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들어가는말
선진유가에서 예치는 통치방식의 이상적인 형태로 제시됐다. 품계와 법도가 계층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예치는 귀천·존비의 차이를 유지하는 체제였다.
예치는 계층 간의 차이를 존속시키면서 가치체계를 유지시키고 백성을 권장되는 도덕적 상태로 이끌었다.
예치와 법치가 결합된 정치 체제에서 존비 질서 유지는 사대부 계층에 일정 혜택을 주면서도 더 높은 사후적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예라는 비법(法)률적인 요소에 지배되는 예치 중심의 사회는 몽테스키외 등 서양 학자들이 동양사회를 자의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사회라고 오해하는 대상이 되었다(최연식 2007, 47).
비트포겔은 동아시아의 통치를 동양적 독재주의(oriental despotism) 시각에서 보고 헌정주의적 요소가 부재했으며 법을 아무때나 바꿀 수 있는 전제정치로 규정했다(A. Wittfogel 1961, 101-102).
법치의 등장이 근대적 사회로 인정받는 조건으로 여겨지고 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상황판단이 자의적 이라고 여기는 데서 근거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현대 법치의 부작용과 결점이 지금와서 지적 되고 있는 만큼 지금과 같은 법 형태를 닮고 있지 않았다고 해서 비판받을 이유도 없다. 법률과 법치 개념은 동양에서 상고(上古)시대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강제적 힘을 동반하는 통치 규칙, 법이 효력을 발휘한 시점을 따라 올라가면 진한대를 넘어 선진(先秦)대로 돌아간다.
선진 유학의 원형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서경』에서도 강제적 힘을 통한 통치 찬양이 드러난다.
제자백가 중 법가는 보상의 통일로써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이익을 보장해 주는 평등성에 초점을 맞춰 등장했다. 동양에서 법치는 귀족이 아닌 평민계급의 권익향상이라는 근대적 문제의식을 일부 갖고 있기도 했다(윤대식 2004, 8).
법치가 법술지사(法術之士)들을 통해 ‘제왕의 도구’로 여겨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법치 또한 전제정치로 흐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비로소 현대에 와서 자의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개조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한비자는 군주가 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신하에게 법 집행을 일임하면 손댈 것 없이 일이 흘러간다고 믿었지만, 알맞은 신하를 선별해 역할을 주는 능력도 성인(聖人)에 가까운 역량을 필요로 한다.
군주가 성인일 수 없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확인된 바 군주에게 법 제정을 일임할 수 없다는 인식은 이미 지배적이다. 아울러 최근 근대 시기 서구 국가들의 법치가 지닌 형식성 및 주관성에 대해 문제의식이 꾸준히 지적되는 바, 동양사회를 폭력적 전제주의 사회로 바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도 등장하고 있다.
동양을 서구의 도식으로 평가하는 이러한 시각은 ‘오리 엔탈리즘’이라고 비판받는다(우드사이드 2012, 221). 전제정치의 도구라고 의심받았던 예치는 자의적인 인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등장했다 고 보기는 어렵다.
법가 사상의 단초는 진(秦)나라에 와서야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며 예와 함께 공존했고 형벌이 연동되지 않는 예가 더 근본적인 통치원리로 채택됐을 뿐이다.
예가 고대에서부터 어떻게 작동됐는지 살펴보면 예가 당시의 문화와 윤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임이 드러난다.
예치는 군주의 정치를 옹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기준으로 제한 하는 기능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군주 또한 예가 지향하는 가치를 따를 것을 신하들로부터 요구받았고 그렇지 않을 시 지탄을 받고 쫒겨나기까지 했다. 예는 선왕의 법제 이념이자 합리적 통치에의 요구였다.
예를 들어 조선은『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의 규정을 바꿀 때 『국조오례의』등의 예서와 어긋나는 부분은 소거하였다.
예치는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관습에 기초해 윤리적으로 평가하고 사회를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예기』는 예제 화된 법과 법제화된 예를 동시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치를 보여준다.
유교사회에서 예와 법의 관계에 대해서 예가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습에 가깝다’는 평과, 예주법종(禮主法從)으로 보는 견해, 또 예 개념이 법의 추상적인 원리 내지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자연법주의에 근거한 법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본고에서 필자는 유교 전통에서 그리고 현대적 작용의 측면에서 예가 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규명하고, 법치의 결과를 질적 측면에서 평가한다.
그리고 유가적 개념인 ‘예’가 지금의 법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지, 예 본위의 통치 즉 예치가 입헌주의를 기초로 삼는 국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구상해본다.
Ⅱ.禮의의미
1.도덕규범으로서의禮
예의 기원은『설문해자』에서 다음처럼 설명한다. ‘예는 시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을 섬겨 복이 이르도록 한다. 시(示)와 풍(豊)을 따른다. 풍은 예를 행하는 그릇이다1).’와 같이 나타나있다.
1) 履也. 所以事神致福也. 从示, 从豊, 豊亦聲.『說文解字』
여기서 시는 신령스러움이고 풍은 제사 그릇 위에 음식을 담아놓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예의 본자(本字) 豐은 두 개의 옥이 북 위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악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옥기와 북(鼓)로 구성된 것이다(张 辛 2022, 2).
따라서 예는 제사의 경건성을 기본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행동과 삶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는데, 요·순부터 주나라까지 정치를 기록한 『시경』2)·『서경』3)에서 ‘예의’등 행위 규범의 의미로 조금씩 등장하다가『예기』4)에서 예의 도덕적 기준으로서의 의미활용이 드러나고, 점차 고차원적 가치기준으로 자리매김하 게 된다.
2) 相 鼠有皮 人而無儀 人而無儀 不死何爲. 相 鼠有齒 人而無 止人而無止 不死何俟. 相 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胡不遄死. 『詩經』「國風」 보아라, 쥐에게도 가죽있는데 사람으로 체통이 없네, 사람으로서 체통이 없으면 차라리 죽기나 하지 무얼 하나? 보아라, 쥐에게도 이빨있는데 사람으로 행실이 없네. 사람으로서 행실이 없으면 차라리 죽기나 하지 무얼 기다리 나? 보아라, 쥐에게도 몸통있는데 사람으로 예의가 없네.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나?
3) 天敍有典 勅我五典 五 惇哉 天秩有禮 自我五禮 (有)[五] 庸哉 同寅協恭 和衷哉 天命有德 五服 五章哉 天討有罪 五刑 五用哉 政事 懋哉懋哉. 『書經』「皐陶謨」 하늘이 지위와 다섯가지 법을 주시니 다섯가지 법을 두터이 하시고 질서를 예에 두시니 스스로 오례를 떳떳이 하시고 마음을 합하여 공경하며 화목하고 바르기에 하늘이 덕 있는 사람을 시켜 제복을 다섯가지 색으로 하고 하늘이 죄지은 이를 꾸지람하시면 다섯가지 형벌을 써서 정사를 힘써 다루니 아름답고 아름답구나
4) 夫禮者 所以定親疎 決嫌疑 非同異 明是非也.『禮記』「曲禮 上」 예는 친하고 먼 관계를 구분짓고, 미심쩍은 것을 결정지어주며, 같음과 다름을 구분하고 옳고 그름을 밝혀준다.
순자를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인 꾸아(A.S.Cua)는 예를 ‘무엇이 옳은지를 형상화한 표현’이라고 정의했고, 뚜웨이밍(杜維命)은 사회적, 윤리적, 심지어는 종교적 맥락 에서 적절한 행동 기준 혹은 규범이라고 봤다.
인은 뚜웨이밍에게 도덕적 배양을 통한 ‘가장 높은 인간적 성취’로 규정됐다. 따라서 예는 최고의 가치를 얻는 과정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효용의 관점에서 가치를 매기는 공리주의나 듀이식 도구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Tu weiming 1968, 35). 핑가렛(Fingarette)은 예를 영적인 의식, 신성한 행위라고 설명한다.
이는 모든 도와 전통으로 축적된 이상적인 방식과 공동체 구성원이 조화를 이루는 행위의 근간이 예라는 의미이다.
정리하면 종교적인 의례에서 시작한 예는 천명(天命)에 의한 정치를 하면서 이러한 경외심이 가정생활이나 사회규범으로 확대되고, 법(法)을 넘어 관혼상제의 풍속과 관습에 관한 의례, 이후엔 정치의 지도원리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 여 예는 최종적으로 인간생활 전체의 틀이며 모든 사회관계의 규범으로 기능하게 되었다(성 균관대학교 유학과 교재편찬위원회 1996, 118-9).
예는 도덕적 성격과 권력 정치적 성격을 함께 갖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기』에서 예는
“임금과 신하‧윗사람과 아랫사람‧아버지와 자식‧형과 아우 사이에도 예가 아니면 (분수가) 정해지지 않으며 (……) 조정의 위계를 정하고 부대를 통솔하고 벼슬에 나아가고 법령을 시행하는 일은 예가 아니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5)
에서 드러나고, 또
“친한 관계와 먼 관계를 구분짓고, 인간행위를 판결해 주며, 같음과 다름을 구별해 주고, 행위의 옳고 그름을 밝혀주는 것”
으로서 유교사회에서 거역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와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규범질서로 인식되었다.
