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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사 개관 2. 비교문학 중국학파와 자국문학 우월주의 3. 비교시학과 ‘中西’라는 틀 4. 비교문학과 동아시아 문학 |
1.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사 개관
중국에서 비교문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1949년 이전에는 비교문학과 관련되는 인명이나 서명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학에서의 강의로 보자면 1924년에 우미(吳宓)가 남경 동남대학(東南大學)에서 개설한 <중서 시의 비교(中西詩之比較)>가 비교문학적 성질을 띤 최초의 대학 강좌이고 1929년에 영국 비평가 리챠즈(중국명 瑞恰玆)가 청화대학(淸華大學)에서 개설한 <비교문학>이 비교문학을 명칭으로 한 최초의 대학 강좌이다. 출판물로 보자면 1936년에 출판된 천취엔(陳銓)의 ≪중독 문학 연구(中德文學硏究)≫(商務印書館)와 1937년에 시인 다이왕수(戴望舒)에 의해 번역 출판된 방 띠겜의 ≪비교문학≫(역서명 ≪比較文學論≫, 上海商務印書館)이 각각 비교문학 관련 저서와 역서의 최초인 것으로 여겨진다. 1940년대 주광치엔(朱光潛)의 ≪시론(詩論)≫과 치엔중수(錢鍾書)의 ≪담예록(談藝錄)≫ 등은 ‘비교문학’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 내용으로 보자면 동서 비교문학의 형태로 수행된 비교문학 연구라고 할 수 있는 바 1949년 이전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가 그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도달한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대만이나 홍콩을 예외로 하고 중국 대륙만을 보자면 1949년 이후 문화대혁명이 끝나기까지 비교문학의 학술적 연구는 1949년 이전보다도 오히려 더 찾아보기가 어렵다. 비교문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신시기(新時期)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되자 그 연구는 급속도로 활발해졌다. 1981년에 북경대학에 <비교문학연구회>가 성립되고 <비교문학연구센터>가 설립되었으며 여기서 <북경대학 비교문학 연구총서>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1984년에 학술지 ≪중국비교문학≫이 창간되었고, 1985년에는 중국비교문학학회가 창립되었으며 <북경대학 비교문학연구소>가 교육부의 승인을 받았고 북경대학 비교문학 석사과정이 개설되었다(박사과정이 개설된 것은 1993년이다. 이 연구소는 1994년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연구소>로 개편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들면서부터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는 다른 어떤 문학 관련 분야 못지않게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의 비교문학 연구에도 한국의 그것처럼 서구중심주의적 연구가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1980년대의 연구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미 1980년대에도 서구중심주의의 전도로서의 자국문학 우월주의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 경향은 1990년대에 들어와 압도적으로 확산되어 양적으로 보면 서구중심주의적 연구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자국문학 우월주의는 중화주의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스스로 <비교문학의 중국학파>라 일컬으며 근대 이전의 중국 전통문학의 우수성을 서양문학과의 대비를 통해 입증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20세기 중국문학, 즉 이른바 신문학에 대한 비판(그 적절성 여부는 차치하고)과 결합되었다. 물론, 전통문학이 아니라 현대문학을 대상으로 하여 영향 연구와 대비 연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즉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나) 진행하고 나아가서는 시학 연구, 인접예술과의 상호 조명 연구, 다문화주의적 연구,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연구 등을 각각 다양하게 시도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한편에 존재한다. 신시기에 들어 비교문학 영역을 처음 개척했던 북경대학 그룹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데, 양적으로는 소수이지만 질적으로는 오히려 이쪽이 주목된다. 그런데 이들 또한 기본적으로는 중서(中西)라는 비교의 구조에 완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결국 중국의 비교문학에는 동아시아를 함께 보거나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보는 입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바, 바로 이것이 본고의 논의의 초점이다.
중국에서 동아시아적 시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아마도 3년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쑨거(孫歌), 왕후이(汪暉), 허자오티엔(賀照田), 천쓰허(陳思和)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일부 나타나기 시작한 동아시아적 시각에 대한 관심은 비교문학 연구와는 아직 적극적으로 결합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 문학’을 탈서구중심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비교문학 지평들 중의 하나로 상정한다고 할 때, 중국 비교문학의 기본 틀이 되어온 ‘중서’ 비교와 ‘동아시아 문학’ 사이의 거리야말로 중국 비교문학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지표이다.
본고는 비교문학 중국학파가 극명히 보여주는 자국문학 우월주의와 북경대학 그룹이 비교적 높은 연구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는 ‘중서’라는 틀에의 집착에 대해 자세히 고찰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다(이 두 학파의 문제의식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순진한 서구중심주의적 비교문학은 본고에서는 논외로 한다). 그 고찰을 통해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비교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필요한 단서가 드러나리라 기대되는데 이것이 본고의 이차적 목적이다.
