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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새로운 계약인가, 새로운 서사인가 : 신사회계약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공진성.조선大

 

 I.들어가며

 

최근 다시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2021년 영국 출신의 사회학 자 미노슈 샤피크(Minouche Chafik)가 “피할 길 없는 변화”와 “위기”를 강조하며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사회계약”의 필요성을 주장했고(샤피크 2022, 9-14, 42), 마찬가지로 2021년 영국의 정치학자 찰스 드벨렌(Charles Devellennes)이 2018년 프랑스에서 등장한 ‘노란 조끼’ 시위대를 보며 그것을 “새로운 사회계약”을 촉구하는 운동으로 해석했다(드벨렌 2024, 16).

지난 세기의 이야기들이 주로 일국적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회계약의 수정, 확장, 또는 새로운 체결을 요구했다면, 이번 세기의 이야기들은 변화한 상황에서 일국적이면서 동시에 지구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회계약이 수정되거나 새롭게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김옥현(2015)은 기후변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새로 운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의 지구적 대유행을 겪으 며 필수 의약품과 의료 기술에 대한 접근을 보편적으로 가능케 할 새로운 ‘지구적 사회계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Perehudoff et al. 2022).

기존의 일국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계약을 비판하며 새로운 지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포스트 베스트팔렌 세계’의 ‘사회 간 계약’ 체결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김만권 2023).

한국에서도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점점 늘고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김옥 현(2015)이 기후위기와 관련해 ‘새로운 사회계약’을 이야기했다면, 법학자 전재경(2017)은 대한민국의 권력구조 개혁을 주장하며 ‘새로운 사회계약’을 이야기했다.

경제학자 최배근 (2021)이 한국 사회의 대전환 필요성을 주장하며 ‘새로운 사회계약’을 말했고, 사회복지학자 강상준(2023)이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또한 ‘새로운 사회계약’ 을 말했다.

사회학자 홍찬숙(2023)도 돌봄이론의 관점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의 체결, 또는 개인주의적 사회계약의 비판적 재구성을 주장했고, 최진석(2022) 역시 도래할 공동체와 관련해 ‘새로운 사회계약’의 탄생을 이야기했다.

김만권(2023)도 “포스트 베스트팔렌 세계 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계약론의 필요”를 주장하며 한나 아렌트의 행위이론에서 그 이론적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가운데에는 사회계약에 대한 언급이 다분히 수사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고, 진지하게 이론적인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한국 인에게 다소 낯선 이론 전통인 사회계약론이 이제 한국에서도 정치사상사적 논의를 넘어 동시대를 위한 정치(이론)적 주장으로서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유럽에서 국가를 ‘사회계약’ 관념에 근거해 정당화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처음 등장했다.

그런 계약이 허구적임을 비판하는 반계약론적 논의가 그 뒤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 만, 계약론은 서구 사회에서 주류 사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하나의 이론 전통을 형성했다.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 이 계약론 전통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수사적으 로만 ‘새로운 계약’을 언급하는 경우에도 한 사회에서 그런 표현이 채택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사회가 사회계약 관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론적 전통이거나 수사적 전통이 거나 간에 ‘사회계약’은 확실히 서구의 전통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구화한 한국에도 어느새 사회계약 관념이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의 관심은 신사회계약론의 내용에 있지 않고 ‘사회계약론’이라는 주장의 형식에 있다.

즉 신사회계약론이 정말 법적 계약의 체결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근대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구조를 살펴 보고, 계약이 과연 실제로 체결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이론에 대해 ‘이야기’의 방식을 내세우는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해석적ㆍ서사적 접근을 살펴 보고, 더 나아가 정치적 서사학의 관점에서 사회계약론 자체가 하나의 서사로 이해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최근의 논의들이 실제 로 추구하는 것이 새로운 서사를 통해 집합적 주체를 구성하고 설득을 통해 대안적 행동을 촉구하는 것임을 주장할 것이다.

 

II.사회계약은 그자체로 체결될 수 있을까

 

사회계약론에는 초기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 크게 보면 비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런 계약이 실제로 체결된 적이 없다는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계약 이 논리적으로 체결될 수 없다는 비판이다.

사회계약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첫 번째 비판에 대해서는 사회계약론이 국가의 실제 탄생 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지배의 정당성 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라고, 또는 현대의 사회계약론이 주장하듯이 공정한 원칙을 발견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라고 답해왔다.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계속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먼저 사회계약의 체결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두 번째 비판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사회계약이 논리적으로 체결될 수 없다는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의 사회계 약론에서 말하는 ‘계약’이 무엇인지를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계약이 그 자체로는 체결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은 약속의 일종이다.

약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계약은 그 여러 가지 약속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여타의 약속들과 다른 계약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이 계약을 언급한 홉스(Thomas Hobbes), 로크(John Locke), 루소(Jean-Jacques Rousseau) 같은 정치사상 가들을 이른바 ‘근대’ 정치사상가로 분류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그것은 바로 약속 당사자들 간의 수평적 또는 대칭적 관계이다.

모든 약속에는 상대가 있지만, 상대와 의 관계가 대칭적이냐 비대칭적이냐에 따라 약속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다.

비대칭적 약속 에 대해서도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지만, 대칭적 약속의 경우와 의미가 다른 것은 분명하 다.

