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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기후위기와 생태적 죄: 마조리 수하키의 논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윤형철.총신대

 

I. 들어가는 말

 

기후위기(Climate crisis)는 오늘날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생명체가 맞 이한 가장 심대한 위협이다.

삼십여 년 전에 몰트만이 생태위기가 단순히 자연환경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위기[이자]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위기” 1)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미래는 예상보다 더 빠르고 치명적인 재난 들로 현실이 되고 있다.2)

이제 기후위기는 단순히 세계 정치와 산업 영역 의 핵심 변수를 넘어, 일상생활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결정적 상수로 자리 매김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독교 신학과 삶의 영역에도 불 가피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후위기가 급속도로 심각해지면서 기후위기 담론장도 시시각각 요 동치고 있다.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 영향 및 적응, 완화에 대한 종 합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출범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1990년부터 최근 까지 정기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보고서는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과 연관되었다’라는 탄식에서,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이 1.5 도를 넘으면 안 된다’라는 다급함으로, 그리고 ‘이미 1.5도 한계점 돌파를 막기 힘들다’라는 절망으로 바뀌어왔다.3)

 

     1) Jürgen Moltmann, God in Creation: A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Gifford Lectures 1984-1985) (Minnesota, MN: Fortress, 1993), xiii.

    2) 2022년 7월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가 도래했 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런 극한의 기후변화가 시작에 불과하며 “우리 행성은 기후 재앙이라는 돌이 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라며 탄식했다. 윤다빈·이기욱, “‘지구가 끓고 있다...온난화 끝, 열대화 시대’ 경고”, 동아일보 (2023. 7. 28). https://www.donga.com/news/ nter/article/all/20230728/120465914/1, 2024년 2월 1일 접속.

    3) IPCC는 1990년부터 2013년까지 다섯 차례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기후변화가 심각해진 2018 년부터 2019년까지 발간된 특별보고서 3건과 2021년부터 2022년까지 발간된 실무그룹 보고서 3건 을 종합하여 2023년에 제6차 평가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하였다. IPCC 보고서는 기상청의 기후 정보포털(www.climate.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기후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별도로, 기후위기를 초래한 원인에 대한 사회적 분석은 이 문제의 심각성 을 더 깊이 드러낸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화석연 료를 기반으로 발전한 과학기술중심주의 산업화’와 ‘자유시장경제를 통 해 모든 종류의 갈등과 경쟁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사회를 무한경제 성장의 틀에 가두고 개인들을 극 한 소비주의에 중독시켰다.

이렇듯 기후위기는 단순히 산업과 경제의 기술공학적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기후정의’라는 윤리적 문제를 동반한다. 기후변화 협상에서 드러난 선진국들의 태도는 단순한 무역협상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준다.

인류 전체와 생태계의 존속이 달린 중차대한 문제 앞에 서 정의와 윤리적 고려가 배제된 채 효용성만 강조되는 현실에 대한 기후 정의론자의 비판적 시각은 주목할 만하다.4)

 

     4) Ian Angus, ed., The Global Fight for Climate Justice, 김현우 공역, 『기후정의: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 (서울: 이매진, 2012), 253. 1997년 교토협약에서 채택된 배출권 거래제나 파리기후협약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 협약과 같은 기후변화 대처 방안이 각국이 협의한 포 괄적 선언을 실현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서 화석연료 기업과 이들의 지원을 받는 각국 정부의 로비 로 타협과 절충을 거듭한 결과 실효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럽연합(EU)의 그린 딜(Green Deal)은 탄소중립, 공정전환,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골자로 삼는 녹색정책이지만 동시에 친환경 신성장 전략으로 타국에 대한 보호무역 수단으로 경제무기화될 수 있다. 기후위기를 넘어 기 후붕괴시대가 도래하면 새로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세계를 자국에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움직임에 관한 관측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 Joel Wainwright & Geoff Mann, Climate Leviathan; A Political Theory of Our Planetary Future, 장용준 역, 『기후 리바이어던: 지구 미 래에 관한 정치이론』 (서울: 앨피, 2023)을 보라.

 

분명한 것은, 기후위기라는 총체적이고 복합적 현상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진단하고 대책 을 모색하는 담론장이 난맥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 간의 협상테이블이든지 연구와 학술의 장이든지 기후위 기 담론장에서 죄의식과 죄책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기후위기는 과학 과 기술과 국제정치를 통해 해결할 ‘문제’이지 회개해야 할 ‘죄’라는 인식 이 희박하다.

많은 과학자가 급진적 전환 없이는 기후위기가 인류에게 피 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한 사람들이 기후 불안(climate anxiety)과 기후 우울증(climate depression) 을 호소하지만, 정작 회심에 버금가는 전환을 위해 필요한 죄의식은 각성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을 압도한 나머지 현대성의 파괴적 힘을 제어하기는커녕 그 해악을 인식하지도 못할 지경 까지 이르렀다는 탄식이 나올 법하다.

기후위기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자연과 생태를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 과 폭력과 오만을 어떻게 단죄하고 또 거기에 연루된 죄를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기독교 신학은 전 지구적 파멸을 초래할지도 모를 기후위기에 가담한 인간의 행동을 통렬히 비판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생태 적 죄’(ecological sin)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가?5)

개혁주의 신학은 기후위 기와 대응이라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위해 생태적 죄 개념에 대 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본 연구는 생태신학 분야에서 다양한 반향을 일으킨 논제에 대한 비 판적 분석을 통해 개혁주의적 관점에서의 생태적 죄 개념의 정립 가능성 을 모색한다.

구체적으로, 마조리 휴잇 수하키(Marjorie Hewitt Suchocki, 1933-)6)가 󰡔폭력에로의 타락󰡕(The Fall to Violence)에서 관계론적 신학 (relational theology)의 틀에서 원죄의 개념을 재해석하여 제시한 논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이다.7)

 

