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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채식’의 의미 :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신수정.명지대

 1. 식물, 음식, 그리고 채식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는 채식주의자 와 몽고반점 , 그리고 나 무 불꽃 등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채식’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다.

특별할 것 도 없고 유달리 모자랄 것도 없는 한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고 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존재가 되 어 정신병동에 유폐되기에 이른다.

이 여성을 채식으로 이끈 계기는 무 엇일까.

어찌하여 이 여성은 상징적 죽음에 해당하는 사회 시스템으로부 터의 추방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채식을 관철시킬 수 있었 는가.

채식주의자는 남편( 채식주의자 )과 형부( 몽고반점 ), 그리고 언니( 나무 불꽃 )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다각도로 이 물음들에 대한 답 을 추적한다.

사실, ‘식물’ 혹은 ‘음식’ 모티프는 한강 소설에서 그리 낯선 장치들이 아니다.

내 여자의 열매(2000)는 말할 것도 없고 그대의 차가운 손 (2002), 그리고 가장 최근작이라고 할 바람이 분다, 가라(2010)에서도 이들 모티프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내 여자의 열매는 이 연작소설 과의 관련성이 적지 않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로 변신하 고 함께 살던 남편은 화분에 담긴 그녀를 돌보며 살아가게 된다는 독 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식물’과 ‘여성’을 동일선 상에 둔 채 식물성의 상상력을 변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 채식주의자의 식물 적 세계를 예비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1)

‘음식’ 모티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액자소설로 담고 있는 그대의 차가운 손 이 음식을 통한 여성적 정체성의 구축과정을 주요 플롯으로 내장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소설 속 내화의 중심인물인 L은 의붓아버지에 의한 강간의 기억을 과도한 폭식에 의존해 지우려 한다.

이때의 폭식은 그녀 가 선택한 자아의 보호수단이자 비루한 세상을 향한 분노의 무기라고 할 만하다.

또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 E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다.

푸 줏간 주인의 딸이라는 출생의 콤플렉스와 육손이라는 트라우마가 만나 는 지점에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음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 즉 채식이 놓여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거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바람이 분다, 가라의 여성 인물 ‘나’에게서도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 는 사안이다.

이들 모두에게 음식은 이들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한강 소설의 여성 인물들은 음식과 관련된 식이 장애 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하는 측면이 있다.

그녀들의 “환부 는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음식을 통해 몸을 만든다.

음식은 이제 인간 의 구성소이거나 의사소통의 매개로서 그 외연이 넓어”2)지게 되는 것이 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식물’과 ‘음식’을 결합하는 ‘채식’ 모티프는 한강의 소설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라고 할 만하다.

식물을 통해 변주되는 또 다른 삶에 대한 욕망과 음식으로 발화하는 여성적 육체 언어의 폭발 은 때로 한강 소설을 환경생태학의 관점이나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1) 한강, 작가의 말 , 채식주의자, 창비, 2007, 245쪽.

      2) 이경, 적막한 식욕의 윤리학 , 여/성이론 6호, 여이연, 2002, 136쪽.

      3) 김미영, 소설교육의 한 가능성-생태소설을 중심으로 , 어문연구 125호, 한 국어문교육연구회, 2005.3, 483~486쪽; 송연주, 여성소설에 나타난 변신 모 티프와 환상성 연구 ,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 41집,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 회, 2008.12, 288~291쪽

 

본고는 이러한 연구들의 유의미 성을 인정하는 한편, 보다 세밀한 텍스트 독해를 통해 한강 소설에 나타 나는 생태학적 기호를 문학적 언어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녀의 소설 가운데 이러한 독법의 가능성을 가장 많이 열어두고 있는 텍스트 로 판단되는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채식의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선, 채식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들을 점검할 것이다. 생태윤리학과 페미니즘은 이 논의에 유용한 참조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본고는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채식 모티프가 육식 문화로 대변되는 남 성적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적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음과 동시에 영적 생명력에 가까운 여성적 에너지의 근원적 힘을 환기시키는 육체 언어의 발화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결국 채 식에서 거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여성적 육체 언어의 변화가 어떤 의미 가 있는지도 추적될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생태학적 기호로 발화하는 여성의 욕망이 어떻게 남성 공동체 내에서 규제되고 소멸되는지 그 ‘규 율의 과정’을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채식 혹은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

