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게하더스 보스는 바울의 종말론이 사실상 기독교에 대한 그의 모든 가르침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하면서 “바울 사도의 종말론을 펼쳐 보이는 것이 곧 그의 신학 전체를 제시함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1
그리고 탐 슈라이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바울 신학의 근본적인 요소이고, 신자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2
즉, 바울이 설명하는 신학은 종말론에 근거한 “종말신학”이고 그의 “종말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부활신앙”, 곧 부활에 대한 이해에 있다.
바울은 서신서들 가운데에서 가장 자세하게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 곳은 바로 고전 15장이다.
전 장에 걸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35-50절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특별히 더 중요하다.
이 본문에서
1) 고린도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서 직접 대답하는 바울의 목회적인 관심이 나타난다;3 2) 그리스도의 부활(45절)과 성도들의 부활(42-44절, 46-50절)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3) “하나님 나라”의 유업으로 대표되는 종말론적 소망이 나타난다;
4) 바울의 종말신학과 부활신앙이 어떻게 현재의 성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특히 마지막 내용은 바울이 35-50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하는 “몸”(σῶμα)의 의미를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
기존의 개역한글(Korean Revised Version, 1961)과 개역개정(New Korean Revised Version, 2003) 모두 고전 15:37-38, 40절에 나오는 헬라어 “σῶμα”을 “형체”라고 번역을 하였다.
본 논문은 35-50절에 대한 석의와 분석을 바탕으로, 고전 15:35-50에 나타나는 바울의 부활에 대한 설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σῶμα을 “몸”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더 나아가서 본 논문은 “몸”에 대한 바울의 논의가 그의 다른 표현들(“육신적인 몸”, “신령한 몸” 등)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고, 그것이 부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35-50절의 교차대구법의 가운데 놓여 있는 45절의 “마지막 아담, 살려주는 영”의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종말신학과 부활신앙에 대한 이해가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간략하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 고린도전서 15:35-50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 교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1-6장까지의 문제들은 바울이 들었던 소식(1:11; 5:1; 6:1)들에 대한 것이고, 7-16장은 고린도 교회가 서신을 통해서 바울에게 질문을 한 문제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7:1; 8:1; 11:2; 15:1; 16:1).
그 가운데 15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질문한 부활의 교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15:1-11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한 부활의 교리가 복음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1
5:12-34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한다.
15:35-50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면서 성도들의 부활에 대해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15:51-58에서 바울은 미래 부활의 영광의 전망과 그 현실적 귀결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의 부활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한다.
고린도전서 15:35은 35-50절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질문을 담고 있다.
35: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πῶς) 다시 살리심을 받고4 어떤 몸으로(ποίῳ σώματι) 나타나는가?”
고린도인들이 제기한 질문은 두 가지인데, 곧 “부활은 어떻게 가능한가?”와 “부활한 몸의 본질은 무엇인가?”이다.5
이에 대해, 바울은 36-41절까지에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하고, 그 다음 42-50절에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을 취한다.
바울의 답변들은 다음과 같다.
36: 너 어리석은 사람아 네가 심는 것은 죽지 않으면 살리심을 받지 못한다.6
37: 또 네가 심는 것은 앞으로 있을 몸(σῶμα)7이 아니고 아마 밀이나 다른 곡식의 단순한 낟알일 것이다.
38: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택하신 대로 그것에 몸(σῶμα)8을 주시는데 각 종자에게 그 자체의 몸(ἴδιον σῶμα)을 주신다.
39: 모든 육체(σάρξ)가 같은 것이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와 같고 또 하나는 짐승의 육체와 또 하나는 새의 육체와 또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와 같다.
40: 하늘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ουράνια)9이 있고 땅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ίγεια)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ἡ τῶν ἐπουρανίων δόξα)이 하나이고 또 다른 것은 땅에 속한 것들의 것(ἡ τῶν ἐπιγείων)이다.10
41: 해의 한 영광이 있고 달의 또 한 영광이 있으며 별의 또 한 영광이 있으니 별과 별의 영광이 각기 다르다.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다(οὕτως). 썩을 것 속에서11 심겨지고12 썩지 아니할 것 속에서13 살리심을 받는다.14
43: 수치 속에서 심겨지고 영광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약함 속에서 심겨지고 능력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44: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으로 심겨지고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으로 살리심을 받는다. 만일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이 있다면, 신령한 것(πνευματικόν)도15 있다.
45: 이같이 기록되었으니 첫 사람(ὁ πρῶτος ἄνθρωπος) 아담은 산 육신(ψυχὴν ζῶσαν)이16 되었다(ἐγένετο…εἰς). 마지막 아담(ὁ ἔσχατος Ἀδάμ)은 살려주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이 되었다(εἰς).
46: 그러나 첫 번째는 신령한 사람(τὸ πνευματικόν)이 아니고 육신적인 사람(τὸ ψυχικόν)이며, 그 다음이 신령한 사람이다.
