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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그리스도교 기적에 대한 새로운 이해 모색: 성령론적-종말론적 기적 이해를 중심으로/김동휘.Graduate Theological Union

Ⅰ. 들어가는 글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기적이라는 단어를 쉽게 접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면 “히말라야의 기적 … 붕괴 터널 갇힌 41명, 16일 만에 모두 구조,” “우간다 70세 여성 쌍둥이 출산 … 기적이 일어났다” 등 기적이란 단어가 포함된 기사를 하루에도 몇 개씩 찾을 수 있다.

심지어 클래식 공연의 한 팸플릿에도 “한·독 수교 140주년, 한강의 기적과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한 양국”이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처럼 기적이라는 단어는 비단 종교적 맥락이 아니라도 일상에서 자주 발견된다. 앞선 사례와 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기적’은 보통 ‘확률적으로 극히 드문 사건’ 으로 정의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종교적 맥락에서,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의 맥락에서 기적은 일상적인 용례와 항상 같은 의미로 쓰이진 않는다.

물론 때에 따라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이 용어를 확률적으로 극히 드문 사건으로 사용할 순 있겠으나, 보통 그리스도교에서 기적이란 신(혹은 신적 의지)에 의해 행해졌다고 여겨지는 매우 이례적이고 비(非)반복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다.2

 

    2.필자는 학위논문 2장에서 학자들이 지금까지 제안해 온 기적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다음의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총 40여 개 이상 제공한다. 기적은 ⑴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사건, ⑵ 자연법칙을 위반하지 않는 사건, ⑶ 자연 질서의 예외적인 사건, ⑷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사건, ⑸ 과학적 용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⑹ 신(혹은 신적 존재)이 일으킨 사건, ⑺ 신의 개입으로 인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필자는 그동안 그리스도교 진영에서 제안해 온 일부 기적 연구들이 어떤 면에서 기적을 신앙의 영역에 가둔 채 이를 글자 그대로 수용하거나(문자주의), 아니면 이를 단순히 자연과학의 경험론적 사유와 상호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기적의 가능성을 쉽사리 일축해 버리는(갈등주의) 기존의 두 입장에 모두 반대한다. 대신에 “양립불가능론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입장”(incompatibilist-eschatological position)에서 기적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제안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적은 자연 질서에서 일시적으로 예외가 되는 객관적 사건으로, 자연에서 발생하는 인과적 메커니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매우 이례적이고 비반복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객관적이면서도 현 자연법칙과 양립불가능한 사건이라는 기적 정의는 어디까지나 ‘현 세계’에서, 보다 정확히는 현 세계의 자연법칙하에서, 그렇게 경험될 뿐이라는 필자의 다음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바로 기적에 대한 종말론적 입장이 새롭게 제안된다.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알려진 기적 사건들을 성서에 기초한 신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본다면, 이들은 ‘새로운 자연법칙’이 적용된 새 창조(New Creation)로부터 비롯된 사건들로서, 이는 사실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현 세계로 소급되어 선취된(retroactively proleptic) 사건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전통적인 개입주의적(interventionist) 기적 이해를 넘어서기 위해서 필자는 “종말론적 성령론”(eschatological pneumatology)이라는 또 다른 작업가설을 통해 성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보고되는 기적 주장들이 사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성령의 선취적 활동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개념 그 너머에 계신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은 창조 후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놀라운 새 일을 행하시며, 그러한 성령의 사역은 종말론적 새 창조로부터 소급하여 역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기적 이론은 삼위일체 신학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종말론적 관점에 비추어 기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처럼 필자가 제안하는 기적에 관한 새로운 용어와 개념들을 바탕으로 본 소고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기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이 글은 그리스도교 기적 개념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담고 있는 바, 성서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기적’이라고 알려진 역사 속 사건들을 학문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기적 이해와 그로부터 비롯된 개념적 한계들을 지적하고, ‘성령론적-종말론적’ 기적 개념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어지는 Ⅱ절에서는 객관적이고 양립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기적 이해를 다루고, Ⅲ절에서는 성령론적-종말론적 기적 이해를 논할 것이다. 본 연구의 의의는 그동안 국내 신학계에서 (성서) 기적을 둘러싼 여러 학문적 이슈들에 관한 종합적 연구가 조직신학뿐 아니라 성서신학에서조차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선행 연구의 부재는 필자의 작업이 미약하나마 학계에서 기적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할 마중물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에 임했음을 밝힌다.3

 

    3.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지난 20여 년간 국내에서 기적을 주제로 출간된 단행본 및 연구 논문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특정 기적 본문에 대한 성서학적 연구가 더러 있긴 하나 기적에 대한 정의, 논 리적/실제적 가능성, 자연법칙 이해, 응답되지 않은 기적 등 해당 주제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 및 논쟁점에 관한 종 합적 연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에 해외 학자들이 쓴 그리스도교 기적에 관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 여러 권 번역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크레이그 S. 키너/노동래 옮김, 『오늘날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상·하 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2); 리 스트로벨/윤종석 옮김, 『기적인가 우연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파헤 치다』 (서울: 두란노, 2018).

