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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고통과 문학, 고통의 문학-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을 중심으로-/김영찬.계명대

 〈 차 례 〉

1. 들어가며

2. 고통을 쓴다는 것

3. 고통의 목소리

4. 그리고, 고통의 연대

5. 고통의 안과 밖, 그리고 구원

6. 나가며

 

 

1. 들어가며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증언의 기록 이다. 이 소설에서 한강은 계엄군의 총에 죽은 소년 동호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그 중심에 놓고 1980년 5월 광주의 상처를 환기하고 증언한다. 특히 항쟁의 마지막 날인 5월 27일의 패배와 죽음, 그후로도 지속된 살 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프다.

한강의 소 년이 온다는 그렇게 1980년 5월 광주를 통과해온 희생자들의 죽음과 고 통의 기록이자 그들에 대한 문학적 애도의 제의(祭儀)다. 그런데 왜 지금 광주인가?

광주민주항쟁이 있은 지 30여 년이 흐른 지 금,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에 힘입어 진상은 이미 상당 정도 규명되 었고 그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증언 들도 이미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임철우의 봄날(1997)처럼 광주항쟁의 진실을 정면으로 파 헤치거나 아니면 적어도 중요한 모티프로 다룬 소설들도 적지 않음을 알 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광주에 대한 문학적 작업이 필요한 까닭은 무 엇인가?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서 실제 작가를 연상시키는 화자 ‘나’는 광주를 찾아 30여 년 전 죽은 소년 동호의 형을 만나는데, 동호의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하는 ‘나’에게 그가 건네는 다음의 당부는 그 질문 에 대한 작가 자신의 우회적인 답변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해주세요. 1)

 

     1) 한강(2014), 소년이 온다, 창비, 211쪽. 이하 이 작품을 인용할 때는 인용문 뒤 에 쪽수만 표시한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해달라는 동호 형의 당 부는 광주항쟁과 그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 현재진행형인 사태임을 강 력하게 암시한다. 공적·제도적인 차원에서 이미 복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의 상징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상기해보면2) 그러한 ‘모독’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사뭇 분명하 다.

그리고 이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한 쪽에서의 끊임없는 이데올로 기적 교란과 (일베식의) 혐오발화가 아직도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고 있 다는 데서도 드러나는 바다.

나아가 그러한 사태는 오늘 날 5월 광주의 비극과 고통이 여전히 다른 형태로 반복되면서 지속되고 있는 것과도 무 관하지 않다.

소설에서 “제대로 써야 합니다”라는 동호 형의 당부는 그런 현실에 맞서 ‘제대로 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되새기는 작가의 성찰적 다짐이 투사된 진술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1980년 광주를 ‘제대로 쓴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어쩌 면 무엇보다도 도청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소년 동호의 사연과 그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동원하는 “온갖 기법상 의 탐구” 3) 자체야말로 그 물음을 마주한 작가의 진심어린 싸움의 방증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작가인 ‘나’가 광주를 찾는 에피소드는 그런 측면 에서 이 소설 전체가 그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응답임을 사후적으로 암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제대로 쓰기’에 대한 작가의 응답이 어떤 시각과 방법론을 통 해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겠다.

즉 이 소설이 1980년 광주에 접근 하는 데 있어 다른 역사적 기록이나 사회정치적 해석과 차별화되는 문학 으로서의 고유한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어떤 방법 론을 통해 관철되며 그 성취의 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이 미 여러 논자들의 적절한 지적이 있었다.

가령 소년이 온다가 “광주를 역사화하는 과정이 여전히 놓치고 있는 지점”을 채우기 위해 “트라우마 의 어둠을 응시할 것을 제안한 시도”4)라거나 “광주를 익명의 집단적 비극으로 의미화 역사화하는 일에 저항하며 고통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것 이 소년이 온다의 성과”5)라는 등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2) 이에 대해서는 서영채(2014), 광주의 복수를 꿈꾸는 일-김경욱과 이해경의 장 편을 중심으로 , 문학동네, 봄호, 230~235쪽을 참조할 것.

    3) 백낙청(2014), 심사평 , 창작과비평 가을호, 478쪽.

    4) 황정아(2015),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문학 - 밤의 눈 과 소년이 온다 , 영미문학연구회, 안과 밖 제38호, 2015, 77쪽. 

 

각기 초점은 다르지만 이런 평가들은 모두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과거에 대한 단순 한 사실 기록을 넘어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드러낼 것 인가에 대한 중요한 문학적 탐구이자 응답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평가들에서도 공히 언급하는 바이지만,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 이후의 고통 혹은 트라우마의 증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참혹한 희생과 고통의 기록으로서, 그리고 그 속 에서도 빛을 발하는 인간 존엄을 위한 싸움의 상징으로서 5월 광주의 현 재성을 성공적으로 환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소 년이 온다에 대한 평가에서 흔히 간과되는 것은 이 소설에는 그러한 과 거의 기억과 증언의 차원에만 국한할 수 없는 보다 중요한 물음에 대한 탐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물음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끊이지 않는 인간과 세계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는 메타적인 물음이다. 6)

 

     5) 조연정(2014),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권여선의 레가토(2012)와 한강의 소년 이 온다(2014)를 중심으로 , 대중서사학회, 대중서사연구, 33호, 134쪽.

