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위치는 특별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초대 교회의 “두 개의 기둥” 사도라고 불릴 수 있고 그들의 위치는 그만큼 중요하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따로 말해지는 경우는 많지만 이들 두 사람의 관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에서(3:15)1) 바울을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1) 베드로 사도는 신약에서 베드로 전, 후서라고 불리는 두 편의 편지의 저자이다. 베드로 전서의 저작권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학자에 의해서 사도 베드로라고 인정되고 있으나, 후서의 저작권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Douglas J. Moo가 NIV Application Commentary on 2 Peter, Jude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6, p.23)에서 말하는 대로 “베드로후서가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이런 결정을 한 초대 교회가 베드로의 저작권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Moo의 주석 22-24을 참조하라
이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그들은 서로 간에 얼마나 깊은 교제가 있었으며,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을까?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역에 준 영향력과 반대로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떠했을까?
초대 교회 신학의 중요한 산맥의 분수령이 되는 베드로와 바울의 관계는 초대 교회 신학을 이해하는 데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베드로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울과 바울의 “그 모든 편지” 특히 갈라디아서 1~2장 속에 나타나는 베드로 사도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함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고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엡 2:20).
사도 바울에 의하면, 초대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도가 있었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였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사도들이었다(갈 2:8-9).
첫 번째 그룹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두 번째 그룹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에는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다.2) 이 사실은 바울의 사도권과 사역에 대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2) 바울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한 사역의 동역자로는 바나바와 실라가 있다. 바나바에 대해서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는 예수님의 12 제자 중 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안디옥 교회가 개척되었을 당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점검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나바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모였던 120 문도 중 한 사람이었거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층의 한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사도행전 11:24에 의하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 또한, 그는 바울 사도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인정받은 선지자들과 교사 중 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행 13:1). 실라는 선지자라고 불리고 있으며(행 15:32)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행 16:38).
두 그룹의 사도들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었지만, 그들이 받은 사명은 각각 달랐다.
이 사실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의 사명이 달랐다면 그 서로 간의 차이점이 각각 다르게 전파되어 온 두 그룹의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어떻게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화를 이루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그룹의 관계는 무엇이었으며 서로의 사역과 복음 형성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
또한, 그들의 사역이나, 전파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어떤 차이점이나 공통점이 있으며 초대 교회 형성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두 개의 그룹 사도의 사역에 대한 기록과 그 사도들의 저서, 특히 갈라디아서 1~2장의 바울의 자서전적인 구절들과 베드로후서 3장 15~17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두 사도의 관계
각기 다른 두 그룹의 사도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동일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역사하였다는 것과 또한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모든 사도가 서로 사귐을 가지며 사역을 하였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른 그룹의 사도들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아는 것은 바울의 사역과 베드로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들의 복음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빛을 비춰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는 신약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들이 쓴 편지들에서 바울과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표현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역시 이 두 그룹의 사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갈등 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승계 관계로 보거나 아니면 상호 간의 역할 분담 중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 초대 교회에서의 두 사도
초대 교회에 있어서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과 위치는 신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아주 독특하다. 특별히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들의 행전을 기록하면서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1) 초대 교회에서 베드로의 지도력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베드로가 열두 사도 중, 특별한 주도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다.3)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도 베드로의 이름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4)
비록 모든 제자가 다 나타나지만, 베드로가 주도권을 잡고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뽑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행 1:15-22). 또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후 일어난 사건에 대해 전 세계에서 모인 경건한 유대인(God-fearing Jews)이 크게 놀라 모였을 때 나서서 설교한 사람도 베드로였다(행 2:14).
바울의 지도력이 등장하기까지는 베드로의 지도력은 요한과 함께 아니면 홀로 사도행전 전반부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5)
3) 열두 사도의 이름 중 베드로가 제일 먼저 거명되고 있다(마 10:2; 막 3:16;눅 6:14).
4) 행 1:13. 사도행전이 바울의 제자인 누가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생각할 때 사도행전에서도 계속 베드로가 제일 먼저 등장하며, 열두 제자 중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이 둘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5) 요한이 함께 등장을 하다가 나중에는 두 사도가 각각 다른 독자적인 사역을 하는 것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즉, 베드로와 바울이 사도행전의 중요한 두 지도자란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 초대 교회 최대의 신학자 바울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에 나타난 베드로에 버금가는 독특한 인물이다.6)
그는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을 말하지 않고는 사도행전, 특별히 그 후반부는 말할 수 없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 특별한 부름을 받은 이후 그가 차지한 위치는 특별히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었다.
임스 던(JamesD. G. Dunn)이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바울은 가장 위대한 첫 번째 신학자”이다.7)
어떤 의미에서 “바울의 영향력과 저서가 기독교 형성에 차지하는 비중은 어떤 일개인도 행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음”8)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다
6) J. Louis Martyn은 Anchor 성경 주석 시리즈 『갈라디아 주석』에서(Doubleday: The Anchor Bible, 2004) 두 사람의 관계를 두 개의 복음 선교의 정확한 상대방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In the formula of Gal 2:7-8Peter is Paul's exact counterpart, the two being identified as the two gospel missions, one to the Jews, one to the Gentiles (173).”
