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완전한 체계적 통일을 추구하는 이념이 이성의 자연적 본성이라고 주창한 칸트와 오직 체계 속에서만 진리는 구체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 헤겔 양자는 독일 근대 관념론의 시작과 완성을 가 리키는 대표적인 이성주의 철학자들이다. 선험론적 철학을 정초시킨 칸트는 철학 인식의 체계를 철학자체로 정의했으며, 인간 이성은 건축술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했다.
그럼에도 인간 의 지식 욕구와 탐구는 가상과 착오를 일으켜 이율배반에 끊임없이 스스로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성 역시 감성에 영향을 받아 주관적 원칙들을 객관적 필연성으로 둔갑시키는 환상에 사 로잡혀, 자신의 능력을 이성의 법정 앞에 세워져 자기비판과 검증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 로 인해 이성은 결국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할 보편타당한 그의 권리조차 침해받는 시련에 봉착했 다.
이와 같은 이성비판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헤겔은 인간의 이성이 공허한 추상적 형식에 매몰 되어 정신의 풍요로운 자기운동과 생성과정이 상실된 비현실적인 지식으로 추락하거나 오랜 정신 사적 노고의 과정이 결여된 미숙한 사견으로 끝나는 헛된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만 일 인간의 이성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시키고 훈육되어야 할 만큼 그의 권리와 정당성을 무제한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면, 이성의 사용과 목적은 자신의 능력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는데 있 지 않고 그에게 부착된 환상들을 제거하거나 방지하는 일에 몰두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성이 본성은 학문의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의 통일성을 목표로 정신의 자기도야에 기초해서 쌓아올려야 할 정신의 왕국을 건설하거나, 혹은 자기분열과 내적 모순을 껴안으면서 점진적인 발 전 단계로 도약하는 유기적 전체의 원환운동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확실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러한 불안정한 이성의 위기 속에서도 그의 절대적 권위에 의문의 여지없이 복종해야 만 하는가? 더 나아가 이성뿐만 아니라 지성과 감성 역시 그 자체로는 착오와 오류를 가질 수 없 다는 칸트의 주장은 오늘 우리에게 자명한 역사적 경험의 사실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18세기 초기부터 시작하여 유럽의 정신사적 전환기에 이르러 부딪힌 철학 의 위기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징조이자, 당시 근대 유럽사회와 정신문화의 기초를 흔 드는 심각한 도전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계몽주의 이래로 이성은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대 중에게서도 유일한 진리기준으로서 최고의 권위와 권세를 누렸다. 하지만 독일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러 더 정확히 말하자면, 1781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판이 나온 시기부터 1794년 피히테 의 『전체 학문론의 기초』가 출간된 시기 사이에‘이성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기독교 신앙 에 기초한 신앙주의 사상가인 야코비에 의해 제기되었고,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이성주의 역시 경험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퇴조를 거듭하여 고전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 자신의 위상을 철학을 비롯하여 기독교 신학 안에서도 견지할 수 없을 만큼 몰락해갔다.
한편으로 우리의 정신문화는 4차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 과학기술의 커다란 변화 가운데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과학 시대의 명암이 극명하게 갈린 현대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두 가지 지적 사건이 독일 근대 후기에 일어났다. 바로 야코비-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과 이로부터 비롯된 이성의 권위와 형이상학 이념들의 인식문제, 그리고 그 이후에 뒤따른 철학과 과학의 유물론 논쟁이다.
근대 후기 범신론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스피노자주의와 사변철학이 자연과학과 함께 무신론과 회의주의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야코비의 신앙적 우려로부터 시작했지만, 그 배후에는 고전적인 형이상학 체계와 이성의 권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지적 위기상황에서 멘델스존은 자신의 인식론을 통해 형이상학과 이성의 권위 복원을 시도했지만 직관과 개념의 구별, 사물자체 개념에 대한 칸트의 인식론 문제를 해결하는데 많은 논쟁과 어려움을 겪었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 이성의 권위와 정당성을 확립하길 원했던 철학의 인식론적 탐구는 근대 후기에 들어서서 점차 치열해졌고, 과학과 철학의 유물론 논쟁에 이르러 타협 없는 대결로 정점에 이르렀다.
따라서 근대 후기 유물론 논쟁은 단순히 서구 유럽의 세속화와 종교비판에 뒤따른 결과로만 파악될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과 사회 정치적 믿음들을 정당화했던 형이상학적 이념을 과학을 통해 부정되는 이성의 월권에 관한 논쟁이며 이성의 궁극적 목적과 인식 한계에 대한 자연과학과 철학의 세계관 충돌 문제로 집약된다.
무엇보다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은 근대 철학 주제로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이성의 신임과 정당성에 관한 형이상학의 세계관 문제로서 유물론 논쟁사의 시원이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본 연구는 우선적으로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과 연관하여 야코비의 철학사상과 종교이해와 더불어 근대 이성주의 위기의 역사적 배경과 이해관계들, 그리고 그 논쟁의 핵심 내용들을 고찰하여 스피노자주의에 관한 철학-종교논쟁이 어떻게 근대철학의 이성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또한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도전과 경종을 울렸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과 이성의 위기
1. 하인리히 야코비의 감정철학과 이성비판
신앙의 철학자인 하인리히 야코비(Friedrich Heinrich Jacobi, 1743-1819)의 초기 저작에서 언급된 그의 감정철학에 대한 중요성은 우리의 감정이 이성능력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감정의 객관적이고 순수한 능력은 전적으로 초감성적인 영역에 관한 학설에서 가장 고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마음 안에 내재한 감정능력은 동물과 구별되는 그 어떤 특별한 다른 숭고한 능력들보다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며, 이성과 하나가 된 동일한 힘으로 간주된다.1
1F. H. Jacobi,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Ein Gespräch(1787),” Werke, Band 2. (Leipzig: Gerhard Fleischer, 1815), 61ff.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과 지성 그리고 이성을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 외적대상에 대한 인식능력의 원천을 설명했다.
일반적인 인식의 성립은 인식 대상이 먼저 감성을 통해 직관에게 주어지고, 이 감각적 직관을 지성이 사유함으로써 가능하다. 인식의 과정에서 직관이란 직접적(직각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어 감성으로부터 최초로 발생하는 인식을 말하며, 인식 일반 의 두 가지 독립된 원천은 감성과 지성이다. 감성에 의해 대상이 직관적으로 우리 마음에 주어진 다면, 지성은 이를 개념화하여 사유한다.2
다시 말해 감성은 인식의 대상들에 의해 마음에 촉발되 어 얻어지는 수용적 표상능력으로서 직관들을 제공한다(A19=B33). 이에 반하여 지성은 무엇보다 감성적 직관의 대상을 자발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으로 개념들을 산출하며(A51=B75) 감성적 직관에 게 주어진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결합하는 주관의 자기활동이자, 다양한 표상들을 통각의 통일 아 래 포섭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경험의 도움이 필요 없는 분석 판단과는 달리, 수학과 자연과학에 서는 술어 개념이 주어개념 속에 포함되지 않은 종합 판단, 즉 선험적 종합판단이 존재하고 있으 며, 지성 속에는 선험적인 인식의 형식과 능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A7=B11). 모든 경험과 감 각적 인상들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이 선험적 인식이라면, 선험적 종합판단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 성과 지성 모두에 각각 선험적인 형식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성의 선험적 형식을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의 경험적 직관형식을 부여했고, 지성의 선험적 인식형식을 열 두 개의 순수 지성개념들(범주들)로 구성했다. 여기서 지성이 자연의 질서와 법칙들을 발견하고 구성하는 능력이라면, 이성은 원리들을 통해 지성의 규칙들을 통일하는 상위능력으로 규정된다. 덧붙여 기 독교 신학과 연관하여 이성사용은 칸트의 관점에선 사변적인 이론영역에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할 뿐이며, 실천적인 영역의 도덕법칙에 있어서만 신학에서 이성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주창 했다.3
사변적 이성에 의한 신학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성능력은 본래 지성을 매개로 경험적 으로 사용되어야할 한계를 갖고 있으며, 이 경험적인 인식 또한 오직 초월적인 것이 아닌 현상에 만 국한된 대상인식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로 이성을 실천적 예지능력으로 사용하는 적합성 논의는 피히테에 이르러 더욱 첨예하게 진척되었고, 그는 자신의 학문론에서 자아의 자기 의식 행위인 실행(Tathandlung)개념을 통해 칸트가 해결하지 못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의 이원 론적 간극을 해소하고자했다.4
이를 통해 피히테는 자아(절대자아)의 실재성을 자기의식과 대상의 식 일반을 위한 필연적 전제이자 증명이 필요 없는 보편적 원리로 규정하여, 비자아인 객관적 세 계는 자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주관적 관념론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 안 에 정초한 자아의 자립성과 독립성, 그리고 자기의식의 무한한 정립행위는 그의 이론철학뿐만 아 니라 실천철학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철학적 사유 활동의 최종근거였다. 하지만 칸트의 이성종 교를 계승한 피히테의 도덕철학은 불행히도 1798년에 작성한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믿는 우리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문헌에서 신을 인격적 존재자가 아닌, "사물들의 살아 숨 쉬는, 작용하는 도 덕적 질서 자체"로 규정한 이유로 인해 무신론으로 의심을 받아, 결국 그는 예나대학의 철학 교수 직을 잃고 말았다.5
2.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Ph.B 505, Jens Timmermann, hrsg. von (Hamburg: Felix Meiner Verlag, 1998), A15=B29. 이하의 본문 각주는 1판을 A로, 2판을 B로 약칭한다.
