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본 소고는 예수의 고난이야기를 보도하는 베드로복음의 특징을 살펴 보는 데 있다.
사본의 훼손으로 전체 본문을 알 수는 없지만, 첫 편집자들 의 기대와는 달리, 적어도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베드로복음은 영지 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급진적인 이원론이 나타나지 않으며, 예 수가 영적인 지식(그노시스)을 전수하는 보도도 없다.
또한 베드로복음 의 예수는 결코 가현설로 설명될 수도 없다.
오히려 베드로복음은 정경 의 복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예수와 예수 사건을 묘사한다.
공관복음 전 통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복음의 예수는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십자 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며, 또한 육체의 부활을 경험한다.
베드로복음의 저자는 정경복음서들 또는 그 자료들을 자유롭게 편집하여, 자신만의 예 수 이야기를 쓴 것이다.
다만 정경의 복음서들보다 더 강한 어조로 유대 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책임이라고 규정하며,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를 죽인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라고 이해한다.
이를 종합하여 볼 때, 베드로복음의 저자가 강한 반유대 적 색채를 바탕으로 정경복음서들의 내용을 자유롭게 편집하여 또 다른 예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베드로복음, 영지주의, 이원론, 가현설, 반유대주의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에는 네 개의 복음서만이 들어있으나,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복 음서가 있었다. 정통과 이단의 개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2-3세 기1)에는 내용과 성향이 다른 다양한 복음서들이 병존하였으며, 이 와중에 베드로복음 역시 다른 그리스도교 문헌들의 틈바구 니에서 권위 있는 거룩한 문서로 인정받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 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신약성서에 포함되지 못한 복음서(외경)들은 많이 사라졌다. 다만, 일부는 초기그리스도교저술가들2)의 글에 제목만이 전해지며, 일부는 부분적으로 그 내용까지 전해진다. 또 다른 일부는 몇몇 사본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기도 한다.
1) 이에 대해서는 K. Aland, “Der neutestamentlich Text in der vorkonstantinischen Epoche,” Compostellanum 34 (1989), 53.
2) 흔히 소위 “교부들”(Church Fathers)이라고 표현하나, 본 소고에서는 이 들을 가리켜 “초기그리스도교저술가들”이라고 지칭한다. 교부라는 용어는 여성들을 배제하며, 주교 등 특정 사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 내포된 문제점들과 일반적인 정보 에 대해서는 J. Chapman, “Fathers of the Church,” Catholic Encyclopedia, vol. 6, ed. by C. G. Herbermann et. al.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9), 1-18을 보라.
역사의 흐름 가운데 사라진 수많은 외경복음서들의 운명과는 달리 베드로복음은 우리에게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체가 남아있지는 않는다. 비록 일부이기는 하나, 잃 어버린 줄만 알았던 베드로복음이 19세기 후반에 발견되었다. 이것이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사본(P. Cair. 10759)인데, 아크밈사본이라고도 불린다. 1886년 이집트의 아크밈(Akhmîm, 오 늘날의 카이로) 근처에 있던 폐허가 된 어느 수도원의 수도사 무 덤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본에서 베드로복음은 예수 의 재판 중간부터 시작한다. 앞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앞에 어떤 내용이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뒷부분 역시 소실되어 관계문장 중간에서 끝이 난다. 카이로사본은 66쪽의 양피지사본 인데, 2쪽에서 10쪽에 베드로복음이 실려 있다. 1쪽(folio 1, recto) 에는 십자가 그림만 있고, 13쪽에서 19쪽에는 베드로묵시록, 그 뒤에 에녹1서, 성율리아누스행전이 담겨있다. 이 사본에서 베드로복음의 내용이 완전하지 않은 이유는, 카 이로사본 자체가 훼손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카이로사본에는 훼 손의 흔적이 없다. 여기에 베드로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없 는 이유는, 이 사본을 필사할 당시에 필사자가 베낀 대본(Vorlage) 이 훼손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카이로사본에 적힌 내용 외에 베드로복음에 어떤 내용을 더 포함되었는지는, 가령 예수의 가 르침이나 이적기사 등이 포함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분명한 것은, 베드로복음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용을 증언한다는 사실뿐이다. 카이로사본(P. Cair. 10759) 이외에도 베드로복음의 일부일 수 도 있다고 주장되는 사본들이 몇몇 있으나,3)
그 사실여부가 명확하지는 않으며, 또한 그것들이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하기 때문 에, 본 연구는 카이로사본(P. Cair. 10759) 본문에 집중할 것이다. 물론 카이로사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도 베드로복음의 존재와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초기그리스도교저술가들의 글에 베드로복음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 이 바로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이다.4)
3) P. Oxy. 2949; P. Oxy. 4009; P. Vindob. G 2325; Van Haelst Nr. 741; P. Egerton 2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P. Foster, The Gospel of Peter: Introduction, Critical Edition and Commentary (Leiden: Brill, 2010), 57-91을 보라.
4) 기원후 264/5년 직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340년경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교회사는 290년부터 325년 사이 에 수차례에 걸친 개정을 거쳐 10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완성되었다. S. Döpp and W. Geerlings (eds.), Lexikon der Antiken Christlichen Literatur, 2., vollständig neu bearbeitete und erweiterte Auflage (Freiburg: Herder, 2002), 240-41. 훗날 루피누스(Rufinus, 약 345-411/2)는 그리스어로 저술된 유 세비우스의 교회사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교회에 소개하였다.
교회사에서 유세비우스는 두 번에 걸쳐 베드로복음에 대해 언급한다(3.3.1-2; 6.12.1-6).