 

Ⅱ. 객관적-양립불가능론적 기적 이해

 

이 절에서는 그리스도교 기적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한 시도로서 필자의 기적 이론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필자는 기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적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발생한 매우 이례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으로서, 이는 일상적인 자연 질서에 일시적으로 예외일 뿐 아니라 자연적 원인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동시에 과학적 법칙 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는 (따라서 자연 질서와 기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매우 이례적 이고 비반복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그러나 종말론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새 창조로부터 비롯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취적 행위로 우리가 이 땅에서 미리 맛보 는 것이다. 위 기적 정의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볼드체(굵은 글씨체)로 강조한 “객관적인,” “양립할 수 없는,” “종말론적 새 창조로부터 비롯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취적 행위”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세 표현을 중심으로 필자의 기적 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난 과거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기존의 기적 이해를 비판적으로 분석 및 평가하는 한편,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대안적 방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우선 본 절에서는 객관적이고 양립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기적 개념을 다루고, 종말론적 사건으로서의 기적 개념은 다음 절에서 다루고자 한다.

 

1. 객관적 사건

 

1) 객관적 기적의 의미

 

위에서 필자가 제안한 기적 정의 중 먼저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바로 ‘객관적’이라는 단어다. 필자는 주장하길, 기적이라 불릴 만한 매우 이례적이고 비반복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은 그 해당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해석이 가능한 주관적 사건이 아니라 어느 관찰자가 바라보더라도 동일한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객관적 사건을 비로소 기적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적이 객관적인 사건이라는 의미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어느 목격자에게나 자연 질서를 초월한 초자연적 사건으로 동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만일 구약성서의 홍해가 갈라진 사건(출 14장)을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이해한다면, 그 놀라운 광경은 고대 히브리인에게나 현대인에게나 매한가지로 자연법칙을 넘어서서 발생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보일 것이 분명하다. 이 놀라운 광경은 홍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인 <얌-숲>( ףּ ו ס- םַ י(을 둘러싼 해석상의 문제와는 별개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여 그것이 과거 성서 시대에 발생했든 오늘날에 발생했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객관적으로’ 관찰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 기자가 기록하길, 이 사건은 분명 목격자들의 눈에 자연을 초월한 놀라운 초자연적 사건이었다(출 14:31; 15:1-21 참조).4

 

  4.여기서 한 가지 명확히 할 것은 고대 히브리인에게 자연/초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러한 구분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 근동의 사람들은 어떤 특정 사건을 자연적 원인이나 자연법칙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는 모두 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 이에 대한 논의는 예컨대, R. Walter L. Moberly, “Miracles in the Hebrew Bible,”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Miracles, ed. Graham H. Twelftre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57; and Richard A. Horsley, Jesus and Magic: Freeing the Gospel Stories from Modern Misconceptions (Eugene: Cascade, 2014), 163을 보라.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비록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자연/초자연의 구분이 없었더라도, 그들 역시 어떤 사건들이 자연적 설명 너머에 있는지 오감을 통해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이 두 논점은 서로 구분될 필요가 있다.

 

즉 홍해 기적이 발생했다고 추정되는 장소와 관련한 어원론적(etymological) 논쟁이나 해당 내러티브를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학적 논의는 가능하겠으나, 구약 출애굽기 14-15장에 묘사된 이야기를 토대로 볼 때에 그 놀라운 광경은 적어도 각기 다른 주관적 감흥에서 비롯된,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사건으로 해석될 여지는 적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홍해 기적을 그간의 구약성서학과 고대 근동학의 연구성과들을 무시한 채 이를 성서에 기록된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해당 성서 내러티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 다양한 해석과는 별개로 홍해가 갈라진 광경은 해당 본문의 묘사대로 당대 목격자들에게 분명히 어떤 자연적 원인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으로 여겨졌으리라는 점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갈라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일반적인 자연의 흐름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예외적이고 극적인 현상은 그들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사건의 배후에는 자연법칙을 초월한 사건을 일으킨 신적인 존재 곧 그들의 구원자 야웨 하나님을 떠올렸을 것이다.5

 

    5.이 단락에서의 필자의 생각은 다음 문헌에서 도움을 받았다. Michael P. Levine, “Miracle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05년 판), ed. Edward N. Zalta, 2023년 12월 20일 접속,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0/entries/miracles/. 

 

2)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기적 이해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에서 기적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접근법이 다음 두 입장에서 비롯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하나님께서 자연 과정 속에 기적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객관적인 결과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인데 관찰자가 주관적으로 ‘기적’ 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 기적에 대한 전통적인 두 입장에서 도출되는 결과는 각각 다음과 같은데, 1) 해당 사건을 객관적이면서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하는 한편 개입주의(interventionism)를 수용하거나, 아니면 2) 자연 과정 속 신의 개입을 반대하면서, 기적을 그저 개개인의 주관적 감흥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은 신의 개입주의적 객관적인 특별 섭리를 수용하는 ‘보수주의 기독교(Conservatives)’의 입장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자연 과정 속 신의 개입적 활동에 회의적이던 ‘자유주의 진영의 기독교(Liberals)’의 입장이었다.6

신적 개입주의에 반대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들은 기적을 단순히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반응으로 해석한다.7

그들은 하나님이 기존의 자연법칙을 어기면서 특별한 사건들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한다는 개입주의에 반대하고자 그분의 활동을 자연 질서와 양립 가능한 것으로 제한한다. 태양 일식 현상이 그 좋은 예다. 아마도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던 고·중세 사람들은 이 기이한 현상을 신이 일으킨 초자연적 사건으로, 즉 기적으로 여겨왔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현대 천체물리학적 관점에서 이 현상은 그저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행성들의 일상적인 운행의 결과로부터 기인한 현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래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일식의 아름다움에 감탄할지 모른다. 즉 일식의 경이로움과 그로부터 비롯된 종교적 중요성은 ‘보는 사람의 눈’(즉, 해석)에 달렸지 그 사건 자체(즉,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8

 

    6.그리스도교 기적에 대한 전통적인 두 입장에 대한 훌륭한 요약 및 약사는 Nancey C. Murphy, Beyond Liberalism and Fundamentalism: How Modern and Postmodern Philosophy Set the Theological Agenda (Valley Forge: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6), chap. 3을 참고하라.

