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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중용(中庸)의 관점에서 본 전도서의 ‘새로운 지혜’/서명수.협성대

1. 서언

“헛되고 헛되다”(1:2)로 시작하는 전도서의 가르침은 기존의 정통신학 사상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충하는 인상을 준다. 무엇보다도 창세기의 창조신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헛되고 헛되다”는 선언은 여섯 번에 걸쳐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선언에 배치되며, “해 아래 새것이 없다”(1:9)는 선언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에 배치된다.1)

1) 텍스트간의 상호관계(intertextual relation)라는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와 전도서에는 유사한 요 소들이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유윤종, “전도서 안의 창세기,”「구약논단」제7 집 (1999), 95-118을 보라.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도 기존의 정통신학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백성답게 사는 길과 방법에 대한 종합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토라는 세상과 인간 삶에 대한 긍정의 원인을 제공한다.

하나님 이 창조하신 창조세계 속에서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은 복된 삶이 기 때문이다.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강조하는 신명기법 정 신 역시 ‘심판’이 아닌 ‘복’의 길을 선택하여 언약백성으로서 행복한 삶 을 살도록 유도한다.

예언자들 역시 이 기조 위에 서 있으며, 지혜문학에 속하는 잠언 역시 이 기조 위에 서 있다. 잠언이 들려주는 모든 권고와 경 고는 이 땅 위에서 행복하게 사는 삶에 방해와 장애요인이 되는 것들을 향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충분히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고 피할 것은 피할 줄 아는 지혜를 갖으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잠 9:10).

이렇듯 정통신학과 잠언은 세상과 삶에 대한 긍정을 통해 하나님 경 외라는 대긍정으로 나아간다.

이에 반해 전도서는 이 세상은 낡았으며, 인생사 모든 수고는 다 헛되 다는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을 드러낸다(1:3). 그런 까닭에 전도서는 모토 (motto)처럼 반복되는 “헛되고 헛되다”로 시작하여 “헛되고 헛되다”(12:8) 로 수미(首尾)를 맞추고,2)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 람의 본분이라는 결구(結句)를 추가하여 끝을 맺는다(12:13-14).3)

2) John Jarick, “The Hebrew Book of Changes: Reflections on Hakkōl Hebel and Lakkōl Zemān in Ecclesiastes,” JSOT 90 (2000), 80.

3)12장 14절이 포함된 전도서의 종말론적 편집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박영준, “전도서 에서의 종말론적 개념에 대한 연구,”「구약논단」제43집(2012), 105-128을 보라.

이렇듯 전도서는 세상과 삶에 대한 부정을 통해 하나님 경외라는 대긍정으로 나아간다.

왜 이런 차이가 노정(路程)되는 것일까? 전도서 이전의 정통신학은 매 우 선험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계약법이 핵을 이루는 토라는 이스라엘 백 성들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인간 이 경험적 안목을 가지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성격의 법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문학에 이르러서는 법의 선험성에 인간의 경험성이 강하게 추가된 다.

잠언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선험적 토라에 기초하지만 세부적인 가 르침에 있어서는 인간의 경험적 교훈을 담고 있다. 이것은 지혜문학 이전의 정통신학과 지혜문학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또는 사회적 위치설 정(social location)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지혜문학에 속하는 잠언과 전도서는 공히 인간의 경험적 성찰을 중시하면서도 긍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 또한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잠언과는 달리 전도서에는 정통신학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가르침이 들 어 있어 독자를 당혹케 한다.

7장 15-18절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단명하고 악인이 오히려 장수하니 너무 의롭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그 중간을 취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좋은 일만 하고 잘 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고 하는데 이 통찰의 이면에는 악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악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도 없고, 절 대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다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하게 만드는 본문이 아 닐 수 없다. 이렇듯 전도서의 어떤 가르침은 명백히 신명기로 대표되는 토 라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전도서는 선험적인 토라의 가르침보다는 인간의 경험적 성찰을 앞세우며 양자택일보다는 양극단을 피하라고 가르치는데, 전도서가 말하는 양국단의 중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통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적 틀 안에서 전도서가 제시하는 중도의 의 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간 서구 학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필자는 본 소고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전도서가 제시하는 중도 의 의미를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기 위해 동양의 중용사상에 비추어 새롭 게 이해하고자 한다.

내용 전개는 먼저 동양의 중용사상을 정리한 후 전도 서 편찬의 중용성에 대해 살펴보고, 그 빛 아래서 위에서 언급한 문제와 관련구절들을 고찰하는 순으로 전개될 것이다.