또한 공자는 도덕인의도 예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으며,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과 풍속을 바로잡는 일도 예가 아니면 갖추어질 수 없다고 본다. 조정의 위계질서를 정하고 군대를 다스리는 일도, 벼슬에 임하고 법을 시행하는 일도 예가 아니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예가 당시 문화 전체를 망라한 넓은 개념이었음을 의미한다. 예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강조되는 인간의 내면적 덕성이나 윤리이며, 동시에 그러 한 인간의 내면성을 사회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구체적 행위양식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예는 내면성을 적절히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백성을) 인도하기를 정치로 하고 가지런히 하기를 형벌로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받지 않아 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백성을) 인도하기를 덕(德)으로 하고 가지런히 하길 예(禮)로 하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바르게 된다.6)
공자는 예를 갖추면 ‘이르게 된다[格]’했는데, ‘이르다’는 표현은『논어』에서 쓰인 至의 의미를 고려할 때 최고의 가치에 닿는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즉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는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로 이어주는 중대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예를 이해하여 자립하였으며, 40세에 미혹되지 않 았고,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60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바로 그 이치를 알 수 있었고, 70세에 마음이 가는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7)
5) 君臣上下 父子兄弟 非禮 不定 (……) 班朝治軍 涖官行法 非禮 威嚴不行. 『禮記』「曲禮 上」
6)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論語』「爲政」
7)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論語』 「爲政」
공자의 말에서 예는 일상의 형식적인 예의범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체계와 문화를 망라하는 의미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공자가 30세가 되어서야 이해한 예는 단순 국가의 규칙이나 제례, 형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인 수준의 경지에 오른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둔 지 15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예는 문화와 규범, 도덕의 총체적인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로 공자에 있어서 예는 『논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김병환 2017, 34).
예는 사욕과 이해(利害)를 넘어선 최고 기준으로 작용해 다른 가치를 넘어서는 핵심 개념이 된다.
2.질서로서의 禮
고전을 분석하면 예는 자연의 질서, 도덕규율이거나 정치 질서 혹은 통치 도구의 의미로 쓰였다. 공자는 예를 자연의 질서로 가장 높은 위계의 질서로 표현하고 있다. 예는 인간 사회의 관습이나 질서를 넘어 하늘과 접할 최고 원리였다. 자연의 질서에서 말하는 자연은 물리적 자연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바꾸거나 극복할 수 없는 세계에 내재한 작동원리이다. 하늘로부 터 받은 원리는 예라고 표현된다. 공자는 예의 작동 범위를 인간의 문화로 한정 짓지 않고 우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질서로서의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예로써 하늘을 따르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8) 예로써 시간의 추이를 따르니, 계절의 변화가 순조롭고 사물의 변화가 순조롭다.9) 사회적 질서로서의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도덕 질서는 인간 행위의 근본이자 결과와 상관없이 공동체에서 추구되는 것으로 예는 사회의 궁극적 결정 기준이 된다. 개개인을 이루 는 원리로도 표현된다. 예는 사람의 근간이니 예가 없으면 설 수 없다.10) 예는 몸의 근간이다.11) 인간은 하늘의 뜻과 질서를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인간은 예를 통해 비로소 조화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공자 이전 주(周)나라때 부터 예의 의미가 깊어졌음을 나타낸다. 좌소(左昭) 2년 한(韓) 선자(宣子)가 노(魯)나라를 방문했을 때『역』과『상』,『춘추』를 보고나서 “주례가 전부 여기에 있다”라고 했던 일도 있다(진고응 197, 93). 예가 선진시대부터 형식적인 예의범절이나 규칙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예는 법과 대응을 이루는 질서로서도 작용한다. 예가 이루어지면 공경과 화목함, 바름이 달성되는 것처럼 예는 고차적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절차라고 할 수 있다.『예기』에서는 예의 의미를 전통 질서와 하늘의 질서로 풍부하게 드러낸다. 前代의 聖人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해 놓은 準則 중에서 禮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후대의 8) 禮以順天 天之道也. 『春秋左氏傳』, 「成公16年」 9) 禮以順時 … 時順而順物. 앞의 책 10) 禮 人之幹也 無禮無而立.『春秋左氏傳』「昭公27年」 11) 禮 身之幹也.『春秋左氏傳』「成公13年」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95 聖人이 후세에 전하려고 가르침을 세운 책 중에서도 또한 禮書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禮儀 三百 가지와 威儀 三千 가지에서 어느 하나인들 〈성인의〉 정신과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있겠 는가. 이 때문에 〈禮가〉 天地와 더불어 능히 그 法度를 같이하는 것이다.12) 유학 오경(五經)의 하나로서 하·은·주 삼대의 예법에 대한 기록을 담은 『예기』는 성인이 정해놓은 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예이며 예를 정리한 책이 지금까지 남은 책들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된다고 설명한다. 공자와 후학들의 말을 담은 서적인만큼 공자가 현시대 가장 상위의 개념으로 생각한 '예'의 위상이 드러난다. 여기서 예는 천지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성인의 정신으로 정의된다. 전국시대까지 예는 정치, 통치의 측면에서도 다른 가치들보다 최고의 것으로 간주되며 동시에 인(仁) 또한 사람이 지닌 핵심 가치로 설명되지만 법(法)은 같은 위상으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 아래 인용은 조화를 얻어 아름다운 것은 예에 부합하는 것이고, 예에 합치되지 않으면 리가 아니니 어찌 아름답냐는 설명이다.『주역전의』는 만물과 세계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 는 책으로 리·기를 핵심 개념으로 하는데, 예가 리 개념성립 여부를 판단하는지 요건이 될 정도의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주역』은 복서(卜筮)의 책이면서 동시에 윤리도덕을 밝힌 우주의 진리서로 꼽힌다. 모으고 통하는[會通] 아름다움을 얻어야 예에 합치된다. 예에 합치되지 않으면 이치가 아니 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으며, 이치가 아니면 어찌 형통할 수 있겠는가?13) Ⅲ.禮와法의관계 1.法의의미 지금의 법(法)자가 통용되기 전 초기 법자는 더 좁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때 법이라는 글자는 중립적이고 총체적인 법률로서의 의미가 아닌 형벌의 의미를 띄고 있었다. 法이라는 글자의 원형은 ‘灋’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세 자는 허신의『說文解字』에서 “법은 형벌[荊=形] 이다. 공평한 것이 물과 같아 水자로 구성되었고, 해태가 정직하지 못한 자를 쫓아내므로 12) 前聖 繼天立極 之道 莫大於禮 後聖垂世立敎之書 亦莫先於禮. 禮儀三百 威儀三千 孰非精神心術之所寓. 故能與天地同其節.『禮記集說 序』 동양고전종합DB. 13) 得會通之嘉 乃合於禮也 不合禮則非理 豈得爲嘉 非理 安有亨乎 『周易傳義 上』卷一, 한국주역대전 DB 96 정치사상연구 제30집 1호, 2024 봄 去자로 구성되었다.”14)와 같이 분석된다.
정리하면 법이란 원래 ‘삼수 변(氵)’ 과 ‘해태 치(廌)’, ‘물리칠 거(去)’가 합해진 글자였다. 후술할『시경』,『서경』에서 법의 효용을 드러내는 부분에서조차도 모두 법을 형벌의 의미로 쓰고 있었다. 당시 쓰이던 법의 의미로 볼 때 법은 예와의 관련성을 찾기 힘든 교정적 도구에 불과했다.
당시의 법 관념은 범죄를 처벌해 사회 질서 확립과 안정을 꾀하는 수단으로서 소극적 성격의 형벌에만 머무르고 있다.
현대 법이 관장하는 영역 상당 부분은 예에 포섭되었다.
선진시대 예는 사실상 법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주례』와 『예기』등 예서(禮書)는 예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의 처벌 규정을 담고 있었다.
당대 사회는 일부 형벌의 기능만을 법에 의탁하고 있었다.
묘족의 백성은 선한 수단을 갖추지 못하고 형벌로서 제재를 가하였다.
즉 다섯 가지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 놓고 이를 법이라 일컬었다.15)
형벌[刑]은 일정함[常]이다. (……) 형벌은 법이다.16)
14) 灋 荊也 平之如水 从水 廌所以觸不直者 去之 从去.『說文解字』
15) 苗民弗用靈 制以刑 惟作五虐之刑曰法 『書經』「呂刑」
16) 刑 常也 (……) 刑 法也 『詩經』「爾雅·釋詁」
법학자들은 법이 기본적으로 의무적, 강제적 요소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규칙이나 법은 해당 시스템의 구성원이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작동한다고 여겨진다.
서구에 나타난 법의 형식주의는 복잡다단한 사회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운용하기 위해 고안됐다.
오스틴(Austion) 등 이전 법학자들이 법의 명령적 성격을 주장하거나 자연법 학자들이 법의 정당성에 대한 논증을 거부한 데 대해 하트(H.L.A. Hart)는 법률 시스템의 존재에 필요한 두 가지 최소 기준을 상정하면서 이같은 전통을 비판했다.
그는 사실이 곧바로 규범적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사실과 당위의 구분이 법의 정당성의 바탕이라고 설명했 다.