3.I. Kant, Kritik der Urteilskraft(1790), Heiner F. Klemme, hrsg. von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09), A636=B664.
4.J. G. Fichte, Grundlage der gesammten Wissenschaftslehre(1794), Sämtliche Werke, Bd I, I.H. Fichte, hrsg. von (Berlin: Walter de Gruyter, 1971), 95f.
5.1799년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에 관해서는 H. Küng, Existiert Gott? Antwort auf die Gottesfrage der Neuzeit (München: Piper, 1978), 165ff.
18세기 후기의 사변적이고 윤리적인 관념론 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한 야코비는 감성 즉 감정능력은 이성능력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객관적 능력일 뿐만 아니라 이성은 감정에 의해 추동되고 하나로 결합된 능력으로 보아 감정 우위의 철학을 고수했다. 우리의 감정과 감성은 한낱 감각적 소재들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의 내적 작용기관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은 야코비의 주목할 만한 사상적 공헌이다. 즉 외부세계의 감각 소재들이 우리의 지각을 통해 지성에게 전달되듯이, 이성은 감정을 통해 판단능력을 얻게 된다고 야코비는 주장한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종적 차이와 구분은 감정능력의 소유여하에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감정 없이는 이성능력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고 피력한 것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감정은 이성과는 달리, 주변 환경과 사물의 사태에 따라 변화무쌍한 신뢰할 수 없는 마음의 근본요소로서 오랜 시기동안 플라톤 철학이래로 그 능력과 가치를 평가 절하해왔다. 특히 칸트를 시작으로 피히테를 비롯한 독일 관념론 철학이 이성우위의 철학체계를 확립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서구철학의 전통적인 이성주의를 대체하는 감정철학을 주창한 야코비에 의하면, 우리 의지의 자유, 윤리적 덕들, 신인식과 같은 초감성적 영역에 속하는 개념들은 내적 감정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직관되고 인식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감정의 수동성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감정능력이 도덕성과 예술 분야를 포함에서 어떻게 종교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그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신앙생활을 통해서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인간 마음작용의 기초요소인 감정 없이는 지성과 이성의 개념정립과 판단작용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지성을 통한 이성의 판단작업에 있어서도 필연적으로 우리 감정은 개입되어 있으며, 이성과 함께 결합되어 상호작용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야코비는 영국 경험론을 대표하는 회의주의자인 흄과 반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의 감정철학에 영향을 받아, 근대 계몽주의에서 기획한 이성종교를 거부하고 초월적 계시신앙에 기초한 기독교적 실재주의를 주창한다.6
인식론적 관점에서 그가 제시한 실재주의란 선험론적 관념론과는 상반된 인식의 관점으로, 우리의 주관적 표상들로부터 독립된 인식대상들에 관한 지각을 인정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즉 우리 자신의 실재적 현존은 개별적 자아의 의식행위와 자기인식으로부터 기인하여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자들을 초월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의해 그 실존 의미와 구조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외부세계의 실재에 관한 존재여부가 우리의 표상에 의해서만 긍정되거나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실재론적 인식론의 핵심이라면, 이러한 실재주의는 선험적 자아가 아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계시 초월적 신앙을 통해서만 근거될 수밖에 없다고 야코비는 강력하게 호소한다. 1785년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을 촉발시킨 편지 서간문인 야코비의 『스피노자의 학설에 관하여』 제 2판(1789) 서문에서 그는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본성을 논하면서 자유로운 자기의식의 활동과 의지의 자유를 인간실존의 필연적 요소로 간주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능력이 추론과 삼단논법을 통해 우리에게 지성의 정신적 힘으로 표출된다 하더라도, 유한한 존재자의 지성은 직접적으로“최고 존재자의 지성에 대한 믿음이나 혹은 자연법칙의 영원한 근원자이고 입법자에 대한 믿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한 분 하나님이자 영이신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 지성적 능력의 본질을 종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7
6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야코비의 실재론적 인식론에 관한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J. Rohls, Philosophie und Theologie in Geschichte und Gegenwart (Tübingen: J.C.B. Mohr, 2002), 414f.
7H. Jacobi, “Über die Lehre des Spinaza in Briefen an den Herrn Moses Mendelssohn(1785),” 2.Aufl, Werke, Band 4-1 (Leipzig: Gerhard Fleischer, 1819), 32f.
그리고 이 신을 향한 믿음은 우리의 가슴 속에 "순수한 사랑의 능력"으로 전개됨으로써, 최고 이성존재자에 대한 경외심 이 일어나는 종교적 심정이 감정에서 발현되어 진다.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의 자아, 자신의 모든 외부세계와 우주 자체는 지성에 의해 정립된, 창조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 라고 그는 항변한다. "유한을 향한 방향은 감각적 충동이거나 욕망의 원리이다. 반면에 영원을 향 한 방향은 지성적 충동이자 순수한 사랑의 원리이다."8
야코비의 입장에서 참된 창조주이신 하나 님을 향한 지성적 추구와 사랑의 열망은 우리의 감각적인 세속적 욕망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목 적의식과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말한 순수한 사랑의 대상은 오직 한분 하나님뿐이다. 신 에 대한 믿음의 순종과 복종이 개인과 사회 체제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기에 종 교는 유약한 인간의 본성을 도와주고 지혜롭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간주된다.9
따라서 모 든 인식의 작용과 행동원리의 핵심요소는 믿음이어야 하며 초월자인 신을 향한 믿음으로부터 인 류의 정신문화와 사회체제 전반의 변화와 개선이 가능하다. 이러한 야코비의 신앙적 신념과 사상적 토대는 철학 일반과 그 정신의 역사에 대한 단호한 현실이해와 평가를 가져오게 된다. 그에게 살아 있는 철학, 국가와 대중의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 로 개선시킬 수 있는 실제적 해결방법은 사고방식과 지성, 이성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행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10
자신의 시대에 구체적인 경험과 역사의 내용을 담아내는 철학은 그 의 시대에 주어져 있는 생활방식을 결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는 원칙을 세우고 판단하며, 이를 검증하는 그의 역할에 있는 것 이 아니라, 그 이론들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 서 철학은 그의 시대가 봉착한 사회적 문제들을 진단하고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문제들을 해결할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낼 힘도 없다고 진단 한다.11
야코비는 비록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언급하는 이성이라는 것이 인류를 위해서 그 자체로 는 해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상하고 올바르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성의 능력 에서 나온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로 현실에 있어서는 죄를 저지르는 무지의 인식일 따름이라고 단 정한다.이와 함께 우리가 독일 근대 관념론에 대한 야코비의 입장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례가 있다. 이는 야코비가 1799년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이 일어난 해에 피히테 에게 보낸 세 통의 서간문일 것이다. 그 해 3월 3일자 편지에서 그는 피히테가 학문론에서 주창 한 자아정립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관념론이 유물론과 동일한 사유목적과 방식을 지녔다고 평가했다.12
사유의 힘에 관한 그의 철학은 시종일관 유아론에 머무르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 서 제시했던 사유에 근거한 실체개념과 주-객관 동일성 체계와 같은 철학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까닭에 야코비의 소견에 따라 요나 예언자의 목소리를 빌려 그의 철학의 결과를 예측한다면, 피히테의 학문론은 "전도된 스피노자주의"로서, 유물론과 일심동체가 된 사상으로 집 약된다.13
8Ibid., 34.
9Ibid., 240.
10Ibid., 234f.
11Ibid., 236ff.
12H. Jacobi, “Jacobi an Fichte(1799),” Werke, Band 3 (Leipzig: Gerhard Fleischer, 1816), 10f.
