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장 도강 총 전적위원회는 국민당군이 창장 남안에 강을 따라 펼친 4천리에 이르는 장사진(長蛇陣 장사진)을 공파(攻破)하기 위해 뱀의 허리를 자르는 전략을 짰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돕지 못하도록 목을 끼우고 꼬리를 공격하면서 주력을 집중해 진(陣)의 한복판을 치고 들어가도록 했다.
4월 20일 난징 정부가 평화담판 서명을 거부함에 따라 중앙 군사위원회는 총 전적위원회에 도강명령을 하달했다.
총 전적위원회는 이날 밤 7시 30분에 모든 부대에 일제히 공격명령을 내렸다.
국공간의 최후의 대결전인 창장전역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됐다.
총 전적위원회는 먼저 돌격 집단군이 구이츠(貴池 귀지)에서 우후(蕪湖 무호)에 이르는 중간을 돌파해 국민당군의 창장방어선의 허리를 절단하도록 지시했다.
강안의 공산당군 중 집단군(중군)의 대포가 불을 뿜어댔다.
포탄이 비오듯 남안과 강상(江上)의 국민당군 진영에 쏟아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귀를 찢고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창장을 뒤덮었다.
창장 방어선의 허리의 허점을 공격당한 국민당군이 놀라 허둥대자 총 전적위원회는 동 집단군과 서 집단군에게 21일 황혼 무렵 동시에 동쪽 장인(江陰 강음)에서 서쪽 마당(馬當)까지 약 600킬로미터에 이르는 강상의 적을 집중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도강 공격부대들은 4야전군단의 협동작전과 강대한 대포 화력의 엄호를 받으며 1만 척의 목선과 배를 타고 일제히 진격했다.
"창장을 건너 전 중국을 해방시키자."
새카맣게 강상(江上)을 메운 목선과 돛을 올린 배에 탄 공산당군들이 구호를 외치며 산을 밀어내고 바다를 뒤집어 업는 기세로 남쪽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강상의 국민당군의 방어선을 뚫어 승기를 잡은 서 집단군은 국민당군의 깊숙한 방어선까지 파고들었다.
동 집단군 포병은 창장 동쪽을 봉쇄해 국민당군 함대가 달아나는 퇴로를 끊었다.
또 다른 부대는 창저우(常州 상주), 단양(丹陽) 등지의 성을 공격해 '징후(京滬 경호; 난징-상하이)' 철로 교통선을 절단했다.
23일 류보청, 장지춘, 리다가 지휘하는 서 집단군은 구이츠, 펑쩌(豊澤 풍택) 등지를 점령했다.
주력부대는 '저장(浙江 절강)-장시(江西 강서)'선상으로 돌진해 도주하는 국민당군을 섬멸했다.
아울러 탕언보와 바이충시 집단군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수위와 장전이 지휘하는 동 집단군은 단양, 창저우, 전장(鎭江 진강), 푸커우(浦口 포구), 우시(無錫 무석) 등지의 성을 점령했다.
35군단 대 부대들이 23일 한 밤중에 기세 드높게 이장먼(挹江門 읍강문)을 통해 난징시내에 들어갔을 때 국민당군은 이미 모두 달아나 난징은 텅 빈 공성(空城 공성)이었다.
공산당군의 입성 하루 전인 22일 정오 리중런은 항저우에서 장제스와 상의한 뒤 난징을 포기하기로 결정해 국민당군은 철수했다.
리중런은 이날 밤 항저우에서 난징으로 돌아온 뒤 23일 새벽 전용기를 타고 파괴된 난징 성 상공을 두 바퀴 돈 뒤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이어 참모총장 구주통, 작전청장 차이원즈 등이 비행기를 타고 항저우로 달아났다.
오전 10시 공군총사령관 저우즈로우(周至柔 주지유)가 마지막으로 난징을 탈출했다.
24일 새벽 인민해방군 8병단 35군단 104사단 312연대 사단 참모장 장샤오안은 부대를 이끌고
홍기를 높이 든 채 총통부로 진입해 문루(門樓)에 올라가 국민당 정부의 청천백일기를 끌어내리고 홍기(紅旗)를 달았다. (주석 294)
294) 揭秘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베이핑 서쪽 교외 샹산(香山 향산)의 쐉칭(雙淸 쌍청)별장에 임시 거주하고 있던 마오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 인민일보)가 4월 23일 호외로 발행한 1면 머리기사 통단제목 '인민해방군 난징점령' 기사를 보고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마오는 먼저 덩샤오핑과 류보청에게 축하전보를 써 보낸 뒤 분출하는 시흥(詩興)을 가다듬어
'7율(七律)-인민해방군 난징점령' 시를 일필휘지했다.
