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이야기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 종교적 권위에 대한 견해 차이에 따른 상반된 미디어 전략과 결과/김선영.실천신학대학원大

 I. 들어가는 말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실상을 재구성하 는 작업은 꽤 복잡하다.

중세에서 근세로의 전환 시기에 많은 요인이 개혁의 형성과 진행 과정에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프로테스탄 트 개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며, 어느 관점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색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 개혁 시기는 “유럽 문화가 필사본의 시대에서 인쇄본의 시대로 이행한 시기 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지적에 주목할 때 단연코 도드라지는 관점은 미디어 다. 1

 

        1 Richard G. Cole, “The Dynamics of Printing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Social History of the  Reformation, eds. Lawrence P. Buck and Jonathan W. Zophy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72), 94-95. 

 

이 관점에서 접근할 때 루터(Martin Luther)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무엇보다 “서구 최초의 대규모 미디어 캠페인”으로 부상한다.2 베른트 묄러(Bernd Moeller)는 “서적 인쇄 없이는 프로테스탄트 개혁도 없다”라고 단언했다.3

인쇄물 가운데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팸플릿이다.

앤드루 페트그리(Andrew Pettegree)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무엇보다 “팸플릿 전쟁”이었다고 명명했다.4

루이저 홀본(Louise W. Holborn)은 프로 테스탄트 개혁의 “특공대”로 팸플릿은 세력 결집과 확장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5

스티븐 오즈먼트(Steven E. Ozment)는 루터의 개혁을 “팸 플릿 작가들의 혁명”으로 지칭하면서, 팸플릿 없이 개혁은 불가능했다고 확언했다.6

 

      2 Mark U.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5), 21. 에드워즈는 16세기 초의 미디어 캠페인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나 “1520년 대 초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대대적인 출판 캠페인은 수단, 방법, 및 규모에서 현대 캠페인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확언한다. 같은 책, 15.

    3 Bernd Moeller, “Stadt und Buch. Bemerkungen zur Struktur der reformatorischen Bewegungen in Deutschland,” Stadtbürgertum und Adel in der Reformation, ed. Wolfgang J. Mommsen (Stuttgart: Klett-Cotta, 1979), 30. 인쇄된 출판물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미친 영향을 결코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대평가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 참조, Robert W. Scribner, “Oral Culture and the Diffusion of Reformation Ideas,” History of European Ideas 5 (1984/3), 237-256.

    4 Andrew Pettegree, Brand Luther: 1517, Printing, and the Marking of the Reformation (New York: Penguin Press, 2015), 120, 138, 210, 312; 앤드루 페트그리, 󰡔루터 브랜드: 역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의 글쓰기, 인쇄, 출판 전략󰡕, 김선영 옮김 (경기도: 이른비, 2022), 184, 206, 302, 438. 크리스먼 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의 특징은 책의 전쟁이 아니라 팸플릿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Miriam U. Chrisman, Lay Culture, Learned Culture: Books and Social Change in Strasbourg, 1480-159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2), 12.

    5 Louise W.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Church History 11 (1942/2), 131.

   6 Steven E. Ozment, Protestants: The Birth of a Revolution (New York: Image Books, 1993), 45. 

 

이처럼 인쇄물이 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루터를 위시해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이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미디어 공세를 취했기 때문 이다.

루터는 일찍이 “인쇄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오류를 없애기 위해 하늘이 내린 기술”이라고 확신하며 그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다. 7

역으로 이런 전략적 사용은 당시 인쇄업의 급성장을 촉진했다.

이처럼 미디어의 관점에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접근하면 개혁의 성공을 위해 루터의 메시지와 미디어 전략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시너지 효과를 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이해하는 데 미디어 의 관점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된다.

이 관점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외에서는 기존에 주로 집중한 교회사, 지성 사, 사회사에서 미디어 또는 커뮤니케이션의 역사까지 연구 방법을 확장해, 이미 1980년대 초에 이 관점에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탐구하기 시작 했다. 8

 

     7 Pettegree, Brand Luther, 24. 물론 루터는 인쇄업자들의 역할과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인쇄업자들이 자신의 탐욕에만 사로잡혀 있는 경우도 지적했다. 한 예로 루터는 1521년 8월 15일 에 게오르크 슈팔라틴(Georg Spalatin)에게 쓴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탐욕스러운 수전노들 이 책을 출판하면서 자신의 수익보다 독자의 이익에 더 관심을 가질 때까지 더는 [원고를] 보내지 않을 작정이라네. 이런 인쇄업자는 그저 ‘나는 돈만 벌면 그만이야. 무엇을 어떻게 읽을지는 독자 가 걱정할 일이야’라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네.”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Briefwechsel, 18 vols, eds. G. Bebermeyer and O. Clemen (Weimar: Hermann Böhlau, 1930-1978), 2. 379-380(이후로는 WA Br. 2. 379-380와 같이 표기);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75 vols., eds. Jaroslav Pelikan, Helmut T. Lehmann, and Christopher Boyd Brown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5ff.;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55–1986), 48:293(이후로는 LW 48:293과 같이 표기).

    8 황대현,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책자,” 「역사교육」 107 (2008), 191.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한 이런 새로운 접근방식은 “일반 역사학 연구 의 방법론적 지평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이후 인터넷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동반된 사회 ․ 문화적 급변화를 감지하면서 독일 사학계에서도 근래 커뮤니케이션 역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9

 

     9 황대현, “종교개혁 공공영역과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통상황,” 「서양사론」 97 (2008), 117-118. 황대현은 활판인쇄술과 인쇄서적이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조명하는 연구가 이미 1970년대부터 나오기는 했지만, 특히 1980년대 초에 나온 2권의 책이 독일 프로테스 탄트 개혁 초기의 커뮤니케이션 상황 전반에 대한 역사가들의 관심을 촉발했다고 소개한다. 첫 번째 책은 쾰러(H.-J. Köhler)가 편집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기 대중매체로서의 팸플릿󰡕이다. 이것은 1980년에 튀빙겐(Tübingen)에서 개최된 국제 학술대회의 산물이다. Hans-Joachim Köhler, ed., Flugschriften als Massenmedium der Reformationszeit. Beiträge zum Tübinger Symposion 1980 (Stuttgart: Ernst Klett Verlag, 1981). 이것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여기에는 16세기 독일에서의 인쇄술의 발달,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개혁 팸플릿의 성격, 중요성, 급속한 확산, 일반인에게 미친 영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19편의 논문이 담겨 있다. 두 번째 책은 1982년 에 출간된 볼파일(R. Wohlfeil)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사 입문󰡕이다. Rainer Wohlfeil, Einführung in die Geschichte der deutschen Reformation (München: C. H. Beck, 1982). 볼파일은 개혁 초기(1517-1525)에 특징적인 다양한 미디어와 복합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관한 연구로 새 지평을 열었다. 특히 그가 사용한 “프로테스탄트 개혁 공공영역”이란 개념은 16세기 독일사와 프로테스탄트 개혁 연구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같은 책, 118-120.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Elizabeth L. Eisenstein)은 르네상스에 관한 논의에서 종종 간과되는 인쇄술의 영향이 프로테스탄트 개혁 에 관한 연구에서는 간과될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10

그런데 국내 학계에서 는 이런 연구 방법과 주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아직 매우 미미하며, 이제 까지 나온 연구물은 극히 적은 형편이다. 국내 신학자가 이 주제와 관련해 내놓은 연구물은 2편에 불과하다.11

그나마 일반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조금 있다.12

이 같은 실태는 국내 신학 분야에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관한 연구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까지의 연구는 대부분 교회사나 교리사적 접근에 치중되어 있다.13

 

      10 Elizabeth L.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2n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164.

      11 권진호, “종교개혁 초기의 설교 소책자,” 「신학사상」 157 (2012), 269-298; 봉원영, “구어적 매체가 16세기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과 현대 기독교의 적용,”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15 (2015/4), 556-570.

      12 서양사학자인 황대현과 오종현, 독어독문학자인 김면과 최경은의 논문이 있다. 황대현,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책자,” 「역사교육」 107 (2008), 191-216; “종교개혁 공공영역과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통상황,” 「서양사론」 97 (2008), 117-141; “독일 종교개혁 전단지: 숭배대상에서 선전도 구로 변화한 시각적 이미지,” 「사림」 34 (2009), 269-295; “도시수공업자는 종교개혁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아우크스부르크의 직조공 우츠 리히스너(Utz Rychssner)의 사례,” 「서양사론」 100 (2009), 155-186; “종교개혁 초기 전단지에 투영된 농민의 이미지: 뉘른베르크 전단지 작가들 의 작품 4편을 중심으로,” 「서양사론」 105 (2010), 5-39; 오종현, “‘루터파’ 선전과 교황의 타자화: 시각 인쇄매체를 중심으로,” 「서양중세사연구」 41 (2018), 71-103; 김면, “독일 인쇄술과 민중본,” 「인문연구」 59 (2010), 253-280; 최경은, “구텐베르크 서적인쇄술 발명의 사회문화적 배경,” 「독 어교육」 51 (2011), 499-518; “루터 이전에 인쇄된 독일어성경의 문화사적 의의,” 「뷔히너와 현대 문학」 38 (2012), 201-230; “종교개혁이 서적인쇄에 미친 영향,” 「독일언어문학」 57 (2012), 239-264. 김선영 |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35

      13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 참조, 김선영, “「한국교회사학회지」에 게재된 16세기 교회사 논문 분석 평가 및 방향 제시,” 「한국교회사학회지」 55 (2020), 145-182.

 

이런 접근법이 꼭 필요하기는 하나 여기에만 매여있으면 복잡다단한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진면모를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요, 통합적 관점을 위해 필수적인 다양한 접근법을 놓치 게 될 것이다.

본 연구의 필요성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이와 더불어 시기적으로 온 인류를 혼란에 빠뜨린 전대미문의 코로나19 도 본 주제를 다룰 필요성을 강화했다.

코로나19로 촉진된 새로운 미디어 혁명을 경험한 한국 개신교회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돌파구를 찾고자 분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이 될 만한 사례의 필요성 을 절감하던 중 교회사가로서, 특히 루터 학자로서 본 연구자는 루터에게서 도움이 될 사례를 발견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기치 아래 그리 스도교의 본질인 성경의 권위를 재확립하면서, 동시에 당시 최첨단의 미디 어를 활용하며 적극적인 미디어 전략을 펼치면서 미래를 향해 돌진한 루터의 모습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본 논문은 팸플릿 캠페인이라는 관점에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탐구한다.

특히 1517년부터 1525년까지를 중심으로 루터가 선도하는 프로테스탄트 측과 가톨릭 측의 권위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와 태도가 상반된 미디어 전략과 그에 따른 판이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구체적인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 및 프로테 스탄트 측과 가톨릭 측 사이에 벌어진 미디어 캠페인의 형세를 살펴본다.

  둘째, 이 미디어 캠페인에서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측이 우세할 수 있었던 원인을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터의 메시지와 그가 전략적으 로 사용하는 미디어 간의 밀접한 상응에 주목하여 고찰하고, 그 결과를 기술 한다.

  셋째, 가톨릭 측의 미진한 대응의 원인을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를 방어하는 메시지와 이에 적합하지 않은 미디어 간의 불상응이 초래한 딜레마 에 주목하여 분석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서술한다.

결론에서 간단하게나마 이러한 연구 내용이 한국 개신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제시 한다. 상기한 연구목적과 연구내용은 본 논문의 차별화된 연구방법도 보여준 다.

   첫째, 16세기 및 그 전후의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상황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물을 조사한다.

   둘째,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특히 독일에서 진행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분석한 연구물을 고찰한다.

   셋째, 루터와 로마교회의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최대한 일차문헌을 다룬다.

   넷째, 교리사 및 교회사와 관련된 부분을 위해서는 권위 있고 적절한 2차 문헌을 선정해 사용한다.

본 연구는 권위 문제를 중심으로 루터와 로마 가톨 릭교회 사이에 벌어진 신학적 논쟁 및 양측의 미디어 전략과 그 결과를 비교 연구한 첫 우리말 논문이라는 점, 루터의 메시지와 미디어 전략이 한국 개신 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찾아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II. 루터와 로마교회의 팸플릿 캠페인

 

1. 프로퍼갠더를 위한 팸플릿 캠페인

 

한스-요아힘 쾰러(H.-J. Köhler)는 1501년부터 1530년까지 신성로마제국 에서 발행된 팸플릿 판(edition)은 약 10,000개이고, 판당 평균적으로 1,000부 를 찍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만약 이 수치가 옳다면, 16세기 첫 30년 동안 제국에 배포된 팸플릿은 대략 1,000만 부에 달한다.

당시 제국에는 1,2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고, 약 5%에 해당하는 60만 명 정도가 문해력을 갖췄다고 보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한 명당 팸플릿 16부 정도를 손에 넣은 셈이다.

여기서 이목을 끄는 점은 1517년과 1518년 사이에 팸플릿 생산 이 530%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이 급속한 성장률은 1524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특히 독일어권 국가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에 결정적 시기였 던 1520년부터 1526년까지는 팸플릿 호황기였다.

이 7년 동안 1501년부터 1530년까지 발행된 총생산량의 거의 3/4(73.9%)이 출판되었다.

이때 연간 생산량의 평균치는 1518/19년보다 거의 4배, 1518년 이전 기간보다 55배 더 높았다. 14

여기서 이목을 끄는 또 다른 사항은 이 기간에 발행된 전체 생산량 의 20% 정도는 루터의 글이었다는 점이다. 15

1523년과 1524년은 엄청난 팸플 릿 수량으로 인해 단연코 돋보인다.

