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종교개혁 당시의 중심
적 사건이었다. “사랑으로 형성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을
주장했던 스콜라신학과 “믿음으로 형성되는 사랑”(caritas formats
fide)을 주장했던 종교개혁 진영 사이의 논쟁은1) 결국 로마가톨릭은
사랑을, 종교개혁 진영은 믿음만을 강조하는 대립적 구도를 낳게 되었
다. 종교개혁 진영은 믿음을 통해 은혜의 충족성을 강조하는 이신칭의
의 구원론으로 나아갔고, 로마가톨릭 진영은 사랑을 통한 선행을 요구
하는 공로사상의 구원론으로 양측이 분리되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
1) Bernd Wannenwetsch, “Caritas fide formata,” Kerygma und Dogma 46. (Vandenhoeck &
Ruprecht, 2000), 205.
12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동일하게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구원받는다는 하나의 신앙을 간직했던 그리스도교회 안에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구원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측의 구원론이 분리된 결과
를 초래하게 되었다. 논쟁적 대결 구조가 낳은 불행한 선택이었다. 이
제 한 발 더 나아가서 양측은 상대방 진영을 향해 공격할 때마다, 로마
가톨릭 진영은 종교개혁의 구원론이 정적주의로 축소되었다고 비판
하는 반면 종교개혁 진영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을 향해 은혜를
제한시키는 신인협동론이라 비판하게 되었다.2)
이런 양측의 대결적 구도 가운데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이 등장하
는데,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
의 주춧돌을 놓은 대표적 교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에
게도 가장 결정적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를 가리켜 “은혜의 교
사”(Doctor of Grace)라고 부를 정도로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
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사랑
(caritas)에 대한 강조가 그의 사상과 작품 전편에 확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런 특징이 그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 신학과 종교개혁 신
학자들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내용
2) 이러한 상호비판은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인해 극단적인 면이 있었지만, 이는 결
국 자신들의 약점을 극복하려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경우, 루터는 신자의 선행에 대한 부정적 언급 속에서도(많
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행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제 25번) 긍정적인 인식(그리스도의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라 부르고, 우리의 행위는 그 능동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진―수동적인― 행위라
고 부르는 것이 정당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수동적인 행위는 능동적인 행위 덕분으
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 하이델베르크 논제 27번)을 강조했고 칼빈은 이
중칭의론이라는 성화를 강조하는 교리로 발전시켰다.(『기독교강요』 III.17.4)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23
을 구비했다고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하나님
의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 본 인간의 믿음과 사랑은 바울로부터 출발한
그의 신학 연구의 결과물인 동시에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시고 사명을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사랑을 직접 경험한 그리
스도인의 자기고백인 것이다. 이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평가
와 존경에는 로마가톨릭 신학이건 종교개혁 신학이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논문에서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
는, 그를 통해 오늘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의 위기를 풀어나갈 지혜를
얻고자 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
는 믿음과 삶의 괴리로 인한 신앙의 붕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답변을 얻기를 기대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은
혜를 강조한 신학자로서 참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역설하였다. 신자
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하나
님을 즐기는 것과 사용하는 것”(frui Dei et uti Dei)의 구분을 통해 참
신앙과 우상숭배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나아가서 아우구스티누
스는 사랑의 대상과 내용 그리고 사랑을 통해 완성되는 믿음의 성장을
예리하고도 웅변적으로 가르쳐 준 그리스도교회의 탁월한 교사이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런 가르침이 믿음과 삶
의 불일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과 일반 신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귀감으로 배워야 할 가치가 충분
히 있다고 여겨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
는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설교가를 경멸
하다 보면 그 설교가가 이야기 하는 하느님의 말씀까지도 경멸하기에
이른다. …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3)”마치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목회자
12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들의 비윤리적인 삶의 모습을 보고 나서 준엄하게 질책하는 듯하다.
경건한 삶이 동반되지 않는 명목상의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개신교의 구원론이 위기를 맞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의 믿음과 사랑의 교훈이 다시 한 번 신자들의 가슴 속에 산 신앙을 불
러일으킬 수 있는 도전이 되길 기대하면서 참 믿음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경청하고자 한다.
최근 십여 년 내에 국내 신학계에 발표된 아우구스티누스 관련 연
구 주제들을 살펴보면, 그의 신학의 세계의 광대함을 표현하듯 다양한
영역에서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주로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들
에 대한 논문들이 주종을 이룬다. 창조와 시간이해, 삼위일체론(주로
filioque에 주목한 논문들), 인간론, 사랑이해 등이 주를 이룬다. 4)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연결 지어 연구함으로 참 그리
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구원의 은혜를 이루어 가는 성도의 바른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먼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믿
음에 대해 소개한 후, 이어서 사랑의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하면서 마
지막으로 믿음과 사랑이 어떻게 통합되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3) Augustinus, De doctrina christiana,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왜관; 분도출판사,
2011), 4. 27.60.
4) 이런 주제에 속하는 연구 자료들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을 소개할 수 있다. 정기철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와 시간론”「한국기독교신학논총」 17(2000), 강응섭의 “아우구
스티누스의 인간론”, 「한국조직신학논총」 19(2007), 정홍열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
론“, 『교회론』 한국조직신학회 기획시리즈 I (2009)와 정홍열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성
례전론“, 「한국조직신학논총」 25(2009), 김옥주의 ”포스트 - 어거스틴 필리오케에 대한
포티오스의 비평“ 「한국조직신학논총」 29(2011), 현우식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 신
학“, 「한국조직신학논총」 40(2014),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
누스』 (2013)가 국내에 번역 출판되었다.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25
II. 믿음에 대한 분석
1. 믿음에 대한 이해
믿음을 정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너무 간결하게 서
술하면 무언가 빠진 듯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면 너무 길어 장황하게 느
껴지는 것이 믿음에 대한 정의다. 칼빈도 수차례에 걸쳐 믿음을 설명
하지만 『기독교강요』 III.2.7 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적 정의5)는 완벽한
내용을 소개해 주되, 그 설명이 다소 길어서 한 마디로 가늠하기 어려
운 반면 다른 곳6)에서는 훨씬 간결하게 소개해 주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에는 믿음이 과연 이것이 전부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 전체를 둘러볼 때,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의외로 믿음에 대한 설명이 적게 등장한다. 『고백록』에도 믿음 자체를
설명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의 주요 작품
속에서도 믿음을 주제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분석하는 경우는 펠라기
우스파와 본격적으로 논쟁을 벌이게 되었던 비교적 후기의 작품 들 속
에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믿음에 대한 정의도 주제에 따라서 다양
한 내용으로 소개된다. 『편람』(Enchiridion)으로도 불리는 『믿음과 소
망과 사랑에 대하여』에서는 믿음이 사도신경에 대한 동의를 가리키
고7), 이 경우는 그의 참된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는 믿음개념이
5) 칼빈은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
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바가 된다.”라고 정의
했다.
