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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안삼환.서울대

1. 들어가는 말 1)

 

    1) 독일어 ‘Beruf’는 ‘소명’이라는 의미와 함께 ‘직업’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음.

독일문학 ․ 문화나 독일 관련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대화에서도 독일과 관련한 이슈가 있으면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고 해결

되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소위 ‘양극화’ 문제가 주요 사회 이슈로 떠오른 이래로는 독일의 좌우파

정당에 대한 질문이 잦다. 이를 테면 독일인들의 그 건전한 시민의식은

대체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또는 독일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좌우

파의 대립이 극심하냐, 그런 사회적 갈등이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합

리적으로 해소되고 있느냐 하는 식의 질문들이 자주 제기되곤 한다. 질

문자는 자신이 너무 큰 테마를 건드린 점을 금방 후회하게 되고, 좌중에

서 응답을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당사자는 어떻게 대답하면 이 질문

에 간단명료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순간 매우 고심하게 된다.

평소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온 필자로서는 독일의 좌우파 양대 정당

인 ‘기민당’과 ‘사민당’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독일 시민사회의 역사적 발

전과정에 비추어 한번 요별(要瞥)해 보는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왔

다. 이러한 성찰의 글이 우리 사회의 이념적, 사회적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직접 제시할 수는 없지만, 독일 시민사회의 형성과 정당문화의

사례를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사회를 비교 성찰할 수 있는 일종의 거울

과 같은 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동 ․ 서양의 문학, 사학, 철학, 즉 인문학 전반에 관한 광범하

고도 해박한 지식, 소위 탈경계적 인문지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할 테

지만, 필자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독문학의 사회적 기여라는 측

면에서 볼 때, 좋은 글이 나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으며, 완

성도가 높은 글은 후학들의 온축(蘊蓄)을 기다리기로 하더라도, 일단 현

시점에서 생각의 편린들을 간추려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후학들이나 현

재의 관계자들을 위해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해서 감히 이 글을 쓰

게 되었다.

독일의 좌우파 양대 정당의 성립과 발전과정을 돌아보는 작업에 있어

서 이 양대 정당의 뿌리를 찾아 16세기 초 루터의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후 양대 정당의 문화사적 발전을 살펴보

려면 독일 시민사회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에 비추어 보아야 독일 좌우파

양대 정당의 현대적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독일 현대의

양당정치의 뼈대를 갖추기 시작한 19세기 후반기, 즉 19세기 독일 시민

사회 및 민족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정당정치의 발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좌우파 양대정당의 뿌리를 찾아서: 루터의 종교개혁과 독일

계몽주의 철학

1) 루터의 종교개혁: 종교의 민주적 개혁과 정치적 보수성

주지하다 시피 독일의 양대 정당은 ‘기민당’(CDU, Christlich-Dem

okratische Union)과 ‘사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

tschlands)이다. ‘기독교 민주당’과 ‘사회민주당’으로 번역되는 이 두 정

당의 뿌리를 찾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적어도 16세기 초 루터시

대부터 논의될 수 있다. 오늘날의 독일은 유럽연합을 주도하는 선진국

으로 간주되지만, 16세기 초만 해도 독일이란 나라는 유럽의 한 후진국

에 불과했다. 당시 유럽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국민국가 체제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고, 중세 가톨릭 교회라는 범(汎)유럽적 거대 종교

체제와 신성 로마제국이라는 황제 체제의 양대 지붕 아래에서 여러 민

족들이 오늘날의 유럽을 지역적으로 분점해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오

늘날의 독일연방공화국이 영토로 하고 있는 지역에는 바이에른, 헤센,

작센 등 크고 작은 수많은 군주국들이 산재되어 있었다.

이 군주국들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면, 민중들 사

이에서 구어로 소통되던 언어는 게르만어의 일종인 도이치어(diutsch)

였을 뿐, 당시 교회와 관청에서 사용되던 공용 언어는 모두 라틴어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조선조에서 우리의 말과 글(훈민정음)이 따로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관청에서는 모두 한문으로 문서를 기록하던 것과 유사

한 현상으로서, 당시 유럽에서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성직자, 판사,

의사, 교사 등 이른바 식자 계층은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민

중에 대하여 문서를 읽고 쓸 줄 아는 데서 연유하는 막대한 지식 권력의

향유자였다.

