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인간은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고민
으로 시작하여 실제로 ‘예스’라는 답변을 추구한 학자가 바로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인간이 조우할 수 있는 ‘신비’
즉, 초월적 하나님임에도 인간의 삶에 깊이 내재한 ‘구원의 신비’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의 장(stage) 안에서 다룬다. 이것은 라너의
삼위일체론이 그리스도론, 성령론, 구원론, 인간론과 깊이 얽혀있음
을 암시한다. 그는 소위 라너식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
시작을 자신이 속한 로마교회의 신학에 대한 냉철한 비판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
회의 공식적인 신학으로 자리한 신-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가
삼위일체론을 그리스도인의 구원적 삶의 자리와는 무관하게 전개해
7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왔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삼위일체론은 정적이고 사변적이며 추상적
인 교리로 전락했고 다른 교리들과는 어떠한 교감도 나누지 못하는
‘나홀로’ 교리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라너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삼위일체론이 구원사 안
에서 경험되고 탐구되며 발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노력
의 결정체가 오늘날 잘 알려진 라너의 ‘공리’(axiom)이다: “경륜적 삼
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
이다.”1)
그는 자신의 저서 The Trinity 전반을 통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
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여기서 필자는 크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우선, 동일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혀 새로울
것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구원사에서의 아버지, 아들, 성령은 내
재적 삼위일체의 세 위격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미 니케아신조(381)
에서 확증된 바 있다. 또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란 개
념 자체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둘 사이의 ‘구분’은 하나님 그 자신(in se)을 묘사하는 것과 구원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것
이다.
두 번째는 라너의 공리가 라틴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학과도
상충된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그는 그리스 정통주의 신학의 삼위일
체론, 특별히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것을 [라틴 신학보다] 선호할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의 이상적 표본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리스 교부
들에게 있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차이는 매우
1) Karl Rahner, The Trinity, trans. by Joseph Donceel with Introduction by Catherine Mowry
LaCugna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8), 22.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79
근원적이며 존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라너가 말
하는 동일성은 전통신학(들)에서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해야만 할 것
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필자는 본 논문에서 라너가 의도했던 그 동일성
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두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륜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
계들은 내재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인식론적
일치였음을 결론적으로 이끌어 낼 것이다. 이를 위해 라틴적 삼위일체
론에 대한 라너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 제안한 그의 공리의 내용을 살
펴 본 후, 그것이 그리스 신학과 유사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상이한 점
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II. 라틴 삼위일체론에 대한 라너의 비판과 공리
라너에게 있어 삼위일체론은 학문적/교리적 주제이기 전에 그리
스도인에게 신앙과 생명을 넣어주는 삶의 주제이다. 반면에 교회의 실
상에 있어 그것은 신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단일신론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라너는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 매
우 냉혹한 어투로 비판을 가한다. 즉, “삼위일체에 관한 그들의 정통적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이 ‘단일신론자들’이다. 우리가 기꺼이 인정해야만 할 것
은 삼위일체론이 오류로 간주되어 생략 된다해도, 주류 신앙서적은 사
실상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2)
2) Ibid., 10-11.
8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이러한 그의 비판적 사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과감히 드러
난다. 라너는 공의회에서 자신의 역할이 가톨릭주의(catholicism)를 신
-스콜라주의(neo-scholasticism)의 엄격한 한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다.3) 그는 삼위일체론을 구원론과 밀접하게 연계시킴으
로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리에 재배치한다. 이러한 라너의 노력이
가장 명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오늘날 잘 알려진 ‘라너의 공리’이다.
1. 라틴 신학에 대한 라너의 비판
라너는 그리스도인과 신학의 중심을 이루던 삼위일체론이 무슨
까닭으로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아니면 설자릴 잃었는가에 대해 고찰
한다. 왜 교회의 신앙고백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는 현대인들
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가? 라너는 자신이 속한 서방교
회의 정형화된 신학적 틀(frame)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이며 전통적인 공식을 존중하고,
이러한 공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믿음으로서 당연히 받아들임에
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교리문답식의 공식들 안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이러한 공언들이 현대인들에게 거의 대부분 이해할 수 없으며 필연
3) 중세 스콜라주의는 신학적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기초한 질
의의 체계(system of inquiry)위에서 다뤘다. 곧, 질문(quaestio)과 토론(disputatio)을 사
용하여 신학적 이슈들을 탐구하였다. 반대로, 신-스콜라주의는 기독교에 가해진 계몽
주의의 극심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세신학의 개선을 시도한 종합체계였다. 그러
나 그것은 중세신학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보다 엄격하고 단순화시키는 한편 생명력 없
는 교리의 개념에 오히려 더욱 집중하는데 전념하였다. 이는 로마교회의 신학이 명백히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을 차단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고립을
자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Catherine Mowry LaCugna, “Introduction” in The Trinity, vii).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81
적으로 오해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4)
예수회 신학자는 전통적 라틴신학이 지향했던 방법론적 편향성
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
게 인간과 세상에 관계하는가에 대한 이해보다는 신적인 영원성 안에
서의 본체(substance)와 통일성(unity)에 치중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
를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삼위일체론을 역사 안으로 실제로 파송된
아들과 성령의 활동과는 별개로 전개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
도인들로 하여금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분으로 지각하게
만든다.5)
라너는 이에 대한 근원적 원인을,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나, ‘한 분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Uno)와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De
Deo Trino)를 분리해서 명제를 집필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게 있다고 이해한다.6) 토마스는 먼저 전자에서 하나님의
통일성, 본성과 속성에 대한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따
라 전개한 후, 후자에서 신적인 발현(processions), 관계, 독특성, 파송
(missions) 등 위격들의 구별성에 관해 고찰한다.7)
물론 라너는 삼위일체를 두 주제로 다루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
이 아니다. 문제는 그 둘을 분리해서 고찰하는 방식을 엄격하게 규격
4) Karl Rahner, Foundation of Christian Faith, trans. by Willam Dych (New York: Seabury,
1994), 134.