6)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2.12에서는 믿음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아는 지식과
그 인애의 신실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라고 정의하기도 했고 로마서 10장 10절의 주석
에서는 믿음을 확실하고 효력 있는 신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2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고, 『영과 의문에 대하여』에서는 믿음이 훨씬 더 역동적으로 소개된
다.8) 따라서 그의 믿음 정의를 정리하는 일이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대한 다양한 설
명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해 주는 추천할 만한 자료로 RGG 3판에 수록
된 룰러(A.A. von Ruler)의 글이 있다. 룰러는 믿음을 교리사적으로 정
리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나간
다. 먼저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믿음 이해를 간략하게 정리한
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그리스도교에서는 믿음을 신비주의적으
로 이해하여 이성에 대한 조명과 천상의 일들에 대한 영적 지식 그리
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신성과의 결합으로 받아들인 한편,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인정과 하나님의 율법과 약속에 대
한 동의 등으로 강하게 지성화와 윤리화 시켜서 이해했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선행이 결여된 믿음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믿음
이해가 펠라기우스가 말한 바처럼,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행위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었다.”9)
이에 맞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 이해에 심대한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가 이해한 믿음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로 설명하고자 한
다. 먼저 믿음의 우선적 대상은 성경으로부터 우리에게 전달된 그리스
도의 복음의 상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성이 중심을 차지
하게 되었다. 이어서 칭의와 사랑의 교제로서의 역사적 가톨릭교회와
믿음의 어머니로서의 교회는 인간 위에서 구원하는 진리의 현실을 인
7)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에게 신경과 주기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하면
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사도신경으로 소개하고 기도의 삶을 주기도로 제시해 준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7(II).
8) 412년에 작성된 『영과 의문에 대하여』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바울 신학 연구 결과가
결정적으로 발휘되는 글로써, 믿음에 관한 사도 바울의 수많은 글들이 인용되고 적용된다.
9) A. A. van Ruler, “Glaube, IV” in RGG 3. Auflage. 2. (Tübingen; J.C.B. Mohr, 1986), 1598.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27
간에게 확증해 주는 권위를 행사한다. 믿음은 또한 교회의 설교와 가
르침(doctrina) 속에서 소명(vocatio)의 의미를 가진다. 소명을 통해 하
나님 자신의 은혜 안에서 믿음의 내용을 인간의 영에게 전달해 주시면
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자신과 연결시키시고 세상과 결별하도록
하신다. 이 부르심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또한 부르심과 함께 믿
음의 영감(inspiratio fidei)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일어난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언제나 믿음의 영감이 인간의 의지에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룰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의지에 믿음의 영감이 작용하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에 따라 기도와 약속 중에 주시고자 하
시는 그것을 바라는 겸손하고 열망하는 의지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믿음이란 마음의 태도이며 삶의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의지
의 동의이며 찬성하는 생각이다(cum assensione cogitare, consensio
voluntis est). 어쩌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믿음의 자세는 전
체 내적 구원의 과정의 일관된 토대이며 그렇게 머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믿음이 그와 같은 것으로서 더 이상 구원의 출발만이어서
는 안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믿음은 자라고 믿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사랑(caritas)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확실
하게 주장해야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이신 영원한 진리를 보는
데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 가운데 믿음은 자신의 궁극적 목표를 가지
고 성취한다.10) 이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에 대한 대략적 설명
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설명 중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믿음에
대한 설명이 “믿음이란 마음의 태도”라는 말이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믿음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혹은 하나님을 향해 나타내는
10) 앞의 책. 1598-1599.
12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마음의 태도로서 이를 성경적 용어로는 순종, 신뢰, 동의, 사랑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하나님과 인간
의 관계를 “향유와 사용”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표현 속에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
하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오늘
한국 개신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의 상태와 본질을 분석해 볼 수 있는
유익한 전거를 찾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2. 향유와 사용(frui et uti)
“향유와 사용”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 이해뿐만 아니라 인
간의 측면에서도 사실 상 인간의 믿음의 진위를 판단케 해 주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특히 그의 책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 1권에서 자세하게 소개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향유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을 그 자체 때문에
그 사물에 애착함이다. 사용한다 함은, 용도로 쓰이는 사물을 우리가
성취하기 원하는 것에,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에 결부시키는 것이다.”11)
라고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풀어서 설명해 나가는데, 고
향을 떠난 사람에게 고향이란 그에게는 향유의 대상인 반면, 그 고향
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타야 할 것은 사용의 대상이다. 만일 타야 하는
것에 정신이 빼앗겨 정작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지체한다면, 이는 향유
할 것과 사용할 것을 혼돈한 어리석은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가 행복
한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하면, 이 세상을 사용해야지 향유하면 안 된
다고 설명한다.12) 그렇다면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향유의 대상은 오
11)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4.4.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29
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13)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
리가 사용할 대상인 것이다.14)
하나님에 대한 향유의 사상이 그의 『고백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
용으로 표현된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
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
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
다.”15) 하나님을 즐기는 인생이 곧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다. 하나님
을 향유한다는 것이 좀 더 분명하게 표현된 곳은 고백록 제 2권의 서문
이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거짓 없는 기쁨, 복되고 안전한 기
쁨이 되신 주님, 당신께서 나의 기쁨이 되어 주옵소서.”16)라고 고백한
다.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이라는 고백이다. 여기서 참 신
앙과 거짓 신앙이 구분된다. 참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고 기
뻐하는 향유의 신앙인 반면, 거짓 신앙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통
해 얻게 되는 다른 것을 향유하고자 하나님을 사용하는 신앙이다. 다
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나의 목적이 아니라 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
님을 사용하는 신앙, 이런 신앙이 곧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나의 만족을 위해 우상숭배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복신앙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라
는 전도 문구 안에 복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나의 성공과 부귀영화
를 위해 신앙을 도구로 삼는다면, 이런 신앙의 대상의 하나님은 기계
12) 앞의 책. 4.4.