이렇게 구어와 문어가 거의 절연되었던 독일적 특수 상황은 라틴계

민족인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사뭇 다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라틴

계 민족의 민중들은 그들의 민중어인 프랑스어 및 이탈리아어와 고전

라틴어와의 괴리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모르는 고통이 독

일의 민중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러한 독일적 특수 상황 하에

서 도이치어를 쓰던 독일의 민중들은 오랫동안 라틴어의 횡포에 시달리

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독일 민중의 어려움을 타개하

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과 그에 뒤따르는 루터의 성경 번역이다.

우리나라 조선조에서는 조광조의 도학적 개혁정치와 그 좌절(기묘사

화, 1519)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루터는 중세 가톨릭 교회

의 오랜 전횡(예: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교황의 수위권

(首位權, Primat)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적혀있는 가르침’(sola

scriptura = allein die Schrift)을 통한,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소통이 중

요함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민중들에게 이러한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

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된 성경이 민중들의 손

에 쥐어진다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

응하기 위해 루터는 파문된 신분으로 아이제나흐(Eisenach) 시 근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라는 산성(山城)에 숨어서 신약을 완역(1521

년, 출판은 1522년)하였으며, 바르트부르크성에서 나와서도 번역을 계

속한 결과, 구약까지도 완역(1534년)해 내었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성경 번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번역을 할 때 순수하고 명확한 독일어로 옮기려고 힘썼다.

2주, 3주, 4주 동안에 한 마디를 찾아, 그에 대해 묻기도 하고 또는

종종 그 한 마디도 발견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장진길 62).

‘순수하고 명확한 독일어’로 옮기기 위해 루터는 “집안의 어머니와 골

목길의 아이들과 시장의 미천한 사람들에게 묻고 이들이 어떻게 말하는

지 이들의 입을 보고난 후에 번역해야만 한다”고 「번역에 관한 공개서

한」(“Sendbrief vom Dolmetschen”, 1530)에서 쓰고 있다. 루터의 사

상과 번역론에서 교황의 독재권 대신에 ‘동등한 기독교인’, ‘언어의 민중

성’ 확보의 노력을 볼 수 있다.

루터의 이 성경번역은 두 가지 의미에서 앞으로의 독일문화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첫째는 교회나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도 오

직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직접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보다 민주적

인 의식이 싹튼 것이고, 둘째는 번역된 성경의 독일어, 이른바 루터 독

일어가 - 약 1세기 전에 발명되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 널

리 보급, 전파되었으며, 이로써 독일어는 소박한 민중어의 티를 벗고 어

휘가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언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 이 독일어가

18세기 후반의 괴테와 쉴러 등 탁월한 시인들의 문학적 성취를 거치는

동안에 현대 독일어라는 문화어로 성숙 ․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이라는 그의

발상 자체가 엄청난 민주적 개혁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

급과 신분, 직업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召命, Beruf)1)이므로 혁명을

통해서 신분을 바꾸려 해서는 안된다며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입

장을 취했다. 즉 그는 당시의 큰 사회문제였던 농민봉기(1524-1526)가

차츰 그 폭력성을 더해 가자, 그의 옛 추종자이자 농민군의 편에 서서

사회개혁을 외치던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와 견해

를 달리하면서, 군주정체를 옹호하고 군주들에게 ‘하느님이 원하신 질서’

에 반기를 드는 농민들에 대한 강력한 진압을 주문하였던 것이다. 루터

의 이러한 보수적 태도는, 역사상 최초의 가시적 좌파 항거라 할 수 있

는 농민전쟁의 진압에 큰 역할을 하였고, 앞으로 독일 땅에서 군주와 귀

족의 전제정치가 19세기까지도, 아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빌헬름 체제

가 무너질 때(1918년)까지,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는 원인(遠

因)이 되기도 했다.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는 독일인의 정체성을 프로테스탄트 정신, 즉 근면, 절약 및 금욕 정신,

직업이 곧 소명(召命)이라는 정신(cf. Weber 66f), 특히 칼뱅파의 ‘현세

내에서의 은총’ 추구 정신 등에서 찾고 있으며, 이것이 나중에 뒤따라오

는 독일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

다. ‘자본주의에 대한 … 칼뱅주의의 아주 특별한 친화력’(cf. Weber

36f.)을 강조하는 베버의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도 상당한 설득력을 인정

받고 있는 사회학적 통설이다. 루터 이후의 독일 정신이 운위될 때에,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일단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정신 속에 내

재되어 있는 종교적인 민주성과 아울러 그 정치적 한계성도 아울러 지

적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독일 땅에서

일어난 최초의 민중 봉기라 할 수 있는 농민전쟁의 편에 서지 않았던

것이다.