첫 번째 언급(3.3.1-2)에서 유세비우스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된 문헌들을 평가하면서 베드로전서만을 경전 으로 인정하고, 베드로후서는 유익하지만 정경으로 인정하지는 않 는다. 반면에 베드로행전, 베드로복음, 베드로의 설교, 베 드로계시록과 같은, 베드로의 이름으로 된 다른 문헌들을 거부 한다(교회사, 3.3.1-2). 베드로복음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두 번째 언급은 더욱 흥미 롭다. 기원후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까지 시리아 안디옥의 주교 였던 세라피온(Serapion)과 베드로복음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 부분이다(유세비우스, 교회사, 6.12.1-6). 유세비우스의 보도에 따르면, 세라피온은 베드로복음의 가현설적 성향 때문에 이것 을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5) 여기서 우리는 유세비우스가 문서화 된 베드로복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세비우스에 앞서 이미 기원후 3세기 중엽의 교회사가 오리게네스가 마태복음주석에서 베드로복음을 언급하였고(10.17), 기원후 4세기 중엽에는 디디무스(Didymus Caecus)가 전도서주석 에서 베드로복음을 언급하였다(1.1-8). 4세기 말에는 제롬(Jerome) 이(de vir. Illustr. 1), 5세기 중엽에는 키루스(Cyrrhus)의 주교 테오 도레투스(Theodoretus)가베드로복음을 언급하였다(haer. 2.2.). 베 드로복음은 아마도 넓은 지역에 걸쳐 읽혔던 것으로 추정된다.6)
5)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6) 바트 어만은 베드로복음이 마가복음보다도 더 널리 읽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B. D. Ehrman, Lost Christianities: The Battel for Scripture and the Faiths We Never Kne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22-24.
II. 베드로복음과 정경의 복음서들
정경에 포함된 복음서들과는 달리 베드로복음은 예수의 제 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서술한다(7:26; 14: 60 참고). 그러나 베드로가 서술하는 내용이 정경의 복음서들이 보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요셉7)이 예수의 십자 가 처형 ‘이전에’ 예수의 시체를 묻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제 외하면, 베드로복음은 전체적으로 공관복음의 보도 순서를 따르고 있다.
7) 정경에 포함된 복음서들과는 달리 베드로복음에는 요셉을 “빌라도의 친구이자 주님의 친구”(2:3)로 묘사된다. 마가복음은 “명망 있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막 15:42)으로, 마태복음은 “아리마대 출신으로 요셉이라고 하는 한 부자 … 예수의 제자”(마 27: 57)로, 누가복음은 “공의회 의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눅 23:50)으 로, 요한복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 …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요 19:38)라고 그를 묘사한다.
물론 차이점들도 있다. 정경 복음서들에 보도되지 않는 장면들 은 아래와 같다. 우선, 예수가 처형당한 뒤에 유대인들이 자신들 의 잘못을 후회하는 장면이 보도된다(7:25-27). “우리 죄로 인해 우리가 저주를 받는구나. 심판과 예루살렘 멸망이 멀지 않았 다”(7:25). 예수가 무덤에 묻힌 뒤에, 천사들이 무덤에 내려오고, 무덤의 돌이 저절로 굴러갔다고 보도되기도 한다(9:35-36). 예수의 부활 장면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정경복음서들에 나오지 않는 베드로복음의 독특한 점이다(10:39-41).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로마 군인들이 빌라도와 나누는 대화(11:45-49)도 정경복음서들에 는 보도되지 않는다. 또한 베드로복음에는 예수 부활의 첫 목 격자로 로마 군인들이 지목된다(10:38-41). 그러나 전체적인 이야 기의 서술은 공관복음서들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카이로사본의 베드로복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장: 헤롯이 예수를 끌고 가라고 명령하다(1:1-2).
2장: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다(2:3-5).
3장: 예수를 조롱하다(3:6-9).
4장: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다(4:10-14).
5장: 예수가 숨을 거두다(5:15-20).
6장: 예수를 묻다(6:21-24).
7장: 제자들이 숨다(7:25-27).
8장: 로마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다(8:28-33).
9장: 무덤이 열리다(9:34-37).
10장: 예수가 부활하다(10:38-41).
11장: 빌라도가 로마 군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다(11:43-49).
12장: 여인들이 무덤으로 가다(12:50-54).
13장: 여인들이 겁에 질려 달아나다(13:55-57).
14장: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다(14:58-60).
이러한 차이점들과 공통점들 때문에 베드로복음이 정경의 복음서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 지에 대한 연구가 관심을 끌었다. 대표적으로 쾨스터(H. Koester)는 공관복음서들에 대한 베드로복 음의 우선성을 주장하였으며,8) 반대로 브라운(R. E. Brown)은 베드로복음이 정경의 복음서들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9) 한 편, 크로싼(J. D. Crossan)은 베드로복음의 일부(1:1-6:2; 7:1-9:1; 9:2-11:7)는 정경복음서들과 무관하며, 나머지 부분(6:3-4; 12:1-13: 3; 14:1-3 이하)은 정경복음서들에 의존한다고 주장하였다.10)
8) H. Koester, “Apocryphal and Canonical Gospels,” Harvard Theological Review 73(1980), 105-30. 특별히 126-30을 보라.
9) R.E. Brown, “The Gospel of Peter and Canonical Gospel Priority,” New Testament Studies 33 (1987), 333-38.
10) J.D. Crossan, Four Other Gospels: Shadows on the Contours of Canon (New York: T & T Clark, 2008), 87-103. 특히 92-94를 보라. 그의 장절 표기 법은 표준화된 것을 따르지 않아 다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1:1- 6:2; 7:1-9:1; 9:2-11:7”은 “1:1-6:22; 7:25-9:34; 9:35-11:47”을 가리키며, “6:3-4; 12:1-13:3; 14:1-3 이하”는 “6:23-24; 12:50-13:57; 14:58-60 이하” 를 가리킨다.
즉 첫 단계의 편집에서는 정경복음서들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 였고, 후에 정경복음서들의 내용이 추가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주목을 끄는 점은, 베드로복음이 정경복음 서들의 특수자료를 보도한다는 것이다. 즉, 두 개 이상의 정경복 음서가 공통적으로 보도하는 단락들이 아니라, 어느 하나의 정경 복음서만이 보도하는 단락들을 베드로복음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드로복음과 마태복음만이 재판에서 손을 씻는 장면을 보 도한다. 유대인들이 손을 씻지 않았다는 보도(1:1) 앞에 마태복음 에 보도되는 빌라도가 손 씻는 장면(마 27:24)이 베드로복음의 소실된 부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해당 내용은 다른 정경복음서들에는 보도되지 않는다.11)
11) 외경들 가운데서는 소위 니고데모복음으로도 알려진 4세기의 문헌 빌라도행전에서 빌라도가 재판 중에 손을 씻는 것으로 보도된다. “빌라도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물로 손을 씻으며 ‘이 의로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아무 죄도 없으니, 당신들이 책임지시오.’라고 말했다” (6:20).