따라서 법률 커뮤니티 내에서 모든 법률은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트가 기존 자연법 이론을 부분적으로 거부한 것은 도덕과 동일시된 법률의 불변성, 권위와 안정성 때문 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이 도덕을 포함하고 있다는 상식적인 전제를 받아들인 이상 법의 정신인 도덕에 대해 역동성을 확인하면 자연법 이론에 대한 거부감은 해소될 수 있다. 법의 정신으로서 도덕규범이 가진 역동성은 인시제의(因時制宜) 기능을 위한 형태에 해당하는 말로 기존의 정신에 위배되는 임의적이고 단기적인 변덕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후술할 내용으로, 예는 공동체의 현능(賢能)이 반영된 질서·규범으로서 형식의 요구되는 변화를 허용하는 법조문의 정신이자 제·개정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는 법의 소극성과 보수성으로 인한 불완전성 극복의 동기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실제로 법가가 반향을 일으킨 법의 의미는 넓어지고 복잡해진 사회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의미보다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초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오기(吳起)는 평민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해 변법서를 출간하며 법술을 주장했는데, 상왕과 마찬가지 로 그가 주장한 법술은 왕을 제외한 귀족과 평민의 평등을 목표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색채가 강해지고 왕 앞에 귀족의 영향력이 약해질 뿐 아니라 평민과의 계급적 차이가 줄어들기 때문에 법가는 목숨을 내놓고 내세울 수 있는 가치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한비자는 제13편 「화씨和 氏」에서 법가 논리를 펼치다 죽임을 당한 법술지사들을 언급하며 상앙의 제안을 받아들인 효공처럼 신하의 말을 들어주는 왕이 없는 현실을 개탄했다. 같은 편에서 언급된 오기가 왕에게 올린 직언은 귀족 계급의 특혜를 없애는 개혁을 담고 있어 법술지사들의 불행한 최후를 짐작케 한다.
옛날에 오기가 초나라 도왕에게 초나라 풍속을 가리켜 말하기를, “대신이 지나치게 세력이 큽니다. 그리고 봉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그들이 위로는 임금을 핍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못살게 굴 터이니, 이것은 나라를 가난하게 만들고 군대를 취약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봉군의 자손으로 3대가 되거든 그 작록을 회수하고 모든 관리들의 봉급을 삭감하며, 긴급하지 않은 관원을 폐지함으로써 정선되고 노련한 선비를 기르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초나 라 도왕이 그대로 실행하였다.
1주년 뒤에 도왕이 죽었다.
오기는 초나라에서 4지를 찢기는 형 벌을 받았다.17)
상앙의 법치에 담긴 정치적 함의도 마찬가지로 평가된다. 상앙이 상벌을 내리라고 한 이유는 ‘보상의 통일’로써 모든 신민(臣民)에게 동등한 이익을 보장해 주는 평등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윤대식 2004, 8).
상앙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도 않고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작위와 봉록과 관직이 없으면서도 특권을 향유하는 간사한 자들”18)을 “금하고 죄과를 막는 것으로 형벌을 엄중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19)”라고 했다.
17) 昔者吳起敎楚悼王 以楚國之欲曰 大臣太重 封君太衆 若此 則上偪主而下虐民 此貧國弱兵之道也 不如使封君 之子孫 三世而收爵祿 絶滅百吏之祿秩 損不急之枝官以奉選練之士 悼王行之期年而薨矣 吳起枝解於楚.『韓 非子』「和氏」
18) 不作而食, 不戰而榮, 無爵而尊, 無祿而富, 而官而長, 此之謂姦民『商君書』「劃策」
19) 故禁姦止過, 莫若重刑.『商君書』「賞刑」
다만 법가가 법으로써 다스리는 것을 주장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법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예를 필요로 하였다.
오기는 오히려 법치 이전에 백성들을 예와 인으로 감화시키는 과정이 필수적 이라고 보았다.
법치 이전의 선행조건으로서 유가적 가치의 전파를 통한 백성들의 인내가 요구된다고 하였다.『오자병법』에서 그가 유교적 가치의 교육을 주장했음이 나타나며, 한비자도 선진 유가의 가치를 완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은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여 모든 백성들의 일치단결을 최 우선 과제로 생각하였다. 전쟁을 하는데 주의해야 할 네 가지 가운데 첫째는 국내적으로 여론이 일치되지 않는 것, 이런 상태에서는 군대를 움직일 수 없다. 둘째는 군대 내부의 불화, 이런 상태 에서는 전투 배치를 할 수 없다. 셋째는 전투배치가 엉망인 것, 이런 상태에서는 전투를 시작할 수 없다. 넷째로 전투에 임한 병사들의 마음이 일치단결되어 있지 않은 것, 이런 상태에서는 승 리를 기대할 수 없다.20) 위 인용에선 법술을 세우는 목적이 백성을 위한 것이며 인(仁)과 지(智)를 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한비자』사상이 제자백가 사상의 핵심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국민수 2021, 100). 어느 학자는“한비는 덕치를 반대하고 덕치와 법치를 다 같이 중시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군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수가 너무 적다고 개탄했다”“(그래서) 나라의 도리는 군자의 특성에 따라 정할 수 없고, 군자의 도리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단지 광활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공상일 뿐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憑 國超 2000, 43).21) 지금 공리(功利)에 대한 여러 의미규정이 분화되어있지만 공리를 전체의 이로움으로 넓게 볼 때 유가와 법가는 최대한의 공리를 구(求)하려는 목적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가에서 인의(仁義)의 정신과 예를 수호해 귀천을 구분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하는 것은 사회 안정을 궁극적 이상의 모습 중 하나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2.禮와法의결합
(1) 禮: 法의 정신
예는 내면의 도덕으로 간주되면서도 외적 규제의 양식으로도 활용된다. 도덕의 의미에 집중할 경우에 ‘예치’란 지도자 개인의 도덕적 자질에 의존하는 정치로 여겨지는데 앵거스 그레이엄(A. C. Graham)은 예를 의례(ceremony) 개념으로 환원해 군주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의례 행위만으로 피치자들의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한 게 공자 사상의 주목할만한 특징이라고 봤다. 핑가렛(Fingarette)은 power, Holy rite와 같은 표현을 쓰며 예를 궁극적인 가치이자 개인의 생명보다 중요한 의미(more than the individual's life)를 갖는다고 표현했 20) 昔之圖國家者 必先敎百姓 而親萬民 有四不和 不和於國 不可以出軍 不和於軍 不可以出陣 不和於陣 不可以進 戰 不和於戰 不可以決勝 『吳子兵法』「圖國」 21) 韓非不光反對德治,而且反對治國時德治與法治竝重. 韓非雖然承認社会上存在君子,但他慨嘆說,这些君 子的数量实在是太少了. 君主治國,針對的是全体國民,而君子只占全体體國民的极級少部分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99 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동양사회가 사람들을 순응적으로 만들고 개조를 막았다고 비판했지만 니담(Joseph Needham)은 중국 사회에서 실정법까진 아니더라도 자연법은 존 재하고 있었고 이를 성왕과 인민이 수용한 관습의 집합체로서의 예였다고 평가했다(Joseph Needham 1988, 250).
앞서 언급한 서구 법학자들이 자연법을 옹호하거나 행여 부분적으로 부정하더라도 법의 정신이 관습과 도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 정치사회에서 예에 통치의 기능을 부여한 것은 법치와 유사한 구조로 보이게 한다.
예에는 사회상도 반영이 되어야하는데, 공자는 “삼으로 면류관을 짜는 것이 예이나 지금와서는 실로 짜고 있으니 검박해서 좋다.
나는 여러 사람이 하는 바를 따를 것이다.”22)라고 했다.
공자는 국가의 다스림 을 위해 형벌보다는 덕과 예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순자에 와서 전통적인 관습이나 제도에 의한 예치의 모습이 발견된다.
예의 입법자는 성인으로 한정되지만 사회구성원의 각각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사회를 유지시키도록 한다.
순자는 법의 개념이 예가 있어야 성립된다 고 보면서 법에 깃든 기본 원리로서의 예를 제창한다.
순자가 “예는 법의 근본이며 여러가지 일에 대한 질서이다.”23)라고 한 데서 예는 법의 해석근거가 되어 법을 해석하는 데 한계와 내용을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봤음을 알 수 있다. 순자 또한 법이 예의(禮義) 혹은 예(禮)에 기초하여 제정된다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켰다. 인위를 일으켜 예의(禮義)를 만 들어 냈다.
예의가 만들어지니 법도(法度)가 제정되었다.
그러니 예의와 법도라는 것은 성인이 만든 것이다.24) 오기, 상앙 등 법가는 법이 나타나는 양상을 폭력적 상벌에 등치시키는 한편 순자는 법의 기원을 예에 둠으로써 법의 근원 내지 정신을 달리 보고 있다.25)
22)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論語』「子罕」
23) 禮者法之大分 類之綱紀也.『荀子』「修身」
24) 聖人化性而起偽 偽起而生禮義 禮義生而制法度 然則禮義法度者 是聖人之所生也『荀子』「性惡」
25) 법이 상벌로서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았더라도 법가 사상가들이 법치를 제안한 의도와 정치적 함의는 단순한 상벌로 축소되기 힘들다. 오기는 고위 관료들에게 지급되던 봉급을 삭감할 것을 제안하며 왕을 제외한 다른 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목적을 갖고 있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한비는 전국의 시대상황이 덕과 예로서 다스려지던 시대와는 다르다며 선왕의 정치를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요순시대는 재화가 풍부하여 후한 상을 내리지 않고 중벌을 쓰지 않아도 백성이 다스려졌지만 전국시대에 와서는 인의를 행하다 나라를 잃기도 하였으며 힘이 겨룸으로 상대방을 복종시키 던 때였다.
이런 사회에서 분쟁을 잠재우고 강국으로 자리잡기 위해서 한비자는 새로운 제도, 법을 필요로했다.
한비자는 인간이 자기 안위를 보호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특성에 착안했고 법규범을 통해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법가의 법 개념은 법의 공평성, 질서유지를 가능케 하는 규준성 명확성, 인시제의(因時制宜)의 합리성을 포함한다(이재룡 1992, 124).
법은 또 공평무사성으로써 예제의 계급적 차별성을 대체하려고 하는 걸 목적으로 갖는다. 예치관은 인격을 갈고 다듬어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려는 적극적 입장이며 법치관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최소한의 행위를 요구하면서 소극적인 입장이다.
