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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민족’에서 ‘인민’으로 가는 길 : 고정옥 조선민요연구의 보편과 특수/임경화.인하대

<차 례>

1. ‘민요’의 근대, ‘민요’의 해방

2. 식민지기 민요 담론과 朝鮮民謠硏 究의 시선

3. 해방기 ‘민요’ 담론과 朝鮮民謠硏 究의 위치

4. 민요에서 인민 창작으로: 월북 후의 고정옥

5. 맺음말

<국문요약>

본고는 해방기에 그때까지의 민요 연구를 집 대성한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을 분석하여, 그의 민요 담론이 어떻게 당시 새로운 민족 정 체성 형성에 긴밀하게 관여하며 구축되어 갔는 지를 밝혔다. 그것은 서구(일본)의 국민문화운 동을 선례로 삼아 민중의 노래인 민요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학의 창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또한 문명이나 세계성, 보편성에 뒷받 침되어 있던 문학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문화나 고유성, 일관성과 결부된 민요의 가치를 발견함 으로써, 조선문학 미발달이라는 특수성을 극복 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기 남한에서는 과거의 민요의 통 시적 가치가 중시되었고, 그것을 새로운 민족문 화 창출로 이어가려고 했던 고정옥의 시도는, 소 련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민요 현대 화 운동이 참조되었던 북한에서 실현되었다. 이 때 고정옥은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화 창출을 체 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민요뿐만 아니라 인 민의 집단적 언어 창작물 전반을 의미하는 인민 창작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인민을 지배 권력으로 파악함으로써 당과 지도 자와 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내셔널리즘의 구 축과 연동되고 만다. 이때 인민 창작과 문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성 속에서 통합되어 발전해 가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 문학의 특수성은 이러한 세계문학의 보편적 발 전 법칙 속으로 회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핵심어: 고정옥, 朝鮮民謠硏究, 민요, 인민 창작, 민족문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1. ‘민요’의 근대, ‘민요’의 해방

‘Volkslied’의 번역어인 ‘민요’라는 말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본래 Volk 자체가 민족과 민중을 동시에 가리키는 이중성을 내포하는 것에서 기인하지만, 타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노래’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과, 문명의 상징인 문자를 향유해온 특권계층에 대 해, 구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피지배 계층으로서의 ‘민중의 노래’를 가리키는 용법이 그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의 번역어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 기 시작한 이 말1)은, 당초부터 지방성이나 계급성, 문화적 차이가 민족으로 수렴되는 ‘민족 의 노래=민중의 노래’로 일원적으로 파악되었다. 거기에는 조선이 일본제국에 의해 마련 된 종족적 분업 체계 속에서 일본에 농업생산물을 공급하고 일본의 공산품을 소비하는 농 업후배지로 배치되는 식민지적 근대의 상황 아래, 민족을 일괄적으로 재상상하는 과정에서 농촌지역만이 조선의 종족적인 공간이 되었고, 농민만이 민중의 근간이자 민족의 정체성과 특권적으로 맺어진 자연적 집단으로서 1920년대 이후에 담론적 실천으로 구성되었던 것과 관계가 있다.2) 또한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높은 문맹률도 이러한 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쳤 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조선지배정책이 문화정치로 전환되고 실력양성론에 기초한 민족 교육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을 당시의 신문에는 “男子中에서라도 大部分을 占領하는 農 民의 知識을 擧하야 論之할 것 갓흐면 …… 日常意思疏通에 必要한 書信 한 張을 能修하는 者가 亦 百人에 一人이면 多幸이라”는 유명한 사설3)이 실렸었고, 식민지기 전국 규모로 문 맹률이 조사된 유일한 예인 1930년 조선 국세조사에 의하면, 조선인의 전체 식자율은 약 22%(남성 36%, 여성 8%)에 머물렀다.4)

대체로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는 일제시기의 문맹률은 95% 정도에서 70% 정도로 낮아지는 추세에 있었으므로,5) 구술문화가 조선의 민족문화를 대표하고 대변한다는 인식은 당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1) 임경화, 근대 한국과 일본의 민요 창출, 소명출판, 2005, 159~162쪽.

2) 클라크 소렌슨, 식민지 한국의 ‘농민’ 범주 형성과 민족 정체성 , 신기욱 마이클 로빈슨, 도면회 역,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삼인, 2006, 407쪽.

3) 敎育에 徹底하라 , 東亞日報, 1922년 1월 5일자.

4) 朝鮮總督府, 昭和五年 朝鮮國勢調査報告 全鮮編 第一卷 結果表, 1934.

5) 노영택,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 國史館論叢 51, 1994.

따라서 식민지정책에 추종하며 식민지 연구에 종사했던 많은 일본의 지식인들은, 조선 지배계층의 문자문화를 중국문화의 영향 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거기에서 타율성, 정 체성, 당파성 등의 부정적 특성을 도출하여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면, 구술문화를 대표하는 민요에 대해서는 그 수집과 연구를 통해서 조선의 민족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 내용은, 대개 ‘일본’을 ‘동양’이 아닌 서양의 위치에 두고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열등한 ‘동양’을 발견함으로써 ‘동양’과 거리두기를 도모하는, 이른바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에 입각 한 것이었다. 즉, 특권계층의 사대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소박’ ‘솔직’ ‘야생’이라는 말로 표 상되는 ‘조선민요’의 원시성이거나, 조선인의 순종성, 여성성, 혹은 지나(支那)문화에 대한 종속성, 창조성의 결핍 따위의 조선민족의 정체적 특성을 도출해내는 식민지주의적인 것이 었다.6)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과거를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데에 특권계층의 문자문화뿐만 아니라, 민요도 이용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조선인들에게도 구술문화는 종종 ‘문맹’이라는 말로 표상되어 개인생활뿐만 아니라 민족사회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폄하되었다. “現在 朝鮮 內의 就學 兒童 이 三十퍼센트에 不過하고 남어지 七十퍼센트라는 놀라운 數가 無學文盲의 鐵鎖에 매여 있 는 現狀은 文化上으로 보나 人道上으로 보나 朝鮮人의 絶對한 恥辱인 것은 勿論이어니와 人類 全體에 對한 씨슬 수 없는 冒瀆”7)이라는 의견은 극단적인 견해라 하더라도, 당시 민 족운동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사회운동에서도 ‘문맹’은 민중의 각성을 위해 시급히 퇴치되어 야 할 부정적인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문명=문자’에 뒤떨어진 ‘미개=구술’이라는 세계성과 보편성을 기준으로 하는 대비에서, 고유성과 일관성을 강조하는 ‘문화=민족’의 가치8)가 수용되고, 구술문화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던 민요에서 도래할 민족문화의 창달을 견인할 기 초로서 그 통시적인 전통과 공시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민요’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 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제국 문명의 우월성이라는 주박에서 벗어나 과거의 민족문화를 긍정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9)

6) 식민지기 일본인에 의한 조선민요 채집 연구의 성과로는 총독부가 발행한 월간지 朝鮮에 실린 수 편의 글이 있지만, 재조 일본인 이치야마 모리오(市山盛雄)가 편찬한 조선민요의 연구(朝鮮民 謡の研究)(坂本書店, 1927)가 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11명 외에 최남선, 이광수, 이은 상도 기고한 이 논집은, 민요에서 조선의 민족성을 엿본다는 의도로 식민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을 조 선에 투영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논집에 실린 조선인 지식인들의 논고는 일본 지식인들의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대항하는 한편으로 오리엔탈리즘과 긴밀히 제휴하고 있기도 하다. 구인모, 韓國近代詩와 ‘國民文學’의 論理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72~92쪽 참조.

7) 敎育振興案과 經費問題 , 東亞日報 1928년 5월 21일.

8) 西川長夫, 地球時代の民族=文化理論: 脱国民文化のために, 新曜社, 1995.

9) 임경화, 앞의 책, 2005.

해방 후 그때까지의 민요 연구를 집대성했다고 평 가되고 있는 고정옥(高晶玉, 1911∼1968)의 朝鮮民謠硏究에서 “朝鮮 最初의 民謠에 關한 堂々한 論文”10)으로 소개된 최남선의 조선민요의 개관 이라는 일문 글은 “조선은, 문 학국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민요국이다. 민요도 문학의 권속(眷屬)으로 본다면, 조 선은 민요를 통한 문학국”이라는 유명한 말을 담고 있다.11) 문명=문자의 혜택을 입지 못 하고 근대화에 뒤쳐져 마침내 같은 아시아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문화의 특수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당시의 일반적인 시각을 인정한 후에 그것을 굳이 역으로 취해, 중국문화 에 종속된 권력계급과, “문화적 저층”에 있으면서도 “민족정신과 민족예술의 수호자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피압박자로서의 민중”을 명확히 구별하고, “조선민중문학의 최대 분야 인 민요”에서 민족문화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풍부함, 연속성, “아름다운 신예술의 초석”으 로서의 장래성까지를 읽어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표명한 표현이다. 최남선에게 “조선인 본래의 사상 경향이 유유히 흐르는” 민요라는 수맥의 발견은 조선문화의 고유한 가치를 증 명하는 하나의 징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대화에 뒤쳐진 조선이라는 공간도, 수집 과 연구를 위한 풍부한 재료를 제공해 주는 민요의 보고(寶庫)로 재해석되었다. 이와 같이, 서양적 근대를 모범으로 하는 위로부터의 내셔널리즘 구축의 식민지화로 인 한 파탄과 그 안치테제로서의 ‘민족 민중 농촌의 가치의 발견’은, 아래로부터의 내셔널리즘 구축의 가능성을 낳았지만, 식민지 내내 민족문화의 주체로서의 조선 민족은 정치적 주체 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동화정책이 강화될수록 민요를 통해 민족문화의 전통을 구축하고 그것을 현재와 미래로 이어가는 사회정치적 환경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민족 해방은 이러 한 상황 속에서 갑자기 찾아왔다.

