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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 /최승태.감리교신학대

I. 서론

초대교회는 일신론을 고수하려는 아리우스주의의 종속론이나 사벨리우스주의의 양태론을 거부하고, 기독교 구원론을 담보하기 위 해 삼위일체론을 제시했다. 기독교 구원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단지 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하는 것이 었다. 하지만 일신론에서 비롯된 종속론이나 양태론은 예수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보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기독교의 구원 개념을 퇴 색시켰다.1)

1) 김균진, 『기독교 신학』 I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132.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 우스주의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치면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삼위일체론이 정식화되었다.

반면에,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세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임을 말함으로써 예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의 구원관이 올바르게 확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의 역사에서, “한 분 하나님”를 우선순위에 두는지, 아니면 “신적인 세 인격”을 우선순위에 두는지 하는 것으로 양분 되었다. 전자는 서방교회가 택한 방식이었고, 후자는 동방교회가 택한 방식이었다.2) 서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 누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의 실체 개념을 도입했다.3) 그리하여 서방교회는 하나님을 한 실체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세 인격이 가능한지를 탐구하였고, 결국 삼위일체를 “한 실체-세 인격”으로 표현 했다.4) 다시 말하면,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를 한 실체이신 하나님이 세 인 격 속에서 자신을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 인격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공통된 신적 실체 안에서 하나”이 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는 신적 실체를 세 인격보다 “일차적인 것”으 로 이해한 대표적인 신학자들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의 본질” 속에 삼위 하나님의 일체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아퀴나스는 삼위일체는 결 국 “하나의 신적 본성”으로 수렴되는데, 이것은 “세 인격도 아니고 세 인격 가운데 한 인격도 아니라고” 생각했다.5)

2) Ibid., 133.

3) 양명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서울: 세창미디어, 2014), 110-112.

4)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142-143.

5)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38-39.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데서 출발해서 세 인격을 논하는 형식에는 실체 중심의 삼위일체론뿐 아니라, 주체 중심의 삼위일체론도 있다. 실체 삼위일체론이 고대에서 중세까지 대세를 이루었다면, 근대에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고 헤겔에게서 절정에 이른 주체의 개념에 기초한 삼위일체론이 대두되었다.

주체란 자신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정신적 존재를 의미하므로, 절대정신인 신은 절대 주체가 된다. 따라서 절대 주체인 신은 “자기-구별(분리)”과 “자기-복귀”의 영원한 과정에 있게 된다. 즉 신은 “자기-매개를 통해 절대적 실체에서 절대적 주체로 나아 간다.”6) 여기에서 주체의 개념에 바탕을 둔 주체 삼위일체론이 발전되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을 주체의 관점에서 파악할 때, 삼위에 대해 독립적인 주체라는 의미의 인격 개념은 포기되어야 한다. 삼위에 대해 인격을 인정하게 되면 인격적인 세 주체가 되어 삼위성만 남고 삼위의 일체성이 상실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의 개념을 바탕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한 대표적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인격7) 대신 “존재 양식”의 개념을 끌어들여서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의 세 존재 양식들”이라고 생각했다.8)

6) 피터 C. 하지슨/정진우 ‧ 최신한 옮김, 『헤겔의 종교철학』 (서울: 누멘, 2017), 185-186.

7) 칼 바르트/박순경 옮김, 『교회 교의학』 I/1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474. 여기 에서 바르트는 인격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 인격들은 각자의 본유적인 주체를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인격들은 실재하는 관계들로서 실존 한다.” 바르트의 입장은 인격이 독립적인 주체가 아니라, 단지 관계적인 개념일 뿐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주체 를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8) Ibid., 459.

 

이에 반하여, 동방교회는 하나님 안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삼위일체론을 전개하였다.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초대교회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 님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론적인 일원론에 근거한 일신론 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들은 오리게네스나 저스틴 마터와 같이 “계시” 에 관심 가졌던 소위 아카데믹한 신학자들이 아니라,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같은 현장 목회자들이었다.9) 이들은 목회현장에서 지니게 된 “교회적 공동체의 경험”(the experience of the ecclesial community)을 통해서 “존재는 삶이고 삶은 교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 역시 “교제 속에 있는 존재” 곧 “관계적인 존재”(a relational being)로 인식함으로 써 “교제의 개념”을 제외한 상태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을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들” 과 “인격적 사랑”10)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이들 은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즉 삼위일체는 “신적인 실체”에 “첨가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보다 “우선적인 존재론적인 개념”이 되는 것이다.11)

9)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Studies in Personhood and the Church (Crestwood, NY: St Vladimar’s Seminary Press, 1993), 16.

10) 여기서 말하는 인격은 바르트가 생각한 인격 개념처럼 관계적인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립적이면서도 다른 인격과 교재 속에 있는 인격 개념을 의 미한다. 참조, 미로슬라브 볼프/황은영 옮김, 『삼위일체와 교회』 (서울: 새물결 플러스, 2018), 142.

11)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17.

삼위일체론의 역사에서 발전된 서방과 동방의 두 형식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을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삼위일체론은 세 신적 인격에서 출발하여 한 하나님에 대해 논하는 방식의 삼위일체론을 일컫기 때문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초기 형태는 카파도키아 신학자들(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게서 찾을 수 있고,12) 그 이후 현대에 와서는 위르겐 몰트만 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12)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면서 하나를 이루는 형태로 존재한다.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146.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특히 예수의 역사에서 삼위일체론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도 일치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예수의 역사에서도 십자가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활동 전체를 강조한다. 이것은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구원론적 맥락에서 전개하는 데 비해, 판넨베르 크는 삼위일체론을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 해명에 중점을 두고 전개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무조건 결합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이 논문에서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판넨베르크의 관점에 서 살펴보면서 보완해보려는 것은, 두 신학자 모두 사회적 삼위일체론 을 전개한다는 점에서이고, 특히 판넨베르크가 몰트만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해봄 으로써, 몰트만이 주장하는 공동체적 모델로서의 삼위일체론에 보완 할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II.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의 배경

삼위일체론이 처음부터 기독교의 구원론을 담보하기 위해 제시 된 틀이라면, 그것은 단지 사변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 이며 경험적인 틀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이 정식화된 이후에는 오히려 그것이 구원론을 위한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을 탐구하는 사변적인 이론으로 취급되었다.13) 몰트만이 삼위일체론 을 전개하면서 가진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론적 비밀을 탐구하는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기독교의 구원론을 담보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틀임을 강조한다.14)

13)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15-16. 박만에 의하면, 기독교의 구원론을 위해 삼위일체론이 정식화된 이후, 오히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신학적 진술”로서보다는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세 인격으로 존재하는지를 이론적으로 추론하는 사변으로 바뀌었다. 이런 경향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절정에 달하였고, 이후 삼위일체론은 “구원론과 단절되고”, 단지 “하나님의 내적 비밀 에 대한 사변적 탐구”로만 취급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경향은 계속 되어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니라, 유일신론자들처럼 여겨질 정도 였다.