2. 중용의 의미

중국문헌 중 ‘중용(中庸)’의 의미에 대해 밝혀주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 은 『논어』와 『중용』이다.4)

사서(四書) 중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확실히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고,『중용』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

자사 (子思) 곧 공급(孔伋)이다. 중국인들은 공자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담아 만세종사(萬歲宗師), 지성대성문선왕(至聖大成文宣王)과 같은 칭호를 부여 하였으나, 공자 자신은 “옛 것을 배워 전하되 창작하지는 않으며, 옛 것을 믿고 좋아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5)하였으며, “요순을 근본으로 삼아〔그 도를〕이어 전하고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삼아 지켰다(祖述堯舜 憲章文武).”6) 공자는 유학의 사상을 새롭게 창시한 것이 아니라 요순시대부터 형 성된 방대한 사상을 체계화하였는데, 요순(堯舜)시대에 발원하여 계승 발 전되어 온 유학의 중심사상은 바로 중용사상이다.7) 논어에 따르면 요 임금 은 순 임금에게 “하늘이 안배한 제왕의 차례가 네 몸에 있으니 진실로 중 용을 잡아 정사를 받들라(允執厥中)”8)고 일러주었다.

4) 「論語」에는 ‘中’에 관한 언급이 25회, 「中庸」에는 22회 등장한다. 등장하는 구절의 내용과 목 록을 위해서는 柳正東, “中庸思想의 哲學的 考察,” 「동양철학연구」 (1981), 22-24을 보라.

5) 공자,「論語」「述而 제1장 (207쪽). 이하 논어의 인용과 문헌 제시는 별도로 밝히지 않는 한은 김 학주,「論語」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에서 가져온다.

6) 자사, 「中庸」제30장(274). 이 논문에서 「中庸」의 인용과 문헌 제시는 별도로 밝히지 않는 한 이세동 옮김, 「대학·중용」(서울: 을유문화사, 2007)에서 가져온다.

7) 신윤구, “孔子의 中庸思想에 대한 硏究,” 「동서철학연구」제33호(2004), 200. 8) 공자, 「論語」 「堯曰」 제1장(427).

천하의 대성(大聖) 요 (堯)·순(舜)·우(禹)가 천하의 대사(大事)인 천자(天子)의 제위(帝位)를 주고받을 때 신중히 일러준 말이 바로 ‘中’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처럼 강조한 ‘중’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집기양단(執其兩端)

공자는 순 임금에 대해 “순은 크게 지혜로워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며,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적용하였다(執其兩端 用其中於民)”9)고 평하였다.

양극단을 붙잡아 두 끝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이 ‘중’의 의미이다. 이때 양극 단이란 매우 다양하게 제시된다.

형이상학적인 요소와 형이하학적인 요 소, 도(道)와 그릇(器),10) 자기를 위함(爲己)과 타인을 위함(爲他), 이상과 현실, 강경과 온건, 기탄(忌憚)과 무기탄(無忌憚) 등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된다.

이러한 두 개의 극단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합일지도(合一之道)가 바로 ‘중’의 상태이다.

주희(朱熹)는 이 ‘중’의 상태를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것(中者, 不偏不倚 無過不及之名)”11)이라고 풀이 하였다. “불편(不偏)은 원의 중심점처럼 모든 둘레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 이고, 불의(不倚)는 평형을 이루는 저울의 추처럼 균형을 찾는 점”12)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본체 적 중립성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현실운용에서의 실 제론적 적합성을 의미하며, 시공간 속에서의 중립성과 적합성의 조화에 의한 ‘최상의 가장 적합한 것’을 의미한다.13)

그래서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못 미친 것과 같다(過猶不及)”14)고 가르쳤다.

9) 주희, 「中庸章句」 제6장(165).

10) 도(道)가 궁극적 진리로서 어떤 한계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를 의미한다면 그릇(器)은 형식과 자기 한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간장종지는 국그릇으로 쓰기 어렵고, 대접은 간장종지나 국 그릇으로 쓰기 어렵다. 항아리는 물독이나 쌀독으로는 쓸 수 있어도 밥그릇으로는 쓸 수 없 다. 이렇듯 그릇(器)은 어디까지나 용도범위 내에서 그릇으로서 존재의미를 갖는다.

11) 김학주, 「중용」(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6쪽. 박완식, 「중용」(서울: 여강, 2005), 61.

12) 이원목, “中庸思想의 形而下者的 論理構造.” 「儒敎思想硏究」 제25집(2006), 166쪽.

13) 신창호, “「중용」의 교육사상 고찰,” 「敎育哲學」28(2002/8), 130쪽; 윤천근, 「原始儒家의 새로 운 解釋」(청주: 온누리, 1987), 44-50 참조.

14) 공자, 論語」「先進」 15장(284).

‘중’이 양극단 사이의 가운데를 의미한다고 해서 단순히 산술적 중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은 고정불변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상황에 따 라 가변적으로 이동하는 균형점으로서의 ‘중’이다.

‘中’은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펄럭이는 깃발’ 모양과 관련이 있다. ‘中’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 발 아래에서 중심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15)

그리고 깃발은 깃대를 중심으로 삼지만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자신의 방향을 설정한다.

