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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종교는 폐기되어야 하는가? 리차드 도킨스의 종교관 비판과 종교의 유용성에 대한 소고/김도훈.장신대

1. 변증의 정의와 필요성

이글은 신무신론자들, 특히 도킨스가 생각하는 종교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종교의 유용 성을 신학이 아닌 타 학문의 연구 결과를 빌려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이글 은 신학적 관점의 글이거나 기독교 내부적 대화의 시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변증적 관점의 글 이다. 필자는 신무신론자들, 특히 도킨스의 글을 읽을 때마다 분노가 앞서고 감정이 앞선다.

이런 비논리적, 무논리적, 비상식적 무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지 서 글프고, 이 책이 어마어마하게 팔렸다는 것이 더 서글프고, 소위 지성인이라는 대학교수들이 이 책을 읽고 환호하며 도킨스의 깃발에 모여 기독교를 조롱하는 대열에 서있는 것을 볼 때면 더더욱 서글퍼진다.

이글은 그래서 감정 섞인 글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대부분 도킨스의 글들은 <만들어진 신>에서 가져 온 것이므로 일일이 각주를 달지 않았다.

불편을 끼친 점 양 해를 구한다.

그리고 이글은 새로운 연구라기보다 필자의 기존의 연구들에서 부분부분 빌려온 것들이다.

이 글을 진행하면서 우선 변증의 정의와 필요성을 간단히 소개하고, 최근에 등장한 신무신 론자들의 주장과 행태에 관해 소개한 다음, 도킨스의 종교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신학이 아닌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종교와 영성의 유용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 학이 아닌 일반학문이 종교의 유용성을 실험과 통계를 통해 말할 때 현대인들(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에게는, 그리고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더 설득력이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변증 혹은 변증학이란 무엇이며, 또 그 필요성은 무엇인지 소개해 보겠다.

a. 변증학은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불 신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알려주고, 신자들에게는 믿음의 확신을 주며, 다른 진리들 과 기독교 교리와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려는 학문”(W. L. Craig)이다.

b. 변증학은 “객관적으로 진실되고, 이성적으로 설득력 있으며, 실존적으로나 주관적으로 호소 력 있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성적인 변론이다”(D. Groothuis, <기독교변증학>)

이 정의에 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신학과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과 신앙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합리적으 로 설명해야 할 과제, 무신론이나 회의주의자들의 질문과 비난에 대해 방어하고 해명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c. 기독교 변증가인 더그 파웰도 변증의 필요성에 대해 지금까지 말한 것과 유사하게 설명한 다.

변증은 첫째, 기독교가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어도 이성과 반대되는,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하며, 둘째, 기독교에 대한 반론에 답변을 제공하고 불필요한 오해 를 없애주며, 셋째, 기독교를 옹호하는 증거와 논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과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무신론 및 다른 종교들의 약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d. 변증은 소통이다. 우리끼리의 소통일 뿐만 아니라 경계 밖의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그러므 로 소통은 선교다.

변증의 필요성을 맥그라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변증은 신학교 강의실에서만 쓰이는 기술이 아닙니다. 기독교사역에 관계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이것은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교회사역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주 기 이해서도 중요한 도구입니다. 변증은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동시에 기존 기 독교인도 신앙의 질적 깊이를 더하고, 그들의 헌신 속에 적절한 이해와 확신이 갖춰질 수 있도록 도 와 줍니다.” (A. McGrath)

2. 신무신론자들 (반유신론자들)과 그들의 주장 및 행동

무신론에 대한 변증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교회의 과제이다. 요즘 무신론자들이 점점 많아 지고 교회를 향한 도전이 점점 거세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기이한 현상은 아니다. 무신론자가 없었던 때가 없었고, 이단이 없었던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기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변호하려는 변증가들과 신의 존재를 합리적 으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떻게 보면 종교가 존재하는 순간 부터 무신론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 여러 형태의 무신론자들이 등장했다.

포이어바흐, 사르트르, 마르크스, 프로이드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과거와는 색다른 무 신론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무신론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신론의 주장들을 적극적으 로 전파하려 한다.

기존의 모든 종교들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제거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주장만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고 실 천하기 위해 어이없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안타까운 수준이다.

거의 광신도, 맹신도에 가깝 다.

그들의 저술들을 보면 분노와 왜곡과 거짓과 오도로 가득 차 있다.

의도적으로 무신론은 좋은 점만, 기독교는 무조건 나쁜 것만 열거하고, 통계를 왜곡 해석한다.

허수아비 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증오심에 불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무차별 공격한다.

그런데 정말 슬픈 것은 그 들은 기독교나 신학이나 성경에 놀랄 정도로 무지하다는 점이다.

권위 있는 신학 서적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비난해 대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행태를 몇 가지 간단히 언급하겠다.

그들은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enjoy your life" 라는 광고 문구를 버스에 붙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없다” 는 광고판,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들었다" (In the Beginning man created God)는, 성 경을 패러디한 광고판을 세운다.

전 세계에 무신론 재단을 설립하고 버스 광고를 시작하거나 시도하였다.

문화일보 2013년 11월 보도에 따르면 영국에서 처음 무신론자 교회가 개척되어 “미국, 호주 등으로 교세를 맹렬히 확대”해 나가고 있다.

영국 코미디언 샌더슨 존스와 피파 에번스가 2013. 1월 런던에서 1호 교회를 세웠고 약 10개월 만에 영국 내에서만 총 15곳, 미 국에서는 18곳에 교회가 세워졌고 호주에서도 6곳이나 세워졌다.

2013년 11월 미국 CBS는 그들을 “무신론자 대형교회”(A-theist Mega-churches)로 칭하면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무 신론 교회현상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그들은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교회의 기능과 역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를 스스로 증명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은 그들의 예배시간에 무신론을 설교하고 무신론을 찬양하며 세속적 인본주의에 입 장에 서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무신론 교인들의 무신론 믿음을 굳게 하고 교육하며 예식 후 그들만의 코이노니아도 갖는다.

물론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들은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 들을 세우고 있다.

무신론 전사들을 양육하기 위함이다.

자기 판단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절대 로 종교적 신념을 주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면서 이들은 과학이론을 빙자하여 종교에 대 한 증오와 편견을 어릴 때부터 심고 있으니 무서운 일이다.

이들은 공적 기관이나 정부기관에 끼치고 있는 종교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많은 단체들을 조직하여 말 그대로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의 기관들이다.

이성 집회 연합 (Reason Rally Coalition), 미국 무신론자들 (American Atheists), 미국 인본주의자 협회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 미국 세속주의자연합 (American Secular Union), 교회와 국가 분 리를 위한 미국인 연합 (Americans United for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미국 세속주의 연대 (Secular Coalition for America), 세속적 휴머니즘 회의 (Council for Secular Humanism), 종교로부터의 자유 재단 (Freedom From Religion Foundation), 자 유사상협회 (Freethought Society), 세속주의자학생 동맹 (Secular Student Alliance) 무신 론자 국제 연합 (Atheist Alliance International), 무종교자와 무신론자 국제 연맹 (International League of Non-religious and Atheists), 인본주의자 국제 연맹 (International League of Humanists) 등이다.

