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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북조선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 젠더, 트랜스내셔널, 미래성의 징후들/김성경.북한대학원大

국문요약

탈식민 과정의 남한에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민족주의적 저항과 전시 성폭력이라는 여성주의 비판의 ‘불편한’ 결합태로 존재했다.

1990년대 4차례에 걸친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세미나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여성법정> 등은 일본군 ‘위안 부’ 운동의 여성주의적 국제 연대의 결정적 분기점이었지만 운동의 민족주의적 영향력 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국제 연대는 북조선의 관련 논의와 참여를 견인하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국제 연대의 영향으로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 민족담론을 내세웠던 북조선에서 오랫동안 비가시화된 일본군 ‘위안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조선 체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일수교 회담의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과 경험은 일본의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단순화되었고, 그마저도 조일협상이 좌 초되자 지속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북조선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일본군 ‘위안부’ 국 제 연대에 참여했던 경험은 북조선의 위안부 관련 담론의 진화를 추동했다.

이 논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북조선의 문학예술 생산물 중 <민족과 운명 19편-23편: 귀화한 일본인 녀성>(1994-1995)과 <네덩이의 얼음>(2017)을 분석하여 일본군 ‘위안 부’ 운동의 국제적 연대가 북조선의 폐쇄적 민족주의 담론에 균열을 만들어냈음을 주장 한다.

특히 김정은 시대에 출간된 <네덩이의 얼음>에 등장한 아시아 피해자 집단들의 연대는 북조선의 민족주의 담론 내 젠더, 트랜스내셔널, 미래성의 징후이다.

주제어: 일본군 ‘위안부’, 북조선, 민족담론, 젠더, 트랜스내셔널, 미래성

Ⅰ. 들어가며

이 글은 민족과 젠더 사이의 긴장 관계가 작동했던 남한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는 다른 경로를 걸어갔던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논의와 문화적 재 현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남한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민족과 젠더의 복잡한 긴장 관계를 증언한다.

일본군 ‘위안부’는 식민주의와 전쟁 시 기 여성들이 경험한 식민, 전쟁, 그리고 가부장제의 이중, 삼중의 억압 구조 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만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공론화와 해 결을 위한 여성운동은 태생적으로 국가, 민족, 그리고 젠더 사이를 넘나들며 활동과 담론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는 국 가의 필요와 전략 아래 가시화되었다는 측면에서 남한과는 궤를 달리 한다. 1990년대 초 북조선은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남한과 일본 여성계의 활발 한 움직임에 주목하여 탈냉전기라는 국제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활용하고자 했다.

전후 배상이라는 목적 아래 북조선의 일본 군 ‘위안부’가 갑작스레 소환되다 보니 당연히 민족 서사로 수렴될 수밖에 없 었다.

남한의 일본군 ‘위안부’가 민족과 젠더 사이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며 불 안정한 위치를 넘나들었다면,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는 제국주의와 민족 이라는 분명한 경계를 구축하는 특징을 지닌다.

그럼에도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담론은 민족 경계 밖의 불균질한 의미들의 흔적이 존재하는데 이것의 배경에 남한과 일본 여성계와의 연대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본 연구는 현실과 문화 텍스트가 상호 참조적이라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 다.

모든 문화적 재현에는 다층적인 의미들이 들어차 있기에 북조선의 문화 생산물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cf. Hall, 1985; 데리다, 2004).

문화적 재 현 속 상징과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포함한 무수한 의미망들과 의 연결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 개념이 북조 선 문화 텍스트 내 다의성을 해석하는 데 적절한 틀을 제공한다(크리스테바, 북조선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 9 2000).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국제 연대 경험은 트랜스내셔널 한 문화적 상상과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북조선의 문화 텍스트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 재현도 민족과 트랜스내셔널 사이를 교차하는 의미 로서 해석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서사가 ‘민 족’을 강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의미 체계로부터 미끄러진 이질적 의미들은 텍스트 안팎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견고해 보이기만 한 북조선의 민족주의에도 균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한편 남한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담론의 변화는 북조선과의 비교적 관 점뿐만 아니라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맥락에서 중요하다.

남한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가시화된 1990년 초반에는 반식민 민족주의 담론이 강하게 작동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민족주의 담론에 대한 여성주의의 비판이 본격 화되면서 민족이나 국가로 소급되지 않는 그들의 다양한 경험에 주목해야 한 다는 논의가 등장했다(양현아, 2001: 168-170; 일레인 김⋅최정무 편, 2001).

강선미와 야마시타 영애(1993)는 일본군 ‘위안부’는 천황제 국가에서 민족 과 계급이 교차하여 작동한 성모순이 주요 원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고, 우 에노 지즈코(2014)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구나 운동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젠더, 민족, 계급의 교차성에 주 목할 때 가부장제와 민족주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131).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사과와 배상 더 나아가 미래의 대일관 계로 확장되면서 민족과 젠더의 사이의 긴장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우에노 지즈코의 비판이 내재한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책임 회피 가능성에 대 한 연구자들의 재비판이나, 탈식민 맥락에서 민족주의의 성격과 활용이 다변 화된 것에 주목하여 등장한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그 긴장의 예이다 (정진성, 1999: 41-42).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민족주의와 여성주의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는 분석 아래 민족주의적 여성주의의 기여가 상당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도 했다(정진성, 1999).

더나아가 일본군 ‘위안부’는 민족 저항이나 보편적 성폭력이라는 단일한 프레 임으로는 해결책은커녕 해석 그 자체가 불가능함을 강조하면서 일본군 ‘위안 부’가 운동의 전략이나 담론 지형에 따라 주체화와 비체화가 동시에 진행되 었다는 주장도 있다(배하은, 2021).

하지만 최근 일본군 ‘위안부’ 배상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기 존의 풍부한 논의와 담론적 실천이 진영논리와 민족주의로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2014년 ‘박유하 사태’와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확 산되고, 뒤이어 2020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이용수의 비판으로 촉발된 ‘정의연사태’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이견이 분출되었다.

일본 군 ‘위안부’ 운동이 남한과 일본 사이의 외교적 쟁점이 되고, 더 나아가 한국 내부의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일본 측의 사과 와 배상은 요원해지고 말았다.

또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전방위적인 백래 쉬의 영향으로 일본군 ‘위안부’가 내포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전쟁의 중층적 이며 구조적인 문제는 비가시화되는 모양새다.

더욱이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친 이후 등장한 남한의 문화 민족주의가 위안부를 민족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경향도 감지된다.

K-문화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의 대중화 현상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균형추를 다시금 민족주 의적 자장으로 끌어당기는 효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예컨대 K-문화에서 일 본군 ‘위안부’의 재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도 그러하고, 2010년대에 ‘평화의 소녀상’을 중심으로 한 ‘소녀’와 ‘할머니’라는 납작한 재현이 2020년 대 K-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적 감수성과 결합하여 다양한 문화 생산물에서 되풀이되기도 한다(허윤, 2018: 142-144).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둘러싼 민족과 젠더의 치열한 논쟁이나 운동 초기부터 지속되어 온 국제적 연대에 기반을 둔 여성 연대에 대한 상상력이 K-문화를 내세운 민족 담론의 파고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남한의 상황은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담론의 진화를 추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0년대 초반 일본군 ‘위안부’ 운동이 국제적 연대를 통해서 확산되면서 북조선에서 공론화되었기 때문이다. 반제국주의 와 반식민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내세웠음에도 북조선에서는 일본군 ‘위 안부’라는 존재가 오랫동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한과 일본을 중 심으로 한 트랜스내셔널 연결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자 마침내 북조선 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라는 존재가 가시화되었다.

이후 등장한 일본군 ‘위안 부’ 관련 문화적 재현도 다층적으로 변화했다.

예컨대 90년대 중반의 <민족 과 운명 19-23: 귀화한 일본인녀성>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는 반제 민족 주의로 구축된 ‘민족’ 담론에 충실하게 복무하면서도 ‘위안부’와 일본여성과 의 연대를 재현하여 ‘민족’의 경계를 확장했다.

