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1. 문제의 제기
2. 주자와 퇴계의 매화시 창작의 배경과 위상
3. 주자와 퇴계의 매화시 비교분석
4. 결론
1. 문제의 제기
朱熹(1130~1200)가 살았던 12세기 송나라는 이 시대의 어지러워진 세
상을 벗어나 자연의 진경에 몰입하여 강호의 경치에 묻혀 도학의 뜻을 펼
치려는 새로운 문사들이 일어나 중국의 문학을 성리학의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송대 성리학의 발달은 道文一致의 문학을 주장하고 文以載道의 문학적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 退溪 李滉(1501~1570)은 주희의 성리학을 집대성
하였다. 퇴계는 주희가 그랬듯이 文以載道와 道文一致의 문학관을 바탕
으로 자연에 심취하였으며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매화에도 심취하게 되었다.
퇴계는 해동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희의 학문을 흠모하고 주희의
시문학에 정통한 사람이다. 퇴계도 33세 때부터 매화시를 짓기 시작하여
죽는 순간까지 117수나 남길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문인이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직접 한 적이 있으며,
주희의 매화시를 탐독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퇴계의 매화시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어 약 40여 편의 논
문과 3권의 책이 발간되어 나왔다.1) 이 과정에서도 퇴계가 주희의 매화시
를 흠모한 정황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래서 주희의 朱子大全을 일견해
본바,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46제 67수, 약 70여 편의 매화시가 발견되었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그 상징과 비유 등 다양한 문예미학이 들어있으며,
눈 속에 피어나는 그 강인한 정신과 우아한 아치, 청아하고 순수한 정취,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 고결한 정절과 의리, 우정, 순수, 평안, 덕행 등
우아한 품격과 성리학적 寓意가 발견된다. 주희의 매화시는 그 문학적 정
취가 철학적 정취보다 우세하였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들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미학만이
아니라 성리학적 우의가 함의된 道文一致의 문학론을 근본으로 삼는 성리
학적 예술철학이 점점이 발견된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는 성리학적 이
미지가 오묘하게 함의되어 더욱 영롱한 미를 발산하고 있다. 주희의 매화
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퇴계의 매화시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맥상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주희를 성리학자와 교육사상가로서 떠올린 반면 문
학가로서 연구는 소홀하였다.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서 선행 논문들을 점검
해 본바 최근에 와서 연구된 논문들이 몇편 발견되었다.2) 그러나 한국에서
는 아직 한 편의 논문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성글게라도 주희의 매화시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하기 위해 일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본고에서는 이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주희의 매화시와 퇴계의 매화시를
비교 분석하여 문학가로서 주희와 퇴계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한국문학사
와 중국문학사에 걸출한 매화시의 시인으로 부각시키고자 한다.
1) 정석태, 퇴계의 매화시에 대하여 , 퇴계학연구 제5집, 단국대학교퇴계학연구소,
1991; 기태완 譯註, 퇴계 선생 매화시첩, 보고사, 2011.
2) 马玉红, 朱熹咏梅诗词的研究 , 延边大学 석사학위논문, 2012.
林晓青, 苏轼与朱熹咏梅诗词比较研究 , 兰州教育学院学报, 2018.
朱文凯, 朱熹咏物诗研究 , 福建师范大学 석사학위논문, 2011.
付春明, 朱熹咏梅诗的思想意蕴 , 南京工程学院学报, 社会科学版, 2014.
2. 주자와 퇴계의 매화시 창작의 배경과 위상
매화시는 남북조 시대에 등장되어 그 일반적인 미가 묘사되다가, 송대의
이학적 영향으로 매난국죽, 사군자에 비유되면서, 송대의 문인들에 의해
그 절의가 상징화되고, 의인화되면서 군자의 풍모로 미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소옹, 육유, 임포, 소동파, 주희, 등 매화를 혹애하는 시들이 나타났다.
퇴계는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도 주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매화는 언제부터 무대에 등장하는가?
소강절은 ‘매화역수’란 고사를 탄생시키며 주역까지 언급하고 있다.
주희는 무이산에 은거하여 서경과 시경에 주석을 달았다. 주희도 주
역, 서경, 시경 등 유교경전에 처음 등장하는 매화부터 중국 역대의
매화에 대해 섭렵하고 있다. 퇴계의 매화시도 유교 경전을 비롯한 역대 매
화시에 대한 언급들을 깊게 성찰한 후에 시를 지었다. 퇴계는 다음의 시에
서 역대 매화시들을 언급하고 있다.
<用大成早春見梅韻> 大成3)이 이른 봄에 핀 매화를 보며 읊은 시를 차
운하다
周詩에서 읊은 매화 진경이 아니므로4) 周詩詠梅非眞識
3) 大成 : 李文樑의 자. 이문량(1498~1581)은 조선 중종~선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
字는 大成이며, 본관은 永川. 李賢輔의 아들로, 음직으로 平陵道察訪 등을 역임하였
으며, 이웃에 살던 이황과 가깝게 지내며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함.
4) 周詩 : 주나라 시전(詩傳)이다. 詩經 召南의 ‘摽有梅’를 말한다. 이것은 상징으
로 비유되기만 했지 진실로 매화를 보고 읊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摽有梅 떨어지는 매실이여 / 其實七兮 그 열매 일곱 개가 남았네 / 求我庶士
나를 구하려는 여러 총각들이여 / 迨其吉兮 그 길일을 택하시오
摽有梅 떨어지는 매실이여 / 其實三兮 그 열매 세 개가 남았네 / 求我庶士 나를
구하려는 여러 총각들이여 / 迨其吉兮 그 길일을 택하시오
摽有梅 떨어지는 매실이여 / 頃筐墍之 광주리에 주어 담았네 / 求我庶士 나를
구하려는 여러 총각들이여 / 迨其謂之 이 모임을 택하시오
검은 매화 흰 매화를 구분5)하지 않았네 不爲梅花分皂白
굴원의 이소6)에도 온갖 꽃을 과장하나 屈原離騷侈衆芳
도리어 얼음 서리 같은 천하 미색 몰랐네 還昧氷霜天下色
하손7)이 양주에서 처음으로 친구 되어 何遜楊州始知己
이별 후 다시 와서 여러 차례 탄식했네 別去重來屢歎息
어떤 이는 강남에서 정표 부쳐 읊었고 或吟江南寄情思
어떤 이는 고개마루 매화로 남북 나뉨8) 자랑했네 或詫嶺上分南北
철석간장도 아름다운 시어를 토해내고 剛腸尚吐嫵媚詞
송광평 절의9)는 굳센 바위 넘어섰네 廣平節義逾堅石
5) 검은 매화 흰 매화를 구분 : ‘梅花分皂白’을 번역한 말로, 실제 매화인지 글 속의
매화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6) 이소 : ‘離騷’는 屈原이 지은 賦의 이름으로, 애국적이고 서정적인 大敍事詩이다.
이소에 매화가 없다는 것을 비판하였다.
7) 하손 : 何遜은 중국 梁나라 때의 사람이다. 하손이 일찍이 楊州 法曹로 있을 때
관사에 매화 한 그루가 있었다. 하손이 그 아래에 吟詠하였고, 그 뒤 낙양에 있으면서
양주의 매화를 생각하여 이내 再任할 것을 청하였다. 양주에 다시 이르자 매화가 성
하게 피었는데 매화 주위를 종일토록 방황하였다고 한다.
8) 영상 매화로 남북 나뉨 : ‘嶺上分南北’을 번역한 말로, 매화 숲으로 유명한 大庾嶺
위의 매화는 남북 기후로 나누어진다. 차고 따뜻한 기후의 차이로 인해 매화의 남녘
가지 꽃이 다 떨어져야 북녘 가지의 꽃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9) 송광평의 절의 : 宋廣平의 절개와 의리를 말한다. 廣平은 당나라 宋景의 자. 일찍이
<梅花賦>를 지어서 “꾀꼬리소리는 아직 껄끄럽고, 벌통은 미처 소란하지 못한데,
이른 봄에 獨步하여 스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네”라고 매화를 묘사하였다. 皮日休
의 <桃花賦序>에서 “나는 일찍이 송광평이 재상이 되어 굳센 자세와 굳은 자질과
강한 모습과 의연한 모습을 사모하여, 그 鐵腸石心이 婉媚한 말을 토할 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 문장 가운데 <梅花賦>가 있는데, 淸便富麗하여 南朝의 徐庾體를 얻어
서 특히 그 인물됨과 같지 않음을 의아히 여겼다”라고 하였다.
兎園標物序 토원에 만물의 순서가 나타날 때
驚時最是梅 시절에 놀라는 건 가장 매화 때문이네
銜霜當路發 서리 머금고 길가에 피고
映雪凝寒開 눈빛에 비추며 추위 속에 피네
枝横郤月觀 극월관에 가지가 비껴 있고
花繞凌風臺 능풍대에 꽃이 둘러 있네
朝灑長門泣 아침엔 장문궁의 눈물을 훔치고
夕駐臨邛杯 저녁엔 임공의 술잔을 머물러두네
應知早飄落 마땅히 일찍 떨어질 것을 알고서
故逐上春來 일부러 상춘을 좋아 왔다네
- 何遜, ‘揚州法曹梅花盛開’
唐宋代엔 분분10)하게 시인 묵객 몇이던가 唐宋紛紛幾騷客
고산에서 감상하니 落莫하지 않았네11). 賞到孤山不落莫
하물며 운대노진일 주자께서는12) 何況雲臺老眞逸
강성에서 애끊으며 霜角13)을 읊었네 腸斷江城詠霜角
나는 매화를 혹애하는 벽이 많아서 我生多癖酷愛梅
남들이 여윈 신선이 山澤에 산다 하네 人道癯仙著山澤
예 놀던 남방에서 玉面14)을 알았는데 舊遊南國識玉面
옛 벗15)이 멀리서 여러 뿌리를 보내 왔네 故人遠惠連根得
서로 짝해 巖壑에서 함께 늙기 기약하나 自期相伴老巖壑
어쩌다 풍진 속에서 떠도는 몸 되었네 胡奈風塵去飄泊
어찌 서울에서 간혹 상봉 없겠는가 豈無京洛或相逢
10) 당송대는 매화를 읊은 시인들이 무수하게 많았다
11) 孤山은 북송의 隱士인 林逋의 諡號이다. 杭州 錢塘 사람으로, 西湖의 孤山에 초막
을 짓고는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숨어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梅妻鶴子’라고
일컬었는데, 그가 매화를 읊은 <山園小梅> 시에 “맑고 얕은 물 위에 성긴 그림자
가로 비끼고, 황혼 녘 달빛 속에 은은한 향기 떠도누나.[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
黃昏]”라는 명구가 나온다. 騷客들이 고산의 매화를 찾아 다녔다는 뜻이다.
12) 雲臺眞逸은 朱熹의 호이다. 그의 <延平水南天慶觀夜作> 시에서 “바위 누대 구름
에 누워 강성을 대하고, 성의 호각소리 속에서 서리를 읊으니 긴 밤이 맑네. 생각건대
남쪽가지 진정 수심에 잠겼으리니, 이 애끊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네.[石樓雲臥對江
城, 城角吟霜永夜淸, 料得南枝正愁絶, 不堪聞此斷腸聲.]”라고 하였다.
13) 霜角 : 변방 추운 곳에서 武卒들의 호각(을 부는 소리)이다.
14) 玉面 : 백옥 같은 얼굴, 즉 ‘매화’를 말한다.
15) 옛 벗 : ‘故人’을 번역한 말로, 瞻募堂 林芸(1517~1602)을 가리킨다. 임운은 조선
선조 때 학자로, 字는 彦成이고, 첨모당은 그의 호이다. 퇴계 문인이다.
흰옷이 검게 되어 변한 내가 슬프네 素衣化緇嗟非昔
차라리 백발로 임금 부름 사양함은 寧辭白髮赴佳招
순간의 부귀영화는 虻雀이 지나가듯16) 瞥眼榮華過虻雀
병인년17)에 스스로 요동 학에 비기어18) 丙歲自比遼東鶴
돌아와 살펴보니 매화 지지 않았네. 歸來及見花未落
정묘년19)에 병석 털고 매화 향기 찾으니 丁年病起始尋芳
옥가지 눈꽃 맺힘에20) 기쁘기가 한량없네 絕喜瓊枝攢雪萼
어찌하여 금년에는 늙음이 더 심한데 何意今年老更甚
빛이 나는 분양 이마21) 진정으로 근심하네 光生正患汾陽額
왕명의 엄한 여정22) 오랫동안 지체하니 尺一嚴程久稽滯
거북목 움츠린 듯이 그지없이 떨리네 仰兢俯慄如龜縮
매군은 갑자기 나를 멀리 하지 마라 梅君不須遽疎我
나의 일은 오히려 높은 격과 친하네 我事尚可親高格
법진23)처럼 명성 피함 이루지 못했으나 未諧法眞避名聲
16) 虻雀이 지나간 듯 : 벌레나 새가 지나가듯 하찮게 보다.
