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이야기

중국 유학사 속 순자 철학의 변증법적 역할과 특징 /배다빈.영남대

 [한글 요약]

본고는 중국 유학사에서 순자의 철학이 이단의 오명을 쓰기 이전부터 그것을 탈피할 때 까지, 각 시기의 그 사상적 영향력과 지위를 살펴봄으로써 순자 철학의 영향력이 반영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특징’을 확인해볼 것이다. 당대 ‘맹자승격운동’부터 송명 이학(理學)의 성 립, 청대 유가의 순자 재조명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사상적 전환과 이로부터 성립된 주 류 사조는 일견 ‘비순(非荀)’ 혹은 ‘존순(尊荀)’의 양면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변증법’의 시각에서 그 흐름을 살펴보면, 순자의 철학은 끊임없이 유가 학술 사조와의 일 종의 변증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곧 순자의 철학이 유학사상 줄곧 주류 철학의 전개와 발전에 있어 일종의 ‘안티테제(antithesis)’의 역할을 취하였음을 표명한다.

 

분야: 중국철학, 선진유학, 순자철학        주제어 : 변증법, 안티테제, 순자, 인성론, 유학

 

Ⅰ. 들어가는 말

중국 유학사를 조망해보면, 순자의 철학은 그의 생전 학술적 영향력과 업적에 비하여 끊임없는 비판과 배척을 겪었다. 이러한 굴곡은 특정한 두 시기에서 발생 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중당(中唐)기 한유(韓愈)로부터 비롯된 존맹(尊孟) 사조 와, 이윽고 발생한 소위 ‘맹자승격운동’의 대립자, 즉 비맹(非孟) 관점이 대두된 시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그 학술 지위가 격감하게 된 것이 첫 번째이다. 이 시기 는 곧 송대 신유학 이후 ‘존맹비순(尊孟非荀)’ 관념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학(理學)의 성립과 더불어 순자의 지위는 맹자 아래로 격감하였는데, 주지하다시 피 그 주요 요인은 맹자와 순자 간에 인성(人性)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부터 기인 한다, 송-명대에는 주자학과 양명학이 유가 철학의 주류 지위를 장악하였고, 명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순자는 공묘(孔廟)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이러한 국면 이 또다시 전환되는 것은 명-청 교체기이다. 당시 명나라 유민으로 구성된 유학자 들이 실학 사조 및 경학 중심주의를 주도함과 더불어, 순자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가치조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당-송 및 명-청이라는 두 시기는 모 두 왕조가 교체됨에 따라 불안해진 유학의 정체성과 지위를 재확립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철학 체계가 요청되었던 시기였으며, 이 과 정에서 순자는 극단적으로 배척되거나, 아니면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본 논문의 목적은 유학사상 순자가 단순히 중시되 거나 배척당했다는 사실 배후에는 그 철학이 끊임없이 다른 유학 사조와 대립, 영향, 지지 관계를 취하였음을 논증하는 데에 있으며, 그 논리적 정당성을 ‘변증 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 획득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순자 철학 내부 의 변증법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종래 중국철학의 변증법적 특징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중국 현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특정한 철학 이론구조 내부에서 핵심 개념들의 상호 변증적 작용 관계를 탐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유학사상 사상적 과도기 혹은 당시 유학 사조의 전환 가운데, 순자 철학이 어떻게 이해되고, 운용되었는지를 고찰해봄으로써, 그것이 일종의 ‘안티테제 (antithesis)’ 혹은 ‘반사조’로서, 그 성립 및 발전에 끊임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였음 을 파악해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당(漢唐) 이래로 점차 배척되어 ‘이단화(異 端化)’된 정형적 시각에서 벗어나, 순자의 철학이 그 역사적 퇴보와 부재, 부흥 과정에서도 줄곧 유학사의 주류 사조와 상호작용을 실현하고 있었음을 확인해보고 자 한다.1)

 

       1) 물론 이러한 연구 논제는 본질상 매우 넓고 풍부한 역사적 식견을 요청한다. 특히 유학사 상 순자 철학을 논한 수많은 학자의 관점을 모두 포섭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 라, 목적 없는 ‘사상사의 서술’에 그칠 우려가 다분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비록 시론(試論)적 성격을 가지지만, 통시적 관점에서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각 시 기 ‘주류 사조의 흐름’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그 토론 범위를 특정하려 한다

 

Ⅱ. ‘변증법’개념의 의미 범주에 대한 정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현대 철학에 매우 친숙한데, 이는 원래 서양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 발전되었다. 최초에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에 의 해서 정립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운동과 변화, 대립자들의 조화를 통 해서 세계를 설명했다는 점에서 변증법의 기초적인 원리를 제시하였고, 플라톤은 대화 혹은 토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진리(이데아) 인식의 방법으로 변증법을 정의한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에 의해서 변증법은 비교적 경시되거나 그 유용성 을 부정당하였지만, 이는 근대에 이르러 여러 학자에 의해 새로운 발전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관점을 제시한 철학자는 프리드리히 헤겔이 라 할 수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칸트에 이르기 까지의 논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논리학을 성립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그에게 있어 개인의 사유 구조 내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전개와 발전은 이러한 변 증법적 형태, 즉 ‘자기동일성’의 구축과 그 내부에 잠재된 ‘모순성’과의 대립을 통 해 전개, 발전하는 양상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양철학에 기원을 두는 본 개념을 엄밀하게 운용하기 위해, 사전에 확인해야 할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 번째,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인식과 건립은 인간의 논리적 인식이라는 관념론의 범주에서 기획되었다.2)

둘째, 소위 “변증법”이 의미 하는 정-반-합(thesis-antithesis-synthesis)이라는 도식에 대해, 헤겔은 명확하게 그 것의 범위를 제시하지도, 정의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도식은 오히려 헤겔 사후 샬리베우스(H.Chalybaus)라는 인물에 의해 최초로 제시, 통용되기 시작했다.3)

 

      . 2) 사실 헤겔은 변증법을 사유의 논리적 방법으로서뿐만 아니라, 현실 존재의 운동법칙으로 도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정신 자체(주관정신), 그리고 정신이 창조해낸 ‘제2의 자 연’인 사회와 역사(객관정신)는 절대 이념의 현실 양태인 절대정신의 내재적 질서에 따른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헤겔이 엥겔스처럼 물리적 자연의 영역에서 작동한 다고 여겨지는 ‘자연변증법’까지도 주장하는가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으므로, 본문 에서는 이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다. 김준수, 「헤겔 철학에서 모순과 변증법」, 『코기토』 제 71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314쪽 참고.