또한 예수의 죽음 뒤 에 땅이 흔들렸다는 보도도 베드로복음과 마태복음에만 보도된 다. 물론 시기에 대한 보도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은 예 수가 “숨을 거두자, …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졌다.”(마 27:51)고 보도하 는 반면, 베드로복음은 “그들이 주님의 손에서 못을 뽑고는 그 를 땅에 내려놓자, 온 땅이 흔들렸고, 큰 두려움이 일어났다” (6: 21)고 보도한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지진을 보도한다 는 점에서 두 복음서는 일치한다. 이 밖에도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는 보도 역시 베드로복음(8:28-33)과 마태복음(마 27: 62- 66)에만 보도된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간청하여 무덤에 경비병을 배치하게 하였다는 보도라든지, 또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났다고 사람들이 누설하게 될 것에 대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걱정하였다는 내용도 일치한다.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베드로복음의 저자가 마태복음을, 또는 마태복음이 사용한 자료나 전승들을 알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주요한 자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12) 어쩌면 베드로복음와 마가복음의 일치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기서 언급할 만 한 점은 베드로복 음의 빈 무덤 전승(13:55-57)이 마가복음의 빈 무덤 전승(막 16: 1-8)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복음의 이 보도는 마 가복음의 해당 단락을 토대로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13)
12) “두 자료설”에 대해서는 C. Holladay, A Critica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Interpreting the Message and Meaning of Jesus Christ (Nashville: Abingdon Press, 2005), 46-51을 보라.
13) P. Foster, “The Gospel of Peter,” The Non-Canonical Gospels, ed. by P. Foster (London; T & T Clark, 2008), 37.
베드로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도 의미 있는 일치점들이 있 다. 우선,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빌라 도의 재판에 헤롯이 참여한다(눅 23:6-12). 베드로복음에서도 재판에 빌라도와 헤롯이 함께 등장한다(2:1-2, 4-5). 또한 십자가 에 달린 죄인 한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도 베드로복음과 누가 복음은 일치점을 드러낸다. 공관복음의 보도와 마찬가지로 베드 로복음에서 예수는 두 죄인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린다. “그들은 죄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사이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 았다”(4:10a). 공관복음과 같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서는 두 죄인이 다 예수를 욕하는데(마 27:44; 막 15:32), 누가복 음에서는 한 죄인이 예수를 욕하고, 또 다른 한 죄인은 예수를 옹호한다(눅 23:39-43). 베드로복음에서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 에 달린 “죄인 한 사람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지만, 사람들을 구하신 이 분이 당신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하고 말하며 그들을 꾸짖었다”(4:13). 이 단락에 서 베드로복음은 누가복음의 전통을 따른다. 베드로복음은 공관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과도 의미 있는 일치점들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들과 일치하지 않는 본문에서 베드로복음과 일치하는 단락들이 있다. 요한복음은 로마군인들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인 한 사람의 다리를 꺾었으나, 예수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고 보도하는데(요 19:32-33), 베드로복음은 성난 군중이 예수의 다리를 꺾지 못하도록 하였 다고 보도한다(4:14). 또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 후에 바닷가로 가서 제자들을 만났는데(요 21:1-14), 카이로사본 베드 로복음의 훼손된 마지막 부분 역시 같이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베드로복음은 예수가 부활한 뒤에 베드로와 다 른 제자들이 “그물을 가지고 바다로 갔다”(14:60)고 보도하는데, 이러한 보도는 부활한 예수가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요 한복음의 보도를 상기시킨다. 여기서도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있었으며(요 21:2),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 소.’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도되기 때문이다(요 21:3). 각 정경복음서들 가운데 한 복음서만이 보도하는 단락들을 베 드로복음이 보도한다는 점에서 베드로복음이 정경의 복음서 들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그 자료들이나 전승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14) 그러나 문자적 일치를 보이지 않는 다는 점15)에서 베드로복음의 저자는 정경복음서들을 문자적으 로 옮겼다기보다는 기억에 의존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16)
14) B.D. Ehrman, Lost Christianities, 20. 또한 T. P. Henderson, The Gospel of Peter and Early Christian Apologetics: Rewriting the Story of Jesus’ Death, Burial, and Resurrection (Tübingen: Mohr Siebeck, 2011), 32-43을 보라.
15) T.N. Schonhoffer, “The Relationship of the Gospel of Peter to the Canonical Gospels: A Composition Critical Argument,”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87 (2011), 229
또한 정경복음서들이 알지 못하였던 자료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복 음은 정경의 복음서들, 또는 그 전승들, 그리고 또 다른 자료들 을 모아서 엮은 ‘하모니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III. 베드로복음과 영지주의
영지주의17)를 정의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영지주의가 초기그리스도교의 특정한 신앙시스템이나 구체적인 종교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 로는 그리스도교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영지주의가 존재하였기 때 문이다.18) 그렇기 때문에 영지주의에 대한 합의된 정의를 찾을 수 없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논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19) 다만, 영지주의가 구체적이고 특정한 종파가 드러내는 신학적, 또는 사 상적 특징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대후기에 널리 보급된 종교현상” 20)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6) Schonhoffer, “The Relationship of the Gospel of Peter to the Canonical Gospels,” 241-48.
17) 본 소고에서 “영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그 범위를 초기그 리스도교 내의 운동으로 제한한다.
18)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Gershom G. Scholem, Jewish Gnosticism, Merkabah Mysticism, and Talmudic Tradition (New York: The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 1965); Yuri Stoyanov, The Other God: Dualist Religions from Antiquity to the Cathar Heres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등을 참조하라.
19) 우리말로 된 영지주의에 대한 연구 동향은, 해롤드 애트리지, “영지주의 연구의 최근 동향,”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22 (2003), 47-66을 참 조하라.
20) A.H.B. Logan, “Gnosticism,” The Oxford Companion to Christian Thought, ed. by A. Hastings et 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268. 그는 영지주의가 오늘날의 ‘뉴에이지’만큼이나 정의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에 대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할 수는 있다.