     5) 불과 50여 년 전에 생태문제가 기독교 신학의 의제로 등장하였지만, 생태나 환경과 관련한 주제는 보수신학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생태학적 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 과 자연의 관계를 먼저 고민한 것은 진보신학 진영이었다. 1975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 차 WCC 총회에서 이전까지 주로 사회정치‧경제적 차원에서 ‘인간을 위한 정의’ 구현을 의제로 삼 던 흐름을 ‘생태 정의’의 문제로 확장하였다. 이런 추세에 의해 1983년에 열린 제6차 밴쿠버 총회에 서 에큐메니컬 생태신학의 기초가 된 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정의 평화 창조질 서의 보존) 원칙이 수립되었다. 한편, 복음주의 진영도 환경과 생태문제에 관한 관심과 참여가 증대 되었다. 일례로,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서 작성된 케이프타운 서약서(The Capetown Commitment: A Confession of Faith and a Call to Action)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 에서 창조세계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 다음, “분열되고 깨진 세상”을 위한 헌신을 다짐하는 항목에 서(IIB.5. 고통받고 있는 피조물을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생명의 다양성이 파괴되고 자원이광범위 한 남용되고 파괴되는 현실을 애통해하며, 기후변화의 위협과 이로 인한 빈곤 국가의 고통을 긴박 하게 다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케이프타운 서약서 전문은 https://lausanne.org/ko/statement/ ctcommitment-ko을 참고하라. 2024년 8월 3일 접속. 6) 국내 신학계에 다소 생소한 마조리 수하키는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조직신학 명예교수이자 과정사 상연구소의 공동 디렉터로 과정신학 진영에서 대표적인 여성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수하키의 과정 신학적 관점은 과정철학의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전통적인 화이트헤드주의와 달리 정통 기독교 신 학을 훨씬 많이 수용하고 반영한다고 평가받는다. 수하키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관계론적 신학’ (relational theology)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형이상학적 측면보다 관계론적이고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측면에 관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7) 수하키의 생태적 죄 개념에 관한 국내연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실정이다. 현재까지 이 주제에 관 한 연구는 로즈메리 류터의 제자로 에코페미니즘 신학을 전공한 연세대 신과대학의 전현식 교수와 협성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웨슬레안 신학자 김영선 교수의 작업에 국한되어 있다. 전현식은 수하키가 비판한 니버의 인간론을 더 상세하게 전개하고 그 말미에 수하키의 초월 개념을 간략 하게 언급하는 데 그친다(전현식, “인간실존, 초월 그리고 죄에 대한 생태학적 재구성: 라인홀드 니 버와 마조리 수하키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2 (2004): 151-176). 김영선은 비교적 상 세하게 수하키의 논제를 요약해서 설명하지만,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세밀한 비판을 가하기보다 두루뭉술하게 수하키의 논제가 개혁신학과 상응한다고 결론짓는다(김영선,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죄이해”, 「한국개혁신학」 36 (2012): 207-235). 본 연구는 기후위기의 당면한 현실의 맥락에서 수하키를 다시 살펴보되 선행연구의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더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수하키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죄 개념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생태적 죄 개념을 정립하고자 시도 한 세 가지 주요 패러다임의 전환을 중심으로 수하키의 논제가 지닌 문제 점을 분석하며, 이를 통해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생태적 죄 개념 정립 에 필요한 보다 성경적이며 차별화된 신학적 요소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생태적 죄 개념을 위한 수하키 논제의 세 가지 전환

 

1. 전통적인 죄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

 

수하키는 󰡔폭력에로의 타락󰡕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죄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전통적인 신학은 죄가 무엇보다도 “하 나님에 대한 반역(rebellion against God)”이라고 규정한다.8)

이런 전통적 패러다임을 설정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9)

수하키는 어거스틴이 “기독교 와 유대교와 이교의 신화들을 재구성”하여 죄의 본질과 토대에 관한 신화 적 구조를 발전시켰다고 본다.10)

 

    . 8) Marjorie Hewitt Suchocki, The Fall to Violence: Original Sin in Relational Theology (1994), 김희헌 역, 『폭력에로의 타락』 (서울: 동연, 2011), 33.

     9) 어거스틴에게 죄의 본질은 ‘지향’(orientation)의 문제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 제7권 제16장의 표제를 “악은 실체가 아닌 의지의 왜곡에서 생겨난다”라고 제시한 뒤에 “사악함이란 절대 실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낮은 것들을 향하며 자기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것을 버리고 교만으로 인해 외부에 있는 것을 향해 팽창해 버린 의지의 왜곡”이라고 말한다(St. Augustine, Confessions, 조동 선 역, 『고백록』 (서울: 익투스, 2022), 250). 동일한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 간의 욕구나 사랑 자체가 죄인 것이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고 사랑하는지가 문제라고 본다. 어거스 틴에게 “바른 의지는 선한 사랑이고, 그릇된 의지는 나쁜 사랑이다”(제14권 7장). 죄가 무엇인지를 규명하기 이해서는 악한 행위나 악한 의지 배후에 있는 더 근원적인 힘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어 거스틴이 “부당한 높임”(undue exaltation)이라고 지칭한 ‘교만’이었다(제14권 13장). 이러한 이유 로 어거스틴은 “범죄 행위 자체보다 범죄자의 교만이 더 나쁘다”(제14권 14장의 표제)라고 단언한 다. St. Augustine, The City of God, 조호연·김종흡 역, 『하나님의 도성』 (서울: 크리스천다이제스 트, 2017), 제14권 7장, 13장, 14장을 보라.

     10)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45.

 

여기에는 ‘천상에서 벌어진 천사들의 타락’, ‘최초의 인간에 주어진 영혼의 능력’, ‘인간에게 주어진 자기초월적 능력(자유의지)의 오용’,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에서 비롯된 반역과 하나님 형상의 손상’ 그리고 ‘죄의 유전’이 포함된다.11)

‘하나님에 대한 반 역’이라는 어거스틴 패러다임은 종교개혁 시대에 ‘말씀을 믿는 것에 대한 반역’(불신앙)으로 변형된 채 유지되었고, 원죄의 신화적 요소가 설득력 을 잃은 근대에 들어서도 실존주의(폴 틸리히)나 심리학/사회학(라인홀드 니버)으로 대체되어 그 명맥을 이어갔다.12)

수하키는 전통적인 죄 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첫째, 하나님을 도덕법의 제정자요 심판자로 인식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신 관을 드러낸다.

  둘째, 정치사회적 또는 개인적 권력에 대한 대항을 하나님 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피억압자들의 고난을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셋째, 모든 죄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추상적 원리로 환원시켜 정치 적 고문, 전쟁, 탄압, 아동 학대 등 각 죄의 특수성을 평준화할 수 있다.

  넷 째, 죄의 실제 피해자들을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침해를 가중할 수 있다.

  다섯째, 계층적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피조세계의 가치를 인간 보다 낮추 어 평가할 수 있다.

  여섯째, 죄에 대한 기독교의 문제의식을 해명하기보 다 인간의 자기 신격화를 부추겨서 죄를 강화할 수 있다.

  일곱째, 신화화 된 추상성으로 인해 실제적인 경험과 동떨어질 수 있으므로, 현실에서 자 행되는 죄를 직접 기술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13)

특히, 전통적인 죄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상대방과 우리의 환경인 지구에 대해 불행을 초래케 하는 방식의 광폭함과 다양성을 기술하는 데 적절하지 못하다”라 는 이유로 새로운 관점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수하키는 주장한다.14)

 

   11)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9-44.

   12)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46. 개혁주의 신학의 죄 이해도 이런 흐름 안에 있다. 예 를 들어, 헤르만 바빙크의 죄 개념은 어거스틴으로부터 비롯한 서구신학 전통의 영향을 그대로 반 영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간략한 분석과 정리는, 이경직,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나타난 죄 이해”, 「조직신학연구」 25 (2016): 89-100을 참고하라.

   13)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5-38.

   14)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5. 

 

이런 문제 제기를 통해 수하키가 제시하는 대안적 기술방식은 죄의 근원적 본질을 “피조세계에 대한 반역의 폭력(the violence of rebellion against creation)”으로 재개념화하는 것이다.15)

이는 죄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오래되고 은폐되었던 문제를 가시화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반영한다.16)

따라서 수하키가 죄의 일차적인 명명으로 제시한 ‘피조세계에 대한 폭력’은 어거스틴의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욕망’ 이나 니버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인간의 한계를 설정해놓은 하나님에 대 한 실존적 반역’ 17)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죄를 기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5)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3.

       16)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8-39.

       17)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38. 