약속은 다시 쌍방적인 것과 일방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대칭적이면서 쌍방적인 약속을 계약이라고 부른다면, 비대칭적이면서 쌍방적인 약속을 신약(信約, covenant), 대칭적이거 나 비대칭적이거나 간에 일방적인 약속을 공약(公約, commitment)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모든 약속에는 상대가 있지만, 약속이 언제나 상대의 약속을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의무를 부과하는 공약 역시 약속의 한 가지 중요한 형태이다.

약속의 구체적인 유형을 위와 같이 구분하면, 근대의 사회계약론이 말하는 계약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마치 하나의 계약처럼 뭉뚱그려져 표현되는 것을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홉스의 계약이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사회계약과 통치계약의 결합이다 (Münkler 2014, 113).

전자가 평등한 사람들끼리 하나로 뭉치기로 약속[pactum associationis]하는 대칭적이면서 쌍방적인 ‘계약’이라면, 후자는 그 계약을 보증해 줄 통치 자(주권자)에게 신민이 복종하기로 약속[pactum subjectionis]하는 비대칭적이면서 쌍방 적인 ‘신약’이다.

홉스의 계약이론은 사회계약과 통치계약이 ‘논리적 순간’에 동시에 발생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다스리는 권리를 이 사람 혹은 이 합의체에 완전히 양도할 것을 승인한다. 단 그대도 그대의 권리를 양도하여 그의 활동을 승인한다는 조건 아래”(홉스 2008a, 232).

 

홉스는 대칭적 사회계약을 전제하는 이 비대칭적 약속을 ‘커버넌트’라고 불렀다(홉스 2008a, 181).

홉스 자신은 커버넌트의 비대칭적 성격보 다는 약속 이행의 시간적 차이를 강조하지만, 그 용어의 출처인 성경의 이야기나 홉스의 주권자가 가진 위상을 생각할 때, 커버넌트의 의미가 시간적 차원에서만 아니라 지위의 차원 에서도 비대칭적임은 분명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성경의 묘사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 라.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 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 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 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covenant]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 19:1-8, 강조는 인용자)

 

커버넌트의 비대칭성은 일차적으로 약속의 당사자 간 지위가 불평등한 데에서 비롯한다.

홉스의 이론에 차용된 「출애굽기」 속의 ‘언약’은 여호와와 그의 명령에 순종하겠노라고 약속 하는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체결된다.

그 언약이 신약(信約)인 이유는, 대칭적 지위에 있는 사람 들 간에 동시에 체결되는 계약(contract)과 다르게, 일방이 상대방의 약속 이행을 믿고 먼저 약속을 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민이 먼저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복종해야 주권이 성립 할 수 있고, 그래야 주권자가 신민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권자의 안전 보장 약속을 믿고 먼저 신민이 주권자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멸의 신이나 필멸의 신(주권자)은 수평적으로 체결되는 사회계약의 어느 일방과 지위가 다르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권리를 전적으로 공동체에 양도한다.

이 양도 행위는 동시에 정치적 지배를 구성하는 행위이다. 그 점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홉스의 이론과 동일한 주권이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루소의 경우에는 계약체결자들 의 공동체 자체가 주권자의 지위를 보유한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공동체에 양도하지만 그 권리를 시민의 권리로서 되찾는다.

“계약이론의 이런 급진민주주의 적 전환”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시민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내린 명령에 신민으로서 복종한 다(Münkler/Straßenberger 2016, 204).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일방적 약속인 공약(公約)이다.

여기에서 약속의 주체가 상대와 맺는 관계는 대칭적일 수도 있고 비대칭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약속 이행을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선거에 나선 정치인이 유권자에 게 하는 것과 같은 일방적 약속이다.

상대방과의 대칭적 관계가 약속의 이행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약속을 지킬 것을 믿고 자신이 먼저 약속한 것을 이행해야 애초에 기대했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도덕적 의무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일방적 약속이었더라도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 지 않았을 때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끄러워하지는 않기 때문에 일방적 약속의 구속력은 제한적이다.

위와 같이 계약과 신약, 공약을 구분해서 보면, 17-18세기에 유럽에서 등장한 사회계약론 이 정치적으로 가진 근대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전근대 세계에서는 특히 통치와 관련해 대칭적 약속 관념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통치자와 피치자가 대칭적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발상 자체가 허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상호의무(mutua obligatio)’라는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상업적 인간관계가 확산하고 급기야 상인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자 그들에게 익숙한 대칭적 계약 관념이 통치의 영역에까지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수평적으로 체결되는 계약이 그것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계약 외의 다른 요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약속 이행이 전제되지 않는 한, 먼저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상업적 관점에서 봤을 때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사회계약은 마치 계약 외의 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를 묘사했지만, 홉스는 ‘커버넌트’ 개념을 통해 비대칭적 주권자의 보증을 사회계약에 삽입했고, 로크는 수평적 사회계약의 참여에 은밀하게 종교문 화적 동질성을 전제 조건으로 요구했으며(공진성 2018, 143 이하), 루소 역시 ‘정치종교 (religion civile)’의 도입을 사회계약의 유지를 위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공진성 2013, 112-129).

훗날 뒤르케임은 사회분업론에서 계약의 이런 비계약적 토대를 자세히 분석한 바 있다(뒤르케임 2012, 307 이하).

이처럼 사회계약은 근대 초기에 등장할 때부터 이론가 자신들에 의해서도 그 체결 가능성이 의심되었다.

 

III.사회계약은 지구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사회계약의 체결 불가능성 문제를 이번에는 사회계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능력’과 관련 해 한번 생각해보자.

