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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중심으로/崔台崗.한림대



1. 머 리 말
2. 러-일 간 역사적 국경구분
3. 쿠릴섬에 대한 국제합의
4.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쿠릴섬의 지위 결정과정
5. 맺 음 말



“일본은 쿠릴섬과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의 결과로 주권을 획
득한 사할린의 일부 및 그에 인접하는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제2조 c항).


1. 머 리 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San Francisco Peace Treaty)에서 쿠릴섬 이양은



218 軍史第74號(2010. 3)


2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이 조약에서 일본이 어느 국가로 이 영
토를 이양해야 하는지 구체화되지 않았다. 둘째로 이 조약은 이들 영토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해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남쿠릴섬(북방영
토)” 문제로 알려진 러-일 간 영토문제의 원인과 관련 있다. 첫 번째 사항
에 대해, 일본은 이 조약에 명시한 영토를 포기하기로 합의했지만, 이 조약
에는 이것을 특별히 소련 측에 포기한다고 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소련은
이 조약에 서명도 하지 않아, 당사자도 아니다. 따라서 국제법상으로 이들
섬들이 어디에 귀속되어야 하는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항은 쿠릴섬과 관련된 것으로, 일본정부는 북방 4도(쿠나시리, 에토
로후, 시코단, 하보마이)를 이 조약에서 포기한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현재까지 북방 4도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4년이 지나고, 냉전이 종식된 지 20년이 흘렀
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국 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 가
장 큰 장애가 바로 쿠릴섬 문제다. 현재 러-일 간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쿠릴섬은 러시아에서 남쿠릴섬이며, 일본에서는 북방영토라고 한다. 이 분
쟁섬은 태평양과 오호츠크해를 분리하는 캄차카와 홋카이도 사이에 펼쳐진
쿠릴열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이들 섬의 총 면적은 5,036평방킬로
미터로 쿠나시리(1,499)와 에토로후(3,184)가 전체의 93%를 차지하고, 나
머지 2도인 시코단(253)과 하보마이(100)는 전체 7%에 불과하다. 이들 섬
들에 대한 러-일 분쟁에 있어 몇 가지 전략적 요인들이 있다. 첫째, 이 분
쟁이 1945년까지 60년 동안 동북아 전역에서 일진일퇴하던 러-일 간 역사
적 경쟁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소련은 얄타합의
에 의해 쿠릴섬과 남사할린을 획득함으로써 마침내 이 경쟁이 자신에게 유
리하게 해결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현재의 현상유지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며 북방영토에 대한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1) 둘째, 이 분쟁섬은 안
보적인 측면에서 소련(러시아)에게 관심이 있다. 1945년 조셉 스탈린(Jo-


1) David Rees, The Soviet Seizure of the Kuriles (New York: Praeger, 1985), p. x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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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h Stalin)은 쿠릴섬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서 러시아를 위해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했다.2) 사실 1875년 우루프섬부터 북부 모
든 쿠릴섬을 러시아가 일본에 양도한 직후 러시아는 뒤늦게 이 섬의 전략
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러한 평가는 1880~1890년대 당시 쿠릴섬을 답사한
러시아 스테판 마카로프(Stepan Makarov, 1848-1904) 장군이 내린 것이
다. 그는 이 쿠릴섬이 태평양과 러시아의 극동 간 왕래를 지배한다고 인식
했다. 이들 섬의 주요 전략적 가치는 1941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 남
쿠릴섬 가운데 에토로후섬의 히도카푸만(Hitokappu Bay) 기지는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해군의 항모 기동부대를 위한 부두로서 사용되
었다.3) 셋째, 소련 관점에서 쿠릴섬을 일본에 양보한다는 것은 일본의 해
상 제해권과 미국 및 서방 해군력에 오호츠크해와 소련 극동항구들을 개방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쿠릴섬은 소련극동과 태평양에서
소련의 전략적 목표들의 중심에 있었다. 넷째, 남쿠릴섬 관련 분쟁지역에
대한 경제적 측면이다. 이들 섬 주변의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합류하는 곳
이라 주변에 풍부한 어자원을 자랑하며 세계 수산자원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다.4) 이처럼 이 당시 남쿠릴섬에 대한 소련의 장악은 자신에게 주요
한 전략적 이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소련의 경제적 지렛대 또
한 극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5) 마지막으로, 심리적 요인도 작용했다. 소
련은 1905년 러-일전쟁 패배로 영토를 상실한 것을 1945년 일본패전으로
그 영토를 회복했다고 보고 있다.6)


2) John J. Stephen, The Kuril Island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p.
208.
3) Ibid., p. 129.
4) Mark J. Valencia and Noel A. Ludwig, ‘Natural Resources of the Disputed Area’,
James E. Goodby, Vladimir I. Ivanov, Nobuo Shimotamai, eds.,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London:
Praeger, 1995), pp. 161-165.
5) David Rees, The Soviet Seizure of the Kuriles, p. xvii.
6) Rodger Swearingen, The Soviet Union and Postwar Japan (Stanford: Ho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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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이 논문의 중심 분석 대상인 러-일 영토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쿠릴섬의 양도에 대한 문제를 살펴본다. 특히 소
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 미-영-소 3국 지도자들 간에 있었던 쿠릴섬 관
련 국제합의와 미국중심으로 전후 평화조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일-러
의 다각적 관계 속에서 이 문제가 냉전시작과 함께 어떻게 변화⋅발전되어
쿠릴섬이 “미해결 영토”로 남아 있게 되었는지 논하고자 한다. 이 글은 왜
양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60여 년 동안 여전히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
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데 있다.


2. 러-일 간 역사적 국경구분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전후 일본 홋카이도 북쪽의 상실한 섬들인 북방
영토를 2가지로 정의(definition)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북방영토
는 모든 쿠릴섬, 시코단과 하보마이, 그리고 남사할린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이래 일본정부는 좀 더 제한된 정의로 남쿠릴섬(쿠나
시리, 에토로후) 2도와 홋카이도의 일부인 시코단, 하보마이로 국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남쿠릴섬에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뿐만 아니라 시코단과
하보마이도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북방영토는 이들 4도를 의미하게 된다.
일본은 이들 섬에 대해 1945년까지 자신들 이외에 어느 국가도 북방영토
4도를 지배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섬은 원래부터 일
본 영토의 일부였으므로 당연히 일본의 주권하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7)
2차 세계대전까지 쿠릴섬 관련 역사적인 러-일 경쟁과정에서 양국 간 국


Institution Press, 1978), p. 188.
7) David Rees, The Soviet Seizure of the Kuriles, p. xxi.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21