14)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또한 그 는 삼위일체론이 국가권력이나 교회 권력에 정당성을 제공하고 가부 장적 문화에 일조하는 기독교적 일신론 극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 한 교리임을 역설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지닌 구원론 담보를 위한 틀로서의 역할과 일신론 극복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논제에 속한다. 즉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적 일신론이 삼위일체론보다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이 구원론 담보라는 본래적인 자리를 잃고 하나님의 존재 탐구라는 사변적 도구로 전락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적 일신론은 기독교 초기 변증가들에게서 전개되 었다. 그들의 과제는 기독교 신앙을 로마와 조화를 이루는 하나님 신앙 으로 기술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화를 위해, 그들은 기독교의 한 분 하나님 신앙과 우주를 하나의 계급적 질서로 보는 철학적 일신론을 하나로 결합했다. 그 결과, 우주의 계급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적 일신론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로마의 정치 권력과 교회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며 가부장적 문화를 합리화해 주는 도구가 되었 다.15) 특히 몰트만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해준 것도 황제의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기독교에 의해 부여받고 싶어서였다고 하면서, 이때부터 “한 하나님-한 황제-한 교회-한 제국”의 공식이 성립되었다 고 주장한다. 즉 하늘의 통치자인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지상의 통치자 도 한 황제이어야 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한 교회가 있듯이 한 황제가 다스리는 한 제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기에 교회에 대한 하나님 의 통치를 대신할 지상의 통치자인 교황의 필요성이 더해졌다.

국가나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한 통치자가 필요하고, 역으로 하나의 통치자에 의해서 국가나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다.16)

15)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58, 303-304.

16) Ibid., 305

그러나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획일적인 것이 아 니라 사귐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일체론 적 통일성이 인간 사회의 통일성을 위한 모델이 되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국가나 교회의 통일성도 한 지배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사귐의 통일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삼위일체론이 지니는 사귐의 일치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에서 표현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몰트만에게, 삼위일체론이 지닌 구원을 담보하는 틀로서의 역할과 공동체적 모델로서의 역할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말하자면, 일신론이 갖고 있는 국가나 교회의 독재적 권 력에 대한 정당화를 극복하게 해주는 삼위일체론의 역할은 구원론을 담보하는 틀로서의 삼위일체론의 역할에서 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적 사귐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장소가 십자가이기 때문 이다.17) 몰트만은 근대에 형성된 경험이나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에서도 삼위일체론을 불필요한 교리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감정의 신학을 전 개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경험 중시의 대표자라면, 윤리적 실천 중시 의 대표자는 칸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 으로 보면서 인간이 신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경험할 때, 간접적으로 경험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한다. 이때의 신은 굳이 삼위일체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몰트만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 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뿐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 님의 경험도 함께 말해야 한다. 이렇게 양방향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당하는 사랑의 하나 님, 즉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성령 안에서 수난당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신앙의 경험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18)

17) Ibid., 308, 316.

18) Ibid., 20-22.

몰트만은 실천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신 분이란 인 식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삶의 동력은 단지 도덕적인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상과 기도”에도 있다. “명상의 삶”이 없는 “행동의 삶”은 단순한 “행동주의”로 전락한다. 따라서 근대 이후 형성된 실천은 단순한 “실용주의”가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할 때 자신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상을 넘어서게 되고 이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개방 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개방하게 되면, 인간은 “십자가의 명 상”(meditatio crusis)에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할 수록,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갈수록, 인간은 더욱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실체를 알게 되고, 이로써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되고, 십자가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의 “삶의 실천”을 변화시킨다. 이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변화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은 단순한 윤리적 실천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분을 따르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은 실용주의를 넘어 우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끈다. 여 기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19)

19) Ibid., 26-28.

우리는 여기에서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는 배경을 확인 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탐구하는 사변적 도구가 아니라, 한편으로 경험과 실천을 위한 교리이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 권력이나 교회 권력, 혹은 가부장적 문화에 정당성을 부여해줌으로써 사회를 경직되게 만드는 일신론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리라 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이 예수의 십자가 중심의 삼위일체론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에 둘 때, 삼위일체론은 구원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교리로서 그리고 일신론을 극복하게 도와주는 교리로서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처럼, 판넨베르크도 삼위일체론이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 니라, 기독교의 구체적인 독특한 신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으로부터”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불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20)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예수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나타냈고, 아버지와 자신의 구분을 드러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의 결합을 확실하게 했다.21)

20)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신준호‧ 안희철 옮김,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서울: 새물결 플러스, 2017), 493.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예수의 십자가에서 시작하 지만,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활동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몰트만은 삼위일 체론을 구원론적 시각에서 보는 데 비해,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론을 인간 중 심적 구원론보다는 하나님 인식에 대한 틀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여 겨진다. 물론 그가 말하는 하나님 인식은 철저하게 예수의 역사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사변적인 인식과는 다르다.

21) Ibid., 426.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의 제삼 인격인 성령도 예수의 역사에서 입증된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복음서들은 “예수의 사역과 말씀을 그 안에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의 표현”이라고 함으로써 예수와 아버지의 결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론의 토대가 구체적인 예수의 역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이로써 삼위일체론이 추상적인 사변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22)

22) Ibid., 430-433.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는 몰트만과 의견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몰트만처럼, 판넨베르크 도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존재론적 탐구를 위한 사변적 틀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III.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내용

이미 언급했듯이, 삼위일체를 사귐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동방의 초대교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동방교부들은 삼위의 일체성을 세 인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사귐으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원리”(the ontological principle of God)를 실체가 아니라, 각자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관계 맺는 개념인 인격으로 보았다.23) 그럼으로써 그들은 삼위일체를 “세 인격의 사귐의 공동체” 로 이해할 수 있었다.24)

23) 동방교부들, 특히 카파도키아 교부들(바실,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 레고리)은 인격을 관계적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이 단지 개체로만 존재하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즉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이고, 아들 역시 아버지와 성령의 관계 속에서 아들이 된다. 이처럼 인격을 관계로 이해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이 실체나 주체가 아니라 관계적인 일치로 설명될 수 있다. 케네스 콜린스/ 이세형 옮김, 『존 웨슬리의 신학』 (서울: 도서출판 kmc, 2012), 132-133.