그러니까 ‘중’의 어원과 관련하여 볼 때 ‘중용’은 마치 깃발이 깃대에 매달려 펄럭이듯이 ‘어떤 기준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해가는 상황에서 균형과 조 화’를 의미한다.16)

‘중’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비유는 ‘저울질’이다. 달고자 하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저울추가 선정되고, 정확한 무 게를 재기 위해 저울대 위에서 저울추를 좌우로 이동시켜 최적의 균형점 을 찾아야 한다.

이렇듯 ‘중’이란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양극단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최상의 조화와 균형을 찾아 이동하는 유동성과 역동성을 가 지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 ‘권도(權道)’라 한다.

이때 ‘權’은 저울을 의미 한다. 오늘날 ‘저울질’ 하면 약은 계산을 가지고 암암리에 이리저리 재는 부정적인 모습을 떠올리기 쉬우나 원래 중용철학에서 ‘권도’라 신중한 자세로 최적의 조화와 균형 찾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권도를 설명하기 위해 맹자 역시 하나의 비유적인 예를 들었다. 평상시에는 “남녀가 손을 맞잡고 무엇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禮)이나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는 손을 내밀어 건져내는 것이 도리이며, 이것을 권도라 한다(男女授受不親 禮也, 嫂溺授之以手 權也).”17)

15) 김성재,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서울: 동녘출판사, 2000), 178-179.

16) 신창호, “중용의 개념과 사상적 특징,” 「韓中哲學」 제6집(2000), 92-93.

17) 「孟子」「離婁上」 17(492). 이 논문에서 「孟子」의 인용과 문헌 제시는 별도로 밝히 지 않는 한 이종찬 편역 「맹자」 (서울: 새문사,2011)에서 가져온다.

위급하지 않을 때 의 ‘권도’과 위급할 때의 ‘권도’은 그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걸린 무게에 따라 저울추를 좌우로 이동시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듯이 ‘중’ 을 찾는 하나의 방편인 권도 역시 산술적 중간이나 양극단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고정점이 아니라 최적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 움직이는 역 동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집기양단’은 두 끝 사이의 교역(交易)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의 의미는 명사적 의미와 형용사, 부사적 의미 그리고 동사적 의미 로 쓰인다. 산술적 중간으로서의 ‘중’은 ‘한가운데(center)’를 의미하고, 형용사적으로 쓰일 때는 ‘알맞은’, 부사적 의미로 쓰일 때는 ‘알맞게’, 동사적 의미로 쓰일 때는 ‘꼭 들어맞다(的中),’의 의미로 쓰인다.18)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중용에 대해 다루었는데, 그 역시 산술적 중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생기는 중용을 구분하였다.

전자는 “사물의 한 가운데(the intermediate in the object)”인데 비하여 후자는 “우리들에 대하여 꼭 알맞은 것(the intermediate relatively to us)”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후자는 동양의 권도에 유사하다 하겠다.

이런 ‘중’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未發) 상태를 ‘중’이라 하고, 그것이 일어난(已發) 후에는 지나침이 없이 절도(節度)에 맞추어 ‘화(和)’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 ‘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비로소 ‘중절(中節)’에 이르게 된다.

정이천(程伊 川)은 희로애락의 미발을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 즉 ‘성(性)’이라 하 였다.

그에게 ‘性’은 곧 ‘理’이다. 율곡(栗谷)은 미발지중(未發之中)을 태극지체(太極之體)로서 천명지성(天命之性)이라 했는데, 이것은 마음이 중심에 있다 하여 재심지중(在心之中)이라 한다.

재심지중이야말로 지선지체(至善之體)이다.

반면 희로애락의 감정이 일어날지라도 절도에 맞아 중절에 이르면 이발지중(已發之中)이 되는데, 이것은 마음이 아닌 마음 밖의 사물과 관련된 것이라 재사물지중(在事物之中)이라 한다. 이 재사물 지중을 지선지용(至善之用) 이라 한다.19)

18)정인재, “중용철학(中庸哲學)에 대한 연구,” 「西江人文論叢」 제20집 (2006), 103.

19)李珥, 「성학집요/격몽요결」(서울: 동서문화사, 2008), 36-37; 심우섭, “中庸思想의 現代的 意 義,” 「인문과학연구」(성신여자대학교, 1988), 136-137 참고.

주자 이후 성리학에서 미발지중은 ‘性’ 곧 ‘理’로, 이발지중은 ‘氣’로 등식화 된다. 조선성리학자들은 이 ‘理’와 ‘氣’가 어떻게 공존, 발생, 교류하느냐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주자학에 기초한 이러한 미발(未發), 이발(已發)/기발(旣發) 을 性과 情으로 구별하는 理·氣를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 과학적, 경험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20)

‘용(庸)’의 의미에 대해 정이천(程伊川)은 “바뀌지 않음을 일컬어 용(不易之謂庸)”이라 했고, 주자는 “변하지 않는 일상생활(庸, 平常也)”로 해석 했다.21)

그러나 다산(茶山) 정양용(丁若鏞)은 ‘중’에 대해서는 주희의 견해 를 인정하지만 ‘용’에 대해서는 명백한 해석이 없다고 보고 그의 ‘평상지리(平常之理)’에 반대하였다. 주자가 ‘용’을 ‘평상’으로 해석한 것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문헌적 근거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용’을 ‘항상 (恒常)’ 또는 ‘경상(經常)’으로 보고 변함없는 마음(恒心)으로 지켜나가는 유상(有常)의 떳떳함을 ‘용’으로 여겼다.22)

한국이 낳은 탁월한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는 ‘중’을 ‘뚫림’으로, ‘용’을 ‘줄곧’으로 해석하여, ‘중용’을 ‘줄곧 뚫림’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 “가온씀”, 즉 “참나인 가온(中, 얼)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용(中庸)이다.”고 풀었다.