    7.예컨대, 19세기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말하길, “기적은 단순히 사건의 종교적 이름일 따름이다. 모든 사건은 기적이 될 수 있는데,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사건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 우세하게 되면 기적이 된다. [때문에,] 내게는 모든 것이 다 기적이다.” Friedrich Schleiermacher,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trans. John C. Oman (New York: Harper & Row, 1958 [1893]), 88.

    8.지면의 한계로 기적을 주관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논의를 더 자세히 다루지 못한다. 대신에 이와 관 련한 탁월한 연구들에 관해서는 R. E. Holland, “The Miraculous,” 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2, no. 1 (1965): 43-51; and David Basinger, Miracl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8-17을 참고하라.

 

반면에,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 기적적으로 개입하여 객관적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자연과 역사 속에서 행해지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적 활동은 치유와 소생, 여러 자연 기적 등 성서 속 기적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오늘날 의학계에서 적지 않게 보고되는 즉각적 치유 사례나 일간지, 방송 등에서 심심치 않게 대서특필되는 큰 참사로부터의 예상치 못한 구출 등도 그 예가 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 속에서 개입적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기적적인’ 사건들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례들은 신앙인들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기적을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9

그러나 일군의 학자들은 이 개입주의적 신의 활동을 수용하는 것에는 신학적으로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입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 것인지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3) 객관적 기적 비판: 개입주의의 문제점 주지하다시피 역사상 학자들이 기적을 객관적인 초자연적 사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신학적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적 논의에 있어서 줄기차게 신학적 문제점으로 여겨 온 부분이 바로 ‘개입주의적 신의 활동’(interventionist divine action) 개념이다. 이 개입주의적 신의 활동과 관련하여 비롯되는 신학적 딜레마는 전통적인 신론과 맞물려 해석상에 큰 문제를 가져온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제점 두 가지가 바로 ⑴ 신의 일관성 결여(소위 ‘이랬다 저랬다 신’ [divine arbitrariness])의 문제와 ⑵ 응답되지 않은 기적/기도(소위 ‘기적 신정론’)의 문제다. 이 둘은 내용적으로 서로 비슷한 논점을 공유하기 때문에 앞으로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겠다. 우선 신의 일관성 결여의 문제를 살펴보자.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고 선하시다면, 세상 속 그분의 행동은 왜 때때로 선별적이고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까? 만약 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과 역사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그분은 왜 항상 그렇게 하지 않으실까? 왜 암 투병으로부터 누구는 극적인 치유를 받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는가, 왜 전쟁 포로 중에서 누구는 강간을 당하도록 방치되고 누구는 보호를 받는가.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기적에 대한 개입주의가 갖는 신학적 문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적에 대한 믿음과 관련한 핵심 문제는 … 바로 ‘신적 일관성’의 문제이다. … 이 문제의 핵심은 신학적인 데 있다. 하나님께서 변덕스러운 요술사처럼 행동하셔서 어제는 하실 생각도 하지 않으셨고 내일 더는 하실 생각도 하지 않으실 일을 오늘 행하신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신적 일관성의 문제는 기적의 개연성과 관련하여 꼭 다루어야 할 핵심 문제이다.10

 

    9.몇 가지 성서 기적을 떠올려 보면 일반적으로 신앙인들이 기적을 신의 직접적인 개입적 행동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컨대, 나사로의 소생 사건(요 11장), 맹인 바디매오의 치유(막 10:46-52과 평행본문), 안식일 손 마른 사람의 치유(막 3:1-6과 평행본문) 등이 그러하다. 오늘날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전해오는 많은 치유 기적들, 의료 시설 및 장비가 변변치 않아 지역 복음전도자의 중보기도가 유일한 치료 수단인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 위치한 여러 국가들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치유 사례들, 대중 집회를 통해 실제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많은 치유 사례들 등은 모두 공통적으로 신이 그 해당 사건에 개입하여 즉각적으로 일어났다고 보고되는 사건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세계 도처에서 보고되는 수많은 기적 사례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치유 기적에 대한 철저한 검증 기준과 승인 과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조사와 이에 대한 방대한 사례 연구는 필자의 논문 6장에서 자세히 다뤘다. 여기서 필자는 정신신체질환(psychosomatic diseases), 즉 질병 치유의 원인이 초자연적 신적 요인이 아닌 사회적, 심리적, 행동적 요인 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정신-신체 간의 자연적 요인일 수 있음을 비판적 견지에서 심도 있게 분석했다. 

     10.John C. Polkinghorne, “The Credibility of the Miraculous,” Zygon 37, no. 3 (2002): 753; cf. idem, Science and Providence: God’s Interaction with the World (London: SPCK, 1989), 60; and Science and Theology: An Introduction (Minneapolis: Fortress, 1998), 92. 