24)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Studies in Personhood and the Church (Crestwood, NY: St. Valdimir’s Seminary Press, 1993), 41-42.

그러나 몰트만은 동방교부들이 제시하는 삼위의 인격적 사귐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그들처럼 삼위의 인격적 사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가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삼 위일체론이 사변적인 신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구원을 담보해주는 기 독교의 독특한 신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당하는 장소가 십자가이므로, 십자가에서 삼위일체의 모습이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본다.25)

25)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53-262. 여기에서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가 삼위일체의 중심이 되는 것은, 십자가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론의 내용 적 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인식의 형식적 원리는 삼위일체 론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몰트만과 판넨베르크의 관점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몰트만이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것에 비해,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론을 역사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의 관계에 대한 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역사 전체에서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를 살펴본다. 박만, 『현대적 삼위일체론』, 181.

나아가서, 몰트만이 십자가 중심의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론이 일신론으로 환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해, 몰트만은 십자가를 중심에 두지 않을 때, 신론의 우선성이 예수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에게 있게 되고,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일신론적 종교가 된다는 것이 다.

전능한 신은 오직 한 분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신론적 종교는 하늘에 전능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시듯 지상에도 그로부터 권세를 받은 군주적 체계가 형성되는 것을 합리화시켜 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하 나님 아버지(천부)-교회의 아버지(교부)-국가의 아버지(국부)-가정의 아버지(가부)”와 같은 가부장적 계급구조에 정당성을 주게 된다.26) 몰트만이 실체 삼위일체론이나 주체 삼위일체론을 비판하는 이 유도 이것과 맥이 닿아있다. 즉 실체를 중심으로 하든지 주체를 중심으 로 하든지,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하면 언제든지 일신론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체 삼위일체론에서는 “신적 본질의 단일성”과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구분해서 말할 수밖에 없 게 되고 본질적 단일성을 우선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 단일성이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고, 결국 “삼위일체론은 추상적 일신론”으로 환원되어 버린다.27) 또한 주체 삼위일체론에서는, 하나님의 세 인격이 하나의 절대 주체 안에 포함되는 요소들로 해소될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삼위일체론은 일신론으로 환원되는 결과가 된다.28)

26)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58.

27) Ibid., 39-40. 참조. 바르트, 『교회 교의학』, 474. 바르트는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을 “한 분 하나님의 세 개별 고유성을 가지는 존재양식들이라고 말하기를 선호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본질적 단일성을 삼위일체의 일체성보다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28)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42.

그러므로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십자가에 시작하는 것은, 삼위 일체론이 일신론에로 회귀할 가능성을 차단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사 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에수의 십자가 는 삼위일체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현장이다. 십자가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론은 사변적 혹은 추상적 이론으로 흐르지 않고 구원을 위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기독교의 교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를 통한 구원 경험에서 출발한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삼위 하나님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은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시작된다. 그런 데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으로 나아 가게 한다. 밖을 향한 하나님의 활동과 하나님의 내적 삶이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의 근거 요 바탕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실현”이라는 정 식이 성립된다.29) 그러므로 인식의 순서에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 내는 경륜적 삼위일체가 먼저이고, 존재론적 순서에서는 하나님의 내 적 삶을 나타내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먼저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 삶은 세 신적 인격들의 교제로 이루어지므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인식은 그들의 사귐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몰트만은 삼위일 체에 대한 인식은 세 신적 인격들 사이의 “유일 독특한 사귐(Gemeinschaft)”30)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한다.

29) 신옥수,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의 역사󰡕, 역사신학회 편 (서울: 대 한기독교서회, 2008), 526.

30) 몰트만은 “사귐”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사귐은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으며, 소유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 하게 하며, 다른 자들을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귐은 서로를 열게 하며, 서로 자기의 몫을 주며, 서로 존경하게 한다. 사귐은 서로 간의 참여 속에서, 서로 간의 인정으로부터 산다.”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생명의 영』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291.

다시 말하면, 몰트만은 세 신적 인격들의 사귐을 강조함으로써, 더욱 철저한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을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의 단일성을 “실체의 동일성”이나 “주체”에서 찾지 않고 세 신적 인격 들의 “사귐의 일치”에서 찾는다.31) 이렇게 할 때만, 기독교의 신론이 가부장적 기득권을 옹호하거나 정당화해주는 일신론32)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없어질 것이라고 몰트만은 생각한다.33)

나아가서, 몰트만은 사귐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은 이 사귐 안으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개방을 특징으로 갖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 이다. 몰트만이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르 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삼위일체의 사귐이 하나님 안에서의 사귐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향해 열린 사귐이므로 인간의 공동체를 위 한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인간 사회의 모델 이 된다면, 가정, 교회, 국가의 일치는 가부장적 권위나 신적인 혹은 교권의 권위, 또는 국가 권력자의 권위에 의하지 않고, “성령의 사귐”을 원형으로 형성되는 공동체의 사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몰트만의 주장이다.34)

31)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41.

32) 몰트만에 따르면, 일신론의 형태에는 정치적인 것과 교권적인 것이 있다. 정치 적 일신론은 일인 지배의 권력을 정당화해주고, 교권적 일신론은 교회의 지도 자들의 권력을 정당화해준다. Ibid., 298-299.

33)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2011), 10-11.