김정은체제 이후 2017년에 출판된 <네덩이의 얼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를 조선민족의 문제로 한정 하지 않고 아시아라는 공간과 아시아 사람들의 연대로 전환했다.

이는 공고 해 보이는 북조선의 민족 담론에 상당한 변화의 징후가 내재되어 있음을 의 미한다.

물론 일본군 ‘위안부’의 트랜스내셔널한 상상 이면에 뿌리 깊은 가부 장성이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민족을 강조해온 북조선이 민족 너머의 상상을 제시한 것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Ⅱ.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논의

식민 지배에서 수령이 인민을 구해냈다는 서사는 북조선 체제의 문화상징 적 근간이다.

구원이 극적이기 위해서는 일본 식민주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를 핍진하게 보여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다면 일본 식민지배의 폭 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본군 ‘위안부’는 주요한 피해자로 부각되 어야만 했다. 하지만 남북 모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침묵했으며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일본군 ‘위안부’의 전모가 드러났다.

특히 북조선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1992년이 되자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일본 식민주의에 저항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구축했던 북조 선이 1992년까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했던 이유가 무엇 인지 의문이 든다.1)

북조선과 달리 남한에서는 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성장과 함께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일본군 ‘위안부’ 논의가 시작될 수 있 었다.2)

1) 노동신문은 1955년 1월 26일에 남한 사회를 고발하는 기사에서 위안부를 언급한 바 있 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미군 위안부’를 뜻하는 것이 었다. 남한에 10만 명에 이르는 ‘미군 위안부’가 있다는 고발성 기사였는데, 노동신문에서 정기적으로 게재하는 남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기사의 일환이었다. 일본군 ‘위안 부’는 1946년 김일성의 교시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위해서 끌려간 젊은 여성들로 지칭했다(김일성, 1992: 381). 이후 일본군 ‘위안 부’ 관련 기사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김일성교시는 1992년에 발표된 <세기와 더불어>에 포함된 것이다. “일본군처럼 전쟁마당에 <위안부>까지 끌고 다니며 남의 나라 를 침략하고 사람들을 도살한 군대는 세계전쟁사에서 더는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김일 성, 1992b: 202).

2) 일제 시기 정신대로 강제 동원될 뻔했던 윤정옥을 필두로 한국여성교회연합회의 회장이 었던 이우정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공동대표였던 이효재가 초기 정신대 운동의 틀을 세 웠다. 윤정옥은 1990년 7월 정신대연구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이후 1990년 11 월에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설립되었다. 남한의 운동사는 한국정신대문제대 책협의회 20년사 편찬위원회(2014), 이효재(1999)을 참고하라.

특히 1980년대 후반 기생관광의 주요 고객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여성단체의 비판이 확산되면서 일본 식민지 시기 ‘정신대’의 존재가 드 러났다.

그리고 1987년 4월 <국제기생관광세미나>에서 ‘정신대’의 실체와 심각성을 확인한 여성단체들이 1990년 11월 16일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 협의회>(이하 정대협)를 조직한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남한 여성단체들은 일본 정부에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일본 국회의원이나 시민 단체와도 연대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노력했다.

하 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16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사실을 밝힌 김학순 의 공개 기자회견이었다. 곧이어 문옥주와 김복선도 증언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에 요시미 요시아키가 일본 군부 자료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처 음으로 밝혀내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요시아키, 1998).

북조선은 남한과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요시아키가 일본 군부의 자료를 발표한 것이 1992년 1월 11일이었는데, 노동신문은 1992년 1월 16일에 “태평양전 쟁시기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사실이 최근 일본 방 위청 문서고에서 밝혀졌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즈음 남한 여성계 의 활발한 움직임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조선은 1991 년 김학순의 증언 이후 남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대응의 방향을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에서 구체적 자료가 발굴되어 일본 정부 가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자 북조선은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된다.

이후 1992년 한 해 동안 노동신문에는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된 기사가 무려 26 번 게재되었고, 기사 내용은 일본군 ‘위안부’의 실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와 배상을 요구하는 사설, 남북일 여성이 참여한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 할>3) 토론회 소개, 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 심 등 다양하다.

3) 북조선의 공간문헌에서는 이 회의를 <아세아 평화와 녀성의 역할>로 표기한다.

그만큼 북조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파급력을 예의주시 하고 있었고 탈냉전이라는 세계 정세의 변화와 연동해서 대응했다.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뒤이어 소련과 중국이 체제전환에 나서 자 북조선의 위기감은 상당했다.

이 시기 남북 모두 냉전의 반대편 국가들과 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고, 북조선은 과거 청산을 통한 일본과의 수교에 상당히 전향적인 태도를 취했다.

와다 하루키(2023)는 북조선이 동구권이 붕괴하는 기점에서 두 가지 대책을 수립했다고 주장했는데, 하나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핵무기 개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일 국교 수립이었다 (38-39).

무엇보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이 진행되면서 급속하게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자 북조선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서 식민지 과거 배상을 얻어내고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절실했다.

1990년 9월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대표단이 방북하여 3당 공동선언을 하면서 조일수교를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었다.

이어 1991년 1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총 8차에 걸쳐서 정 부 간 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식민 역사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는 합의해야 할 현안들이 상당히 많았다.

식민 역사를 둘러싼 이해(관할권, 한일합병조약의 합법성 문제)와 일본의 전후 보상과 재산권 청구권에 관련된 문제, 핵사찰과 같은 안보 이슈, 거기에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일본인 배 우자 관련 문제 등 어느 의제도 쉽사리 합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박창건, 2015: 29-52; 신정화, 2000: 221-242; 정영철, 2005: 157-183).

이러한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가 남한과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자 북조선은 이 문제를 일본의 전후 배상의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문소정, 2015: 226; 이종석, 1995: 57-69).

북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회담 1 차부터 일본군 ‘위안부’를 회담 의제로 제시했다(황호남⋅손춘실⋅김춘실, 2017: 18).

1992년 5월에 베이징에서 열린 제7차 회담에서는 한일합병조약 을 포함한 일본 식민지 시기의 조약과 협정에 대한 불법성 여부가 주요 어젠 다로 논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의 불법성을 드 러내는 중요한 사안으로 논의된다(정영철, 2005: 168; 신정화, 2000: 226).

이러한 일련의 맥락 속에서 북조선 당국은 일본군 ‘위안부’를 포함한 일본 식 민지배 아래 발생한 피해를 조사하는 기구인 <일제의 조선강점피해조사위원 회>를 결성하였고, 1992년 4월 24일부터 6월 30일까지의 조사 기간 동안 총 131명의 피해자를 확인하였다(김당, 2002: 50).

불과 두 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기간에 백 명이 넘는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는 것은 국가가 상 당히 적극적이고 기민하게 움직여 피해 여성들을 찾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한편 북조선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하여 남한과 일본 여성 단체와의 대화 에 적극 나섰다.

1991년 5월 31일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북조선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 15 역할>이라는 심포지엄에 대표단이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11월 서울 에서 열린 2차 회의에 참석하고, 1992년 9월에는 3차 토론회를 평양에서 주 재하였다.

1차 토론회의 주요 의제는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 일본군 ‘위 안부’ 문제 해결, 남북통일을 위한 제안 등이었다(이문숙, 2012: 462).

1차 회의에 참가한 북조선 인사는 려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정명순 조국평화 통일위원회 서기국 참사, 이연화 조선대외문화연락협회 지도원 등이었다.

여 운형의 둘째 딸로 알려진 려연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첫 번째 회의부터 참석한 것은 북조선 체제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뤘음 을 뜻한다.

서울에서 열린 2차 회의는 북조선 여성 대표단이 46년 만에 서울을 방문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북조선에서는 려연구, 김선옥, 정명순, 홍선옥, 최옥 희 등이 참석하였고,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 ‘통일과 여성’, ‘평화와 여성’ 등의 주제로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북조선 토론자인 김선옥은 가부장제에 대한 계급적 시각을 주장하면서 정신대 문제를 “남성에 의한 인신적 속박, 사 회체제로부터 받는 억압, 식민지 종주국으로부터 받는 민족적 멸시”의 맥락 에서 해석했다(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 준비위원회, 1992: 36).