2. 비교문학 중국학파와 자국문학 우월주의
북경대학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연구소의 원로 교수이며 중․일 사이의 문학 및 문화 관계 연구 전문가인 옌사오탕(嚴紹璗)은 1982년 비교문학 연구의 ‘중국학파’라는 개념을 제출하고 서양문화의 울타리를 돌파하자고 주장하면서 ‘중국 담론’을 제창한 바 있다. 그러나 비교문학 중국학파라는 말은 옌사오탕 이전에 중국 바깥에서 이미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출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리따싼(李達三: John Deeney)과 대만의 꾸티엔훙(古添洪), 천펑샹(陳鵬翔)이 그들이다. 리따싼은 1977년 10월 대만에서 간행되는 ≪中外文學≫ 제6권 제5기에 발표한 <비교문학 중국학파>라는 글에서, 꾸티엔훙과 천펑샹은 1976년 두 사람이 공편한 ≪대만에서의 비교문학의 개척(比較文學的墾拓在臺灣)≫의 서문에서 각각 <비교문학 중국학파>에 대해 논했던 것이다. 리따싼은 리따싼대로, 꾸티엔훙, 천펑샹은 또 그들대로 자신들이 <비교문학 중국학파>의 최초의 제출자라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황메이쉬(黃美序)에 의하면 1971년 7월 대만 담강대학(淡江大學)에서 열린 <국제비교문학회의>에서 주리민(朱立民), 옌위엔수(顔元叔), 예웨이리엔(葉維廉), 후야오헝(胡耀恒), 올드리지(A. Owen Aldridge) 등 여러 사람들이 그러한 구상을 제출한 바 있다. 누가 최초의 제출자냐 하는 것은 물론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상이 중국 대륙에서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중화권(中華圈)’ 전반에 걸쳐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꾸티엔훙과 천펑샹은 공편한 ≪대만에서의 비교문학의 개척≫ 서문에서 “이처럼 서양 문학이론과 방법을 원용하고 시험, 조정하여 중국문학 연구에 사용하는 것이 비교문학의 중국파임을 우리는 대담하게 선언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대만 최초의 비교문학 논문집인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 그 중점을 중국파에 두고 있으며 이 책은 중국파 비교문학의 면모와 성취를 드러냄으로써 진일보한 발전의 참고를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중국 문학은 그 풍부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문학연구의 방법에서 체계성이 결핍되어 있고 이론이 결핍되어 있는 까닭에 서양 문학의 훈련을 받은 중국 학자들이 중국 고전이나 근대의 문학을 연구할 때 서양의 이론과 방법을 원용하게 되는데, 이 원용에는 흔히 조정이, 즉 원리론과 방법에 대해 시험과 수정이 가해지는 바 이러한 문학연구는 그 자체로 일종의 비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비교문학의 중국파라는 것이다.
리따싼의 논문 <비교문학 중국학파>는 기왕의 비교문학의 서양 사상 모델과 결별하고자 하는 관념을 지닌 중국 학자들을 비교문학의 중국학파라고 통칭하자는 제의로 시작된다. 이 비교문학 중국학파의 목표를 리따싼은 다음과 같이 다섯 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1) 자기 나라의 문학에서 ‘민족성’을 갖춘 것을 찾아내어 발양함으로써 세계문학을 충실히 한다. 중국문학에는 문학계의 주의를 끌 만한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어문 방면: 한자의 표상적 표의적 구조가 현대 시학과 영화에 공헌한 점(에즈라 파운드의 시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가 그 대표적 예이다). 둘째, 장르 방면: 서양의 서사시가 상무(尙武) 영웅주의의 표현이라면 중국의 사시(史詩)는 숭문(崇文) 영웅주의의 표현이다. 셋째, 문화 방면: 중국 특유의 도가(道家) 천인합일(天人合一) 관념은 자연 속의 오묘에 대한 서양인의 진일보한 이해를 촉진시키는 촉매가 될 수 있고 서양의 ‘원형(原型)’ 관념을 수정하고 충실하게 만들 수 있다.
2) 비서양 국가들의 ‘지역성’ 문학운동을 추진함과 동시에 서양문학은 여러 가지 문학 표현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함을 인정한다.
3) 비서양 국가의 발언자가 된다. 그 목적은 ‘문학’에 대한 제3세계의 공헌을 선양하고 옹호하는 데 있다.
4) 비서양 제문학(諸文學)의 학자가 비교 방법으로 문학을 연구하여 지피지기하게 되면 점차 새로운 문학 관념을 구상할 수 있게 되고 서양의 전통적 문학 관념과 맞서게 되는데, 그럼으로써만 진정으로 세계화된 비교문학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다.
5) 많은 사람들의 무지와 오만한 심리를 없애고 비교문학에 대한 관념을 진정으로 국제화시킨다. 동서 각국은 겸허한 태도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문학유산을 바라보고 피차 상호간에 흡수하고 융합하여야 한다.
