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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슬리보예 지젝의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에 대한 연구 /김경빈.아세아연합신대

한국인들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다.

철저한 비주류로 극소수인 그들이 이룩해낸 엄청난 성공과 각 분야에서 목격되는 막대한 영향력을 부러워하면서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교육 분야에 있어서 두드러져서, 시중 서점에 가보면 유대인들의 교육법에 대한 서적들이 다수 출간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책들을 살펴보면 유대인 교육의 특징을 그들의 종교와 경전, 즉 유대교와 그들의 경전인 토라와 연관해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땅의 교육열이 남다른 부모들을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유대교의 종교 교육에서 목격되는 강점을 배워서 이를 일반적인 학습에도 적용하려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오랜 기간 혹독한 탄압과 지독한 차별 속에서도 유대인들이 살아남아 결국 지금과 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시킨 히브리인들의 유일신 야훼 신앙에서 유래한 유대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대교 신자는 아닐지라도 유대교에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대다수 유대인은 무신론자이다.

그들은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유대교 신자들이다.

슬라보예 지젝(이하 지젝)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70%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다.

종교적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이 우리에게 이스라엘 땅을 주셨음을 믿는다.”라는 물신주의적인 부인을 바탕으로 하는 징후적인 대답을 내놓는다.1

이러한 이스라엘의 세속주의자들과 정통파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병역에서 폭발해서 이스라엘에서는

1년도 안 돼 3번의 의회 해산과 이에 따른 총선을 해야만 할 정도로 심각한 정치 불안을 초래했다.2

건국 초기부터 유대교라는 전통 문화의 계승과 보존을 위하여 소수의 초정통주의자들의 병역면제가 평균의 3배에 달하는 높은 출산율로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서 더는 이런 특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일반 대중들의 압력이 점증하면서, 초월적 종교에 토대를 둔 민족 유대인과 현실적 권력의 종합체인 국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도착적 상황은 지난 2018년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에서 찬반 양 진영의 격론을 거쳐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며 제정된 “유대민족국가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3

1.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이현우, 김희진, 정일권 역 (서울: 난장이, 2014), 178.

2.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212010014; https://news.joins.com/ article/23578735

3.http://lodong.org/wp/archives/7063

공식적으로 하나의 국가인 이스라엘은 천부적, 종교적 권위에 근거한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로 규정되어 유대인이 아닌 다른 모든 이스라엘 국적자들은 민족적 자결권이 없는 2등 국민으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서 지젝은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우선 믿음(Belief, croyance)과 신앙(Faith, foi)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믿음은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지적인 동의와 신앙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 대한 존중이다.4

70%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신앙은 공유하고 있지만, 그 대상인 초월적인 존재가 있다는 신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무신론자 유대교 신자들이다.

지젝은 종교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는 비록 믿음 없을지라도 신앙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앙과 믿음의 변증법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이와 같은 주장을 내놓은 지젝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989년에 출간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독창적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관념론을 내놓은 그에게“동유럽의 기적”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5

그는 1949년 지금은 사라진 동구의 사회주의 국가 유고슬라비아의 일원이었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 공산주의가 몰락했던 시기에 혜성같이 등장한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이다.6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는 1970년대 등장한 해체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연구하여 이를 독자적으로 재구성하여 수용했고, 이를 헤겔 철학과 융합하여 마르크스에 적용한 결과물을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대중문화의 해석에 적용하여 현대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이를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행한 정치적 선언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7

흥미롭게도 그는 반기독교적인 다른 무신론자들과는 달리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 주체의 자유와 인류의 보편성은 서구 문화의 근원인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역설하면서8, 이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기독교의 본질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연구하면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명백한 혈통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9

그래서 2001년부터 4년 동안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믿음에 대해서』, 『죽은 신을 위하여-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를 연이어 내놓으면서 자칭 무신론 신학을 전개했다.10

지젝은 서구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기반이 되는 기독교의 유산을 외면하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을 비판하면서, 히브리 민족의 역사적 기원인 구약 성경의 출애굽 사건에서 기원한 유대-기독교 전통의 해방에 대한 서구의 오랜 기획을 재발견할 것을 촉구했다.11

비록, 그는 모든 초월성을 부인하는 확고한 무신론자면서 유물론자이지만,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유럽 문화의 뿌리인 기독교의 유산에서 유래했음을 지적했다.12

또한, 신학 연구에 있어서 정통교회의 교리에 충실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13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며, 확고한 무신론자다.14

4슬라보예 지젝, 『믿음에 대하여』, 최생열 역 (서울: 동문선, 2003), 117-121.

5Adam Kotsko, Zizek and Theology (New York: T&T Clark, 2008), 1.

6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서울: 이룸, 2009), 21.

7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9-13.

8Marika Rose, “The Christian legacy in incomplete: for and against Žižek,” Modern Believing 57.3 2016, 267.

9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김재영 역 (경기 고양: 인간사랑, 2004), 14.

10도미니크 핀겔덴, 『바울의 정치적 종말론』, 오진석 역 (서울: 도서출판 b, 2015), 104.

11김석 외 7인, 『라캉과 지젝-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경기 파주: 글항아리, 2014), 123.

12Marika Rose, “The Christian legacy in incomplete: for and against Žižek,” Modern Believing 57.3 2016, 271-272.

13Salvoj Žižek, Creston Davis, John Nilbank. Theology and The Political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5), 52-70.

14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21.