이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일국적이면서도 지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계약이 지구적 차원에서 개인들 간에 또는 사회들 간에 체결될 수 있는지와 관련해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다.

사회계약론의 여러 가지 이론적 쟁점 가운데 하나는 계약 체결에 참여하는 개인의 동의  능력이다.

홉스의 사회계약 관념에서 개인에게 요구되는 동의 능력이란 기껏해야 당장 비참 하게 죽기보다 비록 덜 자유롭더라도 주권자의 지배에 복종하며 생존하기를 선택하는 ‘차악 선택의 합리성’이지만,1) 로크의 사회계약 관념에서는 인간에게 그보다 더 큰 합리성과 그에 근거한 동의 능력이 요구된다.

홉스에게 인간의 평등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능력(=누구나 죽을 수 있음=자기를 보존할 수 없음=무능력)이라면, 로크에게 인간의 평등함을 보여주는 지표는 자기 노동을 자연에 투입하여 재산을 만들고 보존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로크에게 (자기 신체를 포함한) 재산의 보전은 합리성의 보유를 뜻하고, 다시 그것 은 동의 능력을 뜻한다.

재산이 있어야 그것을 지킬 필요가 있고, 재산을 모을 정도의 합리성이 있어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사회계약의 체결에 동의할 수도 있다(맥퍼슨 1990, 242 & 268 이하).

로크가 인간의 합리성과 동의 능력, 즉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근거해 사회계약(정치사회)의 지속을 기대한다면,2) 홉스는 인간의 정념(죽음에 대한 공포) 과 그로 인한 무능력(동의하지 않을 수 없음)에 근거해 국가와 그것에 의해 보장되는 사회계약 의 지속을 기대한다.

루소에게도 인간의 동의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동의의 질(質)이다.

루소의 경우에는 사회계약이 ‘변화의 장소’로서 기능한다.

 

“사람들은 영리한 늑대로서 그곳 에 발을 들여놓고, 시민이자 애국자로서 그곳을 떠난다”(Kersting 2000, 60).

 

처음부터 시민 의 자질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연습이 필요하듯이 시민이 되는 데에도 경험 이 필요하다.

이때, 정치적 참여 자체가 매개적 경험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일반의지를 확립하 는 사회계약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시민이 된다.

그러나 개별의지나 전체의지와 구별되는 일반의지의 수립을 위해 사람들은 개인적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하지만, 집단적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충분한 정보도 주어져야 하지만, 다른 사람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 심사숙 고할 시간도 가져야 한다.3)

 

    1) “이처럼 무제한적 권력이라면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권력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결과들, 즉 만인이 자기의 이웃과 전쟁상태에 있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더 낫다.”(홉스 2008a, 277) 홉스는 “왜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만약 그들이 그저 조금의 이해력만 가지고 있다면, 지배 및 복종을 … 선택할 것인지를 자신이 논박할 수 없게, 즉 논리적으로 증명”했다고 믿는다(Münkler/Straßenberger 2016, 197, 강조는 인용자).

    2) 왜냐하면, 계약의 산물인 통치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동의가 철회될 것이기 때문에, 통치는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사회계약은 지속될 것이다.

    3) 이런 고독한 숙고의 중요성을 강조한 탓에 루소는 토론을 배제한 사람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루소가 배제하려 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부당한 영향이지 의견의 형성 과정에서 필요한 토론 자체의 배제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강정인(2009) 참조.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동의이냐이지, 동의 자체는 아니다.

동의와 관련한 사회계약론의 또 다른 쟁점은 계약의 계승 또는 상속 여부이다.

현대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논의가 앞선 계약의 상속 불가능성이나 원천 무효를 주장하지 않고 상속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다만 확장이나 수정을 요구한다면, 그 이유는 ‘새로운 사회계약’ 자체도 후대에 계승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홉스의 계약이론은 사실상 인간의 무능력(스스로 자기를 보존할 수 없음, 그러므로 사회 계약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최초의 계약 체결 이후 태어난 새로운 사회 구성원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동의가 있는지 여부가 그 이론 구상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그 반면에 로크의 계약이론은 인간의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런 동의가 과거에 정말 있었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는지가 이론적으로 중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크는 ‘암묵적 동의’ 개념을 도입했고, 상속이나 재산권 의 향유와 같은 몇 가지 상징적 행위들을 동의의 징표로 간주했다(로크 2023, 143-144).

즉 기존 계약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는 것을 그 계약에 대한 암묵적 동의로 여긴 것이다.

홉스에게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보존할 수 없어야 사회계약이 성립하기 때문에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로크에게는 사회계약이 개인의 합리성과 동의 능력 에 근거하기 때문에 그 구분이 중요하다.

로크는 한편으로 암묵적 동의 개념을 통해 기존의 사회를 계약 체결의 산물로 구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을 통해 기존의 사회(예컨대 식민지 사회)조차 여전히 자연상태에 있는 것으로 만든다.4)

 

    4) 이와 관련해서는 강정인(2004), 195쪽 이하와 문지영(2022) 참조.

 

여기에서 구분의 핵심은 자연의 정복을 통한 재산의 창조와 보존, 증식 여부이다.

