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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고린도전서 15:20-28에 나타난 최후심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시편 110과의 상호텍스트성을 중심으로- 김지은.Nepal New Covenant College

초록

고린도전서 15:20-28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최후 심판자로서 하나님과 신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존재로 제시하는데,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시편 110은 바울에게 이러한 개념을 제공한 중요한 배경 이다.

바울은 시편 110의 환용적(metaleptic)이고 전체적인(holistic) 독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즉위하신 메시아이자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실 최후 심판자라 는 개념을 정립한다.

시편 110에서는 하나님과 메시아 사이의 심판자 역할의 공유 또는 유동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5:20-26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 심판 자의 역할과 권위를 하나님과 공유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놀랍게도 바울은 시편 110:1 에서 메시아의 적을 정복하시는 하나님 개념을 고린도전서 15:25-26에서 죽음을 포함 한 모든 적을 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개념으로 수정한다.

바울은 또한 시편 8:6을 사용 하여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개념을 추가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만물을 복종시키는 권위에 대한 유동적인 개념을 나타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고전 15:28)은 시편 110에서 하나님과 메시아의 관계 로 볼 수 있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라는 측면(LXX 109:3)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464❙신약논단 제31권 제3호∙2024년 가을 아버지-아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에 통합하 기 위한 그의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제어 기독론, 신적 정체성, 최후 심판자, 상호텍스트성, 아버지-아들

 

I. 서론

 

고린도전서 15:20-28에 나타난 최후 심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그의 기독론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본 연구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최후 심판자로서의 신적 정체성1)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논증한다.

 

    1) 여기서 ‘신적 정체성’(Divine identity)이란 Richard Bauckham이 주장한, “창조주이 자 역사의 주권적인 지배자(Creator and the sovereign Ruler of history)”로서 이스라 엘의 하나님, YHWH가 배타적으로 소유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 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8), 1-17. 이것은 제2성전 기 문헌의 중간적 존재들의 신성(divinity)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아울러 바울이 이렇게 인식하는 데 있어서 시편 110은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매개로 시편 110을 기독론을 뒷받침하는 구약 본문으로 읽는다.

바울에게는, 구약의 내러티브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라는 패턴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하여 구원을 이루는 종말적 완성으로 연결된다.

즉, 바울은 렌즈” 2)를 통해 구약을 재해석하며, “이스라엘의 성경이 종말론적 현재를 가리키고” 3) 있는 것으로 읽는다.

그래서 시편 110의 이스라엘의 고양된 왕이며 적을 심판하는 메시아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우편에 즉위하시고 최후의 심판을 행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조(“precursor”) 로서 기능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시편 110:1만이 인용되지만, 본 연구는 바울이 시편 110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성취의 관점에서 읽고 재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바울의 환용적(metaleptic)이고 전체적(holistic)인 시편 110 해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리차드 B. 헤이스(Richard B. Hays)에 따르면, “환용”(metalepsis) 은 문학적 메아리가 그것이 발생하는 텍스트와 이전 텍스트를 연결할 때 나타나는데, “메아리의 비유적 효과는 두 텍스트 사이의 명시되지 않거나 억제된(전이된) 공명의 지점에 있을 수 있다.”4) 따라서 최후 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시편 110과 바울의 본문 사이의 이러한 공명의 그물망에서 인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해석학적 접근은 시편 110의 1절뿐 아니라 메시아의 승리를 다룬 다른 구절들과도 연관되며, 우리는 바울의 텍스트에서 시편 110 전체 본문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편 110이 신약의 저자들, 특히 바울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꽤 많이 이루어져 왔다.5)

 

       2) Richard B. Hays, The Conversion of the Imagination: Paul as Interpreter of Israel’s Scripture (Grand Rapids: Eerdmans, 2007), 40.

      3) David Lincicum, “How Did Paul Read Scripture?” The New Cambridge Companion to St. Paul, ed. by Bruce W. Longenecker, Cambridge Companions to Relig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237.

      4)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20.

      5) David M. Hay, Glory at the Right Hand: Psalms 110 in Early Christianity, SBLMS 18 (Nashvill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73); Martin Henel, Between Jesus and Paul: Studies in the Earliest History of Christianity (Eugene: Wipf & Stock, 2013), 30-47; idem. Studies in Early Christology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5), 108-10, 137-40; Gordon D. Fee, Pauline Christology: An Exegetical-Theological Study (Peabody: Hendrickson, 2010), 109-10.

 

그러나 이 연구들은 거의 다 시편 110편의 1절이 인용된 것에 집중되어 있거나, 특별히 4절이 히브리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본 연구는 시편 110:1뿐 아니라, 메시아의 고양됨과 심판이라는 시편 110의 전체 주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고린도전서 15:23-26에 공명되어 나타남을 밝힌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와 차별된다.

고린도전서 15:23-26은 시편 110을 틀로 삼아,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승귀한 메시아이며,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실 최후의 심판자임을 개념화한다.

특히 시편 110:1에서 ‘원수들을 정복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고린도전서 15:25-26에서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원수를 정복하여 심판하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으로 변형시킨다.

다음 시편 8:6을 삽입한 것도, 시편 110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동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사고의 흐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자로서의 신적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고린도전서 15:28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인식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는데, 본 연구는 이것을 시편 110에서 하나님과 메시아의 관계로 볼 수 있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라는 측면(LXX 109:3)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위계질서를 함유하지만, 그것이 존재론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 연구는 먼저 시편 110에서 하나님과 메시아의 심판자의 역할의 공유가 어떻게 제시되는지 살펴보고,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0-26에서 시편 110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함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5:27-28에서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 그의 기독론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II. 시편 110: 심판자로서의 역할과 권위를 공유하는 하나님과 메시아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바울이 보았을 시편 110의 텍스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LXX를 보았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바울이 그리스어를 말하는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으로서 히브리어와 아람어까지도 읽을 수 있는 교육 수준을 지닌 것으로 보면, 그가 proto-MT 텍스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구약성경 텍스트를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6)

실제로 많지는 않으나 바울의 몇몇 본문에서는 MT의 영향도 보인다.7)

 

    6) Euichang Kim, The Fear of God in 2 Corinthians 7:1: Its Meaning, Function, and Eschatological Context, LNTS 605 (London: T&T Clark, 2019). 60.

    7) Christopher D. Stanley에 따르면, 바울의 83가지 명백한 구약 인용 구절 가운데 롬 10:5; 11:4; 12:19; 고전 3:19와 15:54은 LXX보다 MT 전통에 더욱 일치한다. Christopher D. Stanley, Arguing with Scripture: The Rhetoric of Quotations in the Letters of Paul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4), 67.

 

LXX 외에도 proto-Symmachian 텍스트와, LXX 시편 109:3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는 Theodotian Daniel 7:14도 고려될 수 있다.

