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한반도의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물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 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러한 성경적 신앙고백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론적 으로 불충분하다.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의 자리에서 새 롭게 되새겨지고 자리매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신약성경의 그리스도론적 호칭 자체가 반 제국적, 탈식민주의적 표현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마가복 음의 첫 문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 1:1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지주의 문서들처럼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영적 엘리트 주의가 아니라, 공적인 증언과 공동체적 낭독을 통해서 선포되어지고, 그리하여 박해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것인가를 잘 드러내 준다.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아니 이름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다.
왜 냐하면 나머지 모든 말들은 제국의 담론을 위해 동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하나 님의 아들의 복음의 시작’(arche tou euangelion fiou theou)이라고 하면 주후 1세기 세계에선 영락없 이 로마 황제 숭배의 담론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는 신의 아들로 숭배되었고, 그의 등극 과 그의 군대의 승리의 영광('arche'의 다른 의미)은 로마 제국에서 복음으로 간주되었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제국의 담론의 양식을 빌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시작을 그리려 한 것이다.
이 것은 모방을 통한 저항과 극복이다.
따라서 교부 오리겐이 예수 그리스도를 ‘몸소 하나님 나 라’(autobasileia)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된다는 복음의 핵 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신학적 정황은 루터, 칼빈, 웨슬리가 살았던 기독교화된 서구의 단 일 문화 보다는 이레네우스와 오리겐이 살았던 다종교문화적 맥락을 닮았다.
오리겐이 당대 제국의 지 식인 켈수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해서 반박한 논지는 탈제국적, 탈식민주의적 통찰을 담고 있다.
오리겐 에 의하면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위대한 철학인 플라톤주의도 하지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수행 한 것은 제국의 무지몽매한 다중(multitude)을 도덕적, 영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으로 그리스도론을 구성하기 위해 기독교적 서구문명과 유교적 동아 시아 문명의 두 텍스트인 로마서와 중용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후기 유대교의 바리새파의 신학적 질문을 공유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에서 찾았다.
그 질문은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성실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온 세계에 정의와 영광을 이루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중용의 핵심 은유인 성실할 성(誠)은 일찍이 마태오 리치가 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기독교 복음과 중화문명권의 접촉점을 고대 중국의 상제(上帝)에 대 한 정성(精誠)에서 찾은 이래로 한글과 중국어 성경 번역으로 하나님의 성실, 진실, 신실이라는 표현으 로 수용되었다.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으로 구성할 그리스도론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언약적 성실하심으로부터 인간의 칭의의 믿음을 가능하 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성실의 완성(‘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 되신다.
하나님의 성 실과 인간의 성실의 매개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롬 3:25)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해 하나 님께 대해 불성실(불의, 불신앙, 불경)했던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전적 인 성화를 이루는 온전한 구원은 새로운 창조로서 하나님 자녀의 성실한 사랑(‘사랑으로 일하는 믿음,’ 갈 5:6)이 온 피조물의 구속에 참여함으로 거룩한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 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5-26)
이러한 로마서의 본문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으로서만 유의미하다.
다시 말 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일원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롬 3:22)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 의 백성인 한국 그리스도인들과의 언약에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성립함을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다.
따 라서 우리 민족과 민중의 고난사에서 불교의 중생의 보편적 고난의 의미 지평을 보다 윤리적으로 심화 시켜 준 유교적 맥락에서의 의인들의 피흘림의 앞선 역사(사육신, 조광조, 이순신, 최제우, 3.1운동, 4.19의거 등)만이 아니라, 그러한 삶과 죽음을 초래했던 가르침, 전통, 사상도 ‘총괄갱 신’(recapitulation)의 대상이다.
이레네우스는 누가복음 11:50-51(“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 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를 에베소서 1: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과 연관지어 해석하면서 그 리스도의 총괄갱신의 사역을 기술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미 한글 성경의 번역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총괄갱신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구약성경의 번역은 탈식민 주의적, 상호본문적 해석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 신구약성경 간에도 상호본문적 읽기 와 해석이 가능하기에, 그것을 하나의 이해 지평으로 삼고, 한국의 민족, 민중, 씨알의 심정을 형성해왔 던 본문들의 또 다른 이해 지평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창의적이고 성실하게 융합할 수 있을 때 그리 스도론의 구성을 비로서 시작할 수 있다.
Ⅰ. 신구약성경 안에서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이해의 지평: 하나님의 성실에 대한 담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사도가 롬 1:16에서 하나님의 의의 계시로서 복음을 부끄러 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모든 믿는 자라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의 심정은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 시대의 유대인들의 체험을 반영하는 시편과 예언서에서 발견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시 71:1-2, 4).
제2 이사야도 바벨론 포로기의 수치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죄를 속량하는 고난의 종을 대망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 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 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사 50:6-8)
. 특별히 다니엘서 9장은 사도가 의도했던 부끄러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의 공의는 주 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 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단 9:7).