 

다만 수하키는 죄가 최우선적으로 피조세계에 대한 반역이며 이차적으로만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고 주장함으로 써, 타자와 자연에 대한 폭력 그 자체를 더욱 근원적인 죄로 규정하여 악 의 실재성과 신학적 설명 사이의 직접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수하키가 관계론적 신학의 관점에서 죄 개념을 생태학적으로 재정립하기 위해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축을 옮기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다고 보고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려고 한다.

이하에 서는 수하키의 논의를 세 가지 전환의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2. 초월성의 전환: ‘수직적 초월성’에서 ‘수평적 초월성’으로

 

수하키는 초월성의 개념을 재정의하여 ‘수직적 초월성’을 ‘수평적이고 관계적인 초월성’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전통 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한 반 역’으로 규정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 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서 논의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죄는 하나 님과 동등해지려는 자기과시의 죄, 즉 교만으로 환원되었다.

수하키는 라인홀드 니버의 죄 개념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신학에 주목한다.

페미니즘 신학자들은 전통 신학이 신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참여하면서 저지르는 육욕의 죄보다 영적·정신적인 자기과시인 교만의 죄를 중시하여 전자를 후자에 흡수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교만 못지않게 타자를 절대화함 으로써 자기실현을 가로막는 자기비하의 죄(육욕의 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수하키는 페미니즘 신학의 니버 비판을 단초로 삼아 초월 성의 근거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본성(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일반적으로 초월은 자연에 대한 반립적(antithetical) 개념으로 여겨지 지만, 수하키는 본성/자연 안에도 일정한 형식의 초월성이 있다고 주장한 다.

수하키가 말하는 “자연에 있는 초월성”은 ‘무한의 형식을 갖는 유한’ 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연 안의 각 존재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이 지닌 개성을 통해” 실현하는 양태와 관계의 초월성 을 의미한다.19)

유한한 존재는 양태와 관계를 가능케 하는 자신의 ‘유동 성’을 통해서 무한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자연의 다양한 존재들은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유동성과 영속성을 통해 존재 자 체를 무한히 이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은 ‘유한과 무한의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도 이런 이중구조 안에 포함된다고, 수하키 는 주장한다.20)

‘세계(자연) 너머’가 아닌 ‘세계 안에서’ 초월성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수하키는 세상 안에서 초월성을 획득하는 ‘세 가지 양태의 자기 초월성’ (three modes of self-transcendence)으로 기억(과거), 공감(현재), 상상(미 래)을 제시한다.21)

 

    18)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61-62.

    19)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61.

    20)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61.

    21)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67. 

 

첫 번째 자기초월성인 기억은 자신의 과거와 관계를 맺 으면서 일부를 ‘들어올림’으로써 과거를 재배치하고 초월한다.22)

자아는 과거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 구성체이므로, 이러한 기억을 통한 자기초월 성은 필연적이고 근본적이다.

공감을 통한 두 번째 자기초월성은 현재 안 에서 만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이뤄진다.

자아는 공감을 통해 타자를 존 중하고 주체로서의 타자에 대해 개방하면서 무한한 변화에 참여한다.23)

자기초월성의 세 번째 양태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현재 의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다.

수하키는 ‘수직적 초월성에서 수평적 초월성으로의 전환’을 통해 죄의 기준 또한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자연의 수평적 구조 안에서 “피조적 존재의 상호의존성 자체가 서로의 안녕을 규정하는 경 계들”로 재정립한다.24)

 

     22)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68.

     23)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74-75.

     24)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77. 

 

죄는 수직적 초월성의 경계를 침범하기보다 현세적 초월성의 양태를 좌절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기억을 통한 초월성의 실패는 폭력과 같은 과거가 트라우마로 지속되는 것이고, 공감의 실패는 집단적인 폭력의 악순환이며, 상상력의 실패는 폭력이 사회구조를 통해 영속되는 것이다.

수하키의 논제에서 근본적인 죄는 ‘피조세계 안에 서 자기초월의 실패’로 재정의된다.

수하키의 현세적 초월성 개념은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우월한 존 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안에 속해 있음을 강조한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주와 생명체의 존립은 자기희생(수하키의 표현대로라 면, 자기초월)을 통해 가능하다.

생태계에서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 의 희생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 파괴와 기후위기는 이러한 자기희 생적 초월의 방식이 부정되고 교란될 때 초래된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폐 해는 자기희생과 상호주의라는 생명 원리를 부정하는 데서 가장 심각하게 발생한다.25)

수하키는 인간 우월주의의 표층구조의 이면에 세상과 만 물을 위계적이고 수직적 구조로 인식하여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지배한 다는 수직적 초월성의 기저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수평적 초월성으로의 전환은 이러한 기저 구조 자체를 변혁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3. 우선순위의 전환: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서 ‘피조세계에 대한 폭력’으로

 

수하키는 초월성의 전환을 통해 죄를 판가름하는 기준을 수직적 초월성에서 수평적 초월성으로 전환한 후, 죄 정의의 술부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서 ‘피조세계에 대한 폭력’으로 전환한다.

그에 따르면 죄는 일차 적으로 “피조세계의 어떤 차원에서 저질러진 것일지라도 그 안녕을 위배 하는 불필요한 침해”를 의미한다.26)

죄에 관한 수평적이고 공동체적인 재 정의에서는 어떤 존재도 다른 존재에 대해 우선성을 주장할 수 없다.

피조 세계의 안녕(the well-being of any aspect of creation)은 모든 존재의 안 녕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수하키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한 ‘대체’가 아니 라 ‘전환’이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 에 대한 침해가 곧 하나님에 대한 침해”임을 강조하고자 함이라고 주장한 다.27)

 

     25) William H. Becker, “Ecological Sin,” Theology Today 49/2 (1992): 162.

     26)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85.

     27)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85. 

 

‘피조세계에 대한 폭력이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라는 등치의 근 거에 대해서, 수하키는

   i) 기독교 신학의 하나님에 대한 전제,

   ii) 피조세계 와 하나님의 관계론적 이해,

   iii)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험(세계를 함께 느끼시는 하나님)의 단계를 거쳐서,

   iv) 피조세계에서 저지르는 모든 죄는 하나님에게 짓는 죄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말한다.28)

여기에는 수하키가 의존하는 과정신학의 전제가 깔려있다.

수하 키는 인간 사유의 해석적이고 관점적인 특성을 인정하는 ‘관점주의 (perspectivism)’를 따른다.

성육신적 기독교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유동과 지속의 ‘역사’ 속에서 전달되며,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 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단일한 해석’이나 ‘최종적 지식’은 있을 수 없다 는 것이다.29)

수하키에게 관점적 지식은 관계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우리 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 은 우리를 위한 지식이요, 우리를 포함한 사건 안에” 있는 지식으로서 “관 점을 지닌 진리이고 사건으로서의 지식”인 것이다.30)

수하키의 관점론적 존재론(perspectival ontologies)은 인간과 세계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적용된다.

그녀가 의존하는 관계론적 신학은 ‘하나 님께서 피조세계에 참여하시고 함께하심’을 강조한다.

관계론적 신학은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에 최초의 지향(initial aim)을 부여하셨음을 전제한 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초의 초월적 타자성을 유지하기보다 자신을 “주체적 지향으로 전환시키고,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31) 이런 과정-관 계론적 관점에서 볼 때, 죄를 단지 ‘하나님의 최초의 지향으로부터의 이탈’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 지향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향은

  i) 결정론적이기보다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ii) 이미 세계 안의 실제적 조건들과 상황화되어 관계를 맺고 있고,

  iii) 복잡하고 다양한 미덕들을 함축할 수 있으며,

  iv) 최초 지향들로부터의 이탈을 모두 죄라고 규정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32)

 

    28)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85.

