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초록]
존 폴킹혼은 과학-신학자들 중 한 명이다. 이른바 자연과학을 전문으 로 하는 자연과학자였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자로 활동한 사람인 것 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폴킹혼은 템플턴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폴킹혼은 다른 과학신학자들과는 달리 현재적인 상태에서는 만유재신론 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종말론적인 상태에서는 만유재신론 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이런 폴킹혼의 입장은 만유재신론을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몰트만과는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폴킹혼은 몰트 만의 자기제한으로서의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주장에 영향을 받아 케노시스 창조론을 주장하고 있다.
케노시스라고 하는 개념은 기독론에서 논 의되는 용어이다.
신성의 자기 비움이라고 하는 케노시스 기독론과 관련 한 논란이 존재하는데 이런 기독론의 용어를 창조론에 빌어쓰고 있는 것 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고난의 문제에 대한 해결 때문 인 것으로 사료된다.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를 제한하심으로 세상을 창조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폴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은 몰트만의 케노시스 창조론 보다는 온건한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논리적 함축은 종 말론적인 상태에서 만유재신론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이미 창조론 가운데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이땅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전지하심 을 제한하였던 열린 유신론의 주장과도 비슷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주제어: 창조론, 폴킹혼, 케노시스, 기독론, 열린 유신론, 몰트만]
Ⅰ. 문제제기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2021)은 1968년부터 캠브리지 대 학의 수리물리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1979년에 사임하고 신학공부를 마친 후 1982년 영국 성공회의 사제가 되었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캠브리 지의 퀸즈 칼리지의 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폴킹혼은 이안 바버(Ian Barbour, 1923-2013), 아서 피코크(Arthur Peacocke, 1924-2006)와 더불 어 이른바 과학 신학자(scientist-theologian)로 알려져 있다.2)
2) John Polkinghorne, Scientists as Theologians: A Comparison of the Writings of Ian Barbour, Arthur Peacocke and John Polkinghorne (London: SPCK, 1996), 33. 이들은 각 각 1999년과 2001년 그리고 2002년에 차례로 템플턴 상을 받았다. 템플턴 상은 1973년 테레사 수녀를 시작으로 1992년 한경직 목사님 등이 수여받았는데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찰력, 발견, 실용적인 작업을 통해 삶의 영적 차원을 확인하는 데 탁월한 기여”(outstanding contributions in affirming life’s spiritual dimension, whether through insight, discovery, or practical works)를 한 사람들에게 수여된다. 그래서인지 자연과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주도 한 사람들이 유독 많이 수상자 명단에 들어가 있다. 최근에는 앨빈 플란팅가(2017년)와 프랜시스 콜 린스(2020년), 제인 구달(2021년) 등이 이 상을 받았다.
폴킹혼은 1996년 자신과 이안 바버 그리고 아서 피코크를 비교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에서 “신학자들로서의 과학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과학 신학자들은 테드 피터스(Ted Peters, 1941- )가 “신학과 자연과 학”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모험적인 기획, 자연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다루 는 일에 헌신하였다.3)
이들 과학 신학자 가운데 이안 바버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에 경도된 신학적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아서 피코크는 과정신 학까지는 아니지만 모종의 만유재신론(panentheism)을 주장하는 입장이 다.4)
3) Ted Peters, “Theology and Natural Science,” David F. Ford, ed., The Modern Theologians: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in the Twentieth Century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7, 2판), 649. “Until a name comes along, we will refer to this new enterprise as ‘Theology and Natural Science.’”
4) 박찬호, “Critical Evaluation of Arthur Peacocke’s Theory of Divine Action,” 「개혁논총」19 (2011): 147-180. 이 논문에서는 범재신론과 만유재신론을 호환적으로 자유롭게 혼용한다.
이러한 만유재신론적 입장에 대해 폴킹혼은 비판적이다.
고전적 유 신론(classical theism)은 하나님의 내재에 비해 하나님의 초월성을 일방적 으로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 당시 주변의 이교 사회에 만연하였 던 범신론(pantheism)에 대한 반박이 그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래 서 생각하는 것에 따라서는 고전적 유신론에 하나님의 내재가 없는 듯 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폴킹혼은 그렇다고 해서 고전적인 유신론에 하나님의 내재에 대한 강조가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며 고전적인 유신 론에서 보다 충실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내재성의 언어들을 회복하고 발 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안 바버나 아서 피코크와는 달리 폴 킹혼은 고전적 유신론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지나친 강조를 하고 내 재성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적 유신론을 버려 야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폴킹혼은 “신적인 내재성에 대한 균형잡힌 정통적인 개념을 회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5)
이런 폴킹혼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유신론의 입장에서 수용 할 수 있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학위 논문에서 폴킹혼의 입장을 로날드 내쉬(Ronald H. Nash, 1936-2006)의 주장과 함께 건전한 입장으로 언급한 바 있다.6)
그런데 만유재신론에 대해 일정거리를 유지 하는 폴킹혼은 종말론에서는 만유재신론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전환한다.
“나는 현재 세계를 위한 하나의 신학적 실재로 (비록 하나님은 창조를 넘 어서시지만 창조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만유재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 하지만 나는 만유재신론을 앞으로 오는 세상을 위한 종말론적 운명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7)
5) Polkinghorne, Scientists as Theologians, 33.
6) Chan Ho Park, Transcendence and Spatiality of the Triune Creator (Peter Lang, 2005). 내쉬의 입장에 대해서는 Ronald H. Nash, 『현대의 철학적 신론』 (서울: 살림출판사, 2003)을 참조하라.
7) John Polkinghorne, The God of Hope and the End of the Worl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2), 114f. “새로운 창조에 의한 세계는 신적 실재에 범재신론적으로 참여함 으로써 최종적인 종말론적 성취가 이루어지는 영역일 것이다” [John Polkinghorne, 『과학으로 신 학하기』, 신익상 역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5), 241]. Polkinghorne, “종말론,” 73에서도 “나는 현재의 실재로서의 범신론을 수용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종말론적인 현실이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범신론은 만유재신론 또는 범재신론의 오역이 분명하다. Polkinghorne, The Faith of a Physicist: Reflections of a Bottom-Up Thinker (Augsburg: Fortress Press, 1996), 168에서도 “우리는 만유재신론을 현재의 실재는 아니지만 종말론적 성취에 있어서는 참되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졸고, “과학 신학자 존 폴킹혼의 종말론,” 「창조론오픈 포럼」 12/1, 52-60 참조하라.
폴킹혼을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감신대 이정배 교수였다.
그는 1998년 과학시대의 신론(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을 번역하였다.
