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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한반도 분단체제하 종교폭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형규.숭실대

국문초록

본 연구는 종교폭력(religious violence)에 대한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반도 분단체제 생성기에 종교폭력으로서 나타난 전투적 반공주의를 평가한 것이다. 국내에 구체적으로 소개된 적이 없는 대표적 종교폭력이론가들인 마크 저겐스마이어와 스콧 애플비가 주장하는 폭력의 발생 원인이나 확증자로서 종 교의 역할에 대한 주장들을 정리하며 비판적 성찰을 한다. 이들은 세계 도처에 서 종교가 폭력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가 세속의 이념이나 제도들과 달리 역사와 지역을 초월해 인간을 충동적으로 만들며 좀 더 폭력을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주장들을 거부하며 이를 위 해 한국전쟁 전후 한국개신교가 행한 종교폭력으로서 전투적 반공주의를 검토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분단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폭력이 발생하였음을 강조할 것이다. 분단체제의 비극은 하나의 민족에서 두 신생국가가 탄생함으로써 시작된 다. 국가의 폭력과 희생의 요청에 한국개신교는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냉전체제의 구조적 압박과 무신론-공산주의와 종교자유-자본주 의라는 이항대립적 세계관의 형성은 기독교와 반공주의가 선택적 친화성 으로 결합하게 만들었고 전투적 반공주의가 발현되게 하였다. 미소냉전의 이념 차이로 발생한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선과 악의 종말론적 싸움으로 채색시킨 우주적 전쟁터로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분단체제로부터 폭력으로  의 요청을 강요받았고 생존과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이 기회를 적극 활 용하였다. 본 연구는 신의 뜻으로 행한 종교폭력은 세속적 폭력과의 다양 한 관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종교는 폭력을 조장하지 않는 다. 냉전과 분단체제에 의해 요청되고 허용되었던 특별한 시간과 공간 속 에서 종교에 의한 시연적 폭력이 발생했던 것이다.

 

주제어: 종교폭력, 한국전쟁, 한국개신교회, 전투적 반공주의, 분단체제

 

 

I. 서론: 연구의 목적과 범위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 개신교회가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의사표명을 강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현 진보적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주도하는 모습들이 자주 목격되면서 이에 대한 종교사회학적인 이해와 연구를 요청받고 있다(강인철, 1996; 2006; 김진호, 2018). 한국교회가 공적 사회문제의 여론형성과정에 주체적 행위자로서 적극 참여하는 것이 80-90년대의 민주화운동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를 복기해 보면 한국교회는 해방전후와 한국전쟁시기에 사회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종교사학자 박정신에 의하면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던 교회가 유일하게 열을 내었던 것이 반공주의였다. 한국전쟁을 ‘악마와 천사 간의 대결’로 인식하며 공산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하고 반공을 내세우는 정권에 하나님의 뜻과 지지를 보냈다. 이를 기점으로 반공을 교리 이상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특히 신학자 박형룡은 미국의 반공주의의 저서들을 읽고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붉은 세력이 침투했다고 음모론을 퍼트리고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등을 싸잡아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자라고 비난하며 많은 신학교에서 이것을 교육하였다. 자연스럽게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과 이념적 친화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익의 탁월한 상징”으로 인식된 한국교회는 이러한 “전투적  반공주의”를 채택하였다(박정신, 2008: 146-147).

물론 해방 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전후 극심한 갈등의 시기였기에 종교가 보여준 폭력적 모습이 특이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이하 북과 남으로 지칭함).

문제는 이러한 세속적 이념에 근거한 픅력적 갈등을 종교가 더 촉진시켰는가 이다.

마크 저겐스마이어(Mark Juergensmeyer)나 스콧 애플비(Scott Appleby)같은 학자들에 따르면 종교는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며 폭력을 조장한다.

근대적 세속 정치이데올로기나 국가들의 폭력과 비교하면 종교폭력은 역사와 지역을 초월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비합리적, 비이성적, 극단적, 순간적, 과시적, 비관용적인 모습을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가 특정 민족이나 종족과 연계되었을 때 갈등은 더 폭력적이 되고 거룩한 전쟁이 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갈등에 종교, 특히 한국 개신교회가 다시 중요한 사회적 행위자로 참여하고 있기에 이러한 연구는 시의적절하다. 나아가 종교가 사회적인 문제들에 참여하여 폭력적 갈등의 유발자나 기여자가 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주의가 필요하고 나아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원칙으로 하는 한국사회의 정치질서에 도전을 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주의 깊은 연구가 요청된다.

본 연구는 다음의 질문들에 답을 할 것이다: 종교는 폭력의 촉진자인가? 해방과 한국전쟁전후 개신교는 폭력의 촉발 및 촉진자였나? 한국개신교회는 앞으로 갈등기여자와 평화의 사도 중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이러한 연구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일단 사례로 제시한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이와 같은 짧은 논문형식 속에 담기에는 물리적인 제약이 존재하기에 역사연구가들의 연구업적을 재인용하며 배열하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먼저 고백한다.

관련연구자들의 후속연구가 요청된다. 먼저 종교와 국제정치(religion in global politics) 연구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종교폭력이론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병렬식으로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한다.

 

II. 종교폭력이론과 비판

1. 종교 폭력(Religious Violence)이론

종교폭력이론은 최근 북미 종교사회학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한 종교’(Strong Religion)론에 속하는 주제이다. 1970년대 말부터 전 세계적으로 정치와 경제 같은 이미 종교로부터 분화된 공적영역 속에서 종교가 다시 주요한 행위자로서 등장하고 있다. 공적영역에서 종교의 등장은 종교의 쇠퇴와 사사화(privatization)를 예견하였던 세속화론에 심대한 도전이었다. 사회학자 김성건에 의하면 강한 종교론은 종교를 더 이상 경제나 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환원 불가능한 독립적 상수이자 인과적 능력으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바라본다(김성건, 2013; 2015; Appleby, 2012).