경 변경은 4번 있었다.8) 첫 번째 변경은 1855년 시모다(下田, 러일통상우
호)조약으로 에토로후(Iturup)와 우루프(Urup) 사이를 양국 간 첫 국경으
로 정했다.9) 그 배경을 살펴보면, 19세기 초 러시아는 이미 우루프와 에토
로후 섬 사이의 해협을 따라 영향권을 나누는 데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
다. 1821년 9월 4일 북태평양에서 러시아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알렉산드
르 1세 법령에 의해 러시아정부는 러시아 국경으로 우루프섬을 인정했다.
그러나 러시아 관할 영토에서 남쿠릴섬은 제외했다.10)
양국 국경은 니콜라이 1세의 승인에 따라 1853년 2월 24일 러시아대표
에르피미 푸차틴(Erfimi Putyatin) 제독과 일본과의 협상에서 이뤄졌다. 이
협상은 우루프섬의 남쪽 끝을 러-일의 사실상 국경으로 한다고 정의했으며,
이에 따라 우루프와 에토로후 섬 사이를 러-일 국경으로 하는 것에 동의하
게 된 것이다.11) 이 당시 러시아대표는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를 포함하는
쿠릴섬 전체를 주장했다. 일본 협상대표로 나온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
昭)도 비슷하게 모든 쿠릴섬을 주장하기도 했다.12) 1855년 첫 러-일 영토
분할의 순간에 남쿠릴섬의 소유 문제는 본질적으로 분쟁이 없었다. 쿠릴섬


8) 영토문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국내연구들 金泰恒, 「러일영토분쟁의 연원: 러시아측의
시각을 중심으로」, 중소연구 , 24권 1호(2000); 홍완석, 「러일북방영토문제: 그 역사와
전망」, 동북아연구 , 제5권(2000); 김진기, 「러일영토분쟁의 재조명」, 한국동북아논총 ,
제9권 제1호(2004); 김진기, 「영토분쟁 지역에 대한 일본정부 접근법의 비교연구」, 국
제지역연구 , 제9권 1호(2005) 참고.
9) Alexander Panov, Rossiya I Yaponiya: Stanovrenie I Lazbitie Otnochenii v Konche
XX Nachare XXI Veka (Moskva: Izvestiya Izdateristvo, 2007), p. 39.
10) David Rees, The Soviet Seizure of the Kuriles, p. 10; Hiroshi Kimura, The
Kurillian Knot: A History of Japanese-Russian Border Negotiations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 p. 21.
11) Alexander Panov, Rossiya I Yaponiya: Stanovrenie I Lazbitie Otnochenii v Konche
XX Nachare XXI Veka, p. 39.
12) Raymond C. Garthoff, ‘A Diplomatic History of the Dispute’, Goodby, Ivanov,
Shimotamai, eds.,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n,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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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국경은 획정되어 양국관계의 길은 열리게 되었지만, 사할린은 양국이
공유하기로 하여 국경 미해결로 남겨 두었다. 이로써, 러-일 간 전통적 의
미에서 힘의 균형은 동북아에 처음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 시
모다조약을 근거로 북방영토를 자신들의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국경 변경은 1875년 영토지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
(Petersburg)에서 러-일 대표들이 시모다조약을 개정하기로 합의했을 때이
다. 이 합의에서 우루프섬부터 북쪽 쿠릴섬들은 모두 일본에 이양되었고,
그 대가로 1855년 조약으로 공동 관리하던 사할린섬은 러시아의 영토에 들
어가게 되었다.13) 이 조약에 앞서 양국이 협상하는 동안, 일본은 사할린에
대한 주권 대가로 에토로후와 쿠나시리 절반을 러시아에 양도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단지 거래를 위한 자세에 불과했다. 자국 영
토의 일부로서 에토로후와 쿠나시리를 고려하던 일본의 경우는 시모다조약
의 규정에 공고하게 의존하고 있었다.14) 이 조약의 내용에 대해서 당시 일
본 내 여론으로부터 원래 일본영토인데 자국 영토와 교환한 것에 대한 불
만의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세 번째 국경 변경은 1904~1905년 사이 일어난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가 패하고 1905년 포츠머스(Portsmouth)조약이 체결되면서 일어났다. 프
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체결된 이 조
약에서 러시아는 사할린섬 남쪽 반을 포기함으로써, 앞의 두 조약과 달리
힘에 의한 영토변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이 국경은 임시정부시절과
1917년 혁명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 시기에도 계속되었다.15)


13) 1875년 페테르부르크(사할린-쿠릴 교환) 조약으로 이들 섬도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일본에 영토주장을 하지 않았다. Alexander Panov, Rossiya I Yaponiya:
Stanovrenie I Lazbitie Otnochenii v Konche XX Nachare XXI Veka, p. 40.
14) Wolf Mendl, ‘Stuck in a Mould: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the Soviet
Union', Kathleen Newland, e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Japan (London:
MacMillan, 1990), p. 176.
15) Ibid., p. 40.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23


러시아 혁명에 의해 소비에트정권이 새로이 출현하면서 러-일 간 일련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일본군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여
시베리아의 일본개입(1918~22)이 1922년까지 있었고, 북사할린 점령(1920
~25)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다. 1938년 두만강 유역의 조선과 소련국경에
장고봉사건(Chankufeng Incident), 그리고 1939년 만주와 몽골의 국경에
노몬한사건(Nomonhan Incident) 등으로 일련의 군사충돌이 있었지만, 국
경변화는 없었다. 소련은 내전에서 일본개입, 장고봉사건, 노몬한사건 등을
일본의 침략정책이라고 규탄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소련의 대일본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6) 이처럼 1855년과 1875년 조약은 양국
국경에 대한 타협의 결과였지만, 1905년 조약은 전쟁 패배로 인해 쿠릴섬
전체를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이 쿠릴섬의 일본소유에
대해 완전하게 합의 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쿠릴섬에 대한 소유문제는
또한 2차 세계대전까지 가게 되었다.
네 번째 양국 간 영토변경은 2차 세계대전 후 일어나게 된다. 태평양 전
쟁 말기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얄타합의를 근거로 1941년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을 위반하고 대일참전에 나서게 되었다. 8월 말~9월 초 북방 4도
를 점령하여 이들 섬을 일방적으로 소련 영토에 편입한 후 지금까지 관리
를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양국 간 분쟁의 중심은 남쿠릴섬 4도를 말하는
것이다. 러-일 간 영토분쟁의 본질에 있어 남쿠릴섬(쿠나시리와 에토로후)
은 쿠릴섬들에 포함되지 않는, 원래부터 일본영토라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
다. 때문에 이 섬은 얄타합의, 포츠담선언, 일본이 공식적으로 쿠릴섬에 대
한 주권을 포기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규정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이
다. 일본이 주장하는 또 다른 섬인 시코단과 하보마이는 역사적으로 홋카
이도의 일부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과 소련(러시아)은 쿠릴섬 문제


