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 : 팔을 굽혀 베개 삼아 밴다는 말이니, 청빈(淸貧)한 삶을 즐긴다.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자왈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의. 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술이(述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그것을 베고 살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하고 귀함은 나에게 있어서는 뜬구름과 같으니라.”
상제님 천지공사의 내용이념을 떠나서, 후천 진리라 하는 것은 천지이법이 가을에 가서는 알캥이를 여무는 것이다. 열매기 통일을 한다. 성숙이 된다. 우주질서로 천지의 열매기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다. 천지의 목적이라는 것이 가을에 열매 하나를 맺기 위해서, 알캥이 하나를 매듭짓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캥이 문화가 나온다.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유인(唯人)이 최귀(最貴)라.’이 지구상에 이 대우주 천체권 내에서는 사람이 가장 존귀한 것이다. 음양오행, 천지의 정기를 다 타고난 것이 바로 사람이다. 사람으로서는 금화교역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에 왔다 간 보람도 있고 그렇지 미물곤충, 날아다니는 새, 기어다니는 짐승 모양 그저 한평생 천지이법에 의해 생겨나서 그냥 왔다간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람이라면 가치관을 바탕으로 해서 진리에 살다 진리에 죽어야 된다. 알고서 살다가야 될 것 아닌가! 천지의 이법이 바로 이렇게 되어져 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재기중의(樂在其中矣)라’,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만 해도 만족하다. 하듯이 진리를 알고서 세상을 살다가야 한다.
• 곡학아세(曲學阿世) : ① 자기가 배운 것을 올바로 펴볼 생각은 않고, 그것을 왜곡해 가며 세상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태도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고생(轅固生)은 제(齊)나라 사람으로 《시경(詩經)》에 정통해서 효경제(孝景帝, 재위 기원전 157년∼140년) 때 박사가 되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해 평소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으로 간하는 성격이었다.
어느 날 노자(老子)의 글을 좋아하던 두태후(竇太后, 경제의 어머니)가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글에 대해 묻자 원고생이 대답했다. “그것은 하인들의 말일 뿐입니다.” 두태후는 격노하여 원고생에게 날카로운 병기를 주며 돼지를 찌르게 했다. 원고생이 돼지의 심장을 정확하게 찌르자 돼지는 한칼에 쓰러졌다. 태후는 아무 말이 없었으며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았다. 얼마 후 경제는 원고생을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청하왕의 태부로 임명했다. 오랜 후에 원고생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해 다시 현량(賢良)으로서 원고생을 불렀으나, 아첨하는 선비들이 그를 헐뜯으며 원고생이 늙었다고 말했으므로 황제는 그를 돌려보냈다. 당시 원고생은 아흔이 넘은 나이였다. 원고생이 부름을 받았을 때 설(薛) 사람 공손홍(公孫弘)도 역시 부름을 받았는데, 곁눈질을 하며 원고생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원고생은 공손홍에게 말했다. “공손자여, 힘써 학문을 바르게 하여 세상에 옳은 말을 하고,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이 뒤부터 제나라에서 《시경》을 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고생의 말을 바탕으로 했는데, 《시경》으로 귀하게 된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원고생의 제자였다.(今上初卽位, 復以賢良征固. 諸諛儒多疾毁固曰, 固老, 罷歸之. 時固已九十余矣. 固之征也, 薛人公孫弘亦征, 側目而視固. 固曰, 公孫子, 務正學以言, 無曲學以阿世. 自是之後, 齊言詩皆本轅固生也. 諸齊人以詩顯貴, 皆固之弟子也.)」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에 나오는데, 원고생이 공손홍에게 충고한 말에서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의 ‘곡학아세(曲學阿世)’가 유래했다.
• 곤수유투(困獸猶鬪) : 궁지에 몰리면 약한 자도 오히려 강한 자를 해칠 수 있음. =곤수유투(困兽犹斗) : 막판에 몰린 자가 최후의 발악(發惡)을 함을 비유한 말. 궁지에 몰린 짐승은 그래도 최후 반항을 한다; 막판에 몰린 자는 그래도 최후 발악을 한다.
진나라 경공(景公)은 초나라에게 크게 패전하고 돌아온 중군 대장 순임보(荀林父)의 관직을 박탈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그를 사형에 처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자, 대부 사정자(士貞子)가 간언을 하고 나섰다.
“아니 됩니다. 문공(文公) 때 우리나라가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워 크게 이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공께서는 근심하는 얼굴을 보이셨습니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시고 무슨이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하고 그 까닭을 묻자, 문공께서는 ‘초나라에 득신(得臣)이라는 재상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오. 짐승도 곤경에 빠지면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인데, 하물며 한 나라의 재상임에 다시 말 할 것이 있겠소(困獸猶鬪, 況國相乎)?’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에 문공께서는, 득신이 군사를 철수시키는 도중에 초나라 성왕의 명을 받고 자살하였다는 듣고 웃으시며 '후환이 없어졌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초나라 성왕이 득신을 죽인 것은 초나라에게는 패배이고, 진나라에게는 승리와 같습니다. 왕께서 순임보를 죽이시는 것은 곧 초나라의 승리이고 우리에게는 패배입니다. 순임보는 이미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지금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고치기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진 경공은 사정자의 권고를 듣고, 다시 순임보의 관직을 복귀하였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年條
• 곤재해심(困在垓心) : 매우 어려운 처지에 당함
• 골몰무가(汨沒無暇) : 일에 골몰하여 틈이 조금도 없음
• 골육상잔(骨肉相殘) : 같은 혈족끼리 서로 다투고 해하는 것 = 골육상쟁(骨肉相爭)
• 骨肉相爭(골육상쟁) : 뼈와 살이 서로 싸움. 동족끼리 서로 싸움을 비유.
중국 한(漢)나라에 진중궁(陳仲弓, 104년∼187년)이라는 청백리(淸白吏)가 있었다. 그가 태구(太丘)현 현감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재물을 노린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진중궁은 즉각 행장을 차려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또 다른 사고가 보고됐다. 한 부부가 어린아이를 낳아놓고는 버렸다는 것이었다. 보고를 접한 그는 수레를 아기 유기 사건 현장으로 돌리게 했다. 부하가 “살인사건은 무엇보다도 중한 일입니다. 마땅히 먼저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 그 말에 진중궁은 “재물을 노린 살인 사건이 아무리 중하기로서니 친족을 해친 일만 하겠는가(盜殺財主, 何如骨肉相殘)”라고 답했다.
남송(南宋)시대의 문집인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다. ‘가까운 혈족끼리 서로 해치고 죽인다’는 뜻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이라는 말의 어원이다.
골육은 말 그대로 뼈(骨)와 살(肉), 즉 몸이다. 우리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았다 하여 아들과 자식과의 관계로 확대됐고, 피를 나눈 혈족 전체로 넓어졌다. 혈족끼리 서로 잔인하게 해치니(相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뜻으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있고, 친족이 흩어지는 아픔이라는 뜻의 골육이산(骨肉離散)도 널리 쓰인다.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曹植)이 쓴 ‘칠보시(七步詩)’는 그 아픔을 읊은 시로 유명하다. 조조에 이어 왕에 오른 조비(曹丕)는 재능이 뛰어났던 동생 조식을 불러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지어라. 그러지 못하면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명했다. 일곱 발을 떼기 전에 시를 지어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조식의 문재(文才)가 발한다. “콩을 삶으려고 콩깍지를 태우니(煮豆燃豆<8401>), 가마솥 콩이 뜨거워 우는구나(豆在釜中泣).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건만(本是同根生), 뜨겁게 삶음이 어찌 이리 급한고(相煎何太急).” 자신을 가마솥 콩에, 형인 조비를 아궁이의 콩깍지에 비유해 골육상잔의 비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 공경대부(公卿大夫) : 삼공과 구경 대부(大夫)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높은 벼슬에 있는 관인(官人)을 일컫는다.
공(公)과 경(卿), 대부(大夫)는 모두 중국 주(周) 시대의 관제(官制)에서 비롯된 말이다. 주(周)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의 최고위 관직(官職)을 두고, 이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 그리고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 총재(冢宰), 사도(司徒), 종백(宗伯), 사마(司馬), 사구(司寇), 사공(司空) 등을 구경(九卿)이라 하였다.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합해 공경(公卿)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의 대신(大臣)을 뜻했다. 대부(大夫)는 경(卿)과 사(士) 사이에 위치한 귀족(貴族) 신분을 가리켰는데, 주(周) 왕실에서 분봉된 각 국(國)마다 제후들은 대부(大夫)와 다시 봉건 관계를 맺었다.
주(周) 시대에 나타난 이러한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대부(大夫)의 관제(官制)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시대마다 관직의 명칭은 바뀌었지만 이들 나라들에서는 근대 이전까지 최고위 대신(大臣)을 삼공(三公), 구경(九卿)이라 불렀다. 그리고 4∼5품 이상의 문산관(文散官)의 관품(官品)에 대부(大夫)라는 칭호를 붙였다.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의 삼정승(三政丞)을 삼공(三公)이라고 불렀으며,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와 의정부(議政府)의 좌찬성(左贊成), 우찬성(右贊成) 그리고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구경(九卿)이라 불렀다. 그리고 정1품부터 종4품까지 문산관(文散官)의 관품(官品)에 대부(大夫)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 공곡공음(空谷跫音) : 인적이 없는 빈 골짜기에서 들리는 사람의 발자국소리라는 뜻으로, 적적할 때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출전 : 장자(莊子) - 서무귀편(徐無鬼篇).
은자(隱者)인 서무귀는 위(魏)나라의 중신인 여상(女商)과 이웃해서 살았다. 서무기가 여상의 소개로 위나라 무후(武侯)를 만났다. 두 사람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얼마 후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는 무후의 기뻐하는 웃음소리가 밖에서까지 들려왔다. 이윽고 물러나오는 서무귀에게 여상이 “나는 지금까지 무후에게 시서예악(詩書禮樂)과 병법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말로 도움을 주었건만 이제까지 이렇게 기쁘게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소.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렇게 기뻐하신 겁니까?”라고 묻자, 서무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개나 말의 감정법에 대하여 얘기했을 뿐이지만,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빈 골짜기에서 저벅저벅하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쁘겠소[逃空谷者 聞人之足音跫然 而喜矣]. 하물며 형제나 친척이 옆에서 말하고 웃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더욱 기쁠 것입니다. 무후께서는 진인(眞人)의 말을 오래도록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듣고 몹시 기뻐하신 겁니다.”
여기서 ‘공곡공음’이 유래됐으며, ‘진인’이란 ‘참다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무위(無爲)를 일로 삼고, 이해득실을 벗어나서 도(道)에 통달한 사람을 말한다.
작은 지혜를 버리고 자연과 융화하면 마음의 안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했던 것이다.
또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 듣는 기쁜 소식, 고독하게 지내고 있을 때 동정자를 얻은 기쁨, 매우 진기(珍奇)한 일, 반가운 일 등을 비유하여 쓰기도 한다.
• 공과상반(功過相半) : 잘한 일(功)과 잘못한 일(過)이 반반이라는 뜻으로, 공도 있고 잘못도 있음을 이르는 말. 인간은 완전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
잘한 것이 일곱이고 잘못한 게 셋(功七過三)이라는 글을 읽다가 공과상반(功過相半)이라는 말이 나와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조선조 영조 때부터 순조 때까지 활동한 유효원(柳孝源1751∼1813)이라는 무장이 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순무중군(巡撫中軍)으로 기용되었다. 정주성(定州城)을 점령한 홍경래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군기를 쇄신한 뒤 정주성 아래 토굴을 파고 화약을 설치하여 성벽을 폭파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항복한 반군 2,983명 중 부녀자와 노인,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1,917명을 함부로 즉결처분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대간에서 공과상반(功過相半)이라고 평가되어 삭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1813년 우포대장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사망하였다. 1830년(순조 30)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차대하여 김재찬이 유효원의 포상과 정만석의 연임에 대해 아뢰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이 말하기를,“순무 중군(巡撫中軍) 유효원(柳孝源)이 전쟁에 나아갔을 때 과연 공과(功過)가 상반(相半)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사(旋師)한 뒤에 끝내 상과 벌을 아울러 시행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토평(討平)한 공이 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도 상이 공에 걸맞지 않았습니다. 이미 죽어 고인이 되었으니 나라에서 공로에 대한 보답하는 조처가 실로 긍탄(矜歎)스럽습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을 추중하여 포상하고 구휼하는 두 가지의 뜻을 보여주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 공명수죽백(功名垂竹帛) : 옛날에는 기록을 대나무나 비단에다 해 두었기에 죽백이라 함은 기록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명을 죽백에 드리운다는 말은 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는 뜻이다.
죽(竹)은 대나무요 백(帛)은 비단이다. 옛날엔 기록을 대나무 쪽이나 비단 폭에 해 두었기 때문에 죽백(竹帛)은 곧 기록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공명(功名)을 죽백에 드리운다(垂)는 말은 큰 공을 세워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등우전(鄧禹傳)에 나오는 이야기다.
등우는 소년 시절 장안으로 가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역시 장안에서 공부하던 유수(劉秀)를 만나게 됐다. 유수는 훗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된 인물이다. 등우는 유수의 비범함에 끌렸고 둘은 다정하게 지내다 몇 년 뒤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세상은 난세로 새로 신(新)이란 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때 한나라 왕실의 후예로 반란군 대장에 오른 유현(劉玄)이 왕망을 몰아내고 황제로 추대됐다. 그이가 곧 갱시제(更始帝)다. 사람들은 등우를 갱시제에게 천거했으나 등우는 사양하고 갱시제를 섬기지 않았다. 갱시제의 인품이 하찮다고 봤기 때문이다.
얼마 후 유수가 황하(黃河) 이북 땅을 평정하러 떠났다는 말을 듣자 등우는 유수를 찾아갔다. 유수는 반가웠지만 내심 등우가 벼슬 하나 얻으려는 생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에 멀리 그를 찾아온 이유를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등우가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명공(明公)의 위엄과 덕망이 사해에 더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작은 힘이나마 바쳐 공명을 죽백에 드리우고자 합니다(但願明公威德加於四海 禹得效其尺寸 垂功名於竹帛矣).”
이 말을 듣고 유수는 등우를 곁에 두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유수가 자신의 세력이 작음을 한탄할 때 등우는 “천하를 손에 넣는 데는 덕(德)이 두터운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영토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아닙니다”와 같은 조언으로 유수의 힘을 돋우기도 했다. 오래지 않아 유수는 광무제로서 천자(天子)의 지위에 올랐고 이를 도왔던 등우의 공명은 죽백에 드리워져 널리 후세에 전하게 됐다. 공명수죽백은 이름이 천 년 동안 전해진다는 명전천추(名傳千秋)와 상통한다.
• 공명정대(公明正大) : 마음이 공명하며,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이 바르게 이뤄짐.
• 공불승사(公不勝私) : 공(公)과 사(私)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 공적인 일에도 사사로운 정이 끼여들게 마련이라는 말.
• 공산명월(空山明月) : ① 사람 없는 산에 외로이 비치는 밝은 달 ② “대머리”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
• 공석불난(孔席不暖) : 묵적(墨翟)이 자기의 도를 전하기 위해 천하를 동분서주 사에서 온 말.
공석불가난(孔席不暇暖)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공자(孔子)는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었다.[孔席不暇暖]” 하였는바, 이는 공자가 자주 돌아다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공석불난(孔席不暖) 공석(孔席)은 공자의 자리라는 말로, 난세를 구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을 형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후한(後漢)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게 그을릴 틈이 없다. 공석불난 묵돌불검(孔席不暖 墨突不黔)”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공석불난(孔席不暖) 공자가 도(道)를 행하기 위해 급급하게 천하(天下)를 돌아다니느라 오래 앉아 있을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다.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었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질 틈이 없었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공석아장(孔碩雅章) 윤길보(尹吉甫)가 신백(申伯)을 전송하며 지은 시경(詩經) 숭고(崧高)의 시에 “길보가 송을 지으니, 그 시가 매우 위대하도다. 길보작송 기시공석(吉甫作誦 其詩孔碩)”라고 하였다.
공선계[公膳雞] 공선은 대궐에서 대신에게 공적으로 먹이는 식사를 말하는데, 좌전(左傳) 양공(襄公) 28년 조(條)에 “공선은 매일 닭이 두 마리씩이다. 공선일쌍계(公膳日雙雞)”라고 하였다.
• 공수래공수거(空手來工手去) : 사람이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으로, ① 사람의 일생(一生)이 허무(虛無)함을 이르는 말 ② 또는, 재물(財物)을 모으려고 너무 욕심(慾心)을 내지 말라는 말.
空手來空手去是人生(공수래공수거시인생)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
生死去來亦如然(생사거래역여연)
獨一物常獨露(독일물상독로)
湛然不隨於生死(담연불수어생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여
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갈 때는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인 듯하고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자체가 실이 없나니
죽고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도다
그러나 여기 한 물건이 항상 홀로 드러나
담연이 생사를 따르지 않네
空手來 空手去하니 世上事 如浮雲이라
成墳墓 人去後면 月黃昏 山寂寂을
盞잡고 권하리없으니 눈물겨워 하노라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니
세상 일이 모두 뜬구름과 같다
무덤을 남기고 사람은 가버린 뒤라
달도 지고 어둑하니 산은 적막하고 고요하구나
잔잡아 권할 사람이 없으니 눈물만 앞을 가리는구나
조현명(趙顯命 1690-1752) : 조선조 영조 때의 상신(相臣) 호는 귀록당(歸鹿堂) 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워 풍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 청렴 검소하며 언행이 단정하고 강직하였으며 공사(公私)가 분명하였다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며 붕당(朋黨)에 참여하지 않음 문집으로 귀록집(歸鹿集)이 있으며 해동가요에 시조 5수가 전해짐.
또한《가곡원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空手來 空手去하니 世上事 如浮雲을
成憤人盡歸면 月黃昏이요
山寂寂이로다 져마다
이러헐 인생이 아니놀고 어이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
세상 만사가 마치 뜬구름과 같구나
매장 후 묘지 흙 모은뒤 장례손님 다 떠나고 나면
쓸쓸한 산위에 황혼달만 처량히 비치는 구나
이러헐 인생이 아니놀고 어이리
• 공언무시(空言無施) : 빈말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아니함
• 공전절후(空前絶後) : 비교할 만한 것이 이전이나 이후에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니 前無後無(전무후무)와 비슷한 한자성어다.
• 공중누각(空中樓閣) :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이나 말과 행동이 허황된 사람을 말하거나 진실성과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 또는 문장을 지칭할 때도 이 말이 쓰인다. 비슷한 말로 과대망상(誇大妄想)
송(宋)나라의 학자 심괄[沈括:호는 몽계옹(夢溪翁)]이 저술한 일종의 박물지(博物誌)인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유래됨.
몽계필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등주(登州)는 사면이 바다에 임하여 봄과 여름철에는 저 멀리 하늘가에 성시누대(城市樓臺)의 모습을 볼수 있다. 이 고장사람들은 이것을 해시(海市)라고 이른다.
동주사면임해 춘하시 요견공제 성시루대지상 토인위지해시(登州四面臨海 春夏時 遙見空際 城市樓臺之狀 土人謂之海市)
훗날 청(淸)나라의 학자 적호(翟灝)는 그의 저서《통속편(通俗篇)》에서 심괄이 이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언행이 허구에 찬 사람을 일컬어 “공중누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일을 인용한 것이다.
금칭언행허구자 왈공중누각 용차사(今稱言行虛構者 曰空中樓閣 用此事)
이 처럼 ‘공중누각’이란 말은 이미 청나라 때부터 쓰여 왔으며, 심괄의 글 가운데 ‘해시’라는 것은 ‘신기루’를 가리키는 말이다.
• 공평무사(公平無私) :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사로움이 없다’라는 뜻이다.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에서 유래했다.
‘위앙’이 위나라에서 도망하여 진나라로 왔다(衛鞅亡魏入秦). 진나라 ‘효공’이 그를 재상으로 삼고(孝公以爲相), ‘상’이라는 지역의 땅을 봉지(封地)로 하사하였다(封之於商). 이 때문에 그를 ‘상군’이라고 부른다(號曰商君). ‘상군’이 진나라를 다스리는데(商君治秦), 법령이 아주 잘 지켜지고(法令至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사로움이 없었다(公平無私). 벌을 줄 때에도 권세가 있는 귀족을 꺼리지 않고(罰不諱强大) 상을 줄 때에도 친근한 사람들에게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았다(賞不私親近). 태자가 법을 어겼을 때에도(法及太子) - 당시에는 태자에게 직접 형벌을 가하는 것이 어려워서 태자의 스승에게 벌을 대신 받도록 하였다 - 그는 태자의 스승에게 ‘묵형(墨刑 : 이마에 그 죄명을 칼로 파서 상처를 내고 먹물을 입혀 지워지지 않게 하는 형벌)’과 ‘의형(劓刑 : 코를 베는 형벌)’을 가하였다(黥劓其傅). 이렇게 법을 엄하고 공평하게 시행하며 일 년이 지나자(期年之後)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으며(道不拾遺), 백성들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은 함부로 취하지 않았다(民不妄取). 아울러 진나라의 군사력도 강대해져서(兵革大强) 다른 제후들이 두려워하였다(諸侯畏懼).
‘위앙(衛鞅)’은 바로 ‘상앙(商鞅)’이다. 그는 공평무사한 법집행으로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위아래 할 것 없이 전반적으로 법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툭하면 터지고 있는 부패와 독직, 사건 사고들의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 법집행에 문제가 있다. 특히 일부 사회지도층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국민들에게 위화감(違和感)을 조성하고 실망하게 한다. 심지어 우리 사회가 법치국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야말로 위로부터의 개혁과 엄한 법집행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전국시대(戰國時代)’와 같은 요즘,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상앙’과 같은 위인은 어디 없을까.
진평(陳平)은 한나라 초기의 명신이다.
그는 고조 유방을 여섯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내고 여태후가 유씨왕조를 찬탈했을 때 주발과 함께 한실의 사직을 구한 인물이다.
그의 능력은 항우와의 전쟁 때에도 나타났지만 치세에 더욱 빛을 발했다. 사실 진평은 소하와 장량, 한신에 비하면 2급 참모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자신의 분수를 지켜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고 그런 성품 덕분에 한신과 같이 팽(烹) 당하지도 않았다.
항우의 진영에 일하다가 망명해온 진평이 유방의 수하에 들어오기를 청했을 때 “형수와 간통 했다, 뇌물을 좋아 한다”는 등 온갖 참소가 끊이질 않아 유방은 진평의 등용을 주저했다.
이에 장량이 나섰다. “진평의 능력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가 궁핍해 저잣거리에서 계란 몇 알을 취했다 한들 천하를 취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주군께서 후(侯)에 만족하시려면 그를 영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천하를 도모하시려면 꼭 필요한 인재일 것입니다.”며 그의 등용을 권했다.
유방은 거만한 사람이었으나 한번 사람을 믿으면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겼기 때문에 진평은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다.
진평의 능력 가운데 으뜸은 ‘진평의 분육(分肉)’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일솜씨였다. 진평이 아직 고향에 서생으로 있을 때 마을에 사제(社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었는데, 진평이 제사에 올린 고기를 나눠주는 재(宰)가 되자, 고기 나누는 것이 매우 공평해져 마을 사람들의 분란이 없어지고 모두가 진평을 칭송했다.
이에 진평이 “이 진평을 천하의 재상으로 삼더라도 고기 나누듯 공평할 것인데…”라며 탄식했다. 단순히 한 마을 제사의 고기 분배를 넘어 천하의 복록을 백성들에게 고루 나눠주고자 하는 포부를 간직했던 진평은 꿈꾸던 대로 재상이 되어 한나라를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진평이 일찍이 도마 위의 제육(祭肉)을 나눌 때 그 포부는 이미 원대했다. 그는 늘 기이한 계책을 내어 복잡한 분규를 해결하였고, 국가의 환난을 제거했다. 여태후 때는 국가에 변고가 많았으나, 진평은 스스로 화를 면했고, 나라의 종묘사직을 안정시켜 영광스런 명성을 유지하고 어진 재상으로 칭송되었으니, 이 어찌 시작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라며 “진평이 성공한 것은 천하를 공평하게 하고자 한 성품과 대세를 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참 주인을 만나 재주와 충성을 다하였으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융통성을 발휘하여 적절한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진평을 높게 평가했다.
선거철인 요즘 이당 저당 할 것 없이 공천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번 선거 때만 해도 공천권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며 떠들며 경쟁하던 정당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슬그머니 그 권력을 호주머니에 넣고 정치지망생들을 줄세워 조자룡 헌칼 쓰듯 공천권을 휘두르기에 바쁘다.
기초단체장과 의원들에 대해 정당공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당한 여론이 분명히 있었지만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른 일에는 사사건건 개 거품을 물며 싸우면서도 이런 일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는지 며느리도 모르게 슬그머니 짬짜미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행해진 공천권이 진평이 고기 나누 듯 공평하거나 완벽한 공적인 절차를 거쳤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에 기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며 낙천을 한 사람도 자기의 능력과 공을 다른 이들과 비교해 보지 않고 혹시 자기 앞에 떨어진 고기의 근 수만을 탓하지 않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일찍이 공자는 나라를 유지 하는데 필요한 밥(食)과 군대(軍)와 믿음(信) 가운데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믿음을 꼽았다. 그 믿음은 공평무사로부터 나옴을 권력자들은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하는 법이다.
• 계신공구(戒愼恐懼) : 경계하고 삼가하며 두려워하다. 서경(書經) 대우모에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밀히 살피고 한 결 같이 해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 하였다. 계신(戒愼) 공구(恐懼)는 정(靜)할 때의 경(敬) 공부로 중용(中庸) 수장(首章)에 “도(道)란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니,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도가 아니다. 때문에 군자(君子)는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계신하며,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도 공구(恐懼)한다.”라 하였다.
• 계씨부주공(季氏富周公) : 계씨는 노(魯) 나라 대부(大夫) 계손씨(季孫氏)를 말하는데,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계씨가 주공보다 부하거늘 염구(冉求)가 그를 위해 부세를 더욱 많이 거둬들여 그를 더 부하게 만들어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계씨재(季氏宰) : 공자(孔子) 제자였던 중유(仲由)와 염구(冉求), 이 둘이 노(魯)의 국정을 제맘대로 요리했던 권신(權臣)계씨(季氏)의 가신(家臣) 노릇을 하였다. ❮論語❯
• 계야(季野) : 진(晉) 나라 때 명신(名臣)인 저부(褚裒)의 자(字)이다. 젊어서부터 고상(高尙)한 운치가 있어, 환이(桓彝)의 말에 “계야는 가슴속에 춘추(春秋)의 의리가 있다.”라 하였다. ❮晉書 卷九十三 褚裒傳❯
• 계양(桂陽) : 경기도 부평(富平)의 옛 이름이다.
• 계주생면(契酒生面) : 계모임에서 마시는 술로 생색을 낸다는 뜻으로 남의 물건으로 자기가 생색을 낸다는 의미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는 속담과 유사하다.
• 계포일락(季布一諾) : 계포가 한번 승낙함. 한번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킨다
마음속의 언약까지 굳게 지킨다는 季札(계찰)의 季札掛劍(계찰괘검)만큼, 季布(계포)라는 楚(초)나라 무장의 이름이 들어간 이 성어도 약속의 가치를 말해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장부의 한 말이 천금같이 무겁다’는 우리 속담도 있듯이 계포의 승낙을 받는 것이 일백 근의 황금을 얻는 것보다 낫다고 한 말에서 왔다.