이스라엘의 성경은 죄로 인한 고난의 문제를 단순히 죄책(guilt)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불의로 인한 수치심(shame)의 문제로도 본다. 루터는 죄를 요 16:8에 근거해 불신앙으로 규정하고, 로마서 3:3의 유 대인들의 대표적인 죄와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믿음=의, 불신앙=불의/죄의 등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롬 3:3은 ‘하나님의 미쁘심/성실하심’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지 아니함’만이 아니라 미쁘지 아니함의 대조 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기에 롬 3:2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은 그들 역시도 하나님의 신탁하신 말씀에 성실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롬 1:17의 우 리 말 성경 본문은 루터의 이신칭의론에 부합하는 번역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오직 믿음’(sola fide)의 입장에서 하박국서 2:4을 인용했던 이해의 지평을 보 여준다.
칼 바르트의 번역은 로마서의 하박국서 인용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성실하심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나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르트의 하박국서 인용 번역은 70인역에 의거한 것으로 롬 3:3에서와 같이 당대 헬레 니즘 유대교 안에 하나님 자신의 성실하심이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사상이 통용되고 있음에 대한 증 거로 볼 수 있다(리처드 헤이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288).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으로’를 (하나님 의) ‘성실하심에서’ (인간의) ‘믿음으로’로 번역한 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성실 하심을, 그 계시의 지향점으로서 인간의 믿음을 가리키려 한 것이다(James Dunn, WBC, Romans 1-8, 44).
그렇다면 ‘(그) 의인은 나의 성실함으로 살리라’는 말씀 가운데 ‘그 의인’(ho dikaios)은 누구를 가리 키는가?
우선 이 말씀을 선행하는 하박국 1장의 맥락에서 보면 하박국이 이스라엘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에 대하여 성실하신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신정론의 문제 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대적인 ‘갈대아 사람’으로 표상되는 제국의 불의와 폭력을 하나님의 법정 에서 고발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 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 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 까?”(합 1:13).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음으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언약 에 성실하시다면 이 재판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시어 하나님의 의가 그의 백성의 의를 가져올 것 을 기대한다(톰 라이트,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권, 1269).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의 백성의 의 를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함으로 보면서, 이스라엘의 메시야의 성실함에 대한 롬 3:21-22에 대한 복선을 깔아 놓는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 이 없느니라”(롬 3:21-22).
이 본문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모든 믿는 자들 또는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한 모든 자 들의 유익을 위하여 메시야 예수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라이트, 1271).
그 렇다면 사도가 인용한 합 2:4의 ‘그 의인’은 1세기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야 곧 ‘하나님의 종 말론적 정의를 대행하는 대리자’의 칭호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합 2:4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서 성취된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헤이스, 504-506).
이러한 일련의 주석학적 해석은 대리적 이고 참여적인 그리스도론의 구성에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설명하는 헤이스의 방식은 이레네 우스의 총괄갱신론을 연상하게 할 만큼 많이 닮아 있다:
“예수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운명을 실연했으며(enact),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내어주는 죽음이라는 그의 패턴을 따라 형성된다. 그는 구속된 인류의 원형(prototype)이다. 따라서 바 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함’은 ‘한 몸됨’(incorporation)의 특징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 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며,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 시다. 그리고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실함을 따라 사는 것인데, 그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셨다’(갈 2:19-20)라고 말한다(헤이스, 39-40).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성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 부활의 이야기를 환기하는 환유(metonymy)로서(헤이스, 41) 이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 서의 언약적 성실하심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다시 메시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표식도 그리스도 인의 성실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Ⅱ 한글 성경에서 일어난 일차적 '총괄갱신'의 의미지평: 인간의 성실에 대한 담론
너는 진심(盡心) 진성(盡性) 진의(盡意)하여 상주(上主)를 愛하라(마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첫째 인용 본문은 이스라엘의 셰마(신 6:5)를 예수께서 계명으로 말씀하신 것을 탁사 최병헌이 번역 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어 번역을 활용한 것이지만, 유교문명 특유의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두번째 인용 본문과 비교할 때 마음 심(心)과 뜻 의(意)는 그대로지만 성품 성(性)과 목숨은 또 한 번의 해석적 숙고를 통해 번역된 것이다.
헬라어 원문으로 ‘카르디아’ 그리고 영어로 heart가 마음 심으로, ‘프쉬케’ 그리고 영어로 soul이 성품 성 내지 목숨으로, ‘디아노이아’ 그리고 영어로 mind가 뜻 으로 번역되었다.
주목할 것은 셰마 신명기 6:5의 개역 한글 번역과 개역 개정의 차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개역).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개역개정).
성품으로 번역한 개역이 뜻으로 번역한 개역개정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고 개역과 개역개정이 마 22:37을 모두 목숨으로 번역한 것은 그것의 히브리어 원어(‘네페쉬’/soul-life)가 마음의 정신적 측면과 구별되는 정서적 측면을 가진다는 점에서 더 적합하다(WBC, Duane L. Christensen, 144). 진심/마음을 다하여, 진성/성품 또는 목숨을 다하여, 진의(진력)/뜻 또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번역 에는 유교 문명의 고전인 맹자, 중용, 그리고 대학의 영향사가 작용하였다.
“맹자가 말했다. 제 마음을 다한다면 제 천성을 아는 것이고, 제 천성을 알면 곧 하늘을 아는 것이며, 제 마음을 살펴서 제 천성을 기르는 것이 그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맹자, 진심장구 상, 제1장).