나아가 그는 ‘중’을 하느님 (성령)으로 보았고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받아서 쓰는 것이 중용이 라고 말했다.23)

20)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이지형, “「中庸」注釋을 통해 본 茶山의 經學思想,” 「대동문화연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5), 257-286쪽을 참고하라.

21) 김학주,「중용」, 6-7.

22) 신창호, “「중용」의 교육사상 고찰,” 129 각주 8번.

23) 유영모(박영호 풀이),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서울: 교양인, 2010), 38

이처럼, ‘중’과 ‘용’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나 공통적인 것은 치우치거나 지나침이 없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떳떳하고 꾸준한 마음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참 중용의 길이라고 종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삶의 태도를 일컬어 ‘성(誠)’이라 한다.「中庸」제25장은 ‘誠’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구하고 있는데, “진실함 (誠)은 만물의 처음과 끝이다(誠者 物之終始).”24)

사물의 본질을 밝게 바라 보려는 깨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사로운 상념들이 정중(正中)한 마음을 해치지 않도록 하며, 이권이나 편중된 논리에 붙잡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각성하는 경(敬)의 자세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라 하겠 다.

정약용은 ‘誠’을 ‘신독(愼獨)’의 의미로 해석하였다.25)

24) 「中庸」 제25장(248쪽).

25) 정약용,「茶山全集」, 經集I, 중용강의보 1권(獨愼者誠也). 최상용, 「중용의 정치사상 (서울: 까치, 2012), 84 참조.

군자는 비록 어두운 곳에 있을지라도 감히 악하고 그릇된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고 하늘이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신의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2) 소위이행(素位而行)

주희는 중용에 대한 그의 주석『中庸章句』14장에서 중용과 군자의 도리 에 대해 “소위이행”을 들어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 째, 자신의 위치로서 ‘소위’이다. ‘소(素)’는 ‘~을 바탕으로’, ‘~에 근거 해서’의 뜻인데, 주희는 ‘지금 있는 그 처지’라는 뜻으로 ‘현재(現在)’라고 주석을 붙였다.26)

26) 이세동, 「대학·중용」 제14장(191쪽).

양극단에서 자신의 위치를 치우치게 정하는 것은 옳 지 않다. 그리고 세상과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자기에게 ‘정해진 자리(定位)’가 있기 마련이다. 마치 지정석에 지정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 앉으면 그것은 제자리가 아닌 것처럼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정해진 마땅한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크게는 하늘의 뜻(天命)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능력과 처신에 의해 정해지기도 한다.

중국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해서, 그리고 능력이 뛰어 나다고 해서 중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넘어서는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또한 배우지 못한 시골의 농 부에게 일국의 재상의 자리는 주어진 적이 없다.

주어진다한들 그것이 자기 자리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에게 정해진 자리인 가 아닌가를 헤아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하는데, 이 지혜는 기본적으로 중용의 지혜에서 나온다.

둘째, ‘소위’의 개념에는 ‘정해진 자리’에 ‘바르게 설 줄(正位)’ 알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하늘이 어떤 자리를 정해주었 건만 그 자리에 바르게 설줄 몰라 서있으면서도 위태롭고, 결국에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것만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므로 ‘정해진 자리에 바르게 서는 것’, 그것이 ‘소위’의 근본이다.

소위는 ‘집기양단’과는 달리 불역(不易)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다시 말해 중용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자리에 연연하기보다는 꼭 자기에게 맞는, 자기의 소 임(所任)이 있는 자리를 추구한다.

둘째, 중용은 ‘정해진 자리에 바르게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행동을 하되 자기 자리에 합당 한 행동을 해야 한다. 말단 공무원이 장관이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하는 순간 중용은 깨어지고 만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 다. 중용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바른 행동(正行)이란 일차적으로 자기 본 분에 맞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경직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 다.

‘소위이행’의 ‘행’에도 권도가 적용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누군가 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는 자기 본분과 위치를 내세우기에 앞 서 손을 내밀어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구해내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를 따지기에 앞서, 빈부귀천을 따지기에 앞서 그것을 먼 저 본 사람이 구할 길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자기가 직접 구하기 어려우 면 소리를 쳐서 구할 수 있는 힘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이 옳다. 이것이 ‘소위이행’의 권도이다.

