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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盜 -李植/http://cafe.daum.net/jangdalsoo/hs2Q/67

姦宄無常産(간귀무상산) 간사한 도적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데다

飢荒又一時(기황우일시) 기근과 가뭄이 올해도 이어지는 때라서

近村聞警急(근촌문경급) 이웃 마을의 위급한 경보 들어보니

相識有創夷(상식유창이) 알고 지내는 이들도 약탈을 당했다네

自幸囊中淨(자행낭중정) 다행이구나! 주머니 속이 깨끗하니

應無棟上窺(응무동상규) 응당 대들보 위에서 엿보는 사람 없으리라

穿墉何足磔(천용하족책) 좀도둑들이야 어찌 죽일 게 있으리

城社有狐狸(성사유호리) 도성과 종묘에 여우와 살쾡이 있으니


〈감상〉


이 시는 1628년 충주목사에서 파직되어 택풍당(澤風堂)으로 물러난 여름에 지은 것으로, 현실의 문제점에 대해 노래한 시이다.


택당은 덕수 이씨로 『홍재전서』에서, 


“우리나라의 망족(望族)으로는 먼저 덕수(德水) 이씨(李氏)를 꼽는다. 도학으로는 율곡(栗谷)이 있고, 장수의 지략과 충의로는 충무공이 있고, 문장으로는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있다. 한 문중에 많은 훌륭한 인물이 모였고, 또 각파에서 과거에 장원한 인물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악역(惡逆)의 죄를 범하여 주륙을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이 또한 다른 집안에 없는 일이다


(我國望族(아국망족) 先數德水之李(선수덕수지이) 蓋道學則如栗谷(개도학칙여율곡) 將略忠義則如忠武公(장략충의칙여충무공) 文章則如容齋澤堂(문장칙여용재택당) 以一門而集衆美(이일문이집중미) 且其各派中科甲(차기각파중과갑) 不爲不多(불위불다) 而無一人罪關惡逆(이무일인죄관악역) 身犯誅戮(신범주륙) 此又他族之所未有也(차우타족지소미유야)).”


라 언급한 것처럼, 명문거족(名門巨族) 출신이다.


『인조실록』에서는, 


“문장은 이식이 제일이다(문장칙이식위수(文章則李植爲首)).”라고 하여, 이식(李植)은 당대에 이미 문명을 떨쳤다. 그의 시는 28세를 전후하여 숙부인 이안눌(李安訥)에게서 배웠는데(수학지도다명류(授學之徒多名流) 택당기일야(澤堂其一也)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 「예조판서동악이공신도비명(禮曹判書東岳李公神道碑銘)」), 주지하듯이 삼당시인(三唐詩人)에 의해 시작된 당풍(唐風)이 권필(權韠)과 이안눌(李安訥)에 이르러 성당(盛唐)에 가깝게 되었다.


택당은 「학시준적(學詩準的)」에서, “송대(宋代)의 시로 말하면, 비록 대가(大家)가 많다고는 하나, 학식이 풍부하지 않으면 배우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정종(正宗)이 못 되는 시는 반드시 배울 것이 없다고 하겠는데, 다만 양진(兩陳, 송(宋)나라의 후산(后山) 진사도(陳師道)와 간재(簡齋) 진여의(陳與義))의 율시 가운데에서 두율(杜律)과 근사한 것들은 때때로 참조해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명(大明)의 시 중에서는 오직 이공동(李崆峒, 몽양(夢陽))이 두시를 제대로 배웠으니, 두시와 참조해서 보는 것이 좋겠다. 근대에 시를 배우는 자들이 더러는 한유의 시로 기초를 다지고 두보의 시로 전범을 삼고 있는데, 이것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교시(敎示)에 의한 것이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비록 끝에 가서는 당율(唐律)을 배웠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역시 한유의 시를 학습하였고,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이 만년에 재기(才氣)가 고갈되고 시들해졌을 때에도 역시 한유의 시를 읽었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비록 학식이 천박하기는 하였지만 한유의 시를 배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일단 제공(諸公)의 권유를 받아들여 한번 숙독하고 보니, 그 율시와 절구가 본디 당률의 격식과 같기에, 두시와 병행해서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대편(大篇) 걸작으로 말하면, 바로 양웅과 사마상여의 사부(詞賦)를 얼굴만 바꿔 놓은 격이었으니, 그의 시를 읽기보다는 차라리 그보다 차원이 높은 양웅과 사마상여의 작품을 읽는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늦게 시를 배우는 자들이나 필력이 무뎌진 사람이 그의 시 100여 편 정도를 뽑아서 읽는다면, 마치 경(敬)이라는 하나의 글자가 소학(小學)을 도와주는 공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구급 처방으로서 힘을 얻게 될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재질과 학식이 모두 풍부한 사람의 경우에는 굳이 그의 하등(下等)의 작품에까지 지레 몸을 굽히고서 기어 다닐 것은 없다고 본다