셰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신 6:4)로 시작하는 데 비해서, 맹자의 진심장구는 “맹자가 말했다”로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유일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전심전력으로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면, 후자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마음을 살펴(存心) 천성을 길러(養性), 즉 하늘이 품부한 본성을 극진히 닦음으로 하늘을 알고 섬길 수 있다(知天, 事天)고 주장한다.
유교에서 지천과 사천의 문제는 이미 공자로부터 유래한다.
공자에게서 고대 중국의 인격적, 초월적 하나님(상제) 숭배로부터 우주의 내재적 도로서 하늘(천)에 대한 경외로 옮겨갔다고 하는 주장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상제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아니라, 상제를 최고신으로 삼고 여전히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는 인격적 유 일신 관념과는 차이가 있으며, 오히려 공자가 하늘에 대한 경외를 유지하면서도(“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소이다,” 논어, 제3장 13), 다신들의 숭배를 배척한 것은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진일보한 신관념이라 할 것이다.(“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되느니라,” 논어, 제6편 20)
이렇듯이 공자 이후 송대의 신유학(심경부주)에 이르러서도 하늘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인간의 도덕적 형성(閑邪存誠: 사 악함을 막고 성실함을 보존함)과 실행(見義而必爲之勇:의를 보고 반드시 실행할 용기를 가짐)에 대한 교 훈을 제시하게 된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여 만이 아니라 목숨 또는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다.
여기서 목 숨과 성품으로 번역된 근거는 중용 1장과 22장에 있다.
“천(天)이 명(命)하는 것을 성(性)이라 한다”(중 용 1장).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만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 그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능 히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능히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며,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면 곧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으면 곧 천지와 함께 참여할 수 있게 된다”(중용 22장).
‘하늘의 도인 성실’(중용 20장: 誠者天之道)을 극진한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至誠)은 하늘이 품부한 본성을 다하게 된다는 이 가르침은 중용의 첫 문장,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와 불가분리적이다.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 제임스 레게의 영어 번역(What Heaven has conferred is called the nature; and accordance with this nature is called the path of duty) 이후 이 본문을 규범윤리적으로 해석한 것은 맹자 진심장구나 성자명출(최근에 발굴된 곽점 간백자료)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오류이다.
위에서 인용한 진심장구 제1장의 마지막 부분은 천명을 인간의 생명과 연관지어서 “요절과 장수는 둘이 아니 며, 자신을 닦음으로써 천명을 기다리는 것은 천명을 굳건히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맹자 가 천명을 ‘하늘이 물려준 목숨’으로 읽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기 목숨이나 남의 목숨을 함부로 대하거 나 해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하늘이 물려준 목숨으로서 성은 추상적인 본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이다.
간백자료(성자명출)도 “성은 명으로부터 나오고, 명은 천으로부터 내려온다” 고 하면서, 더나아가 “희노애비의 기(氣)야말로 성이다”라는 획기적인 주장을 한다.
이것은 “중용이 말 하는 ‘성(性)’이 지고의 도덕적 천리나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이 아니라, 매우 평범한 희노애비의 감정의 기라는 것이다”(도올, 중용 인간의 맛, 79).
이것은 성리학에서 칠정(七情)을 본연지성(四端)을 겸한 기 질지성으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율곡전서, Ⅲ, 45).
성경은 마음과 목숨만이 아니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데, 논어 맹자 중용과 더불어 이른바 사서를 이루는 대학에 의하면 이것은 ‘뜻을 성실히 함’(誠意)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그 뜻을 성 실하게 한다 함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악취를 싫어하듯, 호색을 좋아하듯 하는 것, 이것을 일러 스스로 만족한다고 한다. 따라서 군자는 반드시 그 독(獨)을 삼간다. (남이 자기를 알아 봄이 마치 그 폐간을 뚫어 보듯 하니) 이런 것을 일러 안에서 성실하면 밖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다”(대학, 제6장).
율곡은 뜻을 성실히 함의 중요성을 논하는 글에서 인간의 마음(人心)이 발현되기 전 의 상태를 성(性)이라 하고, 그것이 발한 상태를 정(情)이라 한다면, 인간의 심정(심성이 아니라)이 헤아 리고 생각하는 것은 의(意)라고 하였다(율곡전서, Ⅲ, 46).
성 정 의의 주재는 심인데, 바른 이(理)에서 직출하여 기가 작용하지 않으면 선한 마음 곧 도심이라 하고, 기가 작용하면 선악이 합한 인심이라 한 다.
따라서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들으려면 정이 이기고 욕이 성하지 않도록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 리하여 율곡은 “정밀하게 살피는 것과 살피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이 의(意)의 소행이므로, 스스로 닦는 데는 성의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46)고 설파한다.
율곡은 그의 마그눔 오푸스 성학집요의 성실장에서 공자, 맹자, 중용, 대학 그리고 주자를 언급한 후에 자신만의 독특한 성실의 인간학을 전개한다.
그리하 여 뜻을 성실히 함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근본으로서 입지(立志)로 시작하여(“뜻이 성실하지 않으면 확립되지 못하고”)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통해(“이치가 성실하지 않으면 궁격하지 못하며”) 교기질(矯氣 質)에 이르는(“기질이 성실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는”) 전인적 과정을 일이관지한다(율곡전서, Ⅴ, 102).