또한 북조선 대표는 정신대가 ‘조선녀성’의 공통의 문제이므로 피해 배 상과 일본 정부의 사죄를 강조했다.

하지만 통일 논의에 있어서 남북 대표단 은 상당히 날선 토론을 이어갔고, 남한 정부의 지나친 간섭과 반북 시위가 발 생하게 되면서 북조선 대표단은 예정보다 하루 먼저 돌아갔다(신진화, 1992).

다음 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지만 다음을 기약하기 쉽 지 않은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평양에서 열린 3차 토론회의 주제는 ‘민족 대단결과 여성의 역할’과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후 책임’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북조선 위 안부 여성들이 직접 증언하면서 심도 있는 토론이 가능해졌다.

일본 대표는 천황제가 정신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지적하였고, 북조선 대표는 남북일 여성들이 함께 연대하여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명백한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을 제안하였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20 년사 편찬위원회, 2014, 155).

가부장제, 평화, 그리고 통일 등의 광범위한 주제로 진행되었던 <아시아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의 어젠다는 횟수를 거듭하면서 점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집중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4차 도쿄 토론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 쟁책임과 전후배상: 종군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라는 주제 아래 열렸다.

북 조선 대표였던 최금순은 “인도주의 기금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발표에 서 한국 정부와 일본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 위안부 배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국가적 수준의 배상을 요구했다. 남북일 여성들의 연대 활동은 사회적 공론화에 큰 기여를 했고 결국 1993년 8월 4일 일본은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식민 지배 당시 일본의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한 것에 대한 일본의 첫 번째 공식 사과 담화였다.

전후 처리를 둘러싼 일본 정치권의 논쟁이 식민 지배의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를 하는 쪽 으로 의견이 모아지던 즈음,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19일에 위안부 피해자 를 위한 지원 사업을 실행하는 <아시아여성기금>을 설립했다(하루키, 2023: 65-67).

하지만 남한의 정대협을 비롯한 시민사회와 학계는 <아시아여성기 금>은 민간 기금으로 위안부 피해여성에게 보상금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 에 일본 정부가 국제적⋅법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간 기금을 통한 피해자 보상에 대한 비판은 북조선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했다.

국제회의에 참가한 북조선 대표단뿐만 아니라 노동신문 등 기관지에서 는 민간 기금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부 활을 획책하기 위함이라고 비판했다.4)

4) 노동신문에서는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한 즈음부터 종군위안부가 국제법적 범죄이며 민간 보상이 아닌 국가 보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일본정부가 요술을 부려 ≪종군위안부≫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국제사회의 규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노 동신문, 1995/8/12, 6면); “일본정부는 ≪종군위안부≫범죄행위를 인정하고 사죄하며 국가적보상을 하여야 한다” (노동신문, 1995/9/9, 6면); “≪종군위안부≫문제에서 오그랑 수를 쓰지 말아야 한다” (노동신문, 1995/10/21, 6면); “≪종군위안부≫범죄는 일본의 국 가적 범죄 (노동신문, 1995/11/28, 6면); “≪종군위안부≫범죄는 국제법위반죄” (노동신 문, 1995/12/3, 6면); “국가보상을 하지 않는 한 <종군위안부>문제는 해결될수 없다” (노 동신문, 1996/8/2, 6면); 정금영(1992). Discourse 201 Vol. 27, No. 2 18

또한 일본은 시혜적인 보상이 아닌 국제법에 따라 범죄 사실을 사죄하고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 다(문소정, 2015: 233-235).

북조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체계적 대응을 위해서 1992년 8월 <(조선)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 대책위원회>(이하 종태위)를 발족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 제 아시아연대회의>와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등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의 국제법적 책임을 강조했던 북조선으로서는 남한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트랜스내셔널 연대회의가 중요한 플랫폼일 수 밖에 없었다.

Ⅲ. 90년대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 <민족과 운명 19편-23편: 귀화한 일본인 녀성>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핵심은 피해자의 증언이다.

생존자의 증언 없이 는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뤄진 전쟁 범죄의 면면이 밝혀지기 어렵고, 더 나아 가 일본 정부의 사죄,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배상 등의 논의가 확장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정대협을 중심으로 피해자 증언을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1993년부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를 출간하였다.

또한 피해자 증언 채록 과정을 통해 증언이 내포하고 있는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 등 다층적인 의미에 대한 학술적 토론이 본격화 되기도 했다.

예컨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 1-3권은 피해자 생 애 전반이 아닌 위안부 당시 상황에 초점을 맞춰 증언을 정리한 까닭에 증언 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성, 피해자성, 그리고 주체성 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논의가 촉발되기도 했다.

증언의 서술 방식에 대한 논쟁도 지속되었는 데 󰡔강제로 끌려간 조인인 군위안부󰡕 1권과 2권이 1인칭 서술 형식으로 증 언의 상당 부분이 가공되었다면, 3권부터는 가능한 피해자의 증언을 있는 그 대로 수록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한편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The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2000 for the Trial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이하 여성국제법정) 준비 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피해자 60여명의 증언을 담고 있는 󰡔강제로 끌려간 조 선인 군위안부들󰡕 4권은 증언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체계를 고려한 증 언집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지영에 따르면 일본 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출간 된 초기 증언집은 피해 사실 증명이라는 목적과 민족주의적 규범성에서 자유 로울 수 없었다면,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출간된 증언집들은 피해자 증 언이 내포하고 있는 다의성이나 피해자들의 경험과 해석의 다층성과 모순성 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진전이 있었다(2022: 203-208).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적극 활용하여 조일관계를 개선하려 했던 북조선 도 피해자 증언집을 출간하였다.

1995년 종태위는 총 40명의 증언이 담긴 󰡔짓밟힌 인생의 웨침: <종군위안부>편󰡕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종태위의 국 제 활동, 태평양전쟁 당시의 사진 자료, 생존자들의 모습 등의 사진 자료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생존자 개개인의 피해 경험을 개별 장으로 구성했다.

남 북일 여성들과의 여러 차례의 교류를 통해 증언의 중요성을 파악했던 북조선 은 증언집 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짓밟힌 인생의 웨 침󰡕에 담긴 피해자의 증언은 기계적이며 단순한 방식의 서술에 머물러 있었 다.

일본의 책임과 배상이라는 분명한 목적 아래 서술된 까닭에 피해자 생애 전반을 아우르는 다층적인 경험과 인식을 담아내는 것에는 적극적이지 않았 다.

증언을 정리한 주체가 누구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증언이 이뤄졌는지, 그 리고 피해자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나 채록 과정에 대한 언급은 없 으며, 모든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상황, ‘위안부’ 생활, 그리고 이후의 삶이라는 동일한 구조로 서술되어 있다.

1인칭 화법으로 서술된 각 피 해자들의 삶은 3쪽 이내로 소략하여 서술되었으며 모든 증언의 마지막 부분 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국가 배상을 요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는 북조선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게 된 목적이 일본으 로부터 전후 배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결과이 기도 했다(강정숙, 2016: 168).

납작하게 정리된 증언집만큼이나 북조선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문화 재현의 면면도 제한적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문학예술 작품은 극히 소수일 뿐만 아니라 다루는 방식도 단순한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부작 예술영화인 <민족과 운명> 19-23편은 북조선의 주요 문학예술 중 일본군 ‘위안부’를 직접적으로 다뤘다는 측면에서 세심한 분석이 요구된 다.

1994-1995년에 제작되어 개봉한 이 작품의 부제는 <귀화한 일본인 녀 성>이다.