2002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미하엘 벨커와 공저한 종 말론에 관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가 번역되었으며 2009년에는 SFC에서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과학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이 번역 출판되 었으며 역자는 우종학이었다.
같은 해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양자물리 학 그리고 기독교신학이라는 책이 함께 번역 출판되었으며 2015년에는 과학으로 신학하기(Theology in the Context of Science)가 번역 출판되었다.
논문을 통해 폴킹혼을 소개한 것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폴킹혼의 비 판적 실재주의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이 한국종교학회 종교연구에 2005년 김기석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한신대학의 전철 교수가 “존 폴킹혼의 active information 연구 - 신은 물리적 세계에 어떻 게 개입하는가?”와 “존 폴킹혼의 심신이론 연구”를 발표하였다.
2014년 에는 정일권에 의해 폴킹혼을 르네 지라르와 비교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빅뱅 우주론, 양자물리학, 그리고 문화의 기원-존 폴킹혼과 르네 지라르 이론의 빛으로”라는 논문이다.
그리고 2022년에는 박형국의 “폴킹혼과 맥 그래스의 자연신학에 대한 소고: <기포드 강연>을 중심으로”가 발표되었 고 2023년에는 백충현의 “삼위일체와 과학: 존 폴킹혼의 과학신학에서의 하나님 및 세계 이해”가 발표되었는데 폴킹혼의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 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폴킹혼은 존 템플턴 재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 한 여러 학자의 연구물을 2001년 The Work of Love: Creation as Kenosis 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서 출판하였다.8)
8) John Polkinghorne, ed.,『케노시스 창조이론: 신은 어떻게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는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이 책에는 이안 바버와 아서 피 코크, 그리고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의 논문도 수록되어 있 다.
폴킹혼은 이 책에 수록된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신적인 자기 비움으로서의 창조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 다.
이러한 폴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은 한 마디로 몰트만의 만유재신론 보다는 온건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의 설명과 유 사하다고 할 수 있다.
만유재신론이 가지는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이 흐려 지는 위험까지는 아니라 해도 상당 부분 하나님 쪽에서의 실재적인 자기 제한 또는 비움, 즉 케노시스가 존재하게 되어 이른바 고전적인 유신론에 서 주장하는 하나님의 자존성(aseity)이나 주권(lordship) 같은 속성은 상당 부분 훼손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케노시스 창조론의 출발점이 되는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해 살펴보고 폴킹혼의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 는 몰트만의 자기 제한으로서의 창조에 대해 살펴본다.
그런 다음 신적인 케노시스로서의 창조 개념에 대한 폴킹혼 자신의 견해를 살펴보고 비판 적인 평가를 내려 보고자 한다.
Ⅱ. 사상적 배경
케노시스 기독론은 케노시스 창조론의 사상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몰트만은 폴킹혼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으로서의 창조라고 하는 몰트만의 케노시스 창조론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케노시스 기독론
케노시스 기독론은 19세기 루터파 신학 안에 등장하였던 빌 2:6의 ‘자 기를 비어’라는 표현을 신성의 자기제한으로 이해하려는 주장을 지칭한 다.
여기에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동조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케노 시스 기독론에 대하여 개혁파에서는 ‘자기를 비어’라고 하는 것을 신성의 자기 제한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신성이 인성을 취하셔서 신인이 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 님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 였던 것이다.
결국 케노시스 기독론은 신성의 자기제한과 함께 참다운 인 성에 대한 부분도 타협하게 되어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일종의 슈퍼맨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 개혁파 신학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래서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 람 되심에 대한 것을 위협하는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하여 배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9)
도널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1940-2023)는 케노시스 이론에 대한 다섯 가지 비판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케노시스 기독론은 우주가 그리스도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10)
둘째, 케노시스 기독 론은 몇몇 옹호자들의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칼케돈의 기독론과 잘 맞지 않는다.
셋째, 케노시스 이론은 선재하신 아들과 성육하신 아들 사이의 연 속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만든다.
넷째, 케노시스 이론은 역사상의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
다섯째, 주님이 학문적이거나 역사적인 문제들에서는 오류가 있었지만, 영적으 로나 도덕적으로는 오류가 전혀 없었다는 입장은 근거가 매우 불충분하 다.11)
하지만 맥클라우드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케노시스 사상 없이도 지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어떠한 기독론도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으며’(빌 2:7), 부요하신 분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성육신의 신비를 가장 깊은 의미에서 지 적해주는 개념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케노시스’ 개념이다.” 12)
9) 대표적인 케노시스 기독론의 주창자는 고트프리트 토마시우스(Gottfried Thomasius, 1802-1875), P. T. 포사이트(P. T. Forsyth, 1848-1921), H. R. 매킨토쉬(H. R. Mackintosh, 1870-1936), 찰스 고어(Charles Gore, 1853-1932)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알미니안 신학자로 알 려져 있는 로저 올슨(Roger E. Olson, 1952- )이 케노시스 기독론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권문상 은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라는 논문에서 신성의 포기를 주장하였던 토마시우스와 는 달리 매킨토쉬는 신성의 잠재성과 인성 성장에 따른 발현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칼빈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있다[권문상.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칼 빈의 성경해석과 신학』, 안명준 편 (요한칼빈500주년 기념사업회, SFC, 2011), 359-377].
10) 이 부분과 관련한 고전적인 반론은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이 제기하였다. “우리 주님이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동안에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었는가?... 창조하시는 말씀이 자기를 비워서 아기 예수 안에 계신 것 이외에는 전혀 존재하 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 세계의 역사가 창조하시는 말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멋대로 있었으며 그 기이한 30년 동안에 이 지구와 우주 전역에서 일어난 일은 ‘말씀 없이’ 일어났 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William Temple, Christus Veritas (London: Macmillan, 1926), 142이하. Donald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김재영 역 (서울: 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286에서 재인용].
11)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86ff.
12) Donald Mackinnon, “‘Substance’ in Christology-a cross-bench view,” in S. W. Sykes and J. P. Clayton (eds.), Christ, Faith,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297.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90에서 재인용
하지만 “각별히 빌립보서 2:6이하에서 정의하는 ‘케노시스’ 사상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첫째, 그 사상에는 선재하신 그리스 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탁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이 포 함된다.
바울이 사용한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로 계셨다.13)
‘케노시스’ 사상에 포함된 두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리들 을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빌립보에 세워진 교회는 지식 수준이 낮아서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않아서 위협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하르파그모스’(harpagmos, ‘취할 것’)로 여기지 않았다. 자기의 권리들을 포기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 님의 참 모습이다.14)
‘케노시스’의 세 번째 요소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웠다는 사실이다.
‘케노시스’의 최저점은 십자가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헛됨과 허망함의 절 정이다.