 

오늘날 채식은 생태윤리학이 요구하는 중요한 실천 강령 가운데 하나 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이외의 생명체, 생물-생태계, 그리고 모든 생명을 가진 피 조물 각각의 고유한 가치와 자기 목적을 강조하는 생태윤리학은 현대의 대량 사육 체계를 비판하며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 통증, 공포를 주는 것을 금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4)

 

     4) 구승회, 생태윤리학: 인간윤리학에서 자연윤리학으로 , 에코필로소피, 새길, 1995, 59~102쪽.  

 

널리 알려진 대로, 톰 레간(Tom Regan)과 피터 싱어(Peter Singer) 등과 같은 학자들의 연구가 말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 피터 싱어의 작업은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철학적 옹호론으로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아 왔 다. 5)

그의 주저 동물해방은 인간 아닌 동물에 대한 인간의 폭정을 고 발하고 있는 책으로서 전세계적인 반향을 얻은 바 있다

피터 싱어의 주 장은 고통을 적게 산출하고 환경에 손실을 적게 주면서도 더 많은 식량 을 생산해내기 위해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채식은 “일종의 불매 운동(boycott)을 벌이는 것”6)과 같은 실천 적인 행보다.

고기와 동물 농장의 다른 제품들을 더 이상 구매하지 않을 때까지 우리 모두는 사실상 공장 식 영농의 존속과 번영, 그리고 성장에 이바지하고 있는 셈이며, 음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들에게 자행되는 다 른 모든 잔혹 행위들에 대해서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역시 육식을 그치고 채식을 시작할 것 을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문화의 역사는 소를 신화적 상태로부터 산업의 형태로 이행시켜온 과정과 맞먹는다.

오늘날 소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는 지구의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육 대륙의 거주지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육식 문화를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상태로 돌리고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징표이자 혁명적 인 행동”7)에 다름 아니다.

자연을 회복시키고 인간과 소의 관계를 다시 신성하게 만드는 일은 결국 우리 존재를 새롭게 하는 일과 서로 불가분 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식단에서 육 류를 제외시키는 것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전환”8)에 해당된 다.

 

     5) 물론, 이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은 형편이다. 맹주만( 톰 레간과 윤리적 채식주의 , 근대철학 4권 1호, 서양근대철학회, 2009.6, 45~46쪽.)을 참조할 것.

    6) P. Singer, 김성한 옮김, 동물해방, 인간사랑, 1999, 280쪽.

    7) J. Rifkin, 신현승 옮김, 육식의 종말, 시공사, 2002, 351쪽.

     8) 위의 책, 12쪽.

 

한편,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채식주의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캐럴 J. 아담스(Caral J. Adams)는 “우리가 먹는 무엇, 좀 더 정확히 말해 어 떤 사람(동물과 여성을 일치시키고 있다)이 우리의 가부장제 문화에 의 해 결정된다는 것, 그리고 육식에 부여된 의미가 사나이다움을 함축한 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정치가 구조화 되는 방식은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가부장제는 인간/동물 관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별 체계”9)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성별 구조는 각 성별 에 따라 적합한 음식을 교육하는 교육 체계를 포함하는 한편, 남자다움 에 대한 선입견 역시 재생산해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여성과 동물 간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상호 중첩되어 있는 억압을 승인하며, 그리고 다양한 행동주의의 파편화에 반대하는 학문적인 관심 을 불러”10)일으키는 계기를 촉구한다.

 

    9) C. J. Adams, 이현 옮김, 육식의 성정치, 미토, 21쪽.

   10) 위의 책, 26쪽.

 

페미니즘과 채식주의가 둘이 아니 라 하나로 만날 수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 폭력과 동물 폭력의 관계, 아동 학대와 동물 학대의 관계, 여성 구타와 동물 학 대의 관계가 동일선상에서 사유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논의에 힘입은 바 크다.

