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bstract
일본은 현대사 전반에 걸쳐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정학적 시각에 종속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는 나라였다.
전후 일본 부활의 상징과도 같았던 ‘히노마루(일본) 반도체’의 약진은 이 나라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지정학 적 향수를 불러일으킨 동시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구가한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이 창출한 눈부신 성과는 같은 크기의 동시대 실패로 인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20세기 성공적으로 보였던 세계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존재감을 동아시아 언저리로 밀어내 버렸다.
시간을 매개로 하는 역사의 회귀성은 무엇보다도 일본에게 좋은 약이 되어 주었다.
21세기 미-중 전략경쟁 은 일본이 지정학 무대로의 복귀를 공식화하는 근사한 명분을 부여해주었고,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팹(반도체 제조 공장)’을 자처하며 반도체 산업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된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온 일본은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반도체 제조 산업의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껏 일본의 행보로 짐작건대, 어쩌면 반도체 산업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 전자산업의 패권일지도 모른다는 기시감마저 들게 한다.
본고에서는 ‘히노마루 반도체’의 찬란했던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의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일본 반도체 산 업 부활 시나리오를 조망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적 시사점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I. 서론: 일본 반도체 부활의 포석
일본은 미래 전자산업의 나무를 미국에 조성되는 혁신의 숲에 심기로 결심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그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의 포석이 뉴욕 ‘올버니 나노테크 단지(Albany Nanotech Complex)’에 놓여졌다.
오늘날 미국 반도체 연구의 중심이 된 이 혁신 단지조성 계획은 21세기 미국이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동부를 겨냥한 동시다발적인 테러의 충격은 백악관 주도의 국가 재건 계획을 가동해야할 만큼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테러의 직접적 희생양이 된 뉴욕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뉴욕 맨해튼은 더 이상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주지사인 조지 퍼타키(George Elmer Pataki, 재임기간 1995-2006)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절망에 빠진 뉴욕에서 혁신적인 기업과 인재가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는 내일의 미국에 영향을 미치는 상상력을 가진 집단이 뉴욕에 머무는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당시 IBM의 기술부문 중역급이었던 존 켈리(John E. Kelly)는 퍼타키의 막연한 계획에 실현 가능성을 더해 주었다. 그 결과 맨해튼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뉴욕주 주도(州都) 올버니(Albany)에 반도체 미세 가공 기술을 연구하는 대규모 단지를 조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제조업체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9.11 테러로 IT 버블이 붕괴되고 세계는 미국에서 시작된 심각한 불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Noshab, F., 2002). 그 틈을 파고든 나라가 일본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정학적 시각에 종속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는 나라였다. 도쿄 일렉트론사社의 히가시 테츠로(東 哲郎)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퍼타키와 켈리의 구상에 합류하기 위해 한달음에 뉴욕으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테러 이듬해인 2002년, 뉴욕주, IBM, 도쿄 일렉트론 3자가 중심이 되어 ‘올버니 나노테크 콤플렉스’가 출범한다(太田泰彦, 2024). 퍼타키와 켈리는 그들이 마주한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 십년 뒤 뉴욕의 미래를 제안했다. 히가시는 신속하고 대담하게 가장 일본적인 방식으로 그의 본심(本音, honne(ほんね))을 미국의 명분에 슬며시 감추어 두었다. 이후 미국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테러의 상흔을 딛고 눈부시게 성장했다. 뉴욕 맨해튼은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도시중 하나로 건재했고, 올버니는 미국 반도체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혁신적인 인재와 새로운 지식이 이곳 ‘올버니 나노테크 단지’에 끊임없이 모여들었고, 그 중심에는 IBM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쿄 일렉트론은 올버니를 무대로 유수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과 조우했다. 히가시 테츠로가 예견한 일본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아마도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회는 늘 예측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Ⅱ. 본 론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이 창출한 눈부신 성과는 동시에 같은 크기로 저지른 실패로 인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2030년에 일본 반도체 기업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0%가 될 수 있다.”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예측1)은 괜한 호들갑이 아니었다.
1) 첨단 반도체 공정(10nm(나노미터) 이하 미세공정) 기술의 개발과 양산 체제로부터 이탈한 일본의 반도체 기업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꾸준히 하락하여, 2030년경에는 0%대에 수렴할 것으로 예측、経済産業省(2021. 6.), 半導体戦略(概 略), 経済産業省.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광은 그들이 보증했던 제품 성능의 유효기간보다 짧았고, 미-일 밀월의 상징과도 같았던 ‘론(로널드 레이건)-야스(나카소네 야스히로) 시대’에도 미국은 일본을 때렸기 때문이다.
어떤 정부도 자국의 미래에 관한 극단적 비관을 전제로 정책을 설계하지 않는다.
특히 일본과 같은 나라의 관료사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0% 점유율”로 회자되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정책 문건은 처절한 자기반성 위에 반드시 성공한다는 집념과 자신감으로 무장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찾아온 일본은 과거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했던 성공을 반면교사 삼아 반도체 제조 산업의 부활을 노리고 있는 것일까. 이제껏 일본의 행보로 짐작건대, 이들이 노리는 것은 어쩌면 반도체 산업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 전자산업의 패권일지도 모른다는 기시감마저 들게한다.
1. 일본 전자산업과 반도체의 발흥(勃興)
메이지 유신 이래 한 세기 남짓 축적한 물질적, 정신적 자본을 모두 소진해 버린 일본은, 미국이 투하한 두 발의 핵폭탄으로 마침내 그들의 자기파괴적 폭주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일본은 미군 연합군 최고 사령부(General Head Quarters, GHQ)에 의한 군정을 거쳐 한국전쟁 시 미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맡으며 극적인 국가 재건에 성공한다.