더욱이 고정옥의 회고에 따르면, 해방 당초에는 적어도 38선 이남에서는 본래 민요에 대한 관심 자체가 희박했다고 한다.

八․一五後, 朝鮮文化는 何如間 朝鮮歷史上 類例를 求할 수 없을 好條件을 享有하고 있다. 그러나 民謠 같은 華麗하지 못한 部面에 있어서는 아직 이렇다 할 運動이 展開되지 못하고 있다. 十餘年 前에도 朝鮮日報社 같은 데서 鄕土文化調査事業을 計劃한 일이 있었 고, 放送局에서도 鄕土民謠의 現地放送을 試驗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自由스런 處地에 놓이니까 一二 文化機關이 農樂이나 탈춤을 들고 나서는 程度를 넘지 않고 있다. 하기는 民謠 같은 民族文化의 尨大한 遺産은 騷亂한 環境 속에서 한두 사람이 맨주먹으로 短時 日에 蒐集整理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때와 사람과 財源과 餘裕가 있어야 할 것인지도 몰 으겠다.12)

10) 高晶玉, 朝鮮民謠硏究: 原始藝術로서의 民謠 一般과 庶民文學으로서의 朝鮮民謠, 首善社, 1949, 80쪽.

11) 崔南善, 朝鮮民謠の槪觀 , 市川盛雄 編, 朝鮮民謡の研究, 坂本書店, 1927(初出, 眞人 5-1, 1927). 12) 高晶玉, 위의 책, 1949, 96쪽. ‘

즉, 해방으로 획득된 “自由스런 處地”는, 남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어도 학문적, 정책적 차원에서는 민족의 노래로서의 민요를 환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 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고정옥은 식민지기의 민요연구를 총정리하고 그 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적 민족문학’을 꽃피우는 자양분으로서의 민요 의 가치이다. 大綱 이러한 見地에서 著者는 敢히 民謠를 朝鮮文學 복판에 가지고 오는 것이 何等 妥 當性을 잃은 措置라고 생각되지 않는 바이며, 더구나 朝鮮文學이 現在와 未來에 있어 民 主的인 民族文學의 建設을 指向함에 있어서는, 過去에 있어 가장 庶民的이며 가장 鄕土的 이었던 民謠遺産의 究明․攝取야말로, 새로운 우리 文學의 길을 開拓하는데 不可缺의 한 先行課題라 할 것이다. 本 著作의 意義도 여기 있는 것이다.13) “이러한 見地”라는 것은, 조선에서는 “文學이 民謠와 密接한 交涉을 가지고 있으며, 實 地 國文學에 있어 文學과 非文學의 限界를 設定하기가 不可能에 가깝”다는 조선문학의 특 수성을 주장하는 견해로, 앞에서 다룬 최남선의 “조선은 민요를 통한 문학국”이라는 인식 과 통하는 것이다. 朝鮮民謠硏究가 “原始藝術로서의 民謠 一般과 庶民文學으로서의 朝鮮 民謠”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고정옥도 민요의 담당자를 향토에 뿌 리를 내린 서민계급으로 보고 민족문학의 순수성과 연속성을 담지하는 문화적 주체로 파악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정옥에게 그들은 특히 “새로운 우리 文學의 길”로서 “將來 民主朝 鮮이 享有할” “民主的인 民族文學의 建設을 指向”하는 계급적, 정치적 주체이기도 한 이중 적인 것이다. 고정옥이 말하는 ‘서민’은, ‘혁명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고 탈식민적, 전복적 가능성을 내포한 ‘인민’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朝鮮 民謠硏究는, 고정옥이 월북 후에 서구=일본의 민요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주의적인 민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1962년에 조선 구전 문학 연구14)를 완성하기까지의 과도기적 상황 에서 식민지기의 유산을 총정리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13) 高晶玉, 앞의 책, 1949, 3쪽.

14) 고정옥, 조선 구전 문학 연구, 과학원출판사, 1962.

본고에서는 먼저 식민지기 민요 담론 속에서의 朝鮮民謠硏究의 고유한 위치를 밝힌 후, 해방기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좌우의 이념에 각각 뒷받침된 다양한 고전 계승 담론 속에서 재구성한다. 또한 이것을 월북 후의 민요론의 전개와 비교하여, 서구(일본) 모델과 소비에트 모델의 보편성을 모범으로 삼는 한편으로 조선문학의 특수성을 의식하면서 어떻 게 민요를 통한 민족문화를 구축해 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식민지기 민요 담론과 朝鮮民謠硏究의 시선

朝鮮民謠硏究에서 고정옥이 제시한 민요 개념은, 民이라는 가창주체에 세 가지 대항개 념을 설정함으로써 규정된다. 個에 대한 民, 君 官에 대한 民, 國에 대한 民의 謠가 그것이다. 즉, 민요는 개인이 제작한 문학이 아닌 집단(民)의 공동제작이며, 통치계급이 아닌 민중이자 인민이 그 향유계급이고, 정치적 세력 범위인 國이 아니라 혈통적 민족정신이 민요의 단위 라고 하였다. 민중이자 민족은 타민족인 “漢民族이나 倭族”이 정치적으로 지배할 때에도 침 략정신에 물들지 않은 “民族의 傳統的 피가 脈々히 물결치는 노래”를 불렀고, 통치계급이 유교사상이나 화조풍월의 현실도피적 시조에 빠져 있을 때에도, 일상의 노동 속에서 본능적 이고 적나라한 생활감정을 노래한 민요의 담당층이 되었다. 고정옥이 민요의 개념 규정에 있어서, 때로는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謠를 문제삼지 않고, 民에 대비되는 個, 君 官, 國 을 설정하여 가창주체의 문제로 한정한 이유는, 바로 民의 숭고함을 발견하고 현창하기 위 해서였고, 謠의 숭고함은 사후적으로 결정되는 가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탈식민의 과제 를 안고 새로운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정신적으로 뒷받 침하는 민족문화 형성을 도모해야 했던 해방기에, 고정옥이 일제의 침략에도 살아남고 통치 계급의 퇴폐적 문화에도 물들지 않은 民의 謠의 순수한 가치를 강조한 것은 그만큼 시대적 인 과제인식에 입각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정옥이 “過去 에 있어 가장 庶民的이며 가장 鄕土的이었던 民謠遺産”을 연구하는 목적을, 그 유산의 “正 當한 繼承”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의 “民主的인 民族文學 建設”에 기여하기 위해서라고 한 것은, 해방기 내셔널리즘 구축이라는 과제에 부응하려는 것이었음은 명백하다.

고정옥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민요가 연구되고 수집되었던 목적은 다음의 세 가지였다. 즉,

(1)중국에서 위정자가 백성의 여론을 조사하기 위해 민요에 관심을 갖고 수집 연구했 던 경우,

(2)유럽 낭만주의운동의 일환으로 고대 가요가 수집, 연구되었던 경우,

(3)산업혁 명 이후 멸망해 가는 민요를 수집 보존하려는 민속학적 관심이 그것이다.

근대 이전에 동아 시아에서 민간의 가요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거의 유일한 원리였던 중국의 시경 이래의 정교주의적인 가요관에 기초한 (1)은, 고정옥에 의하면 위정자가 “民間에 바람과 같이 떠 돌아다니는 民謠의 勢力에 着目하여” 시정의 자료나 교화의 수단으로 삼는 “國策”으로 활 용한 것이고, 민요 자체에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도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목적 하에 민요가 활용된 예를 근대 이전의 중국이나 조선, 혹은 특이하게도 “第二次 世界大戰 前 獨逸”에서 찾기도 한다. 이에 대해, 고정옥이 제시한 민요 연구의 목적은, 이념적․예술적으로는 (2)와, 학문적 으로는 (3)을 결합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고정옥과 같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1939년에 임 화와 함께 朝鮮民謠選(學藝社)을 출판한 바 있는 민요 연구자 이재욱이 朝鮮民謠硏究 의 서평에서 “資料蒐集의 廣汎과 理論展開의 精緻는 此種 圖書의 白眉”15)라고 했듯이, 1929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1932년에 이른바 ‘城大 반제동맹 사건’으로 퇴학당하기 까지 영문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던 고정옥16)의 서구 문학사나 문예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 식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우선, (2)에 대해서 고정옥은 18세기 말부터 “當時 歐羅巴 文學에 있어 形式美에 置重하 여 生氣 있는 內容을 喪失한 擬古典主義의 反動으로 일어난 로맨티씨즘에, 그 形式的․精 神的․素材的 基礎를 提供키 爲”해 수집, 연구된 것이 민요라고 하며, 유럽의 민요 연구에 대해 가령 다음과 같이 상세히 소개한다.

