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며,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는 사실 그리고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신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간주하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나의 심령 속에 복음으로 역사하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죄의 용서, 영원한 의와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어진다는 확고한 신뢰이다.”1
하나님은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런 한에서 신앙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과학적 사고의 등장과 함께 기독교 신앙은 교회와 개인의 사적 담론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발전되었고, 인간의 존재물음은 철학의 영역에 넘겨졌다. 가령 기독교 신앙은 진리 주장에 있어서, 그 주장하는 바를 독단적으로 단언할 뿐이며, 철학은 이와 달리 논리적 분석과 연관관계 안에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반성하고 존재 및 존재자에 관한 질문을 추구할 수 있다는 통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는 하나의 학문이며2, 그런 한에서 기독교는 일반 다른 학문과의 담론의 영역에서 설득력 있게 진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1Louis Berkhof, 조직신학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747.
2W. Pannenberg,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suhrkamp 1987, 299-300, 303-305. 38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인식의 토대 위에서 과학적 사고에 익숙하며 합리적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Glaube)? 라는 질문은 오늘의 우리에게 보편 타당한 방식으로 답변되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판넨베르그의 신앙(Glaube) 개념을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 논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 “신앙(Glaube)”과 “선취 또는 예기(Antizipation)” 두 개념의 상호 관련성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첫째, 시간 및 역사에 대한 이해를 미래와의 관련성 속에서 규명할 것이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시간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며,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 토대 위에서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 대한 이해가 선취적 사유형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진술할 것이다.
둘째, 철학적 사유의 형식들에 대한 판넨베르그의 비판을 따라, 철학의 반성과 사유 역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말하는 개념(Begriff)이 아닌, 선취 (또는 예기, Antizipation)의 형식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논할 것이다.
셋째, 신앙(Glaube)의 행위는 선취적이며, 그런 한에서 존재론적 사유형식이라는 사실을 다룰 것이다.
신앙과 지식의 공통적 특징을 갖고 있다.
신앙은 신뢰에 상응하는 것으로, 신뢰하는 신앙은 선취적이다.
신앙은 신앙적 결단에 기초한 주관적이며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하나의 사유의 형식이다.
1. 시간과 선취(Antizipation)
1.1. 시간, 우연 그리고 미래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앙’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있으며, 선취적이다. ‘신앙’(Glaube)과 ‘선취’(Antizipation)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서 판넨베르그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시간과 영원은 이원적이지 않으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는 시간을 과거의 결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영원에, 그리고 현재를 미래에 귀속시킨다. 시간은 영원에 속한 것이다.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영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시간 안에서 나누어진 모든 것은 영원 안에서 동시적이다.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계신다. 그러나 영원은 시간 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시며, 미래 자체이시다. 그러나 사건들은 미래로부터 나와서 세계 속에 등장한다. 그는 피조물들의 존재하는 각각의 장소에 창조적으로 현존하신다.3 일련의 사건들을 의미하는 역사는 통일성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역사의 통일성은 시간 속에 놓여있다. 이 시간은 미래로부터 온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시간 그리고 역사가 미래와 관계하는가? 시간 및 역사와 미래의 관련성을 논하기 위해서 판넨베르그는 우연성(Kontingenz)을 중요개념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은 시간(Zeit)을 규정한다. 여기서 시간은 우연적 사건(Zufall)과 상관개념이다. 우연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우연적인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 모든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4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우연은 미래와 관련한다.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의 우연은 미래로부터 발원한다. 우리는 사건의 우연성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사건들은 늘 새롭게 그리고 우연하게 미래로부터 튀어올라, 우리의 삶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를 규정한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것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 한에서 하나님은 미래의 힘이다: “오직 미래를 소유한 자가 그리고 미래를 결정하는 자만이 힘(Macht)을 소유한다.”5 하나님은 미래의 힘으로서 현재와 과거와 관계하며 이 둘을 규정한다. 우연한 사건들은 미래로부터 발원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 나타나며, 모든 유한한 사건들을 포괄하고 넘어선다. 하나님은 현재하는 모든 것에 그들의 고유한 미래를 부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결정될, 그러나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는 그것의 완성 또는 실패라는 두 가지 가능성 때문에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판넨베르그는 현존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사건들의 우연성에서 나타나는 모호성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오히려 미래의 모호성은 현존의 완전성이 오직 영원, 곧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을 지시한다고 말한다.6 미래, 곧 하나님으로부터 사건의 우연성이 나타난다.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결정적인 의미는 역사의 과정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최종적 미래를 통해서 결정된다. 미래3W. Pannenberg, Beiträge zur Systematischen Theologie Ⅱ, Göttingen, 2000, 38, 49-50. 4Ibid., 80. 5W. Pannenberg, Theologie und Reich Gottes, Gütersloher, 1971, 12. 6W. Pannenberg,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Göttingen, 1988, 63-64.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39는 최종적 의미,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을 결정한다. 그러나 각각의 존재자들은 그들의 현재의 순간들 속에서 오직 그들 자신의 통일성을 결정적으로 구성하는 미래에 대한 선취를 통해서 그 자신 안에 어느 정도의 통일성을 갖는다.7