1524년에는 팸플릿의 전체 생산량이 정점을 찍었다. 이 한 해에만 1501년부터 1530년까지 생산된 팸플릿의 16% 이상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전체 기간 연평균의 5배에 달하는 수치다.

팸플릿 생산이 1525년과 1526년에 급감했다 해도, 1527년부터 1530년까지 생산량은 1518/19년보다 거의 2배 높은 수준, 그리고 1518년 이전보다 20배 이상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16

 

    14 Hans-Joachim Köhler, “The Flugschriften and their Importance in Religious Debate: A Quantitative Approach,” ‘Astrologi hallucinati’: Stars and the End of the World in Luther’s Time, ed. Paola Zambelli (Berlin: Walter De Gruyter, 1986), 154-155.

   15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7.

   16 Köhler, “The Flugschriften and their Importance in Religious Debate,” 155-156. 매우 놀라운 이러한 수치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명심할 사항이 있다. 첫째,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사건이지 기술혁신에 의한 사건이 아니었다. 둘째, 이 시기의 출판 통계를 다룰 때 문해율을 고려해야 한다. 최근 추산에 의하면 당시 독일 인구의 문해율은 5-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시골보다 도시의 문해율은 더 높았다. 이것은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유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낮은 문해율은 인쇄술이 루터의 사상을 확산하는 데 미친 영향력과 관련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사항들을 고려할 필요는 있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인쇄술은 여전히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서 빠질 수 없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David V. N.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Catholic Controversialists, 1518-1525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1), 184.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시기에 배우지 못한 이들을 위한 “시각적 프로퍼갠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는 다음 책 참조, R. W. Scribner, For the Sake of Simple Folk: Popular Propaganda for the Germ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2004). 스크립너는 “인쇄된 프로퍼갠더 에만 한정적으로 관심을 집중하는 것보다 시각적 프로퍼갠더를 연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일반 대중에게 어떻게 호소력을 발휘했는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1.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에서 팸플릿에 주목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대중의 생각과 행위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프로퍼갠더를 위해 논쟁자 가 의도적으로 팸플릿을 사용한 게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는 사실 이다.

로마교회도 이미 튀르키예인을 대상으로 하는 십자군 전쟁을 위해 인쇄업자들의 도움을 요청했었고, 인쇄술이라는 신기술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있었다.

교황청은 튀르키예인을 무지한 불신자로 폄훼하면 서 인쇄술은 서구의 정신적, 문화적 우월성의 증거라고 선전했고, 이러한 생각은 십자군을 파견하는 과정에서 널리 퍼졌다.

인쇄술을 활용한 “최초의 종교 운동”인 셈이었다.17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역시 인쇄술의 탁월성을 인지했고, 유럽 전역에 걸쳐 도시에 인쇄업자, 유통업자, 소매업자, 심지어는 독자층까지 아우르는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18

이들은 16세기 초에 인문주의 자와 스콜라 신학자 간의 충돌, 또는 좀 더 정확히 인문주의 안에서 다른 진영 간의 논쟁으로 묘사되는 팸플릿 전쟁에서 논쟁적 팸플릿을 사용했다. 19

 

    17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164-165.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마가렛 메세르브(Margaret Meserve)는 “인쇄된 파문 교서와 전쟁 선포로부터 희년 발표와 새로 운 면벌부까지, 순례자 안내서와 기념품 전단지부터 외교상 연설, 인문주의자들의 논문, 찬가 시까지 르네상스 로마는 인쇄물이 넘쳐나는 도시”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로부터 루터에 이르기까지 6명의 르네상스 교황 시기와 관련해 던져야 할 질문은 로마교회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만큼 인쇄에 관심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인쇄 문화를 조성했는지라고 지적한다. Margaret Meserve, Papal Bull: Print, Politics and Propaganda in Renaissance Rom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1), 4.

    18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185.

    19 앞의 책, 190-191.

 

루터 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이처럼 이미 다져진 기술과 시설 및 네트워크를 활용했고, 이 덕분에 인쇄물의 양이 급격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개혁 초기에 팸플릿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배포할 수 있었다.20

하지만 대중 매체로서 인쇄물의 잠재력을 십분 활용한 것, 확립된 제도에 반대하는 공공연한 선전과 선동을 위해 새로운 기술인 인쇄술을 사용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이 최초였다.21

즉, 16세기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 혁을 팸플릿 캠페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는 팸플릿을 통한 의도적 프로퍼 갠더가 전례 없는 규모로 펼쳐졌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기 때문 이다.22

그리고 이 현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요인은 루터였다.23

 

      20 Louise W.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Church History 11 (1942/2), 126.

     21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165; Richard G. Cole, “The Reformation Pamphlet and Communication Processes,” Flugschriften als Massenmedium der Reformationszeit. Beiträge zum Tübinger Symposion 1980, 142.

     22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6-17. 23 Richard A. Crofts, “Books, Reform and the Reformation,” Archiv für Reformations- geschichte 71 (1980), 31. 크로프츠는 통계 수치를 통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독일 사회는 개혁을 갈망하고 있었다기보다는 가톨릭교회가 제공하는 영적 자원들에 대체로 만족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따라서 루터는 단순히 개혁을 향한 기존의 외침을 프로테스탄트 개혁 으로 이끈 촉진자가 아니었다. 크로프츠는 이런 상황에서 돋보이는 것은 창조적인 신학적 통찰 을 얻고 그것을 신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변화시킨 재능 있는 신학자로서 루터의 점증하 는 인기라고 지적한다. 같은 글. 크로프츠는 또한 가톨릭교회가 루터처럼 문학적 재능과 인기를 갖춘 인물을 키우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측의 통계에서 루터의 작품을 빼면 가톨릭 측이 더 많은 출판물을 내놓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톨릭교회가 그런 인물을 찾아내어 후원했다면 개혁의 흐름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Richard A. Crofts, “Printing, Reform, and the Catholic Reformation in Germany (1521-1545),” Sixteenth Century Journal 16 (1985/3), 381. 

 

 

2. 루터의 적극적 공략 vs. 로마교회의 미비한 대응

 

이런 놀라운 수치 가운데서 확연히 도드라지는 게 있다.

그것은 루터 한 인물과 가톨릭 논쟁자들의 자국어 출판물의 수치만 비교해도 개혁의 첫 수십년 동안 미디어 캠페인의 형세가 한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다는 점이 다.24

여기에 다른 프로테스탄트 저술가들의 글을 포함하면 그 격차는 훨씬 더 현저해진다. 루터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대중에게 개혁의 필요성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들의 동참을 끌어내기 위해 용전분투했다.

루터는 일찌감치 면벌부 반박 95개조 논제의 번역본들이 유럽 전역으로 순식 간에 퍼져나가며 상상치 못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고 대중 매체로서 인쇄술의 잠재력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루터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적극적인 미디어 공세를 취했다. 반면, 로마교회는 개혁이 시작된 지 수년이 지나도록 프로테스탄트 공세에 대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마크 에드워즈(Mark U. Edwards)는 이런 특이한 상황에 대해 16세기 개혁 초기의 미디어 캠페인에서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논쟁자들은 가톨릭 측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으면서” 활동했다고까지 평가한다.25

물론 나중에 다루겠지만 가톨릭 논쟁자들의 개별적인 노력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논쟁자를 공격하고 기존 교리를 옹호하는 팸플릿을 썼다.

하지만 수적인 면에서 볼 때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서 쏟아져 나오는 팸플릿 숫자에 필적하지 못했다.

루터의 경우 1518년부터 1544년까지 성경 번역을 제외한 독일어 저작물의 출간 횟수는 재인쇄까지 합쳐 적어도 2,551쇄에 달했다. 가톨릭 논쟁자들의 경우에는 548쇄에 불과했 다.

루터와 가톨릭 논쟁자들이 내놓은 독일어 저작물의 출간 횟수 비율은 약 5대 1인 셈이다.

논쟁적이지 않은 작품 및 오로지 다른 프로테스탄트 저자 들을 겨냥한 논쟁적인 작품은 제외하고, 명백한 반가톨릭적 내용이 담긴 루터의 글만 고려하면, 비율이 5대 3(루터는 875쇄, 가톨릭은 514쇄)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생산량은 여전히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26

 

     24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20, 30.

     25 앞의 책, 28-29.

     26 앞의 책, 20(Table 2), 29, 30(Table 6).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소책자나 팸플릿을 프로퍼갠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완성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미디어 공략을 펼쳤다. 27 반면에 어마어마한 기득권과 조직력을 갖춘 가톨릭 측은 의아스러울 만큼 규모로나 기세로나 이에 걸맞은 대응을 보이지 않은 듯 보인다. 그 이유를 종교적 권위와 관련된 양측의 서로 다른 견해, 즉 권위에 대한 도전 vs. 권위의 방어라는 상반된 동기가 미디어 캠페인과 관련된 태도와 전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 어 분석해 볼 수 있다. III. 루터: 권위에 도전하는 메시지와 미디어의 밀접한 상응에 의한 적극적 공략 1. 권위에 도전하는 메시지 1) 교황, 로마교회, 성직자의 권위에 대한 도전 루터가 애당초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면벌부 반박 95개조 논제를 비롯해 이후 오간 날 선 공방에서 가톨릭 논쟁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열정적 으로 옹호한 주제는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였다. 28 사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城)교회 문에 게시하면서 토론하고 싶었던 핵심 주제는 교황의 권위 자체가 아니었다. 루터의 의도는 죄의 용서 및 보속과 관련해 교황의 권한이 어디까지인가를 토론해 보자는 것이었다. 교황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공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 27 앞의 책, 15. 28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5. 42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4집 베드로 대성당 면벌부 판매 설교로 95개조 논제 작성에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한 요하네스 테첼(Johannes Tetzel), 독일에 있는 그의 도미니쿠스회 동 료들, 그리고 프리에리아스(Prierias)라 불린 실베스트로 마촐리니(Silvestro Mazzolini da Prierio)는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며 분개했다. 테첼의 논박에 대한 응답으로 루터는 󰡔면벌부 효용에 관한 논제 해설󰡕 (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내놓았다. 그리고 1518년 5월 30일,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Leo X)에게 󰡔해설󰡕과 함께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여기서 루터는 테첼과 같이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이 95개 조 논제를 분명한 근거로 반박할 수 없으니까 교황의 권위를 침해한 것처럼 왜곡한다고 하소연했다.29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루터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비난하는 교서 Exs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를 반포했다. 루터는 8월 7일에 60일 내로 로마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과 함께 프리에리아스의 보고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주제넘은 논제들에 관한 대화󰡕(In praesumptuosas Martini Lutheri conclusiones de potestate papae dialogus)도 받았 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실베스트로 프리에리아스의 대화에 관한 응답󰡕(Ad dialogum Silvestri Prieritatis de potestate papae responsio)을 내놓았 다. 하지만 여기서도 교황의 판단에 복종할 의사를 내비쳤다. 1518년 10월 12일부터 3일 동안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카예타누스(Cajetanus) 로 알려진 토마소 데 비오(Tommaso de Vio) 추기경이 심문을 진행했다. 카예 타누스는 루터에게 오류를 뉘우치고 취하하라고 요청했다. 30 반면에 루터는 무조건적 취하가 아니라 토론을 원했다. 그리고 카예타누스가 그의 입장의 근거로 내세운 교서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29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73 vols., eds. J. F. K. Knaake et al. (Weimar: Hermann Böhlau, 1883–2009), 1:526(이후로는 WA 1:526과 같이 표기); LW 48:68. 30 WA 2:7; LW 31:261. 김선영 |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43 맞섰다.31 이 과정을 통해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 문제가 핵심 주제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루터는 10월 16일에 한 그의 공식 호소, 그리고 10월 17일과 18일에 쓴 서신들에서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고백했 다. 하지만 카예타누스와의 만남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한 루터는 자유로운 공의회를 개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1519년 1월 중순에 교황 교서 Cum postquam을 받았을 때 루터는 더는 저자세를 취하지 않았다.32 테첼, 프리에리아스, 카예타누스와 논쟁을 거치며 이슈화된 교황권 문제는 루터와 요하네스 에크(Johannes Eck)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 (Leipziger Disputation, 1519. 7. 4-14)에서 명시적으로 핵심 쟁점이 되었다. 에크는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I, 314-335 재위) 시대로부터 시작하면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근거를 댔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Magna)가 실베스테르에게 준 것으로 여겨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은 사실 교황 수위권을 날조하 기 위해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위조문서임이 밝혀진 만큼 그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었다.33 에크와의 논쟁 후 교황에 대한 루터의 공격은 더 맹렬해졌다. 1520년 8월에 발간된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에서 루터는 교황과 로마교회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루터는 그들이 개혁에 반대하는 세 가지 방어 수단을 교묘하게 구축하여 그리스도교계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중 교황의 31 WA 2:8; LW 31:262. 32 Jared Wicks, “Roman Reactions to Luther: The First Year (1518),” The Catholic Historical Review 69 (1983/4), 559, 561-562. 33 WA Br. 2:48-49; Martin Luther, “Luther to George Spalatin, Feb. 24, 1520,” Luther’s Correspondence and Other Contemporary Letters, vol. I, 1507-1521, tr. and ed. Preserved Smith (Philadelphia: Lutheran Publication Society, 1913), 1:291. 44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4집 권위와 관련된 두 번째 방어 수단, 즉 교황만 성경을 해석하거나 해석을 확정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공상으로 꾸며낸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외쳤다.34 교황의 권위와 관련된 세 번째 방어 수단, 즉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하거나 확정할 수 있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처벌받아 마땅한 경우 교황 은 공의회의 권위에 의해 처벌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35 교황권 문제 다음으 로 󰡔교회의 바빌론 유수󰡕(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1520, 10)는 교 회의 권위에 대한 또 다른 중대한 공격으로 여겨졌고, 1520년대 초에 가톨릭 측은 이에 대해 가장 많은 논쟁적 글을 내놓았다.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며 가톨릭 논쟁자들은 7성례에 토대를 둔, 평신도의 일상생활에 대한 사제의 권위를 옹호했다.36 2) 평신도의 영적 위상 격상: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 95개조 논제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얻으면서 로마교회로부터 생명의 위 협까지 받게 된 루터는 뒤꽁무니를 빼지 않고 오히려 목숨을 내놓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에 나타난 루터의 문필력은 고위 성직자들이 현상과 기득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고 개혁을 주도할 의식도 의지도 결핍되어 있음을 한탄하고 분개하는 그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루터는 개혁을 위한 동참자를 확보하기 위해 분발했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 하고, 신학과 관습을 바로 세우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34 WA 6:411; LW 44:134. 35 WA 6:413; LW 44:136. 1516년 12월 19일에 개최된 제5차 라테란 공의회(Lateran Council), 제11차 회의의 결과물인 교서 Pastor aeternus gregem은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오직 로마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환하고, 옮기고, 해산할 전권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Heinrich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Latin-English, rev. ed. by Peter Hünermann(for the original bilingual edition), ed. by Robert Fastiggi & Anne Englund Nash(for the English edition), 43rd ed., no. 1445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12), 361-362. 36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145. 김선영 |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45 위해 성직자 그룹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의 왕족과 귀족과 지식층 및 평민으로 구성된 비성직자 그룹에도 호소했다. 그리고 교황을 위시하여 로마교회와 성직자의 왜곡된 특권을 허물고 무너뜨렸다. 그와 동시에 루터는 평신도의 영적 위상을 세워주고 높여주었다.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첫 번째 방어 수단이 “영적 신분”과 “세속 신분”을 갈라놓 고, 세속 신분은 영적 신분에 대해 어떤 관할권도 없으며 영적 권세가 세속 권세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사기요 위선”이라고 규탄했다. 이런 인위적인 신분의 분리 대신 루터는 베드로전서 2:9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두 세례를 통해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론을 내세웠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은 모두 영적 신분에 속하고 직(office)의 차이를 제외하고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37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간의 영적 평등을 주창한 루터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서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교회를 포로로 잡아놓고 억압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루터는 성직자가 하나님과 인 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성직자 위계 제도로서의 교회의 주장을 공격함으로써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참된 교회를 포로 상태에서 해방하 는 일에 착수했다. 3) 평신도의 개혁 참여 독려 루터는 평신도의 위상을 격상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제대로 일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평신도 또는 적어도 평신도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의 권한으로 그리스도교계의 개혁을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독일 37 WA 6:406, 407; LW 44:126, 127. 루터의 이러한 가르침이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오즈먼트는 이렇 게 기술한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의 팸플릿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및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사이의 모든 영적 차별이 신속히 소멸하고 있던 당시 그리스도교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 고 있다.” Ozment, Protestants: The Birth of a Revolution, 59. 46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4집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독일 귀족에게 그들 자신을 허구적 인 성직자 신분에 종속시킨 교황과 성직자의 폭정에서 해방하고,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태만한 성직자를 대신해 개혁의 주체가 되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루터는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 (Nikolaus von Amsdorf)에게 글을 읽고 조언해 달라며 이렇게 적었다.