그것이 계약 체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동의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크가 보기에 문명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에 게 아직 합리성과 동의 능력이 없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또한 사회계약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계약이 없다는 것은 그곳에 아직 ‘정당한’ 지배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로크에 게 ‘정당한’ 지배는 어디까지나 동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의 사회계약과 통치계약은 사실상 인간의 동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도 그리 중요하지 않고 미성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성년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할 필요도 덜하다.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는 성년인 자나 미성년 인 자나 마찬가지이고, 그런 상태를 벗어나는 것은 성년인 자에게도 어차피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로크의 사회계약은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에 근거하기 때문에 미성년 상태의 인간이나 민족을 동의 능력을 갖춘 성년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로크에게는 부모에 게 부여된 그 역할이 신성한 것이듯이 제국에 부여된 그 역할도 신성한 것이다.

미개척 상태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 사는 아직 미성년 상태에 있는 주민들을 성년의 상태로 만드는 것은, 그 결과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그들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더라도, 모든 문명 국가의 신성한 의무이다.5)

 

     5) 자유주의적 제국론에 대해서는 공진성(2012), 534쪽 이하 참조. 홉스적 계약에 의해 수립된 국가가 대외적으로 고립주의적 성향을 가진다면, 로크적 계약에 의해 수립된 국가는 개입주의적 성향을 가질 것이다. 

 

사회계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능력의 성격과 정도가 이론가들에 따라 상이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 (무)능력이 신사회계약론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회계약을 지구적으로 확장해 체결할 때에도 과연 확보될 수 있을까?

새로운 사회계약의 체결이 필요하다고 하는 문제의식에는 기존의 사회계약이 계약 체결에 참여하는 사람과 관련해서나 계약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충분히 포괄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데, 과연 새로운 사회계약이 참여자의 측면에서나 다루는 주제의 측면에서나 모두 충분히 포괄적 으로 체결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먼저 홉스와 로크의 계약이론이 각각 무엇에 근거해 체결되며 누구를 포함하는지 살펴보고, 그런 계약의 논리에 따라 과연 오늘날 지구적으로 개인들 간에 또는 사회들 간에 새로운 계약이 체결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홉스의 이론에서 계약은 최소한의 목적, 즉 생명의 보존을 위해 체결되고 계약은 바로 그 목적과 관련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을 포괄한다(홉스 2008a, 227).

그래서 홉스는 순교를 각오하는 사람이나 광신자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복종시킬 방법이 없으므로 계약의 바깥에 있고, 주권의 확립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6)

홉스의 이론을 지구적으로 확장할 때, 국가들 사이의 ‘사회계약+통치계약’이 체결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포의 상대적 부족이다.

비록 국가들의 관계가 무정부적이기는 하지만, 자연상태(=전쟁상태)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생존의 위협만큼 큰 위협을 국가들 이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7)

일단 주권국가의 형태로 자기를 조직한 사람들은 무정부적 국제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자기를 지킬 수 있으며, 그러므로 더 큰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면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다.8)

 

      6) ‘순교자’에 대한 홉스의 재규정에 관해서는 홉스(2008b) 186쪽 이하 참조.

      7) 스피노자도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두 개의 국가는 자연 상태에 있는 두 사람처럼 서로 대립한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공동체는 다른 정치공동체에 의해 억압받지 않도록 자기를 지킬 수 있지만,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스피노자 2020, 111)

      8) 이 점에서 유럽연합은 주목할 대상이다.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공통의 부정적 경험과 경제적 협력의 필요가 유럽 의 각 국가로 하여금 상위의 권력기관을 만들어 주권의 일부를 양도하도록 했지만, 그것이 과연 주권의 완전한 포기로까지 이어질지, 아니면 일정한 문턱을 결코 넘지 못하고 현 상태를 지속하거나 영국과 같은 이탈국의 증가로 인해 아예 해체될지가 관심의 대상이다. 

 

그래서 핵무기의 개발이나 기후 변화, 또는 글로벌 테러리즘과 같은 전 지구적 위험이 감지되었을 때, 이제 개별 국가의 수준에서 자기 보존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우므로 홉스적 논리에 따라 ‘세계내정(Weltinnenpolitik)’ 또는 ‘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가 필요하며, 그것이 과거에 추구되었던 칸트적 ‘세계공화국 (Weltrepublik)’의 실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했다.9)

그러나 아직 지구적 위험은 예컨대 영화의 소재로나 다루어지는 외계인의 침략이나 다른 행성과의 충돌 같은 거대한 수준이 아니고, 그래서도 여전히 그 위험의 정도는 각자의 처지와 인식 수준에 따라 달리 파악되고 있어서 인류 공동의 대응 필요성이 폭넓게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울리히 벡(Ulrich Beck)에 따르면 위험(risk)은 인식(perception)에 의존하는데, 로버트 쿠퍼(Robert Cooper)의 표현처럼, 오늘날 지구는 서로 다른 발전 수준에 있는 세계들로, 즉 전근대적 세계와 근대적 세계, 탈근대적 세계로 나누어져 있어서(쿠퍼 2004, 37 이하 참조), 각각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지구적 위험의 정도가 다르다.

지구적으로도 일국적으로도 발전이 불균등하게 이루어져 있어서, 설령 위험 자체가 보편적 성격을 가지더 라도, 그 위험이 현실이 될 때 불평등하게 분배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 많이 위험에 노출되는 곳에서도 여전히 위험의 인식은 개인의 처지에 따라 다르다(벡 2010, 4장과 10장).

오늘날 사회계약이 지구적으로나 일국적으로나 홉스적 논리에 따라 새롭게 체결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이는 루소적 계약이 주네브(Genève) 같은 작은 정치공동체를 전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공동체는 동시에 인식공동체인 것이다.