1.2. 역사와 계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과 힘을 드러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이다. 역사비평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단순한 이야기(Erzählung)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학문적인 담론의 장에서 숙고할 수 없는 것, 즉 비역사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판넨베르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며,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의 사실성(Faktizität)을 강조한다. 성서텍스트와 그 보고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진술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8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와 관계하는가?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역사적 행동을 통해 그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역사와 관계한다.9 판넨베르그는 그의 초기 작품인 “계시론에 관한 교의학적 테제들”에서 하나님을 역사행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간접적(indirekt)으로 계시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이해를 소급한다. 하나님은 역사적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항상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해하였다. 결정적인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홍해에서의 구원행위를 통해서 야훼의 신성과 힘이 이스라엘에게 증명되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 또는 행위들의 총체이다.10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 또는 자신을 인간이 경험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또한 판넨베르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계시는 보편적 성격을 갖는다. 이 사상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포로기 이후에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역사가 일련의 전체 사건들로 확장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성에 일치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닌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11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이며, 하나님의 역사계시는 보편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 자신을 계시하는 역사와 인간이 그 주체가 되는 역사를 동일한 역사로 볼 수 있는가? 판넨베르그는 행위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관련성을 규명한다. 하나님의 행동은 유한한 존재를 창조하는 것과 이를 완성하는 것에 있다. 즉 하나님을 자신을 세상의 창조자로 계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달리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결합되어 있다. 두 역사는 하나의 동일한 역사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으로서 그 자신을 통해 (durch sich selbst)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von sich her) 존재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의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실현하신다(Selbstverwriklichung 7W. Pannenberg, Theologie und Reich Gottes, 12, 18, 20-21; 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Göttingen, 1967, 144-145, 147. 8W. Pannenberg, STh Ⅰ, 252-254. 9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91-95. 10W. Pannenberg, STh Ⅰ, 252. 11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95. 40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Gottes). 하나님은 자기실현의 대상이며 동시에 주체이다. 이러한 자기실현은 유한한 인간의 행동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의 시작점에서 그 자신의 행동의 결과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과 인간의 추구는 하나님의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조우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할 때, 영원한 본성 안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유한한 모든 사건들을 포괄하며, 모든 사건은 하나님을 통해 그의 자기실현의 과정에 편입된다.12 즉 하나님은 역사의 총괄개념이 된다.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사건을 미래 속에서 고대하였다. 역사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은 역사의 끝, 미래에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끝에서 드러난다: “계시는 계시하는 역사의 시작점이 아닌 끝에서 일어난다.”13 역사의 끝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기계시, 곧 결정적인 구원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어떤 개별적인 사건들이 아닌, 주어진 모든 사건들과 관련된다. 역사의 끝은 현재 속에 숨어있는 모든 사건들은 드러나게 만든다.14 판넨베르그는 역사 또는 현실성 전체를 선취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우리의 경험에서 현실성 전체는 종결되지 않은 되어감의 과정(Werdeprozess) 속에 있다. 그러므로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의 합은 아직 전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성은 아직 전체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개별적인 것들은 비로소 그것이 속한 전체와의 연관성 안에서 그 자신의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15 아직 완결되지 않은 전체 현실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넘어, 모든 현실성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완성의 의미전체(Sinntotalität)를 선취하는 것으로서만 주어진다. 시간은 완결되지 않은 채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 있으며, 동시에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 계시하는 분으로 그의 역사계시는 보편적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총괄개념이다: “힘과 무력함의 긴장에서, 아들의 죽음 안에서 동시에 성령을 의한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그의 피조물의 고난을 짊어지신다.”16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의 끝에 완성된다. 완결되지 않은 현실성 전체는 모든 존재들의 완성과 그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의미전체로서 선취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역사, 현실성 전체에 대한 이해는 선취적 사유구조를 필요로 한다.