17) 병인년 : 丙寅年 퇴계 선생 66세 때이다.
18) 스스로 요동 학에 비기어 : ‘自比遼東鶴’을 번역한 말로, 내 자신을 요동학에 비유한
다. 병인년 삼월에 퇴계선생이 鳳停寺(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소재)에서 돌아와 陶山
梅를 찾아 시를 읊었는데, ‘그대는 돌아가는 학과 같이 遼天에서 내려왔네’라는 시구
가 있었다.
19) 정묘년 : 丁卯年 퇴계 선생 67세 때이다. 踏靑 날 선생이 홀로 도산에 나가 <小梅
詩>를 읊었다.
20) 눈꽃 맺힘에 : ‘攢雪萼’을 번역한 말로, 눈같이 흰 꽃술이 옹기종기 모인 모습을 묘사
한 말이다.
21) 분양 이마 : 汾陽은 당나라 汾陽王 郭子儀로, 벼슬이 갈릴 때마다 그의 이마에서
광채가 났다고 한다. 이때 선생이 조명을 받았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22) 왕명의 엄한 여정 : 尺一은 一尺之書로, 왕명을 적은 글 즉 인사 발령장이다. 嚴程은
지엄한 왕명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다.
23) 법진 : 法眞은 漢나라 때의 高士이다. 順帝가 네 번이나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의 벗 郭正이 그를 칭찬하여 “법진의 이름은 들을 수 있으나 몸은 보기 어렵고,
이름에서 도망치려 하나 이름이 자신을 따라오고, 명성을 피하려 하나 명성이 자신을
좇아오니, 백세의 스승이라 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오히려 상평24)을 믿어 損益卦 깨우쳤네25) 猶信尙平知損益
도의 운치 하루라도 떨어질 수 없는데26) 道韻休將一日離
고운 생각27) 끝내 막힐까 미리 걱정이네 馨懷預恐終年隔
옅은 안개 보슬비에 찾아드는 손님 없고 淡烟微雨客絕門
맑은 밤 바람 없는데 달이 산에 떠오르네 清夜無風月上岳
술을 불러 한잔 하니 병이 이미 나았고 呼尊試一病已蘇
백편의 시를 써도 정을 못다 푼다네 作詩縱百情何極
분옹의 호사28)가 나를 자랑해 말하지만 汾翁好事誇我說
일찍 핀 매화야말로 천공의 힘 얻었다네 早梅先得天工力
어찌 알리 陶山 매화 추위 타는 내 병 알아 豈知陶梅知我病畏寒
나를 위해 늦게 핌도 오히려 애석해 않네 爲我佳期晚發猶不惜
그대 보지 못했나 범석호를29) 君不見范石湖
種梅譜 만드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네 種梅譜梅爲天職
또 보지 못했는가 장약재30) 又不見張約齋
24) 상평 : 尙平은 후한 때의 高士인 向長을 이른다. 字는 子平이다. 여러 서적에 흔히
尙子平으로 오기되었다. 일찍이 주역을 읽다가 損益卦에 이르자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깨달았으니, 부유함이 빈곤함만 못하고, 귀함이 천함만 못한데, 다만 죽음이 삶
과 어떠한지 모를 뿐이다”라고 하고서는, 자녀들을 다 혼인을 시켜놓고 五嶽 名山을
돌아다니며 종적을 감추었다.
25) 손익계를 깨우쳤네 : 知損益을 번역한 말로, 周易의 損卦와 益卦에서 말하는 이치
를 안다를 뜻한다.
26) 도의 운치 하루라도 떨어질 수 없는데 : ‘道韻休將一日離’을 번역한 말로, 도의 운치
는 단 하루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中庸의 첫 머리에 보면 “도라는 것은
한 순간도 떠날 수가 없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
非道也.]”라고 되어 있다. 도라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의 行走坐臥 語默動靜 一切處
一切時에 다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도가 아니라는 의미다.
27) 고운 생각 : 馨懷를 번역한 말로, 향기로운 회포를 뜻한다.
28) 분옹의 호사 : ‘汾翁好事’는 분옹이 일을 벌리기를 좋아한다의 뜻이다. 汾翁은 ‘분천
에 사는 늙은이’라는 의미로, 大成 李文樑을 가리킨다.
29) 범석호 : 范石湖는 송나라 范成大를 가리킨다. 매화에 관련된 저서에 <范村梅譜>
가 있다.
30)장약재 : 張約齋는 송나라 張鎡로, 約齋는 그의 호이다. 장약재도 매화 수백 그루를
심고 사랑했다는 뜻이다. 그의 문집 <南湖集>에는 ‘玉照堂觀海 二十首’, ‘玉照堂觀
梅二首’, ‘冒雨往玉照堂觀梅成長篇’ 등 많은 매화시가 있다.
玉照風 풍류가 삭막하지 않았네 玉照風流匪索寞
아! 나와 그대 두 사람31) 좇아서 嗟我與君追二子
고절을 맑게 닦음에 더욱 힘쓰네32) 苦節清修更勵刻
31) 두 사람 : 범석호와 장약재를 가리킨다.
32)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詩, <用大成早春見梅韻>
<用大成早春見梅韻> 시에서 退溪는 고대 시경에서부터 퇴계 당대
까지 매화로 뛰어난 시의 유래를 언급하였다. 퇴계는 주희를 ‘雲臺老眞逸’
로 표현하면서 역대 매화시 작가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퇴계는 이 시구에
서 주자의 매화시를 의식하고 있었으며, ‘我生多癖酷愛梅’라고하여 퇴계
자신은 본래 매화를 혹애하는 버릇이 있다고 피력하고 있다. 여기에서 퇴
계는 이들 유래와 달리 천성으로 타고난 매화를 좋아하는 벽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퇴계의 매화시를 일관하고 있는 혹애의 주제의식으로 퇴계
의 매화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퇴계는 이 시에서 매화시의
유래에 대해 모두 파악하였던 것이 드러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매화시의 유래를 언급한 부분이 있어 주목을 끈다.
서경에 “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고, 시경에 “標有梅 其實
七兮”라고 하였다. 대개 고인들은 매화에서 그 열매를 취했고 그 꽃은 취
하지 않았다. 보아도 늘상 초목으로 여겼다. 시경 <묘문> 편에 “墓門有
梅 斧以斯之”라고 하였고, <이소>에는 또한 빼버리고 언급하지 않았다.
남조의 재량 간에 음갱33)과 하손이 읊고 감상한 후에 드디어 꽃을 梅라고
33) 陰鏗 : 字가 子堅으로 梁, 陳 두 왕조에 걸쳐 활동했는데 詩風이 何遜과 유사해
당시 사람들이 陰何라 병칭했다는데 그의 詩는 山水와 景物의 묘사에 뛰어났다. 두
보도 시어에 고심한 음갱과 하손을 배운다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시인들이었다. 이들
도 매화에 심취해서 시를 남겼다.
이름했으니 대개 늦게 표현된 것이다.34)
34) 李睟光,芝峯類說 卷五, 經書部一, <書經>. 書曰若作和羹 爾惟鹽梅 詩曰標有
梅 其實七兮 蓋古人於梅取其實 不取其花 視爲尋常草木 故曰墓門有梅 斧以斯之
離騷亦闕而不及 至齊梁間陰鏗何遜吟賞之後 遂以花名梅 蓋晩遇也
매화는 그 꽃과 그 열매인 매실 두 가지로 이미지가 존재한다. 서경과
시경에서는 열매인 매실이 시가에 등장되고 있다. 이것은 매화시의 유래
를 언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서는 굴원은 이소에서 매
화를 언급한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앞의 시에서 퇴계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퇴계는 옛날에 놀던 남방에서 매화를 알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즉 퇴계
의 처가인 경남 의령에 있었던 매화정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퇴계의 매화시 연구는 42세 때 지은 것부터 연구되었다. 그러나 최근 퇴계
가 33세 때 의령에서 지은 매화시 10수가 발견되면서부터 이 남방의 매화
가 명쾌하게 입증되었다. 퇴계는 33세 때 이곳에서 처가 식구들과 연회를
열었던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35)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 공통으로 나타나
는 것은 역대 매화시들을 충분히 섭렵하고 매화에 대한 박식을 바탕으로
창작하고 있는 점이다.
퇴계가 주희의 매화시를 접한 것은 朱子大全을 통해서이다. 朱子大
全에는 70여 수의 매화시가 있었다. 퇴계가 朱子大全을 읽은 것은
1543년 이후이다. 退溪는 朱子書節要序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
다.
부자가 돌아가신 후 두 王氏와 余氏는 부자가 평일에 지은 詩文類를
전부 모아 朱子大全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두 어느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35) 신두환, 퇴계의 매화시 재조명 , 한문학보 제37집, 우리한문학회, 2017.
그 가운데 公卿大夫와 문인, 그리고 친구와 왕래한 편지가 많아서 48
권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글이 우리나라에 유행된 것은 아주 드물었으므
로, 선비들이 얻어 본 것은 아주 적었다. 嘉靖 계묘년(1543, 중종38)에 우
리 중종 대왕이 校書館에 인쇄하여 반포하도록 하였으므로, 나도 비로소
이런 책이 있음을 알고 구하였으나, 아직껏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책인지
를 알지 못하였다.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책을 싣고 시골에 돌아와서 날
마다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서 이 글을 읽어 보니, 점점 그 말이 맛이 있고
그 뜻이 無窮함을 깨달았으며, 더욱이 서찰에 느낀 바가 많았다.36)
1543년 朱子大全의 간행은 조선의 문풍을 바꾸어 놓았다. 퇴계는 43
세 이후부터 朱子大全을 읽는다. 그 책에는 주희 시문집이 들어있었다.
퇴계는 이 책 속에서 주희의 매화시를 주목하며 읽었을 것이다.
퇴계가 처음 매화시를 지은 것은 33세 때였다. 경남 의령의 처가 집 주변
에 핀 매화를 읊은 것이 처음이다. 퇴계의 첫 매화시는 아내 김해 허씨의
죽음과 관계가 깊었다. 퇴계의 매화시에 나타나는 넘치는 사랑 혹애와 아
름답고 고결한 여인의 형상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김해 허씨에 대
한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37) 퇴계의 매화시가 주자의 영향을 받는 것이
44세 때부터 발견되는 것도 1543년 조선에서 간행한 朱子大全과 관련
이 있다. 퇴계는 1543년 이후에 朱子大全을 탐독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朱子를 목표로 하였는바, 陸學을 높이 떠받드
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몹시 배척하여 통렬히 끊어 버렸다. 蘇齋 盧守愼
이 《困知記》를 존중하여 믿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선생께서는 整庵
羅欽順의 학문에 대해, ‘이단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배척하고 속
36) 李滉, 退溪先生文集 第42卷, 序, 朱子書節要序
37) 신두환, 앞의 논문.
으로는 도왔으며, 왼쪽으로는 막고 오른쪽으로는 끌어내었으니, 실로 程
子와 朱子의 죄인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소재와 힘껏 논변하였는데, 소
재가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유독 高峯 奇大升만이 선생과 더불어
합심하여 困知記跋을 지어 그의 학문을 내쳤는데, 선생께서 보시고는 말
씀하시기를, “이 의논이 아주 명쾌하다. 이렇게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하였다.38)
38) 金誠一, 鶴峯續集 제5권, 雜著, <退溪先生言行錄>.
퇴계는 주희를 목표로 삼으며 공부하였다. 퇴계는 “학자가 道로 들어가
는 문을 알고자 한다면, 朱子大全 가운데서 찾으면 쉽게 힘쓸 곳을 찾을
것이다.”하였다. -김부륜-39) 퇴계는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를 구
하여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조용히 읽기를 시작하여 한여름 내 그치지 않
았다. 그래서 혹 누가 더위로 몸이 상할 염려가 있다고 경계하면, 선생은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어찌 병이 나겠는가.”하였다.
-김성일-40) 또 말하기를, “이 책 《朱子全書原註》 을 읽는 사람은 학문
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 방법을 알게 되면 필시 또 감흥이 일어
날 것이다. 이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힌 뒤에 四書를 다시 보
면, 선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신에게 받아들여 쓸 곳
이 있게 될 것이다.”하였다. -김성일-41)
선생의 집에 매우 오래되고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해진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있었는데,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
39) 退溪集 언행록1, 類編.
40) 退溪集 언행록1, 類編.
41) 退溪集 언행록1, 類編.
들이 이 책을 많이 박아 내자,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대조하
여 고치고 표시하여 다시 한 번 읽으므로 章마다 환하고 글귀마다 익숙해
져서, 그것을 몸과 마음에 受用하는 것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
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
고 침묵하며, 動하고 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
하며 물러나 조용히 사는 일 등에 대한 의리가 이 책의 그것과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혹 남이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였는데, 역시 事情과 道理에 합당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몸소 깨닫고 실제로 믿어 마음과
정신에 녹아든 결과이니, 한갓 책에만 의지해서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말
하는 것으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42)
42) 退溪集 언행록1, 類編.