거기에서 그 생명은 죽고, 그 영원한 말씀이 침묵에 떨어지게 된 다.
그가 취하신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겸비하게 또 가난하게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신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변성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는 어거스틴의 언급은 정당한 것 이다.15)
13)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90.
14)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93.
15) Augustine, On the Trinity, VII. 5 (NPNF. First Series, vol. III), 111. Macleod, 『그리스도의 위 격』, 296에서 재인용.
이 세 가지 위대한 태도의 배후에는 훨씬 더 심오한 원칙들이 있음을 맥크라우드는 논의하고 있다.
첫째로, ‘크립시스’(은닉 혹은 비밀)의 원칙 이 있다.
‘케노시스’에는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감추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진실로 그리스도는 자신에게서 신성을 벗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신성을 한동안 감춘 채 유지하여 육체의 연약함 아래서 비 추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영광을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그 영광을 감추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영광을 떼 어 버리셨다” 16)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 우리는 또한 ‘케노시스’가 기꺼이 더 낮아지려는 마음을 포함하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배후에는 두 가지 위대한 결심이 있다.
첫째로는 종의 형체와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겠 다는 영원한 아들의 시간 이전의 결정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그가 일단 성 육하신 다음에 훨씬 더 자신을 낮추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한 점이 아니라 긴 선이었다.17)
마지막으로 ‘케노시스’는 실질적인 포기를 포함한다.
이점에서는 바울 의 말이 “예수의 신성에 단순히 인성을 부가한 것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18)고 주장하는 찰스 고어의 말은 정확하다.
그러므로 우리 는 케노시스 이론에 반대해서, ‘케노시스’를 신성에 대한 포기로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인 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음이 완벽하게 가능하다 고 주장해야 한다.19)
지금까지 기독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해 간략 하게 살펴보았다.
일종의 신성의 제한으로서의 케노시스 기독론에 대해 서는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자기비우심이라고 하는 것을 단지 인성을 부가한 것 이상의 훨씬 많은 실질적인 포기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 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20)
16) J.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2:7.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98에서 재인용.
17)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98ff.
18) Charles Gore, Th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London: John Murray, 1898), 158.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301에서 재인용. 케노시스 기독론이 영국 신학계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주로 영국 성공회 신학자인 찰스 고어의 옹호 덕택이었다고 매클라우드는 지적하고 있다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282).
19)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301.
20) Macleod, 『그리스도의 위격』, 301.
기본적으로 케노시스 창조론은 기독론에서 토론되고 있는 케노시스 사상을 신론 일반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창조론에 적용해 보려고 하는 시 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건톤(Colin E. Gunton, 1941-2003)이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는 것이다.
빌 2:6은 명확히 성육신과 관련된 문맥에서 케노시스를 언급 하고 있지 창조론에 대한 문맥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21)
21) Colin E. Gunton, The Triune Creator: A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Grand Rapids: Eerdmans, 1998), 142. 케노시스는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겸비를 가리키는 용어다. 여성신학자 인 로즈메리 루터(Rosemary Ruether)는 이 용어를 성부에게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마저도 케노시스는 세계의 창조를 지시하지 않는다. 케노시스라는 용어를 통해 루터는 성부 하나님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Rosemary R. Ruether, Sexism and God-talk: Toward a Feminist Theology (Boston: Beacon Press, 1993), 1ff].
폴킹혼은 자 신이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에게 많은 신학적 영향을 받았 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먼저 몰트만의 케노시스 창조론을 살펴보고 이 어서 폴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을 제시한 후 둘을 비교해 보려고 한다.
몰 트만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폴킹혼은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인 사상에 대 해서는 일정부분 선을 긋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몰트만의 케노시스 창조론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창조’ 이 전에 무한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self-limitation)을 몰트 만은 설정한다. 몰트만은 ‘밖을 향한 하나님의 행위’와 ‘안을 향한 하나님 의 행위’를 구별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적으로 나오 시기 전에 그 스스로 결심하시며, 그 자신을 내어 맡기시며, 그 자신을 결 정하심으로 그 자신에게 내적으로 행위하신다” 22)고 몰트만은 말한다.
22) Jürgen Moltmann, God in Creation: A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3), 86.
이 러한 주장을 통해 몰트만은 하나님에게 ‘안’(within)과 ‘밖’(without)이 있다고 제안한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 자신 ‘바깥에’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해 무한한 하나님은 그 이전에 ‘그 자신 안에’(in himself) 이러한 유한을 위한 여지를 만들어야만 했다.” 23)
몰트만은 하나님의 무로 부터의 창조를 위한 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자기 제 한은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활동적인 공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 자신 안으로의 퇴각(withdrawal)이다.
전능하시며 편재하시는 하나님의 이러 한 자기 퇴각을 통해 무(nihil)가 생겨난다.24)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거 두어들이시며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신다.
이러한 문맥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바깥의 창조’가 동시에 하나 님 안에 (in God) 존재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재 안에 창조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공간 안에 창조가 존재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을 몰트만은 하고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몰트만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인 관계성은 너무나 넓어서 전체 창조가 그 안에 서 공간과 시간과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25)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러한 ‘하나님 안과 하나님 바깥에서의 행위로서의 창조’는 도리어 탄생 또 는 가져옴(a bringing forth)이라고 하는 여성적인 개념으로 불려야만 한 다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하나님은 세계를 자신의 세계가 자신 안에(in himself) 있게 되도록 하심으로 창조하신다: 있으라!” 26)
23) Jürgen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Minneapolis: Fortress, 1993), 109.
24)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09와 Moltmann, God in Creation, 86f을 보라.
25)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09. 이 말은 아드리안 폰 슈파이어(Adrienne von Speyer, 1902-1967)의 말로 알려져 있다. 슈파이어는 한스 우어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가톨릭 신비사상가이다.
26)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09. 그러나 몰트만은 아더 피코크(Arthur Peacocke)과 같이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원칙적으로 그 기원에 있어 ‘그 자신’(himself) 이외의 세계를 창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계를 ‘그녀 자신’(herself) 안에 창조하신다” [Intimations of Reality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64].
몰트만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이라는 아이디어를 짐줌 (zimzum)이라는 유대교의 카발라(Kabbalah) 교리의 도움을 받아 발전시킨다27):
“짐줌은 집중과 집약을 의미하며 그 자신이 그 자신으로 퇴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28)
이러한 짐줌 교리는 아이작 루리아(Isaac Luria, 1534- 1572)에 의해 발전되었다.
몰트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유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축소(shrinkage)의 과정을 통하 여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음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하나님 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아닌 그 무엇이 이 구체 적인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가?