13Ibid., 12f.
그리고 야코비는 피히테에게 보낸 3월 21일자 장문의 편지에선, 그의 관념론이 회의주 의로 끝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격적 하나님의 표상 없이 신을 말한다면, 그러한 신은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관념적 유령일 뿐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에 비추어 야코비는 자아의 자기정립 행위에 관한 피히테의 철학원리와 도덕철학에서 제기된 논쟁의 종교적 견해를 이렇게 정리한다. “다시 한 번 저는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언급합니다. 신은 존재하고, 그분은 나의 바깥에 계시며, 살아 계신 분으로서, 자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거나, 아니면 자아가(내가) 신이다고 하는 양자택일의 사안입니다. 이 외에 제 3의 선택지는 없습니다.”14
인간이란 전혀 선험적인 존재일수 없으며 선험적으로 알 수도, 그리고 행동할 수도 없다는 인간학적 관점으로부터 그는 “경험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15
철학 일반은 이 지점에서 인간을 개선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이 땅에서 위를 향한 초월적인 종교적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충고한다. 결론적으로 야코비에게는 인간의 의식에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유물론과 관념론이 서로 상이한 두 가지 대립형식으로 사변적 체계로서 보여 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는 그럼에도 “하나의 쌍둥이 출생”으로 발견된다.16
14Ibid., 49.
15H. Jacobi, Über die Lehre des Spinaza, 231
16H. Jacobi, “Von den Göttlichen Dingen und ihrer Offenbarung(1811),” Werke, Band 3 (Leipzig: Gerhard Fleischer, 1816), 350.
이 같이 인간의 선험적 능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경험론에 토대한 야코비의 인식론 입장과 이성비판은 인간의 도야와 인격형성을 위한 철학과 이성의 역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철학 안에서도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 절에서는 19세기 초와 현재의 야코비 사상에 대한 상반된 해석과 평가를 확인하면서 멘델스존과의 범신론 논쟁사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야코비 사상에 관한 근현대 철학의 평가
경험론적 인식론과 기독교적 실재주의에 기초한 야코비의 사상은 철학사적 평가에서 극명하게 찬반논쟁이 일어날 만큼,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얻을 만큼의 객관적 이해와 보편적 평가를 도출하기가 현재에 와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반계몽주의를 기치로 이성중심의 관념론을 공격한 야코비의 철학이 한편으로 근대 관념론자들에게는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와 비판을 수반했기 때문이었고, 현재에 와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전통적 해석과 평가에 대한 수정과 재평가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코비를 향한 비판적 평가의 전형적인 역사적 범례는 헤겔이 1817년에 처음 출간했던 『철학 강요』 제 2판(1827) 서문에서 종교의 이성적 측면과 그 내용에 힘쓰지 않는, 즉 내실 없는 신앙 내용의 빈약함에 집중했던 인물로 야코비를 짧게 지적하면서 그의 스피노자학설의 서간문에 제시된 직접적 지에 기초한 신인식, 그 신앙의 빈약한 추상성과 무매개성을 §62에서 논증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처음 확인할 수 있다.17
17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30), Erster Teil, Werke 8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9), 28, 148ff. 18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Ⅲ, Werke 20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6), 316f.
또한 후기 『철학사 강의』에서도 헤겔은 야코비 철학을 평가하면서, 멘델스존과의 서신교환에서 언급된,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 라는 야코비 확신은 “청명한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과 같다”고 표현했다.18
이와 더불어 야코비 철학에 대한 비판의 대표적 사례로는, 1827년 뮌헨에서 말년의 셸링이 강연한 『근대 철학의 역사』를 들 수 있다. 서구 근대의 철학사를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피히테와 헤겔, 야코 비에 이르기까지 비평적으로 그들 철학의 핵심을 서술한 이 저서에서 셸링은 야코비 철학을 “신 지론(Theosophismus)”으로 주제화하여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과 직관을 통해 신을 신비적으로 논술한 사상으로 정의했다. 무엇보다 야코비는 철학을 무지의 학문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칸트와 피 히테의 관념론을 숙명론으로 비판하면서 그들 철학과 대립했음을 지적한다.19
이성주의를 넘어서 서 경험주의로 이행한 야코비의 학문적 시도는 초기 시절엔 계시를 중심으로 외적 역사를 서술하 면서 공허한 비역사적 유신론을 비판한 역사철학을 중심에 두었다면, 그의 후기에는 가장 공허하 고 단순한 이성주의에 집중함으로써 광적인 수준으로 기독교의 “신학적 이성주의” 노선으로 방향 지어 졌다고 셸링은 집약한다.20
한편으로는 자연주의 철학을 배제한 초자연주적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가 야코비의 전기시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주관적 감정에만 호소한 후기 시기는 전 적으로 신에 대한 경험적이고 직접적인 감정의 관계를 주창했다고 파악된다. 셸링은 야코비의 감 정철학과 신인식이 인격적인 경험의 관계로부터 규정되어 있어서 이성을 배제하는 무학문적 사태 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전후기 모든 그의 저작에서는 이성 개념 자체가 “비인격적인 것”으로 간 주되었기 때문이다. 이성 개념에 관한 전기와 후기에 나타난 야코비의 이해와 해석이 일관적이지 못하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은 그의 사상의 논지와 방향이 빈약함을 드러내는 실제적 근거가 된다. 초기 야코비는 이성을 지성개념과 대립하는 상이한 존재자로 구분하여 이성을 제약된 부동자로, 지성을 진보하고 활동하는 존재자로 규정했다. 그리하여 개념을 파악하는 지성은 건설적인 긍정자 로 이해되어 부정자인 이성을 자신 아래 종속시켰다. 그러나 이성을 배제한 그의 초기 입장은 후 기에 이르러서는 직접적인 앎을 이성에 부과하여 신에 대한 이성적 앎을 부정한다. 즉 신은 직접 적인 앎의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을 통해, 혹은 인식될 수 없다는 부정신학으로 선회되었다. 결국 후기 야코비는 이전에 견지했던, 이성을 배제한 반이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이성대신 감정으로 대 체한 비학문적 이성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신에 관한 직접적인 이성적 앎은 야코비에게 하 나의 맹목적인 앎으로 간주되어 무지의 앎으로 격하된다. 오로지 그에게 남는 유일한 참된 신인식 은 인격적으로 관계하고 인간적으로 경험하는 마음의 내적 영역에서 발견된다. 긍정철학을 주창한 후기 셸링의 관점에서 야코비의 감정 우위의 경험적 신인식을 평가한다면, 이성 없는 부정적 요소 들과 직접적인 경험의 토대 위에 세워진 모든 인식론과 철학은 매개하는 중간 항이 불필요한 직 접적인 앎에 경도되어 결국 구체적 내용이 없는 피상적 인식으로 끝나게 된다. 셸링은 이 같은 현실적이지 못한 철학의 종착점을 가리켜 “마지막에 가서는 필연적으로 정신적 쇠약으로 죽음에 이른다.”고 다소 암울하게 표현했다.21
19F. W. J. Schelling, “Zur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1827),” Ausgewählte Schriften, Band 4 (Frankfurt am Mein: Suhrkamp, 1984), 583.
20Ibid., 585f
21Ibid., 592.