이렇듯 바울이 접근 가능했을 구약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으므로, 가능한 한 지금 주어진 본문을 종합해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시편 110의 MT 본문을 주로 다루고, MT와 현저히 다른 부분, 즉 시편 110:3(LXX 시편 109:3)에서는 LXX 텍스트 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본 연구의 주요 쟁점인 ynda와 hwhy의 차이가 LXX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데, LXX에서는 두 용어를 다 κύριος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LXX의 Vorlage인 히브리어 텍스트  비록 proto-MT는 아니지만  를 분석하는 것이 더 엄밀한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전제하에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시편 110:3(LXX 109:3) 외에 다른 구절들에서는 MT와 LXX 사이의 의미 차이가 거의 없다.

본 연구와 관련하여, 시편 110은 그 주제에 있어 메시아 왕의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신적 전사(Divine Warrior)이신 하나님께서 적들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정의되는데,8) 이는 시편 110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시편 110의 구조는 1-3절과 4-7절의 두 단락으로 나뉘는데,9) 각 단락은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탁으로 시작된다(1절과 4절).

첫 번째 단락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담고 있고, 두 번째 단락은 왕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로 시작된다.

그런데 두 단락 모두 이 신탁 이후에 적에 대한 승리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10)

 

    8) Gerhard von Rad and Marva J. Dawn, Holy War in Ancient Israel (Eugene: Wipf and Stock, 2000); Patrick D. Miller, The Divine Warrior in Early Israel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Heath A. Thomas et al. ed., Holy War in the Bible: Christian Morality and an Old Testament Problem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13).

   9) Mitchell J. Dahood, Psalms III. 101-150: Introduction, Translation, Notes with an Appendix, and the Grammar of the Psalter, AYB 17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113..

   10) Daniel J. Estes, Psalms 73-150: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Exposition of Holy Scripture, NAC 31 (Nashville: B&H, 2019), 131.

 

즉, 시편 110의 주제는 적에 대한 심판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왕의 즉위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는 1절 에서도 왕좌 자체가 심판의 자리로 간주될 수 있으므로 심판이라는 주제가 드러난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라는 독특한 표현은 주님의 집회(assembly) 이미지를 전제로 하며, 다윗 왕의 주님으로 묘사되는 다른 주님을 통해 주님이 수행할 보편적 심판을 암시한다.11)

티모 에스콜라(Timo Eskola)는 “착석(sessio)의 개념,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개념이 심판의 측면이 강한 특정한 사법적인 구절에도 나타난다.”12)고 말한다.

 

      11) Evangelia G. Dafni, “Psalm 109(110): 1-3 in the Septuagint: Its Tradition-Historical, and Theological Setting,” Psalms and Hebrews: Studies in Reception, ed. by Dirk J. Human and Gert J. Steyn (New York: T&T Clark, 2010), 251.         12) Timo Eskola, Messiah and the Throne: Jewish Merkabah Mysticism and Early Cristian Exaltation Discourse, WUNT 2/142 (Tübingen: Mohr Siebeck, 2001), 361, 원문에서 강조된 것임.

 

또한 시편 110의 군사적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심판의 주제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전사로서의 왕(1-3절)

 

시편 기자는 hwhy의 신성한 말씀을 왕에게 전달하는데, 이 신탁은 hwhy께서 그의 오른편에 왕을 앉히시고 왕의 적들을 왕 아래 정복할 것을 약속하신다고 말한다.

신탁의 후반부인 1절의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는 심판이라는 주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신성한 전사 하나님이 적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2절에서 먼저 왕의 통치권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전제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xlv(“보내시는”) $z[ hjm(“당신의 강력한 홀”)로 상징된다.

왕의 통치권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음으로써 이미 확인되며, 이는 그가 “야웨의 왕권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준다.13)

 

    13) Frank-Lothar Hossfeld and Erich Zenger, Psalms 3: A Commentary on Psalms 101-150,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147. 

 

그러나 시편 기자가 호소하는 대상은 손에 홀을 들 고 있는 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왕에게 왕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에 대해 힘과 권위를 행사할 것을 촉구한다.

hjm(“홀”)은 적대국을 물리치는 왕의 힘을 상징하는 데 자주 사용되며 (렘 48:17, 민 24:17, 시 2:9), 동사 hdr(“통치하다”)는 “무력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기도 한다14)(시 72:8; 렘 1:13).15)

이 이미지는 왕이 적과 싸우고 파괴하여 심판하는 전사로 묘사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1절에서 하나님이 왕의 적들을 정복하는 분으로 묘사되지만, 왕 자신도 심판의 집행자로서 관여한다.

이것은 1절에서 왕이 하나님과 함께 즉위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미하엘 틸리(Michael Tilly)는 “시 110:1-5에 언급된 인물은 즉위 사건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권세와 권위, 사법권을 분배받는다”고 올바르게 주장한다.16)

또한 하나님께서 왕에게 홀을 보내시는 곳이 시온이라는 점에서 이 메시지가 다윗 왕과 연관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시 2:6).17)

하나님의 힘으로 적과 전쟁을 벌이고 그들을 심판하는 왕은 구약성경에서 낯설지 않다(시편 2, 18, 21 참조).18)

 

    14) Thijs Booij, “Psalm CX: ‘Rule in the Midst of Your Foes!’” VT 41/ (1991), 397. hdr의 기본적인 뜻은 채찍질하다(flog), 쟁기질하다(plough), 치다(beat)의 뜻이다. “hdr,” HALOT, 1190.

    15) Hans J. Zobel, “hdr,” TDOT 13:331-32.

    16) Michael Tilly, “Psalm 110 Zwischen Hebräischer Bibel Und Neuem Testament,” Heiligkeit Und Herrschaft: Intertextuelle Studien Zu Heiligkeitsvorstellungen Und Zu Psalm 110, Biblisch-Theologische Studien 5 (Nukrichener-Vluyn: Neukrichener, 2003), 157.

    17) Ben Witherington III, Psalms Old and New: Exegesis, Intertextuality, and Hermeneutic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7), 270.

    18) Ruben A. Bühner, Messianic High Christology: New Testament Variants of Second Temple Judaism (Waco: Baylor University Press, 2021), 87.

 

왕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이 구절이 수수께끼 같은 3절에서도 발견된다.

3절의 일부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은 시편 기자가 모음 문자를 사 용하지 않았다는 가설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다.19)

또한 LXX(시 109)의 본문은 이 구절에서만큼은 상당히 다르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심판에 대한 생각은 MT나 LXX나 다르지 않다. 3절의 첫 부분 vdq-yrdhb $lyx ~wyb tbdn $m[(“당신의 권능의 날에 당신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자신을 바칠 것이다”)은 일반적으로 왕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거룩한 전쟁이라는 주제는 신성한 전사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의 협력을 배제하지 않는다(삿 5:2; 신 20:4; 삼하 5:24).21)

이어지는 주요 구절인 $ytdly lj $l rxvm ~xrm(“아침의 자궁에서부터, 너의 젊음의 이슬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는 시적인 표현으로 인해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왕의 젊고 활기찬 용사들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고, 왕 자신의 젊은 나이와 힘과 체력에 대한 묘사일 수도 있다.

어떠하든 2-3절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권세, 그리고 강력한 군대를 부여받은 전사 왕의 다양한 면모를 묘사하고 있다.

1절에서 행동하실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이 적을 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22)

 

     19) Dahood, Psalms III 101-150, 113.