     6) 소년이 온다 에서 감각적인 개인의 고통에 대해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다음 진술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개인적 고통, 그 지극히 감각적인 고통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김연수(2015), 사랑이 아 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 한강과의 대화 , 창작과비평, 여름호, 306 쪽.

 

1980년 광주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죽음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근원에서 지탱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 리고 이를 보다 분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한강의 또 하나의 소설을 그 위에 겹쳐놓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뒤에 발표된 단편 눈 한송이 가 녹는 동안 (2015)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실상 제재도 전혀 다르 고 그래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지만, 어느 면 전작인 소년이 온다

에 내재한 문제의식을 또 다른 각도에서 펼쳐놓은 소설이다.

어떤 측면 에서 보면 한강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의 글쓰기를 통해 사후적으 로 소년이 온다의 의미망을 1980년 광주의 기억과 고통의 증언을 넘어 서는 어떤 것으로서 확장하고 있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소년이 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을 겹쳐 읽으면 서, 세상의 고통을 마주해 ‘제대로 쓴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한강의 문학적 사유의 의미를 추적한다.

 

2. 고통을 쓴다는 것

 

작가의 말처럼 소년이 온다의 중심에는 개별적 인간들이 겪는 “지극 히 감각적인 고통”이 있다.

그리고 한강은 그것을 쓰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소년이 온다의 서사는 그러한 물음 의 형식이자 그에 대해 가능한 하나의 소설적 응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년이 온다의 심층에는 과연 그 고통에 대해 쓴다는 것 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라는 또 하나의 물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는 사실이다.

그러한 물음은 따져보면 인간의 고통을 마주한 글쓰기의 (불)가능성과 쓸모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한강의 접근방식에 한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단편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 가 있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하 눈 한송이 )은 소박한 기대와 희망조 차 위협받으며 힘겹게 삶을 버티는 약하고 미미한 존재들의 불가피한 선 택과 싸움, 그로 인해 저마다의 삶을 뒤흔드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소설 이다.

소설은 오래 전 함께 일했던 직장상사였던 ‘그’(윤선배)가 ‘나’의 방 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삼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출 판사를 그만두고 시사잡지 편집부를 들어갔던 ‘그’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 인 기사가 인쇄 직전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파업 투쟁을 벌이다 퇴 사한 뒤 몇 년 후 암으로 죽었던 터다.

‘그’의 방문을 계기로 ‘나’가 기억 하게 되는 것은 십칠년 전 수습으로 일하던 첫 직장에서 ‘그’와 함께 겪 었던 일들이다.

결혼한 여사원에 대한 부당한 퇴사권고와 출근투쟁, 그로 인한 사원들 간의 반목과 갈등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 와중에 서로 다른 처지에 있었던 ‘그’와 경주 언니 사이의 미묘한 경계와 의심, 미미 한 실망, 그럼에도 지속되던 조심스러운 우정 같은 것들을 ‘나’는 떠올린 다.

그러던 경주 언니도 결혼 후 출근투쟁을 벌이다 퇴사한 지 얼마 안 돼 자동차 사고로 죽었던 것.

스물셋의 어린 ‘나’에게 배려를 베풀어주던 첫 직장의 상사였던 그들은 그렇게 모두 죽었다.

“ 나만 살았어.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내 중얼거릴 뻔했다.”7)

 

      . 7) 한강(2015),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 창작과비평 여름호, 306쪽. 아래에서 이 작품을 인용할 때는 쪽수만 표시한다.

 

그렇게 홀로 살아남은 ‘나’는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죽음을, 그리고 그 들처럼 모든 연약한 존재들의 고통의 기척을 오래도록 더듬고 있었을 것 이다.

‘나’가 지금 쓰고 있는 희곡을 결코 끝내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갖 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터다.

‘나’는 ‘그’-유령에게 희곡의 원래 구 상과 그에 얽힌 고민을 토로한다.

길 잃은 여자로 변신한 관음보살을 씻 겨준 승려가 황금 부처가 되고 그 여자를 씻겨준 물과 나무 욕조도 황금 으로 변했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도저히 쓸 수 없었다 는 것이다.

‘나’에 따르면 “그 승려들이 황금 부처가 될 것 같지 않았고 길 잃은 여자가 관음보살일 것 같지 않았”(눈 한송이 , 299쪽)기 때문이 다.

즉 고통에서 해방되는 그런 식의 초월과 해피엔딩은 현실에선 결코 가능하지 않다.

‘나’를 사로잡는 것은 오히려 피흘리는 세상에서 고통받 는 무력하고 미미한 존재들은 결코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을 수 없 으리라는 비관이다.

그래서 ‘나’는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희곡의 결말을 고쳐보려고 하지만, 그 또한 쓸 수 없긴 마찬가지다.