47: 첫 사람(ὁ πρῶτος ἄνθρωπος)은 땅에서 났으니(ἐκ γῆς) 흙에 속한 자(χοϊκός)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
48: 흙에 속한 자(ὁ χοϊκός)는 흙에 속한 자들(οἱ χοϊκοι)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ὁ ἐπουράνιος)는 하늘에 속한 자들(οἱ ἐπουράνιοι)과 같다.
49: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τὴν εἰκόνα τοῦ χοϊκου)을 입은 것처럼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τὴν εἰκόνα τοῦ ἐπουρανίου)을 입을 것이다.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는데 육과 혈은(σὰρξ καὶ αἷμα)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의 각 답변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자.
- 첫 번째 질문
고린도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한 첫 번째 질문은 “부활은 어떻게(πῶς) 가능한가?”였다.
바울은 36-41절에서 여러 개의 비유로 이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 비유들은 식물(36-37절), 사람과 짐승(39절), 천체(41절)의 비유를 포함하고 있다.
식물의 비유를 통해서 바울은 부활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씨는 먼저 죽어야 할 “몸”(σῶμα)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죽는 몸과는 다른 새로운 몸을 주시는데 각 종자에게 “그 자체의 몸”(ἴδιον σῶμα)을 주신다. 이 새로운 몸은 여전히 몸(σῶμα)이라는 점에서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몸, 혹 그 자체의(ἴδιον) 몸이라는 점에서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앤서니 티슬턴에 따르면, “땅에 심은 것은 씨라는 그 나름의 존재로서는 종말에 이르지만, 이 동일한 실체 혹은 동일한 생명이 변화를 겪으면서 새롭고 더 영광스러운 존재 방식을 얻게 된다.”17
그리고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6, 37절에서 나타나는 동사들이 2인칭 복수를 가리킴에 반하여서(σπείρεις, “[네가] 심다”) 38절의 동사는 3인칭 단수이고 그 주어는 하나님이다(ὁ θεὸς δίδωσιν, “하나님이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은 36절에서도 암시되어 나타난다.
36절에서 개역개정은 “οὐ ζῳοποιεῖται”을 “살아나지 못하겠고”라는 능동태적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동사는 “ζῳοποιέω”(생명을 주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살리는 주체가 따로 있고 이는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낸다.18
따라서 이 동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게 되다”로 이해해야 한다.19
탐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이 첫 번째 답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창조주의 능력이 ‘죽은’ 씨앗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20
36절의 동사 “ζῳοποιέω”가 중요한 이유는 이 동사가 45절에서 “살리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으로, 이번에는 창조주가 아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다시 한 번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바울은 다음 비유들로 자신의 논의를 계속 이어 나간다.
39절에서 바울은 “육체”(σάρξ)라는 개념을 네 번이나 연속적으로 언급한다.
사람의 육체와 짐승의 육체와 새의 육체와 물고기의 육체가 각각 다르다.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바울은 부활이 있을 때 육체가 죽었을 때 가졌던 것과 동일한 뼈와 살이 사용되어 마술적으로 바뀌고 형성되리라고 말하지 않는데 이것이 이 비유의 주된 요점이다.21
39절의 “육체”(σάρξ)는 37-38절의 “몸”(σῶμα)과 구분을 해서 이해해야 한다.
39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조건이나 환경에 어울리는 존재 형태를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육체”라는 단어를 창조에 사용된 물질(substance-used-in-creation)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육체라고 해서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부활과 관련하여 어떤 방식을 취해야 될지 몰라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22
그러나 37-38절에서 “몸”(σῶμα)은 단순히 불연속성만을 의미하지 않고(“그 자체의 몸”[ἴδιον σῶμα]), 이후에 두 번째 답변에서 보여지듯이, 부활 가운데 나타나는 연속성도 내포하고 있다.
바울은 어떻게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지에 대해서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비유들은 식물(36-37절), 사람과 짐승(39절), 천체(41절)를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로 바울은 36-39절에서 식물,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비유를 제시한다.
40절에서 바울은 하늘에 속한 것으로 설명을 계속하면서 “몸”의 논의에서 “영광”의 논의로 넘어간다.23
몸과 영광의 논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다양한 몸들은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영광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서 바울의 주된 목적은 서로 다른 종류의 육체들이 존재하고, 그 각각은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24
40절은 몸과 육체에 대한 논의 대신에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의 목록을 나누어서 제시한다.
그리고 41절은 계속해서 “하늘에 속한 것”, 곧 천체의 영광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이 본문은 교차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25
36-39절: 땅에 속한 것
40절: 땅에 속한 영광, 하늘에 속한 영광
41절: 하늘에 속한 것 (천체의 영광)
그리고 이 교차 구조에 따라서, 36-41절의 중심 내용은 40절, 곧 “하늘에 속한 몸과 땅에 속한 몸의 구분”과 “하늘에 속한 영광과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의 구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40절의 대조는 “몸”(σῶμα)과 “영광”(δόξα)에 있지 않고, “하늘에 속한” (ἐπουράνια)과 “땅에 속한”(ἐπίγεια) 사이에 있다.