      3) H.M.Chalybaus, 『Historische Entwicklung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von Kant und Hegel』 1837年, 김준수, 「헤겔 철학에서 모순과 변증법」, 『코기토』 제71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재인용 

 

이러한 까닭에 중국 유학사의 흐름 속에서의 변증법을 적용하고자 할 때, 그 역사적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 헤겔의 변증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되면 많은 개념 적, 논리적 문제에 대면할 위기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헤겔의 변증법 적 사고 위에서 최종적으로 표현된 그의 역사철학은 절대정신(absoluter Geist)과 자유로운 이성에 근거한 발전적 역사관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역사관은 절대정 신의 무한한 자유에 대한 추구와 자기동일성의 주체적 개선에 의한 발전적 형태 를 띠고 있으며, 이것은 역사 발전에 대한 일종의 낙관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 에서 후대의 아도르노에게 논리적으로 비판받는다. 이처럼, 헤겔의 변증법은 기 본적으로는 현상세계의 흐름을 설명하는 논리 기초로서 기획되어 있지만, 그것의 헤겔 철학 내부에서의 역할은 특수하며, 결국 학자 개인의 주관적 경험 및 지식 을 수반한 고유한 주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개념의 운용 범위를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한정해야만 비로소 그것을 다른 문화, 역사의 양상 가운데 구조 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유학사의 어떤 측면은 변증적이며 이는 발전적이다/아니다”와 같은 경솔한 가치판단의 초래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 연구는 헤겔 변증법 체계의 핵심으로 작용하는 절대정신 혹은 발전적 역사관을 배제하고, 변증법의 언어적 정의 자체가 함의하는 정-반-합 의 기초 구조에 대한 인식만을 활용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역사 속에서 주류 적 지위를 점하였던 어떠한 기존 철학(태제)과 그에 대한 반사조(안티태제)의 갈 등과 종합을 통해, 주류 철학이 자기동일성을 보존(Aufheben)4)하면서도 안티테 제의 사상을 받아들여 합의 형태(진테제)를 갖추는 구조를 가리킨다.

 

      4) 헤겔의 변증법 철학에 있어 ‘아우프헤벤(Aufheben)’은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동시에 세 가지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즉 ‘지양’, ‘보존’, ‘고양’으로 형용할 수 있다. 예컨대 ‘정’은 ‘합’의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자신을 ‘지양’하는 과정이 요청된 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성립된 ‘합’은 반드시 본래 ‘정’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한 양태여야만 한다. 동시에 ‘합’의 의미는 더 이상 본래의 ‘정’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일정한 ‘고양’된 바가 수반되어 있어야만 한다.

 

물론 전통 유학사의 흐름에 대하여 변증법을 주요 프레임으로 삼으면서, 순자 철학 일체를 완전히 부차적인 역할로 규정하는 것은, 순자와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논의들을 선택적으로 도출함으로써 일종의 확증편향 혹은 견강부회의 의심을 살 공산이 크다.

그러나 유학사상, 순자 사상이 몇몇 중요한 사상적 과도기 속에서 주류 철학 의 지위를 점유하지 못했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며, 이 글의 관심사는 바로 그 주류 철학의 성립을 주도했던 유학자들의 순자에 대한 긍정, 비판, 배척, 재조명, 흡수 작업 가운데 순자 사상이 이론적 개선과 보강, 성립에 필수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이다. 또한, 본고에서 소개할 인물들의 생전 사상적 역할 및 영향력은 이미 공인되었으며, 여기에 어떤 사실(史實)에 대한 악의적 취사가 개입할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당 이후 유학사 속에서 순자의 철학적 지위가 어떠했으며, 그로부터 성립된 ‘합’의 철학- 즉 이학 체계의 변증법적 성격을 검토해봄으로써, 기존의 맹자학을 주로 삼고 순자학을 이단으로 삼는 시비 관계의 관점에서 벗어 나 대립자들의 철학적 공헌 및 결합 관계를 좀 더 객관적으로 토론해볼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재평가와 순자 철학에 대하여 일대 ‘순자학풍’을 조성한 청대 유가 의 관점을 통해, 순자 철학이 재차 청대 유학 학술 사조의 구조와 의의에 필수적 인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확인한다.

 

Ⅲ. 존맹비맹(尊孟非孟) 사조와 순자

중국 당송(唐宋) 교체기는 정권의 교체와 더불어 사상적 변혁이 발생했던 시기 이다. 이러한 사상 변혁의 도전을 받은 것은 관학을 주도하고 실질적으로 정치를 행하던 유학자들이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오늘날 잘 알려진 송대 신유학이 완전히

성립되기까지 일단의 사상적 과도기를 겪었는데, 이 변화에는 사상적 변화와 학술적 변화라는 두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우선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면, 중당(中唐) 시기 이미 유가 철학 구조의 변화를 일으킨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유(韓愈)이다. 한유는 유가의 ‘도통(道統)’을 입설하면서 맹자야말로 비로소 공자의 도를 계승했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것이 내가 말한 도(道)이니, 일찍이 말하던 노장(老莊), 불교의 도가 아니다. 요 임금은 이로써 순에게 전하였고, 순 임금은 이로써 우 임금에게 전하였으며, 우 임금 은 탕에게, 탕은 문, 무, 주공에게, 문, 무, 주공은 공자에게, 그리고 공자는 이를 맹자 에게 전했다. 맹자가 죽고 나서, 도(道)가 전해지지 못했다.5)

 

한유의 맹자에 대한 추종은 이후 송, 명대 이학자들의 도통(道統) 관념으로 전 승된다. 이에 반해, 한유는 양웅과 순자에 대해서는 “크게는 순수하나 작은 흠결 이 있다.”라고 말하며 비교적 부정적 견해를 남겼다.6)

 

       5) “斯吾所謂道也, 非向所謂老與佛之道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 傳之文、武, 周公, 文, 武, 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 不得其傳矣.” 中國古典文 學基本藏書 『韓愈文集匯校箋注』, 中華書局, 2010年, 4쪽.

       6) “大醇而小疵.” 中國古典文學基本藏書 『韓愈文集匯校箋注』, 中華書局, 2010年, 111쪽. 

 

사실 한대부터 당초에 이르기까지, 유가 내부에서 맹자와 순자의 지위는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순자가 더욱 경학의 시조로서 추종받았다. 하지만 한유를 기점으로, 유가 내부에서는 선진시대의 선유(先儒)에 대한 가치판단에 일련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리고 학술적 변화에 대해서 말하면, 당말-북송 초기의 유학은 여전히 한당 장구(章句), 주소(註疏)의 학문 방식을 답습하고 있었다. 안복평의 이해에 따르면, 이는 동시대 불교, 도가의 마음 수양과 세계 이해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주로 삼는 의리학(義理學)에 비하여 어떤 사상적 깊이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송대 초기만 하더라도 학술적 주류는 불교, 도가였지 유학이 아니었다. 유가의 생존 공간은 점점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그 학술적 지위의 정통성이 존망 위 기에 처해 있었다.7)

 

    7) 顔複萍, 「北宋疑孟思想的探究」, 『名作欣賞』, 2012年, 第五期, 98쪽. 

