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 연구사 검토 및 문제 제기
한강은 1970년 11월에 광주에서 태어나 10살이 되던 1980년 1월에 서울 수유리로 옮겨와 살아간다.
대학 졸업 후 잡지사에 근무하던 1993년,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이 당선되고, 이어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을 발표하며 시인이자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현재까지 발표된 소설집으로는 『여수의 사랑』(1995), 『내 여자의 열매』(2000), 『노랑무늬영원』 (2012) 등 3권이, 장편소설로는 『검은 사슴』(1998), 『그대의 차가운 손』(2002), 『채식주의자』(2007), 『바람이 분다, 가라』(2010), 『희랍어 시간』(2011), 『소년 이 온다』(2014), 『흰』(2016) 등 7권이, 그리고 시집으로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 다』(2013)가 있다. 등단 당시, 90년대의 신세대적 작가답지 않다며 “그의 문장은 아 름답고 서정적이지만, 이즈음의 작가들처럼 관능적이거나 해체적이지 않고, 그의 감수 성은 섬세하고 예민하지만 오늘의 세대처럼 경쾌하거나 현학적이지 않다”1)는 평을 받 은 한강은 그때부터 자신만의 걸음걸이로 매 작품마다 섬세하고 깊은 질문을 던지며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한편 2016년 『채식주의자』가 한국 작가 최초로 맨부커 상을 받으며 평단은 물론 기존에 한강의 작품을 몰랐던 이들에게까지 큰 반향을 일으 키기도 했다.2)
지금까지의 작품에 대한 평단과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더하여 앞으 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2019년 지금까지 한강 작품을 단독으로 다룬 학위논문은 석사학위논문이 10편 있으 며 박사학위논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석사학위논문을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김선 희3)는 한강 소설을 초기작과 후기작으로 나누어 서사적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작품에 나타난 서사적 특성의 변화 양상을 크게 인물의 변화 양상 연구, 서술 양상의 변화, 결말의 양상 등 세 측면에서 논의하였다.
1) 김병익, 「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307
2) 출간 후 약 10년 간 2만부 팔렸던 책이, 맨부커상 수상 후 나흘 만에 누적판매 31만부를 기록했 다고 한다(<한강 '채식주의자', 10년간 2만부·3일 만에 25만부>,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2016.5.19.).
3) 김선희,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서사적 특성의 변화 양상」,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한아름4)은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분석하는데, 동물적 남성성과 이성적 담론으로 대변되는 이성적 주체와 그런 폭력적 현실에서 잃어버린 타자를 추구하는 인간을 연구하였다.
조려나5)는 『채식주의자』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가부장제가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 지, 그러한 억압에 맞서 여성은 어떻게 저항을 하는지, 그리고 그 저항은 어떠한 영향 을 초래하는지 등을 논의하였다.
주은경6)은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 「내 여자의 열 매」와 『채식주의자』를 연구함으로써, 소설 속 인물이 타자화되는 모습이 어떤 의미 가 있는 것인지, 나아가 여성의 주체성 획득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며 궁극적 지향 으로 남성과 여성이 하나가 되는 에코페니즘에 대해 논의하였다.
서민향7)은 한강의 초기작들에서 나타나는 질병에 크게 두 가지 의미, 질병이 서사의 주요 정보를 표상한 다는 점과 질병이 인물들의 삶을 투영하여 존재론적 의미로 확대된다는 점이 있음을 논의하였다.
강연옥8)은 「몽고반점」을 대상으로 하여, 자본주의 시대에서 예술가의 절대미 추구 과정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론을 토대로 논의하였다.
한정희9)는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몸을 통해 고통 받는 점에 주목하여,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율화 된 몸이 겪는 고통을 드러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타자와의 교감 및 새로운 사회로 의 탈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푸코와 메를로-퐁티를 토대로 하여 논의하였다.
정서화10)는 한강 소설의 인물 양상을 크게 떠도는 자들, 팜므프라질(femme fragile : 팜므 파탈Femme fatale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유래된 이 여성 델은 아이와 같은 외모와 연약하고 창백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상적 여성상으로 그려지 며 자기 소멸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함), 예술가들, 도시인들 등 네 가지로 나 누어 각각의 인물 정체성을 분석하고 그 갱신의 양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논의하였 다.
4) 한아름, 「한강 소설에 나타난 주체와 타자 연구」, 서울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5) 조려나, 「한강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 연구」, 숭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6) 주은경, 「한강소설에 나타난 에코페미니즘 양상 연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7) 서민향,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병증의 서사기능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8) 강연옥, 「『몽고반점』의 미의식 연구-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이론’을 중심으로」, 제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9) 한정희, 「한강 소설 연구-몸 담론을 중심으로」,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10) 정서화, 「한강 소설의 인물 정체성 연구-인물 정체성과 갱신의 양상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유용억11)은 한강 소설의 인물 양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였는데 차례로 비극적 현실 인식과 병리적 증상, 여성 인물들의 폭력적 현실 인식, 삶을 향한 의지와 회복의 의미 측면에서 논의하였다.
11) 유용억, 「한강 소설의 인물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박은희12)는 한강의 소설을 에코페미니즘과 환상성 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가부장제의 폭력적 현실 속에서 유폐되어 가는 여성의 삶, 그러한 현실의 부조리에 균열을 일어나는 순간,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발견되는 또 다른 세계인 실재계와의 교섭 등을 살펴봄으로써, 한강의 소설이 여성과 자연의 해방 을 통해 잃어버린 총체성을 회복하려고 한다는 점을 논의하였다.