이는 47-49절의 내용에 대한 복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26
바울은 42절 상반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다(οὕτως)”이라고 하면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작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의 핵심은 “부활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할은 각기 그 자체의 “몸”(σῶμα)을 주시는 “살리는”(ζῳοποιέω) 사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번째 답변에서 바울은 그 의미에 대해서 더 깊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네 번에 걸쳐서 반복되는 “심겨지고”(σπείρεται) “살리심을 받는”(ἐγείρεται)의 대조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 두 번째 질문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한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부활한 몸의 본질은(ποίῳ σώματι)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42-50절에 매우 정교하고 긴밀한 구성으로 나타난다.
케네스 베일리는 이 답변이 정교한 교차대구법(chiastic structure)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27
그의 논의에 따르면 42-50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다(οὕτως). 썩을 것 속에서 심겨지고 썩지 아니할 것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43: 수치 속에서 심겨지고 영광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약함 속에서 심겨지고 능력 속에서 살리심을 받는다.
44: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으로 심겨지고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으로 살리심을 받는다. 만일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이 있다면, 신령한 것(πνευματικόν)도28 있다.
45: 이같이 기록되었으니 첫 사람(ὁ πρῶτος ἄνθρωπος) 아담은 산 육신(ψυχὴν ζῶσαν)이 되었다(ἐγένετο…εἰς). 마지막 아담(ὁ ἔσχατος Ἀδάμ)은 살려주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이 되었다(εἰς).
46: 그러나 첫 번째는 신령한 사람(τὸ πνευματικόν)이 아니고 육신적인 사람(τὸ ψυχικόν)이며, 그 다음이 신령한 사람이다.
47: 첫 사람(ὁ πρῶτος ἄνθρωπος)은 땅에서 났으니(ἐκ γῆς) 흙에 속한 자(χοϊκός)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
48: 흙에 속한 자(ὁ χοϊκός)는 흙에 속한 자들(οἱ χοϊκοι)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ὁ ἐπουράνιος)는 하늘에 속한 자들(οἱ ἐπουράνιοι)과 같다.
49: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τὴν εἰκόνα τοῦ χοϊκου)을 입은 것처럼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τὴν εἰκόνα τοῦ ἐπουρανίου)을 입을 것이다.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는데 육과 혈은(σὰρξ καὶ αἷμα)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도식하면 다음과 같다:29
42절: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의 대조(썩을 것에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의 변화)
43절: 수치/약함에서 영광/능력으로 변화
44절: 육신적인 몸에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
45절: 아담과 그리스도 대조
46-47절: 육신적인 사람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
48-49절: 흙에 속한 자의 형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변화
50절: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의 대조
42-44절에서 바울은 네 가지의 대조를 통해서 부활에 나타나게 될 “몸”을 설명하고 있다.
곧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42절), “수치”와 “영광”(43절), “약함”과 “능력”(43절), 그리고 “육신적인 몸”과 “신령한 몸”(44절)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대조 가운데에서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심겨지고”(σπείρεται) “살리심을 받는”(ἐγείρεται) 동사이다. 그리고 이 반복되는 동사의 주어는 42-43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42절의 “썩을 것”이나 “썩지 아니할 것”, 그리고 43절의 “수치”, “영광”, “약함”, “능력” 모두는 심겨지고 살리심을 받는 대상(주어)이 아니라 방법/방식(manner)에 대한 것이다.
42-43절의 각각의 요소는 방법/방식을 나타내는 전치사 ἐν를 앞에 두고 있다.30
그러나 44절에서는 전치사가 나타나지 않고 바로 주격(nominative)으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이 나타난다. 따라서, 44절에서와 마찬가지로 42-43절에서 “심겨지고 살리심을 받는” 대상(곧 주어)은 “몸”(σῶμα)인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31 무엇보다 바울의 이 답변이 두 번째 질문, “부활한 몸의 본질은(ποίῳ σώματι)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각 대조의 주어가 바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바울의 논의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된다. 같은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부활의 변화한 몸의 특징 때문에 불연속성이 함께 존재한다.32 앤서니 티슬턴은 이를 “정체성의 연속성과 더불어 형태상의 변화”라는 말로 표현한다.33
42-44절에 나타난 대조는 46-50절에서 다시 세 번 반복되는데, “육신적인 사람”과 “신령한 사람”(46-47절),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48-49절), 그리고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50절)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대조,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의 대조는 이후 52-54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고린도 성도들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의 핵심은 “부활의” 몸은 그 전과 전혀 다르지만(불연속성), 동시에 부활의 “몸”은 그대로 존재한다는(연속성)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이 두 번째 답변에서 사용한 대조의 논의들은 고린도전서 전반부에 나왔던 논의들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약함”과 “능력”(δύναμις)에 대한 43절의 논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앞선 설명들(1:25-2:5)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34 고전 1-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십자가의 도”(1:18)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1:23, 2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2:2-5)에 나타났다고 설명한다.35 고전 15장의 부활에 대한 설명 가운데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에 있어서는 역설적이고 오직 믿음의 눈에만 보이는 창조주의 능력이 새 세상에서는 그의 백성의 새로운 몸들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6 부활이 가져오는 이러한 변화는 바울의 “육신적인 것”과 “신령한 것”의 대조 가운데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몸”의 개념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 “육신적인 것”과 “신령한 것” 그리고 “몸”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의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과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다양한 결과로 나타났다.37
탐 라이트는 이 구절을 이해함에 있어서 “육신적”인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영적”을 이해함으로써, 바울이 새로운 부활의 몸을 “비육신적인 것” 곧 사람들이 만질 수 없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엇, 부활했다고 하여도 빈 무덤을 남기지 않을 그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38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앞 뒤 맥락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두 개의 논의가 필요하다:
첫 번째 논의는 “육(혼)”(ψυχή)과 “영”(πνεῦμα)의 구분이고,
두 번째 논의는 바로 “몸”(σῶμα)에 대한 이해이다.