16) Semiyon I. Verbitskii, ‘Russian Perceptions of Japan’, James E. Goodby, Vladimir
I. Ivanov, Nobuo Shimotamai, eds.,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p. 63.
224 軍史第74號(2010. 3)


를 서로 달리 해석하고 있다. 일본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과거 국경조약들
을 통해 북방 4도는 일본 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소련은 이 문
제를 전시 중 연합국과의 합의(얄타합의, 포츠담선언, 샌프란시스코평화조
약)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다.17)


3. 쿠릴섬에 대한 국제합의
(1) 얄타합의(1945년 2월 11일)
쿠릴섬 문제와 관련 현재 이어지고 있는 분쟁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 출
발점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이루어진 연합국 간 비밀협정이다. 당시 3강
국(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일본이 패배한 이후 이 협정을 분명하
게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합의했다.18) 이 같은 합의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
약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섬에 대한 포기를 이끌어내게 된 것이다. 루즈벨트
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스탈린에게 이들 섬들이 대일참전에
대한 대가로 양도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3강 지도자들은 독일이 항복하고
유럽에서 전쟁이 종식된 후 2~3개월 내 소련이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연
합국 편에서 대일본 전쟁에 참전하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19)


17) Rodger Swearingen, The Soviet Union and Postwar Japan, p. 189.
18) Wolf Mendl, ‘Stuck in a Mould: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the Soviet
Union', Kathleen Newland, ed., The International Relations of Japan, p. 178.
19) Goodby, Ivanov, and Shimotamai,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n,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p. xxvi; William F. Nimmo, Japan and
Russia: A Reeval‎uation in the post-Soviet Era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Press, 1994), p. 16.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25


2. 1904년 일본의 배신적인 공격에 의하여 침해된 소련의 다음과 같은 종
전 권익은 회복될 것이다. 즉 (a) 남사할린 및 그 주변의 모든 섬들은
소련에 반환(returned)될 것이다.
3. 쿠릴섬들은 소련에 이양(handed over)될 것이다.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접근은 더 먼저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
의 진주만 공격 후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대일참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42년 8월에 아브넬 해리만(Averell Harriman), 소련주재 미국대사는 처
칠의 모스크바 방문 동안 소련의 대일참전에 대한 주요 임무와 함께 스탈
린을 만났다. 그러나 스탈린은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소련은 국력을 나치독일과의
전쟁에 전력하고 있었던 관계로 동시에 대일본 전쟁에 참여할 여력과 의
지를 가질 수 없었다. 둘째, 소련은 1941년 일본과 중립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것을 준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국 소련은 일본과 전쟁
중인 미국과 연합하게 되었고, 일본은 소련과 전쟁 중인 독일과 연합하게
되었다. 이 당시 소-일 양국은 자신들의 주요 적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
한 후에만 두 번째 적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노선을 취
했다.20)
1943년 말 전쟁의 판세가 변했다. 소련은 대독일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함으로써, 크렘린은 대독일전 승리 후 대일참전을 위해 연합국에 합류
할 의지를 나타냈다.21) 194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연합국의 외무장관들 회
담 시, 미 국무장관 콜델 헐(Cordel Hull)은 소련 측에 태평양에서의 전쟁
참여를 재차 요청했다. 소련 외무장관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는 확실한 의견을 말하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헐 국무
장관에게 소련은 독일에 승전한 후 대일전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22)


20) Haruki Wada, Hoppo ryodo mondai: rekishi to mirai (Tokyo: Asahi shinbun-sha,
1999), p. 144.
21) William Nimmo, Japan and Russia: A Re-eval‎uation in the Post-Soviet Era, p. 15.
226 軍史第74號(2010. 3)


11월 테헤란 미-영-소 3국 정상회담에서도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 다시 한
번 똑같은 약속을 했다. 스탈린은 극동에서 “대일 공동전선”이 펼쳐질 때
소련군은 그때 증강될 것이라는 것을 나타냈다.23)
전시 동안의 여러 국제합의는 소-일 영토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1941년
8월 “영토 불확대”의 대서양헌장 원칙을 설명한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
은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될 것이라고 규
정했다. 그러나 캐나다 워털루(Waterloo)대학 키미에 하라(君江美子) 교수
는 얄타합의는 “영토 불확대”의 원칙을 월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체 쿠
릴섬의 지위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러-일 간 합의된 두 개의 조약
(1855년 시모다조약, 1875년 페테르부르크조약)에 의해 결정된 것이고, 남
사할린은 “폭력으로” 일본이 쟁취한 지역들 가운데 해당되는 섬이라고 주장
하고 있다.24) 얄타합의에서 쿠릴섬들은 소련에 이양(handed over)한다고
되어 있지만, 남사할린은 반환(returned)한다고 명시함으로써 두 영토의
구별을 넌지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얄타회담 전, 미 국무성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발표할 브리핑을 준비했다.
이 블렉슬리(Blakeslee) 보고서에는 일본이 쿠릴섬 전체 가운데 남쿠릴섬
만을 소유해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국무성 실무진들
과 충분한 논의 없이 스탈린에게 모든 쿠릴섬 이양을 약속했다. 카이로선
언 발표 이후 열린 테헤란회의에서 미-소 지도자들은 소련의 대일본 참전


22) Joseph P. Ferguson, Japanese-Russian Relations, 1907-2007 (London: Routledge,
2008), p. 32; Tsuyoshi Hasegawa, ‘The Northern Territories Dispute and Russo-
Japanese Relations’, Vol. I, Between War and Peace, 1697-1985 (Berkeley,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International and Area Studies, 1998), p. 44;
William F. Nimmo, Japan and Russia: A Reeval‎uation in the post-Soviet Era, p.
15.
23)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New York: Routledge, 2007), p. 75.
24)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75.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27


대가에 대한 사할린과 쿠릴섬을 이미 논의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후 루
즈벨트는 태평양전쟁위원회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스탈린이 “사
할린 전부를 러시아로 반환하고, 시베리아로 통하는 해협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쿠릴섬을 러시아에 이양할 것”을 원했다는 것과 쿠릴섬은 대일전
참여에 대한 대가로 소련에 이양될 것이다.25) 쿠릴섬에 대한 얄타합의는,
미국과 영국이 최소의 희생으로 가능한 빨리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 소
련에게 일본전 참전에 대한 “보상(reward)” 또는 “대가(price)”를 제시한
것이다.26) 게다가 소련과의 협력은 새로운 전후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서도
국제기구의 중심적 의미가 있는 유엔연합을 확립하는 데 필요했다. 루즈벨
트는 아마도 미 국무성의 극동전문가들에 의해 준비된 정책안들을 따르는
대신에 그의 세계적 관점에서 쿠릴섬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27) 얄타합의에 대한 규정들은 1946년 1월 29일까지 밝혀지지 않았
다. 그때까지 쿠릴섬의 합법적인 주인인 일본은 이 합의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2)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
1945년 7월 26일 미-영-중은, 이후 소련(8월 9일)도 합류하여 일본이 항
복 시 받아들여야 할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연합국은 1914
년 제1차 세계대전 이래로 일본이 소유한 태평양의 모든 섬들을 상실하게


