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회는 필요한 공동체이며 나름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긍정 적인 대답을 말하기 힘든 시기이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와 그 역할은 강하게 부정적 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모임 및 집회 자제를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개신교회는 이러한 정부 조치에 반발하면서 계속해서 대면 예배를 이어 나가려고 했다. 시민들은 이러한 개신교회의 행태를 매우 부정 적으로 보았고, 이러한 여론은 엔데믹 시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개신교회는 이제 시민사회가 볼 때 그저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래서 종국에는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적 모습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연구한 사람들이 주장한 ‘연대적 공동 체로서의 종교 공동체’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들에 따르면 연대(Solidarity)는 집단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의 교호적 연관성이 주관적으로도 인지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면서 자 신이 속한 공동체와 그 목적이 정당하다고 여길 때 나타난다.1
즉, 연대란 구성원이 서로를 인정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협력하는 운동이며 공동체가 일치를 이루는 데에 기여한다.2
정치사회학자들이 보기에 연대는 종교 공동체에서 아주 잘 발견된다. 종교 공동체원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음 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협력하기 때문이다. “종교 공동체들은 영원성 그리고 초월성에 대한 근거들로부터 정당화된 연대성을 지원”하는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연대성의 모 범들”이다.3
1참조. Kurt Bayertz, “Begriff und Problem der Solidaritat,” in Kurt Bayertz (Hg.), Solidaritat. Begriff und Problem (Frankfurt a. M.: Suhrkamp, 1998), 12.
2이러한 연대의 사회적 의미에 대하여 참조. 에밀 뒤르켐/민문홍 옮김, 『사회분업론』 (서울: 아카넷, 2012).
3Hugo Tristram Engelhartdt Jr, “Solidaritat: Postmoderne Perspektiven,” in Kurt Bayertz (Hg.), Solidaritat. Begriff und Problem, 444-445.
하지만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이 시민사회로부터 지탄받고 이기적 집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한국 개신교회의 운영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사회적 관계 설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 속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을 개선하려면 전통적인 교회론(Ekklesiologie)가 아닌 그리스도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는 교회 이론(Kirchentheorie)을 주목해야 한다.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 탐구에 열중 하는 반면, 교회 이론은 교회론을 전제로 하면서 동시에 목회 현장 또는 교회가 처한 사회적 상황으로 부터 제기되는 질문과 관계하며 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밝힌다.4
교회 이론은 “교의학의 교의 개념과 본 질 개념을 현재 처한 교회의 상태와 관계시키면서 그 상태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개선하는 것으로 목 적으로” 하고, 따라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의 연결지점”이다.5
여기에서 교회는 사회 가운데 있는 한 기관(器官)으로 고찰된다. 그리고 교회의 목회 사역과 교회 정치는 단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사태 가 아니라 교회가 시민사회와 가지는 관계 속에서 고찰된다. 따라서 교회 이론 탐구는 교회론 재정립을 통해 개신교회를 개선하려는 노력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을 추적하는 교회론은 그리스 도교회 안에만 머무르는 담론에 그칠 수 있으나, 교회 이론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가 중심 주제이기에 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밝히기 때문이다. 교회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한국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 탐구는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다 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D. E. Schleiermacher)의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하여 효과적 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그의 신앙론을 근거로 하므로 신학적 행위의 바탕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잘 제시한다. “기관은 공동적인 인 간 행위의 규칙적인 형태이다.”6
따라서 교회를 사회적 기관으로서 다루는 교회 이론은 인간의 행위 이 론을 기초로 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 이론은 실천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에 있기 때문에 신학적 행위 이론의 배경, 즉 교의학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이러한 교회 이 론을 보충할 수 있다. 그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다루는 신앙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7
둘째로,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해 교회의 내적 관계망을 현상적으로 다 룬다. 실천신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 이론은 교회 사역, 즉 목회 활동, 교회 정치 등을 서로 연계시 키는 관계망(Kybernetik)을 구성해야 한다.8
4참조. Christian Gethlein, Kirchentheorie. Kommunikation des Evangeliums im Kontext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18). Jan Hermelink, “Kirchentheorie,” in Ulrike Wager-Rau, Martina Kumlehn, Jan Hermelink und Kristian Fechtner (Hg.), Praktische Theologie (Stuttgart: Kohlhammer, 2017), 81-104.
5참조. Reiner Preul, Kirchentheorie. Wesen, Gestalt und Funktion der Evangelischen Kirche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7), 3-4; Wilfried Härle, Dogmatik, 4. Aufl.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12), 586.
6Reiner Preul, Kirchentheorie. Wesen, Gestalt und Funktion der Evangelischen Kirche, 129.
7“그것[즉, 그리스도교 윤리학: 필자]은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하여 조건지어진 하느님과의 관 계에 대한 서술이어야 한다. 그 관계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의 동기인 한 말이다. 그것[즉, 그리스도교 윤리학: 필자]는 그리스도교적으로 규정된 종교적 자기의식이 우세한 데로부터 생겨난 행동 양식을 서술하는 것 이외에 다 른 것일 수 없다.”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Die christliche Sitte nach den Grundsäzen der evangelischen Kirchen im Zusammenhang dargestellt,” in ders., Sammtliche Werke I/12, Die christliche Sitte nach den Grundsäzen der evangelischen Kirchen im Zusammenhang dargestellt, hg. von Ludwig Jonas [Berlin: G. Reimer, 1843] [이하 CS], 32-33.)
8참조. Reiner Preul, Kirchentheorie. Wesen, Gestalt und Funktion der Evangelischen Kirche, 6.
이 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그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실천신학적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행위들 간의 연계를 밝힘으로 써 교회 내적인 관계망을 현상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유기적 공동체 이론, 특히 교회와 가족 및 국가와의 관계를 신학적 행위 이론으로 다룬다. 교회 이론은 “교회 체계에 적용되는 종교사회학, 교회사회학, 종교심리학, 체계 이론, 조직 이론, 의사소통 이론을 염두”하여 사회 속의 교회의 역할을 돌아본다.9
슐라이어마허가 유기적 공동체 이해에 기초하여 전개한 신학적 행위 이론에 이러한 교회 이론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철학적 윤리학 프로그램에서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간의 교호 관계를 주목하고 이를 그의 선(善)론(Güterlehre)에 서 분명하게 밝혔다.10
여기에서 각 인간 공동체는 최고선 구성 과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면서 동 시에 각자만의 특징과 기능으로 서로 관계하고 있다.11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이와 같은 그의 유기적 공동체론을 바탕으로 하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 개진이다.12
교회 이론은 이렇게 유기적 공동체론을 전제로 하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하여 어떻게 교회가 다른 사회적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명하게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을 고찰하여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13
9Reiner Preul, Kirchentheorie. Wesen, Gestalt und Funktion der Evangelischen Kirche, 9.