 

“전도 서 [3:7]에 기록된 것처럼 이제 침묵할 때는 지나갔고 말할 때가 왔다네. 하나님 께서 평신도들을 통해 그분의 교회를 도와주시기를 소망하며―이 과업은 성직자가 감당하는 게 더 적절하나 그들은 너무나 무관심해졌기에―나는 그리스도인 신분의 개혁 문제에 관한 몇몇 요지를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 앞에 제시하고자 정리하고 있다네.”38

 

여기서 루터는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해 공의회나 세속 통치자들이 이행해야 할 27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39

루터 의 진정성과 열정이 담긴 메시지와 탁월한 문필력에서 솟구치는 호소력은 당시 로마교회에 대한 반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던 독일 민족주의와 국가 의식을 더욱 고취했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40

 

     38 WA 6:404; LW 44:123.

     39 WA 6:415-469; LW 44:139-217.

     40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93.

 

2. 권위에 도전적인 미디어 팸플릿: 루터의 적극적 활용

 

1) 대상: 새로운 독자층으로 부상한 대중

 

교황청이 루터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최선책은 외교적 경로를 통해 비공 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곧 “루터에게는 세상의 관심이 말 그대 로 삶이냐 죽음이냐를 결정하는 산소처럼 꼭 필요한 것”임을 의미했다.41

 

     41 Pettegree, Brand Luther, 89. 

 

이처럼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들일 필요와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파악한 루터는 의도적으로 이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했 다.

이를 위해 루터는 “새로운 언어, 새로운 형태, 그리고 새로운 내용”을 내놓 았고,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태반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간편히 다룰 수 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그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에 응답”했다.42

그것은 주로 목회적 돌봄을 베풀고 경건한 삶을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루터 를 광범위한 대중에게 처음 소개한 것은 󰡔면벌과 은혜에 관한 설교󰡕(Eynn Sermon von dem Ablasz und Gnade, 1518. 4)였다.

이 첫 번째 “베스트셀러”에 이어 특히 평신도를 위해 저술된 일련의 짧은 독일어 설교와 경건한 삶을 위한 글이 신속히 나왔다. 43

이런 작품들 덕분에 루터는 독일 최초의 베스트셀 러 자국어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이전에 인쇄술을 사용했으나 엘리트 중심의 독자층을 주로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인문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폭넓은 독자층 을 확보할 수 있었다.

루터는 이 새로운 독자층에 최대한 신속히 다가가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로서 팸플릿에 주목했다.

팸플릿의 엄청난 위력을 경험한 루터는 팸 플릿을 통해 일반 대중을 신학적 논쟁 안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에게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을 취하도록 독려했다.44

 

     42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26-127.

    43 Edwards, Jr.,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63.

    44 앞의 책, 80.

 

인쇄술은 처음으로 종교적, 지적 운 동이 지식인층과 학자 그룹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 대중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게 했고, 결과적으로 까다로운 신학적 논쟁을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변 모시킨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이전까지 인쇄업자 의 최고 고객은 교회였다.

미사 전례서, 시편집, 성무일도서, 의식서, 기도서 등을 위해 가장 세련된 활자가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중세 고전, 로마법전, 그리고 과학 저작물이 인쇄되었다.

이것들은 “호화로운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각각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엄청나게 비쌌고,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살 엄두도 못 냈다.

더욱이 이것들은 거의 전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교육받은 그룹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즉 “교회, 학교, 그리고 학자들이 사실상 출판업의 생산물 전체를 흡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중세 필사본에서 성취된, 잘 디자인되고 정교한 솜씨로 제작된 예술 작품의 표준을 요구했다.”45

반면, 팸플릿은 특권을 가진 매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정된 좁은 집단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토론과 결정을 넘어서서, 교황의 명령, 공의회 교령, 시의회 판결, 그리고 제후의 지시 등이 대중의 면밀한 조사를 받도록 개방해 놓았다.

팸플릿을 읽을 수 있거나, 또는 읽어달 라거나 말해달라고 할 수 있는 자는 누구나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고, 편을 선택하도록 요청받았다. 46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거대한 독자층이 자국어를 사용한 대중 매체를 통해 혁명적 사상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일에 참여했다. 47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의 결정적인 몇 년 동안 대중에게 접근하여 그들 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가난하고 무지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평신도”가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팸플릿도 있었다는 사실이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이런 팸플릿 대다수는 지식인, 특히 성직자가 작성한 것이 었다. 48

그런데도 이처럼 가장한 이유는 엘리트 그룹이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할 때 그들이 독자를 위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유리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49

 

   45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23-124, 126.

   46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58.

   47 Arthur G. Dickens, Reformation and Society in Sixteenth Century Europe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9), 51.

   48 Hans-Joachim Köhler, “Die Flugschriften der frühen Neuzeit: Ein Überblick,” Die Erforschung der Buch- und Bibliotheksgeschichte in Deutschland, eds. Werner Arnold, Wolfgang Dittrich, and Bernhard Zeller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87), 317-318.

   49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27. 

 

새로운 독자층이 대거 유입되면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인쇄 ․ 출판 시장의 변화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인쇄는 “이전의 귀족적 사업”에서 “좀 더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사업”으로 변화했 다.50

루터에 의해 인쇄의 주된 목적도 바뀌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던 인쇄물이 사상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대중의 사고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 변형되었다.51

이렇게 인쇄술의 힘으로 형성된 여론으로 루터 는 교황의 권좌를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52

 

    50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34.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인쇄업자들은 낭패를 당했다. 같은 논문.

    51 앞의 논문, 124; Rudolf Hirsch, Printing, Selling and Reading, 1450-1550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67), 98.      52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171.

 

2) 형태: 쉬운 대량 인쇄 및 배포

 

팸플릿은 권위에 도전하는 루터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 자체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터의 메시지였 다.

곧 그가 사용한 미디어가 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이전까지 인쇄물은 관례적으로 2절판(folio) 크기였다.

루터는 몇 장으로 된 4절판(quarto) 또는 8절판(octavo)으로 만들어진 팸플릿의 선구자였다.

이처 럼 쉽게 다룰 수 있는 출판물은 15세기 말에 대중적 사용을 위해 도입된 인쇄물 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들은 대개 익명이었고, 흥미진진한 이상 기후 현상 에 대한 보고로부터 교서, 칙령, 면벌부, 광고, 그리고 초대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뭇사람의 시선을 끄는 그림과 종종 짧고 읽기 쉬운 본문이 포함된 한 쪽짜리 전단지 또는 한 면만 인쇄된 대판지(broadsheet)였 다.

이 대판지에서 나온 팸플릿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이전에는 아직 보기 드문 형태였다.53 

 

    53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27. 일부 저명한 작가들이 전단지 형태를 채택했고, 한스 부르크마이어(Hans Burgkmair)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와 같은 최상급 예술가들이 삽화를 제공했다. 같은 논문.

동시대인들은 팸플릿을 소책자(libellus 또는 Büchlein)라 불렀다.

그러나 팸플릿의 성격은 Flugschrift라는 용어에서 더 잘 포착된다.

그 뜻은 문자 그대 로 ‘날아다니는 글’이다. 54

 

   54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5.

 두꺼운 표지로 제본되지 않은 팸플릿은 얇고, 다루 기 간편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쾰러는 인쇄된 종이 한 장(sheet)당 약 1~2 페니히(Pfennig)였을 거로 추정한다.

그러면 대략 평균적 분량인 4절판 (Quarto) 4장, 즉 32페이지가 나오는 팸플릿은 약 8페니히가 된다.

이 액수는 장인이 버는 하루 품삯의 약 1/3 정도로, 닭 한 마리나 쇠고기 1kg, 또는 왁스 한 파운드나 갈퀴 하나 값과 같다.

이 정도는 보통 사람도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55

또한 팸플릿은 신속히 유통할 수 있어 대중에게 빠르게 메시지 를 전달하기에 적절했다.

더욱이 쉽게 숨겨 운반할 수 있었기에 팸플릿은 전복적인 메시지를 유포하기에 이상적이었다.56

많은 양의 정보도 거리에 상관없이 신속히 전파하는 데 최적화된 대중 매체로서 팸플릿에 담긴 메시지 는 단순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인쇄물이기에 복잡한 내용도 와전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었다.57

 

      55 Köhler, “Die Flugschriften der frühen Neuzeit,” 325;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6. 4절판(Quarto) 1장(sheet)의 경우 폴드(Fold)는 2, 리브(Leave)는 4, 페이지(Page)는 8이 된다.

      56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5.

      57 Köhler, “The Flugschriften and their Importance in Religious Debate,” 164.

 

여러 목판화를 포함한 팸플릿도 있었지만, 대부분은내용과 어느 정도 연관된 목판화 난외 장식 또는 단일 목판화 삽화가 실린 속표지를 제외하고는 장식되지 않았다.

따라서 인쇄업자들은 팸플릿을 빠르 고 저렴하게 찍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팸플릿은 전통적인 책처럼 종이와 활자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지 않았다.

팸플릿 생산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큰 규모의 인쇄 작업 사이에 할 수 있었다.

신속히 인쇄하 고 유통할 수 있었기에 급변하는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58

이처럼 루터는 설교 같은 진지한 작품을 비롯해 광범위하게 팸플릿을 사용하면서 관습과 급격히 단절하는 혁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루터는 1520 년 3월에 출판되고, 작센(Sachsen) 공작 요한(Johann)에게 바친 󰡔선행에 관하 여󰡕(Von den guten Werken)의 헌정사에서 팸플릿 사용은 의도된 것이라고 밝힌다.

루터는 많은 사람이 그가 교육을 못 받은 평민을 위해 독일어로 팸플 릿과 설교만 쓴다고 경시하고 비웃는 일을 매일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만 그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절대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많은 두꺼운 책을 저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이고 그리스도교계에 이익이 되는지는 다른 이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단호히 언급한다.