25) Document 11, Appendix D in Graham Allison, Hiroshi Kimura, and Konstantin
Sarkisov, eds, Beyond Cold War to Trilateral Cooperation in the Asia-Pacific
Region: Scenarios for New Relationships between Japan, Russia, and the United
States (Cambridge, Mass.: Strengthening Democratic Institutions Project, Harvard
University, 1992), p. 86.
26) Kimie Hara, Japanese-Soviet/Russian Relations since 1945: a difficult peace
(London: Routledge, 1998), p. 15.
27)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75.
228 軍史第74號(2010. 3)


될 것이며,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얻은 모든 다른 영토들도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방침을 나타냈다. 제8항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28)
카이로선언의 규정을 수행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큐
슈, 시코쿠 그리고 우리가 지정하는 작은 섬들로 제한될 것이다.
냉전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미-소 간 관계가 협력에서 대립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찾고 있다. 1945년 7월 포츠담회의에서 처음으로 변화가 드러나
게 되었다. 새로운 미-영 지도자들이 집권하면서, 독일은 패배했고, 일본과
의 전쟁이 거의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합국은 더 이상 힘 잃은 공
동의 적을 위해 연합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포츠담회담이 열리기 전인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성공적인 핵실험으로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일본과
의 전쟁이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29)
얄타에서 소련에 영토보상을 약속한 미국과 영국은 얄타합의를 따르지
않고 일본 측에 자신들의 최후통첩으로 “카이로선언의 규정”을 언급했다.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주권은 주요 4도와 “우리가 지정하는 작은 섬들”로 모
호하게 한정되었다. 그래서 쿠릴섬은 향후 해석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게
되었다.30)
미국의 새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과 제임스 번즈(James
Byrnes) 국무장관은 이미 미-소 간의 경쟁관계 속에서 일본을 보기 시작했
다. 번즈 국무장관은 가능하면 러시아의 참전 없는 전쟁 종식을 선호했다.31)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대일 참전을 결정했다. 포츠담회담 후, 대일참전 시


28) Wolf Mendl, Japan's Asia Policy: Regional Security and Global Interests, p. 54.
29) 1949년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한동안 미국의 핵독점은 없어지게 되었다.
30) W. Averell Harriman and Elie Abel, Special Envoy to Churchill and Stalin, 1941-
1946 (New York: Random House, 1975), p. 492.
31)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76.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29


작 첫날은 1945년 8월 10일로 정했었다. 그러나 첫 번째 핵폭탄이 히로시
마에 8월 6일 투하되자, 스탈린은 계획을 변경하여 원래 계획보다 2일 먼
저 8월 8일 대일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포츠담선언에 대한 약속을 지키면
서 소련은 대일본 전쟁을 선언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진입하게 되었다. 이
때가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이 투하된 8월 9일 오전 0시였다. 1945년
8월 14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항복하게 된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했을 때, 일본의 지도자들은 1895년 이래 일본의 정복으로 병합한 영
토들에 대한 상실을 예상했다. 하지만 이들은 쿠릴섬을 상실하리라고는 전
혀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남쿠릴섬이 항상 자신들의 소유로 있
었다는 것과 우루프섬부터 북쪽 쿠릴섬을 사할린섬의 교환 대가로 1875년
평화적으로 획득했기 때문이다.32) 더구나 이날까지 남사할린과 쿠릴섬들은
아직 소련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았다.
1945년 8월 16일 스탈린은 얄타회담 결정에 따라 전체 쿠릴섬을 일본의
항복지역에 포함되도록 하고 홋카이도 북부의 절반도 미국에 요구했다. 트
루먼은 쿠릴섬에 대한 양도에 합의했지만,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소련점령
은 거부했다.33)
소련군은 1945년 8월 11일 사할린의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릴섬 점령은 8월 18일 최북단 시무슈(Shimushu)섬부터 시작되
었다. 소련군은 8월 29일 남사할린을 점령하고, 8월 28일부터 9월 5일까지
북방 4도 모두를 점령했다. 일본이 8월 14일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항복
의 의도를 명확히 한 가운데 쿠릴섬들이 점령된 것이다.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는 도쿄만에서 서명되었다.34) 이후 1946년 2월 2일 쿠릴섬들은 소


32) John J. Stephan, The Kuril Islands: Russo-Japanese Frontier in the Pacific
(Oxford: Clarendon Press, 1974), p. 198.
33) 이 같은 스탈린의 역제안은 미국을 얄타합의에 응하도록 하여,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려
는 수단임에 분명했다. Hiroshi Kimura, The Kurillian Knot: A History of Japanese-
Russian Border Negotiations, pp. 49-50.
34) William F. Nimmo, Japan and Russia: A Reeval‎uation in the post-Soviet Era,
230 軍史第74號(2010. 3)


련영토에 편입되었고, 1947년 사할린과 쿠릴섬이 사할린주로서 독립행정단
위가 되어 현재까지 같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35)


4.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쿠릴섬의 지위
결정과정36)
1945년 항복문서 서명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 때까지 6
년 동안 미-소 대립은 고조되었다. 여러 차원의 군사 또는 정치 대립에 개
입함으로써 미-소 대립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전후 세계질서
구축과정에서 협력을 위한 얄타정신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미국의 대일
점령정책의 기본은 민주화와 동시에 철저한 비군사화였지만, 대소정책의
전환은 미국의 점령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서구의 독일과 함께
동아시아의 일본은 전략상의 핵심지역으로 분류되었다. 1950년 6월 발발한
6⋅25전쟁은 동아시아로의 냉전 확대와 동시에 대일안보조약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정책에 있어 일본의 위치는 종전의 적에서 이
제는 아시아 미국 방위전략의 토대로 크게 변했다. 일-소 간 영토문제는 이
런 배경으로 인해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p. 28.
35) Yukiko Kuroiwa, ‘Russo-Japanese Relations, stressed by Territorial Dispute',
Michel Korinman and John Laughland eds., Russia A New Cold War? (London:
Vallentine Mitchell Academic, 2008), p. 346.
36)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관한 국내연구들: 이석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의 쿠릴,
센카쿠섬의 지위와 독도분쟁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소고」, 서울국제법연구 , 9권 2호
(2002); 최장근,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영토조항에 관한 고찰-영토처리의 정치성에 관해
서-」, 日語日文學 , 제21집(2004) 참고.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31