12) 박은희, 「한강 소설 연구-에코페미니즘과 환상성의 결합 양상을 중심으로」,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이처럼 총 10편의 석사학위논문을 살펴본 결과, 공통적으로 10편의 학위논문 모두 가 『채식주의자』를 다루고 있었으며 이 중 3편이 『채식주의자』을 중심으로 한 (에 코)페미니즘적 논의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다수의 논문이 작품의 인물 양상에 주목하 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편, 최근작이자 한강의 작품 중에서도 기존과는 다른 특성에 서 뛰어난 성취로 평가받는 『소년이 온다』에 관한 논의는 아직 다루어 지지 않았음 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의 작품성과 꾸준한 작품 활동에 비하여 학위논문의 편수가 다소 아쉽다고 여겨 지는 반면, 문예지를 통한 서평이나 평론, 리뷰, 그리고 일반논문 등의 연구에서는 논 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왔다.
이는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이기에 나타나는 특 성이기도 할 것이다. 한강 작품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특정 작품을 대상으로 삼아 이 루어진 경우가 다수이다.
이에 연구 대상으로 다루어진 작품에 따라 지금까지 이루어 진 연구 성과를 나누어보자면 크게 4가지 정도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작품 의 발표 시기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해보자면
1) 첫째로, 초기작인 『여수의 사랑』 과 『검은 사슴』을 중심으로 한 논의들13),
2) 둘째로,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 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논의들14),
3) 셋째로,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한 논의 들15),
13) 1. ➀ 김병익, 「희망 없는 세상을, 고아처럼」,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p.306 ➁ 서준섭, 「가족, 개인, 사회–이혜경, 『길 위의 집』,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 과사회」, 1995 겨울호. ➂ 홍기돈, 「그림자로 놓인 오십 개의 징검다리 건너기」, 『작가세 계』, 제11권, 1999. ➃ 김형수, 「타자(他者)에 대한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사림어문연구 제 16권, 2006. ➄ 공임순, 「세상을 읽는 방식들에 관한 이야기」, 창작과비평, 1998 겨울호. ➅ 김동식, 「존재를 위하여 : 한강과 윤대녕(『여수의 사랑』, 『남쪽 계단을 보라』)」, 문학동네, 1995 겨울호.
14) 2. ➀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 : ‘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제59집. ② 심진경, 「산문적 현실을 비껴가는 시적 초월의 꿈」, 실천문학, 2000 여름호. ③ 김 예림, 「식물-되기의 고통 혹은 아름다움에 관하여」, 창작과비평, 2008 봄호. ➃ 장영우, 「육식 의 거부와 폭력의 부정-『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작가세계, 2016 가을호. ➄ 우미영, 「주 체화의 역설과 우울증적 주체」, 여성문화연구 제30호, 2013. ➅ 신수정, 「한강 소설에 나타나 는 ‘채식’의 의미-『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문학과환경 9권, 2010. ➆ 조강석·조연정·양윤의·이경재 리뷰좌담, 「관계의 만화경」 중 ‘세 개의 자각과 하나의 질문-『채식주의자』’, 문학 동네, 2008 봄호. ➇ 나병철, 「한강 소설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환상과 에로스의 회생-「내 여자 의 열매」와 「몽고반점」을 중심으로」, 청람어문교육 61집, 2017. ➈ 오은엽, 「한강 소설에 나타난 ‘나무’ 이미지와 식물적 상상력-「채식주의자」, 「나무불꽃」, 「내 여자의 열매」를 중 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비평 제72집, 2016. ➉ 나선혜, 「한강 소설에 나타난 생태학적 양상 고찰」, 한국문예비평연구 제57집, 2018.
15) 3. ➀ 서영채, 「문학의 윤리와 미학의 정치–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성석제의 『투명인간』 에 대하여」, 문학동네, 2014 가을호. ➁ 양윤의, 「문학의 동시대성에 대하여-2014년 발표된 장 편소설을 중심으로」, 작가들, 2015. ➂ 유희석, 「문학의 실험과 증언-한강과 공선옥의 최근 장 편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14 겨울호. ➃ 김경민, 「2인칭 서술로 구현되는 기억·윤리·공감 의 서사」, 한국문학이론과비평, 제81집. ➄ 이선우,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실천문학, 2014 겨울호. ➅ 김명인, 「기억과 애도의 문학, 혹은 정치학-한강의 『소년이 온다』」, 작가들, 2016 가을호. ➆ 김요섭, 「역사의 눈과 말해지지 않은 소년-조갑상 의 『밤의 눈』과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5 가을호. ➇ 김미정, 「‘기억-정동’ 전쟁의 시대와 문학적 항쟁-한강의 『소년이 온다』(2014)가 놓인 자리」, 인문학 연구 제54집. ➈ 이숙,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폭력의 기억과 인간의 본질 – 한강의 『소년이 온 다』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제60집. ➉ 조연정,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권여선의 『레가토』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제20권, 2014. ⑪ 조성희,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홀로코스트 문학-고통과 치욕의 증언과 원한의 윤리를 중심으로」, 세계문학비교연구 제62집, 2018. ⑫ 최윤경, 「소설이 오월-죽음을 사유하는 방식-한강의 『소 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인권 제16권, 2016. ⑬ 심영의, 「5·18소설에서 항쟁 주체 의 문제-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의 경우」, 민주주의와인권 제15권, 2015. ⑭ 한순미, 「나무 -몸-시체 –5.18전후의 역사 폭력을 생각하는 삼각 운동」, 인문학연구 제52집, 2016. ⑮ 정미선, 「오월소설의 서사 전략으로서의 몸 은유-최윤·임철우·박솔뫼·한강의 사례를 중심으로」, 어문논 총 제27호, 2015.
4) 넷째로, 이상 언급한 작품 외 다른 작품을 다루거나, 한강의 작품 세계를 두 루 다루며 작가론을 펴는 논의들16) 등이다.