계포는 項羽(항우)와 劉邦(유방)이 천하를 두고 각축하는 초한(楚漢) 전쟁 때 양쪽에서 모두 귀한 대접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한번 약속을 하면 끝까지 지키는 사람으로 평이 났다. 처음 항우의 장수로 출전해 여러 차례 유방을 괴롭혔다. 항우가 패망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뒤 계포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
천금의 상금을 걸고 계포의 목을 노렸지만 사람들은 신망을 받았던 그를 숨겨줬다. 주가(朱家)라는 협객은 유방의 측근에 손을 써 계포를 사면되게 했을 뿐 아니라 더하여 벼슬을 얻게 했다. 적지에 있게 되었어도 그는 시비가 명확하고 성심을 흐리지 않아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당시 초나라 사람으로 조구(曹丘)라는 사람이 뛰어난 변설로 실력자와 어울리고 있었다. 왕의 외숙인 두장군(竇長君, 竇는 구멍 두)에게도 뻔질나게 드나들자 계포는 조구를 멀리하는 것이 좋다고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듣고 조구가 도리어 소개장을 갖고 계포를 만나러 왔다. ‘초나라 사람들의 말에 황금 백 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승낙을 얻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동향인데 돌아다니며 당신의 이름을 천하에 날리게 할 수 있는데 어찌 멀리 하십니까’ 하고 말했다. 계포는 조구를 받아들이고 그 후 각국에 선전을 하여 더욱 명성을 높이게 됐다. ‘史記(사기)’ 계포난포(季布欒布, 欒은 단란할 란) 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 고희(古稀) :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70세를 가리킴. 두보의 시에서 나왔으며 고희는 희수(稀壽)라고도 한다.
조회가 끝나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
매일같이 강가에서 만취해 돌아오네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늘 있는 것이지만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네
꽃 사이로 나비 분분히 날아들고
잠자리는 물 위를 여유롭게 나는구나
듣자니 좋은 경치는 함께 다녀야 한다고
잠시라도 서로 즐겨 어긋남이 없자꾸나
조회일일전춘의(朝回日日典春衣)
매일강두진취귀(每日江頭盡醉歸)
주채심상행처유(酒債尋常行處有)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천화협접심심현(穿花蛺蝶深深見)
점수청정관관비(點水蜻蜓款款飛)
전어풍광공유전(傳語風光共流轉)
잠시상상막상위(暫時相賞莫相違)
- 두보(杜甫) ❮곡강이수(曲江二首)❯ 중 두 번째 시
나이별 이칭
나 이 |
이 칭 |
의 미 |
15세 |
지학(지학) |
학문에 뜻을 둠 |
16세 |
과년(瓜年) |
혼기에 이른 여자의 나이 |
20세 |
약관(弱冠) 방년(芳年) |
스무 살이 된 남성의 나이 수무 살이 전후한 여성의 나이 |
30세 |
입지(立志) 이립(而立) |
뜻을 세우는 나이 삼심 세를 달리 이르는 말 |
40세 |
불혹(不惑) |
미혹되지 아니함 |
50세 |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앎 |
60세 |
이순(耳順) 육순(六旬) |
듣는 대로 이해 할 수 있게됨 나이 예순 살을 이르는 말 |
61세 |
환갑(還甲) 회갑(回甲) |
육십갑자의 갑(甲)으로 되돌아옴 |
62세 |
진감(進甲) |
환갑의 이듬해 |
70세 |
고희(古稀) 칠순(七旬) 종심(從心) |
예로부터 드물다는 뜻 일흔 살을 이르는 말 |
71세 |
망팔(望八) |
여든을 바라봄 |
80세 |
팔순(八旬) 산수(傘壽) |
여든 살을 이르는 말 |
81세 |
망구(望九) |
아흔을 바라봄 |
88세 |
미수(米壽) |
팔심팔(八+八)을 모으면 이미(米)가 되는 데에서 생긴말 |
90세 |
구순(九旬) 졸수(卒壽) |
아흔 살을 이르는 말 |
91세 |
백수(白壽) |
백(百)자에서 일(一)을 빼면 백(白)자가 되는 데에서 나온 말 |
100세 |
상수(上壽) |
백 살 이상의 나이 |
111세 |
황수(皇壽) |
화제의 수명 또는 나이 |
120세 |
천수(天壽) |
타고난 수명 |
• 고고지성(呱呱之聲) : 아기가 세상에 처음 나오면서 내는 울음소리
• 고굉지신(股肱之臣) : 임금이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를 말하며, 다리와 팔과 같은 신하. 왕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를 비유하는 말이다.
순(舜)임금이 우(禹)와 대화를 하며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신하들은 짐의 팔과 다리요, 눈과 귀가 되어야 하오. 내가 백성들을 보살피려 하면 그대는 (날개가 되어)옆에서 도와주고, 내가 사방을 위해 노력하면 그대가 함께 해 주시오.(臣作朕股肱耳目, 予欲左右有民汝翼, 予欲宣力四方汝爲.)”』
이 이야기는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나온다. ‘익직’은 우의 신하인 백익(伯益)과 후직(后稷)을 말하는데, 우가 이 두 신하의 공을 널리 알리며 칭찬한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익직❯ 편이며, 여기에 기록된 순임금의 말에서 ‘고굉지신’이 유래하여 팔과 다리 같은 신하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같은 뜻으로 ‘고장지신(股掌之臣)’이 있고, 비슷한 말로는 ‘주석지신(柱石之臣)’과 ‘사직지신(社稷之臣)’이 있다.
• 고군분투(孤軍奮鬪) : 전장에서, 구원병이 없이 고립된 군사나 군대가 많은 수의 적군과 맞서 용감하게 잘 싸움.
• 고근약식(孤根弱植) : 외로운 뿌리, 약한 식목이라는 뜻으로, 친척이나 가까운 후원자가 없음을 말함
• 고담웅변(高談雄辯) : 도도하게 의논하다. 아무 거리낌 없이 의논함을 비겨 이르는 말.
• 고대광실(高臺廣室) : 규모가 굉장히 크고 좋은 집 ↔ 수간모옥(數間茅屋), 수간초옥(數間草屋)
• 고두사죄(叩頭謝罪) : 머리를 조아려 사죄함
• 고량자제(膏粱子弟) : 고량진미만 먹고 귀엽게 자라나서 고생을 모르는 부귀. 부귀한 집에서 고량진미만 먹고 귀엽게 자라나서 고생을 전혀 모르는 젊은이.
• 고량진미(膏梁珍味) : 살찐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 = 진수성찬(珍羞盛饌)
• 고립무원(孤立無援) :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음 = 진퇴유곡(進退維谷)
• 고립무의(孤立無依) : 외롭고 의지할 때가 없음
• 고마문령(瞽馬聞鈴) : 눈먼 망아지가 자신의 턱 아래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듣고 따라간다는 뜻으로, 맹목적으로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함을 이르는 말
• 고목발영(枯木發榮) : 말라 죽어 있는 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곤궁하고 운이 없는 사람이 행운을 만나서 잘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남을 뜻하는 말.
• 고목사회(枯木死灰) : 외형은 고목과 같고 마음은 타고 남은 재처럼 되어 생기가 없다는 의미, 의욕이 없는 사람을 뜻함.
• 고목생화(枯木生花) : 말라 죽어 있는 마른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뜻으로, 곤궁하고 운이 없는 사람이 행운을 만나서 잘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고복격양(鼓腹擊壤) : 중국의 요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태평성대를 즐겼다는 일에서 나온 말로, 태평한 세상을 즐김을 뜻하는 말.
먼 옛날 중국에 성천자(聖天子)로 이름난 요(堯) 임금이 선정을 베풀어 온 지도 어느덧 50년이 지났다.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 임금은 정말로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복(微服)을 하고 민정(民情)을 살펴보러 나갔다.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입아증민(立我烝民),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막비이극(莫匪爾極),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부지불지(不識不知),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순제지칙(順帝之則),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는 하얀 한 노인이
고복(鼓腹),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격양(擊壤), 발로 ‘땅을 구르며[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제력하유우아제(帝力何有于我哉),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이 이야기는 《열자(列子) ❮중니(仲尼)❯》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강구요❯가 유래했다. ‘강구’란 사통팔달의 도로를 말한다.
『상고시대에 아직 음악이 없었을 때 배를 두드리고 (발로)땅을 굴렀는데 즐거움이 거기에 있었다.(上古之時, 未有音樂, 鼓腹擊壤, 樂在期間.)』(《수서(隋書) ❮유림전(儒林傳) · 하타(何妥)❯》)
『우물을 파고 밭을 가는 사람은 자연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는 사람은 임금의 힘을 알지 못한다.(鑿井耕田者不知自然, 鼓腹擊壤者不知帝力.)』(당(唐) 노조린(盧照鄰) ❮익주지진관주려군비(益州至眞觀主黎君碑)❯)
‘고복격양’은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는 것을 말한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여가를 즐기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며, 이의 전고는 다음과 같다.
『요(堯)임금 때 천하가 태평하여 백성들에게 별일이 없었다. 80, 90세의 노인들이 (발로)땅을 구르며 노래를 불렀다.(帝堯之世, 天下大和, 百姓無事. 有八九十老人, 擊壤而歌.)』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밥 먹고 우물을 파서 물 마시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으랴
日出而作 日入而息
耕田而食 鑿井而飮
帝力於我何有哉
이는 요임금 때의 태평성대를 기록한 《제왕세기(帝王世紀)》의 내용으로, 노인들이 부른 노래에서 ‘고복격양’이 유래했다. 이 노래를 ❮격양가(擊壤歌)❯라고 하는데, 백발노인들의 ‘고복격양’에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왕의 존재를 잊고 있을 정도로 정치가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격양가❯는 여러 전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각 전적마다 마지막 절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예문유취(藝文類聚)》, 《악부(樂府)》, 《시기(詩紀)》에는 ‘帝何力於我哉’로 되어 있고, 《초학기(初學記)》에는 ‘帝力何有於我哉’로 되어 있으며,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帝何德於我哉’로 되어 있다.
장자(莊子)는 이 노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유유자적하며 생을 즐기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천하를 유유자적 거니니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다.(日出而作, 日入而息, 逍遙於天地之間而心意自得.)』(《장자(莊子) ❮양왕(讓王)❯》)
‘격양’은 나무로 만든 말굽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 두고 또 하나의 ‘양’을 멀리서 던져 맞히는 놀이라는 설도 있다.
• 고분지통(鼓盆之痛) : 물동이를 두드리는 슬픔이라는 뜻으로 아내가 죽은 슬픔을 이르는 말
‘고분지통 설화’는 부인이 죽었을 때 남편이 물항아리를 두드리며 가슴 아파하는 일의 유래를 설명하는 설화로 ❮장자(莊子)❯의 ‘지락편(至樂篇)’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
혜자(惠子)가 장자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갔는데, 장자는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鼓盆而歌). 이유를 묻자, 장자는 아내가 죽은 것이 사실은 천지 사이에 편히 쉬게 된 것이니 울지 않고 동이를 두드린다고 대답하였다. ❮고분지통의 유래❯는 부인이 죽어 남편이 물항아리를 두드린다는 부분은 ‘지락편(至樂篇)’과 같지만, 나머지 내용이나 주제는 아주 다르다.
『장자(莊子)의 부인이 죽자 혜자(惠子)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그대는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을 길렀고 이미 몸이 늙었네. 아내가 죽어서 울지 않는 것은 혹 모르지만, 동이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다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네. 아내가 죽었을 때는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하지만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면 원래 생명이란 것이 없었네. 생명만 없었던 게 아니라 형체조차도 없었지. 형체는 고사하고 기(氣)마저도 없었다네. 흐릿하고 아득한 사이에 섞여 있다가 변해서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해서 형체를 이루고, 형체가 변해서 생명을 갖춘 것인데, 지금 변해서 죽음으로 간 것이지. 이것은 봄 · 가을 · 겨울 · 여름의 사시가 운행하는 것과 같다네. 아내는 지금 (천지 사이의)큰 방에서 편안히 자고 있는데, 내가 큰소리로 운다면 내 자신이 천명에 통하지 못한 듯해서 울음을 그쳤다네.”(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子, 老, 身死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而本無形, 非徒無形也而本無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也.)』
이 이야기는 《장자(莊子) 〈지락(至樂)〉》에 나오는데, 장자가 부인이 죽자 동이를 두드리고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에서 ‘고분지통’이 유래하여 아내 잃은 슬픔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고분지척(鼓盆之戚)’ 혹은 ‘고분지탄(鼓盆之歎)’이라고도 한다.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은 성이 무너지는 아픔이란 뜻의 ‘붕성지통(崩城之痛)’이라고 한다.
원래 ‘고분지통(鼓盆之痛)’의 의미는 ‘물동이를 두드리며 서러워한다’는 뜻으로, 아내가 죽은 아픔을 말한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는 많이 변형되어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의 반응이 나오는 설화가 된다. 남편이 죽었는데 남편 무덤에 부채질하는 부인 이야기가 앞부분에 나오는 이본과 나오지 않은 이본이 있다. 부인 이야기가 없는 이본은 ‘남편의 아내 시험’이라는 통속적인 흥미로만 주목받았다. 남자 주인공으로 장자, 장주, 율곡이 등장하며, 부인은 외간 남자를 유혹하기도 하고, 그 남자가 요구하는 남편의 골수나 간을 꺼내 주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부인이 목매달아 자살하기도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남자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새로 만든 봉분 옆에서 부채질하고 있었는데, 죽은 남편이 묘의 떼가 마르기 전까지는 개가하지 말라고 유언하여 떼가 빨리 마르게 부채질을 한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만약 자기가 죽으면 개가하겠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절대 개가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자는 아내를 시험해 보려고 죽은 체하였다. 아내가 초상 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찾아왔다. 아내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 함께 살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몸져눕더니 다른 남자의 골을 파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말했다. 아내는 도끼를 가져와 남편의 머리통을 깨고 골을 파내려 하였다. 그때 남편이 일어나 무슨 짓이냐고 따졌다. 아내는 물을 길어 오겠다며 물동이를 이고 나가서는 남편을 볼 면목이 없어 우물에 빠져 죽었다. 남자는 물동이를 두드리며 자기가 너무 심한 짓을 하여 아내가 죽었다고 후회하였다.
‘고분지통’은 물동이를 두드리며 서러워한다는 뜻으로, 아내가 죽은 아픔을 말한다. 버치를 두드리는 슬픔이라는 뜻으로 ‘고분지척(鼓盆之戚)’이라고도 한다. 아내를 여읜 한탄을 뜻하는 말은 '고분지탄(鼓盆之歎)'이라 하며,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을 나타내는 것을 ‘붕성지통(崩城之痛)’이라고 한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장자(莊子, 기원전 369년∼289년)가 쓴 ❮장자❯지락편❮至樂編❯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다.
장자의 친구 혜자가 장자의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 갔는데, 장자는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있었다[鼓盆而歌]. 혜자는 장자에게 부인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에 금방은 슬펐지만, 인간은 본래 생명이 없었고 형체도 기(氣)도 없었으며 나중에 기가 생기고 기가 유형으로 변하고 형체가 생명을 갖추었다가 죽음으로 바뀌게 되었으니 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천지 사이에서 편히 쉴 테니 통곡하면 천명에 통하지 못하므로 울음을 그치고 동이를 두드린다.” 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내가 죽었을 때 동이를 두드리며 슬퍼한 장자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상처한 설움을 나타낸다.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과 사별 겪는 것은 다가오는 시기가 다를 뿐이지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일이다. 천수를 누려 생을 다하는 사별이면 그나마 아픔이 덜하겠지만 중간에 우여곡절로 사별하는 경우에는 그 슬픔과 아픔이 매우 크다.
그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남편이 죽으면 천붕지통(天崩之痛 ), 부인이 죽으면 고분지통(叩盆之痛 ), 형제가 죽으면 할반지통(割半之痛 ), 자식이 죽으면 상명지통(喪明之痛 )이라 표현하였다. 이 네 가지 아픔(四通) 중 고분지통은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나머지 3통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고 이해도 되는 것 같아 '인생은 고해'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해준다.
이 설화에서 남편이 거짓으로 죽은 체하여 자기 부인이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는 장면을 본다. 이것은 남편에게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고 고통이지만,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을 미리 경험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설화의 귀결점은 부인의 죽음과 남편의 후회다. 부인의 죽음은 남편의 관점에서 다른 남자를 가까이한 자기 부인에 대한 응징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부종사(一夫從事)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남편을 후회하게 만든 것은 그래도 부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보여 준다. 이 설화는 부부 사이의 충실성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하게 만든다. 또한, 가짜 열녀설화를 좀 더 일반화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 고색창연(古色蒼然) : 오래되어 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하다. 고색창연한 산사(山寺), 얼핏 보기에도 고색창연한 성벽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었다.
• 고성낙일(孤城落日) : 외따로 고립된 성과 서쪽으로 지는 해라는 뜻으로, 남의 도움이 없이 고립되어 세력이 다하고 있는 매우 외로운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고식지계(姑息之計) : 당장의 편안함만을 꾀하는 일시적인 방편, 미봉책(彌縫策)
• 고신원루(孤臣寃淚) :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
철령(鐵嶺) 노픈 峯(봉)에 쉬여 넘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고신원루)를 비 삼아 띄어다가
님 계신 九重深處(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엇더리.
광해군이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선조의 적자인 어린 영창 대군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려는 계략을 세우고 있었다. 작자는 이것을 반대하여,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철령 고개를 넘으면서 이 시조를 읊었다. 이것이 서울까지 퍼져 궁중에서도 불렀는데 광해군이 나중에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초장의 ‘철령 높은 봉’은 자신의 어려운 산황을 나타내며, ‘구름’은 귀양가는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임금의 궁궐에눈물의 비로 뿌려 본다면, 조금이나마 그러한 진심을 임금께서 알아주시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 비유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이항복(1556년∼1618년) 호 백사(白沙). 명종∼광해군. 벼슬은 선조 때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폐모에 반대하다 북청으로 귀양가 적소에서 죽었다. 임진왜란 중 난의 뒷수습을 하는 데 힘쓴 명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학을 잘 하여 야담에 일화가 많다. 백사집이 있다.
• 고신척영(孤身隻影) : 「외로운 몸과 하나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몸 붙일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신세(身世)를 이르는 말.
월백야 측혼추 (月白夜 蜀魂楸)
함수정 의루두 (含愁情 椅樓頭)
이제비 아문고 (爾啼悲 我聞苦)
무이성 무아수 (無爾聲 無我愁)
기어세상고뇌인 (寄語世上苦腦人)
신막등춘자규루 (愼莫登春子規樓)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
수심 품고 누머리에 기대 서니
네 울음 슬프구나 내 듣기 애달퍼라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수심도 없을 것을
여보소! 세상 근심 많은 분네
아예 춘삼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일자원금출제궁(-自寃禽出帝宮)
고신척영벽산중(孤身隻影碧山中)
가면야야면무가(假眠夜夜眠無假)
궁한년년한불궁(窮恨年年恨不窮)
성단효잠잔월백(聲斷曉岑殘月白)
혈류춘곡낙화홍(血流春谷落流紅)
천롱상미문애소(天聾尙未聞哀訴)
호내수인이독청(胡乃愁人耳獨聽)
원통한 새가 되어 한번 임금의 궁을 나옴으로 부터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에 있도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이 깊이 아니 들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이 다하지 않는도다.
우는 소리 새벽 첫부리에 끊어지니 지새는 달이 희였고,
뿜는 피 봄 골짜기에 흐르니 지는 꽃 붉었도다.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애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시는데,
어찌해 수심 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단종(端宗, 1441년∼1457년)
• 고심참담(故心慘憺) : 어떤 일을 하거나 생각해 내기에 몹시 애를 쓰며 근심 걱정을 많이 함
• 고운야학(孤雲野鶴) : 홀로 외로이 떠 있는 구름과 들에 사는 한 마리 학이라는 뜻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롭게 숨어사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산거(山居) 산속에 살면,
흉차청쇄(胸次淸洒) 가슴이 맑고 시원하니,
촉물개유가사(觸物皆有佳思) 접촉하는 사물마다 모두 아름다운 생각이 드니,
현고운야학(見孤雲野鶴) 외로운 구름과 들의 학을 보면,
이기초절지상(而起超絶之想) 세속을 초월한 생각이 떠오르고,
우석간류천(遇石澗流泉) 바위틈에 흐르는 샘을 만나면,
이동조설지사(而動澡雪之思) 깨끗이 씻고 싶은 마음이 일며,
무로회한매(撫老檜寒梅) 늙은 전나무와 차가운 매화를 어루만지면,
이경절정립(而勁節挺立) 굳센 절개가 우뚝 솟고,
려사구미록(侶沙鷗麋鹿) 물가 갈매기와 고라니나 사슴을 벗하면,
이기심돈망(而機心頓忘) 번거로운 생각이 까맣게 잊어지나,
약일주입진환(若一走入塵寰) 만약 한번 속세로 달려 들어가면,
無論物不相關() 물론 외물과 관계하지 않아도,
卽此身亦屬贅旒矣 곧 이 몸 또한 무용지물에 속하리라.
《채근담(菜根譚)》
• 고육지계(苦肉之計) :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꾸미는 계책.
삼십육계의 제34계. 제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꾸며내는 방책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계책을 말하며 고육지계(苦肉之計)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런 정의에 대한 오해 때문에 궁여지책이나 차선책과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일단 고육지책의 문자적인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육지책에서 ‘자해’는 필수요소다. 또한 자해를 하는 원인은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해를 하지 않는다”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누군가를 속이려는 목적이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궁여지책을 궁할 때만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궁여지책(窮餘之策)은 대부분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에서, 후한말에 오나라의 손권과 형주의 유비가 연합하여 조조의 100만 대군을 맞아 싸우는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직전의 일이다.
연합군인데도 주유와 사이가 안 좋던 제갈량이 계책으로 조조군의 화살을 수거해 가자, 그제서야 주유는 제갈량과 진심으로 뜻을 같이하여 조조군을 화공으로 격파하기로 한다. 이에 제갈량의 화살 도둑질 때문에 분노가 극에 달한 조조는 유비-손권 연합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순유의 제안으로 채중과 채화를 오나라에 간첩으로 보냈다. 이들은 본래 주유의 계략에 빠진 조조에게 억울하게 참살된 채모의 동생들이었으나, 진심으로 조조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채중과 채화는 주유에게 ‘채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투항했다’고 둘러대며 안전하게 주유의 진영에 잠입했다. 그러나 주유는 이미 그들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이에 감녕에게 그들을 잘 감시하라고 한다. 한편 황개는 주유와는 별개로 혼자 궁리한 끝에 조조를 화공으로 격파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를 주유에게 알리자 주유는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노쇠한 황개를 고육지책에 써먹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을 한다. 하지만 황개는 노익장을 과시했고, 결국 주유는 황개를 고육지책에 써먹기로 한다.
주유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조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며 만류하지만 황개는 “나는 손씨 3대 일가에게 두터운 은혜를 입은 몸이니 이 싸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 바치겠다.”며 주유에게 절을 하자 주유도 황개에게 맞절을 하며 계책을 의논하는 장면은 몇 안되는 오나라의 명장면이다.
이튿날 군사회의에서 주유가 “아무래도 싸움이 길어질 거 같으니 장수마다 3개월치 군량을 준비해라.”라고 하자 황개가 “이딴 식으로 질질 끌면 3개월이 아니라 3년이 걸려도 조조 못이긴다. 속전속결이 안된다면 차라리 자포(장소의 자)의 말대로 다같이 항복이나 하는 게 낫다.”라며 딴죽을 걸었다.
이 말을 들은 주유가 “신성한 군사회의 도중에 그따위 망언을 지껄이고도 무사하길 바라냐!”며 화내자 황개도 지지 않고 “나는 손씨 3대를 대대로 섬긴 충신인데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날 죽이겠다고?!”라며 받아친다. 이에 주유는 황개의 목을 베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황개가 나이도 있거니와 손견 때부터 일해온 충신이라 다들 말렸고 이 와중에 감녕은 주유의 명령으로 곤봉으로 매를 맞고 쫓겨나는 지경에 처한다.
결국 여러 사람들의 권유로 사형은 면했지만 대신 형벌로 곤장 100대가 내려진다. 하지만 곤장 50대에 황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가는데 여러 사람들이 다시 사정을 빌어서 주유는 오늘은 이만 때리겠다고 한다. 이를 본 채중과 채화는 이 소식을 조조에게 전했고, 황개 또한 감택에게 항복 문서를 보내 투항할 뜻을 표한다. 여기에 장간이 주유 진영에서 빼내온 방통까지 거짓 합류하면서 조조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게 된다.
여담으론, 노숙이 이를보고 제갈량에게 주유에게 용서를 구해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질책하나 제갈량은 이는 고육지계라며 노숙을 비웃는다. 연의에선 이 부분을 통해 노숙과 제갈량에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 고자표치(高自標置) : 스스로 자신을 높이고 교만함을 뜻함
• 고장난명(孤掌難鳴) : 한쪽 손뼉은 울릴 수 없다는 뜻. 시비는 혼자서 이뤄지지 않음 또는 혼자 힘으로는 일을 이루지 못한다.
• 고재질족(高才疾足) : 몸집이 크고 발이 빠르다는 말로, 뛰어난 활동가를 뜻함
• 고주일배(苦酒一杯) : 쓴 술 한 잔이라는 뜻으로 대접하는 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고중작락(苦中作樂) : 괴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이 있다는 뜻
인생은 고해(苦海)다. 이 괴로움의 바다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오래전에 배운 찬불가가 생각난다. “높고 높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그 공덕을 겁(劫)과 겁에 사뢰와도 어찌 모두 사뢰오리. 아 아승지(阿僧祗) 전세겁(前世劫)에 닦아 오신 원력(願力)으로 고해중생 건지시려 이 세상에 나오셨네.”
고해중생에게는 어떤 고(苦)가 있나. 우선 생명이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가 있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다. 몇 년 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나는 이제 생노병은 다 거쳤고, 사만 남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이 네 가지에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 네 가지를 더해 팔고(八苦)라고 한다. 추가되는 네 가지는 ① 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② 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③ 구부득고(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④ 오음성고(五陰盛苦):온갖 욕망이 쉬지 않는 고통이다. 오음은 생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종류대로 나눈 다섯 가지를 말한다.
고해중생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이렇게 종류가 많다. 현실 생활에서 많이 겪는 고통은 민생고 생활고 물가고에 취직난 구인난 결혼난 전세난 등 수없이 많다. 고와 난을 합쳐 고난이다. 이 고해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삼독심(三毒心)이다. 모든 죄악의 근본이 되는 세 가지 나쁜 마음은 탐욕심(貪欲心) 진에심(瞋恚心) 우치심(愚癡心), 줄여서 탐진치(貪瞋癡)다. 탐내고 성을 내고 어리석은 탓이다.
탐진치를 버리고 번뇌와 망상을 끊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고중작락(苦中作樂), 괴로운 가운데 즐거움이 있다는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이 말은 대보적경(大寶積經)이라는 경전에 나온다고 한다.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만들며 살자고 해석하면 더 좋을 것 같다.
• 고진감래(苦盡甘來) :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 ↔ 興盡悲來(흥진비래)
• 고추부서(孤雛腐鼠) : 외로운 병아리와 썩은 쥐라는 뜻으로, 보잘것없고 천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고침단금(孤枕單衾) : 외로운 베개와 홑이불이라는 뜻으로, 젊은 여자가 홀로 쓸쓸히 자는 잠자리를 이르는 말.