퇴계는 朱子大全을 필사하여 두고 잘못된 것이나 새로운 사실이 발
견될 때마다 고치고 보완하였다. 퇴계는 이 시기에 朱子大全을 탐독하
면서 주자의 매화시에 대해 심취하게 되는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3. 주자와 퇴계의 매화시 비교 분석
주희는 총 70여 수의 매화시를 남기고 있다. 주희의 매화시의 주된 주제
의식은 주로 이별의 정서로 매화를 꺾어서 멀리 있는 친구나 그리운 사람
에게 소식을 전하는 봄의 전령사로서 우정의 테마이다. 주희는 흰 매화꽃
을 사랑하여 청아하고 정결하며 그윽한 매화의 향기를 우아한 아치로써
시에 형상화하고 있었다.
퇴계는 총 117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퇴계는 33세 때 지은 12수와 43세
때 지은 2수를 제외하고는 朱子大全을 탐독하기 시작한 43세 이후부터
매화시를 다시 짓게 된다. 퇴계는 朱子大全을 통하여 주희의 매화시를
철저하게 섭렵하였다. 퇴계가 주희의 매화시를 읽고 차운하기 시작한 것은
44세 때 동호에서 지은 매화시부터이다. 퇴계의 매화시에 나타난 주제의식
은 그리운 여인에 대한 사랑의 테마이다.
퇴계는 27세 때 아내 허씨를 잃고 6년 후인 33세 때 아내의 집 매화정원
에서 아내를 그리며 지은 매화시 10수가 주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서 나타나는 주제의식은 달랐다. 그러나 주희의 매
화시는 퇴계의 매화시에 점철성금되고 있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흠
모했고 주희의 매화시 형식을 사랑하였다. 주희의 매화시는 퇴계에게 영향
을 미치고 있다. 주희의 매화시와 퇴계의 매화시를 비교하고 분석하여 그
영향 관계를 파악해 본다.
3.1. 계상의 매화에 대한 주희의 공간감각과 퇴계의 공간인식
주자 시에 나타나는 계상의 매화시는 퇴계의 계상 공간에 영향을 미쳤
다. 주자의 시냇가에는 매화가 저절로 피었고 퇴계는 계상으로 집을 옮겨
거기에다가 주자가 즐겼던 매화를 심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선생께서는 50세가 되도록 아직 집이 없었다. 처음에는 霞峯에 집터를
잡았다가 중간에 竹谷으로 옮겼으며, 끝내는 退溪 가에 집터를 잡았다.
집 서쪽 시냇가에 精舍를 짓고는 寒棲라고 이름하였고, 샘물을 이끌어 대
어 못을 만들고는 光影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매화와 버들을 심고 세 갈래
로 길을 내었다. 앞에는 彈琴石이 있고, 동쪽에는 古藤巖이 있는데, 산과
물이 맑고 깨끗하여 완연히 하나의 별세계를 이루었다. 병진년(1556, 명종
11)에 나 성일이 처음으로 그곳에 가서 展拜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방 안
에 책을 가득 쌓아 놓고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
이 마치 그런 자세로 평생을 마칠 것만 같아서 사람들이 벼슬하는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霞明洞이 洛川에서 가까웠는데, 낙천은 官禁이 미
치는 바여서 자손들이 거처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곳이라고 여겨 溪上으
로 옮긴 것이다.43)
43) 김성일, 학봉선생문집 속집 제5권, 잡저, <퇴계선생언행록>
위 인용문에서 퇴계는 ‘매화’, ‘버들’, ‘세 갈래 길’ 등 주희와 도연명의
공간에 대한 흠모가 엿보인다. 퇴계는 계상에 집을 지으면서 매화를 심었
다. 주희의 계상의 매화와 퇴계의 계상의 매화는 그 이미지가 사뭇 다르다.
주희의 계상의 공간은 매화가 자연스럽게 핀 공간 감각이며 퇴계의 계상의
공간은 매화를 심은 인식된 공간이었다. 필자는 일찍이 도산의 공간 감각
과 공간 인식에 대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44)
44) 신두환, 退溪의 陶山雜詠 에 나타난 공간감각의 미의식 , 退溪學論集 제7호,
嶺南退溪學硏究院 2010, 39-72면.
퇴계는 청량산에서 도산
으로 옮기면서 산수의 공간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 주자나 소동파처럼 뱃
놀이가 가능한 물에 대한 공간을 찾아다녔으며, 뱃놀이가 가능한 탁영담을
찾고는 도산으로 옮겨 도산의 주인이 되었다. 퇴계는 계상으로 집을 옮기
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시냇가를 계상이라고 하는
것은 계상이 지명으로 고유명사화가 되어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주희의 다
음 시는 퇴계의 계상에 대한 공간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
시냇가 차가운 매화 이미 피었을 텐데 溪上寒梅應已開
옛 친구 한 가지도 부쳐오지 않네 故人不寄一枝來
하늘 끝에 어찌 향기로운 것 없으리오만 天涯豈是無芳物
그대를 위해 사심 없이 술잔 향하네45) 爲爾無心向酒杯
퇴계는 주희의 계상에 대한 공간을 엿보았다. 퇴계는 주희의 공간인 溪
上의 寒梅에 주목하고 있다. 또, 퇴계는 매화를 꺾어 보내는 주희의 시상을
다른 시에서도 그대로 옮겨 온다. 퇴계는 주희의 계상에 매화가 핀 공간을
몹시도 사랑하였다. 주희는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계상의 매화를 다음과
같이 이지적이고 낭만적으로 시 속에 형상화하고 있다.
운대산 아래 시냇가 길 아련히 알겠는데 遙知雲臺溪上路
매화꽃 십리가 산문을 감추고 있네46) 玉樹十里藏山門
퇴계는 주희의 시에 형상화된 계상의 공간을 주목하였다. 퇴계는 주희의
시에 형상화된 계상의 이미지에 대해 상상하면서 이러한 계상의 공간을
흠모하게 된다. 퇴계는 계상에 매화를 심기 시작했다. 퇴계가 계상에 매화
를 심은 뜻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계상에서 그대 만나 의문스러움을 풀어보며 溪上逢君叩所疑
막걸리를 걸러 다시 그대에게 권하네 濁醪聊復爲君持
천공이 도리어 매화가 늦음을 한스러워하여 天公卻恨梅花晩
일부러 잠깐 사이에 눈을 가지에 가득하게 하였네47) 故遣斯須雪滿枝
퇴계는 계상에 집을 지을 당시인 50세(1550년)에 <退溪草屋>이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금계 황준량이 찾아옴을 기뻐하여 지은 것이다(喜黃錦溪
45) 朱子大全 권1, 詩, <梅花兩絶句>.
46) 朱子大全 권1, 詩, <和李伯玉用東坡韻賦梅花>.
47) 退溪先生文集 卷之一, 詩, <退溪草屋. 喜黃錦溪來訪>.
來訪). 이때는 단양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였다.(罷郡歸鄕後)
퇴계는 퇴계 가를 계상이라고 불렀다. 퇴계는 이 시에서 계상의 매화를 언
급하고 있다. 이때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다. 퇴계는 자기가 심은 매화나
무에 꽃이 피어나기를 몹시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직 매화가 필
때가 아니어서 天公 조물주가 일부러 눈을 가득하게 하여 매화꽃인 양 꾸
며놓았다고 하고 있다. 퇴계의 매화시에는 기발한 발상이 그 의경을 장식
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등장하는 계상의 매화를 상상하며, 퇴계의
계상에도 매화가 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퇴계는 59세 때 지은 <感事>에서 계상의 매화를 형상화하고 있다.
한겨울 산골짜기에 눈서리 깊은데 歲寒山谷雪霜深
개울가 매화는 아직도 피지 않네 溪上梅花尙悶心
천리 밖에 있는 친구 견디기 어려우니 叵耐故人千里外
그리워도 그윽한 회포를 함께하기 어렵네48) 相思難與共幽襟
48) 退溪先生文集 卷之三, 詩, <東齋感事 十絶>.
퇴계집에는 제목이 <陳齋感事十絶>로 되어있다. 자주에 “<陳齋感
事十絶> 가운데 1수”라고 하였다. 59세 때의 작품이다. 퇴계는 계상의 매
화를 언급하며 멀리 있는 친구에게 꺾어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 매화에서
그리움의 이미지를 상상하는데 이것은 주희의 매화시에도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하나하나 톱아 가며 읽고 감상하고
이해하였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닮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매
화시에는 주희와 다른 이미지들이 들어 있는 것이 많다. 그 형식은 주희를
닮았으되 그 내용은 참신하고 새로운 것들이었다. 퇴계는 주희처럼 계상의
공간을 간구하였다.
퇴계는 <梅花>란 시에서도 계상의 매화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냇가에 하이얀 매화 두 그루 서 있는데 溪邊粲粲立雙條
앞 숲엔 향기를 뿜고 다리엔 꽃이 비치네 香度前林色映橋
아직은 풍상에 쉽게 얼까 걱정하지 않으나 未怕惹風霜易凍
다만 따뜻한 날씨에 꽃이 시들까 근심이네49) 只愁迎暖玉成消
이 시는 도산서원이 완성되던 경신(1560)년 60세 때의 작품이다. 퇴계는
계상의 매화 핀 공간을 사랑하였다. 어느덧 매화는 해매다 퇴계의 시냇가
에 주희의 시냇가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퇴계는 이지적이고 낭만적
인 시풍으로 매화를 마음껏 노래하고 있다.
퇴계는 69세에도 다음과 같이 계상의 매화를 읊었다.
소문에 계상의 고향집에 작은 매화나무 聞說溪堂少梅樹
섣달 전에 꽃망울이 가지에 가득하다네 臘前蓓蕾滿枝間
아름다움 간직하며 날 기다림은 좋으나 留芳可待溪翁去
봄추위에 일찍 꽃이 상처 입지 말았으면50) 莫被春寒早損顔
퇴계는 별세하기 1년 전에 선조임금의 간절한 부름에 응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이 시는 이때 한양에 있으면서 계상의 매화를 시 속에 형상화하
고 있다. 퇴계는 계상의 매화를 평생토록 사랑하였다. 퇴계는 주희가 읊은
매화시를 보고 계상의 공간을 만들었다. 주희가 계상에 핀 매화를 시속에
형상화한 것은 공간 감각이며, 퇴계의 계상공간은 퇴계가 만든 인식된 공
간이었다. 퇴계는 계상의 매화를 혹애하며 다양한 상상력을 펼쳤다. 퇴계
49) 退溪先生文集 卷之三, 詩, <梅花>
50)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詩, <己巳正月. 聞溪堂小梅消息. 書懷. 二首>
의 계상의 매화시에는 성리학적 이취와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넘쳐
나고 있다.
3.2.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에 대한 주희의 차운시와 퇴계의 차운시
다음의 시와 시에 대한 보충설명은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에 대한 주희
의 차운시를 비평하고 있다. 이 시는 퇴계가 주희의 매화시를 얼마나 흠모
했는지 그 정황을 명쾌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詠梅> 매화를 읊다
시의 품격이 清癯(맑고 가냘픔)함이 심한 것은 韻格清癯甚
얼음과 찬 서리에 참혹한 상처를 입어서라네 氷霜慘刻餘
일찍이 삼첩시51)에 외람되게 화답하기를 和曾三疊僭
백 그루를 심어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했네 栽尚百株疎
우연히 오랑캐의 피리 곡조에 들어갔으니 偶入小羌笛
변방의 고사의 오두막에 마땅하다네 偏宜高士廬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令人益生厭
장미와 작약이 어지럽게 같이 피려 하기 때문 薇藥欲紛如
주선생께서 일찍이 소동파의 <松風亭梅花詩>에 화답하였는데, “매화
가 스스로 삼첩곡에 들어갔네.[梅花自入三疊曲]”라는 말이 있었다. 대개
동파의 시가 세 편인데 선생이 세 번 화답하여 모두 여섯 편이 되었다. 편
편마다 모두 仙風 道韻이 있어서 매번 한번 음송해보면 사람으로 하여금
훨훨 날아서 구름 밖으로 벗어나게 하는 기운이 있으니 그 흠모하고 사랑
하고 즐겨하는 정을 이길 수가 없다. 나 역시 일찍이 東湖梅에 두 번 화답
하였고, 陶山海에 한 번 화답하였는데, 그 외람되고 망령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范石湖는 石湖의 雪坡에 매화 수백 本을 심었고, 또 范
51) 三疊 : 소식의 ‘매화삼첩시’. 疊詩는 疊韻(같은 운자를 쓰는 것)으로 짓는 시이다.