이 작품은 1991년 1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8차례에 걸쳐 진행된 조일 수교를 위한 회담이 결렬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된 까닭에 북조선이 일본에 대해서 견지하고 있는 시각과 조일수교에 대한 미래적 전략을 짐작하 는 데도 유용하다.5)

5) 신정화에 따르면 북조선이 일본인 배우자 고향 방문 요구를 받아들였던 1997년 이후 조 일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으로 전환되었는데, 일본인 배우자 제1진의 고향 방문 합 의가 이뤄진 97년 10월에 일본은 공식적으로 북한에 대한 식량원조 재개를 발표하기도 했다(2000: 233-234).

또한 김일성주석이 사망한 이후에 김정일위원장의 국가 운영 방침이나 통치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 다.

북조선의 문학예술이 주체사실주의를 내세우며 계급성, 당성, 인민성이 라는 원칙 아래 북조선 체제의 입장이나 이데올로기를 인민들에게 효과적으 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민족과 운명>의 재현 은 단순히 문학적 상징에 머물지 않고 현실적이며 정치적 메시지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정일위원장은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창작성과에 토대하여 문학예술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라는 노작에서 이 작품을 “조선 을 대표하는 영화, 조선영화의 얼굴”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1994년 김일성 수령 사망과 고난의 행군이라는 북조선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꾸준히 제작된 <민족과 운명>은 김정일시대에 강조한 ‘조선민족제일주의’를 그려낸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91년에 제작되기 시작한 <민족과 운명> 의 종자(작품의 핵)는 바로 “민족의 운명이자 개인의 운명”인데, 김정일은 민 족의 운명을 “민족의 자주성에 관한 문제”로 정의하면서 “민족의 생명”은 결 국 자주성을 실천하는 문제라고 강조한다(김정일, 2012).

<민족과 운명> 시 리즈는 역사의 파고에서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주인공들이 “조선사람으로 참되게 사는 길”을 조선민족제일주의 사상에 따라 자주적으로 수령, 당, 그리 고 민족을 따르는 것으로 그려낸다(노동신문, 2002/5/23).

김정일위원장이 300여 차례에 걸쳐 직접 시나리오 집필과 각색 작업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 고,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인물들이 결국 사회주의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아 간다는 내용을 혁명적 낙관주의에 기반을 두어 서사화한다. 그만큼 <민족과 운명>은 ‘조선민족’이 누구이며, 어떠한 형상과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지를 재현하고 있어 북한 체제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텍스 트이다.6)

6)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 체현되여있는 조선의 넋은 다름아닌 우리 수령이 제 일이고 우리 당이 제일이며 우리 인민이 제일이고 우리 사회주의조국이 제일이라는 조선 민족제일주의정신입니다. 조선민족으로 태여난 사람은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지녀야 만 우리 나라, 우리 겨레를 위하여 한생을 참되고 보람있게 살수 있으며 죽어서도 영생할 수 있습니다....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은 각이한 운명의 길을 걸어온 각이한 인간들의 형상을 통하여 우리 인민들로 하여금 지금 얼마나 위대한 품에 안겨 살고있는가 하는 것 을 새삼스럽게 되새겨보게 하며 아직은 비록 유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있지만 이때까지 자력갱생, 간고분투하면서 이 땅우에 건설한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가 얼마나 우월한가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합니다.” 김정일(2012).

<민족과 운명> 19-23편에서는 일본인 배우자와 일본군 ‘위안부’가 극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제국주의라는 기치 아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던 북조선에서 일본인 여성과 오랫동안 철저히 비 가시화된 일본군 ‘위안부’를 주인공으로 한 ‘민족’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민족과 운명> 시리즈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조선민족’ 외부에 존 재했지만 결국에는 지도자의 은덕과 조국의 품에서 ‘조선민족’의 일부로 재 탄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강혜석, 2017: 154).

<민족과 운명> 중 상당수는 실존 인물을 극의 주인공으로 소환하여 관객에게 ‘조선민족제일주의’라는 메 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발신하였고, 김정일체제가 내세웠던 ‘광폭정치’를 통 해 ‘조선민족’이라는 집단 정체성을 혈연을 넘어서는 역사 경험과 신념의 공 동체로 확장한다.

즉 주인공인 일본인 여성이나 일본군 ‘위안부’라는 과거를 숨기며 살아왔던 여성 모두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자주적으로 지 도자와 국가의 뜻을 따랐기에 ‘조선민족’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북조선으로 귀화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일본 여성 림은정(홍영희 역) 앞에 일본에 두고 온 큰딸 유키코가 일본 정치인과 일본부인협회장과 함께 북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림은정은 조선 청년 림무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만 가족의 반대 로 결국 헤어진다. 오빠의 강압으로 인해 림은정은 일본인과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서 유키코가 태어났다. 하지만 이후 남편이 태평양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림은정과 유키코 둘만 남게 되고 싱가포르까지 징용을 가게 된 다. 그곳에서 자신이 사랑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림무성을 다시 만나 면서 둘은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가족들은 조선인과 결혼한 림은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키코 마저 빼앗아간다. 이 후 림은정은 림무성을 따라 북조선으로 가고, 아들(수일)과 딸(수영)을 낳고 행복하게 산다. 음악가였던 남편은 교향악단을 이끄는 중책을 맡고 림은정도 병원에서 의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남편은 병을 얻어 사 망했지만 북조선은 일본인인 림은정과 그녀의 두 아이에게 대학 교육뿐만 아 니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조선을 방문한 유키코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림은정 가족 주위를 맴돈다. 유키코의 원한을 아는 일본 정치인과 일본부인 협회 회장은 그녀를 활용하여 북조선으로 간 일본인 여성들의 열악한 삶을 고발하려는 계략을 세운다. 하지만 유키코는 림은정이 선택한 북조선 사회의 우월성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삶이 불행한 이유가 일본의 편협한 민족주 의와 자본주의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총 5편으로 구성된 <민족과 운명:귀화한 일본인 녀성>은 림은정의 과거 회상 장면을 곳곳에 배치하여 그녀가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아왔는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보여준다.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폭력적인 오빠와 전쟁 이다.

오빠는 일본 식민주의를 상징하고 영화 속의 태평양전쟁은 일본 제국 주의가 아시아 곳곳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로 등장한다.

일본인 이라는 혈연을 추종하는 오빠는 림은정을 강제로 일본인과 결혼시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조선인과 결혼한 림은정을 일본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한다.

영 화에서 림은정이 일본에서 경험한 고통을 전시하는 것은 북조선을 선택한 상 당수의 일본인 배우자들이 경험한 것을 압축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조일수교를 위한 북조선과 일본의 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본인 부인의 고향 방 문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봤을 때 <민족과 운명>에 서 일본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과 그녀들이 고향 일본으로부터 부당 한 차별과 폭력을 당했음을 강조한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 정치인과 일본부인협회장은 끊임없이 귀화한 일본 여 성이 자유를 억압당하고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고발하고자 하지만 일본 인 여성들은 북조선에서 부유하고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영화는 북조선을 향한 일본인들의 편견을 하나씩 해명하는 방식으로 플롯을 구성했는데, 예를 들어 일본 정치인과 일본부인협회장이 ‘평양에 거지가 득 실거린다’, ‘제대로 된 집에서 살지 못한다’, ‘자유가 없는 삶을 산다’ 등의 선 입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여 거짓임을 깨닫게 된다는 구조이다.

“내 나라 제 북조선 일본군 ‘위안부’ 재현의 정치 23 일로 좋아”를 외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일본인 여성들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는 그녀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일본인 여성들이 조선인들과 동등한 삶을 살아간 것으로 그 리지 않으며 일본인이라는 낙인이 문화적이며 징후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일본인이라는 이유에서 자기 비하에 빠져있거나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수치스러워하지만 이들 모두는 지도자와 국가의 배려로 ‘조선 민족’으로 재탄생된다.

예컨대 림은정은 남편이 죽고 난 이후에 자신이 일본 인이라는 이유에서 자녀들이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괴로 워하지만 김정일위원장은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의 아들이 음악대학 에 진학하도록 배려한다.