• 고침단명(孤枕短命) : 베개를 높이 베면 오래 살지 못함
• 고침이와(高枕而臥) : 베개를 높이하고 잠. 마음 편안히 잠잘 수 있음.
고대 중국, 폭정(暴政)을 일삼던 은(殷, 商)나라 주왕(紂王)을 목야(牧野)의 싸움으로 멸(滅)하고 패권(覇權)을 쟁탈(爭奪)한 주(周)나라는 중원을 평정하며 거대한 영토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본래 주나라의 근거지였던 호경(鎬京)을 종주(宗周)로 하고 낙양(洛陽) 부근에 성주(成周)를 건설하면서 서주시대(西周時代)를 여는데, 효율적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하여 각 지역에 제후국(諸候國)을 두게 된다. 이 제후국들은 각 왕족 또는 태공망 여상(太公望 呂尙;姜太公)과 같은 공신들이 일정 지역의 영토를 할당받아 제(祭)를 지내며 대대손손 통치하는 봉건체제(封建體制)의 동양적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기원전 770년 제후들에 의해 주나라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지게 된 때를 기점으로 동주시대(東周時代)가 열렸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시작이다. 이 시대에는 쇠락해가는 주나라를 보위하며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는 일, 즉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를 주도적으로 지휘하는 제후를 패자(覇者)라 지칭하며 이러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위해 각 제후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씨를 말려버린 오월쟁패(吳越爭覇) 이후 중국은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켜야 하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넘어간다. 전국시대는 기원전 400년대 춘추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진(晉)나라 삼대부(三大父)가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면서 독립적인 제후국으로 인정되는 시기를 기점으로 시작되는데, 충성(忠誠)과 신의(信義),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표현되는 일관된 철학(哲學)이 더 이상 생존의 덕목(德目)이 될 수 없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의 책략(策略)이 중요시되고, 그의 대표적인 유세객(遊說客)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활약하던 시기가 바로 이 전국시대이다.❮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세력판도를 ‘진본기(秦本記)’, 효공(孝公) 원년, 기원전 361년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산(河山) 동쪽에 여섯 강국의 제후, 즉 제(齊)나라의 위왕(威王), 초(楚)나라의 선왕(宣王), 위(魏)나라의 혜왕(惠王), 연(燕)나라의 도왕(悼王), 한(韓)나라의 애왕(哀王), 조(趙)나라의 성왕(成王)이 나란히 힘을 겨루고 있었다.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주변에는 십여 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는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주왕실은 쇠약해졌으며, 제후들은 정치에 힘을 기울이고 다른 나라를 병합하려고 서로 다투었다. 진나라는 변경에 치우친 옹주(雍州;지금의 섬서성)에 위치하여, 중원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지 않고 이적(夷狄)과 상대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하는 연(燕), 위(魏), 조(趙), 한(韓), 제(齊), 초(楚), 진(秦), 연(燕) 등의 7국이 바로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서 제후들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고 봉토(封土)는 국토(國土)가 되어 각국은 말 그대로 독립적인 왕국으로서 각 지역에 할거(割據)하게 된다. 그나마 주나라 왕실이 형식적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나라도 혼자 힘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룰 만큼 강력하지 못해 괜히 왕실을 도모했다가는 반역자(反逆者)로 몰려 다른 여섯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므로 500년이 흐른 후에 나타난 ‘천하삼분(天下三分)’이 아닌 ‘천하칠분지세(天下七分之勢)’를 이룰 수밖에 없었기에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과 외교책(外交策)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우선 소진은 낙양 사람으로서 일찍이 유세를 배우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풍요로웠던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건너가 귀곡선생(鬼谷先生)이라는 일종의 선인(仙人)의 문하에서 외교전략을 전수받는데 이때 소진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수제자가 바로 장의였다고 한다, 전한시대(前漢時代) 유향(劉向)이 지었다는❮전국책(戰國策)❯이나 사마천의❮사기(史記)❯에서는 소진은 항상 자신이 장의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장의의 연횡책을 채용한 진나라가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결과를 가지고 추론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쨌든 당시의 정세로 보면 동쪽에는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연(燕), 초(楚) 등의 여섯 나라가 서로 이웃하고 있고 함곡관(函谷關) 서쪽에 문화적으로 고립된 진(秦)나라가 웅거하고 있는 상황으로서 6국은 기존의 오랜 관습이나 가신집단들의 이전투구로 인해 부국강병을 위한 국책들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변방에 위치하고 있던 진나라는 타국 사람들의 등용이나 형명학적(刑名學的) 법가사상의 채용 등을 통해 민중에 대한 억압적 철권통치를 기반으로 점차 군사강대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나온 외교전략이 바로 여섯 나라 사이의 합종이냐, 신흥강대국 진나라와 개별적으로 외교를 맺는 연횡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복잡한 외교술인 합종연횡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종횡가들은 귀곡선생의 문하를 나온 이후 한참 동안을 한량처럼 떠돌아다녀야 했다. 먼저 소진은 진나라로 가서 처음에는 연횡책을 유세하였지만 아직 국력이 다져지지 못하여 외교보다는 내치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혜문왕의 말에 좌절을 맛보아야 했고, 장의는 초나라로 가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중 도둑으로 의심받아 유세객의 재산인 ‘입’만 살아남을 정도로 얻어맞고 쫓겨나야 했다. 이는 전국시대 초기 유세객에 대한 불신의 여론을 반영하고 있다. 이후 소진은 강태공의 저서인❮음부경(陰符經)❯을 통해 췌마술(揣摩術), 즉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도 모르게 결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설법을 통달하고 약소국 연나라 왕을 설득하여 이번에는 합종책을 제시, 신임을 얻고 결국 합종을 통한 6국의 재상이 된다. 그러나 당시의 천하통일은 외교만으로는 안되는 것. 결국 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를 삼켜야만이 가능한 것이었으므로 합종책은 그 스스로 불완전한 책략이었다. 이에 소진은 조나라에 있던 시절, 아직까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장의를 불러들여 일부러 괄시를 하고 그의 승부욕을 부추긴 후 조나라에 앙심을 품고 진나라로 쫓아가도록 한다. 이때 소진은 자신의 수하에게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장의를 쫓아가게 하는데, 진나라로 간 장의는 연횡책을 제시함으로써 소진의 합종책으로 위기를 느낀 혜문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객경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고 이 과정에서 소진의 명에 따라 장의를 쫓아간 소진의 수하가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 진나라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물질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다름아닌 소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장의는 ‘소진이 있는 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서 6국을 침범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고 하는데 결국 소진의 합종책이나 장의의 연횡책은 서로 상응(相應)하지 않으면,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터라 장의의 탄식은 하나마나한 것이었다는 것을 소진은 물론 장의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진나라 재상에 올라 처음으로 초나라를 치고 위나라를 공격한 장의는 이후 진나라와 짜고 위나라로 건너가 위나라의 재상이 된다.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놓고 고심하던 위나라 애왕에게 장의가 말한다.
“위나라의 땅은 사방 천 리가 되지 않고 군대도 30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사방이 모두 평지로 되어 있어 다른 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위나라는 사방 국경의 초소와 요새를 지키는 데만도 10만명의 군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남으로 초나라와 화친하고 제나라와 거리를 두면 제나라가 동쪽을 공격할 것이고, 제나라와 화친하고 조나라와 거리를 두면 조나라가 북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한나라와 화친하지 않으면 한나라가 서쪽을 공격할 것이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초나라가 남쪽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른바 사분오열(四分五裂)의 형세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후들이 합종을 맺는 것은 나라를 안정시키고 왕의 지위를 보장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어 나라의 명예를 빛내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합종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천하를 하나로 묶어 형제의 맹약을 맺게 했습니다만, 친형제조차 재물을 다투는 법인데 사기와 배신을 일삼는 소진의 하찮은 계책에 의지하고 있으니 실패로 돌아갈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공격할 것이고, 조나라가 구원하지 못한 채 합종의 약속은 깨지고 위나라는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왕을 위해 한 계책을 말씀드리자면 진나라를 섬기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나라와 한나라는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왕께서는 근심이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누워 주무실 수 있습니다(高枕而臥). 합종론자들은 말주변은 좋지만 믿을 만한 말이 없습니다. 제후 한 명을 설득하면 벼슬을 얻기 때문에 천하의 유세객들이 모두 눈을 휘번득거리면서 합종을 내세워 군주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벼운 깃털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고, 가벼운 물건도 너무 싣게 되면 수레가 부서지며, 여러 사람이 떠들면 쇠도 녹이고, 비난을 계속 받으면 뼈도 삭는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잘 생각하시어 나라를 보존하옵소서, 신은 이만 물러나 위나라를 떠나려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위나라와 진나라의 연횡을 성사시킨 장의는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으며 또 다시 제나라로 넘어가 연횡책을 유세한다.
고침이와(高枕而臥) 또는 고침안면(高枕安眠)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자다. 즉 아무 걱정없이 지낸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다. 이는 강대국 진나라와 약소국들간 이합집산의 대립상태에서 강대국과 손을 잡는 것이 상책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면서 인용한 문구인데, 결국 베개를 높이 하고 편하게 잠을 자는 사람은 강대국에 종속된 약소국 사람이 아니라 약소국을 지배하는 강대국 사람이라는 점에서 현실과는 정반대의 표현이긴 하지만 주객과 본말이 전도된 논리임에도 연횡의 목적을 이루는 이러한 힘이 바로 유세가들의 언변인 것이다.
이후 혜문왕이 죽고 무왕이 등극하자 태자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못하던 장의는 제나라는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위나라로 가면 제나라는 위나라를 칠 것이므로 그 사이에 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거머쥐라는 계책을 내고는 위나라로 돌아가서 재상이 되었고 1년후 병사한다.
한편, 소진이 합종책을 유세하여 6국의 재상이 된 이후 진나라는 15년 동안이나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간은 합종을 통해 서로 의심을 하느라 6국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동안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탄탄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준 준비기간이 되어주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진나라가 제나라와 위나라를 꾀어 조나라를 함께 침으로써 합종을 깰 계책을 마련하고 제나라와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조나라 왕으로부터 명을 받은 소진이 연나라로 가서 함께 제나라를 칠 것을 제의하였으나 거절당함으로써 합종책은 붕괴되고 만다. 한편, 진나라는 연나라와 연횡하기 위해 공주를 연나라 태자에게 시집을 보냈고, 그 무렵 연나라가 상중인 틈을 타서 제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나라 왕은 소진을 불러 비난하였고 소진은 제나라로 가서 왕을 만났다.
“굶어 죽어도 독초는 먹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을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나라가 약소국이긴 하지만 진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연나라의 10개 성을 빼앗았지만, 장차 연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빌려 쳐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곧 굶주렸다고 독초를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하는 자는 화를 복으로 바꿀 줄 안다(轉禍爲福)’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빼앗은 열 개의 성을 지금 즉시 돌려주시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나라는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며 진나라 왕도 기뻐할 것입니다. 옛날 환공(桓公)께서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아무런 대가 없이 되돌려줌으로써 천하의 패자가 되었듯이 왕께서도 반드시 패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재앙이 오히려 복이 되다, 화를 복으로 만들다, 현재의 어려움을 바꾸어 이로움으로 만들다 등의 의미이다. 이 또한 유세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서 제나라가 성을 빼앗은 것은 애당초 화(禍)도 아니었을 뿐더러 성을 연나라에 반환하는 것 또한 별로 복(福)될 것도 없었던 것이었으나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제나라 군주의 심중을 이용하여 연나라의 재신임을 얻기 위한 소진의 간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나라 왕은 즉시 빼앗은 성을 연나라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소진은 제나라에 머물고자 했으나 이곳저곳에 나라를 팔고 두 마음을 품은 자이므로 곧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소진을 비난하는 여론이 드세었다. 이에 소진은 연나라로 돌아왔지만 연나라왕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에서 보았듯 다시금 연나라의 신임을 얻고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합종을 꾀하다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소진은 한참 후에 아무런 변고 없이 병사한 라이벌 장의와는 달리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긴 하였지만 죽어가면서도 제나라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 ‘소진은 연나라의 첩자였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자객이 자수를 하게 만들고, 결국 그 자객을 참수시킴으로써 복수를 하고 만다. 역시 마지막까지 ‘종횡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다.
원칙과 일관성이 아닌 간책과 술수만이 처세(處世)가 되던 전국시대, 그리고 임금삭감없는 주5일 근무제가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화(禍)가 되고 고삐풀린 효율과 이윤의 추구만이 오히려 복(福)이 된다고, 그래야 모두가 ‘고침이와’할 수 있다고 지배자들이 열심히 떠들고 있는 지금의 시대. 전도된 본말을 다시금 뒤집을 수 있는 정세판단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 고화자전(膏火自煎) : 기름 등불이 스스로 저를 태워 없애는 것과 같이 재주 있는 사람이 그 재주 때문에 화(禍)를 입는 경우를 비유(比喩)하여 이르는 말.
산목자구 고화자전(山木自寇 膏火自煎)
계가식고벌지 칠가용고할지(桂可食故伐之 漆可用故割之)
인개지유용지용 이부지무용지용야(人皆知有用之用 而不知無用之用也)
산의 나무는 자신을 베고 기름은 불을 밝혀자신을 태우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이고 옻나무는 쓰임새가 있어 잘리네
그러니 이들의 쓸모 없는 쓰임(無用之用)이야말로 유용지용을 능가하는 더 큰 쓰임이 아닌가. 유용지용(有用之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 춘추시대 초(楚)나라의 현인이자
은자(隱者)였던 접여(接輿/육통 陸通)가
공자(孔子)를 보고 했다는 말이다.
접여는 평소 미친 척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초나라의 미치광이(狂人)’라고 불렀다.
산의 나무는 도끼자루(柯)를 만드는데 쓰인다
그 도끼는 결국 나무 자신을 베게 된다.
바로 도끼자루라는 쓰임새(有用) 때문에 자신을 베게 된 것이다.
향초는 향기라는 쓰임새 때문에 자신을 태우게 되고,
기름은 불을 밝힐 수 있는 쓰임새로 인해 자신을 녹이게 된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는 쓰임새, 옻은 칠을 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베이고 이것이 접여가 말하는 ‘쓰임새 있는 쓰임’, ‘쓸모 있는 쓰임(有用之用)’알고 보면 유용지용(有用之用)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을 헤치는데 쓰이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쓸모 없는 것들은 베이거나 잘려나가는 법이 없다. 산과 들의 이름 없는 꽃과 초목들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산과 들을 지키는 이 이름 없고, 도무지 쓸모 없는 초목들. 이들이야말로 천지의 주인공이고, 건곤의 자식들이다.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고, 땅에 가뭄과 홍수가 들 때도 묵묵히 지키는 것은 이들이다. 이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도 동물도 목숨을 부지하게 되며 생태계가 유지된다.
그러니 이들의 쓸모 없는 쓰임(無用之用)이야말로 유용지용을 능가하는 더 큰 쓰임이 아닌가. 유용지용(有用之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용지용(無用之用)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출처 : 장자의 - 남화경(南華經) 중에서
• 고황지질(膏肓之疾) : 깊이 든 병고치기 어려운 병이나 버릇
고황에 든 병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膏(고)는 심장 아래 부분의 작은 비계, 肓(황)은 가슴 위의 작은 막으로 심장과 횡격막 사이를 말한다. 만약 병균이 이곳에 침범하면 고치기가 어렵다고 전해진 곳이다. 몸 깊은 곳에 병이 들었으니 침이 미치지 못하므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뜻이 넓혀져 사물의 고치기 어려운 병폐나 나쁜 버릇을 가리키게 되었다.
孔子(공자)의 春秋(춘추)를 주석하는 春秋三傳(춘추삼전) 중에서도 역사적 실증적 해석을 중심으로 한 左丘明(좌구명)의 ‘左氏傳(좌씨전)’에 이 말이 사용됐다. 晉(진)나라의 景公(경공)이 병이 위독해져 秦(진)나라에 명의를 부탁했다.
秦伯(진백)은 醫緩(의완)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했다. 의사가 도착하기 전 경공이 꿈을 꾸었는데 더벅머리 두 총각으로 변한 병이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 놈이 ‘그 사람은 용한 의사라던데 우리가 어디로 숨어야 하지?’ 하고 말하니 다른 놈이 답하길 ‘황의 위쪽과 고의 아래쪽에 가 있으면 그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의원이 와서 진맥하더니 병을 고칠 수 없다며 말했다. ‘병의 뿌리가 황의 위쪽과 고의 아래쪽에 있어 뜸을 할 수도 없고 침을 찔러도 닿지 않으며 약을 써도 미치지 못합니다(在肓之上膏之下 攻之不可 達之不及 藥不至焉 /재황지상고지하 공지불가 달지불급 약부지언).’ 成公(성공) 10년 조에 실려 있다.
이렇게 고황에 든 병은 명의도 고칠 수 없다고 痼疾(고질)이라고도 했다. 痼(고)는 훈도 고질 고이지만 병중에서도 단단히 난(固) 병이고 疾(질)은 화살(矢)처럼 빠른 설사, 복통, 식중독 같은 급성질병을 말한다. 疾은 고칠 수 있어도 고(痼)는 암이나 당뇨병 같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이라 고황과 통한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비유하는 泉石膏肓(천석고황)은 고황이라도 좋은 고황이다
• 견리사의(見利思義) : 눈 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함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이익을 보면 의로운지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라는 말이 있다.
자로(子路)가 성인(成人)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는 지혜, 청렴, 용기, 재예, 예악(禮樂)을 두루 갖춘 사람이 성인이라고 대답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금지성인자(今之成人者) 하필연(何必然)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구요(久要) 불망평생지언(不忘平生之言)
역가이위성인의(亦可以爲成人矣)
오늘날의 성인이야 어찌 반드시 그러하겠는가? 이로움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오래 전의 약속을 평생의 말로 여겨 잊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성인이라 할 수 있다.
지혜와 용기와 재주에 예악을 겸비해야 진정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세상에서는 이 세 가지만 갖추어도 인격을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익을 보면 의를 생각한다는 것은 눈앞의 이익을 보면 그것이 옳게 얻는 것인지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문장에서 見利思義(견리사의) 見危授命(견위수명)은 이익을 보거든 정당한지 살피고 국가가 위태로우면 목숨까지 바친다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말이기도 하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견리사의(見利思義)이다.
견리사의(見利思義)란 이익을 보면 의로운지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눈앞의 이익을 보면 그것이 옳게 얻는 것인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 견마지로(犬馬之勞) : 개나 말 정도의 하찮은 힘이란 뜻으로 자기의 노력을 낮추어 일컫는 말. 윗사람에게 바치는 자기의 노력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견마지로(犬馬之勞) 뜻 유래
임금과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을 나타내면서 자신을 하대하는 말로 쓰이는 견마지로는(犬 개 견, 馬 말 마, 之 갈 지, 勞 힘쓸 로)이루어진 말이다.
유래는 딱히 있지는 않지만 견마지로는 사실 개와 말이 하듯 하는 하찮은 힘이나 수고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왕이나 나라에 충성하는 자신을 스스로를 낮춰 이르는 말이나 다짐 혹은 맹세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여기서 개와 말을 뜻하는 '견마'는 비천한 신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며 견마지성, 견마지심이 있고, 유사한 표현에는 한마공로, 한마지로 등이 전한다.
가령 예를 들어 한 신하가 임금에게 말하길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앞으로 견마지로를 다해 전하를 보필하겠나이다.”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나름 인권의 문제도 있고 거의 쓸일이 없는 말이긴 하나 간혹가다 직장상사나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알랑방귀를 뀌는 사람들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아부를 하기도 한다.
한마지로(汗馬之勞) 뜻 유래
견마지로와 비슷한 뜻을 가진 한마지로에는 유래가 전해진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평정한 후 소하의 공을 치하하며 가장 많은 땅과 상을 내렸다. 그러자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여러 신하들이 불만을 갖고 한 고조에게 말하기를 “저희는 몸에 갑옷을 입고 손에는 무기를 잡고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소하는 한번도 한마지로를 다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고조는 이렇게 말한다.
“사냥에서 토끼를 쫓아가서 잡는 것은 사냥개지만 개의 줄을 놓아 짐승을 잡는 것은 사람이다. 소하의 공은 개를 시켜 짐승을 잡게 하는 사람과 같다.”
이처럼 견마지로나 한마지로는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굳은 맹세와 충성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 견마지성(犬馬之誠) : 개나 말의 정성(精誠)이라는 뜻으로, ①임금이나 나라에 바치는 정성(精誠) ② 남에게‘자기(自己)가 바치는 정성(精誠)’을 아주 겸손(謙遜)하게 일컫는 말
존양지의(存羊之義)-낡은 예의(禮儀)나 허례(虛禮)를 버리지 못하고 그냥 남겨둠을 이르는 말
고고영정(孤苦零丁)-가난하게 되어 남의 도움 없이 고생함
박학심문(博學審問)-널리 배우고 자세(仔細)하게 묻는다는 뜻으로,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태도(態度)
걸인연천(乞人憐天)-거지가 하늘을 불쌍히 여긴다는 속담(俗談)의 한역으로, ①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는 말 ② 불행(不幸)한 처지(處地)에 있는 사람이 행복(幸福)한 사람을 동정(同情)한다는 말
진합태산(塵合泰山) 티끌 모아 태산(泰山)
전화위복(轉禍爲福)-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어떤 불행(不幸)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努力)과 강인(强靭)한 의지(意志)로 힘쓰면 불행(不幸)을 행복(幸福)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
일모도원(日暮途遠)-날은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이미 늙어 앞으로 목적(目的)한 것을 쉽게 달성(達成)하기 어렵다는 말
열감무정(悅感武丁) 부열(傅悅)이 들에서 역사(役事)하며 무정(武丁)의 꿈에 감동(感動)되어 곧 정승(政丞)에 됨
송구영신(送舊迎新)-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뜻으로, 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 ②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함
• 견마지양(犬馬之養) : “오늘날 효는 부양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개나 말도 새끼를 먹여 키우는데,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개나 말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즉, 부모를 소홀히 대접하고 공경하지 않음을 뜻함.
자유는 공자의 제자로서 성은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이며 자유는 그의 자이다. 공자보다 45세 아래였다고 한다. 「예운」에서 공자에게 예의 기원을 물어본 제자이기도 하다.
「위정편」은 정치를 주제로 논한 편인데 ‘효’가 자주 언급된다. 공자에게 있어서 효와 정치의 관계는 무엇이 길래 효가 빈번하게 등장하는가? 나는 공자에게 있어서 인(仁), 도(道), 성(聖)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은 한 사람의 차원이고, ‘도’는 한 나라의 차원이며, ‘성’은 천하의 차원일 뿐이다. ‘추기급인(推己及人)’의 다른 양상이다. 공자의 ‘인’을 굳이 묵자의 ‘겸애’와 비교해 설명한다면 공자가 그리는 ‘원’은 그 중심에 ‘자신(己)’이라는 핵이 존재하는 동심원이고, 묵자가 그린 원은 핵이 없는 하나의 큰 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의 원은 핵의 역량이 강해질수록 그 파장과 파괴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그 결과물인 파급 효과가 더욱 멀리까지 미칠 수 있다.
「위정편」에서 공자가 천하를 말하고 한 나라의 정치를 말하면서 효를 빈번하게 언급하는 까닭이다. 효는 한 사람의 인을 강력하게 만드는 주요 동력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 “수신 후 제가, 제가 후 치국, 치국 후 평천하.”의 순서가 되고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수신’이 중핵을 이루는데 수신에 동력을 제공하는 기반 역시 같은 책에 소개되어 있다. “격물格物하여 치지致知, 치지하여 성의意誠, 성의하여 심정心正, 심정하여 수신修身 …” 그 다음은 위와 같다. ‘격물치지’ 곧 배움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고 수신이 중핵이다.
『논어집해』: 포함이 말한다. “개는 집을 지키거나 사람을 따르고, 말은 사람의 수고를 덜어줌으로써 사람을 부양한다. 혹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개나 말까지도 먹여 길러주는데,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부모를 공양하는 것과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 견마지충(犬馬之忠) : 개나 말처럼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충성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 견마지치(犬馬之齒) : 개나 말의 나이라는 뜻으로, 견마가 부질없이 나이만 더하듯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나이를 먹는 일을 의미하거나, 자기의 연령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말. 견마지령(犬馬之齡), 견마지년(犬馬之年)
• 견문각지(見聞覺知) : 따로 따로 의미를 가진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 네 자가 합쳐진 것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진실로 바히야여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보임에는 다만 보임만 있을 뿐, 들림에는 다만 들림만 있을 뿐, 지각됨에는 다만 지각됨만 있을 뿐, 식별됨에는 다만 식별됨만 있을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그곳에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바히야여 견문각지에는 다만 견문각지만 있을 뿐이니라!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와 함께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 속에 있지 않으며, 바히야여 그대는 견문각지 이편에도 저편에도 그 중간에도 있지 않다” — 이 설법이 부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실시간으로 바히야에게서 속속들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은 바히야가 이 간략한 교법을 듣고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하였다”고 전한다.
• 견문발검(見蚊拔劍) : 하찮은 일에 너무 크게 허둥지둥 덤벼 든다- 모기를 보고 칼을 빼어 든다.
• 見蚊拔劍(견문발검) : 모기를 보고 검을 뺀다는 뜻으로 작은 일을 가지고 크게
• 견물생심(見物生心) : 직역하면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겨난다, 즉 무엇인가를 보면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물론 무언가를 보면 갖고 싶다고 느끼는 것, 즉 욕망이란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가지는 감정의 하나이므로 크게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으나 이 사자성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에 대한 절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지 욕망을 느끼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 견사생풍(見事生風) : 일을 당하면 빨리 처리하는 손바람이 난다는 뜻으로, 일을 시원하게 빨리 처리한다는 뜻이다. 우사생풍(優事生風)
《한서》의 조광한전(趙廣漢傳)에서 나왔다. 한(漢)나라 때 탁군(涿郡)사람인 조광한이 경조윤에 있을 때였다. 마침 소제(昭帝)가 죽어 경성 근교 풍현이라는 곳에 경조관(京兆官)인 두건(杜建)이 소제의 능원을 관리했는데 그는 직위를 남용하여 비행을 저질러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조광한이 이 사실을 알고 두건에게 그만둘 것을 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조광한이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자 경성의 세도가들이 압력을 해왔지만 그러나 조광한은 그를 참형으로 다스렸다. 이것을 《한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일을 보면 바람이 일고 회피하는 바가 없다(見事生風 無所回避).” 그러나 조광한은 결국 칼 같은 성격 때문에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죽고 말았다.
• 견설고골(犬齧枯骨) : 개가 말라빠진 뼈를 핥는다는 뜻으로, 음식이 아무 맛도 없음을 이르는 말.
• 견아상제(犬牙相制) : 개의 어금니가 서로 맞지 않는 것, 국경선이 볼록 나오고 오목 들어가 서로 견제하려는 형세
• 견여금석(堅如金石) : 서로 맺은 맹세가 금석과 같이 굳음
• 견여반석(堅如盤石) : 기초가 반석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함을 이르는 말. 완여반석(完如盤石)
• 견원지간(犬猿之間) : 개와 원숭이 사이로 사이가 몹시 나쁨.