 

“저는 저들이 내놓는 그런 유의 두꺼운 책을 쓰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저들이 저의 소논문을 쓰는 것보다 더 쉽게 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저는 교육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독일어로 설교하고 글 쓰는 일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교 수들이 학교에서만 다루는 저 두껍고 무거운 책들과 저 질의들(questiones) 보다 이로 인해 더 많은 이익을 얻었을 것입니다.”59

 

    58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16.

    59 WA 6:203; LW 44:22. 

 

경이로운 판매량과 프로 테스탄트 개혁을 위한 참여도는 루터의 판단이 옳고 현명했음을 증명한다.

 

3) 언어: 자국어

 

16세기 초에 독일어권 사람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 고,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 수는 훨씬 더 적었다.

따라서 라틴어 출판물은 주로 성직자 및 신학 ․ 법학 ․ 의학 관련 직업에 속한 이들로 구성된 소수의 학식 있는 독자를 대상으로 했다. 반면, 자국어 출판물의 경우 일반인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자국어 팸플릿은 그 존재만으로도 평신도인 일반 대중도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고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자국어 팸플릿 그 자체가 “평신도에게 전례 없는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운명에 개입하라고 호소하는 연설”이었다.60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의 초기 몇 년 동안 자국어로의 급격한 전환과 함께, 자국어 출판물을 위한 대규모 출판 노력이 있었다. 1518년부터 1524년 까지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공격하고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논쟁적 글은 5편당 2편만 독일어로 쓰였다.

이것은 1525년부터 1529년까지 거의 절반으 로 증가했다가,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시 감소했다.

1518년부터 1555년까지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은 5편당 3편이 라틴어로 쓰였다.

하지만 루터는 1518 년부터 1544년까지 라틴어 작품 1편당 독일어 작품 4편을 내놓았다.

도시에 거주하는 평신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노력이 절정에 달했던 1518년부터 1529년까지 루터 글의 인쇄물 전체 중 80% 이상이 독일어로 쓰였다.

반가톨릭 적 논쟁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한정해도 수치는 거의 같다.

이 통계는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의 수많은 인쇄물은 제외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가톨릭 측의 인쇄물 중 독일어로 된 것은 절반이 조금 안 된다. 61

 

    60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58.

    61 앞의 책, 39-40. 

 

1518년부터 1525년 까지 프로테스탄트 저술가 중에서도 루터가 쓴 자국어 작품은 단연코 더 많다.

그 시기에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저술가 18명을 열거한 알레한드로 조르징(Alejandro Zorzin)의 통계는 이를 잘 보여준다.62

독일어에 의한 의사 소통의 중요성을 루터보다 더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63

이처럼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독일어로 글을 쓰기 시작한 루터는 “신학적 글쓰기에서 하나의 혁명”을 일으켰다.64

루터는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문체와 형식을 채택했다.

루터는 교회의 권위에 걸맞다고 여겨진 글쓰기를 대중에게 적합 한 글쓰기로 바꾸어 놓았다.

동료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대중 에게 대화를 거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 글쓰기를 만들어 냈다.

신학적 글쓰 기에서 장황하고 상세한 해설, 복잡하고 반복적인 표현을 권위 있고 가치 있게 여기던 시대에 루터는 간결함의 가치를 직감했다.

중세의 종교적 글과 비교해 볼 때 루터의 글은 단도직입적이며, 사변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았 다.

감동과 열정과 진지함이 있었다.

알레고리나 전설적인 성인 이야기나 일화는 없었다.

루터는 글쓰기가 말하기와는 다른 기술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어가 구어와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게 하는 그의 능력은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뿐만 아니라 출판물을 대중화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글쓰기가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던 메시지와 결합했을 때 그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이런 루터의 글쓰기 기술에 주목하며 홀본은 루터가 “최초의 위대한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언급한 다.65

 

     62 Alejandro Zorzin, Karlstadt als Flugschriftenautor, Göttinger Theologische Arbeiten, vol. 48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0), 24.

     63 Richard A. Crofts, “Printing, Reform, and the Catholic Reformation in Germany (1521-1545),” Sixteenth Century Journal 16 (1985/3), 376.

     64 Pettegree, Brand Luther, 133.

     65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28. 고전어와 독일어에 탁월한 언어적 재능을 갖춘 루터는 독일어 성경 번역을 통해서도 저술가로 서의 혁신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위협 가운데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III)의 선처로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신해 있어야만 했던 큰 시련 속에서도 루터는 11주 만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성경(Novum Testamentum Omne)을 독일어로 번역했다.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위해 1522년 9월에 출간되어 ‘9월 성 경’(September Bibel)이라 불리는 독일어 신약성경과 함께 1534년에 출간된 독일어 신구약 성경 은 독일어의 표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일반 독일인 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시장에까지 나가 그들의 일상용어를 경청하며 번역어를 신중히 선택했다.이렇게 해서 탄생한 성경이 인쇄되어 널리 유통되면서 많은 지역 방언을 대체하는 표준 독일어로 정착하기 시작했다.표준 독일어의 형성은 민족주의 고양에도 큰 영향 을 미쳤다.

 

3. 메시지와 미디어의 상응: 루터의 미디어 전략의 결과

 

1)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루터

 

1512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까지 출판 업적과 관련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존재였다.

1516년이 되어서야 루터는 첫 글을 출판했다.

그것마저도 요하네스 타울러 (Johannes Tauler)의 작품으로 여겨진 󰡔독일 신학󰡕(Theologia Germanica)에 붙인 간략한 서문 형태의 소론이었다.

누구도 이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루터가 조만간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유럽 대륙 전체를 뒤흔들어 놓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34세가 되던 1517년,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놀라운 능력을 지닌 저술가요 명문장가요 논쟁자로 새롭게 탄생했다.

1518년과 1519년 두 해 만에 루터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글을 펴낸 저술가가 되었고, 1520년 말 즈음에는 70년 전 인쇄술의 발명 이후 생존한 인물로서 가장 많은 작품을 써낸 저술가가 되었다.

루터는 이 최고의 자리를 16세기 말까지 유지했다.

출판물의 양과 시장에서 거둔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루터는 모든 살아 있는 동시대인 을 훨씬 능가했다.

루터의 글은 모든 고전문학 작가의 글보다 더 많이 팔렸고, 심지어 키케로(Cicero)의 작품과 같은 학교 커리큘럼의 주교재들보다 더 많 이 팔렸다.

16세기에 인쇄업자들은 루터 작품을 거의 5,000판이나 찍어냈고, 루터 성경처럼 그가 관여한 다른 출판 프로젝트도 포함하면 3,000판이 추가된다.

루터는 명실상부한 16세기 베스트셀러 작가였다.66

 

2) 프로테스탄트 진영 인쇄업의 번창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 출판업의 주된 부분은 정성껏 필사한 책들 을 거래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텐베르크가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인쇄기를 발명하자 인쇄된 책의 상거래는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인쇄 ․ 출판과 관련해 축적된 지식과 운영 요령이 없었던 터라 곧 난항을 겪으 면서 열정이 사그라진 2세대 인쇄업자들은 전통적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향 을 보였고 출판업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17년 이후 루터와 프로테 스탄트 개혁은 인쇄업과 출판업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다.

루터는 인쇄 술의 힘을 직감했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위해 인쇄업과 출판업의 도움이 필수적임을 확신했기에 비텐베르크에서 이 사업을 활성화하고자 분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일 인쇄업과 출판업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루터와 그의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과 함께 저렴한 인쇄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이후 출판업과 대중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예전 같지 않았다.

인쇄업 에 의존해 생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상황 속에서 루터가 선도하는 프로테 스탄트 개혁이 한창 진행될 때 독일 전역에서는 루터 덕분에 인쇄업자들과 출판업자들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한 예로, 루터가 사망하기 10년 전쯤 비텐베르크 인쇄업은 책 사업과 직접 관련하여, 그리고 책 사업에 딸린 다양한 사업과 관련하여 고용된 수백 명을 부양하고 있었다.67

 

     66 Pettegree, Brand Luther, xii, 26-27, 87, 104-105, 115, 334-335.

     67 앞의 책, xi-xiii, 9-12, 109-114, 280.

 

3) 비텐베르크 운명의 변화

 

루터가 처음 왔을 때 비텐베르크는 유럽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변방에있는, 약 2천 명 정도의 인구가 사는 변변찮은 소도시였다.

독일의 대도시들은 규모가 이보다 30배까지도 컸다.

비텐베르크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비롯 해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비텐베르크 대학교를 설립한 1502년에서야 처음 인쇄기가 들어왔다.

1502년부터 1516년까지 연속해서 다섯 명의 인쇄업자가 총 123권의 책을 발간했다.

매년 평균 여덟 권의 책을 찍어낸 셈이다.

지원금이 없었다면 이 인쇄소는 폐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상황은 1517년 10월 31일 이후 완전히 돌변했다.

책을 발간하는 독일의 50여 개 도시 중 비텐베르크는 1518년부터 1523년까지 600여 종의 작품을 출판한 놀라운 기록을 세운 가장 중요한 도시로 우뚝 섰다.

1543년, 비텐베르크에는 여섯 곳의 인쇄업소가 성업을 이루고 있었고, 루터가 사망할 무렵 비텐베르크의 생산량은 독일 최강 도시들의 생산량에 필적했다.

16세기 말, 비텐베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큰 출판 중심지가 되었다.68

 

      68 앞의 책, 5-6, 11-12, 23-24, 39-40; Holborn,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133.

 

IV. 로마교회: 권위를 방어하는 메시지와 미디어의 불상응에 의한 딜레마

 

1. 권위를 방어하는 메시지

 

1) 합법적 종교 기관으로서 로마 가톨릭교회 vs. 불법적 이단

 

테첼을 고용한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가 판단하기에 루터는 95개조 논제에서 면벌 및 면벌부와 관련해 교황이  지닌 권위에 대한 당시 견해를 반박하는 듯했다. 69

가톨릭 논쟁자들에게 루터 는 영적 문제에 필요한 법규를 제정할 교회의 권리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 다.70

이런 루터에게서 가톨릭 논쟁자들은 이단적 성향을 감지했다.

하지만 당시 다른 많은 신학적 주제처럼 면벌 문제도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던 만큼 가톨릭 논쟁자들은 신학적으로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꼭 집어 질책할 수 없었다.

이런 모호함 때문에 테첼과 프리에리아스는 루터가 제기한 면벌 과 관련된 신학적 논쟁점이 아니라 교황의 권위를 문제 삼았다.

그리고 천국 열쇠(마 16:19)나 성인들이 쌓아놓은 공로의 보고(寶庫)의 소유자로서가 아 닌, 교회의 신앙 규칙(regula fidei)의 수호자로서 교황의 위상과 권위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71

 

     69 Jared Wicks, “Roman Reactions to Luther: The First Year(1518),” The Catholic Historical Review 69 (1983/4), 522.       70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5.

     71 앞의 책, 26, 27. 

 

1518년 초, 테첼과 독일에 있는 도미니쿠스회 동료들은 루터를 공박했다.

4월에 테첼은 󰡔교황의 면벌과 은혜에 관해 20개의 오류 논제가 담긴 한 오만한 설교에 대한 반박󰡕(Vorlegung wider einen Vermessenen Sermon von zwanzig irrigen Artikeln päpstlichen Ablass und Gnade belangend)으로 루터의 󰡔면벌 과 은혜에 관한 설교󰡕를 논박했다.

테첼은 이 글에서 20개 항목에 걸쳐 면벌에 관한 루터의 주장을 비판했는데, 특히 쟁점으로 부각한 것은 교황권과 관련 된 언급이었다.

제7항에서 테첼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 자녀가 죄를 범하 면 내가 채찍으로 그들의 죄를 벌할지라도 내 긍휼을 그들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참조 시 89:32]’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 베드로와 합법적 으로 선출되고 거룩한 교회를 다스리는 모든 교황에게 그분의 충만한 권세를 주셨다.”

 

그로 인해 “교황은 거룩한 교회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교회 안에서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테첼은 이러한 이유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면 교황이 전적인 면벌, 즉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 plenaria)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죄로 인해 부과한 고통을 사면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19항에서는 루터의 잘못된 논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교황과 거룩한 교황청의 교도권(magisterium)과 재치권 (jurisdictio)을 멸시하게 될 것”이고, “모두 각자의 변덕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 고 싶어할 것”이고, “설교자와 신학자들을 더는 믿지 않을 것”이고, 결과적으 로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믿을 것이기에 거룩한 그리스도교계 전체가 커다란 영적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72

4월 말 또는 5월 초에 테첼은 라이프치히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 사용한 50개 논제를 담아 출판한 Subscriptas positiones에서 루터가 교황의 권위를 공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신앙 규칙의 보증인으로서 교황의 최고 지위 를 확립하고자 했다.

테첼은 제1항에서 “교회 내에서 교황의 권위는 최고이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제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속해서 테첼은 이렇 게 열거한다.

교황의 재치권은 보편교회와 공의회보다 우월하다(제3항).

교 황만이 신앙에 속한 것을 결정하고 성경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제4항).

“교황의 판단은 신앙에 관한 일과 인간 구원에 필요한 일과 관련해 조금도 오류를 범할 수 없다”(제5항).

교황은 존경받아 마땅하다(제8항).

그의 명예 와 권위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제9항).

교황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은 “이단의 표시를 받고 천국의 소망에서 제외된다”(제10항).