가령 다음 대목

 

소녀가 물 밖으로 걸어나온다. 젖은 옷에서, 팔뚝과 종아리에서 쉬지 않고 물이 흘러내리는데, 머리 위에 쌓인 눈만은 아직도 녹지 않았다. 무대 앞 객석 을 향해 한발씩 다가오며 그녀가 말한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어요. 당신은 잠들 수 있어요? 잠깐 잠들어도 꿈을 꿔요. 당신은 꿈을 꾸지 않아요? 언제나 같은 꿈이에요. 잃어버린 사람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거기서 멈췄다. 더 쓸 수 없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 고통의 바 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319쪽.)

 

‘나’가 쓰는 희곡 속에서 소녀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이 잊히지 않아 꿈에 보이고 잠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의 고통은 필시 잃어버린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는 데서 오는 고통 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오직 “상상 속 그녀의 고통만이”(320 쪽.) 오롯이 선연할 뿐, 그것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 고통의 바 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다가갈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타자의 고통 바깥에서 ‘나’는 과연 그 고통에 대해 쓸 수 있는 가?

그것이 이 장면의 심층에 숨어 있는 의문이다.

그에 따르면 쓸 수 없 는 것은 ‘나’가 타자의 고통 때문에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 대로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자각하기 때문 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저 생생한 자각이 그 자체로 갖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절대성을 마주한 문학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일 수 있지 만 거꾸로 보면 역설적으로 글쓰기가 출발해야 할 지점에 대한 강력한 암시라고도 할 수 있다.

타자가 겪는 고통의 심연에 다가가려 해도 결코 다가갈 수 없음을 자각한다는 것은 곧 ‘나’의 글쓰기가 놓인 (불)가능성 의 조건을 새롭게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쓸 수 없음에도 써야 한다면 그것은 그 고통의 심연에 다가갈 수 없다는 무섭도록 생생한 바 로 그 사실에 대한 정직한 감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쓸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이 불가능한 재현에 그럼에도 한 걸음 다가 가게 해주는 윤리적 출발점으로 역전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갈 수 없는 그 타자의 고통에 어떻게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쓸 것인가?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무력감을 토로하는 ‘나’의 고백을 통해 작가가 제기하는 것은 이러한 질문이다.

바 로 이 질문의 제기와 그에 대한 답변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불)가능 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소설 눈 한송이 의 이면에 숨겨진 하위텍스트 (subtext)다.

그런 맥락에서 타자의 고통이 ‘나’의 경계 바깥에 있음을 자 각하는 ‘나’의 고백은 또 다시 중요해진다.

그 고백을 통해 한강이 암시 하는 것은 결국 ‘나’의 내부에 ‘자기’로서 머무는 한 자기 바깥의 그 고통 에 결코 가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리라는 자각이다.

달리 말하 면 이는 가령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이 그것을 재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음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연민이나 공 감은 타자를 동일화하는 주체 중심적인 정신의 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소설이 유령- ‘그’의 뜻하지 않은 방문과 그와의 대화로 진행되어간다는 점은 의미심장 하다.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불)가능한 만남이 갖는 성격을 그 자체로 함 축한다.

거기에서 암시되는 것은, 무엇보다 타자는 오히려 ‘나’의 의지나 사고와는 무관하게 바깥에서 ‘나’에게 도래하고 침투하고 스며드는 우연 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언뜻 사소해 보일지도 모르는 눈 한송이 의 다음 대목은 그런 측면에서 징후적이다.

 

어쩐 일이세요?

반사적으로 나는 물었다. 그가 나에게 올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의 가족이 아니고 친구도 아니었다. 잠시라도 연인이거나 그 비슷한 무엇이었던 적도 없 었다. 하지만 내 질문이 무례하고 무정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덧붙여 말했다. 서 있지 말고 들어오세요.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턱을 마저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책상 앞 회정의자를 문 쪽으로 돌려놓았다. 여기 앉으실래요?(289~290쪽.)

 

이상해요,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뭐가? 그가 묻는 음성이 아득히 멀어진 것 같았다. 늘 생각하던 경주 언니가 오지 않고, 선배가 오늘 저에게 왔다는 게.(318쪽.)

 

“늘 생각하던 경주 언니”는 오지 않고 반대로 “나에게 올 이유가 없” 는 ‘그’가 방문한다.

타자는 소설 속의 ‘그’-유령처럼 그렇게 ‘나’의 의지 와는 무관하게 ‘나’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우연히 ‘나’에게 도래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를 방문한 그 타자가 죽음-유령이 라는 것은 중요하다. 유령은 현실의 경계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는 타자다.

그럼에도 ‘나’는 그 뜻하지 않은 유령의 방문을 기꺼이 받아들여 대접하고 그의 말에 반응한다.

그것은 ‘나’의 실존과 의식의 경 계를 지우고 바깥을 향해 ‘나’를 열어놓았을 때 가능해지는 일이다.

그럼 으로써 ‘나’는 바깥에서 오는 타자에게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인다.

그 렇게 타자의 고통은 서서히 ‘나’에게 전해지고 스며든다. 애초 삼년 전 죽은 유령이 우연히 ‘나’를 방문하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 자체가, 이러한 다가갈 수 없는 타자(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글쓰기에 대한 알 레고리적 극화(劇化)로 읽을 수 있는 여지는 그런 측면에서 충분하다 할 것이다.

