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지>
본고는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 급속히 확산된 헤이트 스피치 현상을 상호교차적 관 점에서 조망하고, 재일코리안 여성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深沢潮)의 작품에 나타난 교차적 상상력을 통해 혐오에 저항하는 대항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 2010년대 이후 분출한 일본 사회의 헤이트 스피치의 중심에는 재일코리안 혐오가 있 는데,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볼 때 여기에는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얽혀 있다. 또한 재일코리안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는 1990년대에 생겨난 ‘위안부’ 문제 부정 운동 을 주요한 원류의 하나로 삼고 있어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대응이 요구된다. 이러한 가운데 후카자와는 근래 혐오에 대항하는 행보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어 주목 된다. 초록과 빨강(2015)에서 후카자와는 헤이트 스피치를 주요한 소재로 삼아 혐오 와 차별을 겪는 재일코리안의 내면과 일본인들의 대항운동을 교차시켜 그려낸다. 나아 가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2021)에서는 태평양전쟁 시기의 오키나와를 무대로 조선 인 위안부와 오키나와인 사이의 연대를 그려냄으로써 마이너리티 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러한 문학적 시도는 대항담론으로서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독자의 공감에 호소하는 전략에 입각한 후카자와의 서사는 자칫 주류 담론의 틀에 회수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양가적 가능성을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제어 : 재일코리안, 혐오, 상호교차성, 위안부, 후카자와 우시오
1. 들어가며
2013년 2월 24일, 오사카시(大阪市) 쓰루하시(鶴橋) 코리아타운 거리에 한 일본인 여중생이 마이크를 쥔 채 서 있다. 그녀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말문을 뗀다. “쓰루하시에 사는 망할 재일조선인 여러분, 그리고 지금 이곳에 계신 일본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재일조선인 당신들이 너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여러분도 불쌍하고 나도 짜증나고, 아, 그냥 죽여 버리고 싶어! 끝까지 그렇게 거만하게 군다면 남경대학살 이 아니라 ‘쓰루하시 대학살’을 일으킬 거예요! 일본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대학살을 저지를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러기 전에 자국으로 돌아가세요. 여긴 일본입니다. 한반도가 아닙니다. 이제 좀 돌아가!” 여중생이 스피치를 이어가는 동안 대다수 행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앞을 지 나쳐 가고,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중 일부는 “맞아, 맞아!”라고 맞장구를 치며 갈채 를 보내기도 한다.1) 이는 2013년 무렵 도쿄(東京)의 신오쿠보(新大久保)와 오사카 쓰루하시 등지에서 반복적으로 열린 헤이트 시위 가운데 한 장면이다.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확산된 소녀의 영상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던졌고, 해외 언론 매체를 통해서도 보도 되었다. 백주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섬뜩한 혐오 발언을 거리낌 없이 외치는 어린 소 녀의 모습은 일본 사회의 변모를 실감케 했다. 2006년에 결성된 극우 배외주의 단 체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 이하 재특 회)’으로 대표되는 ‘행동하는 보수(行動する保守)’ 세력은 인터넷과 거리를 점령하 며 급속히 세력을 키워나갔다. 2015년 일본 법무성이 처음으로 실시한 헤이트 스피 치 실태 조사에 따르면, 2012년 4월부터 2015년 9월까지 전국 29개 도도부현(都道 府県)에서 확인된 헤이트 스피치 가두시위는 총 1,152건에 이른다.2)
1) 「“한국인 대학살 하겠다” 이번엔 일본 여중생의 망언」, 2013.04.02. https://www.chosun.com/site/data/ html_dir/2013/04/02/2013040202253.html (2023.02.17. 검색); 有田芳生(2013), ヘイトスピーチとたたか う!─日本版排外主義批判, 岩波書店, 2013, pp.67; p.20. 이 날의 시위는 우파계 시민단체 ‘재일특 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과 ‘신슈미쿠니카이(神鷲皇國會)’의 공 동개최로 열렸으며 여중생은 신슈미쿠니카이 소속이었다.
2) 「‘デモ’ 1152件 12年以降、29都道府県で法務省初調査」, 毎日新聞, 2016.3.31.
일본에서 혐오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것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유캔 신조어・유행어 대상(ユーキャン新語・流行語大賞)’의 유행어 ‘톱 10’에 선 정된 2013년 무렵부터이다. 2007년경부터 재일코리안3)에 대한 혐오발언을 일삼는 ‘재특회’의 활동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2013년경부터 인종・민족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항운동인 ‘카운터스’가 카운터 데모를 전개하면 서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4)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그 해의 유행 어가 되었고, 2016년 6월 3일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ヘイトスピーチ解消法)’이 제정 되었다.5) 헤이트 스피치를 둘러싼 대항적 움직임에 힘입어 헤이트 시위의 횟수나 참가자 수는 2013년을 정점으로 눈에 띠게 감소했지만, 그 사실이 곧바로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나 차별이 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재특회를 심층 취재한 저널 리스트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가 “이제 재특회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차별이 일상화된 것은 아닐까?”라고 반문한 바 있듯이, 혐오발언은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 가 오히려 ‘사회의 재특회화’가 진전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6) 2021년 8월 재일 코리안 집단 거주지인 교토부(京都府) 우지시(宇治市)의 우토로(ウトロ)에서 발생한 방화사건은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에 기반한 ‘증오 범죄(hate crime)’였음이 밝혀 져 혐오 확산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는 헤이트 스피치가 언어적 차별선동을 넘어 물리적 공격의 단계로 한 걸음 더 나 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응이 요청되고 있다.7)
3) 일본에 거주하는 한반도 출신자에 대해서는 ‘재일한국・조선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자이니치 (在日)’ 등 다양한 호칭이 혼용되고 있으나, 본고에서는 혐한・재일코리안 혐오에서 국적 및 정체성, 신/구 정주자 구분을 막론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 본고가 중심적으로 다루는 작가 후카 자와 우시오가 ‘재일코리안’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재일코리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다만 일부 인용문에서는 원문을 존중해 ‘재일조선인’으로 번역한다.
4) 헤이트 시위와 카운터 운동에 관한 르포르타주로는 다음을 참조. 야쓰다 고이치 저, 김현욱 역 (2013), 거리로 나온 넷우익: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후마니타스; 간바라 하지 메 저, 홍상현 역(2016), 노 헤이트 스피치: 차별과 혐오를 향해 날리는 카운터펀치, 나름북스; 이 일하(2016), 카운터스: 인종혐오에 맞서 싸우는 행동주의자의 시원한 한 방!, 21세기 북스.
5) 정식 명칭은 ‘본국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조치에 관한 법률(本邦外出 身者に対する不当な差別的言動の解消に向けた取組の推進に関する法律)’.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해 소법’은 이념법(理念法)으로 처벌 조항이 없어 강제력은 없지만, 헤이트 스피치를 사회악으로 규정 하는 사회적 규범을 명시하는 효과가 있으며, 각 지방자치체들이 이 법를을 기반으로 삼아 혐오표 현을 규제하는 지방조례를 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크다. 가나가와현(神奈川県) 가와사 키시(川崎市)와 오사카시가 헤이트 스피치 규제 지방조례를 제정한 대표적 사례이다.
6) 야쓰다 고이치(2017), 「<작품해설> 현대 일본사회에 만연한 민족적 배타주의와 싸우며」, 황영치, 전야, 보고사, p.313.
7)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Gordon Allport)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설명하고자 고안한 ‘올 포트 척도’는 ‘적대적인 말 →회피 →차별 →물리적 공격 →절멸’로 이어지는 5단계로 언어적·물리적 폭력의 상승 단계를 도식화한다. 또한 증오범죄 연구의 권위자인 브라이언 레빈(Brian Levin)은 ‘편 견→편견에 의한 행위→차별→폭력→제노사이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도식화하여 ‘혐오의 피라미드(Pyramid of Hate)’로 제시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움직임을 배경으로 이 글에서는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 급속 히 확산된 혐오 현상을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조망하고, 재일코리안 여성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深沢潮, 1966~)의 작품에 나타난 교차적 상상력을 통해 혐오에 저항하 는 대항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후카자와는 2012년 신초샤(新潮社) 가 주최하는 제11회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女による 女のためのR 18文学賞)’에서 가나에 아줌마(金江のおばさん)로 대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등장 한 이래로, 어엿한 아버지에게(ひとかどの 父 へ)(2015), 초록과 빨강(緑と赤) (2015), 애매한 생활(曖昧な生活)(2017), 바다를 안고 달에 잠들다(海を抱いて月に 眠る)(2018),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翡翠色の海へうたう)(2021) 등의 작품을 통 해 여성과 마이너리티, 빈곤 문제 등에 천착해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후카자와의 작품 가운데 헤이트 스피치를 중심적 소재로 다룬 초록과 빨강 및 오 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를 그린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를 대항담론의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8)
8) 초록과 빨강을 논한 주요한 선행연구로는 김계자(2018), 「달라지는 재일코리안 서사: 후카자와 우 시오의 문학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제47집,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p.6386; 심정 명(2022), 「2000년대 이후 일본문학에 나타난 한국인 표상: 한국인 등장인물의 (비)한국성」, 일본비 평 Vol.14 No.2,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pp.154181.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를 논한 학술논문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는 먼저 201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 현상을 인종・젠더의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조망해보기로 한다.
2. 현대 일본사회의 헤이트 스피치 현상과 재일코리안 혐오 : 인종・젠더의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2010년대 이후 일본 사회는 혐오의 급격한 확산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에 대응하기 위해 2019년에 ‘반(反)헤이트를 위한 교차로(反ヘイトのための交差路)’ 를 기치로 내걸고 창간된 잡지 대항언론(対抗言論) 창간호의 권두언에서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杉田俊介)와 사쿠라이 노부히데(櫻井信栄)는 다음과 같이 동시대를 진단한다.