“교회의 열쇠는 모든 신자의 모임이라 불리는 보편교회가 아니라 베드로와 교황,”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과 미래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주어졌다(12항).73

 

    72 Johannes Tetzel, Vorlegung wider einen Vermessenen Sermon von zwanzig irrigen Artikeln päpstlichen Ablass und Gnade belangend, in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Münster: Aschendorff, 1988), 348-349, 361.

    73 Johannes Tetzel, Subscriptas positiones in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369,  371.

 

1518년 봄부터 루터 사건의 예비 조사를 위해 세 명의 교황청 소속 교회법 학자와 신학자가 참여했다.

루터의 논제를 신학적 관점에서 판단하여 보고 서를 작성하는 책임은 프리에리아스가 맡았다. 74

1517년 중반에 카예타누스 의 영향으로 교황을 돕는 고문이요 신학자로 임명된 그는 도미니쿠스회 수도 사, 검열관, 종교재판관, 대표적인 토마스주의자, 공의회주의 반대자였고 교회를 군주정체로 이해했다. 75

 

    74 Peter Fabisch und Erwin Iserloh, hrsg.,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33.

    75 Carter Lindberg, “Prierias and his Significance for Luther’s Developmen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3 (1972/2), 48. 6

 

테첼과 같은 논리를 사용하면서 프리에리아 스는 단 3일 만에 루터의 논제들에 대한 교리적 평가로 󰡔대화󰡕를 작성하여 6월 10일에 교황에게 제출했다.

여기서 그는 로마교회 및 교황의 권위와 관련 해 4가지 기준이자 토대(normas et fundamenta)를 제시했다.

 첫째, “보편교회는 본질상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하나님께 드리 는 예배를 위한 소집이다. 그러나 보편교회는 사실상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교회와 교황이다. 로마교회는 대표적으로 추기경단이지만, 사실상 교 회의 수장인 교황이다. 물론 그리스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째, “보편교회가 신앙이나 도덕을 결정할 때 오류를 범할 수 없듯 이” 교황도 참된 공의회도 직무를 행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

 셋째, “로마교회 와 로마 교황의 교리를 무류한 신앙 규칙―성경도 이로부터 힘과 권위를 얻는다―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 이단이다.”

  넷째, “로마교회는 말 만큼이나 행위에 의해서도 신앙과 관습을 결정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말이 행위보다 더 편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 관습은 법적 효력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성경의 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이단 이듯, 신앙과 도덕에 관해 교회의 가르침과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도 이단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결론은 이와 같다.

“면벌과 관련해 로마교회가 사실상 행해 온 바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 이단이다.”76

이것이 󰡔대화󰡕의 요지다.

교황이 보호할 임무를 맡은 신앙 규칙에는 성경과 전통의 기록물뿐만 아니라 교회가 채택한 관습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신학적으 로 아무리 논증이 잘 되어 있다 해도 교회 관습에 대한 비판은 모두 교황의 권위를 축소하는 당치 않은 이단적 사상이다.

이런 방식으로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주제가 면벌 논쟁의 주된 쟁점이 되었고, 교회의 관행이 옳든 그르든 그것이 교황의 보호를 받는 한 그 관행을 공격하는 루터는 그 보호자를 공격하 는 이단이 되었다.77

1518년 10월 12-14일, 루터는 극적으로 로마가 아닌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78

심문자요 교황 대사인 카예타누스는 당대 최고의 스콜 라주의자이자 교황 무류설 및 교황 수위권을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프리에리아스와는 달리 카예타누스는 루터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낙인찍지는 않았 다.

하지만 카예타누스는 루터를 교황의 권위를 공의회의 권위에 종속시킨 공의회주의 옹호자로 간주했고, 교황의 권위가 공의회와 성경과 전 교회 위에 있다고 다시 한번 못 박았다.79

그 역시 프리에리아스와 같은 방식으로 교황의 권위를 해석했고,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보다 더 나아갔다.80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진행된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한 에 의문을 제기했고, 성경을 다른 교리적 권위 위에 놓았다.81

 

    76 Prierias [Sylvester Mazzolinus]. Dialogus in praesumptuosas Martini Lutheri conclusiones de potestate Papae, 1518,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53-56.

    77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7, 28, 30.

   78 Pettegree, Brand Luther, 91-92.

   79 WA 2:8; LW 31:262;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Tischreden, eds. J.F.K. Knaake et al. (Weimar: Hermann Böhlau, 1912-1921), 5. No. 5523.

    80 Bernhard Lohse, Martin Luther’s Theology: Its Historical and Systematic Development, tr. and ed. Roy A. Harrisvill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9), 113.

    81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5. 

 

1520년 6월 15일에 교황청은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를 반포하면서 루터를 이단으로 명시했다.

이 문서는 41개 조항으로 루터의 이단 혐의를 정리해 놓고 그에게 파문의 위협을 가했다.

특히 25-28조에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된 루터의 주장 을 요약해 놓았다. 82

 

     82 Heinrich Denzinger,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nos. 1475-1478 (p. 366). 

 

루터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교황 수위권을 비판한다고 규탄했다.

1521년 1월 3일, 교황청은 결국 루터의 이단 파문을 공식화했고, 5월 26일에 카를 5세(Karl V)는 보름스(Worms) 칙령 을 통해 루터를 법외추방자로 공포했다.

 

2)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새삼스런 논란에 대한 반박

 

가톨릭 논쟁자들이 보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교회에 존재해 온 교리와 의식(ceremonies)이 새삼스레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측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83

루터는 합법적인 권위와 전통을 뒤엎 는 해로운 이단이었다.

한 예로 도미니쿠스회 요하네스 멘징(Johannes Mensing)은 미사에 대해 이렇게 변호했다.

 

“이처럼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단 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열두 사도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선조인 그리스 교부와 라틴 교부들이 단순한 신앙 가운데 지킨 거룩한 제사인 미사의 타당성을 우리가 증명할 필요가 없다.”84

 

    83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80.

    84 Johannes Mensing, Von dem Opffer Christi yn der Messe (n.p., 1526), Aij.

 

관심 있는 사람이면 모두 참여할 수 있고, 로마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타당성과 이에 대한 루터의 비판을 놓고 공개 논쟁을 벌일 수 있는 팸플릿 전쟁은 그 자체로서 교회의 권위를 전복하는 행위였다.

특히 루터가 1520년에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하 고, 1521년에 신성로마제국에서 법외추방자가 되면서 가톨릭 논쟁자들은 논쟁을 벌이는 데 더욱 예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로마교회와 교황의 권위 있는 결정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전략이었는데, 그러한 설명이 자칫 그 결정 자체에 결함이 있거나 논의의 여지가 있음을 암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85

 

      85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6.

 

  3) 신학적 논쟁은 성직자와 신학자의 고유영역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가톨릭 측과의 마찰 과 논쟁도 격화되었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대중이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동참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고, 가톨릭 측은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잡고 있어야 했다.

논쟁점이 된 권위에 관한 한 로마교회의 입장은 분명했다.

권위는 위계 체제 로서의 교회와 그것의 머리인 교황에게 있다.

일반 대중은 제도적 교회가 이미 결정한 문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논쟁은 물론이거니와 논의할 권리도 없다. 86

따라서 루터가 대중을 향해 오직 성경만을 권위로 삼고,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의 날조된 주장에 오도되지 말고 개혁에 참여하라고 독려할 때, 가톨릭 논쟁자들은 “무지하고 반항적인 평민”은 결코 그러한 논쟁에 연루되 어서는 안 된다고 일침을 가했다.87

그 대표적인 한 예가 프란치스코회에 소속된 법학자, 신학자, 풍자가인 토마스 무르너(Thomas Murner)다.

그는 1520년 11월부터 1521년 2월 사이에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루터를 반박하는 독일어 팸플릿 5편을 연이 어 익명으로 발표했다. 88

 

     86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80.

     87 앞의 책, 165.

     88 5권의 책 제목은 다음과 같다. Ein Christenliche vnd briederliche ermanung zu dem hoch gelerten doctor Martino luther Augustiner order zu Wittemburg (Das er etlichen reden von dem newen testament der heillgen messen gethon) abstande, vnd wider mit gemeiner christenheit sich vereinige (Strasbourg: Grüninger, 1520); Von Doctor Martinus luters leren vnd predigen.  Das sie argwenig seint, vnd nit gentzlich glaubwirdig zu halten (Strasbourg: Grüninger, 1520); Von dem Babstenthum das its von der höchsten oberkeyt Christlichs glauben wyder doctor Martinum Luther (Strasbourg: Grüninger, 1520); An den Großmechtigsten vnd Durchlüchtigsten adel tütscher nation das sye den christlichen glauben beschirmen, wyder den zerstörer des glaubens christi, Martinum luther einen verfierer der einfeltigen christen (Strasbourg: Grüninger, 1520); Wie doctor M. Luter vß falschen vrsachen bewegt Das geistlich recht verbrennet hat (Strasbourg: Grüninger, 1520). 

 

이 5편의 요지는 이렇다.

  첫째, 학식이 있는 신학자이지만 선동자인 루터는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을 호리며 이단적 호소를 통해 진리와 거짓을 섞어 가르치는데, 이는 전통적인 권위와 기존 체제를 뒤엎는 반역으로 쉽게 오도할 수 있다.

   둘째, 루터는 그의 신학에서 교황권, 에큐메니 칼 공의회, 그리스 또는 라틴 교부, 스콜라 신학자, 교회법 등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태도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권위에 대한 경시를 조장했다.

  셋째, 루터는 제도적 교회 안의 많은 남용을 공격함으로써 정당한 권위에 대항하는, 폭력과 반란으로 쉽게 선동되는 대중적 추종자들을 얻었 다. 하지만 남용이 있다고 해서 전통적 신앙을 바꾸는 일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넷째,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 그리고 영적 신분과 세속 신분을 갈라놓는 것은 평신도를 희생시키면서 성직자를 높이고자 의도된 속임수이며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제사장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는 사회의 전통적 질서를 전복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있다.89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터는 위의 5편의 글 중 한 편의 제목 자체가 명시하듯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파괴하는 자”요 “단순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자”였다. 90

 

    .89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61.

     90 Thomas Murner, An den Großmechtigsten vnd Durchlüchtigsten adel tütscher nation das sye den christlichen glauben beschirmen / wyder den zerstörer des glaubens christi / Martinum luther einen verfierer der einfeltigen christen, 1520, in Thomas Murners Deutsche Schriften, Band 7: Kleine Schriften, Teil 2, ed. Wolfgang Pfeiffer-Belli (Berlin: Walter de Gruyter, 1928), 59

 

무르너 의 눈에 비친 루터는 전통적인 신앙과 관습에 대한 논쟁에 일반인을 참여시키 는 부적절한 시도를 하고 사회의 모든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위험인물이었다. 

 

2. 권위에 도전적인 미디어 팸플릿: 가톨릭의 딜레마

 

1) 이단과의 공식적 논쟁에 뛰어드는 위험

 

가톨릭 논쟁자들의 활동을 제한한 딜레마 중 하나는 이단과 논쟁하고 있는 듯 보일 위험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초기에 로마교회가 팸플릿 전쟁에 뛰어드는 일은 곧 그들이 이단으로 의심하고 있는 자와 공식적인 논쟁에 뛰어드는 게 되는 만큼 교회의 입장은 매우 난처했다.

로마교회가 루터 및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과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논쟁을 벌이려면 논쟁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었고, 이는 논쟁거리가 있다는 프로테스탄 트 측의 주장에 명백한 정당성만 부여할 뿐이었다.

교황청이 쟁점을 결정하 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을 꺼리는 데에도 유사한 논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한 행동은 적어도 교황의 결정이 최종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 다. 91

특히 1521년에 루터가 공식적으로 파문당한 뒤에 이 딜레마는 더 곤혹스 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팸플릿 전쟁에 계속 참여하는 것은 곧 이단과 논쟁 을 벌이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가톨릭 논쟁자들은 이단과 위법적 논쟁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감내해야 하기도 했다. 92

로마교회 는 이단과 논쟁을 벌이면 가톨릭 신앙이 협상의 대상일 수 있음을 암시할 수 있다는 점을 심려했다.

또는 이단이 진리의 영에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루터와의 공개적 논쟁 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

공개적 논쟁을 벌인 이들은 그들의 노력이 이단과 의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93

 

    91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79.

    92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6-267.

    93 앞의 책, 211.

 

2) 신학적 논쟁에 평신도의 참여를 고무하는 모순된 결과

 

또 다른 딜레마는 선전용 팸플릿이 일반인을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사상을 전파하는 가장 무차별적 수단인 인쇄기를 사용할 경우, 루터 문제를 여론화하는 결과를 낳는 추가적 위험이 있었다.94

일반 대중은 공개적으로 신앙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게 가톨릭 측의 기본 방침인 만큼, “가톨릭 팸플릿은 그 존재 자체로 그것이 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바를 행하는 셈이었다.”95

따라서 원칙적으로 신앙의 문제에 대한 공개 토론을 반대한 무르너 같은 가톨릭 논쟁자가 자국어 팸플릿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방침에 상반된 처사였다.