2)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발전:

신에서 이성 중심으로의 사유 전환과 시민의식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서구에서 주목되는 한 가지 사실은 학문의

중심이 창조론과 섭리론을 다루는 기독교신학으로부터 차츰 인간의 이

성을 다루는 철학으로 전이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흐름, 즉 서구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의 비조(鼻祖)가 된 사람은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

르트로서, 그는 중세 신학에서의 ‘신(神)’ 대신에 ‘이성(理性)’을 자신의

철학의 근본화두로 삼음으로써 신 중심적 사고로부터 이성 중심의 사고

에로의 첫 관문을 열었다.

이어서 등장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신을

‘능조적(能造的) 자연’(natura naturans, schaffende Natur)과 ‘소조적

(所造的) 자연’(natura naturata, geschaffene Natur)의 합일체로 생각

함으로써(Spinoza 37f.), 결국 만물 속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汎神論)을 주장하기에 이르며, 또한 스피노자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철학을 주도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의 최선의 세계(die

beste aller möglichen Welten)”라며 ‘예정조화설(die prästabilierte

Harmonie)’(Leibniz 272f.)을 주장하는데, 결국 이 두 사람은 신의 존

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방법을 모색한 철학자였으며, 독일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실상의 선구자였다.

이들보다 약 1세기 후에 나타나 독일 계몽주의 철학을 완성한 학자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이다. 특히, 그의 『윤리학

의 기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 나오는 ‘범주적

(範疇的) 명령’(또는 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 즉 우리 인

간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대의 행동이 일반적 법칙이 되어도 좋다

고 생각될 때에만, 그런 행동을 하라!”는 이 도덕적 원칙은 인간이 신이

나 성경으로부터 독립해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결단을 내릴 때

의지할 수 있는 최초의 규범이며(Kant 89), 이 ‘범주적 명령’은 오늘날

의 독일인들에게도 여전히 규범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100인에게 물어도 100인이 다 그렇게 행동하리라고 추정될 때에만 그

렇게 행동하라는 것인데, 이것은 ― 우리에게 ‘삼강오륜’이 그런 것처럼

― 오늘날의 독일 시민들의 의식에도 깊이 내재화되어 있는 행동규범이

다.

3. 좌우 정당정치의 발달: ‘정신의 귀족’과 제4계급 등장

1) 좌파 정당의 이론적 토대 : 유물론의 발달

칸트 이후 최대의 철학자는 변증법의 창시자인 헤겔(Georg Friedrich

Wilhelm Hegel, 1770-1831)이다. 칸트의 이성적 철학을 한층 더 합리

화하여 ‘신의 섭리’를 ‘역사철학적 발전’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헤겔의 후

배들 중 특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혹시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하느님

을 창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세기적 역발상을 내어놓았다(Feuerbach

15). 이 생각 중 ‘인간’을 ‘환경’이나 ‘물질’로 대체한다면, 금방 유심론에

서 유물론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헤겔로부터 마

르크스에 이르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며 이행과정(wesentliches Bindeglied

und Übergang von Hegel zu Marx)”(Metzler 236)이다.

한편, 당시 ‘라인지방 신문’의 기자로서 영국산업혁명 노동자들의 참

상을 목격한 바 있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포이어바흐의 가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이 아니

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물질적 여건과 환경이 인간의 운명을 결

정한다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무신론을 내어놓았는데, 이것이 유

명한 유물론(Materialismus)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독일사회에 내

던진 폭발적 선언이 바로 유명한 공산당선언(1848)이다. 후일, 독일의

보수 정당들이 ‘기독교 민주당’(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기

독교 사회당’(Christlich-Soziale Union) 등과 같이 ‘기독교적’이란 형용

사를 당명 앞에 붙이는 것은 자신의 정당에다 종교적인 색채를 부각시

키려는 의도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유물론적인’ 공산당이나 사회

당이 아니라 유럽적 전통문화에 기반해 있는 우파정당임을 부각시키려

는 징표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13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산당선언(1848)이 나오는