이 둘은 동일 목적을 지향하는 불가분의 관계로 실질내용과 외적형식의 관계로 안과 밖을 이룬다(이재룡 1992, 124).
조선조 정치사회에서도 법의 정신으로서의 예가 드러난다. 조선이 유교적 예를 통해 개인 을 규율할 뿐 아니라 기본적 사회 질서를 형성하고자 한 점은 왕의 교서에서 나타난다.
조의 즉위교서에서 고려의 예제(禮制)가 고례(古禮)에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고례에 입각해 유교적 예제를 정비, 예속(禮俗)을 확립함으로써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교화시키고자 의도한 점이 그것이다.
또 법전인『경국대전』에서 유교의 예적 질서에 따라 국가 전례의 표준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경국대전』「예전」에 유교적 예 관념을 정치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이 깃들어 있었다.
제과(諸科) 규정에서 오경 등 유교경전을 관료 선발 과목으로 규정해 예 관념에 박식한 관료들을 충원하고자 했다(최병덕 2011, 10).
그리고 예 관념에 어긋나는 행위들은『경국대전』에서 범죄로 규정되었다.『경국대전』의「형 전」告尊長條는 노비가 가장을 구타한 경우 참형, 모욕한 경우 교형에 처하는데 옛 노비인 경우 일반인과 같은 것으로 보아 감등한다고 되어있다.
또 因禁條에는 '간음, 도죄, 사죄가 아니면 옥에 가두지 않고 형을 집행할 때는 홑옷을 입히고 장형을 집행하되 간음에 관한 경우는 옷을 벗겨 장형을 집행한다'며 가족 질서를 유린하는 행위에 대한 당대의 엄중한 인식이 담겨 있다.
높고 낮음을 규율하고 가치의 순서를 편찬한 예에 따라 법이 집행되는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예가 당시에도 법의 정신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6세기 사림 등장 이후 조선조 사회에서는 예(禮)가 전사회적으로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주자가례, 삼강행실도 등 예서를 기반으로 개인과 가정이 예의 독립된 실천공간으로 설정되었고 삶 전체가 예의 실천 대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지금의 법률 조문 역시 국가 공동체의 예가 법률 형성에 작용한 모습을 확인시킨다.
예가 법의 정신으로 작용하면서 같은 행위에 대한 평가는 행위 대상과 상황 요건에 따라 달라진다.
법에서 명시하는 양형기준의 차이는 행위 전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드러내고 있다.
가령 상해죄와 폭행죄는 부모에게 저질러졌을 때 더 무겁게 처벌된다.
가족적 가치가 유지되는 결과로 형법은 가족 외 타인과 가족 구성원 간 기대되는 의무의 차이를 당연하게 전제하고있다.
제259조(상해치사)
①사람의 신체를 상해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 역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②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하여 전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260조(폭행, 존속폭행)
①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②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하여 제1항의 죄를 범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2) 禮: 法의 작동 원리
그런데 중국의 예서를 보면 법에 담긴 정신으로서의 예일 때보다 예의 영향력이 더 크게 드러난다. 현대적 국가가 등장한 이래로 모든 국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법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었다.
고대 국가에서 법치가 등장한 아주 초기에도 같은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제자백가의 법가는 왕, 통치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같게 대하라고 종용함으 로써 평민 위의 귀족이라는 집단을 하향시킨 바 있다.
법치의 기본 정서가 국가 구성원들을 같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에 법전이 보완되는 현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법전 경국대전은 다른 어떤 신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규정을 두면서도 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신명호 1998, 84).
왕조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여타 신분관 계 사이의 평등을 제창하게 된다.
왕의 세습은 당시 백성들에게 있어 규범적 확신이 깃든 전통이었다. 왕은 “천지인을 관통하는 존재” , “우주의 덕을 체현한 신성한 존재” , “천명을 받은 신성한 존재”처럼 여겨졌는데 이는 유교 관념의 반영이었다.
앤거스 그레이엄은 형벌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도록 공개된 점에서 법가가 평등을 지향한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한 다(앤거스 그레이엄 2015, 513).
법가는 군주 아래 모든 사람들을 법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취급했는데 유가의 한 사람인 가의(賈誼)는 군자에게 처형 대신에 자살이 허락되지 않거나 속박, 구타 및 신체의 절단이 면제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상사에 대한 존경을 잃어버 리게 된다고 우려했다.
『經國大典註解』서문에서 주해 편찬을 주도한 안위(安瑋)26)는 예와 법의 사회 존재론적봄 지위를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
26) 1491[성종 22]~1563[명종 18],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예조 좌랑 등을 역임했 다.
그는 “성인의 법은 예를 근본으로 삼아 예로 이끌되 따르지 않으면 법으로 다스리니”, “우리나라의 『경국대전』은 여러 임금의 가르침을 절충하여 만세의 법을 이루었고”27)라고 쓰며 성현의 지혜와 유교적 가치가 법률에 반영되었음을 나타 내는 한편 “周公은 법을 만듦에 그것을 예라고 이름을 짓고”28)라고 쓴 데에서는 예와 법을 치환 가능한 관계로 나타낸다.
예는 인륜과 가치체계의 역할과 함께 법과 같이 명령하는 힘을 갖고 통치수단으로 쓰였던 것이다.
안위는 서문 후반부에서
“지금 성상께서는 선왕이 예로써 법을 삼고 형으로써 법을 삼지 않은 것을 깊이 알고서 주해의 책임을 司寇에게 맡기지 않고 특별히 의정부와 宗伯에게 명하여 관장하게 하시니….”29)
라고 썼는데, 이는 형벌을 중심으로 등장한 법 대신 형벌과 필수적으로 연동되지 않는 예를 근본삼아 당대 법이 제정되었 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구(司寇)는 형조(刑曹)의 장관을, 종백(宗伯)은 예조(禮曹)의 장관을 말하는데, 형조가 아닌 예조가 법전의 해설서 집필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상 예가 경국대전을 세운 가장 큰 정신적 지분임을 증명한다.
주공(周公)의『周禮』에는 주나라 관제(官制)의 체계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역 시 관직 등 생후 체득한 계층에 따른 상이한 대우가 명시되어 있다.
왕의 친척은 같은 죄를 지었을 때 다른 방식으로 처벌받고 관직에 있는 사람 또한 형벌의 집행에서 우대를 받는 모습이 나타난다
당대 법가가 갖고 있는 평등지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예적 질서는 법률 형성에 원리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명부(命夫 : 대부 이상)와 명부(命婦 : 대부 이상의 부인)들은 옥사(獄事)나 송사(訟事)에 몸이 연좌되지 않는다.
왕의 동족은 죄가 있어도 시장에서 죽이지 않는다.30)
27) 聖人之法 以禮爲本 禮而不率 法以齊之 … 我朝經國大典 折衷列聖之訓 以成萬世之法.『經國大典註解』
28) 周公作法 名之以禮 위의 책
29) 今聖上深持先王以禮爲法 不以刑爲法 註解之責 不任之司寇 而特命政附·宗伯掌之 위의 책
30)『周禮』「秋官司寇 上」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의 종법적 질서와 교화(敎化)의 교본이 된『주자가례』를 살펴보면 당대의 제례와 혼례, 생활상을 배경으로 신분에 따른 역할 구분이 드러난다.
물론 한(漢)대에 이 책이 편찬되고 조선시대에 다시 도입된 경위는 왕을 중심으로 한 조례를 담은『대당개원례 (大唐開元禮)』,『정화오례신의(政和五禮新儀)』,『주례』와 달리 사대부 계층의 예속과 예 법을 확립하고자 한 의도에 있었다. 이는 사대부와 왕의 예법이 통합되는 효과가 있었다. 『주자가례』는 송대에 주희(朱熹)에 의해 집필된 예서로 다변화한 생활 규범을 포용하려는 의도에서 통일적인 규범을 제시한 사마광의『서의』의 뒤를 이어 당대의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이념 위에서 집필되었다.
현대 법치에서 예의 내용은 헌법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나있다.
법의 상식과 정신이 집약되어 있는 헌법은 예를 담고 있으면서 그에 따라 법 적용의 조건을 규율한다.
헌법 제 9조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우리가 진정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할 전통문화는 이 시대의 제반 사회ㆍ경제적 환경에 맞고 또 오늘날에 있어서도 보편타당한 전통윤리 내지 도덕관념이라 할 것”31)이라고 밝히면서 전통의 진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는 전통적 관념을 수동적인 수정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시대 변화에 적응된 형태의 전통 발전을 국가가 나서서 추구해야 함을 지시한다고 봄이 적절하다.
헌법재판소는 사찰의 동의없는 국토부의 사찰 부지 공용수용을 막지 않는 구 전통사찰보존법을 헌법불합치로 결정하면서 “민족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국가의 단순한 은혜적 시혜가 아니라 헌법상 의무”라고 하였다.32)
이듬해인 2004년 헌재는 국회에서 통과시 킨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에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관습헌법에 따라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 라고 판시하였다.33)
31) 헌법재판소 1997. 7. 16., 전원재판부, 95헌가6.
32) 헌법재판소 2003.1.30., 전원재판부, 2001헌바64.
33) 헌법재판소 2004.10.22., 전원재판부, 2004헌마554, 2004헌마566.
이는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해 사법부의 독립을 보여주는 사건인 한편 헌법의 문언조차 명시하지 않는 전통적 인식을 관습헌법으로서 드러내 위헌 결정에 활용하면서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관념의 위계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는 개별 법조문에 실린 의도 내지 정신이면서 법의 한계를 설정하는 근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관습·정신의 법적 적용은 드워킨이『법의 제국』에서 제창한 통합성 법이론(law as integrity)에서 도출할 수 있다.