꾸티엔훙․천펑샹과 리따싼의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은 논의는 기본적으로 비교문학의 프랑스학파와 미국학파를 모두 편면적인 것으로 보는 공통된 시각에서 출발한다. 앞의 두 사람은 영향을 중시하는 프랑스 학파와 유사성 및 차이를 중시하는 미국 학파 양자의 관계를 상호보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자신들이 말하는 조정․시험․수정을 통해 양파의 상호보완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따싼은 더욱 분명한 말투로 양파의 절충을 이야기한다. ‘중국’ 학파를 다른 말로 ‘중용(中庸)’ 학파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편이 더 적절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리따싼에 따르면 중국학파가 취하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태도는 프랑스 학파와 미국 학파에 대한 일종의 ‘변통지도(變通之道)’이다. 당겨 말하면 프랑스 학파와 미국 학파의 편면성 내지 한계에 대한 이들의 인식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 편면성과 한계를 중국학파가 극복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전망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이들의 낙관적 전망의 근거는 중국문학의 특질과 그 우수성에 있다. 꾸티엔훙과 천펑샹이 이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면(서양 이론을 중국문학에 적용할 때 자연스럽게 조정․시험․수정이 이루어지며 그 조정․시험․수정은 편면성을 넘어선 전면성 내지 보편성에의 도달을 가능케 할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는 그 전제 위에 성립된다), 리따싼은 그에 대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교적 자세한 해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리따싼이 해명하고 있는 내용은 프랑스 학파와 미국 학파 양자의 편면성 극복이나 보편성 획득을 위한 근거라기보다는 중국문학의 특수성이 상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 그 상대적 가치는 중국문학에 고유한 것으로 서양 문학에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리따싼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문학 혹은 비교문학이라는 일반 지평을 설정하고 그 지평 위에 서양과 중국을, 좀더 세분하면 프랑스, 미국과 중국 및 제3세계 각국을 대등한 지위로 올려놓는 일이다. 마치 메이지 시대의 일본이 ‘동양’이라는 일반 지평을 설정하고 그 지평 위에서 중국과 일본을 대등한 지위로 올려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작업에는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문화 상대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국문학 우월주의이다. 이 양자는 얼핏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리따싼에게서는 양자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 결합의 방식은 문화 상대주의를 방편으로 하여 자국문학 우월주의를 확보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마치 일본이 동양이라는 개념의 창안을 통해 국수를 확보했듯이 말이다. 리따싼이 언급하는 중국 이외의 제3세계 국가들이 단지 중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막연한, 따라서 허구적인 보조물로만 등장하는 한 리따싼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꾸티엔훙․천펑샹과 리따싼의 글을 포함하여 ≪중국 비교문학 학과 이론의 개척≫이라는 대만 및 홍콩 학자 논문선을 1998년에 펴낸 중국 대륙의 사천대학(四川大學) 교수 차오순칭(曹順慶)은 이 책의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비교문학의 제1단계(프랑스학파)가 창도한 ‘영향 연구’가 국가의 경계(혹은 국가라는 ‘벽’)를 넘고 각국 문학 사이의 영향 관계를 소통시켰다면, 그리고 제2단계(미국학파)가 창도한 ‘대비 연구’가 한걸음 더 나아가 학과의 경계(학과라는 ‘벽’)를 넘고 서로 영향이 없는 각국 문학의 관계를 소통시켰다면, 바야흐로 형성중인 비교문학의 제3단계(중국학파)가 창도하는 ‘과(跨)-문화연구’는 동서양의 이질적 문화라는 거대한 ‘벽’을 넘고, 수천 년의 문화가 응집된 두터운 장벽을 꿰뚫고 동서 문화와 문학을 소통시킴으로써 진정으로 국제적인 흉금과 시선을 가지고 비교문학 연구에 종사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 인용에 나타나는 차오순칭의 발상은 20여 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꾸티엔훙․천펑샹 및 리따싼의 논술과 놀랍게도 동일하다. <비교문학 중국학파>가 아닌 <비교문학 동양학파(東方學派)>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비교문학 동양학파>를 주장하는 왕닝(王寧)은 <비교문학 중국학파>라는 말이 ‘중국 중심론’을 연상시킬 것을 경계하여 <비교문학 동양학파>라는 말을 만들고 이를 <비교문학 유럽학파(종래의 프랑스 학파)>, <비교문학 북미학파(종래의 미국 학파)>와 함께 ‘삼족정립(三足鼎立)’으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여기서 동양은 중국, 인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그의 ‘동양학파’ 개념은 리따싼의 ‘중국학파’론을 계승한 것이며, 중국뿐 아니라 인도, 일본을 포함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 포함은 형식적 방편일 뿐 실제로는 중국을 동양으로 말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수주의(중국의 경우에는 중화주의가 되겠다)에 대한 경계와 거부는 <비교문학 중국학파>(그리고 <비교문학 동양학파>)론에 흔히 따라다니는 언술이다. 가령, 리따싼은 “우리는 편협한 ‘중국 본위주의(本位主義)’의 형성을 피해야 하지만”이라는 단서를 잊지 않고 달고 있고, 차오순칭과 함께 ≪중국 비교문학 학과 이론의 개척>을 펴낸 황웨이량(黃維樑)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것은 우리가 협애한 민족주의를 제창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며 민족적 과대망상을 고취하자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술들이 실제 논의와 유리된 채 단지 장식이나 부가물에 그친다면 그것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별로 유용하지도 않은 알리바이로 떨어지고 만다. <비교문학 중국학파>론에 필요한 것은 그러한 언술들이 바깥에서 부가된 알리바이가 되지 않고 실제 논의 내용 속으로 녹아들도록 하기 위한 근본적 성찰이다.