그 先驅者는 英國의 비숖․퍼어씨의 英國古歌謠遺篇이다. 퍼어씨의 後繼者로는 죠세 프 리튼, 서 우올터 스콭 等이 있으며 最後의 대성자는 하아바아드 大學 敎授 프란씨스 제임스 촤일드다. 그의 編著 英蘇民族踏謠集은 民俗歌謠蒐集史上 一大 金字塔이라 할 것이다. 英國 浪漫主義運動의 一 誘因이 된 밸러드 蒐集의 事實은 퍼어씨의 出版 後 未久에, 獨 逸에 强力한 影響을 끼쳐 헬데르, 슐레에게르, 그림, 괴에테 等의 로멘티씨스트들을 흔들 고 드디어 그러한 詩形에 依한 創作까지 내게 하였다. 佛蘭西에서도 세니에 夫人(Mme de Chénier)에 依한 一篇의 卓越한 에쎄이가 發表된 것을 機緣으로 後日 발라드(ballade)란 新詩形을 낳았다.17)

15) 李在郁, 高晶玉 著 朝鮮民謠硏究 , 京鄕新聞 1949년 4월 6일.

16) 고정옥의 상세한 약력에 대해서는 신동흔, 고정옥의 삶과 학문세계 (상) , 민족문학사연구 7, 1995 참조.

17) 高晶玉, 앞의 책, 1949, 1~2쪽.

영국의 퍼시(Thomas Percy, 1729~1811)가 편찬한 英國古歌謠遺篇(Reliques of Ancient English Poetry)(1768)을 계기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이 헤르더를 위시한 독일 이나 프랑스 등지로 퍼져가면서 각지에서 민요 수집과 그 영향을 받은 신시 창작이나 신시 형을 낳는 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고정옥이 특히 주목한 것은, 19세기 말에 잉글랜드 와 스코틀랜드의 전승 발라드 305편을 수집하여 출판한 차일드(Francis James Child, 1825~96)의 英蘇民族踏謠集(The English and Scottish Popular Ballads)(1882~ 98)이다. 고정옥에 의하면, 차일드의 작업은 음유시인이 개인적으로 창작한 노래가 점차 조 잡화하고 저하되어 민요가 되었다는 민요 ‘개인창작설’을 ‘집단설’로 기울게 한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즉, 차일드는 “設令 民衆의 한 사람이 아닌 어느 사람이 그것을 作曲했다 할지 라도 依然히 그 作者는 問題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自己와 自意識의 缺如’에 言及하여 공동 설(communal theory)을 暗示했”다고 소개하며, 그 이후의 ‘집단설’ 이론들을 자세히 소개 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던지 集團說만이 民謠의 起源과 本質을 闡明하는 唯一의 學說”이 며, “民謠가 文字 그대로 民(集團)의 共同制作이라는 點에 民謠의 本質이 看取되는 것”18) 이라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제4장에서 언급하듯이, 월북 이후 “창조과정에서의 집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정옥의 민요관에까지 이어지는 개념은 서구의 이론에 의해 이 때 이미 마련되었다. 또한 (3)에 대해서는, 민요는 민속학이라는 학문 범주에 속한다고 하며, 민속학의 연구 범위와 분류법을 제시하여 일본에도 다대한 영향을 비쳤던 샬롯 번(Charlotte Sophia Burne, 1850~1923)의 民俗學槪論(The Handbook of Folklore)(1914)을 인용하여, “高 級한 諸學問(宗敎學, 言語學, 文學, 音樂, 社會學 其他)이 文化人의 生活을 對象으로 하는 데 反하여, 民俗學은” “低文化 民族間에 現行되고 있으며, 或은 開化 民族 中의 蒙昧한 人 民 사이에 保存되어 있는 傳統的인 信仰, 習慣, 說話, 歌謠 及 俚諺을 總括하고 包含하는 汎稱”19)이라고 소개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근대 이후의 학문 체계로는 문학은 고급한 학 문에, 민요는 저문화 민족이나 몽매한 인민들 사이에 보존되어 있는 잔존물(survivals in culture)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민속학에 각각 따로 속해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민족문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있어서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민요의 관계는 역전된다. 즉 “外國 依存의 政治와 學問의 圈外에서 도로혀 上古부터 綿々히 흘러 내려온 固有文化를 繼承 發展하는 重大한 役割을 맡어”온 것은 “下層 平民階級”이며, “現 存 農民文化 中 그들의 衣食住를 生産 加工하는 勞動과 不可分離의 關聯性을 가진 그들의 노래야말로, 참된 우리 民族의 文學的 基調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하여, 민요를 참된 민족 문학의 기초로 간주했다. 그런데 민요의 수집 연구에 대한 (2)와 (3)의 자세는, 근대 이후 일본에서 서구의 민요 담론이 도입되고 주목되는 두 국면이기도 했다. 즉, ‘민요’를 도래할 민족문학의 발달을 재 촉하는 자양분으로서 규정하는 (2)의 인식 자체는, 일본에서 근대화라는 사회변동과 국민 국가 형성 도상에서, 독일이나 영국 등의 민족주의적 계기를 내장한 낭만주의 문헌에 촉발 된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민요 개념과 함께 서구에서 도입된 것이었다.20)

18) 高晶玉, 위의 책, 1949, 12~13쪽.

19) 高晶玉, 위의 책, 1949, 7쪽.

20) 品田悦一, 民謡の発明: 明治後期における国民文学運動にそくして , 万葉集研究 21, 塙書房, 1997; 阪井葉子, 明治期日本における民謡概念の成立 , 独文学報 21, 2005; 임경화, ‘민족’의 소리에서 ‘제국’의 소리로: 민요 수집으로 본 근대 일본의 민요 개념사 , 일본연구 44, 2010.

주 무대가 되었던 것은, 도쿄 제국대학 문과대학 관계자들이 중심이 된 제국문학회를 모체로 발간된 제국문학(帝國文學)(1895~1920)을 통해 전개된 국민문학운동이었다. 19세기말부터 일 기 시작한 이 운동은, 고유한 국민성 내지 민족성을 탐구하고 발전시키면서 선진국들의 정 신적 문화적 달성을 흡수하여 양자를 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근대국가 일본에 맞는 국민문 학을 창출하고자 한 움직임이었다.21) 여기에 민요를 중심으로 이 운동에 관여한 것이, 고 정옥도 “日本서는 明治年代에 上田敏 武田(‘志田’의 오기)素琴이 本格的 硏究에 着手하 였”22)다고 소개하고 있듯이, 영문학자인 우에다 빈(上田敏, 1874~1916)과 독문학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일문학자인 시다 기슈(志田義秀, 1876~1946, 素琴은 호)였다. 그들은 서구의 국민문학 수립 사례를 한편으로 참조하면서, 민요를 통한 국시 혁신, 국어 개량, 국악 개량 등을 주창했던 것이다.23) 고정옥이 자신을 “外國文學의 適當한 吸收를 拒否하는 것도 아니오, 또한 農耕의 生産手 段과 密接한 關係를 가진 民謠의 永久한 保全을 爲하여, 農耕法의 近代的 改良이 不必要하 다고 主張할 만치 愚昧한 쇼오비니스트”24)가 아님을 강조한 점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국민문학 운동은, 해방 후 “새로운 우리 文學의 길”로서 “民主的인 民族文學의 建 設을 指向”하고 있던 그에게 참조할 만한 선례가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재욱, 김재철, 김태준 같은 경성제대 조선문학 전공자들은, 제국문학의 국민문학운동에 영향을 받고 유 럽에서 민요에 관한 도서를 수집하여 경성제대에 부임한 국어학국문학 강좌 교수인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 1888~1974)의 민요 관련 강의를 들었었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잡지인 朝鮮語文學會報에는 서구의 낭만주의 민요운동 관련 참고서가 소개되기도 했다.25)

21) 品田悦一, 앞의 글, 1997.

22) 高晶玉, 앞의 책, 1949, 5쪽.

23) 上田敏, 樂話 , 帝國文學 10-1, 1904; 志田義秀, 日本民謠槪論 , 帝國文學 12-2․3․5․9, 1906.

24) 高晶玉, 앞의 책, 1949, 9쪽. 25) C. R., 民謠硏究參考書(外國篇) , 朝鮮語文學會報 1, 1931. 단 고정옥이 참고한 서구 문헌과는 Child나 Karl Bücher의 Arbeit und Rhythmus가 겹칠 뿐이며, 고정옥의 참고문헌 쪽이 체계적이며 방대하다. 이상의 내용은 박광현, 식민지 조선에 대한 ‘국문학’의 이식과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 市之助) , 日本學報 59, 2004, 248~251쪽 참조.