5) Rahner, The Trinity, 11-15.
6) Ibid., 16-17.
7) 김옥주, “아들로부터 성령의 발현에 관한 이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을 중심
으로,” 「신학논단」 제80집(2015): 82-83.
8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화함으로써 야기된 폐단에 있다. 라너의 분석에 의하면, 토마스의 신
학적 구도에서는 하나님의 본체와 단순성(simplicity)을 말하는 신론
이 중심 내용이고 외부를 향한(ad extra) 하나님의 활동은 주변내용이
다. 하나님의 단일성(oneness)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그 후에 다뤄지는
삼위일체론의 경시를 초래한다.8) ‘삼위일체에 관하여’에 이르게 될
때,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모두 ‘한 분 하
나님에 관하여’의 논지 안에서 이미 말해진 것처럼 보인다.”9)
이러한 라너의 비판은 라쿠나(Catherine M. LaCugna)에게서도 계
속 이어진다. 그녀는 토마스가 규격화한 삼위일체의 구별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하나님”(theologia)으로부터 “우리를 위한 하나님”(oikonomia)
을 분리시키고 따라서 그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만들었
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간격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무관한 신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10)
8) Rahner, The Trinity, 15-21.
9) Ibid., 17. 니케아 신조 이후 삼위일체론의 발전역사는, 그리스와 서방교회 모두, 위격들
(Persons) 사이의 관계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우
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자신들의 삼위일체적
개념을 본체(substance)의 토대위에 세우고 그 속에서 서로와의 반대 관계(opposite relations)
로 둘러싸인 위격들의 삼위일체를 표현하였던 라틴신학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나
타난다[Catherine M. LaCugna, God for Us: The Trinity and Christian Life (New York:
Harper-Collins, 1991), 73,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비판은 80, 91, 97, 101-102, 104; 토마
스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은 157, 167-68을 보라]. 흥미로운 점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부
각되면 될수록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라쿠냐는 삼
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을 매우 통찰력 있게 결론을 내린다. 즉 “교리와 신학의 혁신
은 삼위일체의 등장과 몰락에 관한 이야기이다”(Ibid., 198, 209-10, 392).
10) LaCugna, God for us, 115, 211. 물론 라너를 포함한 다른 많은 신학자들이 내재적 삼위
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 둘 사이의 뚜렷한 구별은 여전히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사이에 존재한다(Ibid.,
211-21). 라쿠나에 따르면 테오로기아(theologia)에 관한 지식과 사색(speculation) 그
리고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 관한 지식과 사색 사이의 틈이 있다. 그녀에게 있어,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83
이어서 라너는 전통 삼위일체적 원리들이 위격들의 구체적이면서
독특한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11) 아우구스티누
스(Augustinus)가 세운 “삼위일체의 모든 외향적 사역은 나누어질 수
없다”12)는 원리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펼쳐지는 위격들의 다양하면
서 독특한 활동들을 ‘하나의 사역’이란 틀에 가둬두었다.13) 또한 라너
는 “각 위격을 일반적으로 또한 특정하게 다루는 삼위일체 교리는 신
성 그 자체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14)는 안셀름의
주장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명한다. 그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신성 안에서 위격들의 반대관계(oppositions of relation)를 제외한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의미다. 물론 라너는 내재적-근원의 관계
(relations of origin) 안에서 아들의 출생(generation)과 성령의 발현
(procession)과 같은 반대관계의 구분이 위격들을 구분하는 유일한 근
거임에는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이러한 내재적 관계들의
독특성이, 이러한 원리들을 통과하면서, 아버지-아들-성령의 삼중적
관계(threefold relation)로 역할 하는 경륜의 드라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그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수회 신학자는 이러한 약점들이 “삼위 가운데 어느 누구도 화육
만약 테오로기아가 적절하게 관련되게 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테오로기아는 역사 안에서 신적인 활동의 신학, 말하자면, 테오로기아
의 오이코노미아이다. 테오로기아는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삼위일체적
형식을 지닌 테오로기아이어야만 한다. 그녀의 삼위일체론 저변에 흐르는 원리는 “테
오로기아가 온전히 계시되면 오이코노미아가 전해지는 것이다. 오이코노미아는 테오
로기아의 형용할 수 없는 신비를 참되게 표현한다”(Ibid., 221).
11) Rahner, The Trinity, 23-24를 보라.
12) Augustine, De Trinitate, trans.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1.4.7; 2.10.18.
13) Rahner, The Trinity, 23.
14) Ibid.