3. 전도서 편찬에 반영된 중용적 지혜

우리말 성경에 ‘전도자’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는 <코헬렛(Qoheleth>이다.

<코헬렛>은 ‘모으다’를 뜻하는 어근 <카할>에서 비롯되 었는데 회중의 특정한 모임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 치는 사람(전12:9)을 가리킨다.

전도서 1장 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이다”고 기록되어 있어 흔히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이라 하나 1절은 후대에 추가된 표제어이다.

전도서의 시기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다. 프레데릭스(D.C. Fredericks) 는 전도서 자료의 가장 이른 시기를 주전 8세기 혹은 7세기까지 올려 잡 았고,27) 쎄우(Choon-Leong Seow)는 페르시아 시대, 특별히 주전 5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 사이로 보았다.28) 주전 3세기 후반 특별히 톨레미 (Ptolemy) V세의 왕위계승(204 B.C.E.) 이후 예루살렘에서 편찬되었을 가 능성도 제기된다. 그런가하면 가장 늦은 연대(terminus ad quem)로 주전 175-150년 사이를 거론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전도서 파편(4QQoh)이 쿰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주전 175년경에 편찬된 시락서(The Book of Sirach) 역시 전도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찬의 가장 늦은 연대의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처럼 전도서의 연대에 관한 논의는 다양하다. 그러나 전도서에 투영되어 있는 사상과 역사, 문화적 정황을 놓고 종합적으로 볼 때 크뤼거 (Krüger)가 제시하는 주전 204년경에 예루살렘 편찬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29)

27) D.C. Fredericks, Qoheleth’s Language (ANETS3; Lewiston, New York: Mellen, 1988).

28) Choon-Leong Seow, “Linguistic Evidence and the Dating of Qoheleth,” JBL 115 (1996), 643-66.

29) Thomas Krüger, Qoheleth (Minneapolis: Fortress, 2004), 19-21, 특별히 154.

전도서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람어가 다수 들어있고, 페르시아 외래어도 들어있다. 내용면에서도 헬라 사상과 문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외래적 요소가 의미하는 바는 전도서의 시대적 배 경이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한 종교 문화적 환경과 신학 사상만으로는 시대적 변화와 다양성을 충분히 포괄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래적인 것들을 적극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험적이고 규범적인 신학사상만으로는 전개되고 있는 현상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을 정립하여 가르칠 목적으로 편찬되 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상적 요구의 관점에서 볼 때 전도서의 시대적 배경을 주전 3세기 애굽(이집트)에 왕궁을 둔 헬라의 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던 시대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이스라엘은 이 때 톨레미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다. 이때는 정치, 사회, 문화, 여러 방면 에서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방식이 통용되기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이스라엘에 유입되어 삶과 신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구되던 시기이 다.30)

이 시기에 저술되었거나 편집된 유대문학은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온 사상을 놓고 고심하였는데, 전도서는 이 새로운 환경이 유대인의 종교적이 고 지적인 헌신에 미친 혼란스러운 영향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라 할 수 있다.31)

30)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인들의 문화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과 유대인들의 동화 정도에 관 한 견해는 대립적이다. Hershel Shanks(ed.), Ancient Israel: From Abraham to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 Washington: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1999), 김유기 옮김, 「고대 이스라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5), 337. 최대주의와 최소주의로 나누어지는데(위 책 제7장[Lee I. Levine 저술 및 개정] 미주 7-8번 참조), 이들 의 견해를 보기 위해서는 다음 문헌들을 보라.

최대주의: Elias J. Bickerman, From Ezra to the Last of the Maccabees (New York: Schocken, 1962); idem, The God of the Maccabees (Leiden: Brill, 1979); Martin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2 vols. (Philadelphia: Fortress, 1974); John J. Collins, “Jewish Apocalyptic Against Its Hellenistic Near Eastern Environment,” BASOR 220(1975), 27-36.

최소주의: Victor Tcherikover, Hellenistic Civilization and the Jews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59), 152-174; Fergus Millar, “The Background to the Maccabean Revolution: Reflections on Martin Hengel's ‘Judaism and Hellenism’,” JJS 29(1978), 1-21; Samuel Sandmel, “Hellenism and Judaism,” in Stanley Wagner and Allen Breck(eds.), Great Confrontations in Jewish History (Denver: Center for Jewish Studies, University of Denver, 1977), 21-38; Paul Hanson, “Jewish Apocalyptic Against Its Near Eastern Environment,” RB 78(1971), 31-58.

31) 생크스, 「고대 이스라엘」, 339.