고정옥도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더 본격적으로 조선민요 연구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고정옥의 민속학적 민요 연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본래 민요를 특정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전승된 지방의 노래로 정의했던 일본의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 1875~1962) 가, 활자나 라디오, 레코드 같은 미디어에 영향을 받으며 생산되었던 신민요나 창작민요, 유 행가 등과 민요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듯이,26) (3)과 같은 민속학적인 민요연구는, 민요에 취재한 재창작을 전제로 하는 (2)와 같은 민요 연구와는 대립하는 것이다. 고정옥도 실은 이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영국의 민속무용 부흥 운동가로 유명한 세실 샤프 (Cecil James Sharp, 1859~1924)가 英國民謠百篇(One Hundred English Folksongs: For Medium Voice)(1916)의 서문에서 민요를 유행가처럼 장식하는 것을 “獨特한 農民性 을 剝奪”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민요는 “時勢의 變化의 導入에 依하여 改良할려고 積極 的으로 故意로 企圖하는 것을 避하지 않으면 않”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素朴하고 率直하게 부르는” 것이 가장 효과적27)이라고 언급한 의견에 대해, 고정옥은

“元來 音樂家 側에서는 民謠의 導入에 依해서 現代音樂을 豊盛하게 하고 樂壇의 淸新劑를 삼으려 하기 때문에, 民 謠에다 現代의 衣裳을 입히는 것을 當然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民俗學者 側에서는 可及 的 옛 모양 그대로를 記錄에 固定하고 保存하고 再生시키려고 하므로, 自然 甚히 原形에 嚴 格하게 되는 것”28)이라고 하여,

이것을 민요 활용을 둘러싼 음악계와 민속학계의 방법론적 대립으로 파악한다. 이에 대해 고정옥은 이 두 주장이 공존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歷史的 인 것에 깊은 關心을 가진 學究의 徒”는 실증에 입각한 민속학적 민요를 추구하고, “民謠의 形式과 內容이 時代에 따라 그 時代의 衣裳을 입어 變化해 가는 것이 民謠의 本質”이므로, “一般 音樂 愛好 大衆”들이 민요의 현대적 연주법을 즐긴다면 그것이 대세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러한 신민요나 유행가들은 “一定한 方向이 없고, 感傷的 戀情, 卑俗한 滑稽에 흘러가기 쉽고, 題材와 表現이 都市 集中的 傾向에 사로잡”힐 위험이 크다. 실제로 고정옥도 조선에서는 “金素月․金億의 詩”이외에 “新民謠로 내세울 만한 것은 開化 初의 唱 歌, 그러고 佛蘭西의 <마르세유>에 비길 <愛國歌> 정도”29)라고 했다. 바로 여기에 민속학적 민요 연구를 추구하는 “學究의 徒”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고정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보다 良心的인 民心, 보다 良心的인 想念을 覺醒케 해서 이를 보다 良心的인 方 向으로 끄을고 나갈, 그러한 노래를 積極的으로 提供할 用意를 게을리 해서는 않 될 것이 다. 獨逸의 <로오렐라이>나 伊太利의 <오 솔레 미오> 같은 卓越한 新民謠의 出現을 渴望 해 마지않는다.30)

26) 柳田国男, 民謡の今と昔, 地平社, 1929.

27) 高晶玉, 앞의 책, 1949, 89~90쪽.

28) 高晶玉, 위의 책, 1949, 91쪽.

29) 高晶玉, 위의 책, 1949, 48쪽.

30) 高晶玉, 위의 책, 1949, 49쪽.

즉, 고정옥은 봉건서민예술의 전통을 담고 있는 향토에서 민요를 수집, 연구하고 거기에 서 “보다 良心的”인 것을 추출하고 현재와 장래의 민족문화 속에 제공하여 새로운 각도로 살리는 데에 민요 연구의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일본에서 국민문학운동의 흐름을 잇는 민요창작운동(민요부흥운동)과 이와 대치했던 야나기타 구니오의 민속학적 민요 연 구의 흐름이, 고정옥에 이르러 지식인과 민중문화의 유기적 결합의 형태로 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서구와 일본의 민요 연구의 흐름 속에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 의 위치를 규정하면, 경성제대 교수로서 고정옥과 사제관계에 있었던 다카하시 도루(高橋 享)의 민요 연구가 고정옥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파악하는 종례의 시각31)은 일본에서의 민요 연구라는 보다 더 큰 틀에서 재고되거나 극히 한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확실히 고정옥은 “日本사람들의 朝鮮文學硏究의 業績에 對해서는, 今後 嚴正히 그 歪曲된 部分을 剔抉한 뒤에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서슴치 않고 包攝 活用하여야 될 것”32)이라고 하여, 식민지기 일본의 조선학 연구에 대해서는 과학적이고 공리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카하시에 대해서도, 1929년 6월에 경성제대 조선어문학연구실의 이름으로 전국의 공립보통학교에 향토민요의 수집 보고를 의뢰하여 수백 편을 입수하거나, 그 후 조 윤제 등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출신 학생, 명륜학원, 경성사범 학생들을 동원하여 수차에 걸쳐 직간접 채집에 착수하거나, 1934년에는 일본의 제국학사원(帝国学士院)으로부터 연구 보조금을 받아가며 지방 민요 수집 사업을 전개한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 만, 다카하시가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연구 성과, 특히 영남 내방가사에 착목한 嶺 南民謠에 나타난 女性生活의 두 길 33)에 대해서는 비판을 전개한다. 비판의 핵심은 다카하 시가 “嶺南地方 兩班婦女子가 房안에서 종이와 붓으로 創作한” 내방가사나 그에 영향을 받 은 내방가사계 민요와 일반민요를 구별하지 않은 점이다. 一般民謠와 內房歌辭系 民謠가 그 成立에 있어, 截然히 다른 點은, 前者가 決코 紙筆의 惠澤을 입은 적이 없음에 반하여, 後者는(적어도 그 最初의 成立과 그에 續行된 數三次의 傳承에 있어서는) 紙筆의 惠澤을 享受한 데 있다 할 것이다.34)

31) 김헌선, 高晶玉(1911~1968)의 구비문학 연구 , 口碑文學 硏究 2, 1995.

32) 高晶玉, 앞의 책, 1949, 92~93쪽.

33) 高橋享, 嶺南の民謡に現れたる女性生活の二筋道 , 京城帝国大学文学会論纂 6(記念論文集 文學 篇), 岩波書店, 1936.

34) 高晶玉, 앞의 책, 1949, 94쪽.

고정옥이 특히 여성의 노래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그가 조선민요의 첫 번째 특징으로 “婦謠의 量的 質的 優勢”를 들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원시 모계사회 이래로 “女性은 政治的 權力에서 排除되고, 社會制度上으로는 오로지 男性의 奴隸化하고 만” 탓으 로, “그들의 鬱憤의 쏟을 곳은 不平과 怨嗟의 노래밖에 없었다. 이 點에 있어선 또한 女性 相好間의 身分은 거진 障碍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 한가지로 諺文을 생활했고, 對男性關 係에 있어 完全히 一致된 한편”이라고까지 언급했다. 이것은 서두에서 식민지기의 식자율 조사를 통해 살펴보았던 것처럼, 남성에 비해 여성의 식자율이 지나치게 낮은 것과도 관련 된다.35) 김부자의 연구가 밝힌 바와 같이, 1920년대의 초등교육 확장정책에도 불구하고 대 부분의 여성들은 미취학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여성의 취학률이 상승한 30년대 이후가 되 어도, 예를 들면 1944년 5월 당시 조선 거주 조선 여성 중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인구는 89%에 달했다.36)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에 더해, 젠더 규범이 불리하게 작용하여 여성은 취학 기회 혹은 글을 익힐 기회로부터 배제되었던 것이다.37) 따라서 “近代 新文化도 女性 社會에는 徐徐히 男性社會보다 훨신 뒤떨어져서 浸潤되어 갔”38)던 것이고, 민요의 보고 (寶庫)는 극단적인 젠더적 편향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35) 1930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 보고에 의하면, 여성의 식자율은 남성의 22%에 지나지 않는다. 朝鮮總督府, 앞의 책, 1934 참고

36) 오성철,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 교육과학사, 2000, 412쪽.

37) 김부자, 조경희․김우자 역, 학교 밖의 조선여성들: 젠더사로 고쳐 쓴 식민지 교육, 일조각, 2009.

38) 高晶玉, 앞의 책, 1949, 498쪽.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 옥에게 민요와 비민요를 나누는 경계는 젠더가 아니라, 그것이 구술문화에 속하느냐 문자 문화에 속하느냐라는 민속학적 요인이 결정적이었으며, 그것은 민요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담보하는 핵심 요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차이를 무시하고 지방에서 조선어로 불리는 노래들을 안이하게 조선민요로 간주하고 거기에서 그 특징을 일반화하는 다카하시의 방식 에 고정옥은 반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도덕적인 엄격함을 지닌 민속학적 민 요 연구자로서의 지식인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3. 해방기 ‘민요’ 담론과 朝鮮民謠硏究의 위치

그렇다면, 고정옥이 내세웠던 ‘민주적 민족문학’을 꽃피우는 자양분으로서의 민요 연구 는 해방 공간에서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을까.