계몽주의의 거대한 영향 아래서 시작된 근대 사회과학은 종교세속화(secularization)를 예측하였는데 이런 약한 종교의 길을 거부하는 새로운 이론들이 등장한 것이다. 김성건에 의하면 강한 종교론의 등장은 기존 종교세속화론의 설명력의 상실에 기인한다. 세속화론이 유럽에서는 적실한 이론이지만 그 외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종교부흥운동들과 공적영역에서의 종교의 재등장과 같은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워너(Stephen Warner)에 의해 제기된 종교사회학의 패러다임의 위기는 새로운 이론을 요청하였다. 다원적인 미국사회를 위해 미시적 방법론 중 하나인 ‘합리적 선택론’에 기반한 ‘종교시장론’이나 초월적 힘에 의지해 권능을 얻고 싶어 하는 실제적 행위 동기와 목적추구로서의 종교를 연구하는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의 ‘비판적 실재인격주의’(critical realist personalism) 같은 대안이론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세속화론에 강한 비판을 제기한 카사노바(Jóse Casanova)는 위로부터의 (국가와 정치) 접근인 ‘시민종교’(civil  religion)와 달리 아래(종교와 신자)로부터의 ‘공적 종교’(public religion)의 등장을 지구적 차원에서 분석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공적종교 연구로 저명한 미국교회사가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카사노바가 ‘공적종교들’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공을 돌렸다. 마티는 공적영역에서의 종교 재등장을 “성의 귀환”(return of sacred)이라 명하고 더 나아가 종교의 해방적 가능성을 밝혔다(Musser, 2019). 카사노바는 최근에 유럽의 엄격한 ‘정교분리’라는 근대시민사회의 원칙 때문에 개별민족종교와 종파의 지원을 받은 전체주의가 발호하게 되었다고 유럽의 정치에서 정교분리를 대원칙으로 삼는 세속화론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오히려 역사 속에서 종교가 정치의 중요한 파트너였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가톨릭 같은 초국가적 세계종교들은 국제정치경제의 글로벌 참여자로서 갈등 조정의 역할을 해왔다(Casanova, 1994; 2009). 그러나 기독교 교회사가 마티와 애플비, 그리고 저겐스마이어 등은 종교가 매우 특이하게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며 지구촌 곳곳에서 갈등과 과격한 폭력에 영감을 주고 그런 행위에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는 비합리적이며 자주 폭력적으로 기울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적 믿음이 그들을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분노와 광신적, 광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다. 종교폭력론을 이끌고 있는 저겐스마이어, 애플비와 종교폭력론에 비판적인 윌리엄 캐버너(William Cavanaugh)와 캐롤린 마빈(Carolyn Marvin)의 근대국가 시민종교의 폭력을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종교폭력론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폭력을 초사회적, 초역사적 현상 즉 특정 사회나 역사와 상관없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며 종교의 폭력성은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과 이론을 가장 선명하게 주장하는 마크 저겐스마이어의 이론을 살펴보자. 사회학자 저겐스마이어는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폭력’이론을 전개하면서 종교가 세속의 갈등과 폭력에 영감을 주고 그런 폭력적 행위에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 96 - 권위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2001년 9・11테러 이후 2000년 첫 출판된 그의 책 Terror in the Mind of God: The Global Rise of Religious Violence를 2003년에 대폭수정보완하며 “현재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폭력적 갈등들에 종교가 연관되어 있다”고 진단하며 특정종교가 아니라 대부분의 전통적 종교들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국제정치의 폭력적 갈등들의 내면에는 종교적 상상력의 가장 깊은 차원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의 폭력적 성향은 역사를 넘어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종교는 사람들을 친구와 적, 선과 악, 우리와 그들로 나눈다. 이 싸움은 전설 속 오래전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수백 년을 싸워야할 선과 악의 우주적 전쟁(cosmic war)이 된다. 이러한 이미지가 현실세계에 적용될 때 타자를 악마화하고 타협과 평화로운 공존의 여지를 제거하면서 폭력을 북돋게 한다.

낙태시술병원 폭파, 벨파스트의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 시오니스트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 시크 호전주의자, 일본의 오움진리교 등을 밀접 접촉해 인터뷰하고 조사하면서 종교폭력의 문법을 찾아내었다: 종교폭력은 늘 “시연적”(performance violence)이라는 것이다. 즉 종교폭력은 의도적으로 강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야만적으로 행하여 그들의 분노를 선명하고 과장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상징적 목적이 있는 종교폭력은 세속폭력과 달리 타협이 없고 폭력사용의 목적도 실용적이지 않다(Juergensmeyer, 2000: 119-120). 저겐스마이어는 먼저 상징적 종교폭력과 전략적 세속폭력이라는 이항대립으로 둘을 구별한다. 종교폭력 속에서는 장기적인 전략적 가치보다는 바로 앞에 당면한 목표물 넘어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초월적인 것을 지시하며 설교할 상징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폭력을 저지른다. 종교폭력의 행위들은 상징, 의례, 거룩한 드라마로 분석될 수 있으며, 공산혁명시기 계급갈등들처럼 몇몇의 세속적 사상이 유토피아적으로 종교폭력과 유사하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회와 역사의 지평 속에서만 수행된다.

예로 공산주의 혁명정부는 부르주아 출신들의 소유물들을 박탈하고 공산주의사회에 맞게 캠프에서 재교육을 하지만 종교적 우주전쟁에서 적은 사탄이기에 개선이 불가능하며, 단지 파괴되어야할 대상일 뿐이다. 즉 세속적 갈등들은 어쨌거나 참여자들의 현 인생 속에서 해결을 찾지만, 종교적 행위자들은 수백 년을 기다리며 심지어 저 세상에서의 완성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행위자들은 그들의 목표를 타협하거나 사회의 법안에서 다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높은 권위에 순종”하기 때문이다(Juergensmeyer, 2000: 123-124, 217). 저겐스마이어는 종교와 세속의 정확한 설명 없이 상징적 종교폭력과 전략적 세속폭력으로 구분한 후 ‘우주적 전쟁’ 개념 속에서 현실의 테러리스트들을 종교적 전사의 상징적 세계관 속에서 위치시킨다. “종교적 폭력이 좀 더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게 만드는 것”은 “선과 악의 갈등과 전설적 과거의 위대한 전투라는 삶의 보다 큰 맥락에서 세속전투를 위치시키기 때문”이다(Juergensmeyer, 2000: 145-146).

종교의 본질은 혼돈과 악을 넘어 질서의 구축이라는 거대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땅에 대한 분쟁처럼 합리적인 세속적 정치적 갈등은 우주적 전쟁하고는 다르다. 이런 우주전쟁의 절대주의는 타협의 가능성은 적으며 폭력의 강도는 증가한다(Juergensmeyer, 2000: 155-159). 우주전쟁 속에서 갈등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방어이며, 이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며, 이 갈등은 되돌아 갈 길이 없는 막힌 것이며, 현실 역사 속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세속적 정치 갈등이 우주적 전쟁으로 바뀐 사례는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다. 1980년대까지 이 갈등은 거룩한 전쟁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Juergensmeyer, 2000: 160-163). 그러나 상징적-전략적이라는 이항대립적 구분을 짓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폭력으로부터 종교폭력을 구별하려는 저겐스마이어의 시도는 세속정치의 상징적이며 종교적인 본질을 간과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실 우주적 전쟁을 일반적 세속의 정치적 전쟁들과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 98 -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세속적 “전쟁도 상대를 이분법적으로 반대편에 놓아 파괴되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전부 아니면 무가 되는 갈등이다. 일단 개전을 하면 어떠한 타협도 둘 중 하나가 이기지 않는 한 끝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의 존재는 위협이고 그가 사라지지 않는 한 늘 안전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군사적 태도는 늘 전투가 승리로 끝날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Juergensmeyer, 2000: 148-149).” 그렇다. “전쟁이 폭력적인 이유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세속적 전쟁과 우주적 전쟁 사이의 분리는 그것이 전쟁으로 호명되는 순간 사라진다. 전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관”을 요청한다. “전쟁은 우주론, 역사, 종말론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통제의 지배로 들어가는 것이다. 종교적 의례처럼 전쟁은 삶의 가장 심오한 측면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참여적 드라마이다(Juergensmeyer, 2000: 155).” 이제 종교가 전쟁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종교적 실천적 행위가 된다.

종교폭력과 세속폭력 구분을 기초로 저겐스마이어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종교적 폭력은 “매우 상징적이며, 두드러지게 드라마적 방식에 맞춰 수행”되며

  둘째로 “도덕적 정당화와 끈질긴 절대주의의 강한 요구에 의해 수행”된다.

  셋째로, 우주전쟁은 “역사적 통제를 넘어”서 있다. 그의 연구의 결론은 갈등들은 처음에는 정치적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폭력의 잠재성이 폭발하면서 종교화된다는 것이다.

“갈등이 종교적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종교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갈등으로 이끈 것은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의 문제인데 어느 순간 갈등은 절망과 좌절감 속에서 정치이념들과 경쟁하는 가운데 종교화된다. 이리하여 세속적 갈등이 성스런 갈등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Juergensmeyer, 2008: 253).” 종교를 통해 원래는 단순했던 세속적 정치적 갈등들에 우주적 전쟁으로 상승케 하는 독특한 위험요소들이 더해진다. 종교 자체가 갈등의 원인이 아니지만 세속갈등을 배가시키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종교적 폭력은 특별히 야만적이고 무모하다. 왜냐하면 가해자들은 한반도 분단체제하 종교폭력에 대한 비판적 고찰 - 99 - 그것을 단순히 세속적 정치적 전투의 부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적 갈등의 시나리오의 부분으로 보기” 때문이다(Juergensmeyer, 2008: 255). 저겐스마이어의 문제는 세속국가의 폭력에 종교성을 덮어 진정한 폭력의 원인과 해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스콧 애플비의 민족종교 폭력론을 검토해 보자. 국제관계학자인 애플비는 종교가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화를 위한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세계의 여러 분쟁, 특히 발칸에서의 유고내전에서 발견한다. 근본적으로 종교가 비합리적이라는 부분은 저겐스마이어와 일치하는데 애플비도 저겐스마이어와 같이 종교가 폭력으로 향하는 경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 The Ambivalence of Sacred: Religion, Violence, and Reconciliation (2000)의 제목처럼 종교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religious fervor)과 그것을 통해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도 작용하는 “치유의 힘”이 되는 약이 되기도 한다(Appleby, 2000: 5).

