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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민주정치와 말의 자유, 그리고 진실의 철학 - 푸코 ‘파레시아(parrĕsia)’ 개념의 한계와 플라톤적 단서 - /황옥자.목포대

 [한글 요약]

본 연구는 현대정치와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탈진실의 문제가 사실상 ‘말의 자유’에 관 한 왜곡된 인식 혹은 해석의 결과로 보면서, 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진 푸코의 파레시아 개 념을 통해 ‘자유롭게 말하기’의 철학적 의미를 추적해본다.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에 관한 이 글의 해석은 아테네 민주정을 파레시아 위기로 규정한 푸코의 진단은 맞았지만, 그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철학적 파레시아의 개념은 지나치게 엄격하기에 실천적 의미를 갖 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유롭게 말한다는 것은 푸코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기검토를 통한 윤리적 엄밀함보다는 민주정치에서 ‘옳은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소위 플 라톤적 단서에 의해 보다 정확히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이 글은 진실-말하기 가 철학과 정치의 넘나듦을 통한 비판의 복원에 중심을 두고,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민주 시민(화자의 윤리)과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민주시민(청자의 윤리)에 초점을 두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주제분야 : 현대철학, 고전철학, 비교철학    주 제 어 : 민주정치, 말의 자유, 파레시아, 옳은 의견, 푸코, 플라톤

 

 

Ⅰ. 서론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통치의 이상적 주체를 “사실과 허구( fact and fiction)의 구분, 진실과 거짓(true and false)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한 바 있다(Hannah Arendt 1951). 아렌트의 전체주의 통치 규정은 반세기가 지나 그야말로 ‘탈진실 신드롬’을 일으킨 트럼프로 인해 다시 회자되고 있다.1)

많 은 학자들이 탈진실이 압도하는 미국정치에 대한 우려와 해석들을 쏟아내기 시작 했으며, 국내에서도 가짜뉴스를 둘러싼 논의들과 함께 논쟁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주제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말의 자유가 탈진실의 길로 들어서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경계되기 시작 했다. 진실이 더 이상 궁금하지도 중요해지도 않는 학문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 의 변화는 “가짜 정보의 생태계”를 만들어 냈고(Jams Ball 2020:59), 정권 쟁취와 유지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공인의 탈진실 발언은 그것의 일상화, 공식화를 선언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정치인의 탈진실 발언 의 정치적 효과는 뚜렷하다. 그것은 ‘말’에 그치지 않고, 폭력적 선동이라는 ‘행위’ 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자유로운 말이 민주정치 내에서 자체 정화되지 못하고 이 것이 폭력을 수반하는 행위로 선동될 때 우리는 ‘말의 자유’에 어떠한 조건과 제 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제약없는 말의 자유가 가져오는 위험에 대한 과거의 교훈을 다시 되새겨야 함을 직감한다. 우리는 어떻게 전체주의적이 거나 폭력으로 연계되지 않는 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인가? ‘탈진실’은 비교적 최근 등장한 용어로 알려져 있지만, 정치 영역에서 진실의 제거가 가진 위험성에 관한 논의는 매우 오래된 것이다.2)

 

       1) 그는 취임 첫 해 동안 2,140건의 허위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하 루 평균 6번에 해당하는 수치다. Michiko Kakutani, 2018. The death of truth: how we gave up on facts and ended up with Trump. pp. 9-11. 이러한 트럼프의 말은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이 포스트 트루스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2017년 <타임>지가 "진리는 죽었는가?"(Is Truth Dead?)를 커버 전면에 내세우게 된 계기가 되었 다(Lee Mcintyre 2019: 201-202쪽).

      2) 리 매킨타이어(Lee Mclntyre 2019)에 따르면, 탈진실의 원흉으로 과학부인주의를 꼽고, 인지편향, 미디어 쇠퇴, 가짜뉴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에 호응했다. 특히 그는 포스트모더 니즘은 사실에 근거한 현실 평가라는 생각을 약화시켰으며, 그 결과 어떠한 끔찍한 결과가 초래될 것인지를 간과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탈진실 현상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트루스』. 두리반. pp.167-172. 

 