우리는 지금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각기 서로 다른 역사와 맥락을 지닌 인종차별주의(민족차별, 재일코리안 차별, 이민 차별), 성차별(여성차별, 여성혐오, LGBT차별), 장애인 차별(우생 사상) 등이 점차 합류하고 결합하면서 화학변화를 일으키듯 그 공격성을 나날이 더해가 고 있다. (…) 이러한 복합적 혐오의 시대는 앞으로 길게 지속될 것이다”9)
9) 杉田俊介・櫻井信栄(2019), 「巻頭言」, 杉田俊介・櫻井信栄編, 対抗言論─反ヘイトのための交差路 Vol.1, 法政大学出版局, p.3.
이처럼 현재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는 혐오 현상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가 복합적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혐오의 양상에 접근하기 위한 유효한 개념으로 근래 주목받는 것이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이다. 패트리샤 힐 콜리스(Patricia Hill Collins)와 시르마 빌게(Sirma Bilge)에 따 르면, 상호교차성은 “세계, 사람들, 그리고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이해하고 분석하 는 방법”이며, “사회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의 삶과 권력의 구성은 인 종, 젠더, 계급 모두 사회를 나누는 하나의 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동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여러 축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10) . 이 같은 관점에 선다면, 혐오에 저항하기 위한 대항담론을 구축하기 위 해서는 헤이트 스피치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갈래의 정치 역학을 풀어볼 필 요가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201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서 눈에 띠게 확산된 혐 오 담론의 중심에 있는 재일코리안 혐오에 어떠한 역학이 교차하고 있는지를 조감 해보고자 한다. 현대 일본에서 재일코리안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식민지배와 냉전의 역사, 북한의 납치 문제와 경색 된 한일 관계 등 정치・역사적 요인에 더해 인터넷과 뉴미디어 환경의 일상화, 한류 붐과 혐한 담론의 확산, 편향된 미디어 보도와 정치인의 혐오 선동, 역사 수정주의 의 대두, 신자유주의의 진전과 경제적 양극화의 심화, 내셔널리즘과 배외주의의 확 산까지 복수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혐오 정동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 고 있다.11)
10) 패트리샤 힐 콜리스・시르마 빌게 저, 이선진 역(2020), 상호교차성,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p.22.
11)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현상 및 혐한・재일코리안 혐오와 관련한 주요한 선행연구는 다음을 참조. 량영 성(2018),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사회를 파괴하는 혐오표현의 등장과 현상, 산처 럼; 梁英聖(2020), レイシズムとは何か, 筑摩書房; 히구치 나오토 저, 김영숙 역(2015), 폭주하는 일본 의 극우주의: 재특회, 왜 재일 코리안을 배척하는가,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히구치 나오토 저, 김영 숙 역(2016), 재특회(在特会)와 일본의 극우: 배외주의운동의 원류를 찾아서, 제이앤씨; 오구라 기조 저, 한정선 역(2015), 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제이앤씨; 倉橋耕平(2018), 歴史修正主義 とサブカルチャー, 青弓社; 安田浩一・倉橋耕平(2019), 歪 む社会─歴史修正主義の台頭と虚妄の愛国に 抗う, 論創社; 高史明(2021), レイシズムを解剖する─在日コリアンへの偏見とインターネット, 勁草書房; 有 田芳生(2014), ヘイトスピーチとたたかう!─日本型排外主義批判, 岩波書店; 무라야마 도시오 저, 서승 철 역(2020), 아베에서 스가까지 조작되는 혐한 여론: 한국 혐오를 조장하는 일본 언론의 민낯, 생각 비행; 師岡康子(2013), ヘイト・スピーチとは 何か, 岩波書店.
재일코리안을 표적으로 한 물리적 폭력이 현실적인 위협으로 부상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문제는 아니며 관동대지진(1923) 당 시 일어난 조선인 학살을 비롯해 조선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종주의적 폭력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12) . 하지만 근래에는 재특회의 교토 조선제일초급학교 습격(2009), 조총련본부 총격(2018), 우토로의 방화사건(2021) 등 재일코리안을 표적 으로 한 폭력이 빈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위 또한 높아지고 있어 자칫 제노 사이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13)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명백히 인종・민족차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일본 사회에서는 인종차별의 존재 자체가 비가시화되는 기묘한 뒤틀림이 존 재한다는 점이다. 일본 내 대표적인 민족적 소수자(ethnic minority) 집단인 재일코리안, 아이누, 오키나와인에 대한 차별은 모두 유엔(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의해 공인된 ‘인종차별’에 해당한다.14)
12) 량영성(2018),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사회를 파괴하는 혐오표현의 등장과 현상, 산처럼, 제3장 참조.
13) 각주7 참조.
14) 일본인과 재일코리안, 아이누, 오키나와인은 모두 ‘황색인종’이기 때문에 일본에는 ‘민족 차별’만이 있을 뿐 ‘인종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에서 생리학적・유전적 범 주로서의 ‘인종’의 과학적 근거(과학적 인종주의)는 이미 부정되었으며, 오늘날의 ‘인종주의’는 ‘문화 적 인종주의’(Etienne Balibar) 또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라고도 불린다. 즉 과학적으로 ‘인종’은 존재 하지 않으며 ‘인종주의’란 ‘인종화하는 권력 작용’에 다름 아니다. 또한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에 따 르면 “생물학적 분류로서의 ‘인종’, 문화적 분류로서의 ‘민족’, 정치적 분류로서의 ‘국민’은 끊임없이 혼동되며 항상 상호침윤”하므로 이들 사이의 관계는 유동적이고 모호하며, 세 가지 범주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鵜飼哲・酒井直樹・テッサ・モーリス=スズキ・李孝徳(2012), レイシズム・スタディーズ, 以文社, p.16. 량영성(梁英聖)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같은 ‘황색인종’이라는 말 자체가 인종주의”이며, “일본에는 인종차별은 없다”는 발상이야말로 새로운 차별을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梁英聖(2020), レ イシズムとは 何か, 筑摩書房, pp.78.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수차례 권고해 왔다. 하지만 일본은 1995년 유엔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국내 처벌법 제정 요구에는 응하지 않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와 저촉할 위험이 있고 기존의 법률만으로도 대응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일본정부는 유엔 인종차별 철폐위원회에 제출한 2017년 보고서에서도 “일본에는 법률로 금지해야 할 만큼 심 각한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기한 바 있는데, 이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 장이자 일본 사회의 기본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일본의 인종주의를 고찰한 량영성(梁英聖)은 일본 사회의 반인종주의 정책 및 사회적 규범 의 결여가 인종주의의 비가시화를 초래해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침묵 효과’를 낳 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15) 이렇게 본다면, 재일코리안에 대한 혐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 사회 내에 존재하는 인종주의의 가시화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처럼 인종차별 의 삭제에 대항해야만 하는 한편으로,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본다면 재일코리안 혐 오에서 비가시화 되고 있는 성차별주의에도 동시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 본의 페미니즘 연구자 기쿠치 나쓰노.(菊池夏野)는 현재 진행되는 ‘헤이트 스피치’ 현상을 ‘인종차별주의(racism)’로만 해석할 경우 이 현상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인 ‘성차별주의(sexism)’를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16)
15) 량영성(2018), 혐오표현은 왜 재일조선인을 겨냥하는가: 사회를 파괴하는 혐오표현의 등장과 현상, 산처럼, p.23.
16) 菊地夏野(2019), 日本のポストフェミニズム, 大月書店, p.166.
재일코리안 혐오에 성차별주의가 깊이 얽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재일코리안 여성 이신혜(李信恵)의 ‘반(反)헤이트 스피치’ 재판이다. 재일코리안 2.5세 프리랜서 작가 이신혜는 자신을 향해 헤이트 발언을 집요하게 반복해온 재특 회의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 전 회장과 우익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 ‘보수속보(保 守速報)’를 상대로 2014년 8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장에서 사쿠라이 전 재특회 회장은 “야스다 고이치씨도 당신을 비판하는데 왜 이신혜씨를 공격 대상으 로 택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단적으로 “(이신혜 씨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 이 재판에 제출된 원고 측 의견서는, 재일코리안 여성 이신혜가 겪 은 복합차별(複合差別)17)은 민족적 출신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증오, 즉 인종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여성 일반이 겪는 폭력과는 그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 다”는 점을 강조하고, “민족차별・인종차별과 젠더차별의 양쪽에서 표적이 되는 마 이너리티 여성은 마이너리티 남성 이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고”, 또한 민족 적 출신에 대한 강한 혐오감과 증오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 성 차별이 이용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17)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는 1996년에 발표한 「복합차별론(複合差別論)」이라는 글에서 “복수의 차별 이 그것을 성립시키는 복수의 문맥 속에서 뒤틀리거나, 갈등하거나, 하나의 차별이 다른 차별을 강화 하거나 보상하거나 하는 복잡한 관계 속에 있는 차별”을 ‘복합차별’이라고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上野千鶴子(1996), 「複合差別論」, 井上俊ほか編, 岩波講座現代社会学15 差別と共生の社会学, 岩波書 店. 유엔의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보고서에서는 ‘복합차별’과 ‘교차적 차별’이라는 말이 뚜렷한 구분 없 이 사용되어 왔는데, ‘상호교차성’이라는 개념이 비교적 널리 알려지게 된 2018년 이후에는 ‘복합 차 별(multiple discrimination)’ 보다는 ‘교차적 차별(intersectional discrimination)’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일본의 피차별부락(被差別部落) 여성을 연구한 구마모토 리사(熊本理抄)는 상호교차성 개념이 유입되기에 앞서 “페미니즘의 한계나 편향을 묻기 위한 도구가 아닌 ‘복합차별론’이 일본에서 유통 됨으로써 여성차별을 보편적인 문제로 보는 주류파 페미니즘의 억압성이 충분히 검토되지 못했다”고 문제적 상황을 지적한 바 있다. 熊本理抄(2020), 被差別部落女性の主体性形成に関する研究, 解放出 版社, p.357.