村에 심은 매화는 더욱 많다. 張約齋52)는 玉照堂에 매화 삼사백 주를 심
었다. 대개 빼어난 아취와 맑은 감상은 그 많음을 꺼리지 않는다. 내가 溪
莊山舍에 매화를 심은 것은 겨우 십여 본인데, 장차 점차 넓혀가서 백본
에 이르게 할 참이다. 그래서 언급한 것이다.[朱先生嘗和東坡松風亭梅花
詩, 有梅花自入三疊曲之語. 蓋坡詩三篇, 而先生三和之, 合爲六篇. 篇
篇皆有仙風道韻, 每一諷誦, 令人飄飄然有凌雲之氣, 不勝其欣慕愛樂之
情. 亦嘗兩和於東湖梅, 一和於陶山梅, 僭妄何可言也. 范石湖於石湖雪
坡種梅數百本, 又於范村種梅尤多. 張約齋於玉照堂植梅三四百株. 蓋
絶致淸賞, 不厭其多也. 余之植梅於溪莊山舍, 僅十餘本, 將漸廣以至百
本也. 故云.]53)
퇴계는 이 시의 창작 배경과 시의 이해를 위해 보충설명을 붙이고 있다.
이 시는 주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퇴계 선생의 이 시와 이 시에
대한 보충설명은 주자의 매화시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자 비평이다. 퇴계는
이렇듯 주자의 시를 철저하게 감상하고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비평하고
차운을 하였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송대에 유행하였던 ’詞‘의 장르이다.
朱子大全에서는 이 차운시를 詞로 분류하고 있다.
이 시를 분석해 보자. 이 시의 首聯은 감상해 내기가 만만치가 않다.
시의 품격이 清癯(맑고 가냘픔)함이 심한 것은 韻格清癯甚
얼음과 찬 서리에 참혹한 상처를 입어서라네 氷霜慘刻餘
52) 張約齋는 張杓이다. 주자가 장표에게 보내는 답장이다. 주자는 장표의 형인 張栻과
서로 도의와 德業을 권하며 교유했다. 장식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주자는
조정에서 충신이 배척당해 쫓겨 가는 현실을 보고 개탄했다. 그래서 병이 심해졌으니
장식을 따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장표에게 충성과 의리가 있으므로
원대한 포부를 펼쳐보라고 당부했다.
53)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詩, <奉酬金愼仲詠梅 三絶句. 一近體>.
여기서 시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시구는 清癯의 품격을 가지고
미학적 비평을 가하며 인과관계 형식으로써 시상을 일으키고 있다. 清癯
즉 맑고 여위다의 품격은 매화가 가지는 이미지가 청아하고 청진하며 淸의
품격을 가지는 것은 이해가 간다. 癯의 품격은 여리고 가냘프고 불쌍하고
애틋하여 여성적 어조나 미인에 비유되는 이미지를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된 이유를 얼음과 찬 서리에 동상을 입은 상처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퇴계의 매화시에는 매화에 대한 동상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
동상의 이미지에는 27세에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한 달
만에 죽은 김해 허씨에 대한 아픔이 함의되어 있다. 퇴계의 매화시에는 매
화가 상처를 입을까 걱정하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주자의 매화시 시
에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주자의 매화시에 등장하는 매화는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와 상처의 이미지가 함의되어 清癯의 품격이 드러난
다. 여기에는 아픈 시대상이 함의되어 있다. 퇴계의 시는 주희의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와 상처의 이미지를 가지고 아내 김해 허씨를 함의하여 승화
시켰다.
스스로 강족의 피리 좋아하여 밤새 즐기고 自欣羌笛娛夜永
추연의 음률 필요 없이 봄 돌아오면 따뜻해지리54) 未要鄒律回春溫
퇴계의 이 시에 나온 강적의 시어는 주희의 시어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기서 퇴계가 소동파의 <송풍정> 시라고 하는 시를 찾아서 주자가 차
54) 朱子大全 권1, 詩, <丑冬 在溫 陵陪敦宗李丈 與一二道人同和東坡惠州梅花詩
皆一再往反 昨日見梅 追省前事 忽忽五年舊詩不復可記憶 再和一篇呈諸友兄一笑
同賦>.
운한 정황을 확인해 본다.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는 다음의 세 시를 가리
키는 것이다. 이 시를 효과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편의상 세 편에 ①, ②,
③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① <十一月二十六日松風亭下梅花盛開> 동짓달 스무엿샛날 송풍정 아
래 매화꽃이 흐드러지다
춘풍령 꼭대기 회남 촌에서 春風嶺上淮南村
옛날에 매화 보고 넋이 나갔었는데 昔年梅花曾斷魂
어찌 알았으리 유랑 길에 다시 볼 줄을 豈知流落復相見
남쪽 오랑캐 땅 비바람 부는 황혼에 수심이 깊네 蠻風蜑雨愁黃昏
여지 나루 쪽 긴 가지는 벌써 반 쯤 떨어졌는데도 長條半落荔支浦
늘어진 가지 광랑의 정원에 홀로 어여쁘구나 臥樹獨秀桄榔園
어째서 그윽한 빛깔 밤 속에 유독 홀로 남는가 豈惟幽光留夜色
아마도 추위 이겨낸 꽃이라 다른 꽃들을 제압하는 게지直恐冷艶排冬溫
송풍정 아래 가시덤불 속에 피어서 松風亭下荊棘裏
두 그루 매화나무 아침 해에 더욱 고와라 兩株玉蕊明朝暾
해남신선 구름타고 어여쁘게 계단에 내려와 海南仙雲嬌墮砌
달 아래 새풀 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 月下縞衣來扣門
술 깨고 꿈에서 깨어나 나무를 돌아보니 酒醒夢覺起繞樹
묘한 뜻 남아있는데 끝내 말할 수 없다오 妙意有在終無言
선생이 홀로 마셨다고 나무라지 말게나 先生獨飮勿歎息
달이 밤새도록 맑은 술 잔과 함께 했으니55) 幸有落月窺淸樽
55) 蘇東坡詩集 卷38
이 작품은 1094년 소식이 60세일 때 외직으로 나가 있던 惠州에서 쓴
것이다. 松風亭은 혜주에 있던 嘉祐寺였는데, 송풍정은 그곳에서 멀지 않
은 곳에 있었다. 이 시는 소식이 해남의 유배시절 지난 날 황주로 유배되어
가던 때를 회고하면서 지은 시이다. 소동파는 “春風嶺上淮南村” 첫 번째
구절 아래 붙여둔 自注에 “내가 지난 날 황주로 유배 갈 때, 춘풍령 위에서
매화를 보고 절구 두 수를 지었다. 다음해 정월 기정으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지었는데 ‘작년 오늘 관산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가는 비 속 매화 보며 넋이
나갔지’라고 하였다.[余昔赴黃州, 春風嶺上見梅花, 有兩絶句. 明年正月
往岐亭, 途中賦詩云 ‘去年今日關山路, 細雨梅花正斷魂.’]”라고 써놓고
있다. 이것은 1079년에 조정을 비방하는 시를 지었다가 1080년에 황주로
유배되던 시절을 회고했다. 춘풍령은 황주 마성현麻城縣을 지나는 곳에
있던 고개 이름이다.
“直恐冷艶排冬溫”에서 ‘冷艶’과 ‘冬溫’을 대립시킨 것은 당대의 구법당
과 신법당이 대립하던 사회상을 풍자한 것이다. 차가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난 매화는 따뜻한 겨울에 피어난 다른 꽃들과는 다르다. 소동파는 차
가운 겨울을 견뎌내고 피어난 매화처럼 온갖 시련을 겪고 유배에서 돌아온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는 소동파의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잘 드
러나 보이는 명시이다. 소식의 이 시는 유명하여 후대 남송의 학자들이 애
송하며 차운하던 시였다. 주희도 이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으며 감상했
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퇴계도 이 시에 화답하였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
시에도 성리학적인 형상사유가 발휘되어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드
러나고 있다.
소동파는 앞 시의 운을 다시 사용하여 또한 수의 시를 지었다. 퇴계는
주희가 이 시를 차운해서 시를 지었던 것을 주목하였다.
② <松風亭下梅花盛開 再用前韻> - 蘇軾(1036∼1101)
나부산 아래 매화촌이 있어 羅浮山下梅花村
옥설은 뼈가 되고 얼음은 혼이 되었구나 玉雪爲骨冰爲魂
분분히 흩날려 처음에는 월계수인가 싶더니 紛紛初疑月桂樹
반짝반짝 홀로 황혼에 기우는 참성과 함께 하네 耿耿獨與參橫昏
선생은 초라한 모습으로 강해 위에 홀로 거하니 先生索居江海上
처량함이 병든 학이 황량한 동산에 깃드는 듯하네 悄如病鶴棲荒園
천향이 미인을 돌아보기를 좋아하니 天香國艷肯相顧
내 술이 익으면 시가 맑고 따사한 것을 알리라 知我酒熟詩清溫
여기 봉래산 궁중의 화조사라 칭하는 蓬萊宮中花鳥使
녹색 저고리 부상나무의 햇살에 거꾸로 걸려 있네 綠衣倒挂扶桑暾
꽃떨기 안고 술 취해 누운 내 모습을 엿보는 듯 抱叢窺我方醉臥
일부러 딱따구리를 보내어 먼저 문을 두드리게 하네 故遣啄木先敲門
마고선녀가 그대를 지나간다고 급히 길을 쓸어놓으니 麻姑過君急掃灑
새는 노래하고 춤추며 꽃들은 서로 속삭이네 鳥能歌舞花能言
술에서 깨니 사람들은 흩어지고 산은 적막한데 酒醒人散山寂寂
단지 떨어진 매화 꽃잎만 빈 술통에 붙어 있을 뿐56) 惟有落蕊黏空樽
주희와 퇴계도 소동파가 다시 운을 차용하여 지은 이 시처럼 두 번째로
화운하여 시를 지었다. 소동파의 매화의 이미지가 주희와 퇴계에 의해 차
용되어 승화되고 있다. 이때부터 廣東增城縣 羅浮山을 가리키는 羅浮라
는 지명은 매화를 지칭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또한 “옥설처럼 흰 몸과 얼음
처럼 차가운 넋[玉雪爲骨冰爲魂]”이라는 구절이 널리 애송되고 있었다.
소식의 이 시는 유명하여 후대 남송의 학자들이 애송하며 차운하던 시였
다. 주희도 이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으며 감상했던 흔적이 나타나고 있
다. 퇴계도 이 시의 ‘나부산’, ‘옥설’, ‘얼음’, ‘혼’, ‘마고선녀’ ‘술통’ 등의 시어
를 가져와서 이 시에 화답하였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도 이러한 시어
56) 蘇東坡詩集 卷38.
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퇴계가 주희의 시를 통해 소동파를 섭렵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난다. 주희와 퇴계는 이들의 시어를 바탕으로 성리학적인
형상사유가 발휘되어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의 미의식이 드러나고 있
다.
소동파는 다시 또 이 시의 운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③ <花落復次前韻> 꽃 떨어지자 다시 앞 운에 차운하여
옥황상제 비가 귀양 와서 보슬비 내리는 마을에 떨어지니玉妃謫墮烟雨村
선생이 시를 지어 혼을 불러 함께하네 先生作詩與招魂
인간의 초목이 나의 상대가 아니니 人間草木非我對
달에서 계수나무 짝하고 달아나 그윽한 저녁을 이루네 奔月偶桂成幽昏
그윽한 향기 문으로 스며들어 짧은 꿈을 찾고 闇香入戶尋短夢
파란 열매 가지에 가득 달고 작은 정원에 머무르네 青子綴枝留小園
옷을 걷고 밤새도록 친구 불러 술 마시니 披衣連夜喚客飲
눈 같은 살결 땅에 가득하니 도리어 따사하네 雪膚滿地聊相溫
솔불을 밝혀 놓고 앉으니 수심에 잠은 오지 않고 松明照坐愁不睡
정화수 들이키니 시원하게 아침 해가 떠오르네 井華入腹清而暾
선생이 내년이면 육십이 되니 先生來年六十化
道眠은 이미 不二문에 들었네 道眼已入不二門
다정한 호사의 여가에 아름다운 기를 습득하니 多情好事餘習氣
안타까운 꽃은 차마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네 惜花未忍都無言
매화만 너무 생각하는 것 나의 허물이니 留連一物吾過矣
백벌백계를 비웃으며 술동이를 비우네 57) 笑領百罰空罍樽
주희도 또 이 시의 운을 사용하여 시를 지었다. 퇴계는 이 두 사람의 시
57) 蘇東坡詩集 卷38.