2500여년 전 플라톤은 거짓이 진실을 압도해가면서, 민주주의가 타락해가는 과정을 그의 스승인 소크라 테스의 죽음으로부터 목격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적 공간에서 진실과 비판이 제 거된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을 경계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진실을 말한 소크라테 스를 위한 변명을 시도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가졌던 플라톤이 민 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진실이 제거된 말의 자유, 즉 파레시아로 꼽은 것은 결 코 우연이 아니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규정하는 말의 자유에 대한 부정적인 플 라톤의 견해는 수십 세기가 지나고 미셀 푸코에 의해 소환된다. 푸코는 플라톤 대 화편에 나타난 파레시아 개념을 아테네 민주정에 제한적으로 적용하면서 아테네 에서의 말의 자유를 ‘파레시아의 위기’로 규정한다. 그리고 푸코는 이러한 이해 아래 근대국가의 통치성을 상징하는 수동적인 주체화 양식과 대립되는 적극적이 고 진실된 주체화 양식을 고대에서 발견하고 소크라테스를 최초의 파레시아스트 로 명명한다(Michel Foucault 2001: 12-20).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을 통해 아테네 민주정치의 특징이었던 거리낌없이 말하기는 적어도 아테네 민주정치에 긍정적 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진실을 매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진짜)파레시아와 극도의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이 글은 현대정치와 여론을 장악하고 있는 탈진실의 문제가 사실상 ‘말의 자 유’에 관한 왜곡된 인식 혹은 해석의 결과로 보면서, 미셸 푸코가 제시한 진실-말 하기, 즉 파레시아 개념을 중심으로 진정한 말의 자유가 무엇인지 추적해보고자 한다.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에 관한 이 글의 해석은 아테네 민주정을 파레시아 위 기로 규정한 푸코의 진단은 맞았지만, 그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된 철학적 파레시 아의 개념은 지나치게 엄격하기에 민주정치에서 실현되기에는 어렵다는 점이다. 푸코의 파레시아 개념이 윤리적이거나 철학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데에는 성공했 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이지 못한 탓에 현실의 정치적 삶에서 그것의 유용성을 확 보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에, 이글은 푸코가 파레시아 위기로 지칭한 아테네 민주적 파레시아(혹은 아테네 정치적 파레시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플라톤이 제시한 ‘옳은 의견(orthe doxa)’을 소개한다. 아테네 민주정을 위기로 빠뜨렸던 파 레시아는 푸코식의 자기검토를 통한 윤리적 엄밀함보다는 민주정치에서 ‘옳은 의 견’을 제시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소위 플라톤적 단서에 의해 보다 정확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이 글은 진실-말하기가 철학과 정치의 넘 나듦을 통한 비판의 복원에 중심을 두고,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민주시민(화자의 윤리)과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민주시민(청자의 윤리)에 초점을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292 황 옥 자

 

Ⅱ. 푸코의 두 가지 파레시아와 한계

1. 파레시아 위기로서 정치적 파레시아

파레시아(parrhesia)는 영어로는 ‘free speech', 프랑스어로는 ‘솔직히 말하기 (franc-parler)’로 번역된다(심세광·전혜리, 2017: 91)3)

 

     3) 이하 DP로 표기. 본문에서 사용하는 DP는 ‘심세광·전혜리(2017)의 『담론과 진실-파레시 아』’의 원제인 Discours et vérité précédé de La parrêsia의 약어다. 

 

고대 아테네에서 정치적 영 역의 파레시아는 아고라에서 ‘발언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되었는데, 이때 정치적 파레시아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민주 의회에 발언하도록 선출 된 특권층의 시민들에 의해 예정된 입법안이 표결되는 방식, 두 번째는 아고라의 공적 만남의 장소에서 개별 시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Diane Skinner 2011: 162). 대개 아테네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두 번째 방식의 파레시아에서 푸코 는 파레시아 사용에 관한 위기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단순히 발언의 자유를 누 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 선 택이 “무제한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자신만의) 고유의 삶의 양식을 선택할 자유”라는 점이다(DP: 225). 누구나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서 파레시아는 숙고없 는 정치를 만들고, 이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형편없는 지도자를 출현시킨다. 그들 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것만 말하기 때문에 훌륭한 파레시아스트는 본질적으로 데모스의 바람과 대립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의견을 거리낌없이 말 할 수 있는 제도 안에서 그 말들을 거슬러 진실을 행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은 극히 드물고,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는 순간 그들은 말로 그를 죽이는 ‘행위’ 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이러한 한계 때문에 고대의 파레시아가 ‘자격이 있는 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파레시아와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행사되는 시민들 간의 나 쁘거나 부정적인 파레시아로 구분되고 있다고 보았다. 파레시아가 잘 작동했는지, 위기에 놓여져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바로 ‘펠로폰네소스전쟁의 패배’다. 푸코는 정치적 파레시아의 좋은 예가 페리클레스 시대에 있었다고 보는데 페리클 레스의 연설 안에는 ‘이세고리아라는 형식적 조건, 탁월함이라는 사실상의 조건, 로고스라는 진실의 조건, 그리고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발 언하는 용기, 즉 도덕적 조건’이 모두 포함되어있다고 보았다. 그에게는 사적 이 익이나 욕망을 위해 대중을 선도하는 말을 내뱉는 무책임함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지도자이지만 민주정체에서 주인인 데모스에 비한다면 약자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강자인 데모스가 분노한다면, 정치지도자는 언제 든 바뀔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가 민주정의 좋은 지 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발언으로 인해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파레시아 계약’을 대중과 맺었고, 이 규칙이 잘 지켜졌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파레시아 게임이 잘 작동한 셈이다.4)

 

    4) Michel Foucault, Le gouvernement de soi et des autres, 1983년 2월 2일 강의 후반 부. 전혜리(2017), 『미셸 푸코의 철학적 삶으로서의 파레시아』, 이화여대 철학과 석사학위 논문. 37쪽. 부분 수정 재인용.