즉, “이신혜씨 개인을 지명하여 자행된 헤이 트 스피치란, 단순한 명예훼손도 단순한 민족차별・인종차별도 아니”며, “젠더차별 로 현현(顕現)한 인종차별주의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적 의식을 지님으로써 더욱 치열해진 젠더 차별이라는, 복합차별에 의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18) 이러한 원 고 측 입장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져 결국 원고 이신혜는 2018년 이 재판에서 최종 승소했고,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의 복합차별에 해당한다”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는 복합차별이 법정에서 최초로 인정된 획기적인 판례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판결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재일코리안을 향한 혐오에는 인종주의 와 성차별주의가 얽혀있다고 한다면, 기쿠치 나쓰노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헤이트 스피치와 ‘위안부’ 문제와의 연관에도 주의를 촉구한다. 기쿠치에 따르면, 거리나 인터넷에서 행해지는 헤이트 스피치를 관찰해 보면 대부분의 경우 ‘위안부’ 피해자나 지원운동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포함되는데, 매스컴 등에서 헤이트 스피 치가 문제화될 때에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부분은 이야기되지 않는, 헤이트 스 피치 논의에서의 ‘위안부’ 문제의 소거가 존재한다. 하지만 “헤이트 스피치는 1990 년대에 생겨난 ‘위안부’ 문제 부정 운동, 즉,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 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 会)’의 교과서 위안부 기술 반대 운동을 주요한 원류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헤이트 스피치와 ‘위안부’ 문제의 관련성을 보지 않는다면 현재 일 어나고 있는 문제의 전모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19)
18) 李信恵・上瀧浩子(2018), #黙らない 女たち ─インターネット 上のヘイトスピーチ・複合差別と裁判 で 闘う, か もがわ出版, pp.99100; 李信恵(2015), #鶴橋安寧─アンチ・ヘイト・クロニクル, 影書房. 이신혜의 반헤 이트 스피치 재판 과정은 오소영 감독에 의해 다큐멘타리 영화 <더 한복판으로>로도 제작되었다.
19) 菊地夏野(2019), 日本のポストフェミニズム, 大月書店, pp.165166.
조경희 역시 “일본에서 역 사부정의 대표 세력들이 모두 일본군 ‘위안부’ 부정에 집착했고, 재일조선인들을 왜 곡했고, 동시에 여성혐오를 작동시킨 것처럼 역사부정과 소수자 혐오는 늘 결합되면서 일어나고 있다”고 단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20) 재일코리안 혐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소수자 혐오와 결합된 역사수정주의와 젠더 백래시의 맥락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현대 일본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재일코리안 혐오 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역사수정주의, 혐한과 배외주의 담론까지가 복잡다단하 게 얽혀있는 양상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정치 역학이 복잡하게 교차하 며 작동하는 한가운데에서 재일코리안 여성 작가 후카자와는 어떠한 목소리를 내 고 있을까? 일본에서는 최근 패트리샤 힐 콜리스・시르마 빌게의 상호교차성 (Intersectionality)의 일본어판이 출간(2021)되고 잡지현대사상(現代思想)에 <상호교차성> 특집호(2022.5)가 꾸려지는 등,21) ‘상호교차성’은 일종의 ‘지적 유행’과도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22) 그런데 이 개념의 수용 양상을 살펴보면, ‘상호교차성’ 이 주목받으면서도 인종에 관한 논의가 적고, ‘상호교차성’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에 축적된 일본 마이너리티 여성들의 운동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 다. 이와 관련하여 아이누민족 루츠를 지닌 문화인류학자 이시하라 마이(石原真衣) 는, 상호교차성 개념이 본래 블랙 페미니즘을 중요한 원류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일본에서는 상호교차성 논의에서 인종의 측면이 빠져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일 본적 문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 안에는 ‘백인’적 일본인과 ‘흑 인’적 일본인이 있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고,. 일본의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이러한 마이너리티 여성들──‘재일’ 여성(…)이나 아이누 여성(…), 피차별부락 여성 운동 등으로부터 강한 비판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페미니스트는 여전히 자신들의 인종적 특권성 = ‘백인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일본 주류 페미니스 트의 무의식화된 인종주의를 꼬집은 바 있다.23)
20) 조경희(2021), 「마크 램지어의 역사부정과 소수자 혐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재일조선인, 부라쿠 민 서술 비판」, 여성과 역사 34, 한국여성사학회, p.115. 히구치 나오토(樋口直人) 역시 혐한・재일코 리안 혐오의 주요한 요인으로 역사수정주의를 꼽는다. 히구치 나오토, 김영숙 역(2015), 폭주하는 일 본의 배외주의: 재특회, 왜 재일 코리안을 배척하는가, 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21) パトリシア・ヒル・コリンズ, スルマ・ビルゲ著, 小原理乃訳(2021), 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 人文書院; 現代 思想 505, 2022.5, 青土社.
22) 森山至貴(2022), 「「今度はインターセクショナリティが流行ってるんだって?」」, 現代思想 505, 青土社.
23) 石原真衣・下地ローレンス吉孝(2022), 「インターセクショナルな「ノイズ」を鳴らすために」, 現代思想 505, 青土社, p.12
2010년대 중반 이후일본에서도 #MeToo의 확산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재주목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는 한국 페미 니즘(‘K페미니즘’)과도 접속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24) 재일코리안 여성의 목소리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논의는 충분히 가시화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어왔다.
24) 자세한 사항은 조경희(2019),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 음」, 여성문학연구 47, 한국여성문학학회; 김지영(2022), 「여성 없는 민주주의와 ‘K페미니즘’ 문학 의 경계 넘기: 일본에서의 82년생 김지영 번역수용 현상을 중심으로」, 일본학 57, 동국대학교 일 본학연구소 등을 참조.
그러한 점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재일코리안 여성 작가로 주목받는 후카자와가 어떠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는 더욱 주목된다.
다음으로 헤이트 스피치와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를 그린 두 작품을 통해 후카자와가 시도하는 대항담론을
살펴보 기로 한다.
3. 초록과 빨강의 교차적 시점을 통해 본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현상
재일코리안 2.5세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는 재일문학의 새로운 목소리로 주목받 는 작가이다.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김계자는 “재일코리안의 일상을 담담하고 유머 러스하게 그리고 있어 재일코리안 문학에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알”린 작가25)로 자 리매김하고 있고, 사쿠라이 노부히데는 순문학이 주류를 이뤘던 재일코리안 문학에 “대중소설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대표적 사례로 후카자와 우시 오를 꼽은 바 있다26) . 이러한 평가에서도 보여지듯이 후카자와의 작품은 ‘무겁지 않게’ 읽히지만, 주제적으로 볼 때 사회의식을 담아낸 작품이 많다. 후카자와는 근 래 작품 활동과 사회적 발언을 통해 혐오의 확산에 대항하는 행보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화제가 되었던 것은 잡지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쇼가쿠칸 발행)에 대한 에세이 연재 중단 사태이다. 2010년대에 지속된 혐한 서적 붐 속에서 일본의 대표적 주간지 가운데 하나인 주간 포스트는 2019년 9월 <한국 따위 필요 없다(韓国なんて 要らない)> 특집호를 발행했다.27)
25) 김계자(2018), 「달라지는 재일코리안 서사: 후카자와 우시오의 문학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47,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85.
26) 康潤伊・櫻井信栄・杉田俊介(2021), 「在日コリアン文学15冊を読 む」, 対抗言論─反ヘイトのための交差路 Vol.2, 法政大学出版局, p.140.
27) 週刊ポスト, 2019.9, 小学館. 주간 포스트는 1969년 창간되었고 ‘일반 주간지’로 분류된 잡지 가운데 4번째로 판매 부수가 많은 잡지이다. 잡지를 발행하는 쇼가쿠칸(小学館)은 1922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출판사로 만화책과 어린이용 학습용 서적을 중심으로 출판한다.
이 특집호의 지면에는 “혐한이 아 닌 단한(断韓)”, “귀찮은 이웃에 안녕” 등 한국과의 단교를 주장하는 기사뿐만 아니라 “분노를 참지 못하는 ‘한국인이라는 병리(病理)’”와 같이 자칫 우생학적 발상으 로 이어질 수 있는 인종주의 담론까지, 혐한 및 재일코리안 혐오를 부추기는 내용 의 기사들이 대거 게재되었다. 이에 당시 해당 잡지에서 에세이 연재를 이어가던 후카자와는 SNS에 “차별선동을 간과할 수 없다”는 비판 글을 올리고, 항의의 뜻으 로 에세이 연재 중단을 선언했다.28) 후에 후카자와는 이 사태와 관련해, “차별이나 불합리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 근거가 위태로운 국민성, 자질성의 문제로 돌려 버리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다29) . 이 밖에도 후카자와는 반헤이트 활동을 위해 결성된 단체 노리코에넷또(のりこえ ねっと)가 발간한 반헤이트 만화 당신과 나와 헤이트 스피치(あなたと 私とヘイトス ピーチと)(2015)30)의 원작 원고를 집필하고,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 제정 5주년을 맞아 2021년 5월 ‘인종차별철폐기본법을 추구하는 의원 연맹(人種差別撤 廃基本法を求める議員連盟)’이 주최한 모임에 초청받아 ‘차별금지법’ 조기 제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맡는 등 반혐오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31) 후카자와의 문학 작품 은 이와 같은 일련의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초록과 빨강과 관련해 작가는, “헤이트 스피치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그것으 로 인해 상처받는 현실의 사람들의 모습에 다가서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기호(記号)적인 해석에서 누락되는 것들을 이 이 야기가 조금이나마 건져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람을 이야기한 바 있다32) .