어떻게 무신론자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면서 기독교와 신학을 연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그러나 지젝에게서는 전통적인 관념론과 유물론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에 나오는 관상학에서 골상학으로의 이행에 주목한다. 얼굴의 표정을 연구하는 관상학은 무의식적인 의식이 표출되는 비언어적 의사소통(Non Verbal Communication)이고, 골상학은 그것이 축적된 잠정적이지만 최종적 결과물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굴의 표정에 나타나고, 이것이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근육이 굳어져서 인상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근육은 뼈에도 영향을 미쳐서 두개골의 형태 자체도 변한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정신은 뼈이다.’15

사상가로서 지젝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늘날 지성계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데카르트의 주체, 코기토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疑心)과 회의(懷疑)의 방법을 통한 진리 탐구는 분명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관한 관심을 촉구했다.16

그런데, 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주체는 데카르트가 아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에서 발견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17

전적으로 타락한 가망이 전혀 없는 죄인, 즉 병리적인 주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의 핵심 테제를 정신분석학의 시선에서 조명한다. 유물론자인 지젝은 믿음은 하나의 정신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규정하고, 그 자체에 대한 정신분석학과 관념론을 이용한 이론적인 접근만 했다. 이어서 그의 주특기인 현실에서의 적용을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권의 모습으로 설명했다. 지젝이 기독교와 신학에 관하여 연구하면서 내린 구체적인 결론은 앞에서 내린 바와 같이 종교 공동체 내에서 일어난 현상은 믿음과 신앙으로 구분되며, 대부분의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믿음 없이 신앙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종교 생활의 주체인 인간은 분열 중이며, 분열은 주체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18

종교에서 개별 주체의 믿음과 신앙의 분열을 피하려면, 상징 교환을 통한 타자와의 상호 작용을 피하려면 아미쉬와 같은 고립의 길로 가야만 한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19

정신 혹은 무의식에 대한 지젝의 이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자크 라캉(이하 라캉)을 알아봐야 한다.

“너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20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21

이 세 문장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대표하는 기본 명제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남겨놓은 환자 개인의 병리적 임상 기록을 소쉬르의 언어 철학과22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회인류학, 에밀 방브니스트의 구조주의 언어학을 이용하여 이론화시켰다23.

그래서 라캉의 이론은 개인은 물론 집단, 혹은 공동체 내지는 문화권에서 일어난 현상과 징후를 설명하는 것에 매우 유용하다.

예를 들어 반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

15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역 (서울: 새물결, 2013), 325.

16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서울: 도서출판 b, 2015), 9.

17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256-257.

18슬라보예 지젝, 『라캉 카페』,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13), 992.

19슬라보예 지젝, 『향락의 전이』, 이만우 역 (경기 고양: 인간사랑, 2002), 414.

20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역 (서울: 웅진 싱크빅, 2015), 15.

21김용수, 『자크 라캉』, (경기 파주: 살림, 2008), 11.

22숀 호머, 『라캉 읽기』, 김서용 역 (서울: 은행나무, 2017), 16.

23아니타 르메르, 『자크 라캉』, 이미선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6), 25-26.

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란츠 파농의 『검인 피부, 하얀 가면』은 라캉의 구조로 식민지와 아프리카, 그리고 흑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효과적으로 설명한 것으로24, 라캉의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읽으면 정확한 독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적 목적이 분명한 지젝에게도 라캉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프로이트의 개인적 차원에서 라캉의 사회적 차원으로, 그리고 지젝의 현실 정치의 차원으로 발전했다.25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라캉 본인은 정치적으로 회의주의자였고,26 합리적 이성의 선험적인 영역이 아닌 언어를 통한 타인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형성된 무의식의 구조가 표출된 주체의 욕망을 연구하여 일반적으로 프랑스 탈-구조주의자로 분류되지만, 다른 탈-구조주의자들과는 달리 언어화 과정의 파생물 이상인 자율성의 근거가 되는 고유성에 집요하게 매달렸다.27

왜냐하면, 만일 주체의 고유성이 없다면, 정신병 환자의 치유 가능성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원래 정신과 의사였던 라캉에게 이 부분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지젝은 이 점에 주목하여 구조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고유성과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에 대한 이론을 만들었다.28

지젝은 이 단계에서 헤겔의 변증법을 가져오는데, 특이하게 전통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완전히 새롭게 변증법 자체를 재해석한다. 즉, 헤겔의 정신을 절대정신이 아니라 라캉의 병리적 주체의 무의식으로 치환시켰다. 헤겔을 통해서 라캉을 바라보고, 라캉을 가지고 헤겔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서 지젝은 헤겔의 논리학부터 건드린다. 지젝은 인간 정신에 관한 헤겔의 무관심과 변증법에 대한 라캉을 비롯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오해로 인하여 서로에게 유익할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없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29

무(無)는 단순한 유(有) 결여(缺如)나 결핍(缺乏)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유(有)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절대 부정인 상태인 덴(Den)이다. 순수한 존재(reines Sein)→무(無)→유(有)라는 헤겔의 견해는 덴(Den)→무(無)→유(有)로 전환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헤겔의 난제였던 실제의 우연적 존재의 잉여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젝은 주장했다.30

파격적인 주장이지만, 그는 비관계(非關係)를 통해서 논증하는데, 두 사람이 서로 모르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이기에 비관계(非關係)가 존재하며, 만일 비관계(非關係)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어지게 된다.31

두 나라가 국교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비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교를 맺을 가능성이 생긴다. “나는 희생 그 자체만 빼놓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32

절대부정 댄(Den)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근거와 존재의 한계라는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되는데, 지젝은 이 둘을 각각 토대(Grund)33와 절대적 되튐(Absoluter Gegen- stoss)34으로 명명했다

24이경원, 『파농-니그로, 탈식민지화와 인간해방의 중심에 서다.』 (경기 파주: 한길사, 2015), 59.

25김석 외 7인, 『라캉과 지젝-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53.

26김석 외 7인, 『라캉과 지젝-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44.

27아나카 르메르, 『자크 라캉』, 25.

28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24-25.

29슬라보예 지젝, 『분명 여기에 뼈가 하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정현역 (경기 고양: 인간 사랑, 2016), 622.

30슬라보예 지젝, 『분명 여기에 뼈가 하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633.

31슬라보예 지젝, 『분명 여기에 뼈가 하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569.

32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37.

33슬라보예 지젝,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이성민 역 (서울; 도서출판b, 2007), 315-384.

34슬라보예 지젝, 『분명 여기에 뼈가 하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245-259.

정립 혹은 있음이 존재하듯이 반정립, 즉 없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 둘이 공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토대(Grund)가 있어야만 하고, 이 둘 모두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토대(Grund) 밖으로 이탈하려 할 경우, 선재하는 주체에 의한 반사적인 강력한 반동, 즉 절대적 되튐(Absoluter Gegenstoss)이 일어난다. 일반적으로 “반복으로서의 혁명”만이 있을 뿐이다.35

하지만, 파멸을 감수하면서 이성적 사유를 극복한 병리적 현상인“광기”에 의한 돌발적인 사건으로36 예외적인 현상이 일어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거기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토대 속에서 있음과 없음이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이 규정되어 변증법적 상호관계가 일어난다.37

결국, 이런 일의 반복 속에서 진리는 우연히 발견될 뿐이기에 “진리는 오해에서 발생한다.”38

이와 같은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 토대(Grund)에 참여해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되는데39, 그곳이 바로 인간의 정신이다.