경향신문 1949년 3월 30일에 실린 광고 서두에서 고정옥의 감상을 인용한 바와 같이, 해방 후 남한 사회에서 민요에 대한 관심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음악계에서는 1945년 말에 국악원이 창립 되어 1946년에는 전국 향토민요와 민속무용 대회를 개 최하거나, 1949년에는 전국향토민요대전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혹은 1946년부터 전국농악경연대회 등을 개최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중인 1953년 4월에는 야만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농악 금지령이 내리기도 했 을 정도였으니,39) 고유문화로서의 민속의 수집, 보존이 나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상당히 희박 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탓도 있어서인지, 해 방기 남한에서의 민요 담론은, 우선은 민속연구와 마찬 가지로 식민지기 민족독립투쟁의 일환으로 소개된다. 예를 들면, 식민지기의 민요 수집 연구 성과가 해방 기에 정리되어 출판된 몇 안 되는 예로, 고정옥의 朝鮮 民謠硏究와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金思燁 崔常壽 方 鐘鉉 편 朝鮮民謠集成(正音社, 1948)은, 이재욱에 의한 서평에서 “日政時代에 비로소 이 (민요 수집 정리 사업)에 關心을 갖게 되었지마는 日政 當局의 干涉妨害가 甚하였다. 卽 民謠蒐集者는 恒常 그들의 注目을 받어 왓음은 勿論이어니와 金敎煥氏의 朝鮮童謠選은(岩 波文庫本) 發賣禁止處分을 當하였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동안 自由로운 雰圍氣 속 에서 今番 本書가 上재됨에 있어서 編者 諸公과 出版者 正音社에 대해서 여러 가지 意味로 서 衷心으로 感謝한다”40)고 하였다. 또 같은 책에 대한 손진태의 서평에도 “三友는 民族受 難期의 困境에도 不拘하고 그때부터 이 어려운 民族事業에 各各 個人的으로 發憤努力하 였”다고 소개되어 있다.41) 혹은,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에 대해서도 京鄕新聞에 실린 광고에는 “半萬年의 歷史가 자라난 燦然한 文化의 자최를 우리는 우리의 民謠에서 찾자. 日帝時代 數十年을 숨어서 民謠 蒐集과 그 硏究로 오직 情熱을 一貫시킨 아 高 敎授의 그 結晶이 이 한 卷에 披瀝되었다.”42)고 소개되어 있다.

39) 農樂은 野蠻인가? , 京鄕新聞 1953년 8월 2일.

40) 李在郁, 朝鮮民謠集成을 읽고 , 동아일보 1948년 12월 31일.

41) 孫晉泰, 朝鮮民謠集成 , 京鄕新聞 1948년 12월 30일.

42) 京鄕新聞 1949년 3월 30일, 4면 광고.

물론 민요를 포함한 민속학 연구는 식민지기를 통해 조선의 내셔널리즘과 식민지독립운 동의 발화점이 되지 않도록 당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민속조사 자체는, 식민지 연구의 일부이기도 했기 때문에 총독부를 비롯한 각종 통치기구와 조선인 연구자들과의 긴밀한 협조 하에 이루어졌던 것은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식민지 당국과의 연계 속에서 이루어진 민요 수집 연구의 성과가 무시된 채, 총독부의 탄압이나 “숨어서” 독립운동처럼 수행되었던 점만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민요 담 론 자체가 해방기의 새로운 민족 정체성 형성에 긴밀하게 관여하고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그런데 이 때 민요를 민족문화로서 강조하는 데는 서로 다른 두 방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이재욱은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와 金思燁 등의 朝鮮民謠集成에 동시에 서평을 기고하고 있는데, 각각의 의의를 강조하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즉 朝鮮民 謠硏究에 대해서는

“우리가 眞正한 意味에 있어서의 民主社會를 建設하려면 過去에 있어 서 가장 國民的이요 自然的이며 또 鄕土的인 雰圍氣 속에서 胚胎 成長 또 傳播되어 오는 이 民謠를 硏究 吟味하여 그 精華를 攝取하는 것이 緊急 工作인 以上 이 困難하고도 또 有 意義한 事業을 能히 大成한 著者의 苦心과 努力은 참으로 壯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고 하 여,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섭취되어야 하는 민족문화의 정화로서의 민요의 의의를 강조하 고 있다. 그 한편으로 朝鮮民謠集成에 대해서는 “本書에 收錄된 數많은 우리 先人들의 心情의 結晶은 (중략) 우리들의 懷舊의 感情을 挑發함이 크고 또 우리들의 心琴을 울림이 尤甚”할 것이라고 하여, 과거 민족문화의 결정체로서의 민요 수집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朝鮮民謠集成의 편자들도 “국가적으로 민요의 수집을 기획하고 정리 보존하는 가지가지 이에 관련된 운동이 전개될 기운을 조장해 줬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출판했음을 밝히고 있다.43)

43) 金思燁 崔常壽 方鐘鉉 編, 朝鮮民謠集成, 正音社,

이것은 해방기 고전 담론을 둘러싼 좌우 대립의 두 경향을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새로운 민족문화 건설을 위한 토대로 과거의 문화에 주목하고 그 계승을 강조 했던 것은 좌우익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과거의 계승할 만한 민족문화로 간 주할 것인가와, 어떻게 그것을 계승할 것인가에 있어서는 양자가 판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 었다. 간단히 말하면, 좌익이 과거의 문화 중에서 계승해야 할 것과 폐기되어야 할 것을 구 별하여 거기에서 추출된 과거 민족문화가 진보적 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민족문화 창출로 이어질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면, 우익은 과거의 민족문화를 발굴 정리 수호하고 거기에서 순수하고 고유한 민족혼이나 민족정신을 찾아내어 새로운 민족문화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는 좌익의 민족문화 건설 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46년에 발표된 조선공산당의 조선민족문화 건설의 노선 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건설될 신문화는 사회주의 혹은 프롤레타리아적인 문화가 아니라 반제국주의적, 반봉 건적인 민주주의적 민족문화요, 무산계급의 반자본주의적 문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는 우리 고문화의 장점을 계승하고 외국의 진보적 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우리 민 족의 특성을 발휘한 새 문화를 세워야 한다.44) 당시 좌익 진영의 역사관은 민족을 근대 이후에 형성되는 것이며 해방기를 봉건제와 대립 하는 민족국가 수립기이자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민족해방기로 파악하고 있었 고, 따라서 민족문화는 과거의 전통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창조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過去에 있어 가장 庶民的이며 가장 鄕土的이었던 民謠遺産”을 계승하여 “새로운 우리 文學 의 길”로서 “民主的인 民族文學의 建設을 指向”하자고 주장했던 고정옥의 주장은 위의 조선 공산당의 민족문화 건설 노선과 그대로 중첩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 면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도 확연하다. 즉, 계승해야 할 고문화로서 민요에 주목하는 것은 당시 좌익 진영의 공통된 인식이었지만, 거기에 모범으로서 섭취해야 할 “외 국의 진보적 문화”를 어디에서 찾느냐는 양자 간에 완전히 다르다. 고정옥이 민족문화 창출 의 선례로서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서구의 국민문화 였던 반면, 좌익 진영의 지식인들에게 교훈으로 삼아야 할 선례는 “톨쓰토이나 트루게네프 골키라이론 유고 등등의 고전”45)이나 “현대의 노서아 문학”46) 등과 같은 러시아의 전통을 계승한 소비에트 문화였던 것이다.

44)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선민족문화건설의 노선(잠정안) , 신문학 1946년 4월.

45) 안희남, 고전문학의 재발견 , 중앙신문 1945년 12월 5일.

46) 이명선, 고대소설의 대중성 , 중앙신문 1947년 3월 7일.

그런 의미에서 고정옥이 추구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서구 의 낭만주의적인 전통에 기초한 국민문화 창출 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고정옥이 낭만주의 운동 속에서 민요가 중시되어 기존 주류 문학의 형식과 내용 을 일변시켰던 서구의 사례와 유사한 조선의 사례로, 조선시대 말기 시조의 전개 양상을 들 고 있던 점에서는 이 양자 사이에서도 명확한 차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朝鮮에 있어서도 李朝末에 이르러 封建的 政治體制의 崩壞에 따라, 兩班을 代身하여 새로 일어난 庶民階級(中人 庶孼 胥吏 平民 賤民)에 依해서, 民謠의 素材 精神 乃至 韻 律을 兩班階級의 獨占的 詩歌였던 時調에 導入함으로써, 새로운 노래의 장르를 形成하였 으니, 李朝末의 詩歌集 靑丘永言 歌曲源流 海東歌謠 等에 收錄된 所謂 長時調 或 은 엇時調 辭說時調가 이것이다. 封建社會의 官僚들이 길러낸 時調가 그 主人을 잃고, 漸々 여위어 가든 것을 新興 庶民階級이 이를 利用하여, 그들도 비로소 글자로 쓴 그들의 노래를 여기에다 담은 것이다. 이 노래들은 그러므로 形式과 內容의 齟齬, 形式의 不通一, 素材文學化 技術의 稚拙 及 內容의 醜雜 等々의 大混亂을 이르키고 있는 한편, 素朴하고 人間的이고 明朗한 新局面을 朝鮮 詩歌 가운데 投影하였다. 甲午更張 後의 新詩 自由詩의 擡頭는 勿論 壓倒的인 外國文學의 影響下에서 考慮될 事實이나, 그러나 朝鮮 詩歌의 傳統 的 形式과 內容의 革命의 씨는 이미 李朝末의 敍上 現象 속에서 萌芽하기 始作한 것이라 고 볼 것이다.47)

해방 직후의 좌익 지식인들에게 시조는 주로 “귀족적 형식”이나 “귀족들의 문학유희”로 인식되었고 그 형식도 “현대에는 적합지 않은”48) 것으로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시조는 “中國文學의 影響을 많이 받아서 朝鮮文學임에 틀림없으면서도 朝鮮的인 點에 純粹性이 稀薄하다”49)고 하는 우익 지식인들도 있을 정도였다. 고정옥도 시조에 대해서는 “上層階 級의 獨占 文學 形式”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정옥에 의하면, 봉건적 정치체제가 붕괴하는 조선시대 말기에 ‘서민계급’들이 새로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은 양반의 문학 형 식인 시조에 스스로의 노래인 민요를 도입해서 기존의 양식을 파괴하고 장시조나 엇시조, 사설시조 같은 ‘破型노래’를 만들게 되는데, 고정옥은 이를 “民謠精神의 時調形式에의 侵 寇”50)라고 부르고 있다.