우선, 영지주의는 극단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을 드러낸다.21) 참 하나님은 선하고 그와 대비되는 조물주는 악하다. 참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불변하고 선한 반면에 조물주가 만든 물질세계는 악 하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대립하고, 영과 물질이 대립하며, 또 한 빛과 어둠이 대립한다.
영지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비밀스럽 고 신비한 지식인 영지(그노시스)의 전수와 깨달음에 있다.22) 영 지주의자들 안에는 신성한 불꽃이 내재되어 있는데, 구세주로서 의 그리스도가 전해주는 영지, 즉 영적인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그 불꽃은 감옥으로서의 육체를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세 번째 특징으로는 가현설을 들 수 있다.23)
21) A.D. Rich, “Gnosticism,” New Dictionary of Theology: Historical and Systematic, 2nd Edition, ed. by M. Davie et al. (London: InterVarsity Press, 2016), 368을 참조하라. “영지주의는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눈다.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가 그것이다. 영적 세계는 불변하는 빛과 완전의 세계이며 물질 세계는 보다 저급한 어둠과 무지의 세계이다.” 송혜경, 신약외경 입문. 상권: 신약외경충론 (서울: 바오로딸, 2013), 199. 또한 송혜경, 영지주의: 그 민낯과의 만남 (의정부: 한님성서연구소, 2014), 151- 62를 보라.
22) A.D. Rich, “Gnosticism,” 369를 참조하라. 또한 게르트 타이쎈, 기독교 의 탄생: 예수운동에서 종교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420. 영 지주의에서 “구원은 지식에서 온다. 영혼이 육체에 갇히면서 잊어버린 자신의 기원과 본성을 기억해 낼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 송혜경, 신 약외경입문. 상권: 신약외경충론, 202. 23) F.L. Cross and E.A. Livingstone (eds.), “Doceticism,”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3rd Edition Revis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496. 송혜경, 신약외경입문. 상권: 신약외경충론, 203-204.
지상의 그리스도는 결코 완전한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니며,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재로 인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따라 서 그리스도는 고난과 죽음도 당하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특징들에 비추어 볼 때, 베드로복음은 과연 영지주의 문헌으로 서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가?
1. 영지의 전수
영지주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인 지식의 전수이다. 그리스도는 어느 한 제자에게만 영지를 전 수해주며, 따라서 바로 그 한 제자만이 영지를 전수 받을 수 있 다. 따라서 그 제자를 추종하는 집단은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 들이 알지 못하는 영지를 소유하며, 결국 영지를 소유한 그들만 이 이 물질세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된다. 가령 도마복음의 경우,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차별되는 특별 한 지위를 부여받는다.24) 마리아복음과 빌립복음의 경우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지식을 전수받는 유일한 제자로 묘사된다.25) 첫 번째 야고보묵시록에서는 야고보가 그 리스도로부터 영지를 전수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26)
24)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다른 제자들을 빼고 도마만을 데리고 가서 비 밀스러운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도마복음 13).
25) 가령, 빌립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짝으로, 예수가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는 제자로 묘사되며(63.34-46), 마리아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구세주의 말씀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10.1-10).
26) 첫 번째 야고보묵시록에서 영지와 야고보의 관계는 유병우, “영지 (Gnosis)의 계시: 첫 번째 야고보의 묵시록을 중심으로,” 신약논단 8 (2001), 175-97을 보라.
그러나 베드로복음에서 베드로는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정경복음서들에 비해 베드로복음의 베드로는 상대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보도되기는 한다. 예수가 처형될 때 베 드로와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게 아니라 “금식하고, … 밤낮으로 울면서 애도하였다.”(7:26-27)고 보도된다(cf. 14:59). 그러나 베드로복음에서 베드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열두)제자들의 대표 성을 지니는 정도이다.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등의 보도는 전혀 없다. 더군다나 베드로복음 에서 예수는 그 누구에게도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전수하지 않는다. 또한 영지를 깨달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사상도 발견할 수 없다.
2. 극단적 이원론
일반적으로 영지주의는 극단적인 이원론적 성향을 드러낸다. 선과 악이 대립하며, 선한 신으로서의 절대 신과 악한, 또는 타락 한 신적 존재로서의 데미우르고스27)가 대립한다. 특별히 영지주 의 시스템에서는 내면에 신적인 불꽃을 가진 사람들(영지주의자 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립한다.28)
27) 영지주의 시스템에서 물질세계를 만들었다는 신은 얄다바옷, 그리스어 로 데미우르고스이다. 송혜경, 영지주의: 그 민낯과의 만남, 160을 보라.
28) Eugene TeSelle, “Dualism,” The Cambridge Dictionary of Christianity, ed. by D. Pat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335를 참조하라.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 도가 전해준 비밀스러운 지식을 깨달음으로써 감옥으로서의 육체 와 이 세상을 벗어나 구원에 이른다. 그런데 베드로복음은 조 물주인 데미우르고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선과 악 의 대립이나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는 구원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영지주의는 육체를 포함한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영지주의 시스템 안에서는 육체의 부활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 나 베드로복음은 정경복음서들이 침묵하는 예수의 부활 장면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더욱 강하 게 증언한다.
38 그 광경을 보던 군인들은 백부장과 장로들을 깨웠다. 그들 역시 무 덤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39 그들이 자신들이 본 것을 보고하고 있는데, 세 사람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또 다시 보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부축하고 나오고 있었고, 십자가가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40 두 사람의 머리는 하늘에 닿았고, 그들의 부축을 받는 사람의 머리는 하늘 위로 솟았다.
41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잠자는 사람들에게 선포하였는가?”
42 그러자 십자가로부터 대답이 들렸다. “그 렇습니다”(10:38-41).
예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이와 같은 생생한 묘사는 영지주의 문헌에서는 상상조차하기 힘들다. 베드로복음은 빈 무덤 전승 을 통해서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다시 한 번 확증한다.
막달라 마리아 등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 도착해보니, 이미 무덤은 열 려 있었고, 빛나는 옷을 입은 젊은이가 앉아 있다가(13:55), 이렇 게 말한다. 왜 왔습니까? 누구를 찾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분을 찾는 게 아 닙니까? 그분은 부활하여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겠다면, 이쪽 에 내려서서 이곳을 보십시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해서 자기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가셨습니다(13:56).