그래서 한 예로 이들은 미국의 여권의 문장도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에 이브러햄 링컨의 게티즈버그에서의 명연설 중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 시키며(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토마스 제퍼 슨의 명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유도 함께 주셨다(The God who gave us life, gave us liberty at the same time)’,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명언 ‘우리에겐 위대한 꿈이 있다. 그 꿈은 1776년(미국독립선언의 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미국이 그 꿈을 이루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We have a great dream. It started way back in 1776, and God grant that America will be true to her dream)”(Christianity Today, Aug 02, 2013 11:29) 등이다.

무신론 현상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무신론자들, 수많은 무신론 단체들이 반기독교적 행동을 일삼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물론이고, 성경을 금서로 만들자는 천만인 서명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버스 광고를 한 적도 있고, 기독교나 교회에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하기도 하고, 교회의 선교나 전도나 행사들 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일들을 버젓이 하고 있다.

이런 행동하는 무신론자들 뒤에는 무신론 철학자, 무신론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교묘한 논리로 혹은 진화론에 대한 맹신적 신념에 바탕하여 무신론 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리처드 도 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만들어 진 신>, <주문을 깨다>, <종교의 종말>, <신은 위대하지 않다>와 같은 책을 출판하여 무신론 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들을 옛 무신론자와 구분하여 신무신론자라 부른다.

이들은 자신의 책을 과학이나 철학책으로 보이게 하려고 하지만 대부분 종교를 감정적으로 비 난하는 글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종교에 대한 증오와 조롱과 모독의 문장으로 가득하다.

대 표적인 글 하나만 인용해 본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 유대인을 ‘예수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전도사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 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1)

1) Dawkins, 7-8,

3. Dawkins의 에 대한 기초적 평가

a. 신뢰성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감정적인 책. 기독교에 대해서는 편견적이고, 단견적이 며, 주류적인 이야기 아닌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늘어놓고 있다.

b. 도킨스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주요 신학자들의 저서가 거의 없다.

신학 서적 한권도 제대 로 읽지 않고 그저 주변적인 이야기, 일부의 부정적인 이야기들로 책을 구성하고 있다.

기껏 해야 13세기의 아퀴나스의 신존재 증명을 비판.

신 존재 증명의 다양한 방법들의 장단점에 대 해서 도킨스보다 더 철저하게, 엄밀하게 비판한 학자들이 많음에도.

c. 이와 함께 기독교나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한참 철 지난 과거의 무신론자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도킨스의 학문적 소양과 성실성, 엄밀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창조론을 철저히 믿고 있으며,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책 한두 권을 읽고 진화론을 마치 미신처럼 묘사한다면 그것 이 정당하겠는가?

d. 도킨스는 자신의 이론과 맞지 않은 이론이나 학자들, 특히 신이나 종교를 인정하는 듯하 면, 냉소적인 비유와 수사로 비난한다.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인 굴드 밑에서 학위를 받은 어떤 전도유망했던 젊은이가 수많은 고민과 번뇌 끝에 진화론을 포기하고 신앙을 선택한 결단을 “자신의 경력과 인생의 행복에 스스로 피해를 자초한 것으로”, “과학과 증거와 이성을 자신의 모든 꿈과 함께 내던져 버린” 근본주의자로, “정신에 대한 고문인 종교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처럼” 묘사하고 조롱한다.

“하버드 대학교 출신의 지질학자가 그렇게 당했다면, 재능이 덜하 고 대항력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생각해보라. 근본주의 종교는 수많은 순진하고 선량하고 열의가 있는 젊은이들의 과학교육을 망치려고 필사적이다.”

e.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근거로 판단한다면 도킨스는 그가 몸서리치면서 그렇게 비판하 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태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과학적 교조주의자 (dogmatist)이며 “과학적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이다.

맥그라스의 말을 빌려 그를 평가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도킨스는 그저 교묘하게 지옥불의 형벌을 설교하는 것과 같은 무신론의 지옥불 설교를 행하고 있다. 사려 깊고, 증거에 근거한 사고 대신에 터보가 장착된 수사학을 사용하며, 사실들에 대해 대단히 선 택적인 조작을 사용하고 있다. 놀랍게도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에는 과학적인 분석이 거의 없다. 이 상한 일이다. 많은 사이비 과학적 사색만 들어 있다. 그의 사색은 문화적 종교비판과 연계되어 있으 며 대부분 낡은 무신론저작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다. 도킨스는 신을 미워하는 자기의 떼거리들에게 설교한다. 그들은 도킨스가 쏟아내는 수사적인 폭발을 맛보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들은 손을 높이 들고 그를 찬양한다. ‘생물학적 진화가 종교와 조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멘!’ ... ‘진짜 과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합니다!’ ‘할렐루야!!’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유대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정신병적인 아동학대자입니다!’ ‘아멘!’” “도킨스에게 종교는 투우장의 황소를 화나게 하는 붉은 천과 같다.”

f. 도킨스의 책과 그 안에 담긴 주장에 대한 비판은 단지 기독교 진영만이 아닌 무신론이나 회의주의자 진영에서도 나온다.

앤드류 브라운은 전체적으로는 도킨스의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무신론자는 무신론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논지에는 스탈린을 들어 비판하고 있고, 로버트 페이프는 도킨스의 책을 독단적 불신으로부터 나온 논증으로 가득 차 있는 책으로 규 정하고 있다.

퓰리쳐 상을 수상한 마릴린 로빈슨은 도킨스가 과학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함을 통탄하면서 도킨스는 성경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지식만 있을 뿐이며 종교의 가장 나쁜 면과 과학의 가장 좋은 면만을 비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묻는다.

“종교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난 받아 마땅 하다면 과학은 안 그런가?”

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겨우 영국조류도감의 수준인 사람이 생물학에 대 해 논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도킨스의 신학에 대한 지식은 마치 이와 같다. ... 그의 책은 진지한 철학 서적과는 거리가 멀다. 도킨스가 손쉬운 표적이라고 여기는 어떤 원수에 대한 공 격이 매 페이지 마다 풍자적으로 등장하고 있은 것을 볼 때, 악의로 편집되고 장황하게 긴 풍 자 문장에는 그 작가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마이클 셔머는

“도킨스의 최근의 책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그것은 중요한 과학 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풍자한다.

g. 도킨스의 상상의 과녁: 중요한 신학적(종교적) 핵심 개념들을 잘못 사용한다.