8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할 수 있다”는 라틴의 ‘전유의 교리’(doctrine of appropriation)와 연합
되면서 더 큰 오류를 낳는다고 본다.15) 그 전형인 예가 화육신 사건이
다. 라너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화육에 대해 말할 때, 신
학적이며 신앙적인 강조는 오직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
(삼위일체의) 신적인 위격들 가운데 한 분이 육체를 취했다는 사실에
있지, 이 위격이 명백하게 로고스의 위격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다.”16)
전유의 교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구
속을 위해 파송된 아들의 독특한 위격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영원 안에
서 나신(generated) 신적인 출생에 관해서 아무것도 인간에게 말해주
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a)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
체의 제2위격이 인간의 몸을 취한 말씀(the Word)이다. 오직 로고스만
이 인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구속사 안에서 단순히 아들에게 전유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에게만 특정한(proprium) 하나의 사례, 하나의
파송이 존재한다.17)
라너의 관점에서 이러한 신학적 원리들은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완성해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위격들과 인간의 상
호연관성을 희석시킬 수 있는 위험을 담지하고 있다. 실제로 삼위일체
는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철학적 하나님이 되고, 다른 한편으
로는 그 교리는 구원론, 그리스도론, 은총론 등 다른 교리들로부터 격
리되었다. 이런 점에서 라너는 삼위일체 교리를 구원론과 재-접목시
키기 위해서 삼위의 내재적 관계는 경륜적 관계와 차이가 없어야 한다
는 원리를 세우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18)
15) Ibid., 28-29.
16) Ibid., 11.
17) Ibid., 23.
18) Phillip Cary, “On Behalf of Classical Trinitarianism: A Critique on Rahner on the Trinity,”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85
2. 라너의 공리
예수회 신학자는 교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모두의 영역
에서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회복되기를 소망하였다. 그의 삼위일체
론은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한 하나님(De Deo Uno)과 삼위일체 하나님
(De Deo Trino) 사이의 연계(links)를 재건하려는 그의 공리에서 잘 나
타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으로도 그렇
다(vice versa).”
그의 공리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고, 라너 스스로도
완벽하게 밝히지 않는다.19) 반면에 그는 무엇보다도 공리를 통해 “계
시된 하나님 이외”의 모든 류의 신(gods)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
히 한다. 말하자면 구원사는 하나님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으로서 계
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신적인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역사 사이의
어떤 류의 틈(gap)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고대 아리우스주의를 부정
한다.20)
보다 구체적으로 공리의 내용을 살펴보자.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
원사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임재를 나타내는 아들과 성령의 파송을 가
리킨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피조물 없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와의 관
계성을 갖는 신적인 위격들을 의미한다. 라너의 신론은 하나님이 본질
적으로, 아버지가 아들과 성령에게 그 자신을 내어주듯, 자기 자신을
전달하시는 분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시간과 역사
The Thomist 56 (1992), 369.
19) 라우서는 그러한 이유를, 나중에 본 논문에서 설명하겠지만, 하나님의 자기-전달교리
때문이라고 본다[Randal Rauser, “Rahner's Rule: An Emperor without Clothes?” IJST 7
(2005): 81-94를 참조하라].
20) Catherine Mowry LaCugna, “Re-conceiving the Trinity as the Mystery of Salvation,” SJT
38 (1985), 3.
8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 끊임없이 연속적인 자기-전
달(self-communication)을 계시한다. 라너가 두 삼위일체를 동일시하
는 것은 하나님이 경륜적으로나 내재적으로나 참되고 완전하게 그 자
신을 남김없이 피조물에게 내어주는 하나님을 부각시킨다. 그러므로
구원의 경륜에서 주어진 것이 (내재적) 하나님 그 자신이다.21)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라너의 공리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보여
준다. 첫 번째 특징은 그의 삼위일체론이 구원론의 상황 안에서 전개
된다는 점이다. 예수회 학자는 이를 위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세워진 그리스 정통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22) 그리스신학의
삼위일체론은 구원론에 그 토대를 두는데,23) “화육한 로고스와 하나
님의 영은 구원을 성취하는 주체로서 가장 먼저 조우하게 되고 경험되
며, 오직 그런 다음에 그들이 필연적으로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
견하기” 때문이다.24) 즉,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구원사 안에서 그리
스도론적 전제와 성령론적인 전제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지향한다. 라
너 또한 인간이 다루는 모든 교리는 “우리가 구원의 상황에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령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확
신을 갖고 삼위일체론에 대한 접근을 찾아야 한다”25)고 밝힌다. 라너
21) LaCugna, “Introduction,” xiv.
22) 라너는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연계를 위해 성부를 성자와 성령 두 위
격의 신성의 근원이요 원천(fontalis)으로서 간주하는 그리스신학의 견해를 따른다.
23)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정신과 이성을 사로잡은 것은 인간 구원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
다. 동일본질(homoousia)에 관한 니케아 신조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의미
하며 동시에 그의 화육은 구속적 활동에 필연적이었음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성령
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인간에게 성화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이끌었다.
24) John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Historical trends & Doctrinal themes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79), 180ff.