율곡의 성실의 인간학은 성학(聖學)으로 불리운 성리학의 궁극적 이상인 지극히 성실한 인간 곧 성인 (聖人)이 되는 천인합일의 공부를 위한 것이다.
율곡은 “성실은 하늘의 도요, 성실하려는 것은 인간의 도”(誠者天之道 誠之者人之道, 중용, 20장) 또는 “성실은 하늘의 도요, ‘성실을 생각하는 것’(思誠者) 은 인간의 도”(맹자, 이루편)라는 천인관계에 대한 본문을 이기론으로 명쾌하게 정리한다.
우선 그는 하늘의 도를 ‘성실지리’(誠實之理)로 인간의 도를 ‘성실지심’(誠實之心)으로 구별한 다음에, 하늘의 도의 작용과 인간의 도의 작용을 차별화한다.
“하늘에는 성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기화가 쉬지 아니하고 유행하며, 사람에게는 성실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공부가 틈이 없이 밝아지고 넓어진다”면서 “성실한 마음이 없으면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게 된다”고 주장한다(율곡전서, Ⅴ, 102).
인간의 마음에 적용하 는 하늘의 이치는 인의예지를 가리키며, 그것은 각각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작용 한다.
성실한 마음이 요청되는 이유는 인간이 “억지로 인(仁)을 하려 하거나 의(義)에 힘써서 겉으로는 볼 만한 듯하나, 마음 속으로는 인과 의를 즐겨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102).
따라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함’(存天理去人欲)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고 적용되는 하늘의 성실한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만세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공자에게서 하늘의 성실한 도를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논어, 이인편)는 말씀이 의미하는 대로 지극히 성실한 자의 삶은 철저한 자기부정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살신성인”(殺身成仁) (논어, 위령공편),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논어, 안연 편),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논어, 헌문편).
Ⅲ.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실과 인간의 성실이 화해된 실재, 인격, 역사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의 대표자로서 인간의 성실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응답하는 분이신 예수 그 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머리이시요 구원자로 영원 전부터 선택되신 분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그러한 신적 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실하신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에게 성실할 수 있게 되는’) 변화가 이미 일어났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Ⅳ/4, 37).
바르트의 이 언급은 그의 거대한 교회교의학의 절정인 기독론/화해론의 끝 부분에서 등장한다.
그러 나 한국과 동아시아의 기독론 구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실과 인간의 성실의 화해된 실재, 인격, 역사에 대한 질문은 출발점이어야 한다. 교부신학을 재해석함으로써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비대칭적, 비경쟁적 관계를 추구하려는 로웬 윌리암스도 서구신학의 기독론적 사변이 자기 백성을 창조하시고 그들과의 ‘언 약적 성실성’(covenanted faithfulness)을 지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자리 또는 역할 안에서 활동 하시는 분으로 나사렛 예수가 보여졌고 이해되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Rowan Williams, Christ the Head of Creation, 219).
동서방 교회가 공유하고 있는 기독론적 사변의 전거는 요한복음 1장으로 비롯된 로고스론이다.
7세기의 신학자 고백자 막시무스는 로고스 기독론과 창조론을 결합하여 그리스도를 화해된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다.
한중일 동아시아의 성경이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를 도(道) 로 번역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도 기독론의 구상이야말로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을 통해 수행해 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막시무스의 기독론, 특히 그의 성육신론은 동방교회의 우주적 신학의 패러다임인 창조와 새창조의 기본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구속론/화해론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의 성실을 대입하 여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는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부인하고 잃어버려진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자유로운 행위’이다(바르트, 교회교의학 Ⅳ/1, 17).
하나님의 성실이라는 번역은 신유학의 언어로는 하늘의 도로서 성실한 이치를 가리키며, 하늘의 성실한 이치는 막시무스의 신플라톤주의의 표현으로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로고스에 견주어 진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인 성자를 ‘유일한 로고스’(The Logos)라 한다면, 모든 피조물들의 개체 안에 있는 다양한 ‘로고스들’(logoi)은 존재자들의 이성적 구조로서 유일한 로고스의 거울 이미지이며 유일한 로고스에 참여함을 통해서만 전락의 상태에서 온전한 현실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성리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이일분수론’(理一分秀論)이라 할 수 있다.
이일분수란 형이상자인 이가 형이하적 온누리 에 다양하고 특수한 이로 편재한다는 말이다.
‘본연의 이’(태극)는 순선한 하나이지만(이일) 기를 타고 유행함에 따라 만 갈래로 다르며 선악으로 나뉘어 진다(분수).
이것을 율곡은 ‘이통기국’(理通氣局)으로 설명한다.
이가 기를 타고 유행함으로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아니함에도 언제나 만물 안에 “그 본연의 묘리는 없는 데가 없다”(이통) (율곡전서, Ⅲ, 82).
그러나 언제나 ‘기가 발하여 이가 타기’(氣發理乘) 때문에 천태만상의 고르지 않은 기화(氣化)의 과정에서 그 ‘기의 본연을 잃어버리는 경우’(기국)가 생긴 다.
그 본연의 기란 ‘호연지기’(浩然之氣)로서 그것이 “천지에 가득 차면 본래 선한 이(理)가 조금도 가 리워짐이 없다”(83).