(宋詩雖多大家(송시수다대가) 非學富(비학부) 不易學(불역학) 非是正宗(비시정종) 不必學(불필학) 惟兩陳(유량진), 〖后山(후산), 簡齋(간재)〗 律詩(율시) 近於杜律者(근어두률자) 時或參看(시혹참간) 大明詩(대명시) 惟李崆峒(유리공동), 〖夢陽(몽양)〗 善學杜詩(선학두시) 與杜詩參看(여두시참간) 近代學詩者(근대학시자) 或以韓詩爲基(혹이한시위기) 杜詩爲範(두시위범) 此五山東岳所敎也(차오산동악소교야) 石洲雖終學唐律(석주수종학당률)


初亦讀韓(초역독한) 崔孤竹末年(최고죽말년) 才涸氣萎(재학기위) 亦讀韓詩(역독한시) 吾雖學淺(오수학천) 殊不欲讀韓(수불욕독한) 旣被諸公勸誘(기피제공권유) 熟觀一遍(숙관일편) 其律絶(기률절) 固唐格也(고당격야) 不妨與杜詩竝看(불방여두시병간) 大篇傑作(대편걸작) 則乃楊馬詞賦之換面也(칙내양마사부지환면야) 與讀其詩(여독기시) 寧讀楊馬之爲高也(영독양마지위고야) 惟晩學筆退者(유만학필퇴자) 抄讀百餘遍(초독백여편) 則如敬字之補小學功(칙여경자지보소학공) 容可救急得力(용가구급득력) 若才學俱贍者(약재학구섬자) 不必匍匐於下乘也(불필포복어하승야)).”


라고 하여, 고시(古詩)와 당시(唐詩)를 학습하고 두시(杜詩)로 귀착하는 것이 시를 배우는 정론(正論)이라 하였다.


하지만 송시(宋詩) 또한 유연한 입장을 가졌고, 학습도 하였다. 위의 글 마지막에, “나는 어렸을 때 사우(師友)가 없는 가운데, 제일 먼저 두시를 읽고 나서 황소(黃蘇, 황정견(黃庭堅)과 소식(蘇軾). 그런데 『택당집』의 다른 판본에는 ‘황진(黃陳)’, 즉 황정견과 진사도(陳師道)로 되어 있는데, 이들이 모두 소식의 문하이고 보면, 본문의 황소는 황진의 잘못이 아닌가 싶다)와 『영규율수(원(元)나라 방회(方回)가 당·송의 시를 모아 49권으로 정리한 책 이름인데, 1조(祖) 3종(宗)의 설을 제창하면서, 시마다 평어(評語)를 가하고 일화를 소개하였다.


1조는 두보(杜甫), 3종은 황정견(黃庭堅)·진사도(陳師道)·진여의(陳與義)이다. 당시(唐詩)보다는 송시(宋詩), 특히 강서시파(江西詩派)에 상당부분 경사되어 있음)』 등 여러 작품을 접하고는 수천 수의 시를 습작하기에 이르렀다(余兒時無師友(여아시무사우) 先讀杜詩(선독두시) 次及黃蘇瀛奎律髓諸作(차급황소영규률수제작) 習作數千首(습작수천수)).”라 하였다. 위의 시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주석〉


〖宄〗 도둑 귀, 〖荒〗 흉년 들다 황, 〖創夷(창이)〗 전쟁의 화로 입은 피해. 〖囊〗 주머니 낭, 〖棟〗 마룻대 동, 〖窺〗 엿보다 규, 〖穿〗 뚫다 천, 〖墉〗 담 용, 〖磔〗 지체(肢體)를 찢어 죽이는 형벌 책.

〖城社有狐狸(성사유호리)〗 도성과 사당의 틈에 굴을 뚫고 서식하는 여우와 살쾡이처럼, 임금의 곁에서 보호를 받으며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는 간신(奸臣)을 뜻하는 말.


각주


1 이식(李植, 1584, 선조 17~1647, 인조 25): 161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경기도 지평으로 낙향하여, 남한 강변에 택풍당(澤風堂)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호를 택당(澤堂)이라 한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1642년에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한다 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 갔다 돌아올 때에 다시 의주에서 잡혀 갇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와, 대사헌과 형조·이조·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문장은 우리나라의 정통적인 고문(古文)으로 높이 평가되었으며,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