25) Rahner, The Trinity, 38. 노우재에 의하면, 라너는 계시, 곧 하나님의 자기-전달은 아들
의 화육과 성령의 부으심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것이 철저히 삼위일체적이란 의미는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87
의 삼위일체 신학은 실제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아들과 성령의 파
송(missions)을 매우 중요시 한다.26)
그러나 우리가 오직 구원사와 역사, 곧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예수와 하
나님의 영에 관한 경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바르
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진리라면, 그들[예수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우리는 진실로 그와 같은 삼위일체 자체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관한 집필이 파송의 교리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다루
고 기껏해야 첨가적인 난외주(scholion)로 다루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27)
삼위일체론과 구원사에 나타난 아버지에 의한 아들과 성령의 파
송에 관한 강한 연대는 두 가지 중요한 상호관계를 내포한다. 우선, 라
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적 유비의 사용을 거부한다.28) 그는 심리
적 유비의 전통성과 그 타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심리학적 이
론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영지주
의적 사색에 치중함으로써 구원의 경륜 안에서의 삼위일체적 경험을
경시한다.”29)
그 다음으로 라너는 “아래로 부터”(from below)의 방법을 취한
아들의 화육은 하나님의 계시를 제공하는 원리로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은 그것의
수용의 원리로서 필연적으로 동시적 사건이다. 노우재,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에 대
한 고찰,” 「가톨릭신학과 사상」 70 (2012), 157.
26) Rahner, The Trinity, 42.
27) Ibid., 40.
28) David Lincicum, “Economy and Immanence: Karl Rahner's Doctrine of the Trinity,”
EruoJTh (2005), 112.
29) Rahner, The Trinity, 115-116.
8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다.30) 이는 라너가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
은 “무한한 차이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인간에게 친밀하고 가까운 하
나님이 되기를 원한다.31) 반면에 삼위일체가 신비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 의해 구원의 계시로서 경험되기 때문이다.32) 따라서 그의 공
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을 경
험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라너의 공리 그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자기-전달이 필연적 전제
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는 절대적 신비이다. “기독교 신앙
에 있어 절대적 신비들이 있다면, 삼위일체의 신비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근본이다.”33) 그리고 그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자기-전
달(self-communication)로 이루어진 신비이다.34)
라너는 삼위일체의 원천(source)을 근원이 없는(unoriginated) 아버
지 하나님에게 두는 그리스 교부들의 주장을 따른다.35) 아버지는 아
들과 성령을 통해 그 자신을 인간에게 “자기-전달한다.”36) 하나님은
30) Gary Badcock, “Karl Rhaner, the Trinity, and Religious Pluralism,” in Kevin J.
Vanhoozer(ed.), The Trinity in a pluralistic age (Grand Rapids, Michigan: W. B.
Eerdmans, 1997), 144.
31) Rahner, Foundations, 137.
32) Rahner, The Trinity, 21.
33) Karl Rahner, An Encyclopedia of Theology, vol. 6 (New York: Herder & Herder, 1970),
297.
34) Rahner, Foundations, 119.
35) Rahner, Trinity, 16; 84.
36) 신적인 자기-전달은 두 개의 양식(modalities)을 갖는 하나의 전달행위이다(Ibid., 98).
라너는 이 개념을 짝을 이룬 네 개의 측면으로 묘사한다: 기원-미래; 역사-초월성; 초대-
응답; 그리고 지식-사랑 (Ibid., Trinity, 88-94). 아들은 각의 쌍에 앞부분을 성령은 뒷부
분과 연관된다. 라너에게 있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
유로운 신실함의 제공이다. 그리고 사랑으로서 그것은 수용을 가져오며 절대적 미래의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초월성을 열어준다(Rahner, An Encyclopedia of Theology, 300).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89
인간을 신적인 자기-전달의 수혜자로서 창조하고 성령에 의하여 하나
님의 은총을 수용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내어
준다. 라너는 하나의 사건인 하나님의 자기-전달 안에서 진리로서의
아들과 사랑으로서의 성령의 구별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의” 하나님
에게 속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37)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자기-계
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한 하나님
과 구원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방식(manners)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
계가 있다. 즉, 역사적으로 인간의 몸으로 온 위격은 아들이고 그이어
야만 하고 그를 은총 안에서 수용하게 만든 위격은 성령이고 성령이어
야만 한다는 의미이다.38)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각각의 신적인 위격은 자기만의 위격적 특성과 다양성 안에서 무상은총
(gratuitous grace)으로 자신을 인간에 전달한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전달은 인간의 생명의 은총뿐 아니라 영원 안에서 신적인 위격들의 직접
적인 비전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내주하심’이요
‘피조되지 않은 은총’이며 신적인 본성의 전달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이자 위격에서 위격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위격
들’의 전달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세 개의 자기-전달은 세 가지 관계적
방식으로 자존하는 한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다.”39)
라너는 자신이 세운 공리를 통해 경륜의 역사에서 신적인 자기-전
달의 세 방식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세 개의 존재적 양태와 동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향
37) Rahner, Trinity, 100.
38) Ibid., 86.
39) Ibid., 34ff.
9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것의 수정을 요구하는 잣대로 작용한다.