 

3. 고통의 목소리

 

유령-죽음은 현실의 앎과 지각 바깥에 존재하는,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한강의 단편 눈 한송이 는 그렇게 실체성이 없는 유 령과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을 짐짓 무심한 듯 펼쳐놓는다.

그러한 설정 자체에서 우선 암시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현실의 틈새에서 말을 거는 타자에게 몸을 기울여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자기를 그 불가능한 대화의 공간 속으로 밀어넣는 시도다.

고통의 바깥에 있다 는 사실이 너무도 생생해 소설 속 ‘나’는 못다 쓴 희곡을 “더 쓸 수 없었 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을 어떻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를 유령과 눈을 마주치고8)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스스로 실연(實演)하 고 있는 셈이다.

 

나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손은 얼마나 차가울까. 거기 닿은 눈은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325쪽.)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 이다.

달리 말하면 눈이 녹지 않는 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와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은 시간의 바깥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이야기 를 들어달라는 타자의 간절한 목소리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목 소리에 응해 귀 기울이는 ‘나’의 움직임이 서로 만났을 때 생성되는 기적 의 순간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9)

   

      8)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326쪽.)

      9) 이 점은 ‘나’가 쓰고 있는 희곡의 내용에서도 어렴풋이 암시된다. “함께 있어주세요, 소녀가 말한다. / 젊은 승려가 멀찍이 서서 대답한다. / 그 건 안된단다. / 제발,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만. (……중략……) 왜 머리 위 눈 이 녹지 않을까? /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 고 있는데. /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316~317쪽.)

 눈 한송이 에서 한강이 말하는 것은 결국 그 짧은 순간의 기적 속에서 불가능한 ‘평화’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화자가 죽음-유령을 맞이해 오래 전 마음이 부서지 는 고통을 겪었던 연약한 존재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소설이 이런 구절로 마무리되는 것도 그런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말 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326쪽.)

 

눈 한송이 에서 ‘그’-유령과의 만남을 계기로 ‘나’가 떠올리는 사람들 의 고통은 “시간에 갇혀서 서로 찌르고 찔리면서 꿈틀거리”는 “상처 난 벌레”(314쪽.)와도 같은 연약한 존재들의 고통이다.

한강은 소설 속에서 ‘나’가 쓰고 있는 희곡의 내용을 그와 병치함으로써 저마다의 그 개별적 인 고통들을 정치적 탄압과 학살로 점철된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연 상시키는 고통의 맥락과 겹쳐놓는다.

앞에서 보았듯이 ‘나’가 쓰고 있는 희곡 속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잊히지 않아 잠들지 못하는 소녀의 고 통이 예컨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목소리는 ‘나’의 희곡 속에 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 겪고 있을 고통 때문에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다음 구절에서도 불현듯 그 고통의 목소리는 출현한다.

 

“지금도 k씨는 평화로워 보여”라는 ‘그’의 말에 ‘나’는 반박한 다.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평화로워진다는 건. 지금 이 순간도 누군 가 죽고.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뒤척이고 악몽을 꾸고. 내가 입을 다물었는데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이를 악물고 억울하다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간절하다고 간절하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어두운 도로에 던져져 피흘리고. 누군가가 넋이 되어서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누군가의 몸이 무너지고, 말이 으스러지고, 비판의 얼굴이 뭉개어지고.(321 쪽.)

 

‘나’가 입을 다물었는데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말한다.

이것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발원지로 자기를 내어주는 장면이다.

그럼으로써, ‘나’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선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러나 알 수 없고 보 이지도 않는 타자가 말한다.

타자의 고통에 전이되고 그 들리지 않는 고 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타자의 목소리는 ‘나’에게 스며들어 ‘나’를 꿰뚫고 ‘나’의 안에서 울린다.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런 것이다.

그리 고 더 나아간다면 이 대목은 사실 고통에 대한 글쓰기가 어떤 것이 되어 야 하고 또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한강의 사유를 상징적으로 극화하는 장면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몰래 ‘나’ 대신 타자가 말하는 이 비 현실적인 장면에 숨어 있는 것은, 저 고통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을, 자신의 어법과 스타일을 지워버리고 타자의 목소리에 자기를 내어주 어야 하리라는 어떤 방법론적 자각이다.

여기에서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행위(듣기)와 말하기는 하나로 겹쳐진다. 그 둘은 하나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그 이전에 한강이 소년이 온다에서 시도한 스타일과 서술방법이 바로 그 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소년이 온다의 창 작과정에 대해 한강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심장한 맥락이 있 었던 셈이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는 저 자신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제 자의식을 지우고 최대한 그 목소리들이 되려고만 했어요. 10)

 

    10) 김연수, 앞의 글, 326쪽.

 

이것은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오래 전 1980년 광주의 진실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 나름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의 한가운데 있는 보이지 않는 타자의 고통을 기억 하고 증언하는 일이었을 터, “자의식을 지우고 최대한 그 목소리들이 되 려고만” 했다는 작가의 시도는 그 기억과 증언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 를 암시한다.

