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이야기

저스틴 마터(Justin Matyr)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개혁주의적 재평가: 초대교회 용례와 저스틴의 글을 중심으로/김용준.칼빈대

1 서론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c.100-c.165)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문 제였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절은 자유주의 시대 이래 로 종교다원주의 혹은 포괄주의로 비판받아왔다.

이런 비판의 중심에는 그의 로고스론이 스토아 철학 때문에 ‘사도 요한의 로고스 개념’을 따르지 못했고1 , 또한 ‘희랍철학과 기독교의 근본 차이와 대립’을 알지 못하여 ‘희 랍철학과 기독교를 같은 선상’에 놓았다고 지적한다. 2

1 서철원, 『교리사』 (서울: 총신대출판사, 2003), 103.

2 서철원, 『교리사』, 104. https://doi.org/10.57228/KRJ.67.1

그러나 저스틴의 변 증에 나타나는 저스틴의 이해는 그가 가진 철학적인 잔재로만 취급될 수있을지 의문이다.

저스틴이 처해 있던 상황과 무관하게 그의 변증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그가 언급한 한마디 혹은 한 단어를 가지고 그를 평가하려 한다.

저스틴의 신학은 ‘부득이한 점’이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철학을 하는 황제와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3)

즉 ‘그리스도를 어떻게 그 당시의 지성에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 까 하는 데 있었다.’ 4

저스틴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그가 말하려는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에 기독교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해 때문에 로마로부터 핍박받았다.

다신론 사회에서 유일신론을 가진 기독교는 유대교와 더불어 무신론자들로 취급되었다.

이 러한 사회적 이해에서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호해야 했고, 가장 기독교를 변호할 수 있는 모델로 헤라클레토스와 소크라테스를 설정하였다. 5

저스틴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거나, 참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결 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시도가 아니었다. 6

그러나 문 제는 저스틴이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 인들’이라고 칭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진술 때문에 그는 종교다원주의자이거나 또는 철학에 기초해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했다고 비난받아 왔 다. 7 그러나 이는 저스틴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당시의 용례를 바르게 이 해하지 않고 단순하게 본 오해에 근거한 것이다.

3 김용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에 대한 고 찰,” 「개혁논총」 58 (2021), 23.

4 한철하, 『고대기독교 사상』 (서울: 대한기독서회, 1992), 39.

5 한철하, 『고대기독교 사상』, 38.

6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Eerste Deel, Vierde onveranderde Druk (Kampen: Uitgave van J. H. Kok, 1928), 284. “doch bij dezen rustte dit geloof meestentijds niet op de leer van de genoegzaamheid der algemeene openbaring, maar op de oderstelling, dat God ook met zijne bijzondere genade onder de Heidenen hetzij dan in of na dit leven werk.” 바빙 크는 저스틴 마터[그외 몇몇 이방인들의 구원 가능성을 믿은 것처럼 보이는 교부들]의 시 도가 일반은총의 충분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이교도들 가운데 역사하신다 는 명제[전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7 Adam Sparks, “Was Justin Martyr a proto-Inclusivist?,”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43 (2008), 497(495-510).

따라서 필자는 오해를 해 소하기 위해 몇 가지 필수적인 이해를 살펴봄으로 지금까지 오해되어 평 가되었던 저스틴의 이해를 재평가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초대교회 에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저스틴 마 터가 사용하고 있었던 ‘로고스’와 ‘크리스티아노스’의 의미를 연구하려고 한다.

2 본론

2.1 초대교회에서 ‘Cristiano,j’의 용례

먼저 초대교회에서 사용된 ‘Cristiano,j’(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에 대 한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에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을 살펴보기 위해서 성경과 초대교회가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는지 를 파악하는 것은 저스틴 마터의 용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 해 준다.

성경의 용례에서 ‘크리티아노스’라는 단어는 세 번 사용된다(사 도행전 2번, 베드로전서 1번). 그리고 ‘디다케,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에 등 장하고,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이 단어가] 네로의 핍박 시기에 로마 에서 대중적이었던 것처럼 쓴다.’ 8

8 J.N.D. Kelly,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ies: A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eter and of Jude (London: Adam & Chrles Black, 1982[1969]), 190.

 

대부분 학자는 이 용어의 형성이 라틴어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9

즉 라틴어의 형태는 지도자나 주인 (master)의 이름에 ‘ianus’라는 어미를 붙여서 ‘추종자’들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헬라어에서도 ‘ianos’를 붙여서 ‘라틴어와 유사’하게 만들었다.

따 라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로부터 형성되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즉 그에게 속하거나 그리스도에 헌신한 자들’을 지시한다.

2.1.1 성경의 용례

2.1.1.1 사도행전 11:26; 26:28

사도행전에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1:26에 가장 먼 저 등장하며, 사도행전 26:28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린 단어이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 자신들에 의해서 적용 된 단어는 아니었다.

믿는 자들은 자신을 ‘제자들’(maqhtai ,), ‘믿는 자 들’(pisteu,ontej), 또는 ‘형제들’(avdelfoi)이라고 불렀다. 10 그러므로 자신 들을 ‘크리스티아노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는 외부 사람들에 의해서 불린 것이었다. 11

9 F. F. Bruce,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Book of the Acts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1986), 242. 각주 26번을 보시오. Michael J. Wilki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2), 1: 925. “Christian” Part.

10 Geoffrey W. Bromiley,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vol. 1 (Wm. B. Eerdmans, 1988; 2002), 657.

11 Horst Robert Balz & Gerhard Schneider,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90-c1993), 3:478; Bromiley,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1: 657.