물론 폭력과 평화 둘 다 비합리적인 종교의 성향에서 나오기에 종교는 ‘전투적’이다. 즉 한편으로 종교는 “합리적 계산과 자기 이익의 관점을 넘어서 폭력의 악순환을 지속하는 능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끝없는 종교적 헌신에서 나오는 종교적 열정은 필연적으로 폭력으로만 이끌지 않고 때로는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차별 속에서 깊은 영감으로 많은 평화의 사도들을 배출한다(Appleby, 2000: 4).” 애플비는 바로 세계분쟁의 현장에서 그동안 수없이 회자되고 드러났던 종교의 폭력성이 아니라 간디(Mahatma Gandhi)나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같은 종교평화주의자들의 새로운 혈통을 찾아 갈등의 치유제로서의 종교의 본질과 역할을 인식케 하고 고무시키고자 한다. 종교는 치명적 갈등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갈등해결의 새로운 형태인 종교적 평화만들기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고자 한다(Appleby, 2000: 7). “극단주의자들과 평화건설자들 둘 다 전투적이다. 둘 다 성스러움에 대한 헌신과 희생의 극단으로 가는 것은 같다. 둘 다 급진적으로 종교의 근본적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 100 - 진리를 다시 기초부터 세워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로 그들 자신을 일반 사람들 즉 종교적 헌신의 동기가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 “종교적 평화건설자들은 폭력을 중지시키고 갈등을 해결하는 데 자신을 헌신하는데 반해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적에 대한 승리가 우선”이기에 폭력을 사용하게 된다(Appleby, 2000: 11-13). 즉 폭력에 대한 태도와 갈등 속에서 폭력의 역할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이 둘은 구별된다. 비폭력주의자들이 폭력극단주의자들보다 긴 안목에서는 영향력이 크다. 애플비에 의하면 “종교는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된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성스러움의 해석자로서 종교는 초우주적 시원과 인간 실존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축복한다(Appleby, 2000: 8).” 종교가 다른 것들과 구별되는 것은 성스러움과의 만남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양면적 본질이 바로 이 성스러움의 특징이다. 이것이 폭력과 평화의 극단적 능력들의 시원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뺷성스러움의 의미뺸(1917/1987)에서 밝혀낸 것을 따르면서 애플비는 자신의 종교이론을 진척시키는데 그에 따르면 오토는 성스러움에서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 바로 종교의 본 모습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성스러움은 그것을 맞닥뜨렸을 때 선도 악도 아닌, 도덕을 넘어서는 분리되지 않은 경험에서 나오는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 궁극적 실재인 것이다. 성스러움은 헌신 가운데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비한(numinous) 성격의 것이다. 이 신비한 감정은 잔잔하면서도 요동치는 갑자기 이상하게 흥분을 주고 발광하는 것이다. 두렵고도 아름답게 이끄는 야성적이고, 악마적이며, 야만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성스러움의 기이한 힘으로서 성스러움의 통제 불가능한 ‘끔찍하게 두렵고 매혹적’(mysterium termendum et fascinans)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종교적 행위로 전환될 때 의례나 기도집회 같은 제한된 형태들로 바뀌지만 이 경험은 결코 인간이성과 언어로 순치되지 않는다. 종교의 한계이겠지만 “종교는 성스러움의 힘을 나타내 보여주지만 (동시에) 드러난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급격하게 제한적이다(Appleby, 2000: 28-29).

” 신비함의 이런 양가적 감정의 힘과 인간 이성으로 성스러움을 탐지하려는 능력의 부족은 종교를 근본적으로 모호하게 한다. 삶과 죽음의 힘 모두를 촉발시키는 종교의 양가적 능력 말이다. 성스러움이 양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양면적이기에 종교는 근본적으로 양면적이다. 사실 오토보다 애플비가 성스러움을 만날 때의 비합리적이거나 통제 못하는 힘을 더 강조한다. 오토는 사실 성스러움에서 윤리적이고 합리적 요소를 제거하고 남겨진 것이 신비롭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신의 상태는 완벽하게 독자적인(sui generis) 어느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우선적이며 기본적인 기준점이며 말할 수 있으나 개념화시킬 수 없는 상태다. 성스러움은 경험적 증명에 종속되지 않는 마음의 순수한 선험적 범주이다(Otto, 1958). 이러한 종교에 대한 규정 위에 현대의 폭력적 사건들의 특징으로 ‘민족종교적’ (ethnoreligious) 폭력을 소개한다. 1960년대부터 1990년까지 전 세계 3/4의 내전들은 민족종교적 갈등에 의해 일어났다.

민족적 정체성은 민족적이며 종교적 전통 위에 기초하여 생성되었다. 전세계적으로 민족과 종교의 정확한 분리가 불가능한 갈등들이 많아졌다. “종교적 행위자들은 그들의 전통을 성스러움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과 밀접히 일체화를 시킨다(Appleby, 2000: 107).” 일반적 민족주의와 달리 민족의 성스러움에 대한 강조는 종교적 전통과 함께하는 민족의 일체성에 기여한다. 이제 민족적 정체성은 규범적 차원을 가지고, 민족의 깊은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고, 초월적 차원에서 거룩한 전사들을 불러 세운다. 종교로서의 민족성은 이제 질적으로도 종교와 같은 것이 된다. 애플비에 의하면 민족갈등 속에서 종교의 역할은 민족을 성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민족성이 종교처럼 비합리적이고 초월적이라고 말하는 애플비에게 그렇다면 문제는 종교인가 민족성인가 되묻고 싶다. 애플비는 저겐스마이어가 정치와 종교를 혼돈한 것처럼 종교와 민족 개념의 혼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예로 이런 종교와 민족의 혼돈 문제는 민족적 폭력이 종교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애플비의 논리대로라면 만약 어떤 민족사이의 갈등이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이면 그것은 종교적 폭력이 된다. 오히려 애플비의 이러한 이해는 폭력을 비합리적인 종교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갈등해결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예컨대 매스 미디어가 1979년 이란혁명을 총을 들고 있는 무슬림 여성들과 이맘 호메이니와 같은 종교폭력 담론 안에서만 분석함으로써 혁명의 원인과 본질을 놓치게 만들었다.

서구화에 대한 거부, 서구에 의한 자원수탈, 세속독재정권의 권위주의 같은 문제들이 가려졌다. 즉 종교폭력은 문제를 단순화시킨다. 그러나 복잡하고 실타래처럼 엉킨 갈등의 해결도 정확한 분석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근대국가의 폭력성과 종교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윌리엄 캐버너와 캐롤린 마빈의 논의를 점검하는 것은 중요하다.