   

 

개입주의적 신의 활동을 논할 때 일부 학자들은 이처럼 ‘이랬다 저랬다’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전통적인 ‘신의 완전성’(divine perfection/integrity) 교리와도 어긋나 보인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주장하길,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창조하시고, 자연계에 규칙성을 부여하셔서 그 규칙대로 세상이 돌아가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창조한 자연법칙에 자꾸 예외가 되는 행위는 그분이 이 세상을 애당초 불완전하게 만드셨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1

왜 하나님은 꼭 이따금씩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세상을 창조했는가? 저명한 불가지론자인자 과학자인 폴 데이비스(Paul Davies)는 지적하길, 이러한 개입주의적 접근 방식은 “신학적인 내적 모순에 빠지기 쉽다. … [이는 마치] 결함이 있는 우주를 창조하고선 때때로 이를 수정하기 위해 변덕스럽게 들쑤시는 우주적 차원의 마술사의 이미지를 암시한다.”12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자 더럼(Durham)의 주교였던 데이비드 젠킨스(David Jenkins)는 “자신이 창조한 우주의 개방성을 이용하여 이따금씩 추가적인 인과적 사건을 세상에 주입하여 특정 사건을 만들어내는 신은 간섭하는 반신(demigod)이자 도덕적 괴물이며 자신 스스로에게 모순이 된”다고 주장한다.13

 

    11.다음 문헌에서 다뤄지는 논의와 언급되는 학자들의 어록을 참고하라. Robert A. Larmer, “Defending Special Divine Acts,” in Philosophical Essays on Divine Causation, ed. Gregory E. Ganssle (New York: Routledge, 2021), 188-89.                12.Paul C. W. Davies, “Teleology Without Teleology: Purpose through Emergent Complexity,” in Evolutionary and Molecular Biology: Scientific Perspectives on Divine Action, eds. Robert J. Russell, William R. Stoeger, and Francisco J. Ayala (Vatican City State; Berkeley: Vatican Observatory;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 1998), 152.            13.David Jenkins, God, Miracle, and the Church of England, 63; cited in Larmer, “Defending Special Divine Acts,” 188. 

 

따라서 위 학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자연법칙을 제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때에 따라 자연계에서 개입적 방식으로 활동하신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스르는 것과 같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항변이다. 앞서 살펴본 자연법칙 혹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기초해 보더라도 역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에 대한 또 다른 반대를 제기할 수 있다. 그 문제 제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실 수 있는 분이라면 왜 이 전능한 분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을 허용 내지는 막지 못하셨을까?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자연에 개입할 힘을 가지며 이따금씩 그 힘을 사용한다면, 왜 그분은 참혹한 악과 고통의 현장에 항상 개입하시지 않는가? 그러한 기적적 개입은 왜 어떤 특정 경우에만 발생하고 항상 일어나지 않을까? 필자가 ‘기적 신정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 응답되지 않은 기적의 문제에 대한 탁월한 요약은 영국 철학자인 토마스 딕슨(Thomas Dixon)에게서 찾을 수 있다. 만일 신이 존재하고 자연에 개입할 힘을 갖고 있으며 이따금씩 그 힘을 사용한다면, 왜 신은 끔찍한 불 의, 잔인함, 고통이 일어나는 다른 수많은 사례들에는 개입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왜 신은 성 베드로 가 꿈에 나타나 기적으로 치료해 줄 때까지 아가타가 고문과 학대와 신체 절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왜 신은 카타니아 사람들은 특별히 보호해주면서 다른 사람들은 화산 폭발과 역병으로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는가? … 왜 어떤 사람은 기적으로써 치료해주면서 똑같은 믿음과 덕을 갖춘 다른 사람은 고통받고 죽게 내버려두는가?14

지면의 한계로 인해, 이 기적 신정론을 둘러싼 논의들을 더 자세히 기술할 수는 없지만,15 위 딕슨의 어록 속 여러 사례들만으로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분명히 드러난다. 행동하지 않는 신(divine inaction)은 (개입적 방식으로) 행동하는 신만큼 신학적으로 다루기 힘든, 쉽사리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의 존재로 인해 기적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비록 악의 존재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기적 신정론의 문제가 기적의 개연성을 분명 약화시킬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끔찍하고 참혹한 악(horrendous evils)의 존재가 곧 기적의 불가능성으로 귀결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16

 

     

 

어쨌든 이 중요한 주제는 이 정도로 간략히 짚고 넘어가고,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2. 양립불가능한 사건

 

다음으로 필자의 기적 이론에서 기적은 신이 행하신 특별한 초자연적 사건이자 객관적인 사건으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 이해의 진보와는 상관없이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관찰자에게나 현 자연법칙하에서 분명히 예외적인 사건으로 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정의하는 기적은 과학과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닌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사건으로서 현재의 자연법칙과 서로 양립불가능한 사건이다. 이처럼 필자의 양립불가능론적(incompatibilistic)인 기적 이해는 그 반대 진영, 곧 자연 이해의 잠정성에 기대어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입장에 대한 철저한 반대에서 비롯된다.