이는 미국과의 빠른 관계 정상화를 바탕으로 이른바 ‘요시다 독트린’ 하에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추진한 결과였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미국에 맡기고, 최소한의 경비(GDP의 1% 이내)만을 방위비에 쓰면서 그 여력을 경제부흥과 산업발전에 투자한다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총리(재임기간 1946. 5. 22.~1947. 5. 24., 1948. 10. 15.~1954. 12. 10.)의 국정철학은 전후(戰後) 일본의 국가전략노선으로서 1960년대 이후 약 30년간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이 되었다(Nishihara, M., Bae-ho, H., & Tadashi, Y., 1978). 이러한 일본 현대 경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니sony’는 이들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5월 이부카 마사루(井深 大)와 함께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를 창업한 모리타 아키오(盛田 昭夫)는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이학도였다. 천부적인 세일즈맨으로서 모리타의 탁월한 국제적 감각은 라틴어로 ‘소리’를 뜻하는 sonus에 착안한 사명(社名) 소니sony를 탄생시켰고, 물리학도로서의 날카로운 지각(知覺)은 기술적 가능성을 알아보는데 향해 있었다. 그는 1948년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 Company) 벨 연구소에서 탄생한 트랜지스터(transistor)의 가능성을 단번에 간파했다(Morita, A., Reingold, E. M.,& Shimomura, M., 1992).
1953년, 뉴욕으로 건너간 모리타는 AT&T 자회사였던 Western Electric의 경영진과 협상을 통해 지식재산권(IP, Intellectual Property)에 관한 막대한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면서 트랜지스터 생산에 대한 권리를 취득한다. 2)
2) In 1953, paid Western Electric of the U.S. $25,000 for transistor technology licenses, fueling a consumer electronics revolution in Japan.(L.A. Times Archives)
그렇게 반도체 제조 산업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1960년대 일본은 초엔저(1달러=360엔) 상황과 저임금 노동력을 발판삼아 휴대용 계산기(샤프 전자, 당시 하야카와전자)와 트랜지스터 라디오(소니)를 전 세계적으로 히트시키며, 트랜지스터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게 된다. 이 산업의 발상지인 미국의 지위는 여전히 공고했지만, 일본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도시바, NEC(일본전기) 등 일본 기업들이 잇달아 DRAM(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나, 1980년대 초만 해도 美실리콘 밸리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의 부상(浮上) 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휴렛팩커드(HP)의 경영진이었던 리처드 앤더슨(Richard Anderson)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일본산 DRAM의 성능을 테스트한 결과, 미국 경쟁사들보다 월등히 높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최초 1,000시간 사용 중 오류 발생률에 있어 미국산 DRAM이 일본산에 비해 4.5 배~10배 이상 높았다. 3)
3) https://www.hpmemoryproject.org/timeline/art_fong/chuck_house_thoughts.htm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DRAM을 제일 처음 만든 나라(미국)에서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일본)로 넘어가고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미국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1980년대 미국 제조업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었다. 인플레이션과 씨름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연 22%에 달하는 금리 수준(Okimoto, D. I., Sugano, T., Weinstein, F. B., & Flaherty, M. T., 1984)을 낮출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미국은 더 이상 주기적인 대규모 설비 투자가 일어나는 제조업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은 정부의 각종 지원을 등에 업고 낮은 자본 조달 비용으로 전 세계 제조업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다. 미국 기업들은 철강, 자동차, 반도체에 이르는 주요 제조 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점차 일본 기업들에게 빼앗기게 된다. 미국은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의 공세에 고전하기는 했지만, 20세기 전반에 걸쳐 언제나 기술 혁신의 역동적인 발원지였다. 반면 일본 사회가 창출하는 혁신의 역량은 그들이 추구하고 있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견인할 만큼 충분히 크고 빠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일본은 미국의 IP를 노골적으로 탈취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미-일 간에는 IP 소송이 잦아졌고, FBI(美연방 수사국)의 함정 수사에 의한 ‘IBM 산업 스파이 사건’(1982년), ‘히타치-프랫앤휘트니 산업스파이 사건’(1982년)(Thomas C. Hayes. New York Times, June 25, 1982) 등 계획적인 악의적 IP 탈취 행위가 적발되는 사례도 늘어났다. 값싸고 질좋은 일본산 DRAM이 시장에서 많이 팔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로인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내셔널 세미컨덕터의 DRAM 부문을 비롯해 굴지의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정리해고에 내몰렸다(The New York Times, 1981. 5. 30.).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일본산 DRAM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고 불공정 행위에 관한 근절을 美정부에 요구했다.
1984년 통과된 ‘반도체 칩 보호법’4)은 기업들의 맹렬한 로비 활동의 결과였다.
4) H.R.5525 - Semiconductor Chip Protection Act of 1984
파탄난 미국 DRAM 반도체 제조 시장의 첨단 기술이 일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러나 해당 법에 의한 “반도체 칩(chip) 패터닝 마스크 저작권 보호” 조치만으로 일본의 DRAM 시장 점유율을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5년,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 인텔은 DRAM 사업에서 조용히 철수한다. 5)
5) Intel Withdraws from DRAM Business(https://timeline.intel.com/1985/farewell-to-dram)
1986년에는 일본이 칩 생산량에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DRAM 부문의 세계 점유율 80%를 차지한다(Baldwin, R. E., 1994). 1980년대 말에는 일본이 전 세계 리소그래피(lithography) 장비의 70%를 공급하는 등 산업 생태계 구축에 있어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소니가 개발한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기기인 ‘워크맨’이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면서 미국과 통상 마찰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당시 반도체 산업을 제패한 일본의 원동력은 가전제품으로 대표되는 전자산업이었다.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시작으로 계산기, TV, VCR(Video Cassette Recorder), 워크맨과 같은 일본산 전자기기가 전 세계로 수출됐고, 여기에 탑재되는 반도체 생산량이 급증하는 메커니즘이 작4) H.R.5525 - Semiconductor Chip Protection Act of 1984 5) Intel Withdraws from DRAM Business(https://timeline.intel.com/1985/farewell-to-dram) 24 KISDI AI Outlook(2024년 Vol. 18) 동했다.