1.3. 미래의 선취로서의 예수
하나님의 계시는 나사렛 예수의 운명 속에서 완성되었다. 예수의 운명은 모든 사건들의 종말을 선취하는 사건이다. 모든 역사의 종말은 예수의 운명 속에서 앞서, 선취로서 일어났다: “오직 이 토대 위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의 운명 속에서 그 자신을 하나의 참된 신으로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17 이와 유사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야훼의 역사적 자기증명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행위들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구원은 항상 그리고 다시 잠정적으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야훼의 자기증명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새로운 그12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Göttingen, 1980, 142-143. 13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95. 14Ibid., 95-98. 15W. Pannenberg, Grundlagen der Theologie – ein Diskurs, W. Kohlhammer, 1974, 36. 16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Goettingen, 1980, 128. 17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98.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41의 역사행동에 의해서 극복되었고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끝이 야훼의 궁극적인 자기증명을 가져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수의 운명 속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드러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유일한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다. 그런 한에서 하나님의 더 이상의 다른 증명은 필요하지 않다: “그는(하나님은) 그 자신을 더 이상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속에서 이미 자신을 계시한 분으로 드러낸다.”18 예수의 운명 속에서 역사의 종국이 이미 앞서 일어났으며, 종말은 예수 안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은 역사의 끝, 미래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하실 것이다. 그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은 이미 종말 사건이다.19 미래의 선취로서의 예수는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도 언급된다. 하나님의 자기실현은 창조의 완성과 피조물을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자기실현의 과정은 성령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 속에서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관계에 상응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발견되며, 예수의 복음과 역사 속에서 결정적으로 발견된다. 인간의 행동을 통해서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함으로써, 모든 사물은 하나님의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 Gottes)의 과정을 통해서 창조적으로 구성되며 규정된다. 하나님의 자기실현은 이미 예수의 인격 속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실현을 향하여 활동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총괄되어있다. 즉 예수의 역사 속에서 모든 창조 세계 안에서 신적 자기실현의 계기로 활동하는 것이 실현되었다. 이 전제 하에서 판넨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수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자기실현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20 예수에게서 모든 사건의 종말이 앞서 일어났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예수의 부름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타났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 통치의 미래는 이미 현재를 규정하며 현재가 되었다. 미래는 여전히 오지 않았으나, 현재와의 차이 속에서 지금 이미 현재 작용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예수 안에서 현재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와 구분된다. 예수의 신성은 아버지의 신성과 다르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구분하는 것 안에 그의 신성, 곧 아버지의 아들의 신성이 기초되어 있다. 아들의 아버지와의 차이, 곧 예수의 현재와 아버지의 미래의 차이는 인간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불러 모으라는 아버지의 보냄에 대한 자기구분과 자기헌신 안에서 수행되었다. 예수의 자기구분과 부활을 통해서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선취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그것의 미래성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로부터 오며,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출현이다.21
2. 철학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선취