13) 앞의 책. 5.5.
14) 앞의 책 22.20.
15) 아우구스티누스, 선한용 옮김, 『고백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I.1.
16) 앞의 책, II.1.
13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신(Deus ex machina)에 불과할 것이고 이런 신앙이 곧 참 하나님을 거
짓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인 셈이다. 성경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
것(출 20:3)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점(마 6:24)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할 것(마 6:33)으로 일관되게 가르
치고 있다. 이런 가르침들은 모두 우리가 궁극적으로 향유해야 할 대
상과 한시적으로 사용해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구분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들이다. 이런 말씀에 대한 위배가 곧 우상숭배이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려는 인간의 타락한 욕심의 발로인 것이고 자기
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의 발현인 것(창 3:5)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20-23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향유
와 하나님의 사용의 의미를 더 자세히 규명해준다. 사도 바울은 로마
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
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
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
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
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
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모양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0-23). 여기
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만든 우상이란 향유의 대상인 하나님
을 인간이 자기의 욕심대로 사용하고자 썩어질 대상으로 바꾸어 놓아
자기의 의지대로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17)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향유의 대
상이 되시는 분으로서 이는 곧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실재(res)이심을
말한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영원하고 변하지
17) Voller Henning Drecoll, Augustin Handbuch (Tübingen, Mohr Siebeck, 2007), 428-429.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31
않는 실재를 허망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상숭배로 보았다.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란 인간이 피조물의 유한
한 조건을 뛰어 넘으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게 주어진 조건들을 인정하고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이와 달리 사용
이란 피조물에게 주어진 변하는 것들을 자기 자신(인간)을 위해 사용
하되 상대적인 가치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질서의 전도가 곧 우상숭배로서 썩어지지 아니할 실재
(하나님)를 썩어질 대상(피조물)으로 바꾸는 행위이다.18)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개하려는 바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
의 향유에 대한 사고의 절정이 “하나님이 곧 우리의 상급이시다”는 말
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최대의 상급은 우리가 그분을 향유하는 것이
며, 그분을 누리는 모든 사람이 그분 안에서 서로서로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19)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하나님을 향유하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 향유하게 될 절정의 상태를 말하되, 여기
서도 하나님 이외의 별도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만이 곧 우리의
보상이며 상급이며 기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왜곡된 천국의 상급 신앙에 대한 중요한 지침
자료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 기복신앙의 종말론적 결론은 곧 천국에서
의 상급 이론으로 등장했다.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의 수고에 비례해
서 차등적으로 상급을 누리게 된다는 사상으로 이것이야 말로 공로 사
상과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심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 많고 더 큰
상급을 위해 하나님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어서 하나님 외의 추가
적 상급을 지향하는 차등 상급 이론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그
18)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론”, 『신론』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한국조직신학회 기
획시리즈 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64-65.
19)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32.35.
13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런 자들이 후에 등장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상급임을 역설하고 있다. “당신 안에서만 내가 당신
과 내 자신을 즐겁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0)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의 말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던 고백이 담겨
져 있다.
III.사랑에 대한 분석
1. 사랑이란?
아우구스티누스의 삶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제가 은혜라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사랑이다.21) 그가 『고백록』에서 즐겨
사용하는 표현인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22)은 그의 인생 전체에
서 언제나 묻어 나오는 중심 개념이다. 그의 삶의 전체 여정은 사랑의
대상을 찾아서 달려온 삶이었다. 세속에 대한 사랑으로 학업을 시작했
고 어린 시절을 벗어나자마자 이성(異性)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정
욕에 사로잡혀 주체할 수 없는 갈망의 시절을 보내다가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 philosophia)에 눈을 뜨게 되고 이어서 진리를 추구하는 열
망으로 인해 마니교에 귀의하고 이어서 다시 신플라톤 철학의 도움으
로 더 높은 진리 체계를 추구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의 사
20)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X.2.
21)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사상에서는 인식이 구원의 중심기능을 차지했던 것으로부터
중기로 접어들면서 사랑으로 그 축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며, 대략 386-391년 시기로부
터 본격적으로 사랑으로의 집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Kurt Flasch, Augustin
Einführung in sein Denken (Stuttgart: Reclam, 1994), 138.
22)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II.2.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33
랑에서 참 진리의 빛을 찾게 되었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이 자기를 품어주시는
극진한 사랑의 경험을 하게 되어 인류의 성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늘 그를 지근에서 지켜보고 눈물로 기도했던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이 그를 지탱해 왔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자신이 걸어
온 이러한 사랑의 여정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
디에 있겠습니까?”23)라는 고백으로 압축적으로 표현되었다.
사랑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전적 고백에는 사랑에 대한 더
심층적 분석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사랑 이해에는 우선 가깝게
는 신플라톤주의의 갈망(appetitus)사상이 그리고 멀리는 플라톤의 에
로스(eros)사상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먼저 플라톤이 에로스이론을
그의 『향연』(symposium)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에로스
는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며, 아름답고 선한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구다. 이때 어떤 것을 갈망하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갈망하는 대상이 스스로에게는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199e/200b).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얻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로스에게는 아직 선한 것과 아름다움이
결핍되어 있는 까닭에 에로스는 현재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선과 아름
다움을 그리워하고 사랑한다(201c). 따라서 에로스는 근본적으로 자
기중심적인 특성을 지닌다.”24) 그러나 이 세상의 선과 아름다움이 계
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에로스는 더 완전하고 불변하는 대상을 찾아 끊
임없이 상승하게 되는데, 오직 변하지 않는 대상은 아름다움, 선 그 자
체이다. 이 상승을 통해 마침내 에로스는 아름다움 자체를 관조하게
23) 앞의 책.