외부 사람들에 의해서 불린 단어라는 의미가 유대인을 지시하는 것 역 시 아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메시아가 아닌 예수의 추종들이었던 사 람들에게 ‘메시아를 따른 자’라는 명칭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 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 사람들’(Nazarenes) 또는‘갈릴리 사람들’(Galilaeans)이라고 불렀다. 12

왜냐하면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으로 향하는 바울의 행동을 통해 유대인들이 가지는 그리스도인들 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이 산해드린의 허락을 통해 그리 스도를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간 것은 그들의 적대적인 행위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크리스티아노스’는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 아닌 ‘외부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현대에 사용된 용례처럼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인’이라는 명칭은 ‘처음에 비그리스도인(non-christians)과 믿는 자들을 구 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믿는 자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3

그래서 주로 외부인이 ‘그리 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식별이 되는 그룹, 즉 유대교와 구별이 되는 그룹이 되기 시작했다.’ 14

존 스토트 (John Stott, 1921-2011)는 이 단어가 ‘초기에 시선을 끌지 못했던 것 같다’ 고 지적하면서 ‘적어도 이 말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제자도의 특성을 강조 했다. 왜냐하면 그 단어의 구성은 Herodianoi(헤롯의 사람), Kaisarianoi(가 이사의 사람)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그리스 도의 사람, 추종자들, 종들로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15

12 Thomas Ethelbert Page, The Acts of the Apostles (London: Macmillan, 1886), 154.

13 Derek W. Thomas,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 Acts (New Jersey: P&R Publishing, 2011), 323.

14 Kenneth O. Gangel, Holman New Testament Commentary: Acts, 장미숙 역, 『Main Idea로 푸는 사도행전』 (서울: 디모데, 1999), 245.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단어는 ‘외부사람 들이 사용한 별명으로서 혹 조롱의 의미로 담았을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유대교의 한 하부 종파가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지닌다’고 지 적한다.

15 John Stott, The Message of Acts: To the Ends of the Earth, 정옥배 역, 『사도행전 강해: 이 된 것이며 ‘그들의 공개적인 고백이나 그들의 생활 방식 때문에 어떤 식 으로든 “그리스도”라고 불린 분에게 헌신한 것처럼 인식된 사람들을 위 땅끝까지 이르러』 (서울: IVP, 1992), 239; 유상섭, 『분석 사도행전 I: 1-14장』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8), 398. 16 K. H. Rengstorf, “Jesus Christ, Nazarene, Christian,” in Dictionary of New Testament ed. Colin Brown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6), 2: 343. 17 Stott, The Message of Acts: To the Ends of the Earth, 239. 18 J. Rasey Michael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9: 1 Peter, 박문재 역, 『베드로전 서』 (서울: 솔로몬, 2006), 533.

또한 사도행전 26:28 본문에서 ‘크리스티아노스’의 용례는 ‘바울’에게 아그립바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 였다.

이때 사용된 용례는 안디옥에서 사용된 용어와는 다른 의미였다. 즉 ‘비아냥’16의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갇혀서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왕’에게 ‘자신의 종교 이해를’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그립바는 이에 대해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이 단어의 표현이 ‘비아냥’이 아니고 ‘익살’ 정도라고 지적한다. 17

16 K. H. Rengstorf, “Jesus Christ, Nazarene, Christian,” in Dictionary of New Testament ed. Colin Brown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6), 2: 343.

17 Stott, The Message of Acts: To the Ends of the Earth, 239.

조롱이든 익살이든 분명한 것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립바는 바울을 존경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모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1.2 베드로전서 4:16

두 번째로 베드로 서신에서 ‘크리스티아노스’는 핍박받는 자에 대한 의 미로서 등장한다.

베드로전서 4:16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 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 고 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14절에 나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표 현의 의미를 좀 더 뚜렷하게 부각 시킨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고 섬기는 자들에 대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같은 외부인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18

18 J. Rasey Michaels,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9: 1 Peter, 박문재 역, 『베드로전 서』 (서울: 솔로몬, 2006), 533.

이러한 문제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가 ‘남용’ 해’19 사용된 것이다.

특히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 는 고난받는 사람들에 대한 칭호를 가리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통 속에서 자 신을 능동적으로 증명할 가능성을 부끄러움보다 우선시한다.’ 20

19 Peter H. David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First Epistle of Peter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0), 169.

20 Reinhard Feldmeier, The First Letter of Peter: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rans. Peter H. Davids (Waco, Texas: Baylor University Press, 2008), 227.

2.1.2 속사도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 c. 107)에서 용례: 크리스티아노스와 크리스티아니스모스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붙여진 기록은 ‘디다케,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에게서 나타난다. 21

윌킨스는 계 속해서 이 단어는 이그나티우스에게는 ‘신앙의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해서 사용’하였고 지적한다.

먼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 11번에 등장한다. 22

그리고 에베소에 보내 는 편지 12번에서23 이그나티우스는 ‘크리스티아노스’의 복수형을 사용하 고 있다.

이 헬라어 소유격 복수형 ‘크리스티아논’은 뒤에 나오는 호이(oi[) 로 이어지는 관계사에 의해서 설명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항상 사도들에게 일치했던 ‘크리스티아노이’24라고 설명하고 있다.

21 Wilki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 926.

22 Ignatius of Antioch, “Ad Ephesios,” in Die Apostolischen Väter, ed. F. X. Funk (Tübingen und Leipzig: Verlag von J. C. B. Mohr [Paul Siebeck], 1901), 11.

23 Ignatius of Antioch, “Ad Ephesios,” 12. “i[na evn klh,rw| vEfesi,wn eu`reqw/ tw/n Cristianw /n( oi [ kai . toi /j a vposto,loij pa ,ntote sunh | /nesan e vn duna,mei vIhsou / Cristou/)”

24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 남성 주격 복수 형태인 ‘크리스티아노이’의 형태를 사용하려고 한다.앞으로 나오는 다른 본문들도 원문과 정확한 성수격을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 명을 위한형태를 표기하려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사도들을 따랐던 자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이 해된다. 25

그러므로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언제나 사도들 과 일치했던 ‘에베소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누구를 뒤따르 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게 쓰이고 있다.

다음으로 막네시아에 보내는 편지 4번, 막네시아에 보내는 편지 10번, 로마에 보내는 편지 3번,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 6번에서 사용 된다.

먼저 이그나티우스는 막네시아에 보내는 편지 4번에서 ‘그리스도인 들로 불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26

여 기서 말하는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은 ‘함께 공동체에 참가하는 자들’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단의 가르침이 아니라 참다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 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 라,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에 보내는 편지 3번에서 이그나티우스는27 ‘크리스티아노스’라고 ‘불리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그렇게 발견되려고 한다.’고 편지한것이다.

25 James Moffatt, “An approach to Ignatius,” Harvard Theological Review 29/1 (Ja 1936), 34.

26 Ignatius of Antioch, “Ad Magnes,” 4. “Pre,pon ou=n evsti.n mh. mo,non kalei/sqai Cristianouj( avlla. kai. ei=nai\ w[sper kai, tinej evpi,skopon me,n kalou/sin( cwri.j de. auvtou/ pa,nta pra,ssousin) oi` toiou/toi de. ouvk evusundei,dhtoi moi ei=nai fai,nontai dia. to. mh. bebai,wj kat v evntolh.n sunaqroi,zesqai)” 여기서 박미경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하였다. Ignatius of Antioch, 『이냐시오스: 일곱편지』, 박미경 역 주 (칠곡: 분도출판사, 2000), 53. 그리고 이은선은 ‘기독교인’이라고 번역하였다. Joseph Barber Lightfoot, “Ignatius’ Letters,” In Apostolic Father, 2nd ed., 『속사도 교부들』, 이은선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1994]), 128. 그리고 키릴 리차드슨은 ‘Christians’로 번 역하였다. Cyril C. Richardson, “The letters of Ignatius,” i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 vol. 1: Early Christian Father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3), 95.