또 한편으로 셸링은 야코비 사상의 배후에는 뿌리 깊은 반자연주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자 연과 그 세계 안에 있는 사물들 모두를 죽어있는, 비정신적인 존재자로 단순하게 파악했다고 평가 한다. 자연철학이 간과된 소박한 경험주의는 철학에 대한 무지를 환기시키며(철학의 학문적 범위 는 단적으로 포괄적이어야 한다는 셸링의 관점에서) 믿음과 앎을 상호 대립적 관계로 구상함으로 써 인간의 지식과 앎이 도달되는 목적지엔 무신론과 숙명론이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고 단정한다. 우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셸링의 개념적 이해를 통해 숙명론과 무신론의 용어를 의미론적으로 살펴본다면, 숙명론(Fatalismus)의 체계란 운명이라는 불명료한 개념에 의존하여 표현하는, 철저하게 맹목적인 예정을 통해 결정된 세계관이라면, 무신론은 주관이 자의적으로 반성하여 모든 행위와 실행에서 법칙과 필연성을 부정하는 비종교적 세계관으로 이해될 수 있다.22
이를 통해 우리는 믿음이 결부되어 있지 않는 이성적 앎의 종결지점이 숙명론과 무신론으로 끝난다는 야코비의 극단적 비판이 개념적으로 얼마만큼 불명확한지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야코비는 계시와 철학, 앎과 믿음의 관계적 양상을 무분별하게 이원론적으로 대립시켜 결코 통일될 수 없는 불협화음으로 간주했다면, 셸링의 관점에서 믿음은 본질적으로 매개적인 앎과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23
즉 앎은 믿음을 배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모든 관계들 안에서 믿음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셸링은 참된 믿음이 종교적인 영역 안에 있는 유일무이한 필연적 구성요소로서 국한되지 않고, 오히려 참된 철학에서도 본질적인 구성요소라고 첨언한다. 이처럼 셸링의 비판적 평가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유기체적 자연관을 부정하는 반자연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앎과 믿음을 경험적 관계 아래 정초하고, 이분법적인 대립 항으로 앎과 믿음을 설명한 야코비 철학의 배후에는 결정적으로 진리를 주관적인 느낌을 통해 계시로부터 얻고자 하는 “굶주린 지성적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며, 진리는 그에게 내용 없는 추상적 신비로 알려질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참된 학문의 자세와 노력이 결핍된 이들의 철학에서는 지와 믿음이 어떻게 조화되고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설명할 수도 없는데, 이는 역사 안에서 필연성과 자유라는 두 가지 요소가 어떻게 대립된 것이 아닌, 조화와 일치, 결합되어 있는지를 전혀 인식할 수도 없는 자들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보았다. 이로부터 얻은 셸링의 최종적 결론으로, 야코비는 무지의 학문을 신봉하는 신지학자, 곧 직접적인 감정적 경험을 통해 계시와 초월적 신에 열광한 무지한 신비주의자로 명명된다. 이 같은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성의 권위를 위협하고 모든 명료한 통찰과 지성에 대한 혐오를 대표하는 시대적 징표이자, 철학과 학문 일반을 대하는 태도 역시 적대적이라고 부언한다.24
헤겔 역시 1830년 『철학 강요』 3판 서문에서 근대철학의 관념론이 인간 스스로를 신으로 정립했다는 기독교계의 비난과 단죄에 대해 상세하게 논박했다. 그는 이 같은 인신공격에 가까운 저주와 비난을 일삼는 기독교 신앙인들이야말로 사실은 자기들만이 참된 신앙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오만을 갖고 성경에 나타난 진리 인식의 정신적 확대를 부정하는 이들이라고 혹평했다. 더 나아가 철학에 전념하지 않는 불청객들은 철학의 학문적 담론에 참여할 자격이 빈약한 자들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는 반면에,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깊은 사유를 지닌 참여자들은 오히려 홀로 있으면서도 바깥을 향해서는 더욱 잠잠한 이들이라고 헤겔은 지적했다.25
22F.W.J. Schelling, System des transzdendentalen Idealismus(1800), Ph.B. Band 254, Ruth-Eva Schulz, hrsg von (Hamburg: Felix Meiner, 1957), 270.
23F. W. J. Schelling, Zur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 598f.
24Ibid., 608.
25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38.
이러한 셸링의 날카로운 평가처럼, 근대 후기부터 대표적인 반계몽주의자로 낙인찍힌 야코비 철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현재까지 이어졌지만,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야코비 철학과 그의 사회 정치적 영향력에 관한 긍정적인 연구 작업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1987년에 출간한 『이성의 운명』으로 독일 근대철학연구사에 이름을 알린 바이저에 의해 야코비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 평가가 새롭게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야코비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알려진 대로, 전형적인 반이성주의를 표방한 반계몽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계몽주의자이이자 동시에 종 교적 신비주의자라는 양면성 모두를 지난 사상가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6
다시 말하면, 그의 이성 비판의 목소리는 이성 자체의 권위를 위협하거나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자기오용 과 월권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했기에, 인간의 경험과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성 능력의 확 장을 규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세기 말 근대 사상가들 중에 야코비 는 늘 계몽주의의 반대자로 신앙을 옹호한 철학자로서만 대중적으로 각인되었지만, 사실은 그가 얼마나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 그리고 만인 평등사상을 확고하게 지지했는지를 우리가 확인 한다면, 단순히 야코비를 종교적 정통주의를 옹호한 신앙적 사상가로 분류할 수 없다고 말한다.27
바이저의 해석에 의하면, 야코비의 이성비판은 이성 자체의 권위와 능력의 사용을 근본적으 로 문제시함으로써 종교적 신앙을 통해 계몽의 이상과 신념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 았으며, 오히려 이성의 힘에 관한 올바른 사용과 한계를 제시했기 때문에 야코비는 우리 인간에 의한 이성의 불합리한 남용과 과도한 오용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위험과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헌 신한 계몽주의자였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이 당시에 쉽게 빠졌던 그들의 치명적 오류는 바로 이성을 형식적 능력으로 간주하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실체로 가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멘델스존과 서신교환을 통해 논쟁했던 레싱의 범신론 비판도 그 사태의 이면을 명확하게 우리가 분석한다면, 야코비의 범신론 논쟁의 시발점은 이성의 진리탐구 정신을 훼손시키고자 비판했던 것 이 아니라, 대다수의 계몽주의자들이 이성 능력을 과도하게 확장하여 본래의 계몽주의 이상을 스 스로 저버렸다는 경각심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한다.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철학을 비롯하여 멘델 스존의 형이상학 역시 야코비에게는 경험의 현실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성의 과도한 확장 을 시도했다고 보여 졌기에, 그의 이성비판의 진정한 대상은 이성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비 판의 실질적인 대상과 중심 주제는 그들 철학자들의 사상적 토대인 형이상학이었다.28
이렇듯, 이 성은 인간과 자연의 경험영역을 초월할 그 어떤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야코비는 굳게 확신했 고, 사회와 정치적 권위는 종교적 계시와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는 이성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야코비는 1782년의 단편집인 『레싱이 말한 어떤 것』에서 일찍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 로 하나 되어 다양한 본능의 욕망들에 이끌리지 않고 정당한 법과 원칙에 따라 사회제도와 공동 체를 올바르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이성에 있다고 진단했다.29
이성이 없이는 참된 사회적 공동 체나 자유로운 법치사회가 형성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 사회적 관계의 근본구조와 제도 적 안정에서 이성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이러한 이성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참된 생명 이자 정신의 영혼,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들의 고리이며, 모든 참된 것들에 대한 영원한 불변의 원천이 되는 형상”이라고 정의했다.30
26F. C. Beiser, Enlightenment, Revolution, and Romanticism: The Genesis of Modern German Political Thought, 1790-1800 (Messachusetts: Havard University Press, 1992), 138-153. 한국어 번역은 프레더릭 바이저/심철민 역, 『계몽, 혁명, 낭만주의』 (서울: 도서출판 b, 2020), 244-272.
27Ibid., 139.
28Ibid., 148.
29F.H. Jacobi, "Etwas, das Lessing gesagt hat. Ein Commentar zu den Reisen der Päpste nebst Betrachungen von einem Dritten"(1782), Werke. Band 2, 341f.
30Ibid., 345.
말년에 이르러 야코비는 일관된 논조로 자신의 사상을 회고 한 『소책자들』에서 다음과 같이 이성의 힘을 긍정적으로 정식화했다.
이성은 정신의 의식이다. 이성을 잃는다면,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식,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실존, 인격을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인격성은 따라서 이성으로부터 존재하며, 이성은 인격성과 분리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선함을 검증하고 무엇이 그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자기를 먼저 돌아보지 않고 감정에 치우친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비이성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성을 갖고서 필연적으로 자유와 인격성의 의지를 결합하는 자는 자유로운 의식을 갖는 사람이 된다. 이성적 존재 자에게 의식되는 자유는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감각적인 욕망과 경향성에 저항하는 능력이 있는 곳에서 존재한다.31
31F. H. Jacobi, “Fliegende Blätter(1817),” Werke. Band 6 (Leipzig: Gerhard Fleischer, 1825), 170.