24) 최원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신학”, 아우구스티누스, 『요한서신 강해』 (왜관: 분
도출판사, 2011), 28.
13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된다. 이 아름다움 자체와 합일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답
게 사는 길이다.25)
플라톤의 에로스의 개념을 이어받아 일자(一者)를 향해 상승하
는 원리로 설명하면서 그의 기저에 갈망이란 주제를 각인시켜 놓은 사
람이 바로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누스다. 그의 제자 포르피리우스가
스승의 사상을 정리하여 출간한 『에네아데스』에는 플로티누스의 에
로스에 대한 사상의 편린들을 살펴볼 수 있다. “에로스는 항상 자신과
는 다른 아름다운 것을 향해 질서 지워져 있으며, 마치 그리워하는 자
와 그리운 이 사이에 자리하는 ‘중재자’와 같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자의 눈이 사랑을 통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리운 이를 보
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26)(Enneades III. 5.2). 또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자신을 낳은 존재를 그리워하며 사랑한다. 또한 그 같은 사랑은
낳은 존재와 낳아진 존재가 유일하다면 그만큼 가장 크다 하겠다. 더
욱이 낳은 존재가 이른 바 최상의 존재라고 한다면, 달리 추구할 대상
이 없으니 반드시 그와 함께 존재하려 할 것이다. 다만 그와 다르다는
것으로써만 구별될 뿐이다”27)(Enneades V.1.6). 일자로부터 유출된
존재자로서 일자를 향해 갈망하면서 상승해 나가는 동력으로 에로스
를 이해한 플로티누스의 사고는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 형
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도움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배운 사상으로 이는 단지
악의 문제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의 전체 사상 체계라
고 할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그의 친밀감은 플라톤과 플로티
누스가 각자의 사상을 조금만 수정할 수 있었다면 그들이 모두 그리스
25) 앞의 책.
26) 참고, 플로티누스, 조규홍 옮김,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 선집』 (서울: 누멘, 2009).
27) 앞의 책.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35
도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평가로도 잘 드러난다.28)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에로스 개념을 수용한 아우구스티누스
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을 분석할 때 그것을 소유하려는 갈망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바른 의지는 선한 사랑이며, 그릇된 의지는 나쁜
사랑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랑이 욕망이며, 그
대상을 소유하며 즐기는 사랑이 기쁨이다. 마주친 것을 피하는 사랑은
공포며, 그 대상이 주는 타격을 느끼는 사랑은 슬픔이다. 따라서 이런
감정들은 사랑이 나쁘면 나쁘고, 사랑이 선하면 선하다.”29) 사랑으로
인간의 모든 심리를 표현해 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론이 마치 사
랑의 완벽한 변주곡처럼 다채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의 사랑론에 만
족할 수 없었다. 비록 에로스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법을 배
웠지만, 그 길에 결정적으로 결여된 것을 간파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
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려오시는 사랑(agape)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이
다. 최원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경험한 아가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
다: “에로스가 아름다움 자체를 향해 올라가는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인간에게 내려오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신약성경의 근본 관심은 사랑
자체를 향하는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분
의 사랑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
를 사랑하시어(I요한 4:10). 아가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인
간을 사랑하셨다(I요한 4:19 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아들 예
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안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분은
28) 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의 도성』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7), 22.27.
29) 앞의 책, 14. 7.
13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 목숨
마저도 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그 사랑은 인간을 향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하느님의 내리사랑,
이것이 아가페의 기본 특성이다.”30)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eros)과 인간
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agape)을 구분한다. 가난의 목마름
(indigentiae siccitas)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애의 풍요로움
(beneficentiae ubertas)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사랑이 구별된다.
전자는 인간의 비참함으로 말미암은 사랑(amor ex miseria)이며, 후자
는 하느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사랑(amor ex misericordia)이다. 이 구
분이 바로 에로스와 아가페이다. 에로스는 자기 존재의 결핍과 비참함
을 채우기 위해서 더 큰 존재를 사랑하지만, 아가페는 자비의 사랑의
응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죄 많은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바로 아가페다.31) 아우구스티누스가 비록 사랑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으로 구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사랑이란
진리를 향해 상승해 나가는 구원론적 요소를 지닌 것으로 여전히 이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내용이 문제
이지 사랑 자체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방편이 된다. 이러한 사랑이
해를 지닌 까닭에 그의 구원론에는 사랑이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믿음과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방금 확인한 것과 같이 사랑에 대한 이중적 구분은 사랑의 본질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되는 틀일뿐만 아니라 아
우구스티누스의 사랑 이해를 풀어가는 기본 방식이기도 하다. 이제 우
30) 최원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신학”, 34.
31) 앞의 책, 37.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37
리는 그의 대표적 사랑 구별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2. 자애와 탐욕(caritas et cupiditas)
플라톤과 플로티누스에게서 사랑을 의미했던 에로스란 단어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라틴어에서 사랑을 뜻하는 다른 단어들로
사용된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주로 아모르(amor)로 표현
했지만 이와 함께 딜렉치오(dilectio)라는 단어도 즐겨 사용했다. 그렇
다고 두 단어 사이에 내용상 구별을 설정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단어
자체의 의미 보다는 그 단어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긍정
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함께 사용했다.32) 이 말은 사랑 자체에는 가
치 부여를 하지 않고 사랑에게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 행동 자체가
아니라 다른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서 사랑에 대한 성격이 규명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 개념을 우선 사
랑하는 대상에 따라 사랑의 성격이 구별된다고 보았다. 사랑 자체가
갈망적 성격을 지녔으나 무엇을 향한 갈망이냐에 따라 거룩한 사랑을
나타내는 자애(caritas)와 세속적 사랑을 나타내는 탐욕(cupiditas)으
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관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모든 갈망은 확실한 대상과 연결되
며, 갈망은 대상으로 하여금 갈망하는 행위 자체를 일으킨다고 간주함
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목적 의식을 제공한다. 갈망은 그것이 추구하
는 대상, 즉 확실하게 주어진 사물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마치 운동이,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의해 방향이 규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33)
32)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 14.7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33) 한나 아렌트, 조안나 스코트, 주디스 스타크 편, 서유경 옮김, 『사랑개념과 성 아우구스
티누스』 (서울: 텍스트, 2013), 48.