3. 비교시학과 ‘中西’라는 틀
<비교문학 중국학파>를 제창한 옌사오탕이 그 일원이기는 하지만 북경대학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연구소를 근거지로 한 북경대학 그룹의 일반적 성향은 ‘중국학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통문학이 아니라 현대문학을 대상으로 하여 영향 연구와 대비 연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진행하고 나아가서는 시학 연구, 인접예술과의 상호 조명 연구, 다문화주의적 연구, 그리고 탈식민주의적 연구 등을 각각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이들이 특히 역점을 두는 것으로 보이는 비교시학 연구이다. 본고에서는 이 그룹의 주요 구성원들인 위에따이윈(樂黛雲), 천위에훙(陳躍紅), 왕위건(王宇根), 장후이(張輝) 등이 함께 쓴 ≪비교문학원리신편(比較文學原理新編)≫(북경대학출판사, 1998)을 통해 이들의 비교시학 연구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 책이 말하는 ‘시학’은 물론 ‘시 연구’가 아니다. 여기서의 ‘시’는 협의의 시 장르가 아니라 문학을 범칭하며 따라서 ‘시학’은 시 이론이 아니라 일반문학이론을 범칭한다. 이 책은 이러한 용법을 서양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부터 발견하며 중국의 문학 전통에서는 시가 줄곧 문학의 대명사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시학’이라는 말로 일반문학이론을 범칭하는 방식이 통용되게 되는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 책은 러시아 형식주의부터 거론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관심은 문학을 문학으로 만들어주는 것, 즉 문학성(文學性)에 대한 질문과 탐색인 바, 이 책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러시아 형식주의 이론가들이 보기에 시학의 주요 목적은 무슨 요소가 언어 재료를 예술 작품으로 변화시키는가, 환언하면 무엇이 문학을 문학이 되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비평,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원형비평, 기호학 등의 이론 사조가 언급된다. 이 이론 사조들이 서양 현대 시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린다 허천(Linda Hutcheon),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이 언급된다. 이들에게 시학은 이론의 대명사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린다 허천에게 포스트 모던 시학은 포스트 모던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표현(theorizing the postmodern)이고, 해롤드 블룸의 저서는 ‘영향의 시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 책은 ‘시학’이라는 말의 의미 확장을 여기에서 정지시킨다. 문학이론 연구의 범위 안으로 한정짓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비교시학’은 “과문화(跨文化)적 각도에서 문학이론에 대해 진행하는 비교 연구”라고 정의된다.
그렇다면 ‘문학이론’이란 과연 무엇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학이론과 시학은 엄밀히 말하면 같지 않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마르게스쿠(Mircea Marghescou)의 ≪문학성의 개념≫에 기대어 김현이 제출한 견해를 돌이켜 보는 게 유익할 것 같다.