 

그러나 페리클레스 사후 적어도 아테네에서의 정치적 파레시아 는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신의 욕망에는 충실하기에 솔직하 지만 ‘무지한 솔직함(ignorant outspokenness)’이다. 이 파레시아 위기로 인해 이 제 모든 사람이 파레시아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미덕에 따라 그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구 분이 생기기 시작한다(Diane Skinner 2011: 163). 아테네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적 파레시아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 나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 사 회에서 출생이 증명되는 성인 남성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정치적 권리(Isegoria)였지만 그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어떠한 위험 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비겁함과 책임의 부재가 파레시아 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이 다. 이 위기는 더이상 민주정 하의 파레시아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의 미했다. 다른 하나는 파레시아의 토대가 평등한 시민권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점 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사적인 탁월함과 가정적인 탁월함, 그리고 사회적 탁 월함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아테네 민주정에서의 파레시아 위기를 확인하 면서 민주정에서의 파레시아를 문제화(problematisation)한다. 파레시아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푸 코는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비판을 통한 파레시아’로의 전환을 통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2. 진실, 비판, 윤리를 연결하는 철학적 파레시아

아테네 정치의 장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던 파레시아는 이제 모두에게 주 어진 정치적 권리로서가 아니라 파레시아스트가 하는 말과 행실, 그가 사는 방식 간의 일정한 조화와 관계로부터 기인하게 된다(DP: 261). 이 파레시아는 모두 철 학자들에 의해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활동과 철학적 역할은 많은 부분 파레시아 게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철학적 파레시아로 거론된다(DP: 262). 철학은 지식의 역할(혹은 게임), 정치적 역할, 파레시아스트의 활동이라는 상이한 역할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셋은 모두 연결되어있다. 푸코는 파레시아스 트의 역할 중 철학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면서, 이것을 매개로 지식의 역 할, 정치적 역할이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철학적 파레시아는 “진실과 삶, 진실과 삶의 양식, 진실과 윤리 혹은 자기 윤리라 부르는 것 간의 관계를 공들여 구축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DP: 263). 푸코의 철학적 파레시아는 말의 자유가 지닌 철학적 성격에 주목하고, 그 철학적 성격을 자기 윤리, 자기 돌봄, 즉 ‘자기 배려 (epimeleia heautou)’에 초점을 둔다. 자기에 대한 관심과 ‘자기 배려(돌봄)’라는 주제는 그리스· 헬레니즘·로마 문화의 전반에 걸쳐 철학적 태도를 특징짓는 항구 적 원리다(Michel Foucault 2007: 45). 또한 그것은 철학적 교의에서 재발견되는 하나의 명령으로 인간이 이성을 활용하여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할 가능성이 있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의 전유물도 아니며 그와 유사한 삶 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생에 유효한 하나의 원칙”으로 작동한다(Michel Foucault 2004: 62-65). 여기서 자신을 안다는 것(자기 인식)은 인식론의 영역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보는 것(자기 배려)의 과정 속에 놓여진다. 푸코는 철학의 역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 온 ‘자기 인식’의 개념을 일평생 동안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실천 적 과정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것은 ‘자기 인식’에서 ‘자기 배려’로의 전환이고, 자 신의 모든 생활방식이 끊임없는 시험과정과 다양한 훈련을 통해 검토되고 반성되 며, 연마되는 자기변형의 총체를 의미한다. 자기 인식과 자기 배려에 대한 개념의 대전환을 통해 푸코는 소크라테스를 자기 인식의 동굴에서 끌어낸 셈인데,5) 그는 소크라테스 이후 기원후 1세기 동안 철학적 파레시아는 ‘자기 돌봄’과 연계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5) 자기 배려가 자기인식의 그늘에 가려져 잊혀진 이유를 푸코는 소위 ‘데카르트의 순간’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제로의식에서 어떤 의심도 없이 자명성을 구축했고, 이것을 존재에 접근하는 원칙으로 설정하면서 ‘자기 인식’을 진실에 접근하는 근본적인 통로로 만 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는 자기인식을 복권시키고, 자기배려를 실격시키 는 결과를 낳았다. 미셸 푸코(2007) 위의 책, 57-58쪽.

 

정치적 파레시아가 파레시아스트 여부를 식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출생에 따 른 시민권, 개인의 역량에 방점을 두었다면, 철학적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비오스(bios)’, 즉 로고스와 비오스의 조화를 그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철학적 파레시아에서의 파레시아스트의 목표는 정치공동체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설득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삶의 주체인 개인은 자기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고,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 라 더 나은 삶에 대한 믿음과 진실에의 호소라는 가치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반 추해 보게 된다. 이것이 일명 ‘삶 변화시키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활의 방식,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자신과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철학적 파레 시아스트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DP: 264).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비오스와 로고스의 관계는 그에게 파레시아스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조화로운 관계 인 반면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서 비오스와 로고스의 관계는 불확실한 관계다. 왜 냐하면 대화 상대자는 자신의 삶을 설명해야 하고, 자신의 삶이 로고스에 부합하 는지 아닌지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파레시아 게임의 목 표는 로고스에 부합하는 삶으로 대화 상대자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실존 및 그가 남긴 질문의 필요성은 무지로부터 벗어 나는 일, 나 자신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일이 결국 타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잘못된 자신을 인식하고 변형시키면서 자기와의 관계 를 재구축하고 할 때, 즉 자기배려의 비판적인 기능이 강조될 때 타자의 필요성은 절박하게 필요하게 된다(Michel Foucault 2007: 162). 예컨대 자기배려 자체가 자 기 자신의 자발적 운동을 표현할 수 없고, 타자에 의해 올바른 자기배려로 유도되 어야 한다(Frederic Gros 2006: 349). 먼저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삶과 진실, 삶 의 양식을 공들여 가꾸어 나가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 변화시키기라는 ‘자기 배려’, 혹은 자기윤리 안에 놓여져야 한다. 그러나 이 자기 배려는 자신의 생활방 식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타자가 없 다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타자 윤리’가 요청된다. 결국 자기 윤리와 타자 윤리 는 상호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배려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 윤리’다. 이렇게 자기배려에서 시작해 상호 윤리로 나아가는 푸코의 진실-말하기는 진실을 아는 것,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 진실의 존재를 믿는 것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심지어 믿는 것이 진실이라는 허구적 진실의 실체를 벗겨 내는 실천적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고 푸코는 믿는다.