10참조. Gunter Scholtz, “Ethik und Hermeneutik,” in ders., Ethik und Hermeneutik. Schleiermachers Grundlegung der Geisteswissenschaften (Frankfurt a. M.: Suhrkamp, 1995), 128 이하.
11참조. Kwangwoo Park. Kirche als solidarische Gemeinschaft. Eine ethische Rekontruktion der Kirchentheorie mit Blick auf die Christliche Sittenlehre von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Münster/Zürich: LIT, 2023), 100-107. 이런 의미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적 윤리학은 “문화철학 또는 사회철 학”이다. (Hans-Joachim Birkner, “Einleitung,” in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Brouillon zur Ethik [1805/06], Auf d. Grundlage d. Ausg. von Otto Braun, hg. u. eingel. von Hans von Joachim Birkner [Hamburg: Meiner, 1981], Ⅺ.)
12슐라이어마허의 철학적 윤리학과 신학적 행위 이론을 중심 주제로 다루는 그리스도교 윤리학 간의 관계에 대 해서 참조. Hans-Joachim Birkner, Schleiermachers Christliche Sittenlehre im Zusammenhang seines philosophisch-theologischen Systems (Berlin: Verlag Alfred Töpelmann, 1964) 81-87; Matthias Heesch, “Die Christliche Sitte,” in Martin Ohst (Hg.), Schleiermacher Handbuch (Tübingen: Mohr Siebeck, 2017), 383-388; Arnulf von Scheliha, Friedrich Schleiermacher als Sozialphilosoph des Christentums. Schleiermacher-Lecture, Berlin 2021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23), 10-12.
13한국에서는 아직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 즉 그리스도교 윤리학에 대한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 은 상태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이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윤리학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실천적인 관심사로 부터 출발하여 연구했다.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전체적인 개괄 참조. 오성현,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윤리학의 철학적 · 신학적 입지와 그 특징,” 「신학사상」 137 (2007): 203-238.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윤리학 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적용 연구에 대해서 참조. 박광우,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그리스도교 윤리학적 고찰 및 대안 모색: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윤리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신학논단」 96 (2019): 129-162; “공적 예배의 의미 고찰 – 예배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이해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19 (2021): 157-189; “애국 심과 세계시민주의 간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 연구: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 윤리학적 관점을 중심으 로.” 「신학논단」 111 (2023): 73-109.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바라본 종교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참조. 박광우, “연대하는 삶을 위한 종교의 의미와 기여에 관하여. 슐라이어마허의 윤리학 및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조직신 학논총」 72 (2023): 89-131.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를 돌아봄으로써 거기로부터 출발하는 그의 행위가 어떤 생리를 지니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 다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어떻게 분화되며 각 행위는 어떤 특징과 기능을 지니는지, 그리고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 후, 우리는 그리스도 인의 행위를 통하여 개신교회의 내외적 관계망을 고찰함으로써 슐라이어마허가 보는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탐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를 돌아보면서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를 사회학, 철학, 다른 신학과 연관하여 살펴본다.
Ⅱ.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 신학적 행위 이론의 기초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자기이해는 나사렛 예수의 하느님 의식으로부터 기인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신앙론을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 르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종교성 –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경건(Frömmigkeit)라고 표현한다 – 은 인간 인식 활동 영역 중 감정에 속하는데, 이는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 즉 자신이 하느님과 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의식하는 것을 의미한다.14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보편적인 종교성이 유일신론적인 형태 가운데 나사렛 예수가 드러낸 하느님 의식과 그의 구원으로 꼴지어진 실정종교이다.15
여기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보편적 종교성을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의식하는 자이며, 그렇기에 그의 자기이해 는 나사렛 예수의 하느님 의식, 즉 그리스도론과 떨어질 수 없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인간 현존에 대하여 인간성의 원형의 계시이자 모범이다. 슐 라이어마허는 인간을 원래 전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로 본다. 인간 존재는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의존하여 살아가고 –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난 인간은 없고 언제나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서 살아가는 인간도 없다 -, 그렇기에 그의 존재는 언제나 근원(Woher)을 상정한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전적인 의존 관 계는 이러한 근원의 궁극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인도와 주재를 따르도록 정초되어 있다.16
하지 만 인간의 현존 – 슐라이어마허의 표현에 따르면 감각적 자기의식의 상태 – 에서는 자아가 있고, 그렇 기에 인간은 자유를 지닌다. 비록 슐라이어마허가 감각적 자기의식의 등장을 전통 신학과 다르게 무조 건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17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 대신 자아를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뒤틀린 모습 을 낳는다.18
14“모든 다양한 경건 양상의 공통점이자 경건을 다른 모든 감정과 구분하는 것, 즉 경건의 본질은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의존적이라고 의식하는 것, 이를 똑같이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의식하는 것이다.”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zt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 2. Aufl. [1830/31], hg. von Rolf Schäfer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2008] [이하 CG2], Bd. 1, 32.)
15“그리스도교는 목적론적으로 정초된 경건에 속한 유일신론적 신앙 방식으로서 그 안에 속한 모든 것이 나사 렛 예수에 의하여 성취된 구원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다른 유일신론적 신앙 방식들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 (CG2, Bd. 1, 93.)
16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이 창조 교리의 의미라고 본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아니기에 세 계와 다른 인간들과 의존적인 관계 속에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주재하심을 느낀다. 슐라이어 마허는 이것이 바로 창조 때 정초된 세계와 인간의 완전성이라고 말한다. 참조. CG2, Bd. 1, 357-387.
17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감각적 자기의식의 개진은 하느님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이다. 이는 마치 부모 로부터 자녀가 의식적으로 독립하여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러한 연유로 정재현은 슐라이어마허의 인간 이해는 종국에 완성될 존재로 인간을 바라보는 이레네우스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본다. 참조. 정재현, 『티끌만 도 못한 주제에. ‘사람됨’을 향한 신학적 인간학』 (왜관: 분도출판사, 2003), 255-261.
18자기를 중심으로 삼아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 곧 감각적 자기의식의 왜곡 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기중심적으 로 세계와 인간을 파악하려 하고 그에 따라 세계와 인간의 완전성도 왜곡된다. 그렇기에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악 (Übel)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악은 죄로 인하여 세계의 완전성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고, 사회적인 악 은 인간의 완전성이 자기중심성으로 인하여 뒤틀어져 대립과 갈등으로 변한 것이다. 참조. CG2, Bd. 1, 471-475.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악의 문제, 즉 신정론 물음은 죄로 인한 인간의 삶에 대한 관점 변화에 기인한다.