(…)문학 언어의 문학성을 규정하는 문학적 체제의 연구는 쉽게 세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과거의 텍스트들을 그것이 발표된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그 텍스트 뒤에 나온 체제에 의해 그것을 해독하여 문학성의 역사적 구성을 시도하는 부류이며, 또 하나는 역사적 정도에 따라 오늘날 문학적이라고 알려진 과거의 텍스트들을 맡아, 과거의 체제에 따라 과거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부류이며, 마지막은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 현대의 문학적 체제에 의해 텍스트를 해독하는 부류이다. 그것을 각각 마르게스쿠를 따라서 역사적 연구, 고고학적 연구, 문학이론적 연구라 부를 수 있겠다. 가령 시조를 예로 들자면, 그것과 현대시와의 역사적 관계를 무시하고 그것의 시적 구조를 따지는 방법은 문학이론적 연구 방법이며 시조를 자유시의 체제에 의해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연구 방법이며, 그것을 그 시대의 사대부들이 그것을 대한 태도에 의거해서 그것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방법이 고고학적 연구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문학적 체제를 택하는가 하는 것은 문학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학성이라는 것이 그 자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문학적 체제에 의해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체제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문학성은 변화한다. 위 인용에서 말하는 것은 어느 한 텍스트를 변화하는 문학성과 관련하여 어떤 기준에 입각하여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 중 현대의 문학적 체제를 기준으로 탈역사화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문학이론적 연구라면 문학이론이라는 것은 동시대의 문학적 체제 및 그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문학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학은 이와 다른 것 같다. 시학은 엄밀히 말하면 문학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고 이런 의미의 시학은 구조주의자들에 의해 강력히 제출되었었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문학적 체제 및 문학성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 체제 및 문학성의 다양한 역사성을 포괄함과 동시에 초월하는 지평에 놓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교문학원리신편≫의 저자들이 말하는 시학은 사실은 시학이 아니라 문학이론 내지 문학이론 연구인 것이 아닐까. 그들이 예로 들고 있는 것들 중 러시아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만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학에 해당되고 나머지는 문학이론인 것이 아닐까. 사실상 구조주의 이후로 ‘시학’이라는 말은 더 이상 본래의 의미(문학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라는 의미)로가 아니라 일종의 메타포로서 사용되어 온 것인데, 이 책의 저자들은 이 점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앞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비교시학’을 “과문화(跨文化)적 각도에서 문학이론에 대해 진행하는 비교 연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대해 ‘시학’이라는 말을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하여 ‘비교시학’이라고 명명해 주려면 “과문화(跨文化)적 각도에서 문학이론에 대해 진행하는 비교 연구”에 그쳐서는 안 되고 그것을 통해 ‘시학’을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명료한 논의 없이 이 책의 저자들은 엄밀한 의미의 시학이라는 말과 메타포로서의 시학이라는 말, 그리고 문학이론이라는 말을 뒤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검토를 염두에 두되, 우리는 일단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는 ‘비교시학’이라는 용어를 용인하기로 하자. 그래야만 본론을 진행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들이 말하는 비교는 중서(中西)의 비교이다. 이들에 의하면, 중서 비교시학의 필요성은 중국과 서양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제기된다. 서양은 서양대로 자신의 문화 체계 내부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은 중국대로 중국 시학의 현대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 중서 비교시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무게가 실리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중국 시학의 현대적 전환이 목표로 하는 것은 “중국 전통 시학의 모체 위에서 현대적 의의와 세계적 의의를 갖춘 새로운 시학 체계가 태어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작업의 선구로 1940년대 주광치엔(朱光潛)의 ≪시론(詩論)≫, 치엔중수(錢鍾書)의 ≪담예록(談藝錄)≫과 ≪관추편(管錐編)≫을 거론하고, 또 외국 학자들로 재미 중국인 학자 류뤄위(劉若愚)의 ≪중국문학이론(Chinese Theories of Literature)≫, 재미 중국인 학자 예웨이리엔(葉維廉)의 ≪비교시학(比較詩學)≫, 재미 중국인 학자 장룽시(張隆溪)의 ≪도와 로고스(The Tao and the Logos: Literary Hermeneutics, East and West)≫,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의 얼 마이너(Earl Miner, 중국명 孟而康)의 ≪비교시학(Comparative Poetics: An Intercultural Essays on Theories of Literature)≫, 하바드 대학의 스티븐 오웬(Stephen Owen)의 ≪중국문론선독(Readings in Chinese Literary Thought)≫ 등을 거론한 뒤, 1980년대 이후의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80년대 이래 중국 대륙의 학자들도 갈수록 중서시학의 비교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하고 출판하고 있어서 비교시학은 중국에서 생기발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고 대단히 양호한 발전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중서 비교시학 연구의 이론적 의거와 방법적 기초에 대해 철저하고 깊이있는 이론 논증이 결핍되어 있다. 이는 구체적 연구를 전개하기 전에 반드시 명확히 하여야 하는 기본적인 인식론적 전제이다.