(1) 일본의 평화준비
전쟁 직후 일본외무성은 평화해결을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준비하기 시
작했다. 문서 준비에 참여한 조약국장이었던 니시무라 구마오(西村熊雄)에
의하면, 일련의 영문보고서가 연합국 점령 기간 동안에 준비되었다. 영토문
제에 관한 보고서 7개 중 3개가 북방영토를 다루고 있었다. 북방영토에 대
한 보고서 작성은 “쿠릴섬(Chishima), 하보마이, 시코단”이 1946년 11월,
“사할린(Karafuto)”은 1949년 1월, “남쿠릴섬(Minami Chishima), 하보마
이, 시코단”은 1949년 4월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들은 일본에서
공개가 허용되지 않다가, 키미에 교수에 의해 1994년 호주 문서국에서 이
들 보고서의 복사본이 처음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37)
“일본영토 인접 작은 섬들: 쿠릴섬, 하보마이와 시코단”이라는 제목의
1946 팸플릿(booklets)은 “북방영토”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항
들을 새롭게 밝혀주고 있다. 왜 일본이 공개적으로 이것을 이용할 수 없도
록 했는지 그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팸플릿은 현재 일본의
“4도” 주장에 맞지 않은 일부 선언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놀라
운 것 중 하나는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쿠릴섬들에 포함시킨 것이다. 이
것은 현 일본 주장에 모순되는 것으로 쿠릴섬의 일부로서 이 2도를 자신들
스스로 인정한 것이 되었다.38)
당시 일본에서는 쿠릴섬 범위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왔다. 특히 시
코단과 하보마이 2도처럼,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2도는 쿠릴섬에 속하지 않
는다는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이 스스로 쿠릴섬의 일부로서


37) For the 1946 booklet, see Kimie Hara, New light on the Russo-Japanese Territorial
Dispute, Working Paper No. 1(1995), Department of International Relations,
Research School of Pacific and Asian Studi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Canberra, May 1995.
38)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79.
232 軍史第74號(2010. 3)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인정한 이 문서의 발견과 함께, 쿠릴섬의 범위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후 연합국은 “작은 섬들”을 명확히 하는 데 일본에
비우호적이었다. 1946년 얄타회담의 내용이 밝혀진 후, 논쟁이 되고 있는
“작은 섬들”은 당시 쿠릴섬들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섬들의 일본
영토 회복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체로 1946 팸플릿에 나온 일본정
부의 목표는 이 당시 시코단과 하보마이 2도반환이었다는 것을 나타낸 것
이다. 이것은 일본이 패전국이고 소련은 승리한 연합국의 일원이라는 현실
을 반영하여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2도 반환론”을 나타낸 것이다.
그 당시 일본 영토회복의 현실적인 목표는 “2도”였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1946 팸플릿은 일본이 이미 논쟁을 위한 토대를 준비했다는 것
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팸플릿은 “쿠릴섬들”로서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를 언급했지만, 이미 쿠릴섬들은 북부와 남부그룹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
래서 일본은 이 영토들을 나눠, 주장의 강도에 따라 3그룹으로 영토를 잃
을 염려가 있었다. 이 팸플릿은 첫째로, 하보마이와 시코단을 홋카이도의
일부로 하는 그룹, 둘째로,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를 쿠릴섬들의 일부로 하는
그룹, 셋째로, 1875년 이래 일본영토로서 나머지 쿠릴섬들을 나타내는 그룹
으로 구분했다. 그래서 1946 팸플릿에 들어있는 “영토반환”의 3그룹은 다음
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2도 반환론”: 시코단과 하보마이는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므로, 이들
섬은 일본소유로 남아있을 것이다. 얄타합의는 완전하게 준수한다.
② “4도 반환론”: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는 쿠릴섬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이 4도는 항상 일본 영토이었다. 이 섬들은 얄타에서 소련에 약속한
쿠릴섬의 나머지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4도는 별개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얄타합의는 부분적으로 준수한다.
③ “모든 쿠릴섬 반환론”: 비록 일본은 포츠담선언(8월 15일)을 수락했
고, 항복문서(9월 2일)에 서명했지만, 얄타합의는 그 당시 드러나지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33


않았다. 그래서 일본은 얄타합의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일
본은 “영토 불확대”원칙을 행사할 것이고, 쿠릴섬은 전쟁의 결과로서
일본이 소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 섬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정부는 쿠릴섬 반환에 대한 입장을 더욱 분명히 밝히게 되었
다. 먼저 전후 쿠릴섬에 대해 홋카이도 의회는 북방 4도의 반환을 요구하
는 첫 조치를 1946년 통과시켰다. 특히 남쿠릴섬 반환에 중점을 둔 것은
쿠릴섬들 가운데 이들 4도에 이전 거주민들의 90%가 살았고, 러시아가 한
번도 지배하지 않은 영토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9년 12월 22일 일본 의
회 외교분과위원회에서 북방영토에 대한 정부의 첫 입장을 밝혔다. 이 성
명은 얄타의 합법성을 거부하고, 남쿠릴섬과 남사할린에 대한 일본의 권리
를 주장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946-47, 1948-54 수상재임) 수상은
한 달 후 이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처음으로 일본 지도자가 북방영토
회복주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후 일본정부는 요시다 수상이
말하는 쿠릴섬은 단지 우루프와 캄차카 사이의 섬들을 의미한다는 것과 일
본이 포기했던 쿠릴섬에서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는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39)


(2) 미국정부의 연구와 안들
미국정부의 일본영토 양도에 대한 연구는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연구 가운데, 쿠릴섬에 관한 T-322문서는 1943년 5월 24일 준비되었
고, 미국 국무성 영토소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 T-322는 쿠릴섬을 위한 5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① 소련에 이양, ② 소련에 이양 또는 쿠릴섬


39) John J. Stephan, The Kuril Islands: Russo-Japanese Frontier in the Pacific, p.
199.
234 軍史第74號(2010. 3)