7)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Michigan/Cambridge,UK: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8), 2. Dunn은 심지어 바울을 기독교 제일 세대에 찾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예수 그리스도]의 신학을 완성한 유일한 최초의 증인(the only one firsthand testimony, theologizing of only one man)”이라고 부르고 있다.
8) Dunn, 『바울사도의 신학』, 2.
나. 신약에서의 사도권
그렇지만 베드로와 바울은 동일한 수준에서 비교해서도 안 되며 비교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각각 다른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직임이 존재한다(고전 12:4-12). 하나님은 어떤 이는 사도로 부르셨고, 어떤 이는 선지자로 또 어떤 이는 교사로 부르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은사와 각종 방언 말하는 은사도 주셨다.9)
9) 고전 12:28; 엡 4:11에는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라는 직분을 더하고 있다.
로마서 12:4~8에서 바울은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조금 다른 순서와 기능의 표현을 보이고 있다. 즉, 예언의 은사와 섬기는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와 권위 하는 은사와 구제하는 은사와 다스리는 은사를 열거하고 있다.
(1) 사도의 직분
초대 교회에서 성령님이 주신 은사와 직임에는 다양한 종류의 것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 직분과 선지자의 직분이다.
이 두 직분은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교회의 터가 되고 있다(엡 2:19-22).
사도 직분은 초대 교회에만 국한되어지는 유일한 은사이다.
그런데도 사도들 개개인의 부름 역시 독특하고 그들의 사명 역시 독특하다. 사도(avpo,stoloj)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a vposte,llw) 받은 자를 나타내고 있다.10)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3:1).
공관복음에 있는 열두 사도의 기원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예수님이 친히 열두 사도를 부르셨고, 그들로 말씀을 전파하러 보내셨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3:13-15)고 기술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서는(6:13) “사도라 칭하셨으니”라는 구절이 발견된다.11)
10) 신약에서의 사도에 관한 기원과 의미에 관해서는 Karl Heinrich Rengstorf, “avpo ,stoloj”, TDNT 1을 참조하라.
11) NIV 성경은 마가복음의 이 부분에 “그들을 사도로 세우시고”(de signating them apostles)라는 구절을 넣었다. 이 부분에 대한 본문 비평에 대해서는 Metzger의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5), 80을 참조하라.
(2) 신약 저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데 사용된 사도의 명칭
신약에는 요한 계시록을 포함해서 21권의 서신이 있는데12) 이 서신들은 여섯 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13)
이 여섯 명의 저자 중 바울과 베드로만이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디도서에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 전서와 후서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반대로 빌립보서에서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및 빌레몬서에서는 아무 명칭 없이 자신의 이름만 소개하고 있다.
바울의 명칭들에서 “사도”는 사역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라 한다면 “그리스도의 종”은 자신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5장 1절에서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장차 받기로 준비되어져 있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극복할 것을 권면하면서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 소개하고 있다. 후서에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복음서에서 자신을 암시적으로 소개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서신에서도 자신을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지만, 복음서와 연관되는 구절들과 주제들을 통해 동일한 저자임을 보이고 있다. 요한 이서와 삼서에서는 저자는 자신을 “장로”로 소개하고 있다.14)
유다서에서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또 “야고보의 형제”로 소개하고 있다.15)
12) 요한 계시록은 묵시문학이란 독특한 장르에 속하지만, 구성 양식으로는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3) 바울과 베드로 외에 다른 네 명의 저자는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 및 히브리서를 기록한 무명의 저자를 생각할 수 있다.
14) 요한 서신의 저자에 관한 것은 이 논문의 논제가 아니며 이 논문에서는 사도 요한을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 일서, 이서, 삼서의 저자로 인정하고 있다.
15) 갈 1:19의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라는 해석을 야고보를 사도로 보고 있는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R. Alan Cole,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Galatians (GrandRapids, Michigan: Wm. B. Eerdmanns Publishing Co., 1989), 94-95를 참조.
히브리서에서는 저자 자신에 대한 어떤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3. 바울 안에 있는 베드로
가. 바울과 베드로의 만남
베드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당시에는 바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첫 만남은 아주 불편한 관계에서였다.
핍박하는 자와 핍박당하는 자로서의 만남이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베드로는 바울이 잔해하려고 핍박했던(갈 1:13) 무리의 지도자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일대일로 만나게 된 것은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한 후에 일어났다.
나. 제일 먼저 만나야 할 사람
(1)‘게바’를 심방하려고(갈 1:18)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어찌하든 베드로가 알고 있는 바울과 바울이 알고 있는 베드로가 각각 달랐을 것이다.
바울이 알고 있는 베드로는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회심 후 12제자 중 바울이 맨 처음 만날 가치가 있는 제자였다.
물론, 회심 직후에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였고, 도리어 아라비아를 거쳐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갈 1:17).