 

2. 종교폭력론에 대한 비판: 캐버너와 마빈

캐버너는 그의 저서 The Myth of Religious Violence: Secular Ideology and the Roots of Modern Conflict (2009)에서 종교와 정치를 이항대립적으로 구별하는 기존의 종교폭력 이론들을 거부하며 종교와 정치의 밀접한 연관성에 주목한다. 즉 종교와 세속을 대척지점에 놓는 학문적 기획이 궁극적으로 종교와 세속을 분리시키기 어려운 이슬람권 사회를 비합리적 종교와 사회로 규정하고자 하는 신식민지 기획이자 서구의 근대국가 신화라고 평가한다. 아랍세계를 종교적이고 비합리적이며 폭력적이라고 규정한 후 아랍세계를 향한 이러한 학문적 기획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 강한 종교이론 중 카사노바와 캐버너의 공격의 지점은 바로 근대정치영역의 종교와 정치의 분리신화이다. 초기기독교사상가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이어서 내려오는 하늘의 도성과 땅의 도성의 분리는 서구 정치사와 종교의 오래된 질문에 속한다.

신학자 본회퍼가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가담할 때도 이유는 정치가 종교를 지배하려는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카사노바와 캐버너에 의하면 종교와 정치는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다. 오히려 현대국가가 정교분리가 되기 전 부족공동체보다 더 종교적이지 않은가라고 질문한다. 종교와 세속에 대한 이런 분리신화는 근대서구의 기획이다.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폭력으로 기울기에 근대정치는 종교를 공적영역에서 배제해야 개인의 자유와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현대정치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캐버너는 도전한다. 즉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정치철학의 권력배열(국가 아래 종교, Erastianism)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이형규, 2016). 국가에 대한 충성은 공적이며 신에 대한 충성은 사적인 것이라고 분리하면서 합리적 세속과 종교적 폭력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의 복잡한 국제정치적 갈등들을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근대초기 서구제국주의의 팽창 때 식민지 확보에 매진하면서 서구 근대국가의 폭력을 합리적인 것으로 강조하면서 생겨난 또 하나의 신화라는 것이다. 현대 서구의 자유주의는 종교와 정치가 간단히 구별되지 않는 무슬림사회 속에서 그것의 결정적 적을 발견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며, 광신적이고 폭력적인 타자를 만들어 그 타자에 대한 강압적 수단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라고 캐버너는 지적한다(Cavanaugh, 2009: 5). 물론 그도 종교나 세속적 이데올로기와 그 실행도구들이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종교가 세속의 이데올로기나 제도들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주장이다. 종교도 폭력적일 수 있는데 문제는 어떤 정치적 상황과 조건 속에서 종교의 범위가 구성 되냐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뒤를 보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캐버너는 경제와 정치적 동기들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주어진 어떤 조건들 아래에서 종교가 폭력에 기여하는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 104 - 군대가 행한 전쟁을 합리화시키는 것을 보면 기름, 인권과 자유, 천상의 악과의 싸움 등 여러 복잡한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종교가 특정한 시간 속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또 종교 아닌 다른 요인들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결국 종교가 세속 권력과 권위의 다양한 배치 구성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 체제에서 종교는 공적이며 세속적인 합리적 영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초역사적이며 초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위치시켰다. 오랜 종교전쟁을 통하여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근대 국가로 주권과 권력이 이동되면서 이것을 종교폭력으로부터 평화로의 진보적 행진이라 찬양하였건만 국가들 간의 전쟁은 감소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캐버너는 이것을 교회로부터 국가로의 “성스러움의 이동”이라 명하면서 새롭게 출현한 근대국가들이 성스러움을 점유하고 국가 자체가 새로운 종류의 종교가 되었다고 지적한다(Cavanaugh, 2009: 11). 이제 새롭게 등장한 근대국가는 국민들의 생과 사를 강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캐롤린 마빈과 데이빗 잉글은 이러한 주장을 근대 미국의 국기를 중심으로 한 논의에서 전개한다. 이들에 따르면 국가를 위해 충성을 강조하고 국가를 위해 죽은 자를 숭배하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현대국가에서도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아니 모든 국가의 본질적 모습이다. 뒤르케임이 말했듯이 내면의 이중적 인간(Homo duplex)의 갈등 속에서 자아사랑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아보다 더 큰 사회와 국가를 위해 살라고 요청하는 오늘날의 국가공동체를 종교적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근대국가는 너무 종교적이다. 마빈과 잉글에 의하면 우선 종교는 자신의 집단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다고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마빈은 희생을 종교적 의례의 중심으로 본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희생의 제의의 반복이 문명과 사회유지의 숨겨진 폭력의 동학임을 밝혔듯이 이런 차원에서 근대민족국가는 종교적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국가를 위해 죽을 강한 의지 같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eim)처럼 국가 공동체는 종교적 헌신의 본질적 실체이다. 뒤르케임에 의하면 하나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의 동의의 상징(emblem)이 요청된다. 그러나 마빈은 뒤르케임은 어떻게 이런 토템이 집합적 감수성을 묶어내는지 잘 설명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토템의 동학을 오늘날 미국사회 속에서 추적하면서 마빈은 토템적인 현대국가는 자신의 해체 위험 속에서 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제를 유지케 하는 의례들과 신념들을 만들어내는데 바로 국기에 대한 마술적이며 원초적인 사용이 그것이라고 말한다. 국기가 미국 시민종교의 토템신물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나라에서 국가주의는 가장 강력한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마빈과 잉글은 한 논문에서 2001년 9・11테러사건 전에 미국을 휩쓴 폭력적 애국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였다(Marvin and Ingle, 1996: 176). 후에 이것을 발전시켜 Blood Sacrifice and the Nation: Totem Rituals and the American Flag (1999)를 출판하면서 어떻게 미국의 국기가 미국시민종교의 토템의 신물로 자리를 잡고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추적한다(Marvin and Ingle, 1999: 4).

미국의 시민종교를 위해 국기는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 국기를 위해 미국인들은 죽이고 그것을 품고 그리워하며 죽어간다. 미국 애국주의가 종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살인하는 에너지들을 조직하기 위한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쟁 관련 의례들과 전몰장병 추도식을 보라. 국가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갱신하는 숨겨진 메커니즘의 근원은 국가를 위한 피의 희생이다. 국가를 위한 “궁극적 희생”은 국기와 다른 의례의 물건들을 포함한 예식에서 정성스럽게 의식화된다. 피의 희생은 창조와 구원의 행위이다. 이 세계를 구하고 공동체를 살린 전몰장병을 예식에서 높이 기리며 구원과 해방의 교리가 완성된다.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절대주권을 가져오게 된 근대유럽의 국가들은 공인된 살인의 권리를 인수받았다. 살인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와 희생을 요청받는 자들의 결정은 사람들이 아니라 토템 공동체인 국가가 결정한다. 국가만이 살해할 수 있다. 누구를 죽이나? 국가는 자신이 살기 위해 국가 숭배자를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 106 - 죽인다. “토템의 비밀이자 가장 큰 터부(taboo)는 자신의 숭배자들을 소유하고, 소비하고, 먹는다는 것이다(Marvin and Ingle, 1999: 4).” 더 나아가 희생자들을 자신들의 그룹 밖 외부에서 찾는 가장 강력한 의식을 거행하는데 바로 전쟁이다. 이 토템 희생은 언제나 가장 최근의 희생을 추모함으로써 국가를 새롭게 갱신하도록 구성원들을 인도하는 토템국가 체제의 감춰진 토대이다(Marvin and Ingle, 1999: 5). 미국 국민들은 그들의 종교보다 국가를 위해 좀 더 죽을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미국의 여론조사가 보여주고 있다(Marvin, 2014).

마빈은 미국의 시민종교의 폭력적 성격을 국가적 희생 제의로, 대통령 선거를 국가적 풍요축제로 해석하며, 이 둘은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의 의식 형성에 있어 중심적인 행사가 된다고 보았다. 의례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집단을 통일하는 것인데 어떻게 집단의 기억이 국가 의례를 통해 생산되고, 국가의 자기의식의 생산과정과 그것을 국민들이 소비하고 역할이 수행되고 의례로 재생산되는지 정밀한 이론적 토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근대초기부터 서구제국주의의 팽창 때 식민지 확보에 매진하면서 국가의 폭력을 합리적인 것으로 은폐하기 위해 근대국가의 신화가 만들어졌다고 마빈은 지적한다.