     20)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 LXX 사본 간에 시 109편의 번역 차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Dafni, “Psalm 109(110),” 241-59.

     21) Dahood, Psalms III 101-150, 115. 22) Witherington, Psalms Old and New, 270.

 

이 시점에서 우리는 놀랍도록 다른 의미를 가진 LXX(시 109편)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μετὰ σοῦ ἡ ἀρχὴ ἐν ἡμέρᾳ τῆς δυνάμεώς σου ἐν ταῖς λαμπρότησιν τῶν ἁγίων, ἐκ γαστρὸς πρὸ ἑωσφόρου ἐξεγέννησά σε. tbdn $m[(“당신의 백성은 기꺼이 할 것이다”)

라는 MT 본문과 달리 LXX는 μετὰ σοῦ ἡ ἀρχή(“통치권이 당신에게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LXX에서도 메시아의 심판이라는 주제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절의 ‘거룩한 자들’(τῶν ἁγίων)과 함께 권능을 행하는 왕의 묘사는 하나님께서 ‘주(여호와)의 날에 거룩한 자(οἱ ἅγιοι)와 함께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고 말하는 스가랴 14:5와 유사하다.

따라서 LXX의 3절도 하늘의 영광을 입은 거룩한 자들과 함께 자신의 능력으로 원수들에게 심판을 집행할 메시아를 제시하는데, 이는 MT 본문보다 종말론적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LXX(시 109편)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ἐκ γαστρὸς πρὸ Ἑωσφόρου ἐγέννησά σε(“새벽별 이전의 모태에서 내가 너를 낳았다”) 구문이다.

이 신성한 아들 되심은 시편 2와 89와 같은 왕의 시편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1절에서 왕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3a절에 묘사된 그의 강력한 능력과 하늘의 권위를 정당화한다.

또한 πρό Ἑωσ- φόρου(“새벽별 이전에”)라는 문구는 이 신성한 아들 되심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메시아는 별자리가 창조되기 전에, “심지어 금성 … ‘빛을 가져오는 존재’” 23) 이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창조에서 메시아의 우선 순위를 암시하며, 이것은 메시아의 선재성을 나타낸다.24)

따라서 3b절에서 우리는 원초적(protological)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3a의 종말론적 측면과 함께 제시된다.

즉, 선재하신 메시아는 종말의 날에 성도들과 함께 심판하고 통치할 것이다.25)

    

   23) Schaper, Eschatology in the Greek Psalter, 104.

   24) Bühner, Messianic High Christology, 90-92; Schaper, Eschatology in the Greek Psalter, 102-106.

   25) Tilly, “Psalm 110 Zwischen Hebräischer Bibel Und Neuem Testament,” 168.

 

LXX 시편 109은 메시아의 즉위와 그의 신성한 아들 됨에 근거한 심판의 권위와 권능을 상정한다.

 

2. 제사장-왕과 관련된 심판의 주제(4절)

 

4절의 왕의 거룩한 제사장직에 대한 하나님의 서약에 관한 두 번째 신탁은 시편에서 표면적으로 심판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없는 유일한 구절인 것처럼 보인다.

4절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다윗 왕조가 “멜기세덱과 관련된 이전 왕조의 제사장 왕권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약속으로 간주된다.26) 그렇다고 해서 4절이 심판의 주제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스(Barry C. Davis)는 4절을 거룩한 왕 제사장이 거룩한 전쟁에서 적들을 도살하여 하나님께 “도살된 제물”로 바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27)

 

    26) Leslie C. Allen et al., Psalms 101-150, WBC 21 (Grand Rapids: Harper Collins Christian Publishing, 2015), 117.          27) Barry C. Davis, “Is Psalm 110 a Messianic Psalm?” BSac 157 (2000), 166.

 

이러한 예는 예레미야 46:10, 이사야 34:5-6, 스바냐 1:7-8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적을 멸망시키는 것은 희생제물을 준비하거나 받으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시편의 저자는 영원한 다윗의 왕권은 멜기세덱의 왕권과 같아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완성되고 완전한 왕권은 제사장 왕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유형의 인물은 쿰란 문헌에서 발견된다.

11Q멜기세덱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모습은 벨리알과 그 악령들을 멸망시키는 종말론적 제사장 전사로 묘사된다.

따라서 왕의 심판 활동도 제사장적 기능으로 인식되며, 다음 구절의 심판에 대한 설명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3. 심판의 주체: 여호와인가 왕인가?(5-7절)

 

이 두 번째 신탁 이후, 시편 기자는 5-7절에서 심판의 주제를 다시 분명하게 재개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첫 단락은 1절에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으로 야웨를 제시하지만, 다음 절인 2-3절은 왕을 그렇 게 제시한다. 제사장 왕의 주제로 시작하는 두 번째 단락은 다음 절 (5-7절)까지 심판이라는 주제를 전개하지만, 누가 심판을 집행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심판을 표현하는 모든 동사는 3인칭 남성 단수 형태이다: 5절과 6절의 #xm(“치다”), 5절의 !yd(“판단하다”), 6절의 alm (“채우다”). 이 동사들 가운데 5절의 #xm만이 명시적 주어인 ynda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다른 동사들은 각각 활용되어 3인칭 단수 주어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부분의 주해에서 핵심 쟁점은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여호와인가 아니면 왕인가? 28)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학자와 주석가 대부분은 5절의 주어로 여호와를 선호한다.

A. 카코(A. Caquot)가 최초로 왕이 주체라고 주장했고 1960년 R. 투르네(R. Tournay)가 그의 가설을 따랐지만,29) 이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30)

그러나 5-7절의 본문이 명확하지 않고 많은 학자가 따르는 해석에도 약점이 있으므로 이 주제는 여전히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실 ynda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반면, !wda이라는 용어는 “지상의 군주”와 “신적인 군주”를 모두 가리킨다.31)

 

    28) 이 주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다음을 참조하라. Maurice Gilbert and Stephen Pisano, “Psalm 110 (109), 5-7,” Biblica 61/3 (1980), 344-45. 또한 다음도 참조하라. Allen, Psalms 101-150, 117-18.

    29) R. Tournay, “Le Psaume 110,” RB 67/1 (1960), 30-31.

   30) Briggs와 Briggs와 Kissane은 이 주장에 동의한다. Charles A. Briggs and Emily Grace Briggs,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ICC (Edinburgh: T&T Clark, 1907), 373-81; E. J. Kissane, “The Interpretation of Psalm 110,” ITQ 21 (1954), 103-14.

   31) Otto Eissfeldt, “!wOda,” TDOT 1:61.

 

따라서 5절의 ynda는 왕의 오른편에 계셔서 모든 악한 왕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

따라서 5절의 의미는 “당신(왕)의 오른편에 계신 여호와(하나님)께서 진노의 날에 왕들을 치신다”는 뜻이다.

하나 님이 왕의 오른편에서 왕을 돕는다는 생각은 시편 16:8, 109:31, 그리고 121:5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한다.

이 경우 5절에서는 하나님이 왕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점에서 하나님과 왕의 위치가 바뀌는데, 이는 왕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1절의 경우와 다르다.