 

여기에는 유학 자체는 비록 국가의 정치 구조와 법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지만, 불학, 도학에 비하면 그 내용 차원에서 주어진 도덕 규범과 질서 체계에 대해 충분한 내재적 정당성을 제공하지 못하였다는 문제의식이 엿보 인다. 즉 인간 행위와 사회 질서에 대한 법칙, 혹은 형이상학적 근거의 결여가 당시 유학과 불-도학의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하여 송대 신유학의 성립을 기점으로 유학 사상 체계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의 논리적 지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두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한유로부터 당송 교체기, 송 초에 이르기까지 소위 ‘맹자승격운동’에 이어 발생한 신유학의 건립 사이에는 일종의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즉 한유가 제시한 맹자의 도통 편입으로 말미암아, 당시 유 가 내부에서는 첨예한 대립 구도가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존맹비맹(尊孟非 孟, 혹은 尊孟疑孟) 사조이다. 이 분열된 입장은 당시 학자들의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논쟁’은 아니나, 분명 유학자 내부에서 뚜렷하게 논란이 있었 다는 점에서 주요한 학술 논제이자 논변 사조로 꼽힌다. 맹자를 추존하느냐, 혹은 비판하느냐는 입장의 차이를 두고, 당말송초의 유가 들은 맹자, 순자, 양웅 세 사람을 주요 토론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입장 또한 다 양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견해의 차이는 바로 맹자, 순자, 양웅 가운데 “누구의 심성론이 유가의 정통성에 적합한가?”라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여기 에서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학자들의 관점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존맹 관념은 한유로부터 발단하였으며, 왕안석, 이정 등의 송대 유가에 의해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한유가 맹자를 적극적으로 추종하면서 양웅과 순자는 흠결이 있다고 보았지만, 반면에 왕안석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맹자가 성에 대해 말하기를, 인간의 성은 선하다 하였다. 양웅이 성에 대해 말하 기를, 인간의 성은 선악이 혼재한다고 하였다. ……맹자, 양웅의 도는 서로 다르지 않 았으니, 두 선생의 설에 다름이 없다. 그 다른 바는, 그 지적한 바가 다른 것일 따름 이다. 이는 공자가 말한 것의 일단(一端)일 따름이며, 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8)

 

이처럼, 왕안석은 비록 맹자와 양웅의 심성론은 그 본질상 동일한 뜻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이에 대동소이하다고 여겼다. 이와 달리 의맹의 입장에서 맹자의 지위 승격에 회의를 표명한 학자들로는 사마광(司馬光), 이구(李購)가 있다. 우선 사마광은 맹자보다는 양웅의 심성론에 찬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맹자는 인성이 선하며, 그 불선함은 외물의 간섭에 의한 것이라 여겼다. 순자는 인성은 악하며, 그 선함은 성인이 교화한 것이라 여겼다. 이는 모두 그 한 부분만을 얻어 대체(大體)를 잃은 것이다. 무릇 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수하여 생겨난 것이다. 선과 악은 반드시 겸하여서 있는 것이니, 이런 고로 비록 성인이라도 악함이 없을 수 없으며, 어리석은 이라도 선함이 없을 수 없으니, 그 품수된 많고 적은 바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9)

 

       8) “孟子之言性, 人之性善. 揚子之言性, 人之性善惡混. ……孟揚之道未嘗不同, 二子之說非有異 也. 其所以異者, 其所指者異耳. 此孔子所謂言豈一端而已, 各有所當者也.” 王安石, 『王文公 文集』, 上海人民出版社, 1974年, 313-314쪽.

       9) “孟子以爲人性善, 其不善者, 外物誘之也. 荀子以爲人性惡, 其善者, 聖人教之也. 是皆得其一 偏而遺其大體也. 夫性者, 人之所受於天以生者也, 善與惡必兼而有之, 是故雖聖人不能無惡, 雖愚人不能無善, 其所受多少之間則殊矣. 司馬光 『司馬文正公傳家集』, 商務印書館, 1937年, 821쪽. 

 

이처럼 사마광은 맹자와 순자의 심성론이 각기 편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 하며, 양웅과 유사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유가의 주류 관점으로 받아들 여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 다. 중요한 점은, 한유, 사마광 등의 인성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들은 모두 당시 ‘심성론’이라는 논제가 선유들의 사상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었음 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당시 유가 심성론이 새로운 주류 철학의 성립에 있어 초석 역할을 취하였을 것이라 추측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주의를 기울일 만한 인물은 이구(李覯)를 꼽을 수 있는데, 한당(漢唐)의 경학 패러다임을 보수했던 이구의 비맹 의식에서 맹자 성선설에 대한 반사조적 경향이 더욱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한 맹자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맹자의 성선설 자체에는 결함이 있다. 둘째, 맹자는 육경을 배척하였다. 셋 째, 맹자는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을 위배하였다.

우선 첫째 지적을 살펴보자.

 

성인은 그 성(性)에 근거하는 자이다. 현인은 예(禮)를 배운 이후에 능한 자이다. 성인은 인, 의, 지, 신의 성을 거두어 모아 예를 완성하고, 예가 완성된 후에 인, 의, 지, 신이 드러나게 된다. 인, 의, 지, 신은 성인의 본성이다. 현인은 인, 의, 지, 신의 아름다움을 알고 예를 배움으로써 그것을 추구하는 자이다. 예가 얻어진 후에 인, 의, 지, 신이 또한 드러나게 되니, 성인과 현인의 그 끝은 하나이다. 그 시작이 다른 것은 본성과 배움을 이르는 것이다.10)

 

이구는 인, 의, 지, 신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갖춘 덕성이 아니라, 오로지 성인만이 타고난 것이라 말한다. 성인 이하의 사람은(비록 여기에서는 현인만 거 론하지만) 반드시 후천적 교화, 즉 ‘예’의 학습을 통해 비로소 인, 의, 지, 신을 깨 닫고 행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의 인성론을 순자의 그것과 비교해본다면, 양자 간에는 인, 의, 예, 지, 신의 관계 및 구조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다. 순자 는 인간의 본성을 자연적 혹은 욕구의 성으로 보았고, 나머지 덕은 모두 인위, 즉 후천적 교화를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인 또한 피할 수 없 는 숙명이다. 하지만 이구의 “인, 의, 지, 신”으로 예를 드러내는 소위 ‘중례(重禮)’ 사상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데, 바로 ‘외왕’의 도로써 ‘내성’을 확충해 야 한다는 외에서 내로 이르는 사유방식이다. 이 명제는 최소한 성인만이 어떠한 내재적 도덕성으로 실천을 이루는 방식을 취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은 반드시 외재적 교육을 거쳐야만 선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를 통해 본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구는 일견 순자와 유사한 측면이 엿보인다.