16) 4. ➀ 신샛별,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 창작과비평, 2016 여름호.. ➁ 권희철,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학동네, 2016 가을호 ➂ 박진, 「한강 소설에 나타난 주체 화의 양상과 타자 윤리 문제-『바람이 분다, 가라』와 『희랍어 시간』을 중심으로」, 한국언어 문화 제 59집. ➃ 양현진,「한강소설의 분신(分身) 구조와 주체성」, 현대소설연구 제71호. ➄ 박 윤영, 「그 ‘삶’을 기억하라-한강론」, 실천문학, 2016 가을호. ➅ 최원식, 「우리 시대 한국문학 의 두 촉-한강과 권여선」, 창작과비평, 2016 겨울호. ➆ 김영찬, 「고통과 문학, 고통의 문학한강의 『소년이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중심으로」, 우리말글 제72권 ➇ 손정수, 「식물이 자라는 속도로 글쓰기」, 작가세계, 2011 봄호. ➈ 우찬제, 「진실의 숨결과 서사의 파 동」, 문학과사회, 2010봄호. ➉ 조연정,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신경숙과 한강의 최근 소설(『희랍어시간』)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2 여름호. ⑪ 정영훈, 「사라진 감각은 또 다른 감각을 부른다-『희랍어시간』」, 세계의문학, 2012 봄호. ⑫ 백지은, 「아픔을 앓/알다-『노랑 무늬영원』」, 문학과사회, 2013 봄호. ⑬ 박진영, 「환멸을 이겨낼, 생의 음화(陰畫)들」, 작가세 계, 2011 봄호. ⑭ 황경, 「한강 소설에 나타난 예술(가) 의식 연구-『희랍어 시간』과 『노랑무 늬영원』을 중심으로」,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45, 2019. ⑮ 강동호, 「피안(彼岸)의 피, 피 안 의 먹-『바람이 분다, 가라』」, 세계의문학, 2010 여름호. ⑯ 오혜진·윤재민·이재경·양경언 리뷰 좌담, 「2015년 여름의 한국소설」 중 ‘유령의 귀환 혹은 ‘평화’를 얻는 방법-「눈 한송이가 녹 는 동안」’, 문학동네, 2015 가을호. ⑰ 신수정 리뷰, 「모든 소설들은 음악소리를 낸다-2010년 봄, 장편소설의 행방」 중 ‘또 다른 평전 쓰기-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2010 여름호. ⑱ 신샛별·이소연·이학영·정실비 리뷰좌담, 「희로애락의 악보들-2012년 여름의 한국소설」 중 ‘고통 의 비브라토–(...) 한강 「밝아지기 전에」’, 문학동네, 2012 가을호. ⑲ 김미정·신형철·이현우·차 미령 리뷰좌담, 「날것과 익힌 것 -2006년 가을의 한국소설」 중 ‘한강, 「왼손」’, 문학동네, 2006 겨울호.
논의들을 살펴보면 1)-6건, 2)-10건, 3)-15건 등으로 근작으로 올수록 논의가 활발 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논의를 살펴보면 대체로 작품에 대한 논의에 공통적 인 지향점을 말해볼 수 있을 듯 하다.
논의들의 큰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다소 단순화 를 무릅쓰고 말해보자면,
1)의 경우 등장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고아의식 및 죄책감 등에 관한 논의,
2)의 경우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 등장인물들을 남/녀, 육식/채식 등의 구도로 해석하는 논의,
3)의 경우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증언, 기억, 윤리, 공공성, 정치 등에 관한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한강의 각 소설에 대해 전통적 소설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 상처입고 고통 받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평, 페미니즘 및 에코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평, 진실을 향해 가는 서사라 는 평,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평 등 다양한 평이 있어왔다.
본고는 위의 석사학위논문과 서평, 평론, 리뷰좌담, 일반 논문 등 여러 연구 성과들 의 가치를 존중하며, 본고가 펼칠 논의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연구 성과들을 좀 더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미영17)은 「내 여자의 열매」와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를 대상작 품으로 하여 이들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 인물들의 주체화 양상을 우울증과의 관계 속 에서 살펴보았다.
17) 우미영, 「주체화의 역설과 우울증적 주체」, 여성문화연구 제30호, 2013. 18) 조연정, 「광주를 현재화하는 일-권여선의 『레가토』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대중서사연구 제20권, 2014.
특히 이들 여성 주체가 앓는 고통(우울증)의 원인을 지젝이 말한 ‘구 조적 폭력’(사회 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관 련지어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대한 복종과 거부의 복합적 관계 속에서 여성의 주체(우울증적 주체)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특히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단 지 식물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동물성의 제거에 더 초점을 두는 인물이기에 남성-문명, 여성-자연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관점을 적용하기 어렵 다고 지적한 부분, 『채식주의자』의 인혜가 그동안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단지 가면을 쓰고 견뎌왔을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가면성의 자각이 바 로 주체화를 재의미화할 수 있는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조연정18)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사건으로서의 ‘광주항쟁’을 현재화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권여선의 『레가토』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통해 분석한다.
『소년이 온다』에 한해 말하자면, 그것이 죽은 자의 고통스런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살 아남은 자의 육체적 수치를 ‘증언 불가능’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현함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광주를 익명의 집단적 비극으로 의미화·역사화하는 일에 저항 하며, 고통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것이 『소년이 온다』의 성과라 보았다.
특히 광주항 쟁 이후 살아남은 자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로부터 느끼는 살아 있음의 수치 를 통해 자신의 비인간성과 대면하면서 주체로 성장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고 보는 대 목, 에필로그의 ‘나’를 ‘증언 불가능’이라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 불가능을 재현하는 작 업’을 시도하는 자로 보며, 『소년이 온다』가 광주비극의 ‘증언 불가능성’을 확인하 는 소설이 아니라 그 ‘증언 불가능성’을 ‘재현 가능성’으로 극복하는 소설로 읽을 수 있다는 대목 등이 인상적이다.