이 현존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존재, 즉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과 일치된 존재 로 나아갈 수 없다. 이미 자아가 중심이 된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자아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이기에 스스로에게 얽매이기 때문이다.19
이러한 인간 현존 가운데 나사렛 예수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인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을 자유 가운데 드러낸다. 슐라이 어마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구원자[즉, 나사렛 예수; 필자] 안의 하느님 존재는 그의 가장 내면적인 원동력으로 정초되어 있다. 그 원동력으로부터 모든 활동이 시작하고, 그 원동력이 모든 순간을 결합한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필자] 모든 인간적인 것은 이 원동력을 위한 유기적 조직체를 구성하는데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다 른 힘이 지성에 관계해야 하는 것처럼 그 원동력을 받아들이거나 드러내는 체계로서 원동력과 관계한 다.”20
이는 나사렛 예수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주재하심을 순종하며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느님의 인도하심과 주재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창조 때 이미 정초 된 인간 본연의 존재이다. 우리가 자아를 중심으로 삶을 파악하는 가운데 이러한 본연의 존재를 잃어버 린 것과 달리, 나사렛 예수는 우리와 같은 지경에 있으면서도 결코 그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오히 려 그에게서는 창조 때 정립된 하느님 의식이 결코 흐려지거나 약해지지 않고 항상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21
이는 그가 모든 삶의 근원이자 원리이자 전체인 하느님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의 이끄심에 전 적으로 복종하여 살아갔다는 말이며 그의 인간적 실존은 그러한 하느님의 이끄심과 그에 대한 의존에 대하여 전혀 불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게 그것들이 삶의 지경에서 나타나도록 했다는 의미이다. 나 사렛 예수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비움의 삶을 살았다.22
그렇기에 그는 무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있어도 삶을 이끄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의 인 도하심을 따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며 삶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실존을 통해 끊임없이 그리 고 확고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23
19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다루면서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간 실존의 무력함이자 죄라고 말한다. 참조. 쇠렌 키르케고르/임규 정 옮김, 『죽음에 이르는 병』 (파주: 한길사, 2007).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죄 이해와 매우 유사하다. 슐라이어마허 의 죄 이해와 키르케고르의 죄 이해를 비교한 연구로 참조. Christine Axt-Piscalar, Ohnmächtige Freiheit. Studien zum Verhältnis von Subjektivität und Sünde bei August Tholuck, Julius Müller, Sören Kierkegaard und Friedrich Schleiermacher (Tübingen: Mohr Siebeck, 1996), 174-293, 특히 206-219. 20CG2, Bd. 2, 69.
21참조. CG2, Bd. 2, 46 이하.
22이는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두 본성론에서 개진된다. 그의 인격에서 신성이 전적으로 능동 적이고 인성이 수동적이라는 말은, 곧 나사렛 예수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이 고 그의 인간적 실존은 그것을 담아내고 개진하는 장(場)이자 도구(Werkzeug)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조. CG2, Bd. 2, 70 이하.
23참조. CG2, Bd. 2, 90 이하.
나사렛 예수의 삶에는 하느님과 관계되지 않은 순간이 하나도 없었 다. 그의 인간적 본성은 그러한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제이고, 그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이미 주 어져 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계시이다.24
24혹자는 슐라이어마허의 방식대로 나사렛 예수를 인간학적으로 구원자로 주장하면 그 유일성이 부정된다고 여 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하여 슐라이어마허는 1)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하는 것은 그를 구원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및 구원 활동과 결코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에게 있어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되고 2) 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와 같은 구원자가 있느냐는 질문은 신앙고백으로부터 출발 하고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을 서술하는 신앙론을 넘어서는 질문이기에 의미 없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 스도인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자이다. 참조. CG2, Bd. 2, 35 이하.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인간성의 원형(Urbild)이다. 그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 완전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모범(Vorbild)이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사렛 예수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창조의 최 종 완성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25
그리스도인 –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개신교 신앙을 지닌 사람들로 이해하는데 - 은 이와 같은 나사 렛 예수의 하느님 의식, 즉 그의 실존에서 나타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기의식의 기초로 삼은 사람들 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칭의(Rechtfertigung)와 돌이킴(Bekehrung)으로 설명하는데, 전자는 그리스 도를 통하여 “변화된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의미한 다.26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의 하느님 의식을 그의 가르침과 삶을 통하여 전 달받는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삶과 만나면서 새로운 존재의 계시에 환호하고 그것으로 인 하여 삶이 바뀌고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말하는 사람들이다.27
그들의 삶 이해는 예전에 자기중 심적으로 살아왔던 삶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선제적 은총(die zuvorkommende göttliche Gnade)”로부터 기인한다고 고백한다.28
이는 그들이 자기중심적인 실존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던 것도, 나사렛 예수의 삶과 그의 하느 님 의식 전달을 통하여 구원받아 새로운 실존으로 나아왔다는 것도 모두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 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자아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필자] 자기활동은 그 관계로 받아들여짐과 함께 그리고 전혀 휴지(休止)기간 없이 시작”하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동적인 수용성이 고양되어 가는 것은 하느님이 준비하는 은총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돌이키게 만드는 은총을 통하여 저 생동적인 수용성이 생기어린 자기활동성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29
그리스도인의 자기활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달받은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이 그의 삶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칭의는 이 를 존재론적으로 뒷받침된다. 칭의에서 나타나는 죄용서를 통하여 그 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삶이 하느님에 의해서 없던 것으로 여겨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됨을 통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30
25이에 대하여 참조. Anne Käfer, Inkarnation und Schöpfung. Schöpfungstheologische Voraussetzungen und Implikationen der Christologie bei Luther, Schleiermacher und Karl Barth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2010), 85-209.
26CG2, Bd. 2, 168.
27“예수의 인격적인 현전은 개인이 그를 만나는 독특한 방식으로 경험된다. 개인의 존재 안에서 예수가 일으키 는 변화는 개인의 시각에서 변화를 식별하는 환호를 이끌어낼 정도로 극적이다. […] 예수의 현전은 환호를 이끌어 낸다. 환호들의 특수성은 예수에 대한 개인의 독특한 경험 및 개인이 언어 목록에서 어느 한 술어를 선택해 내는 능력과 관련된다.” 크리스틴 헬머/김지호 옮김, 김진혁 해설, 『교리의 종말』 (고양: 도서출판 100, 2020), 273.
28CG2, Bd. 2, 178.
29CG2, Bd. 2, 90.
30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옛 삶의 종말 선언인 죄용서와 새로운 삶의 시작 선언인 하느님의 자녀됨은 공속 적이며 동시에 일어나는 사태이다. 참조. CG2, Bd. 2, 195.
그리스도인은 나사렛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자유롭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해를 전제하는 행위는 다음과 같은 생리를 지닌다. 먼저,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필연과 자유의 일치라는 틀을 지닌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인 도 및 주재하심, 즉 그의 주권을 따르면서 이를 자유로운 순종에서 구현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하 느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는 하느님 나라로 정향되어 있고, 필연으로서의 하느님 나라는 그들의 자유 를 통하여 현실화 된다.31
이와 같은 필연과 자유의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는 하느님의 뜻을 개별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랑의 행위로 이어진다.32
둘째,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지복에 의해 추동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지복은 자기중심적 삶에서 비롯되는 즐거움과 불쾌함을 넘어선 상태, 곧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된 삶이다.33
31슐라이어마허에게서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온 인류적 차원에서 완전히 개진되고 현실화되 는 것이다. 참조. CS, 78.