둘째 지적은 그의 저작 『상어(常語)』의 저술 목적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학자들의 뇌동(雷同)이 심각하니, 이는 맹자가 육경(六經)을 배척하고 왕도 에 노닐며 천자를 잊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하에 맹자가 없어져야 하며, 육경이 없어 서는 안 되고, 왕도 또한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로 『상어』를 지어, 군신 지의(君臣之義)를 바로 잡고, 공자의 도를 밝히며, 후세의 환난을 방지코차 할 따름이 다.11)

 

       10) “聖人者, 根諸性者也. 賢人者, 學禮而後能者也. 聖人率其仁義智信之性, 會而成禮, 禮成而 後仁義智信可見矣. 仁義智信者, 聖人之性也. 賢人者, 知乎仁義智信之美而學禮以求之者也. 禮得而後仁義智信亦可見矣. 聖與賢, 其終一也. 始之所以異, 性與學之謂也.” 李覯, 『李覯 集』,中華書局, 1981年, 11쪽.

       11) “嗚呼, 今之學者雷同甚矣. 是孟子而非六經, 樂王道而忘天子. 吾以爲天下無孟子可也, 不可 以無六經, 無王道可也, 不可以無天子, 故作常語. 以正君臣之義, 以明孔子之道, 以防亂患於 後世耳.” 李覯, 『李覯集』,中華書局, 1981年, 11쪽. 

 

이처럼, 이구는 한대 육경(六經) 체제를 보수함과 동시에, 맹자의 왕도정치관을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본 맹자는 왕도를 부르짖고 성선을 말하지만 사실 제후들이 도덕적으로 바뀌어 천자가 되도록 권면하는 행각을 벌였기 때문이다.12)

셋째, 잘 알려져 있듯이, 공자는 일찍이 군신의 상하 구분과 그 역할의 명실 합 치를 매우 중시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맹자의 “의를 해치는 것을 일러 잔이라 하고, 잔적(殘賊)하는 사람을 일러 한 사내라 한다(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 夫, 『孟子·梁惠王』)”라는 말은 공자 언명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이는 군주의 내재적 도덕성에 대한 중시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하는 소위 ‘왕 도’ 관념으로부터 “타인에 의한 정권 교체”까지 허용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확장, 전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이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공자의 도는 군주가 군주다우며, 신하가 신하다운 것이다.

 

맹자의 도는 사람이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의 인과 의는 그 원래 의미가 같지 않 으니, 그 천하를 혼란하게 함이 한결같다.13)

 

      12) “맹자가 말하기를, ‘오패는 삼왕의 죄인이다.’ 내가 보기에 맹자는 오패의 죄인이다. 오패 는 제후들을 거느려 천자를 모셨고, 맹자는 제후들이 천자가 되도록 권하였다. 만약 인성 (선함)이 있다면, 분명 그 위배됨과 따름을 알 것이다. 맹자는 주 현왕(周顯王) 때 살았는 데, 그 후 백 년이 지나기도 전에 진나라가 겸병하였다. 오호! 잔인한 사람이로다.”, “孟子 曰, 五霸者, 三王之罪人也. 吾以爲孟子者, 五霸之罪人也. 五霸率諸侯事天子, 孟子勸諸侯爲 天子. 苟有人性者, 必知其逆順耳矣. 孟子當周顯王時, 其後尚且百年而秦並之. 嗚呼, 忍人也.“ 李覯, 『李覯集』,中華書局, 1981年, 512쪽.

     13) “孔子之道君君臣臣也, 孟子之道人皆可以爲君也. ……孟子之仁義, 其原不同, 其所以亂天下, 一也.” 李覯, 『李覯集』,中華書局, 1981年, 512쪽. 

 

위와 같이 맹자는 공자의 사회 질서에 대한 분명한 확립을 위배하는 주장을 펼 쳤다는 것이 이구의 생각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 즉 이구 자신의 심성론과 공맹 정명론의 상충으로 보았을 때, 그가 ‘공맹(孔孟)’ 명칭을 거부하고 ‘주공(周孔)’ 의 명칭을 지키려 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구가 맹자를 비판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순자를 추종했다는 의 미는 아니다. 특히 심성에 대한 분석에서 이구는 예의 교화 기능을 매우 중시하 지만, 그가 수용한 인성 개념은 한유의‘성삼품설(性三品說)’이다. 게다가 이처럼 순자를 거의 논의하지 않는 양상은 존맹, 의맹을 주장한 이들 모두에게서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도통(道統)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심성론이었으며, 여기에서 순자의 인성론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연 당송 교체기로부터 송대 신유학 성립에 이르기까지, 순자의 지 위는 별다른 영향력 없이 하락하였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순자의 사상은 오히 려 이학자들의 사유체계 건립과 더불어 더욱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존맹’ 사조는 이를 위한 필수적 토양이 되었다.

 

Ⅳ. 송대 신유학과 순자 철학

당송시기 존맹-비맹 논의를 살펴보면, 순자의 사상적 영향력은 극히 미미한 것 처럼 보인다. 다만 우리가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구의 비맹 관념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특징, 즉 정명 및 예교(禮敎)에 대한 숭상이다. 이것은 맹자가 공자의 원의를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드러낸 것에 대 한 반작용이자, 그가 순자에 의해 정립된 예치 질서관에 찬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구는 결코 자신의 논리 속에서 순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 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대를 좀 더 내려와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송대 이학(理學) 또는 신유학(新儒學)이라 불리는 사상 체계의 건립 과정에서 드러나는 순자 사상 의 흔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진(先秦), 한당(漢唐) 유학과 비교하여 보면, 주류학 술 사조로서의 송대 신유학의 특징은 바로 심성론과 우주론을 긴밀하게 연계하여 일종의 ‘상호 해석 관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만물 원리에 대한 이해와 이로부터 정의된 형이상적 이론구조가 일체 도덕 규범의 정당성과 사회 질서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사유체계는 전무(前無)한 종 합성, 체계성, 그리고 엄밀성을 갖추게 된다. 이학의 성립에 거대한 공헌을 한 인물들, 즉 정이천과 주자의 순자에 대한 관 점을 살펴보면, 존맹비맹 논쟁 속 유자들의 심성론에 대한 이해보다 분명 더욱 긍정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생(生)을 일러 성(性)이라’고 한다. 성은 기(氣)이며, 기는 곧 성이다. 생을 이르 는 것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에 구애됨이 생기고, 리(理)에 선악이 있다는 것이 다. 그러나 성 안에 원래 이와 같은 두 물질이 있어 그것들이 상대하여 생겨나는 것 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선하거나 어려서부터 악한 것은, 기의 구애로부터 그리된 것 이다. 선함은 진실로 성이나, 악함 또한 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14)

 

