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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이찬석/협성대)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앙은 출발에서부터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고, 현세적
이면서 내세적, 현재적이면서 종말적이었다.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양가적 측면은 현재에도 지속되어져야 하고, 앞으로도 지속되어져야
한다. 개인적 신앙과 사회적 신앙의 조화가 아직까지는 흡족하게 이루
어지지 않았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조화의 방
향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적인 측면과 종말적인 측면의 조화에
있어서 현대신학은 전자로 기울어지면서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다. 예
를 들어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에 대하여 이 신학을 “열정적, 예언
자적, 종말론적 신학”1)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 신학의 종말론적인
측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논리적, 교


1) 박만, 『최근신학연구: 해방신학에서 생태계신학까지』 (서울: 나눔사, 198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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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적, 객관적이기보다 열정적이며 예언자적이다. 그것은 현실을 고발
하는 데 있어서 구약 예언자들의 사회 비판적 언어를, 그렇게 되어 갈
종국의 목표를 말하는 데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적 언어를 사용한
다.2) 실제적으로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종말론을 이야기하지만
유토피아에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기존질
서에 대한 고발을 의미하며 기존질서의 결함과 허점은 곧 유토피아의
불가피한 일면이다”3)라고 주장하면서 “유토피아는 역사적 활력이며
근본 개혁의 인자가 되고 있다”4)고 기술한다. 결국 구티에레즈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측면은 유토피아로 집중되고, 이 유토피아가 현실
변혁과 해방을 던져주고 있는 측면을 지적하면서 내세보다는 현세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현대신학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종말을 말하면서도 현실세계에 집중하면서, 현세를 중심으로
종말을 이야기하였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은 현세와 내세의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 종말론은 기
독교신학의 부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칼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기독교는 단지 부록에 있어서만 종말론이 아
니라 철저히 종말론이요, 희망이며, 전망이요, 앞을 향한 자세이며, 그
러므로 현재의 출발이요, 변화이다.”5)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현
세/역사 중심적으로만 보지 않고, 현세/역사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의 선상에서 내세의 일과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작업들이 추
구되어야 한다.


2) 앞의 책, 29.
3) 구스타브 구티에레즈/편집부 옮김, 『해방신학(I)』 (서울: 한밭출판사, 1885), 256.
4) 앞의 책, 259.
5)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오시는 하나님: 기독교적 종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16.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79


실제적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가지고 있
다. 사랑이 본질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마지막에 인류의 다수를 저주하고 단지 소수
만을 구원한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였는가? 하나
님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일 없이, 그 자신의 피조물들을 증오할 수
있는가?6) 만유구원론은 이러한 물음들에 신학적으로 응답한다. 만유
구원론은 현세나 역사에 중심을 두고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기 보다는
역사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종말을 중심으로 응답한다.
만유구원론은 보편구원론, 만유회복론, 만유구원론 등의 여러 이
름으로 불린다. 만유 구원론은 회복이나 구원의 대상이 인간뿐만 아니
라 인간이외의 피조물, 즉 사탄이나 자연피조물도 포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7) 본 논문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을 고찰하고, 긍정적/발
전적으로 해석하여 보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몰트만 이전의 만유구원론으로서 칼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을 살펴보
려고 한다. 다음으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무엇을 주장하는지 집중
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하여 보려고 한다.


II. 몰트만 이전의 만유구원론
몰트만이 그의 종말론에서 제시하는 구원론은 ‘만유구원론’으로


6) 김도훈,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몰트만의 ‘만물의 회복’에 대한 이론을 중심
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22집 (2008), 69-70.
7) 김도훈,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1): 만유구원론의 출발점과 성서적 근거에 대
한 비판”, 「장신논단」 (2007), 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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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컬어진다. 만유구원론을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모든 사람이 최종
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이다.”8) 최후의 심판이후에 이루어지는
최종적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 전통은 ‘부분적 구원’을 올곧게 주장하
여 왔다. 천국의 기쁨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주
어지고, 기독교의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주어지
는 것으로 고백하면서, 최종적 구원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
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만유구원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에게 최종적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유구원론
은 모든 인간들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
든 피조물까지도 최종적으로 구원에 합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만유구원론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만물은 최종적으로 회복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만유구원론은 기독교의 가장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인 ‘심판
의 이중결과설’9)보다 먼저 등장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암모니우스 삭가스 등이 만물의 회복을 주장 하였으며,오리겐이나 니
싸의 그레고리에 이르러 좀 더 체계적으로 주장되었다.10) 그러나 일
반적으로 만유구원론의 초기 단계는 오리게네스(185-254)에게서 찾
는다. 그는 사탄조차도 결국에는 영원한 지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화해 권능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 모든 피조물의 저항을 이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주장하였다.11)