를 모두 차운하여 또 화답하여 시를 지었다. 이렇게 하여 같은 운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여기에 드러난 시어들을 분석해 보면 소동파는 억울한 누
명을 쓰고 귀양 가는 아픔을 함의 시켰지만 주희는 그의 시대상의 아픔을
함의시켰고, 퇴계는 아내를 잃은 아픔을 함의 시켰다. 이 시의 옥황상제의
아내처럼 귀한 존재의 이미지를 함의한 ‘玉妃’, ‘옥’의 시어들과 죽은 이의
혼을 부르는 ‘招魂’의 시어는 퇴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퇴계는 이 시
어들을 통해 27세의 아리따운 나이에 죽은 아내 김해 허씨의 이미지를 매
화에 투영하는 데 일말의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시를 통해 볼때 주희와
퇴계는 소동파만큼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러나 시속에서는 주희도 퇴계도
각자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폭음을 하며 통한을 설파한다. ‘달’의 이미지
도 소동파가 바라보는 달과, 주자가 바라보는 달과 퇴계가 바라보는 달은
각각 다르지만, 달과 매화를 조화시키는 미의식은 동일해 보인다. ‘달과 매
화’ 이 이미지 속에는 각자의 처절한 그리움이 존재한다.
마지막 연의 “留連一物吾過矣[매화만 너무 생각하는 것 나의 허물]”이
라는 구절에서 혹애의 정황이 드러난다. 퇴계도 매화를 너무 사랑하였고
주희도 매화를 너무 사랑하였다. 매화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을 하는 것도
세 사람은 같지만 그 사랑하는 이유는 각자가 다르다.
이 세 편의 시 때문에 주희는 삼첩이 저절로 시에 들어온다고 하였다.
퇴계가 ‘三疊’이라는 시어에 주목하는 것은 주희의 비평안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에 대한 주희의 첫 번째 화답시는 다음과 같다.
① <和李伯玉 用東坡韻 賦梅花>
이백옥이 동파시에 각운자를 써서 매화를 읊은 시에 화답하다
북풍에 날마다 강촌에 흙비 내리니 北風日日霾江村
돌아가는 꿈 마침 혼백 수고롭히네 歸夢正爾勞營魂
갑자기 매화 꽃술 섣달 전에 터뜨렸다는 말 들으니 忽聞梅蘂臘前破
초나라 나그네 난초 찬 저녁을 사랑하지 않네 楚客不愛蘭佩昏
그윽한 곳 찾아 이 집 오래됨 예전부터 알았고 尋幽舊識此堂古
지팡이 끌고 어쩌다 사찰의 동산에 모였네 曳杖偶集僧家園
짙은 안개에 매화가 완전히 이르지 않았는데 嵐陰春物未全到
다시 만나니 오로지 남쪽 가지에 따뜻함이 邂逅只有南枝溫
차가운 빛 안계와 색계 스스로 비추고 冷光自照眼色界
아름다운 구름 부상에서 해 뜨는 것 겁내지 않는다네 雪艶未怯扶桑暾
운대산 아래 시냇가 길 아련히 알겠는데 遙知雲臺溪上路
매화꽃 활짝 핀 옥나무 십리에 산문이 감추어지네 玉樹十里藏山門
스스로 속세의 굴레에서 떠날 수 없음 불쌍히 여기는데 自憐塵羈不得去
잠깐 아름다운 곳 말하기 어려움 알아서 생각해 보네 坐想佳處知難言
다만 그대 시 읊조려 쓸쓸함 위로하자니 但哦君詩慰岑寂
이미 꽃 앞의 술잔 함께 쓰러진 것 같네58) 已似共倒花前尊
58) 朱子大全 권1, 詞, <和李伯玉用東坡韻賦梅花>
주희는 소동파의 매화시를 매우 사랑하였다. 주희는 동파의 시에 차운하
여 시를 지었다. 이백옥은 李縝의(1109~1164) 자이다. 濟州 巨野사람으
로 參知政事 贈太師 李邴의 아들이며, 호는 萬如居士로 晉江에 우거하였
다. 주희가 동안에서 주부로 있을 때 절친하게 교유하였으며 문집 권92
에 이진에게 지어준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정축년(1157) 겨울
주희가 동안에 있을 때 지은 것이다. 霾는 시경 邶風 ‘終風’에 “종일 바
람 불고 흙비 내리니, 다소곳이 오려하겠는가?[終風且霾 惠然肯來]”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희는 주석에서 “매는 흙비가 내려 캄캄한 것이다[霾, 雨
土蒙霿也.]”라 하였다. 주희는 매화시에 초사를 자주 인용하였다. 초사
<遠遊>에 “하날의 기운과 땅의 기운 한 몸에 싣고 멀리 오름이여, 뜬 구름
가리며 올라간다네[載榮魄而登遐兮, 掩浮雲而上征.]”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희는 주석에서 “영은 형형과 같다. 여기서 말한 형백이라는 것은 음의
영령이 모인 것이 빛을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營, 猶熒熒也. 此言熒魄
者, 陰靈之聚, 若有光景也.)]”라 하였다.
“梅蘂臘前破”는 당나라 두보의 <江梅>에 “매화 꽃술 섣달 전에 터뜨
렸으니, 매화 해 지나면 많아지겠네.[梅蘂臘前破, 梅花年後多.]”라는 구절
에서 나온 것이다. 楚客은 초나라의 三閭大夫로 <離騷>를 읊었던 屈原을
가리켜 말하였다. “不愛蘭佩昏”은 차의에서 “난초를 차는 것이 이미 늦
었으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매화에 비중을 돌린 것
이다. <離騷>에서는 유독 매화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 뜻을 반대
로 하여 말한 것이다.[謂蘭佩已昏 故不愛, 盖歸重於梅花也. 離騷獨不言
梅花, 故反其意而言之.]”라 하였다. 퇴계도 굴원의 이소에 매화를 언급하
지 않는 사실을 들어 역으로 매화를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주희의 초사
집주를 통해 초사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초사의 시어에 대해 주목하는 자
가 많았다. 굴원의 초사 <離騷>에 “집집마다 쑥 허리 가득 참이여, 그윽
한 난초는 찰 수 없다 말하네.[戶服艾以盈要兮, 謂幽蘭其不可佩.]”라는
구절이 있다. 邂逅는 생각지도 못하게 우연히 만남을 말한다. 시경 鄭風
‘野有蔓草’에 “뜻밖에도 서로 만나니, 내 바람 들어맞았네.[邂逅相遇, 適我
願兮.]”라는 구절이 있다.
주희는 소동파의 ‘옥’, ‘그리움’ ‘술’의 의경을 차용하여 우정의 테마 속으
로 시상을 몰고 가고 있다. 주희는 시경을 비롯한 유교경전을 자주 이용
하는 도문일치 문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또 초사에서 점철성금하여
시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매화의 강
인한 정신과 지조와 고결한 절개를 드러낸 것이다.
퇴계가 극찬하여 언급한 주희의 두 번째 인용시는 다음과 같다.
② <與諸人用東坡韻, 共賦梅花, 適得元履書, 有懷其人, 因復賦此以
寄意焉> 여러 사람과 함께 동파시의 각운자를 써서 매화를 읊었는데, 마
침 위원리의 편지를 얻어 그 사람이 생각나서 다시 이 시를 지어 뜻을 부
치다.
나부산 아래 황모촌에 羅浮山下黃茅村
소동파 신선되어 갔어도 시혼은 남아있네 蘇仙仙去餘詩魂
매화는 저절로 삼첩 곡조에 들었는데 梅花自入三疊曲
지금은 오랑캐 땅에 어두운 안개를 않는다네 至今不受蠻煙昏
아름다운 명성 하루아침에 뭇 나무들과 다르고 佳名一旦異凡木
천고의 빼어난 아름다움 아름다운 동산에서 높네 絶艶千古高名園
오히려 얼음 같은 바탕 스스로 따뜻해질 수 없음 어여삐 여기어劫憐冰質不自暖
비록 가리개 있다하나 따뜻하게 하기 어렵다네 雖有步障難爲溫
복사꽃 오얏꽃과 함께 봄색 어여쁘게 함 부끄러워하고 羞同桃李媚春色
감히 해바라기와 아침 햇살을 다투기도 한다네 敢與葵藿爭朝暾
돌아와서는 다만 긴 대나무만 짝하고 歸來只有翛竹伴
쓸쓸하게 스스로 엉성한 울타리 문 닫는데 寂歷自掩疎籬門
또한 참다운 뜻 아직 남아 있음 알겠고 亦知眞意還立在
호연지기 끝내 말하기 어려움 깨닫지 못하네 未覺浩氣終難言
한잔 내게 권하노니 내 얕지 않음이요 一杯勸汝吾不淺
너 맞아 함께 산림의 술잔 지키려네59) 要汝共保山林尊
59) 朱子大全 권1, 詞, <與諸人用東坡韻 共賦梅花, 適得元履書, 有懷其人, 因復賦
此以寄意焉>.
퇴계는 이 시에서 “梅花自入三疊曲”에 대해 비평하고 분석하였다. 元
履는 魏掞之60)의 자이다.
60) 원래 이름은 挺之, 자를 子實이라 하였으며, 건양 사람이다. 주희와 함께 胡憲에게서
배웠으며, 사람들이 艮齋라고 불렀다. 문집 권91에 그를 위하여 지어준 國錄魏公
墓誌銘 이 있으며, 이외에도 제문과 서신, 서발 등이 있다.
羅浮山은 廣州府와 惠州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소식이 일찍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三疊曲은 集注分類東
坡先生詩 권14에 같은 운자를 써서 매화를 읊은 시 세 수가 나란히 수록
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11월 26일 송풍정 아래에 매화가 풍성하게 피다
[十一月二十六日松風亭下梅花盛開]>와 <다시 앞 시의 각운자를 쓰다
[再用前韻]>, <꽃이 져서 다시 같은 각운자를 쓰다[花落復次韻]>이다.
원문은 ‘三疊’으로, <三疊曲>을 이른다. 본디 당나라 王維( 699~761)의
<安西로 사신 가는 元二를 전송하며[送元二使安西]>를 주요 가사로 하
는 琴曲 詞牌의 이름으로, 陽關三疊, 또는 陽關曲이라고도 한다. 곡 전체
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왕유의 원시를 세 번 반복하여 부르기 때문에 ‘三
疊’이라 이름하고, 원시의 내용 중에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벗이 없으리
니[西出陽關無故人]”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陽關’이라 이름한 것이다. 여
기서는 이별 노래를 통칭하는 말로 쓰였으니, 烈士가 大義를 실천하기 위
해 친지와 이별하는 내용의 비장한 노래를 뜻한다.
퇴계는 소동파의 시와 주희의 차운시를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퇴계가 말한 주희의 세 번째 차운시는 다음과 같다.
③ <丁丑冬, 在溫陵, 陪敦宗李丈, 與一二道人同, 和東坡惠州梅花詩,
皆一再往反, 昨日見梅, 追省前事, 忽忽五年舊詩不復可記憶, 再和一篇
呈諸友兄一笑同賦> 정축년 겨울 온릉에서 돈종이장을 모시고 한 두 도
사와 함께 소동파가 해주에서 지은 매화시에 화답하고 모두 몇 번이나 반
복하였는데, 어제 매화를 보고 성 앞에서의 일을 추억해 보니 문득 오년
전의 옛 시를 거듭 기억할 수 없어, 다시 한 편을 화답하여 여러 친구들과
형님들께 받치니 한바탕 웃고 함께 짓다.
강매61)가 강촌 마을에 피려는데 江梅欲破江睨村
꽃다운 넋62) 불러도 함께 할 사람 없네 無人解與招芳魂
북방 구름 벌 나비의 소식 끊고 朔雲爲斷蜂蝶信
찬비는 안개와 먼지 낀 저녁을 한바탕 씻네 凍雨一洗煙塵昏
하늘은 빼어난 미인이 세상에 짝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겨天憐絶艶世無匹
적막한 데 보내어 산 정원에 의지토록 하네 故遣寂寞依山園
스스로 오랑캐 피리 좋아하여 밤새 즐기고 自欣羌笛娛夜永
추연의 음률 필요 없이 봄 돌아오면 따뜻해지리63) 未要鄒律回春溫
가냘픈 몸매로 물에 비친 새벽달 들여다보는데 連娟窺水墮殘月
또렷이 반짝이는 눈물 젖은 이슬 새벽 먼동 틀 때 마르리的皪泣露晞晨暾
온릉의 맑은 놀이에 옥 같은 도사의 얼굴 기억하는데 海山淸游記玉面
쇠약하고 병 많은 이 날 사립문이 쓸쓸하네 衰病此日空柴門
서로 만나도 옛적의 일들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 相逢不敢話疇昔
시 짓는다고 어찌 반드시 모두 말을 만드리오 能賦豈必皆成言
애써 조탁하는데 오장육부에 뭐가 유익 하겠나 雕鐫肝腎竟何益
하물며 다시 술 끊고 빈 술잔만 읊조리리64) 況復制酒哦空尊
61) 강매 : 江梅는 일종의 '야생 매화‘를 가리킨다. 송대 범중엄의 范村梅譜에서"강매
는 씨앗이 떨어져 들에서 난 것으로 재배와 접종을 거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直脚
梅라고도 부른다.