캐버너와 마빈은 근대국가의 폭력성과 종교적 성격을 밝혀냈다. 전통적 종교가 아니라 폭력의 권리를 가지고 행사하고 있는 국가임을 감추려 갈등의 원인과 책임을 종교에게 돌리고 있다. 종교가 폭력적인가, 근대민족국가가 폭력적인가? 정리해 보면 종교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고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근대정치는 종교를 배제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는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근대국가는 너무도 폭력적이었다. 종교세속화론은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정치철학의 권력배열(Erastianism)을 정당화하고 국가의 종교성과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한 학문적 기획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국가에 대한 공적 충성과 신에 대한 사적 충성을 구별하면서 ‘합리적 세속’과 ‘비합리적 종교’를 이항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세계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폭력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못된다.

종교가 폭력을 고취시키는지, 사회역사적 상황과 상관없이 종교는 감정적, 충동적, 비이성적이어서 사라져야 하는지, 그리고 근대국가는 합리적 이성적이어서 갈등의 해결자가 될 수 있는지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신생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폭력들, 그 중에서도 종교가 개입된 폭력들을 살펴봄으로써 문제해결의 단초를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결국 한반도에서 벌어진 그리고 벌어질지도 모를 폭력의 당사자이자 피해자는 우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예방해야 할 몫도 그 땅에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모름지기 사회과학적 이론의 적실성은 실재 발생한 현실사건에 적용한 분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복잡한 사회정치적 상황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그 폭력성의 강도와 기간이 결정된다고 본다. 즉 지역과 역사의 제한된 상황 속에서 세속국가나 체제의 허락과 제약 속에서 종교는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해방 후 한반도 분단체제 속에서 두 신생국가들은 서로 경쟁하며 탄생하자마자 자신을 축복한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살인과 희생을 요구하였다.

 

III. 사례연구: 한반도분단체제하 개신교의 종교폭력

1. 분단 체제: 백낙청

한반도 분단체제론을 처음 제기한 백낙청은 이메뉴엘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의지해 한반도 위에 ‘분단체제’가 실재한다고 주장하였다(백낙청, 1994).1)

 

       1) 백낙청에 대해서는 김성민・박영균(2015)을 참조 및 재인용하였음. 

 

분단체제는 남과 북의 개별적 체제들과 달리 남북 전체를 포함한다.

나아가 그는 200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분단체제의 ‘동요기’ 내지 ‘해체기’의 분기점으로 보았다. ‘체제’라는것은 일정한 독자성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 재생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분단체제는 세계체제-분단체제-남북분단국가체제로 세 가지 층위 내에서 나름의 생산 및 재생산 메커니즘을 가지고 남북 모두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체제 내적으로 남북 모든 구성원들의 삶에 분단체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한 부분인 분단의식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고착되었다. 분단의식의 극복은 단순히 남북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공동체 형성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재생산되는 분단의 문화, 특히 분단을 강화시켜 온 분단폭력 배후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2)

 

    2) 그래서 백낙청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만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의 모든 분열, 우리 마음속의 모든 병들과 결합되어 있는 분단체제를 우리 마음이 통일을 향 해 열리는 일과 분단체제의 외부적 기구들을 몸으로 허물어 가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백낙청, 1994: 87). 그는 분단체제가 미국의 패권 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식민성을 재생산하고 나아가 “국가주의, 민족주의, 개 발지상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 등 근대 세계체제의 제반 이데올 로기를 강화함으로써 이 체제의 충실한 구성요인으로 복무”하고 있다고 지적하 였다(백낙청, 2009: 39). 분단체제의 폭력성과 군사주의의 영향에 대해서는 후 학들이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본 소고도 이러한 시도 중 하나이다.

분단체제는 한반도 땅 위에뿐만 아니라 남북 구성원들의 신체 안에도 체화되어 우리 삶의 비합리적인 양식과 태도, 정서에 영향을 주어왔다. 분단국가의 승인 아래 벌어지는 분단폭력 문제는 시급성을 요청한다.

 

2. 분단폭력: 군사주의

사회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은 ‘폭력’이란 남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물리적 수단이나 힘이며, 폭력에는 상해의 물리적 행위뿐만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위협적인 태도와 말도 포함된다고 보았다(갈퉁, 2000: 414). 이러한 측면에서 김병로는 분단체제하에서 발생하는 분단폭력은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저해하는 것으로 분단으로 야기된 폭력적 활동과 구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 담론을 총칭”한다고 정의하였다(김병로, 2016: 15).3)

 

     3) 분단폭력 부분은 김병로・서보혁, 분단폭력: 한반도 군사화에 관한 평화학 적 성찰 (아카넷, 2016) 참고 및 재인용 하였음.

 

한반도에는 분단체제가 아니면 발생하지도 존재하지도 않았을 분단폭력들이 존재한다. 비판적 사회실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분단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들이 사회적 행위자들 속에서 인과적 동인으로 작동하여 폭력을 통해 분단체제를 유지-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만들어지고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이기홍, 2017; 이형규, 2019).

폭력에는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힘의 행사뿐만 아니라 제도와 문화적인 폭력도 있다. 인권유린, 그리고 빈곤과 착취 등 제도와 이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담론 등은 문화적 폭력으로서 남북 모두에서 나타났다. 분단체제하에서 북에서 김일성 3대 권력세습체제와 선군정치체제로 그리고 남의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은 반공주의에 기초해 사회전체가 군사적 규율과 훈육체계를 통해 남북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박재환, 2009).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같은 체제 이데올로기는 폭력 사용의 대의였으며 남북은 각자의 이념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종하고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였다. 나아가 분단체제는 군부의 위상을 상승시켰고 군사주의가 유교적 가부장주의와 상호작용 하면서 민에 대한 군의 지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인권보다 안보가 우선인 사회를 남북 구성원 모두에게 강요하면서 근대시민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정치적 자유와 시민권이 수시로 제한당하였다. 분단폭력은 “분단대결 구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활동” 즉 문화적 폭력을 포함한다. 문화적 차원의 분단폭력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안전/안보가 최고의 가치이며 늘 이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 주위를 경계하며 내적으로는 자기검열을 일상화한다. 상대를 타자화시켜 우리와 분리, 배제, 소외시켜 물리적 폭력 행사를 용인하는 환경을 만든다. 교육, 영화, 방송, 언론, SNS 등 각종 문화적 기제를 통해 이를 확산한다(서보혁, 2016: 41).

문화폭력들 중 “분단 이데올로기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의 대립과 분리를 정당화하는 신념체계”로서 특히 종교를 통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악마화하였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해방 후 분단체제 속에서 분단폭력의 첫 피해자가 되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폭력을 신의 뜻으로 행사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해방전후 서북지역의 사회와 교회를 논한다. 미국 선교사들의 감독을 받고 있던 서북지역 한국개신교회는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하에서 내세를 향한 강한 열망과 이세상적 금욕적 개인주의 윤리를 심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전 조선시대부터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평양과 서북지역은 한국적 청교도들에 의해 활력 넘치는 시장경제와 자유인으로서의 근대적 시민사상이 확대되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소 냉전체제가 분쟁갈등의 선(default line)을 긋고 난 후 한반도는 성서 속 우주 종말의 때 악마 루시퍼와 천사 미가엘의 아마겟돈 전쟁터가 될 운명에 놓였다.

주일아침마다 울려 퍼지던 평양교회들의 종소리는 사라지고 세계제국 로마의 황제가 전쟁을 독려하며 부른 출정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Dulce et decorum est. Pro patria mori.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은 아름답고 명예로운 것이리라! (Owen, 1921: 15)”4)

 

           4) 로마 황제이자 시인 Quintus Horatius Flaccus (BC65년-BC8년)의 전쟁을 독려 하는 시에 나오는 구절인데 윌프레드 오웬이 자신의 시 “Dulce Et Decorum Est”에서 인용하였으며 전쟁을 참혹함을 묘사하였다. 