이미 바울은 고전 2:14-15에서 “육(혼)”(ψυχή)39과 “영”(πνεῦμα)의 개념을 대조 가운데 설명하였다.
육신적인 사람(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40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τὰ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οῦ θεου)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πνευματικῶς)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ὁ πνευματικός)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흔히 “혼”으로 번역되는 ψυχή는 바울의 논의 가운데에서 플라톤적으로 불멸의 영혼, 곧 물질적인 인간 존재 중에서 영원히 남아 있을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41
탐 라이트는 ψυχή와 히브리어 נֶפֶשׁ을 비교하여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내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 인간 존재 전체, 실제로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는 분명히 육체적인 효과들도 아니고 정신 과정들의 결과 또는 원인도 아닌 감정, 이해, 상상, 사고, 정서의 혼합물.
바울에게 있어서 ‘소마’[σῶμα]가 공적인 시공간상의 현존이라는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이고, ‘사륵스’[σάρξ]가 썩어짐과 반역이라는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프쉬케’[ψυχή]는 우리가 개략적으로 “내적”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이다.42
바울에 따르면, 이러한 “육신적인 사람”(ψυχικὸς ἄνθρωπος)은 여전히 현세에 속하여서 다른 일, 곧 신령한 일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보여준 태도들은 그들이 신령한 자들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육신적인 자들”(ψυχικός)일 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자들”(σαρκίνοις)이라는 것을 보여준다.43
더 나아가서,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내가 신령한 자들(πνευματικοῖς)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적인 자들(σαρκίνοις)44…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3:1)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신령한 자들”과 “육신적인 자들”을 대조한다.
바울의 3:1의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적인”(ψυχικός) 것과 “육신적인”(σάρκινος) 모두 동일한 의미, 곧 “신령한”(πνευματικός)에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하더스 보스는 “신령한”이라는 말에서 종말 상태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는 생각, 천상의 신비한 몸이라는 생각, 물리학에서 말하는 밀도가 존재하지 않는 몸이라는 생각을 모두 꼼꼼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부활 상태를 성령이 다스리는 상태로 규정하면서 성령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성령이 부활한 몸에 자신의 세 특성인 “썩지 않음”, “영광” 그리고 “능력”을 깊이 새겨 넣는 것을 의미하고 이러한 신령한 몸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육의 몸이다.45
다시 말해서, 바울의 논점은 믿는 자들이 “몸”(σῶμα)을 지니고 있느냐, 않느냐에 있지 아니하다.
신령한 자들이나 육신적인 자들 모두는 몸을 지니고 있지만,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하심을 받는 신령한 자들이냐, 아니면 그들이 육신적인 것들을 신경 쓰며 사는 육신적인 자들인가에 있다.
탐 라이트에 따르면,
여기에서의 문제는 그들이 창조주의 성령에 의해서 내주함을 입어서 인도하심을 받으며 지혜롭게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들이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ψυχικός]) 삶의 차원에서 생활하고 있거나 실제로 모든 썩어질 피조물에 공통적인 ([σάρκινος]) 삶의 차원에서 생활하고 있느냐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바울이 12장에서 영적인 것들([πνευματικά])에 관하여 논의할 때에 이러한 “영적인 은사들”은 “비육신적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영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영감받은 말, 치유 등등의 은사들을 통해서 성령이 사람의 육신의 측면들에 작용하고 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46
따라서 고전 15:44-46에서 육신적인 몸/사람에서 신령한 몸/사람으로의 변화는 세상적이고 통상적인 인간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삶으로의 변화로 규정되어야 한다.47
이와 같은 맥락에서 토마스 슈라이너는 바울이 “신령한 몸”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성령을 통해서 힘을 얻고 움직이는 몸”이라고 주장한다.
그 몸은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physical), (땅 위의) 육신적인 몸(earthly body)과 달리 다른 영역에서 사는 것인데 이는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약동하기 때문이다.48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바울이 “육신적인 것”과 “신령한 것”의 대조를 통해서 부활의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몸”을 통해서 부활의 연속성도 아울러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바울은42-44절에서 네 번에 걸쳐서 부활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그 대상이 “몸”을 가리키며,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즉, 썩을 것 속의 “몸”으로 심겨져서 썩지 아니할 것 속의 “몸”으로 살리심을 받고, 수치의 “몸”으로 심겨져서 영광의 “몸”으로 살리심을 받고, 약함 속의 “몸”으로 심겨져서 능력 속의 “몸”으로 살리심을 받으며, 육신적인 “몸”으로 심기고 신령한 “몸”으로 살리심을 받는 것이다.49
따라서 고전 15:35-50의 바울의 “몸”(σῶμα)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개로 분류해서 설명할 수 있다.50
- 육체(σάρξ)를 가진 몸
-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
-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
- 하늘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ουράνια)
- 땅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ίγεια)
첫 번째는 “육체(σάρξ)를 가진 몸”이다.