이 해석을 선호하는 학자들은 1절의 상황과 5절의 상황이 다르고, 전자는 즉위식 장면을, 후자는 전쟁터를 묘사하기 때문에 이러한 위치 변화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32)

또한 하나님께서 왕의 원수들을 물리치신 것은 1절의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등상이 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일치한다.

따라서 5절의 주어가 6절에서도 바뀌지 않고, 5절부터 6절까지 열방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 일관되기 때문에 6절에서도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7절에서 주석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리니 그러므로 그가 머리를 들리라.”

하나님이 시냇물을 마시며 기분 전환을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33)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물을 마시는 이미지가 없기 때문에,34) 대다수 학자는 7절의 주체가 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5-6절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7절의 주체는 왕이라고 생각한다.35)

 

     32) Booij, “Psalm CX,” 404.

     33) Frank-Lothar Hossfelt and Erich Zenger, Psalms 3: A Commentary on Psalms 101-150,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149.

    34) Hossfeld et al., Psalms 3, 150.

    35) Nancy L. deClaisse-Walford et al., The Book of Psalms, NICOT (Grand Rapids: Eerdmans, 2014), 837; Estes, Psalms 73-150, 344.

 

그러나 5-7절의 순서에서 주어의 변화의 징후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

암시적 주어는 6-7절에서 일관되게 “그”이다.

이것은 내용 수준이 아니라 언어적 수준에서 먼저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7절의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왕이 될 것이고, 5-6절의 주어 역시 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5절의 주어가 ynda라는 점이다. 이 혼란스러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R. 투르네(R. Tournay) 는 ynda가 “오, 주님!”을 의미하는 신성한 호격(divine vocative)이며 5절의 주체는 왕이라고 제안한다.36)

그러나 이는 LXX에서는 뒷받침되지 않는다.37)

다른 가능성도 있다.

ynda라는 단어가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자음만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에 따르면,38) 이 단어는 ynIdoa;>(“나의 주님”)로도 읽힐 수 있다.

데이비스는 이 단어가 1절에 언급된 ynda와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39)

대부분의 영어 성경 버전들은 5절의 ynda를 “LORD”가 아닌 “Lord”로 번역하는데, 이는 1절에서 “Lord”(ynda)가 “LORD”(hwhy)과 구별되는 것과 같다.40)

   

    36) 따라서 번역은 다음과 같다:

“주님! 주님의 오른편에서 그(왕)께서 왕들을 치실 것입니다.”

투르네에 따르면 이 경우 두 연의 구조는 대칭적일 수 있는데, 첫 연은 하나님의 첫 번째 신탁과 시편 기자의 왕에 대한 연설로 구성되고 두 번째 연은 하나님의 두 번째 신탁과 시편 기자의 하나님에 대한 연설로 구성된다. Tournay, “Le Psaume 110,” 30.

   37) 이 단어를 호격으로 이해하려면 그리스어 단어는 κύριος가 아니라 κύριε여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본 상의 증거는 없다.    38) Michael A. Rydelnik은 마소라 모음이 서기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즉 매우 늦은 시기에 늦게 삽입되었기 때문에 “시편 전체 해석을 히브리어 모음 하나에만 근거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Michael A. Rydelnik, “Psalm 110: The Messiah as Eternal King Priest,” The Moody Handbook of Messianic Prophecy, ed. by Michael A. Rydelnik and Edwin Blum (Chicago: Moody Publishers, 2019), 679.

   39) Davis, “Is Psalm 110 A Messianic Psalm?” 166.

   40) 이러한 영어 성경 버전은 다음과 같다: ESV, KJS, NLT, ASV, DBY, HNV, JPS, RSV, WEB, YLT, NIV, NRS, CJB (ADONAI 대신 Adonai), CSB, NASB, THK . 

 

따라서 5절의 #xm의 주어는 주님(Lord)이며,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다른 왕들을 치는 왕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2인칭 단수 접미사 ^ >(“당신의”)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1절에서 왕은 하나님께서 그의 오른편에 앉으라고 말씀하셨고, 여기 5절에 서는 왕이 왕 곁에 계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세상의 적대적인 왕들과 통치자들을 물리친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5-7절은 왕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다.

시편 2편, 18편, 그리고 21편과 같은 다른 왕의 시편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적과 전쟁을 벌이고, 적을 무찌르는 것은 왕이다.

또한 1, 2, 4절에서 왕에게 권위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는 ynda가 아니라 일관되게 hwhy로 표현된다.

시편 기자가 5절에서만 ynda로 하나님을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이며, 오히려 이렇게 하면 청중에게 혼란을 줄 소지도 있다.

이 해석의 또 다른 장점은 왕과 하나님의 위치가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1절과 5절 모두 왕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다고 묘사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1절과 5절의 서로 다른 상황은 왕과 하나님의 서로 다른 위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일관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왕과 하나님의 서로 다른 위치를 길지 않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시편 80:17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자를 강하게 하시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결정적으로, 7a절은 왕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잠시 멈춰서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잘 증명되는데, 이는 “고개를 들어 올리다”로 표현된다.

따라서 5-7절은 열방에 대한 왕의 심판과 적들에 대한 왕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은 전사로서 적들을 죽이고(6b절), 온 땅의 통치자들을 치고(6c절)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 var(“머리”)는 단수형으로, 왕과 불의의 통치자가 나오는 “혼돈의 보편적 힘”을 암시한다.41)

 

    41) Hossfeld et al., Psalms 3, 150.

 

하나님의 ‘전권자’인 왕이 이 악한 권력의 var(“머리”)를 치므로, 7절에서 왕이 자신의 var(“머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이 권력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상징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5-7절은 왕의 심판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대다수 학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각 입장에는 분명히 장단점이 있다.

즉 시편 110편의 두 번째 단락의 의미는 모호하다. P. R. 라베(P. R. Raabe)는 “불확실한 언어로 주어를 묘사한 이러한 모호함은 독자로 하여금 두 가지 독해가 모두 의도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즐기게 하고, 두 가지 모두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게 한다”고 정확하게 말한다.42)

시편 저자가 심판 행위의 주체를 표현할 때 모호하게 의도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두 가지 이해가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크레이그 L. 블룸버그(Craig L. Blomberg)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과 왕을 서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주해한다.43)

   

    42) P. R. Raabe, “Deliberate Ambiguity in the Psalter,” JBL 110 (1991), 228.

    43) Craig L. Blomberg, “Matthew,”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d. by Gregory K. Beale and D. A. Cars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83.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호함이 5-7절에서 왕과 하나님 모두 심판의 주체가 될 가능성 이상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왕, 즉 메시아가 원래 하나님의 고유한 위치인 종말론적 심판자로 묘사될 수 있는 더 큰 그림을 보여준다.

즉, 종말론적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위는 메시아의 사역과 공유되거나 겹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III. 고린도전서 15:23-26: 하나님과 최후 심판자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그리스도

 

지금까지 시편 110 전체를 고찰하면서 이 시편에 하나님과 메시아 사이의 심판자의 권위와 권능의 유동적인 전환을 위한 해석학적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울의 시편 110 읽기는 이 주제와 관련이 있다.