바로 이 이론 논증의 작업을 이 책은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시도하고 있는 이론 논증의 작업을 세세히 추적하는 일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이 명확히 보여주는 ‘중서’라는 틀에 대해 음미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중서 비교의 작업이 서양추수주의나 중국우월주의를 벗어난 보편성의 지평을 지향한다는 것 자체는 인정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틀과 이에 입각한 이론 구성에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들이(앞에서 살펴본 ‘시학’이란 용어 문제 이외에도) 발견되는 바 이것이 간과되거나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우선 중서라는 틀에서 중(中)과 서(西)의 대비에 착위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은 근대 이전의 전통인 반면 ‘서’는 현대이다. 그렇다면 ‘중’의 현대는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암묵적으로 ‘서’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 같다. 좀더 생각해 보면 여기서 ‘서’는 단일한 동질성으로 상정되고 있는데, 실제에 있어서 ‘서’의 내부에는 수많은 이질성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적으로 보자면 현대의 ‘서’와 근대 이전의 ‘서’, 그리고 고대의 ‘서’가 다르고, 공간적으로 보자면 ‘서’ 내부에 다양한 문화적 차이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시간적 및 공간적 차이들을 포괄하여 ‘서’라고 부른다면 ‘중’ 역시 ‘중’을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 속에 집어넣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장면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는 것은 동아시아인데, 만약 동아시아라는 상위 개념을 설정하고 본다면 여기에는 중국 이외에도 최소한 한국, 일본, 몽고, 베트남 등이 포함될 터이다. 이 여러 나라들은 ‘중’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므로 그 본체인 ‘중’만 보면 된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요컨대 ‘중서’라는 틀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틀이 나름대로 유효한 틀이 된다는 점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틀이 인공적으로 구성된 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시각이다. 그 인공적 구성은 이데올로기적 구성임이 분명하며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시각은 더욱 더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임이 분명하다. 이데올로기 비판이 강력히 요청되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중국중심주의가 암묵적 전제로서, 비판적 자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가로놓여 있다. 심지어는 ‘서’조차 중국중심주의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중국중심주의의 이면에는 서양에 대한 열등 콤플렉스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 콤플렉스가 중국중심주의를 부추기고 중국중심주의는 그 콤플렉스를 은폐하는 악순환의 구조를 여기서 우리는 엿본다. 비교시학의 ‘중서’라는 틀은 그 양가성에 대한 성찰로부터 자기 극복의 계기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4. 비교문학과 동아시아 문학
문학 분야에서의 ‘동아시아론’은 ‘동아시아 문학’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때의 ‘동아시아 문학’은 동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복수의 국민문학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최소한 그것들 사이의 상호관계, 더 나아가서는 그것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동일성을 지시한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 문학’이라는 구상은 이왕에 존재해 온 비교문학이라는 문학연구의 한 영역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비교문학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재고찰을 시도하려면 프랑스의 비교문학자 방 띠겜(Paul Van Tieghem)이 그의 유명한 저서 ≪비교문학(La Littérature Comparée)≫(1931)에서 행한 고전적 방식의 정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방 띠겜은 문학연구를 국민문학, 비교문학, 일반문학의 연속적인 세 층으로 구분하고 이 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1) 18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루소(J. J. Rousseau)의 여성교육소설 ≪누벨 엘로이즈(Nouvelle Heloise)≫가 차지하는 문학사적 위치.
2) ≪누벨 엘로이즈≫에 미친 리차드슨(Richardson)의 영향.
3) 리차드슨과 루소의 영향 아래에서의 서구 감상주의 소설.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1)이 국민문학이고, 2)가 비교문학, 3)이 일반문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2)의 비교문학은 한 국민문학과 다른 한 국민문학 사이의 영향 관계를 구명하는 것이고, 3)의 일반문학은 여러 국민문학들에 공통되는 사실을 조사하여 그들 상호간의 의존 관계를 구명하는 것이다. 1) 2) 3)의 차이를 'within walls', 'across walls', 'above walls'라고 전치사의 차이로 교묘하게 설명한 경우도 있지만(Craig La Driére가 1950년에 제안), 이 설명으로는 물론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와 3) 모두 유사성이나 공통성을 대상으로 하지만, 2)는 실증될 수 있는 영향을 바탕으로 한 유사성․공통성만을 대상으로 삼는 데 비해 3)은 그런 영향 관계가 없는 유사성․공통성도 대상으로 삼는다는 데 있다. 3)은 2)의 연장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방 띠겜은 2)만을 비교문학으로 인정하고 3)은 비교문학과 엄격히 구별했다.
한편, 일반문학을 비교문학에 포함시키고 오히려 이쪽에 더 중점을 둔 미국의 비교문학자 르네 웰렉(René Wellek)은 그의 저서 Discriminations: Further Concepts of Criticism(1970)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교문학은 모든 문학 작품과 문학 체험의 통합의식과 함께 국제적 시야로부터 모든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는(물론 나 자신도 포함하여) 비교문학은 언어적, 종족적, 정치적 경계에서도 독립한 문학연구와 동일한 것이 된다. 비교문학은 하나의 방법으로만 국한하지 말고, 비교와 똑같은 중요성으로, 기술, 특성묘사, 해석, 서술, 설명, 평가 등이 그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문학 연구는 가치와 질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문학사와 문학이론과 문학비평을 포괄하여야 한다는 르네 웰렉의 기본 입장이 이러한 주장을 가능하게 했을 터인데, 방 띠겜이 셋으로 나누었던 것들 중 2)와 3)을 포괄하며, 나아가서는 1)까지도 포괄하는 비교문학이 여기서 성립된다. 문학일반이론이 중심이 되는 비교문학은 바로 이러한 르네 웰렉의 맥락으로부터 나왔다.