바울은 모든 인간의 몸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두 번째는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이다.
탐 라이트는 이것은 통상적인 종류의 인간의 몸, 통상적인 생명의 호흡에 의해서 활동하는 몸이라고 이해하였다.51
이 말은 살아 있는 인격을 의미하지만, 바울은 이 표현을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인격이라는 점을 강조한다.52
즉 신령한 것과 대조되는, 육과 관련된 몸을 나타낸다.
세 번째는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인데, 탐 라이트는 이것이 “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생기가 불어넣어지고 활동하는 몸”53이라고 이해하였다.
어쩌면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로 인해 이미 자신들이 신령한 몸이라고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질투와 분쟁으로 볼 때에 그들은 신령한 몸이 아니라, 육신적인 몸에 불과하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3:1-3).
이 신령한 몸은 비물질적인 몸이 아니라 물질적인 몸이지만 오직 성령에 의해 주관되는 몸이다.
네 번째는 “하늘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ουράνια)이다.
이 몸은 하늘에 속한 사람(47-48절)과 연관되어 있는데 곧 하늘로부터 임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주님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적인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활한 몸을 입고서 계속해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지니게 해 줄 것이다.”54
이와 대조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땅에 속한 몸”(σῶμα ἐπίγεια)인데, 이는 아담을 상징한다.
바울은 교차대구법의 구조의 가장 가운데에 45절을 둠으로써 육체를 가진 몸을 가진 믿는 자들이 땅에 속한 몸이나 육신적인 몸에서 하늘에 속한 몸과 신령한 몸으로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마지막 아담, 살려주는 영”의 사역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 마지막 아담, 살려주는 영
고린도전서 15:45의 마지막 아담(ὁ ἔσχατος Ἀδὰμ)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 하는 많은 “아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지점, 즉 “최종적인 아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55
바울이 45절에서 제시하는 대조는 “산 육신”(ψυχὴν ζῶσαν)이 된 “첫 사람 아담”(ὁ πρῶτος ἄνθρωπος Ἀδὰμ)과 “살려주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이 된 “마지막 아담”(ὁ ἔσχατος Ἀδάμ)이다.
바울은 이미 고전 15:21-22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였다.56 따라서 15:45에서의 대조는 앞에서처럼 아담과 그리스도의 존재론적인(ontological) 대조가 아니라, 각각의 사역과 기능(functional)의 대조를 가리킨다.
성경 역본마다 “산 육신”(ψυχὴν ζῶσαν)을 다양하게 해석하였다.57
개역개정은 “생령”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문맥에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ψυχή”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다.
문맥에서 “ψυχή”는 “혼”이라는 보통의 의미보다는 44절의 “육신적인 몸”(σῶμα ψυχικόν)과 관련되어 있다.
즉, 통상적인 종류의 인간의 몸, 통상적인 생명의 호흡에 의해서 활동하는 몸과 관련되어 이해해야 한다.58 다시 말해 첫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육신)였지만,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혹은 하나님의 일을 아는 데에 실패한) 인격이라는 것을 표상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기능은 “살려주는 영”(πνεῦμα ζῳοποιοῦν)이다.
이 표현은 이중적인데
첫째로 “영”(πνεῦμα)은 44절의 “신령한 몸”(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을 연상시키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성도들의 부활한 몸의 첫 모범(23절)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전형적인 사례(paradigm case)에 해당하며 부활이 무엇인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59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살려주는”(ζῳοποιοῦν) 기능과 관련이 있다.
동사 “ζῳοποιέω”은 “살아나게 하다, 살리다, 생명을 주다”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보통 단순히 신체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60
“살려주는 영”이란 표현에 사용된 동사 “ζῳοποιέω” (살리다, 생명을 주다)는 이미 36절에서 바울의 첫 번째 답변에서 언급되었다.
너 어리석은 사람아 네가 심는 것은 죽지 않으면 살리심을 받지 못한다.
같은 동사가 36절과 45절에서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첫째로, 36절에서는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되었지만 45절에서는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둘째로, 36절에서 살려주는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38절) 45절에서 살리는 행동의 주체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탐 라이트는 45절의 “살려주는 영”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새 창조”, “재창조”, 혹은 “갱신된 창조”의 의미를 잘 드러낸다고 주장한다.61
다시 말하자면, 예수는 단지 개별적인 “신령한 몸” 곧 하나님이 부활을 통해서 만들고자 의도한 존재들의 첫 번째 모범일 뿐만 아니라(영),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게 될 바로 그러한 신령한 몸을 가리킨다(살려주는).62
첫 사람은 생명을 받은 육신이였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였다.