8) 김도훈,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몰트만의 ‘만물의 회복’에 대한 이론을 중심
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22집 (2008), 71.
9) 심판의 이중결과설은 최후의 심판 이후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영생이 주어지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고통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과 지옥은 영원
히 지속된다고 믿는다.
10) 김도훈, 앞의 논문,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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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에 따르면, 만유구원론은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다
시 나타났지만, 계몽주의의 휴머니즘으로부터 오지 않고, 초기 경건
주의로부터 왔다.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은 최
후심판과 하늘과 지옥이 있지만, 모든 것은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보면서, 지옥의 고통은 아무 제한 없이 영
원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언젠가 하나님
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때 아무런 지옥도 존재하지 않을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벵엘의 제자인 외팅어(Fr. Chr. Oetinger)는 그리스
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시금 연합될 것이다’(엡1장, 골1장)라는 하나
님의 의도 아래 포괄적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은혜의 선택이 하나님의
모든 길의 시작이라면, 모든 사물들의 회복이 그의 목적이요, 끝이라
고 보았다.12)
몰트만의 종말론은 바르트 신학의 발전이자 바르트 신학의 놀라
운 신학적 완성이라고 평가하는 김명용은 “몰트만의 종말론”이라는
글에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을 고찰하기 이전에 칼 바르트의 만인화
해론을 고찰하면서 바르트의 만인 화해론은 만인구원론을 향하고 있
다고 평가한다.13) 바르트는 계약의 지평을 이스라엘로 제한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계약은 화해의 내적
근거이고, 화해는 계약의 성취이다. 일반적으로 계약이라는 용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사이
의 기본적인 관계를 나타내지만, 바르트는 이 계약 개념을 하나님과


11) 스탠리 그렌즈, 신옥수 옮김,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고양: 크리스
챤다이제스트, 2003), 892-3.
12)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오시는 하나님』, 412.
13) 김명용, “몰트만의 종말론”, 한국조직신학회 편, 『몰트만과 그의 신학: 희망과 희망사
이』 조직신학회논총 제12집 (서울: 한들출판사, 2005),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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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보편적
화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보편적 의미에서의 계약, 즉 하나님
과 인간 사이의 교제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첫째
의도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계약은 깨뜨려진다. 이 깨어진 계약은
화해의 성격을 가지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
이의 깨어진 계약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약은 화해의 전제
이며, 화해는 계약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 의해 파기된
옛 계약을 회복한 새 계약의 내용이며 완성이다.14)
계약의 지평을 만인에게로 확대하는 바르트는 전통적인 칼빈주
의자들이 주장하였던 예정론을 거부하면서 예정의 지평을 모든 사람
에게로 확대한다. 그의 예정론에 따르면, 인류의 일부는 천국으로, 인
류의 나머지는 지옥으로 보내기로 한 예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예정이다. 예정은 창조
이전에 일어났으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대신 모든
인류를 살리기로 작정한 예정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
리시고 모든 인류를 선택하셨으므로, 버림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
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이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지만, 모
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바르트는 단언하지 않았다. 영원 전
에 일어난 하나님의 예정은 역사 속에서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구현되
는 만남의 사건이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렀다거나 구원에 이를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15)
바르트는 계약과 예정만이 아니라 화해의 지평도 모든 사람에게
로 확대한다. 그의 화해론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14)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 (하)』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103-105.
15) 김명용, “몰트만의 종말론”, 248-249.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83


으로 모든 사람들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바르트에 따르
면, 화해가 이루어지는 순간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순간이 아니고,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이
다. 인류의 모든 죄는 이천년 전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졌으므
로 바르트의 화해론은 객관적 화해론이며, 만인화해론이라 할 수 있
다. 그러나 바르트는 자신은 만인이 화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만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면서 만인
화해론과 만인구원론을 구분한다.16) 이러한 바르트에 대하여 김명용
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바르트가 자신의 만인화해론을 만인구원
론과 일시키기를 거부했지만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그의 만인화해론
은 만인구원을 향하고 있다고 보았다.”17)
몰트만은 바르트의 만인화해론을 ‘개방된 보편주의’로 규정한다.
몰트만은 이중예정과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의 선택에 대하여 4가지
(참된 분립주의, 가설적 보편주의, 참된 보편주의, 개방된 보편주의)로
정리하면서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을 개방된 보편주의로 연결시킨다.
첫 번째 ‘참된 분립주의’는 개혁교회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이며 1618
년 도르트레히트 교회법(Dordrechter)에서 확정되었고, 1628년 라이
던 요람(Leidener Synopse)에 근거되었다. 참된 분립주의에 의하면, 하
나님은 세계 창조 이전에 일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기로 결정하였고, 전자에게는 무한한 은혜를 베풀
고, 후자에게는 의로운 분노를 계시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결
국 참된 분립주의는 ‘타락이전의 예정론’으로 이중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18) 두 번째 ‘가설적 보편주의’는 칼빈의 보편적 선택에 대한 생각