다음은 서유기에서 따왔습니다. 서왕모 마마의 파티에 초대받은 관세음보살이 머나먼 남해보타낙가산(南海普陀落迦山)에서 와 본즉 파티는 맹랑하게도 중지됐다. 별안간 시국은 어지러워져 손오공 토벌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천군의 사기(士氣)가 좋지 못하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체면상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제자인 혜안(惠岸)이라는 행자(行者)를 전황시찰을 겸해 응원을 보냈다. 혜안은 이천왕(李天王)의 둘째 왕자로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이름 높은 혜안도 손오공의 비법엔 당하지 못하고 면목없이 돌아올 지경이 되었다.
이쯤되자 천계에선 새롭게 어전회의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 결과 옥황상제의 조카로 무술과 기운이 천하제일이라는 이랑진군(二郞眞君)에게 원병을 청하기로 했다. 상제의 사자(使者)를 진군에게 안내한 사람은 종규(鍾馗)였다. 전설에 따르면 종규는 당나라 때의 선비였다고 한다. 과거(科擧)에 몇 번씩이나 응시했지만 그 때마다 떨어졌고 드디어 비관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후하게 장사를 지내주자 망령(亡靈), 즉 죽은 귀신이 된 종규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세상 사람을 해치는 마귀나 마물을 퇴치하는데 나섰다고 한다. 이른바 ‘종규도’라는 그림이 귀신을 쫓거나 병을 고쳐 주는 신선도(神仙圖)로 이름을 얻게 된 내력은 이에서 연유한다. 진군은 숙부의 일을 위해 곧 부하 장졸들과 매와 개까지 동원해 바람을 타고 단숨에 화과산(花果山)에 당도했다.
싸움에 지쳐 있던 사대천왕(四大天王)과 이천왕 등 대장들은 반갑게 환영했다. 지금까지의 전황을 설명하면서 손오공이 보통의 적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했다. 이랑진군은 설명을 듣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 분 너무 걱정들 마시오. 그까짓 원숭이 놈이 기운이 있어야 몇 푼어치가 되겠소. 꼭 사로잡아 보일 테니 안심들 하시오. 내가 우선 그놈과 접전할 테니 사천왕께서는 사방을 둘러싸 주시오. 또 이천왕은 공중에서 조마경(照魔鏡)을 비추어 그놈이 숨는 곳을 살피도록 해 주시오.”
이랑진군은 그 밖의 여러 장수들에게도 각각 작전분담을 시키고 수렴동 앞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호통을 치며 도전했다. 손오공이 정문에서 손을 이마에 대고 바라보니 얼굴이 하얀 귀족청년이 호통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제넘은 어린 녀석을 단번에 혼을 내주겠다고 깔보며 덤벼들었다.
진군은 황금칼을 빼들고 손오공과 맞싸웠다. 일상일하(一上一下)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용검법으로 쌍방이 막상막하의 실력이었다. 삼백여합(三百餘合) 두 시간 이상이나 싸웠으나 여간해서 승부가 나지 않았다. 진군은 보통 전술로는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기회를 틈타 몸을 한 번 흔들어 비술을 부리자 키가 10만 척에다 푸른 눈, 붉은 수염을 가진 큰 괴물로 변해 손오공을 공격했다. 이에 질세라 손오공도 그에 못지않은 큰 괴물로 변해 격투를 계속했다.
두 거물이 이렇듯 격전을 벌이는 판국이라 화과산의 원숭이들은 작은 가슴을 떨기만 하고 감히 싸우려 드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에 진군의 진중에서는 개를 풀어 놓아 적진의 원숭이들을 습격했다. 여기에 놀란 원숭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오늘날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면 개와 원숭이 사이가 원수 같은 관계라는 뜻으로 사용되는데 바로 그 말의 어원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손오공은 이런 상황에 내심으로 크게 당황했다. 쏜살 같이 비법을 걷우고 동굴 속으로 도망쳐 숨으려 했다. 그러나 미리부터 사천왕들이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여의봉을 줄여 귓속에 감추고 참새로 변해 큰 나무위로 날아올랐다.
손오공이 흔적도 없이 어디로 사라졌으므로 천군들은 맥이 풀렸다. 그러나 진군은 통찰력으로 훤히 알고 있었다. 스스로 매로 변해 참새를 한숨에 잡으려고 했다. 손오공이 놀라 이번엔 큰 새로 변해 도망가자 진군도 역시 큰 새로 변해 추격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손오공은 바다로 뛰어 들어 물고기로 변신했다. 진군도 역시 상어로 변해 손오공을 삼키려 했다. 양쪽 군사들은 싸움도 잊은 채 두 대장의 변신술을 구경하면서 갈채를 보냈다.
• 견위수명(見危授命) : 나라가 위급할 때 자기의 목숨을 바침. 논어 ‘헌문’편에 나온다. 자로가 성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지혜·청렴·용기·재예·예악을 두루 갖춘 사람이 성인이라고 대답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인이야 어찌 반드시 그러하겠는가? 이로움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오래 전의 약속을 평생의 말(약속)로 여겨 잊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성인이라 할 수 있다.(今之成人者 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 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공자는 여기서 지금의 성인은 옛날의 성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위의 세 가지 요건만 갖추면 성인이라 할 만하다는 뜻으로 이른 것이다. 이 문장에서 유래한 견위수명은 이후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낌없이 바칠 줄 아는 충신을 일컫는 용어로 굳어졌다. 견위치명(見危致命)이라고도 한다.
• 견위치명(見危致命) :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움.
• 견인불발(堅忍不拔) : 굳게 참고 버티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
• 견토방구(見兎放狗) : 토끼를 발견한 후 개를 놓아서 잡게 하여도 늦지 않음
• 견토지쟁(犬兎之爭) : 개가 토끼를 쫓다가 둘 다 지쳐서 죽자 농부가 이것을 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제나라의 순우곤은 왕이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이렇게 말하며 말렸다. “제가 저번에 길을 가다가 한자로(韓子盧)라는 개와 동곽준(東郭逡)이라는 굉장히 빠른 토끼를 봤습니다. 개가 토끼를 막 쫓아가던데 아주 수십리를 뛰어다니고 산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섯 번을 해대는데 토끼도 힘들어서 죽고 개도 힘들어서 죽어가더군요. 가만히 지나가던 농부만 좋다하고 잡아서 가던데, 제나라하고 위나라는 서로 지쳐서 싸워봐야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저기 옆에서 진나라와 초나라가 눈 시뻘개져서 노리고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에 위왕은 전쟁을 포기하고 부국강병에 힘을 쏟았다.
• 결교지인(結交之人) : 서로 교분을 맺어 교제하는 사람
• 결의형제(結義兄弟) : 남남끼리 형과 아우의 의를 맺음. 또는 그렇게 관계를 맺은 형제. 도원결의(桃園結義)
• 결자해지(結者解之) :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말.
박완식교수 壯子(장자) 강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 소를 잡는 백정의 이야기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소를 잡는데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난 齊(제)나라의 백정 屠牛吐(도우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아홉 마리의 소를 잡아도 칼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서 소의 털까지 자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포정(庖丁)이라는 사람은 그 보다 한 수 위였다, 무려 19년 동안이나 칼을 갈지 않아도 여전히 그가 사용하는 칼의 날은 전혀 무디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원래 포정은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 문혜군(文惠君)의 주방장이기도 했던 그는 소를 잡는 데 도통하여 소 한 마리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뿐만 아니라 어찌나 능수능란했던지 손 놀리는 것이나 어깨 위에 둘러매는 것, 발을 내디디는 것, 무릎으로 밀어치는 동작, 살점을 쪼개는 소리, 칼로 두들기는 소리가 마치 뽕나무 숲에서 춤을 추듯 음악에 맞고 조화를 이루었다,
이를 보고 감탄한 문혜군이 말했다.
“정말 훌륭하도다! 경지에 이르는 비결이 무엇인고?” 그러자 포정이 말했다.
“소인은 항상 道(도)를 위해 몸 바쳤습니다. 도는 단순한 기술보다 고상하지요.
제가 처음 소를 잡았을 때는 소 전체가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 정도 지나니 소를 보지 않게 되더군요. 지금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봅니다. 즉, 육감의 지배를 받기 보다는 오직 마음으로 일을 하지요. 그래서 소의 신체 구조를 따라 뼈마디와 마디 사이로 칼날을 놀립니다. 자연히 살점과 심줄은 건드리지도 않고 큰 뼈를 다치지도 않지요.”
"제가 좋아 하는 것은 道(도)입니다. 그것은 기술(技)에서 더 나아간 것입니다.
감각기관의 지각작용이 멈추고 神(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소의 자연적 결(天理)을 따라 큰 틈새를 치고 큰 구멍에서 칼을 움직이니, 소의 본래 모습을 따른 것입니다. 경락이 서로 이어진 곳, 뼈와 살과 힘줄이 엉킨 곳에서도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거늘, 하물며 큰 뼈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소의 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 사이로 집어넣으니, 널찍널찍하여 칼을 놀리는 데 반드시 여유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養生(양생)에 대해 터득하였노라!”
이것은 《장자(莊子)》의 養生主篇(양생주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故事)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와 ‘포정해우(庖丁解牛)’는 매듭을 푼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듭지음(結者)을 푼다는 것(解之) 또한 포정의 소 잡는 경지와 같이 쉽게 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역에서 매듭을 짓는 괘가 괘 순서로 30번째인 중화이괘(重火離卦)라 한다면, 매듭을 푸는 괘는 40번째 괘인 뇌수해괘(雷水解卦)라 할 수 있다. 해괘(解卦)는 땅 속에서 머물러 있던 우레가 이제 물 위에 나와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이니, 그야말로 천둥치고 비를 내려 백과초목이 싹을 틔운다는 괘이다. 다시 말하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봄 눈 녹듯이 서서히 ‘풀린다,’는 괘인 것이다.
이괘(離卦)와 해괘(解卦) 사이는 10괘인 60爻(효)가 들어 있다. 60이라는 수는 60갑자의 주기와 같이 천도(天道)가 한 바퀴 돈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고, 또한 6이 극수(極數)이므로 극칙변(極則變)하는 이치를 담고 있기도 하다. 왜 하필 이괘(離卦)로부터 60번째 효에 와서 解卦(해괘)를 두었을까? 풀어야 하는 것에도 때(時)가 있고 마디(節)가 있는 것이다. 아무 때나 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해괘(解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를 보면, ‘공이 높은 담 위에서 새매를 쏘아 잡으니 이롭지 아니함이 없다(公이 射隼于高墉之上하야 獲之니 无不利하니라).’ 하였다. 상구 효는 맨 위 자리에 있는 효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다 풀고 넘어가야 하는 자리다. 새매가 갖는 상징성은 다양하지만 어쨌거나 새매는 맹금류(猛禽類)로서 물(物)을 해치는 날짐승이니, 내 땅에 새가 날아들었다면 쏘아 잡아서 근심을 풀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바야흐로 세상의 얽히고설킨 것들을 풀어야 할 때에, 세상을 해치는 소인배와 같은 무리들에게는 관용(寬容)으로 푸는 것만이 능사(能事)가 아니고 때로는 활로 쏘아 잡듯이 威嚴(위엄)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를 잡는 방법이 쉽지 않다. 그래서 공자는 새매를 잡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중(隼)은 날짐승이요, 궁시(弓矢)는 도구(器)요, 활을 갖고 쏘는 자(射之者)는 사람(人)이니 군자가 몸에 활과 화살을 간직(藏器於身)하고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待時而動) 무슨 불리함이 있겠는가?” 즉 이 말씀은 새매를 잡으려면 우선 새를 잡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새를 잡을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하고, 때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人)과 도구(弓矢)와 때(時)의 3요소가 갖춰져야만 그 동안의 잘못 얽혔던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기초해서 결자해지의 뜻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동안 복희씨의 그물로 세상을 덮어 왔으니 복희씨는 다름 아닌 동이족이다. 즉 간방인 우리나라에서 역사적 문명의 시초가 이루어졌고, 이제 선천을 마치고 후천을 넘어가는 복희씨의 그물로 새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복희씨의 그물을 공자께서는 弓矢(궁시)로 표현했으나 그물이나 궁시 모두 이괘(離卦)의 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다. 또한 궁시는 대궁지인(大弓之人)인 동이족의 것으로, 대궁이 동이족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전게 호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아니! 그물로 순하게 잡으면 되지 하필 화살로 쏘아서 잡으라고 했을까? 대저 道(도)와 德(덕)이라는 것은 강유(剛柔)와 건순(健順)의 조화(調和)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순하게 매인 사람은 부드럽게 풀어야 하지만 불순하게 매인 사람은 활과 화살의 위엄으로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해괘의 괘상에 대해 말하기를 ‘(그 동안의) 어긋났던 것을 푸는 것이다(以解悖也)’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공이 높은 담장 위에서 새매를 쏘아 잡았다.’라고 했는데 담장은 괘상으로 말하면 간괘(艮卦)에 해당하고 새매는 남방주작(南方朱雀)이니 이괘(離卦)를 상징한다. 간방(艮方)은 곧 우리나라를 가리키니, 이는 우리나라에서 새매를 쏘아 잡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선천을 마치고 후천을 시작하는 자리가 동북 간방이라고 주역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후천의 주역이 되는 동북 간방의 이(離) 자리에서 마치 포정이 소를 잡듯이 소의 뿔을 쳐서 午會(오회)를 넘어 후천에 이르기를 선현들은 갈망했을 것이다. 이것이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통해 살펴본 비사(秘辭)이다.
• 결초보은(結草報恩) : 죽어 혼령이 되어서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
춘추시대 진나라(晉) 때, 위무자라는 사람이 큰 병이 들자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젊은 첩을 개가시키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위무자가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아들에게 첩을 따라서 같이 죽게 하라고 처음과 달리 유언하였다. 위무자가 세상을 드디어 떠나자 아들은 아버지의 뒤에 한 유언을 정신이 혼미할 때 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처음 유언을 따라서 아버지의 젊은 첩을 개가시켰다. 그후 진나라(秦)가 위무자의 아들 위과(魏顆)가 장수로 있던 진나라(晉)를 침략하자 위과는 진(秦)의 장수 두회(杜回)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는데, 위과가 열세에 몰리게 되었을 때, 불현듯 한 늙은이가 두회의 발 앞에 풀을 엮어(結草)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여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늙은이가 나타나 이르기를 자신은 위과의 서모( 庶母)의 아버지이며 자신의 딸이 위과의 바른 판단 때문에 목숨을 건져 개가하여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기 위하여 어제 전장에서 위과를 도왔다고 하였다. (출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 십오년조(宣公 十五年條))
• 겸구고장(箝口枯腸) : 궁지에 몰리어 생각과 말이 막혀 대답을 못함
• 겸양지덕(謙讓之德) : 겸손한 태도와 사양하는 덕
겸형군자유종(謙亨君子有終)
영칙필망 겸칙필존(盈則必亡 謙則必尊)
자상자인하지 자하자인상지(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
겸손하고 겸허해야 일이 잘되고, 군자는 끝을 잘 맺어야한다.
많이 안다고 뽑내면 반드시 망하고, 알아도 겸손하면 반드시 존경을 받는다.
자신이 스스로 높다고 여기면 다른 사람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이 끌어 올려준다.
• 겸인지용(兼人之勇) : 몇 사람을 능히 당해 낼만한 용기
[출전] 『논어(論語) 』 선진편(先進篇)
[원문]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공자가 ‘구(求:공자의 제자)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격려해 주었고, 유(由:공자의 제자)는 두 몫 이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겸손하도록 가르쳐 주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겸인지용(兼人之勇)이라고 하면 혼자서 두 사람 몫을 겸하는 빼어난 용기를 뜻한다.
예문) 남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망연(茫然)히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오늘 이지정(李之楨)의 집에 가서 서로 바둑을 두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북방에 일이 있으면 나라에서 반드시 나를 장수로 삼을 것인데 누가 부장(部將)을 맡을 만한가?’ 하니, 이지정이 말하기를, ‘민서(閔여)·김견수(金堅壽)·장효손(張孝孫)이 모두 겸인지용(兼人之勇)이 있으나, 장효손은 외방에 있고 김견수는 이미 현용(顯用)되었고 또 외방에 있으니, 오직 민서가 좋다.’고 하였습니다
• 경거망동(輕擧妄動) :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함.
경거(輕擧)는 일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망동(妄動)은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한비자가 말하기를 “어진 임금은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법입니다. 노여움을 드러내면 신하들이 벌받을 것이 두려워 하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임금이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 경경고침(耿耿高枕) : 근심에 싸여 있는 외로운 잠자리라는 뜻으로, 근심으로 인해 편치 못한 잠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 경국제세(經國濟世) : 나라 일을 경륜하고 세상을 구함 →‘경제’의 준말
• 경국지색(傾國之色) : 온 나라를 움직이게 하는 미인뛰어나게 아름다운 미
• 傾國之色(경국지색) : 임금이 미혹되어 나라가 위기에 빠져도 모를 정도의 미색이라는 뜻으로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를 이르는 말.
「처음, 이부인(李夫人)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천성적으로 음악에 뛰어났고 노래와 춤에 능하여 한무제(漢武帝)의 총애를 받았다. 항상 새로운 노래를 만들거나 편곡하였는데, 듣는 사람마다 감동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연년이 황제를 모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북방에 어여쁜 사람 있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미인이라오
눈길 한 번 주면 도읍이 기울고
눈길 한 번 더 주면 나라가 기울 정도라지
도읍 기울고 나라 기우는 게 무슨 대수겠소
미인은 다시 얻기 어려운 것을
황제가 탄식했다. “훌륭하구나. 그런데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평양공주가 이연년에게 누이동생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황제가 그녀를 불러들였는데, 실로 아름다운 자태에 날아갈 듯한 춤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그 뒤로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初, (李)夫人兄延年性知音, 善歌舞, 武帝愛之. 每爲新聲變曲, 聞者莫不感動. 延年侍上, 起舞歌曰,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上嘆息曰, 善. 世豈有此人乎. 平陽主因言延年有女弟. 上乃召見之, 實妙麗善舞, 由是得幸.)」
이 이야기는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에 나오는데, 이 노래는 한무제 때 궁중 가수이자 악부(樂府)의 협률도위(協律都尉)였던 이연년이 무제 앞에서 절세미인인 자기 누이동생을 자랑하여 부른 노래이다. 무제는 이때 이미 50 고개를 넘어 있었고, 사랑하는 여인도 없이 쓸쓸이 지내는 처지였으므로 당장 그녀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무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날아갈 듯이 춤추는 솜씨에 매혹되었는데, 이 여인이 바로 무제의 만년에 총애를 독차지하였던 이부인 이연(李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던가‥‥.
무제는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에 임명하고 2차에 걸쳐 대원(大宛, 우즈베키스탄) 원정을 하게 하는 등, 능력도 안 되는 그녀의 형제들을 후(侯)로 봉하기 위해 많은 무리수를 두었을 정도로 이부인을 총애했다.
이부인의 ‘경국(傾國)’의 사적은 그녀가 죽은 후에까지 이어진다. 당시 무제는 66세였는데, 38세의 황태자가 무고(巫蠱)의 난으로 목숨을 잃은 후, 그 후계자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이부인의 아들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이 제위를 이어야 외척으로서 그 지위가 든든해질 수 있다는 계산이 앞선 이광리와 승상 유굴리(劉屈氂)는 유박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모사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광리의 딸과 유굴리의 아들이 결혼을 했으니, 두 사람은 사돈 관계였다. 이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 유굴리의 부인이 선택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여러 차례 써 먹다가 실패한 무고의 방법이었다. 무고란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형을 만들어 저주하고 싶은 상대방의 이름을 그 위에 써 땅에 묻은 다음 매일 저주를 하면 상대방이 죽는다고 하는 다분히 미신적인 방법이지만, 걸리면 사형에 해당하는 대죄였다. 승상 부인의 음모는 발각되어 유굴리는 요참(腰斬)형에 처해지고, 그의 일가족과 이광리의 가족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광리는 전쟁터에서 이 소식을 듣고 흉노에게 투항했다. 하지만 이광리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흉노에게 투항한 이광리는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호사를 누렸는데, 그보다 먼저 흉노에게 항복하여 흉노의 정령왕(丁靈王)이 된 위율(衛律)의 술책으로 인해 흉노의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선우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웠는데, 이사장군을 잡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탁선(託宣)을 무당이 받았다나? 탁선이란 신이 꿈속에 나타나 자신의 뜻을 알리는 것을 말하는데, 흉노에서는 이를 절대 복종해야 하는 신의 계시로 믿고 있었다. 물론 이는 모두 위율이 조작한 연극이었다.
이부인은 정말 역사에 길이 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원조였다. 이연년의 노래에서 유래하여 ‘경국지색’은 나라를 기울게 할 만한 미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연년의 노래에서 도시 하나를 기울게 한다는 뜻의 ‘경성지색(傾城之色)’도 나왔다.
‘악부’란 한무제가 창설한 음악을 관장하는 관서를 말한다. 악부에서 각 지방의 민가를 채집하고 보급시켰는데, 이렇게 채집된 민요 등을 일컬어 악부시(樂府詩)라 한다. 악부의 자유로웠던 형식의 시가 점차 정형화되어 후에 오언시(五言詩)로 발전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후한 말기의 건안(建安) 시기이다. 이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일군의 무명작가들이 한대의 민가를 기초로 하여 지은 〈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이다.
• 경국지재(經國之才) : 나라를 다스릴만한 재주를 가진 사람
• 경궁지조(驚弓之鳥) : 한 번 화살에 맞은 새는 구부러진 나무만 보아도 놀란다는 뜻으로, 한 번 혼이 난 일로 늘 의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는 것을 이르는 말.
• 경당문노(耕當問奴) 織當問婢(직당문비) : 농사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하며 베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물어야한다.
농사(農事)에 관한 일은 당연히 머슴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모름지기 모든 일은 그 일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과 의논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일을 잘 처리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이든 자신이 학습한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농사일을 농부에게 묻지 않고 어부에게 물어도 아니될 말이다. 법학을 전공한자가 농림부장관을 하든지 농학박사가 법무부장관을 한다면 되겠는가? 어떤 일이던 항상 그 부문의 전문가와 상의하여 행 해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가 업종별로 얽히고 설켜서 서로 상부상조하며 공존하는 유기적인 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직원도 필요하고 임시직도 필요하다.
한 가정을 지키고 건사해야 한다는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질 것이다. 그 책임감의 무게는 아버지들로서는 나무꾼이든 농부이든 어부이든 직장인이든 모두가 가장으로서 충분히 공감한다. 그런 점에서 그분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며 그 어렵고 힘들고 산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며 오랜 세월 묵묵히 한길 인생을 살아왔으리라 생각하니 절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무나 식물들의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은 농부는 굶어 죽더라도 그 종자를 베고 죽을 지언정 종자까지 다 먹어 치우는 일은 없다. 농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종자만은 꼭 보관함을 뜻한다.
• 경륜지사(經綸之士) : 정치적이거나 조직적인 일에 수완이 좋은 사람. 경륜가(經綸家)
• 경산조수(耕山釣水) : 산에 가 밭을 갈고 물에 가 낚시질을 함곧, 속세를 떠난 생활을 영위함을 이르는 말.
• 경세제민(經世濟民) :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는 뜻.
중국 춘추시대 중엽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사상 첫 패업을 이룬 관중(管仲)은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의 주인공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정치가였다. 관중 사후 100여 년 뒤에 태어난 공자는 그의 업적을 크게 기렸다. ‘논어’ 헌문 편의 평이 그렇다.
“제환공이 제후들을 9번 규합하며 병거(兵車)를 동원치 않은 것은 모두 관중의 공이다. 그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그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관중과 제환공의 만남은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의 만남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전형에 해당한다. 적잖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만남을 삼국시대의 유비와 제갈량 내지 현대 중국의 마우쩌둥과 저우언라이의 만남에 비유하는 이유다. 실제로 제갈량은 평소 관중을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를 관중에 비유하곤 했다.
안타까운 것은 관중이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점이다. 대다수가 ‘관포지교(管鮑之交)’ 고사의 주인공 정도로만 알고 있다.
“‘상대가 이익을 얻게 하라, 관자처럼’이라는 제목을 보고 ‘도대체 관자가 누구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창피스러운 일인지? 관자는 바로 ‘관포지교’로 유명한 그 관중이 쓴 책 이름이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관중은 공자가 사상 최초의 학단(學團)인 유가(儒家)를 창설한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제자백가의 효시에 해당한다. 그의 저서 ‘관자’에는 유가와 도가, 법가, 병가 등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이 녹아 있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에 들어와 ‘관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다. ‘한비자’ 오두 편의 다음 대목이 이를 뒷받침한다.
제자백가의 효시
“지금 나라 안의 백성 모두 정치를 말하고, 상앙의 ‘상군서(商君書)’와 관중의 ‘관자’를 집집마다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라가 더욱 가난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입으로 농사짓는 자만 많을 뿐 정작 손에 쟁기나 호미를 잡고 농사를 짓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백성 모두 군사를 말하고,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병가 서적을 집집마다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군사가 더욱 약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입으로 용병하는 자만 많을 뿐 정작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나가 싸우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농사를 짓고 용병을 하는 것을 설경(舌耕), 설전(舌戰)이라고 한다. 한비자는 ‘설경’과 ‘설전’을 일삼는 나라는 이내 패망한다고 경고했다.
관자는 ‘설경’과 ‘설전’을 극도로 꺼렸다. 부국강병이 ‘관자’의 키워드로 나오는 이유다. 그가 역설한 부국강병 논리는 백성부터 부유하게 만드는 필선부민(必先富民) 이치에서 출발한다. 다음은 ‘관자’ 치국 편의 해당 대목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부유하게 만드는 ‘필선부민(必先富民)’에서 출발해야 한다. 백성이 부유하면 다스리는 게 쉽고, 가난하면 어렵게 된다.”
• 경이원지(敬而遠之)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멀리함
• 경자유전(耕者有田) : 농사를 짓는 사람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으로, 소작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 경전하사(鯨戰蝦死) : 고래의 싸움에 새우가 죽는다는 뜻으로, 강한 자들이 싸우는 바람에 아무 관계도 없는 약한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경조부박(輕躁浮薄) : 마음이 침착하지 못하고 행동이 신중하지 못함.
• 경천근민(敬天勤民) : 하느님을 공경하고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지런히 일함.
• 경천동지(驚天動地) :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는 뜻으로,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을 말함.
• 경천동지(驚天動地) :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인다는 뜻세상을 몹시 놀라게 함.
• 경천위지(經天緯地) : 온 천하를 짜임새 있게 경륜하여 다스림.