첫 번째 답변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답변에서도 바울은 부활의 몸과 현재의 몸 사이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논의하고 있다.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인 반면에,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2, 50절).
그리고 오직 썩지 않은 부활의 몸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 것은 부활의 새로운 몸이 마지막 아담의 “살려주는 영”의 사역의 결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63
50절에서 “육과 혈”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신체적인 몸(physical body)이 하나님 나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썩을” 육과 혈, 곧 “수치와 약함 속에 있고 육신적인 몸에 속한” 육과 혈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64
- 부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바울은 고전 15:35-50에서 고린도 성도들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면서 부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가 같이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육의 것”과 “신령한 것”, “땅에 속하는 것”과 “하늘에 속하는 것”의 대조를 통하여서 부활의 불연속성을 강조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부활의 변화가 동일하게 “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함께 강조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부활에 대한 인식은 몸을 평가절하하고 오직 불멸의 영혼을 강조하던 플라톤과 그리스 철학 전통과 구별된다.65
탐 라이트가 논의했듯이, “만약 바울이 의미했던 것이 어떤 의미에서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몸을 입지 않은 영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온갖 수고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66
그렇다면 왜 바울은 부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울이 미래에 있을 부활의 사건의 중요성이 현재 믿는 자들의 삶 가운데 가지고 있는 현재적 의미 때문이다.
부활은 현재의 상황 혹은 우리의 몸과 단절된 미래의 불연속성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상황과 몸과 연속적인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는 중간에 끊임없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고를 한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15:34).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15:58).
탐 라이트가 바르게 주장했듯이,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은 기독교적인 도덕의 궁극적인 토대이다.”67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이해는 “몸”이라는 개념을 통하여서 고린도전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전 6:12-15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는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몸”을 강조한다.
“몸”으로 주를 섬겨야 한다고 권고하면서(13절) 바울은 그 근거로 그리스도와 성도의 부활을 명시한다(14절) 그리고 다시 한 번 성도의 몸을 강조한다(15절).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σῶμα)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면 주는 몸을 위하여(σώματι) 계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ἤγειρεν) 또한 그의 권능으로(διὰ τῆς δυνάμεως)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ἐξεγερεῖ). 너희 몸(τὰ σώματα)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밖에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성도들에게 각자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릴 것을 여러 번 촉구한다.68
또한 바울은 11장에서 성찬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에나69 12장에서 교회 내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할 때에도70 “몸”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문맥에서 바울이 부활을 설명할 때 성도의 “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소망과 함께 현재적인 책임을 함께 강조하는 것이다.
- 결론: 종말신학과 부활신앙
게하더스 보스는 바울의 종말론을 “반(半)종말론”(semi-eschatology)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원리상 “이미” 실현된 세상과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세대 혹은 세상(혹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가운데 살고 있다는 종말론적 이해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말 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장차 임할 삶에 대해서 간절히 기대하고 기다리는 동시에,71 현재 관심사인 “몸”과 관련된 모든 일(신앙적, 윤리적)을 중요시하게 만든다.72
게하더스 보스에 따르면 바울은 단순히 예수의 부활과 신앙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세워주는 생명력 사이에 널리 유사성이 존재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말론이 말하는 세상이 여전히 이 세상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미래에 대해 기대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73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은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종말론 가운데에서도 부활에 대한 바울의 신앙은 가장 핵심에 놓여있다.
그러나 바울의 종말신학과 부활신앙에 대한 인식은 부활이 미래에 있을 큰 변화의 사건(불연속성)으로만 인식하고 있지 않고, 그 부활의 사건은 현재와 연결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연속성).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몸”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바울의 종말신학과 부활신앙은 고전 15장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장차 있을 성도의 부활을 “변화”라는 불연속성으로 설명하지만, 동시에 “몸”을 통하여서 부활에 내포되어 있는 연속성을 함께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이해가 가능한 것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살려주는 영”으로서의 사역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역 가운데 그를 따른 자들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게 되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
부활의 생명은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모양을 가질 것이고 바로 이것이 그들의 존재 형태, 곧 몸을 전적으로 성령께 개방한 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이다.74
1 Geerhardus Johanne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4), 박규태 역, 『바울의 종말론』(서울: 좋은 씨앗, 2015), 49.
2 Thomas T. Schreiner, New Testament Theology: Magnifying God in Chris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8), 임범진 역, 『신약신학』(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1), 359.
3 바울은 15:12에서도 고린도 성도들의 질문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러나 35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질문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너희 가운데] 누가 묻기를…”
4 개역개정은 ἐγείρονται 을 “살아나며”라고 번역하였지만, 동사의 형태는ἐγείρω(일으키다, 살리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복수이다. 수동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살리심을 받는다”고 번역하였다.
5 탐 라이트는 이 질문들이 진지한 질문들이 아니고, 부활의 불가능을 전제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의미의 질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리석도다”라고 36절에서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다. N. T.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Holy Trinity Church, UK: SPCK, 2003), 박문재 역,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542.
6 개역개정은οὐ ζῳοποιεῖται을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번역하였지만, 동사의 형태는ζωοποιέω (생명을 주다, 살리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수동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살리심을 받는다”고 번역하였다.