16) 앞의 논문, 250-251.
17) 앞의 논문, 253.
18)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오시는 하나님』, 425-427. 병렬의 미학은 어거스틴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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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아들인 개혁교회 신학자 모이제 아미라우트(Moyse Amyraut)가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만을 구원하
고자 한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실지라도 모든 사람을 생각하였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듣도록 결정하였지만, 믿음이라
는 조건하에서만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보편적 선포는 가설적
보편주의이며, 하나님의 선한 의지는 보편적이다. 그러나 복음의 작
용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면서 두 가지로 작용한
다.19) 세 번째 ‘참된 보편주의’는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발견되어진
다. 이 이론은 구원을 향한 역사적인 길은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을 통
하여 진행되지만, 종말론적 목적은 보편적인 구원이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
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다. 참된 보편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택하기 위하
여 버리며,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으로 인도하며, 다시 모으기 위하여
멸망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불신앙을 시간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있어서 그의 은혜는 취소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에 대항하여 그의 불신앙을 영원히 지킬 수 없다.20) 네 번째는 ‘개방된
보편주의’는 바르트의 이중예정론으로부터 연역되어진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죄 된 인간에게 은혜를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 된 인간의 버림을 스스로 짊어지신다. 즉, 하
나님은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자가 되신


학에 도입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병렬의 정리로 하나님의 배열을 통한 세계의 아름다
움은 모순을 통하여 증가된다. 서로 대칭하여 있는 모순들이 문체의 아름다움을 이루
는 것처럼, 세계의 아름다움도 모순들의 대칭을 통하여 형성된다(몰트만, 『오시는 하
나님』, 426).
19) 앞의 책, 427-428.
20) 앞의 책, 428.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85


다. 그러나 버림의 극복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드러난다. 결국, 그리스
도께서 세상의 죄와 모든 버림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화해되어 있다. 신앙을 통하여 그
들은 이제 주관적으로 화해되어 있는 자들로 자기를 경험한다.21)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의 잘
못된 결정으로 인간은 지옥의 고통 속에 끝없이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결정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인간을 살리고자 하신 하
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이 문제에 대한 마지막
답은 만유구원일 것이라고 확언했다.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결정의 궁극적 우위성을 몰트만은 생각한 것이다.”22)


III. 몰트만의 만유구원론-만물의 화해
몰트만은 만유의 화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함에 있어서 ‘최후의 심
판’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중세교회의 그림들에서
묘사되는 최후의 심판에는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죽음이냐? 라는
두 가지 판단만이 있을 뿐이지만, 세계 심판에 대한 희망은 원래 희생
자들의 희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 행악자들
에 대한 하나님의 벌의 심판을 지향하기 보다는 행위자들을 지향하였
고, 황제적인 사법권에 대한 원상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23) 그러
나 몰트만에게 있어서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의 일이 아니라 마지막 이
전의 일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이 그의 새로운 세계에


21) 앞의 책, 429-30.
22) 김명용, “몰트만(J. Moltmann) 신학의 공헌과 논쟁점”, 「장신논단」 (2003/12), 133-4.
23) 위르겐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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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의를 세우시고 영원한 평화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것 안에서
그의 의를 계시하고 그것을 관철하는 데 쓰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면 마지막의 일은 무엇인가? 새 창조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모
든 사물의 새 창조이다.24) 몰트만은 이렇게 주장한다. “죄가 첫째의
일이 아니라 창조의 근원적 축복이 첫째의 일인 것처럼, 심판이 마지
막의 일이 아니라, 의가 그 안에 거하는 새 창조의 궁극적 축복이 마지
막의 일일 것이다.”25) “최후심판은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의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사물의 회복이
다.”26)
몰트만은 만유화해론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
면, 만유의 회복이란 표현은 사도행전 3:21에만 나타난다. 여기서 “영
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
신 대로 만물을 회복하실 때를 나타낸다. 만물의 화해는 에베소서 1장
10절과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글자 그대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경
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 1:10) “그리스도의 피로 평화
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골 1:20) 에베소
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모든 사람과 땅 위에 있는 생물
은 물론 천사, 심지어 불순종한 천사들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되
며, 모든 사물이 회복, 세계의 완성의 형태를 향한 만유의 귀향을 말한
다고 몰트만은 지적한다. 빌립보서 2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24) 앞의 책, 408.
25) 앞의 책, 409. 강조는 논자의 것임.
26) 앞의 책, 433.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87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
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또한 바울은 아담-그리스도의 유형론을
보편주의로 읽어간다. 한 사람의 범죄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아서 생명을 얻었습니다(롬 5:18).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고전 15:22).27)
몰트만은 만유구원론의 신학적 논리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
한다. 몰트만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 안에는 분노를 능가하는 사랑의
더 크심이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죄에 대하여 분노한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형상인 인간에 대하여 영원히 긍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하나
님의 부정은 영원한 부정이 아니고 시간적인 부정이다. 하나님은 세계
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계의 죄들을 심판한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니라 그의 은혜이다.28)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두 가지 결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새로운 창조를 위하
여 봉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의 심판과 만유의 화해는 모순이
아니다. 만유의 화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그의 영광의
나라로 모으시기 위하여 그의 회복시키고 의롭게 하는 의를 그 속에서
계시하는 세계 심판을 통하여 일어난다.29)
몰트만은 만유구원론의 신학적 근거로서 십자가 신학을 제시한
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유의 화해에 대한 희망의 참된 기
독교적 근거는 십자가의 신학이며,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나오는 유
일한 실제적 귀결은 모든 사물의 회복이다.”30) 그러면 모든 사물의 새