새로운 사회계약을 위해 위험을 과장하거나 더 나아가 위험을 일부러 키울 수 없다면, 결국 더 많은 이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통해 합리적으로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이익을 바라는 합리적 개인은 동시에 현재의 확실한 이익과 미래의 불확실한 이익 사이에서 또한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현재의 확실한 이익을 선택한다.

게다가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대립할 때 합리적 개인은 또한 쉽게 개인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무임승차하려고 한다. 합리적 행위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러 므로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10)

 

     9) ‘세계내정’에 대해서는 Bartosch(1995), 238쪽 이하, ‘세계공화국’에 대해서는 가라타니(2007) 참조. 자오팅 양(2022)의 ‘천하’에 대한 논의도 참고하라.

    10) 물론 오스트롬과 같은 학자들은 상황에 따라서 외부의 강제가 없어도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Ostrom et al. 1992). 

 

홉스에게 그런 사람은 ‘적’이고, 로크에게는 ‘범죄자’이다.

그런 이기적 행위자들을 아직 미성년 상태에 있는 존재로 여기더라도, 그런 행위자를 기꺼이 가르쳐 성년의 상태로 양육하는 부모의 역할을 하며 공공재를 공급할 이타적 행위자가 국가 외에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나 롤스와 같은 현대의 계약론 자들이 지구적 차원에서도 자유주의 국가들이 정의의 원칙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11) 실제로 미국과 같은 개입 능력을 갖춘 자유주의 국가들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구적 문제에 개입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동기는 ‘무지의 베일’이나 ‘원초적 입장’과 같은 이론적 장치를 통해서만 정의로운 계약의 수립에 기여할 수 있고,12) 그런 이론적 장치가 없는 현실에서는 오히려 합리적 동기가 불의한 상황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낳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게 될지조차 불분명한 미래 세대와의 사회계약은 더욱 비현실적이다.13)

 

      11) 예컨대 하버마스(2009)의 제4부와 롤스(2017)의 제3부 참조.

      12) 롤스(1985) 137쪽 이하와 155쪽 이하 참조.

      13) ‘세대(간) 계약’ 개념은 공적 연금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생겨난 것인데(Walker 1996 참조), 오늘날 고령화와 저출산의 여파로 인해 세대간 연대에 근거한 기존의 계약과 그에 대한 국가의 보장 자체가 세계 곳곳에서 불신 받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앞으로도 개인들과 국가들은 전지구적 위험 앞에서 새로운 사회계약을 체결하는 ‘협력전략’보다 개별적 ‘무장전략’이나 ‘무임승차 전략’을 선택할 것 같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계약’은 일국적으로도 지구적으로도 실제로는 체결될 수 없는 허구적 상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계약’ 논의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IV.사회계약인가,계약이라는서사인가

 

칸트가 사회계약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정하며 그것이 어디까지나 정치체에 대한 비판의 합리적 기준 수립에 관한 것임을 주장한 뒤, 현대에 롤스가 그 입장을 계승하여 정의로운 사회가 따라야 할 원칙을 제시했을 때, 사회계약론은 한편으로 새롭게 이론으로서의 생명력 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정의로운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그런 인공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발명(invent)되거나 철학자에 의해 발견 (discover)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학적 시각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을 이야기하지만 사회계약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약속을 다루는 이론을 만나게 되었다.

마이클 왈저와 한나 아렌트는 실제로 ‘우리’ 미국인이 맺은 언약 또는 약속을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설적 계약이 아니라 실제의 계약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계약은 미국인이 스스로 자기에게 의무를 부과한 약속이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의 승객들은 케이프 코드에 상륙하기 직전 실제로 ‘메이플라워 협약(Mayflower Compact)’을 맺었고, 1776년 13개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선언은 실제의 역사적 문서이며, 1787년 미합중국 헌법은 연방을 탄생시킨 실제 언약이다.

왈저와 아렌트는 이런 실제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다시 약속의 주체로 만들려고 한다.

시민의 자기 구속에 초점을 맞춘 이 약속을 왈저는 ‘언약(covenant)’이라고 부른다(왈저 2017, 97 이하).

왈저에게는 시내산에서의 언약 체결을 정점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출애굽 역사가 결정적인 정치적 서사이다.

그 서사가 다른 어떤 역사나 이론보다도 미국인들의 정치 적 자기 이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왈저 2017, 26).

왈저의 출애굽과 혁명(1985)은 바로 그 영향에 대한 분석과 묘사이다.

이 책에서 왈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치사에 나타났던 출애굽 이야기를 재진술하면서, 다양한 해석들의 조명 속에서 텍스트 를 다시 읽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출애굽 이야기의 의미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나는 이와 같 은 방식으로 텍스트를 활용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이 텍스트가 허구라거 나 단순한 창작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텍스트는, 하나님의 행위이 기도 하지만, 해방이나 혁명과 같은 정치적 용어들 속에서도 잘 이해된다. …… 나는 출애굽기를 주의 깊게 혁명적 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상술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패러다임”이라는 용 어는 느슨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출애굽기는 혁명의 이론이 아니며, 성서의 설명에는 이론을 구 축하려는 의도가 거의 없다. 출애굽기는 하나의 이야기, 서구의 문화의식의 일부가 된 거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사건이지만 특정한 범위에 속하는 정치적 사건들은 출애굽기 가 제공하는 이야기의 프레임 속에 위치해 왔으며 또 이해되어 왔다. 출애굽 이야기는 다른 이야 기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왈저 2017, 27-28, 강조는 인용자)

 

선험적 형식의 계약이론에 반대해 실제 경험에 근거한 정치이론을 추구하는 왈저는 롤스 처럼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옹호하지만 계약이론적 정당화 절차는 비판한다.