 

1) 양립(불)가능론 용어의 의미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필자가 이름 붙인 기적에 대한 ‘양립(불)가능론’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양립가능론은 자연과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적 활동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즉 “양립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어떤 기적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양립가능론자는 그 사건이 자연적 인과관계에 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러한 물리적 법칙 내에서 그리고 그 법칙들을 통해 행동하실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여전히 기적이라고 간주한다.17

 

     14.토머스 딕슨/김명주 옮김, 『과학과 종교』 (파주: 교유서가, 2017), 97.

     15.이 응답받지 못한 기적의 문제를 학위논문 마지막 장인 “Chapter 11. Miracle and Theodicy: Unanswered Miracles”에서 악의 문제와 신정론과 관련지어 상세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필자는 기적 신정론을 둘러싼 그동안 제안되어 온 다양한 응답들을 정리하여 제시하는 한편, 어디까지나 잠정적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16.필자의 생각에 기적의 개연성 문제와 기적의 (불)가능성 여부는 논리상 전혀 별개의 논의다. 필자는 후자의 경우를 기적의 ‘논리적’ 가능성으로, 전자를 기적의 ‘실제적’ 가능성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논의되는 기적 신정론 문제는 분명 기적의 실제적 가능성을 약화시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논리적 가능성마저 포기하게끔 하지는 못할 것이다.

     17.그 대표적인 예가 성서 기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들이며, 대중적이면서 학문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사례가 영국의 과학자 콜린 험프리스의 경우다. Colin J. Humphreys, The Miracles of Exodus: A Scientist’s Discovery of the Extraordinary Natural Causes of the Biblical Stories (London: Continuum, 2003); idem, “The Star of Bethlehem-a Comet in 5 BC-and the Date of the Birth of Christ,” Quarterly Journal of the Royal Astronomical Society 32 (1991): 389-407; Colin J. Humphreys and W. Graeme Waddington, “Solar Eclipse of 1207 BC Helps to Date Pharaohs,” Astronomy & Geophysics 58, no. 5 (2017): 39-42. 

 

더욱이, 사건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불가능하더라도 여전히 양립가능론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정된) ‘상위 법칙들’(higher laws)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잠정적 이해 너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 그 불가사의한 원인이 밝혀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18

그러나 반대로, 필자를 포함한 양립불가능론자들은 하나님의 기적적 행동이 자연법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 그 너머에서, 그것을 초월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기적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란 (현재든 나중이든) 자연적 혹은 인과적 메커니즘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으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 이해의 진보와 상관없이’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초자연적 사건이다.19

더욱이 만일 한때 기적이라 여겨지던 초자연적 사건이 세월이 흘러 과학의 발전으로 그 사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 사건의 원인이 신이 아닌 순수 자연적 원인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양립불가능론자의 입장에서 그 사건은 더 이상 기적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자연적 메커니즘을 정확히 알고 나서도 여전히 그 자연적 사건을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저 관찰자의 주관적인 감흥에서 비롯된 자의적 해석일 뿐이기 때문이다.20

 

      18.기적에 관한 양립가능론적 설명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고대의 어거스틴부터 현대의 다양한 신학자(혹은 과학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Augustine, The City of God against the Pagans, trans. R. W. Dys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063; XXI.8; James C. Carter, “The Recognition of Miracles,” Theological Studies 20, no. 2 (1959): 184; Christopher C. Knight, The God of Nature: Incarnation and Contemporary Science (Minneapolis: Fortress, 2007), 35-36; cf. 93-95; and Wolfhart Pannenberg, “The Concept of Miracle,” Zygon 37, no. 3 (2002): 760.

      19.예컨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일련의 자연 기적들을 생각해 보라. 물 위를 걷는 기적(막 6:45-52와 평행본문)은 명백히 중력 법칙을 벗어나는 사건이요, 오병이어 기적(막 6:30-44와 평행본문)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요 2:1-11)은 여러 가지 화학 법칙을 어기는 사건처럼 보임이 분명하다. 우선 이 내러티브들에 대한 역사성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이 세 자연 기적이 양립가능론자들의 주장처럼 아직 밝 혀지지 않은 숨겨진 자연법칙에 의해서 나중에 그 메커니즘이 새롭게 밝혀질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의 생각은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인간 이해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과거에나 지금이나 물 위를 걷는 사건이 초자연적 기적인 것처럼, 그것이 미래에도 여전히 그러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자연의 작동 방식으로 미루 어 보건대, 긴 세월이 흘러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서 기존의 중력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사라지거 나 그 기능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의 잠정성에 기댄 양립가능론자들의 설명보다는 필자 가 뒤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종말론적 새 창조로부터 현 자연법칙들이 변형(transformation)될 가능성을 가정하여 성서 속 자연 기적들을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로운’ 자연법칙이 적용된 사례로 이해하는 편이 더 설 득력 있는 신학적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20.대표적인 예로서 1940년 “덩케르크의 기적”(miracle of Dunkirk)을 들 수 있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 군은 노르망디 안개 덕분에 독일 나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적이라고 부른 다. 그러나 이 기이한 사건 속 자연 현상(해무)은 인과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기적이라기보다는 자 연적 사건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수 있다. 단지 그 기적적인 안개는 관찰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만 기적이라고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더 자세한 논의는 J. L. Mackie, The Miracle of Theism: Arguments for and against the Existence of God (Oxford: Clarendon, 1982), 27-28을 참고하 라. 