이는 단지 110:1 한 구절뿐 아니라, 시편 110을 전체적으로(holistically), 그리고 환용(metalepsis)의 관점에서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5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후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시편 110 전체와 공명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5에서 시편 110:1을 채택하는 데 사용한 핵심적인 주제 연결 고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바울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110:1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즉위 행위”로 해석했다.44)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현재 ‘자리’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45)

즉, 시편 110은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 지위에 대한 권위 있는 성경적 근거를 제공했다.

부활하신 메시아이신 그분은 시편 110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즉위하신 왕이자 κύριος로 드러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가 κύριος임을 확증하는 결정적인 사건임을 분명히 한다(롬 1:4; 10:9; 14:9; 참조. 빌 2:11).46)

고린도전서 15:20-26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통치하는(βασι- λεύειν, 25절) 권위의 정당성을 그의 부활에 둔다(20-22).47)

 

        44) Eskola, Messiah and the Throne, 186; Aquila H. I. Lee, From Messiah to Preexistent Son, WUNT 2/192 (Tübingen: Mohr Siebeck, 2005), 212-13. 시 110:1a-c을 인용한 신약성경 구절은 마 22:44; 막 12:36; 눅 20:42-43; 행 2:34-35이다. 그리고 시 110: 1b-c를 인용하는 구절은 히 1:13; 10:12-13뿐이다: 다음을 보라. David M. Hay, “Appendix,” Glory at the Right Hand: Psalms 110 in Early Christianity, SBLMS 18 (Nashvill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1973), 163-65.

      45) Martin Hengel, Studies in Early Christology (London: T&T Clark International, 2005), 220.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이라는 문구는 롬 4:24; 6:4, 9; 8:11, 34; 10:7; 고전 15:12, 20; 갈 1:1; 살전 1:10; 행 3:15; 4:10; 13:30에 나타난다.

     46)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7), 247.

     47) Martin Hengel은 예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주장했다: "여기 서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예수의 메시아의 기원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부활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유대인 의 왕'을 자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분임을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Martin Hengel, The Son of God: The Origin of Christology and the History of Jewish-Hellenistic Religion (Eugene: Wipf & Stock, 2007), 62.

 

그러나 이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κύριος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부활이 이미 자신의 주되심을 보장하고 확증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미 주님이신 주님께 말씀하고 계신다.48)

또한 바울에게 부활하여 즉위하신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다(롬 8:29, 32; 고전 15:24, 28; 롬 1:4; 살전 1:10).

사실 메시아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전제하거나 암시한다.49)

 

     48) Lee, From Messiah to Preexistent Son, 237-38. I. H. Marshall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그가 메시아였기 때문이며(참조. 행 2:22, 10:38ff), 하나님 우편에 앉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미 주님이라고 불린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I. H. Marshall, The Acts of the Apostle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NTC (Grand Rapids: Eerdmans, 1980), 80.

    49) Lee, From Messiah to Preexistent Son, 280.

 

시편 자체가 이미 존재하셨던 아들을 묘사한다(특히 LXX 시 109:3).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의해 부활하셨고(롬 8:32, 34; 6:4; 고전 15:23, 24; 갈 1:1)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따라서 시편 110편은 바울이 하나님의 보좌에 동반자로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배경이 된 자료로 볼 수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메시아의 심판은 시편 110편의 분명한 주제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한 정체성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후 심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를 개념화했다는 것이다.

메시아와 하나님 사이의 심판자의 정체성 공유는 이미 시편 110편에 나타나 있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의 렌즈를 통해 시편 110 편을 재해석하고 기독론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최후 심판자로서 신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배경이 되었다.

 

1. 죽음을 포함한 모든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23-26절)

 

위에서 언급했듯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편 110:1에서 메시아의 즉위로 이해되며, 장차 모든 사람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원수로 인격화되는 사망을 메시아가 멸망시키는 것으로 인식된다(26절).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자 전사로 제시한다. 시편 110:1의 “까지”라는 요소와 시편 110:2의 왕에게 “주는 원수들중에서 다스리소서”는 소청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계획을 제공한다.

23-24절의 ἀπαρχή, ἔπειτα, εἶτα ὁ τέλος의 순서는 그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ἀπαρχή)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시고, 왕으로 취임하여 하늘 통치를 시작하며 그의 일부 적들을 정복하신다.50)

 

     50) 이 페리코프에서 “모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적의 정복이 일부는 정복되고 나머 지는 아직 정복되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Joost Holleman, Resurrection and Parousia: A Tradition-Historical Study of Paul’s Eschatology in 1 Corinthians 15, NovTSup 84 (Leiden: Brill, 1996), 62, n3.

 

이는 그의 파루시아(επειτα) 때까지 지속되고, 마지막 때(εἶτα ὁ τέλος) 원수인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적을정복한다.

웨슬리 힐(Wesley Hill)이 이를 잘 설명한다:

 

시편 110편에 그려진 왕국은 바로 기존의 적들 가운데서, 그들이 발아래 짓밟히기 전 일정 기간 제왕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5절에 따르면, 이 즉위하신 주님은 대관식 날이 아니라 미래의 '진노의 날'에 '왕들을 산 산조각 내실 것'이라고 한다. 신약에는 2절의 인용이 없지만 (순교자 유 스티누스에서는 발견됨),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1절과 함께 읽었 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51)

 

힐이 올바르게 주장했듯이, 시편 110:1뿐만 아니라 다른 구절들도 바울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5에서 시편 110:1의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ynymyl bv)라는 신탁의 앞부분을 “그는 통치해야 한다”(δεῖ γὰρ αὐτὸν βασιλεύιν)로 의역하고, 그다음 신탁의 후반부를 다음과 같이 주어를 바꾸어 인용한다: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ylgrl ~dh $ybya tyva d[, 1c절)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ἄχρι οὗ θῇ πάντας τοὺς ἐχθροὺς ὑπὸ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로 바꾼다.

즉, 바울은 주어를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1절 후반부의 원문 문장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반면, 앞부분은 의역했다.52)

일부 학자들은 25-28절에 도입부가 없고 구약을 “인용”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바울이 시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성경적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53)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단순한 분석이다.54)

 

     51) C. E. Hill, “Paul’s Understanding of Christ’s Kingdom in 1 Corinthians 15:20-28,” NovT 30/4 (1988), 315. 강조는 원문의 것이며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52) L. Joseph Kreitzer는 바울이 고전 15:25에서 시 110:1의 내용을 수정한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에 대한 해석적 표현(κάθου ἐκ δεξιῶν μου[LXX]를 δεῖ γὰρ αὐτόν βασιλεὺειν 로 대체함) (2) ἕως ἄν을 시간적으로 더 명시적인 ἂχρι οὗ로 대체함 (3) πάντας추가 (4) ὑπο πόδιον τῶν ποδῶν σου를 ὑπὸ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로 대체함. (5) 시편에서 문법적 주어 형태를 하나님(θῶ)에서 그 리스도(θῇ)로 바꾼 것.” L. Joseph Kreitzer, Jesus and God in Paul’s Eschatology, JSNTS 19 (Sheffield: JSOT Press, 1987), 149.