28) 「週刊ポストの下劣ヘイト記事「韓国人という病理」に作家たちが 怒りの抗議!ヘイト企画は「小学館幹部取 締役の方針」の内部情報」, 2019.09.02. https://litera.com/2019/09/post4941.html (2023.02.17. 검색). 후카자와 외에도 재일 작가 유미리(柳美里)를 비롯해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内田樹)와 작가 하마나카 아키 (葉真中顕) 등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일본의 신문들 역시 사설을 통해 “일본 사회에 만연한 한국인 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 감정에 아첨했다”(마이니치 신문(毎日新聞))고 비판하고, 잡지 해당호의 회 수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촉구(도쿄신문(東京新聞))했다. 이처럼 특집호의 파장이 커지자 주간 포스트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입장의 사죄문을 출판사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29) 「[전문] “영혼의 살인 헤이트 스피치를 멈춥시다” 재일동포 작가의 호소」, 한국일보, 2021.06.04.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60319020003205 (2023.02.17. 검색)
30) 深沢潮原作, 今川小豆作画(2015), あなたと 私とヘイトスピーチと, のりこえねっと.
31) 위의 글.
32) 深沢潮, 「11月の新刊赤と緑に寄せて ヘイトスピーチに遭ったそのときに……」, https://jnbooks.jp/novel/co lumnDetail.php?cKey=49 (2023.02.17. 검색). 초출은 月刊 ジェイ・ノベル, 2015.12, 実業之日本社.
소설 초록과 빨강은 일본에서 헤이트 시위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2013년에서 2014년 봄 무렵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 후카자와가 실제로 신오쿠보의 헤이트 스피치를 목도하고 집필했다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재일조선인 4세 여대생 지영/치에(知英), KPOP을 좋아하는 지영의 친구 아즈사(梓), 신오쿠보 카페에서 일 하는 한국인 유학생 준민(ジュンミン), 차별선동 데모 단체에 대한 카운터에 열정을 기울이는 중년 여성 요시미(吉美), 서울 유학 중인 재일코리안으로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류헤이(龍平)라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의 교차하는 시선을 통해 일본 사회의 혐오와 헤이트 스피치, 재일코리안의 정체성 갈등 을 그려낸다. 소설은 다섯 명의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타이틀이 달린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며(주인공은 일본식 통명 ‘치에’와 한국명 ‘지영’으로 첫 장과 마지막 장을 구성), 각 장 마다 주요인물 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다양한 인물 군상의 반응과 내면을 비춰내는 서사 구조를 취 한다. 이와 관련해 후카자와는, “차별이라는 현상이 있을 때 그 원인을 생각하는 것 도 물론 중요하지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피해 양상이나 그 마음속을 아는 것이 이해를 위해서는 특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초록과 빨강에서 는 헤이트 스피치와 맞닥뜨린 재일코리안 여대생과 그 주변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 임을 그리고 있다”33)고 집필 의도를 밝힌 바 있다. 한국 국적을 지닌 재일코리안인 주인공 지영은 16살이 될 때까지 자신이 ‘자이니 치’임을 모른 채 ‘일본인’으로 자랐고, 자신의 출신 배경을 알게 된 후에도 ‘가네다 치에(金田知英)’라는 통명을 사용하며 한국인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다. 재 일동포 커뮤니티나 친척과의 교류도 없이 지내온 그녀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는 외국의 것처럼 낯설게 다가올 뿐이며, ‘자이니치’라는 뿌리 역시 “무언가 성가신 존 재”라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인식된다.34)
33) 「傷つけられる、心の内は─ヘイト解消法5年 深沢潮さんおすすめ 差別を考える6冊」, 2021.06.07, https://w ww.tokyonp.co.jp/article/109093 (2023.02.17. 검색)
34) 深沢潮(2019), 赤と青, 小学館, p.12.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로 표기한다.
이 때문에 그동안 자신의 뿌리를 외면하며 지내온 지영은 대학 친구 아즈사와 해외여행을 계획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재일 코리안의 정체성과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해외여행을 위해 처음으로 발급받은 녹 색 한국 여권은 마치 지영에게 “당신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라고 선 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제목의 ‘초록’과 ‘빨강’은 각각 한국과 일본의 여권 색상을 상징하며, 이 작품의 서사는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 지 못하는 ‘자이니치’의 입지와 정체성 갈등을 그려낸다. 정체성을 둘러싼 지영의 혼란과 불안은 KPOP을 좋아하는 일본인 친구 아즈사 를 따라 처음으로 찾은 신오쿠보에서 헤이트 시위대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더욱 증 폭된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2013년의 ‘신오쿠보’는 한류(韓流)팬들이 모이는 ‘KPOP의 성지(聖地)’이자 헤이트 시위대와 카운터 부대가 격렬히 맞부딪히는 현장이 다. 한국 음식점과 상점이 늘어선 신오쿠보의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를 헤이트 시위 대가 활보하는 정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대열을 이룬 집단이 다가왔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대열 바깥쪽을 기동대가 걸어가고, 다시 그 주위를 사람들이 에워싸고 고함치거나 욕 설을 퍼붓고 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여기서는 잘 알 수 없고, 대열을 이룬 사람 들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스피커로 외쳐대는 여성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왔다. “조센징(한반도 출신자를 비하하는 멸칭–필자 주)” “한국인” 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들 린다. “죽여 버려” “목매달아 죽이자” “서울 거리를 불태워버리겠어” “신오쿠보에 가스실을 만들겠어” 귀를 틀어막고 싶어지는 말이 되풀이되고, 치에의 가슴은 미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21)
시위대가 외쳐대는 “날 것 그대로의 증오”가 담긴 말들에 충격을 받은 치에는, “평소에는 재일코리안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낼 정도니까 나와는 관계없다”고 되뇌 며 애써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려 하지만, 이 날 이후 헤이트 시위 장면이 뇌리 를 떠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모든 일본인들이 혐오 선동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헤이트 시위대의 반 대편에는 이들을 애워싼 카운터 부대도 있다. 카운터 데모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폭력적인 차별 발언을 내뱉는 시위대를 향해 “돌아가, 돌아가”라고 고함치며 항의 하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사이좋게 지내요(仲よくしようぜ)”라는 문구가 적힌 카드 를 나눠주기도 한다. 소설의 서사는 카운터 데모에 참가하는 일본인 요시미의 시선 을 통해 헤이트 시위대와 카운터 부대가 격돌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군마 현(群馬県)에 거주하는 중년 여성 요시미는 KPOP 팬으로 SNS를 통해 알게 된 아 즈사와 함께 신오쿠보를 찾았다가 헤이트 시위를 목도하고 이후 카운터 활동에 열 정적으로 합류하게 되는 인물이다. 헤이트 시위대를 바라보는 요시미의 내면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바퀴벌레, 구더기”, “조센, 돌아가”, “일본에서 내쫓자”, “조 선 여자를 강간해” 같은 말들을 태연하게 하는 모습이 떠올라 한번 진정되었던 분노가 다시 올라온다. 사진을 찍으려고 요시미가 데모대에 스마트폰을 들이대니, 중년 남성이 추녀, 아줌마 하며 욕을 퍼붓는다. 반대로 요시미를 집요하게 촬영하는 놈도 있다. ‘바~보, 바~보’하고 유치한 말을 내뱉는 남자도 있었다. 그래도 요시미는 괜찮아,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카운터를 계속했다. 적어도 나는 죽 어, 죽이자 하고 그들이 말하는 대상인 코리안이 아니다. 면전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해봤 자 초등학생 수준의 모욕이니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강하게 먹고 시위에 맞선다. (…) 그런데도 그들의 말에 깊이 상처 입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마음을 안고 반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함께 카운터를 하고 있는 동료들 중에도 재일코리안 은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역시나 당사자에게는 인종차별주의자와 직접 마주해야 하는 카운터는 너무 힘들어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앞에 서서 그들과 맞서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집단의 만행이 내가 생활하는 사회 속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다. (149150) 헤이트 시위대가 외치는 “바퀴벌레, 구더기”는 동물적 속성을 특정 집단이나 개 인에게 전가하는 전형적인 투사적 혐오 표현이며,35) “조선 여자를 강간”하라고 외 쳐대는 선동형 헤이트 스피치에는 명백히 성차별주의가 얽혀 있다.
35) 마사 누스바움 저, 강동혁 역(2016), 혐오에서 인류애로, 뿌리와 이파리, pp.5355.