하나님을 자 기 마음대로 힘을 행사하는 폭군적 존재로 묘사하거나 전능의 개념을 ‘인간의 의지나 자연법 칙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며 하나님의 속성에는 마치 전능만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폭군적 하나님은 도킨스가 만 들어 낸 신이지 기독교의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과녁이거나 상상의 과녁을 맞히고 나서 의기양양해하는 잘못된 과녁의 오류, 허수아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런 비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당신이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니야, 수염 난 산타클로 스 할아버지 같은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닌데 그런 신을 비판해 놓고 기독교의 신을 비판했다 고 우기지 말아.”

그래서 그는 모든 신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날조되었거나 언제 가 날조될 초자연적인 모든 것, 모든 신들을 공격한다”라고 변명한다.

그러면 날조되지 않은 신은 그가 인정할까? 아니다. 날조되었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는 모든 신과 모든 종교를 거부 한다.

h. 왜곡된 통계와 설문: 그는 잘못된 답을 유도하는 잘못된 질문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들을 논증하고 있다.

그는 어느 설문 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미국의 중요한 학자들은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1074명중 응답하지 않은 사람의 비 율이 77%에 이른다는 점이다.

답변한 23%만 가지고 중요한 학자들은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고 판정을 내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다.

더 심각한 오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답을 의 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설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인격신 즉, 개인에게 관 심을 갖고, 기도자의 말을 듣고 응답하고 죄와 악행에 관심을 보이고, 판결(심판)을 내리는 신 을 믿는다.”

이 설문은 인격신이라는 개념을 이미 단편적으로, 그것도 부정적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 대신에

“나는 인격신 즉, 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를 들으시며, 죄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는 신을 믿는다”라는 설문이었으면 답변이 어떠했을까? i.증거의 선별적 사용: “진화는 사실이며 화석이 이를 증거한다. 몇 개의 예만 들어 보자. 시 조새는... 말의 진화과정을 보면... ” 등등 “종교는 타락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기도는 효력이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그의 논리는 늘 이런 식이다.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더 많은 반대 증거는 애써 무시해 버린다.

j.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 “전문가들이나 제대로 교육을 받은 자들은 종교나 신을 믿지 않는 다”라는 논리다.

도킨스는 신을 믿는 전문가들이 있다는 창조론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무 신론적인 전문가가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전문 가가 많다고 어느 한 주장이 참이 되거나 권위 있는 사람들이 적다고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신은 없으며, 이것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도킨스의 논리가 성립 되려면 신을 믿거나 종교를 가진 탁월한 과학자가 전혀 없어야 한다.

만일 종교를 가진 과학 전문가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도킨스의 논리에 의하면, 그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거나 아니 면 도킨스의 주장이 틀리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도킨스의 주장에 의하면 종교 와 과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증명하면 될 일이지 권위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k. 잘못된 비교의 오류: 도킨스는 종교나 종교의 주장들을 아주 형편없고 보잘 것 없는 것으 로 만들고, 나쁜 점들만 열거하여 마치 모든 종교가, 모든 종교 행위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 게끔 하고, 자신의 것(과학)은 좋은 점만 열거하는 논쟁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불교와 유 교를 비교하면서 불교는 좋은 점만, 유교는 나쁜 점만 열거한 다음 “그러므로 유교는 불교보 다 나쁘다”라는 방식이다.

이것은 논쟁에서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옳은 방식은 아니다.

이처럼 <만들어진 신> 곳곳에는 종교에 대한 끝 모르는 적대감, 증오, 편견, 오류, 오해, 덧씌 우기 등의 지뢰들이 허다하게 매설되어 있다.

4. 도킨스의 종교 이해 및 평가

a. 우선 그가 내뱉는 종교에 관한 몇몇 독설을 인용해 보려 한다.

종교란 사고 폐기 과정, 즉 종교는 강력한 반대 증거에 대항해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거짓된 신념.

그 러므로 종교는 망상(도킨스가 인용한 사전적 정의“망상은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특히 정신장애의 한 증상” 종교는 사람들을 언제든 살인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바이러스의 일종이다.

망상은 모순되는 강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집하는 것, 특히 정신장애의 한 증상이라고 정의한다. 그 정의의 앞부분은 종교의 특성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 ...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2)

종교신앙의 위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정상적일 사람들을 광기로 내몰고 광기를 신성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고대 문헌 때문에 자살하고 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리라고 누가 과연 생각했겠는가? 3)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 신앙은 아주 위험하며 그것을 순진한 아이의 취약한 정신에 계획적으로 주입하는 것은 몹시 잘못된 일이다. 4)

2) 『만들어진 신』, 14.

3) Dawkins, 421. 이글은 도킨스가 무신론자인 샘해리스의 말을 동의하면서 인용한 것을 여기에 옮긴 다.

4) Dawkins, 470-471.

위의 주장들에 의하면 종교는 폐기되어야 한다.

백해무익할 뿐이다. 그에게 종교는 폐기되 어야 하고 박멸해야 할 제도일 뿐이다.

그에 의하면

a.종교는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반과 학적이기 때문이다.

b. 종교는 어떤 증거에도 생각과 신념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근본주의 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비록 온건한 종교라 할지라도 폐기되어야 한 다.

모든 질문을 막아 결국은 극단주의가 자연스럽게 번성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고 때문 이다.

c. 종교는 만악의 뿌리이고 역으로 모든 악은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d. 나아가 종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 기능과 역할을 과학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에 대한 물음조차도 과학의 물음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 질문을 신 학에 넘겨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 는다.

앞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본다.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화약음모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 유대인을 ‘예수살인자’라고 박해하는 것도, 북아일랜드 분쟁도, 명예살인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입은 채 텔레비전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전도사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고대 석상을 폭파하는 탈레반도, 신성 모독자에 대한 공개 처형도, 속살을 살짝 보였다는 죄로 여성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행위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종교가 없다면 억압과 폭력과 전쟁과 살육이 없을 것이므로 인류는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 암아 더 나은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종교는 이렇게 폭력적이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글들에는 논리적 오 류가 많다.

종교라는 통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종교 저 종교,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모 든 종교의 잘못을 나열하여 모든 종교는 폭력적이며 모든 악은 종교적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대부분 극단적 이슬람의 폭력이다.

기독교의 잘못은 대체로 과거 몇백 년 전 일이다.

물론 기 독교의 잘못과 폭력을 옹호하려는 것도, 미화하려는 것도, 회피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 판하려면 최소한 종교 간의 차이를 인지할 할 줄은 알아야 한다.

각각의 종교를 종교라는 범 주에 포함시켜, 이런 악행들이 모든 종교에 늘 만연해 있는 악행인 것처럼 비난해서는 안 된 다.