 

3. 해방전후 정치적 상황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1920년대 이후 강화된 일제의 통치 아래 기독교민족주의 운동과 지도자들이 뿌리가 뽑히면서 일제의 반공정책에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순응하게 된다.

특히 서북지역의 기독교회 안에서는 일제에 저항하던 지도자들이 제거된 종교적 진공상태에서 일제에 순응하는 것이 진보적인 것이라는 ‘종교적 진보성과 정치적 어용성의 결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강인철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1930년대 초반에는 일제의 반공정책에 따라 반공주의를 교리적인 수준으로 만들었으며, ‘반일주의=극단적인 종교적 보수주의’, 그리고 ‘친일주의=종교적 진보주의’라는 논리를 만들어 나가며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이제 반공은 친일과 동의어가 되었다(강인철, 1995: 345-347).

해방 후 북이 공산화가 되면서 기독교를 탄압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당시 북의 기독교인들의 사회경제적 신분이나 정치적 성향이 더 컸었다.

현대한국종교사가 윤정란에 의하면 서북지역은 조선시대 주류에서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일찍이 19세기말부터 서구의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계급적 성격은 새로 출현하기 시작한 자작농들과 상공인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윤정란은 이들의 사회윤리인 기독교적 절제 정신이 막스 베버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말한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과 ‘선택적 친화성’으로 결합하였다고 평가한다(윤정란, 2015: 43-44).

당시 평양은 일제로부터 해방과 함께 소련과 소련군정(소군정)이 시행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고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김화식의 기독교자유당, 한경직과 윤하영의 기독교사회민주당 같은 기독교계 정치조직은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서정민, 1995: 406).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제의 패망 후 북쪽의 기독교 세력은 빠르게 조만식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장로 이유필의 평북자치위원회, 목사 김응순의 황해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등 자치기구들을 조직하여 행정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소군정과 그들의 후원을 받던 김일성 세력은 조만식의 건준을 해체시키고 군정이 아니라 민정이라 주장하며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반반으로 참여하는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해 정치주류세력이었던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킨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한경직 그리고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사회민주당과 기독교자유당을 세워 공산당에 맞섰지만 패하였다.

소군정은 일제로부터 빼앗은 무기들을 김일성세력에게 주었고 빠르게 북 전역의 공공기관과 언론들을 점거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 강압적으로 진압하였다.5)

 

       5) 박명수 교수가 미국 국립보관문서에서 찾은 한경직, 윤하영의 비밀청원서. 배재성,“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 돼”, 중앙일보 2017년 8월 16일. https://news.joins.com/ article/21847679 (2020 년 6월10일 접속).

 

1945년 11월 용암포에서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물리적 충돌이 있었고 이것이 신의주 학생 시위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이 조직한 중학생들이 무장을 하고 공산당 위원회를 습격한 사실”을 김일성은 보고한다(윤정란, 2015: 101).

검거를 피해 한경직과 윤하영은 월남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던 조만식은 체포되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민족의 반역자와 친일 반역자로 비난받았다.

1946년 소련군 사령부는 김일성과 함께 북한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주장을 펴면서 지주와 자작농을 제외한 50% 이상의 소작농의 적극적 찬성 속에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해 지주제를 해체하고 자작농과 지주들이었던 기독교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아래 1946년 3월 5일부터 1달 만에 토지개혁과 기업의 90%를 국유화시켰다.

이런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강량욱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보통의 북한 사람들보다 “더 부유”했고 “더 반동적”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종교박해라고 했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빼앗긴 토지”였다고 주장했다(류대영, 2009: 220).

반제반봉건의 제거 후 인민민주주의의 혁명을 실시한다는 이름 하에 전직경찰, 관리, 지주, 일본기업 주주 등 “모든 우익적 요소가 사라짐으로써” 혁명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소련군사정권과 북의 공산주의 세력에게 기독교는“자본주의에 대한 옹호기관으로서의 교회, 아메리카인들의 앞잡이로서의 교회, 교회의 이승만 지지와 북한보다는 남한에 대한 선호성, 민족주의자들의 집합소로서의 교회”였다(서정민, 1995: 405).

물론 김일성은 자신들의 행동의 정당성을 위해 기독교인들에 대해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당이 없던 자는 거의 없고 이들은 놀고먹기만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평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김일성과 기독교는 남북분단 전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류대영, 2009: 210-212).

독립운동으로 부모를 잃고 감리교 목사 손정도와 교회의 보호 속에서 생명을 건지고 청소년시절 교육받고 자랐던 김일성이 기독교회와 신도들을 단지 이념과 당이 다르고 지주였다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자작농과 지주가 많았던 “교회의 장로급 지도자들은 지주라 하여 축출하니 부득이 월남”하게 되었으며 인민위원회는 수많은 지주에게 24시간 내에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떠나라고 하였다(윤정란, 2015: 107).

이때 반대하던 기독교인들은 체포, 행방불명, 처형되고 나머지는 검거를 피해 대거 월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민족 내 좌우 정치세력들의 활동반경이 당시 미소 냉전 체제의 한반도 정책과 정세의 영향 하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소냉전체제와 그것을 기획하고 주도한 행위자들은 우리민족에 강제적으로 두 개로 분단된 정권의 탄생을 원했다. 이를 통해 분단체제의 고착화와 한민족 내전을 향한 결정들을 차곡차곡 실행하였다.

매번 냉전세력들의 결정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종교를 포함한 정치세력들 간에 대치와 갈등선이 수시로 변화되었다.

냉전체제하 한반도 미소군정기에는 일제강점기 독립민족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가 해방의 기쁨도 잠시 당이 다르다고 오늘은 죽여야 할 적이 되었던 시기였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고 증오하는 악순환인 ‘익시온의 수레바퀴’와 폭력의 씨앗이 차곡차곡 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4. 월남한 서북기독교인들과 전투적 반공주의

한국전쟁 전후를 통하여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미국에 의한 남한 통치의 협조자이자 전쟁구호물자 독점과 일제 적산을 받는 데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으며 이것을 기반으로 남한에서 정치, 사회적 헤게모니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신이 준 기회였다”(윤정란, 2015: 19).

한국전쟁 중 북측지역 회복 후 통제권 문제로 이승만 정권과 갈등하였고 정권핵심에서 배제되었으나 1961년 박정희 군부세력의 5・16군사정변 때 적극 가담하고 정권의 반공주의 노선에 적극 협력하여 다시 남한의 정치, 사회, 교육, 종교 전 영역에서 주류로 활동하게 되었다.

월남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미국선교사들과 미군정의 도움으로 자리를 빨리 잡으면서 먼저 장로교 교단의 주도권을 쟁취하게 된다. 윤하영은 미군정의 공보부에서 일했고, 한경직은 베다니 전도회(현 영락교회)를 설립해 월남기독교인들을 결집해 나갔다.

그들은 결국 장로교 총회 내 신사참배거부자 그룹과 조선신학원 그룹(이후 기독교장로회)과의 주도권 경쟁에서 이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이북출신 기독교인들의 미국의 선교자금 독점은 큰 역할을 한다(윤정란, 2015: 68-69).

교회를 통한 구호물자는 서북출신 기독교인들과 활동을 같이한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주도하였기에 당연히 서북출신 기독교인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윤정란, 2015: 109).