III. 존재(Being) vs. 앎(knowing)
라너의 공리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 존재
할 수 있는 어떠한 구별의 제거를 의도한다. 반면에 두 삼위일체 사이
의 구별은, 라너 자신이 성경과 가장 부합하다고 평가한,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처음으로 공식화되었다. 여기서는 라너의 주장과 이견
을 보이는 그리스 신학을 살펴본 후, 그의 공리가 실제로 의도한 의미
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불가지한(unknowable) 하나님의 지식
최근의 삼위일체론적 논의에 있어 테오로기아(theologia)와 오이
코노미아(oikonomia) 사이의 구분을 라너 만큼 혹독하게 비판한 사람
은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테오로기아와 오이코노미아 사이
의 구별을 원리로 삼고 철저하게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갑바도기아 교
부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오이코노미아가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테오로기아는 하나님의 내적인 삶 안에
서의 지식으로서 인간의 앎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
러므로 그 둘 사이의 구분은 하나님이 피조물로부터 소원해지지 않으
면서 절대적 초월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 그 이상은 아니
다.40)
40) Gregory Palamas, Triads for the Defence of the Holy Hesychasts, III.2.24, John Zizizoulas,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91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결과에 따른 위격적
(hypostatic) 관계들의 궁극적 의미는 인간의 이해, 정의(definition), 또
는 논거 등을 뛰어넘는 테오로기아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41) 통일성
(unity)과 세 위격의 하나님 존재에 관한 개념들은 이러한 신적인 불가
해성(incomprehensibility)을 예증하는 하나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인
간 의식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떠한 실재도 하나면서 동시에 셋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신학자, 로스키(Vladimir Lossky)가 언급하였
듯이, “불가해성은 그의[하나님] 불가해적 존재라는 그 사실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왜냐하면 그의 불가해성은 하나님이 본성(nature)일
뿐만 아니라 세 위격들이라는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42)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지배하는 아포파틱
(apophatic) 전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하나님의 내적인 삶은 영원하
고 피조된 실존들과는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구별되며 따라서
인간의 앎을 넘어선다.4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φράσαι)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를 아는 것(νοῇσαι)은 더 불가능하다”44)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성
령의 오심에서 나타난 오이코노미아가 하나님은 삼위일체란 사실을
Communion and Otherness: Further Studies in Personhood and the Church (New York:
T&T Clark, , 2007), 202 재인용. 지지울라스에 의하면, 경륜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실
하는, 말하자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모든 차이를 폐지하는 것
으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성은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참여로
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1)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185.
42) Vladimir Lossky,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 Church, trans. by members of the
Fellowship of St. Alban and St. Sergius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57). 64.
43) Ibid., 47;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182.
44) Gregory of Nazianzen,. Select Orations in A Select Library of the Christian Church: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vol. 7 (MA: Hendricksen Publishers, Inc., 1995), 28.4.
9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계시한다 할지라도, 삼위일체적 실존에 관한 그 이상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적 존재는 하나님의 초월적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다.45)
그리스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오직 그 만큼,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원사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그 만
큼, 그리고 초월자가 경륜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그 만큼만 가능할 수
있다.46)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앎’의 범위가 전적으로 하나님이 자신
을 보여주는 활동 범위에 달려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바질(Basil the
Great)은 이것을 ‘에네르기아’(energia, energy)47)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활동은 다양하고 본질은 단순하다. 우리가 에네르기아를 통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은 하지만, 그의 본질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단언
하지는 못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에너지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그분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의 에너지
는 우리에게 내려오지만, 그의 본질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48)
그리스 교부들, 특별히 바질과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45) Vladimir Lossky,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4), 15.
46)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185.
47)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의 본성(physis)은 에너지(energeia) 즉, 실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현현(manifestation)을 갖는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그것은 교부들의 에너지 개념
에 용어상의 배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성-에너지의 이원관계
(dyad)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 자체로는 충분한 의미를 반영하지 못한다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186).
48) Basil, Letters, 234 in A Select Library of the Christian Church: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ed. by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vol.8 (MA: Hendrickson Publishers, Inc.,
1995).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93
Nyssa)는 에네르기아를 통해 신적인 본질의 통일성에 대한 결정적이
면서도 실존적인 표징을 전개한다.49) 그들은 에네르기아를 ‘하나님
의 활동’(operations), ‘신성의 광채들’,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신성들,’ ‘피조되지 않은 빛’, 또는 ‘은총’이란 말로 바꿔
사용하였다.50) 에네르기아는 근원적으로 신적인 단일성(oneness) 안
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에네르기아를 통해서 외부를 향해 나가고 스
스로를 드러내며 교제한다.51) 주목할 점은 창조되지 않은 ‘에네르기
아’는 하나님의 존재를 역사와 창조 안에 관여케 한다.52) 그러나 하나
님의 ‘본질’과는 구별됨으로 인해 에네르기아는 하나님의 존재를 세
계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앎을 초월하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incomprehensible Being)로 남게 한다.53) 이러한 에네르기아 교리는
결국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본성을 인지할
수 있는 인간적 모든 수단을 차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49) 신적인 본질과 신적인 에너지 사이의 실제적 구별은, 피조된 인간이 앞서 그리스신학
은 하나님의 본질은 초월적이며 완전히 참여할 수 없다고 전제하였다.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삶으로의 참여를 의미하는, ‘신화’의 교리에서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50) Lossky,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55; 90.
51) Ibid., 91-93.