결국 고품질의 저가전략을 앞세운 ‘메이드 인 재팬’ 앞에서 미국산 가전제품은 경쟁력을 잃어갔고, 그에 따라 일본 기업에 반도체 점유율을 빼앗기는 구도였던 것이었다(Encarnation, D. J., 1993). 1987년 미국은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하도록 일본을 압박하며 승부수를 띄운다(Palca, J., 1987). 이 협정은 일본산 DRAM의 대미 수출량을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일본의 값싸고 질좋은 반도체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해당 협정으로 인해 미국내 일본산 반도체 물량은 줄었지만 DRAM의 가격은 오히려 치솟았다. 결과적으로 일본 기업들은 경영상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1988년에는 일본이 세계 반도체 생산액의 50%를 넘어설 정도로 성장한다(Irwin, D. A., 1996). 그야말로 ‘히노마루(일본) 반도체’ 산업의 황금기였다. 요시다의 전략은 옳았다. 자의 반 타의 반 군사지출을 GDP의 1% 이하로 제한한 반대급부로써 민간 기업에 풍부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었고, 이는 일본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된다. 일본산 반도체를 겨냥한 미국의 연이은 제재와 견제가 무력화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일본은 저물어가는 미국의 시대와 뒤이을 ‘팍스 재패니카’의 앞날을 고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이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의 안보 위협 제거를 위한 ‘미-일 조약’은 다시 미국을 겨누는 심각한 안보 문제로 다가오고 있었고, 이들이 애정을 쏟아온 일본내 지미파(知美派) 집단은 도발적 국가주의에 물들어 버렸다. 일본 반도체 몰락의 서막이었다.
2. 일본 반도체의 황혼기: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냉전 초기 펜타곤(The Pentagon)의 지상 최대 임무는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로부터 미국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요격 미사일 기술 향상과 조기경보 시스템 기술 발전에 미국의 과학기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었다. 핵무기를 탑재한 ICBM 공격은 미국의 절멸과 동의어였고, 펜타곤은 이에 대한 군사태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대안을 연구해야만 했다. 이 문제가 가진 가장 큰 비극이자 아이러니 중 하나는 한 발의 ICBM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당시 미군의 탄도탄 요격 미사일인 나이키제우스가 “표적(ICBM)”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Burrows, W. E., 1983). 문제는 ICBM의 숫자였다.
나이키제우스의 결정적인 한계는 소련과의 총력전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동시 다발적 표적 공격’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Jacobsen, A., 2015). 반도체는 문제 해결의 핵심이었다.
다만 미국은 더 이상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닐 뿐이었다.
모리타(소니의 창업자)와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가 쓴 (盛田昭夫&石原慎太郎, 1989)은 ICBM 방어에 관한 미국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짚어냈다.
다핵탄두화된 ICBM인 MARV(MAneuverable Reentry Vehicle)를 요격하려고 하면, 해당 미사일의 탄두는 8~9개로 쪼개지게 되는데, 이 중 몇 발은 요격 미사일을 교묘하게 유도하면서 마지막에 격추되는 시나리오로 움직인다.
핵무기를 탑재한 나머지 탄두는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마지막에 정찰위성으로 정확하게 포착된 목표물을 타격하는데, 소련 ICBM 의 제1 목표물은 미국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 기지의 보복용 ICBM 격납고 바로 위.
격납고는 지하 깊이 50~60미터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 방벽 아래에 있는 견고한 요새로, 바로 위에서 정확하게 수직으로 타격하지 않는 한 파괴될 수 없다.
당시 소련의 기술로는 낙하 지점의 오차가 60미터, 미국은 15미터였다.
이 오차를 제로(zero)에 수렴하도록 하는 노력의 성공여부는 펜타곤이 전력을 쏟는 컴퓨터 성능의 발전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능 향상의 핵심은 반도체 소자(칩)였다. 이시하라는 일본산 반도체가 ICBM의 정확도를 보장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이 만약 반도체를 소련에 독점 공급할 경우 그것만으로도 미-소 군사력 균형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상황이라고 언급하며, 결국 일본이 기술(반도체)을 무기로 미국과 소련 군사력의 심장부를 움켜쥐고 있으므로 이제 일본의 대외전략 기조를 2등 국가에서 패권국(Japan as No.1)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에 반도체가 군사적 균형을 형성하고 기술의 미래를 특징지을 것이라고 예언한 이시하라의 생각은 틀림없이 옳았다. 그러나 반도체가 계속 일본산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커다란 착각이었다. 만약 그가 이같은 위대한 전략을 진지하게 실행하려 했다면, 더욱 은밀히 움직였어야 했다. 일본은 이미 1987년, 공산권에 대한 금수품 판매로 적발된 ‘도시바 기계 코콤(COCOM) 위반 사건’(Wrubel, W. A., 1989)에 연루되면서 냉전 시대 워싱턴에 만연한 편집증적 안보관을 가동하는데 최적화 되어 있는 미국의 정부 시스템을 자극해 왔다. 여기에 더해 일본 그리고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제국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것 같은 극우집단의 뒤틀린 세계관이 철에 슨 붉은 녹처럼 괴기스럽게 번져가고 있었다(Dower, J. W., 2000). 일본을 향한 미국의 분노는 정당했다. ‘론-야스 시대’는 오늘날까지도 미-일 밀월관계의 상징을 의미할 만큼 레이건 대통령(재임 기간 1981. 1.~1989. 1.)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을 불침(不沈)의 항모로 칭하면서 26 KISDI AI Outlook(2024년 Vol. 18) 까지 미국의 비위를 맞춰주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 康弘) 총리(재임기간 1982. 11. 27.~1987. 11. 6.)의 공이 컸다. 