32참조. Katharina Gutekunst, Die Freiheit des Subjekts bei Schleiermacher. Eine Analyse im Horizont der Debatte um die Willensfreiheit in der analytischen Philosphie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19), 183-246.
33“지복은 즐거움의 최대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 것이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원리”이다. (CG2, Bd. 1, 49; CS, Beil. 15 [Ms. 1809, § 45].)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개진된 지복은 그리스 도인들의 존재론적 기초이다. 이 지복은 아직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놓여 있기에 현실화 되어야 하고 이는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기초인 지복은 그들의 행위 의 출발점이며 그 현실화는 행위의 종착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지복을 받아 들이고 거기에 감사하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여전히 예수 그리 스도의 완전함과 지복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과정이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 리스도로부터 하느님 의식과 지복을 전달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단계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감각적 자기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지복을 즐거움과 불쾌함 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지복은 상대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렇기에 완 전을 향한 과정 중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이러한 지복의 개진 및 발전에 근거하고 있으며 지 복이 온 인류 가운데 완전한 성취되는 경지, 즉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다.
Ⅲ.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종류 및 그 기능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그의 존재론적 기반인 지복이 그들의 실제 실존 상태인 감각적 자기의식 속에서 개진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 행위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떤 기능을 지닌가?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그는 효력적인 행위(das wirksame Handeln)를 언급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지복은 그리스도의 것과는 달 리 상대적이며 그렇기에 여전히 완전의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이렇게 과정 중에 있는 지복 은 “즐거움과 불쾌함의 변동”으로 측정된다.34
34CS, 39.
즉, 그리스도인의 감각적 자기의식이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대한 자유롭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할 때 불쾌함이 나타나고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 하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일치할 때는 즐거움이 나타나는 것이다.35
지복이 보다 더 완전하게 개진되려 면 불쾌함 및 즐거움과 관계하여 전자는 경감하고 후자는 증폭시키는 행위를 거쳐야 한다. 그래야 그리 스도인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완전히 의식하며 실제화하는 삶의 고양화, 즉 완전한 지복이 현실화 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 기초인 지복을 현실화하는 효력적 행위 를 즐거움과 불쾌함으로 나누어서 고찰한다. 여기서 즐거움과 관계하는 효력적 행위는 ‘전파하는 행 위’(das verbreitende Handeln)이고, 불쾌함과 관계하는 효력적 행위는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das reinigende bzw. wiederherstellende Handeln)이다.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는 인간의 사회적 실존성인 공동체성 및 개별성과 연관하여 분화된다. 하느 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저항하거나 일치되지 않아 나타나는 불쾌함은 공동체에서도 나타나고 개별자 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인 역시 인간 일반에 대한 종(種)의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지만 동시에 종의식이 각자의 삶의 지경에 따라 발현되고 개진되어 나타나는 그만의 개별성으로 다 른 사람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전적으로 자 유롭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공동체적으로 회복해야 하고, 공동체 자체가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 하심에 반항하는 데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회복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전자를 공동체적 차원에서 나 타나는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로, 후자는 개인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로 구분 한다. 전자에서 공동체는 개인의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대한 저항 및 반항에 대하여 공동체가 담지하고 있는 지복의 개진 상태, 즉 전통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불쾌함이 환기되고 회복되도록 한 다.36
35“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자기의식적 측면에서 그리고 본래적 행위로부터 추상화하여 기술해 보고 자 한다면: 주를 기뻐하는 것은 언제나 같은 정도로 있을텐데, [지복을 체험하는 순간의 내용이 대체로 절대적으로 지속된다고 받아들여지는 한, 그 순간은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지고, [지복을 체험하는] 순간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 정된다고 상기시키는 한, 그 순간은 불쾌함으로 받아들여진다.” (CS, 41-42.)
36참조. CS, 119.
공동체의 전통은 개인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도와주고 스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도 록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의 ‘대표적(repräsentativ) 요소’ 라고 말한다. 한편 개인은 공동체가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대하여 저항하고 있는 상태를 비판하 여 회복시킬 수 있다. 개인 역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개진하여 양심을 지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를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의 ‘수정적(korrektiv) 요소’라고 말하며 개인을 통한 공동체의 갱신을 긍정한다. 개인의 비판은 공동체가 생동성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정화 또는 회복 하는 행위가 지니는 대표적 요소와 수정적 요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그리스도인 개인이 서로에게 서 나타나는 불쾌함을 견제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공동체성과 개별성이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 도인의 사회성이 손상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는 개인의 이탈을 방지하며, 개인은 공동체의 자기절대화 및 화석화를 방지한다. 즐거움과 관계하는 전파하는 행위 역시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성 및 개별성 과 연계하여 분화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전파하는 행위는 인간의 심리적인 측면, 즉 그의 내면성 과 외면성과 먼저 관계한다. 먼저 전파하는 행위를 통하여 인간 내면에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기뻐하며 거기에 자유롭게 순종하는 의향(Gesinnung)이 형성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의향 형성을 전파하는 행위의 ‘집약적인(intensiv) 형식’과 관련짓는다. 집약적으로 전파하는 행위는 지복의 근원인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이 개인의 내면에 더욱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래서 집약적으로 전파 하는 행위는 개인에 대한 종교 교육과 연관되고 개별성 함양과 관련된다. 하지만 의향이 잘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외부로 잘 실행하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다면, 그 의향은 실제화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교양된 의향을 잘 드러낼 재능(Talent)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재능 교육은 전파 하는 행위의 ‘외연확장적(extensiv) 형식’ 및 공동체 확장과 연관되는데, 이는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 심에 대한 즐거움은 공동체라는 외연적 형태로만 의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연확장적으로 전파하는 행위는 공동체성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파하는 행위에서 공동체성과 개별성은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와 다르게 서로 대립하거나 견제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준다. 집약적으로 전파 하는 행위를 통하여 개진될 개인의 내면적 의향 형성이 없으면 공동체가 나타날 수 없고, 외연확장적으 로 전파하는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질 공동체의 구성 및 확장이 없다면 지복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아 개인의 의향 형성이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즉, 집약적 형식과 외연확장적 형식; 필자]은 서 로 대립하지만 그저 상대적으로 대립할 뿐이다. 따라서 그 중 하나는 다른 것과 함께할 때에만 완전해 질 수 있고 모든 순간에서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37
전파하는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공동 체성과 개별성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공동체는 개별의 성숙을 위한 기반이고, 개별은 공동체 확장의 기제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정화 또는 회복하는 행위, 전파하는 행위를 포괄하는 효력적 행위 곁에 드러 내는 행위(das darstellende Handeln)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드러내는 행위는 “삶의 부분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으며 어떤 종류의 변화를 산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다.38
드러내는 행위의 대상인 상대적으로 개진된 지복은 효력적 행위를 통해 변화되었지만 그 완전성으로 나 아가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휴지(休止)과 동시에 다음에 이루어질 효력적 행위를 위한 계기이기 때문이 다. 즉 드러내는 행위는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면서 동시에 이미 구성된 무언가에 의존하면서 최 고선으로 나아가는 인간 실존 가운데 있는 능동적 구성과 수동적 의존 사이에 위치한 순간과 관계한 다.39
드러내는 행위는 아직-완전치 않게-완료됨과 이미-완전히-완료됨 사이에 흔들리고 있는 인간 실 존의 순간과 관계하지만,40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아직-완전치 않게-완료된 순간이 완전히 완료되는 순간으로 발전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드러내는 행위와 관계되는 인간 삶의 순간은 비록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이끌리어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 그 자체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드러내는 행위를 예배(Gottesdienst)와 연관지으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성과 세상에 대한 관계가 그 안에서 구상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드러내는 행위는 그들 가운 데 거하는 한 분 성령의 존재와 살아계심에 대한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1
37CS, 318,
38CS, 48.