34) 몰트만, 『생명의 영』, 292. 여기에서 몰트만은 성령의 사귐이 “성령에 의하여 성령 자신과 함께 열려진 사귐을 뜻하는 동시에, 성령과 인간의 사귐을 뜻하기도한다”고 말한다. ‘성령의’가 “주격 소유격”일 때는 전자의 의미로, 목적격 소유격일 때는 “성령과의”로 해석되기 때문에 후자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성령의 사귐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사귐은 밖을 향해서도 열려 있는 사귐이 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삼위일체는 상호 개방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사귐의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세 신적 인격들의 사귐은 “비슷한 자들의 사귐”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은 “비슷하지 않은 자들의 사귐”을 의미한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공동체의 사귐을 위한 모델로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는 인간의 공동체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왜곡되는 반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에 바탕을 둔 사귐 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욱이 삼위일체의 공동체는 “개체성”과 “사회성”을 모두 포괄하며 중심을 잡아주므로 인간의 공동체를 위한 훌륭한 모델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고 본다.35)

35)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그러므로 몰트만이 제시하는 삼위일체론적 공동체는 국가, 사회, 교회의 공동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 의 삼위일체론이 이런 좋은 의도와 목적하에 전개되었음에도, 거기에 보완할 점이 무엇인지를 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 찾아볼 것이다.

IV.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 즉 세 신적 인격들 사이의 관계와 삼위 일체의 삶을 분리하여 다룬다.

그는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는 하나님 아버지의 군주적 체제에 의존하고, 삼위일체의 삶은 삼위의 순환적 상호 내재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과 삶을 분리하여, 구성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 신적 인격들의 동등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삼위일체의 통일성이 그들의 사귐에 있다고 이해 한다. 몰트만은 먼저 세 신적 인격들의 구성 혹은 상호관계를 논하고, 다음에 삼위일체의 삶을 다룬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삶이 그가 제시하 고자 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이고,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는 그것을 위한 토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세 신적 인격들이 함께 이루는 공동체적 삶에 집중하면서 그의 삼위일 체론을 전개하며, 그것이 공동체적 모델이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삼위일체의 관계와 삶에 대한 몰트만의 주장을 먼저 알아보고, 각각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견해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몰트만의 삼위 일체론이 갖는 문제가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

몰트만에게, 삼위일체의 관계란 세 신적 인격들의 구성에 관한 것 을 가리킨다. 그는 이 관계가 신성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에게 의존되 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전통신학의 관점과 같다.

예를 들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아버지는 “신성의 근원”(the origin of divinity) 이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태동”(generation)되며, 성령은 아버지로 부터 “내쉬어”(spiration)진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구성은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36)

몰트만 역시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아들을 영원히 태동하고 탄생시킴으로써 자신을 아버지로 입증하고 아들의 아버지로서 성령을 내쉬지만, 아버지는 어떤 다른 신적 인격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 즉 아버지는 “신성의 근원 없는 근원이고 아들의 아버지이며 성령의 생성자”가 되기 때문에, 삼위일 체의 구성이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37)

또한 몰트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들이 “단 하나의” “태어난”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들은 피조물과 같이 무 에서 창조되지 않고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들을 “태 동”하고 출산한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의 신분” 곧 “신성의 원천” 이외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준다. 따라서 아들은 자신의 “인격적 특성” 이외의 모든 것을 아버지와 공유한다.38) 특히 몰트만은 아들의 “영원 한 태동”39) 개념이 아들의 이름을 삼위일체적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한 다. 40)

36) Thomas Aquinas,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Summa Theologica, vol. 1 (Westminster, MA: Christians Classics, 1981), pt. q. 27.

37)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61-262. 여기에서 몰트만 역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말하는 “신성의 근원 없는 근원”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규정을 그대로 사용한다. 즉 몰트만도 삼위일체의 구성에서는 아버지의 단일 군주론 적 체제가 불가피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38) Ibid., 263.

39) “아들의 영원한 태동” 혹은 “성령의 영원한 내쉼”이란 개념은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을 아들, 성령과 영원히 공유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40) Ibid.

아들의 태동과 출생은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오는 필연적인 것이 지 우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 없이는 신성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태동”되는 것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파송”을 구분하여, 전자는 본질적인 필연성으로부터 후자 는 아버지와 아들의 자유로부터 온다고 설명했다.41) 그러나 몰트만은 이런 설명으로부터는 “왜 하필 아들만 성육신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답을 찾는다. 말하자 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내어주는 것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은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 곧 순종이다. 그러므로 몰트만 의 관점은 세 신적 인격 가운데 아들의 성육신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응답하는 아들의 사랑이 그의 성육신을 이미 결정하고 있 기 때문이다.42)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표현된 아들의 희생적인 사랑도 이미 삼위일체의 내적 삶 안에 포괄되어 있다고 주장 한다. 즉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응답하는 순종이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아들에게서 그대로 표현된다는 것이다.43)

41)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64.

42) 양명수에 따르면, 아퀴나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신적 인격 가운데 아버지의 위 치가 절대 초월성을 나타낸다면, 아들의 위치는 바로 세상과의 접촉점을 이룬 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므 로 성육신에 적합한 대상은 아들이 된다. 양명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137-138. 43)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65-266.

몰트만은 필리오케의 재해석을 통해 성령과 아버지 그리고 성령 과 아들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서방교회가 필리오케로 인해 오해를 받았지만 성령의 근원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신성의 두 근원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방교회는 신성의 원천이 아버지뿐임을 언제나 인정했다. 따라서 필리오케는 “퍼 필 리움”(per filium, 아들을 통하여)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성령 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성의 근원 인 그분은 만물의 근원 이전에 아들을 태동함으로써 아버지가 되시고, 그렇게 아버지 신분을 획득한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을 내 쉰다. 따라서 성령의 발출에는 “아들의 태동”, “아들의 실존”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관계”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발출은 아들의 태동과 구 분되어야 하지만 또한 그것과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 다.44) 나아가서, 몰트만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아들로부터 받는다”는 에피파네스(Epiphanes)의 명제를 재해석함으로써 아들과 성 령의 관계를 논한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완전한 신적인 실존을 가지며, 아들로부터 관계적인 형태를 받는다.”45) 그런데 “신적인 실존의 생성”은 “관계적인 형태를 받는 것”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이렇게 “생성”과 “받는 것”을 구분하면서, 몰트만은 필리오케가 성령의 관계적 순환의 형태를 표현하는 데 적합할 뿐, 성령의 생성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성령은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그 근원을 가지며 아들로부터 관계적인 형태를 받는다는 것이다.46)

44) Ibid., 286-290.