... 무한한 존재가 행하는 모든 행위 가운데 에 첫 행위는 ‘밖을 향한’ 행위가 아니라 ‘안을 향한 행위,’ 곧 ‘하나님의 자 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 안으로의 자기 제한’이다.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수난(passion Dei)이지 행위 (actio)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자로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앞서의 첫 번째 행위에서 남겨 놓은 원영역(primal space)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 째 행위에서 이다.29)
짐줌 교리에 따르면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나님이 아니다.
“반대로 창조는 이러한 하나님 편에서의 자기 운동, 즉 창조에 그 자체의 공간을 허용하는 운동에 의해 먼저 시작된다. 하나님은 그 자신 바깥으로 나오기 위해 그 자신 안 으로 퇴각하신다” 30)
27) Cf. 조덕영,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 「창조론오픈포럼」2/2 (2008): 18-29.
28) Moltmann, God in Creation, 87.
29)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09f. 게르숌 숄렘(1897-1982)은 독일 태생의 이스 라엘 철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카발라에 대한 현대 학술연구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30) Moltmann, God in Creation, 87.
라고 몰트만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에 의하 면 이러한 아이디어는 창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 필연적인 교정을 지시한 다:
“하나님은 단지 어떠한 것이 존재하도록 부르심에 의해서, 또는 어떠 한 것을 세우심으로 창조하지 않으신다.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있게 하심으로, 여지를 만드심으로, 그리고 그 자신을 퇴각하심으로 ‘창조 하신다.’ 창조적 만드심은 남성적인 은유들로 표현된다. 그러나 창조적인 있게 하심은 모성적인 범주들을 통해 보다 더 잘 표현된다.” 31)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적인 자기 제한을 통해 몰트만은 자신의 만유재 신론을 제시하고 있다:
밖을 향한(ad extra) 창조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마련된 공간 속에서 일어 난다면 하나님 밖에 있는 현실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 자신 안에 ‘바깥을 향 하여’(outwards)를 마련한 하나님 안에(in)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는 창조를 생각하지 않는 일 없이 보다 더 큰 진리에 의하여, 다시 말하여 창조 의 역사가 그것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으로 창조의 역사가 귀결되는 보 다 더 큰 진리, 곧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는 진리에 의하여 포괄되어 지고 파악되어 진다.32)
31) Moltmann, God in Creation, 88.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하나님의 성(sexuality)에 대한 몰트만 의 견해를 상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그에 대해서는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The Trinity and the Kingdom)에 나오는 다음의 말들을 참조하라: “아버지의 이름은 하나의 신학적인, 다 시 말하여 삼위일체론적 개념이지 우주론적 혹은 종교적-정치적 표상이 아니다.... 아버지의 종교 (father religions)의 세계적 가장들과 이 아버지의 차이는 자유에 있다” (163). “그의 아들을 태 동하기도 하고 분만하기도 하는 아버지는 남성적인 아버지인 동시에 모성적인 아버지이다. 그는 더 이상 단성적으로 가장 중심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면 양성적(bisexually) 내지 성을 초월한(transexually) 것으로 규정된다” (164). “675년 톨레도 회의 (Council of Toledo)에 의하면 ‘아들은 무나 어떤 실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태 (out of the Father’s womb, de utero Patris)로부터, 다시 말하여 그의 본질로부터 태동되었거 나 탄생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165). “단일신론(monotheism)은 부권의 종교였으며 이것은 오늘 도 그러하다. 이에 반하여 범신론은 그 이전에 있었던 모권의 종교였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대담하게 진술하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개념에 있어서 성의 언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165).
32) Moltmann, God in Creation, 88f.
이것은 몰트만의 종말론적인 만유재신론의 비젼을 표현해 준다.
이것 은 창조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최종적인 형태다.
그러므로 하나 님의 주도적인 자기제한은 종말론적인 비전, 즉 ‘전체 창조가 변화되는 영화롭고 제한이 없어진 무한함’을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케노시스(kenosis)로서의 창조라는 몰트만의 만유재신론적인 개념’에 반대하여 콜린 건톤은 왜 그것이 설득력 없는 논증인지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건톤은 몰트만과 달리 하나님에게 외 부적이면서 상호관계성과 편재를 배제하지 않는 창조된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이 지지하는 이론에 대해 건톤이 제시 하는 두 번째 비판은 몰트만의 이론에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건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가 진정으로 그 자 체이려면 왜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을 포함해야 하는지 아무런 이 유도 없는 것 같다.”
건톤은 마지막으로 케노시스가
“세계에 대한 하나님 의 어떠한 관계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되는, 타락한 세계에 대 한 하나님의 태도를 다루도록 지정되어 있는 개념” 33)
33) Gunton, The Triune Creator, 142.
이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케노시스라는 은유를 반대한다.
기독교의 창조 개념은 하나님 바깥 에 세계의 창조(creation of the world outside of God)이다.
Ⅲ. 존 폴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
폴킹혼은 만유재신론을 현재적 실재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적절한 것 으로 배격한다.
왜냐하면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을 흐려지 게 하는 점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사이의 상호적인 자유로운 관계 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킹혼은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기 제한 이라는 몰트만의 아이디어를 좋아한다.
만유재신론은 변호하기 위해 하 트숀(Charles Hartshorne, 1897-2000)과 같은 만유재신론자들은
“‘만일 사 물들이 단지 하나님 “바깥에” 존재한다면,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 즉 하 나님과 세계가 있게 될 것이다.’ 다시금,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세계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과-하나 님-아닌-것(God-and what-is-other-than-God)이 하나님 보다 더 큰 (보다 더 포괄적인) 총체가 되어야만 한다.’”34)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폴킹혼은 “세계는 단지 하나님께서 세계를 위한 여지를 자유로이 만들어 주심 때문 에 존재함으로 하나님 더하여 세계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더 큰 실체를 만 들어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말하고 있지 산술적으 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35)라고 주장하고 있다.
존 쿠퍼(John W. Cooper, 1947- )의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Panentheism: 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13장 “신학적 우주론 안의 범재신론”에서 우리는 이안 바버, 폴 데이비스(Paul Davies, 1946- ), 아서 피코크,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1955- ) 등과 함께 존 폴킹혼 의 만유재신론에 대한 항목을 발견하게 된다.
이안 바버나 아서 피코크와 는 달리 일정 부분 만유재신론과 거리를 두었던 존 폴킹혼을 만유재신론 을 다루는 대목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이 유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존 폴킹혼의 신학적 작업에 미친 몰트만의 영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폴킹혼은 창조에 있어서 ‘케노시스’(kenosis) 개념 또는 신적인 축소(divine zimzum)에 대해 긍정 적이다.