27 Ignatius of Antioch, “Ad Rom,” 3. “mh. i[na mo,non le,gwmai Ciristiano,j( avlla. kai, eu`reqw/.”

이는 이그나티우스가 자신이 ‘순교하게 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 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은 순교 당하 는 사람 즉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고 순교 당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 다. 이는 전적으로 베드로전서 4:16의 의미와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크리스티아노스’와 유사한 단어 하나가 더해지는데 헬라어 ‘크리스티아니스모스’(Cristianismo.j)이다.

‘크리스티아니스모스’는 세상으 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더 위대해진다고 이그나티우스는 말한다.

‘크리스 티아니스모스’와 ‘크리스티아노스’는 유사한 단어이지만, ‘크리스티아노 스’는 고난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크리스티아니스모스’는 그러 한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크리스티아니스모스’라는 단어 는 주로 옛날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삶과 대조적인 표현인 ‘유대교’, 즉 ‘유 다이스모스’(vIdai?smo.j)라는 단어와 대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28

막네시아에게 보내는 편지 10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이 단어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옛 방식을 말하는 ‘유다이스모스’와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크리스티아니스모스’를 대조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와 유대교로 번역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 므로 ‘크리스티아노스’와는 다르게 전적으로 기독교라는 교리와 방식에 집중하고 있는 단어이다.

오히려 유대교와 기독교를 대조하고 있는 단어 는 ‘크리스티아노스’가 아니라 ‘크리스티아니스모스’ 였다.

여기서 번역 자 박미경은 크리스티아니스모스’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법’29이라고 하였고, 이은선은 ‘기독교에 따라 사는 것’30이라고 하였고, 키릴 리차드슨 (Cyril C. Richardson) 은 영어 번역에서 ‘Christians’ 31이라고 번역하였다.

28 김용준, “기독교에서 주일성수 문제: 이그나티우스의 ‘주의 날’에 대한 해석을 중심 으로,” 「성경과 신학」 72 (2014), 141.

29 Ignatius of Antioch, 『이냐시오스: 일곱편지』, 59.

30 Lightfoot, “Ignatius’ Letters,” 131. 막네시아에 보내는 편지 10.1.

31 Richardson, “The letters of Ignatius,” 96.

또한 필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 6번에서 다시금 ‘크리스티아니스모스’ 를 사용하는데32, 이는 다른 편지들과 같이 ‘유다이스모스’와 대조되는 말 로 사용하고 있다.

즉 ‘크리스티아니스모스’는 ‘유다이모스’와 대조적으 로 가르침의 내용의 차이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옛 방 식인 ‘유다이스모스’와 반대로 ‘크리스티아니스모스’를 따라야 하는 것이 라고 이그나티우스는 주장하였다.

이는 종교적 공동체를 위한 단어이기보 다는 오히려 ‘삶의 방식’의 차이를 보이는 단어였다. 33

종합해 보면, 번역에 있어서 ‘크리스티아노스’와‘크리스티아니모스’라 는 말을 비교해 보면 리차드슨은 둘다‘Christians’라는 말로 어떤 의미의 구분을 두지 않았지만, 박미경과 이은선은 ‘크리스티아노스’는 ‘기독교인’ 으로 그리고 ‘크리스티아니스모스’는 ‘기독교인의 삶의 방식’으로 번역하 였다.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가 라틴어 ‘크리스티아누스’로부 터 왔고, 이는 정치적 집단을 위해 사용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집단의 구성원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러므로 이그나티우스에게 ‘크리스티아노스’는 핍박받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해서 사용’하였다. 34

32 Ignatius of Antioch, “Ad Philadelphenses,” 6.

33 Karl-Wilhelm Niebuhr, “Judentum und christentum bei Paulus und Ignatius von Antiochien,” Zeitschrift fu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 und die Kunde der alteren Kirche 85 (1994), 232-33.

34)Wilki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 926.

2.2 저스틴의 용례 안에서 ‘로고스’와 ‘크리스티아노스’

성경과 속사도 교부들에 의해 사용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용례의 의미 연구에서 살펴본 것처럼, 저스틴 마터가 사용한 ‘크리스티아노스’가 어 떤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저스틴은 이 ‘크리 스티아노스’를 성경과 속사도 교부들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 고 있다.

따라서 현대에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왜냐하 면 저스틴은 핍박으로 인해 교회를 그리스와 로마사람들에게 변증해야 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스틴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속에서 그가 의미하려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세 단어, 즉 로고스, 바바리안, 크리 스티아노스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단어는 ‘로 고스’와 ‘바바리안’과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단어를 상호 연관 속에서 설 명하려고 한다.

2.2.1 로고스

2.2.1.1 참된 로고스 = 성자 예수 그리스도

저스틴에게서 로고스는 아주 핵심 이해였다.

로고스는 ‘경륜적이며 내 재적인 방식 모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고스는 하나 님이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저스틴은 인정한다. 저스틴에게서 로고스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 할 뿐만 아니라, ‘말씀 하나님’이시다.

그 러므로 저스틴의 이해 속에서 참된 로고스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 수 그리스도이시다. 35

다른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파생된 것들뿐이다.

그런데 참된 로고스에 대한 이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산 출적 로고스이다.

저스틴의 이해 가운데 로고스를 ‘하나님의 씨’36라고 부 른다는 것 때문에 ‘스토아 철학과 연관성’을 주장한다.

35 김용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에 대한 고 찰,” 27-8.

36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prima pro Christianis,” Patrologiae Graecae. n. 6, ed. J. P. Migne (Petit-Montrouge: Migne, 1857), 32. “to. para, tou/ Qeou/ spe,rma( o` Lo,goj.”

그리고 일반적으로 철학에서 ‘산출적 로고스는 인간적 이성’으로 이해되었다. 37

그러나 저스틴 마터의 산출적 로고스의 개념은 단순히 ‘스토아’의 개념 이 아니다.