이상의 논의들을 종합해보면 채식 혹은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기 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재생산해내고 있는 기본 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 고 그것을 바로 잡으며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상태로 되돌아 가려는 실천적 움직임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채식을 한다는 것 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나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미래와 관련 된 정치적 운동의 차원과 연관되며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 로운 인류학적 비전을 제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 연과 여성, 동물 등 현대가 배제하고 억압해온 영역들의 자기 몫을 회복 하기 위한 타자의 윤리학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은 ‘혁명’이라 고 할 만하다.

 

3. 육식 공동체의 타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단발머리, 각질이 일어 난 노르스름한 피부, 외꺼풀 눈에 약간 튀어나온 광대뼈, 개성있어 보이 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무채색의 옷차람, 가장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11)를 신고 있는 한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을 ‘남다르다’고 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10쪽)로 보인다. 한강의 채식주의 는 이 두드러지지 않는 한 여성이 어느 순간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하게 되면서 어떻게 삶의 또 다른 국면 속으로 접어들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 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36쪽) 12)

 

     11)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9쪽. 이후 인용은 쪽수만 기입하도록 한다.

     12) 한강은 화자 남편의 내레이션과 아내 영혜의 독백을 구분하기 위해 이탤릭 체를 사용하고 있다. 뉘어진 활자들은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제대로 발화된 언어가 아니라 침묵과 꿈, 독백에 비견되는 웅얼거림에 가깝다

 

그녀가 채식을 하게 되는 일차적 계기는 꿈 때문이다.

위 인용문의 꿈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고 또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흙삽을 내리치는 둔중한 울림소리가 들리고 죽은 자 의 몸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이 꿈은 가물가물 잡히지 않는 영상으 로 처리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이고 죽는 살생의 끔찍함마저 씻어주지는 못한다.

채식주의자 의 아내 영혜는 이 꿈을 꾼 뒤 냉장고 를 가득 채우고 있던 고기들을 버리고 채식을 시작한다.

그녀에게 채식 은 죽고 죽이는 살생의 반복에서 벗어나 정신적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그것은 오래 전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맛 있게 먹어 치운 죄의식을 벗어던지게 해주는 세례 의식이자 상대를 죽 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적대적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도 함께 달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같은 길로 돌아.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희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 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울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중략)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 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 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 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53쪽)

 

자신의 다리를 문 개를 처벌하는 방식은 그것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그 개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와 시장 골목의 알 만한 ‘아저씨’들의 원칙은 어디선가 덮쳐오는 위해의 두 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인류가 오래 전부터 고안해온 생존술 에 가깝다.

개에게 물린 자는 자신을 문 그 개의 고기를 몸속에 저장함 으로써 또 다시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죽이기 전에 그 누군가를 없애버리는 과정 의 연속에 다름 아니다.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눈을 희번덕이며’ 죽어 간 개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잔치’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이 과정을 내면화한 세계다.

이 사회의 일원이 되 고자 하는 자는 모두 이 원칙을 몸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이 원칙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 마도 그 또는 그녀는 공동체의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길을 선택한 영혜의 운명이 그러하다.

고기 먹기를 금하고 채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한 섭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 가 오랫동안 저작시켜온 삶의 원칙, 문화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사회 구성원이 육식을 ‘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 더 나아가 더 많은 고기를 소비하기 위해 사회적 총역량을 집결하는 육 식 문화 속에서 그것은 스스로를 ‘비정상’의 예외적 상태로 몰고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식주의자가 사회적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채식주 의자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저주받은 타자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이다.

남편의 상사가 주관하는 저녁 모임 자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는 하나 의 장이다.

“화사한 사교톤으로” 음식을 권하고 영혜를 배려하는 사장 부인 앞에서 시종일관 수저를 들지 못한 채 멀뚱멀뚱 그 여인의 우아한 얼굴을 마주보는 것 이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녀는 본의 아니게 “좌중의 기분을 끔찍하게 만”(33쪽)드는 폭탄이 되고야 만다.