이러한 야코비의 이성에 대한 긍정적 이해들을 우리가 사려 깊게 고려한다면, 그리고 모든 독재적 전제정치를 거부하고 이성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이상을 신뢰했던 그의 정치적 신념들까지 고려한다면, 그의 이성비판에 대한 전통적인 부정적 평가들은 일정부분 관념론자들과의 일면적이고 상대적인 이념적 논쟁구도 속에서 일어난 현상적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도덕성의 원리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경험을 철저하게 배제한 칸트의 도덕철학의 입장과는 달리, 야코비는 인간의 행동을 일으키는 주요동기는 선험적 원리나 이성에 있지 않고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와 감정에 있다고 확신한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감정이 이성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흄의 경험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이성의 힘을 실체적 존재자가 아닌 형식적 구조로 간주했다. 야코비의 이성이해가 인식론적으로는 규제적 원리에 중심을 두었고, 실천적으로는 의지와 감정 아래 이성을 통제했지만, 그럼에도 이성이 사회적 질서와 법치국가 안에서의 시민생활의 규범적 원리로 긍정했다는 태도에서 이성의 권리문제와 사실문제를 명확하게 구별했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성의 사실문제에 있어서 야코비는 인간사회의 규범적 원리로서 이성의 힘을 긍정했지만, 이성의 권리문제, 즉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있어서 이성이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는 측면을 우리는 야코비의 이성비판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3. 범신론 논쟁과 이성주의의 위기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은 계몽주의 유대계 철학자로서 어린 시절엔 가정에서 유대교 탈무드 교육을 받았고, 열네 살에는 베를린에 소재한 탈무드학교에서 고전 라틴어, 프랑스어와 영어를 비롯하여 볼프와 라이프니츠 철학과 바움가르텐의 형이상학, 그리고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철학자인 존 로크의 저서들에 관심을 갖고 수학한 사상가였다.32
32A. Altmann, Moses Mendelssohn. A Biographical Study (Tuscaloosa: Alabama University Press, 1973), 15-25, 30f 참조.
1754년에는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가져온 계몽주의의 대표적 극작가인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레싱은 그의 희곡 『현자 나탄(1779)』에서 지혜로운 주인공을 멘델스존으로 묘사하여 ‘독일의 소크라테스’라는 호칭을 부여했을 만큼 동갑내기 두 사람의 관계는 진리추구와 전통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함께 공유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18세기 후기 독일 근대철학사에서 칸트의 이성비판과 더불어 사상적 전환기를 가져온 사건이 있다면 바로 1785년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에서 일어난 범신론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두 사람 이외에도 헤르더와 괴테, 하만, 토마스 비첸만과 칼 라인홀트 등 당대 유명한 사상가들이 연관되었고, 논쟁은 계몽주의의 핵심인 이성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위기를 가져온 사건으로 평가받았다.33
또한 칸트를 시작으로 피히테와 셸링, 그리고 헤겔 의 관념론은 무한자가 어떻게 유한자 안에서 포섭되고, 절대적 무한이 상대적 유한 안에 어떤 방 식으로 현존할 수 있고 통일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을 절실하게 모색했으며, 이들 철 학자들의 핵심과제였다. 더군다나 우리의 의식에 경험적으로 주어진 지식에 대한 문제, 즉 경험적 지식에 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우리가 어떤 권리로 그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그들 철학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무한과 유한의 분리할 수 없는 긴장관계를 어떻게 이성이 설정하고 우리가 이를 이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선험철학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인 우리의 경험에 대한 객관적 판단의 가능성과 정당성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스피노자 철학은 그들이 당대에 씨름했던 문제들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는 결정적인 사상이었다. 18세기 말에 스피노자주의가 부상하게 되었던 이유는 이성의 권위를 복권하고, 종교적으로는 성서의 역사비판 과 정교분리, 보편종교의 정당성을,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는 관용과 평등, 양심의 자유에 입각한 대의 민주주의 옹호에 대한 진보적 신념들을 스피노자 철학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 유로 사회와 정치,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한 반감과 사회개혁을 외쳤던 좌파적인 지식인 들과 철학자들에게 스피노자 철학은 계몽의 시대정신을 의미했다. 특히 스피노자 사상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반종교개혁적인 행태들인 성직자 엘리트주의와 종교적 권위주의의 재등장, 교리적 교조주의의 심화에 대한 사회적 저항의 상징이자 시대 비판의 정신적 무기가 되었다.34
그 에 반하여 스피노자 철학을 무신론이자 범신론으로 비판하고 저주한 당시의 사회 기득권층과 정 치적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과 저주가 그 철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이들 만 큼이나 거세게 일어났다는 반작용도 범신론 논쟁에서 뒤따른 사회 현상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 겠다. 흥미롭게도 1790년대의 근대 독일의 정치사상을 철학사적으로 조명한 바이저는 슐레겔과 노 발리스, 슐라이어마허와 같은, 반 계몽주의의 정신적 물결인 질풍노도의 낭만주의 사상가들이 어 떻게 진보적인 범신론의 전일성(하나이자 모두. hen kai pan) 이념을 사회 정치적으로 수용하고 대변했는지를 몇 가지 특성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기도 했다.35
33F. Beiser, The Fate of Reason. German Philosophy from Kant to Ficht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7), 44-91. 한국어 역은 프레더릭 바이저/이신철 역, 『이성의 운명』 (서울: 도서출판 b, 2018), 103-195.
34스피노자 철학의 시대사적 의미와 철학적 영향에 관해서는, F. Beiser, The Fate of Reason. German Philosophy from Kant to Fichte, 48-61 참조.
35F. C. Beiser, Enlightenment, Revolution, and Romanticism, 242f.
범신론은 무엇보다 사회구조와 형태에서 파생된 불가피한 신분차별을 타파하는 평등주의를 주창하여 신 앞에서 만인 평등주의를 대변했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사회와 정치의 위계질서와 피라미드식 서열화는 성서의 창조질서와 섭리신앙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두 번째로 범신론의 사회적 의미는 특정 민족의 국수주의 와 당파적 엘리트주의를 극복하는 세계주의와 보편주의 이상을 함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범신론은 소수의 종교적 성직주의를 무너트리고 성직자 없는 교회 구성원의 평등한 질서체제와 모든 이들 이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하고 만날 수 있다는 보편적 교회의 위상을 제시했다.
세 번째의 사회적 영향으로 범신론은 인문주의로서, 전통적인 종교적 죄 개념을 구시대적 정신으로 부정함으로써 마 음속에 신이 있다고 믿는 이들 모두는 자신의 본성의 모든 부분들이 교회될 가치가 있으며 그들 의 육체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으로 교화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 네 번째, 범신론의 사회적 의미로는 모든 정치적 왕권체제와 그 형식들에 대한 비판적 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전제 군주제와 같은 모든 정치적 독단주의 형태들은 성서에 기초한 정치형식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러한 네 가지 범신론이 함의한 사회 정치적 의미들은 근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전형적인 정치적 신조이며, 이들은 이 같은 범신론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이상과 신념들을 철학적으로 이념적 학문의 모델인 형이상학으로 체계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야코비는 1785년에 멘델스존과의 개인적 서신들을 당사자의 양해 없이 출간한 『스피노자의 학설에 관한 서한』을 통해 당시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문학과 학술계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이자 범신론을 지지했다는 폭로를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범신론 논쟁은 촉발되었다. 이 서간문에서 야코비는 1783년 여름인 7월 5일 볼펜뷔텔(Wolfenbüttel)에 거주했던 레싱의 집을 처음 방문하여 그와 나눴던 대화를 회고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주의처럼, 만물의 최초 시작과 최종 결말이 없는 원인자인 신을 정립하여 기독교에서 증언하는 인격적인 세계 창조주를 부정했다고 지적한다.36
스피노자의 신관에 반하여 야코비는 자신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세계의 이성적인 인격적 원인자"로 설명했다. 이 대화에서 그는 인격적인 이성적 창조주 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이야말로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임을 레싱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니까 야코비가 스스로 표현한 바대로, 그의 신앙관은 전적으로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할 만큼의, 생의 위험한 모험이자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에 기초한 전적인 헌신이었기에 그 어떤 다른 이질적 신앙의 교설과는 타협이나 조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런 야코비의 신앙에서 스피노자의 자연관과 세계이해, 그리고 성서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역사적 성서비판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배교이자 신에 대한 불경건한 모욕이고 신을 부정하는 불신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14년간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완성한 스피노자의 『에티카』(1677)는 신과 정신, 인간의 정서와 지성, 그리고 자유의 다섯 가지 철학 주제들에 관한 그의 사상을 집약한 대표적 저서였다. 주지하다시피, 스피노자는 이 저서의 첫 번째 주제에서 자기 원인자로서의 무한한 신을 유일한 실체개념으로 정의하면서, 그 실체의 두 가지 변양된 양태를 정신과 신체로 양분하여 구분지어 설명했다. 에키카의 첫째 주제인 신에 관한 정리 18에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적 속성을 가진 신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과는 달리, 인격적 개념으로 이해된 초월자가 아닌 내재적 원인자로서 비인격적인 우주적 차원의 신으로 정의되어37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켜 이로부터 무신론으로 의심되어 인신 공격적 비난을 받게 되었고, 정리 29에서는 스피노자가 신의 본성을 Natura Naturans(능산적 자연)인 실체와 Natura Naturata(소산적 자연)인 정신과 물질로 나누어 설명했지만38 이를 기독교에서는 범신론 즉 신은 바로 세계 자체라는 단순한 해석으로 동일시하여 종교적 비판의 주된 실마리를 제공했다.