13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그러면서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에 관한 한 문장을 인용한
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적고 있듯이 “사랑은 일종의 운동이며, 모든 운
동은 무언가를 향해 움직인다.”34) 이제 아우구스티누스가 문제 삼는
것은 ‘무엇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을 문제 삼는 것이
다. 올바른 대상을 그리워하고 열망하는 것이 사랑(amor, dilectio, caritas)
이고, 그릇된 대상을 열망하고 그리워하면 그것은 탐욕(cupiditas)이
다. 사랑은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탐욕은 아래를 향하여 내려간다.35)
인간은 자기충족성이 결여된 존재로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
우려고 갈망한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그 갈망을 충족시키려 하느냐
에 따라서 그의 본질이 결정된다. 이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인
간에 대한 질문은 사랑에 대한 질문으로 귀착된다. 인간이 누구냐를
알려면 그가 무엇을 사랑하느냐를 알면 된다.36) 세상을 향해 자신의
갈망을 채우려 할 때 그는 세상에 속한 존재로 전락하고 이런 갈망을
탐욕(cupiditas)이라 하고, 반대로 불변하고 영원한 것으로 채우려 할
때 인간은 영원에 참여하게 되며 이런 갈망을 자애(caritas)라 한다. 이
때 인간의 본질은 없어질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세상에 속한 존재가
된다.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소속을 결정짓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
며 영원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자애인 반면 이 세상을 선택하는 결
정이 탐욕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인간의 구원을 결정하는 수단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자애의 절정은 “하나님에 대한 애
착”(inhaerere Deo)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amore
34) Saint Augustine, Eighty-Three Different Questions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Press, 1982), 35.1.
35) 최원오, 40.
36) Kurt Flasch, Augustin Einführung in sein Denken (Stuttgart: Reclam, 1994), 138.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39
inhaerere)을 뜻하는 이 말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간격이 사
라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에게 완전히 밀착된 상태로서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찾게 되는 완전한 일치를 표현하는 말이다. 아우구스티
누스가 “당신은 우리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
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ad te)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편안하지 않습니다”37)라고 고백했
을 때의 그런 상태다. 하나님에 대한 애착은 단지 자애의 절정만이 아
니라 동시에 향유의 절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디 아우구스티누스는
향유를 정의하길, “어떤 사물 그 자체 때문에 그 사물에 애착함이
다”38)라고 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강렬한 향유는 애착으로 이어지
고 그 결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의 긴밀한 연합이 사랑뿐
만 아니라 향유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
어서 향유와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다가가는 같은 길인 셈이
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믿음과 사
랑을 분리시킬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
3. 하나님 사랑(amor Dei)과 자기 사랑(amor sui) 그리고 이웃사랑
일반적으로 하나님 사랑은 선한 사랑이고 자기 사랑은 악한 것이
라고 알려져 있다. 하나님 사랑은 자애와 하나님 향유와 관련되는 반
면 자기 사랑은 자기애로서 탐욕 및 죄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
론 그런 면이 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양자는 언제나 상호 대립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사랑하게
37)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I.1.
38)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I.4.4.
14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되고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비밀이 이
안에 담겨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
면 이는 하나님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음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 본성에 박혀 있는 대로 자기
를 사랑하더라도, 사실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 해로운 일을 하며, 자기를 원수 같이 공격하기 때문
이다.”39)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하
나님을 사랑하는 것 안에서 찾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다시금 그의 향유와 사용이론이 등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
은 누구라도 자신을 향유해서는 안 된다. 똑똑히 지켜본다면, 자기 자
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향유해야 하는 그
분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생명을 다
하여 불변하신 생명께로 향하고 애정을 다하여 그분께 매달린다면 가
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만일 누가 자신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다면 자기를 하나님께 결부시키지 않는 것이며 자신을 향해 돌
아서는 것이지 불변하는 다른 것에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다.”40) 우리
가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지 않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찾았다면 이것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말하는 내용이
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선순
39) 아우구스티누스, 김종흡 옮김, 『삼위일체론』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7),
XIV.14.18.
40)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 교양』, I.22.23.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41
위가 다른 것들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들을 포함하
기 위함이라는 데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사랑의 질서 안에서
모든 계명의 완성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통합되고 자기 사랑이
라는 축에서 두 계명이 서로 만나는 신비로운 연합이 일어난다. “네 마
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
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계명의 목표는 사랑이고 그
이중의 (사랑),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만일 그대 자신을
전인으로, 즉 정신과 육체로 생각한다면, 또 이웃을 전인으로, 즉 정신
과 육체로 생각한다면―무릇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계명에서 (그대가) 사랑해야 할 사물 그 어느 것도 빠져 있지 않
다. 하느님 사랑이 앞서고, 하느님 사랑의 정도가 다른 모든 것이 (하느
님께로) 수렴되게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대 (자신에 대한) 사랑에 관
해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네 이웃을 너 자신처
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그대 자신에 대한 사랑도 간과하지 않
았음을 즉시 (알 수 있다).”41)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이웃사랑을 사
랑의 질서와 자기 사랑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
랑의 온전함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함으로도 설명한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
리 생명의 어떠한 부분도 빈 채 남겨 놓지 말라는 것이고 (그분 말고는)
다른 어느 사물도 향유할 자리를 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무
엇이 사랑받으려고 정신에 가까이 오면 사랑의 모든 충동력이 흘러가
는 그곳으로 끌어가야만 한다. 누구든지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는 사람
은, 그 사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41) 앞의 책, I.26.27.