    29)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91.

    30)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91, 93.

    31)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01.

    32)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02.

 

이런 이유로, 수하키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최초의 지향보다  하나님의 지향을 따라 수행하지 않은 것, 즉 ‘피조세계의 안녕에 대한 침 해’가 더 본질적인 죄의 술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죄가 파괴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 위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명령에 암호로 심겨진 안녕이 침해되었기 때문이다.” 33)

하나님의 최초 지향으로부터 벗 어나는 경계, 즉 죄의 기준은 ‘저 너머’에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의 세계 안에서 혹은 세계를 통해’ 상황화되어 있다.

최초의 지향을 설정 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은 이미 세계 안에 함께하시며 세계를 느끼시고 세계에 의해서 영향받고 계신다.34)

 

     33)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15.

     34)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10. 

 

그렇기에 피조세계에 가해진 침해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한 침해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느끼신다’.

이렇듯 수하키의 논제는 관계론적 신학의 전제를 통해 ‘최초 창조와 그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지향과 수행’으로 구분하되, 둘 사이의 연속성 에서 전자보다 후자에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는 단일성에서 복잡성 으로, 단순성에서 다양성으로,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의 전이를 보여주는 신학적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4. 기준의 전환: ‘하나님 안’에서 ‘피조세계 안’으로

 

수하키의 마지막 전환은 죄를 측량하는 기준과 관련된다.

죄가 ‘피 조세계의 안녕에 대한 반역’이라면 ‘안녕의 기준’(the criterion of wellbeing)은 무엇인가?

수하키는 안녕의 기준으로

   i) 세계 안의 상호의존성,

   ii) 관계적 하나님,

   iii) 하나님과 세계의 공존성을 제시한다.35)

 

      35)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18. 

 

첫째, 수하키는 지구상 모든 존재의 특성을 ‘상호의존성’으로 규정한 다.

생태계에서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미생물, 무기물 등 다양한 존재 들이 각자의 중심과 관점을 가지고 모든 생명권을 위해 공헌한다.

모든 존재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유형과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상호의존성은 구조적으로 상호 반영과 공유의 유사성이자, 실제로 서로에 게 의존하며 존재하는 실상이다.

플랑크톤, 크릴새우, 고래, 포경업, 일본 어부의 생계가 서로 연관된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생태계에서 상호의존성 은 자명하다.36) 이는 물질적 삶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 차원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하키는 관계성이 사물의 일차적 특징이며 “각 사물은 관계성 안에서/을 통해서 자신이 된다”라고 주장한다.37)

만물이 관계성을 통해 서로에게 엮이고 상호의존성으로 이어져 있기에, 한 사물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친다.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한 존재의 안녕은 모두의 안녕에 달려있다.38)

상호의존성은 “안녕의 호혜적 관계”를 의미하며, 상호책임성을 요구한다.

   둘째, 수하키는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 기초한 보편적 안녕이라는 기준에서 ‘모든 존재’에 하나님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에 관한 관계론적 이해가 보편적 안녕의 기준에 포함될 때, 안녕을 향해 가는 상호의존성에 진리와 사랑과 아름다움의 특성이 부가될 것이다.” 39)

모든 존재는 하나의 현실적 우주에 있기에 자신 안에 미래를 포함할 수 없 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시간에 걸쳐 있어 세계의 다양한 양상들을 다 른 모든 양상의 관계 속에서 느끼시며, 모든 존재들을 전체로서 경험하신 다.40)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인 진리, 사랑, 아름다움은 관계적 세계에서 무한한 상황과 방식으로 모든 존재에게 적용된다.41)

 

     36)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21.

     37)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76.

     38)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26.

     39)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29.

     40)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30-131, 135-136.

     41)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37. 

 

   셋째, 상호의존성과 보편적 안녕의 기준에서 볼 때, 원죄는 피조세계에 대한 폭력이다.

수하키에 따르면, 전통적 신학에서 원죄로 여겨온 교 만, 자기중심성, 본질 등은 폭력성에서 비롯된 것이다.42)

사냥, 약탈, 노예 제, 전쟁 등 인간의 공격본능은 기본적으로 자기보존을 위한 것으로, 다 른 존재와 어떤 형태의 친밀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사회적 결 속본능과 목적을 공유한다.

따라서 자기보존이라는 목적을 위해 천성적 인 공격성은 어느 지점에서 억제되어야 하며, 초월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 다.43)

죄는 자기보존에 필수적인 관계성을 기만적으로 부인하거나, 본능 적 폭력을 넘어서 더 충만한 인간성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44)

이런 이유에서 수하키는 죄를 “피조세계의 무엇에든 가해진 불필요한 폭 력(필자의 강조)”이라고 규정한다.45)

상대에 대한 폭력은 상호의존성과 보편적 안녕의 원리로 인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침해가 되며, 자기보존 을 위해 사용된 폭력이 오히려 자기파괴의 원인이 되는 셈이다.

안녕이 보편적이듯이 죄 또한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46)

 

     42)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64-167.

    43) 수하키는 인류의 동물적 공격성과 자기보존 본능의 관계를 독일의 진화생물학자 Christoph Wassermann의 연구를 원용해서 설명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개혁신학에서도 이와 유사한 통 찰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청교도 설교가 스테판 차녹(Stephen Charnock, 1628- 1680)은 인간의 본성인 자기애(self-love)를 삼중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본성적인 자기애(natural self-love)는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 수면을 취하는 본능으로, 하나님께서 모 든 생명체에게 자연법칙의 일부로 부여하신 것이다. 둘째, 육적인 자기애(carnal self-love)는 본 성적인 자기애가 과도하게 변질되어 우리의 사고와 애정, 계획이 오직 자신의 육적인 이익과 관 심사만을 위해 사용되며 결국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가 된다. 셋째, 은혜로운 자기애(gracious self-love)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어 자기사랑을 더 고상한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발휘하는 것이다. 차녹의 통찰대로 죄악 된 자기애는 결국 자기혐오에 불과하며, 이는 자기보존 의 방식인 폭력이 과도하게 확장될 때 자신을 포함한 지구의 전 존재의 안녕을 위협하고 파괴하 는 자기파괴가 된다는 수하키의 통찰과 상통한다. Stephen Charnock, The Complete Works of Stephen Charnock, vol.1: Discourses on Divine Providence and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 (Edinburgh: James Nichol, 1913), 223-224.

    44)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66.

    45)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72.

    46) 전통 신학이 원죄의 보편성을 혈연적 유전이나 언약의 원리에서 찾는 반면, 수하키는 폭력성이 진 화과정에서 인류에 뿌리내렸으며, 인류의 상호연대성을 통해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문화 적 구조에서 영속화된다고 본다. 

 

관계성의 내 재적 본성에 의해 모든 생명체와 사물은 서로의 선에 연루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서로의 악에도 연루되어 있다.

그렇기에 폭력이 일으킨 악은 우리 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숙이 모든 생명체의 층위로 퍼 져나가고 침투한다.47) 더욱이 죄악에의 연루 또한 은밀하고 광범위하다.