앞 장에서는 판넨베르그의 현실성 이해가 선취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시간과 역사는 우연성 개념을 통해 미래와 매개된다. 예수가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예수는 미래의 선취로 간주되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판넨베르그는 철학적 반성을 선취(Antizipation) 개념과 연결시킨다: “철학의 고유한 사유형식은 개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취라고 할 18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106. 19Ibid., 103-106. 20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143. 21W. Pannenberg, Theologie und Reich Gottes, 84, 86. 42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수 있다.”22
2.1.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서 “현실태”(energeia)와 “완성태”(entelecheia) 개념
하이데거와는 다르게 판넨베르그는 현실성을 전체로부터(vom Ganzen her), 곧 미래로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의 통일성은 역사과정으로서 가능하고 또한 역사의 끝으로부터만 인식될 수 있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선취개념은 철학적 반성에도 해당된다. 이를 위해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energeia)와 완성태(entelecheia)의 개념을 다루고자 한다. 형이상학, 제일철학은 존재의 첫 원인들과 원리들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eidos)를 현실태로 동시에 가능태로 규정한다. 완성태는 목적을 그 자체 안에 소유한 것, 곧 완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도달된 완성의 상태를 일컫는다. 현실태는 실현의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실제가 되어가는 움직임과 관련한다. 다시 말해서 현실태는 목적을 향해 되어감(Werden)을 의미한다. 그러나 완성태는 목적에 도달한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동시에 방식을 의미한다. 이 방식은 목적이 목적을 향한 움직임 안에서 현재하고 작용하는 방식이다. 완성태는 되어감의 과정 속에서도 현재한다. 다시 말해서 완성태는 존재들과 본성들의 현존의 형식이다. 이것으로부터 판넨베르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는 완성태의 현재는 선취적 구조를 갖는다. 만약 목적(teleos)이 동시에 현상(eidos)의 현실성이라면, 되어감의 과정에서 현재하는 완성태(entelecheia)는 사 물의 본성의 현재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 사물은 비로소 되어감의 끝에서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 되어감의 과 정 속에서 완성태(entelecheia)의 현재는 하나의 선취적 구조를 가지며, 그것의 완성된 현실화 이전에 형상(eidos) 에 대한 하나의 선취적 현실을 지시한다.23 완성태가 사물의 본성이 현재하는 형식인 한에서, entelecheia는 energeia와 동일하다. 아리스토테레스는 사물의 본성을 무시간성과 무변화성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사물의 본성의 형식을 되어감의 끝으로부터 소급하여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넨베르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개념, 특히 현실태와 완성태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이론적 토대를 위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되어감 속에 있는 사물의 본성은 그것의 끝으로부터 거꾸로 소급하여(rückwirkend) 구성될 수 있다. 여기서 ‘시간’과 ‘되어감’은 사물의 본성을 구성하는 매개가 된다. 다시 말해서, 되어감 속에 있는 존재는 목적 (Ziel)으로부터 - 역사의 끝으로부터 그리고 영원으로부터 – 거꾸로 소급하는 방식으로, 즉 현실의 완성을 선취하는 방식 안에서 본성에 도달할 수 있다.24
2.2. 칸트의 “선취”(Antizipation)와 “통각”(Apperzeption) 개념
선취개념은 칸트의 사상에서도 발견된다. 판넨베르그는 선험적인 오성의 종합적 원리들이 선취적 성격을 갖는다는 칸트의 진술에 주목한다: “내가 경험적 인식에 속하는 것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규정할 22W. Pannenberg,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68. 23 Ibid., 77. 24Ibid., 77-79.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43수 있는 것을 통해서, 모든 인식은 선취라 말할 수 있다.”25 칸트의 선험적인 오성개념은 선험적 성격을 갖는다. 칸트는 모든 인식을 인식의 ‘선취’로 규정하였다. 판넨베르그는 그러나 칸트가 오성의 기능과 반성의 형식을 위해 그에 의해 주장된 선험성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우선 통각(Apperzeption)에 대해서 다루어보자. 인식에서 선험적인 이성의 종합의 원리가 관건이며, 통각(Apperzeption)은, 오성과 이성을 포괄하는 인식의 능력으로서, 모든 인식, 모든 관계, 모든 종합의 근본적인 전제조건이다. 통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즉 나에 대한 표상이다. 감각적인 통각과 초월적이고 순수한 통각은 구분된다. 전자는 내적 감각이며, 후자는 오성의 인식이다. 초월적 통각은 인식의 능력으로, 특별히 오성과 이성을 포괄하는 자기인식의 능력이다. 순수한 통각의 단일성으로부터 인식의 선험적인 원리들이 나타난다. 즉, 초월적인 통각은 자기인식, 즉 모든 표상하기와 모든 개념들을 이끌고 생각하는 나의 인식이다: “생각하는 나는 모든 나의 표상들을 이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서 표상되는 것은 결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 생각하는 나에 기초한 초월적인 또는 순수한 통각을 통해서 반성 속에서 주어진 모든 다양한 것들은 연결되고 연합된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다양한 것들의 경험이 실제로 생각하는 나에 기초한, 순수한 통각의 토대 위에서 통일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창조적인 상상은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생각하는 나에 기초한 통각에 의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상상은 단계별로 확장되는 반성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성의 구조를 넘어선다. 생산적 상상력은 여기서 인간의 경험구조와 관련한다. 