결국, 모든 일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든, 혹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더 나아가 집단 그 자체로서의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 결정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젝은 이제 라캉이 이룩해 놓은 인간의 정신에 관한 연구를 접목한다. 처음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신분석학을 연구했을 때, 라캉은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고 있던 알렉산드로 코제프(이하 코제프)의 왜곡된 변증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40

지젝은 이를 바로잡아갔다. 라캉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젝은 유럽 변방의 그저 그런 관념론 철학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다 사회적, 학문적으로 절벽으로 밀려났던 젊은 날, 우연히 접한 자크 데리다(이하 데리다)를 통하여 라캉이라는 신세계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서 세계적인 사상가로 우뚝 설 수 있었는데, 이는 지젝 자신도 운명과도 같았다고 회고하고 있다.41

라캉 정신분석학의 메인 아이디어는 무의식의 주체에 이미지와 언어를 통하여 유입된 타자의 욕망42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정신의 세 영역에 작용하는데,43 지젝은 이를 이용하여 철학적 난제를 해결했고44, 신학 연구에도 활용했다.45

즉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세계를 라캉의 모델로 분석했다.

상상계는 라캉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46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을 재구성한 것이다.

자기 인식 이전이어서 자아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의 유아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의 이미지를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하면서 이를 닮아가면서 수용하는데47, 이로 인하여 외부의 이상적인 모습에 몰입하여 막상 자기 자신은 소외되는데, 역설적으로 이를 통하여 주체로서의 자아가 형성되어 간다.48

35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221-229.

36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15.

37김성욱, “지젝과 ‘변증법적 유물론’ 복권,” 「시대와 철학」, 제27권 3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 69.

38슬라보예 지젝, 『분명 여기에 뼈가 하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306.

39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박성구 역 (경기 고양: 인간사랑, 2007), 15. 40이안 파커,『지젝』, 이성민 역 (서울: 도서출판 b, 2008), 81-93.

41민승기, “지젝이라는 공간,” 『인문학 연구』 제24호, 경희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3, 6.

42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47.

43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노경인, 김주영 역 (서울; 엘피, 2017), 53.

44김석외 7인, 『라캉과 지젝-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123.

45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역 (서울: 새물결, 2015), 186-188.

46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48.

47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임창석 역 (서울: 새물결, 2017), 27.

48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28.

자아는 동일화의 퇴적으로, 원초적으로 불가능했지만 계속해서 일어나는 타자와의 동일화 시도는‘나’인가‘너’인가의 양자택일을 끊임없이 강요해서 일어나는 불안정을 극복하면서 자아는 성장하는데, 그 전형적인 예가 배변 훈련이다.49

상징계는 구조주의 영향을 받은 개념으로,50 상상계에서 일어난 자아와 타인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에서 생겨나는데51, 개인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의미의 사슬화(Signifying chain), 혹은 기표의 법(Law of the Signifier)에 흡수되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습득 단계에서 습득되어, 다음에 있을 새롭게 인식되는 상징을 기존의 상징을 통해서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이다.52

그래서 라캉에 의하면 언어는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구성하고,53 주체와 실제 사이에 형성되는 상징계로 인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도 간접적으로 신호를 통하여 인지할 수 있다.54

마치 운전 중의 교통신호와 같은 것이다. 신호등을 통해서 운전자는 다른 이와 직접 소통하지 않고도 타자와 의견 교환을 한다.

그런데 라캉은 상징계의 타자를 절대적 대타자(Autre)와 상대적 소타자(autre)로 구분한다. 주체인 자아와의 상호관계에서 영향력이 현격히 다르기 때문이다.55

상징을 통한 외부와 의사소통의 실패로 인한 결핍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체로서 인간은 믿고 의지할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어떤 존재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대타자가 한다.56

예를 들어 운전자에게 다른 운전자나 보행자는 소타자이지만, 법을 통하여 교통신호를 만들고 운영하는 정부는 대타자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황에 따라서 가변적인데, 어린 아기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대타자이지만, 성장하면서 절대성이 사라지는 순간 그 지위를 상실한다.57

교통신호에서 정부도 대타자인 것 같지만, 오류 가능성과 가변성으로 인하여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에서 진정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캉은 대타자의 부재를 대신하는 것이 종교의 대상인 신으로, 미지의 영역에 남아 사람이 자신에게 영원히 의지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58

그래서 그는 창조론자다. 이에 반해 지젝은 대타자 개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지만, 이것이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종교의 근거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59

실재계는 언어를 통한 상징 교환의 한계로 인한 상징계의 실패에서 기원한다.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언어를 통하여 상징화할 수 없는 선험적인 영역이 있는데, 그것이 실재계다. 언어 등을 이용한 상징계 형성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외상, 즉 트라우마로 인하여 상징계에는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고 라캉은 주장한다.60

49켈시 우드, 『한 권으로 읽는 지젝』, 박현정 역 (경기 고양: 인간사랑, 2018), 44.

50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49.

51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30.

52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51.

53토니 마이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55-59.

54아나카 르메르, 『자크 라캉』, 114-115

55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25.

56김석 외 7인, 『라탕과 지젝-정치적,신학적,문화적 독법』, 27.

57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32.

58김석 외 7인, 『라캉과 지젝-정치적, 신학적, 문화적 독법』, 109

59슬라보예 지젝, 『예수는 괴물이다』, 배성민, 박치현 역 (서울: 마티, 2013), 455.

그리고 주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이 구조적 결함을 해결해야만 하고, 결국 그 틈은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누빔점이 생겨나 구조화된 네트워크 속의 일부가 되면서 극복된다.61

그러나 돌발적인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밀려와 누빔점이 무너져 구조 자체가 흔들릴 때, 실재계에 숨겨져 있던 정말로 원했던 것, 케 보이가 표출된다62.