27) 앞의 책, 415-416.
28) 앞의 책, 420.
29) 앞의 책, 421.
28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로운 창조를 위하여 봉사하는 최후심판에서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의’
(義)는 무엇일까?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그 분 안에서 최후심판의
의를 발견한다. 그 의(義)는 복수하는 의 곧 악한 사람들에게는 악한
것을, 선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을 되돌려주는 의가 아니라, 법을 세
우며 회복하고 의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신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의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최후심판은 황제나 왕이 심판에
대한 모범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적인
의이며, 이 의(義)는 우리가 가진 의(義)의 지상적 형식과는 전혀 다르
다. 소위 ‘최후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계시와 그의 구원의 사
역의 완성에 불과하다.31)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지옥을 부정하지 않으며 지옥을 저주하
지도 않는다. 지옥은 영원한 장소가 아니라 시간적인 장소이다. 그리
스도는 그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세계의 화해를 위하여 하나님의 버림
받은 상태의 참되고 총체적인 지옥을 당하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죄의
참되고 총체적인 저주를 경험하였다. 바로 여기에 만유의 화해를 위한
신적 근거가 있다.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이 회복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모아진다는 확신을 근거시키는 것은 정
화된 인류의 낙관주의적 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옥여행이다.32) 그
리스도는 모든 상실된 자들을 찾아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기 자
신이 상실되도록 하였다. 그는 지옥을 열기 위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
하였으며, 이 고통들이 더 이상 가망 없는 것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는
지옥을 완전히 경험하였고, 지옥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지옥의 문들
이 열렸으며, 그것의 담이 무너졌다. 그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30) 앞의 책, 433.
31) 앞의 책, 432-433.
32) 앞의 책, 433.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89


지옥을 파괴하였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의 지옥과 같은 죽음으로부
터 부활한 이후로 더 이상 ‘영원히 멸망 되어 있음’은 존재하지 않는
다.33)
그러므로 만유의 화해에 대한 희망의 참된 기독교적 근거는 십자
가의 신학이다. 전술하였듯이, 바르트는 만유화해의 근거를 몰트만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도 찾지만, 예정론에서도 찾는다. 그러나
몰트만은 십자가의 신학에서 만유화해의 근거를 찾는다. 결론적으로
몰트만은 만유구원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모든 죄인, 악한 자들과 폭력을 행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사탄의 자식
들, 모든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해방되며, 그
들이 치명적인 사멸에서 변화됨으로써 그들의 참된 피조물적 본질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신실하시며, 그가 한때 창조
하였고 긍정한 것을 포기하지 않으며 상실되도록 내버려주지 않기 때
문이다. 최후의 심판은 위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인간
에게 선포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것이다. … 모든 사물의 회복에 대한
종말론적 이론은 이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회복시키는 하나
님의 심판과,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는 하나님 나라라는 두 가지 면
을 가지고 있다.34)


33) 앞의 책, 439.
34) 앞의 책, 441.
29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IV.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발전적 해석
1. 종말론적 종교신학
이웃종교에 대한 배타주의적 태도는 이웃종교를 우상 또는 비진
리로 규정하면서 종교 간의 갈등을 가져옴으로 기독교의 독선적인 모
습을 강화함으로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배타주의적 신
앙을 지니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웃종교를 향하여 부끄러운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행위가 훼불사건이다. 1996년에 “종립 동
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건학이념을 파괴하는 훼불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사건은 지난 9일 불교기 게양대 아래에 회향목으로 조
성돼 종립학교의 상징물로 인식돼 온 卍자 조형물이 무참한 삽질 끝에
십자가로 만들어진 것이 발단이 됐다.”35) 이 사건의 전말은 U.B.F(전
국 대학생 성경읽기 모임)의 행위로 드러났다. 이 사건에 대하여 석림
회장 도수스님은 “일반상식을 넘어선 종교적 테러행위를 자행한 당사
자들의 종교적인 신념이 의심스럽다”고 말하였다.36) 2011년 11월 중
순에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소재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에
십자가를 그린 훼불행위가 벌어졌다. 동국대는 불교계에서 설립한 대
학이어서 캠퍼스에 법당이 있고 대학본관 앞에 불상도 모시고 있다.
2000년에 그 교정에 모신 불상에 붉은색으로 십자가가 그려지고 ‘오
직 예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37) 기독교인들이 이웃종교를 향하
여 이러한 사건들을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배타주


35) 인터넷 <불교신문>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51275
36)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51275
37) 인터넷 신문 <현대불교>,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
=181689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91