전도서 편찬자는 헬라식 교육이 불가피하게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스며드는 새 사상을 자신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결합시켜 ‘새로운 지혜(new wisdom)’를 만들어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32) 그 결과 전도서는 예루살렘 성전 부속학교에서 가르칠 교과서로 편찬되었으며, 교과서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지혜에 관한 여러 잠언으로 유명하고 성전 봉헌 때 많은 백성들을 불러 모았던 솔로몬을 저자로 한 표제어를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러한 전도서의 편찬과 전도서의 정경화 과정에는 중용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권도’가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수(固守)’와 ‘개방(開放)’이라는 두 극단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전도서는 너무 지나치거나(過) 치우치지 않고(不偏), 새로운 시대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꼭 알맞은(the intermediate relatively to the Israelites)’ 신 앙과 삶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편찬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서는 기존의 선험적이고 규범적인 정통신학의 세계관과 경험적이고 실제적이며 범세계적인(cosmopolitan) 세계관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권도를 발휘하여 양자를 포괄하면서 태극지도(太極之道)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12:13)이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33)

32) 반면, 주전 2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저술되었던 벤 시라는 이런 유형의 사고방식에 대해 응답 하기 위해 『작은 전도서(little Ecclesiastes』라 불리는 책을 저술했는데, 전통적 가치와 사고, 제도에 대한 충성을 강조되어 있다. 희년서(Book of Jublees) 역시 할례(15:23-24)와 안식일 (2:17-33)과 같은 기본적인 계명을 지지하는 논쟁을 담고 있다. 생크스, 『고대 이스라엘』, 337 참조.

33)전도서의 저자는 전통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들(orthodox segments) 속에 자신의 신학 적 신념을 담고 있는 본문들을 적절히 삽입하여 정경적 문서가 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Joseph Blenkinsopp, Wisdom and Law in the Old Testa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71.

이것이 전도서가 제시하는 대본(大本)이다.

90CE년경에 얌니아(Jamnia)에서 진행된 성문서의 정경화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존의 전통신학과 배치되는 듯한 내용과 톤(tone)을 담고 있는 일종의 신흥문서로 간주될 수 있는 전도서가 배척되지 않고 정경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점을 찾으려는 권도의식(權道意識)이 작용한 탓으로 해석 할 수 있다.

4. 중용의 빛 아래서 본 전 7:15-18절의 의미

전도서의 독자는 7장 15-18절에 이르러 심각한 고민과 의문에 빠지게 된다.

기존의 신학적 통념과 다르고 성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듯한 내용 때문이다.

15-18절은 22절까지 이어지는 ‘지혜와 의의 한계’에 대해 말하는 구절(pericope)의 내부본문(subsection)이다. 본문의 저자는 앞 서 언급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문제(7:4-12)를 15-22절의 ‘의와 불의’에 대한 견해와 연결시키고 있다.34)

앞의 본문에서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상태와 처신을 비교한 후 12절에서 결론적으로 지혜의 효능으로 ‘지혜가 사람의 목숨을 살려준다’고 천명하였는데, 15-22 절에 이르러서는 간접적으로 지혜의 효능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 하고 있다.35)

34) Krüger, Qoheleth, 139.

35) ‘지혜의 한계’ 모티프는 1장 16-18절에서 먼저 제시되어 있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위 해서는 차준희, “전도서 1장의 신학적 읽기,” 「성령과 신학」제25호(2009), 24-27을 보라.

‘지혜가 사람의 목숨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 즉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과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을 보았다(15절)는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지혜의 제한적 효능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이런 자기모순적인 진술을 하는 것일까?

4-12절 의 내용은 다분히 규범적이고 원칙적인 내용인 반면 15-22절의 내용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저자는 원칙과 경험 사이에 내재하는 모순적 괴리의 원인을 인생의 ‘헛됨(lb,h,, 헤벨)’에 돌리고 있다.

‘헛됨’에 대한 저자의 경험은 세상사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에 모순과 괴리가 생기는 것이고, 또한 모순과 괴리가 있기 때문에 세상사가 헛되다는 두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36)

크뤼거(Krüger)는 15절에 제기되는 문제, 즉 의인의 단명(短命)과 악인과 장수(長壽)의 문제를 셋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

첫째 의로운 상태로 (in righteousness) 단명하고 악한 상태로(in evil) 장수하는 경우,

둘째 의로움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단명하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경우,

셋째 의롭기 때문에(because of) 단명하고, 악하기 때문에 장수하는 경우로 정리하고 있다.37)

크뤼거는 이것을 ‘예외(exception)’의 문제로 이해한다.

그의 견해를 따를 경우 예외란 뜻 그대로 예외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일반화하거나 보편적인 경험법칙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경험적으로 발견한 예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니 그렇게 전복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페리(Perry)는 15절은 공적 지혜(official wisdom) 에 반하는 관찰과 경험을 담은 3장 16절(“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 았는데,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할 곳에 악이 있다.”)로 돌아가 잠언 16장 31절에 표현되어 교리(의로운 삶에 대한 약속된 장수)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38) 이 교리는 다분히 신명기법적 이므로 공적 지혜에 대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크렌쇼(Crenshaw)는 전도서가 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을 용인하고, 저항을 최소화 하는 “일종의 중도(a sort of middle way)”를 승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39)

36) ‘lbh’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D.B. Miller, “Qohelet's Symbolic Use of lbh,” JBL 117(1998), 437-54; idem, “lbh and Qoheleth’s Narrated Life,” in E.S. Christianson, A Time to Tell Narrative Strategies in Ecclesiastes (JSOTSup, 280;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8), 79-91; D.C. Fredericks, Coping with Transience Ecclesiastes on Brevity in Life (Sheffied: JSOT Press, 1993), 11-32를 보라.