19세기 중반의 독일의 정치적 지형도이다. 이웃나라 프랑스는 1789년

에 이미 프랑스대혁명을 거치고 비록 나폴레옹 제정시대, 왕정복고 등

을 거치며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긴 했으나, 혁명의 주체였었던 시민계

급(제3계급)이 국민국가 프랑스의 주요 정치적 담지자로서 성장해 갔음

에 반하여, 독일은 19세기 중엽에도 아직까지 수십 개국의 크고 작은

전제 군주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시민계급 출신이던

괴테(1832년 사망)도 바이마르 공국의 귀족 칭호를 얻고 군주국의 신민

(臣民)으로서 살았다. 이렇게 19세기 초엽의 독일시민계급은 정치적 ‘자

유’(Freiheit, 구체적으로는 입헌군주제)와 민족적 ‘통일’(Einheit, 구체

적으로는 독일땅에 산재해 있던 여러 군주국들의 정치적 통일)을 열망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주체로서의 제도적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군주들(제1계급)과 귀족들(제2계급)의 지속적인 억압을 받는 상황

하에서 설상가상으로 노동자계급(제4계급)의 새로운 요구까지 견뎌내어

야 하는 격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19세기의 독일 시민계급은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군주들과 혈통귀족

들의 전제적 지배 하에서 신음하는 무력하고 비루한 존재였으나, 군주

들과 혈통귀족의 온갖 전횡에 대해 오직 근면과 검약을 통해 자본을 축

적하고 지식을 습득하면서 비록 혈통귀족은 아니지만 ‘정신의 귀

족’(Adel des Geistes)2)이 되는 것으로서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2) 1947년에 피셔 출판사에서 나온 토마스 만의 “인본주의 문제에 관한 16개 시론

(試論)”, 즉 레싱, 괴테, 쇼펜하우어, 바그너, 슈토름, 폰타네 등에 관한 토마스

만의 16개 에세이들은 독일시민계급의 인본주의적 예술가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이 ‘정신의 귀족’(Adel des Geistes)이라는 표제를 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Vgl. Thomas Mann. Adel des Geistes: Sechzehn Versuche zum Problem

der Humanität, Stockhom: Bermann-Fischer, 1947 참조.

 

 

군주와 혈통귀족에게 참정권과 정치적 발언권을 빼앗겼지만 ‘정신의 귀족’을

추구한 독일 시민계급의 대종(大宗)은 사업가, 변호사, 의사, 교사, 시인

​   등으로서, 정신적으로는 귀족에 못하지 않은 고상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런 시민계층을 독일에서는 특히 교양시민(Bildungsbürger)이라 불렀

으며, 이 계층이 앞으로 민주적 ‘현대 독일 시민사회’를 이끄는 주역이

되기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을 겪게 된다.

2) 루터의 계승자 비스마르크:

가톨릭계 중앙당 및 사회민주노동당과 대립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에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

1898)라는 희대의 영웅이 나와 1871년에 독일의 여러 군주국들을 -오

스트리아와 옛 신성로마제국의 부속령들, 즉 헝가리와 그 주변의 동구

여러 이민족 국가들은 제외되었지만 -프로이센 중심의 소(小)독일제국

으로 통일한 것은 국민국가 독일의 뒤늦은 성립을 위해서는 불행 중 다

행이라 하겠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프로

이센의 지도자로서 1848 혁명이후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그는 독일을 프로테스탄트를 중심으로 문화적으로 통합하

려고 했다. 그를 지지하는 중심세력은 독일 민족주의 분위기 속에서 문

화투쟁(Kulturkampf)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

우익세력, 즉 민족자유당(die Nationalliberalen)이었다.

그의 이러한 정책에 대립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당이 바로 1870년에

설립된 중앙당(das Zentrum)이다(cf. Jäckel 31). 이 중앙당은 비스마

르크의 통일 정책, 즉 신교국가인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

앙집권적 독일 통일에 반대하며, 국가로부터 교회의 제 권리를 지키고

각 영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체제의 도입을 주장함으로써 비스마

르크의 정책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중앙당은 산업화로 인한 여

러 사회적 폐단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회 입법을 요구하면서

“진보, 자유주의, 근대문명”과의 타협을 무조건 거부하고자 했고, “문화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15

에 반대하는 투쟁 (Kampf gegen Kultur)”을 내세웠다면, 프로테스탄

트 측은 “문화를 위한 투쟁(Kampf für Kultur)”를 내세움으로써 양자

간의 문화투쟁이 불가피했다(이민호 188). 비스마르크 정부는 가톨릭

성직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지금까지 교회의 관리 감독 하에 있던

교육영역을 국가의 관리감독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출생, 혼인, 사망의

업무도 교회가 아닌 행정당국의 업무로 이관시킴으로써 교회에 세속업

무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가톨릭 감독을 위한 조처들

과 관련하여 중앙당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없었고, 프로이센 영내의 모

든 수도원이 해산되기도 했는데, 이때는 가톨릭 측뿐만 아니라 프로테

스탄트 측의 반발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교육 행정은

병역의 의무처럼 모든 국민이 교육(Bildung)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한편, 대학에 학문의 자유도 인정을 해줌으로써 뒤늦게 출