양현진19)은 한강이 등장인물간의 분신 관계를 통해 서사를 풀어가는 것에 주목하여, 분신 관계의 타자를 통해 주체 재생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즉 한 타자가 죽음으 로써 ‘나’의 경계로 침투해 들어오는 사건을 통해 분신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타 자의 죽음을 경험함으로 인해 주체는 균열을 겪게 되고 이것이 주체의 새로운 재생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를 한강의 초기작인 『여수의 사랑』부터 최근작인 『흰』에 까 지 적용하여 한강 소설 전반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한강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만 이루어지고 본 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김영찬20)은 세계의 고통에 직면한 문학이 그에 대해 ‘제대로 쓴다’는 것은 무엇인 가, 라는 질문을 『소년이 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통해 고찰한다.
특 히 「눈 한송이」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그를 두고, 타자는 이렇게 ‘나’의 의지와 사 고와 무관하게 바깥에서 ’나‘에게 도래하고 침투하는 우연적인 어떤 것이라고 밝히는 대목, 타인의 고통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우고 타자의 목소리에 자기를 내어주 어야 하는데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의 ’나‘가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는 대목 등이 인상적이다.
강동호21)는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죽음이 삶과 맺는 관계에 주목하여, 죽음이 삶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삶의 종결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내적 동 력이 됨을 말한다.
19) 양현진, 「한강소설의 분신(分身) 구조와 주체성」, 현대소설연구 제71호.
20) 김영찬, 「고통과 문학, 고통의 문학-한강의 『소년이온다』와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중 심으로」, 우리말글 제72권.
21) 강동호, 「피안(彼岸)의 피, 피 안의 먹-『바람이 분다, 가라』」, 세계의문학, 2010 여름호.
어둠과 고통, 죽음이 도처에 편재하고 있음에도, 생사의 경계에서 어느새 삶으로 균형추가 기울어지는 이야기가 한강의 소설이라고. 특히 “누군가가 부 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 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라는 소설의 끝부분을 두고 “타인의 죽음을, 그 피안(먹)의 세계를 피(차안) 안으로 되살리는 과정에서 이 절대적 삼인칭(“누군가”)의 존재를 감각 하는 것“으로 읽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는 비록 다루는 작품은 다르나, 본고가 논하 고자 하는 ‘타자-제3자-공동체’ 논의와 맥이 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나병철22)은 「내 여자의 열매」와 「몽고반점」의 포스트모던적 환상성에 주목하여, 이러한 환상성이 타자성과 에로스가 상실된 후기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보았 다.
다만 「내 여자의 열매」의 결말부에서 아내가 식물이 된 것을 두고, 이를 ‘나’의 “현실과 환상을 횡단하는 모험을 통해 혐오스러워진 아내를 식물 타자로 소생시킨 것” 이라고 한 대목은 다소 동의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나’가 아내를 소생시켰다기보다 는, 아내가 ‘나’를 식물성을 알아보게 하는 주체로 소생시킨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또한 레비나스의 에로스를 ‘내 안에 들어온 타자와 끝없이 교섭하며 미래에 와야할 것 과 관계하는 놀이’이자 ‘타자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도, 형부의 예술적 욕 망이 투영되어 일방적인 폭력이 되는, 미래와 관계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형부와 영혜 의 관계를 두고 “에로스적인 상호신체적 교감을 보여준다”라고 말한 것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이는 형부에 의한, 동일자에 의한 타자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
다음부터 소개하게 될 논의들은 본고의 핵심 논의 중 하나인 윤리와 좀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 것들이다.
최원식23)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다루면서, 우선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모호한 「채식주의자」에서 선정적인 「몽고반점」을 거쳐 「나무 불꽃」 에 이르러 연작 전체의 뜻이 명확해진다”며, “이야기가 이야기를 머금는, 연속/비연속 의 흐름에 작가 자신을 싣는 탈작가주의를 실험한 바, 편을 거듭하면서 이야기의 핵심 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22) 나병철, 「한강 소설에 나타난 포스트모던 환상과 에로스의 회생-「내 여자의 열매」와 「몽고 반점」을 중심으로」, 청람어문교육 61집, 2017.
23) 최원식, 「우리 시대 한국문학의 두 촉-한강과 권여선」, 창작과비평, 2016 겨울호.
특히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아버지의 폭력성을 흔히들 부각하지만, 초점은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지 독하게 평범한 산문적 일상에 대한 거절”이라고 밝히는 대목, 「몽고반점」의 핵심을 “형부에 의한 처제의 성적착취”라고 단언하는 부분24), 「나무 불꽃」의 인혜에 대해 “연작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의 초점‘”이자 “영혜의 저항을 온몸으로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종언을 재촉하는 인혜, 이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야말로 이 연작의 진정한 주 인공”이라고 밝히며 “영혜가 저항하자 바로 냉정하게 그녀 곁을 떠난, 꿈이 작은 소시 민(정서방)과, 처제를 동정하는 듯 착취한 교양속물 형부에 이어, 영혜와 가장 깊이 맺 어진 인혜는 이 일탈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묻는 부분, 견인주의자였던 인 혜가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간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 길은 어둡고 끈질기다.”를 통해 미묘한 변화를 겪고 있으며 “인혜는 뜻밖에도 그녀가 그토록 경계하던 영헤와 닮아 있다”고 밝히는 대목, 그러면서 “『채식주의자』의 견인 주의와 『소년이 온다』의 탈견인주의 사이에 깊은 단절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지 만, 「나무 불꽃」에 이르러 『소년이 온다』로 가는 길이 이미 움직이고 있음”을 밝 히는 대목 등이 인상적이다.
24) 이에 대해 최원식은 각주를 달아놓았다.