‘동아시아문학’은 방 띠겜적인 비교문학과 일반문학에서부터 르네 웰렉적인 비교문학까지에 걸쳐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국민문학들 사이의 영향 관계에 대한 구명, 동아시아의 여러 국민문학들에 나타나는 공통성에 대한 구명, 그리고 그것들을 텍스트로 한 새로운 문학일반이론에 대한 탐색 등이 ‘동아시아문학’의 구체적인 작업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은 종래의 ‘서구문학(혹은 구미문학)’ 내에서의 비교문학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온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물론, 이러한 그대로 옮겨오기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의 진정한 자기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서구에서는, 비교문학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기 훨씬 이전인 19세기 전반에 이미 문학의 비교를 내용으로 하는 학문적 접근이 나왔었다(괴테가 말한 ‘세계문학’은 국가들 사이의 문학적 교류와 그 교류를 통한 정신적 재화의 교환을 뜻하는 것이므로 다소 맥락이 다른 것 같다). 빌맹(A. F. Villemain)의 <18세기 프랑스 작가들의 외국문학 및 서구정신에 미친 영향에 대한 시론>과 앙뻬르(J. J. Ampère)의 <제국(諸國) 문학의 비교사>라는 두 강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혜순 교수의 지적처럼, 이것들은 “유럽문학을 하나의 보편성 위에서 파악하기보다 유럽 각국 문학의 차이를 전제하고 비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중세의 보편주의 토양 위에 성장했던 유럽 여러 나라들이 근대에 진입하면서 민족주의적 자각을 갖고 그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임을 보여 준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국민문학의 형성 및 그에 대한 열망과 관련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20세기 전반기의 프랑스 비교문학에서 자국문학 우월주의로 바뀌게 된 것이고(그 배경에는 당시 고조되고 있던 민족주의적 열기와 그에 의한 왜곡이 있다), 이 자국문학 우월주의는 나중에 르네 웰렉에 의해 ‘문화적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공격받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은 19세기 전반 서구에서의 서구문학 내의 비교와는 달리 국민문학의 형성 및 그에 대한 열망이라는 계기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방향이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즉, 동아시아 지역 내의 국민문학들 각각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그 국민문학들을 하나의 보편성 위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중세 보편주의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는 서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이 있다. 종래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에서 비교문학적 작업은 주로 서구문학과 한국문학, 서구문학과 일본문학, 서구문학과 중국문학이라는 식의 구조로 이루어져 왔고, 그것은 항상 전자가 후자에 미친 영향이라는 각도에서 관찰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문학은 제국주의적 학문(혹은 식민지적 학문)이라는 비판을 받아오기도 한 것이다. 그 비판은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비판적 입장에서는 그 영향이라는 것을 보다 세분하여 영향이 아니라 보편적 유사성인 경우, 접촉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 거부하는 경우, 다양하게 변형하는 경우 등으로 차별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왔는데, 이 시도는 기본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서구문학을 하나의 정체로 보고 또 한국문학, 일본문학, 중국문학 등의 각각을 하나의 고립된 정체로 본다는 구도 자체에는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는 비판적 인식이 자칫 새로운, 전도된 자국 우월주의로 치달려갈 위험이 있고(앞에서 살펴본 ‘비교문학 중국학파’가 그 좋은 예이며 그밖에도 한, 중, 일 3국에서 실제로 그런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한 구도 자체가 이미 서구 중심주의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그 역전을 포함하고 있다(앞에서 살펴본 북경대 학파의 ‘중서비교시학’이 바로 그러하며 이 역시 한, 중, 일 3국에서 유사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서구문학이라는 것 안에 다양한 차이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반대로 한국문학, 일본문학, 중국문학 등이 각각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 중 후자에 주목할 때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이 자연스럽게 태어나게 된다. 가령, 한국문학, 일본문학, 중국문학 등은 상호간에 영향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문학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영향 너머에서 자신의 독자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유사성과 차이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망은 각각의 개별 국민문학에 자신을 객관화하여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해 주리라 기대된다.
그러나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이 성립되는 더욱 중요한 근거는 근대 이전의 전통(비서구적 전통)의 공유에 있다. 서구적 근대가 유입되기 이전의 전통은 동아시아의 근대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연속되며 근대를 구성하는 본질적 계기의 하나로 작용해 왔다. 이 전통을 일국적 시각에서만 보지 않고 지역적 보편성 차원에서 보고자 할 때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이 성립된다. 그 전통을 무엇으로 파악하며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앞의 각주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자문화권이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의 동질성이 이 문제에 대한 주된 참조(유일한 참조가 아니라)가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중국문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문자 문제이고 한자라는 문자의 공유를 토대로 한 한자문화권의 사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긍정적 의미에서든 부정적 의미에서든 중국 안팎에서 모두 유효한 것 같다). 요컨대, 그 내용에 대한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전의 전통의 공유라는 동질성은 ‘비서구’ 중에서도 ‘동아시아’라는 인식 단위가 상대적으로 유용하며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지해 주거나 요청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된 논점이다.