52)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결정적 활동들인 에네르기아를 이끄는 요인은 위격들이다. 세
위격들은 에네르기아를 공유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투영된다. 실제로 바
질은 성령의 신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에네
르기아를 가진다는 주장이다. 유사하게, 닛사의 그레고리는 삼위가 함께 하는 활동의
통일성으로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필연적 동일성을 증명한다[G. L. Prestige, God in
Patristic Thought (London: SPCK, 1981), 257-260].
53) 그리스 정통주의 신학자인 메엔도르프(Meyendorff)는 신적인 위격들은 에네르기아를
통해서 그들이 함께 공유하는 고유성 즉, 페리코레시스(perchoresis)를 보여준다고 말
한다. 이것은 바로 “나는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11)는 의
미이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안에서 충돌이 발생하는 반
면에, 신적인 페리코레시스는 삼위의 온전히 하나 된 사랑의 연합을 표현한다
(Meyendorff, Byzantine Theology, 186).
9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이에 대한 사상적 배경은 4세기 교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유노
미우스(Eunomius) 이단과 깊이 연관이 있다. 유노미우스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4) 반면, 교부들
은 하나님의 지식은 신적인 에네르기아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하
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활동이 세상 안에서 계시되는 경륜적 삼위일체
는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불가해하지만 인식 가능하도록, 말하자면,
초월적이지만 내재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최선의 장치이다. 프레스티지(G. L. Prestige)는 닛사의 그레고리 안에
서 에네르기아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그[그레고리]가 말하길, 모든 인종의 결속에도 불구하고, 개
별인 각자는 독립적으로 일하기 때문에, 그들을 다수로 간주하는 것은 적
절하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신의 독립적 ‘에너지’라는 사실에 의해 개별
단위로 나눠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그는 계속해서, 그렇지 않다.
성부는 결코 아들과는 별개로 행동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아들도 성령
과 별개로 행동하지 않는다. 반면에, 신적인 행동은 인간의 인지 안에서는
구별되는데, 항상 아버지로 시작해서 아들을 통해 전개되며, 성령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위격들의 어떠한 분리나, 개별적인 활동은
없다. 오히려 결과는 세 개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일 지라도, 에너지는 변함
없이 세 위격을 통해 거쳐나간다.55)
54) 유노미우스에 따르면,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전치사들
은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즉, ‘부터’는 창조자를, ‘통하여’는 그의 종속
적 수단, ‘안에서’는 시간/장소를 표현한다. 그는 이러한 전치사들은 아들과 성령은 아
버지의 본질과 다르다는 것과 따라서 세 위격들 사이에는 위계적 질서(taxis)가 존재하
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김옥주, “성령, 교제를 가져오는 분: 대 바질의 성령론
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제36집 (2013), 97-98을 참조하라].
55) Prestige, God in Patristic Thought, 260.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95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과 에네르기아의 구분을 통해 본질 안에서
의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그의 활동을 통한 하나님의 가해성이 강조된
다. 그러므로 그리스 신학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
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
는 것이다.
그리스신학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라틴신학에 속한 신학자들은
그들의 전통 신학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 설치
한 간격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그룹의 대표격인 라너는 “삼위일
체론과 구원의 경륜에 관한 교리 사이에는 적절한 구별이 있을 수 없
다”56)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러
한 간격은 그리스신학에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하
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를 위해서도 필연적임을 볼 수 있다.
2. ‘앎’의 대상과 범위
라너의 교리는 표면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구분 없는 동일성이다. 그런데 라너가 생각하는 두 삼위일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무엇인가? 과연 그는 무엇을 염두에 두고
둘 사이의 차이를 없애려 하였는가? 물론 그것은 구원론적 경륜 안에
서의 성부, 성자, 성령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과 동일하다는
주장 그 이상을 의미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일성은 이미 니
케아 공의회(381)가 신조(creed)로서 확증하였기 때문에 어떤 삼위일
체론도 감히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경륜적 삼위일
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구별은 결코 서로 다른 두 개의 삼위일
56) Rahner, Trinity, 24.
9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그 자체(in se)를 묘사하는 것
과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이 사실이다.
만약 라너의 공리가 하나님의 경륜과 내재 사이의 문자적 일치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하나님과 창조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희석시킬 뿐만 아니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론적 관계성을 유
지하려는 합당한 수단을 잃게 된다.57) 라쿠냐의 설명대로, 내재적 삼
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정통적 구별은 “신적인 자유를 보
존하고, 하나님을 세상과 동일시하는 것을 피하며, 인간에게 있어 하
나님의 실재적 지식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영지주의적(agnostic) 혹은
유명론적(nominalist) 견해들을 막기 위해”58) 만들어졌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는 지극히 당연한 공론이다. 필자는 라너
또한 자신의 공리가 존재론적으로 해석됨으로써 나타나는 폐단들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59)
그렇다면 오히려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
이의 존재론적 차이보다는 인식론적 차이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인식론적 간격이 있다는 의미는 구원의 경륜 안에 알려진 하나님
이 신적인 내적-자신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
성을 암시한다. 교부들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존재’에 관심을 가졌다
면 라너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앎’이 쟁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의 공리가 실제로 인식론적 간격을 봉합하
57) LaCugna, “Introduction,” xv.
58) LaCugna, “Re-conceiving the Trinity as the Mystery of Salvation,” 13.