‘장군님의 큰 사랑’을 비로소 체감한 림은정은 자신 이 ‘조선민족’임을 다시 한번 느끼고 더욱 ‘조선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인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운 <민족과 운명>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극의 갈등 구조에 주요 축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림은정의 둘째 딸 수영이 결혼하려는 광명의 어머니인 춘자는 일본군 ‘위안부’로서 일본에 대한 엄청난 적개심을 가진 인물이다.

춘자는 일본 대표단의 방문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자 한다.

이를 알게 된 수영은 약혼자의 어머니 인 춘자가 과거에 경험한 것을 수치스럽게 느끼며 그녀에게 일본군 ‘위안부’ 와 관련된 증언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북조선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라는 존재가 얼마나 비가시적이었는지 드러내는 설정이며 동시에 북조선 사 회의 가부장적 정조 이데올로기가 일본군 ‘위안부’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춘자는 림은정과 그녀의 딸 유키코를 싱가포르의 전장에서 구해 준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회상 장면에서 춘자는 일본군이 퇴각하는 상황에서 다른 위안부들과 도망치게 되는데 그때 일본인 여성인 림은정과 딸 유키코을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을 강간하려던 일본 군인을 죽이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춘자는 일본인인 림은정을 죽이려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림은정과 유키코를 살려주게 된다.

주목해야 할 지점 은 퇴각하는 상황에서도 욕정에 눈이 먼 일본인 군인들이 춘자를 쫓아가는 긴박한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군 ‘위안부’가 경험했던 성폭력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고 일본군 ‘위안부’가 북조선에서도 성애화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춘자와 림은정, 그리 고 전장에서의 위안부들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여성들이 내몰린 처지를 서로 이해하고 돕게 되는데 당시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서 일본 여성과의 연대 경 험과 영화 속 재현의 연관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춘자의 증언을 둘러싸고 수영의 반대가 고조되는 시기에 림은정과 춘자는 우연히 만나게 되어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이 싫다 고 아들 광명을 떠나려는 춘자에게 림은정은 자신도 ‘일본 여자’임을 고백하 며 이것이 “우리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일본인이라는 존재만큼이 나 일본군 ‘위안부’도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민족과 운명>에서 비로소 ‘민족’으로 호명되는 이들이 누구이며, 이들이 어 떠한 이유에서 ‘민족’ 공동체에서 비가시화 되었는지 드러낸다. 혈연을 기반 을 둔 민족 공동체에서는 결코 민족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림은정은 그녀가 일본 식민주의의 폭력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경험했기에 민족으로 초대되며, 일본군 ‘위안부’였던 춘자는 “몸이 더럽혀진” 자신을 숨기며 평생 살아왔지 만 일본을 상대로 자신의 적개심을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비로소 국가와 가족으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된다.

‘조선민족’의 공통된 경험이자 의식으로 자주성을 강조했던 북조선에서 ‘자주’란 국가와 가족에 대한 절대적 복종과 희생에 기반을 두었을 때 획득되 는 것이다. 림은정과 춘자는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여 자식들을 지켜내는 ‘어 머니’로 존재한다.

림은정은 첫째 딸 유키코에게 자신이 상속받은 모든 재산 을 남김없이 줄 뿐만 아니라 아들 수일과 둘째 딸 수영에게도 한없이 너그러운 사랑을 베푸는 존재이다.

남편 죽음 이후에 잠시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지 만 당위원회와 김정일위원장의 세심한 도움으로 그녀의 가족은 안전하게 보 호받는다.

특히 김정일위원장은 림은정에게 손수 편지를 전달하며 자신이 “죽은 림무성 동지를 대신해 친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을 보살필 것이라고 밝 히기도 한다.

한편 춘자는 일본군 ‘위안부’로 일했던 전력으로 인해 평생 결 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지만 외롭게 사는 자신을 어머니로 삼겠다는 광일과 가족을 꾸려 살아간다.

광일이 춘자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화의 끝 부분에 드러나는데, 친어머니도 아닌 춘자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광 일의 노력이 결국에는 수영의 태도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중에서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고 증 언한 이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들이 당과 국가의 보살핌을 받아 또 다른 가족 과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국가가 곧 가족이라 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해 온 북조선에서 여성들은 가족 혹은 유사(pseudo) 가족이라는 구조 아래 ‘어머니’가 될 때 민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영화에는 당시 조일수교 협상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남북일 여성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설정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일본 정치인과 여성단체 대표가 북조선을 방문한다는 배경도 그러하고 일본 정부가 수교 관련 협정에서 제기 했던 일본인 배우자들의 인권을 다루면서도 당시 북조선이 제기했던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전면화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럼에도 <민족과 운명> 의 주인공이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귀화한 일본인 녀성’이라는 점은 북 조선 체제가 아직은 일본군 ‘위안부’ 존재를 전면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음 을 나타낸다.

‘귀화한 일본인 여성’의 서사가 민족, 국가, 가족을 가로지르며 개인적 고통, 좌절, 그리고 변화를 복합적으로 구성하여 관객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도록 세밀하게 조율된 것과는 상반되게 일본인 ‘위안부’의 과거는 위 안부라는 참혹한 경험과 희생적인 ‘어머니’라는 경험으로 단순화된다.

<짓밟 힌 인생의 웨침>에 포함된 피해자의 납작한 증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서사로 영화 속 일본인 ‘위안부’의 삶이 그려진다는 것은 북조선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위치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영화 미장 센에서 일본과의 교류를 상징하는 다양한 장치를 활용하며 현실감을 높이는 데 공을 들인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일본인으로 등장한 캐릭터 들의 생동감을 배가하기 위해 일본어 대사에 조선어를 더빙하는 방식을 활용 하는 것이나 일본을 그럴듯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다양한 소품 등을 적극 활 용한 것에 비해서 일본군 ‘위안부’로 등장한 춘자는 일본군에 의해 옷이 찢겨 진 채 울부짖는 모습과 할머니가 되어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하는 형상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영화가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의 다의적 목소리나 다층 적 삶의 맥락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은 <민족과 운명>으로 대표되는 가부 장적 민족 서사가 ‘일본인’보다 ‘위안부’라는 존재에 한층 더 경직되어 있음 을 의미하는 것이다.

Ⅳ.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90년대에는 아시아 여성들의 연대 활동과 전쟁 중 여성 성폭력에 대한 국 제사회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성국제법정이 열릴 수 있었다(정진성, 2001).

남한과 북조선, 중국, 필리핀, 타이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동 티모르와 일본이 공동 개최하고 70여 명의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과 2천 여 명의 세계 여성 단체 대표들, 회원들,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한 시민법정이 다.

특히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남북대표가 공동 기소를 이뤄냈다는 측면 에서 남북의 협력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7)

7) 당시 검사단은 히로히토 일왕, 이와네 마쯔이, 쓘로쿠 하나, 히사이치 테라우치, 세이시로 이타가키, 히데키 도조, 요시지로 우메즈, 세이조 고바야시, 리키치 안도를 ‘인도에 반하 는 범죄들: 성적 노예와 강간 혐의’로 기소하였다(정대협, 2004).

남북은 공동기소장에서 히로히토 일왕 등 8명을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로 기소하였고,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국제 인권법 위반, 노예제도와 노예매매에 관한 국제법 위반, 여성과 어린 이의 매매에 관한 국제법 위반, 강제 노동에 대한 국제법 위반, 국제범죄법 위반 등을 기소 사유로 명시하였다.

무엇보다 남북공동기소장에서는 일본 정 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음으로써 국제 인 권법의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한국정신대문제대책 협의회, 2004: 61-67).

남북의 공동기소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남한이 일왕을 비롯한 개인 기소에 공을 들였다면 북조선은 처음부터 국가 책임을 규명하는 것에 집중했 다.

북조선 입장의 배경에는 조일수교와 항일혁명전통이 존재했다.

북조선은 일제 식민지 상황을 조선과 일본의 전쟁상태로 규정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 제를 전쟁범죄로 정의함으로써 일본의 국가적 책임에 대한 배상 문제를 포함 한 일본과의 수교협상을 벌이고자 했다(문소정, 2015: 236-237).