진실 말하기로서 파레시아가 갖는 특징을 푸코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DP: 93-101).

첫째, 신념과 진실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이것은 주체와 진실 간의 일정한 관계에 준거하고 이는 발언을 하는 행위를 통해 설정된다.

둘째, 발 화자가 진실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위험이 수반되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다. 이 진실의 발화는 때로 극단적인 차원에서 삶과 죽 음의 게임에 속한다.

셋째, 파레시아는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자이기도 하지만,그 위험은 대화 상대자에게 상처를 언제나 화자와 청자 간의 게임이다. 그것은 화 자가 언명한 진실이 대화 상대자가 범한 과오의 폭로일 수 있으며, 대화 상대자에 대한 조언, 의견, 고백일 수 있다는 점에서 화자 자신이나 대화 상대자에 대한 비 판적 기능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파레시아는 언제나 약자로부터,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결국 파레시아를 행하는 파레시아스트는 진실을 말할 자유를 활용하고, 생명보다는 죽음을, 아첨이나 수사학 대신 비판을, 이기심이나 이익 대신 의무를 선택하게 된다. 요컨대 파레시아는 진실을 언어로 실천하는 방식으로 그 속에서 화자는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진실과 관계 맺고,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자신의 실 존과 관계 맺으며, 비판함으로써 자기자신 및 타인과 관계를 맺고, 또 자유와 의 무를 통해 도덕과 관계 맺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Frederic Gros 2006: 82). 이 때 위험에 따르는 실존의 문제는 진실을 말하는 파레시아적 행위가 주체와 긴밀 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3. 푸코 파레시아 개념의 문제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푸코의 철학적 파레시아는 실존의 문제를 수반하는 행위이며,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사회에 비판을 가하면서 자신과 타자를 연결하는 행위다. 이를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아테네식 민주정치와 결별하고, 소크라테스 를 통해 지극히 ‘철학적인’ 자기배려를 하나의 실천원리로 전환시켰다. 민주적 파 레시아를 문제화하는 푸코의 방식은 ‘누가 파레시아를 사용할 수 있었는지를 통 해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구분해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는 진정한 파레시아스트가 누구인가 를 아는 것은 결국 자기 배려 속에 놓여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이 때문에 타자(청자)를 통해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을지 모르지 만, 타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파레시 아는 철학적 행위를 통해 윤리와 정치적 행위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자 기배려의 행위는 오히려 권력화된 탈진실에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다르게 존재하 기를 실천하는 주체가 된다.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비판을 통해 진실을 말할 의무 인 파레시아의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 묻게 된다. 이 문제들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누구인가? 그에 따르면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자신의 삶과 말이 일치되는지의 여부(조화로운지의 여부), 즉 말과 삶에서 언제나 동일한 태도(ĕthos)를 유지해야 하고, 자신과 타자를 연결시키면서, 자기 배려를 민주정치와 말의 자유, 그리고 진실의 철학 297 통한 자신과 타인의 ‘삶 변화시키기’에 성공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최초의 파레 시아스트로 명명한 소크라테스는 이에 부합하는가? 그들의 말과 삶이 일치했다 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아마도 죽음이나 자신에게 오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용기를 의미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파레시아는 곧은 행실에 기초할 때 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Michel Foucault 2007: 18). 비유하자면, 아첨 꾼이 자신이 들어가는 항아리의 모양에 따라 변하는 액체와 같다면, 진정한 파레 시아스트는 동일한 삶의 규칙을 가지고 동일한 삶을 사는 것으로 자기 실존의 통 일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려는 자다. 이런 사람의 파레시아는 “말하는 자 고유의 삶의 방식이 그가 하는 말 속에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 나 어떤 모델로 현전하게 된 그런 상태”의 것이다(DP: 73). 이러한 자를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로 보기 때문에 푸코에게 진실의 내용이나 모습, 종류 등은 오히려 중요한 질문이 아니게 된다. 푸코는 진실이 과연 무엇이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대한 질문이 지극히 근대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진 실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진실을 말하는 것과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고 진실이라고 믿는 것, 거짓이 진짜 진실이라고 믿는 것, 심지어 진실 자체 에 무관심한 것 등의 구분없이 단지 그 사람의 행실과 살아온 삶의 궤적이 진실 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탈진실 현상의 원인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다. 또한 이러 한 일치된 삶은 또 하나의 권력화된 상황을 가정하게 된다. 즉 그가 가진 지적인 권위, 사회적인 명성, 가문의 전통 등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에 그가 갖춘 자질이 진실한 말을 보증한다는 것은 뭔가 부정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진실-말하기는 화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이 들릴 수 있게 되는 즉 무엇이 진실인지를 구분해내는 청자의 능력을 포함한다는 점이 다. 푸코는 진실-말하기가 화자와 청자의 게임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고, 자기배 려는 타자의 윤리를 필요로 하기에 결국 상호윤리로 모아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주로 온전한 자기돌봄을 통해 진실을 알고 있는 화자에 논의가 집중 되어 있는 측면이 강하고, 청자의 입장을 크게 고려하지 못했거나, 적어도 화자와 청자, 진실을 말하는 자와 진실을 알아차리는 자의 상호성도 잘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과정이 화자와 청자의 게임을 통해 화자의 삶에 영향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타인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확신하기는 매우 어렵다.6)