드워킨은 법의 개념에 대한 구성적 해석으로 제시되는 여러 관념 중 통합성 법이론을 지지한다(안준홍 2016, 44).
그는 통합성 법이론이 법의 기반을 예측가능성과 절차적 공정성에서 구하는 관행주의(conventionalism)와 사법 판단이 달성 할 것이라 기대되는 정의나 효율성으로 정당화된다는 실용주의(pragmatism) 등 법관념보다 법을 더 잘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로널드 드워킨 2004, 173-254).
그에 따르면 법관은 전통과 관습을 고정된 형태로 인식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의미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여야 한다.
법은 사람들의 임의적인 요구를 반영해 대응하는 무원칙한 체계가 아니다.
드워킨 사상의 핵심은 공동체가 일관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직자는 구성원들을 평등한 존재로 대우하여야 한다는 전제 아래 공동체가 채택한 원리들과 가치를 재해석하고 실현해야 한다(로널드 드워킨 2004, 173-254).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권리를 긴장관계로 설정하고 소수자를 지배자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등의 집단적 목표(collective goals) 내지 ‘공동체가 채택한 원리’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와 창조 성에 장애가 된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M. Sullivan 1990, 236-238).
하지만 법률 문언이 남긴 공백에 대해서 해석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 공동체의 원리라는 인식은 타당해보인 다.
공동체의 어떤 원칙을 전제하는 것이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어느정도 제한한다해도 이것 이 법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임을 고려할 때 유효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3) 禮 - 法의 보완
법치가 진나라 멸망 이후 망국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고 파기된 적이 있었다. 진 이후 한(漢) 대에서 유가가 우위를 차지하고 도가가 급부상하였는데, 진이 멸망한 이유가 법가의 냉혹함 으로 유가의 인의의 덕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무제(武帝)는 유가를 관학으로 삼는다고 공포하였고 B.C. 141년에는 신불해·상앙·한비 등의 법가의 이론을 가진 철학가는 관직을 파면한다는 명까지 내렸다(풍우란 2022, 340).
한왕조의 시조인 고조高祖는 백성들 에게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절도 또는 상해를 한 자는 그 값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규정 밖의 모든 진의 법규는 폐지한다.”34)는 약법3장을 공포했다.
하지만 풍우란의 지적처럼 이러한 간단한 서술로써 법치 자체가 힘을 잃었다고 보기엔 어렵 다. 법가라는 학파를 누르고 유, 도가를 연구하려는 흐름이 분명 확인되지만 한대에 나타난 『춘추결옥(春秋決獄)』을 통해 법에 의한 통치가 이어졌다. 이때의 법은 예와 혼재된 형태로 운용되었다고 평가된다. 한은 진의 법들을 축약하여‘삼장(三章)’으로 정리했는데 이러한 법 제정은 과거에 비해 너무나 축소되어 다시 늘릴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진나라의 법을 기초로 ‘방장율(傍章律)’ 18편을 제정하는 등 점차 확대되었다. 진나라의 법을 기초로 했지만 통치 운영상 유가의 '예치(禮治)'적 성격이 반영되어 성문법적 특성이 파괴된 흔적들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이『춘추결옥』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이재규 2014, 3).
동중서의 춘추결옥에는 현재까지 6개의 재판 사례가 남아있는데, 한나라의 성문법을 따라 묘사된 6개의 케이스는 동중서가 도입한 법보다 훨씬 강한 형벌을 내리고 있다(武夫波 2016, 350). 6개 중 첫번째 케이스는 아들을 숨겨준 아버지에 관한 일화이다. 34) 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 餘悉除法秦法.『史記 卷8 高祖本記』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105 <사례 1 : 양아버지가 아들을 숨김> 의심하는 관리가 말합니다. A는 자녀가 없으므로 길가에 버려진 아들 B를 데려와 아들로 키 웁니다. B는 커서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A가 B를 숨기면 A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중서는 "A 는 자녀가 없어서 B를 키워 길렀습니다. 그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누가 그를 대신하겠습니까? "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시경은 나나미벌이 뽕나무 벌레를 데려가 키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춘추(春秋)의 뜻에 따르면 아버지가 아들을 숨겼으니 A는 (재판장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35)
35) 時有疑獄曰 : 甲無子, 拾道旁棄兒乙養之, 以為子 及乙長, 有罪殺人, 以狀語甲, 甲藏匿乙, 甲當何論? 仲舒斷 曰:甲無子, 振活養乙, 雖非所生, 誰與易之. 詩雲:螟蛉有子, 蜾蠃負之. 春秋之義, 父為子隱, 甲宜匿乙而不當 坐 『春秋決獄』
현대법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의 정황은 복잡하지 않은데, A의 양아들 B는 사람을 살해하고 A는 B를 숨긴 상황이다.
한나라의 법령에 따르면 “친족은 재상을 숨겨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 규정은 한나라 법제에게서 나온 것이다.
A씨가 숨긴 상황 자체는 명확하 고 아버지가 아들을 숨기는 것도 허용되지만 이 경우 문제의 핵심은 그렇다면 A는 B의 아버지 로 간주될 수 있을까?가 된다.
A가 B의 친부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범인을 은폐한 A의 행위는 위법이다.
동중서가 책을 쓸 때는 한대에 입양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후기 당명의 법과 비교할 때 여전히 단순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동중서의 분석은 면밀히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A와 B 사이에 부자관계가 성립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중서는 판결을 내릴 때 한나라의 법령만을 자신의 입장으로 삼지 않고 A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했던 듯 하다.
A의 입장에서 문제를 본다면 A의 행동은 B의 은닉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A가 자식이 없어 B를 키웠고, 길가에 버려진 아들 B를 업어 키웠던 행위들은 한나라 법으로 금지된 것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A씨의 무(無)자녀는 A씨가 유기아동을 입양한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B가 성장한 지난 몇 년간 A의 양육 행태는 사실상 유교적 인의의 본래 의도와 일치한다.
동중서는 이 사건을 인하면서도 잔인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아버지의 행동은 인, 의를 실현한 행위이며 동중서의 가치에 부합한 것이었다.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법치가 기본 통치원리로 합의된 상황임에도 법이 공동체의 존재 이유에 도전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나머지 법 바깥의 규범을 요청하게 된다.
법 제정자 가 조문을 만들며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거나 예상했더라도 그 정도 세세한 사례를 일일히 명시할 경우 되려 많은 예외를 열어주는 일이 될 수 있어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예는 권력자의 힘을 제한하는 질서로 존재해왔는데 이에 착안해 응옥 손 부이(Bui Ngoc Son)등은 입헌주의 에서 예가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Bui Ngoc Son 2016, 55).
쉬리옌 수(Shihlien Hsu)는 예가 정부의 권력을 한정짓는 ‘자연법’과 하늘의 의지와 합치되는 원리로서 헌정주의에서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L. S. Hsu, 1975, 96-99).
그에 따르면 헌정주의에서 예가 작동하는 도식은 일반적으로 법률이 반드시 예와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나타낼 필요는 없지만 법률의 제정은 반드시 예의 실현에 유리한 방식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Ⅳ.禮治와法治의양립가능성
1.法治와민주주의의결합평가
대다수의 선진화된 국가는 법치와 민주주의를 정치 형태의 근본으로 두고 있다.