수많은 장점과 유익은 눈감은 채 잘못만 끄집어내어 없어져야 제도라고 한다면, 종교는 왜 사라지지 않고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생존을 이어오고 있는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제거되 어야 하는 조직이라고 경멸한다면, 그런 비난으로부터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제도와 사람과 사 상이 어디 있겠는가?

동서고금의 국가들의 잘못을 열거하면서 그러니 국가를 없애버리자고 하 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과학의 오류나 사기는 없는가? 과학의 폭력과 죄악은 없는가? 당연히 있다. 그들이 그렇게 숭상해 마지않는 과학기술이 없다면 무자비한 테러나 911이나 핵무기나 거대한 살육의 전쟁이 일어났겠는가.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핵무기, 지칠 줄 모르고 발전하는 전쟁무기, 엄청난 환경파괴, 체르노빌, 후쿠시마, 인터넷중 독, 빅브라더 논란 ... 이런 것을 근거로 어느 극단적 반과학주의자가 과학기술의 유익은 눈감 은 채 과학자들은 본래 폭력적이니 과학과 과학자들을 박멸하자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당하 겠는가.

도킨스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진화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이기 적 유전자의 결정일 뿐이다.

사회현상이나 정신현상조차도 그가 만들어낸, 다른 과학자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상상의 신(神)인 밈(meme)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종교를 비난할 일 이 아니지 않는가.

종교도 그가 신처럼 숭상하는 유전자의 결과물이 아닌가.

도대체 왜 그들은 과학의 폭력에 대해서는 눈감으면서 유독 종교에 대해서는 한 치의 관용과 이해도 없는 것일까? 과학과 신앙이 충돌되기만 해서도 아니다.

신앙을 가진, 아니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쟁쟁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종교에 대한 증오 뒤에는 종교에서 받은 상처가 작용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종교나 종교인들에게 받은 상처를 언급한다.

심리학자 폴 비츠(Paul Vitz)에 의하면,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거나 일 찍 아버지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체로 무신론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5)

그들이 종교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거기에다 진화론이나 유물론적 세계관, 무신론적 학문이 더해져 그들의 생각이 신념으로 바뀌게 되고, 자신들의 신념이 절대 적이라는 종교적 확신을 갖게 되고 결국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과학 근본주의적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도 근본주의적인 무신론 종교를 믿고 있는 셈이다.

도킨스의 비판은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도 예외가 아니다. 《구약성서》의 신은 모든 소설을 통틀어 가장 불쾌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하고 거만한 존 재, 좀스럽고 불공평하고 용납을 모르는 지배욕을 지닌 존재. 복수심에 불타고 피에 굶주린 인종 청 소 자, 여성을 혐오하고 동성애를 증오하고 인종을 차별하고 유아를 살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하 고 자식을 죽이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과대망상증에 가학피학성 변태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난 폭자로 나온다. 6)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관용을 모르며, 인종차별주의, 부족주의, 편협성과 손을 잡고, 무지라는 옷을 입고, 자유로운 탐색을 적대시하고, 여성을 경멸하고, 아이들에게는 강압적인, 조직화된 종교는 양심에 커다란 짐을 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Hitchens, 90)

나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속죄가 악의적이고 가학피학적이고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그 것을 개가 짖는 소리로 치부해야 하지만,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객관성이 무뎌져 있다. 7)

5 ) Paul Vitz, Faith of the Fatherless: The Psychology of Atheism, 김요한 역, 『무신론의 심리학: 아버지 부재와 무신론 신앙』, 새물결플러스, 2012.

6) R. Dawkins, 50.

7)R. Dawkins, 381.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신학에 무지하고, 이렇게 성경을 왜곡하고, 이렇게 교리를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정말 어이없지만 그들의 사고가 이 수 준이다.

자신이 허수아비 기독교를 만들어 놓고 증오심에 불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직접 무차별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학자들이라기보다 반종교 혹은 탈종교 전도사들, 진화를 숭배하는 진화론 종교의 교주들과 같다.

자기들은 건전하고 이성적인 과학자들이고 신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망상가로 치부한다.

정말 슬픈 것은 기독교나 신학이나 성경에 놀랄 정도로 무 지하다는 점이다.

아니 모르는 척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b. 종교는 폭력적이라고 그가 비난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성경의 율법 조항에 있다.

구약의 여러 성경 구절들을 오해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 잔인한 하나님, 아동을 학 대하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율법들과 계명들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조차 당황케 하 는 것은 사실이다.

선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싶은 법과 계명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 법의 의도와 정신을 생각지 않고 자구 에 너무 매여 있는 탓이다.

달리 말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의 의도와 정신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사 랑, 이웃사랑이다. 구약의 수많은 계명과 율법들은 결국 이 정신을 구체화하고 법조문화한 것 이다.

이러한 엄격한 법들은 죄지은 사람들의 처벌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보호, 그리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의 오류는 하나님 의 명령이나 율법의 의도는 생각지 않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돌로 치라”, “모든 사람을 진멸하라” 등의 자구에만 집착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언급한 “돌로 치라, 죽이라”는 표현은 잔인성과 폭력성의 명령이라기보다 사형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오늘의 표현으로 하면 “사형 에 처하라”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성경의 강조점은 당연히 법의 정신과 의도, 즉 생명 존중과 이웃사랑과 타인의 신체나 재산의 보호에 있는 것이지, 법의 집행방식이나 돌이라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신론자들이 이런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며 성경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 폭력적인 하나님이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데도 마땅히 해명할 답이 궁할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여 기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로 표현된 동해보복법(lex talionis)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것을 우리는 똑같이 복수하라는 법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사람의 생명과 타 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다.

그것은 보복하라는 법이 아니라 과잉 보 복을 금지하는 법이다.

인간은 감정적인 불쾌감으로 피해입은 그 이상으로 보복하려 한다. 심 지어 사소한 것으로 논쟁하다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동해보복법은 복수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과잉 보복이나 “보복성 폭력”, “잔인한 힘의 원칙의 지배” 를 금지하는 것이고, “인간 행위의 인간화”를 의도하는 법이다. (Lohfink, 134).

게다가 이 법은 성경에만 있는 법이 아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근동지 역의 여러 법전에서도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타인의 재산이나 소유에 해를 끼쳤을 때 가졌 던 고대 근동의 공통적인 재판의 원칙이었다.

달리 말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한 피해를 “범죄행위”로, “사회 전체의 복지에 해로운 행위로 판단하는 고대 중동의 유산”(폰라트)인 것 이다.

동해보복법의 목적은 “소극적인 화의절차를 통해서 인간의 공동체 관계의 균형을 유지 하려는데 있었던 것 같다”고 폰라트는 말한다. 그

러므로 동해보복법은 의도나 배경을 이해한 다면, 결코 성경이나 하나님을 비난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니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에 나타나는 “진멸하라”는 본문 역시 기독교를 폭력적 종교로, 구약의 하나님을 폭력적인 하나님으로 이해하게 했을 법한 본문이다.