저스틴은 일반적 철학이 사용하는 개념과 기독교 성경이 사용 하는 개념을 비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 이성으로 이해되는 스토아의 산출적 로고스의 의미와는 달리38, 저스틴에게 참된 로고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 셨고, 로고스는 첫 열매이고 능력’39이라는 의미에서 ‘첫 번째 씨요, 열매’ 이 다 .

이 는 보 편 적 로 고 스 와 는 다 르 다 는 의 미 에 서 ‘첫 번 째 열 매’(prwto,tokon tou/ Qeou/), 즉 ‘하나님의 첫 번째 열매’를 의미하는데, 로고 스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40

37 R. Seeberg,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Erster Band: Die Anfange des Dogmas im Nachapostolischen Und Altkatholischen Zeitalter (Darmstadt: Wissenschafliche Buchgesellschaft, 1974), 338.

38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Patrologiae Graecae. n. 6, ed. J. P. Migne (Petit-Montrouge: Migne, 1857), 13. “e[kastoj ga,r tij avpo. me,rouj tou/ spermatikou/ qei,ou Lo,gou to. suggene.j o`rw/n( kalw/j evfaqe,gxato) Oi` de. ta,nanti,a auvtoi/j evn kurwte,roij eivrhko,tej ouvk evpisth,mhn th,n a;popton kai. gnw/sin th,n avne,legkton fai,nontai evschke,nai)” 여기서 저스틴은 철학이 기독교와 다 른 것은 아니고 유사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스틴은 사람들이 ‘스토아 철 학의 산출적 로고스’가 기독교와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참된 진리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 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인식과 반박할 수 없 는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스토아의 ‘산출적 로고스’와 기독교의 ‘참된 로고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39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prima pro Christianis,” 14, 22, 63. “vIh sou/j Cristo.j mo,noj ivdiwj ui`o.j tw|/ Qew|/ gegennhtai( Lo,goj auvtou/ u`pa,rcwn kai. prowto,tokoj kai. du,namij.”

40 Donald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98), 57. 맥클라우드는 라이트 풋과 부르스의 ‘프로토토코스’ 연구를 설명하면서,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리고 ‘세상의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상이 결 코 존재할 수 없다’는 ‘랍비 문헌으로부터 두 예들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 가 있다고 지적한다. 맥클라우드의 지적에 근거해서, 저스틴 역시 바울의 경우처럼 그리스 도를 ‘프로토토코스’라고 한 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참된 로고스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다.

저스틴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첫 열매로 말 하고 있다.

이는 완전한 로고스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저스틴은 ‘로고스’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41

2.2.1.2 보편적[혹은 파편적] 로고스: 모든 사람이 동참한 로고스

참된 하나님의 로고스와 구분된 로고스에 대해 저스틴은 설명한다.

이 는 참된 로고스이신 그리스께서 창조주로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 도가 성육신하기 이전’에 로고스에 대해 ‘파편적인 이해를 한 자들’이 존 재하고 있었다. 42

파편적[혹은 보편적] 로고스는 앞에서 언급한 참된 로고 스와는 구분이 된다.

그러므로 저스틴은 로고스의 구분뿐만 아니라, 로고 스를 수용한 사람들도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그래서 참된 로고스를 가진 자들과 파편적 로고스를 가진 자를 구분하였다.

따라서 ‘예언자적 영을 통 해서 이 로고스를 직접적으로 부여받은 선지자들’과 ‘구약의 성도들’이 있 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이 로고스를 가지기는 했지만 ‘모세로부터 로고스 를 받은 사람들(그리스 철학자들)’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43

여기서 모세 로부터 로고스를 받았다는 것은 ‘모세의 권위와 선지자적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의 권위를 상승하려는 것’이었다.

44 또한 케이스(Graham Keith)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저스틴에게서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는 구조 속에 있지 않았다.’ 45

41 Matthew W. Bates, “Justin Martyr’s Logocentric Hermeneutical Transformation of Isaiah’s Vision of the Nations,”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60 (2009), 548.

42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75), 90.

43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Dialogus cum Tryphone Judaeo,” Patrologiae Graecae. n. 6, ed. J. P. Migne (Petit-Montrouge: Migne, 1857), 7.

44 Graham Keith, “Justin Martyr And Relgious Exclusivism,” Tyndale Bulletin 43 (1992), 69.

45 Keith, “Justin Martur And Relgious Exclusivism,” 78.

그러므로 저스틴에게 가장 분명하게 참된 로고스를 가진 자들은 모세와 구약의 선지자들이었다.

반면 헤라클레토스, 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은 이 로고스를 이들로부터 배웠으며, 파편적 로고스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는 일반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이 로 고스의 파편을 알게 된다.

이는 바울(롬 1:20)이 말하고 있는 대로, 그의 신 성이 모든 만물 가운데 밝히 드러나 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신성은 신적 본성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성의 빛의 ‘창조 된 모사’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이 로고스에 동참했다.

2.2.2 저스틴에게서 ‘크리스티아노스’의 의미

2.2.2.1 ‘크리스티아노이’와 ‘우리 크리스티아노이’의 구분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빛 즉 참된 로고스의 빛에서 파생한 로 고스를 가진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라고 불렀다.

그래서 로고스에 동 참한 자들은 ‘크리스티아노스’[보편적 로고스를 안다는 의미에서]이될수 있다.

이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 것을 믿은 것은 아 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비친 로고스를 가진 자들 이었다.

그래서 저스틴은 이들을 [그리스도 이전의] ‘크리스티아노이’이 라고 표현했다.

앞에 언급된 저스틴의 이해 속에서 보면 그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가 심 각한 문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스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크 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저스틴은 지적하기를

‘아버지와 데미우르고스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소크 라테스에게 부분적으로 알려지셨다.’ 46

철학자들과 로고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군인들(시민들)이 믿었 다.’ 47

그러나

‘로고스는 말할 수 없는 아버지의 능력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이성의 것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고 지적한다.