• 경화수월(鏡花水月) : ① 거울에 비친 꽃과 물에 비친 달 ② 눈에 보이나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을 의미 ③ 시의 정취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함을 의미
• 계륵(鷄肋) : 닭의 갈비뼈는 먹을 것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부위이다. 어떤 것을 취해 보아도 이렇다 할 이익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흔히 『삼국지』에 나오는 말로 잘못 알고 있는 이 말의 출전은 『후한서』의 「양수전」이다. 위나라의 조조가 촉의 유비와 한중(漢中) 땅을 놓고 싸울 때, 조조는 진격이냐 후퇴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그때 장수 하나가 내일의 거취를 묻고자 조조를 찾아가니 그는 다만 “계륵” 하고 한마디만 던질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장수가 그 말의 뜻을 몰라 막료들에게 물으니 양수가 답하기를, 내일은 철수 명령이 있을 것이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모두들 그의 해석을 의아하게 여기자 양수가 이렇게 말했다. “계륵은 닭의 갈비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기에는 그럴듯하나 실상 먹을 것은 별로 없는 음식이다. 눈앞에 놓인 한중 땅이 바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이 한중 땅을 버리기는 아깝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썩 대단한 땅도 아니니 그대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의 해석을 듣고도 장수들은 긴가민가했으나 양수의 이 말은 적중하여 다음날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 계고(稽古) : 옛일을 고증하여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으로,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태평어람(太平禦覽)에서 동관한기(東觀漢記)를 인용하여 “건무(建武) 28년, 환영(桓榮)을 소부(少傅)로 삼고, 치거승마(輜車乘馬)를 하사했다. 환영은 제생(諸生)들을 크게 모아놓고, 수레와 말과 인수(印綬)를 진열하고, 말하기를 ‘금일 은혜를 받은 것은 옛일을 살핀 덕이다. 어찌 열심히 하지 않겠는가?[今日所蒙 稽古之力也 可不勉乎]’라고 했다.”라고 했다. 환영은 자가 춘경(春卿)이고, 전한 성제(成帝) 때 사람으로서 태자소부(太子少傅)·태상(太常)을 지내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서경(書經) 우서(虞書)의 요전(堯典)·순전(舜典)·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 네 편의 글을 가리킨다. 이 네 편은 첫머리마다, ‘왈약계고제요(曰若稽古帝堯)’, ‘왈약계고제순(曰若稽古帝舜)’, ‘왈약계고대우(曰若稽古大禹)’, ‘왈약계고고요(曰若稽古皐陶)’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 계구우후(鷄口牛後) : 소의 꼬리가 되지 말고 닭의 입이 되라큰 회사의 말
사마천의 사기, 사마광 자치통감의 소진(蘇秦)전, 한(韓)나라 선혜왕 전(傳)에서 나온 말
중국 전국시대 동주(東周)의 수도(首都)인 낙양(洛陽)출신 소진이라는 종횡가(縱橫家)가 있는데 그가 6국(한(韓), 위(魏), 조(趙), 연(燕), 초(楚))를 순방하면서 합종책(合縱策 : 진(秦)나라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한 계책)위해 제시하면서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에게 전언(傳言)하면서 언급된 말이다.
“전하, 한나라는 자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병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차제에 6국이 남북, 즉 세로(縱)로 손을 잡는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책을 막고 국토를 보전하시오소서.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寧爲鷄口, 영위계구) 쇠꼬리는 되지 말라(勿爲牛後, 물위우후)’는 옛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다른 표현으로 ‘용의 꼬리, 뱀의 머리’도 있다.
• 계군일학(鷄群一鶴) :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뛰어난 한 사람이 섞여 있음.
• 계란유골(鷄卵有骨) : 달걀 속에도 뼈가 있다(골았다). 운수가 나쁜 사람은 모처럼 좋은 기회가 와도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 鷄卵有骨(계란유골) : 달걀에도 뼈가 있다는 뜻복 없는 사람은 좋은 기회도 도움이 안 됨.
• 계명구도(鷄鳴狗盜) : 닭 울음과 개 흉내를 내는 도둑행세하는 사람이 배워
• 鷄鳴狗盜(계명구도) : 중국 춘추 시대에 맹상군(孟嘗君)의 식객들이 닭 울음소리와 좀도둑질로 맹상군을
사마천의 사기 맹상군전에 나오는 말로 계명구도지도(鷄鳴狗盜之徒, 계명구도의 무리)라고도 한다.
맹상군은 평소에 살면서 이런저런 식객들을 많이 불러모았는데, 하루는 어느 날 식객들 중 두세 사람을 골라 무슨 재주가 있냐고 물었다. 이에 그 중 두 사람이 각자 개 흉내와 닭 울음소리를 잘 낸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식객들이 뭐 그런 재주도 있냐, 쓸모없다며 크게 비웃었다. 하지만 맹상군은 “그러한 재주라도 어찌 나중에 쓸 일이 있지 않겠냐”라고 대인배다운 대답을 했다.
진나라의 소양왕이 맹상군을 진에 초청해 등용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제나라 사람이라 위험하다”고 진언했고, 결국 불안감에 빠진 소양왕은 맹상군을 연금한다. 맹상군은 동행한 한 식객을 통해 소양왕의 후궁인 연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연희는 그 대가로 귀한 호백구(狐白裘)를 요구한다. 그 옷은 환심을 사기 위해 진작에 소양왕에게 바친 뒤라 좌절하고 말았는데 한 식객이 “내가 찾아오겠다”며 나서더니 다음날 떡하니 호백구를 들고 나타난다. 어떻게 가져왔는가 물으니 개 흉내를 내서 들키지 않고 왕성에 잠입할 수 있었다고. 호백구를 전달받은 연희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맹상군은 연금 상태에서 벗어난다. 마음이 바뀔까 싶어 부리나케 도망가던 맹상군은 사기꾼 출신의 식객이 위조한 통관 증서로 함곡관까지 도착했지만 한밤중에 도착해서 보니 함곡관은 새벽에 첫닭이 울기 전까지 관문을 폐쇄하기 때문에 다 와서 멍하니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뒤늦게 뜨끔한 소양왕이 추격대를 파견한 상태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나서더니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착각한 수문장이 문을 열어줘서 맹상군은 간신히 살아남게 된다.
위에서는 狗를 ‘개 흉내를 냈다’로 해석했지만 개 흉내가 아니라 그냥 도둑질에 능숙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며 개도둑이라는 해석도 있다. 마침 여우는 개과(科) 아무래도 왕족인 맹상군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귀한 것을 개 흉내 내는 것만 가지고 뺏어올 수 있겠냐는 해석인 듯도 싶다. 근데 왕성의 금고를 털 정도면 하찮기는커녕 아주 초능력 수준인데 내용과 맞지 않으므로 또 문제.
위의 두 식객이 맹상군을 도운 이유는 자신들의 재주를 비웃지 않고 잘 대해주었기 때문. 사람 무시하지 말자. 맹상군은 식객의 수준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어 그 대우를 달리했는데, 이 탈출 사건 이후 위에 언급된 세 사람은 삼시 세끼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고 개인용 마차를 지급받는 수준인 대사(代舍)의 대우를 받았다. 참고로 행사(幸舍)는 삼시 세끼 고기반찬은 먹을 수 있었으나, 개인용 마차는 없었고 전사(傳舍)는 고기반찬도 개인용 마차도 없이 거친 밥을 먹고 잠만 자는 수준이었다.
이 고사는 각지의 세력가들이 저마다 경쟁적으로 세력 확장에 힘쓰며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인재들을 끌어 모으던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 거수고액(擧手叩額) : 손을 들고 이마를 땅에 대며 사례하고 기뻐함을 이르는 말.
• 거안사위(居安思危) : 편안히 살 때 닥쳐올 위태로움을 생각함.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초(楚)나라는 정(鄭)나라와 연합하여 진(晉)나라의 동맹국인 송(宋)나라에 침입했고, 결국 조겹(朝郟), 유구(幽丘), 성고(城郜), 팽성(彭城) 등 4개의 성읍을 점령했다. 송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진나라 도공(悼公)은 송(宋), 위(衛), 조(曹), 거(莒), 주(邾) 등의 나라와 동맹을 맺고 출병해 정나라의 항복을 받고 송나라의 4개 성읍을 되찾았다. 진나라 왕 도공(悼公)은 이 사례품의 반을 이번 싸움에 크게 공을 세운 충신 위강(魏絳)에게 주면서 그의 공을 치하하고 위로했다. 위강은 굳이 사양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생활이 편안하면 위험을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준비를 갖추어야 화를 면할 수 있다(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는 이치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라며 3번이나 사양한 다음 그 하사품을 받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유비무환(有備無患)
• 거안제미(擧案齊眉) : 밥상을 눈 위까지 들어올린다.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공경함으로써 내외가 서로 신뢰를 쌓고 가정을 화목하게 함을 이르는 교훈의 말이다.
집은 가난하지만 절개가 곧은 양홍(梁鴻)이란 학자가 있었다. 뜻이 있어 장가를 늦추고 있는데 같은 현(縣)에 몸이 뚱뚱하고 얼굴이 못생긴 맹광(孟光)이라는 처녀가 서른이 넘은 처지에서 “양홍같은 훌륭한 분이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문을 들은 양홍은 이 처녀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며칠이 지나도 색시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자 색시가 궁금하여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아니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홍이 대답하기를, “내가 원했던 부인은 비단옷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아니라 누더기 옷을 입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라도 살 수 있는 그런 여자였소.”하자, 색시는 “이제 당신의 마음을 알았으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로 화장도 하지 않고 산골 농부의 차림으로 생활을 하자 양홍도 그녀와 둘이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베를 짜면서 생활했다. 양홍은 농사짓는 틈틈이 시를 지어 친구들에게 보냈는데 그 시 속에 왕실을 비방하는 내용이 발각되어 나라에서 잡으려 하자 오(吳)나라로 건너가 고백통(皐白通)이라는 명문가의 방앗간 지기가 되어 지냈다. 그러나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아내는 밥상을 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아래로 깔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올려(擧案齊眉) 남편에게 공손하게 바쳤다고 한다. 고백통(皐白通)이 양홍 내외를 보통으로 보지 않고 도와서 양홍은 그 후 수십 편의 책을 저술할 수가 있었다. 출전 : 후한서 일민전(後漢書逸民傳)
• 거이기양이체(居移氣養移體) : 사는 장소와 지위의 변화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는 뜻으로 좋은 곳이나 지위에 있게 되면 정신도 고상해지고 맑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맹자가 제나라에 갔을때 멀리 제나라 왕자를 바라보고 느낀 바가 있어 한말로 “거처는 기상을 변하게 하고 먹고 입는 것은 몸을 달라지게 한다. 사람에게는 거처라는 것이 참으로 관계과 크다. 다 같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냐(居移氣 養移體 大哉居乎 夫非盡人之子與)”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왕자가 살고 있는 집이나 그가 타고 다니는 수레며 말이 대체로 다른 귀한 집 자식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아자가 저 같이 달리 보이는 것은 그가 처해 있는 위치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천하의 넓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겠느냐?” 맹자가 말한 천하의 넓은 곳이란 도를 터득해서 천지와 호흡을 같이하는 성자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맹자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노나라 임금이 송나라로 갔을 때 질택이란 성문에서 크게 외쳐 불렀다. 그러자 문지기가 “이상하다 분명 우리 임금님은 아닌데 어떻게 목소리가 우리 임금님과 같을까?”하고 말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두 임금이 처해 있는 위치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 거익심조(去益深造) : 날이 갈수록 더욱 정도가 심함. 갈수록 더욱 깊어짐
• 거일분사치편소일분죄과(去一分奢侈便少一分罪過) : 사치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버리면 그만큼 죄가 감해진다는 뜻.
• 거자불추 내자불거(去者不追 來者不拒) : 가는 사람은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은 물리치지도 않는다는 말.
맹자가 등나라에 있을 때였다. 맹자가 가는 곳마다 가르침을 받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 날 맹자가 거하는 여관의 일꾼이 미투리를 삼다가 창틀 위에 올려놓았었는데 맹자를 찾아온 일행들이 다 돌아간 다음 다시 신을 삼고자 창가로 가보았으나 삼다 둔 미투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꾼은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막 큰소리로, “맹자 같은 분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도 도둑놈이 있소.” 하고 맹자에게 항의를 했다. 이 말을 듣고 맹자 는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이 그 신을 훔치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사람을 대하는 것은 가는 사람을 붙들지도 않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지도 않으며(去者不追 來者不拒)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받을 뿐입니다.” 한 것이다.
• 거자일소(去者日疎) :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 아무리 슬픈 사별(死別)을 했더라도 죽은 사람은 날이 감에 따라 차차 잊혀지고 절친한 사이였던 사람도 일단 멀리 떠나면 점차 소원(疎遠)하게 된다는 뜻이다. 거자일소(去者日疎)는 문선(文選)의 잡시(雜詩) 항목에 실려 있는 작자 미상의 시 첫 대목에 나오는 구절. 시 전체는 인생의 무상을 읊어 읽는 사람을 공감으로 이끌어내면서 서글픔을 자아낸다.
거자일이소(去者日以疎)
내자일이친(來者日以親)
출곽문직시(出郭門直視)
단견구여분(但見丘與墳)
고묘려위전(古墓黎爲田)
떠난 사람은 나날이 멀어지고
오는 사람은 나날이 친해지네
성문을 나서 곧바로 바라보니
보이는 것 언덕과 무덤뿐이네
옛무덤은 뭉개져서 밭이 되고
※ 문선(文選) : 중국 량(梁)나라의 소명태자 소통(蕭統)이 엮은 주(周)나라의 시문
• 거재두량(車載斗量) : 수레에 싣고 말(斗)로 된다는 뜻으로, 물건이나 인재 등이 많아 귀하지 않음의 비유.
삼국시대(三國時代) 촉(蜀)나라가 오(吳)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은 위(魏)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손권은 중대부(中大夫) 조자(趙咨)로 하여금 오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을 없도록 일러 위나라에 보냈다. 조자가 위나라에 도착하자 조비(曹丕)가 오의 국왕에 대해 묻자 조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총명과 지혜와 어짐을 겸비하였으며 뛰어난 계략을 가진 인물입니다.” 조비가 이 말을 듣고 비웃자 조자는, “오나라는 백만의 군대와 천연의 험악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조비는 조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와 같은 인물이 오나라에 얼마나 있습니까?” 조자는 대답했다. “저와 같은 인물은 수레에 싣고 말로 재어야 할 정도(車載斗量)로 많이 있습니다.” 조비는 이 말을 듣고 그에 감탄하여 두 나라는 군사 제휴를 하게 되었다.
[출전] 삼국지(三國志) 오주전(吳主傳)
• 거허박영(據虛博影) : 어찌할 수 없는 것. 속수무책(束手無策)
• 건곤일색(乾坤一色) : 겨울 온 천지에 눈이 내린 경치
• 건곤일척(乾坤一擲) : 운명과 흥망성쇠를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개인적인 삶이나 국가의 운명에 절대절명의 중요한 결정과 선택의 기로(岐路)에 서는 일이 있습니다. 곧 마지막 운명을 걸고 승부를 다투는 큰 모험을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고사성어가 ‘乾坤一擲(건곤일척)’입니다. 물론 건곤일척의 고사는 그 사용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야 하고 함부로 도박과 같은 성질로 행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의미인 건곤(乾坤)은 천지(天地), 곧 천하(天下 : 온 세상)를 의미하고 일척(一擲)이란 말은 단번에 전부를 내던진다는 절대절명의 큰 모험을 의미합니다. 바로 온 천하를 두고 죽느냐 사느냐의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전은 당나라의 대 문호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년∼824년, 字-退之(퇴지), 號-昌黎(창려))가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시의 구절에 등장합니다. 그 배경은 초한지(楚漢志)의 초(楚)나라 항우(項羽)와 한(漢)나라 유방(劉邦)의 싸움에서 하남(河南) 지방의 ‘홍구(鴻溝)’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천하를 양분(兩分)하고 있을 때입니다.
용피호곤할천원(龍疲虎困割川原)
억만창생성명존(億萬蒼生性命存)
수권군왕회마수(誰勸君王回馬首)
진성일척도건곤(眞成一擲賭乾坤)
“용과 범이 지쳐 이 강 언덕에서 분할하니,
억만창생 백성들의 생명이 살아났구나.
그 누가 군왕에게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하였는가?
진정 단번에 던져 천하를 도박하도록 했구나.”
진(秦)나라의 멸망이후 천하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두 패자(覇者)에게 놓이게 되었는데, 초반의 우위(優位)를 점했던 항우의 초(楚)나라가 점차 한(漢)나라의 유방에게 기울기 시작한 때, 바로 이 곳 홍구(鴻溝)에서 강화(講和)의 약속이 성립되어 서로 군사를 퇴각시키기로 했지만, 유방의 군사(軍師)였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은 이를 기회로 유방에게 진언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회로 삼자고 한다.
“한(漢)은 천하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는데, 초(楚)의 군사는 피로해 있고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초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절호(絶好)의 때이니 이제 굶주리고 있을 때 쳐부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後患)을 남기는 것[養虎遺患(양호유환)]과 같사옵니다.”
야심 많은 유방(劉邦)은 이 말을 받아들여 결단을 내렸고 초(楚)나라의 군사를 추격해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포위하고 결국 항우(項羽)를 제거해 초를 멸망시켰던 것이다.
• 건목수생(乾木水生) : 마른나무에서 물이 난다는 뜻으로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무엇을 내라고 요구함을 이르는 말. 연목구어(緣木求魚)
• 건성조습도(乾星照濕土) : 눈부시게 빛나는 별이 젖은 땅위를 비치는 것처럼 물건은 서로 상반되는 채로 쓰인다는 뜻.
• 걸해골(乞骸骨) : 늙은 재상(宰相)이 나이가 많아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될 때 임금에게 그만두기를 주청(奏請)함을 이루는 말이다.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쫓긴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고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유방은 지난해(기원전 203년) 항우가 반란을 일으킨 팽월(彭越)ㆍ전영(田榮) 등을 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 서주(徐州)]을 공략했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 하남성(河南省)]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수개월 후 군량(軍糧) 수송로까지 끊겨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자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항우는 응할 생각이었으나 아부(亞父,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란 뜻) 범증(范增)이 반대하는 바람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유방의 참모 진평(陳平)은 간첩을 풀어 초나라 진중(陣中)에 헛소문을 퍼뜨렸다. ‘범증이 항우 몰래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고.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은밀히 유방과 강화의 사신을 보냈다. 진평은 항우를 섬기다가 유방의 신하가 된 사람인만큼 누구보다도 항우를 잘 안다.
그래서 성급하고도 단순한 항우의 성격을 겨냥한 이간책은 멋지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진평은 장량(張良) 등 여러 중신(重臣)과 함께 정중히 사신을 맞이하고 이렇게 물었다.
“아부(범증을 지칭)께서는 안녕하십니까?”
“나는 초패왕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요.”
사신은 불쾌한 말투로 대답했다.
“뭐, 초왕의 사신이라고? 난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는데 ‥‥.”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면서 잘 차린 음식을 소찬(素饌)으로 바꾸게 한 뒤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그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범증은 크게 노했다.
“천하의 대세는 결정된 것과 같사오니, 전하 스스로 처리하시오소서. 신은 이제 ‘해골을 빌어[乞骸骨]’ 초야에 묻힐까 하나이다.”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등창(背瘡)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 걸견폐요(桀犬吠堯) : 개는 주인만을 알고 그 이외의 사람에게는 사정을 두지 않는다는 뜻.
괴통(蒯通)이란 책사(策士)가 한신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지금 항우는 남쪽을 차지하고 유방은 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동쪽인 제나라를 차지하고 있는 대왕이 어느 쪽에 가담하느냐에 따라 천하 대세는 좌우되고 맙니다.
한왕이 대왕을 제나라 왕으로 봉한 것은 남쪽으로 초나라 항우를 치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로 실은 대왕을 속이고 몹시 꺼리고 있습니다. 항우가 망하게 되는 날 대왕의 신변은 위태롭게 됩니다. 지금 항우가 바라고 있듯이 이 기회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동쪽을 대왕이 차지하고 대세를 관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입니다.”
한신은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은 괴통의 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다. 천하가 통일되자 유방은 괴통이 말한 대로 한신을 없애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초나라 왕으로 봉해졌던 한신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장안으로 잡혀 오게 되었고, 이렇다 할 증거를 잡을 수 없자 그를 초왕에서 회음후로 작을 깎았다.
그 뒤 정말 역적으로 몰려 여후의 손에 죽게 되자 한신은, “나는 괴통의 꾀를 듣지 않고 아녀자의 속인바가 된 것을 후회한다. 어찌 운명이 아니었는가?”
하는 말을 남겼다. 한신이 남긴 말을 전해들은 한 고조 유방은 곧 괴통을 잡아들이게 했다.
“네가 회음후에게 반역하라고 시킨 일이 있느냐?”
고조의 물음에 괴통은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반역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철부지가 신의 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만일 그 철부지가 신의 계책을 썼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화가 치민 고조는 괴통을 기름 가마에 삶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슬프고 원통하도다! 내가 삶겨 죽다니!”
괴통은 하늘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부르짖었다.
“네가 한신을 반하라고 시켰다면서 무엇이 원통하단 말이냐?”
“진나라가 그 사슴을(정권) 잃은지라 온 천하가 다 함께 이를 쫓았습니다. 그 결과 솜씨가 뛰어나고 발이 빠른 사람이 먼저 얻게 된 것입니다. 도척 같은 도둑놈의 개도 요임금을 보면 짖습니다.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는 원래 그 주인이 아니면 짖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신은 다만 한신을 알고 있을 뿐, 폐하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천하에는 폐하가 한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들을 또 다 잡아 삶을 작정이십니까?”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화가 치밀었던 고조도 괴통의 말이 과연 옳다 생각되어 그를 곱게 놓아 보냈다.
[출전] 사기 열전 淮陰侯(회음후) 편
• 걸불병행(乞不竝行) : 구걸하는 사람은 같이 다니지 않는다는 것으로 무엇을 요구하거나 청을 할때는 혼자서 가는 것이 이롭다는 뜻.
• 걸화불약취수(乞火不若取燧) : 남에게 불을 구하느니보다는 자기 스스로 부싯돌로 불을 일으키는 것이 낫다.
걸화불약취수, 기급불약착정(乞火不若取燧, 寄汲不若鑿井)
“불을 빌리는 것은 부싯돌을 구하느니만 못하고, 물을 긷는 것은 우물을 파느니만 못하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보다 자기가 노력해서 일을 성취하는 것이 낫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서
• 검려지기(黔驢之技) : 검주에 사는 당나귀의 재주라는 뜻으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기량을 들켜 비웃음을 산다는 뜻.
옛날 중국 검주에는 당나귀라는 동물이 없었다. 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당나귀 한마리를 배로 싵어 왔는데 그는 당나귀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어떤 일에 써야 하는지를 몰라 산 아래 풀어 놓고 먹이면서 키웠다.
어느 날, 산속을 어슬렁거리던 호랑이가 이 당나귀를 보고 여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당나귀를 신수라고 생각하고는 숲속에 몸을 숨긴 채 가만히 종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슬슬 주위를 살피며 숲에서 나와 당나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당나귀가 갑자기 소리높이 우는 소리에 깜짝 놀란 호랑이는 “틀림없이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황급히 달아났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그 우는 소리에도 익숙해지고 아무래도 무서운 동물은 아닌듯한 호랑이는 당나귀 주위를 서성거려 보았다. 아무 반응이 없자 용기가 난 호랑이는 당나귀의 본성을 시험해 보려고 일부러 툭툭 건드려 보았다.
당나귀는 호랑이에게 뒷발질을 했다. 이 서투른 동작하나로 당나귀는 그만 자신의 재주를 폭로하고 말았다.
“뭐야, 요정도야?”
호랑이는 그때서야 안심하며 별다른 힘이 없는 당나귀에게 덤벼들어 순식간에 잡아먹어 버렸다.
용재(庸才)의 졸렬한 기량을 비유하는 말
•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자신의 지식을 넓게 세워 이어나간다. 주자의 성리학에서 본 격물치지(格物致知)는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중 처음 두 조목에 해당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의미는 각각의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신의 지식을 확고하게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의미하는 사물의 이치는 각각의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성, 즉 특징을 말하고 있다. 예로서 사람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소는 네 발을 가지고 있고 힘이 세고 우직하며,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이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개개의 사물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을 소유하고 있다. 이 본성을 사물의 이치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신의 지식을 극진하게 연마한다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주자의 성리학과 달리 왕양명의 양명학에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 뜻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자기의 지식을 이어나간다는 의미이다.
먼저, 성리학에서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을 극진(지식을 넓인다) 하게 함’이라고 위에서 설명하였고.
왕양명의 양명학에서 격물치지는 ‘마음을 바로 잡아서 양지를 실현.’라고 의미를 부연할 수 있다.
양지(良知) : 사람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선한 본성
격물은 동양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였던 과학이란 뜻의 용어였다. 격물은 사물에 다가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이치를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으로 원래는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의 줄임말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 무엇이든 한 가지에 깊이 몰두하고 연구하여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노력하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격물치지는 원래 성리학의 공부 방법이다. 이 방법론을 이해하려면 격물과 치지를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격물(格物)의 격(格)은 다가간다(至, approach)는 뜻이다. 물(物)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격물(格物)은 ‘내가 알려고 하는 대상으로 다가가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말하면 알고 싶으면 우선 알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가란 뜻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의 원리를 알고 싶으면 반도체로 다가가야 하고, 고객의 마음을 알고 싶으면 고객의 마음으로 다가가라는 뜻이다.
치지(致知)의 치(致)는 극(極)의 뜻이다. 극한 깊이로 파고 들라는 뜻이다. 지(知)는 내 지식이다. 즉 치지(致知)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가지고 극한 깊이로 파고 들라는 뜻이다. 이것은 나의 전 지식을 총동원하여 몰입하는 경지를 말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간단히 말하면 ‘어떤 사물의 원리를 알고 싶다면 그 사물로 다가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몰입하라. 그러면 나는 그 원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 방법론의 전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치 즉 리(理)가 있고, 인간에게는 그 이치(理)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인 성(性)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일명 우리가 주자학을 성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性)과 우주가 가지고 있는 리(理)는 본질에서 같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원하는 우주의 사물에 다가가서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한다면 우주의 이치와 접속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하늘의 접속. 일명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격세지감(隔世之感) : 세상이 많이 변화하여 다른 세상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뜻. 격세감(隔世感), 금석지감(今昔之感), 능곡지변(陵谷之變), 상전벽해(桑田碧海), 상창지변(桑滄之變), 상해지변(桑海之變), 여세부침(與世浮沈), 여세추이(與世推移), 창상지변(滄桑之變), 창해상전(滄海桑田)
• 격탁양청(激濁揚淸) : 탁한 물을 내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으로, 악한 것을 없애고 선한 것을 가져옴을 이르는 말.
아무리 흐린 물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맑아지는 게 대자연의 흐름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윗물이 혼탁할지라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자정작용(自淨作用)을 통해 맑아지는 게 또한 자연현상이다.