 

이처럼 과거 놀랍고 기이한 사건들이 당시에는 그 자연적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종교적 맥락이 더해져서 이를 기적으로 간주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과학 및 의학의 진보로 인해 그것이 더 이상 기적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전에 기적처럼 보였던 것이 나중에 과학의 관점에서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흔히들 ‘틈새의 신 오류’(God-of-the-gaps fallacy)라고 부른다.

 

2) 기적과 틈새의 신

 

‘틈새의 신’이라는 표현은 자연계에 개입하시는 신의 행위가 필요할 때마다 그 틈새를 메운다고 주장함으로써 현존하는 과학적 설명의 틈(부족함)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신은 현재 과학지식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설명가설로 사용된다. 이것이 논리적 오류인 이유는 한때 설명될 수 없었던 영역이 과학의 진보로 인해 점차 설명 가능한 영역으로 바뀌어 가고, 과거 그 과학적 설명의 틈새를 초자연적 설명으로 임시방편적으로 메우던 것이 훗날 그 자연적 원인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신적 작용(divine causation)에 의존한 설명이 불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화학자이자 감리교인이였던 찰스 콜슨(Charles Coulson)은 “과학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올바른 정책은 거기서 신을 발견했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 더 나은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며 틈새의 신 오류와 관련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21

필자는 틈새의 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사례 중 하나가 바로 기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성서 기적을 과학적 수단을 통해 입증하려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양자 물리학(QM) 을 활용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인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에 따르면, 생각보다 많은 학자들이 양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미시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미결정성(ontological indeterminacy)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기적이 있고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있다고들 믿는다고 말한다.22

철학자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을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나사로가 소생한 사건과 같은 이른바 ‘자연 기적’의 경우 양자 물리학으로는 거의 설명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한다. 반면, 과학철학자인 존 이어먼(John Earman)을 비롯한 다른 무리의 학자들은 양자역학적 설명이 이들 기적과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한다.23

위 학자들의 말대로 양자 물리학이 과연 기적의 개념을 과학과 더 양립 가능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이에 동의하진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신학자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과학적 수단을 활용하여 성서 기적을 증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려를 나타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양자 불확정성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기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선, 모든 자연법칙이 다 양자 불확정성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 더욱이 복음서의 모든 기적이 양자 법칙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물은 아원자 구성 요소의 자발적인 재배열에 의해 포도주로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설명은 단순히 시체의 소생이 아닌 육체가 불멸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된 예수의 부활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24

 

     21.Charles A. Coulson, Science and the Idea of Go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8), 16. Cf.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The Enlarged Edition, ed. Eberhard Bethge (London: SCM, 1971), 311.               22.Alvin Plantinga, “What is ‘Intervention’?,” Theology and Science 6, no. 4 (2008): 394.

     23.같은 글, 382.

     24.William Lane Craig, Reasonable Faith: Christian Truth and Apologetics, 3rd ed. (Wheaton: Crossway Books, 2009), 260.

 

필자는 크레이그의 위 주장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특히 예수 부활 사건은 기적 중에도 매우 예외적이고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서 양자역학적 설명을 통한 현 자연법칙으로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 여러 면에서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의 부활이 신약성서에 묘사된 대로 일어났다면, 그의 부활한 몸에서 관찰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이 경이로운 사건의 과정은 순전히 자연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건 목격자들에게도 분명 자연법칙을 초월한 사건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양립불가능론적 입장에서 이러한 시도는 ‘틈새의 신’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서 양자 물리학을 통해 기적을 증명하려는 데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기적이 과학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양자 물리학에 의해 완전히 설명된다면, 그것은 자연적 사건이지 더 이상 기적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자연적 사건은 기적이 되고 모든 기적은 순전히 자연적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25

이와 같이 양립불가능론의 입장에서 볼 때, 틈새의 신(God of the gaps) 주장은 기적을 논의함에 있어서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즉, 과학이 어떤 기적적 사건에 대해 그럴듯한 자연적/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경이로움은 결국 자연적인 사건으로 밝혀질 것이기에 그것은 아마도 진정한 기적이 아닐 수 있다. 이러한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지난날 비범하고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성격으로 인해 기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던 일들 중 일부가 지식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는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어 더 이상 기적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26

 

       25.Stanley L. Jaki, Miracles and Physics (Front Royal: Christendom, 1989), 74. 같은 책 66-79쪽의 논의 도 함께 참고하라.

      26.그러나 동시에 틈새의 과학(혹은 자연주의)도 조심해야 한다. 물론 기적 논의에 있어서 틈새의 신 오류를 조 심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기적 이론의 핵심 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적 주장이 설명적 틈새가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과학은 인류가 선사하는 최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신뢰할 만한 학 문이지만 어디까지나 과학 이론은 ‘잠정적 진리’라는 데 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학적 설명 을 뛰어넘는 어떤 불가사의한 기적적 사건이 존재할 수 없다고 과학은 단언할 수 없다. 이것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 라 형이상학적 주장과 다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틈새의 신 오류 만큼이나 ‘틈새의 자연주의’(naturalism of the gaps)도 존재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의 종교철학자인 리처드 스윈번이 주는 교훈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틈새의 신 논증은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적 주장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오류이기 때문에 ‘칼 은 양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신적 개입에 의한 것인데도 그렇지 않다고 믿는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Richard Swinburne, Is There a God?, rev.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106. 