47) 高晶玉, 앞의 책, 1949, 2~3쪽.

48) 이원조, 민족문화 건설과 유산 계승에 관하여 , 문학 창간호, 1946; 일기자, 벽초 홍명희 선생을 둘러싼 문학 담의 , 대조 1946년 1월호.

49) 李熙昇, 時調와 民謠 , 京鄕新聞 1948년 4월 25일.

50) 高晶玉, 앞의 책, 1949, 56쪽.

이러한 파형은 시조의 형식과 내용에 저속화를 초래했지만, 그 한 편으로 “素朴하고 人間的이고 明朗한 新局面을 朝鮮 詩歌 가운데 投影”하기도 했다는 점에 서 서구 낭만주의 문예운동에 비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정옥의 이 주장에 입각하더 라도, 이 양자는 운동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즉, 서구 낭만주의 운동에 서는 기존의 문예사조에 만족하지 못한 문화엘리트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향유되고 있던 민요에 숭고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도입하여 새로운 문학 양식을 창출했던 ‘위로부터 의 문예 혁신’이었다고 한다면, 고정옥이 제시하는 조선의 예는 민요의 담당자인 서민계급 이 양반계급의 시조를 스스로의 세계에 도입하여 파형노래를 만든, ‘아래로부터의 문예 창 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정옥의 이러한 파악은 인민성에 기초한 고전의 현대화를 지향하는 좌익의 전통계승론 에 오히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고정옥이 중인, 서얼, 서리, 평민, 천민을 ‘서민 계급’이라는 개념으로 범칭하는 것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고정옥과 함께 ‘우리어문학회’에서 활동하며 국문학개론(일성당서점, 1949)을 함께 집필했던 구자균도 1948년에 朝鮮平民文學史를 상재하여, 조선 후기 새롭게 문학 활동의 주체로 등장한 이른바 중인층 에 주목한 바 있다. 그때 구자균은 “中人, 庶孼, 胥吏階級은 勿論 常民, 賤民보다는 優越한 社會的 地位를 享受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最下級官吏로서 兩班貴族의 手足과 같이 움지기 지 않으면 안 되었고 永世的 禁錮狀態에 있었다는 點 等으로 보아 常民 賤民과 더부러 平民 이라 指稱하여도 좋을 것”51)이라고 하여, 중인층과 평민층을 아우르는 의미로 ‘평민’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이에 대해 고정옥은 중인층과 평민층을 범칭하여 서민계급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인층들이 실제로 평민이나 천민들과 문화적․정치적 연 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불문에 부친 채 ‘서민’이나 ‘평민’이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파악 하려는 고정옥이나 구자균 등의 시선에는, 당시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인 농민이나 지식인 과의 블록을 구상하여 그것이 ‘통일전선’이 되어 ‘혁명을 수행할 능력’을 가지는 역사 발전의 주체인 ‘인민’을 형성한다고 보았던 해방기의 인민 개념을 과거로 투영하려는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52) 고정옥이 민요를 개인 창작이 아닌 집단에 의한 공동제작임을 누차 강조한 것도, 당시 지식인들의 개인주의를 경계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족문화를 건설하자고 외쳤던 좌익의 주장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고정옥이 민요도 “反市民的 封建 殘滓를 保有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民謠가 새로운 歷史의 創造의 糧食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庶民文學性으로 서다”라고 지적했을 때의 그 서민성은 인민성과 통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민계급의 민요는 “朝鮮 詩歌의 傳統的 形式과 內容의 革命의 씨”를 품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고정옥의 朝鮮民謠硏究야말로 민족 담론이라는 포장 속에 인민 담론이라 는 혁명의 씨를 품고 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정옥이 당시 민요에 대한 국가적 인 관심 속에서 민요의 수집과 그 현대적인 계승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북한을 택한 것은, 적어도 학문적인 비전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53)

51) 具滋均, 朝鮮平民文學史, 文潮社, 1948.

52) 해방기 ‘인민’ 개념에 관해서는 김성보, 남북국가 수립기 인민과 국민 개념의 분화 , 韓國史硏究 144, 2009 참조. 아울러 ‘인민’에서 민중이나 대중과 중첩되면서 사회주의적 혁명의 의미와 연관되 는 좌파적 개념이 우세하게 되는 것은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다(加藤哲郎, 20世紀 日本における「人民」概念の獲得と喪失 , 政策科学 8-3, 立命館大学, 2001).

53) 월북 이후의 고정옥의 삶과 학문을 다룬 신동흔의 연구에 의하면, 고정옥은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국문학 연구에 전념”했었기 때문에, 그에게 월북이 이념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신동흔, 고정옥의 삶과 학문세계 (하) , 민족문학사연구 8, 1995, 222쪽). 하지만, “국문학 연구에 전념”했다는 바로 그 이유는 그가 북한을 택한 학문적 당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朝鮮民謠 硏究는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38선을 넘을 수 없었다.

4. 민요에서 인민 창작으로: 월북 후의 고정옥

고정옥에게 민요 연구는 지식인(전문가)의 사회적 역할이 극히 요구되는 분야였다. 중 간계급으로서 인민 속으로 들어가 민요를 수집 연구하여 계승해야 할 ‘양심적’인 방향을 제 시하고 새로운 문화 창출을 견인하여 이윽고 계급의 대립을 초월한 민족문화를 건설하는 열쇠는, 바로 지식인의 인민적 자각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그에게 지식인으로서의 학문적 실천의 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초에 김일성은 “조선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 을 계승하며 사회주의 나라들의 문화를 섭취하여야 하겠습니다. (중략) 우리 문화인들은 자기 고유한 문화 가운데서 우수한 것은 계승하고 락후한 것은 극복하며 선진국가들의 문 화 가운데서 조선 사람의 비위에 맞는 진보적인 것들을 섭취하여 우리의 민족문화와 예술 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민족문화건설의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54)라는 연설을 행했고, 이에 따라 결성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예이론을 이러 한 미래지향적 민족문화 창출의 전범으로 삼았다. 당초부터 민족성과 인민성을 지닌 것으 로 여겨졌던 민요는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 혁명적인 문화예술을 발전시킨 다는 이 창작의 전형에 부합하는 것으로 중시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이론은 일제시대에 침투하기 시작한 반동적 부르주아 문화인 온갖 반사실주의, 즉 인텔리겐치아들 의 소수의 입장에서 형성된 예술지상주의, 모더니즘, 코즈모폴리터니즘 등과의 강력한 투 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투쟁은 예술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으로 ‘예술에 대한 강력한 숙청’으로 이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그 한편으로 서구중심주의로부터 의 탈각과 민족성 원칙의 확립, 문화예술인들의 인민으로부터의 유리와 고립을 경계하고 인민성 원칙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55)

54) 김일성,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로 되어야 한다: 북조선 각 도 인민위원회, 정당, 사회단체 선 전원, 문화인, 예술인 대회에서 한 연설 1946년 5월 24일 , 김일성 전집 3,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427~428쪽.

55) 임경화, 북한 노래의 탄생: 사회주의체제 형성기 인민가요 성립 고찰 , 북한연구학회보 15-2, 2011, 341~342쪽.

북한 초기 문화계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예이념의 배타적 확립은, 많은 월북 문화인들의 숙청으로 이어졌지만, 민족성이나 인민성을 강조하는 민족문화 수립의 원칙은 적어도 고정옥에게 있어서는 그 자신의 학문적 방향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서구의 국민 문화를 선례로 삼았던 그의 민족문화 수립 이론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이론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그 재편 과정을 거친 결산 보고서라고 할 만한 것 이, 朝鮮民謠硏究가 간행된지 13년 만에 북한에서 나온 조선 구전 문학 연구였다. 월북한 고정옥은 1952년에 창립된 과학원의 언어문학연구소 문학연구실에 소속되어, 50 년대 말에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6) 그 사이 고정옥은, 조선작가동맹 이 조선작곡가동맹과는 별도로 구전민요의 독자적인 수집 정리를 행하여 1954년에 약 300 곡의 구전민요를 수록한 조운 편 조선구전민요선집(조선작가동맹출판사)을 간행했을 때 나,57) 1958년과 1960년에 구전민요집 1 2(국립문학예술출판사)를 간행했을 때에 조력 한 것으로 보인다.58) 한편, 월북 이후 고정옥이 독자적으로 행한 것은 전설집(국립출판 사, 1956), 조선 속담집(국립출판사, 1954)으로 완성을 보는 설화와 속담 채집 연구와, 민간극, 판소리, 수수께끼 등에 대한 연구였다.59) 또한 고정옥이 이끌던 문학연구실은 1959 년 3월부터 단독으로 설화, 민요, 민간극, 속담, 수수께끼 등의 구전문학 수집에 착수하여 1960년부터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의 명의로 발행된 인민 창작60)에 수집과 연구의 성과 를 소개해 갔다.