“물론 그 과정에 영혜가 뜻밖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순간적으로는 해방적 성격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성적 욕망을 예술(나는 솔직히 그게 예술인지도 모르겠다)로 자기기만 하는 형부에 의한 성폭력인 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특히 마지막 대목에 대해 본고는 『소년이 온다』를 탈견 인주의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지만, 「나무 불꽃」과 『소년이 온 다』의 연관성을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동의하였다.
본고의 논지에서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혜가 타자인 영혜를 책임지기로 결단하는 순간을 윤리적 순간이자 결단으로 보았고, 이것이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책임‘을 말하고자하는 『소년이 온다』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어 『소년이 온다』 대해서는 우 선 제목에 주목하며 “‘온다’는 유예된 과거의 귀환도 아니고 먼저 온 미래는 더욱 아 니다. ‘소년’으로 상징되는 가장 순수한 시간이 스스로 빛을 발하며 찰나 찰나 떠오르 는 생생한 현재들이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그 현재는 “드물게 그것도 간절한 이들에게 만 아주 잠깐 현현”한다고 밝힌다.
특히 작가의 서사전술을 ‘형식의 앙가주망’이라 칭 하며 각 장별로 인칭이 달라지는 것을 섬세히 분석한 뒤, 모든 장에 등장하는 ‘동호’에 대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 장 또는 다른 인물들을 매개하는 플랫폼에 가까 워, 결과적으로는 광주항쟁의 작은 집합적 초상이 구축되”었다고 하면서 이 소설이 “진실들에 이르기 위한 다중적 접근을 허락하되 진리의 형이상학에 굴복하지 않는”다 고 밝히는 대목, 각 장의 인물들에 대해 “그냥 그렇게 함께 있음을 실행한 자들은 지 배와 피지배, 또는 위계에서 배제된 소수자들, 동호, 정대, 정미, 은숙, 진수, 선주 들” 이었다고 말하며 “진정한 행동은 그 어느 것이나 이 세상에서 또 이 세상의 도래를 위 해 익명으로 성취된다”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한 대목 등이 인상적이다.
신샛별25)은 경제성장과 생존이 유일한 과제였던 한국인의 정신이 ‘개같이 벌어서 정 승같이 먹는다’로 표현될 수 있으며, 개처럼 일해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청년들이 스스 로를 ‘벌레’취급하는 우리 시대를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벌레로, 그리고 또 무언 가로” 추락하고 있는 시대로 정의한다.
25) 신샛별, 「식물적 주체성과 공동체적 상상력-『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 설의 궤적과 의의」, 창작과비평, 2016 여름호.
그러면서 이러한 시대에 한강의 소설을 읽는 것은 절실한 일이라고 말하며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 대해 “‘인간’과 ‘비 (非)인간’ 혹은 ‘반(反)인간’의 경계를 흐리면서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차별과 배제, 폭 력과 학살 위에 제 입지를 다져왔는지를 보여주는데, 그럼으로써 그의 소설은 ‘인간’이 라는 개념의 의미와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의 가치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의문에 부치 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며, 한강 소설이 전하는 고통은 “‘다음 세상의 증상을 미리 앓아본’ 결과로 생겨난 것들”인데 이를 통해 “추락 중인 인간을 구원할 특별한 상상 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채식주의자』에 대해서는 “이 소설에서 식물과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지우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식물-인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며, 「몽고반점」에서 몸에 꽃을 그린 영혜의 모습에 대해 “이 소설이 식물성과 인간 성이 과연 한데 섞일 수 있는가를 자문하고 실험하는 내용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식물성의 핵심이 채식 (육식 거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며, 『채식주의자』를 “이동성(동물)과 부동성(식물) 의 구도, 일시성(동물)과 항구성(식물)의 구도”로 보는 해석이다.
전자(이동성/부동성) 에 대해서는 영혜를 두고 “영혜가 과거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면서 동물성을 거세해나 가는 끝없는 자기갱신의 과정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 앞에 내내 ‘머물러’ 있었던 것과 다르게,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의 곁을 빠르게 ‘떠난다’”고 밝히고, 후자(일시성/항구성) 에 대해서는 인혜를 두고 “동생을 받아들이는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은 차라리 그녀 자신의 삶의 갱신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녀는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 기는 망각의 회복력에 의존하지 않고, 삶의 갱신을 요청받는 바로 그 순간에 정직하게 멈춰선 것”이며, 이것은 “특정한 시간에 머물러 있는 일, 그러니까 망각에 맞서는 기억”이라고 밝힌다.
요컨대 『채식주의자』의 ‘식물적 주체성’이 가리키는 바는 “육식 거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과 ‘점령’과 ‘망각’에 맞서는, ‘정주’와 ‘갱신’과 ‘기억’ 에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 논의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소년이 온다』에 대해 “광주민주화운동을 과거의 것으로 확정하는 회고나 증언의 서사가 아니라 80년 5월에 대한 장례를 지연시키는 만가(挽歌)가 되고자”하는, “그야말로 ‘식물형 소설’에 가”까 운 소설이라고 말한다.
특히 “80년 광주를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물으며 80년 광주가 “신군부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장소, 즉 민주화의 성지로만 기억돼서는 안”되며 “그곳은 인간의 존엄이 심문받는 법정이었”기 에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연구자가 주목하는 것은 광주민주 화운동 당시 그곳에 모여 함께 싸운 사람들이 ‘탈신(脫身)’, 즉 자신의 몸으로부터 벗 어나는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인데, 이는 “탈신의 경지를 공동체적 감각, 공동체적 체 험에서 발견”해낸 것으로, 『채식주의자』가 “에로티즘을 통해 궁극의 자유를 체험하 는 탈신의 경지를 개인의 차원에서 포착”했다면 『소년이 온다』는 이러한 “탈신의 경 지가 ‘나’(개인)의 경계를 뛰어넘어 ‘우리’(공동체)의 몸으로 접속해 들어가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이 대목이 인상적인 것은 본고가 『소년이 온다』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공동체적 논의를 개인이 자기 몸으로부터의 벗 어나는 ‘탈신’을 통해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채식주 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식물적 소설’이라 칭하며 ‘부동성’과 ‘항구성’ 즉, ‘갱신’ 과 ‘기억’으로 두 소설을 연결해나가는 점도 인상적이다.