45) Ibid., 290-291.

46) Ibid., 292-293.

그러나 몰트만은 성령을 아들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되고, 아들을 성령의 관점에서도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성령이 아들로부터 형태를 받을 뿐 아니라, 아들도 성령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숨을 쉬는 것과 말하는 것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몰트만은 “아버지가 영을 내쉬는 것”은 “아들의 현존 가운데서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태동하는 것은 “영을 내쉬는 가운데에서이다” 라고 한다.47) 성령의 발출이 아들의 태동 안에서 가능할 뿐 아니라, 아들의 태동 역시 성령의 발출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몰트만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불가분리적으로 이해한다.48)

47) 몰트만, 『생명의 영』, 105.

48) 몰트만은 이점 때문에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의 상호관계를 말할 수 있고, 그 관계가 “신학의 기본 전제”가 된다고 본다. Ibid., 106,

2.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견해

지금까지 살펴본 바처럼, 전통적인 삼위일체 신학과 같이, 몰트만 에게도, 아버지의 군주성은 세 인격의 관계를 이루는 전제가 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다루면서, 이들 각자의 “정체성”보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동과 성령에 대한 아버지의 내 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이렇게 되면,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과 성령으로 향 하는 “근원적 관계들”만이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49) 판넨베르크는 만일 근원적 관계만 인정될 경우, 세 신적 인격들의 “서로에 대한 자기 구분으로 규정되는 관계”가 “근원적 관계들로 환원”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삼위일체론이 종속론적 일신론으로 전락 된다고 생각한다.50)

49)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I, 518.

50) Robert Letham, The Holy Trinity: In Scripture, History, Theology, and Worship (Philipsburg, NJ: P & R Publishing Co., 2004), 314-315.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의 관계에 있어서, 근원적 관계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으로부터 아버지에게 이르는 “인격적 관계”도 동일한 중요성을 지녀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판넨베르크의 관점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다룰 때, 삼위일체의 근원적 인 관계와 삼위 사이의 관계를 분리하지 말고 양자를 하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태동하는 것에 그 치지 않고, 그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다시 그 나라를 돌려받기” 때문 이다.51) 또한 아들은 단지 아버지로부터 출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에게 “순종”하여 아버지의 나라를 완성하고 돌려드림으로써, 아버지를 “한 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한다. 그리고 성령도 아버지로부터 내 쉬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머물 며” “아버지에 대한 순종 안에 있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이를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52) 말하자면,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아들과 성령의 존재론적 근거인 아버지의 군주성이 단지 삼위일체의 관계를 구성하는 역할만 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현실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군주성만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도 삼위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 이다. 아버지의 군주성을 통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받은 아들과 성령이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서 아버지의 군주성을 유지시키고 완성시키기 때문이다.53)

51)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517-518.

52) Ibid., 518

53) Ibid., 526.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관계 즉 구성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생각과 몰트만의 생각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내재적 삼위일체에 한정하는 것에 비해, 판넨베르크는 그 범위를 경륜적 삼위일체까지 넓혀서 이해한다. 즉 몰트만이 삼위일체의 관계 형성을 신성의 근원인 아버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 데 비해,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의 관계를 단순히 이런 근원적인 관계 에서만 보지 않고 삼위일체의 사역에까지 확장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를 그들의 사역에까 지 확장 시켜서 이해할 경우, 그들의 관계에서,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 에게 의존할 뿐 아니라 아버지 역시 아들과 성령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의 군주성은 삼위일체의 “사역의 전제”가 아니라 그 ”사역의 결과“가 된다. 아버지의 군주성이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을 통해서 삼위 일체의 관계성이 확보된다.54) 특히 판넨베르크는 아버지의 신성도 아들과 성령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출생과 파송은 “비가역적”이지만, 아버지가 통치권을 아들에게 이양하고 아들은 그 통치권을 통해서 아버지의 통치를 완성한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나라와 신성이 최종적으로 아들에게 의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완성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는 아버지의 출산과 내 쉼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 라, 이들의 사역에서의 상호관계 속에서도 이루어진다.55)

54) Ibid., 524-525.

55) Ibid., 504-507.

이 점은 그가 말하는 군주국 개념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군주국”이란 아버지가 주권으로 다스리는 아버지의 왕국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단순한 사귐의 공동체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아버지의 단독 주권에 의한 군주국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연합해서 세우는 군주국이다. 그래서 이 군주국 안에서는 어느 한 인격의 지배나 군림이 아니라 상호의존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실체나 주체가 아니라, 세 인격의 삶의 관계 안에서 표현되고, 삼위성 역시 이 삶의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56) 판넨베르크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군주국 개념은 창조 이전의 하나님 자신, 곧 내재적 삼위일체에서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창조 이전에도 함께 하나님의 군주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도 계속 하나님의 군주국을 세워가고 있으며, 종말의 완성을 향하고 있다. 종말에 완성될 군주국이란 피조물까지 포괄하는 군주국을 가리킨다.57)

56) Ibid., 525.

57) 조현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의 삼위일체론,” 󰡔관계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웨슬리신학연구소 편 (서울: 아바서원, 2015), 273-278.

이런 면에서, 판넨 베르크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군주국 개념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하나로 연결한다. 하나님의 군주국은 내재적 삼위일체 에서 시작하여 역사 안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결국 종말에 완성될 것이 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삼위일체의 관계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 는 근원적인 관계들만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몰트만과 달리, 판넨베르크는 아들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군주성이 완성된다고 함으 로써 세 신적 인격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판넨베르크의 견해는 몰트만의 경우, 세 신적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의 군주성이 실제적인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일신론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자신의 경우, 그럴 가능성이 약화 된다는 것이다.

3. 삼위일체의 삶에 대한 몰트만의 견해

몰트만에게, 삼위일체의 관계가 삼위일체의 구성에 관계된 것이 라면, 삼위일체의 삶이란 세 신적 인격들이 함께 구성하는 일체성에 관한 것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해, 한 분 하나님과 삼위 일체 하나님을 구분하는 전통의 방식과 달리 삼위일체적으로 논한다. 이것은 그가 실체나 주체의 개념을 삼위일체론에서 배제하는 데서 분 명히 드러난다. 즉 몰트만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한 실체나 한 주체로 보지 않고 세 신적 인격들의 일치로부터 이해하는 것이다.58)

58)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78-279.