이러한 공격은 “한국 것을 좋아하는 여성들을 매춘부라고 부른다”(68)거나, 카운터에 참가하는 요 시미를 “추녀, 아줌마”, “너 총(チョン, 한반도 출신자에 대한 강한 멸칭 표현필자 주)이지?”라고 모욕하는 발언에서 보이는 것처럼, 헤이트 스피치에 반대하는 일본 인에게도 향한다. 헤이트 시위를 목도한 요시미는 “그야말로 보통의 사람들”이 일종의 놀이처럼 “너무나 캐주얼”하게 차별에 가담한다는 사실에 내심 충격을 받으면서도, 헤이트 스피치의 표적이 된 재일코리안의 상처 입은 마음을 이해하려 하고, 나아가 “내가 하는 일은 필요한 일이다. 코리안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사회, 일본인을 위해서다”(155)라고 생각하며 헤이트 시위대에 맞선다. 소설의 내면 묘사에 따르면, 요시미가 카운터 운동에 몰입하게 되는 동기는 단순히 재일코리안을 향한 이타주 의적 감정이나 시민적 정의감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과 이혼한 뒤 친정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는 요시미는 “북칸토(北関東)에 사는 별 볼 일 없는 중년 여자”(153)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카운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 고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소설의 묘사는 그러한 요시미의 욕망 을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중년 여성으로 겪는 사회적 소외 감과 일상 속 곳곳에서 경험하는 여성혐오를 조명함으로써 일본사회 내에 존재하 는 다양한 편견과 혐오로 시야를 확장하기도 한다. “요시미가 속한 사회는 속성에 따라 사람을 구분 짓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156). 다른 한편으로 이 소설의 묘사는 대항운동이 직면하는 어려움도 비춰낸다. 카운터 활동에 적극 동참하게 되는 요시미와는 달리, 작품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방관과 무관심이다. 이를테면 지영과 아즈사가 다니는 대학의 일본인 친구들은 대부분 헤이트 스피치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며, 한국문화에 도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아즈사의 한류 팬 친구로 KPOP 아이돌이 즐겨 입는 브랜 드와 ‘얼짱 메이크(オルチャンメイク)’를 좋아하고 신오쿠보와 서울을 즐겨 찾는 하나에 (はなえ)조차, 카운터 활동이 발신하는 트위터에 대해서는 “교장 선생님 설교 같달까. 도덕 시간에 하는 얘기들인가? 하는……차별은 안돼요, 라니 당연한 소리를 언제까지 나 하고 있고. 너무 정의감 넘쳐서 거부감 들어. 그게 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다 하고 어필하고 싶은 거 아냐?”(8384)라며 거부감을 보인다. 아즈사는 헤이트 시위에 대한 “강한 분노의 감정”(85)은 있지만, 그와 동시에 헤이트 스피치를 반격하는 카운터 부 대의 트윗에 대해서도 “누구를 향한 것이건 더러운 언어나 과격한 말들, 공격적인 표 현을 보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느낀다. “내 타임라인에는 좋은 것, 귀여운 것, 근사한 것, 모에(萌え) 같은 기분 좋은 말들만 있었으면 좋겠다”(89)고 생각하는 아즈 사는 내심 카운터 트윗에 대한 하나에의 반응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재일코리안 인 지영을 친구로 두고 있고, 신오쿠보에서 만난 한국인 유학생 준민과 이성친구로 교제하게 되는 아즈사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대항과 방관 사이에서 시종일관 갈등 하는 양상을 보이며 용기를 내서 카운터 시위에 참가해 보기도 하지만, 헤이트 시위 대를 막기 위해 도로 위에 드러눕는 ‘싯 인’ 전술을 펼치는 카운터 부대의 거친 시위 방식에는 두려움과 함께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신오쿠보에 올 때에는 즐겁 고 기쁜 마음만 느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98). 이러한 장면 묘사에서는 KPOP을 향유하는 젊은 세대는 재일코리안과 한국인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에 대항하는 데에는 소극적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PC 주 의’에 대한 거부감을 안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한류 팬 아즈사나 한국인 유학생 준민은 한국과 일본의 상대국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하 며 인적교류를 통해 서로 활발히 접촉하지만, 이 사실이 곧바로 혐한・재일코리안 혐오현상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서 지영이 “KPOP이나 한류와 자이니치는 전혀 다른 문제”이며, “재일코리안이라는 존재 자체가 일본의 부(負)의 역사를 추궁당하는 것 같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회피하고 싶어지는 것”(267)이라 고 생각하는 것처럼, 재일코리안을 향한 차별과 혐오에는 역사성이 깊이 얽혀있다. 또한 다카 후미아키(高史明)가 한류 붐을 경험한 2010년대 일본에서 한국인은 “가 장 중요한 부정적인 타자”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듯이,36) ‘혐한’은 한류와 한 일문화교류의 활성화를 배경으로 나타났다는 사실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36) 高史明(2015), レイシズムを解剖する ─在日コリアンへの偏見とインターネット, 勁草書房, pp.184185.
그렇다면 아즈사보다 윗세대의 일본인들은 어떨까? 아즈사를 통해 헤이트 시위 대의 영상을 접한 아즈사의 부모는, “일부 이상한 사람들이 하는 일일 뿐이니 내버 려두면 된다”(70)라고 응하며, 요시미의 모친은 필리핀인 이주 여성인 며느리와 지 역 사회에 거주하는 일본계 브라질인 이민노동자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인에 대 한 차별적 인식을 서슴없이 내비친다. 또한 젊은 시절 학생운동에 치열하게 참여했 던 요시미의 삼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1960년대에 활발했던 좌익운동이 실패한 경험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운동에 대한 기피감을 안고 있는 기성 세대의 모습이다. 다시 지영의 묘사로 돌아가 보면,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 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지영의 모습이 그려진다. 헤이트 스피치에 상처 입은 지영의 눈에 비친 “2014년 봄의 일본”은 견디기 힘든 장면들로 가득하다. TV를 켜면 뉴스 프로그램 특집에서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반일(反日)적 행동”이 대대적으로 보도되 고 있고, 전철 안 광고에는 “한국을 폄하하는 표제어들”이 즐비하다. 혐한 책이 “잘 팔리는 책 랭킹”에 들어가 있어 서점에 들어가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은 혐 오발언이 가장 노골적으로 분출하는 공간이다. 포털 사이트 메인 뉴스에 뜬 한국 관 련 뉴스의 댓글창은 차별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헤이트 스피치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지영은 재일코리안에 대한 낙인의 내면화와 자기혐오에 괴로워하며 헤이트 시위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다음은 지영이 시부야 거리를 걷다가 문득 헤이트 스피 치 시위 장면이 머릿속에 플래시백 되면서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장면이다.
시부야(渋谷)거리는 봄방학이라서 그런지 꽤 혼잡했다. 목적지인 샵을 향해 스크램블 교차로의 인파를 가르며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막혔다. 만약 큰 재해가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동대지진 때처럼 갑 자기 나를 습격하고 학살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 신오쿠보 (新大久保)에서 시위대가 “조선인을 죽여버려” 하고 외치던 모습이 머릿속에 플래시백 된다. 진땀이 난다.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너고 멈춰 섰다. 심호흡을 반복하고 간신히 숨을 고른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조금 진정되었을 때 지하 도로 내려가 쇼핑을 포기하고 전철을 탔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도망칠 곳도 없는 밀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한국인을 증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같은 또래 여성의 얼굴이 아즈사의 얼굴이 되어 무서운 표정으로 “한국인 싫어”, “한국인 죽어버려” 하고 증오심을 담아 말한다. 서둘러 눈을 감지만 심장이 뛰어 손잡이 를 붙들고 간신히 서 있는 상태가 된다. (260261)
후카자와에 따르면 이러한 장면 묘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작가는 실제로 자신의 조부(祖父)가 관동대지진 당시 살해당할 뻔했던 재해 생존자였다는 사실을 언급하 면서, 그러한 기억을 지닌 재일코리안들에게 소설 속 인물이 느끼는 공포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라고 응답하기도 했다.37)
37) 「深沢潮さん「戦時下の女性たち ―その 後に続く差別」」, Radio Dialogue, 2021.09.01., https://www.youtube.c om/watch?v=zqCzaYwhfZo (2023.02.17. 검색)
이처럼 소설 초록과 빨강은 다양한 인물 군상을 통해 혐오와 반혐오 세력이 팽팽히 길항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비춰내고 헤이트 스피치가 당사자들에게 야기하는 고통을 생생히 그려낸다. 그렇다면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경 계를 넘어 상호 이해에 이르고 있을까? 재일코리안으로서의 정체성 갈등과 헤이트 스피치의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지영을 지켜보던 일본인 친구 아즈사는 작품의 결 말부에서 아직 깊은 이해에는 이르지는 못하지만 지영의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서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지영과 같은 세대로 일본인으로 귀화한 재일코리안 류헤이의 주 변 일본인 중에는 미디어와 인터넷에서 접한 편향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믿고 ‘재일 특권’을 비난하며 차별적 발언을 내뱉는 친구도 있지만, 류헤이를 통해 헤이트 스피 치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류헤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을 껴안게 되는 친구 역시 그려진다. 재일코리안과 일본인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하 지만, 이제 막 이해를 향한 출발선에 선 듯한 결말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상으로 살펴본 것처럼, 후카자와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의 교차적 시선을 통해 헤이트 스피치가 당사자들에게 야기하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일본인 등장인물 이 점차로 재일코리안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혐오에 대한 대항담 론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항담론은 어느 정 도 유효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무엇보다 작품 속 대부분의 일본인 등장인물들이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보이는 무관심이 현대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들의 평균적 반 응이라고 본다면, 헤이트 스피치의 실상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문 학적 서사의 의미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여기서 주목하고 싶 은 것은 문학적 대항담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후카자와가 택한 재현 전략이다. 작 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것은, ‘자이니치’라는 말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읽 힐 수 있도록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전략이다. 후카자와는 이러 한 전략을 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소설을 쓸 때 차별이나 빈곤과 같은 무거운 테마를 다루게 되더라도, 독자가 읽기 전 에 각오가 필요해지는 이야기로 만드는 것은 피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이니치가 뭐 야?’라는 정도의 인식을 지닌 사람이라도 소설 세계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의식 해서 쓰고 있습니다. 일본은 동질(同質) 사회라서 자신과 같은 것에 대한 공감은 매우 높은 반면,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감정이입하는 것은 좀처럼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는, 재일코리안 설정의 등장인물이라 할지라도 독자가 ‘나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 설정이나 묘사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 독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고, 비슷 한 생각을 하거나 비슷하게 느끼거나 하는 등장인물을 그림으로써, 읽는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느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재일코리안을 테마로 하는 이야기가 많다고 해서, 거기에 정치적인 의도는 없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고민하는 여성의 이야기나 가족 갈등의 이야기의 무대로서, 저에게 인 연이 깊은 재일코리안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의 진정한 테마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민이나 갈등 쪽에 있습니다.38)
38) 「翡翠色の海へうたう刊行記念対談 深沢潮×内田剛」, 2021.12.02. https://shosetsumaru.com/special/quila la_special/fukazawa_uchida (2023.02.17. 검색)
재일코리안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내는 경 향은 후카자와의 다른 작품에도 공통적으로 보인다고 할 수 있는데,39) 위의 발언에 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후카자와는 일본인 독자가 작품 속 재일코리안 등장인물들 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일본인들과의 동질성에 호소하면서 일본의 주류사 회가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으로 자이니치의 문제를 전달하고, 작 품에 정치적인 의도가 없음을 강조한다.