저스틴은 그리스도에 대한 플라톤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면서

플라톤의 교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다른 것이(avllo,tria,) 아니고, 전적으로 유사(균등, o[moia)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즉 스토 아학파와 시인들과 역사가들의 가르침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각각은 산출 적인 신적 로고스의 부분으로부터 연관된 것들 보았다고 좋게 말했다. 그 러나 그들에 의해서 더 중요한 것들 안에서 반대의 것(모순)을 말했던 자들 은 보이지 않는 인식[영적인 인식]과 반박할 수 없는 지식을 가진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선하게[바르게] 말해진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들(h`mw/n tw/n Cristianw/n evsti)에게 속한 것이다. 비출생적이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로고스를 하나님 다음으로 예배하고 사랑한다. 우리 때 문에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또한 그는 우리의 고통과 함께하는 자가 되셨고 고치셨다. 48

46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10. “Cristw|/ de, tw|/ kai. u`po. Swkra,touj avpo. me,rouj )))”

47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10. “ou v filo,sofoi ou,de filo,logoi mo,non evpesqhsan( avlla kai. ceirote,cnai( kai. pantewj ivdiw/tai )))”

48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13. “ouvc o[ti avllo,tria, evsti ta. Pla,twnoj dida,gmata tou/ Cristou/( avll v o`ti ouvk e;stin pa,nth o[moia( w[sper ouvde. ta. tw/n a'llwn( Stwi?kwm te( kai. poihtw/n( kai. suggrafe,wn\ e[kastoj ga,r tij avpo. me,rouj tou/ spermatikou/ qei,ou Lo,gou to. suggene.j o`rw/n( kalw /j e vfaqe ,gxato) Oi ` de . ta ,nanti ,a au vtoi /j e vn kurwte ,roij ei vrhko ,tej ou vk evpisth,mhn th,n a;popton kai. gnw/sin th,n avne,legkton fai,nontai evschke,nai) [Osa ou=n para, pa/si kalw/j ei;rhtai( h`mw/n tw/n Cristianw/n evsti,) To.n ga,r avpo. av gennh,tou kai. avr`rvh,tou Qeou/ Logon meta. to.n Qeo.n proskunou/men kai. avgapw/men( evpeidh. kai. di v h`ma/j a;nqrwpoj ge,gonen( o[pwj kai. tw/n paqw/n tw/n h`mete,rwn summe,tocoj geno,menoj( kai. i;asin poih,shtai)”

저스틴이 말하려고 하는 이해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티아노이’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플라톤의 교리는 ‘기독교의 교리와 전혀 다른 것’ 이 아니라, ‘유사하거나 동등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다르다.

말이 의미 하는 것은 플라톤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유사하지만(전적으로 다 르지는 않지만) 결코 균등[동일]하지도 않다.

이렇게 된 이유는 로고스를 부분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과도 달랐다. 따라 서 시인들, 스토아학파, 역사가들이 다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기독교와 달리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오직 선한 것은 하나님의 참 로고스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 인들’(h`mw/n tw/n Cristianw/n)에게 속할 수밖에 없다.

저스틴은 일반적인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과 ‘우리’라는 말로 수식하 는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을 구분하여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 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진리는 단순히 ‘크리스티아노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크리스티아노이’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이나 철학자들에게는 부분적인 진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는 참 진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 유는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다음으로 로고스 즉 출생하신 로고스를 예배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avr`rvh,tou Qeou/ Logon meta. to.n Qeo.n proskunou/men kai. avgapw/men).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di v h`ma/j a;nqrwpoj ge,gonen), ‘우리의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를 고치신 분이 되셨기’ 때문 이다(o [pwj kai . tw /n paqw /n tw /n h `mete ,rwn summe ,tocoj geno ,menoj( kai . i ;asin poih,shtai).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참 로고스를 믿지 않는 사 람들에게는 참된 진리가 없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 다. 그렇다면 ‘저들’[크리스티아노이]은 어떻게 이 부분적 진리를 가지고 왔 는가? 저스틴은 생각하기를 ‘그 참다운 진리를 플라톤이 다른 곳으로부터 가져왔는데,’ 플라톤이 티마이오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가르침 은 ‘모세로부터 유사하게 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49

다시 말해서 로고스 는 그리스도 자신이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식을 통해서 로고스에 대해 이른 [고대] 철학자들 역시 모세에게 주어진 ‘참 로고스로부터 가져온 어 떤 파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 언급한 대로 소크라테스에게 알려진 진리는 부분적이었다.

종합해 보면 플라톤 자신이 이해한 철학적 원리는 모세로부터 가져온 것이며, 플라톤은 ‘동일한 것을’ ‘다르게’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다시 말해, 원래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것을 가져오 면서 ‘다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이 다.

따라서 로고스는 원래 ‘구약’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인데, 이것을 플라 톤이 가져오면서 ‘다른 것’ 또는 ‘유사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된다.

따라서 저스틴은 결코 종교다원주의나 보편구원론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스틴은 ‘어떤 이교도들이든, 철학적 운동들이든 구원에 대한 좋은 기회 들’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50

2.2.2.2 크리스티아노이: 무신론자들로 오해된 자들에 대한 칭호

소크라테스의 경우처럼, 저스틴은 철학자 중 일부를 그리스도 이전의 ‘크리스티아노스’로 부르려고 했다. 그래서 저스틴은 너무나도 철학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성경을 보았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설명 한 것처럼 저스틴은 그의 글에서 보편적 로고스와 참된 로고스를[그리스 도]를 구분하여서 로고스를 구분하고 있어서, 보편적 로고스를 가지고 산 49 김용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에 대한 고 찰,” 14. 50 Shawn C. Smith, “Was Justin Martyr an Inclusivist?,” Stone-Campbell Journal 10/2 (2007), 195. 26 개혁논총 ‘철학자 중 크리스티아노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참된 로고스를 가진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신론자들’ 로 불렸다는 이해와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무신론자들로 오해를 받았기 때문에 저스틴은 이를 변증해야 했고51, 유사 한 사상을 가진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 역시 무신론자들로 불렸기 때문에 이들과 비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는 의미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저스틴이 소크라테스를 언급한 이유는 소크라테스 당시 사람들 이 소크라테스를 ‘새로운 귀신에 의해서 인도되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었다. 52

당시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모함으로 죽음에 이르러야 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도 결국 ‘보편적 로고스’ 때문에 무신론자로 비판받아 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며, 이것과 유사하게 더 고상한 진리 즉 온전한 구원의 진리인 ‘참된 로고스를 아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하다’라고 말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저스틴에게서 ‘크리스티아노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 는 ‘무신론자’라는 비난과 연관을 지어 설명되는 말이다. 53

51 김용준,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에 대한 고 찰,” 16.

52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10. “Kai. ga.r e;fasan auvto.n kaina. daimo,nia eivsferein( kai. ou[j h` po,lij nomi,zei qeou.j( meh. h`gei/sqai auvto,n.”