 

        6) 여기에는 푸코가 진실-말하기와 관련한 명확한 언어적 엄밀함을 추적하지 않았다는 점도 파레시아 개념의 모호성을 증폭시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진실(Truth)을 진리와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파레시아스트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진리와 진실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파레시 아스트라고 한다면, 사실상 파레시아가 현실에 적용되기에는 지나친 측면이 있다. 왜냐하 면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 너무 과중한 철학적 책무를 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 되기 때문이다. 진리인지 진실인지 사실인지 참인지에 대한 논의(여기에 대해서는 배식한 (2005)논의를 참조)가 빠져있다면, 탈진실이 의미하는 것이 허튼소리(balderdash)인지, 쓸 데없는 말(claptrap)인지, 말도 안 되는 얘기(hokum)인지, 실없는 소리 (drivel)인지, 헛소 리(buncombe)인지, 사기(imposture)인지, 엉터리(quackery)인지, 허세(bluff)인지, 등등... 아니면 그저 개소리(bullshit)인지의 구분 역시 모호하기 때문이다(여기에 대해서는 Herry G. Frankfurt(2005)참조). 적어도 푸코가 소크라테스를 최초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파레시 아스트로 상정하고 있는 한 이에 대한 개념의 구분은 좀 더 엄밀해야 할 것이다. 

 

푸코가 말하는 파레시아스트로서 소크라테스의 삶을 보면,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대화 상대들은 애초에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을 선호했던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몇몇 소피스 트들은 그의 진실의 말들에도 결국 설득되지 않은 채 자신의 기존의 삶을 고수했 다.7)

 

        7) <고르기아스>에서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결국 설득되지 않았으며, <국가> 1 권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 역시 ‘좋은 삶=정의로운 삶=행복한 삶’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의견에 설득되지 않았다. 즉 적어도 그 안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단 언할 수 없다.

 

결국 푸코가 최초의 파레시아스트로 언급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민주정에 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목격한 우리는 진정한 파레시아스트가 현실정치에서는 존재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아테 네 민주정에서 행해지던 ‘말의 자유’를 하나의 ‘위기’로 진단했던 플라톤은 이에 대해 어떠한 해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Ⅲ. 파레시아 위기에 대한 플라톤적 단서

1. 파레시아와 아테네 민주정의 위기

푸코는 자신의 파레시아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고대적인 소스를 상당히 많 이 사용하는데 파레시아(parrhēsia)라는 용어 자체가 모두, 혹은 모든 것을 뜻하는 pas와 말하기를 뜻하는 rhēsis의 복합어로 아테네인들이 민주정치에서 무슨 말이 든 해 댈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8)

 

      8) 플라톤, 박종현 옮김, 2009. 『법률』. 서광사. 202쪽. 주)159 참조.

 

그러나 ‘자유롭게 말한다 는 것(parrhesia)’을 푸코는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플라톤은 ‘거리낌없 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로 해석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푸코식으로 해석하면, 진정한 파레시아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며, 아테네 민주정 자체를 철학적 파레시아와 대비되는 파레시아 위기(=정치적 파레시아)로 규정하는 것이다. 즉 파레시아의 위기가 아테네 민주정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 아테네 민주정의 위기는 파레시아 위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파레시아는 그 자체로 민주정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어떠한 특정적인 위험한 결부될 때 민주정에 위기가 온다고 보았다. 즉 파레시아에는 정치적/철학적 파레시아와 같은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레시아 그 자체가 민주정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파레시아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는 『국가』에서 아테네 민주정을 묘사하는 장 면에서 등장하는데, 그는 민주정이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자유’가 허용된 체제로 보면서, 이를 파레시아라고 적었다.9)

 

     9) 파레시아(parrhĕsia)라는 용어는 기원전 5세기 말부터 고대 그리스 문헌,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서 처음 등장하며, 『포이니케 여인들』(Phoinissai), 『히폴뤼토스』(Hippolytos), 『박코 스여신도들』(Bakchai), 『엘렉트라』(Elektra), 『이온』(Ion), 『오레스테스』(Orestes) 총 여섯 편의 작품에서 파레시아 용어가 등장한다. Saxonhouse, Arlene, Free Speech and Democracy in Athe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그에 따르면 민주정체를 닮은 민주적 인간은 “자유(eleutheria)와 언론의 자유(parrhesia)로 가득 차 있어서, 이 나라 에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exousia)를 가진 사람”이 다(『국가』 557b).