14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사랑하도록, 그와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남을 자신처럼 사랑
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께 대
한 사랑에로 수렴시킨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어느 물길도 자
체에게서 떨어져 감을 용납 안 하며 그 물길이 돌아서 (그 사랑이) 감
소됨도 용납하지 않는다.”42)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양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통합의 주제이며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함께
가는 주제였다. 훗날 종교개혁적 신앙을 편협하게 논의하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사랑이 믿음이며 이웃 사랑은 사랑이라서
그 둘 중 하나님 사랑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고육지책의 선택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V. 믿음과 사랑의 관계
1. 은혜의 선물로서의 믿음과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사랑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사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믿음은 칭의와 관련
되고 사랑은 성화와 관련된다는 주장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
게 믿음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더 특이한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만 사랑에
대해서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먼저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설
42) 앞의 책, I. 22.21.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43
명을 들어보자. “우리의 고백이 겸손, 공순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경건하며 진리에 합당합니다. 우리는 생각하면서 믿으며,
생각하면서 말하며,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행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길과 참된 경배에 관해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자신에게서 났다고 생
각해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
입니다(고후 3:5).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힘대로 되지 않는다’
고 암브로시우스는 말하고, 따라서 그는 또 ‘항상 마음이 위로 올라가
는 행복자는 누군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라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경이 ‘주께
도움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주여 그 마음에 올라가는 길이 있나
이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시 84:5, 70인역: Ambrose, on the
Fight from the World, 1).43) 암브로시우스까지 인용하면서 아우구스
티누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우리의 믿음의 불
가능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과 주도적 성격을 강조했을 때는 펠
라기우스파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종하게 되어 계속 복종하는 사람들이 예정되었다는 것을 그들은(펠
라기우스파) 고백하려 하지 않지만, 은혜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의
지보다 먼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다만 그들은 진리가 선언하는
대로 은혜는 거저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에 반대하는 펠라기우
스파의 오류에 따라, 은혜는 먼저 있은 의지의 공로에 대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는 또
한 믿음보다도 먼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믿음이 은혜보다 먼저 있
다면, 의지 없이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확실히 의지도 은혜보
43) 아우구스티누스,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33.
14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다 먼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의지보다 먼저 있으므로, 은혜
는 모든 복종보다 먼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랑보다 먼저 있습니
다. 이 사랑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참으로 즐겁게 복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은혜를 받는 사람 안에서 은혜가 이루며, 은혜는
그들에게서 이 모든 일보다 먼저 있습니다.”44)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견인론을 전개하는
경우다. 역시 펠라기우스파와 논쟁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여러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믿음의 시초와 동시에 끝까지 계속
하는 견인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주장합니다.”45)라고 함으로 진정으
로 은혜의 교사(Doctor of Grace)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앞서도 잠깐 소개되었지만 은혜가 믿음에 끼치는 작용을 설명하는 가
운데 사랑도 동시에 언급된 바가 있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함께 맞물려 돌아가
는 특성을 보여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전체 작품 속에서 성경을 모두 42,816 차
례 인용했다고 한다.46) 그것도 거의 대부분을 암기한 채로 말이다. 그
런데 그 중에서 로마서 5:5을 무려 201번이나 인용했다고 한다. 그 말
씀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에 부은바 됨이니”이다. 이 말씀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감동과 영향을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과 의
문에 대하여』에서 이 본문으로 믿음과 사랑을 은혜의 빛으로 동일하
게 설명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법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44) 앞의 책, 41.
45) 앞의 책, 54.
46) 피터 브라운, 차종순 옮김,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2),
46.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45
우리에게 올 때에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
에 사랑이 부어진다고 합니다(롬 5:5).”47) 그에게 사랑은 하나님이 우
리 마음에 부어주신 선물(caritas infusa)이었다. 우리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
을 부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분이시
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amare Deum de Deo).48)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삶의 방식으로도 소개한다. “성경이 증
언하는 것과 같이, 덕성인 사랑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우리 자신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사랑은 하나님께 속
한 것이니(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
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
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 8)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성경
에 있는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라
는 말씀과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났음이라’(요일 3:9)는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을 원칙으로 삼을 때입니
다.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악
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3:5). 그러므로 사람이 죄
를 지을 때에는 반드시 사랑(caritas)에 따른 것이 아니고, 그 때마다
정욕(cupiditas)에 따라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심성을 따
르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닙니다.”49) 아우구스티누스
는 사랑을 하나님의 은사로 볼 뿐만 아니라 그 은사를 행사하는 사람
47) 아우구스티누스, 『영과 의문에 대하여』, 25.
48) 최원오, 42.
49)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에 대하여』 I. 22. XXI.
14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들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사와 은사를 행사하는
삶을 일치된 모습으로 바라볼 때 여기에 믿음과 삶의 균열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 이해는 이제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Dilige, et quod vis fac)”50)라는 격언으로 등장한다. 얼핏 보면
무책임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 말 속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된 자가 그 다음에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외에는 다른 일이 없
음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한 선포인 것이다. 사랑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선언이라 하겠다.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롬 5:5 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성경 본
문은 갈 5:6일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은 그가 믿음
과 사랑의 관계를 말할 때마다 어김없이 인용하는 성경이다. 그의 주
요 작품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이 구절을 사
용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그가 믿음과 사랑을 어떤 관계
에서 바라보았는지 아울러 분석하고자 한다.