39아이러르트 헤름스(Eilert Herms)는 슐라이어마허가 형성 또는 교양 (Bildung) 개념을 통하여 이러한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을 간파했다고 본다. 참조. Eilert Herms, “Schleiermachers Bildungsbegriff und seinie Gegenwartsrelevanz,” in ders., Menschsein im Werden. Studein zu Schleiermacher (Tübingen: Mohr Siebeck, 2003), 227-249.
40참조. CS, Beil., 16 (Ms, 1809, § 48).
41CS, 512 (Vorl. 1824/25).
슐라이어마 허는 이러한 의미에서 드러내는 행위와 예배가 서로 상통한다고 본다.
예배가 하느님을-섬기는 것 (Gott-Dienst), 곧 하느님의 기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실존 속에서 하 느님의 인도 및 주재에 따라 살고 있다는 지복 –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 을 드러내는 행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42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좁은 의미로서의 예식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을 드러내는 그리스도교적인 덕 역시 예배에 속한다. 공동체성과 개별성이 서로 조화를 이 루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성은 이 드러내는 행위에서 구상되는데, 하느님의 기관으로 사는 것을 가리키는 드러내는 행위는 공동체적인 차원이나 개인적인 차원 모두에서 나타나고 서로를 전제하면서 동시에 교 호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43
이러한 예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교회는 세상을 한편으로는 인정하면 서 동시에 그만의 특질을 바탕으로 그것을 개선하는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 밝혀진다. 교회와 세상 모두 가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속해 있고 각자가 모두 그것을 표현하는 한, 교회는 세상의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에 대한 표현, 즉 그의 예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감각 적인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하느님의 인도 및 주재하심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교회는 여기에 대해 자신의 표현과 서술로 세상의 부족한 점을 메꾸어주고 보완한다.44
드러내는 행위, 즉 예배는 그리스도 인의 사회성과 세상에 대한 관계의 원형을 그려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위한 이념을 제공한다. 이제 지복은 드러내는 행위와 효력적 행위 간의 순환적이면서도 교호적인 작용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개진 및 발전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지복과 유사한데, 이는 회복하는 행위와 전파하는 행위로부터 유래할 뿐만 아니라 그 양자보다 앞서 있다.”4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적 상태, 곧 그리스도로부터 전달받은 지복 자체(an sich)가 드러내는 행위를 통하여 의식된다. 이 지복 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즉 그의 감각적 자기의식과 조우하며 즐거움과 불쾌함으로 여겨지는 대자적(für sich) 형태를 띤다. 효력적 행위는 이러한 대자적 형태의 지복에 대응하며 이행된다. 지복은 효력적 행 위가 이루어지는 틀인 공동체와 개인 간의 대립 및 의존 관계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개진된다. 이 효력 적 행위를 거쳐서 다시 그리스도인의 존재로 돌아온 지복은 다시 드러내는 행위를 통하여 의식된다. 하 지만 이 때의 지복은 앞선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의식된 지복과는 다르다. 드러내는 행위와 효력적 행 위 간의 교호적 관계를 통해 이행된 과정에서 “의식 자체에서 증가”가 나타나고,46
“내면은 의식이 생겨 나는 것과 함께 짝을 이루는 상대적인 무의식성의 감소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47
42참조. CS, 526-527.
43슐라이어마허는 여기에 대하여 공(公)예배와 개인의 경건생활 간의 상호공속성을 강조한다. 공예배는 개인의 경건생활의 출발점이자 근간이고, 개인의 경건생활은 공예배를 생동적으로 만든다. 이에 대한 분석에 대해 참조. 박광우, “공적 예배의 의미 고찰 – 예배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이해를 중심으로,” 174-181.
44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 참조. Kwangwoo Park. Kirche als solidarische Gemeinschaft. Eine ethische Rekontruktion der Kirchentheorie mit Blick auf die Christliche Sittenlehre von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160-169.
45CS, 504.
46CS, 504.
47CS, Beil., 146 (Ms. 1822, § 2, Anm. b).
즉, 이 때의 지 복은 즉자대자적 상태(an und für sich)이다. 이는 곧 앞선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의식된 지복이 효력 적 행위를 통하여 갱신되고 발전되어 다시 드러내는 행위를 통하여 의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복은 드러내는 행위와 효력적 행위 간의 관계를 통하여 갱신되고 더욱 발전한다. 그리고 드러내는 행 위와 효력적 행위는 지복의 개진 및 발전을 중심축으로 삼아 서로 교호적이면서도 순환적으로 작용한 다.