서영채26)는 ‘문학의 윤리’를 말하며 여기서의 윤리는 “작품 생산자로서의 장인의 윤 리”와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시민의 윤리”가 결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학과 정치의 결합으로, 예술의 정치란 “미학의 영역 밖에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윤 리가 미학을 휘어버리는 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26) 서영채, 「문학의 윤리와 미학의 정치–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성석제의 『투명인간』에 대하 여」, 문학동네, 2014 가을호.
특히 『소년이 온 다』의 에필로그에 대해 “작가가 광주에 대해 써야겠다고 느꼈다는 것, 광주에서의 한 소년의 죽음에 대해 쓰고자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작업을 자기가 맡아야할 몫으로, 자기의 책임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또한 그런 동기와 의도를 매우 직접 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 소설에 일곱 개의 시선이 도입된 것에대해 “강동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여섯 명의 서로 다른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 여섯은 저마다 하나식의 시대이기도 하다”고 해석하는 부분, 광주항쟁 후 살아남은 자들이 느낀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두고 “‘광주 이후’를 살아야 했던 세대들이 정신의 핵자이며 그 파토스야 말로 새로운 책임과 행위의 유대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라 고 말하며, 그들이 동호를 기억하고 호명하는 것 자체가 “장례식과 추도의 형식”이며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 자체가 “강동호의 장례식”이라고 밝히는 대목 등이 인상적 이다.
특히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의 정치를 연결하여 말하는 대 목이 인상적인데, 작가는 소설쓰기라는 장인의 기율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이 “공동체 의 어떤 사건에 대해 책임지고자 하는 시민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소 설의 출발점은 “장인의 윤리”였지만 그것이 “시민의 윤리에, 곧 공동체의 정치에 도 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이것이 바로 “미학으로 하여금 정치에 이르게 하는 윤리의 힘”이라고 밝히며, “윤리는 한 개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윤리적 의식을 가진 그 개인이 특정한 상황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보 편성을 지닌 개인이 되면 윤리는 정치가 된다”고 말한다.
“문학의 정치는 자기 충실성 을 향해 가는 윤리적 과정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연구자의 발언에 동의하며, 이 연 구에서 보여주는 미학과 정치를 연결짓는 ‘윤리의 힘’에 대한 논의는 본고의 연구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힌다.
리뷰좌담 중에서는 2008년 문학동네 봄호27)에서 『채식주의자』를 다룬 글을 소개 하고자 한다.
27) 조강석·조연정·양윤의·이경재 리뷰좌담, 「관계의 만화경」 중 ‘세 개의 자각과 하나의 질문- 『채식주의자』’, 문학동네, 2008 봄호.
우선 조강석은 소설의 주 인물인 영혜, 그(형부), 인혜가 각각 어떤 자각 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데, 영혜의 경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점유본능, 말 그대로 먹 어치우려는 본능”, 즉 “육식을 그친 영혜의 꿈속에도 끈질기게 떠오르는 저 훼손된 얼 굴들이 상징하듯, 문제는 바로 ‘유통’과 ‘교환’에 의해 상징적으로 은폐되는 타자 훼상 (毁傷)과 섭생의 생존방식 자체”에 있다는 자각이, 그(형부)의 경우 “꽃의 교합을 읽어 낸 이의 자각”인데 “그것이 폭력이건 점유이건 섭생이건 쇠잔이건 교환이건 간지이건, 그 모두를 결정적인 이미지와 교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이, 인혜의 경우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자각, 고통스런 사건을 겪은 후에도 “고통이 여전히 지나간 것이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남는다는 것, 즉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 리라는 생각”과 “고통은 일회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라는 태도”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이 있다고 밝한다.
그러면서 “세 가지 자각 모두 치명적인 자각인데 파멸과 교환될 수 없는 치명적인 자각” 즉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영혜의 선택과 “자기 의 매개된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이는, 꽃의 이미지조차 운동이 포함된 교합의 이 미지로 읽으려는” 그(형부)의 선택, 둘 모두를 선택할 수 없는 인혜의 상황을 두고 작 가가 “일회성이 아닌 고통을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으로 보았다.
특히 이 세 자각이 실존의 세 가지 방식일 수도 있겠다며 영혜가 “종교 적 방식”을, ‘그(형부)’가 “심미적 방식”을 택했다면, 인혜는 “윤리적 방식”, 즉 “어떻 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윤리적인 질문”이라 고 지적하는 부분에 크게 공감하였다.
같은 좌담에서 조연정은 조강석이 말한 세 가지 자각에 대한 논의에 이어 ‘자각의 층위’에 대해 말하는데, “영혜의 자각은 온전히 자기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고, ‘그’의 자각은 영혜 혹은 ‘몽고반점’이라는 이미지로부터 매기된 것이고, 인혜의 자각은 외부 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보면서 “영혜에게 자각과 그에 따른 행위가 모두 자발적”이 고 ‘그’에게는 매개된 자각과 자발적 행위가 있”는 반면, 인혜는 “자각도 어느 정도 수 동적이고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니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상태”이자 “불가피한 상황 속에 놓인 채 행위를 강요당하는 인물”이라고 밝힌다.
이 두 논의는 본고의 『채 식주의자』에 대한 주 논의인 ‘타자(영혜)를 마주한 주체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해 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맥이 닿아 있다고 여겨졌으며 좋은 참조점이 되어 주었다.