62) 招芳魂 : ‘꽃의 혼을 불러 돌아오게 하다'는 의미이지만, 그 매화로 하여금 ‘꽃피게
하다‘ 는 뜻이다. 소동파는 <꽃 떨어져 다시 앞의 운에 따라 짓다[花落復次前韻]>라
는 시에서 “太眞妃가 안개비 내리는 마을에 내려오매 선생은 시를 지어 혼을 불러주
네.[玉妃謫墮煙雨村, 先生作詩與招魂.]”라고 했다.
63) 鄒律回春溫 : 추연은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해서 음율을 불면 땅을
따뜻하게 할 수 있어서 벼와 기장이 자생하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64) 朱子大全 권1, 詞, <與諸人用東坡韻 共賦梅花, 適得元履書, 有懷其人, 因復賦
이상으로 퇴계가 언급한 주희가 소동파의 매화시 세 편을 읊었다는 것
을 확인해 보았다. 이 시에서 주자는 소동파의 ‘강촌의 매화’, ‘꽃다운 넋’,
‘그리운 사람의 소식’, ‘빼어난 미인’, ‘술’ 등의 의경을 차용하여 낭만적인
시풍을 드러내었다. 퇴계는 이 주자의 차운시에 대해 선풍도운이 넘치는
구절이라고 극찬했다. 소동파의 시에서 나타나는 신선사상이 퇴계는 도운
이 있다고 하여 성리미학으로 물들이고 있다. 퇴계는 도합 6편이라고 하였
다. 이 언급 속에는 소동파의 매화시 세 편과 주희의 매화시 세 편의 의경
을 차용하여 시를 짓겠다는 형상사유가 드러나고 있다. 퇴계가 이 여섯 편
을 중심으로 보되 주희의 차운시 3편을 외람되게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고
하고 있다. 그 세 편을 찾아 감상해 보자.
퇴계가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를 차운한 첫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① <湖堂梅花暮春始開, 用東坡韻. 二首>
내가 옛날 남방에서 매화촌을 찾았더니 我昔南遊訪梅村
바람과 안개 매일같이 魂을 읊어 녹였네 風烟日日銷吟魂
땅 끝에서 홀로 맞아 경국색을 찬탄하고 天涯獨對歎國艷
역로에서 매화 부치며 속세의 어둠 슬퍼했네 驛路折寄悲塵昏
서울에 온 이래로 간절히도 그리워서 邇來京輦苦相憶
맑은 꿈은 밤마다 정원으로 날아갔네 淸夢夜夜飛丘園
여기가 서호일 줄 어떻게 알았으랴 那知此境是西湖
우연히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정다워라 邂逅相看一笑溫
꽃다운 맘 고즈넉이 늦은 봄에 피어설랑 芳心寂寞殿殘春
옥빛 자태 아름다이 돋는 해를 맞이하네 玉貌婥約迎初暾
학을 짝한 높은 선비 산에서 나오지 않고 伴鶴高人不出山
연 사양한 정숙한 여인 항상 문을 닫고 있네 辭輦貞姬常掩門此以寄意焉>.
하늘이 복사와 살구를 매화보다 늦게 피게 한 뜻 天敎晩發壓桃杏
이 묘한 의미를 시인인들 다 말하지 못하리니 妙處不盡騷人言
아름다운 그 모습 철석간장이 방해 되리오 媚嫵何妨鐵石腸
병든 몸이 술병 들고 찾아감을 사양 말라 莫辭病裏携甖罇65)
퇴계는 이 시를 소동파의 시에 직접 차운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희의 차
운시를 다시 차운한 시이기도 하다. 퇴계는 차운의 형식 위에 ‘매화촌’, ‘미
인’, ‘혼’, ‘술’ 등 소동파의 시어들을 가져 와서 그 이미지에다가 자기의 매
화에 대한 정서를 형상화했다. 퇴계의 매화시에는 그리워하는 사람이 형상
화되고 있다. 퇴계가 44세 때 호당에서 매화를 보며 지은 시에 나타나는
酷愛는 소동파와 주희에게서 영향을 받은 정황이 있다. 이 시의 첫 구절
남방의 매화촌은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형상이지만 여기서 대치시킨 의경
은 옛날 의령 백암촌 아내의 고향집 주변의 매화정원이다. 퇴계는 아내 김
해 허씨와 매화 정원에서 노닐던 옛 추억을 되새기며 소동파의 남방의 매
화촌을 연상시킨다. 톼계는 이곳에서 아내 허씨를 그리면서 매화시 10수를
연작시로 지었다. 퇴계는 33세 때 지었던 매화시의 기억을 다시 이어간다.
그 때 각인된 아내의 이미지가 함의된 매화이다. 퇴계가 아내의 고향집 의
령 백암촌의 매화 정원에서 맹세했던 사랑이 소동파의 지나친 사랑이란
이미지에서 차경하여 혹애로 이어진다. 이 시에서는 그 당시 상황이 재현
된다. 다음의 구절이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서울에 온 이래로 몹시도 그리워서 邇來京輦苦相憶
맑은 꿈은 밤마다 정원으로 날아갔네 淸夢夜夜飛丘園
65) 李滉,退溪先生文集 권1, 詩, 湖堂梅花暮春始開用東坡韻 , 二首 春赴召後.
주희와 소동파의 매화시에서도 그리움이 깔려있다. 이 시구에 함의된 몹
시 그리운 그리하여 밤마다 꿈을 꾸는 화자의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의령
백암촌에서 매화의 이미지에 함의 되었던 아내 김해 허씨 그 사람이다. 퇴
계는 남방촌에서 매화를 읊은 시상을 이어 밤마다 의령 백암촌 정원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다음의 시구는 다양한 이미지가 함의된 연상 작용
으로 묘사한 오묘한 표현이다.
여기가 서호일 줄 어떻게 알았으랴 那知此境是西湖
우연히 서로 만나 한 번 웃음 정다워라 邂逅相看一笑溫
퇴계는 서호에 은거하여 매화를 아내로 삼았던 임포를 尙友千古하여 벗
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퇴계는 매화 속에서 아내 허씨를 떠올린다. 퇴계는
임포가 매화를 아내 삼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죽은 아내를 떠올린다.
하늘이 복사와 살구를 매화보다 늦게 피게 한 뜻 天敎晩發壓桃杏
이 묘한 의미를 시인의 말로는 다하지 못하리라 妙處不盡騷人言
퇴계는 소동파와 주희의 매화 속에 다양한 이미지가 함의되어 있음을
선언하였다. 이 시는 많은 논문에서 분석되었지만, 학자들의 견해 속에 행
해진 분석과 이해는 너무도 성글었다.
퇴계가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에 차운한 두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② <湖堂梅花暮春始開, 用東坡韻. 二首>
묘고산의 신선이 눈 내리는 마을에서 藐姑山人臘雪村
형상을 단련하여 매화의 혼이 되었다오 鍊形化作寒梅魂
바람 불고 눈에 씻겨 본모습을 드러내니 風吹雪洗見本眞
천연의 옥빛 자태 어둔 세상 초탈했네 玉色天然超世昏
고상한 정조 여러 꽃의 시세움에 들지 않고 高情不入衆芳騷
고산의 동산에서 천년 뒤에 한 번 웃네 千載一笑孤山園
세상사람 몰라보니 심제량과 같단 말가 世人不識嘆類沈
나 홀로 기뻐하네 온백설자 만난 듯이 今我獨得欣逢溫
정신 맑고 뼈가 차매 스스로 깨닫나니 神淸骨凜物自悟
지극한 도 거짓 없이 노을 햇빛 먹는다네 至道不假餐霞暾
어젯밤 꿈속에서 흰옷 입은 선인 만나 昨夜夢見縞衣仙
하얀 봉새 함께 타고 하늘문에 날아가서 同跨白鳳飛天門
섬궁에서 옥절구로 찧은 약을 달랬더니 蟾宮要授玉杵藥
직녀가 인도하여 항아에게 말하더라 織女前導姮娥言
깨어나매 그 향기가 옷소매에 가득하여 覺來異香滿懷袖
달 아래서 가지 잡고 술병을 기울인다 月下攀條傾一罇66)
퇴계는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묘고야산의 이미지를 차용하였다. 퇴계는
매화를 藐姑射山의 神人에 비유하고있다. 《장자》 <逍遙遊>에 “묘고야
산에 신인이 사는데 ‘살결은 빙설과 같고[肌膚若氷雪]’ 오곡을 먹지 않으
며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빙설과 같다는
말에서 유래하여 매화를 비유하는 시어로 姑射가 많이 쓰인다. 동파와 주
자의 시에 藐姑射山의 神人이 드러난다. 퇴계는 주희의 시에서 이 시어를
포착한 흔적이 드러난다. 다만 퇴계의 시에 나타난 이 藐姑射山의 神人에
비유한 사람은 바로 선계에 가 있는 퇴계의 아내 허씨 부인이다. 주희가
그랬듯이 퇴계는 매화시 속에서 仙界를 자주 그려내고 있다.
호당에서 지은 이 두 수에서 형상화된 정인의 이미지는 옛날 아내의 고
66) 李滉, 退溪先生文集 卷之一, 詩, <湖堂梅花。暮春始開。用東坡韻。二首>, 春
赴召後.
향집 주변에 핀 매화의 이미지였다. 그때 그렇게 맹세하던 사랑의 매화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다시 읊는다. 바로 그 사람. 퇴계의 아내
허씨.
퇴계는 소동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주자가 차운했던 것처럼 ‘달과
매화’를 연상시키며 ‘술’로써 카타르시스를 이루어 낸다.
퇴계가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 그 세 번째 차운은 다음과 같다.
③ <節友社梅花暮春始開. 追憶往在甲辰歲在東湖賞梅, 用東坡韻賦
詩二首, 忽忽十九年矣. 因復和成一篇以示同舍諸友. 從來思舊感今之
意云> 절우사 매화가 늦봄에 비로소 피었다. 지난날 갑신년 동호에서 매
화를 감상하며 동파의 운자로 두 수의 시를 지었던 것을 추억하니 문득
19년이 흘렀다. 다시 한 편을 차운하여 같이 지내는 여러 벗들에게 보인
다. 옛 생각으로 인하여 지금 느낀 뜻을 쓴다.
푸른 봄이 교남의 향촌에 저물려 하는데 靑春欲暮嶠南村
여기저기 도리는 사람 혼을 미혹하게 하네 處處桃李迷人魂
눈에 분명 들어오는 천지에 외로운 나무 서 있는데 眼明天地立孤樹
한 떨기 흰 꽃이 뭇 꽃들의 어둠을 씻어주니 一白可洗群芳昏
풍류는 눈 내리는 섣달도 상관하지 않네 風流不管臘雪天
품격이 더욱 아름다워 봄 동산에 빼어나니 格韻更絶韶華園
도산의 경계에서 옛 신선 몇을 감상하네 道山疇昔幾仙賞
스무 해 거듭 봐도 기쁜 빛 따사롭네 卄載重逢欣色溫
바람에 휘날리며 서호의 짝이 되어 臨風宛若西湖伴
달 아래 노닐다가 날 새는 줄 몰랐다네 對月不覺東方暾
날 더러 묻는 말이 어이 이리 여위신고 問我緣何太瘦生
이 늙은이 오래도록 雲巖에 은거했네 白首長屛雲巖門
이때까지 내 절로 연하에 병이 있어 向來自有烟霞疾
지금까지 난초 향기의 속삭임을 얼마나 기다렸나 今者何須蘭臭言
하늘 가 그 사람 볼 수 없으니 天涯故人不可見
너와 함께 날마다 마실 술동이가 어찌 없겠나67) 與爾日飮無何樽
퇴계도 소동파와 주자의 시를 감상하고 그 운자의 형식 위에 도산의 매
화에 다시 한번 더 화답하였다. 퇴계는 소동파와 주희의 시에 차운하여 지
었던 동호의 매화를 상상하며 19년이 지난 뒤에 도산의 매화를 보고 시를
창작하였다. 이 시에서도 퇴계는 달과 매화 그리고 술의 낭만적인 이미지
들을 가져와 마음껏 시상을 펼치고 있었다. 퇴계는 아내 허씨를 그리워하
며 매화를 지나칠 정도로 혹애하고 있다. 아마도 퇴계는 소동파와 주희의
매화시를 상상하며 그 의경을 빌어 와 그리운 아내 허씨를 상상했던 것
같다. 퇴계가 죽은 아내 허씨를 그리며 아내가 즐겨 보던 처가의 매화 정원
에서 10수의 연작시를 지은 것은 이미 말했거니와 그 시에 형상화했던 아
내 허씨의 기억은 지울 수가 없었다. 퇴계가 죽음에 임하여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고 했던 그 매화에 품은 사랑은 그리운 아내 허씨의 형상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은 이전 논문에서 밝혔다.68) 퇴계는 이 시에서
도 소동파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주자가 차운했던 것처럼 ‘달과 매화’를
연상시키며 ‘술통’으로써 폭음하며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고 있다.