우선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언급할 때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이 구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
우에는 단지 다른 의도 없이 믿음은 원래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50) 아우구스티누스, 최익철 옮김, 이연학, 최원오 해제 역주, 『요한서간 강해』 (왜관: 분도
출판사, 2011), 7.8.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47
라는 전제로 단순히 믿음을 언급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예로는 『영과
의문에 대하여』 26항에 등장하는 내용으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
음이(갈 5:6) 있는 사람은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이다. 또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5항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
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시초가 일단 마음에 침투하게 되면, 마
음은 순결한 생활을 통해서 직접 보는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
다”라고 언급하는데, 여기서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표현은
단순히 믿음을 언급하기 위한 의례적 소개 정도로 보인다. 그만큼 아
우구스티누스에게는 믿음은 너무나도 당연히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
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뿌리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또 다른 경우로
는 믿음과 사랑을 모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과정 중 서
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사용한 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즐겨 인
용했던 롬 5:5이 갈 5:6과 함께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경
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으며, 눈으로 보는 경지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게 될 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
사하며, 이 사랑은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
의 의지만으로 족하거나 또는 율법의 문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께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기 때문입
니다.”51) 이 말씀을 풀어 보면, 우리가 영원한 실재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믿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 믿음이 그때까
지 작동을 하려면 그 안에서 사랑, 즉 영원한 실재이신 하나님을 사랑
하는 마음이 활발하게 기능해야 하되, 그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
51) 아우구스티누스, 『영과 의문에 대하여』, 59.
148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에 부어주시는 은혜라는 점이다.
방금 전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서의 “사랑”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언급이라면 다음의 경우는 신앙인의 실천을 주제로 삼은
경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서신서 강해에서 모두 두 차례에 걸
쳐서 갈 5:6을 인용한다. 그 첫 번째 경우에서 사랑은 믿음의 실천을 요
구한다고 확실하게 언급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
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1요한 5:1). 예수님께서 그리스
도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대로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러나 실천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실천이 바로 사
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52)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일서 5장 1-3절을 본문으로 열 번째 강의
를 하는데 같은 강의에서 갈 5:6을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은, 월계관을 사랑해서
가 아니라 벌이 두려워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마귀들도 벌
받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믿음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그
믿음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이 될 것입니
다. 그대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을 찾아냈고, 예루살렘 시민을 찾아냈
으며, 천사들의 시민을 찾아냈고, 길에서 한숨짓는 나그네를 찾아냈
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십시오. 그는 그대의 길동무입니다. 그와 함께
달리십시오. 그리하면 그대도 그처럼 될 것입니다. ‘낳으신 분을 사랑
하는 사람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신 분도 사랑합니다.’ 낳으신 분은 누
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나신 분은 누구입니까? 아드님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드님을 사랑한다는 뜻
52)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강해』 열째 강해 1.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49
입니다.”53)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바울
과 요한이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함께 살펴보았는데 두 사도는 모두 믿
음과 사랑을 동반자 관계로 보고 있음을 확인했다. 비록 표현은 달라
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란 생각에서는 두 사도가 동일한 생각
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
고 우리의 이웃까지 포함하여 상황과 문맥에 따라 변화하면서 모두를
포용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공교롭게도 라틴어 성경은 갈 5:6의 “사
랑”을 caritas로 번역하고 있기에,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라틴어성경
의 번역자는 아니더라도. 그의 자애(caritas) 이론에 하나님 사랑과 이
웃 사랑이 모두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갈 5:6의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
신학과 씨앗의 법칙(rationes seminales)을 원용하여 해석해 볼 수 있
다. 씨앗의 법칙이란 씨앗(seed)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나무(tree)도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씨앗으로부터 출발하여 나무로 변화해 나가
는 과정도 하나님의 창조라는 설명이다. 즉 “씨앗과 나무라는 대상을
넘어서, 씨앗과 나무를 연결하는 함수(mapping)를 하나님의 창조 작
품으로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54)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에
적용하였던 씨앗과 나무의 법칙을 구원에 사용되는 믿음과 사랑에 적
용해 보면, 믿음과 사랑은 각각 하나님의 은사를 설명하는 1차 술어이
다. 그런데 믿음과 사랑 각각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 이 두 은사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에 대한 2차 술어를 설명하는 중, 우리는 역시 아우구스
53) 앞의 책, 열째 강해 2.
54) 현우식,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 신학” 「한국조직신학논총」 40. (2014.12): 265.
150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티누스가 소개했던 씨앗의 법칙을 활용할 수 있다. 씨앗으로부터 출발
하여 나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창조의 일관된 사역 안에서 변화가
진행되듯이, 가능 상태로서의 믿음은 그 믿음이 온전히 실현되는 상태
로서의 사랑으로 변화한다.55) 사실 이러한 설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과 봄의 관계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다. 믿음과 사랑은 별개의 은
사가 아니라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완성되는 관계에 있으며 믿
음이 가능태라면 사랑은 실현태에 해당된다. 따라서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에서 등장하는 믿음과 사랑의 관계는, 믿음이 자신의 완성
된 표현을 말하려 한다면 반드시 사랑으로 그 믿음이 역사해 나갈 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렇듯 믿음과 사랑은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함께 완성해 나가는 연속적 관계 속에 있는 주
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이 참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보았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에 대한 판단은 사랑의
실천으로 결정된다는 말이다.
V. 결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이 대립관계가 아니라
참 믿음과 거짓 믿음,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이 문제였음이 밝혀졌다. 오
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을 설명했던 향유와 사용개념이 그가 사
랑을 말할 때도, 즉 caritas와 cupiditas 그리고 amor Dei와 amor sui에
55) 앞의 책, 265.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51
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되었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믿
음”과 “사랑”이 문제였고 오히려 “믿음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동일
한 은사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루어가는 동일한 길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개신교의 신앙의 위기는 “믿음이냐 사랑
이냐?”, 혹은 “믿음이냐 삶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사
랑 그리고 믿음과 삶을 분리해서 생각한 결과, 오히려 믿음 자체가 무
너졌고 사랑 자체가 사라진 믿음의 위기와 삶의 위기 속에 빠져 있다
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질문은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냐?” 그리고
“우리의 삶이 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냐?”를 물어야 하며, “참 믿음은
참 사랑으로 역사하고, 참 사랑은 참 믿음으로 시작된다”고 말해야 한
다. 오직 우리가 물어야 할 믿음과 사랑의 바른 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바울이 가르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재차 강조했던,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만이 올바른 답변이다.
종교개혁 당시에 믿음과 사랑의 선택의 기로에서 종교개혁자들
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물었다면, 이제는 믿음과 사랑의 통합을 위해
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다시금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
로부터 새롭게 배우는 것이 현재의 한국교회 개신교의 신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안으로 제안해 본다.