37) Krüger, Qoheleth, 140.

38) T.A. Perry, Dialogues with Kohelet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3), 127.

39) James L. Crenshaw, Old Testament Wisdom (London: SCM Press, 1981), 131.

16-18절은 15절에서 말한 모순과 역설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너무 지혜롭게도 살지 말고, 너무 악하고 어리석게도 살지 말고(16-17), 하나를 붙잡되 다른 하나를 놓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양극단을 피한다(18절). 여기서 너무 의롭게도 너무 지혜롭게도 살지 말라는 16절의 권고의 의미에 대해 화이브레이(Whybray)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와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것(pretensions to wisdom)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40) 크뤼거는 “과장된 의와 지혜(exaggerated righteousness and wisdom)”를 피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가 하면, 바톤(Barton)은 당시 핫시딤들의 과도한 율법준수에 대한 비난(reproof)을 반영한 탓으로 본다. 그래서 그는 “과도하게(excessively)”에 주목한다.41) 17절은 16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8 절은 결론적인 해법 제시를 담고 있고 있는데, 양극단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고 강조 한다(18b). 크뤼거는 이 구절의 의미를 최상의 유용성(greatest usefulness)을 약속하는 순간의 상황에 맞추어 의롭되 때때로 의롭지 않게 또는 지혜롭되 때때로 어리석게 행동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42)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 철학의 영향 하에 ‘중용(golden mean/moderation)’ 사상이 일반화되었고,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43)와 전도서는 알렉산더 시대의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중용사상은 여러 지역에서 인간이 추구한 보편적인 현상일 뿐이라는 견해가 있다.44)

40) R.N. Whybray, “Qoheleth the Immoralist? (Qoh. 7:16-17),” in John G. Gammie et al (eds.), Israelite Wisdom: Theological and Literary Essays in Honor Samuel Terrien (SBLHS 3; Missoula, Mont.: Scholars Press, 1978), 191-204.

41) George Aaron Barton, The Book of Ecclesiastes (Edinburgh: T. & T. Clark, 1971), 143-144. 42) Krüger, Qoheleth, 141.

43) W. Brindle, “Righteousness and Wickedness in Ecclesiastes 7:15-18,” AUSS 23 (1985), 243-257.

44) John H. Choi, “The Doctrine of the Golden Mean in Qoh 7,15-18: A Universal Human Pursuit,” Biblica 83 (2002), 354-374.

이제 관점을 달리 하여 앞에서 살펴본 유학의 중용사상의 틀 안에서 본문이 제시하는 중용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본문 역시 중용사상에서 처럼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의로움과 불의라는 두 극단(兩端)을 제시하고 있 다.45)

그러나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본문에서는 긍정항(지혜, 의로움) 이 부정항(단명, 파멸)으로, 부정항(불의. 어리석음)이 긍정항(장수)으로 교차된다.

이 역설적 교차를 풀기 위해 ‘하나를 잡고 다른 하나를 놓지 말 며, 두 극단을 피하라(벗어나라)’고 권고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지혜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 문학에서 빈번히 관찰되 는 교차구조를 보게 된다. 이러한 교차적 구조는 중용사상에도 내재되어 있다. 먼저, “너무(hBer.h; 하르베) ~하지 말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무과(無 過)’의 교훈, 다시 말해, 과유불급(過猶不及)을 읽을 수 있다. ‘지나치면/ 너무 ~하면(過猶) ~(좋은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不及)’는 것은 긍정항이 부정항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극단을 피하라, 문자적으로는 ‘벗어날(나갈) 것이다(aceyE 에 쩨)’이다.46)

45) 전도서에 나타난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두 사상적 축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구자용, “메멘 토 모리(Memento Mori), 카르페 디엠(Carpe Diem)!,” 「구약논단」제43집(2012), 82-104을 보라.

46) aceyE를 ‘바로 행동하다/위무를 수행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을 하는 학자들을 위해서는 차준희, “전통적 자혜에 대한 비판적 성찰: 전도서 7장의 주석과 신학적 메시지,” 「구약논단」제42집(2011), 57-83(63, 각주 22)을 보라.

중용에서는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不偏), 기대지도 말고 (不倚), 가운데를 붙잡아라(執中)라고 가르친다. 피하거나 나가버리는 것은 적극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소극적인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전적 의미를 떠나 ‘aceyE(에쩨)’를 ‘집중(執中)’의 의미로 읽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사전적 의미로만 읽을 경우 본문에서 진정한 의미의 중용사상은 드러나지 않는다. 양극단의 중간을 취함에 있어서 단순히 중립적 지대(middle zone) 에 서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권도를 발휘하는 중용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素位)에 굳게 서서 바르게 행동하는(正行)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8b절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 경외사상은 중용에 대한 해석에서 다산 정약용이 제시한 ‘신독(愼獨)’의 의미로 읽어도 그 의미가 손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외자의 경외자세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신독’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도 적 용되며,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에 진지함의 외연이 훨씬 넓어진다고 할 수 있다.