실제로 무르너는 가톨릭 측 내부 인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96

이 같은 메시지와 미디어 사이의 불상응은 가톨릭 측의 적극적인 팸플릿 사용에 걸림 돌이 되었다.97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황대현은 믿는 자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혁명적인 제안에 대한 로마교회의 반응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사제를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중재자요, 성별된 존재로 여긴 로마교회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라는 루터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가톨릭 저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측의 대화체 팸플릿에 등장하는, 자신의 견해를 당당히 주장할 줄 아는 자의식이 강한 평신도를 내세우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팸플릿을 통해 평신도에게 더 밀접히 접근 하고 효과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이 매체의 다양한 텍스트 유형을 충분히 활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놓치고 말았다.”98

 

    94 앞의 책, 266.

   95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58.

   96 Thomas Kaufmann, “Anonyme Flugschriften der frühe Reformation,” Die frühe Reformation in Deutschland als Umbruch, ed. Bernd Moeller (Gütersloh: Gütersloher Verl.-Haus, 1998), 219.

   97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80. 

   98 황대현,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책자,” 「역사교육」 107 (2008), 208.   

 

3) 루터를 반박하는 글이 루터를 홍보하는 역효과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반박하고자 자국어 팸플릿을 쓰고 공개적 이고 대중적인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어야 하는지의 문제를 놓고 가톨릭 논쟁 자들은 또 다른 딜레마에 빠졌다.

왜냐하면 반박하려고 기술한 루터의 주장 이 의도한 바대로 대중을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대한 반감과 거부로 이끌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루터와 그의 지지자들이 제시하는 그 리스도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홍보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도록 초대하고,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고, 그의 글을 더 읽게 만들고, 그를 추종하게 촉진하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99

가톨릭 논쟁자들이 상당히 적대적이고 왜곡된 관점 에서 루터의 가르침을 소개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반로마, 반 교황, 반성직자, 반교권적 호소는 이미 그런 분위기가 널리 조성되어 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호기심을 유발하고 더 많이 알고 싶게 만들 수 있었다.100

프로테스탄트 메시지가 전파되고 대중이 논쟁의 내용에 대해 알 아가던 초기에, 루터가 무엇보다도 그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할 필요가 있었 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가톨릭 측에게 이런 현상은 매우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응답하지 않는 것은 자국어 독자층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루터와 그의 친구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응답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 의 입장을 메시지와 미디어 모두에 의해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톨릭의 딜레마였다.”101

 

    99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58, 80-81.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교회의 검열 역시 예측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역효과를 낳았다. 금서목록이 거기에 수록된 책 제목들을 무료로 홍보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삭제할 구절 목록은 독자들에게 반로마 구절을 찾을 수 있는 ‘책, 장, 줄’로 안내했고, 프로테스탄트 선전가들이 저명한 저술가와 평판이 좋은 작품에 서 반가톨릭 사상을 담고 있는 인용문을 직접 찾을 필요를 덜어주었다.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197.

     100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72.

     101 앞의 책, 58. 김선영 |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67

 

3. 메시지와 미디어의 불상응: 딜레마의 결과

 

1) 가톨릭 논쟁자를 위한 교황청의 후원 부족

 

이런 딜레마 속에서 이제 막 태동한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의 확산을 차단할 수도 있었던 결정적인 초창기에 로마교회는 상당히 미온적이고 관망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체계적인 미디어 전략의 부재 가운데 누구보다 가톨릭 논쟁자들이 시련을 겪었다.

지원이나 관심이 미비한 상태에서 그들 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녹록지 않았다.102

1518년부터 1525년까지 활동적인 가톨릭 논쟁자는 57명이었다.

이 중 약 10%가 전체 생산물의 44%를 내놓았 고, 30여 명은 단 한 번만 글을 썼다.

이들의 삶이 보여주는 바는 가톨릭 논쟁자 들을 위한 후원이 상당히 열악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쇄비용이 많이 든 만큼 이들에게는 현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로마는 논쟁자들에게 지속적 인 물질적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103

요하네스 코흘레우스(Johannes Cochlaeus)는 신세를 한탄하며 로마가 자신의 헌신을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고 충분히 후원하지도 않는 것을 비통해했다.104

희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논쟁자들은 그들을 향한 적의까지 감내해야 했다.

지롤라모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 1480-1542)는 클 레멘스 7세(Clemens VII, r. 1523-1534)에게 쓴 보고서에서 프로테스탄트 개 혁과 그것이 지속되는 것을 “박사들의 입과 인쇄업자들의 손이라는 두 가지 역병” 탓으로 돌리면서 이를 “악의 근원”이라 지적했다. 105

 

       102 Hubert Jedin, “Die geschichtliche Bedeutung der katholischen Kontroversliteratur im Zeitalter der Glaubensspaltung,” Historisches Jahrbuch 53 (1933), 73-76.

       103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189-190, 215, 218.

       104 Johannes Cochlaeus, “Cochlaeus an Aleander, 27 September 1521,”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XVIII Band, ed. Theodor Brieger and Bernhard Bess (Gotha: Friedrich Andreas Perthes, 1897), 120, 123.

       105 Hieronymus Aleander, “SSmo D. N. pedes exosculatur Aleander,” Beiträge zur Politischen,  Kirchlichen- und Cultur-geschichte der sechs letzten Jahrhunderte, III Band, ed. J.J. Döllinger (Wien: Manz’sche K. K. Hofverlags- und Universitäts-buchhandlung, 1882), 275. 

 

또 다른 글에서는 수 세기 동안 보편적인 신앙으로 고백한 것을 적대적이고 부적합한 재판관들 앞에서 토론의 여지가 있는 문제로 만들기 때문에 “공개적이고 미리 계획된 논쟁은 역병처럼 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논쟁이 벌어지면 프로테 스탄트 측에서 승리를 자랑하며 그 세력이 더 커지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는 처음 라이프치히에서, 가장 최근에는 취리히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을 목격했다.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다른 해로운 논쟁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106

 

이처럼 가톨릭 논쟁자들은 격려와 후원 대신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개혁 운동을 부채질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알레안드로가 1520년부터 1525년까지 교황 대사였음을 고려해 볼 때, 가톨릭 논쟁자들에 대한 그의 견해와 평가가 곧 로마의 견해와 평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107

 

    106 Hieronymus Aleander, “Consilium super re Lutherana,” Beiträge zur Politischen, Kirchlichenund Cultur-geschichte der sechs letzten Jahrhunderte, III Band, 245.

     107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21. 예딘은 이것이 클레멘스 7세의 통치 기간 내내 로마 교황청과 그 대표자들이 공유한 견해였던 것 같다고 하면서, 파울루스 3세 때 정책상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Jedin, “Die geschichtliche Bedeutung der katholischen Kontroversliteratur im Zeitalter der Glaubensspaltung,” 74-75. 하지만 바그치는 예딘의 판단이 과장된 면이 있다고 평가하면서, 오히려 예딘이 간과하고 있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 r. 1522-1523) 때 예외적으로 방향 설정의 변화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그치는 비록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6세가 논쟁자들의 목표와 매우 유사한 체계적인 프로그 램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22. 

 

파울루스 3세(Paulus III, r. 1534-1549) 치하에서 가톨릭 논쟁자들에 대한 지원 정책을 시작했다 해도 그러한 지원이 주목할 만한 출판물의 증가로 즉각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본 적으로 가톨릭 논쟁자들에 대한 교황청 고관들의 태도는 개혁 초기부터 트리덴티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까지 시종일관 소극적이고 부정적이 었다.

트리덴티노 공의회가 끝나고 나서야 예수회의 노력과 함께 로마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쏟아져 나오는 논쟁적 글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적인 노력을 시작했다.

당시 급변하는 정황을 고려할 때 상당히 지체된 조치였 다. 108

예딘의 표현에 의하면 가톨릭 논쟁자들은 그들의 헌신에 대해 때때로 보상받기는 했으나 멸시되었다.

루터파와의 심도 있는 지적 토론도, 가톨릭 저술가들과 인쇄업자의 홍보를 통한 계획된 선전을 하려는 시도도 없었 다.109

가톨릭 논쟁자들이 감독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바는 더 적었다.

하지만 극소 수의 예외는 있었다.

그중 마이센(Meissen)의 감독 요하네스 폰 슐라이니츠 (Johannes von Schleinitz)와 메르제부르크(Merseburg)의 감독 아돌프 폰 안 할트(Adolf von Anhalt)가 있다.

이 두 곳은 모두 게오르크(Georg) 공작이 다스리는 작센 공작령의 감독 관구에 속했다.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충실히 고수한 게오르크와 그의 사촌이며 안할트의 공녀인 마르그레테(Margrethe) 2명만이 가톨릭 논쟁자들의 후원자가 되었다.110

특히 게오르크는 주목할 만하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강력한 대적자인 게오르크는 다양한 성직 제후들을 포함하여 다른 어떤 가톨릭 통치자보다 인쇄술의 위력을 이해 하고 이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11

 

     108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77-78;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22.

     109 Jedin, “Die geschichtliche Bedeutung der katholischen Kontroversliteratur im Zeitalter der Glaubensspaltung,” 74.   

      110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28-230, 233. 111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36. 

 

프로테스탄트 도시들이 가톨릭 논쟁자 들의 작품에 출판금지령을 내리면서 서부의 쾰른(Köln)과 동부의 작센 공작 령이 가톨릭 논쟁자들의 문헌 인쇄를 지배하는 인쇄 중심지가 되었다.

프로 테스탄트 진영으로 넘어간 1539년까지 작센 공작령의 인쇄 중심지는 라이프 치히와 드레스덴(Dresden)이었다.

이 두 곳에서 가톨릭 측의 논쟁적 문헌 전체의 약 절반, 그리고 독일어로 된 논쟁적 문헌의 절반을 찍어냈다.

두 군데 의 교회 중심지인 쾰른과 마인츠(Mainz)는 주로 학식 있는 독자층을 위한 작품을 계속 생산했다.

이 두 곳에서 인쇄된 논쟁적 글 중 독일어로 된 것은 6분의 1도 채 안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는 라틴어로 된 글 2편당 3편 이상의 독일어 글을 내놓았다.112

여러 논쟁적 글을 직접 저술하기도 한 게오르크는 다른 논쟁자들이 글을 쓰고 출판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가톨릭 논쟁자들 가운데 선도적 역할을 한 코흘레우스, 에크, 엠저(Hieronymus Emser), 무르너, 실비우스(Petrus Sylvius), 그리고 비첼(Georg Witzel)이 쓴 작품이 1518년부터 1555년까지 이 기간에 가톨릭 측에서 내놓은 자국어 인쇄물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는데, 대다수가 게오르크의 후원을 받았다.113

 

    112 앞의 책, 29, 31.

    113 앞의 책, 36-37, 76;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30-231. 독일어로 글을 쓴 대표적인 가톨릭 논쟁자들과 그들이 내놓은 글의 분량은 다음과 같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인물은 비첼과 코흘레우스다. 1518년부터 1555년까지 비첼은 8편의 인쇄물 중 하나꼴로, 코흘레우스는 10편의 인쇄물 중 하나꼴로 작품을 내놓았다. 1518년 부터 게오르크 공작이 사망하고 공작령이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된 1539년까지의 기간만 보면 코흘레우스는 8편의 인쇄물 중 1편꼴로 저술 활동을 한 중요한 논쟁자였다. 같은 기간 동안 코흘레우스의 글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발행된 문헌의 20% 이상을 차지했다.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36(Table 9), 37. Number of Publications 1518-1539 Percentage of Total Catholic Publishing Effort 1518-1539 Number of Publications 1518-1555 Percentage of Total Catholic Publishing Effort 1518-1555 Cochlaeus 67 12.4% 74 10.6% Eck 38 7.0% 46 6.6% Emser 37 6.8% 38 5.5% Murner 29 5.4% 29 4.2% Sylvius 33 6.1% 33 4.7% Witzel 47 8.7% 89 12.8% Others 291 53.7% 387 55.6% Total 542 100.0% 696 100.0% 

 

게오르크의 채플린이었던 엠저와 코흘레우스는 논쟁적 글을 쓰고 출판하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게오르크의 비서요 충성스러운 선전자였던 엠저는 공작이 드레스덴에 인쇄소를 세웠을 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글을 발행할 수 있었다. 114

다양한 가톨릭 논쟁자들 이 글을 출판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마련해 준 코흘레우스는 개인적 희생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115

무르너는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고, 루터를 옹호한 논쟁자들의 조롱과 욕설만 받았다.

무르너는 결국 스트라스부르를 떠나야 했다.

다른 가톨릭 논쟁자들의 처지도 거의 매한가 지였다.116

이렇듯 프로테스탄트 진영이 수십 년 동안 인쇄기를 지배하며 신속히 확산하는 동안 이에 맞서보고자 한 가톨릭 논쟁자들은 교회로부터 제대로 후원도 못 받은 채 악전고투해야 했다.117

 

      114 Pettegree, Brand Luther, 222.

      115 Edwards,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36.

      116 앞의 책, 76.

      117 16세기 가톨릭 논쟁자들에 대한 평가는 크게 3 형태로 나뉜다. 그들의 업적과 공헌에 대한 평가를 최소화하는 학자들, 최대화하는 학자들, 그리고 중간 위치를 취하는 학자들이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위해서는 다음 글 참조,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6-8. 바그치 는 이 책에서 16세기 가톨릭 논쟁자들에 관한 연구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같은 책, 1-14. 

 

2) 인쇄업자에게 따돌림받은 가톨릭 논쟁자들

 

설상가상으로 인쇄업자들조차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을 외면했다.118

일 반적으로 인쇄업자는 비용을 충당하고 수익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판매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저자에게 비용을 물지 않고 작업하려 했다.