이미 언급했듯이, 몰트만이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는 이유 는 일신론이 가져다주는 가부장적 문화를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그러 므로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세 신적 인격들의 사귐을 통한 일치이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카파도키안 교부 들은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신성의 근원인 아버지에게만 돌린다. 그들 은 신성의 근원인 아버지가 아들을 영원히 태동하고, 성령을 영원히 내쉬는 분으로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보존하고, 또한 아버지가 아들과 성령의 각각 다른 방식의 발출을 통해 삼위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몰트만은 이런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면, 두 인격 이 아버지 한 분에게로 집중되고, 결국 일신론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고 비판한다. 일신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몰트만은 아버지의 단 일 군주론적 체제를 삼위일체의 구성에만 한정시키고, 삼위일체의 삶 의 근거를 삼위의 상호순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59) 또한 몰트만은 “세 실체,” “인격,” 혹은 “존재 양식” 같은 총괄개념 들도 삼위일체론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개념들은 삼위의 구체적인 차이를 해소함으로써 결국 삼위일체론을 일신론으 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총괄개념으로서의 인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게 “서로 다른 인격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주장은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과 성령 의 인격이 각자 독립적이면서도 순환적인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다.60) 나아가서, 몰트만은 신성의 본질 개념도 반대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신성의 본질을 먼저 다루고 삼위일체론을 뒤에 다루는 전통이 생겼지만, 이렇게 될 경우, 삼위는 독자적인 인격을 지닐 수 없고 단지 신성의 본질의 발출로만 이해되어,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 일신론으 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61)

59) Ibid., 295.

60) Ibid., 295-296.

61) Ibid., 296.

몰트만은 이렇게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 면서, 인격의 개념과 순환의 개념을 도입하여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라틴 교부들은 인격을 “대체 가능한 가면이나 기능”의 의미로 생각했지만, 보에티우스는 “대체 혹은 대리 불가능한” “그 자신의 현존”을 뜻하는 인격 개념을 제시했다. 따라서 이 개념이 삼위일체에 적용되면, 세 신적 인격들은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인격들 로서 신적인 본성을 지닌 “실체들”이 된다.62) 그런데 몰트만에 따르면, 보에티우스의 인격에 대한 실체적인 이 해는 어거스틴에 의해 관계적인 이해로 발전되었다. 어거스틴은 사랑 의 삼위일체론63)을 통해, “삼위일체의 세 인격은 개체적이고 나누어 질 수 없으며 동일한 단 하나의 신적인 본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세 신적 인격들은 이 본성을 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지닌다. 이 본성을 아버지는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 터” 지닌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기 다른 인격을 지니 고 있으면서도, 관계 안에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즉 그들의 인격은 그 자체로 관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다.64)

62) Ibid., 270.

63) 아우구스티누스/김종흡 옮김, 『삼위일체론』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7), 8권, 9, 10. 여기에서 어거스틴은 사랑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받는 것”, “사랑”,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인데, 이 렇게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것을 연결하는 사랑에 의 해서이다. 이것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성부와 성자가 성령에 의해 일치를 이 룬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그 자신에 대한 마음의 지식,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한 사랑, 이 셋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서 로의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듯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도 그렇다는 것이다.

64)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71.

몰트만은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적인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요하네스 다마스커스의 “순환” (perichoresis)이론을 받아들인다. 순환이론에 의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지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 안에 거한다. 즉 아버지 안에 성령과 아들이 거하고, 아들 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거하 며, 성령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서로 안에 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안으로 “침투”한다. 그럼으로 써 이들은 “자신들의 인격적 독특성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할 뿐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존재한다.65) 몰트만의 주장은 순환의 개념을 도입할 경우, 삼위일체의 단일성 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세 신적 인격들의 완전한 상호 나눔의 삶으 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이것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아버지에 의하여 구성되고, 아들에게 로 집중되며, 성령을 통하여 밝혀진다.”66) 여기에서 몰트만은 삼위일 체의 단일성이 아버지에게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 신적 인격들의 상호내재적인 순환적 삶에서 이루어지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이렇게 생각할 때, 삼위일 체론이 일신론으로 전락 될 위험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종속론에도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순환의 개념은 신적 인격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등한 가운데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해 주는 틀이기 때문이다.67)

65)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16.

66)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79.

67) Ibid.. 276-277.

이런 방식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삶이 세 인격 사이의 “영원한 순환”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에서는 아 버지의 군주적 위계질서가 존재하지만, 삼위일체의 삶에서는, 위계질 서 없는 “상호내재적” 혹은 “상호침투적” 순환 속에서의 사랑의 교제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68)

68) 미로슬라브 볼프 역시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세 신적 인격들의 순환 속에서 찾 으면서,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세 신적 인격들은 각자 “단지 그 자신일 뿐 아니라… 오로지 그 안에 다른 인격들이 내주하는 가운데 진정한 인격이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는 한에 서 아버지가 되고, 아들과 성령 역시 다른 인격들이 내주하는 한에서 아들과 성 령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삼위일체는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 속에 있다고 말한다: “비록 성부가 신성의 근원이고, 따라서 성자와 성령을 보낸다고 해도… 모든 신적 속성을 공유하는 인격들 사이에 존재하는 완벽한 사랑의 공동체 속 에서, 위계와 종속의 개념은 생각할 수 없다.” 미로슬라브 볼프/황은영 옮김, 『삼위일체와 교회』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8), 349, 361.

몰트만은 이처럼 세 인격들이 동등하게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을 유지하면서 순환적 일치를 이룬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론이 완전한 사회성의 모델이 된다고 주장한다.