우리는 거대한 사회적, 생태적 악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 수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죄에 가담하고 그 구조의 일부가 되어 죄악 된 구조를 영속화한다.48)

이처럼, 수하키는 피조세계의 상호의존성과 그에 따른 보편적 안녕을 죄의 기준으로 설정함으로써 원죄 개념을 신학적 범주에만 국한하지 않고 현실로 확장하는 일종의 “생태학적 현실주의”(ecological realism)49)를 반영한다.

 

    47)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178-179.

    48)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의 타락』, 228-229.

    49) 이 표현은 William Becker의 “Ecological Sin”에서 빌려온 것이다(Becker, 163).

    50) William H. Becker, “Ecological Sin,” 157-158.

 

III. 수하키 논제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적 비평

 

1. 생태적 죄 개념을 위한 신학적 재구성의 한계

 

생태문제를 죄 교리와 연결한 수하키의 논제는 생태신학 분야에서 독 보적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는 생태신학 연구에서 죄의 개 념이 상대적으로 간과됐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윌리엄 베커 (William Becker)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50)

  첫째, 전통적인 신학은 죄로부터의 인간 구원과 구속주이신 중보자 그 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반면,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세계로의 임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시해왔다.

  둘째, 전통적인 신학에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강조는 세상 전체가 타락했다는 부정적 인식을 심어주어, 물질의 영성을 평가절하하는 금욕주의나 탈속적인 신앙을 조장하였다.

  셋째,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고 신적 중보자를 통해 은혜로만 구원받 을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이 어떻게 든 이 난관에서 인류를 건져주실 것이다’라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반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수하키의 연구는 기존 생태 신학 담론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 목할 만하다.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기후위기나 생태문제를 진단하고 명명하기 위해 죄의 개념은 구체화하고 확장될 필요가 있다.

생태계에 대한 무차별적 착취와 개발의 파괴행위, 이를 조장하고 가속하는 자본주의의 압도 적인 위세, 물질적인 성공을 영적 충만과 혼동하는 세속적 물질주의의 만 연 등 인간 외의 생명을 소외시키고 파괴함으로써 인류 스스로를 파괴하 는 폭력의 악순환을 신학은 어떻게 명명해야 하는가?

예견된 파멸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무한한 자본주의적 욕망과 자기파괴적 행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데에 ‘원죄’보다 더 적합한 개념은 없을 것이다.

수하키가 제 시한 통찰―피조세계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책임성, 현세적 초월성, 피조세계의 안녕, 원죄의 본질로서 폭력, 폭력적 악의 광범위한 침투성―은 기후 위기를 초래한 개인, 사회, 국가의 죄악된 성향과 구조의 깊은 뿌리와 보 편적 영향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개념과 통찰을 제공한다.

수하키는 인류의 상호결속과 모든 생명의 상호의존성 및 상호책임성을 근거로 세 가지 양태의 자기초월을 통해 전 지구적 차원으로 연결된 폭력의 구조를 폭로하고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후와 생태를 파괴하는 폭력은 자본주의와 사회문화, 신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극우민족주의 와 자국 이기주의와 같은 강력한 체제에 의해서 형성되고 유지되며, 우리는 그 체제의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수혜자이자 동조자이다.

어떤 사람이 기후위기와 생태파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고통에 공감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고, 대신 자본주의와 소비문화의 가치체계에 속한 상태에 머물러 생태적 폭력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기후 위기 배후에 도사린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생태적 죄의 식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은 수하키의 논제가 남긴 가장 큰 공헌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수하키의 논제에는 치명적인 결 함이 있다.

수하키는 생태적 관점으로 죄를 명명하기 위해 기독교의 기 본 교리 전체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시도하는데, 이는 보수복음주의 및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생태신학적 통찰을 얻는 과정에서 정 통 신학 체계의 근간을 훼손하는 득어망전(得魚忘筌)의 우를 범하는 일 이다.

다시 말해서, 생태적 관점이 신학 전체를 새롭게 규정하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작용할 경우, 기독교 신학의 다성적 정합성(polyphonic coherence)51)을 훼손하는 단성적(monologic), 환원적(reductive) 이데올로기로 비화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52)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된 시각은 현실 인식을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에 포섭된 이들에게 허구와 위선 의 편협한 세계관을 주입하여 지적 진실성과 윤리적 통합성을 저해할 수 있다.53)

 

     51) 수하키가 지지하는 ‘관점주의적 존재론’은 근대의 토대주의 인식론(foundational epistemology) 을 반대하는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alism)를 반영한다. 이러한 접근은 진리의 정합성과 통 일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해석하고 표명하는 신학의 관점과 서술은 다양할 수 있 지만, 그것들은 진리의 정합성과 통일성을 변주해내는 ‘다성적 담화’(polyphonic discourse)이자 ‘교향학적 진리’(symphonic truth)여야 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Anthony C. Thiselton의 The Hermeneutics of Doctrine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2007), 136-137을 참조하라.

    52) 어떤 고상한 인간의 사상도 이데올로기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가장 칭찬받을 만한 대의도 범죄적 야만을 위해 왜곡되고 도구화될 수 있으며, 신학도 예외는 아니다.

    53) 윤형철, “우상의 또 다른 얼굴,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우상화와 우상적 기능에 대한 비판”, 「생 명과말씀」 제28권 제3호 (2020): 185.

 

역설적이게도, 생태주의는 역사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변질된 사례가 있다.

‘생태학’(ecology)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제 안한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 1834-1919)의 이론은 나치 정권의 우생학 정책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에서 요제프 멩겔레(Josef Rudolf Mengele)가 수행한 반인류적 인체실험은 헤켈의 영향을 받은 우생학 연구의 극단적 형태로 볼 수 있다.

나치독일이 추진한 녹색 운동은 19세기 후반 독일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환경문제를 개선하려는 생태 운동이면서, 동시에 아리아 인종의 순수한 혈통과 건강한 토양을 보존한다는 우생학적 명분 아래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에코파시즘 (ecofacism)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54)

이런 역사적 사례는 생태주의 가 결코 가치중립적이거나 그 자체로 보편타당한 관점일 수 없음을 시사 한다.

따라서 생태주의가 신학적, 실천적 의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성경 적 해석학과 개혁주의 신학의 틀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재해석되 며, 조율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수하키 논제는 그녀가 ‘관계론적 신학’이라 명명한 과정신학의 해석적 틀에서 구축되었기에, 과정신학에 내재한 이론적 한계점을 불가피하게 내 포하고 있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유신론을 수용한 과정신학은 전 통적 유신론의 핵심 개념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폐기하고 하나님과 세계 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급진적 내재주의 신학을 제시하였다.

과정신 학의 만유재신론적 하나님은 악을 물리칠 절대적 전능함이 없으며, 주권 적 통치보다는 “설득을 통해 세계 안에서 그리고 세계를 통해” 역사하며, 세계를 다스리는 존재가 아닌 “세계와 함께 고난당하는” 존재로 묘사된 다.55)

 

    54) 나치의 녹색운동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는 Peter Staudenmeier의 “Fascist ecology: the ‘green wring’ of the Nazi Party and its historical antecedents,” The Pomegranate 15 (2001): 4-21을 참고하라.

   55) Roger E. Olson, The Journey of Modern Theology: From Reconstruction to Deconstruction, 김의식 역, 『현대 신학이란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의 재구성에서 포스트모던 해체까지』 (서울: IVP, 2021), 544-546. 