59) 라쿠냐는 철저하게 라너의 공리가 존재론적 동일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대변한다. 오
히려 그녀에게 그것은 삼위일체적 관계를 경륜이나 내재 안에서 동일하게 보는 방법
론적 이해라고 옹호한다(LaCugna, “Re-conceiving the Trinity as the Mystery of
Salvation,” 11).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97
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다’(is)는 말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기본적 진상들로부터 내재적 삼위일
체에 대한 해석학적 이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무엇’인가가 요구된
다.60) 그렇지 않다면 경륜적 삼위에 대해 알려진 것과 내재적 삼위일
체에 관해 알려진 것 사이의 ‘필연적 연계’가 있어야만 한다. 라너는
삼위일체의 ‘자기-전달’을 그 연계로 사용하였다. 구원사에서의 하나
님의 계시는, 영원에서의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에게 알려지도록 자신
을 완전히 내어주는, 실제적 자기-전달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보장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간
격을 봉합할 뿐만 아니라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인식론적 이동을 자연
스럽게 유도한다.
따라서 라너는 경륜 안에서 나타나는 위격들이 “단순이 내적 삼위
일체의 모사(copy)나 유비(anology)”61)라면 신적인 ‘자기-전달’은 결
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화육신 사건은 신성 안에서의 로
고스 자신에 대한 구체적이며 독특한 특성을 계시해야만 한다는 필연
적 연계가 있어야 한다.62)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
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는 필연적 연계는 인간으로 하여
금 “세 위격들은 자신을 전달하는 자신만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63)는
결정적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여기에 라너가 삼위일체의 위격들이 구
원사에서 역할을 서로 교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유의 교리를 혹독
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구원의 경륜적 사
건에서 계시된 삼중적 관계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들
60) Cary, “On Behalf of Classical Trinitarianism,” 390.
61) Rahner, Trinity, 35.
62) Ibid., 28.
63) Ibid., 36.
9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을 성립하는 내재적-삼위일체적 관계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
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전달 교리는 구원의 경륜에 관한 성경적 내러
티브로부터 내재적 삼위일체의 교리를 읽어가는 해석학적 이동을 정
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64)
반면에 이러한 인식론적 이동이 과연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적용
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라너를 포함해 현대 신학자
들이 지향하는 인식론적 추구는 인간의 외적인 표현적 속성(시각적
외형, 말, 태도, 활동 등)으로부터 내적인 자아를 인식한다는 해석학적
이동을 담지한다. 그것에 따르면 사람에 대한 ‘앎’은 그/그녀의 내적
자아에 대한 접근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그러한 가정 하에서, 경륜
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인식론적 차이는 하나님의 참
된 인격적 지식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라
너가 고전적 삼위위일체론과 결별하게 된 궁극적 동기가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가정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케리(Phillip Cary)의 주장에 동
의한다.65)
헤겔은 이러한 가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철학자였다.66) 그에 의
하면, 인간은 내적 요인과 그것을 표현하고, 보여주거나 상징화하는
외적인 요인으로 구성된다. 자기-지식(self-knowledge)은 이러한 외향
적 표현들, 특히 말과 행위는 사람의 내적인 구성을 측정하고 읽어가
는 해석학적 활동을 통해 언어진다.67) 동일한 맥락에서 라너는 구원
사에서 나타난 세 위격 사이의 관계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세우는 영원
64) Cary, “On Behalf of Classical Trinitarianism,” 391.
65) Ibid., 394.
66) Declan Marmion and Rik Van Nieuwenhove, An Introduction to the Trin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167.
67) Robert Stern, Hegel and the Phenomenology of Spirit (New York: Routledge, 2002),
111-112.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99
한 내적 관계들과 동일하다는 주장을 이끌어낸다.68) 즉, 경륜에서의
삼위의 관계들은 그들의 가장 내적인 정체성에 있어서의 필연적 구성
요소가 된다. 라너는 이런 점에서 신적인 발현(processions)을 파송
(missions)과 동일하다고 강조한다.69)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자기-전
달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필연적 구
성요소들인 관계나 구조에 대해 인식론적 이해를 갖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록 존재론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하여
도, 하나님의 자유와 은혜에 심각한 훼손을 초래한다. 하나님에게 있
어 자기-전달의 행위는 하나님 존재의 필연적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럴 필요가 없음에도 자신을 내어주기로 선택하는 하나님의 자유행위
이다. 다시 말해서, 신적인 행위의 형태나 구조는 필연성의 문제가 아
니라 은혜의 문제이다. 반면 라너의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앎’의 대상
을 하나님 존재의 내적인 필연성으로 만듦으로서 신적인 자기-전달을
제한시킨다.70)
앞의 논리와 연결해서, ‘존재’는 ‘앎’의 규칙을 뛰어 넘는다. 말하
자면, 나의 ‘존재’는 타인이 ‘나’로부터 표현되어진 말과 행동으로 인
식된 ‘존재’와는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 건톤(Colin E.
Gunton)의 표현을 빌리자면, 앎(knowing)과 존재(being) 사이에는 비
대칭 관계(asymmetical relationship)가 존재한다.71) 인식된 ‘존재’가
참 ‘존재’에 포함되지만, 후자가 완전하게 (타자 안에서) 인식된 ‘존재’
68)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4 (Baltimore: Helicon Press, 1961), 231.
69) Rahner, An Encyclopedia of Theology, 298.