39) 후카자와의 성장 배경은 자이니치 커뮤니티와는 거리를 두고 일본인 학교를 다니면서 통칭명(通名)으 로 생활해 왔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의 자이니치 작가의 전형과는 다르다. 후카자와는 자신의 재일코 리안 재현과 관련해, ‘재일동포’라고 하면 “민족학교를 나오고 집단 거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 실제로 재일동표의 80~90%는 자기가 재일동포라고도 말하지 않고 사는 사람 들”이라고 하면서, “재일동포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특별한 환경에 있는 사람으로 표상되기 쉽지 만 저는 평범한 한 시민이라든가, 생활하고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 아이라든가, 다른 사람들과 아무 차이도 없는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재일동포를)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야기 꽃이 피었습니다] 재일동포의 ‘일상’을 쓰는 작가」, 2018.07.29. https://m.news.zum.com/articles/46668384 (2023.02.17. 검색). 이와 같은 후카자와의 재현의 경향과 관련해 스기타 슌스케는 “대중의 무의식을 잘 포착한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자이니치 문학”이라고 평하면서, 하지만 “일본적 전통에 뿌리를 둔 생활리얼리즘으로 쉽게 감정적으로 공감되어버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불안감이 남는다고 우 려를 표한 바 있고, 강윤이(康) 역시 ‘세련된’ 자이니치 묘사를 특징으로 꼽으며 “나이브하고 감상적” 인 색채를 지적한 바 있다. 康潤伊・櫻井信栄・杉田俊介(2021), 「在日コリアン文学15冊を読む」, 対抗言 論─反ヘイトのための交差路 Vol.2, 法政大学出版局, pp.140142.
그런데 이처럼 동질성에 기댄 서사 전략은 일본인 독자의 공감을 손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자칫 재일코리안의 경험을 매 저리티 일본인들이 쉽게 이해 가능한 표준화된 아픔으로 환원시킬 수도 있는 양가 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은 아닐까? 이는 일본 주류 사회에서 작동하는 내집단에 대한 동조 압력을 강화시켜 일본 내 소수자 혐오 재생산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도 경계가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다음으로 살펴볼 비 취색 바다에 노래하다의 서사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4.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가 그리는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민족・젠더・계급의 교차와 연대의 모색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는 가도카와쇼텐(角川書店)이 발행하는 문예 웹진 「카 도분 노베루(カドブンノベル)」에 연재된 후 202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장편 소설이 다.40)
40) 초출은 가도카와쇼텐(角川書店)의 전자서적 문예지인 「カドブンノベル」(2020년 1월호, 4월호, 9~12월호). 단행본은 深沢潮(2021), 翡翠色の海へうたう, 角川書店. 이하 이 책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쪽수 로 표기한다.
후카자와는 이 소설에서 조선인 위안부와 오키나와로 차별과 혐오의 주제를 확장해 보인다.
재일코리안 문학에서 오키나와 주제와의 교차는 새로운 시도이며, 소설이 담고 있는 마이너리티 간 연대의 주제나 위안부 서사의 측면에서도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이 소설의 서사는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와, 동시대 일본 을 살고 있는 20대 작가 지망생으로 취재 차 오키나와를 방문한 일본인 여성의 서 사를 교대로 그려낸다. 후카자와는 이러한 서사 구조를 택한 이유에 대해, “위안부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춰 그녀의 인생을 시간 순서로 그려내는” 구성도 가능했지만,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로 위안부의 인생을 그리고 싶지 않았”고, 위안부 문 제는 현재 여성들이 안고 있는 젠더 문제와도 이어져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발언한 바 있다.41) 특이한 점은 작가와 같은 재일코리안이 아닌 일본인 여성을 작품의 주요 시점인물로 설정했다는 점인데, 후카자와는 작가 자신 이나 조선인 위안부에 더 가까운 재일코리안이 아닌 일본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 정한 이유와 관련해, 같은 소재의 작품을 처음에는 재일코리안을 주인공으로 하는 중편 소설로 집필했었으나 결국 어디에도 정식으로 게재가 되지 않았고, 후에 작품 을 장편소설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편집자와 상의하여 독자에게 더 가까워지는 쪽으로 인물 설정을 조정했다고 집필 경위를 밝힌 바 있다.42) 독자의 감정이입이 용이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43)
41) 「時代を超えて共鳴する 想い 深沢潮氏インタビュー 翡翠色の海へうたう刊行を機に」, 読書人WEB, https:// dokushojin.com/reading.html?id=8426 (2023.01.30. 검색). 초출은 週刊読書人 (2021.09.24).
42) 「インタビュー 他人が差別されていることを見過ごすことに、居心地の悪さを感じない社会―翡翠色の海へう たうから 考えるレイシズム、女性差別の問題(深沢潮さんインタビュー)」, 2021.9.28. https://d4p.world/news/12 926/ (2023.02.17. 검색)
43) 이는 대중소설 독자층을 주요 타깃으로 하는 카도카와쇼텐의 성향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오키나와전과 ‘위 안부’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는 만큼 독자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자 고심한 흔 적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류큐처분(1879)에 의해 일본에 병합된 이래로 일본 내 ‘내부 식민지’와도 같은 역사를 걸어온 오키나와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치러진 오키나와에서는 주민의 4분의 1 가 량이 희생되었고, 전후에는 일본 영토 총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 주일미 군 시설의 75%가 집중되어 있어 미국과 일본에 의한 중층적 폭력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제국일본의 또 다른 피지배 민족이었던 조선인의 시선에 서 본다면, 오키나와는 가해와 피해가 중첩되고 차별과 피차별이 착종된 공간이기 도 하다. 오키나와의 조선인을 사료 발굴을 통해 추적한 오세종(呉世宗)의 연구에 의하면, 태평양전쟁 당시 오키나와 본도를 비롯해 미야코섬(宮古島), 이시가키섬(石 垣島), 이에섬(伊江島), 게루마섬(慶留間島), 도카시키섬(渡嘉敷島), 다이토섬(大東 島) 등에는 주민들의 가옥을 접수하거나 참호를 이용해 만들어진 ‘위안소’가 140곳 이 넘게 설치되어 있었다.44) 당시 오키나와에 있었던 위안부는 약 1000명 정도로 추정되나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으며, 최초의 위안부 피해 증언자로 알려진 배봉 기(裵奉奇) 외에는 피해 여성들의 삶 역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는 이처럼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해내려고 한 문학적 시도라 할 수 있으 며, 이는 역사수정주의에 맞서는 대항담론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 이다. 후카자와는 “아무래도 위안부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왠지 ‘건드려서는 안되 는 것’이라는 감각이라든지, 어떤 특정한 종류의 감정을 환기”하는 상황이 일본 사 회에 만연해 있는데, “실제로 그곳에 어떤 삶이 있고 사람들이 있었는지”를 그려내 고 싶었다”45)고 집필 동기를 설명한 바 있어 이러한 맥락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카자와는 오래 전 여행으로 오키나와의 전쟁 유적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오 키나와전의 참혹했던 실상을 알게 되었고, 후에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 서 이 작품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취재를 위해 아카섬(阿嘉島)을 찾아 위안소 여성들을 돌보았던 오키나와 여성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초록과 빨강 집필 당시 한국을 취재했을 때 ‘나눔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46) 또한 작가는 “지금까지 썼던 많은 작품과는 달리 오키나와전도 위안부도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기에 더욱 철저히 사전조사를 하고 집필에 임했다”고도 발언했는 데,47) 소설 말미에 수록된 참고문헌 목록은 작가가 증언을 폭넓게 섭렵하고 작품을 집필했음을 짐작케 한다.
44) 呉世宗(2019), 沖縄と朝鮮のはざまで─朝鮮人の<可視化 /不可視化>をめぐる歴史と語り, 明石書店, p.42.
45) 「インタビュー 他人が差別されていることを見過ごすことに、居心地の悪さを感じない社会―翡翠色の海へう たうから 考えるレイシズム、女性差別の問題(深沢潮さんインタビュー)」, 2021.9.28. https://d4p.world/news/12 926/ (2023.02.17. 검색)
46) 「時代を超えて共鳴する 想い 深沢潮氏インタビュー 翡翠色の海へうたう刊行を機に」, 読書人WEB, https:// dokushojin.com/reading.html?id=8426 (2023.01.30. 검색). 초출은 週刊読書人(2021.09.24.).