여기서 플라톤은 민주정체에서의 세 가지 자유 개념을 도출하 고 있는데, 엘레우테리아, 파레시아, 엑수시아가 그것이다. 주목해 볼 만한 점은 파레시아를 민주정의 속성으로 본 것은 맞지만, 이에 대 한 대안이 푸코처럼 철학적 파레시아를 주장하는 것, 혹은 파레시아 개념을 이분 화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플라톤은 파레시아 자체가 특 정한 어떤 것과 결부될 때, 더 나쁜 것으로 향할 수 있고, 반대로 더 좋은 것과 결 부될 때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민주정에서는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 즉 말할 수 있는 자유인 파레시아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한 편으로 이성과 좀 더 가까운 형태의 자유인 엘레우테리아(eleutheria)적인 것과 사적인 욕망에 취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엑수시아적(exousia)인 자유를 넘나들 게 되는데, 전자와 가까운 말의 자유는 좀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가져오지만 욕망 의 자유를 향유하는 말은 민주정의 위기를 가져오게 된다. 요컨대 플라톤이 민주 정체의 특징으로 규정한 파레시아는 특별히 개인의 사적인 욕망과 연계된 것이었 다. 이때 모든 것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말하는 자, 혹은 진정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오히려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안 듣기로 일관하면서, 저마다 자신은 물론 남들도 통솔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법률』 671b). 적어도 아테네에서 플라톤이 지켜본 민 주정체는 엘레우테리아가 아닌 엑수시아와 연계된, 그래서 자기지배가 아닌 자기 자신의 노예이며, 자기 욕망과 자기 욕구의 노예가 되는 정체였다. 비슷한 방식으 로 자기가 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도시국가는 가장 형편없는 자들의 노예가 된다. 결국 아테네 민주정에서 말의 자유는 진실에 대한 관심의 부재, 일관성의 부재, 이성과 절제의 부재로 인해 폭군이 설 기회를 제공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모든 자 유를 사라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등 장하고, 그들이 대중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만 하면’ 진실에 관심없는 대중 은 그 사람을 존중하게 되는 그야말로 참으로 “고상한 관용”을 취하게 되기 때문 이다(『국가』 558b). 또한 플라톤이 민주정치 그 자체에 대한 반감보다 당시 아 테네 민주정이 가진 특정한 자유의 지배적 형태, 즉 ‘엑수시아적인 파레시아’를 비판했다는 점은 그러한 가장 낮은 수준의 민주정치(ochlokratia)가 결국 민중 선 동가를 출현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리낌없이 말하는 말의 자유가 엘레우테리아적인 것과 관계할 때 파레시아는 어떤 모습일까? 플라톤은 『법 률』에서 국가의 법은 “자유로우며 자체적으로 우애롭고 지성을 갖추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법률』 701d), 페르시아인들의 키로스 시대에 대 해 설명한다. “페르시아인들이 키로스 시대에는 노예상태와 자유(eleutheria) 사이에서 알맞은 정도를 더 누린 편이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이 자유로워졌으나, 나중에는 다른 많은 사람의 주인들로 되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나눠주 고 평등하게 대해줌으로써, 군사들이 지휘관들과 더욱 우애롭게 되었으며, 위험에 처 해서는 헌신적으로 임했습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지혜로워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경우에는 왕이 시샘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거리낌 없이 말하게(parrhēsia) 해주며 어떤 일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자들을 존중하게 해주어 그 지혜로움의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기여케 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그때는 그들에 게 있어서 향상되어 갔는데, 이는 자유와 우애 그리고 지성(nous)의 공유를 통해서였 습니다”(『법률』 694a-b). 요컨대 플라톤은 푸코가 비판한 (정치적, 민주적)파레시아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 평가보다는 그것이 이성이나 절제, 즉 엘레우테리아적인 것과 연계되는 파레 시아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때문에 플라톤이 『법률』에서 받아들인 자유는 『국 가』에서 언급했던 엘레우테리아적인 자유였으며, 이 자유가 민주정의 핵심인 ‘말의 자유’와 연계될 때 파레시아는 국가의 법에 기여하는 공동의 지혜로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엘레우테리아적인 파레시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플라톤의 해석처럼 좀 더 이성적인 것, 좀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그래서 공동체의 좋음에 기여하는 파레시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아볼 민주정치와 말의 자유, 그리고 진실의 철학 301 수 있는가? 플라톤은 이에 대해 어떤 철학적 엄밀함보다는 경험에 의해 알게 되 는 하나의 의견, 그러나 모든 의견이 아니라 옳은 의견(orthe doxa)을 말할 줄 아 는 능력을 지닌 화자, 그리고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청자의 윤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 옳은 의견(orthē doxa)을 말하는 자-알아차리는 자

플라톤 철학이 지혜(sopia)와 앎(epistēmē)을 통해 진리(idea_alēthēia)에 이르 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익숙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이 진짜임을 아는 것은 지 성(nous)에 의해 가능한데, 이것은 앎(epistēmē)과 지혜(sophia, phronēsis)의 능 력을 지닌 인식 주관으로서 “이성(logos)의 확장된 능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 상에 대한 앎의 능력이자 플라톤이 진정한 앎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10)

 

    10) 플라톤, 박종현 옮김, 2009. 『법률』. 서광사. 85쪽. 주)77 / 88쪽. 주)84 참조.