영혜의 응 시는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 다수자들의 폭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울 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식량, 직물, 가죽을 제공하는 동물과 물리적·심 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후기 사육시대 사람들의 눈앞에 “그런 동물들의 출산, 교미, 도살 과정”13)을 갑작스럽게 대면하게 함으로써 동 물들에 대한 그들의 야만적이고도 폭력적인 관리 상태를 드러내 보이고 야 마는 상황에 비견된다.

 

    13) R.W. Bulliet, 임옥희 옮김, 사육과 육식, 알마, 2008, 14~15쪽.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응시 혹은 그녀의 존재 자체는 이미 그것이 거기에 있는 한 그 자체로 이 사회의 정상성을 위 협하는 ‘실재’라고 할 만하다. 이는 가족 공동체라고해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가족 공동체는 자아 의 또 다른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 과정을 보다 첨예하고 폭력적인 방 식으로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언니의 집들이에 모인 영혜의 가족들은 그녀의 채식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완강하게 비난하고 부정한다.

그들 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고기를 강요하고 사랑의 대가를 요구 한다.

부성과 모성, 혈육애가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 다.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새카맣게 그을린 장인의 얼굴을, 한때 젊은 여인이었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쪼글쪼글한 장모의 얼굴을, 그 눈에 어린 염려를, 처형의 근심어린, 치켜올라간 눈썹을, 동서의 방관자적인 태도를, 막내처남 내외의 소극적이지만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내가 무슨 말이든 꺼내놓을 것이 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상에 내려놓 는 것으로, 그 모든 얼굴들이 쏘아보내는 무언의, 하나의 메시지에 대 한 대답을 대신했다.(46~47쪽) 

 

고기 먹기를 강요하는 가족의 요구 앞에서 ‘젓가락을 내려놓는’ 영혜 의 동작은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것과 가족 안에서의 행복 찾기가 공존 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예증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만하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딸의 입을 벌리고 억지로 고기를 밀어 넣는 가족 공동체 의 사랑은 영혜의 신념과는 어긋난다.

물론, 이 ‘고기 강제로 밀어 넣기’ 는 “다 널 위해서 하는 말”(48쪽)이라는 염려와 배려로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의 이면에는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 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60쪽)라는 가족이기주의적 이해타산이 함 축되어 있기도 하다.

이 이중성의 밀도는 채식주의자 딸을 둔 ‘아버지’가 육식 공급이 중단된 사위 앞에서 면목없어하는 대목에서 가장 내밀하게 드러난다.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는”(38쪽) 이 가부장은 딸의 채식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여기 에는 ‘남성=육식’이라는 등식과 아내의 임무는 남편으로 하여금 고기를 먹게 하는 것이라는 오랫동안 저작해온 육식문화의 원칙14)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14) C. J. Adams, 앞의 책, 30~31쪽. “여성들이 자기 남편 앞에 고기를 내놓아야 한다고 믿는 것은 사실상 남자 가 강해지려면 고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이 식사의 내 용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육식의 성정치를 영속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혜는 이 가부장의 노력마저 좌절시키고 만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49쪽)라는 그녀의 대답은 단순히 ‘고기’ 먹기를 거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 혹은 ‘아버지 문화’ 전체를 부정한다는 의 미를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순간 사랑과 배려로 위장된 가족애는 자취를 감춘다.

아버지와 딸의 사이에는 팽팽한 전운이 감돈다.

먼저 아버지가 딸의 뺨을 친다.

그리고 억지로 고기를 밀어 넣는다.

이 도발 앞에서 딸 은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피가 흐 르고 놀란 비명이 오가며 사랑으로 충만한 가족의 ‘잔치’가 끝난다.

이 자해는 그녀가 선택한 채식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함축하는 측면이 있다.