47) 「時代を超えて共鳴する 想い 深沢潮氏インタビュー 翡翠色の海へうたう刊行を機に」, 読書人WEB, https:// dokushojin.com/reading.html?id=8426 (2023.01.30. 검색). 초출은 週刊読書人(2021.09.24.); 「インタビュー 他人が差別されていることを見過ごすことに、居心地の悪さを感じない社会―翡翠色の海へうたうか ら考えるレイシズム、女性差別の問題(深沢潮さんインタビュー)」, 2021.9.28. https://d4p.world/news/12926/ (2 023.02.17. 검색)
비당사자가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의 삶에 육박해나가 는 작가의 집필 과정은, 소설 텍스트 내 서사 구조와도 겹쳐진다. 이 소설의 서사는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와 현대 일본을 사는 20대 작가 지망생 일본인 여성의 서사를 교대로 그려낸다. 즉 당사자 시점과 역사를 추체험하는 비당사자 시점이 교 차적으로 그려지도록 설정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이 소설은 포스트 증언 시대의 위안부/오키나와 서사가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다음과 같 은 질문들을 탐구한다. 당사자가 아닌 이가 써도 되는가? 왜 쓰려고 하는가? 당사자 란 누구인가? 비당사자인 일본인이 위안부/오키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어 떻게 가능한가? 이 책의 일본어판 띠지에는 “나라도 시대도 성별도 모든 경계를 넘 어서 가라”라는 광고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그렇다면 혐오에 저항하는 경계 넘기 는 가능한가? 또는 어떻게 가능한가? 소설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가와이 하나(河合葉奈)는 도쿄에 있는 회사에 계약 직 사원으로 근무하며 소설가를 지망하는 30대 일본인 여성이다. 그녀는 어느 날 인터넷상에서 한 KPOP 아이돌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디자인하고 수익의 일부를 학대 피해 아동 지원을 위해 기부한다는 모 브랜드의 옷을 입고 올린 SNS 글이 악플 세례를 받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고, 이를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에게 관 심을 갖게 된다. 하나는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야말로 신인상 공모전에서 승부 를 걸 만한 절호의 소재임을 확신하게 되고, 작품 집필을 위한 취재 차 오키나와로 떠난다. 다음은 하나가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를 주제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 는 장면이다. 성차별과 성폭력……. 그러고 보니 요즈음 SNS에서는 me too 글이 자주 보이고, 뉴스 기사에서는 성차별이 나 성폭력과 관련된 것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이번에는 위안부라는 단어를 검색해본다. 한국, 전쟁, 배상과 같은 단어들이 많이 보 인다. 매춘부, 날조, 소녀상 등의 말도 보이고, 정보량이 너무나 방대하다. 그 날은 인터넷 기사를 닥치는 대로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한 숨도 못 잔 채로 아침 을 맞이했다. 조사를 해보니 오키나와에 위안소가 있었고, 목격 증언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지상전의 무대가 된 오키나와.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불쌍한 여성들. 마치 퀴즈에서 정답을 맞춘 것처럼, 머릿속에서 힘차게 종이 울렸다. 찾았다. 이것이다. 이 제재야말로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여성들 역시 자신들이 겪은 피해를 알리고 싶을 것이다. 전쟁의 어리석음, 오키나와전의 비참함도 전달할 수 있다. 쓰자. 쓰는 수밖에 없다.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이다. (1617) 하지만 이처럼 ‘경박한’ 동기에서 출발해 의욕만이 앞서 있는 그녀에게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 오키나와인은 “야마토가 쓴 오키나와전은 가짜”라며 거부감을 드러내 고, 단순한 호기심과 얄팍한 정의감 수준으로 충분한 준비 없이 ‘위안부’의 삶을 소 설화하려는 하나에게 친구와 편집자는 신중히 접근할 것을 조언한다. 하나는 처음 에는 반발심을 느끼지만, 이러한 과정들을 겪으며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는 누구 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오만을 깨 닫고 타자의 아픔에 조금씩 다가서게 된다. 한편, 하나를 시점으로 하는 서사와 병행하여 이 소설은 오키나와의 한 조선인 위안부의 일인칭 서사를 통해 전쟁 말기 오키나와로 독자를 데려간다. 위안부 여성 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서사에서 ‘나’는 본명을 빼앗긴 채 ‘고하루(コハル)’라는 일본 명으로 불리며 군인들의 성적・물리적 폭력에 시달린다. 위안부 여성에게 가해진 성 적 폭력은 ‘나’의 서사에서 반복되는 “구멍이 된다(穴にされる)”라는 표현을 통해 ‘구멍’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며, 나아가 이는 오키나와 곳곳에 뚫려있는 동굴(ガマ) 과 참호, 폭격으로 인해 섬의 도처에 뚫린 ‘구멍’의 형상과도 겹쳐지면서 오키나와 에 가해진 전쟁의 폭력을 환기하기도 한다. 텍스트에 일본어(한자/카타카나)와 한글 로 변주되며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아리랑 노랫소리는 위안부 여성들의 고난과 삶 의 애환을 상징한다. 이처럼 소설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는 위안부와 오키나와에 가해진 폭력을 서사화하는데, 이 작품의 서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지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마이너리티 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인 위안부 ‘나’는 미 군의 오키나와 상륙 후 치열한 지상전에 휘말려 군부대와 함께 도주하다가 전쟁터 에 유기되고, 폭격을 피해 은신해 있던 동굴을 향해 미군이 분사한 화염방사기로 인해 전신 화상을 입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나포되어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하 지만 일련의 사건의 충격으로 인해 실어증에 걸린 ‘나’는 자신과 같은 또래의 딸을 폭격으로 잃은 한 오키나와인 남성을 만나 부녀지간과도 같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의 보살핌을 받아 생존한다. 이 소설은 전쟁 말기 오키나와인의 보살핌으로 생존 한 조선인 위안부가 전후 미군의 성폭력에 노출된 전쟁고아 오키나와 소녀들을 돌 본다는 서사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와 오키나와인 사이의 연대를 그려낸다. 그런데 이처럼 마이너리티 간 연대를 모색하는 한편으로, 후카자와가 취재 차 방 문한 오키나와의 반기지 운동 현장에서 만난 어느 오키나와인과의 일화를 통해 마 이너리티 간 연대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바 있다는 점은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2013년 무렵부터 넷우익이 공격하는 타깃이 재일코리안에서 오키나와로 시 프트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오키나와인을 향한 헤이트 스피치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되는 미군기지 반대 투쟁은 혐오가 분출되는 현장이기도 하 다.48)
48) 古谷経衡(2019), ネットと差別煽動, 解放出版社, p.144. 특히 2016년에는 오키나와에서 미군의 헬리콥 터 이착륙장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오키나와인을 향해 현장에 투입된 오사카부경(大阪府警) 소속 기동대원이 ‘토인(土人)’이라는 차별적 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선을 넘어도 되는가(線を跨いでいいのか)」(2019)라는 에세이 글에서 작가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미군기지 반대 투쟁 현장을 찾은 후카자와는 “일본 정부로부 터 핍박 받아왔다는 의미에서 우치나 사람들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에 뿌리 를 둔 재일코리안인 나 사이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처럼 느껴졌고, 또한 기지반대운동에 대해서도 강한 공감을 갖고 있었기에, 한 오키나와인에게 만 나자마자 “오키나와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너무하지요. 저도 재일코리안이라서 자 주 공격당해요”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 돌아온 오키나와 여성의 반 응은, “아아, 당신 얘기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는데, 공격당해서 힘든데 굳이 위안 부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니, 왜죠? 주목 받고 싶은 건가요? 당신이 쓰지 않아도 누 군가가 쓰지 않을까요?”라는 냉담한 것이었다. 오키나와 여성의 “선을 긋는 듯한” 차가운 응답에 상처 입은 기분이 된 후카자와에게, 취재 코디네이터로 현장에 동행 했던 본토 출신 일본인 지인이 던진 발언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던진다. “내가 가진 실감으로는, 십 년을 있어도 우치나(오키나와인)는 나이처(본토 일본인)에 게 선을 그어요. (…) 재일코리안이라고 해도, 우치나에게는 나이처에 불과하죠. 그러니 그렇게 손쉽게 선을 넘으려고 하는 건 오만 아닐까요. 공감이라는 것이 폭력이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나는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재일코리안이라는 원 안에 집어넣어지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으면서, 스스로 선을 긋고, 게다가 그 선을 넘어 우치나의 원 안으 로 밀고 들어가려 해버린 것이다. 손쉽게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일 인가 하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자만하고 있었다. 똑같이 일본 사회 안에 있는 마이너리 티라는 것을 방패삼아 제멋대로 공감(sympathy)하는 것은 실례인 것이다. 나 역시 귀국 자녀라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재일코리안은 힘들죠, 잘 알아요”라는 말을 듣고 짜증이 났던 적이 있지 않은가?49) 후카자와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오키나와 취재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자기 혐오에 빠져 지내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는 개념이다. 역자에 따라 ‘소극적 수용력’으로도 번역되는 이 개념 은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처음 사용한 말로, “조급하게 사실 이나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고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서 머물 수 있는 능력” 을 뜻한다.50) 후카자와는 손쉽게 어떠한 경계를 넘지 않고 ‘부정적 능력’을 구사하 여 선 위에 버티고 서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쓰는 일 그 자체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때 ‘부정적 능력’은 바꾸어 말하자면, 타자의 곁에 서고자 하지만 섣불 리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고 결론을 언제까지나 유보 상태에 두는 것, 타자를 단일 한 상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하나로 규정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 서, 문학의 언어뿐만 아니라 상호교차성 개념이 내포하는 타자 이해의 가능성과도 통저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카자와는 이 소설에서 다양한 경계를 넘어 ‘위안부’ 서사와 일본 사회와 의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가 지적하듯이 “(일본)군 ‘위 안부’ 문제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이민족에 대한 차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 한 차별이 겹쳐서 발생한 문제”51)라고 본다면, 이 소설은 조선인 ‘위안부’ 서사에서 확장하여 젠더적 관점에서는: #MeToo 서사와의 접속을 시도하며, 민족적 관점에서 는 오키나와인과의 연대를, 계급적 관점에서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여성들, 셸터에 있는 싱글 맘 여성들, 주인공 하나의 계약직 사원으로서의 불안정한 처지 등을 그 려냄으로써 여성의 빈곤 문제로도 시야를 확장시킨다.
49) 深沢潮(2019), 「線をまたいでいいのか」, 跨境 8, 高麗大学校日本研究センター, pp.67.
50) ‘부정적 능력’에 관해서는 帚木蓬生(2017), ネガティブ・ケイパビリティ ─答えの出ない事態に耐える 力, 朝 日新聞出版를 참조.
51) 요시모토 요시아키 저, 남상구 역(2013),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무엇 인가?, 역사공간,p.11.