상징계를 이용하여 상상계에 일어난 사태, 예를 들어 맛집으로 소문나서 몇 시간을 대기하다가 겨우 먹었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서 밀려드는 배신감과 허무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실재계가 드러난다.

맛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고,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를 상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재계는 그런 곳으로, 지젝에 의하면, 바로 그 자리가 변증법이 실현되는 현장이다.63

그리고 이는 무의식과 관련된 윤리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64.

또한, 숨겨져 있던 무의식의 욕망도 표출된다.65

무의식은 사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66 여기서부터 정신분석학은 분석의 학문에서 서술의 학문으로 발전한다.67

인간의 정신에서 현상은 사후적으로 서술할 수는 있어도 사전적으로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상상 속에서 꿈꾼 맛과 현실에서 경험한 맛은 일치할 수 없고, 둘은 대립하지만 공존하면서 원래 있었던 맛에 대한 생각과도 상호 작용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리고 변화가 일어난다. 기대했던 맛과 경험한 맛, 그리고 원래 입맛은 모두 다 다르지만, 이들 모두가 상호 작용하는 속에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이 셋은 모두 영향을 받아 변화가 일어난다. 또한,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요인들로 인하여 인간의 기억 자체에도 조작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맛과 관련된 모든 요인을 완벽하게 분석하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맛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먹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렇게 만드는 어떤 미지의 것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욕망에 이끌리어 마치 그럴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선택할 자유(상징계)가 있다는 것에는 선택할 의무(실재계)가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68

만일 선택 자체가 없다면 이런 고민은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유명한 맛집일지라도 그 음식 자체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애초부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역은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뛰어넘는 선악을 초월한 장소라고 라캉은 주장했다.69

그리고 숨겨져 있는 실재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길 요청한다.70

61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149-150.

62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184-187.

63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61.

64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52.

65숀 호머, 『라캉읽기』, 김서영 (서울; 은행나무, 2017), 135.

66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109-122.

67김현강, 『슬라보예 지젝』, 50.

68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261-262.

69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204.

70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246.

방문한 여행지의 유명 맛집에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면서 먹어볼 가치가 있는지는 합리적 이성을 이용하여 논리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먹어보기 전까지는 그 욕망을 결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욕망은 상징 교환 과정에서 타자의 욕망이 이식된 것이지만, 충족되기 전까지는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쳐서 또 다른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본문의 메인 주제인 신앙과 믿음의 변증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먼저 라캉과 지젝에게 믿음은 대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믿음은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가에 대한 지적인 동의이다.

둘의 차이는 대타자가 실재하는가이다.

즉, 초월적인 존재인 대타자가 현실에서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라캉은 그렇다는 것이고, 지젝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변증법적 상호 작용의 전반적인 구도 속에서 어느 것이 더 내적 통일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타자는 개별 주체들이 상징 교환을 통하여 상호 간에 의사소통할 때, 최소한의 공통적인 합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만일 대타자가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또한, 대타자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런 믿음은 쉽게 무너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없기에 믿는 척을 할 뿐이다. 를 들어 도시의 교통 신호등을 살펴보겠다. 정부는 법을 만들고 이 법에 따라서 교통 신호들을 설치, 운영한다. 이를 통해서 운전자나 보행자를 비롯한 모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상징 교환을 통해서 사고 없이 안전하게 도로에 나와서 다닐 수 있다.

정부는 대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정말 대타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타자이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은 그것이 지탱하는 상징체계 구원들 모두의 확고한 신뢰가 있어야만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모든 운전자 혹은 보행자는 자의건 타의건 완벽하게 교통 법규를 지키지는 못한다.

제한된 정보로 인하여 혹은 돌발적인 상황 때문에 부득불 규칙을 위반한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방어 운전을 해야 할 의무도 있다. 또 이 모든 규칙을 만든 정부는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자신들이 만든 예외 상황의 불가피성을 근거로 법을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 때로는 법까지 바꾼다. 따라서 국민에게 국가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진 고귀한 것으로 무조건 믿고 따라야만 하는 절대선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적인 차악(遮惡)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처음부터 대타자는 아니었고, 믿음의 대상도 아니었다. 단지 믿어야만 하는 대상이 있어야만 하기에 믿는 척 했을 뿐이다. 의미와 사슬로 엮인 상징체계 속에서 실재하기 위하여 주체는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이와 같은 상태, 즉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믿는 척만 하는 것은 아마 신앙일 것이다. 종교적 언어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초월적인 신에 대한 존중은 정치적인 수사인 소속된 공동체를 유지 시키는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바꾸어 보자. 라캉과 지젝에서 이런 신앙은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인가.

믿음과 같이 상징계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다른 영역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 보면 달라진다. 왜냐하면, 욕망과 관계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존재의 근거가 되는 토대(Grund)의 존속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대적 되튐(Absoluter Gegen- stoss)에 의한 반동으로 자기 합리화가 일어난다. 이를 비유로 설명해 보겠다. 어떤 가족이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점심시간에 맛집 기행을 하던 중 방문한 한 유명 식당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 이상으로 손님이 너무 많아서 번호표 뽑고 3 시간을 문밖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이때 남편과 아이들은 배고픔(욕망 A-1) 때문에 옆에 있는 식당을 가고 싶었지만, 아내는 인스타에 멋진 사진을 올려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욕망 B-1)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이 둘(욕망 A-1와 욕망 B-1)은 충돌했지만, 가정(토대 1)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일단 기다리면서 아이들에게는 대신 옆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주는 것(누빔점 C-1)으로 타협을 본다.

그러면서 남편은 자신은 헌신적 가장이라면서 자위(증상 A)하고, 아내에게는 아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시켜준다는 만족(증상 B)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실상 남편은 여행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화를 낼 용기(광기 A)가 없었고, 아내는 가정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해서(대타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순종하는 척할 뿐이기에(소타자),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찡얼거리며 더는 못 참겠다고 반항(사건 C)하지만, 이번에는 부모는 스마트 폰으로 좋아하는 동영상을 틀어줘서(누빔점 C-2) 상황을 모면한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이 일어난다.

그날따라 손님이 너무 많았기에 재료가 떨어졌다면서 그날 장사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쌓여왔던 갈등이 폭발하여(광기 B) 가족들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쏟아놓는다.