Ⅳ.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한 개신교회의 내외적 관계망 조망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정초된 지복은 그의 행위를 촉발하고, 행위는 그러한 지복을 점진적으로 개진 한다. 그런데 “윤리적인 것이 인격에서 그 자체적으로 완료되지 않는 것처럼, 인격 역시 그 자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기질대로, 그러니까 성별과 동시에 인종과 민족성의 특정 형태로 자라”나 공 동체를 이룬다.48
즉, 공동체란 윤리적인 것의 이상적 현실화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한다. 그 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 특별히 개신교회는 곧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개진된 지복 의 현실화이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내외적 관계망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통하여 조망될 수 있다. 먼저 개신교회 내적인 측면, 즉 교회 사역들을 살펴보자. 교회 사역 간의 관계망 구축은 그리스도인 의 존재, 곧 지복을 드러내는 행위인 공예배를 통하여 시작된다.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그것[즉, 공예 배; 필자]은 개인들의 결합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구성하고 특정 장소를 차지한다”.49
그리스도인 개 인은 각자의 경건 생활을 통하여 각자의 삶에서 의식한 지복을 공예배에서 공유하고 함께 드러낸다. 이 렇게 볼 때 지복이란 곧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의식을 의미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의식 인 지복이 공예배 가운데 찬양으로 먼저 서술된다고 본다. 찬양은 모든 공동체원이 함께 참여하는 공예 배의 순서로서 “오직 공동체원의 자기활동과 결부되”기 때문이다.50
즉 찬양은 즉자적인 공동의식의 표 현이다. 이 공동의식은 보다 구체적인 행위, 곧 그 대자적 형태로 이양되어야 한다. “종교적 의식은 직 접적 자기의식이지만, 그 충족은 오직 행위로 이양되어 형성될 때에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51
여기에 설교의 자리가 있다. 설교자는 공동체의 공동의식을 자신의 삶과 연관하여 돌아보고 구체적으로 개진하 여 공동체원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다.52
설교란 곧 공동의식의 대자적 형태이다. 찬양을 통하여 나타난 즉자적 공동의식과 설교를 통해 나타난 대자적 공동의식의 과정을 거친 후 이루어지는 기도는 공동의식 의 즉자대자적 형태이다.
이 단계에서 공동체원들은 공동의식이 예배 후에도 현실화 되기를 바라며 그 에 따라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그렇기에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촉진”으로 향한 다.53
48Friedrich D. E. Schleiermacher, Ethik (1812/13) mit späteren Fassungen der Einleitung, Güterlehre und Pflichtenlehre, Auf d. Grundlage d. Ausg. von Otto Braun, hg. u. eingel. von Hans von Joachim Birkner (Hamburg: Meiner, 1981), 80.
49Friedrich D. E. Schleiermacher, “Die praktische Theologie nach den Grundsä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 dargestellt,” in ders., Sammtliche Werke Ⅰ/13, Die praktische Theologie nach den Grundsä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 dargestellt, hg. von Jacob Frerichs (Berlin: G. Reimer, 1850) (이하 PT), 69.
50PT, 176.
51PT, 225.
52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설교란 공동의식의 개인화이면서 공동체원들 간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다. 참 조. Jörg Dierken, “Dogmatik und Predigt bei Schleiermacher,” in ders., Ganzheit und Kontrafaktizität. Religion in der Sphäre des Sozialen (Tübingen: Mohr Siebek, 2014), 98-116; Wilhelm Gräb, “Predigt als kommunikativer Akt. Einige Bemerkungen zu Schleiermachers Theorie relilgiöser Mitteilung, in Kurt-Victor Selge (Hg.), Internationaler Schleiermacher-Kongreß. Berlin 1984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5), 643-659.
53PT, 187.
이처럼 공예배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인 지복이 개진되고, 그리스도인들은 공예배를 통하여 그 들이 공유하는 지복을 비로소 표현한다.
공예배를 통하여 표현된 지복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이행된다. 슐라이어마 허는 이를 목회(Kirchendienst)적 차원과 교회정치(Kirchenregiment)적 차원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먼 저 목회적 차원을 보자.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관계하는 교회 사역을 종 교 교육(Religionsbildung)으로, 불쾌함과 관계하는 것을 목회상담(Seelsorge)으로 본다. 종교 교육을 담당하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즐거움으로 체험한 지복을 종교 교육을 받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전 달함으로써 “그들이 종교적 삶 속에서 독립적으로 사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해서 책임지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척도 및 규범을 제시하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하고 아이들이 “그들의 영역에서 그리스도교 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게 한다.54
반면 목회상담은 지복을 불쾌함 으로 느끼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다. 목회상담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에 따 른 삶에 대한 신뢰가 깨져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55
목회상담자는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피상담자 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그가 다시 하느님의 말씀과 그에 따르는 삶에 대하여 신뢰하도록 회복한다. 그래 서 목회상담자는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롭게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자율성 을 회복시킨다.56
종교 교육과 목회상담은 공예배를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난 지복을 그리스도인 개인의 실존 상황과 연관하여 다루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한편 지복은 교회정치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불쾌함과 관련하여 권징(Kirchenzucht), 교회 개혁(Kirchenverbesserung), 그리고 에큐메니컬 운동(Ökumene)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개진된다.57
먼저 권징은 교회 공동체 또는 교단 전체가 개별자 또는 개교회의 자유의 오용에 따른 불쾌함을 회복하 는 행위이다. 개별자 또는 개교회의 자유 및 권리 개진은 권징을 통하여 교회 전체의 공동체성을 위하 는 방향으로 설정된다.58
교회 개혁은 개별자 또는 개교회가 교회 전체에서 나타나는 불쾌함을 회복하는 행위이다. 개별자 또는 개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관계에 근거한 양심을 통하여 교회 전체가 담지하고 규정한 지복 상태의 상대성을 상기시킴으로써 교회 전체가 화석화되는 것을 막는다.59
에큐메 니컬 운동은 각 교파가 각자의 상황에서 느끼는 지복에 대한 즐거움을 서로에게 전달하는 행위이다.60
54PT, 395.
55참조. PT, 430.
56이에 대하여 참조. Christian Albrecht, “„… daß jene Anforderung nicht mehr in ihm entstehe.“ Schleiermcahers Programm der Seelsorge als Wiederherstellung religiöser Autonomie,” in Arnulf von Scheliha und Jörg Dierken (Hg.), Der Mensch und seine Seele. Bildung – Frömmigkeit - Ästhetik. Akten des Internationalen Kongresses der Schleiermacher-Gesellschaft in Münster, September 2015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17), 277-291.
57슐라이어마허의 교회 정치에 대한 이해 전반에 대하여 참조. Eilert Herms, “Schleiermachers Lehre vom Kirchenregiment,” in ders., Menschsein im Werden. Studien zu Schleiermacher, 320-399.
58따라서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교회 권징은 보편을 상징하는 정신이 개별을 상징하는 몸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단련(Gymnastik)과 비견된다. 이에 대한 분석은 Arnulf von Scheliha, “„Kirchenzucht?“ Reformierte Themen in der Christlichen Sittenlehre Friedrich Schleiermachers,” in Anne Käfer, Constantin Plaul und Florian Priesemuth (Hg.), Der reformierte Schleiermacher. Prägungen und Potentiale seiner Theologie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20), 170 이하.
59참조.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Christliche Sittenlehre (Vorlesung im Wintersemester 1826/27). Nach größtenteils unveröffentlichen Hörnachschriften und nach teilweise unveröffentlichen Manuskripten Schleiermachers, hg. und eingel. von Hermann Peiter (Münster: LIT, 2011), 139. 31
60에큐메니컬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이해에 대해서 참조. Sabine Schmidtke, “Schleiermacher als Ökumeniker,” in Anne Käfer, Constantin Plaul und Florian Priesemuth (Hg.), Der reformierte Schleiermacher. Prägungen und Potentiale seiner Theologie, 221-233.