부딪칠 激(격)의 구성은 물줄기가 갈라지고 합해지는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한 수(氵)와 노래할 교(敫)로 이루어졌다. 敫(교)는 고백(告白)하다에서처럼 ‘아뢰다’는 뜻도 지닌 흰 백(白)과 놓을 방(放)으로 구성되었다. 放(방)은 모 방(方)과 칠 복(攵)으로 짜여 있는데, 여기서 方(방)은 동서남북 사방을 의미한다. 즉 한 곳에 매여 있는 것을 사방(方)으로 흩어지도록 회초리를 들어 친다(攵)는 의미를 담아 ‘놓아 준다’는 뜻을 부여한 것이다. 이에 따라 敫(교)는 입에서 나온 소리(白)가 사방으로 메아리친다(放)는 데서 ‘노래하다’는 뜻을 부여했다. 따라서 激(격)의 전체적인 의미는 노랫소리가 사방으로 메아리치듯(敫) 흐르던 물(氵)이 바위나 제방 등에 거세게 부딪치며 흐른다는 데서 ‘부딪치다’ ‘세차다’ ‘격렬하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흐릴 濁(탁)의 구성은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한 수(氵)와 누에 촉(蜀)으로 이루어졌다. 蜀(촉)은 누에의 상형(罒)과 고치에 싸인(勹) 번데기(虫)를 의미한다는 데서 ‘누에’ ‘나비 애벌레’를 뜻하게 되었으며, 중국 사천성의 옛 지명이 ‘촉나라’였던 점에서 ‘나라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이 지역은 고대부터 누에고치에서 뽑아 짠 비단의 산지였다. 누에고치(蜀)에서 실을 뽑아내기 위해서 뜨거운 물(氵)에 담가야 하는데, 이 때 고치 속의 번데기로 인해 물이 혼탁해지기 마련이라는 데서 ‘흐리다’ ‘혼탁하다’ ‘더럽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오를 揚(양)의 구성은 손 수(扌)와 볕 양(昜)으로 이루어졌다. 扌(수)는 다섯 손가락의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든 상형글자 手(수)의 약자로 쓰기 편하게 한 획을 줄인 것이다. 昜(양)은 태양을 본뜬 日(일)과 햇볕이 내리 쬐이는 모양(一 + 勿)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갑골문이나 금문에는 둥근 해(日)아래에 T자형의 장대에 깃발(勿)을 달아 세워 그림자를 통해 시각을 알 수 있는 ‘해시계’를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재의 자형은 소전에 와서 이루어진 것으로 햇살에 휘날리는 깃발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揚(양)의 전체적인 의미는 손(扌)으로 깃발을 매단 장대(昜)를 세워 올린다는 데서 ‘날리다’ ‘오르다’ ‘바람에 흩날리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맑을 淸(청)의 구성은 물 수(氵)와 푸를 청(靑)으로 짜여 있다. 氵(수)는 물줄기가 갈라지고 합해지는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한 것으로 자형의 좌변에 놓여 강이나 물의 뜻으로 쓰인다. 靑(청)에 대해 허신은『說文』에서 “靑은 동쪽 방향을 나타내는 색이다. 木(목)은 火(화)를 낳는다(오행의 상생관계, 목생화木生火를 뜻함). 生(생)과 丹(단)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갑골문에는 보이지 않지만 금문에 그려진 자형을 보면 광산의 갱도(井)에서 광물(丶)을 깨내는데, 자형(丹)이 형성된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아 구리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붉은 뜻을 갖는 丹(단)은 안료로 쓰이는 주사(朱砂)나 진사(辰砂)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구리(銅)를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구리(丹)가 산화되면 푸른빛을 낸다(生)는 점에서 착안하여 ‘푸를 靑’이라 하였다. 따라서 淸(청)의 전체적인 의미는 푸른 빛(靑)을 띤 물(氵)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激濁揚淸이란 더러운 탁류를 몰아내고 맑고 깨끗한 물을 끌어들인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에게 해로운 악(惡)을 제거하고 착하고 맑은 선(善)을 선양(宣揚)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당서(唐書)』에 나온다.
• 격화소양(隔靴搔痒) :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는 뜻에서, 필요한 것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성에 차지 않음을 이르는 말.
가죽신을 사이에 두고 가려운 곳을 긁다. 즉,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다. 무슨 일을 애써 하기는 하나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방망이를 가지고 달을 치고, 가죽신을 신고서 가려운 곳을 긁는다.(掉棒打月, 隔靴爬癢.)』《무문관(無門關)》
『시가 제목에 내포된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詩不著題, 如隔靴搔癢.)』(송(宋) 완열(阮閱) 《시화총구(詩話總龜)》
‘격화소양’은 ‘격화조양(隔靴抓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음의 전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지떨이로 침상을 두드리니 흡사 가죽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과 같다.(拈拂敲牀, 大似隔靴搔癢.)』(명(明) 거정(居頂) 《속전등록(續傳燈錄)》〈남경영릉안복자승(南京寧陵安福子勝)〉
이상의 전적에서 유래하여 ‘격화소양’은 애를 쓰기는 하지만 핵심을 찌르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격혜소양(隔鞋搔癢)’ 혹은 ‘격화파양(隔靴爬癢)’이라고도 한다. 《무문관(無門關)》은 《벽암록(碧巖錄)》, 《종용록(從容錄)》과 함께 선종의 대표적인 책이다.
• 격화파양(隔靴爬癢) : 격화소양(隔靴搔痒)과 같은 말로, 신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인데, 전하여 무슨 일을 하느라고 애를 쓰기는 하지만 정곡을 찌르지 못해 답답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삼두양서(三頭兩緖) : 두서가 여러 갈래여서 하나로 되지 못하고 번잡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 견아설(見我舌) : 내 혀를 보아라. 비록 몸이 망가졌어도 혀만 살아 있으면 뜻을 펼 수 있다는 말이다. 부족한 것이 많더라도 한 가지라도 뚜렷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의(張儀)는 전국시대 세객(說客)으로 소진(蘇秦)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사람이다. 장의는 소진과 함께 귀곡선생(鬼谷先生)에게서 종횡술(縱橫術, 합종과 연횡의 술)을 배웠다. 소진이 스스로 자기 재주가 장의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할 정도로 장의는 재능이 뛰어났다. 장의는 학업을 마친 뒤 제후들에게 유세를 하고 다녔다. 어느 날 초(楚)나라의 재상이 개최한 연회에서 술을 마시는데, 재상의 벽옥이 없어졌다. 재상의 빈객들은 장의를 의심하고 여럿이서 장의를 호되게 때렸다.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 그를 보고, 그의 아내가 공부와 유세 같은 것을 안 했으면 이런 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탄식하자 장의가 물었다. “내 혀가 있는지 보아 주오. 아직도 있는가?” 아내가 비웃으며 말했다. “혀가 있긴 있구려.” 장의가 말했다. “그러면 됐다.”(其妻曰, 噫. 子無讀書遊說, 安得此辱乎. 張儀謂其妻曰, 視吾舌, 尙在不. 其妻笑曰, 舌在也. 儀曰, 足矣.)」
장의는 소진과는 반대로 육국(六國)이 연합하여 진(秦)과 동맹을 맺어 화친해야 한다는 연횡책(連橫策, 연형책(連衡策))을 주장하였다. 장의는 탁월한 언변으로 논리적인 유세를 펼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그런 후에 육국을 돌며 진나라와 화친해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여 결국 소진이 이룩했던 합종책(合縱策)을 깨뜨리고 모든 나라가 진나라에 복속하도록 만들었다.(사분오열(四分五裂), 합종연횡(合縱連橫) 참조) 장의는 마지막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을 지냈는데,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위나라에서 죽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온다. ‘견아설’은 ‘내 혀가 여전히 있는가’라는 뜻의 ‘오설상재(吾舌尙在)’라고도 한다. ‘소진 · 장의가 왔다가 뺨 맞고 달아나겠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는데, 언변이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용례 : 정치인들은 선거에 떨어져도 ‘견아설(見我舌)’을 외치며, 이번에는 전례 없는 부정 선거여서 떨어졌지만 내 혀가 살아 있는 한 다음에 꼭 당선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 그러고는 가족이나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또다시 4년 후에나 있을 선거를 준비하는 무모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집안이 서서히 망하려면 예술 하는 자식이 생기고, 급격히 망하려면 정치 하는 자식이 생긴다는 농담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 견강부회(牽强附會) : ① 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주장에 유리하도록 맞춤 ②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치나 조건을 맞추다.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 견백동이(堅白同異), 수석침류(漱石枕流), 영서연설(郢書燕說), 추주어륙(推舟於陸)
• 견금여석(見金如石) :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풀이되며 지나친 욕심을 절제함을 뜻함.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의 부귀영화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려의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최영장군을 떠올리면 늘 함께 생각나는 구절이 황금보기를 돌처럼 하라는 글귀입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용재총화(傭齋叢話)에 나오는 말이다.
최철성영(崔鐵城瑩)
소시기부(少時其父)
상계지왈(常戒之曰)
견금여석(見金如石)
최영(崔瑩) 장군이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항상 그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하였다.
고려(高麗)의 명장이자 충신인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잊지 않으려고 비단천에 견금여석(見金如石)이라고 새겨서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최영은 고려에 쳐들어 온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등을 물리치고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와 마찬가지로 겨우 생활하는 정도였다.
지나친 욕심을 절제하는 검소한 생활로 재물을 멀리하고 의리를 앞세웠던 것이다. 최영은 재상의 반열까지 올랐으나 살림살이는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나는 평생 탐욕을 부린 일이 없다. 내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유언했을 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하였다.
그는 나중에 높은 벼슬자리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교훈을 명심하여 절대로 재물을 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남의 물건은 터럭 하나도 취하는 일이 없어 살림살이는 여느 백성보다 나을 것이 없이 겨우 밥을 먹고 지내는 정도였다.
그 때 재상들 사이에는 서로 돌려가며 집으로 초대하여 바둑을 두는 일이 있었는데, 어느 집이고 서로 다투어 진수성찬을 마련하여 누가 더 사치스럽게 잘 차리는 지를 뽐내었다.
최영이 대접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점심때가 훨씬 지나도록 음식상을 내지 않다가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床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잡곡밥에 채소 반찬뿐이었다. 그러나 손님들은 워낙 배가 고팠던 터라 밥그릇을 모두 비우며, “역시 최장군 댁 음식이 제일 맛있다.” 고 칭찬했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도 또한 용병술의 하나입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형제간의 의리를 위해 황금을 강물에 던진 형제 ‘형제투금(兄弟投金)’이야기가 전한다.
어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웠다. 그 형제는 의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공암진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깜짝 놀란 형은 그 까닭을 물었다.
나는 평소 형을 무척 좋아하였지요. 그런데 오늘 금덩이를 나누어 갖자 문득 형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차라리 강물에 던져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 여겼지요. 형도 동생의 말에 공감하여 금덩이를 강물 속에 집어 던졌다.
• 견련지친(牽連之親) : 서로 관련되는 먼 친척. 골육지친(骨肉之親)
• 견리망의(見利忘義) :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음.
장자(莊子 기원전 370년∼287년)가 조릉(雕陵)의 정원으로 사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조릉(雕陵)은 밤나무 동산이 있는 곳으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조릉(雕陵)의 울타리를 따라 걷고 있는데 이상한 큰새 한 마리를 만난다. 까치였다. 장자는 쫓아가서는 까치를 쏘려고 하니, 까치가 움직이지를 않았다. 까치가 무언가를 골똘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장자는 그 까치가 노려보는 곳을 따라가 보니 작은 앞발을 쳐들고 있는 사마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사마귀 또한 무엇을 노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매미 한 마리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즐겁게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 뒤에 숨어 있는 사마귀가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까치는 까치대로, 사마귀는 사마귀대로 모두 저 죽는 것은 모른 채 모두 눈앞의 이익에 마음이 빼앗겨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장자는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어 탄식하며 말했다.
“희물고상루 이류상소야(噫物固相累 二類相召也) 아아, 세상 만물이 본래 서로 얽혀있고,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를 불러들이는구나.”
장자(莊子)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정원지기가 다가와 정원에 함부로 들어온 그를 책망하였다. 장자(莊子) 또한 이(利)를 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莊子)는 만물은 이런 것이라고 깨닫고 득의양양(得義楊楊)해 있었는데 정원지기가 다가와서 이 정원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장자(莊子)를 책망하였다.
장자(莊子) 또한 눈앞의 이익 때문에 판단이 흐려졌음을 깨달았다고 하여 이를 견리망의(見利忘義)라고 하며, 이때부터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자신의 참된 처지를 모르게 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장자(莊子)의 고사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견리망의(見利忘義)이다. 견리망의(見利忘義)란 견리이망기긴(見利而忘其眞)의 준말로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히게 되면 지켜야 할 의리를 잊게 된다는 뜻으로 눈앞의 이익을 보면 탐내어 의리를 저 버린다는 말이다.
천지만물지리 무독필유대(天地萬物之理 無獨必有對) 천지만물의 이치는 혼자라는 것이 없으며 반드시 상대가 있다. [근사록(近思錄)] 희물고상루 이류상소야(噫物固相累 二類相召也) 사물은 항상 서로 연루되어있고 음과 양은 서로를 부른다. [장자] 자연은 음과 양의 상대성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낮과 밤, 작용과 반작용, 남과 여, 나와 남,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옳음과 그름 등으로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긴밀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시시때때로 변화를 통해 자리를 바꿔가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리(道理)란 음양의 조화이고 이해의 중심(中心)추이며 치우침과 기울어짐이 없는 중정(中正)의 이치이다. 치우쳐 있음을 기울어져 있다하고 기울어 있음을 바르지 않다하며 바르지 않음을 부정(不正)이라하고 부정을 도(道)에서 어긋남이라한다.(一+止=正이다. 一은 통일ㆍ통합을, 止는 그칠지 머무를지 살지 족할 지로서 正이란 음과 양, 나와 남을 통일한 가치와 삶을 의미한다) 세상일과 남이 나의 뜻대로 되길 기대하는 것은 나에게 치우침을 요구하는 것으로 바르지 않는 것을 요구함으로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별이 총총 빛나는 밤과 맑은 하늘은 모두가 좋아하지만 이런 날이 계속되어 비가오지 않는다면 만물에게는 재앙이다. 날이 가물면 생명의 근간인 물이 고갈되어 만물이 생존하지 못한다. 땅은 물이 부족하면 생명이 살수 없는 사막으로 변한다. 비가 오는 것이 만물에게 필요하듯 인생에 있어 우울과 슬픈 눈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삶의 깊은 지혜를 터득하게하며 생각을 영글게하여 인생을 풍성하게 한다. 천도무친 상여선인(天道無親 常與善人) 하늘은 편파적으로 친하지 않으며 항상 선한 사람과 같이한다. [노자] 천도가 선한 사람과 함께한다함은 선한 사람은 천리에 따라 순리적으로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한 독재자에게 불쾌한 일이 많은 것은 천도를 거슬리므로 민중의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남에 비해 유별나게 불쾌한일이 많다면 삶에 임하는 당신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사는 음과 양이 있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작동된다. 욕심이란 지나친 마음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평형감각을 상실함을 의미하며 욕심이 많으면 마음을 비울 수 없고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천도를 이해하지 못하며 천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천도에 어긋나는 사고방식으로 언행을 하게 되어 사람과 다투며 사물과 불화하게 되어 불쾌한 일이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천하시비무소정 구시자 비구도리야 구합어기자야 거비자 비비사시야 거오어심자야(天下是非無所定 求是者 非求道理也 求合於己者也 去非者 非批邪施也 去忤於心者也) 세상의 옳고 그름은 정해진 것이 없으니 옳음을 구한다는 것은 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합리화를 구하는 것이며 옳지 않음을 거부하는 것은 사악함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회남자]
• 감명자진구불능매(鑑明者塵垢弗能埋) : 감명자라는 뜻은 “맑고 깨끗한 거울을 가진 자”라는 말이고 진구(塵垢)는 “먼지와 같은 때 즉 더러움”을 의미하며 불능매(弗能埋) 라는 말은 “묻히는 것을 능히 피할 수 있다” 는 말이다. 다시 종합해서 모두의 뜻을 정리하면 “맑고 깨끗한 거울 즉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러운 먼지와 같은 때 속에 묻힘을 피할 수 있다”는 뜻으로 맑은 거울이 모든 것을 밝게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밝으면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길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마음의 거울은 자신을 깨끗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악과 더러움에서 자신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배우고 깨우치려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일은 이처럼 배우고 지식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맑고 깨끗한 거울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다 해서, 권위가 있다 해서, 마음의 맑고 깨끗한 거울을 가질 수 있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거울은 별도로 닦고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가장 작은 일을 통해서도 자신의 거울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일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 감불생심(敢不生心) : 힘에 부치어 감히 어찌 해볼 생각도 못함. ‘어찌 감히 엄두를 내겠는가?’ 즉 일의 상황이 어렵거나 상대방이 두려우니 어떻게 감히 생각이나 하겠는가라는 말이다. 언감생심(焉敢生心), 감불생의(敢不生意)
• 감언이설(甘言利說) : 남의 비위에 들도록 꾸미거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서 꾐을 이르는 말. ‘몸에 좋은 말은 입에 쓰다’는 뜻의 양약고구(良藥苦口)라는 말이 있듯이 감언이설은 대상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이로움을 주지는 못하며, 윗사람에게 아부하거나 달콤한 말로 교묘하게 다른 사람을 속여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를 일컫는다. =첨언밀어(甜言蜜语)
• 감언지지(敢言之地) : 거리낌 없이 말할 만한 자리나 처지.
• 감정선갈(甘井先喝) : 맛이 좋은 우물은 길어가는 사람이 많으므로 빨리 마른다는 뜻으로 재주가 좋은 사람이 일찍 쇠함을 말한다.
단 우물이 먼저 마른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 공자와 은자(隱者) 태공임의 대화에서 유래하며 자기 분수를 지켜 처신하는 것이 참 지혜임을 가르쳐주는 말이다.
7일간 곡기가 끊긴 공자에게 태공임은 살 길을 알려주겠다며 의이(意怡)새에 대해 말한다. 의이새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날개짓 밖에 없지만 남과 함께 날아갈 때는 앞질러가려 하지 않고 먹이를 먹을 때에도 남이 남긴 것만 먹어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이새 처럼 무욕(無慾)으로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임을 알려준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위한 감정(甘井)이 되어 그 능력을 펼치는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그러한 우물은 결코 마름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공명과 권력을 위해 입신하려는 자들은 오래지 않아 그 이름이 더럽혀지고 마는 법. 진정 큰 이름을 얻고자 한다면 ‘감정선갈(甘井先喝)’의 무서움을 깨달아 자기 분수와 공의에 맞는 우물이 될 일이다.
• 감지덕지(感之德之) : 분에 넘치는 듯싶어 몹시 고맙게 여기는 모양
• 감탄고토(甘呑苦吐)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로, 자신에게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배척한다는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말한다. = 토사구팽(兎死狗烹)
• 갑남을녀(甲男乙女) :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갑이라는 남자와 을이라는 여자라는 뜻으로, 특별히 이름이나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보통사람을 말한다. 순화어는 ‘보통 사람들’ = 장삼이사(張三李四), = 선남선녀(善男善女), = 필부필부(匹夫匹婦), = 초동급부(樵童汲婦)
• 갑론을박(甲論乙駁) : 자기의 주장을 세우고 남의 주장을 반박함
• 강개무량(慷慨無量) : 의기가 북받쳐 한탄하고 분개함이 끝이 없음. 세상의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며 탄식하는 사람.
• 康衢煙月(강구연월) : 번화한 큰 길거리에서 달빛이 연기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 태평한 시대의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서 상점마다 피어오르는 연기에 달빛이 은은히 비추는 평화로운 풍경을 나타낸 말로, 간단히 말해서 태평하고 풍요로운 시절의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태평성대(太平聖代)와 비슷한 말이다. 태평성대는 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기 위해 많이 쓰인다면, 강구연월은 백성들의 여유로운 삶을 나타내기 위해 많이 쓰인다. 비슷한 말로는 고복격양(鼓腹擊壤), 도불습유(道不拾遺), 요순지절(堯舜之節)이 있으나 대부분은 태평성대로 많이 써서 나머지 사자성어들은 생소한 사람들이 많다.
• 강근지친(强近之親) : 도와 줄만한 가까운 일가친척을 의미 = 강근지족(强近之族), 골육지친(骨肉之親)
• 강노지말(强弩之末) : 힘찬 활에서 튕겨나온 화살도 마지막에는 힘이 떨어져 비단조차 구멍을 뚫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무리 강한 힘도 마지막에는 결국 쇠퇴하고 만다는 의미.
전한시대(前漢時代) 한고조(韓高祖)는 흉노를 정벌코자 출전했다가 오히려 흉노에게 포휘되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이때 진평(陳平)이란 신하가 묘안을 내어 간신히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한고조는 흉노족과 화천의 약속을 믿고 매년 선물 등을 보내었다. 그러나 흉노의 왕 선우는 약속을 어기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기가 일쑤였다. 이윽고 무제(武帝)시대에 이르러 한(韓)나라는 흉노족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하고 대신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때 어사대부(御史臺夫) 한안국(韓安國)은 흉노를 공격하는 원정계획을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찬 화살에서 튕겨 나간 화살도 마지막에는 비단조차 뚫기 어렵습니다(强弩之末).” [출전]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때는 조조가 하북의 원소를 무찌르고 천하를 한손에 넣고 싶은 야망으로 똘똘 뭉친 때이다. 조조는 남하하기 시작했고, 형주에 유종은 그냥 항복해 버리고 만다. 형주에 의탁해있던 유비는 백성들을 이끌고 양양성으로 도망치는데 조조가 기병 오천으로 쫓기 시작한다. 이때 장판교에서 제갈량이 계책을 내어 장비에게 지키게 한다. 뒤따라오던 조조는 장판교에서 장비와 소수의 군사만을 보고 달려들려는 군대를 멈춰 세우게 된다. 자세히 보니 숲 사이로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복이다! 멈춰라!”
“으허허 바보 같은 놈들 어서오너라 이 장비가 다 죽여주마!”
“으으으∼ 매목을 심어놓다니 좁은 다리에서 기병으로 맞서기에는 무리다..으음...”
그렇게 장판교에서 장비와 조조는 대치를 하게 되고 한나절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이때쯤이면 되었겠다 싶은 장비는 서서히 장판교에서 물러나며 다리를 끊어버린다. 하지만 제갈량은 장비에게 일러 꼭 퇴각할 때는 그냥 천천히 물러나라고 계책을 들었다. 하지만 조조가 쫓아올 것이라는 불안감에 다리를 끊어버린 장비는 말을 몰아 빠르게 퇴각했다. 그 모습을 본 조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다리를 만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서 다리를 만들어라!! 저놈들의 개책이다.!! 병사가 얼마 안되니 어서 다리를 놓아라!”
그렇게 조조는 빠르게 주위의 나무를 베어 쓰러트려 다리를 만들어 다시 쫓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장비가 서서히 물러났다면 유비일행은 양양성까지 도망갈 수 있었으나. 장비의 실책으로 어쩔 수 없이 하구에 주둔하게 된다. 이때 제갈량은 빠르게 오나라로 건너가고 있었다. 우선 저 많은 조조의 병력을 막을 곳은 오나라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오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촉의 제갈량은 오의 손권을 보기 전 손권의 신임을 받고 있는 주유를 먼저 찾아간다. 이렇게 만난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앞으로 시국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주유님 조조는 이제 오나라까지 몰아칠 것입니다. 그러니 조조와 맞써 싸우셔야 합니다.”
고심한듯 주유는 제갈량을 쳐다보지 않고 그저 차 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주유는 말을 뱉었다.
“으음... 저희 오나라도 준비는 하고 있으나 현재 반반입니다. 전투를 하자는 쪽과 하지 말고 화해를 요청하는 쪽이지요.”
그말을 들은 제갈량은 당연히 그렇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고 주유를 설득하였다. 조조의 성품부터 시작해서 조조의 여성편력 그리고 주유의 아내 소교가 오나라의 꽃이니 꼭 조조는 오나라를 칠것이라고 어떻게 보면 말도 안돼는 이야기지만 주유는 그의 아내 소교를 매우 아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말에 흔들려 제갈량을 대리고 손권을 찾아갔다.
“손권님 촉의 책사 제갈량이 동맹사절로 찾아왔습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손권은 제갈량을 본 후 그의 왼쪽에 시립해있던 전쟁을 하자는 파인 황개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반대쪽 전쟁반대파를 또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쓰다듬고는 제갈량이게 말을 이었다.
“내가 현재 머리가 아프오. 조조가 백만대군을 몰고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오. 하지만 우리 오는 겨우 해봐야 10만이요. 아무리 병력이 많다고 해도 전투에서 지지 않을 자신은 있으나 그 후 침체될 이 나라가 걱정이요 그래서 차마 전쟁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한거요!”
그 말을 들은 제갈량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손권에게 말을 하였다.
“저희 촉이 아무리 조조에게 패하였다고 하지만, 그동안 조조는 우리 촉을 잡기위해 밤낮을 달려 300리길을 행군하였습니다. 아무리 강병이라고 하나 그 300리길을 달리고 이제 익숙치않은 수전을 치뤄야 하는 처지입니다. 아무리 강한 화살이라도 마지막 힘을 다하고 떨어질 때는 얇은 비단조차 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지치고 힘든 조조군을 저희 촉과 함께 이 익숙하지 않은 수전으로 싸운다면 당연히 필승할거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해 조조를 맞이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준비하게 된다.
• 강랑재진(江郞才盡) : 강랑의 재주가 다했다는 말로, 학문상에 있어 한 차례 두각을 나타낸 후 퇴보하다란 뜻이다.
• 강랑채필(江郞彩筆) : 강랑은 남조(南朝) 양(梁) 나라 때 문장가 강엄(江淹)을 말한다.
• 강랑한부(江郞恨賦) : 강랑은 남조(南朝) 고성(考城) 사람 강엄(江淹)인데 자는 문통(文通)이고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예릉후(醴陵侯)에 봉해졌다. 소시적부터 문예(文譽)가 있었으며 유명한 한부(恨賦)를 지었다.
• 강려자용(剛戾自用) : 성미가 깔깔하여 스스로의 재지(才智)만 쓰고 남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말한다.
• 강렵(剛鬣) : 돼지의 이칭이다. 돼지는 살찌고 모렵(毛鬣)이 억세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강령(江令) : 육조(六朝) 양(梁) 나라의 문인(文人) 강엄(江淹)이 동무령(東武令)을 지냈으므로 강령(江令)이라 한다. 고향에 못 돌아감을 슬퍼하는 시를 많이 읊었다.
• 강령(綱領) : 일의 으뜸이 되는 큰 줄기 또는 정당이나 단체의 취지·목적·행동 규범 따위의 원칙을 말한다.
• 강목(綱目) : 사마광(司馬光)이 찬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주희(朱熹)가 증감(增減)하여 만든 책으로 원 제목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다. 그 체재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모방하여 글자를 크게 하여 제요(提要)로 붙인 것을 강(綱)이라 하고 글자를 작게 하여 그 아래에 두 줄로 쓴 것은 목(目)이라 하는데, 강(綱)에는 주자가 포폄(褒貶)하는 뜻을 붙였다.
• 강목수생(剛木水生) :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 함이니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무엇을 내라고 요구함을 이르는 말.
• 강목집람(綱目集覽) : 송나라 왕유학(王幼學)이 찬한 통감강목집람(通鑑綱目集覽)을 말한다.
• 강목팔목(岡目八目) : 당사자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이해득실(利害得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바둑에서 나온 말로, 옆에서 보고 있는 관전자가 오히려 냉정하게 지켜보기 때문에 대국자보다 팔목(八目)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강(崗)은 옆이란 뜻이다.
• 강무(講武) : 임금이 사냥이나 또는 군사 연습을 하는 것을 강무(講武)라고 한다. 주로 농한기를 이용하여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실시하던 수렵대회를 말한다.
• 강무고실(羌無故實) : 시문에 전고를 사용하지 않거나, 쓰인 표현이 출처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때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맑은 새벽에 언덕머리에 오르다.’라는 시구는 전혀 고실이 없다. 청신등롱수 강무고실(清晨登隴首 羌無故實)” 하였다.
• 강문통(江文通) : 문통은 남조(南朝) 때 문인(文人) 강엄(江淹)의 자이다. 그는 젊어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유학(儒學)·도학(道學)·불경(佛經)에 두루 통하였다.
• 강상죄인(綱常罪人)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도덕을 해친 범죄.