발한 독일의 근대화가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과학과 지식’을 자본

으로 급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대척점을 이루는 또 하나의 정당은 사회민주노

동당(die sozialdemokratische Arbeitspartei)이다. 공업화 결과로 노

동자수가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급증하고 지속적인 경제불황

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마르크스 계급이론으로 무장한 베벨(August Bebel, 1840-1913)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26-1900)를 중심으로 사회민주노동

당이 설립되었고 1875년 라살(Ferdinando Lassalle, 1825-1864)파도

흡수하여 ‘사회주의 노동당(Sozialistische Arbeitspartei)’으로 확대하였

고 제국의회에 진출할 정도로 성장했다(cf. Wehler 87). 일부 시민들도

‘파리 코뮌’ 양상에 충격을 받아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마저 거부해야

한다는 극우 보수주의자 입장을 보였고, 비스마르크 역시 사회주의 노

16 탈경계 인문학_제6권 2호 (2013년 6월)

동당의 확장에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맞서기 위해 비스마

르크는 두 차례에 걸친 황제암살미수 사건을 십분 활용하고, 소위 ‘사회

주의 탄압법(Sozialistengesetz)’을 제정하였고, 이 법이 1878년 10월

19일 제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 탄압법에 따라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모든 단체

들은 해체시키려고 했고 불온한 정당의 당원들은 철저히 감시했다. 2-3

년간의 한시법이었는데 1890년까지 부분적으로 개정되면서 지속되었

다. 이 법으로 베를린은 준계엄 상태 하에 놓이게 되었고, 사민당과 각

종 노동조합이 해체되었으며 1500여 명이 체포되고 900 여명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탄압법이 실질적으로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음을 비스마르

크는 모르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결국 노동자들을 사회주의로부터 격

리시키기 위해서는 탄압 대신에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는

국가의 적절한 사회정책이 필요함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노동재해 보험’ 및 ‘부상병, 노년 보험’을 위한 법률을

공포했다.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민족국

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적인 보수우익 정당의 입장을 유

지하면서, 가톨릭계의 보수 정당인 중앙당과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 노

동당에 동시에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이 시기의 우익 정당이 프로테스

탄트냐 가톨릭이냐로 이분화 되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우익 보수 정

당과 좌익 진보 정당의 양대 흐름이 분명하게 확인된다. 정당의 ‘기독교

적인’ 특성은 사회주의적 좌파 정당의 특성에 대하여 확실히 보수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결국 외교에서 국제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던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죽고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2년

후인 1890년에 황제 빌헬름 2세와의 정견의 차이로 말미암아 결국 물러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17

나게 되었다. 빌헬름 2세의 친정체제 하에서의 독일제국은 점점 더 군

국주의적 특징을 띠며 민주주의라는 당대 유럽의 큰 흐름에 역행하게

된다. 후발 자본주의국가로서 일찍부터 식민지 개척의 대열에 끼지 못

했던 당시 독일의 입장은 외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 공이 1897년 12

월 6일에 제국의회에서 행한 연설 중에 나온 “양지바른 땅(Platz an der

Sonne)” (Penzler 8)3), 즉 식민지의 필요성에 대한 언급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결국 빌헬름 체제의 독일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만, 1918년 연합국에 패배하게 된다. 패전 직후에, 비스마르크

의 사회주의 탄압법 이래 억압을 받아오던 공산당의 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등이 ‘11월

혁명’을 시도하지만, 독일 땅에서 제4계급이 일으킨 이 첫 혁명은 실패

로 끝난다.

3) 히틀러 체제와 통일독일의 붕괴

이제 독일에는 프랑스 등 연합국의 비호 하에 “바이마르공화국”(1919

-1933)이 들어선다. 독일 땅 위에 패전의 선물처럼 타력으로 세워진 이

신생 민주공화국은 괴테와 쉴러가 정신문화를 꽃피웠던 위대한 문화도

시 바이마르에서 그 독일 문화를 계승해 나가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프

랑스 등 연합국들이 요구한 과도한 전쟁배상금과 노동계급의 대량 실업

사태, 군소정당의 난립과 합종연횡(合從連橫)에 따른 민주주의 체제의

대혼란 등으로 인하여 마침내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

일노동자당(NSDAP,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나치당, 1921-1945)에 의해 제3제국의 전쟁준비체제로 돌입한다. 1933

3) Vgl. Johannes Penzler (Hrsg.). Fürst Bülows Reden nebst urkundlichen

Beiträgen zu seiner Politik 1. Bd, 1897-1903, S. 8: “Mit einem Worte: wir

wollen niemand in den Schatten stellen, aber wir verlangen auch unseren

Platz an der Sonne.”