어떤 면에서 폴킹혼의 창조론에 이미 만유재신론적인 요소가 들 어가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적인 실재로서의 만유재신론에 대한 폴킹혼의 반론은 분명하다.
“범재신론의 결함은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가 갖는 진정한 타자성을 범재 신론이 부정한다는 점이다.” 36)
34) Colin E. Gunton, Becoming and Being: The Doctrine of God in Charles Hartshorne and Karl Barth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58.
35) John Polkinghorne, Science and Providence: God’s Interaction with the World (London: SPCK, 1989), 22.
36) John Polkinghrone, Science and Trinity, 95-97. John Cooper,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 님』, 김재영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515에서 재인용.
그렇기 때문에 폴킹혼은 하나님의 초월성 과 내재성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만유재신론의 목표에는 동의하면서도만유재신론이 그 일에 있어서 성공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37)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가 갖는 진정한 타자성을 부정하는 만유재 신론의 결함이 미래적인 상태에서는 어떻게 극복이 되는가?
현재적인 실 재로는 결함을 드러내는 만유재신론이 미래적인 실재로서는 아무런 결함 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폴킹혼이 말하는 만유재신론의 결함 인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가 갖는 진정한 타자성”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 의 초월성”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폴킹혼의 종말론적 만유 재신론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세계가 갖는 진정한 타자성과 함께 하나 님의 초월성 또한 훼손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폴킹혼이 편집한 케노시스 창조이론: 신은 어떻게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는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는 원서인 The Work of Love: Creation as Kenosis가 2001년에 출간되었다.
케노시스 창조론의 대표적 인 주창자는 몰트만과 영국 성공회 소속의 밴스톤(W. H. Vanstone, 1923- 1999) 신부이다.
몰트만과 벤스톤을 포함한 일단의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이 1998년 10월 케임브리지 퀸스 칼리지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인 창조를 케노시스로 간주하는 관점이 제시하는 통찰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모인 사람들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일련의 논문을 작성하여 그 주제를 한층 더 발전시키자는데 모두 동의하였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내기로 하였다.
1999년 11월 뉴욕에서의 한 차례 모임에서 제출되었던 초 안들을 심도있게 토론하기 위해 모였는데 그 어간에 밴스톤 신부는 세상 을 떠나고 말았다.38)
37) John Polkinghorne, Faith of a Physicist, 64.
38) Polkinghorne, ed., 『케노시스 창조이론』, 19.
폴킹혼은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논문에서 “비움 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섭리에 따른 능력을 모두 정당 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조는 “이 해하시며 함께 고난 받으시는 친구”이며 설득을 통해서만 활동하신다는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의 설명이 그 배후에 있다.
이러한 설명은 그것 자체로 감동적인 표현임과 동시에 고상한 개념이지 만 “신성의 능력이 상실되어서 궁극적 성취의 근거이신 하나님에 대한 희 망이 전복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라고 폴킹혼은 주장 한다.
이 문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화이트헤드의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던 그분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39)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조는 제1원인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고전신 학의 주장이 그 배후에 있다.
“제1원인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 시며, 어떤 것에도 고통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그분의 신적 본성 에 미치는 것, 즉 참된 사랑의 관계가 의미할 법한 종류의 상호 효과가 전 혀 없다.” 4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고전 신학의 주요 옹호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아퀴나스의 설명은 “하나 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확신에 의문을 제 기할 정도로까지 창조로부터 멀고 단절되어 있다.
“제1원인인 신과 제2원 인인 피조물이 함께 세계에서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을 가정하는 데 모순 이 없는가에 관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 역시 존재한다.” 41)
39)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Polkinghorne, ed., 『케노시스 창조이론』, 167.
40)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67.
41)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67f.
20세기 후반에 창조에 관한 상당히 많은 신학적 사고가 등장하였는데 그 가운데 폴킹혼은 4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성육신 신학이다.
케 노시스와 관련한 전형적인 본문은 빌 2:1-11의 “자기를 비워(ekenosen) 종의 형체를 가져”이다.
폴킹혼은 17세기와 19세기 초의 루터파 신학자들 과 19세기 말에 몇몇 영국 신학자들 가운데 등장하였던 케노시스 기독론 을 언급하고 있다.
20세기에 케노시스를 창조론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폴킹혼은 몰트만과 밴스톤의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몰트만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개념을 강력하게 제기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삼위일체적 사건을 통해 계시되었다.
밴스톤은 비움 개념을 창조라는 사랑의 행위가 수반하는 위태로움, 값비싼 대가를 치름, 그리고 가치의 선물에 대한 그의 탐구의 중심에 두었다.42)
42)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68.
둘째는 신정론이다.
신정론이라고 하는 당혹스러운 문제는 신의 사 랑과 신의 능력에 대한 주장들이 서로 대치하는 전형적인 형국에 등장하 곤 한다.
대표적인 신정론적 대답은 자유의지 논변이다,
“의심할 여지없 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자유를 지닌 도덕적 존재가 존재하는 점이 야말로 위대한 선이다. 이 선물을 잘못 사용한 것을 도덕적인 악(moral evil)의 기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더는
“자유의 남 용이 온 창조 세계를 망라하는 우주적 결과를 초래했고, 이전에 소유했던 낙원에서의 완전한 삶을 타락시켰으며, 따라서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 악 (physical evil)의 원천은 자유의 남용이었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는 상황 이 되었다.
셋째는 창조의 지속이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진화된 세계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도록” 창조주에 의해 허용된 일종의 창조 세계를 의미한다.
삶이라는 연극은 미리 결정된 대본에 따르는 공연이 아니라 행위자 자신 들이 직접 연기하는 자발적인 즉흥 공연이다.
비록 비움에 관한 언어가 분 명하게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명백히 비움 개념이다.
하나님은 피 조물과 더불어 창조 과정을 전개하는 데 함께하신다.
이 피조물들은 풍성 한 변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령한 역할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 한 역할을 감당한다.
넷째는 인과 관계 결합체(Causal Nexus)이다.
“계속되는 창조”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인도와 영향이 나타나는 진화로서 이해된다면, 우리는 하 나님의 섭리 행동이 진화 개념을 수용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관점을 통해 세계라는 인과 관계 결합체에 관해 우리가 아는 바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토마스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인과 관계가 이중 작인 (作因, agency)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공동 인과 관계”를 보이려 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거나 심지어 불경하다.
하나님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신정론에 명백한 어려움을 제기한다.43)
폴킹혼은 창조주가 창조 세계와 맺는 사랑의 관계에서 산출되는 비움 의 서로 다른 측면들 네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a. 전능성을 비우심.