그녀의 채식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죽고 죽이는 살생’에 대한 혐오 로 나타나지만 심층적으로는 그러한 살생을 삶의 원칙으로 내면화하지 않을 수 없는 육식 문화 전반, 곧 가족과 사회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유 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일상의 규율 전반에 대한 거부와 부정으로 이해 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녀는 한 사회, 한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단독자로 존재할 뿐이다. 15)

 

     15) 김미현은 이 상황을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사케르’ 개념 을 빌려와 채식주의자 영혜가 공동체의 주변부 타자로 존재하지만 그 공동체 를 유지시키기 위한 ‘구성적 조건’으로서 필요한 조건이 되고 있다고 본다. 김미현, 젠더 프리즘, 민음사, 2008, 336~341쪽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가 자신을 가여워하는 어 머니를 보며 마음속으로 “저 여자가 왜 우는지 나는 몰라”(60쪽)라고 부 인하는 장면은 이 이탈극의 대단원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채식주의를 선택함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된 것이다.

가족도 사회도 국가 도 모두 그녀를 부인한다.

이제 그녀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말미, 병원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윗옷을 벗어던진 채 군중의 무리에 둘러싸여 햇살을 쬐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남편, ‘나’가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저 여자 를 모른다”(64쪽).

 

드디어 그녀에겐 남편조차 ‘타인’이 된 것이다.

 

4. 경계 넘기의 두 유형, 영성과 광기

 

채식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의 의미를 지니 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그러한 맥락을 가능하게 하는 보다 근원 적인 힘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힘이 어떻게 관리되 고 있는지 그 실상을 추적할 필요도 있다.

먼저, 몽고반점 을 통해 예 술이 예리하게 간파한 여성적 자질을 확인해보자.

몽고반점 의 ‘나’는 아내로부터 처제 영혜의 엉덩이에 어린아이처럼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 는 이야기를 듣고 강한 성적 욕망을 느낀다.

비디오 액티비스트로 알려 진 화자는 이제까지 명료하지 않은 어떤 ‘이미지’에 들려 있었는데 그것 이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렬한 열정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여기 서 몽고반점의 푸른색을 ‘식물성’의 이미지와 연결 짓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 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 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101쪽)

 

작품 모델이 되기 위해 옷을 벗은 처제의 엉덩이를 들여다보며 화자 는 몽고반점으로부터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한다.

‘식물적인 무 엇’으로 이어지는 이 ‘광합성’의 이미지는 한강 소설에서 낯선 것이 아니 다.

이미 살펴본 대로 내 여자의 열매 는 완전히 식물로 변해버린 여자 가 베란다 화분에 담겨 광합성을 하고 있는 장면을 작품의 마지막에 선 보이고 있으며 채식주의자 역시 “앙상한 쇄골과 여윈 젖가슴, 연갈색 유두”(63쪽)를 내놓은 채 햇살을 즐기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강 소설에서 ‘광합 성을 하는 식물-여성’의 이미지는 항상 관능의 표상으로 재현되고 있다 는 점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려왔던 대로였다. 그녀의 몽고반점 위로 그 의 붉은 꽃이 닫혀다 열리는 동작이 반복되었고, 그의 성기는 거대한 꽃술처럼 그녀의 몸속을 드나들었다. 그는 전율했다. 가장 추악하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의 끔찍한 결합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 다 그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물들이고 배와 허벅지까지 적시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을 보았다 (140쪽)

 

위 인용문은 여성의 식물적 이미지가 어떻게 섹슈얼리티로 발현되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용문에 따르면 광합성의 흔적을 간직한 처제 와의 결합은 ‘완벽’했다.

그는 ‘끈끈한 풀물의 푸른빛’에 압도당한 채 ‘전 율’한다.

이 감동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처제와 형부 사이의 ‘추악한’ 결 합이라는 세속적 도덕의 잣대는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풀물의 푸른빛’이 간직한 섹슈얼리티가 관계의 경계를 틀 지우는 모랄을 이긴 것이다.

그 렇게 보자면 이 섹슈얼리티를 에코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영성’ 개념 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 속의 생명이 협력과 상호 보살핌, 사랑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론 및 새로운 인류학의 필요를 강조하는 에코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이분법을 넘어 모든 생명체에 내재한 생존 본능과 의지를 되살리고 가꾸어나가기 를 희망한다.