막시무스는 하나님이 창조를 다섯 가지 ‘분단’(division)으로 보면서,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적 분단이 반창조적 분단으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창조되지 않은 것과 창조된 것의 분단, 예지적 피 조물과 물질적 피조물의 분단, 하늘과 땅의 분단, 낙원과 현실 세계의 분단,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분단이 그것이다.
이들은 서로 대극을 이루지만, 대결하도록 지음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 에서 인간의 창조가 모든 창조의 마지막이며,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 안에 ‘요약되어’(summed up) 있기 에, 만물의 소우주로서 인간의 소명은 자신 안에 본질적으로 요약된, 그러나 실존적으로 분단된 피조세 계를 총괄갱신(재요약으로서 recapitulation)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자신 의 자연적 로고스와 조율되는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로고스와의 최적의 관계 속에 있을 때 가능하다.
인간의 독특한 위치는 유일한 로고스의 통일/화해하게 하는 역할을 피조물을 위해 중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피조된 질서를 조화롭게 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바 치는 ‘예전적’ 사역의 일부가 된다(Williams, 104).
신유학에서 성인은 “중화(中和)에 이르러 천지를 제자리에 찾게 하고 만물을 육성하게 하는” 자이다 (중용, 1장 5).
‘지극한 성인’(至聖)을 하늘의 성실한 이치를 온전히 얻은 자로서 ‘지극히 성실한 자’ (至誠)라 함은 그가 “홀로 지극히 통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맑고, 지극히 순수한 기를 타고나서 그 덕이 천지와 합치”되기 때문이다(율곡전서, Ⅲ, 54).
그리하여 지극히 성실한 성인은 자신의 본성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본성과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게’함으로써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더불어 병립하는 ‘천지인’(天地人)의 상생에 참여할 수 있다(중용, 22장).
천지의 호연지기를 품어서 하늘의 성실한 이치를 온전히 받은 성인들인 요, 순, 주공, 공자는 “나면서부터 알아서 편안하게 행하여 점차로 조금씩 전진하는 공부가 없었지만,”
비록 범인이라도 “괴롭게 애써 배워 알고 힘써 행하여,” 천지와 함 께 일체가 되는 신묘한 경지에 “달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 같으나, 진실로 능히 공부를 쌓을 수만 있 다면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율곡전서, Ⅳ, 184-185).
만물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기의 바르고 통한 것을 받았고,” 그 마음에 “온갖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므로 탁한 것을 맑은 것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닦는 행위’(修爲) 곧 수양의 공부를 통해 변통의 도리가 없는 “만물들이 각각 제 성(性)을 이루게 하는 것은” 수양의 극치로서 “위천지(位天地) 육만물(育萬物)”하는 경지에 이르게 하여 “참찬화육(參贊化育)의 공(功)”을 이루게 함으로써만 사람의 할 일을 다하게 된다(율곡전서, Ⅲ, 53-54).
신유학이 성인의 경지를 정해 놓고 수양의 공부를 통해 범인이라도 “처음은 ‘하고자 할 만한 선’(可 欲之善)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천지와 병립하고, 화육을 돕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한다면(율 곡전서, Ⅴ, 185),
막시무스의 기독론의 경우에는 분단된 세계의 화해와 일치의 실재를 성육신하신 예 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성육한 영원한 로고스와의 연합을 통해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거 룩하게 변형’(神化/theosis)시키는 데 동참할 것을 추구한다.
막시무스는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에 대한 칼케돈 신조의 노선에서 성육하신 위격의 단일한 행위와 단일한 의지를 지지하는 황제의 칙령에 대해 반기를 들고 그리스도의 신성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온전함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 행위론과 이중 의지론을 역설했다.
문제는 성육한 로고스 안에서 행위(에네르기아)가 위격적인 것이라면 하나일 것이고, 그것이 본성적인 것이라면 신성과 인성에 속하게 되어 둘이 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혼은 자신의 결정에 의해 결코 행위하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을 움직이는 로고스에 모든 것을 의지했다”는 단 일행위론의 주장은 현저하게 그리스도의 인성을 축소함으로써, 온전한 인간성이 결여된 그리스도는 인 간을 결코 구원할 수 없게 되는 우를 범한다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2, 66).
더 큰 문제는 행위는 의지로부터 나오므로 단일행위론은 단일의지론으로 발전했다는 데 있다.
예수의 겟세 마네의 기도(눅 22:42)를 해석하면서 두 의지를 옹호하는 막시무스는 “인간으로서 구주께서 그의 인간 본성에 속한 의지를 가졌다”면서 그것은 “그의 신적인 의지와 그의 아버지의 의지에 대한 고매한 일치” 라고 보았다(68).
“무엇이든지 (성육신에서 로고스에 의해) 수용되지 않은 것은 치유되지 않는다”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인용하면서 막시무스는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치유되어야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성 육신 안에 수용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도 “만일에 그리스도가 슬퍼할 수 없었다 면, 인간 본성을 슬픔으로부터 해방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만일 그리스도가 분명한 인간 의지를 소유 하지 않았더라도 똑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75).
16세기 조선의 성리학에서 최대의 쟁점은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인간론의 문제이다.
특 히 인간의 심성과 심정에 대한 율곡의 정밀한 이해는 신학적, 기독론적 가치를 함유하고 있다.