70) Cary, “On Behalf of Classical Trinitarianism,” 395.
71) Colin E. Gunton, Theology Through the Theologians: Selected Essays 1972-1995
(London: T&T Clark, 1996), 127.
10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와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표현하는 ‘나’와 인식하는
‘타자’ 각각에는 일련의 의도(intention)나 성향(penchant) 등이 작용하
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앎’의 과정이 이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인식의 질서는 물론 경륜적으로 자신을 계시하
는 하나님은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의 하나님 개념과
부합한다. 만약 하나님이 경륜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분이라면, 경
륜적 사건은 우리를 영원 안에서 그리고 자신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게 인도하는 신실한 안내자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라너의 공리 후반부는 같은 맥락으로 수용되기
는 어렵다.
IV. 나가는 글
라너는 그의 공리를 통해 삼위일체론의 경험적 측면을 재-부각시
킴으로서 철학적 영역으로 주변화 되었던 교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으로 재-배치하는 데 그 의의를 두었다. 그는 정적이고 사변적이
며 형이상학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버리고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인간이 조우하고 인식하며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
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라는 공리를 선
언한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적인 본질(통일성)이 논해진 다음
에 삼위의 다양성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소위 라틴적 ‘관행’을 철저하
게 비판하고 배제한다. 대신 라너는 구원론의 토대 위에 삼위일체 하
나님을 구원의 신비로서 인간이 인식가능하게 하였다.
구원론과 깊이 연관된 라너의 삼위일체론적 사상은 그리스교회의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101
교부들로부터 다양한 통찰을 이끌어왔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라틴신
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의 부흥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학과의 접목을 통
해 에큐메니컬 화합에도 이바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72) 또한 하나님
의 경륜에 토대를 두는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삼위일
체론적 논의의 다양성을 도모하였다.
반면에 라너의 공리는 라틴신학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학의 전통과
도 결별을 내포한다. 라너는 그의 공리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경륜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계들은 내재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라너에 의하면 구원사에서 세
위격들이 활동하는 독특한 역할들 사이에서의 관계들은 하나님의 존
재 자체에 필연적이며 내적인 삼위일체적 관계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
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선호하는 그리스신학의 그것과도 상충된다. 왜
냐하면 그리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근원적 관계가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그리스신학에서 의미하는 피조물과 다른 삼위일
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앎’의 범위를 제한
하는 데 있다. 필자는 라너의 공리가 존재론적 동일성이 아닌 인식론
적 동일성으로 해석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라는 선언이 존재론적 동
일성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인식론적 일치로 이해된다 할지라도, 라너
의 삼위일체론적 이해는 그리스와 서방 둘 모두의 전통적 교리와는 상
충된다. 그의 공리가 지향하는 앎의 범위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이
해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의 하나님’ 즉, 존재까지 확장된다. 이것은
72)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Crestwood, NY: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85), 40.
10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그리스신학이 라너의 공리의 후반부, 즉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다’에 대해서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라너는 니케아 신조가 고백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이면
서 동시에 셋인가에 대한 물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질문
은 오히려 어떻게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자기-전달을 조명하는가
에 있다.73) 그는 하나님 안에서의 삼위와 통일성에 관한 존재론적 질
문들이 아니라, 헤겔의 이해와 유사하게,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에 관
한 교리적 지식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의 초월성을 알고 그와의 인격적
관계를 갖느냐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들을 묻고 있다.
73) Rahner, Trinity, 27; Cary, “On Behalf of Classical Trinitarianism,” 392.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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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105
국문초록
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칼 라너는 인간과 초월적 하나님이 구원적 경험의 장 안에서 조우
하는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공리에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적 전제를 제시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
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러한 신학적 견
해는 신-스콜라주의로 경직되어 있던 로마 카톨릭 신학계에 매우 혁
신적 반향을 일으켰다. 본 논문은 라너의 공리를 중심으로 그가 의도
했던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동일성이 갖는 의미
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두 삼위일체의 동일성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륜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계들은
내재적 영역에서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는 인식론적 일치였
음을 결론적으로 이끌어 낼 것이다. 이를 위해 라틴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라너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 제안한 그의 공리의 내용을 살펴 본
후, 그것이 그리스 신학과 유사하면서도 근원적으로 상이한 점을 고찰
하도록 하겠다.
10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3집(2015년 12월)
Abstract
Epistemological Understanding on Karl Rahner's
Axiom
Kim, Okjoo
Lecturer
Hansei University
Gunpo, Korea
Karl Rahner developed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the stage
of salvific experience where humanity and the transcendent God
encounter each other. He proposes his trinitarian premise through
the so-called Rahner's axiom: “the economic trinity is the
immanent trinity and vice versa.” This theological perspective
created an innovative sensation in the Roman Catholic Church's
theological circle that neo-scholasticism rigidly dominated over.
This article will attempt to observe the meaning of what Rahner
actually intends to mean the identity of the immanent Trinity and
the economic trinity. Furthermore it will conclude that the axiom
does not merely show literal(ontological) identity but
epistemological identity that the relations of the three Persons in
the economic level correspond to that of the immanent level. For
doing this, I will examine on the one hand Rahner's criticism of
김옥주|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 107
the Latin theology and the axiom's content and on the other hand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his theology and the
Greek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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