그러나 경제안보와 관련된 국가적 사안에 정상 간의 개인적 친분이 끼어들 여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1980년대 미국은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흑자를 누리며 제2의 경제대국으로 등장해 미-일간의 무역마찰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일본이 저지르는 IP 탈취를 위한 스파이 사건과 코콤 위반과 같은 이적행위는 미-일 관계에 상당한 긴장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가장 큰 문제는 반도체였다. 펜타곤은 일본산 반도체의 독점적 지위를 냉전시대 미국을 겨냥한 안보의 위협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 반도체 기업이 불공정한 무역의 한 형태인 ‘덤핑(dumping)’을 통해 미국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비판(Irwin, D. A., 1996)했지만, 사실 문제의 본질은 다른곳을 향해가고 있었다. 1987년, 마침내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역 제재 수단인 슈퍼 301조(통상법 301조)가 발동됐다. 그래도 일본은 끄떡없었다. 그러나 “전자 왕국” 일본열도를 옥죄는 미국의 포위망은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일본 반도체 산업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백악관을 비롯한 펜타곤, 의회, 실리콘 밸리 업계의 혼연일체가 된 극일(克日) 노력은 전자산업의 굴곡진 변천사와 결합되면서 일본 반도체 산업을 고사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1991년 새로운 협정에서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의 점유율을 기존 10%에서 20%까지 끌어올린다’는 엄격한 조항이 포함된다. 반도체 산업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흥망성쇠를 바탕으로 하는 역동적인 서사를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오늘날을 이해하고 앞날을 예측해볼 수 있다. 1980년대 일본산 반도체, 그중에서도 DRAM의 수요를 견인한 전방산업은 컴퓨터였다. 1970년대 IBM의 ‘메인프레임’으로 통용되는 대형 범용 컴퓨터는 복잡한 연산, 대용량 저장 및 통계처리 등을 위한 목적으로 민간과 공공부문에 잇따라 도입되었다(Campbell-Kelly et. al., 2023). ‘메인프레임’은 도입주기가 매우 긴 편에 속하는 고가의 전산장비로, 제조사들은 DRAM 부품의 장기보증을 선호했다. NTT(일본전신전화)와 같은 주요고객의 까다로운 품질 및 안전성 요구에 익숙한 도시바, 히타치, NEC 등의 일본 기업들이 생산하는 DRAM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뢰성으로 컴퓨터(메인프레임) 업계의 엄격한 납품 기준을 준수했고, 가격까지 저렴했다(Yunogami, T., 2006; Lo, M. A., 2012). 결과적으로 미국산 ‘메인프레임’에 일본산 DRAM이 속속 탑재되면서 ‘히노마루 반도체’ 점유율 확대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컴퓨터 업계는 한가지 커다란 패러다임 변화를 맞이한다.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 PC) 시대의 개막이었다. 히노마루 반도체,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에 관하여 27 PC산업은 반도체 기업의 새로운 전장(戰場)이었다. 포문은 20세기 기술 혁신의 한 축을 담당했던 IBM이 열었다. 1981년 출시된 IBM PC 5150이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개인용 컴퓨터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Ferguson, C. H., & Morris, C. R., 2002). 오늘날 전자산업 혁신의 중심에 있는 애플은 1984년 최초의 매킨토시를 출시했고, IT 업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될 마이크로소프트(MS)는 1985년에 컴퓨터용 운영체제(OS)를 개발한다. 결론적으로 1985년 DRAM에서 철수한 이후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칩, chip)에 전념한 인텔의 전략은 주효했다. 1992년 미국 컴팩(COMPAQ) 컴퓨터가 인텔 칩과 MS OS를 탑재한 PC를 IBM보다 훨씬 저렴하게 내놓으며, 이를 계기로 전 세계 PC 출하량은 급증했고 인텔의 칩 사업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1993년 출시한 ‘펜티엄’ 프로세서의 대성공으로 인텔은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한다. 뒤이어 1995년 MS가 윈도우 95를 출시하면서 PC가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PC의 대중화를 이끈 인텔은 반도체 제조업체로서의 지배적 지위를 완전히 되찾게 된다. PC산업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 미국은 과거 일본의 자본가 계급을 키워낸 것처럼 한국의 DRAM 산업에 의욕적이었던 삼성전자를 육성했다(Miller, C., 2022). 이 과정에서 인텔은 뒤늦게 반도체 제조업에 뛰어든 한국의 삼성전자에 그들의 기술과 라이선스를 아낌없이 제공했고, 이를 통해 한국 반도체 산업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간 일본 반도체 기업들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인텔은, 일본보다 훨씬 낮은 원가 구조를 가진 한국산 DRAM이 일본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미국 전자제품 기업들은 국산 부품 애용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6), 정확히는 일본산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6) “우리는 자랑스러운 미국산 제품을 사용합니다.(We proudly buy Americans.)”
인텔의 공략은 적중했다. DRAM의 주요 고객이 ‘메인프레임’에서 PC로 바뀌면서 요구사항도 바뀌었다. 교체 주기가 짧은 PC용 DRAM에 장기 성능 보증은 무의미했다. 대신에 개인용으로 확대 보급되는 컴퓨터에는 단위가 다른 엄청난 물량의 DRAM이 필요했고, 가격은 훨씬 더 저렴해야 했다.
삼성전자는 3~5년 보증의 PC용 DRAM을 낮은 생산비용으로 대량 생산해냈다. PC의 두뇌에 인텔 브랜드를 달고 있는 삼성전자의 DRAM이 속속 채택되면서 한국산 반도체 점유율은 급격하게 확대되었다(Lo, M. A., 2012). 인텔의 부흥과 삼성전자의 부상은 일본산 반도체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본격적으로 후퇴시켰다. 일본 기업들도 PC 시장의 성장과 DRAM 스펙의 변화, 한국산 DRAM 점유율 확대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계속해서 25년이나 보증 가능한 과잉품질의 DRAM을 찍어냈고, 이마저도 플라자합의로 인해 원가 경쟁력을 상실해 버렸다.
한국은 그들이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성공적인 반도체 산업을 일구어 내고 있었지만, 일본은 애써 현실을 외면했다.