53 Smith, “Was Justin Martyr an Inclusivist?,” 199, 201. 스 미 스 는 여 기 서 Oskar Skarsaune의 분석을 가져온다. 소크라테스와 아브라함은 우상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철학자 중 무신 론자로 오인을 받아 죽은 일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당시] 고난과 어려움 과 비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도 한 분 하나 님을 믿고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단순히 저들 철학자를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불렀다기보다는 저들이 받은 오해 즉 무신론자들이라는 오해는 지금 참된 로고스 즉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도 동일하게 적용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파편적 로고스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던 그리스[헬라]인 과 유대인 역시 이 문제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렸다는 것과 유사하 게 참 로고스를 소유하고 믿는 참 우리 ‘크리스티아노이’에게는 당연한 문 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은 ‘그리스 철학자들 의 구원에 대한 선포적 진술이기보다는 공통된 경험과 행위에 연결된 문 학적 기술 또는 은유’일 것이다. 54

54 Smith, “Was Justin Martyr an Inclusivist?,” 201.

2.2.2.3 크리스티아노이: 바바리안(유대인)

저스틴은 단지 소크라테스와 철학자들 또는 시인 중에 무신론자들이라 고 취급당한 사람들만을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신 약 이전의 유대인들을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독특 한 점은 유대인들을 ‘바바리안’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저스틴은 ‘크리스 티아노이’의 구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을 나누어 말한다. 그리고 유 대인을 말할 때는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바바리안’이라 고 표현한다. 이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등장하기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참다운 로고스를 알아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편적 로고스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이었 다. 저스틴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첫 열매시라고 우리는 배웠다. 그리고 모든 인간 종 족이 공유하는 로고스가 존재한다고 미리 선포하였다. 그리고 로고스에 따 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그리고 무신론자들이라고 불려졌다. 그 것은 그리스에 사는 소크라테스와 헤라클레토스이다. 그리고 그들과 유사 한 사람들이 있다. 이방(바바리안)에서는 아브라함 그리고 아나니아, 아자 리아, 미사엘, 엘리야와 다른 사람들이 있다. 55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세 가지 정도의 이해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로고스의 존재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로 고스에 대한 문제는 보편적[공유된/파편적] 로고스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 해 미리 선포했다는 것이다. 저스틴에게는 모든 사람이 원래 이 로고스를 알아야 했다.

이는 이미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그리고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에게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56

또한 바빙크(H. Bavinck 1854-1921) 가 지적한 것처럼 ‘로고스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창조되었으므로 모 든 사람이 이 로고스에 동참’해야 한다. 57

55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prima pro Christianis,” 46. “To .n Cristo.n prwto,tokon tou/ Qeou/ ei=nai evdida,cqhmen( kai. proemhnu,samen lo,gon o;nta( ou- pa/n ge,noj avnqrw,pwn mete,ce\ kai. oi` meta, lo,gou biw,santej Cristianoi, eivsi( ka/n a;qeoi evnomi,sqhsan\ oi-on evn ;Ellhsi me.n Swkra,thj kai. `Hra,kleitoj( kai. oi` o[moioi auvtoi/j\ evn barba,roij de. vAbraa,m( kai. vAnani,aj( kai. vAzari,aj( kai. Misah.l( kai. vHli,aj( kai. a;lloi )))”

56 다음을 보라. 김용준, “바르트의 신학방법론에 대한 비평적 고찰,” 「성경과 신학」 62 (2012), 173.

57 Bavinck, Gereformeede Dogmatiek, 1: 290. 바빙크는 이를 일반계시로 명명하고 이 방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시, 로고스의 조명, 성령의 사역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교부 중에서, 저스틴 마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외에도 많은 교부가 로고스가 ‘이방 세계 가운데 역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namen eene werkzaamheid van den Logos in de heidenwereld aan). 어거스틴 역시 이방인들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림자 가운데서 진리를 보았다’(dat zij de waarheid in schaduw zagen)고 말하였다. 바빙크 는 ‘이교 철학이 가지고 있는 진리로부터 유익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en dat wij dus met het ware in de heidensche philosphie onze winste moeten doen en het ons moeten toeeigenen)고 지적하였다.

이는 요한복음이 말한 대로, 모 든 만물이 그를 통하여 즉 로고스를 통하여 만들어졌으므로(요 1:3), 그에 대해 동참하지 않고서는 결코 바른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이 첫 번째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들어진 모든 피조 물 중 하나이므로, 당연히 모든 종족은 이 로고스에 동참해야 했다.

둘째, 무신론자들로 취급되었다. 58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보편적인 로고스에 대한 이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은 사람들에게 바르게 이해 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처럼 보편적 로고 스만을 가졌든, 그리스도인들처럼 참된 로고스를 가지고 있건, 언제나 어 느 시대에나 로고스를 아는 자들은 무신론자들로 취급받았다.

그 이유는 ‘무신론이라는 용어는 ‘관례적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에 게 주어진’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59

58 김용준, 『교의신학자가 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에베소서』 (용인: 목양, 2013), 88. 에 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그리스도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이 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고 했는데, 이때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라고 말할 때 헬라어 ‘avqeoi’ 를 사용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방인들은 ‘무신론자들’, 즉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 들 그리고 일부 철학자들이 무신론자들이라고 비난 받은 것은 동일한 이해 속에서 살필 수 있다. 즉 다신론의 입장에서 ‘유일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또한 무신론자로 여겼다. 새로 운 귀신은 무신론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이다.

59 Sparks, “Was Justin Martyr a proto-Inclusivist?,” 498.

보편적 로고스든 참된 로고스든, 로고 스를 아는 자들은 실제로 무신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로고스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로고스를 아는 자들을 무신론자로 취급하고 말았다.

따라서 저스틴은 ‘크리스티아노이’와 ‘무신론’이라는 말을 같은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스틴의 언어에서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은 곧 ‘무신론 자로 오해받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에는 소크라 테스와 헤라클레토스가 있었고, 바바리안 중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 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신론 사회에서 언제나 무신론자들이었다.

셋째, 이러한 불신의 힘이 강한 곳에서도 여전히 로고스에 동참하여 살 아간 ‘크리스티아노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토스 와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사람들이며, 바바리안60 중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들이었다.

60 저스틴은 ‘크리스티아노스’의 범주에 ‘그리스 사람’과 ‘바바리안’이 있다고 말하는 데, 이 바바리안을 다른 교육을 받지 못한 민족을 지칭하지 않고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으 로 보아서 전적으로 ‘그리스’ 사람의 이해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헬라어 ‘바바로스’는 ‘외국어로 무식하게 말하거나, 외국 사람, 교육받지 못한 사람, 혹은 그리스 사람이 아닌 사 람’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H. Balz, “Ba,rbaroj,” in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eds. Horst Balz and Gerhard Scheider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0), 197-198. 여기서 저스틴은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대조하기 위한 방식으로 ‘유대인’을 ‘바바리안’이라고 부른 것이다. Kiel Hans Windish, “Ba,rbaroj,”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ed. Gerhard Kittel and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6), 547.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 인’으로 나누거나, 또는 ‘유대인’과 ‘비 유대인’으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는 다.