 

3) 기적은 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신학적 탐구의 영역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필자는 기적이란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 개념이 아닌 종교적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달리 말하자면, 기적의 진위성을 탐구하는 것은 과학적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분명히 종교적(신학적) 탐구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과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자연 현상의 원인을 테스트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다.

그러나 과학적 노력은 일반적으로 자연적 원인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어떤 사건에 초자연적 원인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과학의 능력을 벗어난다. 대개 기적을 일회적이고 비반복적인 사건으로 정의한다고 본다면, 그리고 그 기적 사건이 인격적 신의 행위의 결과라고 가정할 수 있는 타당한 신학적 근거가 있다면, 적어도 과학적 방법으로 이를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초자연적 현상의 ‘결과’는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으나 그 ‘원인’은 자연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는 의미에서, 기적은 일반적인 실험실 환경에서처럼 여러 가지 변수를 통제하면서 실험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과학적 방법으로는 이를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을 통해 기적을 입증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말이 곧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은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초자연적 사례가 자연계의 탐구 영역 밖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과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례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 초자연적 원인이 있을 수 없다는 확고한 견해를 누군가 채택한다면, 그는 사실 과학적 가정이 아닌 형이상학적 가정을 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자연적 원인을 다루는 과학의 방법론적 원리를 고려할 때, 어떤 가정된 초월적 존재의 기적적인 행동을 수용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과학의 역할이 아니다. 자연계 안에서의 초월적 존재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자연과학보다는 철학적 혹은 종교적 틀을 필요로 할 것이다. 따라서 신학과 과학이 하나의 진리를 향한 다른 두 가지 층위의 탐구라는 점에서 필자는 한편으로 과학을 통해 기적을 연구하려는 시도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자연의 영역뿐 아니라 자연 너머의 영역에서도 활동하실 수 있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수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너머의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기적은 반-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이다.

 

Ⅲ. 성령론적-종말론적 기적 이해27

 

     27.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성령론적-종말론적 입장’에 대한 필자의 작업가설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향후 후속 연구들을 통해서 기적에 대한 본 연구자의 입장을 계속 발전시킬 것이다. 확실히 기적에 관해서는 해결되어야 할 질문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절에서 필자는 본인이 제안하고자 하는 바의 대략적인 개요를 제시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음에 너른 양해를 구한다.

 

앞 절에서 필자는 그리스도교 기적 개념을 객관적 사건이자 현 자연 질서와 양립불가능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 객관적인 초자연적 사건으로서 기적과 그 기적적인 사건은 모든 관찰자에게 자연법칙을 초월한 (따라서 ‘양립불가능한’) 놀라운 광경으로 관찰된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현 세계에서, 보다 정확히는 현 세계의 자연법칙하에서, 그렇게 경험될 뿐이라는 필자의 계속되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기적에 대한 종말론적 입장을 새롭게 제안하는데, 성서에 기초한 신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본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보고되어 온 기적 사건은 ‘새로운 자연법칙’이 적용된 ‘새 창조’로부터 비롯된 사건으로서, 이는 사실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현 세계의 역사 속으로 소급되어 선취된(retroactively proleptic) 사건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자연법칙이 적용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례를 바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보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열역학 제2법칙(이른바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좀 더 부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독일의 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와 미국의 신학자인 로버트 러셀(Robert J. Russell)이 차례로 주창해 온 부활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선취 행위에 주목한다. 특히 러셀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 부활 사건에 기초한 하나님의 행위는 분명 현 자연법칙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자연 질서를 넘어서는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신적 행위였다.28

이 역사상 유래 없는 새로움은 예수의 부활체에 나타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특징을 보면 분명해진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지만 불연속성의 특징도 보인다.29

그분의 부활하신 몸은 무덤에 안치되었던 것과 동일한 몸이었지만, ‘영의 몸’(고전 15:44)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성서 기자는 기록한다.

부활체는 예수의 원래 몸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몸이 아니었다.

기존의 육체와의 일부 불연속성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원래 몸에서 비롯된 진정한 ‘육체 부활’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은 나사로의 소생(요 11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었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현현)을 마주했을 때의 경험 역시 이를 완전히 주관적인 심리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객관적인 현현이었다.30

그래서 러셀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은 성서에서 묘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과 그와 함께 새롭게 변형될 자연법칙에 대한 첫 번째 예시, 즉 예수의 육체 부활은 새로운 자연법칙을 옛 창조인 현 세계에서 ‘미리 맛보는’ 첫 번째 사건이라고 주장한다.31

 

     28.Robert J. Russell, Time in Eternity: Pannenberg, Physics, and Eschatology in Creative Mutual Interaction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12), 80-81. Cf. idem, “The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as a First Instantiation of a New Law of the New Creation,” in From Resurrection to Return: Perspectives from Theology and Science on Christian Eschatology, eds. James Haire, Christine Ledger, and Stephen K. Pickard (Hindmarsh: ATF Press, 2007), 85-86.