36H. Jacobi, Über die Lehre des Spinaza, 56-8.
37B. Spinoza, Ehtik in geometrischer Odrnung dargestellt(1766), Sämtliche Werke. Band 2, Wolfgang Bartuschat, hrsg von (Hamburg: Felix Meiner Verlag, 2010), 49f.
38Ibid., 63-65. 에티카에서 다뤄진 신과 자연의 철학적 이해는 백훈승, 『서양근대철학』 (전주: 전북대학교 출 판부, 2017), 128-140를 참조하라.
그럼에도 이 논쟁의 당사자였던 스피노자의 범신론 비판을 객관적으로 논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적 신관을 통해 무한과 유한 사이의 양자 차이 안에 포함된 긴장된 일치와 통일을 자연주의에 기초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하고자 노력했다는 역사적 공헌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그의 신론은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전통 형이상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계승 발전시킨 그간의 오래된 종교적 신관을 벗어나 근대과학의 자 연관을 토대로 계획한 진일보한 과학적 사고방식의 전거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함 께 근대 서구 철학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영국 경험론의 원류가 된 프란시스 베이컨도 17세기 초 에 일부 종교인들의 무지와 비이성적인 열심 때문에 종교가 자연철학을 적으로 여겼고, 자연탐구 와 자연철학은 종교적 무지와 오해로 인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던 사실을 우리가 다 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39
한편으로는 범신론 논쟁에서 결정적으로 야코비는 스피노자의 정신 속에는 바로 "무로부터 는 아무것도 만들어 나오지 않는다(a nihilo nihil fit)" 는 사상에 근거하여 영원히 불변하는 내재 적 원인자만을 신으로 상정함으로써 기독교 창조신앙에서 말하는, 무에서 유로 산출되는 유출과 생성의 과정을 완전히 도외시했다고 지적한다. 이와 연관하여 레싱이 스피노자주의자로서 그의 신 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야코비의 단정적 판단에서, 레싱은 비록 독실한 이신론자지만, 사물의 원인 자를 믿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인 세계를 구별하지 않고 사물의 최초 원인자를 규명하지 않은 스피노자의 이념들은 결국 인간학적 관점에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숙명 론으로 귀결되며, 하나이자 전체라는 전일성에 기초하고 모든 현존하는 것의 현실성 배후에 근거 가 된 순수한 원리를 신이라고 주창함으로써 무신론이라는 단죄를 받은 범신론을 레싱이 공유하 고 있다고 야코비는 확신했던 것이다.40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야코비의 충격적 편지를 받은 멘델 스존은 절친한 친구인 레싱의 명예를 지키지 위해 1784년 8월 1일에 야코비의 판단에 대한 의구 심이 담긴 답장으로 화답했다. 즉 『야코비씨에게 보낸 기억들』이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멘델스존은 레싱이 때때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아주 낯선 이념들을 함께 엮어 주사위를 던지듯 역설적으로 언급하는 습관이 있다고 상기하면서, 그 같은 야코비의 확신이 우연적일 수 있다고 환기시켰다.41
39F. Bacon, The New Organon(1620), Lisa Yardine, Michael Siverthorne, edited b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74f.
40H. Jacobi, Über die Lehre des Spinaza, 89f.
41M. Mendelssohn, “Erinnerungen an Herrn Jacobi,” in: Über die Lehre des Spinaza, 115.
야코비에 의해 범신론 논쟁이 일어난 철학적 배경을 우리가 확인한다면, 이성에 대한 계몽 주의의 굳건한 신뢰가 어떻게 스피노자의 범신론 혐의를 통해 촉발되어 형이상학과 이성에 관한 회의주의와 비판이 18세기 후기에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멘델스존은 바로 야코비가 포문을 열었던 사변철학과 계몽주의 이성에 대한 비판에 항거한 형이 상학의 최후 수호자이자 칸트 이전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이상을 계승하고자 했던 근대 후기의 마 지막 이성주의자였다.
그에게 있어 형이상학은 명증적인 학문인 수학만큼이나 철학 안에서 고유한 학문적 지위와 역할을 가져야만 하는 순수분야이다.
개하고 논문을 마무리하겠 다.
4. 멘델스존의 형이상학과 범신론 해석
1755년 출간된 멘델스존의 처녀작인 『담화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중요성과 그의 사상에 대 한 최초의 변호였다. 다시 말해 이 저작은 스피노자를 정당하게 이해하고 그의 불명예를 회복시키 고자 한 용기 있는 시도였다.
총 네 편의 철학적 『담화들』은 가상의 대화 상대 네오필(Neophil)과 필로폰(Philopon)이 진행한 두 편의 담화와 칼리스텐(Kalisthen)과 누메시안(Numesian)의 두 편의 대화로 구성되었다.
특히 그는 첫 번째 담화에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 개념이 스피노자의 사유와 연장 개념과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가 실체의 독립된 속성들이라는 실체개념을 논증함으로써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42
이와 더불어 초기 멘델스존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저작은 칸트를 제치고 1763년 베를린 왕립 학술원의 최우수 현상논문으로 선정된 『형이상학적 학문들에서의 증명에 관한 논고』였다. 형이상학적 진리들이 수학의 증명과 같은 전제의 자명성과 근거의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논증한 현상논문은 진리의 시금석인 이성에 대한 멘델스존의 확고한 이념을 보여준 저술이었다. 수학이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이라는 보편적 공리에 의해 명제의 확실성을 증명하듯이, 형이상학적 명제들도 그러한 수학적 공리를 적용하여 참과 거짓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43
나아가 형이상학만이 유일하게 단순한 가능성에서부터 하나의 현실성으로 정립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보았다.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형이상학 논고에서 언급한 “신의 지성” 개념을 다시금 수용한 멘델스존은 모든 학문은 신의 지성 안에서 기하학적 증명의 명제들과 같이, 가능한 모든 진리들을 서로 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비록 우리의 유한한 지성에는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균열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모든 가능한 규정들을 결코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지만, 신의 무한한 지성은 실재하는 사물의 모든 가능한 규정들을 가장 명확하고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무한자에 관하여 인간적으로 무언가를 논한다면, 신의 현존을 선험적으로 증명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44
한편으로 이 저서를 통해 멘델스존은 시기적으로 칸트의『윤리형이상학의 정초』(1785)보다 앞서서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의지를 전제로 한, 도덕성의 선험적 원칙과 필연성을 논증하기도 했다.45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재정립한 멘델스존은 1767년에는 옥중에서 독약을 마시기 직전에 나눴던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의 대화를 회상한 담론집인 『파이돈』을 출간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는 모든 사물들과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의 원인을 탐구하는 지성과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진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멘델스존의 영혼 불멸성에 관한 증명을 반박했던 출처가 바로 이 담화의 두 번째 대화편이었다. 모든 아름다움과 훌륭함의 근원이자 원형인 이데아에 관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념을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상기한 멘델스존은 인간영혼의 단순성으로부터 어떻게 사멸할 수 없는 영혼의 불변성이 증명될 수 있는지를 밝히고자 했다.46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재구성한 그는 영혼의 본성과 인간의 고유한 사고능력인 지성이 사물의 완전성에 관한 우리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 간주함으로써 영혼의 표상능력을 실체적으로 증명가능하다고 확신한다.47
42M. Mendelssohn, “Gespräche,” in: Moses Mendelssohn's Schriften zur Philosophie, Aesthetik und Apologetik, Band 1, Moritz Brasch, hrsg von (Leipzig: Leopold Voss, 1880), 9-11.
43M. Mendelsshohn, Abhandlung über die Evidenz in Methaphysischen Wissenschaften (1763) in: Gesammelte Schriften. Jubiläumsausgabe. Bd. 2 (Stuttgart: Bad Cannstatt, 1983), 277f, 302. 44Ibid., 306f.
45Ibid., 317-23.
46M. Mendelsshohn, Phädon oder über die Unsterblichkeit der Seele (1763), 3. Aufl in: Gesammelte Schriften. Jubiläumsausgabe. Bd. 3/1, 96-99.
47Ibid., 91f.