왜냐하 면 계약이론적으로 구성된 또는 발명된 이상적 도덕은, 왈저에 따르면, 아무에게도 의무를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왈저는 다양한 곳에서 온 여행자 집단이 어느 중립적 공간에서 만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때 함께 생활하는 데 적용할 어떤 중립적 원칙을 사람들이 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원칙을 그들이 고향으로 갈 때 가지고 가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새롭게 창안된 이 원칙들이 어째서 이미 도덕적 문화를 공유하고 하나의 자연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스려야 하”냐는 것이다 새로운 계약인가, 새로운 서사인가: 21 (왈저 2007, 31).

더 나아가, 그렇게 중립적 공간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잠정협정(modus vivendi)’이 설령 그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것일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합의라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고 왈저는 주장한다(왈저 2007, 31, 번역은 인용자가 수정).

 

계약이론적 ‘발명의 길’에 맞서 왈저는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사회적 도덕을 해석하는 도덕철학의 길을 내세운다.

 

“도덕은 단지 시간, 사건, 외부적 힘, 정치적 타협,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배타주의적인 의도들의 산물로서” 철학적 이상과 비교할 때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이 불완전한 세계에 사는, 그 세계에 적응하고 그 세계를 또한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는 하나의 가치를 제시한다(왈저 2007, 39, 번역은 인용자가 수정).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모든 진지하고 정치적으로 적절한 정의론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 왈저의 생각이다.

 

“우리가 논증할 때 하는 일은 실제로 현존하는 도덕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고, “그 도덕이 우리에게 권위적인 이유는 그런 도덕이 있어야만 우리가 도덕적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왈저 2007, 39).

 

그러므로 왈저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도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약속의 의미를 더 풍부하고 생생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아렌트 역시 자기의 혁명이론을 위해 서사적 구성 방식을 선택하고, 왈저처럼, 국가를 건설할 때 사람들이 서로 맺은 약속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아렌트에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홍원표 2007, 89).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 던 ‘새로운 시작’을 현재에 다시 드러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과거와 연결한다.

아렌트는 혁명론(1963)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새로운 시작’, 즉 미국 혁명에 대해 이야기함 으로써 당대의 정치 현실에 개입한다. 아렌트는 미국 혁명의 과정이

“모든 건국에 필요하기에 혁명에서 불가피한 냉혹한 폭력이라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인정되는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 된다”고 말하며, “이런 측면에서 미국 혁명 과정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특이한 교훈을 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아렌트 2004, 338).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의 잘못된 발전을 대립시킴으로써 미국 혁명의 성공 역사에 새겨진 위대한 순간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불운한 상황들(프랑스 인민의 비참함과 거대한 빈곤)과 정치적으로 잘못된 결정(가장 먼저 혁명의 핵심과제로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놓은 것)이 연결됨으로써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자유의 수립에 실패했고, 프랑스는 긴 19세기 동안 혁명 과 왕정복고를 거치며 무너졌다(아렌트 2004, 135 이하).

 

그에 비해 대서양 건너편의 혁명가 들은 그런 실패를 피할 수 있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로부터 포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거나 적어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메리카 정착민들의 해방투쟁 뒤에 헌법을 제정하는 유효하고 소통적인 과정이 이어졌다.

그 과정의 끝에 자유의 헌법이 놓여 있다.

그 헌법은 구속력 있는 정치적 문서로서 민주적 다수의 변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어야 했다.

아렌트에게 이런 형태의 정치적 자기 구속에서 중요한 것은 ‘약속’이지 법적인 성격의 계약이 아니다.

법적인 계약은 재판관의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그저 형식적인 문제에 대해 책임을 만드는 반면, 약속은 규범적으로 더 큰 의무를 부과하는 힘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속성은 아메리카인들의 건국 행위에, 즉 그들의 고유한 헌법 제정 행위에 ‘신성한’ 권위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더 강해진다.

그래서 아렌트는 헌법의 아버지들에게 로마적ㆍ어원적 의미(그들을 시작(principium)에 ‘다시 묶는다(re-ligare)’ 는 뜻)에서 ‘종교적’ 색채마저 부여한다.

 

헌법의 아버지들은 이 시작을 말과 행동으로 했고 이어지는 모든 정치적 결정들을 이 정초 행위에 근거해 하도록 의무화했다(아렌트 2004, 317 이하).

 

혁명에 관한 아렌트의 정치학적 연구는 역사적 사례에 근거해 주장하는 혁명이론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대의 청중에 맞춰진 하나의 “정치적 우화(political fable)”이다(영-브부엘 2007, 656).

이 자유의 나라에서 한때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라는 말로 이해되었던 것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아렌트는 현재의 미국 사회를 질책한다(아렌트 2004, 347).

이 사회가 ‘접시닦이에서 백만장자로’라는 이제 지배적인 것이 되어버린 사회적 유도동기 위에 서 자기의 애초의 혁명적 자유 이념을 잊어버렸으며 배신했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혁명론에서 주장한 것과 매우 유사하게 왈저는 출애굽과 혁명을 가지고 동시대의 청중을 향한다.