이 개념은 하나님이 창조된 타자가 존재하고 행동 하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반 섭리가 발생하는 모든 일을 허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 님의 뜻과 일치하거나, 하나님의 특별 섭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창조 세계가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가기 때문에, 이런 이해는 진화 역사를 해석하는 기본이다.44)
b. 단순한 영원성을 비우심.
창조주는 시간에 실재와 의미를 부여했 다.
어거스틴 이래로 신학자들은 시간이 본질상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우 주는 “시간 안에서”(in tempore)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cum tempore) 존재하게 되었다고 이해했다.
이런 어거스틴의 관점은 1500여 년이 지난 후 공간, 시간, 물질을 한데 묶는 현대 과학 사상인 일반 상대성 이론의 등 장으로 지지받게 되었다.
이 관점으로 인해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는 시간 이 창조 세계뿐 아니라 창조주에게도 실재임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 신의 본성인 무시간성과 영원성을 포기하시지 않으면서도, 창조된 시간에 참으로 관여하시는 창조주라는 개념과 상응하도록 자신의 신성에 시간이 라는 한 극을 “덧붙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성을 수용하신 이 행위를 비움이라 부를 수 있다.45)
43)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75.
44)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2.
45)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3f.
c. 전지하심을 비우심.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하나님조 차도 아직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이끈다.
다시 말하면, 창조는 하 나님의 전지하심의 비움을 수반했다.
하나님은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의미에서 현재적 전지를 소유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간이 라는 실재에 관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결국 아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미 아시지는 않으므로 절대적 전지를 소유하신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46)
d. 원인으로서의 지위를 비우심.
이 부분에 있어 폴킹혼은 자신의 이 전의 견해를 상당 부분 수정하여 새로운 제안을 하고 있다:
“나는 창조주 의 비움의 사랑이,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여러 원인 가운데 한 원인으로 행동하도록 허락하셨음을 믿게 되었다.” 47)
물론 하나님의 겸손이 그렇게 되도록 허용했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창조주에 관한 담론을 피조물 의 담론에 적절한 유비를 담은 용어로 축소할 수 없다. 결국 이 단계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비움의 역설 즉 성육신으로 되돌아간다.
성육신 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 행동에 중심을 두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본성 이 가장 분명하고 접근하기 쉬운 피조물의 용어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기 독교 신학은 결코 예수를 하나님과 단순히 동등하게 간주했거나 성육신 이라는 역사 속 사건이 우주를 통치하는 하나님 개념을 약화하는 어떤 것 이라고 가정했던 적이 없다.
하지만 성육신은 하나님이 형언할 수 없을 정 도로 항상 완전히 통제하시는 분이시라는 설명으로는 적절히 반영되지 않는 정도까지 피조물과 기꺼이 공유하고자 하신다는 점을 보여준다.48)
“하나님은 미래를 나타나게 하실 때, 피조물이 그들의 역할을 하게 하셨 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인과성과 피조물에 속하는 인과성 은 서로 얽혀 있음이 틀림없다.” 49)
46)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4f. 이러한 설명은 아래에서 논의할 열린 유신론의 주장과 유사하다.
47)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5.
48)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5f.
49) Polkinghorne, “비움을 통한 창조와 하나님의 행동,” 186.
2013년 기독교사상 지상인터뷰에서 폴킹혼은 자신의 “하나님의 자 기 제한의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경이(wonder)는 자연 의 신학(theology of nature)의 적절한 출발점이다.
경이는 과학자에게 매 우 중요한 단어다.
이것은 ‘창조자’의 놀라운 세계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준다. 경이는 ‘경배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칼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 는 성서해석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경이를 들고 있다.
“하늘은 하나님 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과학자라면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지혜문학을 쓴 저자들은 세계를 보고, 그 속 에서 놀라움과 아름다운 구조를 발견했다.50)
이어지는 대담에서 토론자는 지혜문학의 다른 측면인 인간의 삶의 고 통에 대한 아주 사실적인 묘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악 과 고통의 문제로 옮겨가면서 이 문제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그리고 선하심에 대한 기독교인의 믿음에 큰 도전이 되어 왔다는 지적에 대해 폴킹혼은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는 분”이라고 답 하며 사랑의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두 종류의 자유를 주시는데 하나는 자 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자유라 고 말하고 있다.51)
50) “과학과 신학, 진리를 향해 가는 벗-존 폴킹혼,” 『기독교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203.
51) “과학과 신학, 진리를 향해 가는 벗-존 폴킹혼,” 203f. 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한 비판적 평가 ┃ 박찬호 133
폴킹혼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자기 제한, 즉 케노시스가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적 세계관을 충돌 없이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틀 을 제공해준다. 폴킹혼은 우주의 역사는 진화하는 역사이며 이 진화의 역 사는 규칙성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개방성과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음 을 말하고 있다. 규칙성만 있다면 새로운 것은 전혀 일어날 수 없다. 새로 운 일은 카오스(chaos)의 끝에서 일어난다. “우연성이 하나님이 (피조물 의 자유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면, 지속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기독교의 전통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52)
폴킹혼은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하여 카오스(chaos) 이론의 지지자이 다. 콜린 건톤(Colin E. Gunto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자 이론 과 생물학, 그리고 혼돈 이론과 같은 분야에서의 발전은 신학이 간격의 하 나님이 아니라 세계의 형성에 폭 넓게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실체의 형태 에 있어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개방성(new openness)이라는 개 념을 지시해준다고 주장되고 있다.” 53)
피코크는 한때 생물학자였다. 이러 한 준거 기준에서 피코크는 우연(chance)을 하나님의 행동 수단으로 제안 하고 있다.
낸시 머피(Nancey Murphy, 1951- )는 양자 세계의 불확정성을 하나님의 행동을 위한 여지 또는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폴킹혼은 혼돈 이론을 하나님의 행동과 일치하는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54)
피코크는 폴킹혼의 ‘아래로부터 위로의 사고’(bottom-up thinking)을 반대하며 거꾸로 ‘위로부터 아래로의 사고’(top-down thinking)를 주장하 고 있다. 피코크의 위에서 아래로의 인과론만을 주장하는 입장에 대한 두 가지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머피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하기 위한 영역의 하나로서 양자 세계의 불확정성을 지지하고 있다.
머피와는 반대로 폴킹 혼은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하는 한 방식으로 혼돈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
양자 이론이 미시 세계의 현상에 적절한 설명이라면 혼돈 이론은 거시 세 계의 현상에 적절한 이론이다.55)
52) “과학과 신학, 진리를 향해 가는 벗-존 폴킹혼,” 204.
53) Colin E. Gunton, “The Doctrine of Creation,” Colin E. Gunton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Christian Doctri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154. 간격의 하나 님에 대한 토론을 위해서는 Thomas F. Tracy, “Particular Providence and the God of the Gaps,” Chaos and Complexity: Scientific Perspectives on Divine Action (Vatican City State: Vatican Observatory Publications, 1997, 2nd Ed.)을 참조하라.