최북단 섬들인 시무슈와 파라무시로 2도(Shimushu, Paramushiro)의 국제
화 그리고 나머지는 일본의 소유, ③ 국제관리, ④ 일본에 의한 조건부 소
유, ⑤ 계속 일본 주권유지. 국무부 내에 쿠릴섬에 대한 의견들이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토소위원회는 특별한 하나의 안을 추천하
지 않았다. 그러나 1943년 11월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쿠릴섬들
의 이양을 논의했다. 얄타회담 전 루즈벨트을 위해 준비된 한 브리핑은 원
래부터 일본의 영토를 고려하여 일본이 남쿠릴섬을 보유해야 한다고 제시
했다. 이 간략한 보고서인 블랙슬리(Blakeslee) 보고서는 1944년 12월 28
일 나온 CAC-302이다.40)
얄타합의가 밝혀진 후 1946년 2월 1일 미 국무성의 부서 간 지역위원회
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섬의 양도와 쿠릴섬에 대한 재정의가 논의되었다. 또
한 쿠릴섬과 남태평양의 4개 섬나라인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섬 간
거래가 고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쿠릴섬에 대한 정의 문제에 대해 이 위
원회는 합의안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위원회는 거래를 위한 추천
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1946년 6월 24일 SWNCC 59/1는 국
무성에서 준비되었다. 이것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남사할린
과 이에 인접한 섬들은 소련에 반환한다. 쿠릴섬은 얄타합의에 의해 소련
에 이양한다는 것이다.41)
초기 안들로는 1947년 3월, 7월, 8월 3개 안과 1948년 1월 1개 안이 있
다. 1947년 3월안은 국무성에서 준비되었다. 이 안은 얄타합의에 따라 소련
에 쿠릴섬을 이양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즉 일본의 영토범위에서 쿠릴섬
은 제외되었다. 1947년 7월안은 쿠릴섬을 어느 국가에 줄 것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42)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2도를 쿠릴섬의 일부로 인정했다. 그러


40)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p. 80-81.
41) James F. Byrnes, Speaking Frankly (London: Heinemann, 1947), pp. 220-221.
42) Hiroshi Kimura, The Kurillian Knot: A History of Japanese-Russian Border Negotiations,
p. 61.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35


나 1947년 8월안은 7월안과 달리 쿠릴섬에서 쿠나시리와 에토로후 2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쿠릴섬은 4도를 제외한 우루프부터 북쪽 섬들로
제한했다.43) 미국은 일-소 간 전쟁상태가 종식되기를 원했지만, 얄타합의
를 준수할 의사는 없었다. 1948년 1월안에서 4도의 이름은 일본의 영토범
위에서 제외되었다. 이 안은 일본이 쿠릴섬의 완전한 주권을 소련에 양도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4도에 대한 연구는 좀 더 해야 하는 상황이
었으나, 법률적으로 일본이 남쿠릴섬(쿠나시리와 에토로후)을 보유하는 경
우보다 하보마이와 시코단을 보유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미국이 쿠릴섬에 대한 좁은 의미의 정의를 한다면, 쿠나시리
와 에토로후는 남쿠림섬에 포함되는 것이며, 하보마이와 시코단은 일본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1949년 가을에 일본평화조약을 위한 준비가 재개되었다. 1949년 9월안은
수정되었고, 10월 13일안이 준비되었다. 이 안에서 “인접 작은 섬들”로서
일본의 영토범위에 쿠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 시코단 4도가 다시 포함
되었다. 그러나 영토이양에 대한 사항은 1948년부터 변화가 없었다. 즉 일
본은 소련에 쿠릴섬의 모든 주권을 양도한다는 것이다.
1949년 11월안에서 4도 처리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이들 4도의 이
름은 다시 일본의 영토범위에서 제외되었다. 즉 미국은 에토로후와 쿠나시
리 그리고 작은 쿠릴(Little Kuriles)(하보마이, 시코단)섬에 대한 일본의
소유를 제안할 것인지 결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맥아더 정치고문 윌
리암 시볼드(William Sebald)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 1949년 4월 일
본정부는 “남쿠릴섬(쿠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 시코단” 제목으로 북
방영토에 대한 제3의 보고서를 준비했다. 이 “논평”은 일본이 이 당시 이미
1946 보고서에서 준비되었던 “4도 반환론”을 강력하게 성사시키기 위해 제
시된 것처럼 보였다. 1945년 8월 17일의 한 대화에서, 트루먼은 극동 소련


43)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p. 82-83.
236 軍史第74號(2010. 3)


군 점령지역에 모든 쿠릴섬을 포함시키기 위해 지령 제1호(이 안에서 소련
군은 일본 항복 지역 가운데 쿠릴섬을 포함하지 않았다)를 수정하도록 요
구한 스탈린의 요청에 합의했다. 모든 쿠릴섬은 뒤이어 소련군에 점령당했
고 미국의 반대와 도전 없이 소련 영토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쿠릴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모순 없이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오키나와
에 대한 미국의 관리 때문이었다. 시볼드는 “에토로후와 쿠나시리 그리고
작은 쿠릴섬들에 대한 소련의 포기를 제안하기에는 오키나와 관리에 대한
미국의 입지가 취약한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 섬
을 오키나와의 방법으로 신탁통치하에 둘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할 수 있다”
고 논평했다. 이것은 4도의 양도와 오키나와 사이의 연계전술이 평화조약
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44)
1950년 8월 7일 당시 미 국무부 특별고문 존 덜레스(John F. Dulles)
책임하에 준비된 첫 안에서 남사할린과 쿠릴섬의 양도는 4장 5조에서 포모
사(Formosa)섬의 양도와 함께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안이었다. 덜
레스안으로 이 섬들의 미래 지위는 극동 4강(미-영-중-소) 또는 유엔 결의
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 덜레스는 이 조약으로
유엔에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게 하여 유엔자체가 해체될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이 “유엔결의안”은 나중에 제외되었다. 1950년 10월 26~27일
덜레스는 안보위원회 소련대표인 야코프 말리크(Yakov Malik)와의 회담에
서 “만약 소련이 이 조약에 당사자로 참석하게 된다면, 이 조약에 의해 일
본은 소련에 남사할린과 쿠릴섬을 이양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45)
1951년 3월 1일에 준비된 새로운 안은 다음과 같이 쿠릴섬에 대한 양도
를 기술하고 있다. 즉 일본은 소련에 남사할린과 이에 인접한 작은 섬들을
반환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소련에 쿠릴섬을 이양할 것이다.46) 쿠릴섬


44) Ibid., pp. 85-87.
45) Goodby, Ivanov, and Shimotamai,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n,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p. xxv.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37


에 대한 정의는 이 조약문에 처음 언급되었다. 3월 1일 안은 일본정부에
제출되었다. 3월 16일 일본은 쿠릴섬에 대한 정의를 “양국 합의 또는 사법
적 결정에 의해”에서 “이들 섬은 일본을 포함하는 4강에 의해 정의될 수 있
다는 것”으로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3월 20일 수정안
에 반영되지 않았다. 대신 쿠릴섬에 대한 정의는 제외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49년 말까지 미 국무성 내에서는 쿠릴섬 정의에
대한 연구에서 하보마이와 시코단 2도를 쿠릴섬의 일부에서 제외시킬 것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만약 이들 섬을 일본 영토의 일부로 구체화한다면, 소
련이 불법적으로 이들 섬을 점령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래
서 미-일 안보동맹이 미-소 군사충돌의 위험을 야기할 수 있었다.47)