     14) “‘生之謂性’, 性即氣, 氣即性, 生之謂也. 人生氣稟, 理有善惡, 然不是性中元有此兩物相對而 生也.有自幼而善, 有自幼而惡, 是氣稟有然也. 善固性也, 然惡亦不可不謂之性也.”程頤, 『河南 程氏遺書』 , 『二程集』, 中華書局, 1981年, 61쪽.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완벽하지 못하다. 기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명확하지 못하다.15) 정이천의 사상 체계에서 뚜렷한 특징은 ‘성(性)’ 개념이 두 가지 속성, 즉 본연 지성과 기질지성으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이 선천적으로 품수받은 소위 ‘천성’이 바로 ‘리’이며, 이것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으로, 본연지성 혹은 의리 지성(義理之性)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물적 본성(生)’으로부터 타고난 ‘기 질지성(氣質之性)’도 있는데, 이는 신체의 물질성 및 그 욕망에 근거한 본성이다. 이것은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으며, 전자와 질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정 이천은 기질지성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고, 병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또한 인 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이러한 관념이 바로 송명이학의 이원적 사유 구조의 기초가 되어, 이후에 주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된 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맹자의 논의는 대개 성선을 말하고 있다. 불선함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이는 ‘빠 져드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처음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이후에 곧 불선함이 생긴다고 말한 것일 따름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오히려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 은 것이니, 완비되지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16)

순자와 양웅은 기를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즉 성을 논하지 않았다.17)

소위 천명과 기질은 또한 서로 얽매여 있는 것과 같다. 천명이 있으면, 곧 기질이 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만일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곧 생물은 살 수 없게 된 다.18)

 

      15) “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程頤, 『河南程氏遺書』, 『二程集』, 中華書局, 1981 年, 132쪽.

      16) “孟子之論, 盡是說性善, 至有不善, 說是陷溺.是說其初無不善, 後來方有不善耳. 若如此, 卻 似論性不論氣, 有些不備.” 朱熹, 『朱子語類』 卷四, 崇文書局, 2018年, 第48-49쪽.

      17) “若荀揚則是‘論氣而不論性’, 故不明. 旣不論性.” 같은 책.

      18) “所謂天命之與氣質, 亦相羇同. 才有天命, 便有氣質, 不能相離. 若闕一, 便生物不得.” 같은 책. 

 

이처럼, 주자는 과거 인성론의 다양한 개념들의 일장일단을 파악하고, 맹자가 말한 악을 완전히 후천적 사욕의 누적으로 되돌리며, 성선설은 오직 본연지성에만 착목하고 기질지성을 논하지 못한 과오를 범하여 완벽하지 않다는 관점을 드 러낸다. 이처럼 송명 신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 체계를 건립하는 가운데 선대 유 가의 인성론을 종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위 전통 유학 주류로는 맹자, 정이천,  주자로 이어지는 계보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는 위와 같은 사유체계가 함의하 고 있는 주요 계승 맥락과 그 역사적인 영향력에 대한 고려로부터 도출된 인식이 다. 그러나 어떤 학술 사조가 계승된다는 것은 학자들의 각 시대의 요구에 따른 대응이며, 또한 그 과정에는 대립자에 대한 비판, 흡수와 같은 작업이 수반된다. 즉 신유학자들은 결코 맹목적인 선유(先儒) 추존을 하지 않았고, 선대 사상에 대 한 종합적인 비판 위에 자기 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예컨대, 주자는 맹자와 순자, 양웅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평가를 내린다. 성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은 것은 맹자이며,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 결함일 따름이다. 기를 논하며 성을 논하지 않은 것은 순자와 양웅이다. 명확하 지 않으며, 또한 큰 해로움이다.19) 이 언명은 곧 맹자를 주로 삼고 순자와 양웅을 그 부차의 지위에 두는 인식을 보여준다. 즉 주자는 ‘천리’, ‘성’이야말로 비로소 인간 본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했 고, 이에 맹자는 비록 기질지성은 논하지 못했지만, 인성에 있어서 더욱 근원적 인식을 해냈다고 본 것이다. 만약 이를 변증법적 시각에서 다시 살펴본다면, 맹자 의 심성론에서 주자의 심성론은 정-합의 관계에 해당한다. 또한, 이전 장에서 확 인해본 바와 같이, 당송 교체기의 유가의 정통성 문제상에서 발생했던 존맹비맹 사조 속에서는 순자의 반사조로서의 면모가 미약했던 반면, 송대의 이학이 완전 한 체계를 갖추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순자의 입장이 매우 분명하게 토론, 흡수, 비판된다. 즉 주자는 맹자와 순자의 심성론을 모두 취하면서도 맹자의 그것을 자 기 철학의 기초로 채택한 것이다. 위와 같이 주자의 맹자, 순자에 대한 비교적 종합적인 평가 이외에도, 순자의 철학이 신유학 도처에 스며들어 있거나, 사상적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의견이 존 재한다. 예를 들어 황갑연은 순자와 주자의 마음(心)에 대한 이해와 관점이 상당 부분 유사하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양자 모두 심의 인지기능, 지각기능을 선천적 인 것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심의 불완전성에 대해 인정20)

 

       19) “論性不論氣, 孟子也. 不備, 但少欠耳. 論氣不論性, 荀揚也; 不明, 則大害事!” 朱熹 『朱子 語類』 卷六十二, 1121쪽.           20) 『荀子』 解蔽 : “故人心譬如槃水, 正錯而勿動, 則湛濁在下, 而淸明在上, 則足以見鬢眉而察 理矣. 微風過之, 湛濁動乎下, 淸明亂於上, 則不可以得大形之正也. 心亦如是矣.” 『朱子語類』卷十一:“心不定, 故見理不得. 今且要讀書, 須先定其心, 使之如止水, 如明鏡. 暗 鏡如何照物!” 위의 책 133쪽. 

 

하였으며, 인간의 일체 행위(선악을 막론하고)에 대한 심의 주재성 등, 심의 ‘지각작용’ 및 ‘인지기능’에 기초한 여러 방면에서 유사점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수양론 차원에서도 심(心)-리(理) 혹은 예(禮) 학습은 인지뿐만 아니라 자기성찰, 자기반 성 활동을 공통점으로 삼는데, 이것이 바로 순자의 허일정(虛一靜)과 주자의 거경 (居敬) 공부의 공통분모라는 것이다.21) 이러한 비교는 주자의 사유체계가 맹자, 순자의 사상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표명한다. 이 외에도, 혜길흥(惠吉興)은 순자의 예론과 송대 유가의 예치 사상에 많은 계 승 관계가 나타나며, 그들이 순자의 중례(重禮) 사상, 법치 관념을 다양하게 수용 했음을 논증하였다.22) 하지만 그는 예교(禮敎)와 외치(外治) 측면에서 송대 유가 가 적극적으로 순자를 긍정, 비판하거나 혹은 계승하였다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밝혀내지 못했으며, 따라서 어쩌면 그러한 사상적 유사성은 그저 한, 당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가 예교(禮敎) 전통의 연속선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예 학 방면에서는 순자와 송대 유가 간의 직접적인 변증 관계를 증명하기 곤란한 것 으로 보인다. 요컨대 송명 이학은 태생적으로 순자 사상의 여러 방면에서 직간접적인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그 직접적인 영향은 심성론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래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자의 학설은 표현 형식상에서는 비록 장재, 이정과 차이가 있으나, 여전히 리와 기라는 두 차원에서 인성을 설명 하고 있다. 진한 이후 유가 인성론 발전 추세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정도와 방식 으로 자연적 속성(氣)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임을 긍정하는 것이었으며, 이로부터 본성은 선함을 주로 삼으나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또한, 줄곧 자연적 속 성을 악행의 근원으로 간주하여, 그것의 본성으로서의 의미를 폄하하였다.”23)

 

      21) 당연히 순자와 주자의 심에 대한 이해 또한 각기 다른 이론적 기초와 목적을 갖추고 있 다. 이에 관하여 황갑연은 그 이론 체계, 수양 방법, 학문 목적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이미 분석한 바 있다. 황갑연, 「순자와 주자 도덕의식 구조의 유사성 - 일심론(一心論)과 공부 론(工夫論)을 중심으로」 『儒學硏究』 제28권,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291-292쪽 참 고.