줄어드는 일본산 반도체 수요에도 설비 투자는 계속됐고, 초과생산에 대한 우려의 경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7)
7) https://www.theglobalist.com/memory-loss-a-u-s-japanese-drama/ 히노마루 반도체,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에 관하여
일본은 그들 반도체 산업의 황금기를 누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모든 장점이 이제는 단점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듯 보였다. 그러는 사이 1996년에 이르러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의 점유율은 20%에 도달했고, 이에 따라 미-일 반도체 협정은 실효(失效)되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은 기난긴 황혼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성공한 기업은 저마다의 이유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지만, 추락하는 기업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하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몰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일본 기업들은 합종연횡을 통한 구조조정에서 활로를 찾으려 필사적이었다. 1999년 히타치와 NEC가 DRAM 사업 부문을 분리, 통합하여 엘피다 메모리를 설립했다. 2001년 NEC와 도시바가 범용 DRAM 사업에서 철수했고, 2002년에는 NEC가 반도체 사업 부문을 분사하여 NEC 일렉트로닉스를 설립, 2003년 히타치와 미쓰비시전기의 일부 사업부문이 통합되어 르네사스테크놀로지가 등장했다(小柴満信, 2024). 그렇게 일본에서 반도체는 가장 확실한 사양산업이 되어갔다. 일본 정부는 침몰을 재촉했다. 1976년에 탄생한 ‘초LSI 기술연구조합’이 이끌었던 일본 반도체 호황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수많은 국책 연구기관과 이를 통한 국가 프로젝트를 출범시켰고, 이후 이들이 설정한 자전주의식 개발 목표가 사막의 신기루처럼 멀어져 가는 것에 무감각해졌다. 반도체산업연구소(SIRIJ, 1994년), 반도체공학연구센터(STARC, 1995년), 초첨단전자기술개발기구(ASET, 1996년), 반도체첨단테크놀로지(Selete, 1996년) 등 비슷한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출몰한 국가연구소들은 “필요한 기술개발” 대신에 “합의된 연구개발”에 매달렸다. 2001년, Selete에서 추진했던 ‘아스카’ 프로젝트의 첨단 공정 노드 개발 목표는 65nm 로, 13개 참여 회사가 요구한 2가지 수준(130nm와 45nm)의 평균치로 도출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다(湯之上隆, 2023). 2002년에는 국책 파운드리인 아스플라(ASPLA)가 설립됐지만, 이 역시 곧 경영난에 봉착해 2005년에 자취를 감춘다. 일본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종합반도체기업(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중심의 반도체 산업 구조는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설계부터 제조까지 한 번에 이루어지는 ‘수직통합형’ 구조에서, 설계와 제조가 분리된 ‘수평분업형’으로 전환되는 가운데,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은 1987년 대만의 모리스 창이 세계 최초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전문기업)인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반도체 설계만을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fabless)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한다. 퀄컴, 브로드컴, 엔비디아와 같이 제조 공장이 없는 기업들에게 tsmc는 최적의 생산시설이 되어주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휴대전화의 선풍적 인기에 힘입어 반도체 수요가 증가했고, 각 제조사의 주문을 일괄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파운드리의 가치는 날개를 단 듯 높아져만 갔다. 모리스 창과 비슷한 이력의 소유자인 리처드 창은 2000 년 대만에서의 반도체 사업을 접고 중국으로 건너가 파운드리 업체 SMIC(Semiconductor Manufacturing International Corporation)를 설립했다. 삼성전자도 2005년 IBM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미국에서도 2009년 AMD(Advanced Micro Devices, Inc.)의 제조부문을 분리 매각하여 설립된 파운드리 전문업체인 글로벌파운드리스(Global Foundries Inc.)가 등장한다. 2007년 애플이 출시한 최초의 아이폰을 시작으로 스마트폰에 반도체의 일종인 AP(Application Processor)가 탑재되면서 파운드리 사업의 성장세는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갔다. 연간 10억 대 이상 팔리는 스마트폰의 위력은 대단했다. 인텔이 거절한 애플의 일감을 tsmc가 수주했고, 이를 계기로 대만 반도체 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제조 설비와 부품․ 소재에 관한 대만 내 업체의 상대적 열위는 일본에게 불행한 기회였다. 대만을 중심으로 구축된 반도체 제조 공급망에서 일본에게 주어진 역할은 제한적이었고, 일본 기업은 여기에 만족해버렸다. 일본의 장비와 재료업체들은 이 공급망에 편입되어 살아남았다.
반면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체는 한 점 회생의 기미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무의미한 업계 재편은 계속됐다. 2008년 후지쯔가 반도체 사업을 분사하여 후지쯔 반도체를 설립했고, 2010년에는 NEC일렉트로닉스와 르네사스 테크놀로지가 합병하여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가 탄생했다. 하지만 모회사가 수익성이 떨어지는 반도체 부문을 떼어내고 싶었을 뿐 지속적인 투자는 요원했기에 상황은 호전될 수 없었다. 2012년 엘피다 메모리가 파산하면서 일본에서의 반도체 사업은 확실한 부도 보증수표로 낙인 찍혔다.
돌이켜보면 일본 반도체 산업의 역사는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들의 실패는 명백히 하강하는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한 선택의 연속이었기에 찬란했다. 일본은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UMC(United Microelectronics Corporation), tsmc와 같은 동아시아의 신흥 반도체 제조 세력을 과소평가했고, 시대에 뒤떨어진 국가 프로젝트에 매달렸으며, 팹리스와 파운드리로 분업화되는 산업 구조 변화의 흐름을 놓쳤다.
인텔을 철저하게 모방한 삼성전자의 기술 로드맵 전략은 ‘치킨게임’으로 알려진 가격 전략과 결합하면서 극적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동안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고비용 구조로 효율성을 잃어갔다.
정부주도의 연구조합이 이끌었던 영광의 시대가 재현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진행된 국책사업들은, 일본에서 반도체가 가장 확실한 사양산업이 되었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줄 뿐이었다. 종합전자기업에 의해 굳어버린 수직계열화 체제는 분업화된 효율화를 강조하는 반도체 산업 트렌드를 이해했음에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반면 일본의 성공은 너무나도 불확실했다. 그들 반도체 산업의 영광은 메모리에 국한된 반쪽짜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국수주의(國粹主義)적 미사여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품었던 반도체를 무기로한 패권에의 열망은 미국의 수요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망각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달성한 성과는 그들의 지정학적 야망을 뒷받침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였고, 나머지 반쪽을 차지한 미국이 새로운 혁신의 돌파구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일본은 뒤쳐져버렸다. 그사이에 일본이 성취한 절반의 영광은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온전히 나누어줘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확실한 희망도 감지됐으나, 이미 일본 반도체 산업은 기술의 미래를 포용할 여유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도시바의 마쓰오카 후지오(舛岡 富士雄)와 같은 일본 반도체 업계의 “이름없는 영웅(unsung hero)” 8)은 저장매체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지만, 일본 사회는 이 발명자를 홀대했고, 해당 기술을 너무나도 쉽게 삼성전자에 내어주었다.