의이다. 그들의 신앙적 입장에서 이웃종교는 복음을 거부하는 우상으
로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지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
복의 행위를 연출한다.
종교신학적으로 배타주의에 대한 대립적인 입장은 다원주의라
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존 힉
(John Hick)은 기독교와 타종교 전통 속에 흐르고 있는 신에 대한 부정
신학(negative theology)적 전통인 아포파틱(apophatic) 전통에 근거하
여, 칸트의 인식론을 통하여 ‘실재’와 ‘실재의 현현’의 구분을 통하여
한 종교의 우월성이나 절대성을 부정한다.38) 힉에 따르면, 모든 종교
들은 동일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고백이므로 모든 종교
들은 궁극적 실재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이러한 힉의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는 배타주의와 같이 이웃종교들을 정죄하거나 열등하게 생
각하지 않고 종교 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
러나 힉의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차별 없이 동일한 신과 동일한 종
류의 구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이며, 따라서 결국
에는 자신의 종교를 믿을 근거를 상실”39)하게 된다. 장왕식은 힉의 다
원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모든 종교가 동등하다면 사람
들은 무슨 이유로 각각 다른 종교를 믿어야 하며, 또한 어떤 종교를 믿
든지 결국 동일한 결과를 가져 온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있겠느냐는 쉽고도 평범한 질문에 답변하기 어렵다는 단
점이 있다.”40) 존 캅(John Cobb)도 힉이 기독론을 상대화 시키는 점에


38) 이찬석, “종교신학과 선교”, 「선교신학」 20집 (2009), 61-2.
39) 장왕식, 『종교적 상대주의를 넘어서: 과정신학으로 종교다원주의를 넘어서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205.
40) 장왕식, “종교간의 대화론과 아시아 신학”, 변선환 아키브, 동서신학연구소편, 『변선
환 신학 새로 보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139.
29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대화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성육신의 신앙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
만 아니라,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장기를 떼내어 상대편에게 주는 꼴
이 되어 버린다.”41) 힉의 종교 신학은 기독교적 독특성을 강조하기보
다는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종교적 보편성을 강조 하면서, 기독교인들
의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결국 배타주의는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강조하면서 선교적
열정과 기독교적 정체성을 가져 올 수 있고, 힉의 실재 중심적 다원주
의는 모든 종교들의 공통성을 전제로 이웃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수용
성을 강화함으로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나 반
대로 배타주의는 기독교의 수용성이라는 부분에서, 힉의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정체성이라는 부분에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종교 신학이
극복해야만 과제는 ‘정체성’과 ‘수용성’이라는 두 축을 동시에 끌어안
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교회일
치 운동이지만 다양한 교파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일치로서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42)를 추구하듯이, 진정한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존중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져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되기 위한 전제는 주
체성과 독특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힉과 같이 종교들의 공통성을 강
조하게 되면 정체성의 혼란으로 진정한 다원주의는 약화될 수밖에 없
다. 반대로 배타주의와 같이 정체성을 ‘닫힌 정체성’으로 성격화한다


41) 존 캅, 김상일 옮김, 『과정신학과 불교: 대화를 넘어선 기독교와 불교의 창조적 변혁 모
색』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70.
42)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다양성의 일치’ 또는 ‘조화운동’으로 규정하는 글은 다음
의 글을 참조. 이찬석, “일치에서 조화로 ‒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고찰”, 「한
국조직신학논총」 30집 (2011), 305-332, “WCC와 존 웨슬리의 에큐메니즘”, 「한국조직
신학논총」 32집 (2012), 175-198.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93


면, 수용성의 약화로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정
체성과 수용성의 조화로 진정한 다원주의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김영한과 김도훈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을 기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김명용은 반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
도’라는 토대위에 굳건하게 서 있으면서 기독교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김영한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특수 구속론’과
‘보편 구속론’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영한에게 십자가 사건
은 인간의 믿음을 조건으로 하는 특수한 구속의 사건이다. 그러나 몰
트만은 믿는 자의 구속과 모든 자의 구속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영한의 눈에 몰트만은 믿는 자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를 불신
자까지 포함한 모든 인류에 대한 구속인 보편 구속론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더 나아가서 김영한에 따르면,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을 만유화해의 사건으로 해석함으
로써 신앙과 불신앙의 구분을 무효화하고, 신앙의 결단 이전에 이미
골고다에서 일어난 보편 구원의 사건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43) 김영한의 평가에 따르면,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특수한 사건
인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보편사건으로 해석함으로 신앙과 불신앙의
구분을 무효화시키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정체성을 무효화 시키고 있
는 것으로 읽혀진다.
김도훈도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몰트만의 ‘만물의 회
복’에 대한 이론을 중심으로”44)라는 글에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믿음 없는 종말적 구원’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도훈에 따르
면, 몰트만을 비롯한 만유구원론자들은 ‘믿음 없는 모든 사람의 구원’,


43) 김영한, “몰트만의 보편 화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조직신학연구』 1 (2002), 126-7.
44) 김도훈, “만유구원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몰트만의 ‘만물의 회복’에 대한 이론을 중심
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22집 (2008), 69-105.
29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즉 만유구원론적 사상을 거의 모두 바울에게서 가져온다. 그러나 바울
이 만유구원론적 입장을 지지했다고 주장하려면, 바울의 ‘믿음을 통
한 구원’이나 ‘믿음에 의한 칭의’를 부정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
다.45) 계속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리 말하자면, 바울은 만
유구원론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와 복음과 칭의를 언제나 믿음
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선포하였으며 그것을 믿을 것을 요청하고 그것
을 믿는 자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 . 바울의 복음은
보편적 복음이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으
로 초대하는 복음이다. 복음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바울이 생각하는 불
의한 자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그는 믿음 없이도 무조건적으로 구원
얻을 것이라는 의미의 만유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다.”46) 여기에서 김
도훈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믿음이 없는 종말적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한다. 김영한과 유사하게 김도훈도 몰트만의 만유구
원론은 믿음 없는 종말적 구원을 이야기함으로 기독교적 정체성을 약
화시키는 것으로 읽어간다.
그러나 김명용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종교다원주의의 입장
과 다르게 기독교적 정체성을 약화 또는 무효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라는 대전제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김명
용에 따르면, 인류의 절대 다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접맥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에도 복음을 받을 수 없는 환경 내에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진다면
상실을 가진 사람들은 고개를 저을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 신학은 이