56) 1961년 국가 학위 학직 수여 위원회 제1차 총회에서 박사, 교수, 부교수, 학사의 학위 학직을 수여받 은 112명의 명단을 보면, 이때 언어문학연구소 소장이었던 김병제, 부교수였던 정렬모는 각각 교수 가 되었고, 연구사이자 학사였던 고정옥은 부교수로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로동신문 1961년 4 월 22일). 김병제와 정렬모가 모두 어학 연구자였으므로, 문학연구실은 당시 고정옥이 총책임을 맡 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7) 로동신문의 서적 소개 란(1954년 4월 13일자)과 서적평 란(6월 9일자)에서 확인된다.

58) 8 15 해방과 인민 창작의 새로운 발전 , 인민 창작 1960-2, 1960.

59) 고정옥, 앞의 책, 1962, 68~73쪽.

60) 이 잡지는 1960년(1~3호)과 61년(1~3호)에 각각 3권씩 6권, 62년에 2권(1~2호), 총 8권이 발간 된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이 시기에 출판된 것이 구전문학에 관한 연구서 인 조선 구전 문학 연구였다. 마침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 중심의 권력체제가 더욱 강화되어 1960년 5월에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이른바 ‘주체 선언’이 발표되었 고, 한국의 4․19 혁명을 계기로 같은 해 8․15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는 김일성이 연 방제 통일방안을 제안하는 등, 남북 양국에서 처음으로 통일운동이 고양되어 어느 때보다 뜨겁게 민족문화 창출이 강조되던 격변기와 겹친다. 여기에서도 그의 민요(구전문학) 연구 는 시대적 과제인식과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요에서 민속 전반으로 그의 관심과 연구영역이 확대되어 간 것은, 월북 후 구전문학 연구의 모범으로 삼았던 고리키(Maxim Gorky, 1868~1936)의 ‘포클로어에서 배우자’는 호소를 실천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화 창출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려는 실천적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인민 이 력사에서 처음으로 주권을 장악함으로써 인민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로 된” 현재인 만 큼, 고정옥에게 그 과제는 더욱더 절실한 것이었다. 그것은 구전문학을 러시아어 Народное творчество의 번역어인 ‘인민 창작’으로 명명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도 명확히 드러나 있 다. 조선 구전 문학 연구는 “인민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물질적 부의 창조적 력량일 뿐만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모든 정신적 보물들의 유일하고도 무진장한 원천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인민의 숭고함은 이미 당과 지도자 김일성에 의해서 보증된 것임을 선언한다. 그 리고 나서 그러한 인민의 집체적 창작의 위력을 설파하는 고리키의 말이 인용된다. 집체적 창작의 위력은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수천 년 동안에 개인의 창작은 <일리아드> 나 <칼레와라>와 견줄 만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인민 창작이 그 근원에 놓여 있지 않은 어느 한 일반화도, 일찌기 인민들의 민담이나 전설 속에 없었던 어느 한 세기적 전형도 천재를 가졌다는 개인이 내여 놓지 못했다는 사실로써 증명된다.61) 고정옥은 일정한 문학적 교양을 가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직업적 작가들에 의해서 창작 되는 문학을 협의의 문학이라 보고, 인민 창작을 광의의 문학으로 보았다. 위의 고리키의 견해에 따르면, 전문적인 개인의 창작인 협의의 문학은 인민 창작의 원천에 뒷받침되었을 때 비로소 창조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문학은 인민 창작에 의해 규정되어 활발한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된다. 문학과 인민 창작의 관계를 이와 같이 파악하면, 朝鮮民謠硏 究에서처럼 문학=외래문화에 종속된 지배계층의 문화, 민요=민중에 의한 고유한 민족문 화와 같은 대립적인 도식으로 파악하거나, 국문 문학의 미발달이나 중국문화에 대한 종속 성이라는 열등의식을 품을 필요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朝鮮民謠硏究에서 고정옥은 향가 나 시조 등을 “상층계급의 문학”으로 강조하여, 민요의 순수성과 구별했는데, 조선 구전 문학 연구에서는 향가와 시조는 민요를 성과적으로 섭취하여 그 형식을 완성한 것이며, 봉건 말기에는 민요의 결정적인 작용으로 보다 높은 인민성을 지닌 사설시조를 파생시켰다 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민요는 국문 가사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부요의 영향으로 규방 가사가 탄생했으며, 민요는 심지어 한시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62)

61) 고정옥, 앞의 책, 1962, 1쪽.

62) 고정옥, 앞의 책, 1962, 179~180쪽.

민요의 순 수성에 대한 천착이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눈을 돌려, 문학을 배태하고 영향을 미치는 민요 의 역할에 주목하여 문학과 민요의 긴밀한 상호관계로 그 주안점을 옮기면서 민요의 세계 는 넓어진 것이다. 민요의 저변이 넓으면 넓을수록 문학과의 관련성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 다. 그가 민요 연구에서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예술적 인민 창작”63) 전반으로 연구의 대 상을 확대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민의 창조력과 도덕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 기반한 인민 창작이라는 개념은 고정옥 의 민요에 대한 종래의 비판력도 약화시켜, 계승해야 할 과거의 민요 유산 목록을 비약적으 로 확장시켰다. <아리랑>에 대한 해석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고정옥은 朝鮮民謠硏 究에서 <아리랑>을 “近代謠”로 분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近代謠”란, 멜로디는 민요와 닮았더라도 “內容의 데카단티즘을 包攝하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過去의 民謠의 一般槪念의 埒外로 퉁겨져 나오기 비롯한 것”이라고 정의하여 <아리랑>과 민요를 구별하 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리랑>의 成立이 景福宮 修築工事에 있는지 與否는 姑捨할지라도, <아리랑>의 內容 이 近代 市民階級과 勞動者 農民의 生活相의 如實한 反映인 것은 事實이다. 都會地로 팔 려 나오는 시골 處女, 日本으로 露領으로 품팔이 가는 農民, 東學亂, 倭亂, 胡亂, 汽車開通, 電燈, 시어머니에게 대한 大膽한 反抗, 黃金萬能思想, 世紀末的 에로티씨즘 等等, 바야흐 로 近代生活의 萬華鏡이다.64)

고정옥은 <아리랑>을, 식민지근대를 사는 노동자, 농민들의 비극과 저항의지나 봉건적 억압에 대한 여성의 항거는 물론, 신흥 부르주아들의 퇴폐적인 문화까지도 아우르고 있는 총체적인 근대상이 반영된 노래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아리랑>이 가지는 다양성이 강조되어 있을 뿐, 특별히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파악하려는 문맥은 없다. 그런데 조 선 구전 문학 연구가 되면, 오히려 <아리랑>의 이와 같은 왕성한 생명력이 높이 평가된다. <아리랑>은 난봉가, 노래 가락, 방아 타령, 녕변가, 이팔 청춘가, 양산도 등 여러 노래들 의 가사의 일부분을 흡수하고 있으며, 또 그것은 전통적 민요로서 뿐만 아니라 현대 가요 로서도 생신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운 선률이 풍부한 민 족적 정서로써 대중을 매혹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65)

63) 고정옥, 앞의 책, 1962, 48쪽.

64) 高晶玉, 앞의 책, 1949, 187쪽.

65) 고정옥, 앞의 책, 1962, 84쪽.

아름다운 선율이 과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가사를 흡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랑>이 민족적인 노래로 해석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조선 문학에 <아리랑>을 제재로 하는 창작시들이 발표되거나66) 인민 창작에도 일제의 착취 상을 폭로하는 <아리랑>의 개사가나 해방 이후 협동노동 시에 불린 개사가들이 소개되는 등, 활발하게 재창작되고 있었던 것이 중시되어 있다.67) 과거의 인민 창작 중에서 계승해 야 할 것과 폐기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제시하고 있는 조선 구전 문학 연구의 작업은, 과거의 인민 창작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이념에 맞게 현대화하여 민족문화 창출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데 최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정옥이 ‘구전문학’보다 ‘인민 창작’이라 는 용어를 택하고자 한 것도, 체제 성립 초기부터 활발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1948년 에 문맹자의 98%가 문맹을 벗어났다고 선언한 바 있는 북한68)에서, 이미 ‘구두성(口頭性)’ 이 필수적인 특성이 되지 않고 글로 써서도 창조력을 발휘하는 현대의 다양한 ‘인민 창작’ 의 형태를 끌어안기 위해서였다.69) 여기에는 소련의 시인 알렉산드르 트바르도프스키 (Aleksandr Tvardovsky, 1910~1971)가 그의 가장 유명한 시 바실리 초르킨(Василий Тёркин) (1945)의 형상은 “신문과 벽신문의 펠레똔, 에쓰뜨라다의 레파토리, 류행가, 속 요, 인형극 풍이 이룩한 바로 그 반(半)폴클로르적 현대시들에서 나왔다”70)고 언급한 견해 가 참고되었다. 즉, 문자를 매개로 하더라도 통속성, 집체성, 비전문성을 띤 인민 창작은 문 학과 포클로어의 중간형으로 간주되는데, 포클로어와 문학이 상호관련성 속에서 발전하듯 이, 반(半)포클로어와 문학 사이에서도 긴밀한 교호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 러한 현대의 포클로어를 둘러싼 제 현상을 포함하기에는 구두성을 강조하는 ‘구전문학’이 라는 말은 한계가 있다. 당시 각종 문화서클을 통한 군중문화 사업이 전문가들의 개입으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정치적 주체인 인민이 민족문화 창출의 주체로 성장할 것이 기대되고 있었던 만큼, 고정옥의 시선도 민족문화가 창출되려고 하는 현재의 시점에 집중되어 있었 던 것이다.71)

66) 임경화, 망각된 냉전체제하의 <아리랑>: 1963년, 남북단일팀 국가가 되기까지의 남북한 <아리랑> 정전화 과정 , 상허학보 37, 2013.