도킨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된 본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결코 단순히 한 민족의 살육을 허락하거나 용인하는 무 자비한 본문이 아니다.

이 본문은 강자로서 약자의 말살을 의미하는, 마치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전략을 의도하는 본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나약한 이스라엘의 생존전략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로핑크,135ff).

다시 말하면 강대국이 약소국을 이유 없이 노략하고 침탈하는 구절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아니라 약소국이었다.

전쟁에서는 이 겨야 했다.

진멸하라는 표현은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민족 의 와해였고,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는 이방 종교로의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 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의 약속이 깨어지는 것이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 족속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자격이 있어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진멸은 철저히 우상의 근절을 의 미했다. 몰렉에 대한 심판이었고, 몰렉신을 섬기는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하나님 의 심판은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우상을 섬 긴다면, 멸망당한 민족들처럼 이스라엘도 멸망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레녹스).

그러므 로 오늘의 도덕적 관점이나 인권의 차원에서 이 본문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이 전쟁을 합리화하는 본문으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신명기에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라는 구절 바로 다음에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라는 구절이 등장한 다.

진멸이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멸절을 의미했다면 그들과의 언약도 혼인도 하지 말라는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미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에서도 진멸했 다고 되어 있으나 여전히 이방 민족이 생존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 은 진멸이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수사적, 문학적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톰 라이트나 웬함이나 레녹스나 월터스토르프도 유사한 의미로 해석한다.

레녹스는 문자적인 의미의 말살 을 의미한다면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 대한 약자 보호법뿐 아니라 평 화를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종교는 폭력적이 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니다.

c. 도킨스가 종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종교의 기능과 역할을 과학이 대신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킨스가 말하는 종교의 기능은 무엇인가?

여기서도 여지없 이 도킨스의 무지와 자의가 드러난다.

도킨스가 말하는 종교의 역할은 설명, 훈계, 위로, 영감 이다.

a. 설명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우주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인데 현대과학으로 전면 대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b. 훈계는 종교의 도덕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이나 종교 없이도 우리는 선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도덕은 현재의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

c. 종교 의 또 하나의 기능은 위로인데 종교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도킨스에 의하면 상 상이거나 착각이다.

그저 선물이 주는 위로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 도 위로를 줄 수 있다고 본다.

d. 종교의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영감의 기능도 과학이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종교가 없이도 인간은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가 과학이 발견한 양자의 세계다. 우리는 여기서 물을 수 밖에 없다.

과연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고 종교의 기능이고 종교의 역할인가고. 도킨스가 제시한 것은 종교의 부수적 기능일 뿐 본질적 기능은 결코 아니다.

어 떤 신학 교과서에도 종교 혹은 기독교의 역할을 이것으로 설명하는 교과서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의 제거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설사 종교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종교의 자정 능력을 믿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역사는 타락 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러므로 또 한편으로는 개혁의 역사이고 자정의 역사였다.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나 재미있는 착상이어서 소개해본다.

“몽둥이를 만드는데 쓰였다는 이유 로 참나무를 비난하겠는가?

거짓말이 전파되도록 했다는 이유로 공기를 나무라겠는가?

어린 이들이 공연을 망쳤다고 해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탓하겠는가?”

d. 여기서 도킨스에 반문하고자 하는 질문은 모든 전쟁이 종교에 기인한 것인가 하는 것이 다.

도킨스는 많은 실례를 들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오로지 종교적이라고만 할 수없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전쟁은 대부분 종교전쟁이 아니라(물론 종교전쟁도 있었음), 폭력 대 폭력의 전쟁, 복수와 증오의 전쟁일 뿐이며, 좀 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영토(생존)전쟁이다.

마이클 셔머(회의주의자)는 “이 모든 것 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결국 정치적 동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들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e. 또 하나의 질문, 전형적인 종교의 폭력성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자살테러도 종교적인가 하는 것이다.

로버트 페이프(R. Pape)나 쉐한(I. S. Sheehan)은 이것을 단호히 부 정한다.

그래서 스콧 아트란: 자살폭탄테러를 중지시키는 방법은 종교를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온건파를 적절히 지원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역사학자 마틴 마티 의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종교 고유의 특성을 다서가지로 언급한다.

첫째, 종교 는 궁극적 관심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종교는 공동체를 세운다.

셋째, 종교는 신화와 상징에 호소한다.

넷째, 종교는 제의와 예식을 통해 강화한다.

다섯째, 종교는 추종자에게 특정 행동 을 요구한다.

도킨스의 정의와는 사뭇 다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와 같은 종교의 다섯 가지 특징은 정치 운동의 특성이기도 하다. 종교 광신자가 있을 수 있듯이, 정치 광신자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광신이지 종교 자체가 아니다.”

f. 도킨스는 종교적 경험은 모두 뇌의 작용임을 주장한다.

“놀라운 것은 종교적 믿음을 갖는 경향도, 도덕적으로 친절하게 행동하려는 경향도 종교 때문이 아닌 인간 뇌의 속성이라는 점 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는 도킨스뿐이 아니다.

현대의 신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영적, 신 비적 체험(RSME)들 처럼 보이는 것들은 뇌의 현상일 뿐이라는 현대 유물론적 뇌과학의 주장 에 근거한다.

종교는 마치 사랑처럼 뇌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뇌의 신경 활성 물질들의 작용이듯 종교 역시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맥그라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랑의 감정이 뇌의 작용이기 때문에 연인들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해 사랑이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교류 현상이라고 해서, 즉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실제 연인이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맥그라스).

마찬가지로 종교체험의 기제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결코 아니다.

무신론적 뇌과학자들은 종교적 신비적 영적체험이 뇌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뇌 안에 신 부위 God spot’ (신을 담당하는 뇌 부위. 인간은 영적 실체를 자각하고 인간이 지닌 물리적 실체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을 믿도록 선천적으로 ‘설계’되어 있 다고 주장. 즉 신은 ‘저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뇌 안에서 진화를 통해 적응한 산 물이라는 것), ‘신 스위치’, ‘신 요인 God factor’, ‘신 모듈 God module’(뇌의 특정 부위에 ‘신 모듈’이 있다는 주장. 종교적 믿음이 모듈로서 인간의 뇌에 어느 정도 ‘설계’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보았다.

또한 종교적 ‘신 헬멧 God helmet’ (신 헬멧이라 고 이름 붙인 헬멧을 발명했는데, 이 헬멧을 착용하여 측두엽을 전자기로 자극함으로써 영적 이고 신비적인 체험을 일으킨다고 주장)을 통하여 증명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그리 정확한 실험은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신헬멧은 도킨스도 실험에 참여했으나 종교적 현상을 경험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Mario Beauregard, Denyse O’Leary, The Spiritual Brain,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 참조)

종교적 경험이 뇌의 화학작용일 뿐, 외부 요인(혹은 초월적)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 도에 대해 앤터니 플루(Antony Flew, 무신론의 거두였다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회심한 영국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비판한다. "위성전화 한 대가 외딴섬의 해변에 떠내려갔다.