강상(綱常)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 등의 관계를 의리·자애·우애·공경·효도 등을 매개로 파악하는 유학적 사고의 개념이자,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적 의미가 함축된 용어이다. 강상으로 대표되는 유교 윤리가 사회적 통치의 근간 이념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위중한 범죄 행위였고 이에 대해서 국가는 범죄의 범위와 내용, 그리고 그에 적용되는 형률을 규정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엄벌 위주의 대책으로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 사회 윤리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조선후기까지 지속해 나갔다. 그러나 점차 조선후기,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경제적인 발전과 이에 동반한 반유교적인 사고, 생활 방식 등의 변화로 강상 윤리의 의미는 약화되어 갔고 국가의 엄형 위주의 대응책은 강상 범죄를 줄이는 데에 실제적인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강상을 범한 죄에 대한 규정은 조선후기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 가서야 명문화되었다. ‘부모나 남편을 죽인 경우 또는 종이 주인을 죽인 경우 또는 관의 종이 관장을 죽인 경우 강상죄인은 재판을 마무리하고[結案] 사형에 처한 후에[正法] 그 아내와 자녀는 종으로 삼고 집은 허물어 웅덩이로 만들며[파가저택(破家瀦澤)] 그 고을의 호칭[邑號]을 낮추고 수령은 파직한다.”고 하였고, “부모·조부모·시부모·남편·백숙부모, 형과 누이 등을 죽인 자, 종으로서 주인을 죽인 자, 관의 종으로서 관장을 살해한 자(이상은 범죄가 이미 저질러졌는지 미수에 그쳤는지를 막론한다), 고공이 가장을 죽인 자, 계모를 간음한 자, 백숙모·고모, 손윗누이나 손아래누이[姊妹], 며느리를 간음한 자, 종으로서 여자 상전을 간음한 자, 적모를 팔아버린 자, 부모를 구타하고 모욕한 자, 아버지의 시체를 불태워 버린 자는 의정부·의금부·사헌부의 관원이 합좌하여[三省] 추국한다.”고 하여, 부모나 남편을 죽인 자, 주인을 죽인 노비, 관장을 시해한 관노를 강상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강상죄인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가족을 노비로 삼고 파가저택하며 읍호도 낮추고 수령을 파직하는 등 당시 내릴 수 있는 형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처벌을 내림으로써, 강상죄인은 단순한 살인죄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법규로 보여주고 있다. 기타 강상 관련 범죄의 경우도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의 관원들이 합좌하여 범인을 재판하는 삼성추국(三省推鞫)을 열어 처벌하도록 법제화하였다.
부자간이나 부부, 인척간의 가족 윤리에 관한 범죄, 종·고공(雇工)과 주인 간의 사회 윤리를 무너뜨리는 범죄는 효의 기준에서 처벌되었고, 관의 종이나 하급 관원이 관장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충의 기준에서 처벌되었다.
이 중 충을 거스르는 강상죄의 경우는 가족, 사회관계에서 빚어지는 강상죄에 비해 공적인 범죄이고,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해치는 반국가적 범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특별하다. 불충적인 강상 범죄는 여러 유형으로 드러났는데, 법문 상으로는 읍리나 백성이 국왕의 대리자인 지방 관장을 시해하는 행위라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 외에도 관장에게 모욕을 주거나 무함하여 고발하는 무고(誣告), 관장의 비리 등을 폭로하는 부방(付榜), 소송 관원에 대한 공격, 그리고 왕의 상징물에 대한 훼손 등의 범죄도 강상을 무너뜨리는 행위로 파악하고 있다.
노주(奴主)의 명분이나 상·하천, 고주·고공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범죄 또한 중요한 강상죄에 속했다. 18∼19세기 조선후기 사회의 반봉건적 징후는 신분제의 해체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었는데 신분 질서, 명분 등을 해치는 반사회윤리적 범죄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양반이나 노비주, 고주가 천민이나 노비 등을 침학하고 괴롭히며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의 범죄 유형과 그 반대로 노비나 천민, 고노, 비부(婢夫) 등이 양반, 상전에 대해 저지르는 범죄의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전자는 일반 사람을 죽인 경우의 살인에 비해 그 처벌의 수위가 낮았고 게다가 사건의 원인 제공이 노비들의 범분(犯分)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처벌은 더욱 가벼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법적으로 볼 때 극형, 엄형의 원칙은 조선후기까지 변함없었다. 주인을 살해하고 상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분수를 무너뜨리는 범죄, 즉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고 무고하거나, 주인집의 여자 상전이나 처의 상전을 겁탈하는 행위 등은 사회윤리를 해치는 범죄로서 역시 엄형으로 처벌했다. 그리고 여자에게도 정절을 강요하고, 마을에 정려(旌閭)함으로써 귀감으로 삼으려 했다.
• 강호연파(江湖煙波) : 강, 호수 위에 안개처럼 이는 잔물결의 대자연의 풍경. 강호지락(江湖之樂), 강호지인(江湖之人), 강호산인(江湖散人)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사는 사람을 의미
• 강호지락(江湖之樂) :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즐거움
• 개과불린(改過不吝) : 과실이 있으면 즉시 고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말라.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편에 개과불린(改過不吝)이라는 말이 있다. 고칠 개(改), 허물 과(過), 아니 불(不), 인색할 린(吝), 허물을 고치는 데는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잘못이 있으면 서둘러 바로잡고, 폐단이 있으면 조속히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폐단은 개혁하기도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허물을 고칠 때는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지만, 이런 경우는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언필(洪彦弼)은 청렴결백(淸廉潔白)하여 인망이 높았다. 홍언필이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자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여 산적한 폐단을 과감히 개혁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홍언필은 영의정에 오른 이후로 세상을 안정시키는 데만 힘쓰고 새로운 의견을 내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태도를 비판하자 홍언필이 말했다.
“나도 시사(時事) 가운데 개혁해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개혁하고서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폐단을 단번에 개혁하겠다고 선언하면 듣기에는 통쾌할지 몰라도 굳어진 폐단은 개혁하기도 그만큼 어려운 법이다. 눈앞의 폐단을 개혁하려다 훗날 더 큰 폐단을 야기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개혁에는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다.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널리 동의를 얻고,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심사숙고하여 오랫동안 준비한 끝에 개혁을 추진해야만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내어 업적을 쌓으려는 욕심에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성급히 밀어붙이면 개혁은 좌초하기 십상이다. “개혁하고서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준비가 미비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직은 개혁할 때가 아닌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개과천선(改過遷善) : 잘못 들어선 길을 버리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결의를 실천하여 마침내 이룩함을 이르는 말. 당나라의 정치가 조거정(趙居貞)의 《신수춘신군묘기(新修春申君廟記)》에서 보인다.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유래가 비슷하나 사용 용례는 완전히 다른 편. 개과천선은 “남의 말을 듣고 (잘못을) 고치는 것”이고, 괄목상대는 “자기 스스로 잘못을 고치거나 발전하는 것”을 뜻한다.
• 개관사정(蓋棺事定) : 죽은 뒤에야 사람의 참다운 평가가 내려진다는 말로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인데요. 두보(杜甫)가 쓰촨성[四川省] 동쪽 쿠이저우[夔州]의 깊은 산골로 낙배해 있을 때 친구의 아들인 소혜가 유배되어 그곳에 와서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이를 보다 못한 두보가 <군불견간소혜(君不見簡蘇徯)>이란 시를 지어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군불견간소혜(君不見簡蘇徯)
군불견도변폐기지(君不見道邊廢棄池),
군불견전자최절동(君不見前者摧折桐).
백년사수중금슬(百年死樹中琴瑟),
일곡구수장교룡(一斛舊水藏蛟龍).
장부개관사시정(丈夫蓋棺事始定),
군금행미성로옹(君今幸未成老翁),
하한초췌재산중(何恨憔悴在山中).
심산궁곡불가처(深山窮谷不可處),
벽력망량겸광풍(霹靂魍魎兼狂風).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에 버려진 못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한 섬의 오래된 물은 교룡이 숨기도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
그대는 아직 늙지 않았거늘
어찌 원망하리 초췌해 있음을
심산유곡은 살 곳이 못된다.
벼락과 도깨비와 미친바람이 불고 있으니.
• 개두환면(改頭換面) : 내심(內心)은 그대로 두고, 단지 그 표면만을 고침, 머리를 고쳐 얼굴을 바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만 변화시키고 실제 속내용은 예전과 같이 변함없는 상황을 이르는 말. 조삼모사(朝三暮四)
• 개문납적(開門納賊) : 문을 열고 도둑을 불러들인다는 말로 스스로 재난을 불
• 개선광정(改善匡正) : 착한 것으로 고치고 바로잡음. 개과천선(改過遷善)
• 개세지재(蓋世之才) : 세상을 덮을 만한 재주.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년∼210년)이 지방 시찰 중에 병들어 죽자 환관정치가 시작되고, 폭정과 횡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무리지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진시황(秦始皇)에 패하여 멸망당한 6국 연(燕), 위(魏), 제(齊), 조(趙), 진(秦), 초(楚), 한(韓)의 옛 귀족들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195년)과 항우(項羽, 기원전 232년∼202년)가 등장한다. 그 유명한 초한(楚漢)전쟁이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겨루게 되었다. 처음 항우(項羽)의 우세로 전개되던 싸움은 장기화되면서 역전이 되었다.
항우(項羽)의 군대가 해하(垓下)에 진지를 구축했지만 군사는 터무니없이 적고 식량 또한 거의 바닥이 나 있는 등 극한상황에 처했다. 그 상태에서 한나라 병사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당했으니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였다. 그런데 밤이 되자 한나라 병사들이 사방에서 초(楚)나라의 노래를 불렀다(四面楚歌).
항우(項羽)가 크게 놀라 말했다. “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저렇게 많을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항우(項羽)가 한밤중에 일어나 술을 마셨다.
항우(項羽)는 우(虞)미인을 사랑하여 전투 중에도 늘 데리고 다녔다. 옆에는 준마인 추(騅)도 있었는데 그가 언제나 타고 다니던 말이었다. 비감에 싸인 항우(項羽)가 울먹이는 소리로 시(詩)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이혜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추불서혜가내하(騅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내약하(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는다.
그래도 시운을 못 만나니 명마 추가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말이 나아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를 또한 어찌할거나.
항우(項羽)가 이렇게 여러 차례 노래를 부르자, 곁에 있던 우(虞)미인도 따라 불렀다. 이 시(詩)의 첫 구절에서 개세지재(蓋世之才)에 해당되는 말이 있다. 항우(項羽)의 시(詩)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개세지재(蓋世之才)이다. 개세지재(蓋世之才)란 세상을 뒤엎을 만한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인물을 일컫는 말이다.
• 개심현성(改心見誠) : 모든 정성을 다함
• 객반위주(客反爲主) :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뜻. ‘까치집에 비둘기 들어 있다’ 주객전도(主客顚倒)
• 객지면식(客地眠食) : 자신의 집을 멀리 떠나 객지에서 자고 먹는 일. 곧, 객지 생활하는 상태
• 객창한등(客窓寒燈) : 나그네 방안의 차가운 등불이라는 뜻으로 외로운 나그네의 신세
• 거가대족(巨家大族) : 대대로 번창하고 문벌이 좋은 집안
• 거사(居士) : ① 벼슬을 피해 은거하고 있는 선비 ② 불교를 믿는 선비
• 거두절미(去頭截尾) : 앞뒤의 잔사설을 빼놓고 요점만을 말함
• 거석이홍안(擧石而紅顔) : 무거운 돌을 들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말.
• 거세개탁(擧世皆濁) : 온 세상이 다 흐림. 곧,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바르지 않다.
“擧世皆濁(거세개탁) 我獨淸(아독청) 衆人皆醉(중인개취) 我獨醒(아독성) 是以見放(시이견방) 온 세상 너나할 것 없이 전부 흐려 있는데 나 혼자만 맑고 깨끗하고, 뭇 사람들 모두 거기 빠져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게 깨어 있어 그만 추방당해 버렸네.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可以濯乎纓(가이탁오영), 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可以濯乎足(가이탁오족) 창랑의 물결이 맑을 때엔 내 갓끈 씻어내고, 창랑의 물결이 흐릴 때면 내 발이나 씻어보리”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왕족출신의 충신, 굴원의 유명한 어부사의 구절이다. 몇 년 전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채택되었던 ‘거세개탁(擧世皆濁)’의 출처가 되는 시이다. ‘거세개탁’이란 ‘누구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혼탁에 빠져있을 만큼 세상이 혼탁해서 홀로 깨어있기 힘듬’을 의미할 때 쓰이는 말이다.
진심이 진솔하게 표현된 글은 은연중에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사상, 심지어 마음까지도 드러낸다. 개인의 삶이든, 서로가 얽혀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삶이든, 부조화한 현실에서 인지하는 왜곡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의 양심을 건드리게 마련이다. 적어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심장을 가진 인간이라면 말이다. 수천 년 전 강가를 외로이 서성이던 굴원의 고뇌와 그의 외로운 결단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가슴을 두드리는 것은, 늙은 어부의 시를 통해 두개의 자아가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고뇌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자신이 깨끗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탁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쫓겨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자아와 탁한 세상에서 현실과의 타협도 시류에 영합도 하지 못하고 세상 밖에서 홀로 서성이는 처량하고 외로운 자아가 있다. 여하간에 굴원은 둘 중 어떤 자아든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심어린 실존적 결단은 자기를 포장하거나 합리화하거나 감추지 않는다. 이처럼 굴원은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솔직하다.
“모든 게 다 끝났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어찌 고도(古都)를 마음에 품으리(已矣哉 國無人莫我知兮 又何懷乎故都).” 구차한 인생 삶을 구걸하듯 굴욕적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굴원이 자신의 생명을 미련 없이 버릴 정도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곧고 맑은 신념을 지키는 것이 소중했던 것만큼, 늙은 어부의 입을 빌어 또 다른 자기를 성찰한 것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것을 시사한다. 굴원의 이러한 양가적 감정, 참으로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을 캐치한 함석헌 선생의 해설의 마지막에 인용한 맹자의 말은, 깨어 있는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淸斯濯纓 濁斯濯足 自取也(청사탁영 탁사탁족 자취야, 맑으면 갓끈 씻고 흐리면 발씻는 것, 그건 다 스스로 제가 하는 것이니라’(함석헌 역)
‘다 스스로 제가 하는 것’ 맹자가 이 굴원의 싯구를 인용한 의도는 인용원문의 전후 문장을 보면 분명해 진다. 즉, ‘불의(不義), 불인(不仁)한 자와 함께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망치며 가문을 망치며 나라를 망치는 길이다. 불인하고 불의한 자는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자므로 남들도 업신여기게 되어 망치게 된다. 나라나 가문이나 망조가 드는 과정도 똑같으며, 모두가 스스로 망조를 자초하는 것이다. 濁斯濯足矣(탁사탁족의) 自取之也(자취지야), 禍福之來(화복지래) 皆其自取(개기자취), 화와 복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 비록 하늘의 화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스스로 자초하는 화는 결코 피할 수가 없다.’ 라고 설파한다.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 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은 실로 그 빛깔이 곱고 감미로우며 즐겁게 하고,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산산이 흐트러놓는다. 욕망의 대상에는 이러한 우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렵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남전대장경(南傳大臧經)
인생은 부단한 선택과 외로운 결단의 연속이다. 굴원의 고사, 맹자가 가르키는 손가락의 방향에는 擧世皆濁 衆人皆醉(거세개탁 중인개취)의 시류, 그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이 있다. 누군가 만들어 준 인식의 틀 속에서 순간순간의 즐거움으로 강화되고 학습되는 동물적 만족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간다. 자본과 물질이 멍에처럼 얹혀져 타인을 의존하고 타인을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타의에 의해서 길들여진 삶, 획일화된 로봇처럼 타의에 의해서 조종되는 기계적 삶은 참으로 서글픈 우리 사회 민초들의 자화상이다. 굴원의 고사는 스스로 주체가 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깨어 있는 삶, 인간답게 살아가는 삶’을 가능케 하는 주체적인 삶의 방식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 가부좌(跏趺坐) : 책상다리를 하고 앉음. 가부좌(跏趺坐)라는 말은 인도의 말을 한역한 것으로, 본래 원어는 범어 paryaṅka( 빨리어의 pallaṅka)이다. 그런데 이 paryaṅka라는 좌법은 붓다 당시 결가부좌(가부좌) 모양의 좌법이 아니라 좌우 발을 모아서 뒷꿈치가 성기에 닿을 정도로 몸에 붙여 앉는 좌법이었다. 실제로 결가부좌는 인도 북부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원 전후 경에 불상과 함께 등장하였다. 그 이전에 인도에서 결가부좌는 발견되지 않는다. 결가부좌는 불상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북인도에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가부좌(跏趺坐)는 결가부좌의 약어로 연화좌(蓮花坐)라고도 한다. 요가에서는 파드마사나라고 부른다. 결가부좌는 앉는 법의 한 가지로서 가는 발의 안, 부는 발의 등을 말하며, 오른쪽 발을 우선 왼쪽 허벅지 위에 얹고 다음에 왼쪽 발을 오른쪽 위에 얹어 앉는 법이다. 부처님은 반드시 이 앉는 법을 따르기 때문에 여래좌 · 불좌라고도 한다. 결과부좌에 대해 좌우 중 한쪽 발을 좌우의 한쪽 허벅지 위에 놓는 것을, 반가좌(半跏坐)라고 한다. 반가좌는 오른발을 왼발의 밑에 두면, 왼발이 오른발 아래에 감추어 지고, 오른발 바닥만이 위를 향하게 된다. 선종에서는 결가부좌를 좌선의 바른 자세로 정하고 있다.
가부좌(跏趺坐)쓸데없는 고집을 피울 때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또 일부 언론이나 문학작품에는 고집스레 한가지 일에 몰두 할 때 가부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가부좌의 본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뜻은 스님이나 수행자들이 앉는 자세를 가부좌라고 한다. 즉 가부좌의 본뜻은 정각을 이루기 위해 수행할 때의 자세를 가리킨다.
가부좌에는 결가부좌(結)와 반가부좌(反)가 있다. 결가부좌는 발의 위치에 따라 길상좌(吉祥坐)와 항마좌(降魔坐)로 나뉜다. 반가부좌는 반가좌 또는 보살좌(菩薩坐)라고도 한다. 따라서 가부좌는 몹쓸 고집을 피운다는 부정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묵묵히 한길을 걷는다는 뜻에서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원래 뜻은 스님이나 수행자들이 앉는 자세를 가부좌라고 한다.
• 가가대소(呵呵大笑) : 너무 우스워서 껄껄 크게 웃음(박장대소=拍掌大笑)
• 가급인족(家給人足) : 집안이 넉넉하고 사람이 풍족하다는 뜻으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마다 풍족하라는 의미의 기원으로, 주로 입춘절의 입춘방(立春榜)으로 사용함.(=人給家足)
• 가기이방(可欺以方) : 그럴듯한 말로 속일 수 있음. 이 사자성어는 직역으로는 ‘남을 속인다’는 것이지만 원문의 의미를 살펴보면 어른이나 리더나 군자는 “알고도 속아 준다”는 따뜻한 사람의 인자함이 담겨 있다. 군자가기이기방(君子可欺以其方) : 옛날 중국 鄭(정) 나라 재상인 子産(자산)이 살아 있는 물고기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산은 살아 있는 물고기를 차마 잡아먹을 수 없어서 정원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연못에 넣어 잘 살게 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물고기를 오히려 다 잡아먹고 태연하게 연못에 고기를 놓아 주었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산은 그 물고기가 자기가 있을 곳을 얻었다며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가리켜 군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군자라도 남에게 속아 넘어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입니다.
즉, 세상 물정에 어둡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군자 같은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교활한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을 알려 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진정으로 알아야 할 본질은, 역설적으로 “군자는 알고도 속아 넘어가 줄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자산도 하인이 그 물고기를 잡아먹을 것을 알았거나, 또는 배고파서 잡아먹었을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 속아 넘어가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먹으라고 받은 선물인 고기였기에 자신이 먹는 대신 하인에게 은연중에 먹으라고 주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모든 게 넉넉한 상황의 대인이라면, 자기를 속이려는 어리석은 상대방의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속아 주는 큰 아량이 지도자이고 큰 어른의 처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주변의 모임에서도 또는 국가의 지도자에게서도 어디에서나 통용되면 좋을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미덕이 되어도 좋을 고사이자 사자성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 가농성진(假弄成眞) : 처음에 장난삼아 한 일이 나중에 정말이 됨. = 농가성전(弄假成眞) 농으로 한 것이 진실로 한 것같이 됨.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 일이 뚜렷한 결과를 맺게 됨을 이르는 말
• 가담항설(街談巷說) : 길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를 뜻하는 가담항설(街談巷說)은 유언비어(流言蜚語)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유언비어는 아무런 근거가 없이 널리 퍼진 소문, 터무니 없이 떠도는 말 등의 뜻입니다. 가담항설이 사실일 수도 있는 이야기라면, 유언비어는 사실과 다른 거짓된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 가동가서(可東可西) : 동쪽이라도 좋고 서쪽이라도 좋다.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다. 가동가서(可東可西)는 원래 가이동가이서(可以東可以西)인데 이를 줄여서 가동가서라고 한다. 예전 조선개국시 태종 이방원이 조선개국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만나 지은 하여가(何如歌)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 가동주졸(街童走卒) : 길거리에서 노는 철없는 아이 일정한 주견이 없이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하류배
• 가렴주구(苛斂誅求) : 세금 같은 것을 가혹하게 받아 국민을 못 살게 구는 일
• 苛斂誅求(가렴주구) :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고 물건을 강제로 요구함. 유교 경전인 예기 단궁편(檀弓篇)에 나온 구절로, 춘추 시대 말, 공자의 고국 노나라 조정의 실세였던 대부 계손자의 가혹한 정치를 비판하는 말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태산 인근 동네를 넘어가다가 세 개의 무덤 앞에 슬피 울며 곡을 하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 셋 옆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 둘을 업은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고 자로로 하여금 그 이유를 물어보게 했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여인 :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참지 못 하고 이쪽(태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시아버님께서 몇 년 전 호환을 당하시더니 몇 달 전에는 남편이 호랑이에게 해를 맞았으며 며칠 전에는 열세 살 난 첫째 아들이 나무를 하러 나서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자로가 스승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공자가 이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라 얘기하니 바로,
자로 : 그러면 왜 이사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여인 : 이곳에는 가혹한 정치(가렴주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듣고 착잡해진 자로가 스승에게 돌아가서 이 슬픈 말을 전하자 스승이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자 : 잘 알았느냐? 이렇듯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가정맹어호)이니라.
유래가 유래인 만큼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와 함께 기득권층의 부정부패를 비판할 때에 사용하는 한자성어다.
• 가롱성진(假弄成眞) : 처음에 장난으로 한 일이 나중에 참인 것처럼 된다는 말로 거짓이 참인것 처럼 보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말이 씨 된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농담처럼 한 말이 현실이 될 수 있으니 말조심하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주(周)나라는 성왕(成王) 대(代)에 이르러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하는 주공 단(周公 旦)이 실권을 잡았다. 주공 단(周公 旦)은 주(周)나라의 정치가로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통칭으로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
주공(周公)은 형인 무왕(武王)을 보좌하였고 무왕(武王) 사후에는 그의 장자(長子)인 성왕(成王)을 보좌하면서 주(周)나라 건국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강태공과 소공 석과 함께 주(周)의 창업 공신의 한 사람이다.
어느 날, 주(周)나라의 2대 왕인 어린 성왕(成王)이 아우(叔虞)에게 오동잎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너를 왕에 봉하노라.”
보필하던 주공 단(周公 旦)이 경하(慶賀)하자 성왕(成王)은 장난으로 한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공(周公)은 이렇게 아뢰었다.
“천자(天子)가 말씀하시면 사관이 기록하고 , 이를 예로써 완성하고 음악으로 노래합니다.”
성왕(成王) 때 당(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섭정을 맡고 있던 주공(周公)이 군대를 보내 당(唐)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성왕(成王)은 아우 숙우(叔虞)를 당(唐)의 왕(王)으로 봉하여 다스리게 한다. 이후 당숙우(唐叔虞)의 아들 섭(燮)이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성왕(成王)의 아우는 진(晉)의 시조가 되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성왕(成王)과 당숙우(唐叔虞)는 이복형제라고 한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이야기에서 유래되는 고사성어가 가롱성진(假弄成眞)이다.
가롱성진(假弄成眞)이란 생각없이 농담으로 한말이 끝에 가서 사실로 바뀐다는 말이다. 처음에 장난으로 한 일이 나중에 참인 것처럼 된다는 뜻이다. 거짓이 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가부득감부득(加不得減不得) : 더 할 수도 덜 할 수도 없음
• 가부지친(葭莩之親) : 갈대의 줄기에 붙어 있는 갈대청같이 엷게 붙어 있는 친척을 이르는 말로 촌수가 먼 인천(姻戚)을 이르는 말
• 가빈즉사양처(家貧則思良妻) :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
• 가서만금(家書萬金) :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 또는 타국에서 받아본 가족의 편지는 만금의 값어치가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반갑고 소중하다는 뜻.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하니
나라는 깨어져도 산하는 남아있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이라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感時和賤淚(감시화천루)요,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이라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하니
봉화불이 석달 계속 피고 있으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이라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만큼 이나 귀하구나
白頭搔更短(백두소경단)하니
흰 머리는 긁어서 더욱 빠지고,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이라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시성(詩聖)인 두보(杜甫, 712년∼770년, 당(唐)나라 때의 사람으로 자(字)는 자미(子美) 호(號)는 소릉(少陵))의 시, 춘망(春望)
• 가언선행(嘉言善行) : 좋은 말과 착한 행실(海東小學)
• 가유호세(家諭戶說) : 집집마다 깨우쳐 알아듣게 말함
• 가인박명(佳人薄命) : 여자의 용모가 아름다우면 운명이 기박하다는 뜻(美人薄命)
‘가인박명(佳人薄命)’, 동양에서 ‘미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말은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식(蘇軾, 1036년∼1101년)이 지은 ❮박명가인시(薄命佳人詩)❯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다.
그 한 구절이란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기구한 운명 많으니(自古佳人多薄命)”라는 짧은 소절이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운명이 순탄치 않다는 이 구절은 아름다움이 여성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아름다운 여인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담고 있어 미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우려어린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이 사회적으로 위험시되고 부정적인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은 아름다운 여성이란 남성을 유혹으로 이끌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예컨대, “요사하고 음란한 미인이 정치하는 데 유해한 점은 역대로 지나간 일을 고증해 보면 그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산을 탕진한 자가 많습니다.”라는 발언처럼 미인이란 나라와 가정을 흔드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부용(婦容)’이라 하여 여성의 용모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후한 때 반소(班昭)는 『여계(女誡)』에서 여성의 실천 사항으로서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 네 가지를 주창하였는데, 부용이란 “세수를 깨끗이 하고 의복을 정결하게 하며 정기적으로 목욕을 하여 몸에 때를 없게 하는 것”이었다.
당나라의 여성 학자 송약소(宋若昭)도 『여논어(女論語)』에서 “여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바로 세우는 방법은 오직 깨끗하고 올곧게 처신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몸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요, 올곧다는 것은 몸을 영예롭게 하는 일이다.”고 하였다. 곧, 여성에게 청결을 강조하면서 올곧은 수신(修身)의 길로 나아가도록 권장하였던 것이다.
여성에게 청결을 강조한 이 조항은 이후 여성의 용모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각종 여훈서나 경전에서 계속 강조되었고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혜왕후 한씨(韓氏, 1437년∼1504년)는 “여성의 용모란 반드시 얼굴이 아름답고 고운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먼지와 때를 씻고 의복이나 치장을 청결히 하며 수시로 목욕하여 몸을 더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 곧, 여성의 용모란 외모가 아닌 청결에서 나온다는 의미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도 “부인이 단정하고 정결함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얼굴을 화장하여 남편을 기쁘게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화장하고 예쁘게 옷 입는 여성을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으로 평가하였다.