년 히틀러 정권장악 이후 12년간 독일은 홀로코스트(Holocaust, 유태

인 학살) 등으로 얼룩진, 그야말로 문화적 대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극우당이라 할 나치당의 당명 안에 ‘사회주

의적’이란 말과 ‘노동자’란 단어가 들어있다는 아이러니칼한 사실이다.

이것은 당시 독일사회에서 ‘사회주의’(Sozialismus)와 ‘노동자(Arbeiter)

문제’가 그만큼 급박하게 되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당

명에 사용된 ‘사회주의’와 ‘노동자’ 개념은 독일사에서 나치역사 만큼이

나 예외적인 사용일 뿐, 기존의 좌우파 양대 정당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역사 소설가들이나 역사가들이 밝혔듯이, 제 3제국을 가능하게 한 역

사적 조건들은 이미 제 2제국시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cf. Wehler

16f.). 히틀러 자신도 “제 3제국의 선구자로 고려될 수 있는 사람 가운

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비스마르크”라고 했고 나치시대의 “대독일 설

립의 제반사항을 마련”했고, “민족사회주의 통일국가를 위한 초석을 확

립했다”고 말했다(Domarus 1078). 물론 비스마르크는 소독일주의 민

족국가를 수립하고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처럼 주변국을 정복하고자 하지

는 않았다. 그래서 나치시대에 비스마르크가 지속적으로 영웅시되지는

않았지만,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의 통일국가 수립에서 제3제국의 연속성

을 보았다. 그러나 대독일주의 입장을 취하는 히틀러는 비스마르크의

소독일주의적 민족국가 통일을 왜소하게 보았을 것이다. 나치당은 파행

적 국수주의와 군국주의의 결합으로 결국 비스마르크가 확립한 통일 독

일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은 전후에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서독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하에서 서방측 연합국들의 대대적 물적 지원을 받고 국민들이

민주주의적 개안(開眼)을 함으로써 경제적으로는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

을 이룩해 내고 정치적으로도 과거청산(Vergangenheitsbewältigung)

- 나치 만행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 - 을 이룩해 내고 바이마르공화국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19

의 실패한 민주주의를 교훈으로 삼아 상향식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였

다. 보수적 기민당과 진보적 사민당이 번갈아 집권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립하고, 경제적 부(富)와 사회보장제도를 동시에 달성한

서독이 1980대 말 소련의 고르바쵸프 체제의 해빙 무드를 틈타 슬기롭

게 재통일(1990)을 성취해낸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독일 최근세사

이다.

4. 기민당과 사민당의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전후 서독에서 기민당과 사민당의

양대 정당 제도가 현대적 형태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

는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민주주의의 실패가 큰 교훈이 되었다. 군주

와 귀족이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전후 독일 사회에서 주로 옛 교양시민

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으로서 기독교 민주당(CDU, Christlich-Demokr

atische Union; 바이에른주에서는 기독교 사회당, CSU, Christlich-Soz

iale Union)이 활동하였으며, 노동자와 기능공 등 무산계층은 이미 바

이마르공화국 시대부터 사회민주당(SPD, Sozialda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지지기반이 되어 있었다. 군소 정당이 난립함으로써

나치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뼈저린 경험에

서 전체 국민투표자의 5%에 미달하는 득표를 한 정당의 의회 진출을

기본법(서독의 헌법)에서 원천 봉쇄해 놓았기 때문에, 기민당과 사민당

간의 중간 정당으로서는 오직 자유민주당(FDP)만이 의미 있는 정당으

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지도가 백중세로 드

러날 때에는 오히려 소수당인 자민당이 늘 연정에 참여하고 정책의 키

보드를 쥐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를테면, 1969년에서 1998년까지 자민

20 탈경계 인문학_제6권 2호 (2013년 6월)

당은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연정파트너로서 연방정부 구성에 참여하였

다. 이를테면, 자민당은 1969년에서 1982년까지는 사민당과 연정을 구

성하였고, 그 이후 69년까지는 기민당과 연정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10% 내외의 득표를 해 온 자민당이 30여 년 동안 독일 외무성의 장관