그것은 곧 스스로를 저마다의 개별적인 고통의 목소리가 들어설 공간으로 개방하고 스스로 그 목소리의 발원지가 되는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은 (영화 <쇼아(Shoah)>의 증언에 대한 쇼샤 나 펠먼의 표현11)을 잠시 빌리자면) 1980년 광주라는 그 고통의 장소의 안과 밖을 연결하고 서로 대화하게 하면서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불가능한 위치를 발견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눈 한송이 의 저 장면은 소년이 온다를 관통하 는 작가 자신의 고심과 방법론적 선택의 핵심을 장면화하는 사후적인 소 설적 주석으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4. 그리고, 고통의 연대

 

그렇다면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1980년 광주의 고통을 어떻게 기 억하고 또 증언하고 있었는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1980년 5월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오래도 록 겪어야 했던 고통스런 사연을 들려준다.

항쟁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 은 모두 그날의 기억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1980년 광주를 현재의 사건으로 앓고 있 는 사람들이다.

한강은 과거 광주의 현장에서 시작해 30년 후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건너뛰는 단절적인 구성 속에서 초점화자를 옮겨가며 살아남은 자들의 삶에서 지속되는 폭력과 억압, 끔찍한 고문의 고통과 수치심 등을 부각한다.

이들은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출판사에 취직해 군사정권의 검열과 탄압을 겪으며 홀로 살아남은 수치심을 견디고 있거 나(김은숙), 참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김진수)

또 노동운동을 그만두고 환경단체에서 상근하는 중 광주에 대 한 증언을 요청받고 증언할 수 없는 고문의 고통에 몸서리치는 이도 있다.(임선주)

그러면서 작가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5월 광주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 저마다의 기억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항쟁의 마지막 날 계엄군의 총에 죽은 소년 동호에 대한 기억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에필로그’에서 작가-‘나’는 동호의 이야기를 “제대 로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한 바 있다.

한강이 선택하는 그 ‘제대로 쓰기’의 방법론은 바로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끊임없이 되살아나 는 트라우마로서 동호를 소환하는 것이다.

김은숙과 김진수, 임선주 등의 후일담에서 이들의 고통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어린 동호를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혹은 그를 남겨두고 도청으로 돌아기지 않았다는, 그렇게 동호는 죽고 자기는 살아남았다는 자책과 죄의식이다.

한강은 그 렇게 살아남아 고통을 겪는 자들이 죽은 자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내부화 하는 그 슬픔과 죄의식의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그 고통은 불가능 한 애도의 고통이다.

애도란 본시 상실한 대상을 떠나보내는 것이지만, 이들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1980년 5월의 트라우마는 이들에게는 여 전히 현재진행형인 고통이기 때문이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동호는 그 트라우마의 중핵이다.

소설의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애초 소년이 온다의 기획은 어두운 죽음의 기억 속에 묻혀 있는 소년을 현재 속에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그 것은 에필로그에서 ‘나’가 환상 속에서 듣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에서도 분명하게 암시되는 바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 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 를 바랍니다.”(213쪽)

 

그렇다면 소년 동호를 그렇게 되살려내기 위해 작 가가 선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물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떠 나보내지 못하는 그 불가능한 애도와 죄의식의 고통을 끊임없이 반복하 고 환기하게 함으로써 동호를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떠오르게 하는 것이 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속에서 트라우마적 기억 으로 존재하는 동호를 그들의 목소리로 불러내는 것이다.

김은숙이 검열

로 대사가 모두 삭제된, 5월 광주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연극을 보는 장 면에서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102~103쪽)

 

그녀는 무대 위 소년의 모습에 동호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그리고 “고 개를 뒤로 꺾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입술이 자신도 모르게 달 싹인다.”(101쪽.)

 

이 장면에서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들리 지 않는 목소리는 따라서 동호의 목소리인 동시에 그 목소리를 빌려 말 하는 그녀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불가피하게도 이 대목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눈 한송이 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즉 이것은 그 자체로 들리 지 않는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타자의 목소리가 ‘나’에게 스 며들어 ‘나’를 꿰뚫고 ‘나’ 대신 말하는 그러한 사건이다.

소설에서 이 장 면이 유독 기이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실제 작가의 목소리를 포함 해(어쩌면 독자의 목소리까지도) 고통에 전이되는 여러 겹의 주체의 목 소리가 그 주인 없는 목소리 속에 겹쳐 울리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 기 때문이다.

고통의 목소리는 그렇게 하나로 겹쳐진다.

소설에서 동호는 그 고통의 목소리‘들’을 통해 끊임없이 호명되는데, 이 장면은 그러한 소설의 전체  발상을 극적으로 장면화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 서 다음 구절은 소설 전체에 걸쳐 말없이 전이되는 고통의 목소리 속에 서 동호가 환기되고 호명되는 방식을 그녀 스스로 실연(實演)하는 것이 라고도 볼 수 있다.

 

그녀는, “배우들을 흉내 내듯 목구멍을 쓰지 않고 부 른다. 동호야.”(101쪽.)

 

소설에서 동호는 인물들의 살아남음의 수치와 죄의식을 환기하는 존 재이지만, 그들 모두는 그를 잊지 않고 어떻게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 신의 삶 속으로 호명한다.