바로 미국에 대해 매우 표준적인 ‘언약’이라는 동기와 씨름하는 그 책의 출판은 공화당원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 시기에 미국의 가난한 계층과 부유한 계층 간의 격차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왈저에게 레이건의 아메리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 아니라 “공격, 부정의, 억압의 땅”이었다(Krause/Malowitz 1998, 100).

왈저는 출애굽의 역사를 통합의 역사로 이야기하는데,

“그 역사는 더 자유롭고 더 정의로 운 미국 사회를 위해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미 한번 그런 역사를 위해 길을 떠난, 그러나 반복되는 실망 탓에 약속된 땅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마치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고 느껴야 한다”(Krause/Malowitz 1998, 100-101).

왈저는 정치적 이론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한 형태로 구상함으로써 이론과 실천 사이의 고전적 구별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현상 영역이 해석의 양태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왈저는 동시에 ‘무장소(nowhere)’에서 정치적 행위를 보고 연역적-합리주의적 구성의 방법에 입각해 인간의 공동생활이 이성적인 방식으로 정비될 때 따라야 할 기본원칙들을 결정할 수 있다는 철학적 가정을 급진적으로 의문시한 다.

 

전문가 지배적 철학에 대한 민주정의 우선성을 이처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왈저의 정치이론의 기본적 특징인데, 이런 옹호가 겨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 롤스의 요구, 즉 사회계약론 전통을 재수용하면서

“국가의 다른 모든 제도들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무엇이 원칙들의 원칙으로 여겨져야 하고 무엇이 정의롭게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보편적으 로 확정하라는 존 롤스의 요구이다(Llanque 2007, 248).

 

왈저와 아렌트는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론에 서사적 구성 방식을 선택한다.

공공 철학(public philosophy)으로서 그 이론은 구체적인 정치공동체의 사회적 자기 이해에 관한 논의에 개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동시에, 현재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정치적 공동체의 모든 정치적 경험에 속하는 가치들과 이상들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정치적 이야기의 수신자는 계약이론이 상상하는 것처럼 냉정하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참여 비용과 편익을 영리하게 계산하는 합리적 행위자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정치적 기획에 포함되는 시민이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부분적으로 공공의 것(res publica) 아래 둘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이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에서 부여받기 때문이다.

특수함이 소거된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에게는 행위를 촉구하는 이야기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통해 호명되는 구체적 청중이 아니면 행위능력을 발휘할 ‘우리’가 결코 될 수 없다.14)

 

   14) 물론, ‘우리’라는 집합적 주체의 형성을 둘러싸고 서사적 경쟁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Llanque(2014), 17 참조. 

 

왈저와 아렌트가 보여주는 것 같은 해석적ㆍ서사적 정치이론이 가설적이고 허구적인 계약을 비판하며 역사적 ‘언약’과 실제의 ‘약속’을 강조한다면, 정치적 서사학(political narratology)은 계약이론도 해석적 정치이론도 모두 일종의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 시각에 서 보면, 현대의 계약론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계약론도 사회와 국가의 실제 형성 과정을 이론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회와 국가의 규범적 상태를 제시한 것이고, 과거의 계약론뿐만 아니라 현대의 계약론도 그런 규범적 상태를 마치 논리적 오류 없이 도출한 것처럼 묘사할 뿐이지, 정말 그렇게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과거의 신화적 설명과 마찬가지로 근대와 현대의 계약론적 정당화도 어디까지나 서사적 힘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서사학의 메타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합리주의적-구성주의적 계약이론 역시 자기의 정치적 질서 구상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서사적 프로그램의 실현이다.

계약론의 방식과 이야기의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계약론조차 하나의 이야기일까?

정치적 서사학에 따르면 사회계약론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이야기이다.

서사적 정치 개념은 정치적 이야기들과 그 안에 보관되는 집합적 경험들이 인간 공동체의 정체성을 위해 하는 구성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주의적ㆍ합리주의적으로 단축된 심의 정치 모델 에 대립한다.

‘이야기하는 인간(homo narrans)’이라는 구상은 기존의 신화(mythos)-이성 (logos) 구별을 부순다.

이야기에는 그저 인간들을 감정적으로 묶는 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특유의 합리성이 있다.

그 합리성은 특히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작용하는데, 이 영역에 서 중요한 것은 설득력 있는 주장과 증명이다(Llanque 2014, 7-29).

 

“갈등의 시작, 갈등의 정점 또는 대단원, 갈등의 끝 또는 해소라는 사회계약론의 서사 구조”가 특정 정치이데올로기적 구성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홉스, 로크, 루소의 세 가지 고전적 버전이 보여주듯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현실의 변화를 지향하는 규범적 접근”이다(Münkler/Straßenberger 2016, 201).

 

그러나 그 규범이 현실에서 효력을 가지려 면 그 규범에 관한 이야기가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들려야 한다.