민주주의 의 근본 성격에 관한 이해방식의 차이는 민주주의를 집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제도적⋅절차적 조건들의 묶음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민주주의를 그런 조건들의 구비 정도와는 상관없이 특정 한 가치나 원칙이 실현된 상태로 보는 방식의 차이를 말한다(김비환 2014, 43). 대체로 자유민 주주의자들은 국가가 특정한 제도적⋅절차적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지를 민주주의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어, 공정한 정기적인 선거의 존재 유무, 시민의 기본권 보장 여부, 언론의 자유와 법의 지배의 확립 여부 등을 민주성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들로 삼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국가의 민주성의 정도는 그 국가가 자유민주주의로 규정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제도적⋅절차적 조건들을 얼마나 잘 구비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된다. 다만 법의 통합성을 주장한 드워킨(R. Dworkin)처럼 제도나 절차의 구비 여부만으로 국가의 민주성을 판단하기보다 시민들 사이의 실질적 평등이 실현됐는지 여부를 핵심 기준으로 설정하는 평등 지향적 민주주의자도 있다. 시민들의 평등과 존엄성이 보장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를 구성한 다고 여겨지는 제도와 절차도 민주주의 달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드워킨과 같은 평등적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무위’하게 운영되는 법치의 보완 필요성과 보완 방안을 제시하는 본고에서 특히 언급될 필요가 있다. 민주성의 달성 여부를 특정 제도나 절차의 확립 여부로 판단하는 데 그친다면 그 제도가 방해받지 않고 차질없이 운영되는지 확인하는 작업 외에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질적 제고 방안은 불필요한 논의가 된다. 법치는 사법 절차에서의 실수나 일부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공무원 등 요인으로 인해 많은 부분에서 오작동을 나타내는 상황에서 정치의 결과, 실질적 내용을 제고하길 목표한다면 현행 제도 외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를 실질적인 가치의 실현이란 관점에서만 바라 보게 되면 개인의 자유 침해나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의 비중이 줄어들 수 있다는 난점이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107 있다. 또 실질적 가치의 실현 여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도 문제로 나타난다. 따라서 민주주의 를 규정하는 두 기준 모두 함께 고려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민주주의라고 해도 그것이 사회의 다른 주요 제도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다수 인민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사회의 주요 정치제도로서 장기적인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 이에 현대 민주주의의 지속을 지탱하는 절차 즉 법치 외의 다른 수단을 떠올리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절차적 정당성이 민주주의 성립의 충분조건이라고 여기고 방치한 것과 지속 가능한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고민이 없었던 것은 민주주의의 질적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서 민주주의의 작동 조건에 대해 주목할만한 의견을 설파하고 있는 뵈켄회르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 전제조건을 사회, 문화적, 정치적·구조적, 윤리적 전제로 분류해 구체적 기준들을 제시하였다. 우선 정치적 쟁점에 대한 개인의 자율적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에게 헌법상 자유를 명문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실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 으로 그 명문에 역행할 수 있는 암묵적 메커니즘이 작동해서는 안 된다(이계일 2013, 457). 사회를 지탱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기구와 결정절차가 형식적으로 명료히 정해져있더라도 각 개인이 자신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이익이 무엇인지 구체화할 최소한도의 용의가 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한다면,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은 외관은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찾는 형태를 띠더라도, 실제로는 권력투쟁이나 밥그릇싸움의 의미밖에 갖지 않게 된다. 또 공익의 내용과 그 실현을 위한 적절한 수단 판단에 있어서 전혀 수렴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구성원 생각의 이질화가 존재한다면, 민주주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원활한 의사 결정은 구성원들이 어느 수준까지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음을 필요로 하며 여기엔 가치적, 이해관계의 동질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뵈켄회르데는 어느 정도의 ‘상대적 동질성’을 민주주 주의의 사회, 문화적 전제조건 중 하나로 두는 것이다. 이때문에 자유주의자 롤즈도 다원성이 높아진 현대사회에서 정의의 원칙들의 원초적 근거로서 어느 수준의 보편성을 정치적 자유주 의의 구성요소로 두었다(롤즈 1998, 166). 이는 자유주의가 개인들을 억압하는 것을 피하면 서도 정의의 원칙들에 대한 합의의 가능성을 정립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바이통동(Bai Tongdong)은 롤즈의 이러한 작업이 성(聖)과 속(俗) 사이 길을 걷는 유가의 방식과 조화된다 고 설명한다(Bai Tongdong 2012, 123). 동질성 여부는 법치의 안정성에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다. 개인 들은 법에 의해 행동 범위에 있어 제한을 받는데, 개인들의 가치관 편차가 커질수록 법 준수의 108 정치사상연구 제30집 1호, 2024 봄 이행률은 떨어지기 쉽다. 이는 법치의 혼란 상태를 야기한다. 개인들의 정서가 아주 이질적일 때 강제적 성격이 부각되는 법률만을 통해서는 동질성을 제고하기 힘들다. 이때 인간의 품성 에서 도출한 규범으로서의 예가 법률을 해명할 수 있다면 법률에 대한 공감을 높일 개연성이 있다. 예는 그 내용의 형성 동력으로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발화와 요구, 관습을 포함한다. 따라서 예는 다양한 행위자 사이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규범과 법에 대한 이해를 유도하게 된다. 예는 법의 내용적 근원으로서 개인들의 정서와 더 가까운 위치에서 최소한의 사회적 동화(同化)를 만들게 된다.
2.法治의 보완: 禮治
홈즈(Holmes)는 헌정주의는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며, 헌법의 기본적 기능이 민주주의 로부터 특정 결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Holmes Stephen 1988, 196).
다수에 게 정부의 권력이 장악되고 다수의 결정이 지배하더라도 최소한의 법의 지배의 원리를 실현할 사법부를 설치함으로써 최초의 헌정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오승용 2010, 169).
그러나 헌정주의를 뺀 법치 시스템과 민주주의는 끈끈하게 결합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법치가 비록 최소한의 원칙을 사수하면서도 다수의 지배에 열려있음을 전제로 실현되고 있다해도 법치가 열어둔 재량은 결코 작지 않다.
법치가 허용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활동 영역은 상당히 넓으며 이것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을 목격하면 헌정주의가 정초한 원칙들은 현실의 극히 일부분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현대 법치는 소극주의를 원칙으로 일단의 자유를 현능적 판단 위에 두는데, 분리된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이 개인들에 이로운 결단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음은 돌아봐야 할 문제인 것이다.
헬드(Held)의 설명처럼 민주주의를 공정한 주기적 선거, 평등한 투표권의 확대, 시민적ㆍ정치적 자유 등 절차적 조건뿐만 아니라 결과로 서 나타나는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시민적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상태”(데 이비드 헬드 1993, 271)로 정의했을 때, 현시되는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또 다른 현대 민주주의의 한계는 평등성의 축소ㆍ왜곡에 있다. 틸리(C. Tilly)는 브라질, 미국 그리고 인도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현대 민주주의는 물질적 불평등이 광범위하게 존재 하는 가운데 발현ㆍ지속되며”, “정치적 과정에 있어 범주적 불평등이 거대한 자원의 불균형 을 야기하기 때문에 민주적 정치를 방해하거나 전복시킨다.”(찰스 틸리 2007, 182)고 지적한 다.
민주주의를 자유의 원리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것은 평등성의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109 협애화 하거나 훼손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미국 전직 대통령이자 공화당 후보로 거론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법무부를 이용해 정적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36)
36) 트럼프는 2023년 11월 한 스페인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바이든)정권이 법무부를 이용하는 것'이 당신이 재선 한다면 똑같이 반복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확실히 반대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답하였다. "You say they've weaponized the Justice Department, they weaponized the FBI. Would you do the same if you're reelected?“ "Yeah. If they do this and they've already done it, but if they want to follow through on this, yeah, it could certainly happen in reverse. It could certainly happen in reverse. What they've done is they've released the genie out of the box.“ Univision News, Trump on Univision: the former president talks about the Latino vote, foreign policy and economy, 23년 11월 09일자
현재 법치의 틀 안에서 헌정주의나 민주주의 등의 체제가 일반적으로 이상으 로 여기는 모습은 조성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적극성을 띠게 될 경우 개인 자유의 침해라 는 결과를 안게 되는 딜레마 상황에 놓인 법치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움직임이나 계획을 차단할 수 없는 현실에 놓였다.
따라서 사회는 법치와 민주주의에 종속되 지 않는 체제 또한 필요로 하게 된다.
법학자들은 법률의 명확성 문제를 고심해왔다. 명확성 요청은 가장 핵심적인 합법성을 이루는 요소이며 명확성의 결여는 합법성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다만 입법에서 명확성 을 중시한다는 것이 ‘선의’나 ‘적정함’과 같은 규준을 기준 삼는 법령들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 다(론 풀러 2015, 26).
오히려 명확성을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이 일상생활 속 상식적인 판단 기준을 활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입법이 일상언어를 수단으로 쓰고 있는 이상 필연적이 다.
이런 시각에서 풀러는 “그럴듯해 보이는 명확성이 솔직하고 개방된 모호함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고” 언설한다.
현재의 법조문은 ‘건전한 풍속’, ‘합리적으로 기대되는’ 등의 상식에 호소하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법령이 일상언어로 기술되는 이상 상식에 의존하는 설명은 극복해야할 제거의 대상이 아닌 필요한 표현 방식이다.
국가공동체에서 자란 인물이라면 결정을 앞두고 드는 생각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거나 예외적인 양육환경을 겪지 않는 이상 응당 생각하리라 기대되는 내용은 예로써 총합된다.
법이 기대는 규범이나 전통으로서 예는 시간에 따라 변화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면서 또 동시대에 합리적으로 예상되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요건으로 한다.
보드는 법관이 법률이 미처 규정하지 않은 상황에 마주쳤을 때 유추(analogy)를 통한 의율을 동원하거나 예 관념을 동원하는 방법을 쓸 수 있었는데, 명·청 대에 이르러서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예에 근거한 판단이 주를 이루면서 유추를 통한 판단이 아예 필요 없게 되었다고 분석한다(Derk Bodde 2014, 31-32).
실제로 예는 법이 일부러 명시하지 않거나 명시할 수 없는 상황 조건을 대신할 수 있다.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상당히 많은 경우 행위자의 고의, 인지 여부에서 갈리는데 상식과 질서의 총체인 예에 근거해 당사자의 판단을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사건사고에서 자주 언급되는 ‘공연음란죄’의 경우 타인에게 수치심을 불러일 으킬 수 있는 행위로 요건을 상식에 기대어 한정하고 있다. 속옷만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두 남녀가 경찰에 붙잡혔을 때 그들은 '나는 이정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라고 항변할 수 있다. 법률에 무엇을 꼭 입고 밖을 돌아다녀야 하는지 적혀있지는 않지만 속옷 활보가 타인에 게 불러일으킬 감정이 창피함 내지 수치심에 가깝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개인의 사상을 스스로 통제할 자유가 있지만 법률이 관여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기준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보편적 상식은 아주 안정적인 기준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만 오히려 문언의 구체성에 너무 기대다 보면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앞선 사례처럼 어떤 옷은 꼭 입고 외출해야 하는지 무수히 많이 기술한다면 그것을 시민들이 외우기도 어려울 뿐더러 적시된 규정은 지켰지만 누구의 시각으로도 부적절해보이는 옷차림을 한 사람을 규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앞에서 도덕규범과 질서로 분석된 예는 장기간 걸쳐 내려온 자발성에 근거한 도덕과 사회적 합의가 형상화된 형식이다.