식민시기 에 만주 지역에서 김일성이 이끈 항일독립운동을 국가서사의 근간으로 삼는 북조선이 당시 상황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폭력으로 단순화할 수만은 없 는 노릇이었다.

북조선이 군사적 ‘강점’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 것 도 그러하고, 북조선이 출판한 공동기소안에서 “특히 1930년초부터 국내외 의 넓은 지역에서 강력하게 전개된 조선인민의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은 일 제에게 심각한 정치군사적 타격을 주었으며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고 적 시한 이유는 분명했다(황호남⋅손철수⋅김춘실, 2017: 162).8)

8) 흥미로운 점은 정대협이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공동기소안의 내용을 조금 수정한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1930년이라는 시기를 특정하지 않았고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 등의 표현 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역사를 둘러싼 남북 사이의 해석 차이가 상당했음을 뜻한다. “상해 임시정부(이후 중경으로 옮김)와 다른 독립군은 국내외에서 1945년 8월까지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 해나갔다(2004: 31).”

북조선은 조 일 수교를 위한 전략적 선택뿐만 아니라 항일혁명이라는 국가 서사를 모두 고려해야만 했다.

시민법정인 국제전범재판은 개인을 기소하는 경향에도 불 구하고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국가책임 문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있었던 것은 북조선의 입장을 남한을 비롯한 국제검사단에서 기소 내용을 상 당 부분 수용했기 때문이다(강정숙, 2016: 157-8).

이렇듯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북조선 대표단과 남한 대표단 및 국제 검 사단과의 소통과 절충의 과정이었다.

발표 형식이나 내용 등을 두고 남북은 회의의 막바지까지 토론과 수정 작업을 진행하였고, 그 전 과정에서 재일조선 인 연구자의 역할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강정숙, 2016: 161-163).9)

9) 남북이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 행하였다. 특히 김영과 김부자는 2003년에 직접 북조선을 방북하기도 하였다. 2000년 국제 여성법정을 거치면서 상당한 신뢰를 구축했던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은 북조선의 국내 위안 소 관련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 성과물은 송연옥⋅김영(2012)을 참고하라.

 

또한 공동기소장 작업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의 구술 작업의 중요 성을 다시금 확인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국제법적 쟁점 이나 제국주의와 전쟁의 폐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는 일본, 중국, 필리핀, 타이완, 인도네시 아,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 검사단이 기소안을 발표한 것도 북조선 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남북 기소단이 법정이라는 형식에 맞춰 기소안을 준비했다면, 다른 국가의 기소단의 경우에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의 증언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법정에 참여한 이들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다 (심영희, 2001: 154-156).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북조선은 위안부 관련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적극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에 있었던 위안소 실태 에 대한 보고서와 위안부 생존자 박영심의 피해 실태에 대한 보고서 등이 예 이다(황호남⋅손철수⋅김춘실, 2017: 35-54).

보고서의 목차나 서술 방식 등은 남북기소안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위안소 설치 경위와 관리 운영 상황 등에 대한 경험적 자료에 기반을 두면서 피해자와 목격자의 증언 을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특히 위안부 생존자 박영심에 대한 보고서는 위안 부 실태를 담은 사진에서 시작되는데, 이 사진의 원본은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이 소장하고 있었다.

포로가 된 위안부 여성들을 찍은 이 사진에서 임 신한 박영심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박영심의 여 정이 일본 제국주의 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주장하면서 그녀가 상해-남 경-미얀마(라시오)-송산까지 이동하면서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을 극적으로 드러낸다(황호남⋅손철수⋅김춘실, 2017: 44-47).

박영심과 주변인의 증언 등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박영심이 머물렀던 곳을 실제로 방문하여 구체적인 상황을 서술하는 등 보고서의 사실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했다.

남한에서 생 산된 풍부한 조사 결과나 증언집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북조선의 진일보한 보고서와 증언들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의 경험과 연관지어 해석이 가능하다.

조일수교를 둘러싼 북조선과 일본의 접촉은 2002년 김정일위원장과 고이 즈미 총리의 회담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결국 일본인 납치 문제와 북핵 이슈 등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면서 결렬된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기소된 일본 정부와 일왕을 비롯한 책임자에 대한 법적 책임이나 처벌도 이뤄지지 못했다.

공식적 사과와 배상을 강조했던 북조선으로서는 조일수교가 수포로 돌아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도 찾기 어려워졌다.

이후 위안부 관련 남북 여성 대화가 간헐적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국제적 수준에 서의 연대 활동에 북조선의 참여는 뜸해졌다.

이명박정부에 들어서 남북관계 가 악화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으나 2004년 고이즈미가 재방북하여 이뤄낸 납치자 유골 송환에 대한 합의가 가짜 논쟁으로 파기된 것도 컸다.

Ⅴ.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재현: <네덩이의 얼음>(전인광, 2017)

남한과 일본은 2015년 일본군 ‘위안부’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 되었다고 발표했다.

남한 정부가 재단을 설립하고 일본 정부가 10억 엔의 위 로금을 제공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위안부 관련 시민사회 운동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일본은 이번 합의를 완전한 해결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비롯한 공식 사과가 부재했다는 점, 진실 규명이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갑작스런 위안부 합의로 남한 사회가 들썩이던 시기에 북조선에서 위안부와 관련한 첫 번째 소설이 연재되었다는 점이다.

전인광의 <네덩이의 얼음>은 2016년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산하 대외 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에 연 재되다가 2017년에 문학예술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작품이다.

작품 의 결말 부분에는 2015년 위안부 합의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일본 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배상이 부재한 합의가 또 다른 응징을 불러일으킬 것 이라는 경고가 담겨져 있다.

이는 소설이 현실을 모티브로 했음을 뜻하며 소 설 곳곳에는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에 기반을 둔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장치가 배치되어 있다.

<네덩이의 얼음>은 태국 칸쿤에서 일어난 일본인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찾 아가는 추리소설이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 으로 잔혹한 성범죄를 자행했던 긴노스케와 그의 손녀이자 역사수정주의자 인 렌코, 그리고 일본군 장교로 유격대와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였던 니시하 라가 태국에서 살해된다.

일본 경찰 무라야마와 태국 경찰 웅카라는 살인사 건이 역사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예감하고 수사에 나선다.

일본 황실과 연관되어 있는 긴노스케와 렌코가 살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해 현장 에는 <아시아정의련합>이라는 단체 이름으로 쓰여진 ‘판결집행장’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집행장’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기소되지 않은 ‘히로히또’를 기소하고 일본군전쟁범죄에 연루된 사람을 추적하여 처벌한다 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전인광, 2017: 24).

무라야마와 웅카라는 2000년 여 성국제법정에 참가했던 피해자의 양자와 양녀들이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 음을 밝혀낸다.

여성국제법정의 기소와 판결이 실제로 이행되지 못하고 이후 에 일본 내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생존자의 후대가 직접 정의를 구현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인 경찰 무라야마는 사건을 파헤치면서 점차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의문을 품게 되고 동아시아의 평화와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일본 스스로 변화해야 함을 절감하면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소설 중 살해당한 긴노스케는 태국 방콕 지역에 대규모의 아파트를 건설하 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은퇴한 황군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니도쿄’ 사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자본을 앞세워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 치이다.

긴노스케를 도와 이 사업에 참여한 니시하라는 과거 일본군에 저항 했던 유격대원을 죽이고 유격대장의 부인인 샨프리앙을 위안부로 만든 인물 이기도 하다.

위안소에서 샨프리앙이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녀와 서로 의지하 면서 지냈던 조선 여성 박복희(싼따라)가 샨프리앙의 아들인 츄홍따이를 키 워내게 된다.

샨프리앙과 박복희의 삶은 극에서 활용되는 증언을 통해서 서 사화되는데, 이 증언은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중 박영심과 정옥순의 경험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김은정, 2018: 416-7).

정의로운 일본인 다큐멘터리 감독인 마에다가 만든 기록영화의 일부라는 설정을 통해 이미 노동신문과 단행본 등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박영심의 삶과 증언이 세밀하게 묘사된다(전 인광, 2017: 313-314).