남편이 원했던 것은 결국 평소 기죽어 지내면서 억눌렸던 가장으로서의 체면(트라우마 A-1),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이 없었던 아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이었다(트라우마 B-1).

그렇다면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가족 여행이 싫어졌다(트라우마 C-1).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

싸움이 커져서 여행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덴 A)은 모두가 바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모두 인정하기 위하여 저녁을 더 좋은 곳에서 먹기 위해 고급 식당을 예약을 한다(누빔점 C-3).

가족 모두는 가족 간의 화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신앙), 각자의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 남편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려고 예약과 함께 선납했던 숙박비가 아까웠고(케 보이 A), 아내는 일상을 탈출해 오랜만에 답답한 집에서 벗어나 느껴본 해방을 계속 누리고 싶었다(케 보이 B). 아이들은 친구들한테 가족 여행을 간다고 자랑했던 것 때문에 이 여행을 예정대로 마무리하기를 원했다(케 보이 C). 그래서 모두 불만은 있었지만, 일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속으로 참으면서 여행을 계속해서 결국 무사히 집에 돌아왔고, 이제 그들 앞에 놓여있는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비록 처음 예정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지만, 모든 가족들이 나름 원하던 바를 다 얻어 만족한다. 가족의 구성원들이 정말로 믿고 있던 것, 즉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즉, 무엇이 그들의 진짜 대타자였을까? 남편에게는 돈(대타자 A)이 대타자였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면 날릴 선납한 숙박비가 그의 무의식적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분위기 전환을 위한 저녁 식사로 지불한 액수가 더 클 수도 있지만, 여기서 돌아가면 포기해야 할 선납한 숙박비가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예정이 없던 비싼 저녁 식사를 감수했다. 아내에게는 시간(대타자 B)이었을 것이다. 소중한 가족과의 여행에서 많은 시간을 맛집 앞에서 대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은 아닐 것이다. 평소 애용하는 집 근처의 단골집이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고, 이 소동이 방송과 인터넷, SNS를 이용한 치밀한 홍보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평소 살림살이 때문에 자신만의 시간이 없어서 이런 핫 플래이스를 찾아갈 엄두까지 내지 못했던 그녀는, 평소에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던 다른 가족들의 짜증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예정된 일정을 다 소화하고 싶었다. 아이들의 경우 친구들(대타자 C)이다. 유명한 맛집이라는 곳이 아이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서서 기다리는 것은 너무 지루하다. 그래도 친구들한테 오기 전에 자랑했던 것과 돌아가서 풀어놓을 허풍은 포기할 수 없다. 먹어보니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TV에도 여러 번 나온 유명한 곳이어서 일단 먹어보면 학교에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부러워할 친구들의 시선들만 생각하면 지루함을 참고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마음에는 여전히 섭섭함이 남아 있다.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이 이 여행을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들인 수고와 여행지에서 쓴 비용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잘 몰라 준다고 생각한다(트라우마 A-2). 아내는 오랜만에 떠난 여행이었지만 다른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지 않아서 집안에서 살림했던 것의 연장이었을 뿐이고, 다음에 기회만 된다면 마음이 통하는 편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야겠다면서 여기저기 연락을 한다(트라우마 B-2). 아이들은 맛집 탐방이라지만 결국 겨우 국내 여행이나 다녀온 자기 집의 처지가 여름 방학 때 디즈니랜드를 갔던 친구네와 너무 비교되어서 비참했고 무능한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트라우마 C). 그래도 그들 모두는 이런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 46 제61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발표3] 김경빈, “슬리보예 지젝의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에 대한 연구” 없는 화목한 가정의 일원으로 살아갔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시간은 흘러가 이 모든 사건은 지난날의 추억이 되고, 명절날 가족들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바를 정리해 보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믿음은 다 다르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대타자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돈, 시간, 친구들은 셋 모두에게 소중한 존재이고, 그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무의식 속에 숨어있다가 결정의 순간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렇지만, 이 가족이 외부의 충격에 의한 내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분명한 가치, 즉 가족의 화목이라는 숭고한 가치에 대한 존중 즉,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 중 한 명이 이 고귀한 덕목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을 거부한다면 그 공동체는 붕괴할 수도 있는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가족의 붕괴가 자신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삶의 터전인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대가를 기꺼이 지급한다.

그러나, 본심을 숨겨서 발생한 의사소통의 한계로 인한 트라우마는 그들 모두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트라우마도 결국 퇴적물과 같이 쌓이면서 자아의 일부가 된다. 지젝의 관점에서 교회와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모든 교회 공동체들이 믿음과 신앙 모두 가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만일 정말로 그런 교회 공동체가 있다면 이는 거짓이거나 광신,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이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있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있으며, 무지와 진리, 선과 악 사이에 있다. 이와는 반대로 믿음, 신앙 모두 없는 신앙 공동체는 논리적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나 성도 모두는 있음과 없음 사이 그 어느 곳에 있다. 그러면서 있음과 없음, 신앙과 믿음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분열 중인 주체로 살아간다. 악은 선이 없어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악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불신은 믿음이 없는 특수한 상태가 아니라 다른 것을 믿는 것이다. 선은 악의 우연적인 결과물일 수도 있기 때문에 믿음과 신앙은 윤리적 가치판단을 초월한다. 신앙은 믿음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대타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주체에는 자시만의 대타자가 있다.

여기서 남겨진 과제로 변증법적인 관계와 궁극인 지양에 대한 의문이 던져진다.

이 주제에 있어서 지젝은 라캉의 구도가 이식된 헤겔로 논증한다. 헤겔의 주체는 절대적 주체이지만,71 분열된 정신이 반영된 실체인 주체는 한계가 분명하다.72

그러나 이 반영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모두 이중적으로 항상 지속 되면서 그 현상인 주체는 자신 또한 스스로 폐지해가면서 존재하며, 이럴 경우에만 진정한 자유의 순수 형태에 이를 수 있다.73

즉, 과거의 것, 즉 트라우마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지젝은 다소 엉뚱하게 기독교, 그중에서도 특별히 프로테스탄트의 예정론을 높이 평가한다.74

71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44.

72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52-353

73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59-360.

74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356-358.