5. 결어

모든 비교연구는 최대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

차이점를 최대화 하거나 반대로 유사점을 최대화 하여 그 ‘최대화’에서 분명한 의미를 찾으려는 유혹이 그것이다. 이 최대화의 유혹을 배제하고, 적절한 비교를 통해 의미 있는 차이와 유사점을 추출해낼 때 비교연구의 의미는 담보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도서는 「주역」에 비유될 만큼 변 화와 사고의 유연성을 요구하는 책이다.

전도서가 그런 성격을 띠게 된 주된 원인 중의 하나는 기존의 신학적 패러다임만으로는 현상과 현실의 진 리를 제대로 포착하고 설명할 수 없는 변화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산출되 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선험적이고 규범적인 정통신학으로는 더 이상 새 로운 시대의 요구를 충분히 수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도서의 편저자는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신학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지혜’를 수립하여 두 축을 가지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흔적이 전도서에는 여러 군데 산재하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7장 15-18절에 제시된 양극단의 조화이다.

전도서가 제시하는 극단의 조화가 유학의 합일지도(合一之道)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택일을 지양하려는 정신의 발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중용’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의미의 영역을 새롭게 할 소지가 있다. 특별히, ‘집기양단’과 ‘소위이행’을 전도서 본문에 적용할 경우 아마 전도서가 의도했으나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던 역동적 합일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 을 것이다.

이 역동적 합일은 중용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는 ‘권도’에 의해 강화된다. 또한 그간 성서학을 주도해왔던 서구 학자들이 보여준 해석의 한계를 보완적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전도서 연구와 관련하여 「중용」이 제 시하는 다양한 내용들과 「주역」이 보여주는 세상과 인간 삶의 역동성을 연결하는 연구는 계속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검색어: 중용, 집기양단, 소위이행, 코헬렛, 새로운 지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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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Qoheleth’s ‘New Wisdom’ Viewed Through a Lens of ‘Zhongyong’

Myung Soo Suh, Ph.D. Professor, Department of Theology, Hyupsung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ad Ecc.7:15-18 which suggests a kind of new wisdom through a lens of Confucian classics, ‘Zhongyong(中庸)’. According to the passages, the wise man should not be too righteous because there is a righteous man who perishes in his righteousness. Rather there is a wicked man who prolongs his life in his wickedness. So he who fears God shall be quit in regard to both. Qoheleth here takes issue with two orthodox doctrines, that is, (1) the righteous have a long life(Ex.20:12; Dt.4:40; Ps.91:16; Pr.3:2,16; 4:10), and (2) the wicked shall not live out half their days(Ps.37:10; 55:23; 58:3-9; 73:18). Why does the author suggest the paradoxical solution as a new wisdom? At a first glance, it seems to collide with Deuteronomic instructions which insist a firm choice. The author's new wisdom as uselessness of going to extreme seemed to derive from social situation that the orthodox theology could not comprise the complexity of the world and life. So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book of Ecclesiastes was written and compiled in Jerusalem under Ptolemic rule with the purpose of teaching young men. In thinking of life the author surely based on the experiential and empirical knowledges. The author's experiential knowledges tell his audiences that life is so contradictory, ironic and paradoxical. For this reason the author pays attention to the way of moderation/mean/ equilibrium for the better safe life. With regard to moderation/mean/ equilibrium as a new way of conduct it is valuable to read the text through a lens of ‘Zhongyong’ which is junzi(君子)’ ideal way of behavior. The way of ‘Zhongyong’ consists of two attitudes of life such as (1) firmly harmonizing of the extremes(執其兩端) and doing on the basis of ones' own position(素位而行). Especially the former has been explained in comparison to scaling. In direct ratio with weight of something, a weight have to be moved for measuring. It is called ‘kwondo(權道)’ in Confucian term. In conclusion, ‘Zhongyong’ is a way of action which avoids going to the extremes. It desires not too much nor too little(過猶不及). This idea corresponds to the new wisdom of the text(Ecc.7:15-18). Where comes from the principle of the Golden Mean? The author of ‘Zhongyong’ said that it comes from the Sincerity(誠) in self which corresponds to the Heavenly Way(天道). The Sincerity(誠) is similar to ‘the fear of God’ in Hebrew thought.

Keywords Zhongyong Harmonizing of Extremes Doing Based on Ones’ Own Position Qoheleth New Wisdom

■ 투고일: 2013년 1월 01일 ■ 심사일: 2013년 1월 30일 ■ 게제 확정일: 2013년 2월 08일

구약논단 제 19권 1호(통권 47집) 2013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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