육체를 포함한 물질세계에 대한 거부도 없고, 또한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베드로복음에서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발견할 수 없다.
3. 가현설
가현설이란,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하는 기독론으로,29) 영지주 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베드로복음에서 가현 설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은 세 구절이다.
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 예수?
첫째는 예수가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묘사되는 부 분이다. 베드로복음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인 두 사람을 데려와서, 주님을 그들 사이에서 십자가 에 못 박았다. 그러나 그분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셨다(4:10b). 아무런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치 영지주의적 성 향으로 보이기도 한다.30) 그러나 본문은 분명하게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w`j mhde,n po,non e;cwn)”이라고 하지,31)
29) 가현설의 정의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유병우, “가현설의 정의와 그 의 미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 신약논단 22 (2015), 537-50을 보라.
30) Swete는 이 구절이 베드로복음의 영지주의적 성향의 근거라고 주장 한다. H.B. Swete, The Akhmîm Fragment of the Apocryphal Gospel of St Paul (London, 1983), xxxviii; Foster, The Gospel of Peter, 292에서 재인용.
31) BWHEBB, BWHEBL, BWTRANSH [Hebrew]; BWGRKL, BWGRKN, and BWGRKI [Greek] PostScript® Type 1 and TrueType fonts Copyright ©1994-2015 BibleWorks, LLC. All rights reserved. These Biblical Greek and Hebrew fonts are used with permission and are from BibleWorks (www.bibleworks.com).
결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다. 설사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고 보도되더라도, 그것이 영지주의적 성향의 결정적 인 증거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는 십자가 위 에서 고통에 절규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 뒤 에, 머리를 숙이고 숨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된다(요 19:30). 이에 덧붙여, 정경에 포함된 초기그리스도교의 수난전승에서도 예수의 고난과 침묵이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 다. 의회 앞에 선 예수는 온갖 거짓 증언과 모욕적 언사에도 “입 을 다물고, 아무 답변도 하지 않았다”(막 14:61. 또한 마 26:63; 요 19:9 참조).
나. 십자가 위에서 인간 예수를 떠나버린 신성?
베드로복음의 가현설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보이는 두 번째 구절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마지막 절규이다. 나의 힘이시여! 오, 힘이시여! 당신은 나를 버리고 떠나셨습니다(5:19). 베드로복음은 십자가에서 인간 예수가 처형되기 직전에 하 나님의 영(신성, 神性)이 떠났다는 듯 묘사한다. 세례 받을 때 신 적 그리스도(Divine Christ)가 인간 예수에게 내려왔고, 예수가 십 자가 위에서 죽을 때 떠나갔다는 것이다.32)
32) J.W. McCant, “The Gospel of Peter: Doceticism Reconsidered,” New Testament Studies 30 (1984), 262.
이러한 주장이 정당 하다면, 위의 구절은 다분히 영지주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가현설적 기독론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 요한행전이 다.33)
33) 요한행전 전체가 다 영지주의적이지는 않다. 다만 94-102장과 109장 에 영지주의적 요소가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요 한행전에 이차적으로 추가된 본문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K. Schäferdiek, “Johannesakten,” Neutestamentliche Apokryphen, II: Apostolisches Apokalypen und Verwandtes, 6. Auflage. ed. by W. Schneemelcher (Tübingen: Mohr, 1999), 152를 보라. 해당 본문(101-102장)은 같은 책 170-71을 보 라.
요한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십자가 처형 직전에 신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를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서 고난을 당하지도, 죽지도 않았다고 한다(요한행전 101-102). 이러한 주장은 정경복음서들의 용례에서도 지지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힘’)이 신적 그리스도로 해석될 여 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 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부르 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4). 이러한 용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능력(‘힘’)이 떠났다는 베드로 복음의 표현을 ‘신적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를 떠났다’고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베드로복음 에서의 예수의 절규, 즉 “당신(즉 능력 또는 ‘힘’)은 나를 버리고 떠나셨습니다.”(5:19)라는 절규를 근거로 신적 그리스도가 인간 예 수를 떠났다고 해석하는 데에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선, 만약 이 순간이 신적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를 떠난 장면이라면,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결코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적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의 몸을 떠나 기 직전까지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으며, 바로 고통의 최고조인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적 그리스도는 고통에 서 해방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34) 둘째, 베드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이 땅에 닿자, 땅이 흔들렸다고 하는 데(6:21), 이 보도가 십자가에 달려 이미 죽은 육체의 신성을 분명 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35)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신성이 인간 예수를 이미 떠나버렸다면, 죽은 예수의 시신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을 수 없는데, 베드로복음은 이미 숨을 거둔 예수의 육체에 여전히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도한다. “이윽고 그들이 주 님의 손에서 못을 뽑고는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온 땅이 흔들렸고, 큰 두려움이 일어났다”(6:21). 따라서 베드로복음에서 신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 시 인간 예수를 떠났다 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더군다나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도 베드로복음이 보도하 는 예수의 절규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 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 리셨습니까?(eivj ti, evgkate,lipej me;)”(막 15:34)라고 부르짖는다.36)
34) P. Foster, “The Gospel of Peter,” 35.
35) P. Foster, “The Gospel of Peter,” 35.