신(神)이 육화(肉化)를 통하여 신이 자기 자신을 버렸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 과정 또한 그의 권능 아래에 있어서 여전히 전능한 신(神)인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피조물과 같이 되어 절대 타자성이 극복되어 이미 결정되었다는 점은 부정의 불안에서 긍정의 확신이 대체되어 자유는 더 강력한 추동력을 가지게 된다. 외부와의 상징 교환 속에 연속된 실패로 트라우마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주체는 이를 통하여 성장해 나가듯 광기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자유는 퍼져 나간다.

혼돈의 자리, 그곳의 빈틈에서 자유의 씨가 뿌려지고 진보는 거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젝은 종교개혁자 루터를 높이 평가했다.

근대의 출발점인 진정한 코기토의 출발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의 주체가 아닌 루터의 분열된 병리적 주체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 즉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에 주목했다.

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개인이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작동하는 방향을 긍정적인 목표로 변경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로 인하여 발생하는 욕망에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드리워져 있지만, 숭고하고 거룩한 것에 대한 욕망도 있는데, 라캉의 구도 속에서도 이것도 트라우마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후기에 라캉은 이 문제에 매달렸다. 일반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로 인하여 개인은 하나의 객체적인 존재로서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75

75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361.

효를 최상의 덕목으로 삼는 유교 성리학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자리는 없고, 자식은 영원히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유교 문화권에서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적었을 수 있지만, 약자는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유를 향한 역사의 진보도 찾기 힘들다. 그러다 그 체계 자체가 붕괴하여 믿었던 바와 의지했던 것이 사라졌을 때, 문화 대혁명과 같은 자기 파괴적 약탈과 대량 학살이라는 인간성 말살이 일반 대중에 의하여 자행되었다. 부모님과 내가 하나라면, 나의 치명적인 문제는 부모님의 치명적인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나와 마찬가지인 부모를 죽이는 것, 즉 대타자를 제거하는 것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를 예방한다. 지젝이라는 한 개인이 살았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조국이라 생각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은 이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제삼세계 국가와의 외교적 필요로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이지만 각 개인의 종교는 민족에 따라서 규정할 정도로 모든 것을 통제했던 위대한 인민의 지도자 티토의 공산당의 절대권력이 눈 녹듯 사라졌고, 모두의 만족을 위하여 고의로 느슨하게 만든 다민족 다문화, 다 종교의 불안정한 연방의 구조는 그 누구도 만족할 수 없었던 아주 작은 불안의 외침에 순식간에 붕괴했고, 이로 인한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혼란과 무의미한 파괴가 자행되어 결국 모두가 불행해졌다. 권력의 진공상태와 이념의 빈자리는 사람들을 결국 원초적인 민족 정체성으로 회귀시켰고, 바로 얼마 전 무신론자 공산당원으로 이웃들과 사이가 좋던 보통 사람이 평소에는 무시했던 자신의 소속 종교에서 믿는 신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학살하면서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자신도 슬로베니아인이었기 때문에 로마가톨릭으로 규정되어 다니지 않는 교회에 소속되었고 믿지 않는 신을 믿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것을 강요했던 체제가 무너졌을 때, 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상황으로 흘러갔는데, 일단 그렇게 정해진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대타자로 여겨졌던 공산당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대타자, 실재하지 않는 대타자가 필요했고,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 신이 민족에 따라서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했던 치열한 내전은 드디어 끝났다. 이제 누가 대타자의 자리를 차지했을까? 바로 자본주의다

. 돈만이 법이요 진리요 생명인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지젝은 자본주의를 격렬히 비판해왔고, 물신주의 극복을 자신의 중요한 학문 과제로 삼고 있다. 참된 자유는 대타자가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주체로서의 자아는 연속되는 상징 교환의 실패로 인한 트라우마가 쌓이고 쌓인 병리적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해방을 향하여 나간다. 그러나 라캉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대타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상징의 한계 뒤에 숨어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현대 과학적 사고의 중심에 있는 인과율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파괴한다는 고민을 가져왔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한계를 초월한 심연의 원초적인 그 무엇인 프로이트의 das Ding의 선재다.76

그래서 그는 현대 지성계에서 보기 드문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논리를 초월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하여 상징화될 수 없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 인식할 수 있는 das Ding은 대타자의 욕망이 발현된 것이기에, 그 결과물인 죄에 대한 속죄도 그곳 das Ding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라캉은 주장했다.77

76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227-229.

77무까이 마사아끼, 『라캉 대 라캉』, 230-231.

상처를 준 그것만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그래서 대타자인 신은 균열(트라우마)에서 인식되기에 존재하고 이것의 해결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 가 생각난다.

학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환자의 치료에 있다.

이제 내용을 정리하면서 논의를 마무리하겠다.

서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쇠퇴와 텅 빈 교회 건물을 보면서 전통적인 서구 문명의 몰락으로 예견하는 지식인들이 많지만, 이에 대해서 지젝은 다른 의견을 표명한다. 상징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를 해결하기 위한 대타자가 언제 어디서나 필수적이다.

따라서 종교가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믿는 그 어떤 것, 즉 대타자가 있기 마련이고, 완전한 의미에서 무신론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계몽주의 이후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멍에라고 비판했지만, 이로 인하여 황금만능주의와 같은 극단적인 물신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이 시대는 돈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있다.

이런 병리적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타자로서의 종교 혹은 신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 하며, 그로 인한 영향과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많은 서구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서구 문명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들, 예를 들어 보편적 진리에 대한 추구나 해방의 오랜 기획은 기독교와 무관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기에 당연한 것 같이 여기지만, 다른 종교를 믿는 문화권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비록 개인적으로 믿든 안 믿든, 그것들이 이 시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우선 가치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기독교를 존중하고 그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

서구 문화권에서 있어 온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던 논쟁은 지금까지는 광의의 기독교적 범주 즉 그들의 토대 안에서 일어났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 기본 토대인 교회와 기독교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에 대한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젝은 비판한다.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해 보였던 일당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이로 인하여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동유럽의 복잡한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상황 속에서 지내오면서 그가 목격한 것은 모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의 강함이 아니라 믿음과 신앙의 공고함이었다. 필연적인 오해를 극복해 주는 대타자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신기루같이 공동체는 분해된다.