만약 저스틴이 사용한 ‘크리스티아노이’가 현대적 의미였다면, ‘그리 스’와 ‘바바리안’이라는 구분은 바르게 적용된 용례가 아니다.

저스틴이 유대인을 지칭하며 언급한 ‘바바리안’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구 분하는 관점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 사람으로서 구분하는 관점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세상을 나누어 부르는 관점 을 택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의 구분은 저스틴의 ‘크리 스티아노이’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크리스티아노이’ 라는 단어를 통해 그리스[헬라] 사람과 유대인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오 히려 저스틴은 여기서 유대인들도 철학자들처럼 로고스를 알았지만, 참된 로고스를 알지[혹은 믿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3 결론

결론적으로, 저스틴이 사용한 크리스티아노이는 결국 현대에서 사용되 는 언어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저스틴은 이 단어를 그리스 사람이나 유대인들에게 적용했다는 것이 종교 다원주의적인 의미로 ‘그리스도 이전의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저스틴이 사용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 ‘크리스티아노이’라는 단 어는 분명하게 두 가지 측면에서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철학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사용한 ‘크리스티아노이’는 ‘보편적/파편적/부분적 로고스’ 를 지시하기 위해서 ‘저들 크리스티아노이’를 사용하였고, 또한 참된 로고 스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라는 표현과 구분하여 사 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의 ‘종교의 씨앗’과 바빙크의 ‘로고스 에 대한 동참’에 대한 이해를 만나게 된다.

그리스 사람에게는 ‘소크라테 스’가 있고, 바바리안 중에는 ‘아브라함’이 있다는 구절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저스틴이 사용하는 ‘크리스티아노이’의 용례는 대부분 이 고소당하고 핍박당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변증 가들의 일반적인 용례였는데, 변증가들은 ‘순교의 죽음에 이르도록 그리 스도를 따랐던 사람의 자기-표현(self-characterization)’ 61으로서 사용되었 다.

그리고 보편적 로고스에 대한 의미를 통해서 그는 당시의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철학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전에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노이]’는 ‘우리 크리스티아노이’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구절이 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 이전에 보편적 로고스로 인해 [무신론자로] 핍박받은 사람’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저스틴이 제시하려고 했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보 편주의적 개념이나 종교다원주의적 개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62

61 Wilkin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1: 926.

62 Smith, “Was Justin Martyr an Inclusivist?,” 197; 199.

그리스도 이전에 ‘부분적’ 혹은 ‘보편적 로고스’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뜻 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저스틴은 ‘우리 크리스티아노이’와 단순히 ‘크리스티아노이’[혹은 저 들]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 크리스티아노이’는 참된 로고스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고 ‘크리스티아노이’[저들]은 보편적 로고 스를 아는 것 때문에 핍박을 당한 사람들을 지시할 뿐이다.

왜냐하면 ‘저 스틴은 어디서도 그 자신의 시대에(그리고 현재에 연장해서) [보편적] 로 고스에 따라 사는 사람이 이것에 기초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제안하지 않 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63

그리고 ‘크리스티아노 이’[저들] 안에도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그리스 사람들’과 다 른 하나는 ‘바바리안들’(그리스도 이전의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관점 은 저스틴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사용되 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 혹은 부분적 로고스를 아는 사람’과 ‘참 로고스 를 아는 사람’을 구분하는 단어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저스틴의 이해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익명의 그리스도인’64 같은 종교다원주 의나 보편주의가 아니라, 핍박받는 참 로고스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의 모 습을 변증하기 위해 파편적 혹은 보편적 로고스를 가지고서 핍박을 받은 사람들과의 유사성을 보여준 은유에 불과하다.

63 Sparks, “Was Justin Martyr a proto-Inclusivist?,” 504.

64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등과 같은 개념은 현대 포괄주의 혹은 종교 다원주의 나 종교 보편주의적 개념을 대변한다. 목창균, 『현대신학 논쟁』 (서울: 두란노, 2007), 428.