다시 말해서 초월적 통각은 감각적인 인상들의 주어진 다양함과 결합되어, 인간의 경험구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상상의 활동성은 항상 다시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이는 하나의 다른 차원, 즉 생각하는 나를 넘어서는 차원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다른 차원, 즉 미래를 필요로 한다. 미래는 항상 다시 새로운 것을 일으킨다. 이로부터 판넨베르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칸트의 종합적 상상의 기획은 본성의 미래에 대한 선취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다.26 현실의 완성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통해서 접근가능하다는 판넨베르그의 견해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3. 하이데거의 “이해”(Verstehen)와 “존재”(Sein)
하이데거의 존재이해는 선취와 관련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작품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질문을 다룬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 곧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이다.27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문으로 삼으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점에서 인간을 현존재(Dasein)라 칭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이해(Verstehen)는 현존의 가능성들에 관한 기획으로서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한다. 현존재는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가능성을 기획한다. 즉 인간은 가능성에의 존재(Seinkönnen)이다.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미래를 향한 존재이기도 하다. 존재는 현존재의 자신의 죽음의 미래를 향한 최후의 가능성들에 관한 기획 안에 정초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미래에로 미리 달려감을 통해서 동시에 고유한 죽음의 미래로부터 드러난다.28 만약 완전한 가능성에의 존재(Seinkönnen)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미리 달려감 안에 놓여 있다면, 미리 취함 또는 선취(Vorwegnahme)와 이해(Verstehen)는 함께 일어난다. 즉 이해는 미리 달려감과 25I. Kant, KrV A 165 / B 208. 26W. Pannenberg,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68-69, 73. 27M.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2006, 147. 28Ibid., 11-12, 52, 148, 152. 44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동일한 것이다. 현존재의 완성은 죽음의 가능성을 향해 미리 달려감 안에서, 미리 달려가는 결단 안에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 앞서 달려가는 ‘이해’를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의 방식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현존재의 의미는 시간성 속에 있다: “앞서 달려감은 현존재를 실제적으로 미래적으로 만든다.” 즉 현존의 완전성은 죽음 앞에서 완성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미래와의 연관성 안에서 시간적으로 구조화하였으며, 판넨베르그는 이를 자신의 신학에 수용한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하이데거가 미래를 현존(Dasein)으로 축소시킨 것과 죽음을 현존의 고유한 가능성으로 본 것을 비판한다.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이다. 그러나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현존재의 죽음은 죽음 이전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삶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현존재를 완전성으로 인도할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은 현존재를 중단시킨다. 하이데거의 존재이해에서 신학적으로 숙고할 것은 그에게 있어서 이해(Verstehen)가 항상 이미 이해 되어지는 것의 선이해(Vorverständnis)를 통해서 그리고 해석을 이끄는 선개념(Vorgriff)을 통해서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이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현존재의 완성은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감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선취의 행위 안에서 신앙을 통해서, 신적 영원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매개된다. 죽음이 아닌, 하나님만이 인간의 현존을 완성으로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존재의 완성, 곧 구원을 미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시간성에서 미래의 우선성에 상응하는 미리 취함(Vorwegnahme)를 통해서만”29, 즉 선취(Antizipation)를 통해서만 일어난다. 현존재의 존재, 존재의 의미는 미래로부터, 곧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 선취는 그러므로 존재물음을 추구하는 철학의 사유형식으로 불가피하다: “형이상학의 고유한 사유형식은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의미에서 말하는 ‘개념’(Begriff)이라기 보다는 선취가 되어야 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철학의 개념 자체는 선취로서 진술되어야 한다.”30
3. 선취와 신앙: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
신앙이란 무엇인가?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앙은 신뢰의 행위이다.