다음으로 본문 안에서 레비나스가 직접 언급되는 연구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최윤경28)은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는 고통 속에 있는 타인의 ‘볼모’”가 됨을 밝히 며,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1980년 5월에 대한 임철우의 『봄날』이 행하는‘재현’ 과 정찬의 『길, 저쪽』이 행하는 ‘현재화’를 함께 사유하고 있다고 본다.
28) 최윤경, 「소설이 오월-죽음을 사유는 방식-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인권 제16권, 2016.
그에 따르면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죽은 자’들의 명령과 이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응답을 소설의 형식으로 실험”한 소설이며, 이를 현재 독자인 우리에 대한 ‘명령’으로 받아들여‘문학의 윤리’와 연결 짓고 있다.
심영의29)는 “타자에 대한 책임은 타자의 요청에 의해 내가 타자를 대체하는 것”이 라는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며,『소년의 온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에 주목한다.
29) 심영의, 「5·18소설에서 항쟁 주체의 문제-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의 경우」, 민주주의와 인권 제15권, 2015.
연구자는 ‘항쟁의 주체란 누구였는가’를 분석하는데, 그에 따르면 항 쟁의 주체는 “민초라거나 민중이라거나 무장시민군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emotion) 그러니까 사건을 마주한 개개인의 감정이 모인 ‘집합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행위 주체가 어떤 특정한 “도덕적 개인이라기보다는 사건을 마주한 개개인의 감정이 모인 ‘집합적 감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윤영30)은 레비나스적 타자의 죽음에 대해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윤리적 자각, 즉 ‘존재론적 겸손’이라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말하며, 한강의 소설 에서 나타나는 타자의 죽음이 살아남은 자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죽 음이 아닌 생명력으로 재전유”됨을 밝힌다.
특히 한강의 전작과 달리 『소년이 온다』 에서 그려지는 죽음에 대해서는 “나와 무관한 타자의 종말이라는 점에서 전작과 대별” 된다며, “나와 관계하는 타자의 외연은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넘어 집단적이며 공동 체적인 것으로 무한히 확장된다”고 말한다.
박진31)은 “타인은 우리를 거슬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런 수동성이 주 체의 주체성이다”라는 레비나스의 말을 언급하며, 한강의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주체화 양상을 살핀다.
30) 박윤영, 「그 ‘삶’을 기억하라-한강론」, 실천문학, 2016 가을호.
31) 박진, 「한강 소설에 나타난 주체화의 양상과 타자 윤리 문제-『바람이 분다, 가라』와 『희랍 어 시간』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제 59집.
『바람이 분다, 가라』에 대해서는 “남성/여성의 이분법과 이 성애/동성애의 대립마저 해체하면서, 성별화된 몸을 통해 자기동일적 주체를 산출하는 상징적 규범체계의 작동방식과 그 파괴력을 가시화했다”고 말하며, 이 소설에서 나타 나는 글쓰기의 과정은 “동일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표상적 주체의 가능성을 암시”하 고 있다고 밝혔다.
『희랍어 시간』에 대해서는 “언어를 지우고 주체에서 물러났던 여자가 회피할 수 없는 타자의 말 걸기에 응답하며 주체화되는 과정의 이야기”라고 말 하며, 이러한 주체는 “내재성에 머무르는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에게 노출되어 자기 바 깥에서, 타자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덧붙여 이 두 장편소설이 “개별적인 상처의 영역을 넘어서는 인간 공동의 취약성과 유한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동일성에 종속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과 ‘함 께 있음’의 윤리로 나아”가는 한강의 여정이, 이후에 발표된 『소년이 온다』가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밝힌다.
오은영32)은 “자기동일성의 악순환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구원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주장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틀로 삼아 한강의 소설을 읽어보려”하며, 레비나스 의 「탈출에 관해서」가 지적한 “서구 존재론의 전체성이 ‘자기 충족적인’, 즉 ‘자기중 심적인 나’로부터 비롯됨”과, 한강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폭력이 “‘자기 안에 갇힌’ 내 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는 것을 연관지어 말한다.
연구자에 따르면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폭력의 연결고 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 나무가 되고자 죽음을 선택”한 존재로서 “인간 존재가 과연 폭 력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겠는지” 질문하고 있으며, 그런 영혜에 대해 1부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은 “자기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자신이 폭력의 주체가 되는지에 대한 의식 조차 없는” 인물로, 2부의 화자인 ‘그’는 그러한 의식을 지니면서도 “자신의 욕망으로 내달리는” 인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로부터의 탈출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 혜가 자신이 마주하는 꿈속의 얼굴들이 실은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자신의) 얼굴이라 는 걸”자각했듯이, “폭력이 항상 ‘나’로부터 시작한다는 자각에서 비로소 가능해질 것” 임을 주장한다.
김형수33)는 『여수의 사랑』과 『검은 사슴』, 『내 여자의 열매』에 나타나는 인물 들을 분석하며 그들은 “음울한 과거의 기억 때문에 (...) 자신을 고립시키고 유폐된 삶 을 살고 있”는데, 한강이 이들에게 “타자의 목소리인 이명을 들려주면서 상처난 과거 기억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고 말한다.
32) 오은영, 「한강의 『채식주의자』:‘나’로부터의 탈출은 가능한가?」, 세계문학비교연구 제59집.
33) 김형수, 「타자(他者)에 대한 사랑의 변주곡(變奏曲)」, 사림어문연구 제16권, 2006.
그리고 그런 인물들에게 “‘삶/죽음’, ‘빛/어둠’, ‘생시/꿈’, ‘현실/기억’을 넘나드는 고통스런 여정을” 떠나게 하며, 그 고통 속에서 맞이할지도 모를 죽음에는 “무(無)에 대한 유혹이 있고 영원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레비나스의 말을 언급하며 죽음으로의 여행을 감행해야함을 주장한다.