이때 이들의 고통스런 죄의식이란 다름 아닌 살아남은 자들이 스스로의 고통을 죽은 자들의 고통과 겹쳐놓는 연대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장면에서 그녀(김은숙)가 무대 위 소년의 모습을 통해 동호의 이미지를 불러들이는 것처럼, “직선으로 쓰 러져 죽어 있는”(132쪽.) 동호의 사진을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던 김진수 또한 그러했다. 죽기 위해 그 도시에 다시 갔다가 고통스럽게 죽어 있는 동호의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된 임선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말한다.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 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176쪽.)

 

죄의식의 고통이 소년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년 이 온다에서 인물들이 모두 동호를 ‘너’라는 이인칭으로 호명하고 있다 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라는 이인칭은 그를 부르는 ‘나’와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함축하는 인칭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 속 인물들이 과거의 동호를 ‘너’라고 호명할 때 과거의 그는 비로소 그를 부르는 그들 의 현재 속에 불려와 존재하게 된다. 12)

그것은 한편으로 죽은 동호를 떠 나보내지 못하는 인물들의 우울증적 태도의 표현이지만, 그는 그럼으로써만 과거의 망각과 죽음의 어둠으로부터 현재의 한가운데로 불려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소년은 그렇게 죽은 자를 자기의 내부로 끌어 안는 우울증적 태도 속에서 호명되고 또 그럼으로써만 되살아난다.

소설 에서 임선주가 밤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누군가의 걸음 소리를 듣는 것도 동호를 그렇게 자기 죄의식의 한가운데로 불러들여 되살려내려는 상상적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소설의 애초 구상은 소년 동호를 현재 속 에 떠오르게 해 밝은 빛 속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학살에 희생된 소년을 망각의 어둠으로부터 되살려내 구원해내는 것이 이 소설 의 지향점이다.

이때 동호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살아남은 자 모두를 고 통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1980년 5월 광주를 구원하는 것 이다.

그리고 작가가 고통을 견디고 그와 싸웠던 그들 모두에게서 단순 한 희생자의 고통을 넘어선 인간적 존엄의 증거를 소설 곳곳에서 확인하 고 강조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13)

 

    12) 한강의 다음 진술도 그러한 이인칭의 수행적 효과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발언이다. “동호는 죽은 소년이지만, 부르면 거기 어둠으로부터 떠올라서 존재하게 돼요. 호명하고 또 호명하면 현재 속에 가까스로 떠오르는 ‘너’에요.” 김연수, 앞의 글, 324쪽.

    13) 에필로그에서 ‘나’의 다음 진술도 그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들이 희생자 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 에 거기 남았다.”(213쪽.)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그러한 작업이 무엇보다 과거 속에 묻혀 있던 그 고통의 목소리들을 가 시화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통과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동호는 그런 고통의 연대를 통해서만 되살아나고 구원받는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5. 고통의 안과 밖, 그리고 구원

 

이 지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장으로 덧붙여진 ‘에 필로그’다.

소설의 마지막 ‘에필로그’에는 동호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실제 작가를 연상시키는 화자가 현재 시점으로 등장한다.

열 살 무렵 어 른들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끔찍한 학살의 소식, ‘나’가 어린 시절 떠나온 광주 중흥동 옛집으로 이사 온 소년의 죽음에 얽힌 안타까 운 사연, 세월이 흘러 그 소년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광주를 찾아 소년의 가족을 만나고 5·18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빠져드는 슬픔과 고통, 그리고 소년의 무덤을 찾아 초를 태우는 ‘나’-작가.

이런 내용들이 에필로그에서 서술된다.

실제 작가의 이야기임이 강하게 암시되는 이 에필로그는 언뜻 소년이 온다의 창작동기를 이야기하기 위해 덧붙여진 부록과 같은 것 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소설의 끝에 하나의 독립된 장으 로 삽입된 이 ‘에필로그’는 실은 이 소설의 의미구조를 완성하는 데 실질 적인 역할을 하는, 소설의 중요한 일부로 기능한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소설가 화자 ‘나’가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와 소설 쓰기를 앞두고 겪는 일들을 바로 그 소설의 일부로 통합하는 독특 한 구성은 글쓰기의 자의식을 감각적으로 극화(劇化)하는 효과적인 장치 로 작용한다.

그 자의식이란 다름 아닌 5 18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 가, 또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성찰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5 18이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광주의 이야기를 쓰기로 하면서 ‘나’가 겪는 내면의 분투와 고통의 전이 가 자세하게 서술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그럼으로써 이 에필로그는 앞에서 서술된 내용들 전체의 의미와 맥락을 그 사태의 바깥에 있는 ‘나’ 의 관점에서 사후적으로 구성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소년의 이야기를 쓰 기 위해 자료를 읽고 사람들을 만나는 ‘나’의 행적은 그런 측면에서 ‘나’ 혹은 작가 자신에게 5 18에 대한 글쓰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또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바로 그 성찰의 궤적을 재연하는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대체 광주란 무엇인가?

‘나’는 문득 용 산참사의 현장을 영상으로 보던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 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쪽.)

 

용산은 광주다.