신앙은 신뢰로서만 가능하다. 신뢰란 그 스스로 영속하는 자 안에 자신을 고정하는 것이다.31
우리가 항상 신뢰하는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가 신뢰를 보내는 자를 의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긴다, 우리는 신뢰를 통해 우리의 현존재를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에게 의존적이 되게 된다.32 신앙에 대한 히브리어의 의미는 자신을 고정하여 두는 것(sich festmachen)을 의미하며, 진리(emet)와 신앙(he’emin)은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는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이 하나님께 그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 자신을 하나님 안에 고정시킬 때, 진리, 곧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속을 선사한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뢰는 신앙의 본래적 구조를 구성한다.33 신앙이 신뢰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루터에게서도 발견된다: 신자는 신앙 안에서 자기 자신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extra se in Christo) 산다. 신뢰로 특징지어지는 신앙을 언급할 때, 인간의 본성을 숙고하는 것은 유의미하다. 신뢰는 인간의 근29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146. 30W. Pannenberg, Metaphysik und Gottesgedanke, 68. 31W. Pannenberg, STh Ⅲ, 196. 32W. Pannenberg,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Göttingen 2011, 68. 33Ibid., 68.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45본적인 존재구조를 구성한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세계개방성(Weltoffenheit)은 인간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34 이러한 점에서 신뢰 그리고 신앙은 인간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세계개방성’에 놓여 있다.35 여기서 세계개방성의 핵심은 의존성(Angewisenheit)이다.36 인간은 개방되어 있고, 그는 자기 자신 바깥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의존하는 미지의 것과 오직 신뢰를 통해서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37 세계개방성은 인간에게 미래의 미래성을 위한 시야를 열어준다.38 인간의 존재구조를 세계개방성(Weltoffenheit) 또는 의존성에 기반한 신뢰로 보는 판넨베르그의 인간이해는 판넨베르그의 신앙개념을 존재론적 사유구조로 보는 필자의 주장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각각의 경험을 넘어서, 각각의 주어진 상황을 항상 넘어서 항상 개방된 존재이다. 그는 또한 세계를 넘어 개방된 존재이다.”39 인간은 다른 사람들 또는 사물들과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 개방된 존재구조 안에서 인간은 세상을 경험하는 우회로를 통해서 그 자신을 사물들과 구분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고, 자신을 그 자신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개방성을 본성으로 갖는 인간은 자기초월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인 존재구조는 자기동일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을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자기신뢰의 방향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경우, 자기 자신과 비동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판넨베르그는 오직 신앙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신뢰의 행위 안에서의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신앙이 미래와 관계하는 한에서, 신앙은 인간의 불특정한 미래를 겨냥하는 인간의 본성과 그 안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충동과 갈망을 포괄한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앙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 또는 선파악(Vorgriff)의 형태를 취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정향되어 있다. 진리는 미래에서 비로소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러므로 진리는 미래에 대한 선파악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신뢰하는 선파악은 신앙의 특징을 나타낸다.”40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세계의 미종결성(Unabgeschlossenheit)과 관련된다. 현실성 전체가 완성되는 종말, 하나님의 완성된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재 활동하신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오직 현실성의 전체성에 대한 주관적 선취 안에서, 모든 개별적 경험 안에 놓여있는 의미 전체성에 관한 기획들 안에서, 주어진다. 여기서 기획들은 그 자체로 역사적이다.”41 신앙의 구조는 이에 상응한다: 진리는 “오로지 아직 오지 않은 나타남에 대한 신뢰로서의 선취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을 통해서!”42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이해는 선취적으로만 주어질 수 있으며, 신앙은 이에 상응하는 존재론적 사유형식이다. 판넨베르그의 선취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존재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다. 판넨베르그를 따라 ‘나타남’(Erscheinen), ‘현존’(Dasein) 그리고 ‘존재’(Sein)의 세 개념의 비교를 34W. Pannenberg, Was ist der Mensch?, Göttingen 1962, 6. 35Ibid., 8-10. 36Ibid., 23. 37Ibid., 23. 38Ibid., 31. 39Ibid., 10. 40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236. 41W. Pannenberg, Wissenschaftstheorie und Theologie, Frankfurt am Main 1987, 312. 42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206. 