"종산(난징의 주산)의 비바람(시국) 변화무쌍하다, 鐘山風雨起蒼黃
백만 정예 창장을 건넜네. 百萬雄師過大江
제왕의 땅 오늘 옛날이 다 했구나, 虎踞龍盤今勝昔
하늘과 땅이 뒤집혀 의기 드높다. 天翻地覆慨而慷
마땅히 남은 힘 궁지몰린 적 추격해, 宜將剩勇追窮寇
초패왕을 배워 따라 해서는 안 되리. 不可沽名學覇王
하늘이 (사람마냥) 정이 있다면 늙고, 天若有情天亦老
세상사 상전벽해 바른 이치 일러라. 人間正道是滄桑"
마오는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을 함락시켜 꿈에 그리던 통일중국을 눈앞에 두게 됐다.
마오는 이 시에서 영용하게 싸운 인민해방군의 용맹 분투정신을 기리고, 난징 공격을 앞두고 결렬된 국민당 정부 총통대리 리중런과의 평화담판에서 고민을 했던 일단의 감회를 적었다.
국민당 정부가 제시한 창장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劃江而治 획강이치) 방식이 평화담판의 쟁점이었다.
중국의 첫 통일제국, 진나라를 멸한 뒤 초나라의 항우는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참모인 범증의 말을 듣지 않고 서초패왕으로 만족했다.
기회를 놓친 항우는 그 뒤 한의 유방과 천하를 두고 각축을 벌이다 유방을 광무산에 고립시켜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또다시 성고(成皐), 영양을 경계로 한 유방 쪽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였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여 휴전협정을 깨고 항우를 공격해 해하성(垓下城) 최후 일전의 승리로 천하를 차지하면서 통일제국 을 열었다.
이런 고사를 알고 있던 마오는 패왕에 만족한 항우의 전철, 여기서는 창장을 경계로 한 두 중국인 '남북조'의 분할통치를 거부하고 창장을 도강해 난징을 함락시켜 패왕의 교훈을 되새김하고 있다 하겠다.
쉽게 말하면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사는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의 풍운조화로 세상이 주기적으로 바뀌면서 진화하고 있다.
'홍비(紅匪)'로 몰렸던 공산당이 난징을 점령하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몰고 와 중국통일을 앞두고 있는 마오의 강개한 마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간 저장성 펑화(奉化 봉화)현 시커우(溪口 계구)진 고향집에 들어박혀 있던 장제스는 가족들을 타이완(臺灣 대만)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풀이 죽어 맥 빠진 목소리로 아들 장징궈(蔣經國 장경국)를 불렀다. (주석 295)
295) 揭秘 蔣介石爲啥不死守南京 時政頻道 新華網 '開國英雄的紅色往事' 梅世雄 黃慶華 著
新華出版社
"배를 준비했으니 우리 떠나자!"
장징궈는 이때를 훗날 "아버지의 마음은 울적하고 침통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도강전역 총 전적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덩샤오핑과 천이는 4월 27일 안후이성 하페이(合肥 합비) 야오강(瑤崗 요강)촌에서 총통부로 입성했다.
29일에는 총 전적위원이자 난징시 군사관제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된 류보청도 총통부에 도착해 덩샤오핑, 천이와 합류해 총통부를 둘러봤다.
이들은 장제스의 총통 집무실에 들어갔다. 집무실에는 커다란 탁자가 창가에 비스듬히 놓여있고 벽에는 거울 상자에 끼워 넣은 장제스의 큰 사진이 걸려있었다.
1943년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때 군복정장을 한 사진이었다.
탁자위에는 탁상시계, 붓꽂이, 붓, 문진 등이 놓여있고, '쩡원정(曾文正 증문정)전집'도 보였다.
장제스는 청나라 말기 중신인 쩡궈판(曾國藩 증국번)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살펴보던 덩샤오핑은 짙은 쓰촨 목소리로
"장 위원장, 우리들이 왔소이다. 우리들을 오랫동안 잡으려고 했는데 오늘 우리들이 제 발로 들어왔소이다. 또 당신이 어떤 허풍을 치나 보겠소이다"라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류보청은 탁상용 달력을 가리키며
"여기 봐, 장 선생의 달력 날자가 23일이네. 떠난 지 얼마 안 되는구만"이라고 했다.
천이는 장제스 집무책상 앞에 있는 가죽의자에 앉아 마오의 베이핑 샹산 쐉칭 집무실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마오에게
"주석, 저 천이입니다. 제가 지금 장 총통의 의자에 앉아 주석께 보고드린다"며 난징 해방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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