45) 앞의 논문, 90-91.
46) 앞의 논문, 92. 강조는 논자의 것.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95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이런 문제와
관련된 모든 신학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47)
김명용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믿음 없이 죽은 자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종교
다원주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밖에서 찾은 것이 아니
고,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찾은 데 장점이 있다. 물
론 죽은 자들의 세계에 전파되는 복음의 가능성은 많은 신학적 토론이
필요한 것이지만, 몰트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믿음으로’라
는 개신교 신학의 대전제 위에서 믿음 없이 죽은 자들의 구원의 가능
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믿음 없이 죽은 자들
의 구원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밖에서 찾은 오늘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관점과 다른 신학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
장점이 있다.48)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김영한/김도훈의 평가와 김명용의
평가는 대립을 보이고 있다. 김영한은 몰트만이 신앙과 불신앙의 구분
을 무효화 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김도훈은 ‘믿음이 없는 종말적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에 근거한다면, 몰트만
의 만유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약화시키거나 무효화시키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명용은 몰트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
도’ ‘오직 믿음으로’라는 종교 개혁적 전통 위에 굳건하게 서있다고 평
가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김영한과 김도훈은 죽음


47) 김명용, “몰트만의 만유구원론과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 「장신논단」 (2000), 296.
48) 김명용, “몰트만의 종말론”, 한국조직신학회 편, 『몰트만과 그의 신학: 희망과 희망 사
이』 (서울: 한들출판사, 2005), 271. 강조는 논자의 것.
29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이전의 시점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김명용은 죽음 이후로까지 시점
을 확대하기 때문에 대립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믿음이 없는 종말적 구원을 말하고, 신앙과 불
신앙의 구분을 무효화한다는 평가는 믿음을 죽음 이전으로 제한시키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명용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서 믿음을 죽
음 이후로까지 지평을 확대하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토
대위에 굳건히 서 있는 것으로 읽어간다.
몰트만에 의하면, 지옥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열렸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지옥이 파괴 되었다. 몰트만은 분명하
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완성한 것이, 그의
복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며, 그가 나타나실 때 모든 사람
과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49) 계속하여 몰트만은 크리스토프
블롬하르트의 말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님 예수께서 거
기에서(즉 골고다에서) 인내하신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날 것이다. 바
로 이로써 구원자께서 이 어둠속에서 권리를 얻었으며, 그리하여 하늘
과 땅 위에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이라고 모든 혀가 고백하는 일이 언
젠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말이 바로 이 십자가에서 열린다.”50) 직선적
으로 말한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죽음
이후에 언젠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구원에 합류할 수 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불신앙과 신앙의 구분
을 무효화 한다는 김영한의 비판과 믿음 없는 종말적 구원을 말한다는
김도훈의 비판은 재고되어져야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토대 위


49) 위르겐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439.
50) 앞의 책, 439. 강조는 논자의 것임.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97


에 굳건하게 서 있다는 김명용의 평가를 적극적으로 읽어가야 한다.
결국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점을 죽
음 이전으로만 설정하지 않고, 죽음 이후로도 확장함으로 이웃종교인
들도 수용하는 수용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과 중심성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기독교적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배타주의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적 정체성과 다원주의가 지니고 있는 이웃종교에 대한 수용성
을 아우르면서 복음적 정체성을 유지함으로 종교 신학이 추구해야만
하는 ‘정체성’과 ‘수용성’을 종말론적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위로의 기능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위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최후심판으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라는 이중결과설을 믿
고 있는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나 지인
들에게 대한 한없는 안타까움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도 최종적으로는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다
는 만유구원론은 큰 위로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로의 기능은
현재 예수를 그리스도로 뜨겁게 고백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적
용될 수 있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기독교에 있어서도 구원은 중
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라는 의문은 구원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만약에 구원에 대한 정의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를 용서
함 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칭의와 구원은 동일시되어지
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
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범위를 칭의로 제한하지 않고, 동방교