바울이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회심 삼 년 뒤였다. 그
동안에 예수님에 관한 것은 물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 대한 많은 말을 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회심 후의 행적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에 의하면, 다메섹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즉시 간 것처럼 이해되기 쉽지만 갈라디아서의 언급을 보완하면 회심 후 3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을 알 수 있다.16)
16) 바울의 행적에 대해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진술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Moises Silva의 저서 Interpreting Galatians (Baker Academics; Grand Rapids, 1996, 2001), 113-27을 참조하라. Silva의 결론은 주어진 모든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되, 최종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는 믿음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우선순위가 내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2) ‘게바’로 불리는 특별한 사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헬라어 이름인 ‘베드로’보다는 아람어 이름인 ‘게바’로 부르고 있다.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베드로’ 대신 아람어 이름인 ‘게바’라고 부르는 것은 아홉 번 있는데, 그중 여덟 번을 바울이 사용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4번(갈 1:18; 2:9, 11, 12) 그리고 고린도 전서에서 4번(고전 1:12; 3:22; 9:5; 15:5) 사용하고 있으며, 신약 성경에서의 사용된 나머지 한번은 요한복음 1:42절에서 쓰이고 있다.17)
반면에 베드로라는 이름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150번 이상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갈라디아서 2장 7절과 8절에서 각각 한 번씩 사용하고 있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왜 바울이 ‘베드로’보다는 ‘게바’를 선호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18)
17) 한글 번역에서는 앞에 언급된 ‘게바’를 받는 관계 대명사를 ‘게바’로 번역하여 2번 사용하고 있다.
18) 베드로라는 이름과 게바라는 이름이 갖는 각각 다른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아무 차이가 없다는 설에서, 베드로는 공식적인 문서에서 추출된 것이고 게바는 아니라는 설과 반대로 베드로는 개인적인 이름이고 게바는 공식적인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론들에 대해서는 브루스, 갈라디아서 주석, 120-21 참조.
첫째는 사도 바울이 베드로와 자신과의 특별한 유대인 동족으로서의 관계를 나타내려고 했거나 아니면
둘째 이유인데 베드로의 권위에 맞서는 자신의 권위를 내 세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뒤에서 언급될 갈라디아서에서의 용법과 함께 고린도 전서에서 사용된 문맥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이유가 다 해당한다.
고린도 전서에서의 처음 두 번의 용법은(고전 1:12; 3:22) 고린도 교인 중에서 ‘게바’를 따르는 무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베드로의 권위를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용법은(9:5) 가족을 동반하며 사역을 하는 유대인 사역자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자신 역시 베드로처럼 사역의 대가를 이 지상 생활 속에서 보상받을 동일한 권한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기 사역의 가치를 베드로와 동일한 위치에 놓고 비교하고 있다.
마지막 용법은(15: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본 제자로서의 독특한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
(3)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가장 가까운 일차 증인으로서 베드로
그는 베드로와 함께 십오일을 지냈다.19)
열두 명의 제자와 주의 형제 야고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이면 베드로를 거명하였을까?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말틴(J. Louis Martyn)은 첫째 이유로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전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포함한 유대 교회에 무명의 인사였기 때문이고 둘째로 베드로 사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0)
2주일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라이켄(Philip Graham Ryken)이 말한 대로 “베드로와 십오일을 보내는 것은 랍비 식의 훈련을 받기에는 넉넉한 시간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을 알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21)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는 대로 바울은 이 기간 동안에 어떤 인간적인 요소가 그의 복음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의 사도 직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십오 일 동안에 바울이 베드로와 지내면서 행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전혀 알지 못하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장 가까운 관계로서의 일차 증인인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전해 듣는 것이다.
바울이 방문한 목적은 그가 사용한 동사 “i`storh/sai”가 잘 보여준다.
이 단어의 고전적인 의미는 어떤 것을 질문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리스 문학에서 종종 어떤 사람과 친해진다는 의미가 있다.22)
이 동사를 사용한 바울의 의도는 베드로의 개인 간증을 듣기 위한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23)
19) 십오일은 유대인의 날자 계산으로는 만 2주일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20) J. Louis Martyn, Galatians (New York: Doubleday, 2004), 173. Martyn은 바울이 이 구절을 언급한 것은 그의 방문이 공식적인 것이 아닌 개인적인 것이었음을 보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21) Philip Graham Ryken, Galatians (Philipsburg, New Jersey: P&R Publishing,2005), 29.
22) 이 단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F. F. Bruce, The Epistle tothe Galat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2), 98을 참조하라.
23) “심방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i`storh/sai는 보고를 듣는 것을 의미한다.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베드로의 개인적인 생애(history)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더 자세히 배우려는 것이었다”(Ryken, 갈라디아서, 29).
(4) 십오 일 동안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들
베드로와 지내면서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는 다른 사도를 만나지 못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은 바울 사도가 의도적으로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없어서 만나지 못한 것인지 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만 2주간을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의도적으로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브루스(F.F. Bruce)가 말한 대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는 “다른 사도들은 분명히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음이 틀림없다.”24)
이 동안에 바울이 베드로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짐작케 하는 구절은 고린도 전서 15장의 처음 부분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내가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진술한다.
이곳에 쓰인 두 개의 동사 모두 전치사 para-가 접두사로 쓰이고 있으며, 두 동사의 차이는 둘째 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고(paralamba,nw), 처음 것은 바울이 다른 사람(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 주는 것을(paradi,domi) 보이고 있다.