특히 위안부 서사로서 볼 때 이 작품은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에 접속을 시도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 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젊은 세대의 일본인 여성 인물들은 성폭행/추 행을 당할 뻔했던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해 ‘위안부’ 피해 여성들로 상상력을 확장 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은 길에서 추행을 당할 뻔한 일을 겪은 주인공 하나가 친 구와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위안부라는 게 성폭력이랄까, 성착취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생각보다 가까운 문제가 아닐까 하고> <예전에 이야기했을지 모르겠는데> <나 대학생 때 미팅에서 술에 취해서 성폭력을 당할 뻔했던 위험한 적이 있어. 그런 일 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 때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내가 맞닥뜨린 일은 가오루가 경험한 일에 가깝다. 나나 가오루가 느낀 공포 이상의 것을 위안부 여성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공포는 반복되었다.(8990) 이러한 묘사를 통해 이 작품은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 들을 서로 잇고, 여성혐오 문제와의 연결고리를 만듦으로써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 본인 독자들의 공감과 관심을 환기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상호교차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작품의 서사는 명 백한 한계 또한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본토 일본인 여성 하나의 시점에 선 위안부/오키나와 서사가 일본 여성과 조선/오키나와 여성들 사이에 있는 식민주의적 위계관계에 대한 내성을 결여한 채 여성 간 연대로 안일한 접속을 시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에 위안부운동을 둘러싼 한일 페미니스트들의 연대가 구축되는 가운데 재일여성들이 제기한 비판에는 식민주의에 대한 관점을 결여한 일본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제국의 페미니스트”을 고발하는 목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52)
52) 金富子(2011), 継続する植民地主義とジェンダー─「国民」概念・女性の身体・記憶と責任, 世織書房; 熱田 敬子(2022), 「ポスト証言の時代の日本軍性暴力研究」, 現代思想 Vol.505, 青土社 등을 참조.
그러한 점에서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의 서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일 본 주류 페미니스트의 시점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를 공감에 기대어 대항담론을 구축하려는 이 작품의 서사적 한계로 볼 것인가, 혹은 ‘위안부’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터부시되고 있는 현재 일본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안부 서사 의 한계선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품이 수용되는 사회의 문제로서 볼 것 인가? 이는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후카자와의 서사는 그러한 한계와 어려움까지를 포함해 혐오가 확산된 현대 일본사회에서 대 항담론을 모색해가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나가며
본고에서는 2010년대 이후 일본에서 확산된 혐오 현상을 상호교차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재일코리안 여성 작가 후카자와 우시오의 작품이 일본사회의 혐오와 어 떻게 마주하며 대항담론을 모색하고 있는지를 고찰하였다. 초록과 빨강에서 후카 자와는 헤이트 스피치가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재일코리안과 일본인들의 일상 의 풍경을 담아낸다. 나아가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의 서사는 오키나와의 조선 인 위안부로 서사를 확장하면서 마이너리티 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교차적 시선에 입각한 서사구조를 지닌 두 작품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경계 너머에 있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이해하려는 상상력을 독자에게 요청한다. 일반 대중 이 기피하는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소설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에 대해 많 은 독자들이 보인 긍정적 반응은, 이러한 시도가 대항담론으로 지닐 수 있는 호소 력을 시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독자의 공감에 호소해 연대의 기반을 구축하려고 하는 후카자 와의 서사 전략은 자칫 마이너리티의 서사를 주류 서사의 틀 속에 회수할 수 있다 는 점에서 그 효과는 양가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서사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의 자장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후카자와는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 다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다.
다른 사람이 차별받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 다. ‘동질적인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소홀히 대하기 쉬운 것이 아닐까요. 제가 소설을 쓸 때에 어떠한 등장인물이라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라는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렇지만 다른 곳도 있어요’라는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것은, 역시나 근본적으로 그러한 사회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있다고 느낍니다. (…) 이 소설은 ‘나는 여기에 있다!’는 외침을 담은 소설입니다. 저마다가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존중받아야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썼습니다. 테마가 ‘위안부’라든지 ‘오키 나와전’이라고 하면, ‘무거운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 문체도 굉장히 조심해서 쉽게 읽히도록 쓰고자 노력했습니다. 물론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힘들어지는 묘사도 있지만, 그 아픔이라는 것도 느껴주셨 으면 합니다. 역사적인 치부를 접하는 것──잘못한 일과 마주하는 것은 아픔을 동반합 니다. 하지만 그 ‘아픔’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하면 역사수정주의자가 되거나, ‘일본은 훌 륭했어’, ‘전쟁은 옳은 일이었어’, ‘식민지가 아니고 좋은 일도 했어’라는 식의 언설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픔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아픔 때 문에 ‘피하고 싶다’고 생각되는 테마라 할지라도 소설이나 여러 가지 작품을 통해 추체 험 하면서 접하는 것은 하나의 입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53)
53) 「インタビュー 他人が差別されていることを見過ごすことに、居心地の悪さを感じない社会―翡翠色の海へう たうから 考えるレイシズム、女性差別の問題(深沢潮さんインタビュー)」, 2021.9.28. https://d4p.world/news/12 926/ (2023.02.17. 검색)
이러한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작품이 수용되는 담론장의 역학을 민감하게 응시 하고 있는 후카자와의 서사는 독자에게 수용 가능한 서사의 한계선을 가늠하면서 대항담론을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서사는 역사에 무관심한 대 중 독자층을 ‘입구’(출발선)에 서도록 하는 데에 조준이 맞춰져 있다. 1990년대 이 후 진행된 젠더 백래시와 역사수정주의의 결합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로를 느끼 는 광범위한 대중을 낳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54) 일견 ‘가벼운’ 듯 보이는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의 문체나 그 한계 역시 일본 사회 내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 높았던 1990년대보다 훨씬 더 후퇴한 지점에 입각한 서사 전략을 취할 수밖 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55)
54) 조경희(2019), 「일본의 #Me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 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 여성문학연 구, p.47; p.95.
55) 이를테면 리뷰 사이트 Book Live의 비취색 바다에 노래하다페이지에 게재된 리뷰 글 중에는 “지금 시대에는 무거운 주제를 중후하게 그려내는 것 보다는 이렇게 자신과 가깝게 느껴지도록 쓰는 편이 잘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는 독자의 반응도 보인다. https://booklive.jp/review/list/title_id/20036525/vol_n o/001, 2021.12.22. (2023.02.17. 검색)
정치적 메시지가 지나치게 부각되지 않 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는 후카자와의 서사는 철저히 일본문학의 미학적 규범을 따르는 듯 보인다. 이와 관련해 후카자와가 한 대담에서 “일본의 문학은 ‘정치적 올바름’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한국 문학은 ‘올바름’을 있는 그대로 표현합 니다. 일본의 가치관과 다른 것들이 밖에서 들어와서 안을 변화시킬 가능성도 있습 니다”56)라고 발언하며 ‘K페미니즘’ 서사와의 접속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는 사실 또한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물론 동질성과 공감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해 가고자 하는 후카자와 와는 다른 전략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시하라 마이(石原真衣)와 시모지 로렌 스 요시다카(下地ローレンス吉孝)는 상호교차성을 논한 대담에서, “매저리티를 이해 시키기 위해 마이너리티의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부분을 추출해서 유형화하는 것” 까지를 마이너리티에게 떠넘기는 매저리티의 태만과 무의식화된 특권을 꼬집으면 서,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채 잡음을 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의 주류 사회가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상처나 불쾌함을 글을 읽는 이가 몸소 경험할 때 그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대화’를 열어가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그대로 가 져가면서 ‘횡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논한다.57)
56) 구리하라 준코, 「일본 서점의 ‘혐한’ 책들, 오락으로 소비되는 혐오: 중장년 남성이 주 독자……표현의 자유니까 괜찮다?」, 2020.06.13. https://m.ildaro.com/8756 (2023.02.17. 검색)
57) 石原真衣・下地ローレンス吉孝(2022), 「インターセクショナルな「ノイズ」を鳴らすために」, 現代思想 Vol.50 5, 青土社, p.19.
이러한 전략은 대중적 소구력 면 에서는 떨어질 수 있지만, 후카자와가 시도한 대항담론과는 다른 또 하나의 대안적 서사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양자택일은 아닐 것이다. 혐 오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어느 단일한 목소리가 아닌 서사의 다양화로 맞서 야만 할 것이다.
◀ 참고문헌(Refere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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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Is It Possible to Cross the Boundary to Resist Hate? : Focusing on the Intersectional Imagination Represented in Ushio Fukazawa’s Novels Kim, Jiyoung (Sookmyung Women’s Univ.) The present article aims to examine the spread of hate in Japan since the 2010s from an intersectional perspective and to explore the possibilities of counter-writing to resist hate through the intersectional imagination of the works of Ushio Fukazawa, a Zainichi Korean female writer. The hate for Zainichi Koreans, which was at the center of the hate speeches that have been rampant in Japanese society since the 2010s, was intertwined with racism, sexism, and historical revisionism. In this context, Fukazawa is noteworthy for her recent efforts in writing against the spread of hate. The novel Midori to Aka (2015), centered on hate speech, depicts the inner lives of the Zainichi Koreans experiencing hate and discrimination along with the Japanese people’s counter-movement. Furthermore, in Hisuiiro no Umi ni Utau (2021), Fukazawa explored the possibility of inter-minority solidarity by depicting the solidarity between a Korean comfort woman and Okinawans during wartime. These literary attempts are significant as counter-discourses, but at the same time, Fukazawa’s narratives, based on the strategy of appealing to the reader’s sympathy, have an ambivalent potential in that they can be reclaimed into the framework of mainstream discourse.
Keywords: Zainichi Korean, hate, intersectionality, comfort women, Ushio Fukazawa
■ 투 고 : 2022. 12. 31. ■ 심 사 : 2023. 01. 15. ■ 심사완료 : 2023.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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