46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통해서 판넨베르그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자. 판넨베르그는 ‘나타남’, ‘현존’ 그리고 ‘존재’의 개념을 서로 귀속된 것으로 규정한다. 플라톤 이후 현상과 존재는 분리되어 이해되었다. 현상은 이데아로부터 분리된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는 것으로, 존재는 이데아, 곧 그 자체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그리고 변함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헤겔은 본성과 현상을 상호관련된 것으로 파악하였으나, 본성을 존재에 대립시킴으로써 본성에 맞서 현상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사유하도록 이끌었다. ‘나타남’(Erscheinen), ‘현존’(Dasein) 그리고 ‘본성’(Sein)은 서로 귀속되어 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나타난다(etwas erscheint). 나타난 현상(es scheint bei mir und es ist da)은 존재(Sein)와 다르다. 그러나 현상(또는 현존재)은 본성을 지시한다. 나타난 어떤 것은 현상의 사건을 넘어선다. 존재는 현상으로터 이해할 수 있다. 현상은 그러나, 존재와는 상이한 것으로서, 존재를 지시한다. 여기서 ‘나타남’, ‘현존’ 그리고 ‘존재’의 관계는 시간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만약 현상을 나타난 것의 본성적 미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현상에 대한 해석은 오직 미래에 대한 선개념 또는 선취 안에서만 가능하다.43 신앙을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 논증하고자 할 때,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인간의 인식에 도달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신앙이 계시인식을 매개하는가, 신앙은 지식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신앙(fiducia)은 지식(notitia)과 상호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 사유에서 지식은 진리와의 관계를 의미한다. 신앙 역시 진리와 관계한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하는 하나의 형식이다.”44 판넨베르그는 ‘신앙’과 ‘지식’의 공통된 특성을 선취(Vorgriff)로 파악한다: ”신뢰는 지식이 장래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형성된다 - 결과에 대한 선취(Vorgriff)는 신앙의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도 고유한 것이다.“45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의 내용으로서의 ‘지식’은 ‘신앙’의 기초를 이루며, ‘지식’은 ‘신뢰’에 선행한다. ‘신앙’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을 뜻하며, 그런 한에서 ‘신뢰’ 와 ‘신앙’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판넨베르그는 P. Althaus의 ‘신앙’의 이해를 비판한다. Althaus에 따르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의 기초를 이룬다. 여기서 지식은 신앙과 함께 시작된다. 이 관점은 신앙의 내용의 확실성이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빌미를 제공한다. 그러나 신앙은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신앙은 그 자신의 내용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인식(Wahrnehmung)에 관여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notitia)과 동의(assensus)는 신뢰(fiducia)의 기초를 이룬다.46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은 신앙의 토대가 된다. 신앙(fiducia)은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notitia)과 동의(assensus)에 근거한다.47 신뢰(fiducia)는 그 안에 ‘참으로 간주함’(ein Fürwahrhalten)의 의미를 포함한다. 신앙은 복음에 대한 동의(assensus)이다. 클레멘스 역시 신앙을 동의로 규정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지식’이 진리 주장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식’ 역시 ‘동의’를 포함한다.48 신앙과 지식이 선취(Vorgriff)라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43W. Pannenberg, Theologie und Reich Gottes, 79-80, 86-90. 44W. Pannenberg, STh Ⅲ, 156. 45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227. 46Ibid., 223-230. 47W. Pannenberg, Offenbarung als Geschichte, 101. 48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240;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A, 822. [발표3] 안유경, “판넨베르그의 선취개념과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 제62차 신진학자학술발표회 47때, 신앙은 하나의 지식 또는 인식의 형식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앙과 지식은 긴장 관계 속에서 놓여있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기초한다. 여기서 역사의 의미가 관건이 된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역사의 의미는 나에 관계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앙은 그 사건에 의해 사로잡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시에 대한 지식은 신뢰하는 신앙을 통해서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획득한다.49
49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229-230,
인간은 계시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동시에 사건에 사로잡힌 신앙을 통해서, 구원에 참여한다. 신앙을 자기 자신에 관한 인식의 하나의 형태, 곧 존재론적 사유형식으로서 논하기 위해서, 판넨베르그를 따라 신앙(Glaube)을 확실성(Gewissheit)과 의식(또는 양심, Gewissen)의 개념을 비교하고자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을 ‘확실성’으로 간주하였다. 판넨베르그는 “사람은 확실성 안에서, 완전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적인, 그리고 그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안다”50고 말한다.