비록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동일한 “paralamba,nw”가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문맥상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것임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부정으로 시작하고 일관하는 갈라디아서의 흐름과 맞추어 생각할 때 이 전해 받은 내용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했던 2주일 동안에 전해 들은 예수님의 구속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보이고 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만난 사람은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뿐인데,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개인적인 증인으로 베드로와(5절) 야고보가(7절) 개인적으로 거명되고 있는 것은 바울이 2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베드로와 야고보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 그중에서도 부활에 관해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간증을 들었음을 연상시킨다.
또 이 두 사도만을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음을 언급한 것은 바울의 사도권이 예루살렘 사도들에 의해 인정받게 되는 것은 그 내용과 계시 된 과정 때문이지 그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실바(Moises Silva)가 1장 20절의 바울의 맹세 부분을 언급하면서 지적한 대로,25) 1장 1~2절과 1장 11~12절과 함께 바울이 사용한 자신의 사도권의 독특성을 강조한 3중 부정의 구조에 의해 잘 증명되고 있다.
24) “사도행전과 서신 편에 있는 바울,”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Gerald F. Hawthorne과 Ralph P. Martin 편 (Downers Grove, Illinois: Inter Varsity Press, 1993), 683.
25) Silva, 『갈라디아서 해석』, 152-53.
다. 대등한 입장에서 베드로를 만남
(1) 어떤 만남이었는가?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이 사도들과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1장 18절에 기록된 예루살렘 방문은 베드로와 사사로이 만난 것이었고, 2장 2절에 있는 14년 후의 만남 역시 공적인 만남이 아닌 사사로운 만남이었다.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방문의 시기가 언제였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특별히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회심 후 예루살렘을 최소한 4번 방문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처음 예루살렘 방문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얼마 후 있었다(행 9:26-30).
이것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회심 3년 후 방문하여 베드로와 사귐을 갖는 것과 연결하면 설명이 된다.
두 번째 방문은 바나바의 초청을 받아서 그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흉년으로 고통 받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금을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전달할 때 이루어졌다(행 11:27-30).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이다.
종교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은안디옥 교회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파송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21장 이하에서 다루고 있는 3차전도 여행 후부터 체포당하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사건이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말하는 방문이 어떤 것과 일치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네 번째 방문과 연결될 가능성은 없다.
가능성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 번째 방문이거나 아니면 세 번째 방문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예루살렘 종교회의인 세 번째 방문이 자세한 상황을 맞추어 볼 때 일치되는 점이 많다.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같고26) 또한 다뤄지고 있는 주제가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치한다.27)
그러나 세 번째 방문과 일치시킬 경우의 문제점의 하나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사사로운 만남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공적인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에 써진 것이라면 그곳에서 결정된 공적인 결정 사항을 모든 초대 교회의 권위로 언급해야 하는데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갈라디아서에서는 공적 결정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두 번째 방문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두 번째 방문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바나바라는 인물의 등장(행 11:30)과 아가보라는 사람의 예언(행 11:28)과 갈라디아서의 “계시를 인하여(2:1)”란 구절이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 또 예루살렘 종교회의 같은 공적 모임이 아닌 사사로운 만남이라는 사실이다.28)
26)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동행한다. 사도행전 15장 2절 역시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 및 그중에 있는 몇 사람을(이 속에 디도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파송한다.
27)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2장 4절에서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로 표현되고 있다. 특별히 디도를 동행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사도행전 15장 1절의 어떤 사람들이 일으키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라는 주장과 연결되고 있다.
28) W. L. Knox는 사사로이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 그 당시는 아직 오늘날과 같은 민주적인 절차가 교회 내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전체적으로 만나지 않은 것이지 공적인 만남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닐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브루스, 『갈라디아서 주석』, 110에서 재인용).
또한, 사도행전의 방문과 갈라디아서의 방문의 순서가 순차적으로 일치한다는 장점도 있다.
(2) 유명한 자들(toi/j dokou /sin, 갈 2:2)
이 사건이 2차 방문을 말하든, 3차 방문을 말하든, 더욱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구절들을 통해서 나타내고 싶어 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2장 1~6절에서 “유명한 이들”(toi/j dokou/sin)이란 말이 네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다.29)
이 사실을 볼 때 이 유명하다는 이들이 사도 바울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유명하다는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며 또 그들과 바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뒤에 나오는 9절에서 바울 자신에 의해 주어지고 있다.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유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고 그들이 바로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30)
29) 2:2, 6, 9절에서 “기둥 같이 여기는”으로 번역된 구절 역시 동일한 단어인 dokima,zw가 사용되고 있다.
30) 기둥같이 여기는 세 사람에 관해서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야고보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브루스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형 야고보가 예수님 지상 사역에서 인정받은 대로 제자들 사이에서 기둥같이 여겨지던 사도였을 것이라는 설과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라는 두개의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다(브루스,『갈라디아서 주석』, 122-123). 이 구절에서 또 하나 특이한 사실은 바울의 서신에서 사도 요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이곳이 유일하다.
사람들이 유명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초대 교회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아무것도 아니며, 특별히 자신이 증거하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생각할 때 그들이 더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사람들이고 따라서 바울 사도는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제출하고 인정받아야 했던 대상이었다.