이러한 멘델스존의 초기 문헌들을 우리가 살펴본다면, 그는 인간 영혼의 실체인 지성적 사고와 이성은 개념적 가능성을 실재적 현실성으로 이행할 수 있는 내재적 힘을 갖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신념을 증명하고자 노력했 다는 점이다.
고대철학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의 주요 과제는 바로 개념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즉 표상과 외부대상이 상호적으로 어 떻게 현실적으로 연관되고 일치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성의 실체와 능력을 증명하는데 있어 서 초기 멘델스존이 해결하길 원했던 철학의 필연적 과제였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저서로는, 멘델스존의 형이상학과 이성주의를 이해하기 위 한 중요한 후기문헌으로 1785년에 출간된 『아침시간 혹은 신의 현존에 관한 강의들』을 언급할 필 요가 있다. 멘델스존은 이 저술을 통해 이성의 권위를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다시 금 정리하면서, 칸트의 이성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줬고 그와 연관된 관 념론을 반박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논의의 중심에는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강단철학의 형이상학을 지키기 위해서,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인상들로부터 귀납적 추론들로 나아가는 사유방식이야말로 가 장 완전한 인식의 증명에 가깝다는 흄의 경험적 인식론을 역으로 그가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의 경험적 지각과 관련한 논리적 개연성은 관찰자의 서로 다른 주관적 인상들이 서로 일치하 면 할수록 더 높은 지각의 확실성이 존재한다는 논증에 달려있다고 보았다.48
이러한 사유의 반전 은 야코비가 회의주의자인 흄의 경험론에 의존하여 감정우위의 철학을 제시한 것처럼, 목적을 성 취하기 위해서라면 나와 반대되는 수단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불가피한 철학적 논증일수 있다. 연이어 멘델스존은 본문 6장과 7장에서는 관념론에 대한 그의 거침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이어간다. 그는 관념론자들이 표상과 실재하는 대상, 곧 정신적 실체와 감각적 물질의 근본적 차 이를 간과하고 동일시했기 때문에, 우리 외부에 실재하는 감각적 대상들에 관한 진리를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은“한낱 사기”일 뿐이라고 묘사한다.49
이 같이 관념론자들의 인식론을 비판한 멘델스 존은 칸트의 관념론을 회의주의로 이해했다. 역설적이지만 칸트야말로 도덕과 종교의 믿음을 정당 화할 수 있는 토대인 형이상학을 파괴시킨 장본인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사상에서 고전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계승하고 재정립하고자 했던 멘델스존은 이 후기저서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진리 에 관해서 어떻게 형이상학적으로 증명하여 확증할 수 있는가의 물음에 대해서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지성”을 통해 그 대답을 찾았다. 건전한 지성은 일상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이성의 형식과 유사한 힘을 지녔고 심리적 견해와 논리적 견해의 두 양자를 밀접하게 결합시켜 이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0
48M. Mendelssohn, Morgenstunden oder Vorlesungen über das Dasein Gottes (1785), in: Gesammelte Schriften. Jubiläumsausgabe. Bd. 3/2, 46f.
49Ibid., 50-57.
50Ibid., 34.
건전한 상식 혹은 지성과 이성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 지 성은 일상의 지각작용에 있어서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앞을 향해 전진하는 반면에, 이성은 자신의 지팡이에 맴돌면서 두려움을 갖고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내딛는 성격을 가졌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가 언급한 대중적으로 옳다는 건강한 상식과 지성이 특 정한 사태에서 이성과 충돌한다면,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의 딜레마에 봉착할 수 있 다. 이성의 주권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대중의 상식과 지성이 갖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우리가 얼 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가 그에 대한 믿음을 논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안임에는 틀림없기 때문 이다. 멘델스존은 아쉽게도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여 이성의 권리를 회복 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보여 진다. 1786년에 이미 이에 대한 비판적 논점이 토마스 비첸만(Thomas Wizemannn. 1759-87)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비첸만은 폐렴으로 27살의 나이로 단명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야코비와 절친한 우정을 나눈 친구였고,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가 그의 철학의 명민함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야코비와 멘델스존 철학의 결론들』에서 멘델스존 철학의 일관적이지 못하고 불확실한 이성주의 태도를 집중적으로 논증했다. 멘델스존은 이성만이 형이상학과 인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또 다른 편에서는 보통의 건전한 상식이 이성을 지도할 수 있다고 피력함으로써 이성의 권위에 관한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줬다는 것이다.51
비첸만에 의하면, 우리의 건전한 상식이 결코 이성의 권위위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상식은 일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모순된 생각으로 이끌며 사물들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52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의 범신론 문제를 상세하게 논증한 멘델스존은 『아침시간』 후반부 13장부터 15장에 걸쳐서 상세히 논증하면서, 레싱은 야코비가 단정적으로 고발한대로, 단순히 스피노자주의를 따르는 범신론자가 아니라 “순화된 범신론”의 범주에 소속된 지성인임을 독자들에게 설득한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논한다면, 레싱은 “무한한 지성” 개념만을 신의 실체에 부여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유와 연장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레싱은 스피노자와는 구별된 논지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했다고 변론하기도 했다. 멘델스존이 재해석한 논점에서 “무한자의 현존은 모든 유한자들의 현실성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다”53는 명제는 순화된 범신론자가 제시할 타당한 구호로 자신의 학설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일성 개념인 ‘모든 것은 하나이다.’라는 범신론자의 상징적 문구는 그 세부적 내용을 구체화하여 대중적 오해를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테면, “무한자는 자신 안에 전체를 품고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전체이고, 하나는 그럼에도 또한 동시에 전체이다”라는 문구로 정화시켜 우리가 이해한다면, 범신론에 따라다니는 악의적 비난을 해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가장 완전하고 최고의 현실성을 함유한 실재하는 신은 유한한 인간의 약함과 결핍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분은 이러한 인간적 한계를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이다.54
동시에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멘델스존은 스피노자의 철학체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55
51T. Wizenmann, Resultate der Jacobischen und Mendelssohnschen Philosophie (Leipzig: G.J. Göschen, 1786), 35f.
52Ibid., 133f. “Der gesunde Menschenverstand ist, wie die Phantasie, der rohe Stof, in welchem die vernunft die Regel der Ordnung bringen muss: sonst kann er blenden, aber nicht erst leuchten.” 53Ibid., 121.
54Ibid., 118.
55Ibid., 106-08 참조.
첫째, 스피노자는 무한자가 지닌 외적이고 내적인 크기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무한적”이라는 형용사를 가진 실체 개념은 그의 자립성을 위해 그 어떤 다른 존재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규정했지만, 그 단어 속에는 사실 많은 유한한 존재자들이 내적으로 함께 결합되어 구성되어 있음을 간과했다.
둘째로, 스피노자는 자립성과 대자적 존립성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설명하지 못했다. 자립적인 것(das Selbständige)과 그 자체로 자신을 위해 존립하는 것(das Fürsichbestehende)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한자만이 자립적 존재자라고 해도 그 안에는 자체적으로 존립하는 다른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체개념은 오직 전자의 자립성만을 가진 존재자로만 이해했다.
셋째로, 스피노자는 실체 개념에 있어서 질료적 진리와 형식적 진리의 차이 역시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실체를 사유와 연장의 속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 면서, 연장은 물질의 본질로서 운동하지 않는 반면에, 사유는 정신의 본질로서 여타의 인격적인 의지와 다양한 정서적 욕구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스피노자는 물질의 운동과 정신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추가적인 특징들, 예를 들어 의지나 판단등과 같은 지각작용의 요소들도 사 유와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멘델스존은 스피노자의 사상을 부적절한 사변철학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철학적 입장에서 스피노자는 결정적으로 무 한하고 완전한 신의 개념인 실체개념 속에 사물 자체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실질적으로 구별하지 않았기에, 절대자의 정신 속에 불안정하고 유한한 사물들을 그의 속성으로 부여했다고 해석한다.
Ⅲ. 나가는 말
이성과 신앙 사이의 오래된 서구 철학논쟁은 근대후기의 계몽주의 위기 시대에 범신론 논쟁 의 당사자인 야코비와 멘델스존 사이의 물러설 수 없는 싸움으로 재현되었다.