그런데 가톨릭 논쟁자의 글은 잘 팔릴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만큼 위험 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코흘레우스는 인쇄업자들은 거의 모두 비밀스레 루터파 신자라고 하면서, 무료로 인쇄해주지도 않고 충실하게 인쇄해 주지도 않는다고 한탄했다.119

 

    118 Pettegree, Brand Luther, 214-220.

    119 Cochlaeus, “Cochlaeus an Aleander, 27 September 1521,” 123.

 

가톨릭 논쟁자들은 책 시장 전체가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쓴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아무도 교황을 위한 것이나 루터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은 인쇄하려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인쇄업자들이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을 꺼리는 주된 이유는 기본 적으로 간단했다.

인쇄업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측을 옹호하기 때문에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을 인쇄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들의 글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 에 환영하지 않았다.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은 여러 이유로 분석해 볼 수 있다.

그중 신학적 내용과 함께 가톨릭 논쟁자 대부분이 쟁점 사안을 논의할 때 학문적 스타일과 라틴어를 고수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학문적 스타일은 수사적 측면에서 각각 고유한 관습이 있기에 글을 쓰는 이에게 많은 제약을 가한다.

논쟁 스타일은 특히 상대방의 글을 한 문장씩 논박하기, 상대방의 주장에서 모순을 찾아내 폭로하기, 상대방과 과거 이단과의 유사점을 상세히 제시하기 등 이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상당히 따분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는 논법을 사용했다.

이런 관습은 독자가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이처럼 가톨릭 논쟁자들의 문체는 지루하고 딱딱하며 분량 또한 길고, 학문적 논쟁 같은 경우가 많아 판매고를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120

 

     120 Bagchi, Luther’s Earliest Opponents, 267; Hirsch, Printing, Selling and Reading, 1450-1550, 98. 

 

3) 가톨릭 진영 인쇄업자들의 고충

 

가톨릭 논쟁자들의 글이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호응을 얻지 못했다 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나오는 글은 인쇄할 수 없고 오직 가톨릭 진영에서 나오는 글만 인쇄할 수 있었던 인쇄업자들이 겪은 고충에서도 잘 입증된다.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대표적 예는 라이프치히 인쇄업자들의 운 명이다.

1515년만 해도 라이프치히는 독일의 주요 인쇄 중심지로서 바젤 (Basel), 아우크스부르크, 그리고 스트라스부르 같은 다른 주요 생산 중심지들보다 앞서 있었다.

1515년부터 1522년 사이에 1,100판 이상을 발간했다. 무엇보다 개혁 초기에 라이프치히 인쇄업자들은 루터의 글을 열심히 찍어냈 다.

게다가 1519년 7월 4일, 루터와 에크와의 논쟁이 벌어진 라이프치히는 일시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개혁 드라마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 여름은 라이 프치히 인쇄업자들에게 “황금기”였다.

하지만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카를 5세가 루터를 법외 추방자로 공포하자 1522년에 게오르크 공작이 그의 공작령 안에서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저술가들이 쓴 저서의 인쇄와 매매를 전면 금지했다.

이로 인해 생산량이 곤두박질쳤다.

라이프치히 인쇄소들은 “1519년과 1520년에 각각 190판과 188판을 생산”했으나, “1521년과 1522년 에는 생산량이 반감했고, 1523년과 1524년에는 완전히 폭락했다.

1524년에 는 유력 인쇄소들이 겨우 25판만 생산했다.”121

시의회는 인쇄업자들을 위해 공작에게 탄원했다.

그들은 “집과 가족과 그들의 모든 생계”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비텐베르크나 다른 곳에서 나온 새로운 것을 “인쇄하는 것도 파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사람들이 기꺼이 팔려고 하고, 또 수요가 있는 물품은 보유해서도 안 되고 선매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엄청나게 쌓여 있는 [가톨릭 논문은] 누구 도 원하지 않고 거저 줄 수조차 없다.”122

 

       121 Pettegree, Brand Luther, 220-221; Pettegree, The Book in the Renaissa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1), 104-105.

       122 Felician Gess, ed., Akten und Briefe zur Kirchenpolitik Herzog Georgs von Sachsen, Erster Band 1517-1524 (Leipzig: B.G. Teubner, 1905), 641.

 

게오르크 공작이 1539년에 사망하면 서 후계자가 된 동생 하인리히 4세(Heinrich IV)가 작센 공작령에 루터교회를 세웠을 때 인쇄업자들은 마침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라이프치히의 사례는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진영 의 팸플릿이 인쇄업계의 생명줄이었고, 이 시장의 일부가 되느냐 못 되느냐 가 독일 인쇄업자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으며, 동시에 가톨릭 인쇄물이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유럽 전역을 놓고 볼 때 1517년 이후 인쇄업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중심지로 이동했고, 가톨릭 통치 지역에서보다 프로테스탄트 통치 지역에서 시장이 더 빠르게 확장되고 다양화되었다.123

 

    123 Eisenstein,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192. 

 

V. 나가는 말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탐구할 수 있는 접근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어떻게 접근하느냐, 어떤 각도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당 히 색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따라서 복잡다단한 양태를 지닌 루터의 프로테 스탄트 개혁을 최대한 전체적으로 그려보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방법을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이에 따라 본 논문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연구할 때 주로 사용하는 교회사, 지성사, 사회사 등의 한정된 접근방법을 넘어설 필요성을 지적하면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팸플릿 캠페인으 로 규정하며 미디어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특히 1518년부터 1525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루터 및 프로테스탄트 측과 가톨릭 측이 종교적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취했고, 이것이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 및 미디어 전략 에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고찰 했다.

여기서 본 연구와 관련해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각주 16에서 명시했듯이 루터가 아무리 미디어를 전략적으로 잘 사용했다고 해도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면서 그 성경에 토대를 두고 재정립한 그의 신학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신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16세기 프로 테스탄트 개혁은 힘을 얻지 못했으리라는 점이다.

이를 전제로 하고 본 연구 가 강조하고자 한 바는 미디어의 관점에서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보면 루터는 대중이 그의 신학에 쉽게 접근하고 개혁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자국어 팸플릿이라는 미디어를 의도적으로 최대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루터가 선택한 미디어는 그의 메시지 파급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다는 점이다.

그 메시지의 중심에는 교황과 성직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이 있었고, 자국어 팸플릿이라는 미디어는 그 자체가 권위에 대한 도전을 표현하는 메시지였다. 메시지와 미디어가 시너지 효과를 내며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견인한 셈이다.

면벌과 면벌부의 타당성을 논의해 보자고 게시한 면벌부 반박 95개조 논제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교황, 로마교회, 성직자의 권위 문제로 초점이 맞춰지면서 루터와 가톨릭 논쟁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루터는 이런 종교적 권위에 과감히 도전했고 권위의 재편성을 시도했다.

그 노력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다시 세우고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 는 작업, 즉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법과 말씀과 뜻을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세우는 과업이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쌓아가고 있던 인간적 법, 교리, 전통, 관습에 억눌리고 있던 수많은 유럽의 그리스도인이 이 새로운 가르침 에 귀를 쫑긋했고 동참했다.

어떤 경우에는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경과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응답하지 못한 채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을 이단으 로 처벌하려는 로마교회의 태도에 루터는 교황의 권위와 관련된 이론을 파고 들면서 교황권을 둘러싼 허구를 벗겨냈다.

교황, 로마교회, 성직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외치면서, 동시에 평신도의 영적 위상을 격상하고 그들 이 개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그리고 당시 새로운 독자층으로 부상한 대중에게 최대한 다가가기 위해 권위에 도전적인 대중 매체로서의 팸플릿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자국어로 글을 썼다.

대중을 위 한 자국어 팸플릿은 루터의 메시지와 잘 맞아떨어졌다.

프로테스탄트 개혁 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 이 운동을 미디어 캠페인으로도 접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적극적인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미디어 전략을 추진함으로써 루터는 많은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루터 자신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점, 프로테스탄트 진영 인쇄업이 번창 했다는 점, 그리고 비텐베르크시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반면에 규모로 보나 조직력으로 보나 대규모 팸플릿 전쟁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루터를 공격함으로써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도 있었을 가톨릭교 회는 예상외의 모습을 보였다.

95개조 논제 이후 테첼과 프리에리아스, 그리 고 상대적으로 정도가 덜하기는 했지만 카예타누스 역시 면벌부 설교에 의문 을 제기하는 것은 면벌부의 보증인인 교황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이유로 루터를 교황의 권위를 훼손했다는 혐의 아래 이단으로 규정했다.

루터의 주장을 성경과 교리로 반박하기보다는 신앙의 수호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붙였다.

이처럼 가톨릭 논쟁자 들은 로마교회를 합법적 종교 기관으로 재확인하는 반면, 루터와 프로테스 탄트 측을 불법적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들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해 새삼스레 논란을 일으킨다고 매도하고, 신학적 논쟁은 성직자와 신학자의 고유영역임을 강조하면서 권위를 방어하는 메시지를 제시했다.

로마교회는 루터가 평민을 선동하여 이단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팸플릿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필요성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팸플릿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러 딜레마 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팸플릿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이단과 공식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동시에 평민에게 신학적 논쟁에 참여하고 루터 문제와 관련해 그들의 의견을 묻고 판단하도록 초청하고 독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더 나아 가서 루터를 반박하기 위해 조목조목 기술한 내용이 오히려 루터를 홍보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로마교회가 가톨릭 논쟁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공연히 불신하거나 반 대한 이유를 알려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톨릭 논쟁자들은 인쇄업자들에 게도 환영받지 못했고, 가톨릭 진영 인쇄업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고충을 겪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촉진된 또 다른 새로운 미디어 혁명의 시대에 미래를 향해 돌파구를 찾고 방향을 설정하고자 애쓰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에 본 연구가 던지는 시사점 중 세 가지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교 의 복음과 교회의 본질 회복을 위해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를 외쳤으 면서도, 그 본질을 최대한 많은 사람과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당시 최첨단 의 미디어를 선택했다.

‘현재’의 개혁을 위해 중세 천년을 뛰어넘어 성경과 초기 교회라는 ‘과거’/‘근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도, 커뮤 니케이션 수단이 구술 언어에서 문자 언어로 본격적으로 전이하는 시대에 대량 생산된 인쇄물이라는 ‘미래’ 지향적인 미디어 전략을 취한 것이다.

루터 의 모습은 문자 언어에서 영상 언어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미디어 혁명 시대에 본질은 놓치지 않으면서도 시대를 앞서가는 미디어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일을 선도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루터는 복음의 본질을 최대한 많은 사람과 의사소통하기 위해 당시 가장 대표적 대중 매체인 팸플릿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루터는 단지 괜찮아 보여서 팸플릿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면서 팸플릿이라는 미디어를 최대한 활용했다.

팸플릿은 교황과 로마교회와 성직자와 연관된 권위, 그리고 교황과 로마교 회가 수호하고자 한 권위, 권위적 전통, 권위적 관습 등이 지배하는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학이 많이 세워 지면서 지식층이 늘어나고, 민족주의 의식이 팽창하고, 일방적이고 맹신적 인 종교적 순종에 회의감을 갖고, 정보를 원할 뿐만 아니라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려는 의지가 강해지는 시대에 사는 사람 들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미디어로서 팸플릿의 기능과 장점을 루터는 간파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만약 루터가 팸플릿을 사용하면서도 성직 자와 지식층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고, 장황하고 상세 한 해설과 복잡하고 반복된 표현을 중시하고, 긴 글을 썼다면 루터의 팸플릿 캠페인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터는 팸플릿이라는 미디어 뒤에 서 작용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감지했고, 그 변화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는 요인이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영향을 받는 대중과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팸플릿이 최적화된 미디어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통찰했고, 그 특성을 극대화했다.

그래서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 글쓰기, 즉 글쓰기 혁명을 시도했 다.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고 열린 소통을 위해 자국어를 사용했고, 간결함의 가치를 발견하고 간단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인 해설과 표현을 소중히 여겼고, 이에 맞춰 적절한 단어와 문체와 형식을 선택했고, 주머니에도 쏙 들어갈 수 있는 짧은 팸플릿을 내놓았다.

게다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브랜 드 아이덴티티, BI)을 만들어 냄으로써 루터 브랜드라는 출판 디자인의 혁신 도 꾀했다. 미디어에 대한 루터의 이러한 감각은 그의 메시지 못지않게 중요 했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루터는 새로운 독자층 인 대중에게 정보를 시시각각 전달하고 호소하면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위해 그들의 세력을 결집했고, 대중은 열렬히 호응했다.

한국 개신교회도 트렌드에 맞춘다는 생각으로 피상적으로만 미디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를 파악하면서 미디어를 이용해야 할 것이 다.

예를 들어 기존의 4대 매체는 신문, 잡지, TV, 라디오였다.

이 미디어의 특성은 일대다(one-to-many)이고 일방적 독백이다.

현재 중요한 소셜 미디 어(Social media)의 특징은 다대다(many-to-many), 쌍방적 관계, 그리고 개방 과 참여와 공유의 가치에 대한 중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가 대세라고 사용 하면서 여전히 일대다, 일방적 독백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미디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디지털 이주민이 아닌 디지털 원주민으로 성장한 MZ(1981-1996, 1997-2010)세대에서 잘파세대(Z+Alpha) 를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디지털 기술, 소셜 미디어, AI, 가상 현실, 비대면 학습 등에 너무나 익숙하고 능숙한 알파세대(2010~)를 맞이한 한국 개신교 회는 본질을 다시 세우는 과업과 더불어 미디어를 결코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미디어와 영성, 미디어와 신앙 양육, 미디어와 복음 전파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하고, 비대면 현존감(Untact Presence)을 강화하면서 공동체를 세워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다채롭고 수준 높은 온라인 시스템 구축과 콘텐츠 개발 등의 시급한 과제를 충실히 감당할 필요가 있다.