36) 마태복음도 비슷하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 셨습니까?(Qee, mou qee, mou( i`nati, me evgkate,lipej;)”
물론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다르다. 베드로복음에서는 카탈레이포(katalei,pw)를 사용한 반면에,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 서는 접두어 에크(evk)가 포함된 엥카탈레이포(evgkatalei,pw)를 사용 하였다. 그런데 베드로복음에서 사용된 카탈레이포(katalei,pw)는 신약성서에서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 마태복음에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 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katalei,yei a;nqrwpoj to.n pate,ra kai. th.n mhte,ra kai. kollhqh,setai th|/ gunaiki. auvtou/)”(마 19:5, cf. 막 10:7; 엡 5:31)는 보도가 있는데, 여기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예수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 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 한 뒤에, “그들을 떠나갔다(kai. katalipw.n auvtou.j avph/lqen).”(마 16:4. cf. 21:17)고 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베드로복음에 사용된 카탈레이포(katalei,pw)라는 동사는 마가복 음과 마태복음에서 “남겨두고 떠나다”라는 의미로 쓰인 동사 엥 카탈레이포(evgkatalei,pw)와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따라서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표현에서 영지주의적 성향을 주장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마찬가지로 베드로복음의 “당신 은 나를 버리고 떠나셨습니다.”(5:19)라는 표현에서도 영지주의적 성향을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 힘(뒤나미스)
맥캔트(McCant)에 따르며, 뒤나미스(du,namij)는 하나님에 대한 완곡어법이며,37) ‘뒤나미스’라는 용어만으로도 베드로복음에 영지주의적 성향이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38)
37) McCant, “The Gospel of Peter: Doceticism Reconsidered,” 263. 뒤나미스가 하나님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는 맥캔트(McCant)의 주장은 뒤나미스 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에 근거하는데, 이러한 그의 판단은 긍정적 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도 하나님을 뒤나미스로 표현하는 환 유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나미스라는 용어로 하나님을 표현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영지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그의 평가는 논 리적 비약이다.
38) McCant, “The Gospel of Peter: Doceticism Reconsidered,” 262. 맥캔트는 특별한 논증 없이, 뒤나미스라는 용어의 사용만으로, 세례 때에 신적 그 리스도가 예수에게 내려왔고 예수의 죽음 때에 신적 그리스도가 예수 를 떠났다는 케린투스파 영지주의(Cerinthian gnostic system)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첫 번째 주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두 번째 주장은 비약이다.
다른 영지주의 문헌들에서 하나님을 뒤나미스로 부르는 것을 발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약성서에서도 뒤나미스는 매우 자주 쓰이는 단어인 데, 우선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능력을 의미한다. 가령, 바울은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하면서,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 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 어 있습니다”(롬 1:20)라고 진술한다. 여기서 ‘능력’은 하나님의 속 성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능력’은 주기도문의 송영에 도 드러난다. “나라와 권세(du,namij)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 입니다”(마 6:13).39)
39) 이 구절은 이차적 본문으로 네스틀레-알란트 그리스어 성서의 본문에 는 제외되어 있으며, 본문비평장치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말 성 서 전통에서는 본문에 포함되어 있다.
뒤나미스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 다.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 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롬 9:7)라는 구약인용(출 9:16, 칠십인역)이 적절한 예이다. 또한 바울 은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 다.”(고후 4:7)라고 진술함으로써 뒤나미스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 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엡 3:7) 라는 바울의 진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복음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과 부활에 대해서 논쟁할 때, 그들을 이 렇게 비판하는 것으로 보도된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 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마 22:29. 또한 막 12:24 참조). 여기서 뒤나미스는 하나님의 능력 또는 하나님으 로부터 오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 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눅 4:14)라든지,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 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행 1:8)라는 표현 역시 여기 에 해당한다. 이 밖에도 이 단어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의 미로 사용된 예는 무수히 많다.40) 비슷한 의미에서 뒤나미스는 또한 성령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다. 누가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눅 4:14)고 보도한다. 누가는 자신의 두 번째 책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 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라고 했다.41)
40) 이 밖에도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많다. 마 26:64; 눅 1:35; 22: 69; 롬 1:16, 20; 고전 1:18, 24, 2:5; 6:14; 고후 6:7; 13:14; 엡 3:7; 딤 후 1:8; 벧전 1:5; 계 1:16; 11:17; 12:10; 15:8 등.
41) 성령과 관련되는 기타 구절은 다음과 같다. 눅 24:49; 롬 15:13, 19; 고 전 2:4; 엡 3:16 등.
이처럼 뒤나미스는 초기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 나님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로, 결코 영지주의 의 가현설을 드러내는 독특한 특성이라고 할 수 없다.
4. 베드로복음은 영지주의 문헌인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베드로복음에서 영지주의적 요소 를 찾아내기는 힘들다.42) 그렇다면 왜 베드로복음이 영지주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을까? 바가나이(L. Vaganay)는 베드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예수’ 대신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을 외면하는 가현설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주장한 다.43)
실제로 베드로복음은 예수를 가리킬 때 ‘주님’이라는 용 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13번에 걸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44)
42) 영지주의가 특정한 종파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광범위한 현상을 가리 키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영지주의가 그 리스도교 내부의 이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경향 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Rich, “Gnosticism,” 369를 보라.
43) L. Vaganay, L’Évangile de Pierre (Paris, 1930), 109; Foster, The Gospel of Peter, 151에서 재인용.
44) 13번 가운데 11번은 노미나 사크라(nomina sacra) 형태로 사용되었다. 초기그리스도교문헌에서 하나님, 주님, 성령, 구세주 등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축약된 형태, 즉 nomina sacra 형태로 사용되었다는데, 이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로는 C. H. Robert, Manuscript, Society and Belief in Early Christian Egypt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26-48을 보 라.
특별히 복음서의 화자가 예수를 언급할 때에는 오로지 ‘주님’만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영지주의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예수에 대한 호칭으로서의 ‘주님’은 이미 신약성서와 초기그리스 도교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레네우스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발렌티누스파 영지 주의자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불렀으며,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 용하지 않았다고 한다(Adversus Haereses, I.1.3). 물론 이레네우스의 진술과는 달리 영지주의 문헌에서 ‘주님’이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영지주의 문헌들뿐 아니라 정경복음서들 이나 영지주의가 아닌 다른 초기그리스도교 문헌들에서도 널리 사용된 용어이기 때문에, ‘주님’이라는 용어에서 영지주의적 성향 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베드로복음에 ‘주 님’이라는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결 코 가현설이나 영지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베드로복음을 영지주의 문헌으로 분류하는 가장 중요한 근 거는 안디옥의 주교였던 세라피온(Serapion)과 베드로복음에 대 한 유세비우스의 보도(유세비우스, 교회사 6.12.1-6)일 것으로 판단된다.45) 유세비우스의 보도에 따르면, 세라피온이 소위 <베 드로복음>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는데, 베드로복음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로수스(Rhossus) 공동 체가 베드로복음으로 인해 이단에 빠졌다고 세라피온이 평가한 다고 유세비우스는 소개한다(6.12.1-2). 이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유세비우스는 세라피온의 글 을 직접 인용한다(6.12.3-6). 이에 따르면 세라피온이 로수스(Rhossus)를 방문하였다가 그곳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베드로복음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읽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처음에는 이것을 읽는 것을 허락하였다.46)
45) 유세비우스는 세라피온에 대한 일화를 언급하면서, 부분적으로 그의 글을 평가(6.12.1-2)하기도 하나, 상당한 양을 직접 인용한다(6.12.3-6).