상고시대 의 유학으로부터 비롯된 인심도심론을 종으로 하고 16세기 당대의 신유학의 첨단의 쟁점인 사단칠정론 을 횡으로 엮은 율곡의 인간 이해는 성육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성에 대한 막시무스의 기독론을 탈 식민주의적이고 상호본문적으로 읽는 데 훌륭한 단서를 제공한다.
유학에서 만고의 심법이라고 하는 상 서(서경 대우모 편)의 구절,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고서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에 대한 중용장구서의 주자의 해석은 16세기 조선에서 치열한 논쟁을 초래했다.
이 른바 ‘혹원혹생(惑原惑生)’의 문제라고 하는데, 이 말은 주자가 “인심과 도심의 분별이 있게 되는 것은 곧 그것이 어떤 경우엔 형기(形氣)의 사(私) 에서 생겨나고(혹생), 어떤 경우엔 성명(性命)의 정(正)에 바 탕을 둠으로써(혹원) 그 지각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이가원 감수, 신역 대학/중용, 170-171) 에서 유래했다.
율곡은 주자의 혹원혹생에 근거하여 성명의 바른 것에서 근원하는 도심과 형기의 사사로운 것에서 생기는 인심을 이기의 발함이 같지 않음으로 이해하면, 혹원혹생을 말하기 전에 주자가 “심지허령지각 이 하나”(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라는 의미를 놓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퇴계의 이기호발설에 대 한 반박으로서 율곡은 주자가 혹원혹생이라 한 것은 “마음이 이미 발한 것을 보고 이론을 세운 것”이라 주장한다(율곡전서, Ⅲ, 56, 85).
인심이든 도심이든 한 마음의 “정과 의를 겸하여 말하는 것”이기에, 하나의 정을 가지고 “사단을 칠정 가운데서 그 선한 일변을 가려서 말한 것”과 다르다(44-45).
다시 말 해서 사단칠정설과 달리, 인심도심설은 감정만이 아니라 의지를 개입시켜 논하기에, 인간 의지의 지향성 에 따라서 사칠의 포함관계가 아니라 인심도심간의 대극적인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한 마음이 “발한 것이 이의(理義)를 위한 것”이면 “이것은 성명이 마음 속에 있는 데서 연유하기에” 도심이고, “그 발하 는 것이 식색(食色)을 위한 것”이면 “이것은 혈기가 형체를 이룬데서 연유했기에” 인심이라고 하는 것이 다(56).
율곡은 인간의 한 마음의 실존론적인 대극(도심과 인심)을 우주의 존재론적 대극(이와 기)으로 오해하는 이기호발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천지의 조화도 기가 화하매 이가 타지 않는 것이 없음”을 통해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다(57, 83).
성인은 “정이 그 성명의 본연에서 나온” 도심을 “존양하여 확충케 하고,” “정이 형기에 가리어 성명의 본연에서 바로 나오지 못한” 인심을 도심으로 하 여금 인심의 “과불급을 살펴서 절제하도록 한다”(66).
율곡이 성인을 범인으로부터 식별하는 방식은 막시무스의 기독론의 이중의지론과 견주어질 수 있다. 율곡의 발상은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성인(聖人) 기독론을 내포한다.
성인은 어떤 사람이며 존재인가? “성인은 기질이 청수하고 천성이 그 본체를 온전히 하여 털끝만큼도 인욕의 사가 없으므로 그 발하는 것이 마음의 하려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는 일이 없어서, 인심도 역시 도심이다”(68). 성인의 혈기 도 다른 사람과 같이 “주릴 때 먹고 싶으며, 목마를 때 마시고 싶으며, 추울 때 입고 싶으며, 가려울 때 긁고 싶은 것은 성인에게도 인심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나, 성인의 경우에는 “형기가 비록 용사(用事) 를 한다 하더라도 인심은 도심에게 명령을 들으므로 식색지심도 역시 법도를 따르게 된다”(69, 68).
그 러나 범인은 기품이 불순하여 본연의 천성을 잃어버리고 수양의 공부도 없으므로 “그 발하는 것이 대부분 형기의 부림을 당하게 되니” “인심이 발할 때에 도심으로 이를 주재하지 못하니 흘러서 악이 된 다”(68-69).
도심을 주로 하는 성인과 인심을 주로하는 범인을 사람이 말을 탄 것에 비유하자면 (人信馬 足 馬從人意說), “말이 사람의 뜻을 따라 나가는 것은 사람이 주가 되니 곧 도심이요, 사람이 말의 다리 만 믿고 그대로 나가는 것은 말이 주가 되니 곧 인심이다”(69).
율곡은 공자에게서 성인의 전범을 보았고, 자신과 모든 범인들이 성인 공부할 것을 역설하였으되, 성 인의 새로운 도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율곡 이후 조선 사회와 국가가 내우외환으로 급격히 붕 괴되어가던 19세기 말에 이르러 ‘다시 개벽’을 꿈꾸었던 수운 최제우는 “성인의 태어나심이여! 그 흙탕 물인 황하가 천년에 한 번 맑아지면 성인이 태어난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운이 스스로 와서 스스로 돌아가기 때문일까? 황하의 물이 스스로 알고 변하는 것일까?”라고 탄식하였다(김용옥, 동경대전, 2, 207).