54) 머피는 이 분야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에 가장 가까운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물리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였던 폴라드(William. G. Pollard, 1911-1989)를 제시하고 있다. 폴라드는 “하나님께서는 모 든 원자 하부의 사건의 조정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라고 제안하고 있다. 존 폴킹혼은 비록 이런 견 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행동을 양자 수준에서 해석한 개척자 로 폴라드를 지목하고 있다 [졸저, 『창조신학 특강』(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23), 102]. 55)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졸고, “Critical Evaluation of Arthur Peacocke’s Theory of Divine Action,” 『개혁논총』 19 (2011)를 보라.
Ⅳ. 비판적인 평가
과학 신학자들 가운데 폴킹혼은 이안 바버나 아서 피코크와는 달리 예 외적으로 만유재신론에 대해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 하고 있다.
이러한 폴킹혼의 입장은 건전한 복음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폴킹혼은 몰트만의 여러 신학적인 아이디어, 특별히 하나님 의 자기 비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폴킹혼은 현재적인 실재로서는 만 유재신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종말론적인 상태에서는 만유재신론을 수 용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폴킹혼의 종말론적인 만유재신론은 그가 보이고 있는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한 수용적인 자세에서 이미 그 안 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케노시스 창조론을 폴킹혼이 수용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폴킹혼이 현재적인 상태로서의 만유재신론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이유와 비슷해 보인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 피조물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폴킹혼이 가지고 있는 이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자세 이다.
이런 폴킹혼의 자세는 마치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제한함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존하고자 했던 열린유신론자들의 자세와도 비슷해 보인다.
2000년에 출간된 적절한 하나님 탐구하기: 과정 신학자와 자유의지 유신론자들 사이의 대화(Searching for an Adequate God: A Dialogue between Process and Free Will Theists)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인 존 캅 2세 (John Cobb, Jr., 1925- )와 클라크 피녹(Clark H. Pinnock, 1937-2010)이 공동 편집자가 되어 과정신학자들과 열린유신론자들의 입장을 서로 개진 하고 있는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정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계열에 서 있는 신학이라면 열린유신론은 복음주의신학의 계열에 서 있는 신학 이지만 그 신학적인 귀결점이 비슷해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56)
56) John Cobb, Jr. & Clark H. Pinnock, eds., Searching for an Adequate God: A Dialogue between Process and Free Will Theists (Grand Rapids: Eerdmans, 2000). 열린유신론자들 (open theists)은 자유의지 유신론자들(free will theist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열린유신론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보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지하심 특별히 미래적인 지식의 일부를 제한하려 한다. 즉 하나님도 미래에 대해 모르시 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열린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열려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 열린유신론은 한 마디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된 모티브로 하는 신학인데 알미니안 신학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제일의 원리로 삼을 때 이르게 되는 논리적 귀결을 보여준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존 파이퍼(John Piper, 1946- )는 ‘위험한 신학’이 라고 지칭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미래적인 지식을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마저 위협받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미래적인 지식 을 부정하게 되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 문제는 말끔하게 해결이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피조물에게 있다. 하나 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에 따라 그들이 죄지은 것이기에 하등 하나님께 책임이 돌아갈 것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문제는 해결이 되지만 악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통제권이 나 궁극적인 승리 또한 보장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심각한 누수현 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존 프레임(John M. Frame, 1939- )은 열린 신학 논쟁(No Other God: A Response to Open Theism)이란 책에서 이 열린 유신론을 집중적 으로 다루고 있다.
우선 존 프레임은 ‘열린’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좋 은 느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닫혀진 것이 열린 것보다 더 좋을 수 가 있는 실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냉장고의 문을 열어 놓으면 음식은 상하 게 될 것이다.
대문을 열어 놓는다는 것은 도둑을 불러들이는 것이 된다. 달리는 차의 문을 열어 놓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전통적 인 기독교 유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 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열려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에 대해 무 지하다는 말이 되며 이것은 결코 좋을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열린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 자신을 열어 놓으시는 분 이시다. 어떤 문도 그분에게 닫혀 있지 않다.
하나님은 진정 사람의 마음 문까지도 열려지게 하실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은 열린 유신 론이나 과정신학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 리를 보장한다.
일정 부분 우리는 과정신학뿐 아니라 열린 유신론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존 프레임의 결론을 인용해 본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전통적인 신학이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주고받기(give-and-take)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다.
그렇지만 열린[유신론]처럼 하나님의 총체적 주권과 지식을 부정함으로 가 아니라 그의 시간적 편재에 대하여 더 많이 강조함으로 그 같은 상호 반 응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시간 너머에 존재하며 절대적이며 무 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시간 속 에 들어와서 그의 피조물과 인격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그의 영원한 계획은 이러한 인격적인 상호 작용을 포함하며 결정한다.57)
57) John Frame, 『열린 신학 논쟁』, 홍성국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243.
하나님과 세계의 진정한 상호 작용을 전통 신학이 부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호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면 과정 신학이나 열린 유신론의 도전을 통해 그런 부분을 보다 분명히 정립하게 된 것은 나름의 진전이라면 진전이랄 수 있을 것이다.
피조물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유재신론을 현재적인 실재에 대 한 설명으로는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폴킹혼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 님의 케노시스를 받아들이고 있는데 필자가 이해한대로는 몰트만의 만유 재신론적인 케노시스 창조론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정통신학과는 거리가 있는 열린유신론 류의 신관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듯하다.
이 부분 과 관련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기대해본다.
Ⅴ. 결론
지금까지 폴킹혼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 해 살펴보았다.
케노시스 창조론의 출처가 되는 케노시스 기독론은 몇몇 옹호자들의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육신에는 주님 편에서의 모종의 케노시스가 있다는 것을 우 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케노시스 창조론 또한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창조에 있어 모종의 케노시스, 즉 하나님 께서 피조세계에 부여하신 자율권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주장은 가능 하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케노시스 창조론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적인 근 거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론에 사용되던 언어를 신론 일반으로 확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 요하다 할 것이다.
폴킹혼의 케노시스 창조론의 뿌리는 몰트만의 창조론이라고 할 수 있 다.