7 개역개정은 σῶμα을 “형체”라고 번역하지만 이후 44절의 논의와의 연속성을 위해서 “몸”으로 번역하였다.
8 37절과 마찬가지로, 개역개정은 “형체”라고 번역하지만, 이후 44절의 논의와의 연속성을 위해서 38절에 나오는 두 개의σῶμα을 “몸”으로 번역하였다.
9 개역개정은 “형체”라고 번역하지만, 이후 44절의 논의와의 연속성을 위해서 40절에 나오는 두 개의σῶμα을 “몸”으로 번역하였다.
10 헬라어 원문에서는 “영광”(δόξα)이 40절에서 한 번만 나온다.
11 개역개정은 “썩을 것으로”라고 번역하였지만 43절에 나오는 “ἐν”(속에서)와의 통일성을 위해서 전치사 “ἐν”을 “속에서”라고 번역하였다.
12 개역개정은σπείρεται 을 “심고”라고 번역하였지만, 동사의 형태는σπείρω(심다, 씨를 뿌리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수동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심겨지고”라 번역하였다. 43-44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3 개역개정은 “썩지 않을 것으로”라고 번역하였지만 43절에 나오는 “ἐν”(속에서)와의 통일성을 위해서 전치사 “ἐν”을 “속에서”라고 번역하였다.
14 개역개정은ἐγείρεται을 “다시 살아나며”라고 번역하였지만, 동사의 형태는ἐγείρω(일으키다, 살리다)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이다. 수동태를 강조하기 위해서 “살리심을 받는다”고 번역하였다. 43-44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5 헬라어 원문에서는 “몸”이 44절 마지막에는 나오지 않는다.
16 개역개정은 “생령”이라고 번역하였지만, 바울의 논의의 문맥에 맞추어 “산 육신”으로 번역하였다. 뒤의 논의 참조.
17 Anthony C. Thiselton, First Corinthians: A Shorter Exegetical and Pastoral Commentary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2006), 권연경 역, 『고린도전서: 해석학적 & 목회적으로 바라 본 실용적 주석』(서울: SFC, 2011), 501.
18 놀랍게도 대부분의 영어 번역도 이를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로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어, ESV, NRSV, NIV 모두 “살아나다” (come to life)으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에 KJV는 “되살아나게 되다” (be quickened)로 수동태로 번역하고 있다.
19 참조. 38절에서 “하나님이” 수동태의 주체로 소개되었다.
20 N. T. Wright, 앞의 책(2005), 544.
21 Kenneth E. Bailey, Paul Through Mediterranean Eyes: Cultural Studies in 1 Corinthian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1), 김귀탁 역,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고린도전서의 문예-문화적 연구』(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692.
22 Anthony C. Thiselton, 앞의 책(2011), 504.
23 베일리는 40-41절의 “σῶμα”에 대한 논의에서 바울은 “몸”의 개념보다는 “어떤 유형적 물질”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3.
24 N. T. Wright, 앞의 책(2005), 545.
25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88-689.
26 N. T. Wright, 앞의 책(2005), 545. 라이트(548)는 바울의 천체에 대한 논의는 부활의 몸을 플라톤주의의 “별과 관련된 불멸”의 의미로 설명하고자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27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5-699.
28 헬라어 원문에서는 “몸”이 44절 마지막에는 나오지 않는다.
29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5-696에 나오는 도표를 참고하여 수정을 하였음.
30 Daniel B. Wallace, 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 An Exegetical Syntax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72-375.
31 탐 슈라이너도 그의 주석에서 같은 논의를 하고 있다. Thomas R. Schreiner, 1 Corinthian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NTC 7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8), 321-322. 이러한 맥락에서 NIV가 15:42의 본문에 “몸”을 삽입한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The body that is sown is perishable, it is raised imperishable.” 필자의 강조.
32 Thomas R. Schreiner, 앞의 책(2018), 321.
33 Anthony C. Thiselton, 앞의 책(2011), 502.
34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8.
3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ς)이라”(1:18).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ν)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4).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δυνάμει)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5).
36 N. T. Wright, 앞의 책(2005), 550.
37 예를 들어,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은 “육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번역하였지만, ESV, NIV, KJV는 “자연적인 몸”(natural body)과 “영적인 몸”(spiritual body)으로, RSV는 “육신적인 몸”(physical body)과 “영적인 몸”(spiritual body)으로 번역하였다.
38 N. T. Wright, 앞의 책(2005), 551. 탐 라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계몽주의 이후의 이신론적인 특징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일반적으로는 고대 사상, 특히 바울 사상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552).
39 헬라어 단어 ψυχή는 생명; 사람; 생명, 내적 자아, 영혼의 뜻을 지니고 있다. Frederick William Danker, The Concise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Chicago, I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김한원 역, 『신약성서 그리스어 사전』(서울: 새물결플러스, 2017), 604. 여기에서는 문맥상 “영”(πνεῦμα)과 대조되는 뜻의 “육”을 나타낸다. N. T. Wright, 앞의 책(2005), 553.