 

그 러나 현실정치에서 진리의 추구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플라톤은 완전한 철학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방식보다는 그것을 본으로 삶는 다른 형태의 앎을 말 하는데, 그것이 바로 단순한 논리적 사고나 추론에 의해서 누구나 옳고 그름을 분 간할 줄 아는 오르떼 독사(orthē doxa_옳은 의견)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정치인이 나 현실의 대중이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독사(doxa: 의견)에 불과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오르떼 독사이기에 인간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축적된 실천적 지식으로 옳은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이는 플라톤이 모든 공 동체의 구성원이 아닌 통치자나 정치가에 의해서만, 공동체의 올바름이 수행될 수 있다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배치된다. 또한 누구나 옳은 의견을 가질 수 있 다는 것은 철학자에만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인식론적인 앎과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 ‘옳은 의견’은 지혜를 갖춘 철학자의 면모는 아닐지라도 대중을 선도할 수는 있는 좋은(eu) 것이다.

플라톤은 덕에 관한 논의를 진행하는 『메논』편에서 옳은 의견의 중요성을 앎(epistēmē)에 못지않게 유익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앎(epistēmē)을 갖고 있는 대상들에 대해서 적어도 옳은 판단 (바른 의견: orthē doxa)이나마 가진 한은, 비록 참된 생각은 하되 지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를 갖춘 사람에 비해 조금도 못지않은 선도자(안내자)일 걸세. ... (중 략)... 그러고 보니, 옳은 판단(바른 의견:orthē doxa)은 앎(지식:epistēmē)에 비해 조금 도 못지 않게 유익하이.” (『메논』 97b~c)

 

플라톤은 특정한 철학적 수련을 거치는 사람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옳은 의견을 갖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적인 것을 혼 안에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이것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것을 무지 (agnoia)로 간주한다.11) “대중이 통치자들과 법률에 복종하지 않을 때는, 똑같거니와 특히 개인의 경우에 는 훌륭한 주장(원칙:logos)들이 [제] 혼 안에 있는데도, 이것들을 전혀 활용하지는 않 고, 오히려 이것들에 정반대로 할 때는 이 모든 것을 저는 나라에 있어서건 또는 시 민들 개개인에 있어서건 가장 엇가는 종류들의 무지로 간주합니다.” (『법률』 689b) 이러한 플라톤의 견해는 공동체의 보존과 진리의 획득을 통한 좋음을 위해서 누구나 그리고 반드시 자기배려를 통해 타자와의 연결을 추구하는 푸코식의 파레 시아스트, 혹은 소크라테스적인 파레시아스트가 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우 리는 오히려 자신의 경험을 숙고하고 반성하는 선에서 보통 사람 누구나 옳고 그 름을 구분하는 오르떼 독사를 가질 수 있게 되고, 보통 사람들의 이 보통의 능력 을 통해 모든 인간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공동체의 보존에 관심을 가면서, 비 판적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것이다(Conford F. M. 1912: 77). 옳은 의견을 말하 고 또한 알아차리는 자의 능력을 플라톤은 교육에서 찾고 있다. 이 논의에서 플라 톤은 어떤 거짓말, 말 속임수와 같은 재주가 아닌 올바르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 고 지배하는 자, 그리고 그 올바른 의견을 잘 청취하고 다스림을 받을 줄도 아는, 푸코의 논의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화자와 청자의 자기동일성, 혹은 치자와 피 치자의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피력하고 있다. 이를 아는 자가 진정한 자유민, 완벽 한 시민이 된다.12)

 

   11) 플라톤에 있어서 무지는 곧 나쁨(kakia=badness)에 해당한다. 플라톤, 박종현 옮김. 위 의 책. 『법률』 310쪽. 주)35.       12) 현대 민주정치에서는 중요한 것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 단순히 그것이 허위에 근거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뻔한 거짓말과 달리 허세 부리 기를 통한 일종의 속임수다. 프랭크퍼트는 이를 거짓말과는 다른 ‘개소리(BullShit)’라고 말 하는 데 이때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 (phony)”라는 데 있다(Herry G. Frankfurt 2019: 49). 또한 프랭크퍼트는 그들의 언어가 무엇이든지 꾸며낼 수 있는 하나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개소리 예술가(bullshit artist)로 부른다(Herry G. Frankfurt 2019: 54-55). 푸코가 제시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공들여 자기 자신을 가꾸는 자’이지만, 이에 반하는 사람은 진실하지 않는 자, 혹은 거짓말을 하 는 자가 아니라, 광범위하고 독립적이고 임기응변에 능하며, 꾸며내는 것을 잘하는, 즉 “헛소리를 잘 믿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James ball 2020: 29). 때문에 진 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해내는 청자의 능력이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매우 엄밀한 잣대로 진 리를 구분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헛소리를 믿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자, 자신이 원하는 것 을 쟁취하는데 유리한 발언, 욕망을 이루는 데 유리한 발언을 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능력 에 있다 하겠다.