참고문헌

김용준. “바르트의 신학방법론에 대한 비평적 고찰.” 「성경과 신학」 62 (2012): 163- 86. ______. 『교의신학자가 교회론적 관점에서 본 에베소서』. 용인: 목양, 2013. ______. “기독교에서 주일성수 문제: 이그나티우스의 ‘주의 날’에 대한 해석을 중심 으로.” 「성경과 신학」 72 (2014): 123-54. ______.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신학 안에서 삼위일체론의 가능성에 대한 고 찰.” 「개혁논총」 58 (2021): 9-38. 목창균. 『현대신학 논쟁』. 서울: 두란노, 2007[1995]. 서철원. 『교리사』.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2003. 유상섭. 『분석 사도행전 I: 1-14장』.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한철하. 『고대기독교 사상』. 서울: 대한기독서회. 1992. Balz, Horst Robert & Schneider, Gerhard.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93. Balz, H. “Ba,rbaroj.” in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Ed. Horst Balz and Gerhard Scheider.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0: 197-98. Bates, Matthew W. “Justin Martyr’s Logocentric Hermeneutical Transformation of Isaiah’s Vision of the Nations.”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60 (2009): 538- 555. Bavinck, H. Gereformeerde Dogmatiek. Eerste Deel. Vierde onveranderde Druk. Kampen: Uitgave van J. H. Kok, 1928. Bromiley, Geoffrey W.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Vol. 1. Wm. B. Eerdmans, 1988[2002]. Bruce, F. F.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Book of the Acts.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1986. Davids, Peter H.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First Epistle of Peter.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Grand Rapids, Michigan, 1990. Feldmeier, Reinhard. The First Letter of Peter: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rans. Peter H. Davids. Waco, Texas: Baylor University Press, 2008. Gangel, Kenneth O. Holman New Testament Commentary: Acts. 장미숙 역. 『Main Idea 참고문헌 34 개혁논총 로 푸는 사도행전』. 서울: 디모데, 1999. Hans Windish, Kiel. “Ba,rbaroj.”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Ed. Gerhard Kittel and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6: 546-53. Ignatius of Antioch. “Ad Magnes.” In Die Apostolischen Väter. Edited by F. X. Funk. Tübingen und Leipzig: Verlag von J. C. B. Mohr (Paul Siebeck). Ignatius of Antioch. 『이냐시오스: 일곱편지』. 박미경 역주. 칠곡: 분도출판사, 2000. S. Justinus Philosophus et Martyr. “Apologia prima pro Christianis.” Patrologiae Graecae. n. 6. Ed. J. P. Migne. Petit-Montrouge:Migne, 1857. ______. “Apologia secunda pro Christianis.” ______. “Dialogus cum Tryphone Judaeo.” Keith, Graham. “Justin Martyr And Relgious Exclusivism.” Tyndale Bulletin 43 (1992): 57-80. Kelly, J. N. D. Early Christian Doctrines.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75. Lightfoot, Joseph Barber. “Ignatius’ Letters.” In Apostolic Father. 2nd ed. 『속사도 교부 들』. 이은선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1[1994]. MaCleod, Donald. The Person of Christ.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98. Michaels, J. Rasey.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49: 1 Peter. 박문재 역. 『베드로전 서』. 서울: 솔로몬, 2006. Moffatt, James. “An approach to Ignatius.” Harvard Theological Review 29 (1936): 1- 38. Niebuhr, Karl-Wilhelm. “Judentum und christentum bei Paulus und Ignatius von Antiochien.” Zeitschrift fur die neutestamentliche Wissenschaft und die Kunde der alteren Kirche 85 (1994): 218-233. Page, Thomas Ethelbert. The Acts of the Apostles. London: Macmillan, 1886. Rengstorf, K. H. “Jesus Christ, Nazarene, Christian.” In Dictionary of New Testament, vol. 2, ed. Colin Brown.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6. Richardson, Cyril C. “The letters of Ignatius,” I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 Vol. 1: Early Christian Father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53. Schaff, Phili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2: Ante-Nicen Christianity From the Death of John the Apostle to Constantine the Great A.D. 100-325. Massa 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2006. Seeberg, R. 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Erster Band: Die Anfänge des Dogmas im Nachapostolischen Und Altkatholischen Zeitalter. Darmstadt: Wissenschafliche Buchgesellschaft, 1974. Smith, Shawn C. “Was Justin Martyr an Inclusivist?.” Stone-Campbell Journal 10 (2007): 193-211. Sparks, Adam. “Was Justin Martyr a proto-Inclusivist?.” 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43 (2008):495-510. Stott, John. The Message of Acts: To the Ends of the Earth. 정옥배 역. 『사도행전 강해: 땅끝까지 이르러』. 서울: IVP, 1992. Thomas, Derek W.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 Acts. New Jersey: P&R Publishing, 2011. Wilkins, Michael J. The Anchor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2. Willis, J. R.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from Apostolic Times to Saint Augustine. New York: Exposition Press, 1976. Windish, Kiel Hans. “Ba,rbaroj.”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1, ed. Gerhard Kittel and Trans.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6: 546-53.

국문초록

저스틴은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문장 때문에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는 교부이다.

그러나 이는 초대교회의 용례와 저스틴 자신의 문장을 통해서 재해 석해 볼 때,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초대교회에서는 성경과 이그나티우스의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살펴볼 수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현대에서 사용하는 의미와는 약간의 다른 뉘양스를 가지고 있다.

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Christianos’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핍박받는 자’로서의 자기-표현으로 이해된다.

두 번째로 저스틴에게서는 ‘로고스’의 의미와 ‘크리스티아노이’(Cristianoi,)의 의미를 각각 재고해야 하는데, ‘로고스는’ 크게 두 가지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보편적’ 로고스이고, 다른 하나는 ‘참 로고스’이 다.

여기서 보편적 로고스는 로고스의 창조로 인해 드러나는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로고스이며, 참 로고스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저스틴은 ‘우리 크리티아노이’와 ‘크리스티아노이’를 구분하고 있으며, 이 ‘크리스티아노이’라 는 공통점은 ‘무신론자로서’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공통성을 통한 변증을 위한 장 치이다.

특별히 ‘저들[혹은 그들]’이라는 부류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 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서 저스틴이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 이전의 크리스티아 노스’라는 의미는 ‘보편적 로고스’를 아는 사람으로서 핍박받는 자들이라는 의미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저스틴 마터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의미는 칼 라너와 같은 종교다원주의나 보편주의가 아니다.

주제어: 저스틴 마터, 보편적 로고스, 참 로고스, 크리스티아노스,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 도인, 무신론

 

Abstract

A Reformed reassessment of Justin Martyr’s ‘Christians before Christ’: Focusing on usage from the early church and Justin’s writings

Kim, Yong Jun (Assistant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Calvin University)

Justin Martyr is a church father who has been seriously misunderstood because of the sentence ‘before Christ, Christian.’ However, when we again interpret it through the use of the early church and Justin's own sentence, we can see that it just is a misunderstanding. First, in the early church, you can look at word ‘Christianos’ in the Bible and Ignatius’ letters. This commonly has a slightly different nuance from the meaning used in modern times. The ‘Christianos’ of the Bible and the Early Church Fathers is understood as a self-expression as a ‘persecuted one’ while following Christ. Second, for Justin, the meaning of words ‘Logos’ and ‘Christianos’ must be reconsidered. the Word ‘Logos’ is explained in two ways. One is the ‘universal’ logos, and the other is the ‘true logos.’ Here, the universal logos is a fragmentary and partial logos revealed through the creation of logos, but the true logos implies only Christ. In this concept, Justin distinguishes between ‘we Cristianoi,’ and ‘Cristianoi,’, and the commonality of these Cris tianoi, is a device for apologetics for those who are ‘persecuted’ as ‘atheists’, particularly included the Greeks and the Jews in the category of ‘them’ or ‘Cristianoi.’ As a result, the meaning of ‘before Christ Christianos’ used by Justin focuses on the meaning of those who are persecuted as people who knows the ‘universal or partial logos’. Therefore, the meaning of Justin Marter’s ‘Christian before Christ’ is not religious pluralism or universalism like Karl Ranher.

Key Words: Justin Martyr, universal or Partial logos, true Logos, Christianos, Before Christ Christian, atheism

개혁논총 67권(2024.3)

논문투고일: 2024.01.15. 논문수정일: 2024.03.05. 게재확정일: 2024.03.14.

저스틴 마터(Justin Matyr)의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개혁주의적 재평가 초대교회 용례와 저스틴의 글을 중심으로.pdf
0.3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