4. 삼위일체의 삶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견해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관계와 삶을 분리하여, 관계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지만 삶은 삼위의 순환적 일치 속에서 이 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으로 빠지는 것을 방 지함은 물론69) 양태론적 일신론에로의 회귀 가능성도 차단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69) 박만에 따르면,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삼 위일체의 일체성이 세 신적 인격들의 “의지의 연합”에 있는 것이지, “존재론 적인 연합”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조지 훈징어(George Hunsinger), 존 오도넬(John O’Donnell), 월터 카스퍼(Walter Kasper) 등이 속 한다.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159.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과연 몰트만의 주장이 성공적인지 에 의문을 제기한다. 판넨베르크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구성과 삶을 분리하고 있다는점이다. 삼위일체의 구성에서는 아버지의 단일군주론적 체제를 인정 하고, 삶에서는 삼위의 동등성과 순환적 일치를 주장하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 는 것이다.70) 이런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판넨베르크는 아버지의 군주체제와 삼위일체의 삶을 분리하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의 군주체제를 삼위일 체의 삶을 위한 전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단일성은 기원의 동일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만일 기원이 같지 않다 면, 세 인격은 전혀 다른 존재가 되므로 내적인 일치를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아버지의 단일군주 체제하에서만 세 인격의 순환적 일치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71) 나아가서,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의 삶을 세 인격의 순환적 상호 내재에 근거시키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 개념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 면, 신적인 본질 혹은 단일성은 하나님의 “영” 혹은 “신성”에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구절에서, 영을 이성이 아니라, “창조하고 생명 을 부여하는” “역동성”으로 이해해야 하고, 이럴 경우, 영은 “하나님의 능력에 찬 힘의 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72)

70)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525-526. 판넨베르크는 몰트만의 이런 분리를 “본체적 지평”과 “관계적 지평”의 분리라고 하면서, 이 분리 때문에 몰 트만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삼위의 상호관계보다 아버지의 단일 군주체제가 더 중요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71) Ibid.

72) Ibid., 620.

하나님의 본질인 “영” 혹은 “신성”을 “힘의 장”으로 이해할 때, 신 성은 세 인격 안에 동등하게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 신적 인격들은 영 혹은 신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형태가 된다. 역으 로 신적인 단일성인 영 혹은 신성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서만 드러난다. 이 점에서,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독립된 인격 을 통해서 나타날 뿐 아니라, 세 인격의 연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특히 영은 세 인격의 공통된 본질이면서, 동시에 삼위의 한 위격이 되기 도 한다.73) 이처럼, 영 혹은 신성의 개념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생각 할 때, 판넨베르크는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으로 전락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판넨베르크는 세 신적 인격들 각자의 정체성이 그 들의 연합에 의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인격의 정체성이 “다른 두 신적 인격들과의 관계에 의해” “중재”된다고 말한다. 세 인격 들이 서로를 중재할 때, 한 인격의 정체성은 다른 두 인격 들의 “헌신”을 통해 “완전하고 온전하게” 된다.74)

73) Ibid., 621.

74) Ibid., 612.

이렇게 되어, 삼위일체론은 일신론 으로 빠지지 않는다.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사랑의 개념을 통해서도 설명한다. 그에 따 르면, 사랑은 “권능”이다. 사랑하는 인격들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은 바로 사랑의 권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들은 서로 사랑함으로 연합 하고 이 연합 안에서 상호관계를 통해 사랑을 계시한다. 이렇게 될 때, 각 인격은 사랑 안에서 다른 인격들로부터 “자신을 새롭게 수령” 한다. 사랑 안에서 인격들은 서로 “헌신”하고, 이를 통해, 각자의 인격이 새로 워지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어느 한 인격이 다른 인격들 위에 군림하 거나 그들을 지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삶을 사랑 으로 이해할 때, 삼위일체는 사랑의 권능 속에서 서로를 위해 헌신함으 로 일체를 이루며, 그 헌신을 통해 각 인격의 정체성은 더욱 새로워진 다.75)

75) Ibid., 689-691.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아버지의 단일 군주 체제와 삼위일체의 삶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 혹은 신성 을 삼위일체의 근거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는 두 인격의 기원이 됨으로써 신성을 표현하고, 아들과 성령은 각각의 방식으로 신성을 표현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삶이 형성되며, 이를 통 해, 삼위성과 일체성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판넨베르크 는 몰트만이 갖고 있는 약점, 즉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으로 환원될 가능 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V.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몰트만이 완전한 사귐의 공동체 모델로 서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세 신적 인격들이 각자의 독특한 인격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로 나아가는 전통적인 방식을 극복하고, 삼위일체 자체에서 단일성과 삼위성을 말 하는 것이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관계와 삼위 일체의 삶을 분리하여, 아버지의 군주적 체제를 삼위일체의 관계에만 한정시키고, 삼위일체의 삶은 세 신적 인격들의 순환적 일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으로도 환원되지 않고, 동시에 삼신론으로도 전락되지 않는다 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몰트만은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추상적 일신론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국가나 교회 권력의 독점을 막고, 가부장 적 문화를 타파하는 공동체적 모델을 제시하는 좋은 틀이 된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지적처럼,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의 단일 군주성과 삼위일체의 삶을 분리함으로써, 다시 일신론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몰트 만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는 이것이 현실화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권한을 아버지께 다시 돌려 드리는 종말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 안으로 지양되고, 여기에서 아들과 성령도 아버지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다고 몰트만이 주장하는데, 76) 이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 한 분의 영광만 남는 일신론에 로의 회귀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76)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205-206.

이것은, 판넨베르크의 비판처럼, 몰트만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아 버지에게서 아들과 성령이 나오는 근원적 관계에만 의존하는 데서 분 명히 나타난다. 근원적 관계만을 고려할 경우,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에게 존재론적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역에 있어서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단일군주 체제는 삼위일체의 구성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삶 속에서도 계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삼위일체의 구성과 삶이 분리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단일 군주체제가 삶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의 단일 군주성 과 삼위일체의 삶을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단일 군주성을 세 신적 인격들의 일치를 위한 전제로 이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는 세 신적 인격들의 단일 기원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참된 일치를 말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판넨베르크는 아버 지에게서 아들과 성령에로의 근원적 관계 못지않게,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서 아버지에게로 향하는 관계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발출뿐 아니라, 아들과 성령의 사역도 강조하여, 그 관계를 그들의 상호의존에 두는 것이다. 이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관 점이 더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사료된다. 몰트만의 견해처럼, 삼위일 체의 관계를 아버지의 단일 군주성에만 의존할 경우, 일신론에로의 회귀 가능성이 배제될 수 없고, 더욱이 세 신적 인격들이 일치를 이루는 삶의 근거가 오직 그들의 상호내재적 순환에만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기원 단일성이 전제되지 않음으로써, 삼신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77)