미국 유학을 경험한 “평안도 엘리트층”이 미군정기에 국가기구에서 자연스럽게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강인철, 2006: 527). 한경직은 선교사들의 한국어 통역자였으며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동문이었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의 민족주의계열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 한경직과 윤하영을 비롯한 월남 기독교인들은 남한사회 정치, 경찰, 군사, 교육, 종교 등 전 영역에서 반공주의를 주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남한사회에서의 안정적 정착을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 ‘탈출신앙공동체’인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월남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는 반공의 전투기지역할을 하게 된다(윤정란, 2015: 102).

한국전쟁전후 기독교세계봉사회(CWS)는 가장 큰 구호물자 기관이었는데 미국 NCC의 산하기관이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교단으로서 한국의 가입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졌다.

군사작전의 이유로 유엔군의 통제 아래 있으면서 반공주의 성향의 단체나 교회가 전쟁구호물자를 더 많이 지원 받았다.

숭미주의와 더불어 전투적 반공주의는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한미동맹은 개신교회 내에서 이루어졌고, 교회는 “친미주의의 강력한 성채”로서 시민사회로 영향을 끼쳤다(윤정란, 2015: 43; 강인철, 2006: 526).

세계냉전체제하에서 북한공산주의에 맞서 미국 기독교계가 구호단체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이제 세계 기독교인들은 반공전선으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였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적개심을 타오르게 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후 조성된 냉전체제의 강화를 위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개인은 자발적 동기로 행위 한다고 믿지만 냉전 분단체제의 연극무대에서 그들의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어떻게 충실히 수행하느냐가 평가와 생존의 보증조건이었다.

 

5. 한국개신교 종교폭력의 시작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회의 핵심 구성원이었으며 반공주의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946년 결성된 서북청년회는 서북의 오산학교, 신성학교, 숭실학교 출신들이 주동이었다.

서북청년회가 민간인 학살 등 반공에 앞장서 청부 테러단이 된 것은 생계 때문이거나 미군정과 극우세력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등의 해석이 있으나, 국제공산화의 확장과 좌익세력결집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컸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마어쩌둥의 인민해방군의 대립 즉 국제적 공산주의와의 대립이라는 구조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윤정란, 2015: 221).

1946년 10월 대구 봉기가 일어나자 이승만 정권은 반공세력 결집이 시급해 서북청년회를 조직하고 대응하였다.

한경직은 공산당으로 인해 남한 전 지역이 혼란한 가운데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서북청년회를 조직하였다고 고백하였다.

이후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제주 반란사건 평정에 기여하였고 이 일로 영락청년들이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술회하였다(윤정란, 2015: 224).

서북청년회는 공산주의 지지자들과 각 계층과 단위에서 계속 충돌을 하였다. 후에 서북청년회원들 중 상당수는 미군 방첩대와 산하 유격부대원이 되어 북으로 침투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이들 중 일부는 백의사로 흡수가 되거나 그 후 KLO부대, 동키부대, 호림부대 등의 옷을 바꿔 입어가면서 한국전쟁 전후 오로지 “가족을 구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반공주의 이념의 전투적 전사들이 되어갔다(윤정란, 2015: 230-231).

미국 주도 유엔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1948년 4-9월까지 발생한 제주4・3 항쟁은 서북청년단의 참여 하에 군경이 진압하였던 사건이다.

이는 이후 전개될 분단체제하 반공주의 이념 위에서 북정권의 악마화와 분단을 선과 악의 ‘우주적 전쟁’으로 신학화하는 ‘종교적 폭력’의 시작이었다.

최초의 한국 군대인 조선경비대 9연대와 11연대대에 들어간 서북청년들은 ‘악몽의 그림자’로 제주민들에게 불릴 정도로 끔찍한 잔혹성을 보여주었다(윤정란, 2015: 236).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과도한 백색테러와 폭력은 당시 중국에서 공산주의의 확대와 무관치가 않았다.

냉전체제에서 아시아 전역에서 붉은 군대가 점점 승리하고 있었다. 미군정과 남한정치세력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때에 군과 경찰로 옷을 갈아입은 서북청년회는 제주도에서 1949년 전후 대대적인 방화와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극과 인륜을 저버리는 야만적이며 잔혹한 행위들을 벌였는데 ‘시연적 폭력’ 바로 그것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면서 기독교 목사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요한계시록의 적룡, 괴물, 아낙 자손, 사탄, 마귀로 표현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삼천리강산 돌아다니며 삼킬 자 찾는다”고 설교하고 “마귀승리 초래할 휴전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한경직은 “공산주의자는 아낙 자손, 천륜도 인륜도 무시하는 공산당을 섬멸할 수밖에” 없다고 설파하였다.

이를 위해 십자군 양성이 교회의 임무요, 휴전은 마귀와의 타협이라고 하였다.

교회는 휴전을 반대하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성명서에서 “공산주의는 영원히 회개할 수 없는 마귀”라고 표현하고 그들을 전멸시켜야 세계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1955년 정부 공보처장이었던 갈홍기 목사는 한국이 “공산진 타멸의 선봉국...민주진 전체의 삶을 양 어깨에 걸머지고 멸공 투쟁의 선봉으로서 혈투에 혈투를 거듭 공산진 타도 위한 세계의 모든 길은 한국으로 통해” 있다고 반공산주의 진영의 선봉으로 한국의 선민의식을 강조하였다.

감리교의 홍현설은 생활반공을 강조하면서 사회 전영역에 기독교인의 세포조직을 만들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전세계 공산화’ 음모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빈곤을 퇴치하자고 주장한 배경에는 당시 남한에 비하여 북한이 공산주의 경제 블록 속에서 빠른 경제성장을 하는 것에 기독교계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자가 노동조합을 지배하고 있으니 많은 산업현장을 기독교사상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윤정란, 2015: 267-269, 284).

한국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종교폭력이었다.

공산주의를 악마화한 종교적 폭력은 남한의 교회 지형에서 극좌극우가 아닌 온건한 노선에 위치한 남북협상론자인 김규식까지도 용공으로 몰아 붙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계 맺은 교파나 단체들 또한 용공으로 매도하였다.

휴전후 1949년 미군철수 때 온건노선을 따르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모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가 미국철수 반대 반공기독교 총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김흥수, 1995: 428).

1945년 미군정이 행정고문 11명 중 3명을 목사로 임명한 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계는 미군정이 원하는 냉전체제와 분단체제하 반공주의의 첨병이 되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1920년대 미국 기독교의 반공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따라한 측면도 보인다. 미국 기독교계는 ‘세계공산화’라는 공산주의 음모론을 종말론적 전쟁과 연결지어 이미지화하는 포스터와 설교를 전파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공산주의는 악마에 의해 영감과 지시받고, 동기부여 받는다”고 설교하였다(류대영, 2009: 360).

성서의 종말사상과 현시대의 사건들을 연결해 종말이 임박했음을 믿었던 극단적 성경주의자들의 전천년설주의(Premillennialism)자들은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

이에 대항한 미국의 운명적 사명과 애국심이 합쳐져서 냉전시대의 반공투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전 사회로 퍼져갔던 한국사회에서 소련과 중공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북한공산주의자들에 맞서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국교회의 반공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류대영, 2009: 261).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기초를 기독교 정신 위에서 세우고자 했던 기독교인들에게 교회와 반공주의는 ‘선택적 친화성’의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는 지금이 유물론적 독재국이 아니라 기독교적 이상을 건국케 할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기며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으로 묘사하며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성서 속 천상의 전쟁, 종말론적 우주적 전쟁으로 해석하였다.

일상 속의 거짓말, 도둑질, 테러 등 생활의 죄도 공산주의의 악영향으로 생긴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모든 게 북한 공산주의 탓이 되었다(김흥수, 1995: 426-428).

한국전쟁 전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과 남쪽의 교회는 분단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악순환에 깊이 빠져 분단폭력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상대를 악마화하는 종교폭력을 지속 강화해 나갔다.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군 학살’ 사건(1950년 10월)을 소재로 한 황석영의 손님의 한 구절이다:

 

“우린 십자군이다. 빨갱이들은 루시퍼의 새끼들이야. 사탄의 무리들이다. 나는 미가엘 천사와 한편이구 놈들은 계시록의 짐승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주께서 명하시면 나는 마귀들과 싸운다(황석영, 2001: 22).”