     53) Jan Lambrecht, “Paul’s Christological Use of Scripture in 1 Cor. 15.20-28,” NTS 28 (1982), 508; Lee, From Messiah to Preexistent Son, 219.

     54) Hill은 바울의 이 언어가 “성경적 맥락과 관계없이 초기 기독교의 전통적인 용법을 단순히 반영한 바울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주로 적절한 암시(allusive) 또는 공명 (resonant)으로서 기술된 것이다”라고 올바르게 주장한다. Wesley Hill, Paul and the Trinity: Persons, Relations, and the Pauline 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2015), 123, 원문의 강조임.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편 110:1에 초점을 맞출 뿐만 아니라 시편 110 전체의 주제인 메시아의 심판과 관련하여 바울의 사유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25절에서 동사 τίθημι의 주어가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로 바뀐 것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는 시편 110:1과 가장 뚜렷하고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 시편 구절에서는 메시아의 원수를 정복하는 자가 하나님이지만, 바울은 이 개념을 바꾸어 원수를 정복하는 자가 그리스도인 것으로 변경한다.55)

일부 학자는 시편 110:1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동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만,56) 이 구절의 문법적, 신학적 특징이 그 반대, 즉 주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낮다.

  첫째, 24b절과 24c절은 두 절 사이에 명사가 삽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동일한 주어를 가져야 한다.

즉, 24b는 “그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하기 때문에 24b와 24c 절의 주어는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렇다면 24c절과 25절은 구문 구조상 평행하기 때문에 25절의 주체는 그리스도라는 가정이 분명해진다.57)

 

       55) 대부분의 주석가는 25절의 주체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Hans Conzelmann et al., 1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2008), 273; Leon Morris, 1 Corinthian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NTC 7 (Downers Grove: IVP, 2015), 207;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0), 1231; Gordon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rev. ed. (Grand Rapids: Eerdmans, 2014), 837; Joseph A. Fitzmyer, First Corinthians, AYB 32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8), 573. Holleman은 25a의 주어는 그리스도이고 25b의 주어는 하나 님이라고 주장한다. Holleman, Resurrection and Parousia, 59.

      56) F. F. Bruce, 1 and 2 Corinthians,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71); Hengel, Studies, 165; Martinus C. de Boer, The Defeat of Death: Apocalyptic Eschatology in 1 Corinthians 15 and Romans 5, JSNTSup 22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8), 117.

      57) Hill, Paul and the Trinity, 126-27.

 

  둘째, 신학적인 측면을 더 중요하게 고 려해야 한다.

20-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데,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아담과 대조적으로 ‘그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되는 분이다(ἐν τῷ Χριστῷ πάντες ζῳοποιηθήσονται, 22절).

바울은 이 주장을 그리스도가 ‘죽음이라는 원수를 멸망시킨다’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다(26절).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을 심판하는 것은 “모든 통치자와 모든 권세와 능력”(24c절)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의 절정(ἔσχατος ἐχθρός)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25절)에 복종시킨다는 생각은 24절c를 신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58)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 활동을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22절부터 24절과 26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모두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25절의 동사 τίθημι의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 명확하다.

그러므로, 시편 110:1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으로 대체된다.

얀 램브레히트(Jan Lambrecht)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원문을 바꿔서 자신의 기독론에 맞게 다시 쓴다. 부활 이후부터 그 리스도는 통치하고 있으며 이 왕권의 목적은 모든 적을 정복하는 것이 다.59)

 

     58) 110:1c를 통해 바울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24절)을 “그의 모든 원수 "(25절)로 규정하고, 그들의 멸망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는 것”(25절)으로 명시 한다. de Boer, The Defeat of Death, 115.

    59) Lambrecht, “Paul’s Christological Use of Scripture,” 507.

 

이처럼 주체가 하나님에게서 그리스도로 바뀐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수들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시는 분으로 이해한 바울의 기독론적 인식을 더욱 분명하게 암시한다.

이는 바울이 δεῖ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울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κάθου ἐκ δεξιῶν μου)의 명령을 δεῖ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는 통치해야 한다”(δεῖ γὰρ αὐτόν βασιλεὺειν)로 의역하고 있다.

이렇게 필요성을 표현함으로써 일부 학자들은 δεῖ를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드러나는 종말론적 맥락의 배경에 있는 것으로 본다.60)

또한 힐이 올바르게 주장했듯이, 이러한 종말론적 필연성은 고린도전서 15:3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성경적 예정”을 통해 인식된다(κατὰ τὰς γραφάς[“성경에 따라”]).61)

 

    60)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232;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755, n45.

    61) Hill, Paul and the Trinity, 125;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Lambrecht, “Paul’s Christological Use of Scripture,” 506.

 

그렇다면 바울이 δεῖ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시편 110:1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원수들의 정복에 대한 바울의 주장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더 놀라운 것은 바울이 25 절의 주체를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 옮긴 근거를 성경적 권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시편 110편에 메시아가 종말론적 심판자가 될 수 있는 해석학적 여지가 있으며, 이는 원래 하나님의 지위라는 것을 논의했다. 따라서 바울은 시편 110:1의 심판 활동의 주체를 고린도전서 15:25에서 하나님에서 그리스도로 수정함으로써 최종 심판자로서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사고 과정에서 다음 단계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 구절에서 시편 110:1뿐만 아니라 시편 8:6도 사용한다.

이 두 시편은 공통된 표현(시편 110:1의 τῶν ποδῶν σου[LXX 109:1]과 시편 8:6의 τῶν ποδῶν αὐτοῦ)과 공통 주제(시편 110에서는 하나님이 원수를 정복하고 시편 8에서는 만물을 인간 아래 복종시키는)가 모두 있다.

마틴 헹엘(Martin Hengel)에 따르면, 이 두 시편의 융합은 바울 이전에 이미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메시아 찬송'의 형태로 존재했으며, 이는 초기 기독론 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62)

그러나 바울은 이 두 시편을 별도의 단락(23-26절과 27-28절)으로 배열하여 서로 다른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각각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이다. 이 구절에서 이 두 시편의 조합은 단순히 오래된 찬송가의 용법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이해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시편 110:1과 8:6을 사용함으로써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절에서 의미론적 무게는 시편 110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63)

 

27a절의 아이디어는 이 페리코페에서 25b절의 개념, 즉 그리스도의 만물 정복이라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강화하기 위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이 인용구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래리 J. 크라이처(Larry J. Kreitzer)는 바울이 시편 110:1의 주체를 25b절에서 하나님에서 그리스도로 수정했지만, 27절에서는 동일한 “기독론적 과정”을 수행하지 않고 대신 원래의 주체인 하나님으로 주체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64)

 

    62) Hengel, Studies, 166-67. 마찬가지로 던은 바울이 이 두 시편의 조합을 “그가 이 시편을 받아들였을 때 이미 그 연관성이 확립되었음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사용 했다고 말한다. 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6), 109.