 

이러한 과정신학적 신관은 전통적 유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동성과 불변성으로 단정하고, 그 대신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 며 소멸하는 실재의 일부로 하나님을 편입시킨다.

이러한 급진적 재해석 은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수용하기 가장 어려운 지점으로 평가된다.

 수하키가 호소한 인류의 연대성이나 피조세계의 안녕의 보편성 개념 은 자연주의 생태이론이나 진화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피조세계 안에서’ 내재적 원리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피조세 계의 유기적 결속과 죄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과 피조세계 간 의 초월적/수직적 관계를 해체하는 접근은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수평 적이고 현세적인 차원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통일성 있게 통합하는 원리 는 필연적으로 초월적 창조주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구심력이 강할수록 그 반작용인 원심력이 강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이 명 확해질수록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상호연관성과 상호책임성이 더 강 화된다는 역설적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 신학이 유 지해 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간의 긴장’을 단순히 ‘내재성으로의 통합’으로 해소하는 것은 신학적 깊이와 복잡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수하키의 접근법은 전통적인 신학 담론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2. 인간중심주의의 반성과 반인간주의의 위험성

 

생태적 죄의 개념화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요구한다.

생태분야의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56)

 

    56) 인간론의 패러다임적 변화의 필요성은 에코페미니즘에서 더욱 부각되어 왔다. 에코페미니스트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는 기존의 인간론으로는 기후문제를 제대로 다루거나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 한다. Sallie McFague, A New Climate for Theology: God, the World, and Global Warming (Minneapolis, Minn: Fortress, 2008), 45.

 

인간중심주의가 현재의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 를 초래한 주요 심리적 기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 내에서 광범위한 합 의가 형성되어 있다.

수하키가 생태적 공감을 촉구하는 것 역시 이러한 맥 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근대 이후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이고 변혁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을 객관화하여 통제, 조작, 생산/재생산의 대상 물로만 취급해왔다.57)

데카르트에서 기원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만물은 결정론적으로 운명 지어진 기계로 여겨졌고, 근대 서구인은 유기  전체성을 지닌 자연을 기계 부품처럼 조각내어 세분화한 뒤 인간중심의 관점과 기준으로 재조립함으로써 자연을 “물화(reification)”하였다.58)

물화된 자연은 인간과 상호의존하는 실체가 아닌, 인간의 분석과 통제와 사용에 종속된 사물(thing)에 불과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에 내재하는 친밀성이 부정된 세상에서 위계의 상부이자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차 지하게 되었다.59)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근대적 사고와 행태의 중심에 ‘인간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기독교 신학과 윤리를 향했다.

중 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린 화이트(Lynn White Jr., 1907-1987)는 1967년 에 발표한 논문 “우리의 생태 위기의 역사적 뿌리” 60)에서 기독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중에서 가장 인간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화이트는 창세기 기사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주어진 문화명령(‘땅을 정복하라’, 창 1:28)에서 비롯된 유대 - 기독교 전통의 인간중심주의가 근대 과학기술주의와 인간의 자연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작용했다고 주 장했다.61)

 

    57) 대화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신과 동료인간과 자연을 도구화하여 객관적 분석과 비인격적 지 배의 대상으로 삼는 관계맺기 방식을 ‘나-그것’(Ich-Es)라고 불렀다. ‘나-그것’의 관계는 인격적이 고 대화적인 주체와 주체의 개방과 포용의 관계맺기 방식인 ‘나-너’(Ich-Du)와 대조된다. 이에 대 해서, 윤형철,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에 표명된 대화철학적 인간론 다시 보기: 신학적 인간론과 의 대화 가능성을 중심으로”, 「생명과말씀」 제34권 (2022): 201-235를 참고하라.

    58) Jürgen Moltmann, “The Transformation of theology in the present climate crisis,” HTS Theological Studies 79 no 2 (2023): 3.

    59) 김도훈, 『생태신학과 생태영성: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회복을 위하여』 (서울: 장로회신학대 학교 출판부, 2009), 60-66.

    60)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Science 155 (1967): 1203-1207. 61) Lynn White Jr., “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 1205. 

 

인간중심주의와 기술만능주의에 따른 자연 남용과 생태파괴의 책임이 기독교에 있다고 지목한 것이다.

그 이후 기독교는 인간중심주의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린 화이트는 빈약하고 세련되지 못한 근거를 바탕으로 근대 이후 발전 한 세속적 인간중심주의로 향해야 할 비난을 기독교로 돌렸다.62)

현대의 기술진보주의와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뿌리를 히브리 전통이나 기독교 성 경에서 찾는 것은 부당하다.

극단적이고 신격화된 인간중심주의는 기독 교가 사회의 지배적 세계관이었던 시대보다 기독교가 세속사회에 종속된 근대 이후에 발생한 병리 현상이기 때문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기형적 실천 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63)

 

     62) 린 화이트의 논제는 많은 신학자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반박되었다. 박찬호는 화이트의 주장이 i) 창세기 1, 2장에 대한 그릇된 주해에 근거하였고, ii) 근대 자연과학의 기원을 중세 기독교 신학에 서 찾는 것은 막연하고 타당성이 부족하며, iii) 오늘날의 생태위기는 기독교 창조론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론으로부터 이탈한 탓이라고 지적하며 반박하였다. 박찬호, “기독교 창조론과 생태계 위기: 린 화이트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반론”, 「조직신학연구」 37 (2021): 62-92를 보라.

    63) 전현식, “기후변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 「기독교사상」 54(11) (2009): 37-38. 전현식도 기독교가 현재의 기후위기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다는 생태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여 일일이 반박하면서, 참 된 기독교적, 성경적 전통에 생태적 영성의 요소가 풍부하게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생태문제의 해결을 위해 요구되 는 인식의 전환은 인간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의 이분법적 대립이 아 니다.

인간중심주의에 반발하는 ‘반동적 생태중심주의’(reactionary egocentrism)는 인간의 가치와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인간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생태적 관점은 반(反)인간중심주의(anti-anthropocentrism)가 아 닌 탈(脫)인간중심주의(post-anthropocentrism)를 지향해야 한다.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 보는 이원론적 위계 구조를 탈피하고, 다른 존재들과의 근본적 상호연관성과 상호의존성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은, 동 시에 생태계 전체와 개별 생명체들을 돌보고 가꿀 책임과 특권을 받아들 이는 일이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탈중심화/재중심화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통해 조율되어야 할 문제이다. 인간중심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는 단순히 인간의 위치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 안에서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론적 위치를 확립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자 기 신격화 경향으로부터의 탈중심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참여자로 피조세계를 책임지고 돌보는 사명을 회복하는 재중심화를 의미 한다.64)

이와 관련하여, 리처드 미들턴(Richard Middleton)은 창세기 1:26- 27의 ‘하나님의 형상’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늘(우주의 지성 소)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땅의 영역(성소)에 전하는 통로 로서의 인간의 소명”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65) 하나님의 형상이 가리키는 중간성(betweenness)은 인간이 땅(자연)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도, 땅의 운명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를 땅 에 나타내야 하는 제사장적 왕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이 피 조세계와의 관계에서 감당해야 할 청지기적 왕직의 사명과 방식은 그리 스도를 통해서만 알려지고 실현된다.