이상과 같이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것을 서구에서 전개되어 온 비교문학과 대비해 보면 우리는 이것이 탈식민주의적 비교문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는 아포리아 중의 하나는 문학이라는 보편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실제로 문학이 존재하는 방식은 민족어를 조건으로 한 국민문학이라는 현실 사이의 갈등이다. 종래 서구에서 전개되어 온 비교문학이 그 갈등을 서구문학이라는 지평 속에 가두어 놓았다면, 그리고 비서구 지역 각국의 비교문학도 그 지평 속에 스스로를 함몰시켰다면, ‘동아시아문학’은 그 지평을 벗어나는 탈식민주의적 비교문학 지평의 한 예가 되는 셈이다. 지금 우리는 ‘한 예’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다른 예들이 있을 수 있음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가령, ‘중동문학’이라든지 ‘동남아문학’, ‘중남미문학’, ‘아프리카문학’ 등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심지어는 이런 의미에서의 ‘서구문학’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상정되는 것들 사이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이지 배제나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최근에 나온 새로운 비교문학 저서 ≪비교문학(Comparative Literature)≫(1993)의 저자 바스네트(S. Bassnett)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바스네트는 인도를 예로 들면서, 비서구권 국가에서 식민지 유산을 넘어서려는 노력 속에서 보여주는 국민문학에 대한 애정이 오늘날 서구 세계에 나타나고 있는 비교문학의 쇠퇴 현상에 대해 새로운 활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한 비서구권 국가의 국민문학 담론의 기반이 되는 내용들이 서구권 지역에서는 ‘탈식민지’라는 문화비평으로 확고하게 영역을 확립하고 있는 바 “이것은 바로 또 하나의 이름으로 된 비교문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반문 형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바스네트가 지적한 바, 비서구권 국가에서의 국민문학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래의 민족문학--필경은 자국 우월주의에 노출되고 만--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고, 서구권 지역에서의 ‘탈식민지’ 담론은 비교문학이 아니라 문화비평 내지 문화연구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동아시아문학’은 바스네트가 말하는 것들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콜롬비아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역설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고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문화를 보면서 자아 도취에 빠져 있는 서구의 이성적 재능이 우리를 해석하는 데 전혀 가치 없는 도구가 되리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삶을 파괴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은 채, 그들이 자신들을 재는 동일한 잣대로 우리를 재고자 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그랬듯이 너무나 힘들고 잔학한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동아시아’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말한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여러모로 차이는 있겠으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층위에 있는 것 같다.
탈식민주의적 비교문학으로서의 ‘동아시아문학’이 국민문학의 반성적 자기 인식을 위해, 그리고 문학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위해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데 성공하기까지는 물론 많은 위험들이 숨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논의를 ‘동아시아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로 끌고 가려는 성향이다. ‘서구문학’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이나 ‘동아시아문학’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이나 난망한 일이라는 점에서 똑같고, 자칫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라는 점에서도 똑같다. 또,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구상이 암암리에 반성 없는 자국 중심주의로, 나아가서는 자국 우월주의로 변질될 염려가 많다. 가령 한국문학의 어떤 모습들이 동아시문학에도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하여 동아시아문학을 규정하는 것은 그런 변질의 좋은 예가 된다. 또, ‘동아시아문학’의 구상이 전(前)-근대의 전통에 대한 맹목적 긍정, 그리고 그 긍정을 위한 교묘한 논리적 조작과 연결될 위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위험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들을 극복하고 탈식민주의적 비교문학으로서의 ‘동아시아문학’이 생산적인 성과를 낳을 때 이는 문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의 ‘동아시아론’에도 참조할 만한 것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것과 ‘동아시아문학’ 사이의 관계이다. ‘동아시아문학’은 분명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것의 지역주의적 저항만으로는 ‘세계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불충분한 것이 아닌가, 전지구적 시야에서의 대응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전지구적 시야에서의 대응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 아무런 발상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설사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것을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대응이라는 문맥에서만이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문맥에서도 고찰해야겠다는 점을 마지막 문제로서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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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本文是對中國比較文學硏究史做了槪觀, 對最近20年中國比較文學硏究中的兩個潮流(卽比較文學中國學派和中西比較文學)做了比較詳細探討, 對比較文學和東亞文學之間的關係做了嘗試性探討. 本文第一次目的在于解構比較文學中國學派所隱藏的自國文學優越主義和中西比較詩學所隱藏的中國中心主義, 第二次目的在于顯示出東亞文學成爲脫西方中心主義和脫殖民主義的一家比較文學學派的線索.
주제어: 비교문학, 중국학파, 비교시학, 동아시아문학, 동아시아론, 탈식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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