대타자의 사실성을 거부한 지젝은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지만, 물신주의라는 이 시대의 대타자와의 투쟁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대타자에 있어서 라캉과 같이 솔직해져야 할 것이다. 믿음이 환상일 뿐이라면 치료도 착각일 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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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이한영/감리교신학대>

1. 글 전체에 대한 개략도

이 글이 주는 난해, 난삽, 복잡함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개략도를 그려 보았다.

<문제제기>

현황: 유대인들의 현주소: 유신론 --- 무신론 ↓

분석: 지젝의 분석: 믿음 --- 신앙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

<분석틀에 대한 소개>

* 지젝: 헤겔: 변증법 (절대정신 -> 지젝: 병리적 주체의 무의식) ↔ 데카르트 정신(이성) {관상학 → 골상학 (외적 표상 -> 무의식적 시간적 축적변화)}에 관심 : ‘덴(Den 절대부정)’-- (사이: 유, 무의 관계서술, 변증법에 사용) : 라깡: 정신분석 -- (실재계, 무의식, 욕망을 까발리는 데 유용) :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분석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 분석을 위해 사용) : 상징계 -- 대타자: 상대적 소타자 : 절대적 대타자): 신(God): 허상, 믿음(종교근거) : 실재계 -- 언어를 통해 상징화할 수 없는 선험적 영역 (관련개념: 상징계의 누빔점, 케 보이, 무의식의 욕망) : 유물론 : 맑시즘 : 루터 재해석 --- 병리적 주체: 믿음으로 구원 : 기독교 분석 --- 믿음 없는 신앙 (공동체) 가능. 정신분열과 치료 (==> 절대자아, 절대이성의 변증법이 아닌, 무의식의 변증법) (참된 실재는 자아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드러난다) (고립된 개인무의식 아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무의식) (바탕의식으로서의 무의식과 전의식의 구별이 필요해 보인다) (==> 결국 믿음에 대한 분석을 위해, 이 긴 글의 소개가 필요했던 것: 주체, 정신, 실재) * 라깡: 개인, 집단, 공동체(문화권)에서의 현상과 징후 설명에 유용 (기독교 적용가능) : ‘주체’의 ‘고유성’ 연구 (--> 지젝의 주체 개념에 영향) :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 대타자 인정 (↔ 지젝: 대타자 부정). *

<두 가지 문제점>

라깡과 지젝의 차이 [ ① 믿음은 허상인가 실재인가? ② 초월적 존재(대타자)는 존재하는가 아닌가?]

* 대타자: 개인마다 다른 대타자의 존재.

(기독교 적용: 동일한 하나님? 각자의 하나님?)

- 토대: 대타자와 토대의 존속 보장: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토대 (신앙공동체와 관련)

- 믿음: 신자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 돈? 권력?) (: substitutions) -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인가, 신앙인가? 아니면 상호작용인가? (믿음 없이 신앙공동체를 유지해가는 사람들, 현실에 대한 분석의 틀로 유효)

<지젝의 관점에서 본 교회, 기독교, 그리스도인들>

- 믿음과 신앙의 일치는 이상적이지만 불가. 이 둘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가 존재. 사람들: 이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분열의 주체로 살아가는 존재들

- 지젝에게 헤겔식 절대주체란 없다. 분열된 정신이 반영된 한계인으로서의 주체.

- 루터 이해: 분열된 병리적 주체의 구원(by 믿음): 트라우마 극복: 목표의 방향전환. - 외디푸스컴플렉스의 예방효과: 부친살해. 대타자의 제거. 근본적 원인 제거. (이 글은 외디푸스컴플렉스를 긍정적으로 본다. 왜? 아버지 신을 죽이지 않으려고.)

- 지젝은 자본주의, 물신주의 등의 대타자를 죽이고 새로운 자유, 해방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 라깡<글쓴이의 생각>

<마무리>

- 믿음과 신앙의 분열, 이중성, 변증법을 논하던 글쓴이는 지젝을 잘 따라오다가 갑자기 라깡으로 선회한다. 그 이유는 대타자의 존재 유무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 이유: 상처를 준 곳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프로이트 식 생각) - 황금만능주의, 물신주의의 병리적 기독교 현상극복 방안 : 대타자 제거가 아니라, 대타자 존재 의미 고민, 보편적 가치, 기독교 유산 보존 등 주장

- 지젝이 물신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만족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

- 라깡처럼 솔직히 대타자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

- 치료를 위해 믿음은 환상이 아니어야 한다고 주장 ==> 마무리가 매우 아쉽다.

오히려 지젝에게 말한 지적이 글쓴이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해야 한다.

① 글쓴이가 생각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각자 다른 대타자를 갖고 있음에도 믿음이 환상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② 각자의 대타자가 다르다면, 어떤 대타자를 인정해야 하는가? 보편적 대타자 또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바탕적 대타자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③ (니체를 응용하자면),“그런 신(대타자)은 죽었다”고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믿음은 환상이다”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④ 황금만능주의, 물신주의, 기복신앙에 물든 기독교를 치료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2. 이 글 전체에 대한 개략적 이해 및 논평

이 글은 믿음과 신앙의 이중구속(double bind)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대적 상황과 이로부터 출발하는 지젝의 분석,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지젝 철학에 대한 배경소개, 유물변증론자인 지젝의 바탕이 되는 헤겔 (변증법) 철학과 라깡 심리학의 배경적 소개를 통해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고유성과 관련된) “주체”에 대한 (지젝의) 해석, 절대부정의 상태인 “덴”에 대한 개념분석을 통한 “유”와 “무” 에 대한 이해, 인간정신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 합리적 이성정신과 (특별히 욕망과 관련된) 라캉의 무의식적 정신-주체에 대한 이해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라깡의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대한 긴 글은 특별히 숨겨져 있는 실재계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서술적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42~43페이지에 이르는 이러한 긴 서술은 이 글이 지향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한 서설에 불과하다.

믿음과 신앙의 이중구속의 문제를 해부함으로써 종교, 특별히 현실 기독교의 숨겨져 있는 진짜 문제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시도이다.

그래서 현실분석에 있어서 믿음과 신앙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정작 기독교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대타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정작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두 인물, 즉 라깡과 지젝은 이 점에 있어서 갈라지며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각자 자신의 입장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타자는 없다는 지젝의 입장과 대타자는 있다는 라캉의 입장으로 말이다.