근대 초기 서양의 신체관은 상이한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였다. 하나는 약점과 욕망의 근원으로서의 인간 육체에 대한 불신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나체가 재발견되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그런 반면에 유학에서 몸이란 내면의 발현체로서 예와 선(善)을 실 천하는 주체이자 수신(修身)의 대상으로서 중시되었다. 여성의 몸이 마음의 투영체로서 중시되다보니 청결과 예의바른 몸가짐이 강조되었고, 여성의 몸짓, 자세, 동작 등을 통해 조신있는 동작을 훈련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 “여자는 외모를 자랑하지 말고 덕에 기준하여 행동해야 한다. 무염(無鹽)은 외모는 비록 초라하였지만 그 말이 제나라에 수용되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 말처럼 용모가 아닌 행동거지를 여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하였다.
여성의 용모에 대한 담론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규범서를 통해 교육되고 전달되었다. 조선 후기 한글로 쓰인 어느 규범서를 보면, “여성의 용모란 부인의 거동이니 타고난[天生] 추악한 얼굴을 변하여 곱거나 아름답게[艶美] 하지는 못하나 마땅히 얼굴 가지기를 조용히 하고 의복을 정제히 입고 말씀을 드물게 하고 앉으면 서기를 공순하게 하고 걸음을 찬찬히 걸으며 자리가 바르지 아니하면 앉지 아니하고 벤 것이 바르지 아니하거든 먹지 아니하며 의복을 차리지 말고 추위에 얼지 아니할 만큼 입고 음식을 너무 사치하기 말라.”고 되어 있다. 곧, 여성의 용모란 겉모습이 아니라 정갈한 옷차림과 예의바른 태도에 달려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더라, 천하에 어떤 경국지색도 덕성기품을 당하지는 못해.” 최명희씨의 소설 『혼불』(1990)에 나오는 이 한 토막의 대화처럼 조선의 여성은 덕성 있는 행실을 갖추었을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여성으로 추앙받았다. 여기에는 여성의 덕행이 안정망으로 작용해 미모로 남성을 파멸로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과 믿음이 깔려 있었다.
• 가장집물(家藏什物) : 집에 두는 여러 가지 물건이나 가구장롱이나 문갑 등.
•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479년)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씨(季孫氏)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 짐
• 각고면려(刻苦勉勵) : 심신의 고생을 이겨내면서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노력함.
• 각곡유목(刻鵠類鶩) : 따오기를 그리려다 비슷한 집오리를 그린다.( 남을 본
• 刻鵠類鶩(각곡유목) : 고니새를 새기다 따오기를 닮게 새김( 남을 본받아 배워서 다소 나마 보람이 있다.)
① 성현(聖賢)의 글을 배움에 그것을 완전(完全)히 다 익히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最小限) 선인(善人)은 될 수 있다는 말.
②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여 어느 정도(程度) 성과(成果)가 있다는 말.
鵠不成尙類鶩 畵虎不成反類狗(각곡불성상류목 화호불성반류구 : 고니를 새기다 안 되어도 따오기쯤은 새기었고, 범을 그리다 안 되어도 개쯤은 이루었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刻鵠不成猶有類 屠龍雖妙竟何施(각곡불성유유류 도룡수묘경하시 , 각곡유목은 비슷하기라도 하지만, 용 잡는 기술은 비록 기묘하다 해도 어디에 써 먹으리)
❮정포(鄭誧) 증이천각달존(贈李天覺達尊)❯
“후한서(後漢書)”의 ‘마원전(馬援傳)’에 刻鵠不成尚類鶩 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마원이 조카들에게 준 훈계 중에 나옵니다. 거기서는 고니를 만들려고 조각을 하다보면 오리 모양이라도 나오니까 훌륭한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면 설혹 그렇게 되지는 못해도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뜻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 각골난망(刻骨難忘) : 은혜를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뼈 속까지 사무쳐서 잊혀지지 않음
뼈에 새길(刻骨) 정도로 잊을 수 없다(難忘)는 말은 원한을 잊을 수 없다는 뜻도 되겠지만 은혜를 잊지 못한다고 강조할 때 더 많이 쓴다. 증오나 한을 잊지 못할 때는 骨髓(골수)에 사무치다, ‘뼛골에 사무치다’로 약간 달리 표현한다. 남에게 큰 은혜를 입고도 갚을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지 ‘머리 검은 짐승은 남의 공을 모른다’는 속담이 전한다. 또 ‘큰 은혜는 갚을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작은 원한은 반드시 갚으려 한다‘고 菜根譚(채근담)에도 타이른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고사를 인용하면서 곧잘 깨우치는 성어가 많다.
뼈에 새기면서까지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이 말이 가장 강조된 뜻이면서도 처음 유래된 곳은 명확하지 않으나 한국성어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여러 문인의 문집이나 實錄(실록)에 등장하고, 흔히 사극에서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신하들이 입에 달고 다닌 말이라 더욱 그렇다. 같은 뜻으로 중국에서는 刻骨銘心(각골명심)이나 鏤骨銘心(누골명심)이란 표현을 쓴다. 은혜를 갚는 고사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것이 結草報恩(결초보은)이고 꾀꼬리가 반지를 물어 은혜를 갚는다는 黃雀銜環(황작함환)이란 재미있는 성어도 있다.
중국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나라의 장수 魏顆(위과, 顆는 낟알 과)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秦(진)의 명장 杜回(두회)를 사로잡은 이면에는 풀을 묶어 쓰러지게 한 보은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과는 부친이 죽었을 때 유언을 무릅쓰고 젊은 새어머니를 개가시켜 새 삶을 살게 해준 덕으로 계모의 아버지가 두회를 초원에서 쓰러지게 했다는 것이다. 後漢(후한)의 楊震(양진), 楊秉(양병) 부자는 부정에 흔들리지 않는 四知三惑(사지삼혹)의 주인공이다. 이들이 청렴으로 길이 빛나는 것은 그의 선조 楊寶(양보)가 어릴 때 올빼미의 공격을 받은 꾀꼬리를 구해 치료한 뒤 날려 보낸 덕분이었다. 西王母(서왕모)가 보낸 반지를 선물 받고 후손은 삼공에 오르게 됐던 것이다.
이처럼 은혜를 베풀면 언젠가는 보답이 된다. 착한 일을 많이 행하면 경사가 따른다고 積善餘慶(적선여경)이란 말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구하면 앙분을 하고 짐승은 구하면 은혜를 한다’는 말이 더 와 닿는지 홀로 사는 가구가 많아지는 만큼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더 크게 증가한다고 한다. 동물을 사랑하더라도 주변의 더 어려운 이웃도 살피면 더욱 좋겠다.
• 각골통한(刻骨痛恨) : 뼈에 사무치게 마음 속 깊이 맺힌 원한
• 각양각색(各樣各色) :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제각기 다양한 모습들.
• 각자도생(各自圖生) : ‘각자가 스스로 제 살 길을 찾는다’는 뜻의 한자성어로, 원래 조선 시대 대기근이나 전쟁 등 어려운 상황일 때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유돼된 말이다.
• 角者無齒(각자무치) : 뿔이 있으면 이가 없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복을 갖추 지 못함을 이르는 말.
‘각자무치(角者無齒)’란 뿔이 있는 짐승은 날카로운 이가 없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모든 재주나 복을 다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의 재능과 강점을 살려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이는 요즘 시대에서 강조하고 있는 윈-윈 시너지와 일맥상통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위에 다른 사람이 재능이 더해져야 우리는 더 큰 역량과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할 수 있는 일들과 창조성이 더욱 증대된다고 할 수 있다.
각자무치의 지혜는 우리의 삶과 함께 가야 할 과제이다.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이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강점과 능력을 잘 관찰하여 이를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지지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과거로부터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보다는 자신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강점에 상대방을 맞추려는 일들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중략)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 생산적인 갈등은 우리를 더욱 튼실한 관계로 만들어주고 생산적인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이런 갈등의 속성을 잘 이용할 때 우리의 생활은 더욱 윤택하게 될 것이다.
• 각주구검(刻舟求劍) : 중국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 칼이 물에 빠지자 뱃전에 칼자국을 내어 표시해 두었다가 나중에 칼자국이 난 뱃전 부근에서 칼을 찾았다는 데서 유래. 융통성이 없고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유한 말.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영토의 팽창(膨脹)과 전국(全國)의 패권(覇權)을 차지하는 것에 지상 목표를 삼고 있던 중국 고대(古代)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의 시대적 요청과 역사적 흐름으로 인한 왕성한 사상(思想)의 발전을 가져온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가(思想家)들은 자신의 주장으로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강한 독설(毒舌)로 유세(遊說)를 하고 다녔습니다.
“배[舟]에 새겨[刻] 칼[劍]을 구하다[求]”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은 고사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고, 의미 역시 ‘시대의 변화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용통성 없는 사람’의 뜻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앞서 다룬 한비자(韓非子)의 ‘수주대토(守株待兎)’ 농부 이야기나 ‘견토지쟁(犬兎之爭)’, ‘교주고슬(膠柱鼓瑟)’의 고사를 상기하면 유사한 의미에서 주장한 내용이기에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楚)나라의 어떤 칼잡이가 장강(長江: 陽子江)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에 올라 뱃전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강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배가 출렁거리는 차에 검객(劍客)이 차고 있던 칼이 그만 강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놀란 검객은 급히 작은 단도(短刀)로 떨어뜨린 뱃전에 표시하면서, “이곳이 칼을 떨어뜨린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도착하자 검객은 이제 칼을 찾아야겠다고 표시해 놓은 뱃전에서 물에 들어가 칼을 찾으려 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만으로 보자면 우스운 한 편의 소품(小品)에 불과하지만, 刻舟求劍이 의도한 주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면 고사의 올바른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해답의 출발로 먼저 고사의 출전(出典)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살펴보겠습니다.
《여씨춘추》라는 책의 출간에는 여러 가지 야화(野話)가 전해집니다. 진(秦)나라의 재상(宰相)까지 오른 여불위(呂不韋: ? - B.C 235)라는 인물이 편찬한 책으로 전해지는데, 법가(法家) 사상을 중심으로 도가(道家), 유가(儒家), 농가(農家) 등 제자(諸子)의 학설(學說)과 설화(說話) 등을 모아 엮은 일종의 백과전서(百科全書)의 사상서(思想書)로 볼 수 있고, 그 사상 역시 제자백가 사상 중 잡가(雜家)로 분류합니다.
여불위(呂不韋)는 본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거상(巨商)으로 많은 부(富)을 소유한 인물이었는데, 당시 조(趙)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 후에 장양왕이 됨, 진시황의 부친)를 도와 권력에 접근하였고,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자 재상까지 올라 권력을 잡고 나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바로 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당대의 학자(學者)나 논변가(論辯家)들 3천 여명을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여씨춘추》를 저술하게 하고 완성된 책을 진나라의 도읍지 함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 두고 천냥을 걸고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냥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호언장담(豪言壯談)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유래된 고사가 또한 '일자천금(一字千金)'인데, 일자천금(一字千金)의 의미는 현재에도 '최고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출간된 《여씨춘추》의 확고한 주장에 그 힘을 더해준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고사가 바로 각주구검(刻舟求劍)입니다. 《여씨춘추》의 각주구검 이야기 뒷 부분에 이런 말을 이어집니다.
“지나간 옛 법만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칼잡이와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이미 지나가 변했지만 그 법은 그대로가 아닌가?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已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바로 확고하고 자신있게 역설(力說)한 《여씨춘추》의 강한 주장은 그 사상의 고하(高下) 여부를 떠나서 자신만만한 여불위(呂不韋)의 독설(毒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권력의 정상에까지 오른 여불위는 진시황(秦始皇)과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진위(眞僞)가 의심스러운 야화(野話)가 전해집니다.
조(趙)나라의 볼모였던 진(秦)나라의 왕자 자초(子楚)를 도왔던 여불위는 그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특히 상인으로 전국(全國)을 돌며 찾아낸 절세(絶世) 미인(美人)을 자초에게 진상(進上)하는데, 자초와의 슬하(膝下)에서 아들 정(政)을 낳게 되었고 그 아들이 후에 진시황(秦始皇)이 됩니다. 그런데, 일설(一說)에 여불위가 미녀를 진상하기 전에 임신(姙娠)을 시켰고 그 자식이 바로 정(政)이라는 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일로 진시황(秦始皇)이 왕이 되고 나서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모(生母)와 놀아나다가 결국 그로 인해 자결을 하고 마는 것을 볼 때,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生父)라는 설이 설득력(說得力)을 얻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여불위라는 인물은 우리가 사람의 인생(人生)에 대해서 논할 때, 전형적인 인생유전(人生流轉)을 겪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인(商人)으로서 그가 이룬 경제적 부(富)와 그로 인한 권력의 접근과 권력 정상의 군림(君臨), 하지만 결국 '권불십년(權不十年)'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권력의 끝은 파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여불위의 종말(終末)을 보면서 그가 주장한 세태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면서 임기응변(臨機應變)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결말이 또한 어떠했는가를 돌아본다면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를 다른 관점(觀點)에서 바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멸시(蔑視)와 조롱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오히려 눈치 빠르게 상황에 대처하면서 임기응변을 적절하게 구사(驅使)하는 사람이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칭송 받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남 보다 앞서면서 민첩하게 행동하는 것만이 최고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눌(語訥)한 듯 하면서 양보(讓步)와 배려(配慮)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사회가 밝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 간웅(姦雄) : 간사한 지혜가 있는 사람
• 간난신고(艱難辛苦) : (갖은 고초를 겪어) 몹시 힘들고 괴로움
천신만고(千辛萬苦), 천고만난(千古萬難), 간난고초(艱難苦楚) 등이 비슷한 사자성어. 천신만고는 일천 천자에 매울 신을 쓰면서 일만 만자와 괴로울 고자를 써서 직역을 하게 되면 천 가지의 매운 일과 만 가지의 괴로움이 있다는 말로서 상황이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흔히 천신만고 끝에 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은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노력을 경주하여 괴로움에 벗어날 때 이런 말을 쓰게 된다. 천고만난은 일천 천에 괴로울 고자를 쓰고 일만 만에 어려울 난자를 사용한다. 천고만난도 직역을 하면 일천가지 괴로움에 일만가지 어려운 일에 처해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온갖 괴로움과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말로 이해를 하시면 될 거 같다. 간난고초는 어려울 간에 어려울 난 그리고 매울 신과 쓸 고자를 쓴다. 직역을 하게 되면 어렵고 어려운 상황에서 모진 애를 쓴다고 이해를 하시면 될 거 같다. 천신만고와 천고만난 그리고 간난고초까지 위에서 소개해드린 간난신고와 다를 바 없는 비슷한 단어라 하겠다.
• 간뇌도지(肝腦塗地) : 간과 뇌장을 쏟아낸다는 뜻. 간과 뇌가 흙과 범벅이 되다란 뜻으로 전란(戰亂) 중의 참혹한 죽음을 형용한 말. 사기 유경열전(劉敬列傳)에서 유래한 고사로 한나라 고조(高祖)와 유경(劉敬)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고사임.
유경(劉敬) : 폐하께서는 촉땅과 한을 석권하고, 항우와 싸워 요충지를 차지하도록까지 대전(大戰) 70회, 소전(小戰) 40회를 치렀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간과 골이 땅바닥을 피칠하게 되었고, 아버지와 자식이 들판에서 해골을 드러내게 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使天下之民, 肝腦塗地, 父子暴骨中野, 不可勝數)라고 하였다. 간과 뇌가 흙범벅이 되 죽는다는 뜻. 조자룡이 아두를 구해오자 유비는 아기 때문에 명장을 죽일 뻔 했다며 탄식하는데, 이에 조자룡이 감동하며 외친 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조조(曹操)가 형주 정벌에 나섰을 때, 형주의 군주였던 유표는 죽고 그의 아들인 유종이 뒤를 이었으나 유종은 변변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유비(劉備)는 북쪽의 번성을 수비하고 있었다. 조조는 형주를 함낙한 여세를 몰고 번성까지 정벌하기 위하여 쳐들어왔을 때, 유종의 항복을 전해 듣고 남쪽으로 도주하는 유비의 뒤를 쫒을 때, 그 유명한 장판교 위에서 조조의 앞길을 막는 장비(張飛)의 용맹으로 유비 일행은 죽음의 일보직전에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을 가슴에 품고 조조의 적진 속을 헤치고나온 뒤를 조조의 장수 문빙(文憑)인 조자룡의 뒤를 쫒아서 장판교까지 왔을 때 장비의 서슬퍼런 기세에 꽁무늬를 뺀 장비의 무용담이 유명하다. 사지에서 아두를 구해온 조운에게 유비가 도리어 아두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명장을 잃을 뻔 했구나!”고 탄식하자 조운이 감복하여 “간과 뇌장을 쏟아내도 주공의 은공을 갚을 수 없겠습니다.”고 말하였다.
• 간담상조(肝膽相照) : 간과 쓸개가 가까이 서로 잘 보여 주듯이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라는 뜻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당나라의 문인 유종원(柳宗元)이 유주자사(柳州刺史)로 발령 났을 때, 그의 절친한 친구인 유우석(劉禹錫)도 좌천되어 파주자사(播州刺史)로 발령이 났다. 파주(귀주성 준의현(遵義縣))는 멀리 떨어진 편벽한 고장이었으므로, 80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 유우석은 어머니를 홀로 두고 갈 수도, 모시고 갈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안 유종원은 눈물을 흘리며 “그가 힘들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구나. 조정에 상소를 올려 유주자사와 파주자사를 서로 바꾸자고 간청해야겠다. 이 일로 내가 다시 죄를 입어 죽는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마침 배도(裵度)가 유우석의 이런 사정을 황제에게 아뢰어 유우석은 연주(連州, 광동성 연현(連縣))자사로 가게 되었다.
그 이후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는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유종원의 참다운 우정과 의리를 우회적으로 기리었다.
“아! 선비는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비로소 절의(節義)가 드러나는 법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평시에 함께 지내면서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며, 술자리나 잔치 자리에 서로 불러 가며 억지웃음을 짓고 서로 겸손을 떨며, 손을 잡고 간과 쓸개를 서로 보여 주며, 하늘의 해를 가리키고 눈물을 흘려 가며 죽으나 사나 서로 배반하지 말자고, 마치 진실인 양 맹세를 한다. 하지만 한 터럭만큼의 이해관계만 얽혀도 서로 모르는 체 반목을 하고, 함정에 떨어지면 손을 뻗어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구덩이 속에 더 밀어 넣고 돌까지 던지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널려 있다.”
송나라 호태초(胡太初)가 위의 유래를 기록한 후 평론에서 “오늘 도착한 날부터 반드시 동료들을 인견하여 업무상의 소홀한 부분이나 공익에 손해를 끼치는 일을 두루 서술하고 성심으로 소박하게 대하며 간담상조해야한다.”에서 유래하였다.
• 간두지세(竿頭之勢) : 막대기 끝에 선 형세라는 뜻으로 위태로운 상황을 이르는 말.
• 간성난색(姦聲亂色) : 간사한 소리는 귀를 어지럽게 하고 좋지 못한 색(色)은 눈을 어지럽게 한다. 악기(樂記)에 “그러므로 군자는 정욕을 바로잡아 뜻을 여기에 맞추고, 다른 비슷한 일들도 여기에 준해서 행동을 완성시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간교한 소리나 어지러운 색채가 보고 듣는 사이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음란한 음악이나 잘못된 의례가 사람의 마음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고 오만하고 삿되고 편벽된 기운이 몸에 배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목구비와 마음과 몸 모두가 바른 길을 따라서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是故 君子反情以和其志 比類以成其行 姦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 惰慢邪辟之氣不設於身體 使耳目鼻口心知百體 皆由順正以行其義)”라는 말이 나온다.
• 간성지장(干城之將) : 국가를 튼튼히 지킬 수 있는 인물을 가리킨다. 간성지재(干城之材), 국가간성(國家干城), 공후간성(公侯干城).
• 간세지재(間世之材) : 방패와 성 구실을 하는 인재. 국방의 책임을 다할 장수. 나라를 구하여 지키는 믿음직한 군인을 이른다. 구국간성(救國干城).
• 간세자(間世者) : 천지간에 뻗쳐 있는 깨끗한 기운을 타고난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을 말한다. 예전에 중국에서는 500년 만에 한 사람씩 이런 기운을 타고난 성인(聖人)이 나온다고 여겼다.
• 간어제초(間於齊楚) : ‘약자가 강자들의 틈에 끼이어 괴로움
을 받음’을 이르는 말. 중국 주나라 말엽 강국이던 제(齊)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약소한 등(藤)나라가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등(藤)나라는 두 나라의 사이가 악화되거나 야심을 가진 두 나라의 새로운 군주가 즉위할 때마다 크나큰 환란과 고통에 시달여야 했으며 평화기에도 두 나라의 눈치만 보며 노심초사(勞心焦思) 했다고 한다.
• 간운(看雲) : 자식이 타향(他鄕)에서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가, 흰 구름이 외로이 나는 것을 보고는 좌우(左右)에게 “우리 부모가 저 구름 밑에 계시다.”라 하며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 간운백일면(看雲白日眠) : 형제를 그리워하는 정이 간절함을 이른다. 두보의 시 ‘이별을 한탄하다[恨別한별]’에 “집 생각에 달 아래 거닐다 맑은 밤에 서 있고, 아우 생각에 구름을 보다 대낮에 잠이 드네.[思家步月淸宵立 憶弟看雲白日眠]”라고 하였다.
• 간운보월(看雲步月) : 객지에서 고향(故鄕)생각이 간절하여 낮에는 구름을 바라보고 밤에는 달을 바라보며 거니는 것을 말한다.
• 간운사(看雲思) : 자식이 타향(他鄕)에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당(唐) 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 있으면서 고향 쪽 구름을 바라보고 그 아래 계시는 부모를 생각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간운장비안[看雲長費眼] : 자식이 타향에서 어버이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을 넘어가던 중에 흰 구름이 외로이 떠 가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 구름 아래에 어버이가 계신다.[吾親所居 在此雲下]”라고 하고는 한참 동안 머물러 있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에 다시 길을 떠났다는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89 狄仁傑列傳❯
• 간운척호(看雲陟岵) : 간운(看雲)은 고향을 떠난 사람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있을 때 그 부모가 하양(河陽)에 있었는데, 하늘에 흰 구름이 외로이 떠 있자 좌우의 사람들에게 “나의 부모가 저 아래 계신다.” 하고는 서글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자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척호(陟岵)는 시경(詩經) 척호(陟岵)에 “저 초목이 우거진 산에 올라 어머니를 바라보노라. 어머니는 말하리라. 아! 내 자식 부역을 가서 밤낮으로 잠자지 못하리라. 행여 삼가 그래도 돌아오고 그곳에서 버려지지 말라.[陟彼屺兮 瞻望母兮 母曰嗟予季行役 夙夜無寐 上愼旃哉 猶來無棄]”고 한 구절이 있다. ‘척호(陟岵)’ 시는 효자가 행역(行役)을 나가 그 부모를 잊지 못하는 까닭으로 산에 올라가 그 부모가 계신 곳을 바라보면서 부모가 자기를 염려할 것을 상상한 시이다.
• 간장막야(干將莫耶) : 명검도 사람의 손이 가야 빛나듯, 사람도 교육을 통해 선도해야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吳)나라 왕 합려(闔閭)가 대장장이 간장에게 명검을 두 자루 만들어서 바치라고 명령했다. 간장이 칼을 만들기 위해 청동을 녹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청동은 삼년이 지나도 녹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아내인 막야가 남편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용광로에 넣은 뒤 300명의 소녀가 풀무로 바람을 넣으니까 그제야 청동이 녹았다. 드디어 간장이 명검 두 자루를 만들어, 양의 기운이 있는 검을 간장, 음의 기운이 있는 검을 막야라는 명칭을 붙였다. 순자는 천하의 명검들을 열거했다. 제환공의 총(蔥), 주문왕의 녹(錄), 초장왕의 홀(忽), 오왕 합려의 간장과 막야, 그리고 거궐과 벽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리 명검이라 해도 숫돌에 갈지 않으면 무딘 칼일뿐, 아무것도 베지 못한다.”고 말했다. - 오월춘추 합려내전(吳越春秋 闔閭內傳)
• 갈이천정(渴而穿井) : 목이 말라서야 우물을 판다.(일을 미리 준비하여 두지 않음을 말한다.
갈이천정(渴而穿井)에서 渴은 목마를 갈, 而는 말 이을 이, 穿은 뚫을 천, 井은 우물 정으로 ‘목이 말라야 비로소 우물을 판다’는 뜻이며 ‘안자춘추(晏子春秋)’의 ‘내편 잡상(內篇 雜上)’에 나오는 말이다. 미리 준비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닥친 뒤 서두르며 허둥대거나, 평소 준비성이 없어 늘 헤매는 사람, 상황이 다급해진 뒤 뒤늦게 대처하며 때가 늦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제(齊)나라로 도망쳐 몸을 의탁한 일이 있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물러나 초라한 신세에 놓인 연유를 소공에게 묻자 소공(昭公)은 지난날을 후회하며 이렇게 답했다.
“자신을 보좌할 충신은 등용하지 않고 주변에 간신과 소인배만 두었기 때문이다.” 소공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권좌에 있을 때는 누가 충신인지 몰랐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니 비로소 알게 됐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제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있겠다.”
경공은 이 말을 듣고 소공이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심복인 안자(晏子)를 불러 소공이 노나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면 현명한 군주가 되지 않겠냐며 안자의 생각을 물었다. 그러자 안자는 이렇게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어리석은 자는 후회가 많고, 물에 빠진 자는 수로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며, 길을 잃은 자는 길을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쟁에 닿아서야 병기(兵器)를 만들고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니 아무리 서두른다 한들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안자는 “전쟁이 나고서야 무기를 만들고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파는 사람은 미래를 보는 혜안(慧眼)이 없는 것”이라며 소공이 노나라로 돌아간다고 해도 현군(賢君)은 되지 못할 것이라 단언했다. 일이 닥친 뒤 늦은 후회를 하는 것보다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백번 낫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갈이천정(渴而穿井)이다. 본뜻은 목이 마르기 전에 우물을 파야 목마를 때 바로 마실 수 있는 것인데 때가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든 일을 미리 예비하고 준비해 두지 않으면 정작 급하게 필요한 때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 일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알아보고 부족한 것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배우고 미리 준비하여 ‘이만하면 되었다’고 확신이 설 때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굿이 끝난 뒤에 장구를 치는 것은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과 같고, 말을 잃어버리고 마구간을 고쳐도 소용없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미리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정말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을 나눠볼 때 미리 준비를 한 사람과 미리 준비를 못한 사람의 차이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라. 목이 마르기 전에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다. 미리 준비하는 사람은 허둥지둥하지 않는다. 갈이천정(渴而穿井)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하여 힘을 키우거나 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함을 명심(銘心)해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
• 감개무량(感慨無量) : 긍정적인 느낌이 넘칠 때 쓰는 표현인줄 알았는데 뜻을 보니 ‘마음속에서 느끼는 감동이나 느낌이 끝이없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회포의 느낌이 한이 없을 정도로 깊이 느끼는 일 = 감개읍하(感慨泣下), 한탄하며 눈물을 흘림
• 감노불감언(敢怒不敢言) : 감히 성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화가 나지만 말을 못하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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