    22) 惠吉興, 「荀子對宋代理學的影響」, 『邯鄲學院學報』, 2012年, 第四期. 136쪽.

    23) 陳來 『朱熹哲學研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1988年, 180쪽. 

 

즉, 송대 이학의 건립은 근본적으로 과거에 다양하게 논의되어 대립 관계를 이루었던 심성 이해에 대한 종합적 사고로부터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부분적 폄하’는 분명 존재했지만, 맹자에 비하여 송대 유가의 심성론은 분명‘자연적 속성으로서의 인 간 본성의 긍정’이 가장 큰 변화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자의 철학이 맹자를 골간으로 삼되 순자 또한 비판, 수용했음이 명 백하다면, 이는 순자 철학의 반철학적 면모를 분명하게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正, 맹자)은 그 자체로는 하나의 ‘정설’로 채택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재 사유 주체가 인식하는 세계와 인간을 전면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하기에 자기모순 혹은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발전, 개선하려면 반드시

반(反, 순자)과의 충돌 혹은 결합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합에 도달한 새로운 합(理學)은 정으로서의 본래 정체성과 목적성을 보존(aufheben)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을 부분 수용하여 더욱 개선, 보완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다.

 

Ⅴ. 청대 유가의 순자 재조명

당송시기에 순자 철학은 적극적인 사상적 영향력을 끼쳤는가? 앞에서 보았듯 이, 그러한 특징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필자는 비록 송명 이학과 순 자 철학 간에 일련의 필수적인 결합 관계가 존재함을 주장하였지만, 사실 역사적 으로 보면, 송-명대를 거치면서 유학자 집단 내에서 순자의 학술적 지위는 점점 하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 가정(嘉靖 9年)에 이르러서는 공묘(孔廟)에서 배출되 었다. 이는 순자 철학이 이학 체계의 건립에는 일련의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이 후 송명 이학의 변화, 발전 과정에서는 또다시 적극적으로 토론되지 못했거나, 심 지어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에 비하여, 명말 청초 유학자들의 순자 철학에 대한 인식은 매우 극적으로 긍정적인 변화양상을 띤다. 이를 설명하기에 앞서, 청대 학술 사조를 간단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소위 청대 유가의 주류학술은 고증학, 훈고학으로 여겨진다. 물 론 청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은 뒤에도 여전히 많은 이학자가 활동했지만, 명 유민으로 구성된 몇몇 유학자들은(그들 또한 이학을 배웠음에도) 망국의 원인을 송명이학 특유의 공담무실(空談無實)한 학풍의 소치로 여겼으며, 이에 그 가운데 몇몇 학자들은 고대(古代)로 되돌아가 유가 사상의 본의를 정밀하게 탐색하려는 소위 경학(經學)사조의 부흥을 주도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술 사조의 전환과 순자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여영시(餘英時)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대의 고증학은 최초에는 경학, 사학에 미쳤으며, 이후에 제자학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이었는데, 왜냐하면 선진고적으로 고정, 훈고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여러 경(經)들은 곧 제자(諸子)들(의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당연히 『순자』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24) 즉 경학 사조 는 선진제자백가 사상에 관한 탐구로 그 시야를 확장하였고, 이에 따라 오랫동안 24) 餘英時 『中國近代思想史上的胡適』, 聯經出版公司, 1984年, 78-79쪽. 중국 유학사 속 순자 철학의 변증법적 역할과 특징 59 경시되었지만 동시에 여타 제자들(노자, 묵자 등)과는 달리 유가의 일원인 순자에 대한 재평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기점으로 청대 전반에 걸쳐 유가의 순자에 대한 긍정적 관점이 줄곧 출현하였는데, 심지어 유월(兪越)과 같은 학자는 맹자를 낮추고 순자를 더욱 높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순자』 자의(字意)에 대한 교정으로부터 순자 철학의 의미 조명에 이르기까지, 청대는 그야말로 ‘순자학’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하지만 본문의 목적은 순자가 유학사 속에서 안티테제로서의 영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논증하는 데에 있으므로, 청대 유가의 다양한 순자 인식 가운데, 비교적 순자 철학의 시대적 영향력을 대표하는 관점에 주목하려 한다. 이 에 해당하는 관점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1) 공자를 표준으로 삼고 맹 자와 순자를 동일선상에서 비교, 조화하여 그 지위의 균형을 모색하거나, 2) 이학 의 이론 가운데 순자 철학의 요소를 발굴, 그 업적을 주장하거나, 3) 당대 주류 사 조로서의 경학사 속에서 순자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유 형은 모두 순자 철학을 일종의 타자로 상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유학 발전사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는 종합적인 시각을 내재하고 있다. 우선 첫째 관점, 즉 공자를 기준으로 맹자와 순자의 균형점을 찾는 노력은 사 용(謝墉)과 학의행(郝懿行)으로부터 엿볼 수 있다. 맹자는 성선(性善)을 말했는데, 대개 사람이 선함에 힘쓰도록 한 것이 이 말이다. 순자는 성악(性惡)을 말했는데, 대개 사람이 악해지는 것을 미워한 것이 이 말이다. 요약컨대 공자의 ‘서로 가깝다’는 말을 이은 것이니, 모두 편향된 논법이다. 성악 만을 이르면 상지(上智)가 없게 되며, 성선만을 이르면 하우(下愚)가 없게 된다.25) 맹자, 순자의 뜻은 본래 합해지지 않음이 없다. 다만 주장하는 논지가 각기 편향 된 것이다. 성인의 말씀에 근거하면, 본성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선악을 겸하여 말하 는 것이며, 습관에 의해 멀어진다는 것은 곧 배움이 달라 나뉘게 된다는 것이니, 후 대 유가(맹자, 순자)가 이 뜻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26) 맹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추존하여 환공, 문공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순자는 맹자 의 논변을 바로잡아 위급한 세상을 구휼하고자 하였다. 맹, 순의 뜻은 하나로 귀결된 다.27)

 

      25) “孟子言性善, 蓋勉人以爲善而爲此言. 荀子言性惡, 蓋疾人之爲惡而爲此言. 要之, 繩以孔子 相近之說, 則皆爲偏至之論. 謂性惡, 則無上智也, 謂性善, 則無下愚也.” 謝墉, 『荀子箋釋 序』, 王先謙 『荀子集解』 考證上 13쪽 참고.