따라서 예에 근거한 의사결정은 특수의지보다 일반의지 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유가는 법을 자주 바꾸면 백성들이 혼란해진다며 법 제정에 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내왔는데 법 개정을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가 유지한 최선의 규범을 무시하고 정권을 이양받은 자의 자의적인 규범을 확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법전에 조문을 추가할 때 국조오례의, 조종지성헌(祖宗之成憲) 등 기존의 규범 기록과 모순되 지 않게 하는 것도 당대의 짧은 사유로 생긴 규범이 오랜 시간 검증된 예를 쉽게 대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이다.
조선후대『대전회통』과 같은 법전에서 법 개정이 이루어진 후에도 조종지법의 내용을 지우지 않은 채로 표기해두었는데, 백성들의 예 관념과 상식과 충돌할 가능성을 차단하며 법 집행을 하고자 했던 모습이다.
현재 법제처의 국가법령정보센 터와 국회법률정보시스템은 법률을 공지하면서 각각 신구법비교 항목과 연혁을 두어 신구조 문의 대비를 나타내고 개정 이유를 부착하고 있다.
삭제돼 실효성이 없는 법조문을 남겨두고 있는 것은 각각의 법률이 의미적 기반 아래 단절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법률이 헌법과 같은 내적 규범에 근거한 연속성에 어느정도 따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슈미트 는 합창단원이 바뀐 상황에서도 그 노래의 단일성이 유지된다는 예시를 들며 헌법을 공동체의 단일성을 유지, 재생산 하려는 정치적인 힘을 생성하는 장소로 볼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이 예치의 법치적 성격 연구: 111 경민 2021, 104).
이렇게 보아 긴 시간 도전과 변화를 거쳐 형성된 예가 내적 정합성과 사회적 적용 가능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면, 예가 다시 숙고되어 그 정당성이 강화될 때 법의 제개정과 해석에 안정적인 의미적 바탕이 된다고할 수 있다.
예는 수월적 사고의 결정(結晶)이자 보편적 상식의 근거지로서 개인 이기심의 난립을 줄이고 동질적 감수성을 형성한다. 이렇게 볼 때 예에 기반한 동질적 관념과 정서는 법률에 대한 공유된 해석과 통섭 가능한 토론환경 구축의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앞서 언급한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법 위헌 결정에서 기대고 있는 관습헌법 등 예의 내용을 개념화하고 재창출하는 작업을 요한다. 현대 헌정주의 담론에서 마주한 과제인 단순한 의사표집으로 축소된 민주주의 제도와 그에 따른 공동체의 질적 하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단순한 의사들의 총합 즉 숙고되지 않은 방치된 개인성이라는 원인을 개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가 통치 방편으로서 실체적으로 작동한 역사적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예치와 법치의 경쟁과 공존은 한(漢) 대부터 확인된다.
동한 시기 유학자들의 최대의 장은 천자만이 주도할 수 있는 백호관회의에서 벌어졌다. 동한 장제 건초 4년(79년)에 미앙궁 백호관에서 열린 백호관회의에서는 정현이 천자가 예 규범의 존속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이 회의는 이전 까지 계속 제기된 문제인 정치권위의 근간으로서 경학의 권위를 확립하고 그 관건으로 금고문 논쟁, 참위논쟁, 경전의 동이문제 등을 해결하여 텍스트의 정리를 통해 국가이념의 통일성을 완결하려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정치권위의 제도적 안정성과 우월성을 이념적으로 뒷받 침하는 작업의 완결이라는 의도가 내포되었는데, 이 점에서 백호관 회의는 유교적 예제를 정형화한 제도화의 작업인 동시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구획하는 이념적 근간을 확정한 계기라고 설명된다(윤대식 2004, 26).
조선조의 정치사회에서도 예를 통해 개인을 규율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질서를 세우고자 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고려의 예제(禮制)가 고례(古禮)에 부합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고례에 입각하여 유교적 예제를 정비하여 예속(禮俗) 을 확립함으로써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교화시키고자 의도한 점이나, 유교국가 조선을 관통하는 통치원리와 통치방식에 대한 정치적 문제의식이 집약된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유교 의 예적 질서에 따라 국가 전례의 표준을 확립하고자 하였고 그것이 조선조의 국가운영의 기본 원리로서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최병덕 2011, 10).
16세기 등장한 성리학적 소양으로 무장한 사림은 국가적으로 주자가례에 기반한 유교 의례의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주자의 사창제를 도입하고 향례를 시행하였으며 향당윤리의 보급에 힘썼다.
조선 전기에 국가적 예인 오례(五禮)에 포함되어 있던 가례(家禮)가 독립해 나가 사대부의 예로 확산되면서 예의 실천 공간으로 서 개인과 가정이 중요시되고, 향촌이 독자적인 예의 실천 공간으로 대두하고, 인간의 삶 전체가 예의 시행 대상이 되어가면서 조선 사회가 예치를 구현하기 위한 시작의 단서를 마련하 기 시작하였다(고영진 2022, 157-8).
유교사회에서 형법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교화된 역사적 사실은 재판할 때 유교경전을 인용하여 판결하는 ‘인경결옥(引經決獄)’, 유교경전을 바탕으로 법조문의 함의를 분석하는 ‘이경주율(以經註律)’, 유학자들의 예제(禮制)를 법조문에 포함시키는 방식 등을 통해 드러난 다.
앞서『주례』의 예시를 통해 언급한 것처럼 유교사회의 법은 상하귀천에 따른 차등적 형률을 적용하여 예치(禮治)와 '기강(紀綱)' 확립적 수단으로 쓰인 면이 있다.
『대명률』을 일반법으로 삼고『속대전』과『대전통편』의 법조문으로 보강된 조선시대의 형법도 유교 적 가치 즉 예를 근본 정신으로 하고 있었다. 유교적 전통에 비추어 법조문 적용을 검토하는 관례는 경국대전이 완성되던 조선 초기의 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던 성종 10년 살인 사건에 연루된 한 여자 노비를 둘러싸고 왕과 신하의 조정 내 격론이 벌어진다.
사노비 근비(斤婢) 사건은 민효원(閔孝源)의 여노비 근비가 박중손(朴仲孫)의 중개로 차경남 (車敬南)과 통정하였는데, 그 후에 이웃 사람 박종손(朴終孫)과도 사통해 박종손이 근비 앞에 서 차경남을 죽이겠다고 말했고 어느 날 실제로 차경남을 목졸라 살해한 일이다. 먼저 일부 신료는 근비가 박종손의 말을 듣고 차경남에게 고하지 아니한 것은 비록 실정을 알았다고 하겠으나, 또 가세한 일은 없으며 삿갓과 그물로 시체를 덮은 일이 협박에 따라 급하게 이루어 졌다며 극형이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또 사형(死刑)은 중한 일이고 주관하는 형조(刑曹) 에서 이미 의옥(疑獄)으로 계달했기 때문에 대신들 간 의논도 일치하지 아니하면서 갑자기 극형에 처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말했다.
이때 사서오경인『서경(書經)』이 인용되 는데, ‘허물이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리리 상법(常法)을 쓰지 않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 낫다.’, ‘죄가 의심스러운 것은 가볍게 하라.’는 내용이었다.37)
여기서 주목이 가는 부분 은 유교 경전이 사건의 판단기준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서경』의 관점은 신료의 주장 뿐 아니라 임금의 결정에도 고려되었다.38)
37) 與其殺不辜, 寧失不經 …… 罪疑惟輕『書經』「大禹謨」
38) 근비 사건에 대한 기록은 최병조, "15세기 후반 조선의 법률논변 : 私婢 斤非 사건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法學- 제52권 제1호(2011)을 참조하였다.
『서경』의 ‘죄가 의심스러운 것은 가볍게 하라.’는 명령이 당대 법률 적용의 한차원 위 원칙으로 반영된 것은 법제의 유교화를 다루며 전술한 ‘인경결옥’, ‘이경주율’의 예시로 해석된다.
법치와 예치의 공존은 입헌주의와 유교전통의 상호작용에서도 확인된다. 선대의 성군(聖 君)들이 세운 도리라는 뜻의 선왕지도(先王之道), 선왕지법(先王之法)은 국가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하고 구체적인 시책을 비판할 때 사용된 기제였다(함재학 2006, 190). 선왕지법은 일반적으로 경전의 가르침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도자의 경전 공부는 경연(經筵)을 통해 제도적 기반 하에 이루어졌다.
경연은 경국대전에 의해 법적으로 인정받은 기관이었다. 선왕 지법과 함께 따라야할 전통은 시조 왕께서 제정한 법이라는 뜻의 조종지성헌(祖宗之成憲), 조종지법(祖宗之法)으로 이 또한 왕이 내건 시책에 대한 비판 논거로 활용되었다.
현대의 예치는 초법적 기구로 해석된 플라톤의 야간회의(김용민 2019, 200-201)39)나 장칭이 제창한 유교전통적 가치로만 기술된 헌법의 지배를 통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39) 플라톤의 야간회의는 우선적으로 법률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지만 법률을 개선하고 개정하려는 노력을 수행 하는 기관으로 설명된다. 야간회의 개념은 이를 교육기관으로 보는 해석과 초법적인 통치기구로 보는 상반된 해석을 동반한다.두 번째 해석은 플라톤이 법의 지배가 아닌 철학의 지배로 회귀하고자 했다는 전제를 포함하 고 있다.본고에서 간략하게나마 시사하는 현대적 예치의 효능이 구성원 간 동질적 가치 공유를 통한 원활한 법 해석과 규범 준수의 자발성 제고인 만큼, 예치를 법 체계의 상위에서 작동하는 방식으로 구상하는 것은 일관되지 않을 것이다.