    셋째, 루터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확신하면서 비텐베르크의 인쇄업 활성 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문성과 실력은 물론 미적 감각을 갖춘 인쇄업자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인쇄 ․ 출판 과정을 수시로 꼼꼼히 감독했다.

더 나아가 서 인쇄업에서 수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요건에 맞춰 글을 썼다.

이는 프로테 스탄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한국 개신교회도 미디어를 위한 전문가 양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효율적이면서도 올바른 사 용을 위해 끊임없이 점검해야 할 것이다.

콜은 프로테스탄트 측과 로마 가톨릭 측 사이의 여러 중요한 차이점을 미디어에 대한 태도라는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프로퍼갠 더를 위한 인쇄기의 잠재력을 무시한 듯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렇 게 말한다. “오랫동안 권력과 권위에 익숙해져 있던 가톨릭 신학자와 정치가 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중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실험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124

또한 크로프츠는 “가톨릭교회는 독일어로 출판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그렇게 하기를 꺼렸다”고 서술한다.125

 

    124 Richard G. Cole, “The Reformation in Print: German Pamphlets and Propaganda,” Archiv für Reformationsgeschichte 66 (1975), 93, 102.

    125 Richard A. Crofts, “Printing, Reform, and the Catholic Reformation in Germany (1521-1545),”

Sixteenth Century Journal 16 (1985/3), 381.

 

 

한국 개신교회는 현재 급변하고 있는 미디어와 관련해 얼마나 의식이 깨어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에 관한 연구 방법의 확장 및 코로나19와 함께 미디어 대변혁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 회가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본 연구는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시의적절한 과제라 확신하며 연구를 수행했다.

이를 위해 본 연구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참고문헌

1차 문헌

Aleander, Hieronymus. “Consilium super re Lutherana.” Beiträge zur Politischen, Kirchlichen- und Cultur-geschichte der sechs letzten Jahrhunderte, III Band. Ed. J. J. Döllinger. Wien: Manz’sche K.K. Hofverlags- und Universitätsbuchhandlung, 1882, 243-267. _______. “SSmo D. N. pedes exosculatur Aleander.” Beiträge zur Politischen, Kirchlichen- und Cultur-geschichte der sechs letzten Jahrhunderte, III Band. Ed. J.J. Döllinger. Wien: Manz’sche K.K. Hofverlags- und Universitätsbuchhandlung, 1882, 268-284. Cochlaeus, Johannes. “Cochlaeus an Aleander, 27 September 1521.” Zeitschrift für Kirchengeschichte, XVIII Band. Eds. Theodor Brieger and Bernhard Bess. Gotha: Friedrich Andreas Perthes, 1897, 119-126. Denzinger, Heinrich. Enchiridion symbolorum definitionum et declarationum de rebus fidei et morum, Latin-English. Rev. ed. Peter Hünermann(for the original bilingual edition), ed. Robert Fastiggi & Anne Englund Nash(for the English edition), 43rd ed.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12. Gess, Felician. ed. Akten und Briefe zur Kirchenpolitik Herzog Georgs von Sachsen, Erster Band 1517-1524. Leipzig: B.G. Teubner, 1905. Luther, Mart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73 Vols. Eds. J. F. K. Knaake et al. Weimar: Hermann Böhlau, 1883–2009. _______.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75 Vols. Eds. Jaroslav Pelikan, Helmut T. Lehmann, and Christopher Boyd Brown. St. Louis, MO: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55ff.;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55–1986. _______.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Briefwechsel, 18 Vols. Eds. G. Bebermeyer and O. Clemen. Weimar: Hermann Böhlau, 1930-1978. _______.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Tischreden, 6 Vols. Eds. J.F.K. Knaake et al. Weimar: Hermann Böhlau, 1912-1921. _______. Luther’s Correspondence and Other Contemporary Letters, Vol. I, 1507-1521. Trans. and ed. Preserved Smith. Philadelphia: Lutheran Publication Society, 1913. Mensing, Johannes. Von dem Opffer Christi yn der Messe. N.P., 1526. Murner, Thomas. An den Großmechtigsten vnd Durchlüchtigsten adel tütscher nation das sye den christlichen glauben beschirmen / wyder den zerstörer des glaubens christi / Martinum luther einen verfierer der einfeltigen christen, 1520, in Thomas Murners Deutsche Schriften, Band 7: Kleine Schriften, Teil 2, 59-117. Ed. Wolfgang Pfeiffer-Belli. Berlin: Walter de Gruyter, 1928. Prierias [Sylvester Mazzolinus]. Dialogus in praesumptuosas Martini Lutheri conclusiones de potestate Papae. In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 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52-107. Herausgegeben und kommentiert von Peter Fabisch und Erwin Iserloh. Münster: Aschendorff, 1988. Tetzel, Johannes. Subscriptas positiones. In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369-375. Herausgegeben und kommentiert von Peter Fabisch und Erwin Iserloh. Münster: Aschendorff, 1988. _______. Vorlegung wider einen Vermessenen Sermon von zwanzig irrigen Artikeln päpstlichen Ablass und Gnade belangend, in Dokumente zur Causa Lutheri (1517-1521), 1. Teil: Das Gutachten des Prierias und weitere Schriften gegen Luthers Ablaßthesen (1517-1518), 340-363. Herausgegeben und kommentiert von Peter Fabisch und Erwin Iserloh. Münster: Aschendorff, 1988.

2차 문헌

권진호. “종교개혁 초기의 설교 소책자.” 「신학사상」 157 (2012), 269-298. 김면. “독일 인쇄술과 민중본.” 「인문연구」 59 (2010), 253-280. 김선영. “「한국교회사학회지」에 게재된 16세기 교회사 논문 분석 평가 및 방향 제시.” 「한 국교회사학회지」 55 (2020), 145-182. 봉원영. “구어적 매체가 16세기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과 현대 기독교의 적용.” 「한국콘텐 김선영 |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83 츠학회논문지」 15 (2015/4), 556-570. 앤드루 페트그리. 󰡔루터 브랜드: 역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의 글쓰기, 인쇄, 출판 전략󰡕. 김선영 옮김. 경기도: 이른비, 2022. 최경은. “구텐베르크 서적인쇄술 발명의 사회문화적 배경.” 「독어교육」 51 (2011), 499-518. ______. “종교개혁이 서적인쇄에 미친 영향.” 「독일언어문학」 57 (2012), 239-264. 황대현.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책자.” 「역사교육」 107 (2008), 191-216. ______. “종교개혁 공공영역과 독일 종교개혁 초기의 소통상황.” 「서양사론」 97 (2008), 117-141. Bagchi, David V. N. Luther’s Earliest Opponents: Catholic Controversialists, 1518- 1525.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1. Chrisman, Miriam U. Lay culture, Learned Culture: Books and Social Change in Strasbourg, 1480-159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2. Cole, Richard G. “The Reformation Pamphlet and Communication Processes.” Flugschriften als Massenmedium der Reformationszeit. Beiträge zum Tübinger Symposion 1980. Ed. Hans-Joachim Köhler. Stuttgart: Ernst Klett Verlag, 1981, 139-162. _______. “The Reformation in Print: German Pamphlets and Propaganda.” Archiv für Reformationsgeschichte 66 (1975), 93–102. _______. “The Dynamics of Printing in the Sixteenth Century.” The Social History of the Reformation, 93-105. Eds. Lawrence P. Buck and Jonathan W. Zophy. Ohio State University Press, 1972. Crofts, Richard A. “Printing, Reform, and the Catholic Reformation in Germany (1521-1545).” Sixteenth Century Journal 16 (1985/3), 369-381. _______. “Books, Reform and the Reformation.” Archiv für Reformationsgeschichte 71 (1980), 21-36. Dickens, Arthur G. Reformation and Society in Sixteenth-century Europe.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9. Edwards, Mark U., Jr. Printing, Propaganda, and Martin Luther.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2005. Eisenstein, Elizabeth L. The 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2nd ed.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Hirsch, Rudolf. Printing, Selling, and Reading, 1450-1550.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67. Holborn, Louise W. “Printing and the Growth of a Protestant Movement in Germany from 1517 to 1524.” Church History 11 (1942/2), 123-137. Jedin, Hubert. “Die geschichtliche Bedeutung der katholische Kontroversliteratur im Zeitalter der Glaubensspaltung.” Historisches Jahrbuch 53 (1933), 70-97. Kaufmann, Thomas. “Anonyme Flugschriften der frühe Reformation.” Die frühe Reformation in Deutschland als Umbruch. Ed. Bernd Moeller. Gütersloh: Gütersloher Verl.-Haus, 1998, 191-267. Köhler, Hans-Joachim. “Die Flugschriften der frühen Neuzeit: Ein Überblick.” Die Erforschung der Buch- und Bibliotheksgeschichte in Deutschland, 307-345. Eds. Werner Arnold, Wolfgang Dittrich, and Bernhard Zeller.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87. _______. “The Flugschriften and their Importance in Religious Debate: A Quantitative Approach.” ‘Astrologi hallucinati’: Stars and the End of the World in Luther’s Time. Ed. Paola Zambelli. Berlin: Walter De Gruyter, 1986, 153-175. Lindberg, Carter. “Prierias and his Significance for Luther’s Development.” The Sixteenth Century Journal 3 (1972/2), 45-64. Lohse, Bernhard. Martin Luther’s Theology: Its Historical and Systematic Development. Tr. and Ed. Roy A. Harrisville.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9. Meserve, Margaret. Papal Bull: Print, Politics and Propaganda in Renaissance Rom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1. Moeller, Bernd. “Stadt und Buch. Bemerkungen zur Struktur der reformatorischen Bewegung in Deutschland.” Stadtbürgertum und Adel in der Reformation. Ed. Wolfgang J. Mommsen. Stuttgart: Klett-Cotta, 1979, 25-39. Ozment, Steven E. Protestants: The Birth of a Revolution. New York: Image Books, 1993. Pettegree, Andrew. Brand Luther: 1517, Printing, and the Marking of the Reformation. New York: Penguin Press, 2015. _______. The Book in the Renaissa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1. Scribner, Robert W. For the Sake of Simple Folk: Popular Propaganda for the Germ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2004. _______. “Oral Culture and the Diffusion of Reformation Ideas.” History of European Ideas 5 (1984/3), 237-256. Wicks, Jared. “Roman Reactions to Luther: The First Year(1518).” The Catholic Historical Review 69 (1983/4), 521-562. Zorzin, Alejandro. Karlstadt als Flugschriftenautor. Göttinger Theologische Arbeiten, Vol. 48.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0. 

 

한글 초록

본 논문은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팸플릿 캠페인으로 규정하면서 미디어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특히 1518년부터 1525년까지의 시기를 중심으 로 루터 및 프로테스탄트 측과 가톨릭 측이 종교적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 을 취했고, 이것이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 및 미디어 전략에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고찰했다. 구체적인 연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터 및 프로테스탄트 측과 가톨릭 측 사이에 벌어진 미디어 캠페인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둘째, 이 미디어 캠페인에서 루터와 프로 테스탄트 측이 우세할 수 있었던 원인을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루터의 메시지와 그가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미디어 간의 밀접한 상응에 주목하 여 고찰하고, 그 결과를 기술했다. 셋째, 가톨릭 측의 미진한 대응의 원인을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를 방어하는 메시지와 이에 적합하지 않은 미디어 간의 불상응이 초래한 딜레마에 주목하여 분석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초래된 결과 를 서술했다. 결론에서 간단하게나마 이러한 연구내용이 한국 개신교회에 던 지는 시사점을 제시했다. 

 

주제어  마르틴 루터,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 미디어 캠페인, 자국어 팸플릿, 종교적 권위

 

Luther’s Reformation in Germany as the First Large-Scale Media Campaign in the Wes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us Authority Sun-young Kim, Ph.D. Professor, Department of Theology Graduate School of Practical Theology This study analyzes Luther’s Protestant Reformation from the perspective of media, defining it as a pamphlet campaign. Focusing on the period from 1518 to 1525, this paper highlights the differences in the perspectives of Luther and his followers from those of Catholics on religious authority, which influenced their disparate attitudes toward media and media strategies, and draws out their respective consequences. This study first reviews the state of the media campaigns of Luther and his followers versus those of the Catholics. Second, it examines the close correspondence between Luther’s message challenging the authority of the Pope and the Roman Church and the media he strategically used to understand why Luther and the Protestants were able to prevail in this media campaign. Third, it analyzes the cause of the lackluster response by the Roman Church by concentrating on the dilemma arising from the mismatch between the message defending the authority of the Pope and the Roman Church and the unsuitable media that were used to transmit it. Finally, the re-  sults are described and the implications of this study for Korean Protestant churches are briefly presented

 

Keywords   Martin Luther, 16th-century Protestant Reformation, Media Campaign, Vernacular Pamphlet, Religious Authority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4집(24.10월)

접수일: 2024년 8월 1일, 심사완료일: 2024년 8월 22일, 게재확정일: 2024년 8월 31일

 

팸플릿 캠페인으로서 루터의 16세기 독일 프로테스탄트 개혁 종교적 권위에 대한 견해 차이에 따른 상반된 미디어 전략과 결과.pdf
1.1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