뒤이어 정송순(실제 이름은 정옥순)이라는 인물이 태국 칸쿤으로 끌려가 위안부로 생활했다는 증언을 통해 소설 속 일본인 살 해 사건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설정을 구축한 다(전인광, 2017: 315-319).

긴노스케, 렌코 그리고 니시하라가 살해당한 사건은 2000년 여성국제법정 에서 위안부 피해자와 그녀들의 가족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츄홍따이는 위 안소에서 죽은 어머니 샨프리앙을 대신해서 자신을 키워준 박복희와 함께 여 성국제법정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츄홍따이를 비롯해 중국의 위 안부 할머니의 조카 왕선홍, 필리핀의 위안부 할머니의 양아들 판따시옹, 그 리고 전쟁 중 니시하라의 명령 때문에 미쳐버린 할아버지를 둔 일본인 이마 무라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법정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우익을 중심으로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 고 아시아 평화를 해치는 긴노스케, 렌코 그리고 니시하라를 살해한다.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태국, 미얀마, 중국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아시아라 는 것은 일본군 ‘위안소’가 지역 전역에서 운영된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소설이 그려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조선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 국가, 혈연적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 아시아라는 공간과 계급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미 북조선은 90년대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세 미나에서 계급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가난한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강조한 바 있는데 소설 속 위안부는 ‘조선’ 여성만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북조선 여성의 피해와 고 통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으로 그려지고, 오히려 태국 국경 지역의 가난한 라 후족 여성의 기구한 삶이 일본인에 대한 응징을 촉발한 것으로 묘사된다.

위 안부로 끌려간 어머니를 둔 라후족의 후예인 츄홍따이와, 재일조선인 여자친 구 아끼꼬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은 일본인 이마무라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일본 제국주의 대 조선이라는 구도를 가해자 대 고통을 공유하는 피해자 집 단들로 재편한다.

이에 더해 역사수정주의자인 렌코가 정의로운 역사학도인 아끼꼬를 살해한 사건이 이마무라와 츄홍따이의 응징의 계기가 되었다는 서 사는 반평화 세력 대 평화 세력이라는 또 다른 구도를 겹치게 한다.

일본인 경찰 무라야마는 <아시아정의련합>이라는 존재와 그 이면의 동기를 알게 되 면서 일본의 다른 미래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인물로 전환된다.

수사 당시 무 라야마를 도운 일본인들은 우익 세력의 보복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정의로운’ 일본인들은 아시아 연대의 한 축으로 재현되며, 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제국주의적 야망을 버리지 않는 일본의 역 사수정주의자와 우익 정치세력이다.

즉 폭력 앞에서 민족, 국가, 혈연적 가족을 넘어선 인류애적 희생과 정의 공동체가 힘을 모은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 가해국 일본의 책임자를 기소한 것을 넘어 피해자들이 서로 만나는 계기이자 그녀들의 자녀, 즉 미래 세대들이 일본 제국주 의 역사의 폐해를 통감하는 장이 되었다는 설정은 일본군 ‘위안부’를 현재와 미래의 맥락으로 재위치하기 위함이다.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게 된 자녀들이 전범과 역사수정주의자를 직접 응징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연속선에 있음 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반대하는 수요 집회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소녀상 옆에 세워진 깃발대에 일본을 상징하는 일장기의 한복판에 위치한 빨간 해에 가위를 그려 넣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 다고 묘사한다. 여기서 ‘가위’는 소설의 중반부에 태국 내 ‘미니도쿄’에 거주 하는 일본인들의 성범죄 관련 법정에서 어린 태국 피해자의 어머니가 휘둘렀 던 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인들이 지금과 같은 의식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만약 지금 세대가 어렵다면 그 다음 미래 세대가 나서서 이들을 응징할 것을 상징한다.

김은정에 따르면 <네덩이의 얼음>은 기존의 북조선 문학의 관습을 비틀어 내는 “미적 용기”를 감행한 작품이다.

장르적으로도 기존의 북조선 문학의 정탐물이나 반탐물과는 차이가 있고 일본인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선악이 라는 이분법에 얽매여 있지 않다(김은정, 2018: 421-426).

기존의 북조선 문학이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그려내는 것을 창작 원칙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감안해봤을 때 <네덩이의 얼음>이 시도한 아시아적 상상과 연대는 다소 이 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게다가 소설 속 미래세대로 호명되는 이들에 북조 선 인물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도 새로운 시도임에 분명하다.

소설의 연재 가 시작된 2016년은 김정은체제가 정치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던 시기였다.

일본군 ‘위안부’를 문학예술에서 직접적으로 다루는 동시 에 새로운 서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기존의 일본 대 조선민족이라는 ‘뻔한’ 관 습적 구도를 전환함으로써 북조선 체제가 상대적으로 구축한 안정감과 변화 를 대내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소설이 대외선전매체인 <우리 민족끼리>에 연재되었다는 것도 서사적 진화를 가능하게 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네덩이의 얼음>은 북조선의 반제 민족담론에 트랜스 내셔널한 상상력이 결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소설 곳곳에 조 선 민족의 장점이나 우수성 등이 간접적으로 제시된 측면에서는 폐쇄적인 민 족 담론의 영향력이 완전히 퇴조하지 않았음을 뜻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대 항하는 다양한 집단의 평등한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분명 트랜스내셔널한 연 대를 미래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주제를 다루면서 트랜 스내셔널한 연대를 서사의 장으로 초대한 것은 과거 90년대와 2000년대에 지속되었던 초국적 교류의 경험과 연관지어 해석할 때 이해의 폭이 넓어진 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 소환된 것도 그러하고 법 정에서 밝혀진 필리핀과 중국의 위안부들의 피해 사실이 소설에 그대로 등장 한 것도 중요한 증거이다.

여느 조선 문학과는 다르게 ‘정의’로운 일본인들이 여럿 등장하여 아시아 연대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설정도 일본군 ‘위안부’ 관 련 트랜스내셔널 연대의 모델과 닮아 있다.

그럼에도 <네덩이의 얼음>이 제시한 트랜스내셔널한 상상력에도 분명한 한계는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북조선 출신 일본군 ‘위안부’는 고향으 로 돌아가지 않고 칸쿤 지역에 남아 있으며 기록영화의 일부로 등장하는 실 제 북조선 출신 위안부의 서사는 ‘증언’을 반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아시아의 위안부 여성들의 고통스런 경험과 삶이 상대적으로 핍진하게 묘사되어 있다면 북조선 여성들의 경험은 삭제되어 있다.

그녀들의 피해가 소설의 주요 축으로 등장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하는 동시에 북조선의 가부장적 민족 서사의 허약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민족 서사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자, 다음 세대를 생산하는 ‘민족의 자궁’으 로 상상되어 왔다는 것을 감안해봤을 때 일본군 ‘위안부’는 북조선 남성의 실 패와 무력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다(인로, 2000: 91).

다시 말해 일본군 ‘위안 부’를 직접 다룬 소설에서 북조선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위안부 문제를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북조선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슷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미래 세대가 일본군 ‘위안부’의 혈연적 가족이 아닌 유사 가족의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

위안부의 ‘오염된 몸’은 ‘민족’의 다음 세대를 생산하지도 혈연 가족의 일부로 초대되 지 못한다.

그녀들의 기구한 삶을 통감한 미래 세대는 혈연이나 민족 밖에 존 재한다.

소설의 트랜스내셔널한 상상이 민족이나 가족의 폐해의 극복으로 등 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순수한 영역을 남겨두기 위함일 수 있다 는 뜻이다.