각 교파는 지복에 대한 즐거움의 상호전달을 통하여 다른 교파로부터 지복의 다른 측면을 배우고 보충 받아 지복의 총체성으로 더 나아가고 서로를 협력자로 여긴다.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해 본 목회적 차원의 관계망은 다양한 교회 사역들이 지복의 개진이라는 공동 의 목표를 위하여 공속적으로 관계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연대적 특징을 지닌다. 예배는 그리 스도인의 공동의식이자 존재 상태인 지복을 드러낸다. 종교 교육과 목회상담은 그리스도인 개인에게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불쾌함과 관계하여 지복을 갱신하며, 교회 권징과 교회 개혁 및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 정치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불쾌함과 관계하여 지복을 더욱 개진시킨다.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개진된 지복은 다시 예배를 통하여 표현되고 그 다음 교회 사역을 준비한다. 교회 사역들은 지 복의 개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기능 및 특징을 바탕으로 서로 공속 및 협력하는 관계, 즉 연대적 관계 가운데 있다. 이러한 관계망을 내적으로 구현하는 개신교회는 연대의 실제적 현실화이다. 이제 개신교회의 외적인 측면, 즉 개신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하는지 알아보자. 슐라이어마허는 교회의 외적인 측면을 가족 및 국가와의 관계를 통하여 조망한다. 가족은 모든 인간 공동체의 출발점이 면서 동시에 교회의 원리인 지복의 상호전달이 제일 먼저 일어난다는 점에서 교회의 기초적 구성 요소 이다.61
그리고 국가는 모든 인간 공동체에 대하여 공동으로 적용되는 법을 마련하여 서로 다른 사람 및 공동체가 소통할 수 있게끔 하여 교회의 법적 보호 및 다른 공동체와의 소통을 보증한다.62
이런 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가족과 국가에 대한 교회의 관계가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상, 즉 가족과 국가와 관계하는가? 이는 우리가 앞에서 살 펴봤던 드러내는 행위에서 구상된 교회와 세상 간의 관계, 즉 교회는 세상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동 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완하여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개신교회는 가족과 국가가 지니는 윤리적 의의와 그 기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슐라이어마 허에게서 인간 공동체는 이성과 자연의 일치라는 최고선 구현을 목적으로 이성의 자연에 대한 형성 및 인식 작용을 인간의 실존적 특질인 동일성 또는 개별성에 따라 구현하는 윤리적 행위의 형성물이다. 인 간 공동체는 행위 주체자인 개인이 윤리적 행위를 이행하며 다른 개인과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기 때문 이다.63
61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예수가 일방적으로 전하고 제자는 일방적으로 듣는 예수 공동체를 교회로 보지 않고 학교의 일종으로 본다. 오히려 교회는 예수가 승천한 후 성령이 임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에 대한 기억을 전 달하고 전달받으면서 시작한다. 참조. CS, 337-338 (Vorl. 1826/27).
62미리암 로제(Miriam Rose)는 슐라이어마허의 국가론에서 소통이 핵심을 차지한다고 본다. 참조. Miriam Rose, Schleiermachers Staatslehre (Tübingen: Mohr Siebeck, 2011).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국가론은 절대 정신의 개진에 따른 객관적인 법 정립을 국가의 기초로 보는 헤겔의 견해와 전혀 다르다. 참조. Jörg Dierken, “Aufgeklärtes Staatsdenken. Politische Institutionalität bei Schleiermacher und Hegel,” in ders., Ganzheit und Kontrafaktizität. Religion in der Sphäre des Sozialen, 318-332.
63참조.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Über den Begriff des höchsten Gutes. Zweite Abhandlung,” in ders., Kritische Gesamtausgabe (이하 KGA) I/11. Akademievorträge, hg. von Martin Rössler unter Mitwirkung von Lars Emersleben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2002), 664 이하.
따라서 교회, 가족, 국가는 그 공동체에 해당하는 윤리적 행위와 관계하여 형성되고 공동의 목 표인 최고선 구현에 있어서 나름대로 특징과 기능을 갖는다. 교회는 가족과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오히려 그들과 평등하다.
그래서 교회는 가족과 국가의 윤리적 기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교회는 가족과 관련된 사항들, 즉 남녀 간의 결혼과 자녀 출생 및 양육,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사교 활동의 윤리적 의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공동체적 기초로 삼는다. 또한 교회는 국가와 관 련된 사항들, 곧 정부와 국민 간의 교호 작용으로 이해되는 정치,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는 문화 및 경제 발전, 그리고 국가의 안보 활동을 인정한다. 교회는 가족 및 국가를 인정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최고선,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협력한다. 하지만 개신교회는 자신만의 기능으로 가족과 국가가 더 윤리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기여한다. 교회 는 가족에 대하여 남녀 간의 사랑 모델을 제시하고, 자녀 교육의 윤리적 방법을 제공하며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교의 범위를 넓힌다. 이는 교회가 모든 인간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 과 사랑을 증언하고 드러내기에 가능하다. 이러한 교회의 가족에 대한 윤리적 기여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의 윤리적 활동, 즉 일부일처제 가정 형성 및 이혼 금지, 가정 예배를 통하여 자녀에게 영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훈육하는 그리스도인 부모,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환대와 선행으로 구체적으로 나 타난다.64
한편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하느님 앞에 평등을 상기시킴으로써 정부와 국민이 서로를 존중하 며 교호 작용을 하도록 하고, 문화 및 경제활동에 있어 국가가 자기 자신을 목표로 삼는 국가주의로 빠 지지 않도록 전체로서의 하느님 나라를 상기시키며, 전 인류에 대한 형제사랑을 상기시킴으로써 국가의 안보 활동인 전쟁이 방어전쟁으로 국한되도록 하며 평화로운 국제관계가 이루어 지게 한다. 이와 같은 교회의 국가에 대한 윤리적 기여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활동, 즉 사형 폐지 등의 인간화 된 사법제도 구축 및 평화로운 국가 개혁, 보다 인간화된 경제제도 구축, 방어전쟁을 위한 병역 이행 및 세계시민적 국제관계 구축으로 이루어진다.65
64이에 대하여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에 관한 설교 참조.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Predigten. Vierte Sammlung 1820. Predigten über den christlichen Hausstand,” in ders., KGA Ⅲ/1. Predigten. Erste bis Vierte Sammlung (1801-1820) mit den Varianten der Neuauflagen (1806-1826), hg. von Günter Meckenstock (Berlin/Boston: Walter de Gruyter, 2012), 621-766.