직(총리는 다수당에 양보하는 대신에 연정의 파트너로서의 자민당의 당

수는 대개 독일의 외무장관직을 맡았음)을 차지함으로써, 독일의 역대

외교정책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런 서독의 정당 지형도는 70년대 초 이래로 녹색당(Die Gründen)

이 등장하고, 또한 통독이래로는 동독의 옛 통합사회당(SED, Sozialisti

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4) 세력의 일부가 좌파당(Die Lin

ken)을 결성하여 주로 동베를린 및 구동독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보다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최근에는 투명한 정보화 사회

의 구현을 외치며 인터넷을 통해 기습적 정당활동을 벌이는 해적당(Die

Piraten)까지 생겨나서, 독일의 정치적 지형도는 보다 복잡해졌으며, 연

정의 키보드를 쥐어왔던 자민당의 지위가 심히 흔들리게 되었다. 전통

적인 좌우 양당(기민당과 사민당)이 30% 내외를 분점하지만, 이 두 정

당 이외에도 녹색당, 좌파당, 자민당, 해적당 등 4개 군소 정당이 5%의

벽을 넘어 하원 진출을 하고자 현재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따라

서, 연정의 형태도 전통적인 흑황(기민당+자민당) 연정이나 적황(사민

당+자민당) 연정, 또는 대연정(기민당+사민당) 이외에도, 적록(사민당+

녹색당) 연정, 적적(사민당+좌파당) 연정 등의 새로운 연정 형태도 가능

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정치적 사안이 상향식 민주주의 과정을 통해

4) 구동독의 집권당인 SED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를 우리나

라 사회과학자들이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으로 번역하는 사례가 많은데, 여기서

‘Einheit’는 동․서독의 ‘통일’을 표방하는 ‘통일’이 아니라, 동독 출범 당시에 공산당

(KPD)과 사민당(SPD)이 한 정당으로 ‘통합’(사실은 사민당이 공산당에 병합)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독일 사회주의 통합당’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21

의회에서 발의되고 의회에서의 토론과 논쟁을 거쳐 각 정당 간의 민주

적 타협과 표결로 결정되는 독일의 정치문화는 현재 그 어느 나라의 민

주주의보다 발달되고 성숙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할 것이다.

5. 의회 민주주의를 통한 법치주의의 확립

루터의 종교개혁, 농민전쟁, 19세기 초의 나폴레옹의 지배, 통일과 자

유를 향한 독일시민계급의 열망, 제4계급의 등장, 비스마르크의 통독과

사회주의 탄압법, 제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공화국, 제3제국과 동∙서

독 분단 시대, 그리고 현재의 통일독일 시대를 겪어오면서 여러 정치적

시련과 그 극복을 경험해 온 독일인들은, 자신이 우파든, 좌파든, 또는

중립적 정당 지지자든 간에, 모든 정치적 사안을 의회에다 위임하고, 의

회에서 토론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서로 인정, 협조, 배려하는 정치문화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

했다.

독일 시민사회의 개방성과 민주성, 그리고 시민의 실권을 웅변해 주

는 한 가지 사례로서, 제10대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 불프(Christian

Wulff, 1959- )의 사임 사건을 들 수 있겠다. 불프는 2010년 6월 30일

독일연방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이전에는 니더작센주의 기민당 지도자로

서 정계의 신망이 두텁던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가 과거 니더작센 주

지사로 일하던 시절에 어느 은행으로부터 파격적 저금리로 주택 자금을

빌린 사실이 지난 2011년 12월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이 모종의 정치

적 특혜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언론에 보도되고, 불프

가 이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독일시민사회 및 언론에서 연방대통령직 사

퇴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변명, 해명하

22 탈경계 인문학_제6권 2호 (2013년 6월)

던 불프가 2012년 2월 17일에 드디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옛 동독의

루터교회 목사 겸 시민운동가였던 가우크(Joachim Gauck, 1940- )가

2012년 3월 18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초당적 지지를 얻어 새 연방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은 연방수상과는 달리 정치적 실권은 없고, 국

빈을 접견하고 국내외 유공자를 포상하는 직무를 지닌 상징적 존재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독일 시민들은 특혜시비 혐의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연방대통령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고 할 것이다. 이른바

‘불프 사건’이라고 불리는 3개월 동안의 이 일련의 정치적 과정은 실증

법에 저촉되지도 않는 어떤 특혜 의혹만으로도 현직 대통령을 사퇴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이 현대 독일 시민사회에 주어져 있음을 웅변하는 하

나의 예이다.