법률 로써의 규정이 어렵지 않은 대부분의 개별 사건은 법의 지배에 종속되어도 불편함이 없으며 이러한 법의 지배는 행위 결과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의미가 있다.
반면 법률에 근거한 판단이 모호한 상황에서 헌법과 상호작용하는 예가 상위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구성원들의 가치적 기준이 되는 형태로 예치는 기능할 수 있다. 전술한‘이경주율(以經註律)’의 역사는 법의 명확성을 높이는데 예가 역할할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예치가 헌정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만큼 가령 헌법재판소의 작업을 확장하는 일은 현대적 예치의 일례로 구상될 수 있다.
재판소가 채용하는 헌법재판연구원은 변호사 자격을 소지한 자 외에도 여타 분야의 박사학위를 소지한 자를 자격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연구원들은 재판에 참고되는 보고 서를 작성하는데 관여하는데 헌법 이해는 법률가 뿐 아니라 기본권을 연구하는 타 학문 종사자 들도 기여할 수 있는 작업임을 보여준다.
헌법에 대한 해석 작업을 활성화하는 것은 법을 충실히 해석하고 개선하는데 의미있는 규정을 제공하는 가치와 예 연구의 바탕이 될 것이다.
여타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과 제도적 여건에 따른 검토는 후속 연구에서 다뤄보도록 한다.
Ⅴ.나오는말
일찍이 초기 주나라의 통치자들은 무거운 벌칙성 제재를 동반한 ‘영적인 의식(holy rites)’ 을 지지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강제와 형벌을 동반하는 것은 법가적 전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오래된 질서에서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예’는 비강제적인 유대에 이상적으로 기대 고 있는데,『서경』에서도 우왕과 주나라의 제후들이 정당한 상황에서 강제력을 쓰는 것에 부정적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벤차민 슈워츠(B. Schwartz)는 오히려 이후의 공맹 대에서 강제력을 줄이려고 한 데 반해 이 전통이 주의 정통 서적에서부터 관찰된다며 주나라 왕조가 힘에 부정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B. Schwartz 1985, 324).
실제로 공자 시대의 자산(子産)은 예의 실현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었지만 예의 유대가 폭력적이고 무정부적인 마찰을 방지할 수 없다는 것을 목도하고 예가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자산의 개혁 프로그램은 법가적 프로그램의 현현을 그리게 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방식으 로 그는 개혁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본고는 예가 과거 실현한 권력 감시와 견제의 효과에 더해 예의 진의(眞義)를 밝혀냄으로 써 법 보완의 이력을 연구하는데 주력했다.
동질적 규범으로서의 예는 법의 공백을 해소해왔 으며 도덕적 사회를 견인해왔다. 이론적 수준에서 예치의 현대적 의미는 기술한대로 법률의 모호성 해소와 다원주의·민주주의와 긴장 관계에 놓인 법 준수를 위한 공통 인식·정서의 형성, 자발성 확보로 나타난다. 법률의 문언이 허용하고 있는 넓은 공백은 자의적인 법 해석과 탈선에 무력한 면이 있다.
구성원들 사이의 동질적 규범으로서 유대를 형성하는 예를 공유해 법의 지배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법 체계에 대한 공익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글은 국가 권력의 견제이자 창출 원천으로서 예치가 시행되던 선진시대와 한대, 조선왕 조의 실례를 발굴을 통해 예치의 법치 보완 양상을 제시했다. 본고에서 정리한 예의 의미와 예치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예를 활용한 통치 전략이 정교화된다면 다수주의의 부작용 해소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조선의 재판은 인경결옥, 즉 예를 서술한 유가 경전으로 법조문 을 해석하는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으며 조선후대『대전회통』등의 법전에서는 법 개정이 이루어진 후에도 백성들의 예 관념과 상식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조종지법의 내용을 지우지 않은 채로 표기해 예치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예치와 결합한 법치는 확고한 원칙으로써 왕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와 의사결정을 막는 결과도 도출하였다.
본고는 예의 의미와 법과의 결합 이력을 분석하고 법 보완의 가능성과 과거에 시현된 구체적 모습을 보이는 한편 지금의 정치 체제에서 기능할 수 있는 예치에 대한 기초적인 구상과 기대효과를 시사하였다. 예치의 정치적, 법적 지위에 대한 구체적 진술은 차후의 연구 과제로서 실정법학을 포함한 간학문적 연구에 기반한 예치의 실현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한 더 설득력있는 논증이 될 것이 다. 아울러 다른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는 동아시아 바깥의 국가에서 예치의 가능성 연구를 통해 예치의 보편화가능성도 알아볼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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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동양 정치가 법치를 결여하고 있으며 지금 쓰이고 있는 법이 서구의 역사에서 연원한다는 시각이 존재 하지만, 예치 본위의 통치가 이어졌던 중국의 사상 사를 보면 그것이 내포한 법치적 요소와 성격이 나타 난다. 한국 정치사에서도 법은 중요한 위치를 점유 하고 있었다. 『주례』에는 상벌로 군신들을 통벌한 다는 법가적 대응이 반영되어있고,『주례』의 육전 을 참고한 조선(朝鮮)『경국대전』의 <예전>과 <형전>은 유교윤리를 입법화했다. 법의 지배가 자 리잡은 이후에도 예치는 법치와 함께 기능한다. 법 전이 계속해서 편찬되던 조선조에서는 경연을 통해 법 바깥의 문화와 규범을 국왕에게 학습시켰다. 이 는 일차적으로 통치 자체가 정치주체의 도덕성에도 좌우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며 다스림의 방 향을 설정하는 가치 기준이 예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 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들끼리 모여 범 법자의 처분을 논의할 때 개별 법률의 진의를 파악하 는 과정에서도 유가 경전이 수시로 인용되었다. 동 양의 역사에서 정치 질서의 형성이 인간을 외적으로 규율하는 법⋅제도적 장치의 구축에 의존하기 보다 내면적 규율장치인 인간의 도덕성 개발에 더 의존하 게 된 것은 행위자의 책임과 도덕성을 강조하는 문화 로 인한 것이었다. 동서양에서 오랜 연원을 가진 법치는 현대 정치 의 효율성을 높여주면서도 법 해석의 모호함과 과잉 범죄화, 개인의 다원성으로 생기는 불안정성 등 다 양한 부작용에 부딪히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 형 태의 원형을 제시한 서구에서도 민주주의의 질적 저 하와 법의 모호함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본고는 예 와 법의 관계 및 과거 예치와 결합한 정치 형태를 분 석하고 예치가 법치를 보완한 사례를 분석한다. 구 체적으로 동양에서 예의 의미와 법의 의미 및 법가사 상의 정치적 의미, 동양 특유의 예·법 간 관계와 예치 가 보완한 법치의 양상을 제시한다. 한편 법이 문언 상으로 허용하고 있는 해석 상의 난점과 도덕 감정과 의 괴리 등 법치로써 해결하지 못하는 영역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에서 장기적으로 이러한 문 제들은 법치에 작지 않은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권위를 갖는 공동체의 규범적 유산으로서 예 의 개념이 법률이 명시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규정 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음을 보이고 예치가 헌정주의와 긴장관계에 있는 민주주의와 다원성을 보완할 방안 연구를 향후 시사점으로 제안한다.
주제어: 예치, 법치, 유가, 법가, 동질성, 민주주의, 헌정주의
┃영문초록 (Abstract)┃
Study On the Elements of Rule of Law in Rule of Li: Defining the concept of homogeneity as a complement to the rule of law
Park Eunchae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re is a view that Eastern politics lacks the rule of law and that the laws currently in use originate from Western history, but looking at the history of China's ideology, where li(rites, sprits)-based rule continued, the elements and characteristics of the rule of law contained therein appear. Law also occupied an important position in Korean political history.『Jurye』 reflects the legal response of punishing the military subjects with rewards and punishments, and the of the Chosun Dynasty's 『Gyeonggukdaejeon』, which refers to the six authorities in 『Jurye』, legislated Confucian ethics. Eastern legal thought has different characteristics from Western law, and the difference lies in the relationship with social customs and li at the time. In the Chosun Dynasty, when legal codes were continuously compiled, the king was taught culture and norms outside the law through contests while the rule itself was considered to depend on the morality of political subjects. Even when ministers gathered together to discuss the disposition of criminals, Confucian scriptures were cited in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the true meaning of individual laws. The rule of law, which has a long history in the East and the West, has increased the efficiency of modern politics, but is facing various side effects, such as ambiguity in legal interpretation, excessive criminalization, and instability caused by individual pluralism. The West, which presented the prototype of modern democracy and the rule of law, is also looking for answers to the decline in the quality of democracy and the ambiguity of the law. This paper shows political forms combined with past rule of li to draw ideas to supplement the difficulties of rule of law. The purpose is to identif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eaning of li and the meaning of law, the political meaning of East Asian legal thought, and the unique legacy of rule of li in the East, and to present rule of li as a complement to the modern rule of law. In modern society, areas that cannot be resolved by law are rising to the surface, and in the long run, these problems can lead to distrust in the judiciary and become a major obstacle to the rule of law. This paper proposes that the concept of li, as a normative heritage of communities, enables regulation of situations that cannot be specified by law and suggests further project which draws persuasive blueprint for complementing democracy and pluralism which are in tension with constitutionalism.
keywords: Constitutionalism, rule of li, rule of law, democracy, norms, homogeneity
논문투고일: 2024년 04월 10일 심사개시일: 2024년 04월 25일 심사완료일: 2024년 05월 20일
정치사상연구 제30집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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