(3) 달라진 바울의 위상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두 번째 만남이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에 주는 의미는 첫 번째 만남보다 아주 더 중요하다.
첫 번째 만남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개인적인 깊은 사귐을 가지게 되었고, 기본적인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 관한 것을 전수받았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기간 중 형성된 관계에 관한 한 사도 바울은 베드로보다 훨씬 아래인 아무 할 말이 없이 침묵만 지켜야 하는 예수님의 제자일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는 바울의 위상이 달라졌다. 여전히 그들에게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복음을 제시하고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런데도 이제는 어느 정도 동일한 입장에 서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바울과 또 함께 이방인 선교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유명한 자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 사도가 유명한 자들이 복음에 관한 한은 더 이상 유명하지 못하다고 말할 때 바울의 초점은 야고보 형제나 요한 사도를 향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를 겨누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바울의 사도권과 그가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복음이 베드로의 사도권과 또한 베드로를 중심으로 증거되는 복음과 대칭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4) 할례자의 사도(a vpostolh. th /j peritomh /j, 갈 2:8)
바울이 베드로를 보는 눈은 십사 년 후에는 전혀 달라졌다.
사도 중에 유명하다고 여김을 받는 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그런데도 바울의 위치는 베드로의 위치와 동일해졌다.
특별히 베드로는 할례받은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맡은 자로 불리고 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베드로와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하는 사명을 맡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이방인 디도를 동행하고 간 것과 그리고 그를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도록 원칙을 세운 것은 그가 무할례자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 즉 그의 이방인 사도권을 인정받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디도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울 사역의 인정은 물론 앞으로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디도의 경우는 시험케이스가 되었고 성공한 것이다.
(5) 교제의 악수(dexia .j e ;dwkan e vmoi, 갈 2:9)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는 이전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기둥같이 여기는 사도들이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악수의 의미는 단순한 교제를 나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나 베드로를 필두로 하는 예루살렘 사도의 권위 아래서 사방에서 안팎으로 공격만 당하던 바울을 그들과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콜(R. Allan Cole)이 『틴데일 주석』에서 말하는 대로 그들이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것은 우정과 신뢰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바울 일행을 괴롭히는 유대주의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바울의 복음을 인정해 주고 그의 사도권까지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을 그들과 대등한 동역자로 인정해 준 것이다.31)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울을 동역자로 인정해 준 것이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인간적인 교제를 통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먼저 교제의 악수를 내민 것은 베드로에게 할례자의 사도가 되도록 역사했던 동일한 성령님의 인정하심이 바울의 사역 속에 열매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를 인정함에 따른 성령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에 따른 교제의 악수라는 점이다.
이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인정받는 자들도 어쩔 수 없이 바울의 복음과 사도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교제의 악수를 나누면서 예루살렘 사도들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다.
샘플리(J. P. Sampley)는 이 교제의 악수를 나눌 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우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바울 일행은 자신들을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32)
31) R. Alan Cole, Galatians (TNPC; Grand Rapids: Eerdmans, 1989), 109-11.
32) J. P. Sampley, Pauline Partnership in Christ (Philadelphia: Fortress, 1980),50. Martyn, 『갈라디아서 주석』, 205에서 재인용.
어떻게 이해하든 바울 일행의 이방인 복음 선교는 베드로의 유대인 선교와 대등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한 바울과 베드로는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라. 우월한 입장에서 만난 베드로
(1)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갈 2:11)
유명한 대 사도들과 무명의 성도의 관계로 시작된 아니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던 원수로 시작된 바울과 다른 사도들과의 관계는 바울 일행 쪽이 전혀 기울어지는 불균형의 관계였다가 서서히 바울 쪽에도 무게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기둥같이 여겨지던 사도들이 교제의 악수를 내밀므로 균형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제는 오히려 바울 사도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면서 반대쪽으로 기울어지는 관계까지 오게 되었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이 사건은 바울과 가진 두 번째 만남 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할례자의 사도인 게바가 이방인의 선교 중심지인 안디옥 교회를 방문함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 두 사도의 안디옥에서의 만남은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아직 예루살렘 종교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33)
33) 이 문제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브루스, 『갈라디아서』, 128-29를 참조하라.
할례자 사역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선교의 출발점이었던 안디옥 교회로 장소가 옮겨진 것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건은 2장의 시작에서 제기되어진 할례의 문제와 연결된다.
디도를 할례받지 않아도 되도록 결정된 이후에 이방인들과 할례자들과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어나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디도의 경우가 할례 문제의 시험케이스가 된 것처럼 안디옥 교회야말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어떻게 뿌리 내릴 것인가의 시험케이스가 되었고 이 사건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바울의 사역과 복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 사건이다.
(2) 면책하였노라(kata . pro,swpon auvtw/| a vnte ,sthn, 갈 2:11)
문제의 발단 역시 유대인이 어떻게 이방인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로 시작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옳고 그름의 문제 이상의 것이다.
사실 이 문제 해결의 기본 원칙은 이미 이전 만남에서 해결된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 전파를 위한 두 개의 다른 사도 그룹을 세우셨고 그들은 서로 화해를 하였다.