(논평자는 이 둘이 서로 변증법적으로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God과 Godhead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은 기독교를 전통적인 서구문명의 몰락으로 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지젝의 견해에 따라 기독교를 대신하는 대타자의 등장, 물질만능주의와 자본주의와 결탁한 병리적 대타자의 등장에 논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은 대타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른 해방의 길을 찾는 지젝을 따라가지 않고, 대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라깡에게서 찾는다.

그러면서 대타자의 존재의미와 함께 믿음의 존재의미를 통해 치료의 의미도 함께 찾고자 한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문장으로의 제안만 있을 뿐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미완의 글이라고 생각된다. 좀 더 발전시켜 완성된다면, 좋은 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실 독자들이 기대하는 부분은 위와 같은 분석을 추상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아니라 기독교 현실, 특별히 한국기독교 현실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분석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기독교의 현실문제를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을 통해 분석, 진단하고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문제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의 문제다.

번역물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글들, 문법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문장들, 난해함이 아닌 난삽한 글쓰기로 인한 독해의 어려움, 소제목으로 구분되지 않은 글의 구성, 지금 이러한 글을 전개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과 설득과정의 결여 등이다. 즉 글은 자신의 생각임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이 글은 논문게재용 글은 아니다.

발표용 글이다.

유대상황에 대한 긴 소개, 지젝과 라깡의 개념과 사상에 대한 긴 글, 맛에 대한 긴 예시 등은 논문에서는 불필요한 사족이다.

그래서 논평자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글을 읽고자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완의 마무리가 아쉽다.

왜 라깡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제까지 끌고 온 지젝의 논리가 한 순간에 허물어지고, 라깡으로의 선회도 그 타당성을 이해하기 어렵다(아래 <3 질문>의 7, 8번 참조).

아무런 설명도 근거주장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위와 같은 긴 글들을 적절히 생략, 삭제하거나 축소하고, <믿음과 신앙>, <대타자> 등에 대한 현실적 적용(한국적 상황 등)에 더 많은 지면을 활용한다면, 이 글의 완성도는 한층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질문: 궁금한 것들을 적어 봅니다.

① <37페이지> 밑줄을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 그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이 우리에게 이스라엘 땅을 주셨음을 믿는다.”라는 물신주의적인 부인을 바탕으로 하는 징후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

② <39페이지> 헤겔의 관상학에서 골상학으로의 이행에 지젝이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이 글의 논의 전개에서 왜 중요한가?

③ <46페이지> 프로테스탄트의 예정론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는데, 그 아래 내용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설명해주었으면 한다.

④ <47페이지> 유교 성리학의 외디푸스 컴플렉스 부재와 대비하면서, 자유를 향한 진보를 위해, 외디푸스 컴플렉스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대타자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면서도, 이를 예방하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글이 읽힌다. 이러한 독해가 맞다면,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전 단계에서 성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막아야 하고 예방하는 것이 아닌,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 아닌가?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곧 아버지의 죽음과 부활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병리적 기독교의 치유는 병든 주체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다시 탄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⑤ <신앙과 믿음의 변증법> 왜 변증법인가? 헤겔식 정반합의 변증법이나, {즉자, 대자, 즉자-대자}의 실존변증법도 아니라면, 어떤 의미에서 변증법이라 하는가?

⑥ 왜 <40페이지, 2단락에서도 나오는 ‘주체의 욕망’은 기독교 현실에 대한 분석도구로 사용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욕망에 대한 분석이 병리적 기독교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주요한 열쇠가 아닌가?

⑦ 지젝이 병리적 주체가 믿음으로 구원된다고 하는 루터에 주목했다고 했는데, 지젝의 믿음과 신앙의 변증법에 의해 본다면, 과연 “믿음”이 병리적 주체를 치료하고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또한 라깡의 말대로 대타자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할 때, 믿음은 이 인정받은 대타자를 향한 믿음은 올바른 믿음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지젝의 말대로, 각자의 믿음, 각자의 허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지젝이 아닌, 라깡의 노선으로 선회할 때, 바로 이것이 문제점이 될 것이다. 결국 문제제기 이전의 상태로 회귀되는 것이 아닌가? (즉 믿음과 신앙 분리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가? 갑자기 대타자도 인정하고, 믿음도 인정한다는 논리이므로 … 뭐 때문에, 왜?)

⑧ 오히려 믿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 듯 보인다. 지젝의 분석은 믿음 없이 신앙공동체를 유지해가는 사람들, 현실에 대한 분석의 틀로 유효하다. 신자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프로이트와 윌버는 그것을 대용물(substitutions)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⑨ 케 보이가 드러난다면, 그것에서 원인 또는 이유를 찾고 그에 준하여 대안을 찾는 것이 맞을 것이다. 지젝이 아닌 라깡을 선택하여 대타자를 인정할 때, 대타자가 물신주의, 맘몬의 욕망 그것이라면, 물신이 되어버린 대타자로서의 신, 맘몬이 되어버린 대타자로의 신이 아닌, 참 대타자와 관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⑩ 절대부정 “덴”이란 무엇인가?

⑪ <48페이지> 프로이트의 Ding이든, 라깡의 대타자이든, “한계를 초월한 심연의 원초적인 그 무엇”은 무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의 이성적 존재를 무의식으로 바꾸어 놓은 듯 한데, 이성 발현 이전의 원초적 무의식이 신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의식출현 이전의 플레로마인가? 아니면 반대로 완전한 초월적 의식인가? 과연 그러한 것이 존재하는가? (또한 전의식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한 만일 무의식이 아니라면, 그것은 또 무엇인가?

4. 나가는 말

논평자는 라깡 전공자도 지젝 전공자도 아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평소에 흥미를 갖고 공부한 적도 없다. 그저 오래 전에 공부모임에서 책 1권 읽은 정도가 고작이다. 그래서인지 이 글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이 더 많아졌다. 제기한 물음들이 글의 완성도를 이루는 데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모쪼록 라깡과 지젝의 분석의 틀로 구성된 이 글이 병리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건강한 기독교로 재탄생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조직신학회 제61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자료(20.1.7)

61_202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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