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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

다시 사랑을 위하여/김시탁


다 젖고 나면 더 젖을 게 없어
그때부터 열이 난다는 걸
젖어본 사람은 안다 
 
덜 젖으려고 발버둥칠수록
이미 젖은 것들이 채 젖지 못한 것들을 
껴안고 뒹굴어 결국 다 젖고 만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안다 
 
비오는 날은 비를 맞고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을 맞듯이
받아들이며 껴안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넉넉하고 건강한지를
비탈길을 걸어본 사람은
다 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철로 위에 선 여자야
강가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사내야
더 젖어봐라 다 젖고 나면 펄펄 열이 나겠지
그 열로 다시 사랑을 데울지 누가 아느냐 
 
절망하고 절망하고 하염없이 절망해도 
절망할 수 있다는 절망도 희망 아니냐
비탈에도 햇살은 내리고
진흙탕물 속에서도 연뿌리는
꽃대를 밀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