77) 김재진 교수도, 몰트만이 아버지의 단일 기원성을 삼위일체의 삶에서 배제하 고, 삼위가 서로 다른 인격들임을 강조할 경우, 결국 삼신론으로 흐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김재진,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비판적 이해,”

특히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해, 영 혹은 신성의 개념 을 사용하여 설명함으로써, 삼신론이란 비판을 피해간다. 그는 아버지 의 기원성 그리고 아들과 성령의 사역은 각기 영 혹은 신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되고, 이를 통해, 세 신적 인격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 면서, 신성 혹은 영 안에서 일체성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이 총괄개념을 거부하는 데 반해,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괄개념을 거부할 때는 삼신론 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겠지만, 영 혹은 신성의 개념을 통해서, 이 것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는,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 에서 출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말한다 해도, 아들과 성령의 존재 가 아버지로부터 발출되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아버지의 단일 군주적 체제를 부정할 수 없고, 결국 일신론으로의 회귀 가능성이 완벽 하게 차단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아버지로부터의 발출을 부정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삼신론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 삼위 일체론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가 몰트만을 비판하 면서 보완하고 있다 할지라도, 판넨베르크의 견해 역시 일신론 혹은 삼신론으로 흐를 가능성을 완벽하게 차단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 다. 이것은 삼위일체 신학이 갖는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나 주체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단일성에 집중함으로써, 가부장적 제도를 정당화해주는 일신론에로의 환원을 막고, 삼위일체론을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 모델로 제시하려는 몰트만의 의도와 목적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삼위일체론에는 보완해야 할 약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의 비판점들이 함께 고려될 때,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그것의 의도대로, 국가나 교회의 독점적 권력을 막고, 사귐의 공동체 건설에 더욱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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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판넨베르크의 관점에서 본 논문의 목적은 몰트만이 제시하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가진 내용 과 특징 등을 살펴보고, 이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판 넨베르그의 입장에서 평가해보는 데 있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내재 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분하여, 한 분 하나님을 먼저 다루 고,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혹 은 단일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런 현상은 초대교회에서 중세 에 이르는 실체 삼위일체론과 근대 이후의 주체 삼위일체론에서도 그 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한 실체, 혹은 한 주체에 둘 경 우, 삼위일체론은 결국 일신론으로 환원되어 버린다고 비판한다. 그렇 게 되면, 삼위일체론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기독교 신론의 정체 성도 사라지게 된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몰트만은 세 신적 인격들의 일체성을 실체나 주체가 아니라, 삼위일체적으로, 즉 세 인격 사이의 순환적 일치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삶이 사귐의 공동체임을 밝 힌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 신적 인격들의 순환적 인 일치의 바탕이 사랑이고, 따라서 삼위일체는 사랑의 사귐 속에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사랑은 언제나 타자를 지향한다는 점에 최승태 |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261 서 개방적이므로, 삼위일체는 모든 공동체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몰트만의 공헌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몰트만은 세 신적 인격들의 관계와 삼위일체의 삶을 분리하여, 삼위일체의 관계는 아버지의 군주체제에 의존하는 반면, 삼위일체의 삶은 세 신적 인격들의 순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판넨 베르크는 이렇게 분리할 경우, 삼위일체가 아버지의 군주체제로 회귀 되어, 결국 일신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판넨베르크는 영의 개념과 아버지의 군주국 이론을 제 시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세 신적 인격들은 영 혹은 신성을 드러내는 한에 서 하나가 되고, 아버지의 군주국은 내재적 삼위일체에서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 즉 삼위의 사역에 의해 유지되고 완성된다. 이렇게 되면, 삼위일체의 관계와 삶은 세 인격들의 상호의존 혹은 상호 헌신으 로 유지된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의 상호의존을 통한 사역으로 아버지 의 군주체제가 보존되고 완성되기 때문에, 삼위일체가 일신론으로 환 원될 가능성이 차단된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크의 이론이 어느 정 도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주제어 위르겐 몰트만, 사회적 삼위일체론, 사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군주국

Abstract

A Critical Examination of Moltmann’s Sociological Trinity: From Pannenberg’s Perspective

Choi, Seung-Tae Lecturer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valuate Moltmann’s sociological trinity from Pannenberg’s perspective. In the Christian tradition, the inner trinity and the economic trinity have been separated. By this separation, traditional theology has wanted to represent that God is transcendent and essentially different from the creation. This separation has also been shown by distinguishing De Deo Uno and De Deo Trino. For when the divine three persons are not united, the doctrine of God might fall into the theory of three gods. This is emphasized by the substance-trinity and the subject-trinity. However, Jurgen Moltmann argues that if the trinity is expressed by substance or subject, the trinity might fall into an abstract monotheism because the three-ness will return to the oneness. Then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loses its identity. So Moltmann says that the unity of the three divine persons should not depend on substance or subject. Rather he understands the unity as the perichoresis among them. Through this perichoresis, he asserts that the trinity becomes a community based on the fellowship of love among the three divine persons. And since love is always tending toward others, the trinitarian community is not closed, but opened to the world. In this sense, the trinity can be called an idealistic model of communion for all kinds of community on earth. This may be Moltmann’s contribution for the trinitarian theology. In spite of this, Moltmann distinguishes between the Father’s monarchy and the life of the trinity, and he says that the relations of the trinity depend on the monarchy of the Father, while the life of the trinity is accomplished by the perichoresis among the three persons. However, in this case, Pannenberg says that the trinity finally returns to the monarchy of God. Then the trinity will be reduced to monotheism. In order to solve this problem, Pannenberg suggests the concept of “spirit” or “deity” and the theory of the monachy of the Father. According to Pannenberg, when the concept of spirit and the Father’s monachy apply to the trinity, the three divine persons become one only by expressing the spirit, and the Father’s monarchy is maintained and fulfilled by the commitment of the Son and ths Spirit. So Pannenberg asserts that the trinity will not be reduced to monotheism. Thus Pannenberg’s trinity seems to be a good compliment for Moltmann’s one.

Keywords Jurgen Moltmann, Sociological Trinity, Communion, Wolfhart Pannenberg, Monarchy ∙

투고접수일: 2020년 03월 31일 ∙ 심사(수정)일: 2020년 05월 09일 ∙ 게재확정일: 2020년 05월 18일

한국조직신학논총 제59집(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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