65이에 대하여 참조. CS, 241-290; 440-501.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교적 국가 정치 이해에 대하여 참조. Arnulf von Scheliha, “„[…] die Verletzung des Buchstabens nicht achtend, […] wharhaft im Sinn und Geist des Königs handelnd.“ Friedrich Schleiermacher als politischer Prediger,” in Michale Pietsch und Dirk Schmid (Hg.), Geist und Buchstabe. Interpretations- und Transformationsprozesse innerhalb des Christentums. Festschrift für Günter Meckenstock zum 65. Geburtstag (Berln/Boston: Walter de Gruyter), 155-175.
신학적 행위 이론을 통해 고찰한 개신교회의 외적인 관계망 역시 연대적이다. 개신교회는 세상이 그 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목표로 한다고 여기며 그것들의 특질 및 기능을 인정한다.
동시에 개신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증언 및 서술하면서 가족 및 국가와 관계하며 그 들이 보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행위를 통하여 돕는다.
이러한 개신교회 의 외적인 관계망에서도 개별들이 각자의 특징을 바탕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협력하여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연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처럼 개신교회는 내적으로 연대를 구현할 뿐 아니라 외적으 로도 연대하는 공동체이다.
Ⅴ. 결론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행위 이론은 나사렛 예수의 하느님 의식으로 자기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즉 지복에 기반한다.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지복이 그의 실존적 상태인 감각적 자기의식과 연계되 면서 나타나는 즐거움과 불쾌함,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개진된 지복에 대응하면서 분 화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행위들로 구성되는 개신교회의 내외적 관계망에는 공동의 목표인 지복, 그 리고 그것의 완전한 현실화인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서로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각자의 특질과 기능으로 교호 작용을 하고 있는 개별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는 서로의 자유 및 개성을 인정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연대를 내적으로 구현하고 다른 사회 공동체들의 관계에서 드 러내는 데에 있다. 개신교회의 사회적 의미는 사회학, 철학 그리고 다른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분명해진다.
첫째, 개신 교회는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연대적 작용에 대해 분명한 목적을 부여한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에 따르면 사회는 특정한 코드를 지닌 체계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 및 다른 체계와 소통하면 서 분화 및 발전한다.
종교 역시 초월과 내재라는 고유한 코드를 바탕으로 다른 사회적 체계와 소통하 면서 분화 및 발전해 왔고 이는 종교 공동체 조직에도 반영되어 있다.66
이와 같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은 사회에 속한 개별 공동체의 개성 인정 및 서로 간의 소통을 정당하게 말하지만, 그러한 과정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개신교회는 사회 분화 발전 과정의 방향이 하느님 나라임을 밝힘으로써 사회 체계 이론을 보완한다.
개신교회가 증언하는 하느님 나라는 모든 인류의 존 재론적 토대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개신교회와 그리스도교 신학을 통하여 방향을 얻은 사회적 체계 이 론은 무의미해지지 않을 수 있다.67
둘째, 개신교회는 자신 안에서 구현된 연대를 증언함으로써 연대가 공허한 당위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속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는 타자성을 어떤 특정 관점에 종속시키는 존재론 대신 타자를 전적으로 위하는 윤리를 제일철학으로 내세우면서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을 당위로 정초했다.68
레비나스의 타자윤 리는 연대에서도 중요한 요소인 타자성을 부각하였으나, 그러한 타자를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연대의 현 실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당위를 강조하는] 정언명령이 윤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행동을 방 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윤리적 규범을 긍정적으로 논증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69
66참조. Niklas Luhmann, Funktion der Religion, 8. Aufl. (Frankfurt a. M.: Suhrkamp, 2016), 9-63; 272-316.
67사회 체계 이론에 대한 신학적 기여에 대하여 참조. 전철,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의 신학적 연구,” 「신학 연구」 66 (2015): 33-58; “민중신학과 체계이론의 대화: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신학의 생명론 연구,” 「한국 조직신학논총」 46 (2016): 247-274.
68에마뉘엘 레비나스/김동규 옮김·해설, 『윤리와 무한: 필립 네모와의 대화』 (고양: 도서출판 100, 2020).
69빌프리드 헤를레/김형민 옮김, 『선의 매혹적인 힘. 그리스도교 윤리학의 이론과 실제』 (성남: 북코리아, 2016), 117.
연대적 공동 체인 개신교회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이 지니는 약점을 보완한다.
개신교회의 내외적 관계망 에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협력하는 개별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 신교회는 연대의 실현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자신을 통하여 입증한다.
셋째, 연대적 공동체인 개신교 회는 하느님 나라, 곧 인간의 최고선 구현에 있어서 세상과 소통하고 함께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교회란 세상과는 다른 내러티브를 지닌 공동체이기에 세상에 대한 대안 공동체 라고 말한다.70
하우어워스는 세상에 있어서 교회의 존재적 의미를 잘 밝혔지만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시 킴으로써 교회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71
“종교적 표상들과 개념들은 그 주관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보편적인 특성을 보여줄 때에만 소통가능해”지기 때문이다.72
연 대적 공동체로서의 개신교회는 하우어워스의 말처럼 자신만의 특징과 역할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세상과 분리된 공동체는 아니다.
개신교회와 세상 모두 최고선, 즉 하느님 나라의 현실화 과정 속에서 분화되어 나타났으며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해 협력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개신교회가 연대를 구현하고 증언한다는 주장이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 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회의 개혁은 성서 등을 근거로 한 당위 정초로부터 시작한다 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연대적 공동체인 개신교회의 존재가 먼저 서술될 때 바뀔 수 있다. 개혁을 위한 당위는 존재에 대한 서술에 근거하고, 현실은 서술된 존재를 통하여 반성되기 때문이다.73
70스탠리 하우어워스/홍종락 옮김, 『평화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주의』 (서울: 비아토르, 2021).
71이에 대하여 참조. 김현수, “자유주의자 vs. 분파주의자. 공공신학자 막스 스택하우스와 교회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논쟁,”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0 (2012): 277-301.
72Ulrich Barth, Symbole des Christentums. Berliner Dogmatikvorlesung, hg. von Friedemann Steck (Tübingen: Mohr Siebeck, 2021), 66-67.
73존재의 서술이 지니는 윤리적 의미에 관하여 참조. Eilert Herms, “Sein und Sollen bei Hume, Kant und Schleiermacher,” in ders., Menschsein im Werden. Studien zu Schleiermacher, 298-319.
한국 개신교회는 성서의 증언 위에 서 있으며 그렇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연대적으로 증언하는 존재이 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회의 존재가 분명해질 때에야 비로소 개혁이 시작될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다.
존 재로부터 시작하는 개혁은 공허한 당위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회의 존 재가 연대적 공동체라는 점이 밝혀질 때, 그래서 그가 거기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볼 때, 한국 개신교회 는 바뀔 것이며 더욱 자신의 존재에 따라 현실 속에서 연대적 공동체로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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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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