이제는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는가의 문제만 남았고 11절 이하의 사건이 바로 이 실행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바울의 지적이다. 자신이 가진 권위로는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이미 계시 되고 인정된 하나님의 복음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에는 인간적인 권위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 유명한 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아니함,”(갈 2:12) 즉 베드로의 외식을 문제 삼고 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나누던 것은 한두 번의 동작이 아닌 계속적인 행동이었다.
그 동사 자체만으로는 증명되지 않으나34) 이미 이 사건 이전에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와 만남을 통해 하나님이 이방인도 받으셨고 정결케 하셨다는 경험과 고백을 한 사건이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34) 브루스는 “함께 먹다가”의 미완료과거 동작을 베드로 사도가 안디옥에서 계속적으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했던 것을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브루스, 『갈라디아서』, 129). 또한 콜(갈라디아서』, 115) 역시 같은 견해로 이 구절을 “함께 식사를 하곤 했었다(used to eat with)”로 번역하고 있다.
이 원칙은 베드로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베드로와 고넬료를 불러 세워 주셨고 베드로는 이 원칙을 이미 고넬료 일행, 즉 이방인 당사자들에게와 예루살렘 교회에 고백한 것이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도 용납하시고 정결케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행 10:28), 유대인들을 선택하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아계신 증인이신 성령을 이방인들에게도 보내 주셨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확증된 그 확신 속에서 저들에게 세례까지 주었다(행 10:44-48).
(3) 복음의 진리(h` a vlh,qeia tou / euvaggeli,ou, 갈 2:14)
문제가 일어나게 된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한 것에서 시작된다.
할례자의 사도인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이 주신 원칙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이들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인데35) 바울이 염려한 것은 베드로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베드로로 인해 야기된 파급 효과를 걱정하고 있다.
바울 자신이 두 번째 만남에서 유명하다는 이들에게 사사로이 접근한 것의 근본 목적이 자기 사역의 결과나 방향 전체를 고려한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면(갈 2:2), 안디옥에서 베드로 사도를 면전에서 책망하는 사건 역시 그 사건이 미치는 파장을 복음의 순수성과 연관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가 보이는 두려움에 대한 반응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유대인, 심지어는 바울과 함께 이방인의 선교를 책임 맡은 바나바에게까지(갈 2:9, 13) 베드로의 외식에 영향받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나바를 거명한 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지니고 있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소명과 영향력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그 유명한 대 사도 베드로를 모든 사람 앞에서 면책한 이유이다.
바울에게는 단순한 대 사도와 무명의 사도의 사도권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복음의 순수성이 지켜질 수 있는가 여부의 문제이기에,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기도 한 것처럼 어찌 보면 너무 당돌해 보이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바울이 보고 있는 베드로 사도는 또 그가 보인 행동은 유명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의 진수를 지키는 일에 오해를 가져올 행위이다.
바울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이다.
바울은 유명한 이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시하는 첫 번째 만남(갈 2:1-10)과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면책하는(갈 2:11-14)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모두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 핵심이 되고 있다.
즉, 사람의 의가 율법의 행위(이방인과 유대인의 식탁 예절에 얽힌 정결 의식)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과 직결되는 것이기에36) 감히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면책한 것이다.
35) 브루스는(『갈라디아서』, 131)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할례자들의 정체에 대해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 성도들은 물론 아니고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도 아니고 심지어는 야고보 자신도 아니고 유대인 중에서도 호전적인(militants) 무리를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36) 라이켄은 갈 2:16에서 기독교의 가장 기본 교리인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원칙을 3단계의 구조로 분석하고 있다(『갈라디아서』, 61-64): 즉, 먼저는 일반적인 예로(“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시작하여 개인적인 적용으로(“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발전시키며 보편적인 진리로(“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함)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독교 교회사에서 말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들고 일어선 종교 개혁 사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 초기에 일어난, 후기 개혁가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한 경고가 되는 신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최초의 종교 개혁사건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의 잘못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신자, 특별히 복음 전파에 앞장선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바울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 기본 교리의 일관성 있는 실천을 강조하면서 자신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즉,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서 범법을 행하게 될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갈 2:18).
이처럼 바울 사도의 담대함은 개인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그 복음을 지키려는 올바른 헌신에서 나온 것이다.
4. 베드로 안에 있는 바울
가. 무명의 사도와 유명한 대 사도의 만남
(1) 베드로가 성숙한 후 바라보는 바울
일반적인 관념으로 생각한다면 베드로에게 있어서 바울은 무시해도 좋은 사도였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 함께 보냈던 시간이나 특별히 그가 받은 열두 제자 중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나 권위를 생각한다면 많은 성도를 죽이고 옥에 넣었던 바울은 그에게 특별한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교회의 대적이었다가 주님을 만나고 복음 증거자가 된 바울은 베드로에게는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중요한 상대가 되지 않는 무명의 전도자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베드로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음을 베드로후서 시작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2)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벧후 1:1)
베드로후서는 전서의 독자와 같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내진 서신이다.37)
특정한 독자가 아닌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보내진 공동서신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더글라스 무(Douglas J. Moo)는 거짓 교사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이방인 성도 중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와 그리스에 사는 신자들일 가능성을 말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이들이 바울의 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38)
베드로 사도가 이 두 번째 서신을 쓸 때쯤에는39) 그의 모든 태도가 성숙하고 원만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37) 후서의 독자에 관해서는 벧후 3:1에 나오는 “이 둘째 편지”라는 구절에 의해 전서와 같은 독자임을 알 수 있다.