46) 어만(Ehrman)의 평가처럼 로수스의 공동체가 정경복음서들을 알고 있 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으나 그들의 복음서는 베드로복음이었을 것이며, 공중예배 시간에 이것을 낭독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Ehrman, Lost Christianities, 27; D. Lührmann, “Petrus als Evangelist: Ein Bemerkenswertes Ostrakon,” Novum Testamentum 43 (2001), 359. 세라피온 이 베드로복음의 사용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은, 그것을 사적으로 읽는 것뿐 아니라 공중예배에서 읽도록 허락하였음을 의미한다는 뤼어만 (Lührmann)의 평가는 정당하다.
그러나 안디옥으로 돌아온 뒤에 뒤늦게 이것을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가현설적 요소들 때문이라고 밝 힌다. 아마도 이 이야기 때문에 베드로복음은 으레 영지주의 문헌으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라피온의 평가와 는 달리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베드로복음은 결코 영지주 의적 요소들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베드로복음을 반 대한 것은, 그 자체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이단적 성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예가 또 있다. 로마의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요 한계시록(계 2:6, 15)에 언급되는 니골라당과 관련하여, 그들이 추 종하는 니골라가 사도행전에 언급되는 니골라라고 전제하며, 그 를 영지주의자로 취급한다(Hippolytus, Refutatio omnium heresium, 7.24). 그러나 성서에 보도되는 니골라(행 6:5)나 니골라당(계 2:6, 15)을 영지주의와 관련시킬 만한 근거가 없다. 여기서도 영지주의 자라는 비난은 영지주의적 특생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들과는 신학이나 사상 또는 생각이 다른 집단에 대한 일반적 인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라피온이 베드로복음 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이단’이라든지 ‘가현설주의자들’이라는 용어는 베드로복음에 영지주의적 또는 가현설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적대자들을 비판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IV. 반유대주의적 성향
1. 신약성서의 반유대주의적 성향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전체로서의 유대인들에 대한 고정 관념이 구체화된 것으로, 그들을 본질적인 악으로 규정” 47)하는 것이다. 뤼터(R. R. Ruether)는 유럽문화권의 반유대주의적 사상의 뿌리가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주장하며,48) 에크하르트(A. R. Eckhardt)는 신약성서에 있다고 주장한다.49) 그만큼 유대인들과 유 대교에 대한 반감이 신약성서에서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50)
47) R.R. Ruether, “Anti-Semitism,” The Cambridge Dictionary of Christianity, ed. by D. Pat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56.
48) 앞의 글, 56. 더 자세한 내용은 R.R. Ruether, Faith and Fratricide: The Theological Roots of Anti-Semitism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7) 을 보라.
49) A.R. Eckhardt, Elder and Younger Brothers: The Encounter of Jews and Christians (New York: Scribner, 1967)를 보라.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윤리의 관점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불신의 벽을 허물려고 시도한 다.
50) 이에 대해서는 J.D.G. Dunn, “The Question of Anti-Semitism in the New Testament Writings of the Period,” Jews and Christians: the Parting of the Ways, CE 70 to 135, ed. by J.D.G. Dunn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1999), 176-211을 보라. 신약성서의 반유대적 성향 논쟁에 대한 소개로는 J.G. Gager, The Origins of Anti-Semitism: Attitudes toward Judaism in Pagan and Christian Antiquit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특히 13-34를 보라.
공관복음서들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민 사람 들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다(마 26:3-4; 막 14:1; 눅 22:2). 비록 로 마의 공권력이 최종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승인하였으나, 그것을 강요한 사람들은 분명하게 유대인들로 지목된다(마 27:15-26; 막 15:6-15; 눅 23:13-25). 마태복음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 대인들에게 있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 의 죄목을 찾지 못하는 빌라도에게 유대백성은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마 27:25)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도 유대인들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요한복 음의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유대인들’(VIouai/oi)은 ‘세 상’(ko,smoj)과 더불어 악역을 담당한다.51)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 랑하는 마음이 없다(요 5:42). 그들은 예수를 돌로 치려고 하였고 (요 8:59; 10:31),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19:6, 15). 또한 요한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고 처형한 자들 이 유대인들이라고 이해한다(요 16:2).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로 규정된다(요 3:19-21). 바울서신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등장한다.52)
51) 이에 대한 반대의견도 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적대적인 의미에서 의 ‘유대인들’이 전체 유대인들이 아니라, 소수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 킨다는 것이다. R.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vol. 1, (Garden City: Doubleday & Company, 1966), LXXI; R. Kysar, “John’s Anti-Jewish Polemic,” Biblical Research 9 (1993), 26-27 등. 그러나 요한복음 자체는 유대인들을 몇 개의 범주로 나누고, 일부를 긍정적으로, 또 나머지 일 부를 부정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그저 예 수의 적대자들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는 R.A. Culpepper, Anatomy of the Fourth Gospel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3), 126을 보라.
52) 물론 바울서신에서 유대인들이 긍정적으로 처리되는 본문도 있다. 로 마서 9-11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이 본 소고의 취지를 흐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본 소고는 비록 유대인들이 신약성서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기는 하나, 베드로복음에서는 한층 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유대인들을 긍정적으 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본 소고의 논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형제자매 여 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 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 을 받은 것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동족에게서 똑같은 고난 을 받았습니다. 유대 사람은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우리를 내쫓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자 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웁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 게 이르렀습니다”(살전 2:14-16).
이 밖에도 요한계시록에서 유대인들은 “사탄의 무리”(계 2:9; 3:9)로 규정된다.
2. 베드로복음의 반유대주의적 성향
그런데 베드로복음은 신약성서보다 훨씬 더 유대인들에 대 해 강도 높은 반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카이로사본 에서 베드로복음은 헤롯과 재판관 등 유대인들이 손을 씻지 않았다는 보도로 시작된다(1:1). 마태복음에도 비슷한 보도가 있 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 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마 27:24).