    63) Hengel은 시 8:6이 시 110:1에 의해 해석된다고 주장한다. Hengel, Studies, 165. 또한 다음을 보라. Gordon D. Fee, Pauline Christology: An Exegetical-Theological Study (Peabody: Hendrickson Pub, 2010), 109-10. 64) Kreitzer, Jesus and God, 151. 그러나 Lambrecht는 27절의 주어가 25절에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본다. Lambrecht, “Paul’s Christological Use of Scripture,” 507. 그러나 크라이처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27a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에 두셨다고 분명히 말하는 28과 평행을 이루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다. Kreitzer, Jesus and God, 150.

 

즉, 24c절과 25절에서 모든 원수를 적극적으로 복종시키고 그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이지만, 27a절과 27b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복종시 키고 궁극적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다.

25절의 πάντας는 시편 110:1에는 없는 것으로, 시편 8:6에서 온 것이 분명하며, 시편 110:1b의 ὑπο πόδιον τῶν ποδῶν σου는 시편 8:6의 ὑπὸ τοὺς πόδας αύτοῦ 로 대체되어, 이 두 시편이 바울의 개념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페리코페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를 모든 원수를 정복하는 능동적인 주체로 묘사한 다음,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개념을 삽입한다.

크라이처는 이러한 현상을 “그리스도 중심성(christocentricity)과 하나님 중심성(theocentricity)의 독특한 혼합”이라고 정의한다.65)

본 고는 이미 시편 110 자체에서 하나님 또는 메시아를 심판자로 언급할 때 이런 종류의 혼합, 즉 의도적인 모호성을 지적하였다.

바울은 시편 110:1에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고린도전서 15:25에서 그리스도의 역할로 바꾸고, 15:27에서 다시 이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나님의 역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바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가 유동적임을 보여준다.

조셉 플레브닉(Joseph Plevnik) 은 이러한 개념적 중첩의 주석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행동은 분리되지 않는다. … 하나님이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모든 권세를 멸망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고 있다.66)

 

    65) Kreitzer, Jesus and God, 151.

    66) Joseph Plevnik, Paul and the Parousia: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Eugene: Wipf & Stock, 2014), 134.

 

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기능적, 개념적 중첩”은67) 바울에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최후 심판자로 인식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67) Kreitzer, Jesus and God, 151.

 

IV. 고린도전서 15:27-28: 하나님께 대한 그리스도의 복종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 어조가 28절에서 약해졌다고 생각한다.

2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복종 (αὐτὸς ὁ υἱὸς ὑποταγήσεται)하여 하나님이 만유 안의 만유가 되시도록(ᾖ ὁ θεὸς [τὰ] πάντα ἐν πᾶσιν) 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최종 복종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왔다.

존 A. 지슬러(John A. Ziesler)는 하나님의 전통적인 영역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종속의 요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68)

제임스 D. G. 던(James D. G. Dunn)도 “만유의 주(롬 10:12 참조)는 하나님에 의해 주권을 부여받으셨다.

그것은 인류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주권이다. … 그리고 그것은 결국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게 될 주권이다”라고 썼다.69)

이 시점에서 바울이 이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언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크라이처에 따르면, “앞 구절의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내용이 하나님의 존재론적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결론부에서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 긍정” 은 불가피한 것이다.70)

 

    68) John A. Ziesler, Pauline Christianity, Oxford Bible Ser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39-40.

    69) Dunn, The Theology of Paul, 254.

   70) Kreitzer, Jesus and God, 159.

 

크라이처는 적어도 앞 구절에서 기독론적 개념의 중요성을 옹호하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바울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역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분하려 한다는 점에서 크라이처의 견해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 중심적 강조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지위에 “충돌”할 것을 두려 워했다면 23-26절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깊은 수준에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적 강조를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고든 피(Gordon Fee)는 바울의 그리스도의 이러한 복종에 대한 인식을 “그리스도의 위격(person)”이 아닌 “구원 역사에서 그의 역할(role)”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71)

또한 크리스 틸링(Chris Tilling)은 이러한 종속의 요소를 “바울 인식론의 관계적 성격”으로 설명하면서 “신비, 역설, 긴장”에 속한다고 말한다.72)

최근 R. B. 제이미슨(R. B. Jamieson)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아들이 인간으로서 행하는 행위”, 즉 “성육신하신 아들의 중보적 메시아 통치의 정해진 끝, 마지막 아담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순종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묘사와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격적 묘사를 구분하는 이른바 ‘부분적 주석’(partitive exegesis)을 통해 본문을 검토한다.73)

 

     71) Fee, Pauline Christology, 113, 원문의 강조.

     72) Christ Tilling, Paul’s Divine Christology (Grand Rapids: Eerdmans), 246-47.

     73) R. B. Jamieson, “1 Corinthians 15.28 and the Grammar of Paul’s Christology,” NTS 66 (2020), 187-89.

 

그리스도의 복종이라는 갑작스러운 개념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합리적이지만, 고려해야 할 것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존재론적 차원과 기능적 차원을 구분하는 피의 구분은 바울 시대에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에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인다.

즉 이 설명은 시대착오적이다.

틸링의 시도는 그리스도의 복종을 여전히 미스터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종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제이미슨의 논지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에게 복종시킨 후에는 인성을 더 이상 포함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본 연구는 이 페리코페의 배경이 되는 시편 110에서 하나님과 메시아 왕의 관계에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무엇보다도 시편 110에서 하나님은 왕을 즉위시키고(1절), 위임하고(2절), 권한을 부여하는(5절)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왕의 아버지라는 것을 암시한다(LXX 시편 109:3).

여기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시편 110에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과 왕의 역할이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분명히 구별되지만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110이 고린도전서 15:20-28의 개념적 배경이라고 가정한다면, 28절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종속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관점에서 인식될 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국을 하나님께 넘겨주신 것(24절)과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킨 것(28절)을 설명할 때마다 아버지- 아들의 언어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많은 주석가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을 하나님에게 왕국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한다.74)

그렇게 할 때 그는 자신의 통치와 권위를 하나님께 복종시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왕국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신 것은 시편 110:1의 틀에 부합하며, 여기서 “때까지”라는 단어는 왕의 통치의 한계를 표현한다.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현재” 통치하시는 활동을 완성하시는 것이다.75)

 

    74)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841; Morris, 1 Corinthians, 208-209; Mark Taylor, 1 Corinthians, NAC 28 (Nashville: B&H, 2014), 389-90; Douglas Mangum, ed., Lexham Context Commentary: New Testament, LCC (Bellingham: Lexham Press, 2020), 1 Corinthians 15:28.

    75) Fee, Pauline Christology, 113.

 

바울은 이를 25절에서 ἄχρι οὗ(“까지”)로 표현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왕국을 온전하게 만들어 더 이상 죽음과 눈물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시고 (사 25:8), 완성된 왕국을 아버지 하나님에게 넘겨주셔서 하나님이 모든 존재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리라”, 28절).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이 일을 하실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께 복종한다면, 이것은 아들에게 왕국의 주권을 주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존경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그 관계는 위계적이지만, 열등한 자가 상급자에게 복종하는 관계는 아니다.