38)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1996), 25.
39) 일반적으로 베드로후서의 저작 시기는 네로에게 순교하기 전인 주후 68이전 경으로 생각하고 있다. 베드로후서를 베드로의 이름이 도용된 위작이라고 보는 견해의 근거로 3장 4절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의 조상을 제1세대 기독교인으로 보면서 늦게 보는 견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조상들을 신약이 아닌 구약의 조상들로 본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대해서는 Simon J. Kistermaker, Exposition of the Epistles of Peter and of the Epistle of Jud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16-17을 보라.
특별히 베드로후서의 서론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는지 그의 주된 관심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다룬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성품에 도달하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벧후 1:3-11).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독자들을 부르고 있는 명칭이다.
베드로는 독자들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로 부르고 있다.
이 명칭 속에는 더 이상 예수님의 12제자 중 수제자로서, 유명하게 여김을 받는 사도의 모습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베드로가 바라보는 바울 사도 역시 더 이상 2류 사도(Second Class Apostle)가 아닌 동등한 사도로 바라보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나. 대등한 위치에서 사랑하는 사도로서의 바울
(1)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o` avgaphto.j h`mw/n a vdelfo.j Pau/loj, 벧후 3:15)
베드로가 바라보는 바울,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성숙한 성도 관계의 정상에 있다 할 수 있다.
바울과 베드로는 더 이상 일대일로 대적하거나 겨뤄지는 관계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소중한 지체로서 말해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와 너의 관계를 뛰어넘어 “우리”라는 교회의 공동체 속에 융합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두 사람의 관계에서처럼 적대관계에서 시작된 둘의 관계가 화해의 과정을 거쳐 공동 운명체로,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가고 있는 지체로 불리고 있다.
“우리”라는 관계를 잘 나타내는 것이 바울과 베드로와 또 다른 동역자들과의 관계이다.
(2) 함께 사역하는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바울
베드로후서는 바울과 2차 선교 여행을 함께 떠났던(행 15:40; 살전 1:1) 실라에 의해서 대필되었다(벧전 5:12).
특별히 베드로후서를 대필하는 사람이 실라라는 점과 실라와 바울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라는 단어는 베드로의 마음만 담은 것이 아니라 대필자 실라의 마음도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에서 도중하차한 마가와 결별하고 두 개의 선교팀으로 분열해야 했던 마가 역시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이 되었고(벧후 5:13) 이 마가를 바울은 마지막 순교 전에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하고 있다(딤후 4:11).
적대관계였던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는 형제 관계가 되었다. 형제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복음 사역을 함께 하는 동역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참조. 고전 2:13; 빌 2:25; 살전 3:2; 벧전 5:12).
다. 대등한 입장에 서 있는 또 하나의 교회 지도자로서의 바울
(1)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
베드로에게 있어서 바울은 이제는 사랑하는 동역자의 자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다.
바울은 이미 이방인 선교의 지도자이며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는 동역자가 되어 있었다.
바울의 복음과 사역의 독특성을 인정한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은 베드로와 그 일행들의 사역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후서를 읽는 독자들과 바울의 편지를 받은 독자들이 동일하다면 베드로후서의 독자들에게 베드로가 소개하는 바울의 위치는 특별하다. 초기 안디옥 교회를 방문할 당시에는 유명한 예루살렘 사도가 무명 사도의 사역지를 점검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할례자의 사도로서의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선교하고 세운 교회들에 편지를 보낸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바울을 언급함으로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에게 바울 사도는 특별한 성령님의 은사를 행사하는, 자신의 사역에 못지않게 독특한 사역을 감당하는 또 하나의 사역자로 비치고 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자신의 말씀을 연결시키고 있다.
(2) 그 모든 편지에도(벧후 3:16)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들이40) 어떤 것을 지칭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어떤 특정한 편지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보낸 오늘날 신약의 정경 속에 들어있는 모든 바울 서신이 편집되어 있는 바울 서간집을 얘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가능성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경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경이 되지 않은 다른 바울의 편지들까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렌스키(R. C. H. Lensky)는 여기 언급된 바울의 서신이 잃어버려졌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으나41) 더 큰 가능성은 켈리(J. N. D. Kelly)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각각 낱개로 보내졌던 편지들이 수합되어 편집되고 정경의 형태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던 바울 서신을 생각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42)
40) 바울의 편지로 번역된 한글 번역은 헬라어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41) R. C. H. Lensky, The Interpretation of I and II Epistles of Peter, the three Epistles of John, and the Epistle of Jude (Minneapolis, Minnesota,1966), 353
42) J. N. D. Kelly, A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eter and Jude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1), 370-71.