이 생태학적 생명의 신성함과 영성 개념은 그리 멀지 않 다.

따라서 이때의 영성은 ‘종교’ 보다는 ‘주술’에 가깝고 ‘과학’ 보다 ‘마 법’을 더 사랑한다.

즉, 그것은 “만물에 스며있는 여성원칙”16)으로서, “여성의 관능, 여성의 성적 에너지, 여성의 가장 소중한 생명력과 같은 것”, 다시 말해 “여성으로 하여금 생명을 사랑하고 축복하게 해주는 에 너지”17)를 말한다.

이 영성이 왜 중요한가.

근대 과학 기술은 인류가 자연과 맺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파괴하고 그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과정을 통 해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이 ‘탈마법화’ 의 과정이 “자연을 (남성) 의지에 종속시키고 자연의 모든 주술적 힘을 풀어버”18)리고 있다는 점이다.

 

     16) M. Mies․V. Shiva, 손덕수․이난아 옮김, 에코페미니즘, 창작과비평사, 2000, 29쪽.

     17) 위의 책, 30쪽.

     18) 위의 책, 31쪽.

 

영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 과정 을 해체하고 새로운 판을 짜기를 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머니 대 지를 치유하고 세계에 다시 마법을 걸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몽고반점 에 따르면 이 움직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 들은 예술가들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영성에 속하는 일면이 있다.

남 들이 예쁘다고 하는 자신의 아내 보다 결코 더 아름답지 않은 처제의 얼굴에서 “가지를 치지 않은 야생의 나무 같은 힘”(78쪽)을 감지하는 예 술가-형부의 예지력은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고 그가 처제에 게 “단순한 성욕”을 분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 처제의 섹 슈얼리티는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는, 계속해서 수십만 볼트의 전류에 감전되는 듯한 감동” (103쪽)을 가져오는 어떤 것으로 발현된다.

그러나 근원에의 대면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것은 어느 순간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속하던 세계 바깥으로 주체를 끌고 간다.

이 순간 사이렌의 유혹 을 두려워한 오디세우스의 간지(奸智)는 여전히 유효하다.

연작소설의 마지막은 영성을 실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요원 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나무 불꽃 으로 마무리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영혜의 언니에 따르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섹슈얼리티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었던 남편과 동생의 정사는 “치료가 필요”(145쪽)한 일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남편을 징계하고 동생을 정신 병동에 수감한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169쪽)간다.

“시간은 흐른다”(187쪽)는 사실을 믿으며. 그녀에게 여성적 ‘영성’은 ‘광기’의 다른 이름이다.

한 아버지의 맏딸이자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그녀 에게 ‘영성’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다. 물론, 이제는 그녀도 안 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 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192쪽).

그러나 그것 을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여전히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갈 뿐이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 서 뿌리가 돋아서……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응, 사 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 데……(156쪽)

 

잠결에 내뱉는 영혜의 말은 그녀에게 낯선 이방인의 언어일 뿐이다.

병사에 수용한 뒤 집중적으로 질병을 관리하고 치료하고 있건만 동생은 여전히 ‘헛소리’를 한다.

이 헛소리는 감금된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려는 무의식적 안간힘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자신을 물구나무선 ‘나무’와 동일 시하며 사타구니에서 피어나는 ‘꽃’을 만개시키기 위해 다리를 벌리려고 애쓴다는 영혜의 중얼거림은 그녀에겐 단지 “혐오감”만 유발할 따름이 다.

“처음엔 나직하고 다정했으며, 중간쯤에선 어린아이처럼 천진했으나, 마지막 부분은 짐승의 소리처럼 뭉개어져 알아들을 수 없”(156쪽)는 이 목소리는 그녀의 세계가 용납할 수 없는 광기의 영역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일상의 규율에 몸을 내맡기고 있 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때때로 형언할 수 없는 ‘흉통’을 느끼는 그 녀는 가빠오는 숨을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 흉 통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예컨대 “이 모 든 것은 무의미하다./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더 앞으로 갈 수 없다./가 고 싶지 않다”(200쪽) 등과 같은 진실이 흉통이 되어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다만 견디고 있었을 뿐이다.