6. 맺는 말

요약하자면, 현재의 독일 시민사회는 오랜 전제적 억압과 인고의 삶

을 견뎌내고 ‘정신의 귀족’을 추구해 온 독일 교양시민계급의 후예들과,

농민전쟁 이래 가난과 제도적 질곡으로부터 헤어나기 위해 공산당과 나

치당, 그리고 동독 통합사회당(SED)의 유혹이라는 시련에 부대끼면서

그 또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한 독일의 노동자계급이 각각 기독교민주당

(기민당, CDU/CSU)과 사회민주당(SPD)이라는 양대 정당을 기반으로

하여 민주주의, 법치주의, 그리고 사회보장정책이 확립된 경제적 공동체

라는 가치관을 공동으로 확립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당체제는 현재 중립적 정당인 자유민주당(FDP), 지속가능

한 친환경 정책 정당인 녹색당(Die Grünen), 동독 정치의 이념적 상속

안삼환_독일 시민사회의 발전 맥락에서 본 독일 양대 정당제도의 역사적 배경 23

자라 할 좌파당(Die Linken), 그리고 정보화 사회에서의 인터넷 소통

을 중시하는 해적당(Die Piraten) 등 소수정당들을 통해 보완되고 있다.

참고로 2012년 7월 현재 ‘독일 제1공영방송의 유권자 지지성향 조사’

(ARD-DeutschlandTrend)를 보자면, 기민당 및 기사당 35%, 사민당

30%, 자민당 4%, 좌파당 7%, 녹색당 14%, 해적당 7%, 기타 군소 정당

들 3%의 지지율을 보임으로써 전통적으로 제3당이었던 자민당이 녹색

당, 좌파당, 해적당 등에 밀려 4%의 지지율밖에 확보 못하고 있기 때문

에 다음 회기에서의 연방 의회 진출 가능성마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

다. 바이마르공화국 때의 소수정당 난립이라는 교훈을 깊이 새겨 전 유

효표의 5% 이상을 얻은 정당만이 하원에 진출할 수 있다는 법적 장치에

걸릴 위험성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우리나라의

비례대표제가 독일의 이 제도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은 쉽게 짐

작할 수 있겠지만, 비례대표제가 정치자금 불법헌금과 직결되고 있는

최근의 우리나라의 현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라 하겠다.

독일의 시민의식이나 독일 문화를 얘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

일인들이 이룩한 민주주의, 법치주의, 공동체적 정신, 그리고 지속가능

한 지구환경을 위한 생태학적 가치관(예: 탈원전 정책) 등에 대한 이해

가 필수적 전제조건이 된다. 즉, 오늘날의 독일시민은 기민당(CDU/

CSU)을 지지하든, 사민당(SPD)을 지지하든, 또는 녹색당원이든, 좌파

당원이든, 자신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정치적 한계성을 잘 인식하고 있

으며, 이런 권한과 한계 내에서 이성적이고도 정치적인 선택과 결단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늘 주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정책이 무엇인가를

주민과 함께 고민하고 그것을 정책 및 법률 입안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

독일의 지방의회 의원들 및 국회의원들은 확실히 한국의 의원들보다는

유권자들을 보다 많이 의식하고 있다 할 것이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

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지방선거와 연방선거에서 적절히 반

영하는 독일 국민들은 현재의 한국 국민들보다는 그 행동양태가 조금은

더 성숙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독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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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Historical Background of Germany’s Two Big Parties

in the Context of the Developmental History

of German Civil Society

AHN Sam Huan

(Seoul National University)

On the occasion of the polarization of social classes in Korea, this article

describes the historical background to the development of the two big

German parties, the CDU/CSU and the SPD. The chronology covers

developments from the religious reform of Luther and the concurrent

Peasants’ War, through the domination of Napoleon in the early nineteenth

century and the desire of the German civil class for freedom and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the philosophy of Hegel, Feuerbach, and Marx and the

appearance of the forth class, through the period from Bismarck to Hitler,

divided Germany, and reunification, and on up to the present day. Also to

be shown is how Germans overcame their errors in history. The

development of the German political structure is reflected in the context of

civil society’s development, especially the development of democracy and

constitutionalism, a sense of community and collective spirit, and a

consciousness of the ecological environment. This process could offer a

model for the positive development of Korean Democracy.

Keywords : CDU, Luther, Marx, Bismarck, SPD

 

 탈경계 인문학_제6권 2호 (2013년 6월)

Received: 15 April 2013   Reviewed: 10 May 2013  Accepted: 15 May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