(3) 미-영 공동안들
1951년 5월 미-영 공동안은 4월 말과 5월 초 워싱턴에서 열린 공동실무
그룹 모임에서 나왔다. 여기서 일본영토의 범위를 기술한 영국안48)을 버리
고 미국안을 채택했다. 남사할린과 쿠릴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46)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90.
47) Ibid., p. 91.
48) 1951년 3월 영국외무성에서 준비한 일본평화조약안에서 일본의 영토범위는 홋카이도와
캄차카 사이에 있는 모든 소련 점령 섬(쿠릴섬)들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51년 4월
안에 일-소 국경은 변경되었다. 쿠나시리와 에토로후는 여전히 쿠릴섬에 포함되었지만,
시코단과 하보마이는 일본의 주권 영역에 포함되었다. 후자에 대한 처리에서 변화는 이
들 섬이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미국의 견해를 받아들여 미국의 영향으로 인해 나
타나게 되었다. 1951년 3월 13일 미 국무성이 영국대사에게 보낸 한 비망록(Aide
Memoire)에서 미국의 쿠릴섬에 대한 미국안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즉 쿠릴섬의 범위
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일본과 소련정부 사이에 양국 합의에 대한 문제 또는 국제사법재
판소에 의해 사법적 결정을 위한 문제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것을 토대로 영국정부는
쿠릴섬의 범위는 어느 단계에서 적정하게 결정될 것이라는 미국정부의 견해를 동의하기
로 결정했다.
238 軍史第74號(2010. 3)


있다. 즉 일본은 소련에 쿠릴섬을 이양한다. 남사할린과 함께 일본이 공식
적으로 주권을 행사했던 이 섬의 인접한 섬들을 이양한다.
6월 11일 파리에서의 미-프 회담에서 같은 사항이 논의되었다. 여기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미국은 하보마이와 시코단이 역사적으
로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러시아인
들이 이미 하보마이섬을 점령하고 있으므로 일본평화조약에 이 문제를 재
촉하는 것보다 오히려 차후 중재 또는 국제재판소 결정을 위해 정확하게
쿠릴섬 정의를 내리는 문제를 남겨두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49)
6월 14일 수정안에서 수용자 “소련”은 없어지고, 단지 이들 섬들에 대한
일본 포기만 언급되었다. 즉 일본은 쿠릴섬의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하며, 1905년 9월 5일 포츠모스 조약으로 주권을 획득한 사할린 일부
와 여기에 인접한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도 포기한다는
것이다.
영토에 대한 수령자를 구체화하지 않는 구상은 5월 미-영 공동안이 준비
되기 전 중국과 캐나다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 제안에 대한 이들의 토대는
다른 영토 양도와 일관성 문제 때문이었다. 중국은 4월 24일 비망록에서
초기 미국안에 대한 모순을 지적했다. 이 초기안은 포모사 및 중국과 대만
사이 해협에 있는 페스카도레스(Pescadores)의 일본 포기만 언급되어 있
지, 어느 국가에 이양한다는 것은 없었다. 반면 이 안에는 일본이 소련에
남사할린과 인접 섬들을 반환하고 쿠릴섬을 이양할 것이라고 이양 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50)
그때 중국정부는 차별없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
조항에 포함된 규정들은 남사할린과 쿠릴섬에 대한 단순 포기로 대체되어
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캐나다정부도 5월 1일과 18일 비망록에서 모든


49)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Divided Territories in the San
Francisco System, p. 93.
50) Ibid., p. 94.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39


이전 일본영토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처리를 요구했다. 즉 분쟁의 소지를
만들지 않도록 양도되는 영토들에 대해 차별 없는 처리를 제안했다. 결국
미국은 이들 제안을 받아들였다. 1951년 6월 5일 런던에서 덜레스는 이 조
약에서 사할린과 쿠릴섬에 대한 일본의 포기와 포모사에 대한 일본의 양도
에 대한 일관성 있는 규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근거로 정당화했다. 첫째, 미-영 5월안은 소련에 직접적인 혜택을 주었다.
그래서 국내적으로 이 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의회 설득 작업이 힘들 것이
라는 측면이 있었다. 둘째, 만약 소련이 이 평화조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들 섬에 대한 법적 주권은 여전히 일본에 속해있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
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섬들에 대한 소련점령은 계속될 것이다. 그때 미국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통해 바람직하지 않은 분규에 개입될 수 있다. 그러므
로 일본이 이들 섬을 포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들 섬의 이
양을 열어놓고 남겨두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1951년 6월 14일 마침내 영국은 새로운 미국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소련
은 미-영 공동안을 비난하며, 이 안의 수정을 요청했다.51)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 참석한 그로미코는 미-영 안을 평화조약이 아니라 극동에서 새
로운 전쟁의 준비를 위한 조약이라고 비난했다.52)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
고 미-영 공동안은 수정되지 않았다. 이 조약의 내용에 반대한 소련은 서명
을 거부했다. 그 결과 대일본 평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소련, 체코, 폴란
드를 제외하고 48개국에 의해 조인되었다.
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일본 요시다정부는 미국 측에 샌프란시스코 평화


51) 소련의 수정안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 일본은 남사할린, 쿠릴섬
에 대한 소련의 주권을 인정할 것. 2) 모든 연합군 군대는 조약 발효 90일 이내에 일본
으로부터 철수할 것. 3) 혼슈, 홋카이도, 큐슈, 시코쿠의 4해협을 비무장하고, 일본해를
따라 배들이 자유 통행하도록 보장할 것 등이다. 그로미코 수정안의 구체적인 설명에 대
해 Rodger Swearingen, The Soviet Union and Postwar Japan (Stanford, Hoover
Institution Press, 1978), pp. 77-78 참조.
52) Ibid.
240 軍史第74號(2010. 3)


회의에서 시코단과 하보마이는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었다는 입장을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덜레스는 하보마이는 쿠릴섬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확인
해 주었지만, 시코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쿠나시리
동쪽에 있는 시코단은 쿠릴섬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분명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53) 그러나 요시다는 하보마이와 시코단
에 대해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 에토로후와 쿠나
시리 2도 관련해서 똑같은 요청을 하지 않았다.54) 비록 요시다는 이전에
남쿠릴섬 반환을 위해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는 일본이 남사할린과 쿠릴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서명했다.