67) 인민 창작에 실려 있는 해방 후 북한에서 창작된 <아리랑> 개사가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100만 톤 증산에 총 궐기하세/ 우리네 조합은 살기 좋은 락원/금년도 500만 톤에 생활은 는다데/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아라리가 났네/500만 톤 생산에 총 궐기 하세”(인민 창작 1961-2, 과학원출판사, 13~14쪽)

68) 朝鮮中央年鑑 1949, 朝鮮中央通信社, 1949, 135쪽. 북한 초기 문맹률에 관해서는 고영진, 해방 직후 북한의 ‘문맹퇴치운동’에 관한 일고찰 , 言語文化 8-2, 同志社大学言語文化学会, 2005 참조.

69) 고정옥, 앞의 책, 1962, 44쪽. 고정옥은 당시를 “문맹이 없어지고 근로 대중이 문’자를 소유한 오늘날의 조건에서 인민들이 글로 써서도 그들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언급했다.

70) 고정옥, 위의 책, 1962, 45쪽. 펠레똔(Фельетон)은 알기 쉬운 시사평론이나 문학평론, 에쓰뜨라다 (Эстрада)는 오락성이 강한 극예술을 의미하며, 모두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다.

71) 황윤상은 월북 후 고정옥의 민요 연구를 당시 1960년대 북한의 민요(인민 창작) 담론 속에서 자리 매김했다( 1960년대 북한의 민요 수용 양상 ,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그는 구전문 학의 인민성의 강조와 구전문학과 문학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믿음이 북한에서의 구전문학의 현대 적 변용의 당위성을 더욱 강화해 갔으며, 고정옥의 이러한 전략은 “문학 전통을 세우는데 있어 구비 문학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포석이 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35~36쪽). 근대화로 인해 인멸 의 길을 걷는 구비문학의 문학 연구에서의 영역 확보 차원에서도 그 현대적 변용에 중점을 두는 전략이 필요했다고 보는 이러한 인식은, 북한의 문학 개념 재편 과정을 살피는 데에도 중요한 지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인민 창작에 대한 강조가 월북 이전의 고정옥의 민요 인식과 단절 된 커다란 변화라고 파악한 점은 본고와 견해를 달리한다.

그것이 반영된 것이 바로 문학연구실 주관으로 실시된 현대 인민 창작의 집중적인 수집 이었다. 그 기관지 인민 창작에 실린 인민 창작 수집 요강 에는 다음과 같은 테마를 가 진 ‘노래’의 수집이 요청되어 있다. △1930년대 항일 무장 투쟁 과정에서 창조 보급된 혁명 가요들 △창가(계몽 가요) △ 의병 투쟁 △3․1 봉기와 관련된 노래들 △20~30년대의 로동운동 △농민운동을 반영한 노래들 △일제 강점 하 조선 인민의 반제 반봉건적 감정과 기분을 반영한 노래들 △조국 해방 전쟁 시기에 창조된 노래들 △평화적 민주 건설 시기 △전후 복구 건설 시기 및 오 늘날의 천리마 시대의 로동자들과 농민들의 헌신적 투쟁을 반영한 노래들 △평화적 조국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들 △기타 20세기에 들어 창작된 노래들72) 민요라는 용어를 쓸 경우에 자칫 ‘옛날에 불렀던 노래’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을, 인민 창작이라는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의 다양한 장르뿐만 아니라, 반제 반봉건 투쟁부터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해방 후의 인민가요까지를 폭넓게 내부에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 다.

72) 인민 창작 1960-2, 66쪽.

이것이 바로 인민이 처음으로 주권을 장악하여 문화 창출의 주체가 되었다는 자신감에 뒷받침되어 지배문화로서의 무한한 확장을 기도하는 고정옥의 민족문화 건설에의 욕망의 행방이었다.

5. 맺음말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체제 수립이라는 역사적인 과제인식 속에서 민족문학 건설의 일환으로 고정옥이 추구한 서구 낭만주의 운동을 모범으로 한 민요 연구인 朝鮮民謠硏究는, 월북 후가 되면, 소련의 포클로어 연구를 참조하면서 새로운 계급문학을 창출하는 사회 주의적 사실주의로 그 이론의 틀을 일신하여, 조선 구전 문학 연구로 재편되었다. 양자 사이에는 민족문화의 보존이 아니라 인민성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화 창출을 추 구했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월북을 전후해서 새로이 구축해야 할 민족문화의 전범을 서구 적인 것에서 소비에트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은, 그가 추구하는 민족문화의 모습에 도 급격한 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가장 단적으로는, 朝鮮民謠硏究에서는 창출해 야 할 민족문화는 퇴폐적이거나 저속하지 않고 반봉건적이고 일제 잔재를 소거한 시민적인 것인 데 반해, 조선 구전 문학 연구에서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고상한 공산주의 사상, 집단주의적 감정,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교양에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자는, 보편성과 단일성을 가지는 세계적인 문화가 고유성과 다양성을 가지는 민족문화의 재구축에 관여하며, 어느 것도 아래로부터의 건전한 민족문화 창출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족문화 창출의 주체로서의 인민을 지도할 도덕적 지식인으로서의 고정옥의 위치는 월북 전과 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은 고정옥에게 정치적 주체이자 문화의 창조자이기도 한 인민을 중심에 둔 아 래로부터의 민주주의적 민족문화의 창출을 실천하는 장일 터였다. 하지만, 그가 인민을 지 배계급의 위치에 올려놓는 순간, 그 민족문화는 당과 지도자와 일체가 되어 체제의 이데올 로기를 오롯이 담아내고 동원이 논리를 내면화하는 위로부터의 내셔널리즘의 완성으로 급 격히 다가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민의 문화를 다수의 문화가 아니라 지배적인 문화로 끌어올림으로써, 그때까지 고유한 민족문화와 종속적 사대 문화의 대립관계로 파악했던 민 요와 문학이 상호관계성 속에서 통합된다. 이제 “인민 창작과 문학은 넓은 의미에서의 문 학의 두 개의 날개이며 그들은 호상 밀접히 교호 작용하면서 발전해 왔으며 하고 있는”73) 변증법적 발전의 두 축으로 파악되었는데, 이것은 역으로 문학이 지배 문화인 인민 창작과 의 관계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지양하며 발전해 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73) 고정옥, 앞의 책, 60쪽.

조선문학의 특수성은 이렇게 세계문학의 보편적 발전 법칙 속으로 회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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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y from 'Ethno-Nation' (minjok) to 'People' (inmin) : Universality and Particularity of Chosŏn Minyo Yŏn’gu by Ko Chŏng’ok

Lim, Kyoung-Hwa( Professor of Inha University )

This paper focuses on the analysis of Chosŏn Minyo Yŏn’gu(Research on Korean Folk Songs, 1949) by Ko Chŏng’ok(1911~1968), which systemized practically all of the pre-existing folklore scholarship. The paper aims at finding out how Ko’s folk song discourse was formed in close relationship with the process of the new ethno-national (minjok) identity formation at that time. The objective Ko had in mind was the creation of ethno-national literature from below, on the basis of “masses”(minjung) songs (folk songs), with an eye upon the precedents of national culture movements in Western Europe/Japan. Ko also strove to discover the value of the folk songs related to their cultural content, their “native originality”, or consistency, as opposed to (modern) literature defined by “civilization” or worldwide universality. In such a way, he wished to overcome what he saw as “underdeveloped” conditions of the Korean literature. However, after the 1945 Liberation, it was the historical value of past’s folk songs that was given priority in South Korea; Ko’s attempt to relate the folk songs to the creation of the new ethno-national culture could bear fruits in North Korea, which used the Soviet movement for folk songs’ modernization, grounded in Socialist Realism, as its reference. At the point, in order to promote his project of ethno-national culture creation from below in a systematic way, Ko- who went North - introduced the concept of “people’s(inmin) art”, which included not only folk songs but all the other products of collective linguistic creativeness as well. However, by identifying the “people” as dominant power, identical with Party and its leader, this project easily allowed itself to be co-opted by the nationalism from above. In this framework, “people’s art” and literature were seen as mutually related, fusing and developing together, rather than opposing each other. It can be said that Korean literature’s particularity reverted in this way to the “universal law of the development of literature”.

Key Words: Ko Chŏng’ok, Chosŏn Minyo Yŏn’gu, Folk Song, People’s Art, Ethno-National Culture, Socialist Realism

東方學志 제163집(2013년 9월), 261~288쪽

투고일: 2013. 09. 16 심사일: 2013. 09. 27 게재확정일: 2013. 09. 27

 

&lsquo;민족&rsquo;에서 &lsquo;인민&rsquo;으로 가는 길 고정옥 『조선민요연구』의 보편과 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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