하지만 몰트만의 자기 제한으로서의 창조론과 폴킹혼의 견해를 비교 해볼 때 폴킹혼의 창조론은 몰트만 신학이 보이는 만유재신론으로 흘러 가지는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폴킹혼은 열린 유신론자 들의 논리와 비슷한 주장을 통해 현재적인 상태에서 만유재신론을 주장 하지 않으면서도 케노시스 창조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 세상에 존재 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고민 가운데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 면 이해가 되는 주장이기도 하지만 만유재신론과 관련하여 몰트만을 다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주장을 결국에는 수용하고 있는 것 같 은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이런 폴킹혼의 주장은 신학이 자연과학과 공명(consonance) 관계에 있다는 폴킹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귀결처럼 보여 진다.
하지만 이런 주 장은 피조세계 쪽에 너무 많은 자율권을 부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만유재신론이 가지는 하나님과 세계의 구분이 흐려지는 위험 까지는 아니라 해도 상당부분 하나님 쪽에서의 실재적인 자기 제한 또는 비움, 즉 케노시스가 존재하게 된다.
이른바 고전적인 유신론에서 주장하 는 하나님의 자존성(aseity)이나 주권(lordship) 같은 속성은 상당부분 훼 손되지 않을 수 없다.
Abstract
Critical Evaluation concerning John Polkinghorne’s Kenotic Doctrine of Creation
Chan Ho Park (Baekseok Graduate School of Theology, Professor)
John Polkinghorn is one of the scientist-theologians. He was a physicist who specialized in the so-called natural sciences, then studied theology and worked as a theologian and priest. In recognition of this contribution, Polkinghorn also won the Templeton Prize. Unlike other scientific theologians, Polkinghorn is a person who does not accept panentheism in the present state. However, in an eschatological state, he does accept panenthesim. Polkinghorn’s position can be said to be different from that of Moltmann, who explicitly accepts panentheism. However, Polkinghorn argues for the creation of Kenosis influenced by Moltmann’s claim of God’s creation as self-limitation. The concept of Kenosis is a term discussed in Christology. There is a controversy regarding the theory of Kenotic Christology, which is called the selfempty of divinity. The term of Christology is used in the doctrine of creation. It is believed that the reason is due to the solution to the problems of evil and pain in this world. The God of love created the world with self-limitation. Polkinghorn’s Kenitic doctrine of creation seems to be in a more moderate position than Moltmann’s Kenotic ttheory of creation. However, Polkinghorne’s theory of creation already seems to have the inevitability that will flow to panentheism in the eschatological state. In some ways, it can be said to be similar to the argument of the open Theism, which limited God’s omniscience in order not to blame God for the problem of evil in this world.
[Key words: doctrine of creation, Polkinghorne, Kenosis, Christology, open theism, Moltmann]
<참고문헌>
“과학과 신학, 진리를 향해 가는 벗-존 폴킹혼,” 기독교 사상 (서울: 대한기 독교서회, 2013. 권문상. “칼빈의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칼빈의 성경해석과 신학, 안명준 편, 요한칼빈500주년기념사업회, SFC, 2011. 박찬호, “Critical Evaluation of Arthur Peacocke’s Theory of Divine Action”, 「개혁논총」 19 (2011): 147-180. ------------. “과학 신학자 존 폴킹혼의 종말론”, 「창조론오픈포럼」 12/1 (2018): 52-60. ------------. “케노시스 창조론에 대한 존 폴킹혼의 견해”, 「창조론오픈포럼」 12/2 (2018): 60-69. ------------. 창조신학 특강,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23 조덕영,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 「창조론오픈포럼」 2/2 (2008): 18-26. Augustine. On the Trinity, VII. 5, NPNF. First Series, vol. III, 1979. Cobb, Jr., John & Clark H. Pinnock, eds. Searching for an Adequate God: A Dialogue between Process and Free Will Theists, Grand Rapids: Eerdmans, 2000. Cooper, John. 철학자들의 신과 성서의 하나님. 김재영 역. 서울: 새물결플 러스, 2011. Gore, Charles. Th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London: John Murray, 1898. Gunton, Colin E. The Triune Creator: A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Grand Rapids: Eerdmans, 1998. ------------. Becoming and Being: The Doctrine of God in Charles Hartshorne and Karl Barth.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142 조직신학연구 제47권 (2024년) ------------. “The Doctrine of Creation,” Colin E. Gunton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Christian Doctri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Frame, John. 열린 신학 논쟁. 홍성국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Mackinnon, Donald. “‘Substance’ in Christology-a cross-bench view.” in S. W. Sykes and J. P. Clayton (eds.) Christ, Faith,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Macleod, Donald. 그리스도의 위격. 김재영 역. 서울: 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Moltmann, Jürgen. God in Creation: A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3. ------------. The Trinity and the Kingdom. Minneapolis: Fortress, 1993. Nash, Ronald H. 현대의 철학적 신론. 서울: 살림출판사, 2003. Peters, Ted. “Theology and Natural Science.” David F. Ford, ed. The Modern Theologians: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 in the Twentieth Century. Oxford: Blackwell Publishers, 1997, 2nd Ed. Peacocke, Arthur. Intimations of Reality.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4. Polkinghorne, John. Scientists as Theologians: A Comparison of the Writings of Ian Barbour, Arthur Peacocke and John Polkinghorne. London: SPCK, 1996. ------------. The God of Hope and the End of the Worl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2. ------------. 과학으로 신학하기. 신익상 역.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5. ------------. The Faith of a Physicist: Reflections of a Bottom-Up Thinker. Augsburg: Fortress Press, 1996. -----------. ed. 케노시스 창조이론: 신은 어떻게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는 가?. 박동식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5. -----. Science and Providence: God’s Interaction with the World. London: SPCK, 1989. Ruether, Rosemary R. Sexism and God-talk: Toward a Feminist Theology. Boston: Beacon Press, 1993. Tracy, Thomas F. “Particular Providence and the God of the Gaps.” Chaos and Complexity: Scientific Perspectives on Divine Action. Vatican City State: Vatican Observatory Publications, 1997, 2nd Ed..
조직신학연구 제47권 (2024년)
논문 투고일: 2024.06.03. 수정 투고일: 2024.07.30. 게재 확정일: 2024.08.14
'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솔로몬의 꿈에 나타난 왕정 이념과 제왕 신탁의 요소들/윤동녕.서울장신대 (0) | 2024.11.17 |
---|---|
로마서 1:3-4의 메시아 언어: “다윗의 혈통”, “하나님의 아들”을 중심으로 /김명일.고려신학대학원 (0) | 2024.11.13 |
찰스 피니의 부흥신학과 방법론에 대한 분석과 평가/유창형.칼빈대 (0) | 2024.11.12 |
생태학적 정치신학에 관한 연구: 생태 위기 극복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박성철.경희대 (0) | 2024.11.12 |
그리움과 에로스의 구원 ― 다석 류영모와 플로티노스의 신비적 합일에 관한 신학적 고찰/안규식.연세대 (0) | 2024.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