      26) “孟荀之指, 本無不合, 惟其持論, 各執一偏. 準以聖言, 性相近即兼善惡而言, 習相遠乃從學 染而分. 後儒不如此義.” 郝懿行, 『與王引之伯申侍郎論孫卿書』, 王先謙 『荀子集解』考證上, 16쪽 참고.

      27) “孟遵孔氏之訓, 不道桓文之事, 荀矯孟氏之論, 欲救時勢之急. 孟荀之意, 其歸一耳.”

 

같은이상의 언급들은 모두 맹자와 순자를 모두 공자의 뜻을 계승한 인물로 간주하 고, 그들의 이론(異論)이 사실 공자 사상에 대한 편향된 해석에 불과한 것으로 보 고 있다. 또한, 학의행은 맹자와 순자 간의 시대적 차이를 고려하여, 순자가 맹자 의 이론적 보완을 시도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번째로, 신유학 이론 속에서 순자 철학의 요소를 발굴하는 관점이다. 이 관 점은 앞 장에서 언급했던 이학과 순자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대진(戴震) 과 전대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자가 예의를 말한 것은 곧 송유(宋儒)가 말한 리(理)이다. 순자가 말한 성은 곧 송유가 말한 기질이다. 송유가 세운 학설은, 맹자와 같은 듯하나 그 실제는 다르다. 순자와 다른 듯하나 그 실제는 같다.28) 맹자가 말한 성선은 사람이 본성을 다 하여서 선에 노닐기를 바란 것이다. 순자가 말한 성악은 사람이 본성을 변화시켜 선에 힘쓰도록 바란 것이다. 그 입설이 각기 서 로 다르나, 사람을 가르침으로써 선하도록 하는 것은 똑같다. 송유가 성을 말한 것은 맹자를 주로 하였으나, 의리와 기질 둘로 나뉘었으니, 이미 맹자, 순자의 뜻을 겸하여 취한 것이다. 사람을 가르침으로써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은 것에 대 해 말하자면, (이는) 순자의 화성(化性)설을 암용(暗用)한 것이다.29)

 

    28) “荀子之所謂禮義, 即宋儒之所謂理, 荀子之所謂性, 即宋儒之所謂氣質.”, “宋儒立說,似同於 孟子而實異,似異於荀子而實同也.” 戴震, 『孟子字義疏證』, 『戴震全書卷六』, 黃山書社, 1995 年, 190쪽.

    29)“孟言性善, 欲人之盡性而樂於善, 荀言性惡, 欲人之化性而勉於善, 立言雖殊, 其教人以善則一 也. 宋儒言性, 雖主孟氏, 然必分義理與氣質而二之, 則已兼取孟荀義. 至其教人以變化氣質爲 先, 實暗用荀子化性之說.” 『跋荀子』 王先謙, 『荀子集解』, 中華書局, 1988年. 15쪽. 

 

우선 대진의 말을 살펴보자. 그가 주목한 순자와 송유의 공통점은 예(禮)-리 (理)와 성(性)-기질(氣質)의 유사성이다. 예와 리는 순자와 송유에게 있어서 모두 수양을 통해 획득해야 할 가치 속성인 동시에, 사회 질서의 근거로 작용한다. 성 과 기질의 관계 또한 내재적 유사성을 띠고 있다. 순자가 본성의 내용을 자연 욕 망 그 자체로 삼았다는 점에 대비하여 보면, 송유가 말한 기질지성 또한 이에 상 당하는 내용적 정의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 리라는 두 개념의 서로 다른 기원과 그 개념적 함의에 대해 엄밀하 게 고찰한다면 그 차이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순자의 예는 선왕에 의해 책, 15쪽. 제정된 것으로, 인간 도덕행위의 외적규범이자, 사회질서의 표준으로 작용한다. 그는 본성을 오로지 욕망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에, 예의 발생 또한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질서와 혼란에 대응하는 마음의 결정(心之所可)으로부터 조성된 것이 라고 말하며, 여기에서는 어떠한 초월적, 관념적 근거도 상정하지 않는다. 반면에, 리는 도덕의 규범성이라는 외재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천 적 선한 본성을 규정하는 형이상적 개념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는 당연히 도 덕의 달성 방법(개인 수양과 치세)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사유 흐름들을 보여준 다. 그러므로 대진의 논법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는 이론구조 차원에서는 양자의 유사성을 긍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이학은 맹자의 정신을 주로 삼는다는 점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전대흔의 논지 또한 사실 대진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는 특이하게도 ‘(송유가)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순자 화성설(化性說)의 암용(暗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 또한 ‘변화기질’과 ‘화성기위’ 간에 존재하는 의미함축의 충 돌을 피할 수 없으며, 사실 견강부회하는 면이 있다.30) 그러나 전복미(田富美)는 청대 유가의 이러한 작업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청대 유가의 이 ‘화성기위’,‘변 화기질’의 해석 배후에는 하나의 전제가 존재한다. 바로 실천 행위로부터 덕을 이 루는(成德) 경향이다.”31)

 

    30) 이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배다빈, 「清儒와 荀子 사상 관계에 대한 비판적 접근- 錢大昕 의 순자 이해 및 순자와 戴震 人性論의 내재적 정합성을 중심으로」, 『동서철학연구』 101 호, 한국동서철학회, 2021 참조.

    31) 田富美, 「“化性起僞”與“變化氣質”」, 『邯鄲學院學報』, 2016年, 第三期. 31쪽. 

 

즉 당시 청대 유가의 이러한 순자 인식은 선진 유가 특 유의 ‘실천지학(實踐之學)’ 정신에 대한 추구를 반영하고 있다. 비록 유가의 심성 론 구조의 차이는 세대마다 상이하지만, 그들이 심성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와 공부법으로부터 도달하려 했던 ‘성덕(成德)’은 도덕 가치의 실현과 사회 질서의 확립에 있었다. 그러므로 ‘화성기위’이든 ‘변화기질’이든 막론하고, 현실의 무질서 와 혼란이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야기된다는 것을 긍정하고 이것의 개선을 수양의 중점 목표로 삼는 것은 순자의 유가 철학 본질에 대한 구현이며, 동시에 이학 건 립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포함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청대 유가는 경학사 차원에서 순자의 업적을 조명하였다. 이것은 청 대 경학의 발전 추세에 부응하는 가운데 순자의 고유한 공헌을 조명함으로써, 그 의 학술적 지위를 회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예컨대 왕중(汪中)은 『순경자통 론(荀卿子通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경의 학문은 공자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여러 경전에 더욱 공이 있다. ……무릇 칠십 제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대 여러 유학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 그 가 운데 전국시대와 진(秦)의 폭정과 혼란을 거쳤다. 육예(六藝)의 전수를 끊이지 않게 한 것은 순경이다. 주공이 육예를 짓고, 공자가 서술하였으며, 순경이 전수하였으니, 그 법도가 하나이다.32) 여기에서 왕중은 유가 경전 전수라는 맥락에서 공자의 후계로 순자를 꼽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호원의(胡元儀) 또한 『순경별전(郇卿別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대(漢代)의 『역』, 『시』, 『춘추』 연구는 모두 순경에 기원한다.33)

 

      32) “荀卿之學, 出於孔氏, 而尤有功於諸經. ……蓋七十子之徒既沒, 漢諸儒未興, 中更戰國,暴 秦之亂, 六藝之傳賴以不絕者, 荀卿也. 周公作之, 孔子述之, 荀卿子傳之, 其揆一也.” 王先謙 『荀子集解』 考證下, 21-22쪽.