 

물론 소설이지만 작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신천, 재령지역 학살사건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고 구상하였다.

전투적 기독교 반공주의자들은 1970년대 월남파병 때에도 공산주의를 악으로, 자신들을 십자군으로 묘사하였다.

NCCK의 길진경 목사는 베트공을 악마로 묘사하면서 “악의 행패, 평화파괴 악”을 무찌르자고 하였고 NCCK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정의의 승전”을 기원하였다. “자유의 십자군이요 평화의 사도”라 박정희 대통령은 칭송하였고 이어서 김활란은 “인간자유와 존엄성 보호, 위장없는 영구한 평화를 아시아에 심고자 몸바친 파월장병은 자유의 십자군”이라 치켜세웠다. 장로교의 교단지인 기독공보는 월남참전군은 “세계평화와 자유수호군”이며 저들은 “무신론자들의 군대”이고 “적마의 마수를 분쇄한 그리스도 정신으로 무장한 군”을 위해 축복하였다(류대영, 2009: 271-276).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 분단체제와 분단폭력에서 발생한 종교폭력은 종교계, 특히 개신교회 안의 모두에게 전염되어 갔다. 종교폭력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적으로 규정된 타자와 우리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구분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었다.

여기서 때로는 종교폭력이 세속분단폭력보다 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종교인에 의한 폭력은 너무도 잔인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최태육, 2018).

 

IV. 결론: 연구의 한계와 제언

본 연구는 한국교회사학계의 연구물들에 의지하여 한국개신교와 반공주의의 관계를 최근 종교사회학계와 국제정치학계에서 등장한 종교폭력론의 시각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한국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를 통해 저겐스마이어와 애플비의 종교폭력론에 대한 캐버너와 마빈의 비판이 적실함을 제시하였다.

즉 종교폭력으로서 한국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는 분단체제의 폭력구조에 무방비로 노출된 교회가 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냉전으로 인해 분단된 하나의 민족 두 체제는 그 구성원들에게 상대체제를 향해서는 폭력과 살인의 허용을,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체제를 위해서는 희생과 피의 순교를 강압적으로 요청하였고 서북기독교가 중심이 된 한국교회는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적극 이 기회를 활용하였다.

즉 분단구조와 폭력의 첫 번째 희생자였던 서북출신 개신교인들은 전투적 반공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분단폭력의 가해자가 되어갔다.

한국교회의 종교폭력은 한국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여기서 질문은 종교가 시공간을 초월해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종교는 폭력적으로 바뀌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최초로 충돌한 지역, 해방후 근대국가형성을 위한 강렬한 민족주의가 일어났으나 불행히도 한민족 두정치체제가 나타났던 한반도에서 종교폭력이 발생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전후 발생한 종교폭력은 선행 세속적 이념경쟁과 국가형성을 위한 강한 민족주의 열망과 충돌이 없었다면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미소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발생한 한민족 내전은 한반도를 선과 악의 종말론적 싸움으로 채색시킨 우주적 전쟁터로 만들었다.

냉전체제와 그 하위 분단체제 속에서 북쪽의 무신론-공산주의와 남쪽의 종교자유-자본주의라는 이항대립적 세계관이 형성되었으며 한국교회와 반공주의는 선택적 친화성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자신의 사회윤리로 채택하고 서북기독교인들을 전면에 배치해 해방과 전쟁전후 부족한 국가적 자원 배분의 경쟁에서 물적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

신생국가의 시민종교가 되고자 하였던 한국교회의 열망은 북에서는 실패하였지만 남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사실 한국교회는 이미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자신을 변모시켰고 나아가 해방전후에는 그것을 충실히 수행할 세속정권 친화적 종교지도자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적극적인 폭력행사를 통해 분단체제의 유지, 확대, 재생산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한국개신교회는 항상 국제적 냉전체제와 남북분단체제 속에서 능동적 행위자가 아니라 기민한 반응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냉전체제의 구조 아래서 반공주의 외에 다른 행위규범과 사회윤리는 제한받았기에 반공주의를 적극적으로 택하고 특히 월남한 서북기독교인들은 전투적 반공주의를 택해 생존을 모색하였다.

선택지는 구조적으로 강압된 것이며 참여의 강도는 행위자의 합리적 이해관계를 따른 선택이었다.

이후 교회는 전투적 반공주의가 인도하는 역사의 통로를 거쳐 남한 사회의 주류종교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과도한 폭력사용은 여전히 한국 현대사에 잊고 싶은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다.

교회의 청년들을 반공의 전사로 앞세운 지도자들은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 형제, 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습니다. 싸늘한 주검 위에 흙 한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긴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십자가 아래 화해의 여정에 무릎을 꿇고 참여합니다

  (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 2018).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때 나타났던 전투적 반공주의라는 한국교회의 종교폭력은 분단체제 국가폭력과 분리할 수 없다.

세계유일의 민족분단국가로서 남과 북 모두 반성해야 한다. 더 이상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폭력과 희생, 살인과 순국을 요청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혼란스럽고 참혹했던 그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닫혀버린 역사와 사회적 조건들 속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는 야스퍼스(Karl Jaspers)가 처음 명명한 굴대문명시대(axial civilizations)의 종교로 기독교를 평가하면서 이전 부족종교나 고대왕국의 종교들과 달리 세속적 행복이나 권력소유를 넘어 종교를 고양시켜 그런 욕망을 돌파해 나가는 자기 성찰적 종교라 하였다.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이념을 창조해내고 세속국가들의 잔인함과 불평등한 구조들에 대항해 세계내적 사회윤리를 만들어낸 기독교는 굴대문명시대에 등장한 진화된 종교다(Bellah, 2011; 박영신, 2017).

이것은 인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내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능력이 인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인간은 자유를 향하여 끊임없이 믿음의 발명품들을 내어 놓았다.

한국교회가 이 세상적 가치를 넘어서는 초월의 가치를 제시하며 폭력과 희생을 찬양하는 분단체제 속에서 평화의 사도가 되어 닫힌 체제를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미래에도 교회를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믿음의 발명품을 찾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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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ociological Study of Religious Violence in the Korean War

Hyung Kyu Lee(Soongsil University)

This study provides a sociological study of militant anti-communism that propagated religious violence during the Korean War. The Cold war system brought out a division system on the Korean peninsula between 1940s and 50s. According to religious violence theory, religion has a peculiarly dangerous inclination to promote violence. After being exiled from communist North Korea, North Korean Christian defectors vigilantly served for South Korean military with militant, anti-communism during the Korean War. In particular, they were often involved with anti-communist terrors under the Korean government. Korean churches adopted this militant anti-communism from the defectors that came from up North. Furthermore, they became the leading group and the majority power of South Korean Church. By evaluating anti-communism as religious violence by the Korean Church, the Church did not promote violence. What I challenge is the argument that the Korean Church was more inclined toward violence than were both governments of the two new Korean states during war time. This study reveals that, rather, two Korean governments coercively required the killing and sacrifice of their people. It is evident that North Korea Christian defectors were raised as militant, anti-communist warriors against communist North Korea during Korean war. I would help us to see that they were the scapegoat of the division system on the Korean peninsula constructed by the Cold War. 

 

Keywords: Religious Violence, The Koran War, Korean Protestantism, Militant Anti-communism, Korea's Division System, NK Christian Defectors

 

Asian Journal of Religion and Society Vol 8 (No.2, 2020)

 Received: 29 June, 2020 Final Accepted: 11 July, 2020 Published: 20 July, 2020

 

한반도 분단체제하 종교폭력에 대한 비판적 고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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