29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회의 ‘신화’나 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까지 확대한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은 늘 의문의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신앙
의 소유자들에게 만유구원론은 위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에 의하여 선물로 받는 것이면서, 인
간이 성취하고 완성시켜야 하는 측면이 있다. 존 웨슬리(John Weley)
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서 일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의 구
원을 이루십시오. 여기서 ‘이루다’라는 말의 원뜻은 어떤 일을 철저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너희 자신’이라는 말은 너희 자신이 이 일을 수행
하지 아니하면 그 일은 언제까지나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51)
웨슬리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성취시키고 완성시켜야 한다.
웨슬리의 구원의 개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죄를 용서받
는 칭의와 동일시되지 않고, 칭의를 넘어선다. 일반적으로 웨슬리의
구원론은 ‘구원의 순례’ 또는 ‘구원의 여정’으로 이름 지어면서 선행
은총-회개-칭의/신생-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
으로 그려진다. ‘칭의’(justification)는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함 받는
단계이고, ‘신생’(new birth)은 칭의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성령
의 역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칭의의 주도권은 성자에 의하여,
신생은 성령이 주도적으로 수행하신다. ‘성화’(sanctification)는 그리
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 도달하기까지 거룩하여지는 긴
과정이다.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
랑을 증가시키면서 죄를 짓지 않는 상태인 완전성화의 단계에 도달한
다. 이 완전성화의 단계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단계이다. 이와 같이


51) 존 웨슬리/한국웨슬리학회 편역, 『웨슬리설교전집6』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170. 강조는 논자의 것임.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299


존 웨슬리에게 구원은 칭의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
기까지 계속되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성취하고 완성시켜
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지평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까
지 확대한다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내가 구원을 완성하셨는가? 죽음
이전에 구원을 완성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더불어 불안감에 휩싸
일 수 있다. 구원의 지평을 이와 같이 확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만유
구원론은 위로를 안겨 줄 수 있다.
동방정교회에 있어서도 구원은 단순히 칭의에 머무르지 않고 ‘신
화’(神化, deification)로까지 확대된다. 클레데닌(Daniel B. Clendenin)
은 “인간의 신화는 정교회의 중심적 주제, 주된 목표, 기본적인 목적,
혹은 주요 종교적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52)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인 스타브로풀로스(Christoforos Stavropoulos)에
따르면, 동방교회의 비전은 테오시스(theosis)의 성취이다. 그는 다음
과 같이 말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각각 테오시스를 성취하라는 하나의 독특한 부르
심을 받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각각 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
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닮고, 그분과 연합되게 될 운명, 사도 바울
은 삶의 목적을 지극히 명로하게 묘사 한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가 될 것이다’(벧후1:4). 이것이 당신의 삶의 목적이다. 즉, 당
신은 하나님의 본성 및 신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삶에 참
여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 운명―하나님처럼, 곧 진정한
하나님 자신처럼 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53)


52) 다니엘 클레데닌/김도년 옮김, 『동방정교회 개론』 (서울: 도서출판 은성, 2002), 205.
30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그러면 테오시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테오시스는 신과의 연합
이라고 규정할 수 있지만,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신
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신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고, 인간은 창조되어진 존재로서 피조물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이 신적인 본질을 획득할 수는 없다. 그
러므로 시나이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of Sinai)는 다음과 같이 신
화를 정의한다. “신화는 우리의 본성이 열등한 것으로 쇠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간적 성품의 본질적인 변화도 아니다.”54) 인간이 신
화를 이루었다고 하여도 “베드로는 베드로이고, 바울은 바울이며, 빌
립은 빌립이다. 각 사람은 그의 고유한 본성과 개인적 정체성을 보유
한다.”55) 결국 성도들이 신화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으
로 존재하고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신처
럼 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며, 창조주와 피조
물 사이의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56)
구원의 개념을 동방정교회와 같이 신화로 이해하고, 존 웨슬리와
같이 구원의 완성을 전적인 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이해한다면,
죽음 이전에 신화의 단계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
을까?라는 불안감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
종적으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만유구원론의 주장은 구
원의 완성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기독교인들에게 위로의 기능을
수행한다. 김명용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


53) 앞의 책, 204.
54) 앞의 책, 285.
55) 앞의 책, 220.
56) 칼리스토스 웨어/엄성옥 옮김, 『정교회의 길』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9), 192, 이찬
석, 『글로컬 시대의 기독교 신학』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3), 75-99.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301


라고 평가한다.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만유를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라는데 큰
장점이 있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의하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좌
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언제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신자들이 있다. 아버지 생
전에 아버지를 복음에로 인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일이 이
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절망할 필요가 없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영원한 절망을 없게 하고 만유를 희망과 은총의 빛으로 감싸
는데 큰 장점이 있다.57)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하여 김명용이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
이라는 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최태영도 김명용과 비슷하게 몰
트만의 만유구원론을 평가한다. “만유구원론은 불신자로서 죽은 사
람들이나 이 세상적 환경에서는 도저히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자들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희망이 주어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58) 그러
나 김명용과 최태영의 평가에서 전제는 비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떠
난 사람들이나,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가족들이나 지인들을 위로하는
측면에 국한하고 있다. 달리 말한다면, 김명용은 구원을 예수를 그리
스도로 고백하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구원
의 개념을 협소하게 전제하고 있다. 만약에 동방정교회나 존 웨슬리와
같이 구원의 개념과 지평을 넓게 확대한다면, 만유구원론은 종말론적


57) 김명용, “몰트만의 종말론”, 한국조직신학회편, 『몰트만과 그의 신학: 희망과 희망 사
이』 (서울: 한들출판사, 2005), 271
58) 최태영,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통전적 이해”, 「한국조직신학논총」 22집 (2008),
129.
30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으로 모든 인간을 포함한 온 피조물이 구원을 받으면서 구원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음으로 타자는 물론 기독교인 자신의 신앙에
게도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 될 수 있다. 즉, 신화와 그리스도인의 완
전에 도달하지 못한 불안감을 하나님의 희망과 은총의 빛으로 보듬을
수 있게 된다.