이는 학문의 자연스 런 진리탐구 정신이 당시의 엘리트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커다란 위협과 도전으로 여겨진 것 도 철학에 대한 오랜 학문적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즉 철학이 사회 질서와 도덕, 종교적 신념의 오랜 전통들과 가치들을 폄훼하고 파괴한다는 대중적 오해와 선입관은 일련의 기득권자들의 자기 방어 기제와 대중의 불안 심리가 결합되어 일어난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근 대 관념론의 유아론적 실재론과 함께 사회변혁에 대한 급진적인 열망을 스피노자의 철학에 의지 하여 그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철학자들은 야코비의 이성비판이라는 커다란 암초를 만나 험 난한 싸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 마지막 희생자가 바로 멘델스존이었다는 것도 당대로부터 전해 내 려온 역사적 사실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계몽의 이성주의와 철학 일반이 야코비가 경고한 것처 럼, 정말 사회 안에 허무주의와 무신론을 조장하는 위험한 독약이었는지를 판단하기에는 다방면적 해석들이 나올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그리고 근대 후기 의 자연과학자들에 의해 고전적 형이상학의 체계와 종교적 신념들이 거세게 부정되고, 현재까지 현대과학과 진화생물학자들을 통해 무신론이 대중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는 현실만큼은 인정하 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1785년 범신론 논쟁은 서구 정신사에서 시대적 전환점을 가져온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아직도 국내의 대다수 교회와 신학에서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가 대립하여 갈등을 빚고 있어서 이를 해소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남아있는 형국이다.
따라서 근대 후기를 지 나고 현대의 4차 산업혁명의 포스트휴머니즘 시대를 맞이한 우리는 그들이 해결하고자 했던 시대 사적 문제들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에 관한 학문적 대안들을 객관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학자로서 의 시대적 사명을 우리가 어떻게 올바르게 감당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으로 사 료된다.
분명 이성에는 이론적 사변과 실천적 의지력을 위한 행위를 추동하는 힘도 갖고 있지만, 종교적인 초월영역에서도 성서와 믿음만큼이나 이성의 힘은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불가 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언급한 비인격적인 우주적 차원의 신관도 한편으로 우리시대에 재평가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신학적 논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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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이상은(서울장신대)>
오래간만에 꼭 필요한 고전적인 주제를 다룬 잘 작성된 논문을 읽어보았다.
철학적 신학에 있어서 꼭 다루어야 할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논쟁은 계몽주의 시기 철학적 담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명되어왔다.
국내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 연구자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논쟁을 소개한 바 있다.
또한 레싱의 저술 ‘현자 나탄’에서 묘사된 인물이 사실은 멘델스존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계몽주의 문학을 다루는 문학계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철학계에서 이 논쟁이 다루어져왔던데 비해 신학계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다소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따지면 한국 신학계의 편식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의 시기 철학적 신학의 주제를 통해 이 부분의 조명을 시도한 것 하나만으로도 이정환 박사의 논문은 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문은 사상사적 흐름으로 볼 때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관점으로부터 촉발된 질문이 관념론의 논의를 거치면서 낭만주의에 미친 영향을 체계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훨씬 후에 괴테, 헤르더와 같은 낭만주의자들로부터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관념론적 철학의 흐름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이 담론으로부터 주어진 영향의 반열에서 신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관념철학적 구조에 빚을 진 가운데 신학을 전개하고 있는 입장에서 필수적으로 다루어야 할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 본 논문은 신학의 이해를 위해 필수가 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은 서론에서의 질문과 함께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과 이성의 위기를 살피는 가운데 전개해 나가고 있다.
바이저의 논의를 참조하는 가운데 야코비의 사상에 대한 일별을 시행하고 범신론 논쟁과 이성주의의 위기에 대해 다룬 후 멘델스존의 형이상학과 범신론 해석을 다루어나간다.
네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비판에 대해 정리해 나간다.
저자가 정확히 다루고 있는 바와 같이, 두 사람의 논쟁은 본래 스피노자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레싱에 대한 저술을 멘델스존이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야코비가 멘델스존에게 그가 말년에 스피노자주의자였다고 하는 사실을 전하면서 촉발된 것이 본 논쟁의 시작점이다.
야코비의 관점에서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무신론으로 이르기가 쉬워 보였다.
반면 저자도 인용하고 있는 멘델스존의 저술 ‘아침 혹은 신의 존재에 대한 강연’은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성과 믿음 사이의 균형을 강조하며, 레싱에 대해서도 재평가를 시행한다.
저자가 언급하는 바와 같이 멘델스존은 레싱을 단순한 스피노자가 아니라 그를 넘어선 지성인으로 평가했다.
저자가 다루는 이러한 논쟁의 배경을 볼 때, 한편으로 스피노자의 영향에 대해 재평가해보게 된다.
계몽주의의 시대에 스피노자가 던진 질문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러한 논쟁에서 핵심을 이루는 질문은 단순히 범신론이라고 하는 개념을 넘어서 저자가 다루는 것과 같이 세계관의 문제를 다루는 대답으로 이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좋은 주제, 잘 작성된 논문이다.
복잡할 수 있는 주제를 세밀하게 읽어나갔고, ‘아침’을 비롯한 일차자료에 대한 접근이 잘 수행되어 있다.
다만 흐름을 따라가면서 정리를 조금 더 자세히 해 보면 더 많은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저자가 질문하고 대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조금만 더 자세히 드러나 면 좋을 것 같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들의 범신론 논쟁을 다루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의 논쟁의 배경에 비추어 질문을 한다면, 이 논쟁은 당시 뉴턴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 폭발의 시기, 이신론의 주장이 유럽에서 제기되던 시기를 막 지나면서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났던 시기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도 암시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질문은 남는다.
신유물론, 심신평행이론 등의 논의를 경험하면서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형이상학과 유물론의 세계관의 갈등 을 경험하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적 세계관을 어떻게 유물론적 세계관 과 신앙을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계시와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 가.
동시에 논문의 구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보자.
저자는 서론을 통해 전체 방향에 대해 질문 을 제기하고 있다.
핵심적 질문은 이성의 권위에 대해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질문을 제기했던 야코비와 그와 논쟁을 벌이며 형이상학과 이성의 권위를 복원하고자 했던 멘델스존의 대화를 중 심으로 전개한다는 구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쟁은 근대 후기 이후 과학과 철학의 유 물론 논쟁의 대결로 이어졌으며,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은 이성의 신임과 정당성에 관한 형이상 학적 세계관의 문제로서 유물론 논쟁으로 이어졌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 의 논쟁을 이성과 신앙 사이의 논쟁으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하나의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기보다 이성도 중요하 며 신앙도 중요하며, 둘을 다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종합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저자는 멘델 스존의 범신론 논쟁과 근대의 이성주의 위기라고 하는 주제하에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하고 있다.
그런데 전개방식을 볼 때에는 야코비에 대해 한참 다룬 후 멘델스존의 범신론 논쟁에 대해서는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다.
약간은 소개의 차원에 집중된 것처럼 보이는 면도 있다.
저자가 내리고 자 하는 이성주의 위기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다음으로 전개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다룬 방식은 저자가 설명하는 방 식과 같이 배경설명, 문제제기, 역사의 흐름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는 방식과 더불어 칸트의 저 술 ‘사유의 오리엔테이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Was heißt: sich im Denken orientieren?)를 통해 살펴보는 입장들이 많았다.
일단 이 논쟁이 잘 알려지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칸트가 1786년, ‘사유의 오리엔테이션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면서이기도 했 고,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논쟁이 진행되던 가운데 멘델스존이 사망하면서 최종적인 대답은 칸트가 내리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연구들이 칸트의 저술을 중심으로 칸트가 멘 델스존을 어떻게 비판하면서 이성과 믿음을 종합하고자 했는가로 귀착되는 방식을 많이 취했던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대체로 바이저의 질문을 초점으로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전개의 흐름은 약간 달라져 보인다. 사실은 칸트가 내리는 대답의 방식은 나름대로 이성과 신앙을 종합하고자 시도하는 방식이고 그 자체가 계몽주의 시기에 종합화된 대답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칸트가 보기에 결국 이 문제는 주관주의적 방식에 따라 해결될 수 있는 것이고, 이들의 방식, 특히 멘델스존은 상식이라는 말과 함께 다소 과감하게 객관적 방식을 추구했던데서 한계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전반적으로 칸트의 철학과 그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그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서술하고, 논쟁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취하고자 하는 방향과 칸트의 방향은 어쩌면 같은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과 더불어 스피노자부터 레싱을 거쳐 관념론으로 이르는 계보를 파악해 나가는 저자에게, 낭만주의 철학과 신학으로 이어지는 범신론적 논의의 기여는 무엇인지 간단히 정리해 줄 수 있는지 한번 청하고 싶다.
사실 우리 신학계에서는 막연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이지만 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 길잡이가 필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주제,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 철학적 신학의 주제를 잘 연결하여 신학적 논의에 기여하고 도움을 주신 이박사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제17회 한국조직신학자 전국대회 발표자료(2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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