공자 이후 천년이 못되어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두 번의 천년 즈음에 조선에 당도하였다.
우리는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을 통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의 전통에서 유래한 진리를 의인화하 여 기독론적으로 읽은 요한과 바울을 따라 다음과 같은 기독론적 읽기를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誠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성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 매”(요 1:11,14a).
바울은 갈라디아서 3:23-25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믿음의 옴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리처드 헤이 스의 주장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에 응답하여 십자가 에서 순종하신 분의 성실에 대한 환유로 본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면 “그리스도의 성실이 오기 전에”와 “그리스도의 성실이 온 후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서의 핵심 본문이자 논쟁의 초점이 되 는 롬 3:21-22에 대한 새로운 읽기도 가능해 진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은 하나님께 불성실한 인간들을 대리하고 대속하는 성실이며,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효성(孝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효 기독론의 구상 은 다석 유영모와 해천 윤성범에 의해 시도된 바 있다.
다석이 효경을 기독론적으로 다시 읽은 것은 탈 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의 훌륭한 사례이다:
“몸 마음 부모 천지 신명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았 다. 불가불 꼭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효의 근본이다. 신체발부는 부모에게 받았으니 상 처내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나를 세우고 바른 길을 가고 목숨을 하늘에 끌어올려 하나님을 드러 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 대저 효는 하늘을 섬기는 것이 근원이고, 부모를 섬기는 것이 시작이요, 나 라를 섬기는 것이 중간이요,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 끝이요,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마침이다”(김흥호, 다석일지공부, 1, 36).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자 유일한 효자이시다.
해천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효의 존재 근거(ratio essendi)이고,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효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의 인식 근거(ratio cognoscendi)”라고 주장한다(윤성범, 효, 영문 본, 40).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효성은 “진심, 진성, 진의를 다하여 상주를 애하라”는 셰마의 온전한 구현이다.
현금의 서구신학의 기독론의 논의 가운데 중대한 난제 중의 난제는 역사와 믿음의 이야기로서 교리,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대(신학)의 이중과제’(백낙청), 근대의 문제를 수 용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것의 단적인 사례가 로웬 윌리암스의 기독론과 톰 라이트의 역사적 예수론 사이의 건널 수 없는 ‘흉한 골짜기’(레싱)가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나는 시온으로의 야훼의 돌아오심과 그것이 부각시키고 있는 성전신학이 복음서 기독론에 대 한 가장 심오한 열쇠들이자 단서들이라고 주장한다. 적어도 당분간은 예수의 ‘칭호들’을 잊어버려라; 나 사렛 예수가 삼위일체의 제2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사이비 정통신앙적 시도들을 잊어버 려라; 아무런 생각 없이 정통신앙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의 반영물인 무미건조한 환원주의를 잊어버려라. 그 대신에, 야훼께서 재판장과 구속자로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나서 예루 살렘 도성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귀를 타고 들어간 것과 성전의 파괴를 상징한 것과 최후의 출애굽을 기 념한 것을 통해서 그것을 구현한 한 젊은 유대인 예언자에 초점을 맞춰라. 나는 역사의 문제로서 나사 렛 예수가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였던 것을 자기 속에서 몸소 실행으로 옮길 소명, 그가 ‘아버지’로 알고 있었던 바로 그 분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소명, 예수는 새로운 출애굽의 백성을 위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될 것이었다.
예수는 자기 자신 속에 언약의 하나님의 돌아오심과 구속의 행위를 구현할 것이었다”(톰 라이 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987).
“우리는 성부에 대한 로고스의 영원한 관계를 지상의 로고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용어로는 사람의 아 들)의 ‘아들의’(filial) 삶과 혼동하여, 전자가 후자에 의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다.
로고스의 성자의 위격이 영원히 그리고 근본적으로 ‘신적 삶’ (삼위일체)의 한 양상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의 필연성과 하나님의 위격들은 하나가 되어 행위함을 이해하는 것의 본질 적 중요성이다(15).
우리는 로고스가 한 개별적 인간 실존을 통일하고 정체성을 부여하는 근거로 존재하는 것을 정당하 게 말할 수 있다(73-74).
따라서 신적 삶 안의 영원하고 동시적인 것이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근원함과 성자와 성부의 관계 성육한 로고스의 지상의 삶 안에서 이야기와 극적인 언어로 연출된 것이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교환 하는 영원히 자기를 비우는 사랑이 예수가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적극적 순종(빌 2:8)이 되었다 (105-106)”(Rowan Williams, Christ The Heart of Creation).
위의 두 대조적인 인용문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라이트는 역사적 예수가 ‘아버지로 알고 있었 던’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반면에, 윌리엄스는 영원한 로고스의 아들의 위격을 말한다.
전자는 기독론 의 인식론적 측면에, 후자는 존재론적 측면에 각기 치우침으로써 전자는 영원한 로고스와 성육한 로고 스, 그리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의 풍성한 영성을 결여한 빈곤한 기 독론(에비오니즘?)에 머물게 되고, 후자는 하늘 아버지의 유일한 효자로서 예수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증언에 근거하지 않고 본질적 삼위일체의 사변에 빠지는 요령부득의 기독론(도쎄티즘?)에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탈식민주의적 상호본문적 기독론이 취하는 입장은 역사적 예수의 하늘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에 대한 성자의 효성의 관계를 전자는 후자의 인식론적 근거이고 후자는 전자의 존재론적 근거로 본다는 것이다.