하나님의 형상됨을 자연 위에 군림 하는 인간중심주의로 보는 화이트의 오독을 교정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66)

 

     64) Sallie McFague, A New Climate for Theology, 58.

     65) J. Richard Middelton, “A New Earth Perspective,” in Four View on Heaven, ed. Michael E. Wittmer, 오현미 역, 『천국에 대한 네 가지 견해』 (서울: IVP, 2023), 112.

    66) 김경철이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중심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과 삼 위일체적 생태신학’도 본 논문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김경철,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자연에 대한 생태신학적 고찰”, 「조직신학연구」 33 (2019): 10-41.

 

피조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종말론적 이해 역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해독제이다.

하나님 형상인 인간이 피조세계에서 제사장적 왕으로 섬긴 다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창조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이해’ 를 전제한다.

현재의 땅은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하게 경험하지 못하기 때 문에, 성례전적 이해는 곧바로 종말론적 이해를 요구한다.

우주적 구속 이 완성되는 비전을 제시하는 고린도전서 15:28의 종말론적 미래는 땅과 거기에 거하는 모든 생명이 참여하는 생태학적 미래를 포함한다.

미들턴 이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성경에서 구속은 “땅에서 저주가 일소되고(계 22:3), 피조물이 부패의 속박에서 해방되어(롬 8:19-20)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며, 그곳에는 의가 거한다(벧후 3:13; 계 21:1)”라고 묘사된다.67)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이 구속되는 성경의 종말론적 완성에서 “인간과 인 간을 둘러싼 땅의 환경은 서로 얽혀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세상의 갱신 없 이는 생각할 수 없다.” 68)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생태적 죄를 이해하기에 적합한 개념은 수하키 의 생태중심적인 ‘피조세계의 안녕’보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성경적 개념 인 ‘샬롬(~Alv')’이다.

코넬리우스 플랜팅가(Cornelius Plantinga Jr.)는 샬 롬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정의와 충만과 기쁨으로 한데 어우러지 는 것을 일컬어 히브리 선지자들은 ‘샬롬’이라고 한다.…성경에서 샬롬은 ‘보편적인 번영, 온전함 그리고 기쁨’을 뜻한다.

본성적인 필요가 다 충족되 고 타고난 은사가 충실하게 활용되는 풍성한 상황, 창조주이자 구주께서 문 을 여사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피조물들을 환영하심에 따라 즐거운 경이감이 고취되는 그런 상황이다. 다시 말해 샬롬은 ‘만사의 당위적 존재 양식(the way things ought to be)’이다.69)

 

      67) J. Richard Middelton, 『천국에 대한 네 가지 견해』, 132-133.

      68) J. Richard Middelton, 『천국에 대한 네 가지 견해』, 133

      69) Cornelius Plantinga Jr., Not the Way It’s Supposed to Be: A Breviary of Sin, 오현미 역, 『우 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 (서울: 복있는사람, 2017), 36. 

 

샬롬은 하나님과 피조세계가 이르게 될 궁극적 상태를 지칭하는 개념 으로 ‘총체성’, ‘완결성’, ‘풍요와 번영’, ‘정의’, ‘구원’, ‘희락’과 같은 다양 한 의미가 서로 맞물리고 소통하여 더 큰 뜻을 그려낸다.

샬롬에는 구조와 과정, 그리고 최종적 결실의 종말론적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

즉, 샬롬의 기반은 진실과 정의의 결핍이 없는 구조적 완결성과 통일된 전체성이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상호나눔과 공감, 참여와 섬김, 사랑이 채워질 때 만 물은 풍요로움과 복된 번영을 누리게 되며, 샬롬 공동체는 춤과 음악과 웃 음이 어우러진 축제의 활기가 넘치고 소진과 권태를 알지 못하는 희락으 로 가득하게 된다.

플랜팅가는 죄가 샬롬을 거스르고 화평을 깨뜨림으로 써 세상의 당위적 존재 양식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70)

 

     70) Cornelius Plantinga Jr., 『우리의 죄, 하나님의 샬롬』, 41.

 

세상의 당 위적 존재 양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죄로 인해 손상된 구조적 완결 성 또한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의’ 샬롬을 훼손 또는 훼방하는 것이다.

요컨대, 개혁주의 신학이 지지하는 참된 기독교 창조신앙과 샬롬의 비전은 인간중심주의적이거나 반생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3. 생태적 죄 개념의 윤리적 딜레마

 

생태주의는 근대의 기계론적 존재론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 전체론적 존재론을 상정한다.

전체론적 존재론에 근거한 생태중심적 윤 리학은 생태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유기적 연결과 상호작용, 그로 인한 상 호책임 관계에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도덕적 체계를 도 출하고자 한다.71)

 

    71) 생태중심적 윤리의 개념은 1949년에 발간된 Aldo Leopold의 책 『모래 마을의 달력』 (A Sand County Almanac: With Essays on Conservation from Round River. New York: Ballantine Books, 1949)에서 ‘대지 윤리’(Land Ethics)라는 개념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더욱 체계적인 방 식으로 생태중심적 윤리가 표명된 자료는 Paul W. Taylor. Respect for Nature: A Theory of Environmental Ethic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을 참고하라. 

 

이런 이유에서 수하키도 생태윤리적 동기와 실천 방향 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수하키의 관계론적 생태윤리는 현실과 실존에 대한 인식이라 는 차원에서 일정 수준의 설득력을 제공하지만, 초월적 원리와 교리적 기 반을 외면함으로써 윤리의 구속사적 맥락과 인간 삶의 심층적 차원에 대 해서는 침묵한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특히, 관계론적이고 내재적 인 존재론에 기반한 생태윤리는 ‘초월적 기준 없이 존재나 사실 자체로부 터 당위를 도출할 수 없다’는 윤리학의 고전적 난제, 즉 자연주의적 오류 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죄의 개념은 하나님, 인간, 세계 간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관계망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하 나님의 초월적 존재성과 계시적 권위 없이는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이 이 러한 복잡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72)

수하키의 관계론적 신학은 초월성을 배제한 채 내재성에 치우쳐 있다.

하나님이 존재들과 사실들 중의 하나이자 전체라는 점은 강조되지만, 동 일한 하나님이 그것들을 규정하고 목적을 부여하는 영원한 규범이 된다 는 점은 간과된다.

수하키에게 하나님은 ‘세상을 느끼시는 하나님’이지만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생태윤리 의 규범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 주권적 임재와 윤리적 기준을 드러내셔야 한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계시가 윤리적 준거 점으로 제시되지 않음에 따라, 수하키의 논제에서 생태윤리적 삶은 ‘피조 세계의 안녕’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한 후 다시 ‘무엇이 피조세계의 안녕을 위한 윤리적 선택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피조세계의 안녕’은 윤리적 결단과 실행의 기준이라기보다 결과물이다.

기독교적 샬 롬 비전이 말하듯이, 종국적 샬롬은 종말론적 여정의 종착지이며, 이 여정 의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두 점을 잇는 궤도를 주권적으로 결정하시는 분 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피조세계 내에서 죄의 기준을 모색하려는 수하키의 시도는 개혁주의 신학이 경계해온 자연신학의 한계를 노정한다73).