    29.예수의 부활체에 나타난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⑴ 연속성: a)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식별한다(눅 24:30-31; 요 20:19-20); b) 그분은 음식을 드시거나(눅 24:42-43); c) 만져질 수 있었으며(마 28:9; 요 20:17; 눅 24:39); d)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줬다(눅 24:39; 요 20:24-29). ⑵ 불연속성: a) 제 자들이 때론 예수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일부는 계속 의심했다(요 20:14; 21:4; 마 28:17; 눅 24:37); b) 그 분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 없이 닫힌 공간에 나타나셨다(요 20:19-20); c) 부활의 현현에는 진정한 큰 신비감이 있 었다(막 16:1-8). 이 내용은 부분적으로 다음 문헌에 도움을 받아 정리했다. Hans-Joachim Eckstein, “Bodily Resurrection in Luke,” in Resurrection: Theological and Scientific Assessments, eds. Ted Peters, Robert J. Russell, and Michael Welker (Michigan: Eerdmans, 2002), 119; David Wilkinson, Christian Eschatology and the Physical Universe (London: T&T Clark, 2010), 101-02.

    30.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다음의 구분은 영국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의 도움을 받았다. ⑴ 부활은 실제 일어나지 않음(계몽주의); ⑵ 부활은 신화적 사건(다비드 프리드리 히 슈트라우스); ⑶ 부활은 제자들의 경험 속에서 일어난 사건(루돌프 불트만); ⑷ 부활은 역사적 탐구를 초월하는 사건(칼 바르트); ⑸ 부활은 학문적 탐구에 개방된 역사적 사건(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알리스터 맥그래스/김기철 역, 『신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복있는사람, 2014), 748-59. 이 가운데 필자가 지지하는 입장은 예수의 육체 부활 이며, 고전 15장과 복음서의 부활 기사 등으로 미루어 봤을 때 사람들은 분명 새 몸을 입고 부활하신 주님의 객관 적 현현을 목격했을 것이다. 필자의 학위논문 10장은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바 성서학적 여러 논의들을 바탕으로 부활의 역사성 문제를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자 시도했다.

    31.러셀은 예수 부활을 ‘새로운 자연법칙(또는 새로운 창조)의 첫 번째 사례’(First Instance of a New Law of Nature” or as the First Instance of a New Law of the New Creation, FINLON[C])로 명명한다. 러셀 외에도 예수 부활을 FINLON(C)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상당수 있으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Philip Clayton, God and Contemporary Science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97), 205; C. S. Lewis, Mere Christianity (New York: HarperCollins, 2001 [1952]), 220–21;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c Theology, 3 vols.,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91–98), 3:627; John C. Polkinghorne, The Faith of a Physicist: Reflections of a Bottom–Up Thinker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164, 166; Karl Rahner,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ans. William V. Dych (New York: Crossroad, 1982), 259; and N. T. Wright, History and Eschatology: Jesus and the Promise of Natural Theology, The 2018 Gifford Lectures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19), 202; cf. 254. 

 

따라서 러셀의 이론을 토대로 삼아 필자가 계속해서 발전시킨 신학적 사유는 이것인데, 과거 성서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보고되는 기적 주장들은 사실 ‘새 창조’의 ‘새로운 자연법칙’이 소급 적용되어 선취된 사건이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신다고 기록한다(사 46:10).

아울러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⑴ 성서가 증언하는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다는 놀라운 대목에서 새롭게 변형될 자연법칙이 적용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추할 수 있다(사 65:25; 11:6-9).

   ⑵ 신약성서의 적지 않은 성경 본문들이 예수가 다가오는 하나님의 왕국을 염두에 두고 기적을 행하셨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두 개의 Q구절인 마 12:27-28//눅 11:19–20; 마 11:5//눅 7:22을 보라).

   ⑶ 많은 학자들이 (성서학자와 신학자 모두) 부활을 포함한 예수의 기적을 일컬어 새 창조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32

이러한 종말론적 선취 개념의 성서학적 토대와 함께, 필자는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부활 사건에서 관찰된 하나님의 기적적인 행동은 예수 시대를 포함한 성서 시대까지 소급하여 적용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판넨베르크가 창안하고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인 테드 피터스(Ted Peters)가 뒤이어 발전시킨 ‘소급적 존재론’(retroactive ontology) 개념을 필자의 기적 이론에 적용하여,33 필자는 종말론적 새 창조에 기초하여 첫 부활절 주일에 확증되고 선취된 기적 사건인 예수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주장되어 온 수많은 기적 사건들에 또 다른 ‘2차적 선취적 사건’으로서 확장/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2.예를 들어, Leonhard Goppelt,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 1, trans. John E. Alsup (Grand Rapids: Eerdmans, 1981), 155; C. S. Lewis, “The Grand Miracle,” in God in the Dock: Essays on Theology and Ethics, ed. Walter Hooper (Grand Rapids: Eerdmans, 1970), 85; C. F. D. Moule, “Introduction,” in The Significance of the Message of the Resurrection for Faith in Jesus Christ, ed. C. F. D. Moule (London: SCM, 1968), 10; and Hans Schwarz, Creatio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2002), 224.

   33.Wolfhart Pannenberg, Jesus–God and Man, 2nd ed., trans. Duane Priebe and Lewis L. Wilkins (Philadelphia: Westminster, 1977), 135 and passim; cf. idem, Systematic Theology, 2:303, 344, 365. See also Ted Peters, Anticipating Omega: Science, Faith, and Our Ultimate Futur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6), 12; and idem, God–The World’s Future: Systematic Theology for a New Era, 3rd ed. (Minneapolis: Fortress, 2015), 607-09 and 427. 

 

‘소급적 존재론’ 개념이 필자의 기적 이해에 적절히 적용된다면, 성자이신 인간 예수께서 행하셨다고 여겨지는 치유, 축귀, 자연 기적, 소생 등은 사실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