V. 나오는 말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옥은 영원해야 하고, 비기독교들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고 고집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세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
았던 삶과 의무들이 억울하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 지향적이고 보상중심적인 신앙에서 비롯된다. 예수를 그리스도
로 고백하고, 성실한 교회 생활의 초점은 천국과 같은 내세를 위한 것
이기 이전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것이다. 천국과 내세에서의 상
급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선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원수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통전적이고 온전한
구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몸과 영혼의 구원이며, 역사적인 차원에
서는 개인과 사회의 구원이며,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온 피조물의 구원
이다 온 피조물의 구원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포함해야 한다. 루
터교 신학자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옥이 영원히 남아 있어야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직 완전하
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지 않음을 항구적으
로 상기시키는 것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편적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303
이 아니고 포용적인 것도 아니라며,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이 존재한다면 일시적인 것이어야 하고, 지옥
이 사라지게 되면, 모든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질 것이
다.59)
피터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보편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하
므로 지옥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지옥의 사라짐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다. 강자에 의하여 억압과 차별을 받고 있는
주변인/민중들이 해방되고,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착취를 당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자연이 해방되고, 비기독교인들도 구원의 장에 합류되
어질 때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질 수 있다.
‘성부 수난설’이 초기 기독교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지만, 이
제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입장으로 수용되어지고 있다. 어거스틴에 의
하여 ‘만유구원론’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적합하게 만유구원론이 회복되어 기독교 복음의 통전성을 회복해야
한다.


59) Ted Peters, 이세형역, 『하나님: 세계의 미래』 (서울: 컨콜디아사, 2006), 622.
30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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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305
국문 초록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예수의 복음은 철저히 종말론적이었지만, 현대신학은 계몽주의
이후에 종말론을 신학의 부록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
하여 종말론은 회복되면서 신학적으로 현세와 내세의 조화를 도모하
고 있다. 몰트만의 종말론 중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주
제는 만유구원론’이다. 만유구원론은 최후의 심판이후에 영원한 천국
와 영원한 지옥이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고백을 거부하면서,
지옥의 영원성을 부정한다. 만유구원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만물의
회복을 원하시며,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구원을 받는
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하여 한국 신학자 중에서 김
영한과 김도훈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며, 김명용은 긍정적인 평
가를 하고 있다. 본 논문은 김명용의 관점을 확대 해석함으로 몰트만
의 만유구원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보려고 한다. 본
논문은 우선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출현하기 이전에 만유구원의 역
사를 간단하게 살펴본다. 김명용이 지적하듯이, 몰트만의 종말론과
만유구원론은 바르트의 종말론과 만유화해론의 발전적 해석이고 완
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바르트의 만유화해론을 고찰
한 후에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
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두 가지로 제
시하여 보려고 한다. 첫째로, 종교신학의 올바른 방향은 배타주의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실재중심적 다원주의가 지니고 있는
30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수용성을 발전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몰트만의 만
유구원론이 던져주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제시하여 보려고 한다. 두
번째로,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은 위로의 기쁨을 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위로의 측면을 비기독교인들에게로 제한하고
있다. 본 논문은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위로의 기
능을 할 수 있음을 제시하여 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이 시대에 적합하게 새롭게 해석되어짐으로 보편적이고 통
전적인 구원의 지평을 만들어야 함을 본 논문은 제시하려고 한다.
이찬석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 307
Abstract
A Study on Jürgen Moltmann’s
Notion of Universal Salvation
Lee, Chan-Seok
Assistant Professor
Hyupsung University
Hwasung, Korea
Although Jesus emphasized the aspect of the Kingdom of
God, modern theology regarded eschatology as a supplement of
theology after the Enlightenment. However, modern theology is
trying to harmonize the dimension of this world and the next by
Jürgen Moltmann. It is his universal salvation that many theologians
are focusing on among Moltmann’s theology. The universal
salvation denies the eternal aspect of Hell which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doctrine in Christian tradition. According to
the universal salvation of Moltmann, God want to save all creatures,
all lives will be saved finally. This subject is becoming as
one of theological issues with which Korean theologians deals.
Kim Younghan and Kim Dohoon are negatively criticize the universal
salvation. However, this article will try to interpret the
positive aspect of the universal salvation like Kim Myeongyoung.
30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9집(2014년 9월)
Firstly, this article will articulate the aspect of religious theology
of Moltmann’s notion of the universal salvation. Secondly, this
article will articulate the comforting aspect of it for Christians as
well as non-Christians. After all, this article will imply that
Moltmann’s notion of the universal salvation should be positively
interpreted for the wholistic salvation.
‖ 주제어 Keywords ‖
종말론, 구원론, 만유구원론, 위르겐 몰트만, 종교신학
Eschatology, Soteriology, Universal Salvation, Jürgen Moltmann, Religious
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