 

“아이적부터 [사람으로서의] 훌륭함(덕:aretē)과 관련된 교육, 곧 올바르게 다스릴 줄도 그리고 다스림을 받을 줄도 아는 완벽한 시민으로 되는 것에 대한 욕구와 사랑 을 갖는 자로 만드는 교육에 대한 것인 것 같으니까요 ..... (이는) 지성(nous)과 정의 (dikēs)와는 상관없는, 어떤 재주를 목표로 하는 양육은 저속하고 자유민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며, 전혀 교육이라 불릴 가치가 없는 것이라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법률 643e~644b)

 

요컨대 올바른 교육과 양육을 통해 획득된 정치적 지식이 인간이 획득 가능한 최대의 지식이며 이것은 옳은 의견을 가지고 옳게 판단하는 것이다. 의견과 판단 에 속하는 것일지라도 진리의 차원에 머무는 철학적 지식을 지속적으로 본으로 삼고 모방한다는 점에서 지식의 추구와 성취에 관한 인간의 능력은 신뢰할 만하 다. 플라톤의 인간 능력에 관한 신뢰는 개인의 사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한 참된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되며, 정치는 인간의 능력으로 충분히 개선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과 개선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목표를 동시에 수용하 게 된다.

 

Ⅳ. 결론

현대에서 자기 배려가 사라진 것 같다는 푸코의 생각은 고대의 자기돌봄 윤리 를 회고하게 만든다.

진실과 관계하여 자기가 자기와 맺는 관계, 자기와 타자가 맺는 관계들을 통과해 결국 상호 배려, 상호윤리로 모아지는 이 자기 돌봄의 역사 는 명백히 근대문명에서 잊혀졌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이 개념을 찾아 내고 자유의 실천을 통한 자기변형의 총체로서 자기배려를 되살리고 그 실천의 중심에 비판을 통한 진실-말하기라는 파레시아를 위치시킨다. 비판의 시작점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푸코는 진정한 파레시아스트의 조건을 검토하면서, 상대에게 자신을 돌봐야 하고 그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설 득하는 ‘삶 변화시키기’를 파레시아스트의 목적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푸코는 이 러한 목적에 성공했는가? 진짜보다 믿을 만한 가짜들이 범람하고 그것이 돈이 되 고 즐거움이 되는 사회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능력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에 대해 설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아테네 민주정은 거짓이 진실을 이기는 말의 자유가 지배했고, 그것은 진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는 형편없는 지 도자를 출현시켰으며, 결국 민주정을 역사 속에 잠들게 했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 는 어떠한가? 가짜뉴스를 즐기며 비판의 의지나 능력을 상실한 채 누리는 자유, 예속된 삶을 살게 되지만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자유, 가짜를 알아차리는 청 자가 아닌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는 그런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않는가? 플라톤 과 푸코는 이러한 ‘말의 자유’를 민주주의의 위기로 설정하지만 이 두 철학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파레시아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푸코는 말의 자유가 지닌 철학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자 기 배려(epimeleia heautou)’에 초점을 둔다. 이때 철학적 파레시아스트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비오스(bios)’, 즉 로고스와 비오스의 조화를 그 특징으로 하고, 이 때문에 철학적 파레시아에서의 파레시아스트의 목표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타인을 설득하는 존재다. 요컨대 파레시아는 진실 을 언어로 실천하는 방식으로 그 속에서 화자는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진실과 관 계 맺고,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자신의 실존과 관계 맺으며, 비판함으로써 자기자 신 및 타인과 관계를 맺고, 또 자유와 의무를 통해 도덕과 관계 맺는 것”으로 정 의된다. 그러나 푸코의 철학적 파레시아, 혹은 진정한 파레시아는 현실 정치에서 진실/거짓의 구분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인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속이는 ‘진짜 가짜’를 구분해 내기에는 너무 엄밀하다. 또한 파레시아스트의 출현은 기대하기 어렵고, 만약 출현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다수가 존재 하는 사회라면, 그 진실의 말은 묻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견해에서 우리는 진리나 진실을 알아차리기를 바라기보다 오 히려 진실에서 가장 멀어진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말하는 자의 욕망에 기인한 소 위 개소리는 아닌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것을 파악하는 능력은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죽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야 하는 푸코식 파레시아스트도 아니며, 보편적 진리나 진실을 직접적으로 추구 하는 철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가장 가까우면서 인간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 즉 ‘옳은 의견’을 갖고, ‘옳은 판단’을 할 수 능력을 교육을 통해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의견과 진실 사 이를 오가며, 철학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속적인 비판을 통해 인간이면 누 구나 가지고 있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보통을 능력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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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emocratic Politics, Free Speech, and Philosophy of Truth

Hwang, Ok-Ja (Mokpo National univ.)

This study identifies the problem of post-truth, which dominates modern politics, as the result of distorted perception or interpretation of 'freedom of speech'. Therefore, the aim of this paper is to track the political philosophical meaning of 'free speech' through Plato and Foucault's concept of parrhesia.

Key Words : Democracy, Freedom of Speech, parrhesia, orthē doxa, Michel Foucault, Keyword :s ; Plato

 

새한철학회논문집철학논총 제108집ㆍ2022ㆍ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