그리고 그 섬에는 현대 문명과 접촉해 본적이 없는 부족이 산다.

원주민들은 번호판의 숫자를 갖고 놀다가 어찌 어찌해서 여러 번호를 연속으로 누르게 되었고 거기서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그 소리가 정체 모를 장치에서 나오는 소음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족의 과학자 몇몇이 똑같은 복제품을 조립해서 그 숫자들을 다시 누르자, 똑같은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 보인다.

크리스털과 금속과 화학물질을 이런 식으로 조립하면 인간의 음성처럼 들리는 소리를 만들게 된다.

그 음성은 이 장치의 특성일 뿐이다.

그런데 이 부족의 현인이 과학자들을 소집해 토론을 벌인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 도구에서 나오는 음성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 분명하네.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을 뿐, 그들은 살아있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네.’ 현자는 그 음정을 전화기 의 특성으로 치부하지 말고 어떤 신비한 통신망을 통해 그들이 다른 인간들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식으로 점점 더 깊이 연구하다 보면 그들의 섬 너머에 있는 세 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현인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보세요, 이 기계에 손상을 가하면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음성은 리륨과 회 로판과 발광 다이요드의 독특한 결합으로 만들어지는 소리에 불과한 겁니다.(플루, 99-100)”

g. 저자 퍼트넘과 캠벨은 약 5년간 미국인을 대표하는 표본 샘플 5천 7백여명과 인텨뷰를 진 행. 세세하면서도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해 종교가 어떻게 미국인들의 실제 삶에 영향을 미쳤 는가를 연구하였다.

이 책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의 신앙인들은 시민사회에 참여를 신의 선물로 여 긴다.

신앙을 가진 미국인들은 신앙이 없는 자들보다 더 나은 시민과 이웃의 역할을 하고 있 으며, 기부와 자원봉사, 그리고 지역 선거 등에 비종교적인 사람들보다 3, 4배 더 많이 참여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관계의 변화가 종교적 태도를, 더 나아가 종교의 의 미 체계와 신앙 체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이를 통해 종교가 어떻게 사회를 분열 시키고 통합시키는가에 대한 거시적인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 연결 망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볼 수 없는 더 강력한 이타성과 기부 현상을 낳는 요소라는 것이 저자들의 논지다.

교회의 좋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교회 밖 타자에 대한 이타적 태 도가 그들의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확신과 맞물리면서 이 더 열렬한 생각의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에는 그러한 이타적 실천과 사회적 기부를 실행에 옮기게 하는 다 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데 더 유리한 조 건을 갖고 있다.

물론 저자들은 성적인, 계급적인, 인종적인 불평등을 치유하기 위한 공적 행동에서 그리스 도인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소극적임을 지적한다.

하여 그것이 향후 그리스도교의 과제임을 말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타자에 대한 마지못한 수용에서 전략적 인정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조건 없는 수용으로 변화해가는 추세에 있다.

하여 그리스도 교는 미국 사회를 점점 더 호혜적인 사회로 만들어갈 주역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그레이스', 미국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김진호의 서평의 일부)

5.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종교와 영성의 기능과 역할

최근 종교와 영성을 긍정심리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룬 학자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피터 슨(C, Peterson)은 괘락과 긍정경험, 행복, 긍정적 사고, 성격강점, 가치, 흥미와 능력과 성취, 건강, 긍정적인 대인관계, 긍정기관 등을 긍정심리학의 주요 주제로 다루면서 교회를 다루기 도 하였다. 8)

, 콤튼 (William Compton)과 호프만 (E. Hoffman)은 기분과 정서, 여가, 몰입, 명상, 최고의 성과, 사랑, 건강, 창조성, 미적 예술적 감각, 회복탄력성, 지혜, 성격, 종교 및 영성, 긍정적 제도들이 좋은 삶, 행복한 삶, 인간의 웰빙을 좌우한다고 보았다. 9)

8) Christopher Peterson, A Primer in Positive Psychology, 문용린 김인자 백수현 역, 『긍정심리 학』 프라이머, 물푸레, 2010.

9) William C. Compton, Edward Hoffman, Positive Psychology: The Science of Happiness and Flourishing, Wadsworth, 2013 (이하 compton & hoffman으로 약칭함)

이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종교와 영성을 의미 있는 요소로 취급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종교와 영 성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종교와 영성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강화시키고, 삶 을 행복하게 하고 좋은 삶(good life)을 살게 하며, 삶을 의미 있게 하고, 고난과 질병과 죽음 등을 대하는 다른 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던져보자. 종교나 영성이 건강과 행복과 플러리싱한 삶,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 무엇 때문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피터슨은 여러 연구들을 검토한 결과 다음 여섯 가지 요소로 이 문제에 답하고 있다.

첫째, “종교는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회 적 지원이 스트레스나 면역체계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종교 공동체가 육체 적 건강에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비슷한 마음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 있는 한 공동체 안 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만족한 삶의 근원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다른 사회적 지원체계와 달리 종교적으로 파생된 사회적 지원은 지원관계의 궁극적 근원, 즉 지원이 하나 님으로부터 온다는 신념으로까지 확대되기 때문이다." 10)

둘째, 종교는 건강한 삶의 스타일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11)

셋째, 종교는 인격통합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넷째, 종교는 생산성 (generativity)과 이타주의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12)

다섯째, 종교는 스트레스나 삶의 어려움 에 대한 자기 나름의 독특한 대처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13)

”종교는 예기치 못하거나 원치 않는 스트레스 요인에 희망을 줄 수 있고, 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으며, 그들의 삶을 더 넓은 틀에서 보도록 도우며, 새로운 목적과 의미를 만들어 내줄 수 있다.” 14)

여섯째, 종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의식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15)

의미의식과 목적의식이 인간의 주관적 웰빙 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의미에 대한 생각은 결국 삶의 궁극적, 최종적 의미를 묻게 되는데 이것은 종교에 가장 특징적인 생각이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영성과 종교의 영향의 실례들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영성 이나 종교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터슨은 “종교적인 믿음이 문제를 해결하고 심지어 신체적인 병까지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16)고 주장한다.