이에 따르면 광주는 지금 이곳에서 수없이 다른 이름 으로 되태어나 여전히 짓밟히고 훼손되고 있다.

반민중적인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과 야만의 역사가 있는 한 1980년 광주는 그렇게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죽음과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죽음과 고통은 ‘나’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인데, 에필로그의 전반부에서 그날 희생된 소년 동호가 교사였던 아버지가 가르쳤고 ‘나’가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였다는 사실이 소개되면서 그 점이 암시된다.

5월 광주는 그렇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되살아나는 현재적인 고통이다.

그리고 작가 인 ‘나’는 과거에도 그렇듯이 지금도 그 고통에 보이지 않게 연루되어 있 고 그래서 그것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문제는, ‘나’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소설에서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나’가 직면하는 그런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겪는 마음의 고투는 이렇게 묘사된다.

 

누군가에게 조그만 라디오를 선물받았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계기판에 연도와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걸 받아들고 나는 ‘1980.5.15.’이라고 입력했다. 그 일을 쓰려면 거기 있어봐야 하니까.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인적 없는 광화문 네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그렇지, 시간만 이동하는 거니까. 여긴 서울이니까. 오월이면 봄이 어야 하는데 거리는 십일월 어느날처럼 춥고 황량했다. 무섭도록 고요했 다.(204쪽.)

 

‘나’는 그렇게 1980년 5월에 있었던 일을 쓰려면 거기에 있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의 ‘나’는 그 고통에 다가갈 수 없음을 무섭도록 생생하게 자각할 뿐이다. 14)

 

       14) 그런 측면에서 이 대목은 (앞에서 언급한) 자신이 고통의 바깥에 있음을 절감 하고 그래서 쓸 수 없다고 절망하는 눈 한송이 의 ‘나’의 의식과 공명한다.

 

그러면 어떻게 쓸 것인가?

직접 광 주로 내려가 상무관을 찾고 영상을 보고 자료를 읽는 등의 ‘나’의 행적 자체가 이미 그러한 물음을 좇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와 관 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것은 특히 다음 두 장면이다.

 

  ① 그러던 어느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2013년 1월 의 서울 거리는 며칠 전의 꿈속처럼 황량하고 차가웠다. 예식장의 샹들리 에는 화려했다. 사람들은 화사하고 태연하고 낯설어 보였다. 믿을 수 없었 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평론을 쓰는 한 선배는 나에게 왜 소설 집을 보내주지 않느냐며 웃으면서 항의했다.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 나 많이 죽었는데.(205쪽.)

②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 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 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203쪽.)

 

이것은 ‘나’가 자료와 영상을 통해 과거 5월 광주의 생생한 현장에 다 가가기 시작하면서 겪는 고통스런 감정이입의 순간들이다.

이 장면들은 그런 측면에서 소년이 온다의 글쓰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시작되는지 를 상징적으로 극화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2013년 1월 서울에서 누군가 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겪는 에피소드를 그린 ①에서, 현재 위에 과거를 겹쳐놓고 현재의 상황을 오히려 낯선 것으로 거리화하는 지각(知覺)의 혼란은 ‘나’가 과거 광주의 고통과 죽음을 생생한 현재적 사건으로 경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과거의 죽음과 고통의 현재적 전이가 발생하는 장면이다.

군인을 피해 달아나다가 총검에 가슴을 찔리는 꿈을 꾸고 깨어나 공포에 사로잡히는 장면 ②도 그런 점 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자신의 의식과 감각을 지금 이곳의 현실로부터 분리 시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죽은 자들의 고통과 겹쳐놓는 무의지적 사유 활동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그저 글쓰기를 앞 둔 ‘나’의 갈등과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면쯤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로써 발생하는 효과다. 이 장면들은 모두 과거 광주 에서의 죽음과 고통이 현실의 ‘나’를 탈존(脫存)시키면서 ‘나’에게 전해지 고 ‘나’의 내부로 스며드는 장면을 극화한다.

이는 곧 소년이 온다의 글쓰기가 ‘나’에게 침투하고 스며드는 그 과거의 죽음과 고통의 목소리를 내부화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장면들은 에필로그 앞의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고통의 연 대를 그 이야기의 바깥에서 ‘나’-작가가 자기 스스로 실연(實演)하는 장 면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안과 밖은, 그리고 고통의 안과 밖 은 그렇게 공명하고 연결된다. 앞에서 나는 소년이 온다의 글쓰기에는 1980년 광주라는 고통의 장 소의 안과 밖을 연결하고 서로 대화하게 하면서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 하는 불가능한 위치를 발견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애초 타자의 목소리와 관련한 지적이었지만, 사실 소설의 일부로 통합된 이 에필로그야말로 그것을 구조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바로 이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쓰기 로 하면서 실제로 경험했으리라 짐작되는 고통의 전이를 에필로그 형식 을 통해 그대로 소설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와 통합함으로써 소설의 공간 자체를 안과 밖의 전이와 대화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동호를 호명해 밝은 빛 속으로 되살려내려고 하는 글쓰기의 의도와 전략 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장해주는 것도 바로 그러한 구조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의 공간은 어둠과 망각 속에 갇혀 있던 동호가 밝은 빛 속으로 이끌려 나오는 공간이며 (소년의 무덤 앞에서 초를 밝히는 ‘나’의 행위에 서도 암시되듯이) 그럼으로써 소년의 구원과 그에 대한 애도가 완성되는 공간이다.