8) https://www.forbes.com/global/2002/0624/030.html
결국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광이 남긴 유산이란 오래된 가능성과 익숙한 희망으로 뒤엉킨 불확실한 성공에 다름 아니었다.
3. 히노마루 반도체의 새로운 도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2022년 2월 24일 새벽, 러시아의 포병대와 미사일 부대가 전면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했고, 러시아 기갑부대와 공수부대가 벨라루스, 돈바스, 크림반도 세방향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한 진격을 시도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세계가 경악했고, 카스미가세키(霞ヶ関)에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일의 동아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될 수도 있다”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발언(Foreign Policy, Feburary 6, 2023)은 일본이 마주한 지정학적 위기의 난이도를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후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9) 유치에 가려져 있었던 일본 국책 반도체 제조업체 ‘라피더스(Rapidus)’의 설립 계획이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9) 일본 쿠마모토 소재의 tsmc 산하 파운드리 기업
오랜 기다림 끝에 일본이 다시 지정학 무대로 복귀했음을알리는 순간이었다.
2019년 여름, 히가시는 ‘올버니 나노테크 단지’의 조성을 함께한 미국 IBM 기술부문의 거물 켈리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IBM이 개발한 2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제조 기술을 일본이 양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Nikkei Asia, August 2, 2024). 타당성 검증은 훗날 라피더스 사장 자리에 오른 히타치제작소 생산기술 담당 출신 고이케 아츠요시(小池 淳義)가 맡았다. 그가 2023년 9월 1일 라피더스 치토세 공장 기공식에서 힘주어 이야기한 “천년에 한번오는 기회”와 마주한 순간이었다. 히가시는 국가의 총력을 이 프로젝트에 쏟아야 한다고 직감했다. 이 일본 반도체 업계의 거인은 도요타 자동차, 덴소, 소니 그룹, 키오시아, NEC, NTT, 소프트뱅크, 미쯔비시UFJ은행과 같은 굵직한 대기업에 출자를 권유했다. 그렇게 모아진 8개사, 730억 원을 들고 아마리 아키라(甘利 明) 자민당 의원을 찾아갔다. 아마리는 즉각 ‘반도체 전략 추진 의원연맹’을 결성해 주었다. 여기에는 세키 요시히로(関 芳弘), 고바야시 타카유키(小林 鷹之), 야마기와 다이시로(山際 大志郎) 등 거물급 정치인들을 포함해 100 명이 넘는 의원들이 힘을 보탰다. 그간 일본 반도체 산업에 수혈된 엄청난 규모의 세금으로 인한 국민적 거부감과 정치적 피로감도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들은 행정부도 움직였다. 아라이 마사요시(荒井 勝喜) 국장, 노하라 사토시(野原 諭) 국장, 니시카와 카즈미(西川 和見) 실장 등 경제산업성 고위급 관료들이 전면에 나섰다. ‘0% 점유율’의 위기감을 조성한 “반도체 전략(半導体戦略)”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재무성을 설득해 20조 원의 보조금도 확보했다.
히가시는 일본 “Top 기술자 100인” 10)의 명단을 작성해 국회와 정부를 설득한다.
10) https://diamond.jp/articles/-/317280
더 이상 일본에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는 인력이 남아있지 않다는 반대를 그렇게 넘어섰다.
이 무렵 물밑에서 추진된 또 다른 국책 반도체 프로젝트인 JASM 유치는 라피더스 설립을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 앉혔다. tsmc 공장을 국내에 유치해 일본의 반도체 소재․ 장비, 응용 산업과의 밀착 협력을 강화하여 당장의 이익을 꾀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가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카스미가세키의 공기가 일시에 변화했다는 것을 눈치챌 만큼 노련했다. 그해 5월 IBM 임원인 다리오 길(Dario Gill)이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를 면담하도록 움직인다. 이 자리에는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사장과 마크 리우 tsmc 회장, 팻 겔싱어(Pat Gelsinger) 인텔 CEO, 산자이 메로트라(Sanjay Mehrotra) 마이크론테크놀로지 CEO, 세계 1위 반도체 장비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의 프라부 라자(Prabu Raja) 반도체부문 CEO, 벨기에 반도체 연구개발 기관인 imec의 막스 밀고리(Max Mirgoli) 부사장 등 7명이 함께했다.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철저하게 연출된 장면이었다. 일본의 독자적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 확보가 필요하다는 데에 극적인 민-관 합의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8월, 마침내 국책 파운드리 라피더스의 설립이 승인된다. 회사 설립 직후부터 라피더스는 IBM의 연구 거점이 있는 뉴욕주 ‘올버니 나노테크 단지’로 “Top 기술자 100인”을 포함한 수백 명 규모의 엔지니어를 파견해 IBM의 기술을 이전 받고 있다. 20여년 전 미국의 불확실성 한가운데 놓여진 히가시의 포석은 확실한 일본 우세로 대국의 중반부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국책 파운드리 라피더스의 설립은 일본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히가시가 가꿔온 일본 전자 산업의 미래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사명(社名)처럼 속도가 관건이었다. 설립 3년 후인 2025년 4월까지 2나노미터 공정 기술이 적용된 시제품 라인을 완성하고, 2027년 초에는 양산 체제에 돌입한다는 파격적인 사업화 전략 로드맵은 일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 일본 업체들의 기술 수준은 기껏해야 28나노미터 공정 정도로 파악된다. 이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tsmc조차도 이제 겨우 3나노미터 공정을 양산에 적용한 상황에서 일본이 갑자기 2나노미터 공정 수준의 기술로 도약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반도체의 지정학 시대에 일본이 도전도 해보지 않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성공시킬 것입니다.” 2023년 12월 SEMICON Japan 개막 기조연설에서 히가시 테츠로의 결의에 찬 음성이 장내를 뒤덮었다. 빈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라피더스를 포함한 일본 반도체 산업이 지불해야할 경제적 대가는 상상을 초월한다. 라피더스 치토세 공장 하나에만 30조 원에서 최대 50조 원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질 예정이며, 키오시아 키타카미(北上) NAND형 플래시메모리 공장에 약 10조 원, 쿠마모토 JASM 제1공장에만 10조 원 등 최대 100조 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 신설 투자가 계획돼 있다. 반도체 업계 전반에 살포되는 정부 보조금만도 JASM에 5조 원, 라피더스 3조 원을 비롯해 SUMCO에 7,500억 원 등 10조 원을 훌쩍 넘겼다. 알려진 금액만 이정도이다. 지역의 자체 보조금을 비롯해 인프라, 교육, 인적 자원 등 유무형의 지원을 합하면 일본 사회의 총력을 반도체 산업에 기울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언뜻 반도체 산업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 모양새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계산은 치밀했다. “일본의 ‘지정학적 반사이익’과 미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안보 이익’의 접점에서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차지할 것” 일본은 그들이 마주한 지정학적 위기(대만 해협의 유사시)를 타개하기 위한 답안으로써 어떠한 대가라도 지불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히노마루 반도체,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에 관하여 33