5. 맺 음 말
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러-일 간 영토분쟁의 원인은 얄타합의와 샌프
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2월 얄타비밀협정에서
쿠릴섬은 남사할린과 함께 소련에 이양하기로 합의되었다. 루즈벨트와 처
칠은 스탈린에게 대일참전 대가로 “영토 불확대”의 대서양헌장과 영토 확
장의 의도는 없다고 합의한 카이로 선언을 위반하고 영토이양이란 “보상”
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소관계가 협력에서 대립으로 전환되면서, 전후 쿠
릴섬의 양도는 왜곡되었다. 이 영토의 권한 이양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53) John J. Stephan, The Kuril Islands: Russo-Japanese Frontier in the Pacific, p.
199; 1955년 7월 일본정부의 문의에 대해 미국은 공식입장을 나타냈다. 하보마이와 시
코단은 지리적, 역사적, 법적으로 홋카이도의 일부이지 쿠릴섬의 일부가 아니다. Rodger
Swearingen, The Soviet Union and Postwar Japan, p. 191.
54) Raymond L. Garthoff, ‘A Diplomatic History of the Dispute’, Goodby, Ivanov,
Shimotamai eds.,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n,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p. 18.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41


“미해결 문제”로 남겨둠으로써, 현재 국제법상 쿠릴섬의 귀속문제는 결정
되지 않았다.
미국이 이 평화조약을 준비하는 데 주도권을 취하는 동안, 문제는 쿠릴
섬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조약의 입안과정에서 제기되었다. 이 쿠
릴섬의 정의는 다른 의견들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서 얄타합의
는 반영되지 않았다. 공동입안자인 영국은 1951년 초까지 얄타합의를 준수
했으나, 미국 협상자들이 미국안을 받아들이도록 영국을 설득하여 미국안으
로 조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외무성 1946 팸플릿에 언급된 것처럼,
원래 일본 목표는 하보마이와 시코단 2도 반환이었다. 이 “2도 반환론”은
일본 패배의 현실을 반영한 전쟁의 결과였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 이후 1953년 스탈린 사망과 1954년 후르시쵸
프 등장으로 소련의 새로운 대외정책인 “평화공존”으로 인해 동서 간 변화
의 징후가 보이던 시절 소-일 간 평화협상 재개가 이뤄졌다. 양국은 관계정
상화를 위해 1955~56년 4차례의 협상을 통해 비록 완전한 평화조약을 체
결하진 못했지만, 1956년 10월 19일 양국 간 전쟁상태 종식과 외교관계 수
립을 위한 일소공동선언에 합의했다. 이후 양국 의회에 의해 비준되었고,
조약으로서 유엔에 기탁됐다. 이 선언의 9조에서 평화조약 체결 후 하보마
이와 시코단을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1956년 일소공동선언의 합의는 시코
단과 하보마이의 지위는 쿠나시리와 에토로후의 지위와 다르다는 것을 양
국 정부가 인정한 것을 반영한 것이다. 즉 양국은 얄타 등 국제합의에서
쿠릴섬의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를 하지 않았지만, 시코단과 하보마이
는 쿠릴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55)
현재 쿠릴섬 문제는 냉전의 결과로서 “4도 반환론”에 토대를 둔다. 일본
과 소련은 1956년 “2도 반환”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양국 국경문제를 해
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간섭과 일본의 1955년 체제로 인해 4도


55) Kimie Hara, Japanese-Soviet/Russian Relations since 1945: A Difficult Peace, p.
94.
242 軍史第74號(2010. 3)


반환으로 일본정부 정책이 변했다. 미국의 간섭을 보면, 덜레스 국무장관
(1953~59)이 시게미슈 마모루(重光葵) 외상에게 경고한 사례를 볼 수 있
다: 만약 양국 영토문제에서 하보마이와 시코단만 반환받고, 쿠나시리와 에
토로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후 일-소 평화조약이 체결된다면, 일본의 오
키나와에 대한 잔여주권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56) 이 같은 덜레스
의 간섭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미-소 냉전시대 소-
일 간 교착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즉 양국 간 관계정상화를 막는 것이 미
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 있었다. 둘째, 오키나와에 대한 미국 관
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셋째, 계속적인 소-일 간 적대관계를 일어나
게 함으로써 미해결 분쟁은 일본을 미국에 더 의존하도록 할 수 있고, 소
련은 더 고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 1950년대 중엽 소-일 평화협상들은 소위 1955년 체제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장기집권 시대가 구축되는 기간과 중복되었다. 소련
과 평화협상에 대한 자유당과 민주당 두 일본 보수당의 정책들은 이들 정
당 간 정치적 거래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당시 강해지는 사회주의 정당들
에 대항해 거대 집권당을 만들기 위해 합당을 했다. 민주당의 수상 하토야
마 이치로(鳩山一郞, 1954-56)는 미국과의 협력을 최우선 정책으로 하는
전 수상이 이끄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자유당과 타협을 했다. 처음부터
일본입장은 하토야마와 요시다 간의 개인적 경쟁으로 혼란이 있었다. 하토
야마는 대공산권외교를 추진하는 등 좀 더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지향했으
나, 요시다는 친미성향 보수세력의 지도자로 경제재건과 미-일 안보체제에
의존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처럼 일본과 소련 관계에서 “냉전”이 시작하기
도 전에, 이들 국가 사이에 냉전이 개입했다. 한편으로 국내 보수세력들의
집단인 자민당은 4도 반환을 당의 핵심정책으로 지정했으며, 자국영토에
대해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이


56) Hiroshi Kimura, The Kurillian Knot: A History of Japanese-Russian Border
Negotiations, p. 71.
러시아와 일본의 쿠릴섬 문제 243


후 일본의 공식입장은 4도 반환 없인 평화조약 체결도 없다는 정책을 유지
하고 있다.
요약하면, 쿠릴섬 문제는 진전되지 못하고 한곳에 머물고 말았다. 냉전의
시작과 함께 양국 영토문제 해결에 장애가 생겼지만, 냉전 종식과 함께 러-
일 양국이 스스로 이 문제를 외국의 간섭 없이 해결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
고 그 냉전의 “쐐기”는 양국 국민들 간의 역사적 불신만큼이나 깊이 박혀있
어 그 해결의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원고투고일:2009. 12. 2, 심사수정일:2010. 1. 18, 게재확정일:2010. 2. 9)
주제어 :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쿠릴섬, 미해결영토, 얄타협정, 냉전, 영토문
제, 남쿠릴섬, 북방영토, 소련, 일본
244 軍史第74號(2010. 3)


<ABSTRACT>
The Issue of the Kurile Islands between Russia and Japan:
A Case of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Choi, Tai-kang
This paper will be examined the issue of the disposition of the Kurile
Islands in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Why did the territorial problem
between Japan and USSR come to be left unresolved in the Treaty? This
paper will be given the answer why both sides can not so far sign a peace
treaty since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In tracing the origins of the
current dispute, the point of departure is the secret agreement among the
Allies in Yalta in February 1945.
The issue of the Kuriles Islands was set in place. Although the Cold War
intervened the resolve of the territorial issues between Japan and USSR,
with post-cold war era Japan-Russia countries do not still resolve this issue
without the foreign intervention, especially USA. The Cold War wedge left
between Japan and the USSR remains to this date.
Key Words :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the Kurile Islands, Unresolved
Territory, Yalta Agreement, The Cold War, Territorial Issue, South
Kuriles, Northern Territories, USSR, Ja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