이상으로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에 얽힌 주희의 차운 시와 퇴계가 이들
의 시를 극찬하며 지은 세 편의 차운시를 분석하여 주희의 매화시가 퇴계
의 매화시에 미친 영향관계를 분석해 보았다.
67) 退溪先生文集 卷之三, 詩, <節友社梅花…>
68) 신두환, 2017, 앞의 논문.
3.3. 퇴계의 주자 매화시 수용양상 분석
주희는 <존경하는 원범 형이 십매시 를 보여주었는데, 풍격이 청신하
고 의기가 심원하였다. 여러 날 동안 완미함에 화답하고자 하였으나 할 능
력이 없었는데, 어제 저녁 백록 옥간에서 돌아오다가 우연히 몇 구절을 지
었다[元範尊兄示及十梅詩, 風格淸新, 意寄深遠. 吟玩累日, 欲和不能, 昨
夕自白鹿玉澗歸, 偶得數語]>69)를 지었다. 이것을 줄여서 주희의 <십매
시>라고 한다. 주희의 십매시는 매화시의 걸작이다. 그 제목들만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江梅>, <嶺梅>, <野梅>, <早梅>, <寒梅>, <小梅>,
<疎梅>, <枯梅>, <落梅>, <賦梅>. 주희는 매화를 종류별로 나누어 읊
었다. 이 시도 나름 절구 열 편이다.
퇴계도 <再訪陶山梅 十絶>에서 절구 열 수를 지었다. 소동파의 <십매
시>가 그 중심에 있지만 그 중에 한 수에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파선의 절구 열 편과 세 편의 사70)가 있으니 坡仙十絶與三詞
유독 서호 임화정만 매화를 읊은 것은 아니네 不獨西湖作已知
하물며 자양의 주자 시(풍아) 짓는 솜씨 있으니 況有紫陽風雅手
장시로 읊고 절구로 감탄하길 마음으로 기약하네71) 長吟絶歎寓心期
동파의 매화시는 십매시와 앞에서 살폈던 송풍정매화시 세 편이 있다.
송풍정매화시는 송대 유행했던 ‘詞’이다. 소동파의 매화시는 이지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형식은 같지만 그 내용은 서로 달랐다. 퇴계와 주희
의 매화시는 묘하게도 그 결이 같다. 퇴계는 또 서호주인 임포를 매화시의
대표 작가로 보고 있다. 梅妻鶴子의 임포를 퇴계는 상우천고하였다. 그리
69) 朱子大全 권7, 詩.
70) 소식의 次楊公濟梅花十絶 과 송풍정매화시 三疊을 말한다.
71) 退溪先生文集 卷之四, 詩, <再訪陶山梅十絶>.
228 淵民學志․第32輯 (2019)
고 퇴계는 자양의 주자를 매화시 작가로 부각시키며, 소동파, 임포, 주희를
매화시의 대표작가 반열에 올렸다. 중국 문학사에서 송대 매화시 작가로
주희를 손꼽는 사람은 퇴계가 최초이다. 퇴계는 이 시에서 시경의 매화
시에 버금갈 風雅의 작가로 매화시 짓는 솜씨가 있다고 주희의 매화시를
주목하고 있다. 퇴계는 결구에서 장편시와 절구로 주희의 매화시를 따라
열심히 매화시를 짓겠다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철저하게 본받고 있다.
주희가 주목했던 또 다른 소동파의 시는 다음과 같다. 주희는 이 시의
운자를 활용하여 시를 지었다.
<岐亭道上見梅花戲贈季常>
岐亭의 노상에서 매화를 보고 장난삼아 지어 季常에게 준 시
혜초 난초 다 죽고 국화 또한 꺾였으니 蕙死蘭枯菊亦摧
반혼향이 고개 마루 매화로 들어오네 返魂香入嶺頭梅
몇 가지 죽은 가지 바람 불어 다하니 數枝殘綠風吹盡
한 점 꽃 같은 마음 참새소리에 피어나네 一點芳心雀啅開
시골 주점에서 죽엽주를 처음 맛보고 野店初嘗竹葉酒
강구름 떨어지려 하자 콩대를 태우네 江雲欲落豆稭灰
가던 길 다시 향하니 꽃봉오리가 보이고 行當更向釵頭見
병에서 일어나니 검은 구름 바야흐로 언덕에 피어나네72)病起烏雲正作堆
주희는 蘇軾의 <岐亭의 노상에서 매화를 보고 장난삼아 지어 季常에게
준 시>에 차운하였다. “반혼향이 영남의 매화로 들어갔네.[返魂香入嶺南
梅]”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 “李夫人이 죽자 漢武帝가 몹시 그리워한 나머
72) 蘇東坡詩集 卷12.
지 方士로 하여금 반혼향을 만들게 하여 피우니, 이 부인이 강림하였다.”라
고 하였다. 서쪽 바다 끝에 聚窟洲가 있고 그 위에 返魂樹가 있는데, 그
나무 뿌리를 솥에 고아서 즙을 낸 뒤 반혼향이라는 丸藥을 만들어 죽은
이의 코에 대면 起死回生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上》 叉頭는
비녀의 머리 부분을 뜻하는 釵頭로, 가지 끝에 처음 돋아난 뾰족한 꽃망울
을 묘사한 것이다. 퇴계는 이 시에서 사용된 운자와 의경을 차용하여 아내
김해 허씨를 그리워하며 매화시 속에 형상화하였다.
주희는 다음과 같이 지었다.
<次韻雪後書事 二首>눈 온 후 일을 쓰다
몇 그루 매화나무 있는 쓸쓸한 강가를 惆悵江頭幾樹梅
지팡이 짚고 맴돌며 갔다가는 다시 오네 杖藜行遶去還來
저번에 눈 덮여 찾을 곳 없었더니 前時雪壓無尋處
지난 밤 밝은 달에 매화는 의구하네 昨夜月明依舊開
멀리 어여쁜 사람에게 꺾어 보내니 사람은 옥과 같고 折寄遙憐人似玉
서로 그리워하는 한은 재처럼 영원토록 사라지리라 相思應恨劫成灰
황혼에 조용히 읊으니 까막까치 날아오르는데 沈吟日落寒鴉起
나는 도리어 사립문 바라보며 홀로 돌아오네 卻望柴荊獨自回
주희는 소동파의 매화시를 섭렵하고 소동파의 시운을 사용하여 시를 짓
고 있는 정황이 파악되었다. 이 시는 동파의 시운을 사용하여 시를 지었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은거의 정취가 드러나고 그리움과 한가로운 정취가 드
러나고 있다. 특히 매화 가지를 꺾어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이미지는 주희
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주희가 매화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리
움 때문이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순수하고 고결하고 지조와 정조에 대한
주제의식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매화와 인품이 서로 교융하고 있다.
퇴계도 이 ‘來’자운을 활용하여 절구시를 지었으며, 주희가 추구하는 정서
를 퇴계도 추구하고 있다. 퇴계와 주희의 매화시는 그 결이 같다. 다음의
시는 이 시와 통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망호당 밑에 한 그루 매화 望湖堂下一株梅
몇 번이나 봄을 찾아 말을 타고 왔던가 幾度尋春走馬來
천리 가는 길에 그대 저버리기 어려워 千里歸程難汝負
문 두드려 다시 찾아 술 취해 누웠다네73) 敲門更作玉山頹
‘來’의 운은 소동파와 주자의 즐겨 사용한 운이다. 퇴계도 이 운자를 즐
겨 사용했다. 玉山頹는 술에 취해 쓰러지는 것으로 嵇康이 술에 취하면
옥산이 무너지는 듯하였다고 했다. 망호당은 한강 주변 독서당의 부속 건
물이다. 이곳에 있는 매화는 퇴계가 해마다 보아오던 그리운 매화이다.
1545년 을사사회가 일어나자 퇴계는 물러날 뜻을 굳히고 1546년 2월에 귀
향을 결정한다. 퇴계와 매화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된 것인가? 퇴계는
이 매화에게 맹세한 뜻이 있었던 모양이다. 퇴계는 이 약속을 저버리기가
어려웠다. 그가 남쪽으로 떠나는 날에 막 꽃이 피어나는 매화를 만나 서로
정을 소통하고 있다. 퇴계는 술을 가지고 찾아가서 서로의 회포를 풀어낸
다. 퇴계는 매화를 아리따운 여인의 이미지로 의인화하고 있다. 玉山頹는
술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다. 퇴계는 매화를 향해 혹애와 폭음
으로 일관하고 있다. 옥산퇴처럼 “혜강의 자태가 마치 외로운 소나무가 홀
로 선 것처럼 빼어나 그가 술에 취해서 넘어지면 옥으로 된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이 매화를 보지 않고 남쪽으로 먼 길을 떠날 수
73) <望湖堂尋梅(丙午仲春。將歸嶺南)>.
없어, 다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가서 폭음하며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고 있다.
퇴계는 주희처럼 매화에 그리움을 실었다.
퇴계는 주희의 이 시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남북을 가지고 선후로 나누지 않고 不將南北分先後
처음과 끝을 잡기를 좋아하면 같고 다름이 있다네 肯把初終有異同
매화를 꺾어 멀리 보내는 사람 옥과 같다는 折寄遙憐人似玉
회암의 시구는 깊은 속마음을 표현한 것74) 晦庵詩句表深衷
퇴계는 주희의 시구 “멀리 어여쁜 사람에게 매화를 꺾어 보내는 사람은
옥과 같다.[折寄遙憐人似玉]”를 그대로 시 속에 인용하고 있다. 이 시구는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렇듯 주희의
매화시를 세밀히 감상하고 분석하고 있다.
퇴계의 다음 시 <再用前韻 答景說>도 운자를 주목해 보라.
호수 가에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들었는데 聞道湖邊已放梅
은 안장의 호탕한 객은 일찍 오질 않네 銀鞍豪客不曾來
홀로 초췌하게 남으로 가는 사람 가련하니 獨憐憔悴南行子
그대와 함께 한 번 취하고자 저물도록 마시네75) 一醉同君抵日頹
퇴계도 소동파와 주자가 즐겨 쓰는 ‘來’자 운을 즐겨 쓰면서 주희의 영향
을 받고 있다. 이 시에서도 매화와의 이별과 폭음이 드러나고 있다. 퇴계의
매화에 대한 지나치리 만큼 사랑하는 혹애의 정황은 주목해 보아야 한다.
퇴계는 해동의 주자로 일컬어진다. 주자대전에는 매화에 대한 시들이 듬
74) 退溪先生文集 外集, 卷一, 詩, <再訪陶山梅十絶>.
75) 退溪先生文集 卷一, 詩, <再用前韻 答景說>.
뿍 들어있다. 주희가 매화를 사랑한 것은 특별하였다. 주희의 매화에 대한
시상은 퇴계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가 소동파의 운을 딴 것이 많았던 것을 주목하고,
주희의 동파운 매화시에 차운을 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 “편편
이 모두가 선풍도운이 있었다.”고 하였다. 매양 한 번씩 읊고 나면, 구름
밖으로 벗어나는 기운 그 흠모하고, 愛樂하는 정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 깊이 심취 했으며, 곳곳에 주희의 매화시를
엿보며 지은 시들이 수두룩하다.
빽빽한 대나무 처음 오는 눈에 놀라고 竹密初驚雪
성긴 매화 오히려 추위 견뎌내네76) 梅疎劫耐寒
꽃 곁에서 구리거울 마주 짝하니 花邊偶對靑銅鏡
마른 가지 빛나는 눈 얼음 이기지 못하네77) 槁項不堪冰雪映
주희는 추위를 이기는 강인한 매화의 이미지를 자주 드러내고 있으며
자주 매화가 추위에 얼어서 다음 해에 꽃을 피우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것
들이 있다. 이러한 주자의 매화시의 이미지들은 퇴계에게서도 그대로 드러
나고 있다.
신선의 얼음과 눈같이 결백한 자태 仙人冰雪姿
곧고 빼어남 견줄 수 없네 貞秀絶倫擬
역리를 어찌 들어서만 알겠는가 驛使詎知聞
향기 찾아 안개 낀 강물에 묻네78) 尋香問煙水
76) 朱子大全 卷1, 詩, <次韻彦采病中口占>.
77) 朱子大全 卷1, <次張彦輔賞梅韻>.
또 주희는 매화를 보러 가려고 약속을 했으나 약속을 못 지킨다는 내용
의 시들이 드러나는데 퇴계의 매화시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주희는 눈 속의 매화를 묘사하면서 눈과 서리가 매화의 개화를 방해하는
이미지를 자주 등장 시키는데 이것은 퇴계의 시에서도 드러나는데 세태의
풍자와 결부된다. 주희의 시에는 매화를 죽은 여인의 혼에 비유되기도 하
고 그리운 사람에 비유되어‘ 꽃다운 넋, 초혼의 이미지들이 자주 나타나며,
매화를 부쳐주는 驛吏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특히
주자는 초나라의 초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퇴
계도 이 초혼의 이미지를 계승하여 주희보다도 더 그리움과 혹애로 나타난
다. 퇴계에게는 주희보다도 더 안타까운 죽은 아내 허씨의 기억이 있다.