 

     72) John Frame, The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이경직 공역, 『기독교 윤리학: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 (서울: 개혁주의신학사, 2015), 217-218. 프레임은 윤리의 문제에서 반드시 고려 해야 하는 실존, 목적, 의무의 세 가지 관점들이 하나님 없이는 통합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73) 수하키는 자신의 연구가 “자연신학의 형태를 띠고서, 기독교 교의학에서보다는 인간의 실존 구조 에서 비쳐지는 것들 속에서 해답을 구하였다”라고 스스로 밝혔다. Marjorie Suchocki, 『폭력에로 의 타락』, 265. 

 

세상과 역사 안에서 인 간의 이성과 경험만으로 구성한 하나님과 세상에 관한 지식은 불완전하고 모호하며, 문화적 맥락에 따른 왜곡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조건성에 기반한 관점주의적 윤리는 필연적으로 윤리관의 다원화와 충돌을 초래하며, 보편적인 윤리 원리의 부재는 구체적인 윤리적 문제 해결의 장애물로 작용한다.

수하키가 제시하는 관점주의 존재론은 대체 불가한 개성을 지닌 유한한 개체들의 고유성을 무한성으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이는 자연에서 영원을 찾는 비현실적 신비주의에 가 깝다.

‘세계 내로 한정된 자기초월’이란 개념 역시 죄의 보편성과 그 심각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수하키의 윤리적 구상에서 인간은 생태적 존재의 영역에 국한되어, 초월적 차원으로의 확장가능성이 제한된다.

 

V. 나가는 말

 

이제까지 본 연구는 마조리 수하키의 생태적 죄 개념에 대한 비평적 고찰을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생태적 죄 개념의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개 혁주의 신학의 틀 안에서 이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특히 수하 키의 논제가 지닌 독창성과 시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신학적, 윤리적 측 면에서의 내재적 한계를 지적하였다.

수하키의 생태적 죄 개념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생태적 삶으로의 변혁적 결단을 촉구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생태적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의 부재는 기후위기의 극단적 현상들이 일회성 스펙터클로 소비되거나 기후 우울증과 같은 피상적인 반응에 그치게 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진정한 생태적 공감과 전환을 위해 생태적 죄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수하키의 문제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수하키의 논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배제한 내재주의적 접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과도한 비판, 그리고 윤리적 기준의 모호성으로 인 한 신학적, 윤리적 한계를 노정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개혁주의 신 학의 관점에서 수하키의 문제제기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기반한 피조세계의 상호성’, ‘그리스도의 구속과 통치에 참여하는 성례전적이고 종말론적인 인간론’, ‘하나님 중심의 샬롬 비전’과 같은 신학적 원리의 재정립이 요구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 정립된 개혁주의적 생태신학은 기독교가 생태적 책 임을 다하면서도 신학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균형의 길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더불어, 기후위기를 초래한 생태파괴적 행태를 생태적 죄로 바로 명명함으로써, 생태적 죄를 각성하고 그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 의 구원과 회복에 참여할 수 있는 회개와 회복의 모멘텀을 맞이할 수 있기 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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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본 연구는 기후위기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고백해야 할 생태적 죄와 전환 해야 할 생태적 삶을 탐구하기 위해 마조리 수하키가 󰡔폭력에로의 타락󰡕 에서 전개한 논제를 개혁주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수하키는 죄의 본질이 전통적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닌 ‘피조 세계에 대한 반역의 폭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논증하고자 세 가지 측면 에서 신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와 초월적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수직적 초월성’에서 피조세계의 상호의존성에 기반한 ‘수평적 초월성’으 로의 전환이다.

 둘째, 관계론적 신학과 관점론적 존재론을 기반하여 죄를 우선적으로 ‘피조세계의 안녕에 대한 침해’로 보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은 파생적으로 동반되거나 동일시된다고 주장하는 우선순위의 전환이다.

  셋째, 죄의 기준을 ‘하나님 안’에서 ‘피조세계의 안’으로 전환하여 ‘피 조세계의 무엇에든 가해진 불필요한 폭력’이 원죄의 핵심이라고 간주하는 기준의 전환이다.

수하키가 의존하는 과정신학의 만유재신론적 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 을 폐기하고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의존 관계를 전제하는 급진적 내재주의 신학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수용하기 어려운 근본 적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인간중심주의에 반발한 반동적 생태중심주의는 자칫 인간혐오나 반인간주의로 이데올로기화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수하키 논제는 생태적 죄의 기준과 해결을 피조세계 내에서만 모색함으로써 자연신학의 윤리적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비록 수하키의 논제가 품은 문제의식에 공감할지라도, 개혁주의 신학이 생태적 죄 개념을 정립해 나가는 길은 피조세계에 대한 성례전적, 종말론적 이해와 하나님 중심의 샬롬 비전을 통해야 한다.

초월적 하나님과 성 경에 준거한 개혁주의 생태윤리는 인간중심주의의 탐욕을 그리스도 중심 주의로 전환하여 회개와 회복의 모멘텀을 마련하고, 피조세계에 대한 제사장적 왕의 소명을 갱신해야 한다.

[주제어: 기후위기, 생태적 죄, 마조리 수하키, 생태중심주의, 피조세계의 안녕, 하나 님의 샬롬]

 

 

Abstract

The Climate Crisis and Ecological Sins: A Critical Examination of Marjorie Suchocki’s Thesis

Hyung Chul Yoon (Chongshin Theological Seminary, Assistant Professor)

This study critically examines the thesis presented by Marjorie Hewitt Suchocki in The Fall to Violence from a Reformed perspective in order to explore the ecological sin that Christians must confess and the ecological life they must transition to in the era of the climate crisis. Suchocki argues that the essence of sin is not “rebellion against God” as traditional theology states, but rather “violence rebelling against creation,” and attempts a theological shift in three aspects to substantiate this claim. First, a shift from ‘vertical transcendence’ premised on the vertical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umans and the transcendent God, to ‘horizontal transcendence’ based on the interdependence of creation. Second, based on relational theology and perspectival ontology, she claims that sin is primarily a ‘violation of the well-being of creation,’ while ‘rebellion against God’ is a derivative or equivalent consequence, thereby shifting the priority. Third, a shift in the criterion of sin from ‘within God’ to ‘within creation,’ regarding “any unnecessary violence inflicted upon creation” as the core of original sin.  The process-theological panentheistic theology that Suchocki relies on has a fundamental problem that makes it difficult for Reformed theology to accept, as it reconstructs a radical immanentist theology premised on the interdependence of God and the world by abandoning the ‘transcendence of God’. Furthermore, the reactive eco-centrism against anthropocentrism may become ideologized into misanthropy or anti-humanism. Above all, Suchocki’s thesis may fall into the ethical dilemma of natural theology by seeking the criteria and solutions for ecological sin solely within creation. Although we may resonate with the problematics raised in Suchocki’s thesis, Reformed theology must establish the concept of ecological sin through a sacramental and eschatological understanding of creation and a God-centered vision of shalom. A Reformed ecological ethics grounded in the transcendent God and Scripture should transform the greed of anthropocentrism into Christocentrism, providing a momentum for repentance and restoration, and renew the priestly kingly calling toward creation.

[Key words: Climate crisis, Ecological sin, Marjorie Suchocki, ecocentrism, well-being of creation, God’s Shalom]

 

 조직신학연구 제47권 (2024년)

논문 투고일: 2024.06.15. 수정 투고일: 2024.08.05. 게재 확정일: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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