마태복음의 이 보도를 통해서 “마태는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빌라도에서 유대 백성에게로 떠넘기고 있 다.”53)
53) 민경식,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마태복음 (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2013), 521.
그런데 베드로복음은 이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유대인 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손을 씻지 않았다. 헤롯도 씻지 않았고, 그 의 재판관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씻지 않았다”(1:1).
이로써 베드로복음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더욱 분명히 한다.
이를 다시 한 번 확증하기 위해 빌라도는, 예 수가 부활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 유대인들에게
“나는 하나님 의 아들의 피와 관련하여 깨끗하오. 그를 죽인 것은 당신들이오.” 하고 말하였다(11:46).
빌라도 자신은 예수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 이 없으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베드로복음에서는 예수의 재판을 헤롯이 주도한 다. 빌라도가 아니라 헤롯이, 로마 군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명령하는 것으로 보도된다.
“그러자 헤롯 왕이 ‘내가 저 사람에게 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 든 다 행하라.’하고 말하고는, 그들에게 주님을 끌고 가라고 명령 하였다”(1:2).
처음부터 예수의 처형을 주도한 것은 로마의 공권력 이 아니라 헤롯을 비롯한 유대인들이다. 빌라도의 친구이자 예수의 친구인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묻겠 다고 하자(1:3), 빌라도가 헤롯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의 시체 를 요구하는데(1:4), 이는 예수의 시신에 대한 결정권을 헤롯이 쥐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뒤에 요셉에게 예수의 시신을 넘겨준 자들도 “유대인들”로 보도된다(6:23).
베드로복음에는 정경의 복음서들이 보도하지 않는 내용 가 운데 유대인들이 회개하는 장면이 있다. 예수가 죽고 난 뒤에 유 대인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을 깨닫고 이렇게 울면서 한탄한다.
“우리 죄로 인해 우리가 저주를 받는구 나. 심판과 예루살렘 멸망이 멀지 않았다”(7:25).
유대인들의 회개 에 대한 보도는 얼핏 그들의 잘못을 경감해주는 장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취급된다. 이 단락 직후에 그들은 여전히 제자들을 잡으려고 혈 안이 된 자들로 묘사된다(7:27). 또한 예수의 부활 증언을 방해하 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그들은 빌라도를 찾아가서 더욱 더 단단 히 예수의 무덤을 지킬 것을 간청하였으며(8:30),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로마 군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도록 신신당부하였다 (11:47). 베드로복음이 유대인들의 회개 장면을 보도하는 데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
이 보도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전적으로 유 대인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예루 살렘의 멸망이 로마에 대한 봉기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를 처형한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오리게네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오리게네스, 켈수스를 반박함 4.22).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이다.
V. 나가는 말
사본의 훼손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베드로복음은 오늘날 그 일부만이 전해진다. 전체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일부분만으로도 베드로복음의 특징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처형과 부활에 얽힌 이야기 이다. 첫 출판자(편집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베드로복음에는 영 지주의적 요소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이원론적 특징을 보이지도 않으며, 베드로나 또 다른 어떤 제자가 예수에게서 비 밀스러운 지식을 전수받았다는 보도도 없다. 또한 그런 영적인 지식(영지주의 신화 등)에 대한 정보마저도 없다. 물론 베드로복 음이 증언하는 예수는 결코 가현설로 설명할 수도 없다. 베드 로복음을 영지주의 문헌으로 잘못 규정한 것은 안디옥의 주교 세라피온에 대한 보도 등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초기그리스도교저 술가들의 오해와 베드로복음에 대한 부적절한 공격에서 비롯되 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베드로복음은 정경의 복음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예 수와 예수 사건을 묘사한다. 공관복음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베 드로복음의 예수는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며, 또한 육체의 부활을 경험한다. 베드로복음의 저자는 정경 복음서들 또는 그 자료들을 자유롭게 편집하여, 자신의 예수 이 야기를 쓴 것이다. 다만 정경의 복음서들보다 더 강한 어조로 유 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볼 때, 베드로복음의 저자가 강한 반유대적 색채를 바탕으로 정경복음서들의 내용을 자유롭게 편집하여 또 다른 하나의 예수 이야기를 저술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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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esus Narrative in the Gospel of Peter
Min, Kyoung-Shik (Yonsei University)
The Gospel of Peter, an apocryphal gospel dated to the 2 nd century CE, presents a unique and interesting case on the authority of the canonical Jesus tradition and its mutation in the early Christianity. Discovered in Cairo, Egypt, in the late 19th century, the parchments made of sheepskin preserve only a portion of the Gospel of Peter, which begins at a middle point in the trial scene and then proceeds with the rest of the passion narrative relating Jesus’ suffering,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verall, what is left in the manuscript reflects the tradition of the New Testament canonical gospels in terms of its content and narrative framework. The Petrine author seems to have followed his source material, i.e., the canonical gospels rather carefully and faithfully with one noticeable departure: criticism of the Jews and Judaism is more explicit and frequent in the Gospel of Peter than in the canonical gospels. It is rash, however, to conclude that this apocryphal gospel envisages the gnostic Christology and cosmology. The Gospel of Peter exhibits neither radical dualism nor any notion of mystical gnosis of the divine, two of the common features found in the gnostic literature from the 2 nd to 4 th centuries. The Christ portrayed in the Gospel of Peter is far from docetic as his earthly body is never denied; the Petrine Jesus has bodily suffered, been crucified, raised from the dead, and appeared to his disciples. Not all apocryphal gospels deviate from what was considered by the early Christians as orthodox. While holding onto the passion narrative of Jesus in the canonical gospels, the Gospel of Peter adds vividness to the story. Moreover, it features an elevated hostility against the Jews, an element that mirrors the strong anti-semitic mood prevalent at least among some quarters of the early church in the 2 nd century.
Keywords The Gospel of Peter, apocryphal gospels, Gnosticism, docetism, the passion narrative
신약논단 제24권 제1호 ․ 2017년 봄
(투고일: 2014. 2. 14. 심사일: 2017: 3. 6. 게재확정일: 2017: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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