콤틑(William Compton)과 호프만(Edward Hoffman)도 많은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종교성이 건강에 긍정 적 영향을 강하게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술 을 무시하여 건강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으나 정상적인 종교 내에서는 종교성이 어떤 경우 도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17)

둘째로, 인간의 행복한 삶이나 플러리싱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의미추구에 관련된 논의들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생의 의미 와 목적의식은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소중하다는 가치감을 제공 해 준다.” 18)

이차 대전을 경험한 프랭클이 삶의 의미에 대해 강조하며 의미요법을19)

10) compton & hoffman, 233. 이런 그의 주장은 A. Bergan & J.T. McConatha, "Religiosity and Life Satisfaction", Activities, Adaptaion, and Aging, 2000, Vol 24 (3), 23-34. D.G. Myers, "The Funds, Friends, and Faith of Happy People," American Psychologist, 2000, Vol 55(1), 56-67의 연구에 근거한 것이다.

11) compton & hoffman, 233.

12) compton & hoffman, 233.

13) compton & hoffman, 233.

14) compton & hoffman, 233.

15) compton & hoffman, 233.

16) peterson, 522.

17) compton & Hoffman, 230-231, 권석만, 『긍정심리학: 행복의 과학적 탐구』, 학지사, 2008, 461.

18) 권석만, 446.

19) V. Frankl, Men's Search for Meaning, 이시형 역,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 2012. 동저자,The Will to Meaning : Foundations and Applications of Logotherapy, 이시형 역, 『삶의 의미 를 찾아서』, 청아, 2005.

제안한 이후, 삶의 의미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점증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구들은 한결같이, 삶에는 의미나 목적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거나, 일반적으로 더 웰빙한 삶을 살거나, 삶 의 만족을 누리거나, 삶을 보다 더 잘 통제하며, 각자의 일에 더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 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에게서는 우울이나 불안, 일중독, 자살 충동, 약물 남용 등 부정적 측면이 덜 발견되었다20)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보다 더 중요한 것에 헌신하거나 세 속적인 관심사를 초월하는 이상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의 미 의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21)

이 의식은 대체로 종교인들이거나 순교자들에게서 더 높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의미가 창조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요소와 특성이 나타날 때 더 많 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가?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을 제공하는가?

이에 대해 피터슨은 다음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a. “더 위대한 조화와 일관성과 동질감이다.

자기 정체성이나 삶의 목 표에 보다 더 위대한 조화와 일관성과 동질감이 있을 때 보다 더 큰 의미가 만들어진다.

종교 적 태도는 바로 삶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일관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 22)

b. “이 웃에 봉사하거나 가치 있는 명분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 역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기여 할 것이다.

이것은 종교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c. “창조성”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은 삶에 중요성을 부여해 준다.

그래서 삶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

d. “삶을 가능한 한 충만히 그리고 깊게 사는 것”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데 중요하다. 23)

e. 고난이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고난은 자신감을 고양시키기도 하며 인간관계를 강화시키는 기회가 되고 삶의 철 학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가 인정하듯 고난은 영적 성숙의 자극 제가 되기도 한다. 24)

f. 종교체험 같은 것이 삶의 의미를 증진시키기도 한다. 25)

 

셋째로, 영성과 성스러운 감성이라는 주제로 넘어가보기로 하자.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지 만, 이러한 현상들은 삶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 다.

사실상 종교나 영성을 연구하지 않고 긍정심리학이 행복이나 삶의 의미를 논한다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전 세계의 대부분의 인구가 신을 믿거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 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학문적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로페즈와 슈나이더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 초반의 심리학자들은 영성을 무시하거나, 영성을 병적 현상으로 보거나, 영 성을 영성 그 이면에 놓여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심리적, 사회적, 생리적 기능으로 환원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26)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영성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로페즈와 슈나이더에 따르면 그 이유는 세 가지다. 27)

20) lopez & snyder, 680.

21) lopez & snyder, 680.

22) peterson, 234.

23) b. c. d. peterson, 235 참조.

24) compton & Hoffman, 235.

25) compton & Hoffman, 236.

26) lopez & snyder, 611.

27) lopez & snyder, 611.

첫째는 “영성이 문화적 팩트(cultural fact)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증적 연구들이 영 성을 수많은 인간 기능의 측면들과 연계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는 “미국 심리학회가 종교성을 문화적 다양성의 변수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영성이 그 자체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인간적 동기로 인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8)

로페즈와 슈나이더는 심리학이 영성을 다뤄 야 하는 이유와 동기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심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영성이 인간의 기능에 수많은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영성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연구자들은 영성을 다만 ‘멀찍이’서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주로 직접적이 아닌 먼 척도들을 포함하는 개 괄적 연구들을 의존한다. 가령 개인이 얼마나 자주 교회 가며 몇 번이나 기도하는가와 같은 척도나 영성과 종교성에 대한 자가 평가 같은 척도들에 의존한다.

이 과정을 보다 더 깊이 이 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보다 더 가까이에서, 즉 영성 지향적 사람들을 직접 사귀고,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관계를 익히며, 그들의 제도와 환경에 참여하여 관찰하며, 특별한 영성 자료와 방법을 보다 더 상세히 조사하는 것을 통해 연구해야 한다.

영성공동체와 심리학 사이의 긴장과 반감과 오해의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직접적이고 자세한 연구가 어려울 지 모른다. 그러나 해야 한다. 할 만한 가치도 있다.

영성에 대한 연구는 삶의 무시된 차원을 이해하고 또 사람들이 자신들의 웰빙을 강화하는 것을 돕기 위한 노력에 좋은 전망을 주기 때 문이다.” 29)

실질적으로 영성생활이 인간의 삶과 별개가 아니다.

일상의 삶처럼 영성생활 자체도 인간 실존의 일부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부인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심리학이 영성의 세계관과 방법과 가치들을 심리학의 그것들과 이어줌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식한 사회과학자들이나 정신건강 전문인들 사이에서는 심리영성적 (psycho-spiritual) 대안들을 발전시켜 영성적 자료들을 임상 실천에 통합하려는 실험들이 시도되고 있다.

또한 종교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군의 가치들, 구인(construct)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있으 며, 이러한 영성과 관련된 주제들을 예방, 교육, 치료 대안에 응용하기 시작하였다.” 30)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감성, 즉 종교적 감성인 감사나 용서, 자비와 공감, 겸손, 경외감, 신비감, 회심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연구의 결과들은 영성이 얼마나 인간의 웰 빙에 도움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31)

감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덜 우울감을 보이고 스트레 스도 덜 받았으며 역으로 더 행복한 삶을 갖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32)

감사가 사회적 관 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며,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는 증거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과 가족치료 상담사들은 정서적 친밀감과 유대감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일 감사를 표현하는 훈련을 권고하고 있다. 33)

용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행위임은 틀림없다.

용서가 없다면 화, 분노, 상처와 같은 감정들 삶을 갉아 먹을 것이고 적대감이나 복 수심만 반복될 것이다. 34)

최근의 심리학은 전형적인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은혜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계발하여 은혜 (grace, graciousness)가 얼마나 인간의 웰빙과 정신건강과 삶의 의미부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그 연구는 은혜가 웰빙과 정신강을 증진 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35)

28) lopez & snyder, 616.