이 견디는 자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경계를 넘고자 하는 자가 마지 막으로 선택한 것이 ‘거식’이다.

자신이 나무로 변신했다고 간주하는 영 혜는 오로지 ‘물’만 필요로 할 뿐 어떤 형태의 음식도 거부한다.

이제 그 녀는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식은커녕 채식마저 도 원하지 않는다.

 

몸부림치는 영혜를 어깨에 들쳐멘 보호사가 복도를 걸어와 비어 있는 2인용 병실로 들어간다.

의료진을 따라 그녀도 그 방으로 들어 간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영혜의 의식은 분명하게 개어 있다. 그토 록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영혜의 몸짓은 크고 거칠다.

태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목구멍에서 터져나온 다 ……놔아!……놔아아! (210쪽)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하다.

달아나려는 자를 관리하는 공동체의 규 율은 나름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다.

영혜의 ‘신경성 거식증’은 거기에서 연원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포도당을 투여하려는 의사의 조치를 거부 하며 분명한 발음으로 고함을 지른다.

 

“싫……어……! 먹기 싫…… 어……!”(211쪽)

 

이 처절한 ‘자기 거부’의 목소리는 채식보다 훨씬 강력 하고 극적인 부정의 목소리임에는 틀림없다.

거식은 단지 음식을 거부하 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항의의 태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

 

    19) 임옥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여이연, 2010, 356쪽.

 

어떤 형 태의 영성도 광기로 치부되고 관리되는 이 시스템 하에서 사물로서의 규정을 벗고 자신의 근원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녀는 거식을 택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정 이 어찌 되었든 그녀의 거식이 채식으로부터 이어지는 강한 부정의 정 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5. 채식에서 거식으로

 

본고는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한강의 소설에 나타나는 채식의 의 미를 규명하고자 했다.

‘식물’과 ‘음식’을 결합하는 ‘채식’ 모티프는 한강 의 소설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라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생태윤리 학적 관점에 따르면 일종의 불매 운동(boycott)에 해당되는 채식주의는 자연을 회복시키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시 신성하게 만들며 우리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한 혁명적인 행동이라고 할 만하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채식은 육식으로 대변되는 남성적 질서를 교란하는 정치적 움 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정치가 구조화되는 방식은 우리가 동물, 특히 소비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식 혹은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재생산해내고 있는 기본 관념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바로 잡으며 그를 통해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실천적 움직임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따르면 채식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취향 의 문제나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정치적 운동 의 차원과 연관되며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류학적 비전을 제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연과 여성, 동 물 등 현대가 배제하고 억압해온 영역들의 자기 몫을 회복하기 위한 타 자의 윤리학이기도 하다. 한강의 소설은 여성 채식주의자를 통해 육식문화로 대변되는 남성적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저항적 움직임을 보여준다.

남편과 아버지 등 가족 공동체가 채식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을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채식을 금하고 육식을 강요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없게 되자 그녀를 정신병 동에 감금함으로써 사회로부터 추방한다.

자연 속의 생명이 협력과 상호 보살핌, 사랑 등의 ‘영성’으로 충만 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다만 어두운 ‘광기’의 그늘 속으로 유폐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채식에 대한 완강한 고수를 넘어 거식에 이른 여성의 육체 언어는 남성적 지배 질서를 대변 하는 기성 언어를 대체하며 여성적 욕망의 생태학적 윤리를 실천한다.

채식으로부터 거식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육체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당연히 꿈이나 독백의 형태처럼 의사소통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언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육체 언어를 통해 한강은 폭력으로 얼룩진 공동체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의 질서를 희망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 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주제어: 채식, 채식주의자, 생태윤리학, 육식 공동체, 영성, 광기

 

투 고 일 2010년 12월 13일 심사완료일 2010년 12월 23일

문학과 환경 9권 2호

KCI_FI0015049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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