게다가 조일수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활용하고자 했던 북조 선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의 공식적 사과와 법적 배상 문제 등을 여전히 부각시킬 수 있는 자구책으로 아시아 연 대를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문화 생산물이 언제나 잉여의 의미를 담 아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첫 번째 소설 인 <네덩이의 얼음>이 내재한 트랜스내셔널한 미래는 민족을 강조해 온 북 조선의 무의식에 장착되어 있는 의외성의 일면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Ⅵ. 나가며

2020년 6월 경향신문에서는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라는 기획을 연재 했다(경향신문, 2020/6/11-2020/7/1). 당시 이용수 할머니의 정의연 비판 이 촉발한 위안부 ‘운동’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총 7회에 걸쳐 운동의 역사 를 되짚어보고 향후 과제를 탐색하려는 시도였다.

연재에서는 민족적 피해를 강조하는 정의연의 운동 방식이 ‘위안부’ 운동의 주류가 되면서 민족 담론 밖 의 분석이나 비판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환경을 지적한다.

일본의 공식 사 과와 배상이라는 목표로 운동 역량이 집중되면서 전쟁 성범죄에 대한 여성주 의적 비판이나 가부장적 국가와 민족 내 성차별적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그럼에도 연재 필자 중 한 명인 김부자의 주 장처럼 몇몇 잘못을 다그치며 ‘위안부’ 운동 성과 전체를 폄훼해서도 안 될 것이다(경향신문, 2020/6/29).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90년대와 2000년대 남한과 일본의 연구자와 활동가가 만들어낸 국제 연대는 일본의 공식적 사과와 배상이라는 좁은 틀에 수렴되지 않는 상당한 성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북조선은 일본군 ‘위안부’ 존재에 대해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 다.

남한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 었다.

뿌리 깊게 작동하는 순결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큰 몫을 했다.

민족의 ‘영토’ 혹은 민족의 ‘자궁’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몸이 제국주의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북조선은 오랫동안 대면하지 못했다.

당연히 ‘위안부’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발화할 수 없었다.

상당수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이유에서 숨죽여 지내거나 가족도 없이 외롭게 지냈다.

만약 남한과 일본 여성들의 국제적 운동이 없었더라만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 대부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 을 수도 있었다.

트랜스내셔널 연대가 국가적 수준에서 어떠한 파장을 만들 어내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 중 하나가 북조선의 일본군 ‘위안부’라는 뜻 이다.

적어도 북조선에 살고 있는 219명의 일본군 ‘위안부’의 경험이 발화되 었다는 것은 커다란 성과임에 분명하다(이토 다카시, 2017: 296-7).

그럼에 도 북조선 체제가 정치적 목적아래 주도한 ‘위안부’ 운동인 까닭에 한계도 분 명하다.

북조선의 ‘위안부’ 생존자들이 충분한 사회적 보호와 배려를 받았는 지 알려져 있지 않고, 전쟁이나 군대 내 성폭력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도 이뤄지지 않았다.

조일수교를 위해 ‘위안부’ 문제가 활용되었던 까닭에 북 조선 내부로 다양한 담론이 확산되지도 못했다.

처음부터 여성들의 입장에서 시작되지 못한 ‘위안부’ 논의는 결국 민족 국가의 필요와 이해관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북조선 체제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위안부’ 논의가 국가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비판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나 시민사회 의 요구가 부재하다는 문제제기는 북조선 체제라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뻔한’ 비판에 불과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국가가 생산한 담론에 내재되어 있는 미세한 변화와 가능성을 찾아 의미화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 연 구는 북조선 문학예술 중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직접 다룬 두 작품을 분석 했다.

9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과 운명>에서 다뤄진 ‘위안부’와 2017년에 발표된 <네덩이의 얼음>을 분석함으로써 민족이라는 경계가 확장되고 있는 것과 탈민족적⋅탈경계적 상상력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음을 밝혔다.

<민족 과 운명>의 ‘위안부’ 춘자는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한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찬 전형적인 민족 알레고리로 재현되지만 그녀가 마음을 나누는 존재는 가족이나 남성 민족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눴던 일 본인 여성이다.

극 중 일본인들 중 일부는 가해자가 아닌 제국주의의 또 다른 피해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네덩이의 얼음>에서는 아시아 여성들이 참여했 던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주요 모티브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성국제법정 을 가능하게 했던 여성들의 트랜스내셔널 네트워크가 미래세대로 전수된다 는 설정이다.

특히 일본 내 우익 정치 세력과 역사수정주의의 확산을 다루면 서 트랜스내셔널 아시아인의 연대를 정의로운 미래상으로 제시한다는 측면 에서 전통적 민족 담론의 진화를 나타낸다. 문학예술은 현실을 재현(再現)하는 문화 생산물이다.

실제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예술적 상상력을 덧입혀 있음직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럴 듯한 사회문화적 맥락과 배경을 배치하여 서사된 사건의 신빙성을 높이는 것 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조선 문학예술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을 모티브로 활용하는 이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민성을 강조하는 북조선의 문 학예술은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욕망을 은밀하게 전달할 때 더 많은 독 자와 관객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다.

실제 사실을 이야기로 만들어내기 위해 서는 사회문화 깊숙하게 내장되어 있지만 이성과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표출 되지 못한 희망과 욕망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민 족과 운명>에서 자신을 드러낸 ‘위안부’ 춘자는 국가와 양아들의 배려 아래 평안함을 되찾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측면에서 가부장적 민족주의의 상징이 지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는 인물로 민족 밖의 은정을 설정함으로써 전통 적 민족 담론 외부에 여성주의적 화해와 희망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 을 볼 수 있다.

<네덩이의 얼음> 작품 곳곳에 배치된 트랜스내셔널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북조선이 잠시 경험했던 국제연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를 드러낸다.

김정은체제의 ‘우리국가제일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아래 한구석에는 세계의 일부이고자 하는 희망과 다시금 트랜스내셔널 네트워크 에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제국주의 전쟁 시기 아시아의 여성들은 성폭력에 내몰렸다. 전쟁이 끝난 지 50여년이 지나서야 숨죽였던 여성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 다.

지금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어쩌면 이러한 격랑은 오랫동안 지속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감한 여성들이 만든 작은 길이 남한과 일본, 그리 고 저 멀리 북조선까지 뻗어나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

몇 번의 만남이 일 으킨 파장이 견고하기만 한 북조선의 민족담론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 것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북조선 문학예술 작품에 재현 된 미래적 상상력이 현실과 조응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인내심을 갖 고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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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presentational Politics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in North Korea: Signs of Gender, Transnationality, and Futurity

Sung Kyung Kim(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During the decolonization process in the South,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movement navigated a complex terrain between nationalist resistance and feminist critique of wartime sexual violence. The four conferences on “Peace and the Role of Women in Asia” in the 1990s, along with “the 2000 International Women’s Tribunal for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 War Criminals”, were crucial turning points for feminist international solidarity within the movement. These events also highlighted the movement’s nationalist influences. Despite this, the international solidarity of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movement has led to significant discussions and engagement in North Korea. In North Korea’s anti-imperialist and anti-colonialist national discourse, the long-invisible ‘comfort women’ were brought to the forefront through international solidarity efforts. Nevertheless, the North Korean regime attempted to leverage the ‘comfort women’ issue in DPRK-Japan diplomatic negotiations. North Korea’s participation in international solidarity concerning Japanese ‘comfort women’ during the 1990s and 2000s has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evolution of the discourse on comfort women within the country. This paper examines North Korean film and literature addressing the issue of Japanese ‘comfort women,’ positing that international solidarity with the movement has introduced a critical fissure in North Korea’s rigid nationalist narrative. The analysis focuses on Nation and Destiny 19-23: A Naturalized Japanese Woman (1994-1995) and Four Blocks of Ice (2017). Particularly, the portrayal of Asian victim group solidarity in Four Blocks of Ice, published during the Kim Jong-un era, highlights the interplay of gender, transnationality, and futurity within North Korean nationalist discourse.

Keywords: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North Korea, Nationalist discourse, Gender, Transnationality, Futurity

접수일: 2024.04.17. 수정일: 2024.06.13. 확정일: 2024.06.13

담론201 27권 2호(Discourse 201 Vol. 27, No. 2 )

 

북조선 일본군 &lsquo;위안부&rsquo; 재현의 정치 젠더, 트랜스내셔널, 미래성의 징후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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