신앙과 확실성은 서로 결부되어 있다. 헤겔 역시 신앙과 확실성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절대정신의 주관적 인식은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서의 과정이다. 그 과정의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통일은 정신의 확증 안에 있는 객관적 진리에 관한 확실성으로서의 신앙이다.”51
구원은 신앙을 통해서 가능하며, 신앙은 확실성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구원의 현재하는 보증으로서 확실성의 토대가 된다.52
신앙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신앙을 일으키는 성령의 활동과 작용은 다루지 않을 것이다. 확실성(Gewissheit)과 의식(Gewissen)은 현실성 전체와 관련한다.
‘확실성’은 개별적 동의들에 관한 성찰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개별적 경험의 내용을 전체경험과 연결시킨다. ‘의식’에서는 존재의 형성되어감, 구체적으로는 자기 동일성의 문제가 관건이 된다. 그러나 ‘신앙’은 이 두 영역을 넘어선다.
‘확실성’과 ‘의식’ 속에서 현재하는 전체에 관한 지식은 미래에서 비로소 드러나며, ‘신앙’은 전체 현실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님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과 소유를 넘어 자기 인식 안에서 드러난 최종적인 것을 향한다.”53
신앙은 자기인식을 매개한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안에서 경험되는 비동일성은 극복되어야 한다. 죄의 극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죄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죄인식은 자기인식(Selbstbewusstsein)의 출발지이다. 죄에 대한 인식, 곧 자기인식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죄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죄를 인식하는 내면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 칭하는 것에 달려있다. 칭의는 죄의 용서에 대한 수용을 통해 가능하다. 즉 신앙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롬 10:9).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현으로서, 신자가 신앙을 통해서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예수의 복음과 역사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통해서 실현된다. 즉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경건하며 의로운 사람으로 칭하는 것에 의존되어 있다.54
50Ibid., 235.
51G. W. F. Hegel,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 555.
52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Ⅰ, 234, 236.
53W. Pannenberg, Grun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Ⅱ, 263.
54W. Pannenberg, Anthropologie in theologischer Perspektive, 271-300.
삶의 지속과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신뢰의 행위 안에서, 신앙은 의식 안에서 현재하는 존재 전체에 관한,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이며, 그런 한에서 존재론적 사유형식이다.
신앙은 미래를 향해 개방되어 있으며, 미래의 완성된 존재를 오늘 선취한다.
4. 결론
신앙은 인간의 구원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판넨베르그의 선취로서의 신앙에 대한 이해는 신앙이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실존적 질문에 보다 명쾌한 답을 주는 듯이 보인다.
신앙은 단순한 주관적 결단이 아닌,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계시의 사건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나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때 그의 역사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역사의 완성으로서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래는 시간을 뚫고 시간 속으로 들어오며 현재를 규정하며 현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시간이 영원에 속하여 있듯이, 현재는 미래로부터 오며 인간은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 의존되어 삶의 구원과 지속을 누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판넨베르그가 철학의 사유방식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의 반성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개념 또는 창조적인 상상력은 새로운 종합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지 않으며,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과정과 역동성을 반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것을 일으키신다.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우연적 사건들은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주어진 인간의 본성, 세계개방성에 대한 숙고는 신앙을 존재론적 사유구조로 파악하는 것을 도우며, 인간의 하나님 연관성을 암시한다.
인간은 미지의 어떤 것을 의존하는 신뢰를 통해서만 그 의지하고자 하는 것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행위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완전하게 드러내시는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미래의 하나님은 현실성 전체를 구성하며 완성할 것이지만, 현실 경험의 역사성 그리고 그 역사의 미완결성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의 완성, 곧 구원은 신뢰하는 신앙, 곧 선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선취하는 사유형식으로서의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는 개방된다.
그런 한에서 신앙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 간격을 매개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틀거리로써, 현실성 전체, 즉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계를 연결하는 기능을 하며, 신앙인은 미래에 드러나게 될 현존의 완전함을 오늘 선취하게 된다.
한국조직신학회 제62차 신진학자 학술발표회(2021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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