퇴계의 매화시의 특징은 혹애이다. 퇴계는 아리따운 나이에 죽은 아내 허
씨를 매화 속에 투영시키고 평생 동안 매화를 혹애한 것이 독특한 정황이
다.
주희의 매화시와 퇴계의 매화시의 영향 관계 속에는 긴밀하고 밀접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퇴계의 매화시 속에는 주희의 매화시에서 감명 받은
시어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희가 매화시에 이렇게 집중한 것은 임포를 비롯한 소동파 등 송대에
와서 매화가 성리학적 예술철학을 통해 절개와 정조의 상징성이 강조되었
기 때문이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비유와 상징이 들어있고 다양한 중의가
겹쳐서 오묘한 성리학의 미의식이 함의되어 있다.
얼었던 계곡이 흘러 벌써 오열하고 冰溪流已咽
응달진 산마루엔 차가움이 아직도 맺혀있네 陰嶺寒方結
갑자기 이른 매화에 봄이 닥치니 忽値早梅春
아직 꽃망울 없는 것 두려워 않네 未恐芳心歇
새하얀 꽃 마침내 저렇게 고우니 的皪終自姸
은근한 마음 누굴 위해 꺾어 보낼까? 殷勤爲誰折
천리 먼 그리운 사람에게 부치면 千里寄相思
그리운 사람에 대한 걱정 비로소 멈추겠지79) 相思政愁絶
이 시의 시안은 咽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계곡의 시냇물이 벌써 녹아
서 흘러내리는 소리가 시끄러운 것을 오열한다고 의인화 시켜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응달진 산마루엔 눈이 녹지 않고 얼어있다
는 것을 結자의 운자로 절묘하게 대를 맞추며 시상을 일으키는 서두로서
멋진 표현이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이른 매화에 봄이 엄
습하였으나 꽃망울이 아직 맺히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추위에 언 매화나
무는 과연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직도 쉬고 있는 매화나무에 비로소 새
하얀 매화 꽃망울이 또렷하게 피어나온다. 이 매화 가지를 누구에게 꺾어
보낼까? 아마도 몹시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그 그리운 사람에게
저 매화 가지를 꺾어 보내면 그리운 사람에게 대한 걱정이 아마도 덜어지
겠지라고 상상한다. 성리학자들의 시는 가끔 시상이 일반시인보다도 더 격
정 적인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조의 태도와 사유의 폭이 깊고 넓어 더욱
오묘하고 절묘한 표현들이 나타난다. 형식보다도 내용의 심오함이 더욱 우
세한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시는 선경후정의 미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묘사구조로서 조금도
理의 색채가 함의되지 않은 순수한 정감의 세계를 잘 표현하였다. 주희는
매화를 우정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
주희의 매화시의 주제의식에는 우정을 상징하는 것이 많다.
79) 朱子大全 卷1, <懷山田作二首, 梅花>.
시냇가 차가운 매화 이미 피었을 텐데 溪上寒梅應已開
옛 친구 한 가지도 부쳐오지 않네 故人不寄一枝來
하늘 끝에 어찌 향기로운 것 없으리오만 天涯豈是無芳物
그대를 위해 사심 없이 술잔 향하네80) 爲爾無心向酒杯
안개비 내리는 때 강가에서 술잔 잡으니 把酒江頭煙雨時
강변의 나무에 봄이 한창임을 멀리서도 알겠네 遙知江樹已芳菲
불쌍하구나, 지친 나그네 오두막집 안에서 應憐倦客荒茅裏
매화꽃 다 졌는데도 아직 돌아가지 못하네81) 落盡梅花未得歸
이른 매화가 지금 성대하게 늦게야 피어나니 早梅方盛晩初開
진달래 살구꽃이 어지럽게 나를 쫓아오네 鵑杏紛紛趁我來
향기로운 꽃은 십일을 못 간다고 말하지 마오 莫道芳菲無十日
오래 머물러 마땅히 또 다른 봄을 돌아오게 하네82) 長留應得別春回
주희가 벼슬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와서 타향에서 보낸 적이 많았다.
주희는 고향의 매화, 두고 온 매화, 추위에 상하지 않을까 하는 매화에 대
한 걱정이 많았다. 퇴계 역시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벼슬하며 비슷한 정황
이 겹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읊으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읊은
매화시들은 그 이미지를 가져온 것이 더러 있었다. 퇴계는 주희의 시구에
서 가져온 시어들을 점철성금시킨 흔적들이 나타난다. 이 외에도 퇴계의
매화시는 주희의 매화시에서 영향 받은 바가 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
다.
80) 朱子大全 卷1, <梅花兩絶句 二首>.
81) 朱子大全 卷1, <寄諸同寮>.
82) 退溪集 內集 卷5, <暮春歸寓陶山精舍記所見>.
4. 결론
이상으로 주희의 매화시를 바탕으로 퇴계의 매화시를 비교 분석해 보았
다.
朱子大全에 실린 주희의 매화시는 총 70여 수이며, 퇴계는 朱子大
全을 통하여 주희의 매화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평하였다. 퇴계의 매
화시의 미의식에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입은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
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퇴계는 매화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였고, 매화에 대한 시를 117수나 지었다.
주자의 시와 퇴계의 시는 박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하는 경향
이 짙다. 퇴계는 자연에 대한 즉흥적인 공간 감각보다는 도학의 공부를 통
해 얻어낸 지식을 바탕으로 인식된 공간이 많다. 퇴계의 계상 매화는 그
분위기가 주희의 계상 매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퇴계의 매화시는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았으며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과
정에서 퇴계의 매화시가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끼쳤다는 정황이 포착되
었다. 퇴계의 매화시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희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통찰하였으며, 그 공
간을 본받고 싶어했다. 퇴계는 계상에다가 매화를 심고 주자처럼 그 공간
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주희의 매화공간은 자연적인 공간 감각이었으나 퇴
계의 계상의 매화 공간은 인식된 공간이었다. 곡ㅇ간 감각과 공간 인식은
차이가 나는 것이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모방하면서도 그 주제의식은
달랐다. 퇴계의 매화시에는 아리따운 나이에 죽은 아내 허씨의 형상이 함
의되어 있다. 그가 33세 때 지은 매화시에는 아내 허씨가 형상화되어 있고,
이 사랑의 테마가 혹애로 이어지며 퇴계의 매화시에는 혹애의 정황이 나타
난다.
퇴계는 주희가 소동파의 송풍정매화시를 차운한 시에 대해 극찬하면서
주희의 매화시가 소동파의 운을 딴 것이 많았던 것을 주목하고, 주희의 동
파운 매화시에 차운을 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 “편편이 모두가
선풍도운이 있었다.”고 하였다. 매양 한 번씩 읊고 나면, 구름 밖으로 벗어
나는 기운 그 흠모하고, 愛樂하는 정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엄격
히 말하면 송대에 유행하였던 ’詞‘의 장르이다. 朱子大全에서는 이 차운
시를 詞로 분류하고 있다. 소동파, 주희, 퇴계로 이어지는 일련의 차운시는
주희의 매화시가 퇴계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퇴
계는 주희의 매화시 형식과 내용을 철저히 분석하고 비평하면서 수용하고
있다. 소동파, 주희, 퇴계로 이어지는 매화시는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
이 넘쳐나고 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흠모하였으며 상세하게 읽고 감상하면서 오묘
하게 수용하고 있었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매화를 고결한 인품으로 그 상
징과 비유 등 다양한 문예미학이 들어 있으며, 눈 속에 피어나는 그 강인한
정신과 우아한 아치, 청아하고 순수한 정취,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 정절
과 의리, 우정, 순수 평안 덕행 등 우아한 품격과 성리학적 理趣가 발견된
다. 주희의 매화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퇴계의 매화시에 나타나는 이미지
는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퇴계의 매화시와 주희의 매화시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직
접 한 적이 있으며, 주희의 매화시를 탐독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퇴계의 매화시의 미의식에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입은 바가 있었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들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미학만이 아
니라 성리학적 우의가 함의된 道文一致의 문학론을 근본으로 삼는 성리학
적 예술철학이 점점이 발견된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는 성리학적 이미
지가 오묘하게 함의되어 더욱 영롱한 미를 발산하고 있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 깊이 심취했으며, 곳곳에 주희의 매화시를 엿보며 지은 시
들이 수두룩하다. 또 주희는 매화를 보러 가려고 약속을 했으나 약속을 못
지킨다는 내용의 시들이 드러나는데 퇴계의 매화시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주희는 눈 속의 매화를 묘사하면서 눈과 서리가 매화의 개
화를 방해하는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키는데 이것은 퇴계의 시에서도 드러
나는데 세태의 풍자와 결부된다. 주희의 시에는 매화를 죽은 여인의 혼에
비유되기도 하고 그리운 사람에 비유되어‘ 꽃다운 넋, 초혼의 이미지들이
자주 나타나며, 매화를 부쳐주는 驛吏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특히 주자는 초나라의 초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동파와 주자의 시에 藐姑射山의 神人이 드러난다. 퇴계는 주희의 시에
서 이 시어를 포착한 흔적이 드러난다. 다만 퇴계의 시에 나타난 이 藐姑射
山의 神人에 비유한 사람은 바로 선계에 가 있는 퇴계의 아내 허씨 부인이
다. 주희가 그랬듯이 퇴계는 매화시 속에서 仙界를 자주 그려내고 있다.
주희가 벼슬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와서 타향에서 보낸 적이 많았다.
주희는 고향의 매화, 두고온 매화, 추위에 상하지 않을까 하는 매화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퇴계 역시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벼슬하며 비슷한 정황이
겹친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를 읊으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읊은 매
화시들은 그 이미지를 가져온 것이 더러 있었다. 퇴계는 주희의 시구에서
가져온 시어들을 점철성금시킨 흔적들이 나타난다.
주희의 매화시는 주희의 인품이 그대로 시에 투영되어 시품이 곧 인품
이다. 더 나아가서 주희는 매화를 의인화하여 순수하고 고결하게 표현하고,
지조와 정조가 선비의 품격에 들어맞으며 작자와 매화가 일치하는 물아일
체의 경지, 動靜과 理一分殊, 고결한 품성, 은일의 정서, 높은 정조, 지조,
고결하고 순수한 강인한 선비정신 등을 표현했다. 성리학자의 일상 속에서
매화의 고결한 품성과 오만한 자세로 속세를 경시하는 선비정신이 엿보인
다.
주희의 매화시와 퇴계의 매화시의 영향 관계 속에는 긴밀하고 밀접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퇴계의 매화시 속에는 주희의 매화시에서 감명 받은
시어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희의 매화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조
선의 매화시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국문초록】
이 논문은 주희(朱熹)의 매화시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매화시에 미친 영
향을 고찰한 논문이다. 주희는 매화에도 애착한 정황이 발견되는데 그가 남긴 매화
시를 일견해 본 바 약 70여수에 달하며, 그의 매화시도 조선의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정황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희의 매화시에 대해 연구한
정황이 포착되지 않는다. 퇴계는 해동의 주자라고 불릴 정도로 주희의 학문을 흠모
하고 주희의 시문학에 정통한 사람이다. 퇴계도 매화시(梅花詩)를 117수나 남길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문인이었다. 퇴계의 매화시는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희의 매화시가 퇴계의 매화시에 영향을
끼쳤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퇴계의 매화시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희의 영향
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 소동파, 주희, 퇴계로 이어지는 매화시에는 이지적이고
낭만적인 시풍이 넘쳐난다.
주희의 매화시에는 그 상징과 비유 등 다양한 문예미학이 들어 있으며, 눈 속에
피어나는 그 강인한 정신과 우아한 아치, 청아하고 순수한 정취, 향기를 함부로
팔지 않는 고결한 정절과 의리, 우정, 순수 평안 덕행 등 우아한 품격과 성리학적
우의(寓意)가 발견된다. 주희의 매화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퇴계의 매화시에 나
타나는 이미지는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있다. 이에 퇴계의 매화시와 주희의 매화시
를 비교 분석해 보았다. 퇴계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을 직접 한
적이 있으며, 주희의 매화시를 탐독한 정황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퇴계의 매화시
의 미의식에는 주희의 매화시에 영향을 입은 바가 있었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들
에는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미학만이 아니라 성리학적 우의가 함의된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학론을 근본으로 삼는 성리학적 예술철학이 점점이 발견
된다. 주희와 퇴계의 매화시에는 성리학적 이미지가 오묘하게 함의되어 더욱 영롱
한 미를 발산하고 있다.
핵심어 : 주희, 퇴계 이황, 매화시, 성리학, 이미지, 미의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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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9. 7. 14. 심사완료일: 2019. 8. 19. 게재확정일: 2019.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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