사실, 아버지와 관계에서 아들이라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잠재적으로 종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실존적 평등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말하려는 바울의 전략이 여기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하나님의 신성한 정체성에 내재되어 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은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다시 말해, 이 관계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의 정체성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려는 바울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아버지에 대한 종속성을 설명하는 힐의 생각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후 다른 역할을 맡으시지만, 이것은 그를 “하 나님 아버지”이신 분과 구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24-25절에서 그가 행사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하다는 확신을 무효화하거나 철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문의 이 두 가지 측면, 즉 그가 고유한 신적 정체성에 포함된다는 것(24-25절)과 그가 “아버지”라고 불리는 분과 환원 할 수 없는 차이를 갖는다는 것은 중복되지 않고 경쟁적이지 않으며 상 호 보완적인 측면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침해하지도 않고 서로를 깎 아내리지도 않는다.76)

 

따라서 28절에서 하나님을 그리스도와 구별하는 바울의 논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등시키는 데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우리는 빌립보서 3:21에서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데, 바울은 예수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ὑποτάξαι αὑτῷ τὰ πάντα)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개념적 중첩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 15:28에서 만물을(ὑποτάξαι τὰ πάντα)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은 하나님이고, 빌립보서 3:21 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77)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한 능력과 권능을 아버지의 능력과 동일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공유되는 아들의 신성한 지위나 정체성을 약화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제이미슨의 설명을 인용해 보자.

 

그리스도는 참으로 성부와 구별되지만, 그러한 구별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아닌 자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하나님 내부의 구별이다.78)

 

    76) Hill, Paul and the Trinity, 132.

    77) Kreitzer, Jesus and God, 153.

    78) Jamieson, “1 Corinthians 15.28,” 194.

 

N. T. 라이트(N. T. Wright)도 예수의 ‘아들 되심’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라는 모티프는 “비록 구별되기는 하지만, 예수를 바울의 한 분 하나님 그림(the Pauline picture of the One God)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볼 수 있도록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다.79)

또한, 힐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이신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비대칭적 상호성”(asymmetrical mutuality) 이라고 명명한 것은 도움이 된다. 그는 이 관계가 “하나님과 예수의 신분이 서로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상호적”이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신’ 또는 (죽음에서) ‘일으키신’ 아버지로 식별되는 반면 예수는 아버지에 의해 보내지거나 일으켜진 아들로 식별되기 때문에 “비대칭적” 이라고 설명한다.80)

 

    79) Christoph Heilig et al., ed. God and the Faithfulness of Paul: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Pauline Theology of N. T. Wright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7), 30.

    80) Hill, Paul and the Trinity, 133. 81) Amy L. Peeler, “Son of God,” DPL 2, 1008. Hengel에 따르면, 이 아들론은 바울 서신에서 바울이 초대 교회에서 가져왔을 다음 두 가지 공식과 관련하여 제시된 다: “선재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 Hengel, The Son of God, 10-15. 원래 강조됨.  

 

28절에서 아들의 종속을 언급한 바울의 의도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정체성에 대한 함의를 결정하기 위해 바울 서신들에서 예수의 아들 되심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바울은 자신이 구별되어 세워진 것이 하나님의 복음(εὐαγγέλιον θεοῦ)을 위한 것인데, 그 하나님의 복음이 그의 아들과 관련된다(περὶ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고 말하므로(롬 1:1-4, 9), 예수의 아들 되심은 바울 신학에서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롬 8:3)와 사로잡힘의 문제(갈 4:4)를 해결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고 주장하며, 이것은 또한 인간 존재 이전에 아들이 선재하심을 암시한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을 인류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려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어주신 아버지(롬 5:10)로 간주하며, 또한 아들도 백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주신 분으로 인식한다(갈 2:20).

따라서 아들의 구속과 희생 사역은 현재의 악한 시대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해 성취된다(갈 1:4).81)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 스도의 목적과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일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하시는 아버지로 식별된다.

프란시스 왓슨(Francis Watson)은 플라톤의 존재론과 달리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행위와 분리될 수 없으며, 바울의 하나님관은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롬 4:24; 8:11).

이스라엘의 한 분 하나님(신 6:4)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신 6:10, 12) 으로 동일시되는 것처럼,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낸다.82)

 

    82) Francis Watson, “The Triune Divine Identity: Reflections on Pauline God-Language, in Disagreement with J. D. G. Dunn,” JSNT 80 (2000), 104-107.

    83) Watson, “The Triune Divine Identity,” 111. 하나님과 예수의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왓슨을 참조하라. “The Triune Divine Identity,” 115.

 

따라서 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롬 8:31) 분이시며,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분이다(롬 5:10).

이 모든 묘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아들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성한 자기 정체성은 “하나님 자신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아들을 통해 드러난다.83)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성한 정체성 안에서 아들과 아버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분으로서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 안에 포함된 그의 신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아들 예수의 기능적 종속을 나타내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는 우리가 아버지-아들의 언어로 이루어진 바울의 신학적 주장을 접할 때 이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최후 심판자로서 모든 원수를 멸망시키고 심판하는 신성한 전사로 간주하고 있으며(24절과 25절), 동시에 예수를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아들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8절).

이 아들만이 아버지 하나님께 나라를 이양해서 아버지 하나님이 만유 안에 만유가 되시게 할 수 있으며(28 절),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종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24-26절에서 하나님과 공유하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V. 결론

 

본 연구는 시편 110편이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최종 심판자로 인식하는 개념적 배경을 제공했음을 논증했다.

우선 시편 110:1의 하나님 우편에 메시아가 즉위하신다는 주제뿐 아니라, 고양된 메시아의 심판에 관한 본문의 주석적 고찰을 통해 시편 110의 주제 전체에 주목했다.

이 시편은 메시아의 하늘 보좌 즉위와 메시아의 심판을 모두 제시하는 핵심적인 구약성경 본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시편 110을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했으며,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고귀한 메시아이자 왕으로서,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실 최후 심판자로 인식한다.

시편 110에는 하나님과 메시아 사이의 심판자 역할의 공유 또는 유동성이 등장한다.

이는 고린도전서 15:20-26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 심판자로서의 역할과 권위를 하나님과 공유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놀랍게도 바울은 시편 110:1에서 메시아의 적을 정복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고린도전서 15:25-26에서 죽음을 포함한 모든 적을 정복하신 그리스도라는 개념으로 수정한다.

이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바울은 시편 8:6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개념을 여기에 추가하는데, 이는 만물을 복속시키는 권위에 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동성을 나타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복종(고전 15:28)은 시편 110에서 하나님과 메시아의 관계로 볼 수 있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LXX 109:3).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본질적으로 위계적이지만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이러한 아버지-아들 관계는 바울이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성한 정체성 안에서 아들이자 아버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바울이 아버지-아들 언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신적 정체성 안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함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편 110이 하나님과 메시아 사이에 심판자로서의 정체성이 공유됨을 보여주듯이, 고린도전서 15:20-28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자로서의 신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것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최후 심판자로 이해한 방식이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인식했음을 나타낸다.

 

 

 

투고일: 2024. 8. 20. 최종심사일: 2024. 9. 13. 게재확정일: 2024. 9. 13.

신약논단 제31권 제3호∙2024년 가을

 

고린도전서 1520-28에 나타난 최후 심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 - 시편 110과의 상호텍스트성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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