21세기에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사회계약론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규범을 새롭게 제시하건 간에 그 이야기에 청중과 독자가 설득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V.나오며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논의는 기존의 사회계약에 관한 논의를 전제하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계약론적 전통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 말은 실제로 어떤 사회계약이 과거에 구성원들 의 동의에 의해 체결되었고 끊임없이 그 사회계약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구성원들의 동의에 의해 갱신되어왔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 변화를 촉구하는 주장 이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한때 제시되었고, 이후 반복해서 과거의 사회계약(에 관한 주장)에 근거해 새로운 설득의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는 뜻이다. 16-17세기에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하고, 종교적 권위가 약해지고, 상업적 관계가 확장되 고, 그리하여 기존의 정치질서가 더는 과거의 서사를 통해, 즉 왕권신수설이나 가부장지배론 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몇몇 창의적 사상가들이 ‘사회계약론’이라는 새로운 서사 를 통해 기존의 정치질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정당화하기도 했고, 아예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과거의 논의들에 근거해 오늘날 계속해서 사람들은, 특히 그 논의들이 생겨난 서유럽, 즉 영국, 프랑스 등지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계약’이라는 이름 으로 변화를 촉구하고 정당화한다.

사회계약의 체결을 일종의 법적 행위로 보는 사람은 사회계약의 구속력이 법의 근거가 되는 사회계약 그 자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법이 근거해 마땅한 어떤 도덕률에 서 비롯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회계약의 체결을 일종의 거래 행위로 보는 사람은 사회계 약의 구속력이 상호 이익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회계약의 체결을 일종의 서사적 구성이라고 보면, 사회계약의 구속력은 결국 이야기의 설득력에 달려 있다.

그 이야기가 사람들 각자를 사회계약의 당사자로 여기게 만들고, 그 계약에 자기가 동의했기 때문이건, 계약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건, 아니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 건 간에, 어쨌거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믿게 만들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사회계약을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서사)로 파악할 때,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특수한 역사 적 상황에서 유의미하게 등장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고, 그러므로 또한 ‘사회계약’을 인간의 정치적 삶에 관한 여러 가지 형태의 약속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나아가 유럽 밖의 다른 전통에서도, 예컨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전통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약속들’을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계약론을 유연하게 변형하여 유럽 밖의 다른 전통에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약속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인 사회의 실제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느냐이다.

 

‘새로운 사회계약’의 정치적 힘은, 마치 유대 왕국에서 ‘언약’을 상기시키며 나타나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정치적 힘이 백성들이 이미 알고 있는 가치와 규범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생생한 해석 능력에 달려 있었듯이(왈저 2007, 102-115),

결국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해석적 능력에 달려 있다.

오히려 문제는 오늘날 실제적ㆍ지구적 위기와 무관하게 그런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데 필요한 서사 자체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한병철이 지적하듯이, 오늘날 세상에는 더 큰 우리 공동체를 형성하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파편화한 개인들의 소비 욕구만을 자극하는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만 넘쳐나고 있다(한병철 2023, 124 이하).

그런 의미에서 ‘신사회계약론’이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고 가능한 세계의 모습 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미래 서사”가 되지 못하고(한병철 2023, 136-137), 그저 지식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으로서 하나의 ‘스토리’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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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새로운 사회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에도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았다.

가장 유명하게는 1971년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가 “계약 론의 전통” 속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가장 적합한 도덕적 기초”를 새롭게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했고(롤스 1985, 13), 1988년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Carole Pateman)이 근대적 사회계약론을 은폐된 ‘성적 계약’이라고 비판하며 근본적 민주주의를 주장했으며(페 이트먼 2001), 1997년 사회학자 찰스 밀스(C. W. Mills)가 기존의 사회계약을 백인끼리의 ‘인종 계약’이라고 비판하며 암묵적으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요구했다(밀스 2006).

새로운 사회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기존의 사회계약이 배제한 사회 구성원이 있음을 지적하거나 기존의 사회계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 운 문제가 등장했음을 강조하며 새로운 사회계약의 체결을 촉구하곤 한다.

그러나 이때 ‘사회계약’이라 는 말로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법 적인 의미의 실제 계약을 체결하자는 것일까, 아니 면 다른 어떤 것일까?

이 글은 먼저 근대의 사회계약 론을 재검토함으로써 계약이 무엇인지, 사회계약이 정말 체결될 수 있는지, 오늘날의 새로운 문제를 해 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그 것이 기본적으로 새로운 규범을 발명하고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해석학적 접근이라는 대안적 방식에 의해 비판받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서사학 의 관점에서 보면, 계약론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여겨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신사회계약론의 유효성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새로운 약속의 주체 로 여길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의 설득력에 달려 있 다. 주제어: 신사회계약론, 약속, 신약, 계약, 서사

 

 

┃ (Abstract)┃

A theoretical consideration on the new social contract theory: Is it about new contract or new narrative?

Gong, Jin Sung (Chosun University)

The stories about new social contract are continuing. People urge the conclusion of new social contracts by pointing out that there are members excluded from existing social contracts, or emphasizing that new problems that can not be solved by existing social contracts have emerged. However, what do they mean by using the word ‘social contract’? Is it about signing an actual contract in the legal sense, or something else? This article first examines what a contract is, whether a social contract can really be concluded, and whether it can be a means of solving new problems today by reviewing the modern social contract theory. And this article argues not only that the social contract theory is basically a way to invent and justify new norms and criticized by the alternative method of hermeneutic approach, but also that the social contract theory itself can be considered as a narrative from the perspective of political narratology. The validity of the new social contract theory depends on the persuasive power of the narrative that allows members of society to see themselves as the subject of new promise.

 

Keywords: New Social Contract, Promise, Covenant, Contract, Narrative

 

논문투고일: 2024년 04월 17일 심사개시일: 2024년 04월 25일 심사완료일: 2024년 05월 14일

정치사상연구 제30집 1호 2024 봄

새로운 계약인가, 새로운 서사인가 신사회계약론에 대한 이론적 고찰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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