29) lopez & snyder, 616.

30) lopez & snyder, 617.

31) peterson, 236-258.

32) peterson, 237.

33) peterson, 237

34) peterson 238.

35) Rodger K. Bufford, Amanda M. Blackburn, Timothy A. Sisemore, Rodney L. Bassett "Preliminary Analyses of Three Measures of Grace: Can They be Unified?" Journal of Psychology & Theology, 2 0 1 5 , Vol. 43 , No. 2, 86 - 97.

듀크 대학의 해롤드 쾨니그(Harold G. Koenig) 의학박사는 “의학 연구 결과들은 기도가 병을 예방해 주며, 병에 걸렸을 경우 빠르게 호전시켜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전했다.

1,500여 건의 신빙성 있는 의학 연구 자료들이 “좀더 신심이 깊고, 좀더 기도를 많이 하는 사 람들이 좀더 나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며, 쾨니그박사는 “건 강과 규칙적인 예배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는 125건의 연구 중에서 85건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대학의 영성·신학·건강 센터의 디렉터인 쾨니그박사는 청각과 시각의 결함을 지닌 환자들에게 기도가 탁월한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 과가 Southern Medical Journal에 실렸다고 말했다.

기도 모임 후에 “이들은 시각 및 청각 검사에서 뚜렷한 개선을 보였다”면서 쾨니그 박사는 “헌신적인 신앙 활동, 특히 신앙 공동체 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좋은 점은 신자들이 병에 더 잘 저항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좀 더 낙관적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더 잘 이겨내고 웰빙을 더 많이 체험한다.

또한 덜 좌절하고, 덜 분노하며, 자살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좀 더 강한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고 혈압이 낮은 편이며 심장 기능도 좀 더 낫다.”

래서 이렇 게까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이 주일날 골프치러가는 사 람보다 더 건강하다.”(마음, 116)

무신론자였다가 신앙과 의학을 연구한 뒤에 기독교인이 된, 연구원이자 작가인 톰 녹스 (Tom Knox)는 기도의 힘에 대한 증거는 놀랍다고 말했다.

”내가 발견한 것들이 나를 압도했 다“며 녹스는 ”지난 30년 동안 신앙이 의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유익하다는 걸 증 명하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신앙이 생명 연장에 유익하다는 연구들이 이어지고 있다.

2006년, 텍사스 대학의 인구 연구자들은 교회에 더 많이 출석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좀 더 장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종교적 참여는 단계적 인 방식으로 성인의 수명에 간여한다.”면서, 녹스는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과 매주 교 회에 출석하는 사람의 기대 수명은 7년의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5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에 거주하는 노인 2천 명을 조사했던 Th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는 예배 참석자 들이 전혀 참석하지 않는 이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 노인학 저널에 실린 4천여 명의 노인에 관한 연구 보고서는 무신론자가 신자들보다 6년 더 빨리 사망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심지어 교회에 가지 않아도 신자들이 무신론자들보 다 더 오래 살았다.

2006년에 미국 고혈압 학회는 교회 출석자들의 혈압이 무신론자들보다 좀더 낮다고 발표했다.

또한 과학자들은 신자들의 유방암 완치율이 비신자들보다 높다는 사실 을 발견했다.

관상 동맥 질환, 류마티스 관절염에서도 더 좋은 결과가 나왔고, 아이들도 수막 염에덜 걸렸다. 프란시스코 제너럴 병원의 연구팀은 393명의 심장병 환자들에게 미치는 기도 의 영향을 조사했다.

환자들 중 절반은 오직 환자의 이름만 아는 낯선 이들의 기도를 받았다. 그 결과 병이 덜 악화되었고, 병증도 덜했고 투약도 줄었다.

빨리 호전되었고 빨리 퇴원했다. 무신론자들은 신앙을 무시할 수 있지만, 과학이 그들 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 다.”라고 녹스는 덧붙였다. 36)

36) http://www.kcjlogos.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45

종교는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한 피터슨의 글을 인용해 본다.

“미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신 앙심은 반사회적 행동을 예방하는 경향성과 관련이 있다. 예배 참석과 같은 신앙심의 지표에 서 높은 점수를 보이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정서 조절 능력이 뛰어났고 공격적인 행동을 덜 했다. 또 한 학교 성적이 더 좋았고 마약과 술을 할 가능성이 적으며 성적인 문제를 덜 일으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좀 더 일관된 것으로 여겼다. 똑같은 결과들이 성인들에 게서도 나타난다.

더욱이 성인들 사이의 종교적 개입은 개인적인 행복과 가족의 생활 만족을 예언한다.”(Peterson, 긍정심리학 프라이머)

그는 또 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된 실례를 소개한다.

"교회가 사회적 정의와 봉사를 강렬 히 추구할수록 각 지역사회에 이익이 되는 다양한 자원들을 제공하는데 명백하게 중요한 역할 수행한다. 이런 교회들은 집회에서 자유 지원제나 다른 형태의 시민 참여와 같은 시민의 의무 감을 가르쳐 줄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교육, 심리적 인 상담, 재정적 지원, 주거, 의류, 음식과 같은 다양한 자원들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지역사 회 내의 생활 만족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6. 정리:

도킨스를 비롯한 신무신론자들은 종교의 해악들을 언급하며 종교는 전혀 의미가 없 으며 무익하니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이들 주장의 오류들과 심리학이 말하는 종 교, 혹은 종교생활의 유용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주관적 경험, 주관적 정서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체험과 영성과 덕목들을 긍정심리학이 실험이나 통계적 방법들을 이용하여 과학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언급한 것은 긍정심리학과 종교가 반드시 일치함을 말하려고 한 것도, 종교의 기능이 오로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안녕 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도킨스류의 종교비판에 신학이 아닌 통계와 실 험 학문인 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대응한다면 그것 또한 변증의 관점에서 좋은 시도 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소개한 것이다.

오늘날은 무신론의 르네상스 시대다.

종교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고 영향력이 점차 축소 되고 있는 시대다.

과학과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공격해 대는 무신론의 공격에 우리는 속 수무책이다

. 종교를 갖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교양과 지성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신 계몽주의를 살고 있다.

사상의 전쟁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무신론자들은 지성의 요새인 대학 을 장악하고 유사 종교화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혹시 무신론자들의 도 전과 조롱 앞에서 골리앗 앞의 사울의 모습은 아닌지?

신앙인들은 지적인 논쟁을 피하며, 지 적 변호를 경건치 못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종교 체험만을 중요시하며 지적인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닉슨대 통령 특별고문이었으며 교도소선교회 설립하고 템플턴 상을 수상했던 찰스 콜슨의 말을 기억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지성주의가 더 경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 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apologia)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4-15)

한국기독교학술원공개강연 자료(2023년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