40 개역개정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신령한 자들”에 대한 대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육신적인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41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9. “플라톤과 그리스의 철학 전통은 인간을 순수한 불의 신적 영혼을 가지고 있으나 그 영혼이 현세에서는 육체 속에 감금된 존재로 이해했다. 그런데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처음에 나왔던 신적 불로 돌아가고 거기서 하나의 별이 된다.”
42 N. T. Wright, 앞의 책(2005), 456.
43 두 개의 개념(ψυχικός, σάρκινος) 모두를 “육신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헷갈릴 수 있지만, 바울이 “영적인 자들”, “혼적인 자들”, 그리고 “육신적인 자들”이라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두 개의 카테고리, 즉 “영적인 자들”과 “육과 세상에 속하여 있는 자들”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탐 라이트도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혼적인 자”와 “육신적인 자”는 둘 다 바울이 “통상적으로 인간적인” 사람들, 단순히 현세 속에서 그 가치관들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들, 내세의 돌입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들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로 묘사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N. T. Wright, 앞의 책(2005), 459-460. 필자의 강조.
44 개역개정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신령한 자들”에 대한 대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육신적인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45 Geerhardus Johannes Vos, 앞의 책(2015), 257.
46 N. T. Wright, 앞의 책(2005), 553.
47 N. T. Wright, 앞의 책(2005), 554. 라이트(554-563)는 다른 1세기 문헌의 사용에 비추어 바울이 “육신적인”과 “영적인”을 대비하고자 이 개념들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48 Schreiner, 322. “What Paul means by a spiritual body is a body empowered and animated by the Holy Spirit; the body is physical but, in contrast to one’s earthly body, it lives in a whole new realm, for now it is a body enlivened by the Holy Spirit.” 본인의 번역, 저자의 강조.
49 Thomas R. Schreiner, 앞의 책(2018), 321-322; Anthony C. Thiselton, 앞의 책(2011), 504-508.
50 베일리는 그의 책에서 이 가운데에서 첫 세 개만 언급한다.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2.
51 N. T. Wright, 앞의 책(2005), 560.
52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700.
53 N. T. Wright, 앞의 책(2005), 559.
54 N. T. Wright, 앞의 책(2005), 559.
55 N. T. Wright, 앞의 책(2005), 539.
56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57 예를 들어, 개역개정은 “생령”으로, 개역한글은 “산 영”, NIV, ESV는 “living being”으로 KJV는 “living soul”로 번역하였다.
58 N. T. Wright, 앞의 책(2005), 560.
59 Anthony C. Thiselton, 앞의 책(2011), 477.
60 Frederick William Danke, 앞의 책(2017), 263. 이 단어가 쓰인 다음의 구절들을 참조하시오. 요 5:21; 6:63; 롬 4:17; 8:11; 고전 15:22, 36, 45; 고후 3:6; 갈 3:21; 딤전 6:13.
61 N. T. Wright, 앞의 책(2005), 539-570. 라이트는 고전 15:35-50의 논의가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살리는 영”은 창세기에서 창조주의 활동과 신약 시대의 예수의 사역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게하더스 보스는 “살려주는 영이 된 마지막 아담”은 종말론과 그리스도가 신자 속에서 만들어내신 삶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Geerhardus Johannes Vos, 앞의 책(2015), 259.
62 N. T. Wright, 앞의 책(2005), 561. 베일리, 703 “새 창조에서 예수의 부활은 성령이 새로 형성하고 지시한 부활한 몸의 첫 열매로 자리 잡고 있다.”
63 N. T. Wright, 앞의 책(2005), 541.
64 Thomas R. Schreiner, 앞의 책(2018), 324.
65 Kenneth E. Bailey, 앞의 책(2017), 699. “몸에 관해 말하자면, (그리스인에게) 목표는 죽을 때까지 견디는 것이었고, 죽으면서 몸은 ‘보기 싫은 것이 없어져서 시원하다’라는 말을 들으며 버림받았다.”
66 N. T. Wright, 앞의 책(2005), 543. 라이트는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계속해서 “죽은 자들”(νεκροί)이라고 말하다가 35-50절에서는 “몸”(σῶμα)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 용어들을 바꾸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67 N. T. Wright, 앞의 책(2005), 538.
68 “너희 몸(σῶμα)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σώματ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6:19-20).” “내가 내 몸(σῶμα)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9:27).”
69 고전 10:16, 17; 11:24, 27, 29.
70 고전 12:12, 13, 14, 15, 16, 17, 18, 19, 20, 22, 23, 24, 25, 27.
71 Geerhardus Johannes Vos, 앞의 책(2015), 120. “오는(장차 임할) 삶에 보이는 관심에 냉담하거나 적대시하는 기독교라면, 그것이 설령 기독교라 불릴지라도, 역사 속에서 기독교라 불려온 기독교는 아니다.”
72 Geerhardus Johannes Vos, 앞의 책(2015), 128.
73 Geerhardus Johannes Vos, 앞의 책(2015), 97.
74 Anthony C. Thiselton, 앞의 책(2011), 513
한국기독교학술원 54회 공개강연회 자료(201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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