윌리암스의 로고스 기독론은 영원한 로고스의 성자의 위격을 역사적 예수의 인식론적 근거 없이 주장하기에 요령부득일 뿐 아니라, 지상의 인간 가족내의 효친(孝親) 의 관계가 붕괴되어가는 서구 또는 서구화된 사회의 인륜적 몰락의 위기에 대처 불가능하다.
또한 다석 의 효 기독론은 한 편으로는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다른 편으로는 토투스 크리스투스의 실재를 거부하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금욕주의, 영적으로는 탈교회적 종교다원주의라는 비정통을 극복할 수 없다.
결론: 한국교회의 분단 극복을 위한 기독론적 과제
“이스라엘이나 조선으 하나님 겉은 건 없다오. 그냥 … 하나님언 하나님이디.”
이 말은 황석영의 소 설 손님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가는 한국의 역사 공간에서 기독교는 맑스주의와 함께 달갑지 않은 손님 이라고 부른다.
마치 전근대 조선 사회에서 천연두를 ‘마마’ 혹은 손님으로 부른 것처럼 말이다. 탈식민 주의적 상호본문적 접근으로 분단 시대의 기독론의 과제를 달성하려면 여전히 남아 있는 근대 한국의 두 손님 사이의 불화, 곧 북한의 무신적 사회주의와 남한의 물신적 기독교사이의 분단이라는 마성적 변 증법을 신학적으로 해체하고 기독론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예레미야 3장의 맥락에서 남북한의 분단을 하나님의 성실과 인간의 불성실의 대조로 읽는다면, 북한의 무신적 사회주의의 문제는 하나님을 유물론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역한 죄, 곧 ‘불신앙’(faithlessness)이라고 한다면, 남한의 물신적 기독교의 문제 는 하나님과 물신적 자본주의를 동시에 섬기려 한 패역의 죄, 곧 ‘불성실’(unfaithfulness)이라고 할 것 이다.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분열 상황에서 당대의 제국 앗수리아에 의한 분할 통치와 지배의 구조그리 고 그것에 편승한 남북의 집권자들의 적대적 공존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을 본받아 오늘날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특히 기독론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반도 북녘의 ‘배역한 이스라엘’의 남녘의 ‘패역한 자매 유다’인 물신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된 하나님의 성실과 인간의 성실의 화해를 값싼 은혜로 변질시켜 온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 스도의 성실에로 돌아가야 한다.
회개와 행함이 없는 거짓 복음주의를 내던지고 복음의 진정한 의미와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실에서 믿는 자의 성실 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성실을 백안시하 는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할 수 없음’(롬 3:3)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이 “배역한 이스라엘 은 패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다”(렘 3:11)고 선언하신 것의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인 가?
그것은 북한의 무신적 사회주의를 편드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반제국주의를 고취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제재로 파탄난 인민의 고단한 삶에 대한 영원히 미쁘신 하나 님의 연민의 심정을 반영한다.
“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 는 것이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1a, 22).
하나님의 미쁘신 사랑에 대한 예레미야의 담론은 아버지와 남편의 메타포를 활용한다:
“배역한 자식 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라. …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4a, 19b).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지속적인 기근과 경제 위기가 거듭되었던 1990년대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이래 실질적인 국가의 실패로 인하여 생존을 위한 장마당의 확장이 일어났다.
어버이 수령의 죽음과 더불어 ‘낮전등’에 빗대어진 북한 남편들의 무능으로 인해 ‘북 중 국경의 원거리 모성’(김성경)의 피눈물 나는 희생은 무신적 사회주의 체제의 탈가부장화를 촉진했다.
가족과 국가의 경제적, 도덕적 지속성이 총체적인 난국으로 상실되어 가는 위기는 비단 한반도 북녘의 현재만이 아니라 머지않은 장래에 남녘에서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것은 세계체제의 하위 체제로서 분단체제의 속성상, 그리고 제국의 분할통치와 지배가 지속되는 한, 그리고 그것에 편승한 남 북의 두 정권 하의 민족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일찍이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북 이스라엘의 유민들 에게 화해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선포했다: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 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 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4b-15).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와 우주 어디에서나 하나 님 심정에 합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남과 북은 하나로 화해된 것이다(엡 2:14).
예언자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라고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으나, 그 화해의 실재가 세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화해하게 하 는 말씀을 부탁하셨기 때문이다(고후 5:19).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실에 믿는 자의 성실로 응답할 수 있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화해를 통한 회복만이 아니라, 인격과 역사의 새 로운 창조에 동참하는 부름을 받았다(로마서 8:19-23).
갑진년 새해를 맞이하여 감리교회의 전통인 언약갱신예배에서 사용하는 기도문은 오늘 한반도에서 기독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하다:
“오 의로우신 하나님,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로 인하여 당신 앞에 엎드린 저를 보아 주소서. 당신의 뜻을 행하지 않았던 저의 불성실을 용서하소서. 제가 전심으로 당신께 돌아가면 제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나이다”(존 웨슬리, 언약기도 중에 서).
한국조직신학회 제65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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