라. 아픔과 문제와 소망을 함께 나누는 동역자로서의 바울
(1) 이런 일에 관하여(벧후 3:16)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 서신에서 자신의 마지막 당부를 하는 결론 부분에서 바울 사도와 그의 편지들을 언급하는 것은 성경 정경의 형성과정과 연관하여 깊은 의미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후서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믿음의 소중함을 잘 지켜 나가기 위해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며 악은 멸망할 것을 구약의 가르침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베드로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하고 있는데 베드로 사도는 이 점에 있어서 또 다른 기독교 선교의 축을 이루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고 있다.
(2)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변형하며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해석을 하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 해석하는 말씀에 따라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많은 부분이 베드로 사도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상호 간에 교제를 통해서 얻어지거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동일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파하면서 동일한 열매를 얻게 된 것이다.
두 사도가 일치되게 다루고 있는 종말론에 대한 부분은 곳곳에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종말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과 그 종말이 언제 올 것이며 어떤 모양으로 올 것인가에 대한 것은 특별한 계시로 주어졌다.43)
43) 자세한 바울의 성경 구절에 관해서는 켈리, 『베드로 서신과 유다서』, 371-72를 참조하라.
(3)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7)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이 모든 성도에게 주신 신기한 능력으로 부르신 자를 앎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인 목적을 방해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그를 아는 일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배워나가는 일은 베드로 사도 혼자만의 몫이 아니고 바울 사도 역시 특별한 몫을 맡고 있다.
그런 의미로 바울은 베드로의 좋은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과 연결하여 야고보가 행위라는 열매를, 요한 사도가 사랑이란 열매를 구했다면, 베드로 사도는 믿음을 위해 지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44)
44)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철해, “The Knowledge to Salvation in 2 Peter,” Scripture and Interpretation (Seoul: TCBR, 2006), 80-93을 참조하라
특히, 바울 사도가 성령의 계시를 받은 것을 “그 받은 지혜대로”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의 특별한 정의를 볼 수 있다.
즉,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이런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벧후 1:3,4) 가지고 있는 사도로 보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께 받은 말씀 역시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은 영역을 사도 바울이 받은 지혜대로 기록된 편지 속에 있는 종말의 사건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5. 결론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은 베드로 사도와 바울 사도이다.
한 사람은 이방인 선교의 기둥이고 또 한 사람은 유대인 선교의 기둥이었다.
이 두 사도의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성을 알기 위해 두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것은 유익하다. 두 사람의 받은 사명이 각각 다르고 사역의 양상이 달라 그들의 사역은 별개로 각각 다르게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한 몸인 교회의 중요한 지체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두 사도가 각각 다른 사도들을 어떻게 이해하였고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아는 것은 기독교 사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 이 두 사도의 관계는 그들의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근본적인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초대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주도권을 행사한 사도인 반면 바울 사도는 최초 최대의 초대 교회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사와 직분을 세우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사도였고 사도들을 통해 교회는 세워져 나갔다.
많은 신약의 저자가 자신들을 여러 가지로 소개하거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반면 베드로와 바울 이 두 사람만이 자신들을 사도로 부르며 소개하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을 모두 사도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직분이나 임무는 많은 점에서 독특하며 큰 차이점이 있다.
두 사람이 전혀 관계없이 자신들의 각각 다른 직무를 향해 가는 듯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실은 두 사람의 사역과 직임은 결국은 하나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각각 상대방 사도에 관한 생각이 발전되어 가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바울 사도 속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그의 서신 중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바울의 경우는 갈라디아서의 자서전적인 처음 두 장에서 베드로(게바라고 불리는)에 대한 깊은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것을 보이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바울이 제일 먼저 만나서 단 2주 동안 만의 짧은 사귐을 가지게 만든 아주 중요한 사도로 접근되고 관계가 맺어지고 있다.
물론, 이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지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을 형성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만남이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이 무르익어 가면서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이 만남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과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와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리고 인정받기 위한 것인데 예루살렘 사도들은 기꺼이 교제의 오른손을 내민다.
처음의 만남이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기울어진 만남으로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 만남에서는 양측이 균형을 이루는 서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각각 독립된 자신들의 사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다.
그러나 바울은 또 하나의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고 있다.
이 만남은 안디옥 교회에서 이루어졌는데 할례자의 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사도에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책망을 듣는 사건의 기록이다.
이 기록의 목적은 바울이나 베드로가 우월한가 등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에 대한 그 당시의 종교 개혁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에게서 베드로는 서서히 아주 유명한 대 사도에서 함께 주의 복음을 동역하는 동역자로, 나가서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동역자와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관계로 형성되었다.
베드로에게서도 바울의 위치 역시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교회의 핍박자로서 불편한 관계로 시작되었으나, 서서히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순종하며 쓰임 받는 신실한 사랑받는 형제 동역자로 나타났다가 나중에는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특별한 종말론의 계시자로 소개되고 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올바른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지식을 전해 줄 사도로 소개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관계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것을 보면서 올바른 하나님 나라 일군들의 독특성과 연합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바울과 베드로 두 사람을 독특하게 별개의 사역을 행하도록 부르셨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궁극적으로는 두 사도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 사역을 이루도록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서는 세워지지 않는다. 반드시 함께 부름을 받은 동역자들과 함께 세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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