Ⅲ. 정책적 시사점
반도체 산업에 관한 오늘날 일본의 파격적인 행보는 옛 영광의 되새김질이 아닌, 새로운 도전으로 풀이된다. 한때 세계를 호령한 일본열도의 반도체 신화는 DRAM이라는 메모리 소자에 국한된 것으로, 지금의 2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제조 능력 확보와는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 DRAM 부문에서 철수한 이후 일본 반도체 산업은 로직 반도체 분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했으나, 재앙에 가까운 결과만을 낳은 채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 일본이 국가적 프로젝트로 생산해내려 하는 소자 또한 오래전 세계 시장 점유율 80%를 차지했었던 ‘더 정교한 DRAM’이 아니라, 최첨단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으로 불리는 로직 반도체다. 첨단 로직 반도체의 일본 내 생산량은 현재 0%. 무모한 도전이라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비판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밖에 없다. 10만여 개의 정밀한 부품과 도합 2킬로미터가 넘는 전선이 내장된 소형버스 크기의 최첨단 기계, 모델명 TWINSCAN NXE:3400C는 20년간 100억 유로(한화 약 15조 원)가 넘는 연구개발비가 투입된 반도체 제조 장비로, 대당 1억 6,000만 유로(한화 약 2,300억 원)를 호가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Ashton, J., 2023). 이 기기가 파장 13.5nm의 극자외선(EUV, Extreme Ultra Violet) 영역에 있는 빛을 생성해 13nm의 해상도로 300mm 실리콘 웨이퍼 한 장에 사람 머리카락 두께의 3만분의 1 정도인 선을 2,000만 개 인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1초, 시간당 170장 이상의 웨이퍼를 생산11)해내며, 그 정밀도는 흔히 “지구에서 화살을 쏘아 달에 놓인 사과를 맞추는 정도”로 묘사된다. ASML이 독점 공급하는 최첨단 노광장비 EUV 리소그래피 시스템은 2나노미터 로직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EUV 리소그래피 시스템 도입이 성공적인 첨단 반도체 양산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장비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제조업체의 막대한 인적자원 투입이 요구된다. tsmc는 2018년 EUV 장비를 도입한 이후 1년 간 100만 번이 넘는 시운전을 거치고 나서야 2019년 안정적인 양산 적용에 성공했다. 단순 계산으로만 따지면 하루 3,000번에 가까운 테스트 분량에 해당하며, 웨이퍼당 20초의 노광시간을 가정했을 때, 1년, 365일 하루 평균 약 18시간의 노동 투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산해볼 수 있다. 최소 투입 시간이 그렇다. 테스트 이후의 분석 과정과 조업일수 등을 고려하면, 노동강도는 훨씬 더 늘어난다. 비슷한 시기에 EUV 시스템을 도입한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DRAM 생산 라인을 빌려 대략 30만 번 정도의 테스트를 거친 뒤 양산에 적용한 결과, tsmc와의 현격한 수율(yeild) 차이를 보인 것11) https://www.asml.com/en/products/euv-lithography-systems/twinscan-nxe3400c 34 KISDI AI Outlook(2024년 Vol. 18) 으로 알려져 있다(湯之上隆, 2023). 인텔은 21년 EUV 장비를 도입했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양산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피더스는 2024년 말 이 장비를 도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유수의 첨단 반도체 제조 기업들에서조차 다루기 까다로운 난해한 장비를 라피더스가 양산을 공언한 시점인 2027년까지 대략 2년 남짓한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제어해 내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EUV 사례와 같은 공정 최적화 과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도체 제조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다. 공정 최적화는 양산단계의 수율 제고와 품질 향상에 직결되며, 전적으로 투입된 엔지니어의 질과 양에 비례한다. 이는 우수한 엔지니어의 확보가 라피더스의 성패를 좌우할 핵심 과제임을 시사하고 있다. 라피더스 사장 고이케는 향후 성공적인 사업 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 규모를 추산하여 “20년 계획”으로 정리해, 정부와 국회에 라피더스 설립에 관한 이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계획에 따르면, 2027년 양산 시점까지 라피더스가 확보해야할 고급 엔지니어의 수는 대략 500~600명 수준으로, 현재 확보한 “Top 기술자 100인”은 목표치에 턱없이 부족하다. 라피더스가 파운드리 사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한 회의적인 시각도 이들의 성공이 요원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반도체 위탁 생산을 전문적인 비즈니스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발주처에 해당하는 팹리스 고객의 주문 확보가 우선이다. tsmc의 경우 매년 애플로부터 신형 아이폰용 AP의 위탁 생산을 개당 100달러, 2억 개 수준의 규모로 의뢰 받으며, 내부적인 수익성 검토를 통해 협상에 의한 계약을 맺는 구조다(林 宏文, 2024). 라피더스의 2027년 ‘2나노 로직 반도체 양산’이라는 목표는 분명한 수요처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라피더스가 위탁받은 첨단 프로세서 주문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국내 첨단 반도체 제조 산업의 육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IBM이 제시한 ‘2나노미터의 세계’는 일본 제조기업들에게 청사진(blue print) 그 자체였다. 이론상으로 현재 업계 주력인 ‘7나노미터 기술’보다 성능이 45% 증가하고, 소비전력은 75% 감소한다(小柴満信, 2024). 따라서 이 기술의 적용은 레벨 5에 해당하는 완전자율주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또한 2나노미터 수준부터는 양자 컴퓨팅의 세계와도 물리적으로 연결된다. 차원이 다른 연산 능력은 제조업은 물론 바이오를 비롯한 차세대 산업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은 일본이 미래 전자산업의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순한 호승심이나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이 산업을 다루고 있지는 않았다. 히노마루 반도체,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에 관하여 35 카스미가세키의 전략가인 야치 쇼타로(谷內 正太郞)가 입안한 인도태평양 구상은 한반도의 일제 피식민지 역사에 동정적이었던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김동현, 2024). 미국은 일본을 다시 한번 지정학적 대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일본은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치토세부터 쿠마모토까지 신규 설비투자가 이루어지는 반도체 제조 시설을 지도 위에 놓고 보면, 일본열도 전역에 배치된 미군 기지의 위치가 연상된다. 일본 반도체 산업의 지정학적 반사이익은 대만 해협의 위기를 겹쳐놓았을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들은 대만 해협 유사시, 약 6만여 명의 tsmc 엔지니어를 난민으로 받아들여 대만 본토 설비와 정확히 같은 플랫폼에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해내도록 계산했을 것이다. tsmc의 쿠마모토 공장인 JASM에서 벌어지는 일본과 대만의 기술 협력은 라피더스가 앞으로 확보해야 할 핵심 엔지니어 명단을 작성하기에 최적의 무대가 될 것이다.