152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참고문헌
1차 문헌
Augustinus./ 성염 역주, De doctrina christiana, 『그리스도교 교양』, 왜관; 분도출판사,
2011.
Saint Augustine, Eighty-Three Different Questions,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Press, 1982.
Augustinus./ 김종흡 옮김, Enchiridon,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하여』, 서울: 생명의말씀
사, 1990.
아우구스티누스./ 김종흡 옮김,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
앙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_______./ 선한용 옮김, 『고백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_______./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왜관: 분도출판사, 2011.
_______./ 김종흡 옮김, 『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
과 신앙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_______./ 김종흡 옮김, 『삼위일체론』,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7.
_______./ 김종흡 옮김, 『영과 의문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론과 신앙론』. 서
울: 생명의 말씀사, 1990.
_______./ 최익철 옮김, 이연학, 최원오 해제. 역주, 『요한서신 강해』 왜관: 분도출판사,
2011.
_______./ 조호연, 김종흡 옮김, 『하나님의 도성』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7.
2차 문헌
브라운, 피터. 차종순 옮김,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2.
아렌트, 한나. 조안나 스코트, 주디스 스타크 편, 서유경 옮김, 『사랑개념과 성 아우구스
티누스』. 서울: 텍스트, 2013.
정홍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론”, 『신론』.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한국조직신학회 기획
시리즈 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최원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의 신학”, 『요한서신 강해』 왜관: 분도출판사, 2011.
칼빈, 존.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역, 『기독교강요』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플로티누스, 조규홍 옮김,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 선집』 서울: 누멘, 2009.
현우식,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 신학,” 「조직신학논총」 40. (2014,12): 245-274.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53
Arendt, Hannah. ed. Joanna Vecchiarelli Scott & Judith Chelius Stark, Love and Saint
Augustin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Flasch, Kurt. Augustin Einführung in sein Denken, 2. Aufl. Stuttgart: Reclam, 1994.
Bernd Wannenwetsch, “Caritas fide formata,” Kerygma und Dogma 46.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0.
Drecoll, Voller Henning. Augustin Handbuch, Tübingen, Mohr Siebeck, 2007.
Ruler, A.A. van. “Glaube, IV” in RGG 3. Auflage. 2. Tübingen; J.C.B. Mohr, 1986.
Platon, Symposium.
154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국문 초록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재조명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가톨릭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에 결정적
인 영향을 준 서방 교회의 교부이다. 그의 사랑론이 로마가톨릭의 구
원론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의 은혜론은 종교개혁 신학자들에게 지대
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에서 사랑과 믿음은 결코 대립적
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신앙 생활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
다. 그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가 믿음과 삶의 괴리이다. 종교개혁 신학
이 편협한 구원론을 지향할 때, 믿음과 삶은 분리되어 나간다. 이런 위
기는 종교개혁 신학의 왜곡된 부작용이라 하겠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이 논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과 사랑을 연구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의 선물이다.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참 믿음과 거짓 믿음 그리고
참 사랑과 거짓 사랑이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frui)으
로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uti)으로 표현되었고, 마찬가지
로 참 사랑은 자애(caritas)로, 잘못된 사랑은 탐욕(cupiditas)으로 소
개되었다. 그는 믿음과 사랑의 바른 관계를 언제나 갈 5:6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서 보았다. 믿음은 사랑의 시작이며 사랑은 믿음의
열매로서 믿음과 사랑은 언제나 구원의 길을 동행한다. 믿음과 사랑은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55
종교개혁의 시기에 그리스도교의 두 진영이 믿음과 사랑의 분리
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해석했다면 이제는 믿음과 사랑의
화해를 위해 다시 그로부터 배우기를 소망한다.
156 한국조직신학논총 제41집(2015년 6월)
Abstract
Reexamining of the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Love from the View of St. Augustine's Theology
Chung, Hongyul
Professor
Asia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Yangpyeong, Korea
Augustinus is the church father who has exercised a decisive
influence upon the foundation of both catholic and reformed
theology. Has his Agapelogy impacted the formulation of cathjolic
Soteriology then his Grace Theology has given a great influence to
the reformed theologians as well. However, on no account the
theme of love and faith are portrayed as antagonistic. Currently
the churches in the Korean reformed circle are facing a serious
crisis. And one of the core causes of that is the perilous gap
between faith and life. When the reformed theology pursues a
shallow Soteriology, faith and life breaks on apart. one may argue
that such a critical situation is a side effect of a distorted reformed
theology. In light of this, the present paper proposes an
Augustinian concept of faith and love as a scheme to tackle the
crisis.
정홍열|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서 본 “믿음과 사랑의 관계” 재조명 157
To Augustinus, faith and love are both the gift of God's grace.
What has disturbed him was the problem of true and false faith, as
well as true and false love. The true faith was explained in terms
of delighting God(frui) while the idolatry was utilizing God(uti).
Likewise, the true love was presented as an affection(caritas) and
the false as an avarice(cupiditas). He always viewed the proper
relationship between faith and love in light of Galatians 5:6, “faith
working through love.” Faith is the beginning of love and love is
the fruit of faith. As such faith and love goes together in the trail
of salvation. Faith and love never separates to each other.
If there was an attempt during the Reformation period to
interpret the Augustinian theology for the sake of a separation
between faith and love, now one hopes to relearn from him for the
sake of their reconciliation.
'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슬픈 현대: 글로벌 시대의 종교와 평화르네 지라르의 최근 저작『클라우제비츠를 완성하다』를 중심으로/정일권.한동대 (0) | 2019.05.28 |
|---|---|
| 폴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에 관한 연구― 개신교원리를 중심으로/황민효.호남신학대 (0) | 2019.05.28 |
| 고전 유신론과 기독교 신학/박영식.서울신학대 (0) | 2019.05.28 |
| 칼 라너의 공리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김옥주.한세대 (0) | 2019.05.28 |
| 몰트만의 만유구원론에 대한 고찰(이찬석/협성대) (0) | 2019.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