      33) “漢之治易詩春秋者, 皆源出於荀卿.” 胡元儀, 『郇卿別傳』, 王先謙 『荀子集解』 考證下, 39 쪽. 

 

이와 같은 순자의 한대 경학에 대한 공헌에 있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 로 보인다. 그러므로 왕중과 호원의의 언명은 송명이학의 의리(義理)중심적 사상 체계를 탈피한 청대 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순자 사상의 가치를 결합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경학을 기치로 삼는 청대 유학과 순자가 상보(相補)적 관계를 맺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청대에도 여전히 이학은 관학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이학과 경학, 그리고 청 중기 이후 흥성한 한학(漢學) 사조가 어우러져 비교적 다면적인 학술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순자 사상은 결 코 주류 혹은 ‘정(正)’의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다양한 학술 흐 름 조성에 교각을 담당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 청유의 순자 연구로부터 드러난 특징을 살펴보면, 그들 학문의 주요 목표는 송명이학 자체가 가지는 ‘결함’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를 극복한, 좀 더 개선 발 전된 새로운 유가 학술 풍토의 성립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시된 새로운 연구 방식, 즉 경학, 훈고학에 대한 중시는 자연스럽게 그들로 하여금 철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순자의 가치를 재조명하도록 하였다. 이는 한당 이래 최초로 행해진 순자 철학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였으며, 마침내 ‘순자학’은 당시 학술계 의 일각을 차지하게 된다. 

 

Ⅵ. 나가는 말

역사적 차원에서 소위 ‘변증법’개념은 두 가지 전제를 함의한다. 첫째, 정은 합 에 대하여 불완전한 자기모순 상태를 가지고 있다. 둘째, 타자(반)과의 결합을 통 해, 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함과 동시에 좀 더 발전된 형태를 갖춘 새로운 단 계로 진입한다. 유학사의 전체 흐름으로 보았을 때, 한당 이래로 순자와 그의 철 학은 맹자승격운동과 이학의 성립 이래로 줄곧 주도적 지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이학의 건립 과정에서, 그리고 청유들의 재평가를 통해, 순자 철학은 최소 한 두 차례에 걸쳐 당대 주류 사조와 내재적으로 긴밀한 영향 관계를 맺었을 뿐 만 아니라, 마침내 유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역사의 한 단락에서 순자가 이단으로 배척당하였다 할지라도, 이 처럼 순자 철학 내부에 어떤 ‘대립자’로서 마땅히 존재해야 할 풍부한 철학적 함 의와 사유체계가 없었다면, 유학사의 흐름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 이라 단정하기 어렵다. 더불어 오늘날 우리가 순자 철학 자체를 연구하는 데 있 어서 그 가치와 의미를 풍부하게 발굴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과거 유학사에서 순자 철학 자체가 줄곧 행사하였던 고유한 영향력 및 철학적 가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程頤, 二程集, 中華書局, 1981年 戴震, 戴震全書, 卷六, 黃山書社, 1995年 司馬光, 司馬文正公傳家集, 商務印書館, 1937年 李覯, 李覯集, 中華書局, 1981年 王安石, 王文公文集, 上海人民出版社, 1974年 王先謙, 荀子集解, 中華書局, 2012年 張載, 張載集, 中華書局, 1978年 朱熹, 四書章句集注, 中華書局, 2011年 朱熹, 朱子語類 卷四, 崇文書局, 2018年 황갑연, 「순자와 주자 도덕의식 구조의 유사성 - 일심론(一心論)과 공부론(工夫論)을 중심으로」 儒學硏究 제28권,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3. 김준수, 「헤겔 철학에서 모순과 변증법」, 코기토 제71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陳來, 朱熹哲學研究, 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88年 田富美, 清代荀子學研究, 花木蘭文化出版社, 2011年 餘英時, 中國近代思想史上的胡適, 聯經出版公司, 1984年 中國古典文學基本藏書, 韓愈文集匯校箋注, 中華書局, 2010年 趙松, 「辯證法的歷史形態: 從樸素辯證法到實踐辯證法的發展」, 學習與實踐,2018年 惠吉興, 「荀子對宋代理學的影響」, 邯鄲學院學報, 2012年, 第四期. 田富美, 「“化性起僞”與“變化氣質”」, 邯鄲學院學報, 2016年, 第三期. 顔複萍, 「北宋疑孟思想的探究」, 名作欣賞, 2012年, 第五期. 鄭開, 「作爲中國古代哲學範式的心性論」, 中國社會科學報, 2018年

 

 

[Abstract]

The Dialectic Characteristics of Xunzi’s Philosophy in the History of Confucianism

Bae, Da-Bin (Yeungnam Univ.)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iscuss the dialectic status of the philosophy of Xunzi in history of Confucianism. Through the "Elevation movement of Mengzi" and "Zunmeng-Feimeng argument" of Tang-Song period, the status of Xunzi as the Confucianism master and his philosophical influence have been on the decline. Until the revaluation of Qing dynasty’s Confucian and the transformation of academic thought took place, Xunzi was rejected as "The heretic" and did not have any of academic influence in Neo-Confucianism of Song dynasty. On the other hand, however, there are some parts of it that have been contorted that Xunzi cannot be fused in the development of Confucian change overly. This was stereotyped from the “Dao-tong(main line of descent)” that presented by Han Yu,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philosopher of the Tang Dynasty, and moreover, it was strengthened by the continuation of following the Mengzi of mainstream thought. Therefore, through the dialectic frame, I prove that the Xunzi actually existed directly or indirectly through mutual change with mainstream thought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theoretical structure of Neo-Confucianism, and to argue that the philosophy of Xunzi has made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establishment of a new philosophical paradigm for Confucians in Qing Dynasty. Key Words : Dialectic, Antithesis, Xunzi, Human nature theory, Confucianism

 

 

투고일 : 2021년 12월 20일 심사일 : 2022년 01월 15일 게재결정일 : 2022년 01월 25일

새한철학회 철학논총 제107집ㆍ2022ㆍ제1권 

중국 유학사 속 순자 철학의 변증법적 역할과 특징.pdf
0.53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