이미 일본은 대만(tsmc, UMC 등), 미국(마이크론, 인텔, IBM, 엔비디아 등), 한국(삼성전자 등) 등 각지로 흩어져버린 자국의 반도체 엔지니어들을 다시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브레인 게임’을 시작했다.
아마도 IBM은 기술이전 대상으로 일본보다는 대만의 tsmc나 한국의 삼성전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었을 것이다. tsmc는 이 분야의 독보적인 양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IBM과의 기술제휴로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IBM의 선택은 일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분명 중국을 의식한 미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일본의 지정학적 잠재력은 히노마루 반도체 부흥 전략에 백악관의 의지가 투사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와 관련된 일본의 거침없는 광폭 행보는 워싱턴의 암묵적 동의와 명시적 의도가 전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 반도체 산업을 향해 쏟아내던 미국의 정당한 분노는 언제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었다. 일본은 미국인들의 기억에서 ‘진주만’을 도려냈듯이, 1980년대 자신들로부터 비롯된 ‘반도체의 악몽’도 말끔히 지워냈다.
Ⅳ. 결 론
원하지 않았던 개국과 쇄국의 역사를 반복한 일본은 그들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도 비슷한 자취를 밟아왔다.
이는 미국으로부터 시작되고 종결된 전쟁 같은 서사이기도 했다. 남아메리카 동태평양 에콰도르령 제도 ‘갈라파고스’는, 기술의 미래와 표준에 관한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된 일본의 IT 산업을 묘사하기에 꼭 알맞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가 잃어버린 전자산업의 경쟁력을 빗댄 ‘갈라파고스화 된 일본’이란 자조는, 지정학 36 KISDI AI Outlook(2024년 Vol. 18) 적 향수를 불러 일으킨 ‘히노마루 반도체’의 쇠퇴와 함께 그들로 하여금 이 산업에 재차 빗장을 걸어 잠그고 동아시아 한 귀퉁이로 물러나 있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히가시 테츠로와 같이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자국 전자산업의 미래를 열성적으로 가꿔온 이들이 공존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반도체 경제학의 낙제생이었던 일본은 반도체의 지정학에서 분명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21세기에 전개되고 있는 미-중 전략경쟁은 지정학 게임에 익숙한 일본을 이 무대로 복귀시키는 근사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20세기 내내 벌어진 이 게임에서 최종적으로 미국에 ‘불침(不沈)의 항모’를 자처하며 살아남게 된 일본의 처지는, 21세기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팹(반도체 제조 공장)’으로서 미래 전자 산업의 패권을 재설계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기술은 ‘갈라파고스화’ 되었을지언정 산업과 국제적 네트워크는 이들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도로 연결되고 개방되어 있었다. IBM(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미국), tsmc(대만), imec(벨기에, 다국적), ASML(네덜란드)과 같은 지정학적 우군들의 지지와 공감을 연출해내며 추진된 라피더스 설립과 JASM 유치는 아직 일본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국제사회에 증명해 내었다. 일본은 어느새 지정학적 대안이 아닌 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1세기 반도체 산업의 ‘갈라파고스화’는 일본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한 때 그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부신 성과를 자랑했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반도체 과목 시험의 주제가 경제학에서 지정학으로 바뀌자 한국은 문제해결 능력을 잃어버린 열등생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tsmc가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업(業)의 본질을 ‘반도체 외교를 통한 국가 수호’로 정립해 나가는 동안 우리는 ‘치킨게임’으로 푼돈 챙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기에만 바쁜 나머지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우군을 키워내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지정학적 갈증에 목말랐던 일본이 반도체를 재료삼아 국제사회의 역학 구도를 요리하는 그들 본연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철지난 “안미경중(安美經中)” 의 논리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짐을 함께 나눠지고(burden sharing) 있는 일본을 옆에 두고도, 국가 외교의 전력(全力)을 미국이란 한 나라에 쏟아붓는 대만을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초격차 기술 개발만이 이 산업의 미래를 특징지을 것이라는 협소한 상상력으로 스스로의 취약성을 키워갔다. 하지만 그렇게 설정된 기술적 과제는 어느 기업이나 한 연구자 개인의 성과였을 뿐, 국가적 프로젝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동아시아 변방에 홀로 고립돼 가고 있다. 히노마루 반도체, 찬란한 실패와 불확실한 성공에 관하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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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DI AI Outlook(2024년 Vol.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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