즉 그 공간은 소설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그럼으로써 동호의 구원이라는 기적을 완성하는 공간인 셈이다.

 

6. 나가며

 

일찍이 아도르노는 이렇게 반문한 바 있다.

“만일 축적된 고통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린다면 역사 기술로서의 예술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 가?”15)

 

       15) 테오도르 아도르노(2005), 홍승용 옮김, 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402쪽.

 

한강의 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과 소년이 온다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가능한 응답이자 또 하나의 물음의 형식이다.

문학은 이 세 계와 인간의 고통에 어떻게 다가가고 또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한강 소설의 심층에는 바로 이러한 물음이 존재한다.

한강의 소설이 다가가려 고 하는 그 고통은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고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각 기 다른 개인의 고유한 기억과 신체에 저마다의 무늬와 강도로 새겨지는 개별적 고통이기도 하다.

특히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는 모든 고통받는 존재들의 연대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그 고통의 연대 속에서도 기어 이 빛을 발하는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것을 통해 한강 의 소설이 묻고 있는 것은 결국 문학이 그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에 어떤 몫을 보탤 수 있는가라는 자기반영적인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의 질문으로 되돌 아갈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미미하고 연약한 존재들이 겪는 고통의 절대성으로부터 구원은 가능한가?

문학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응시하면 서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강의 소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문학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그 쓴다는 것의 불가능을 끌어안고 그럼에도 무릅쓰고 써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 들리지 않는 고 통의 목소리에 간절히 귀 기울이고 몸을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야 한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에서처럼 문학을 통한 구원의 순간은 어쩌 면 시간 밖의 시간,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의 짧은 순간의 기적 속 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쳐 지나가버리 는 순간의 불가능한 기적을 창조하기 위해 진심과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 어쩌면 그것이 무력한 문학에 주어진 가능한 한 줌의 몫이랄 수도 있 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연수(2015),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강과의 대화 , 창작 과비평, 여름호, 창비, 312∼332쪽. 백낙청(2014), 심사평 , 창작과비평 가을호, 창비, 478∼479쪽. 서영채(2014), 광주의 복수를 꿈꾸는 일-김경욱과 이해경의 장편을 중심으로 , 문학동네, 봄호, 문학동네, 228∼254쪽. 조연정(2014),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권여선의 레가토(2012)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를 중심으로 , 대중서사연구, 33호, 대중서사학회, 101∼138쪽. 황정아(2015), ‘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문학 - 밤의 눈 과 소년이 온다 , 영미문학연구회, 안과 밖 제38호, 창비, 58∼79쪽. 조르조 아감벤(2012), 정문영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테오도르 아도르노(2005), 홍승용 옮김, 미학이론, 문학과지성사.

 

〈국문 요약〉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어떻게 기억하고 드러 낼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문학적 탐구이자 응답이다.

이 소설은 일차적으 로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과 증언의 기록이지만, 그것을 통 해 그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차원의 물음을 제기한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인간과 세계의 고통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라 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1980년 광주의 희생자들이 겪었던 죽음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문제의식을 근원에서 지탱하는 것은 그러한 근본 적인 물음이다.

이 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하게 가시화하기 위해서 한강 의 또 하나의 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을 겹쳐 읽는다.

이 소설은 소년이 온다를 관통하는 작가의 방법론적 고민과 선택의 핵심을 장면화 하는 소설적 주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소년이 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을 겹쳐 읽으면서 세상의 고통을 마주한 문학이 그에 대해 ‘제대로 쓴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마주한 한강의 문학적 사유가 갖는 의미를 추적한다.

 

◎ 주제어: 고통, 트라우마, 재현, 타자, 목소리, 애도

 

- Pains and Literature, or Literature of Pain -Focusing on Hangang’s Novel The Boy Is Coming and During a Snow Thaw Out

Kim, Young-chan (Keimyng University)

Hangang’s novel The Boy Is Coming is a important literal study and response to the question how remember and reveal the truth of Kwangju in 1980. This novel primarily represent, remember and testimony trauma of Kwangju in 1980, that leads to raise a question a more universal problem. That is a fundamental literal question what is to be done and how to write facing pains of human being. What support the problematic of this novel is that question. In order to visualize that, this essay reads Hangang’s another short story novel with it. That is During a Snow Thraw Out. This short story is unfolding the problematic of The Boy Is Coming in a different standpoint. In a sense, the writing of this short story expands the meaning of The Boy Is Coming from a representation of memory and pains of Kwangju to a certain universal question. From that point of view, this essay trace the meaning of Hangang’s literal thought facing the question what is write properly in the painful world.

 

Keywords: Pains, Trauma, Representation, the other, voice, mourning

 

 ◎ 논문접수: 2017년 2월 27일 ◎ 논문심사: 2017년 2월 28일 ~ 3월 24일 ◎ 게재결정: 2017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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