더 나 아가 그는“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죽음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타자의 목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한강의 소설이“레비나스의 ‘타자의 사유’를 빌면, 타 인을 위해 고통 받고,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타인을 관용으로 받아들이고, 타인 의 자리에 대신 서 보고, 타인을 대신해서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여 행”이라고 정의한다.
본고는 한강 소설에 대한 위와 같은 다양한 연구들을 참조하면서, 그 기저에는 ‘타 자와 그 타자를 만나는 주체의 만남’이 핵심적인 뿌리로 박혀있음에 주목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이 타자와 주체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일 것이나, 특히 한강의 소 설에 본고가 주목하는 이유는, 한강의 소설에서는 이 타자의 ‘타자성’이 도드라지게 나 타나고, 이 타자에 의해 주체가 어떤 고통을 겪거나 상처를 입고, 그 와중에 굳건할 것 같던 주체의 주체성이 어떤 변모를 보이며, 나아가 이 주체가 처음에는 낯설고 어 렵게 대하던 타자를 맞이하고 마침내는 그 타자를 껴안는데 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만남은 또 다른 타자와의 만남으로 연결되고, 이는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기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본고는 한강의 첫 소설 집인 『여수의 사랑』을 시작으로, 중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를 거쳐 최근작이자 한강의 또 다른 결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소년이 온다』까지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이를 타자의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을 토대로 논의함으 로써, 한강 소설에 나타나는 타자와 이 타자와 주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윤리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2. 연구 방법 및 목표
본고는 레비나스의 철학에 기대어 한강의 소설 작품을 논의해갈 것이므로, 우선 본 고의 주 논의와 관련이 깊은 레비나스의 ‘타자성’과 ‘주체성’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레비나스는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숨을 거두 었다.
그는 일명 ‘네 문화의 철학자’라 불리는데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자연스 레 처음 읽은 책은 성경이었다고 하며(유대문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운영하던 서 점에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러시아 고전문학를 읽었으며(러시아문학), 청년 시절 독일에서 접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고(독일철학), 이후 자신이 귀화까지 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될 프랑스에서 접한 철학(프랑스철학) 등이 그 네 문 화이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된 경험은, 레비나스 철학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일생동안 레비나스는 우리 모두가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으며 타인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의 근본바탕에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경험과 더불어 20세기에 극에 달하던 인종 차별 및 박해가 놓여있다.
후자가 레비나스 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인데, 실제 레비나스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피해 자주 이민을 가야했으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숱한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레비나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경험은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이었 다.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나치 공포에 대한 예감과 그것에 대한 기억이 지배한 다”34)
34) E. Levinas, Difficile liberté. Essais sur le judaïsme(Paris:Albin Michel, 1976), p.406, 강영안, 『타인의 얼굴』, 문학과지성사, 2005, 23쪽에서 재인용. 이하 『어려운 자유』로 표기. 더불어 본고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소개는 『타인의 얼굴』의 영향이 큼을 밝힘. 이하 각주를 통해 저 자, 제목, 쪽수만 표기.
레비나스는 히틀러가 나치당을 설립하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2차 세계대전 (1939년~1945년)을 일으키기 전부터 이를 예감하고 「히틀러주의 철학에 대한 몇 가 지 반성」(1934)을 통해 반유대주의 및 타자배제 이데올로기의 뿌리를 드러내어 비판 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게 되고, 레비나스는 나 치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경험을 하며, 부모와 두 남동생은 나치에 의해 죽게 된다.
전 쟁의 경험은 레비나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그는 기존의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특히 그가 주목했던 것은 서양철학의 근본에 내재해 있는 ‘전체성’ 이었다.
“전쟁에서 보이는 존재의 면모는 서양 철학을 지배하는 전체성 개념 속에 자 리 잡는다.”35).
여기서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전체성이란 동일자(‘나’) 위주의 사고체계로, 동일자의 자기실현만을 추구하며 그 외 다른 이들은 자신의 끝없는 확장을 위해 체계 속에 포함 되어야 할 하나의 수단이자 개체로 여긴다.
내가 지배하고 규정하고 나의 힘이 자유롭 게 작용하는 이 전체성의 세계에서, 다른 이의 인격은 하나의 체계 속에 종속되어 버 리고, 만약 이러한 자신의 체계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 즉 ‘나’와 다를 경우 그 타 자를 배제하고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체계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 는 서양철학의 근본바탕에 이러한 전체성이 내재해있으며, 나치의 전체주의라는 폭력 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런 바탕에서 발생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각 개인의 인격과 존엄을 고려하지 않으며 단지 개인은 전체 속에 포함될 때만 의미를 가질 뿐이 라고 본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 로 대치하고 이것을 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36)
이 러한 서양철학의 전체성/전체주의에 대항하여 레비나스가 내세우는 것은 존재의 다원 성이며(“우리는 오히려 통일성 안에 용해할 수 없는 다원론을 지향한다”37)), 이는 ‘타 자’를 통해 드러난다.
35)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8, 8쪽.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36) 강영안, 『타인의 얼굴』, 31쪽 참조.
37)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6, 33쪽.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 목, 쪽수만 표기.
레비나스의 철학은 첫 저서인 『탈출에 관하여』(1935-1936)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발표된 『존재에서 존재자로』(1947), 『시간과 타자』(1947) 등의 초기, 레비나스 의 첫 번째 주저라 할 수 있는 『전체성과 무한』(1961)의 중기, 그리고 두 번째 주저 라 할 수 있는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1974)의 후기 등 크게 초기-중기-후기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은 대체로 존재론이었다”라는 말로 『전체성과 무한』의 서두 를 연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이론으로, 모든 것을, 심지어 타자까지 나의 세계(동일자의 세계)라는 전체 속에 체계화하는 전 체성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철학은 존재론이자 자아론’이었고, 이러한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하이데거 는 존재(Sein)를 ‘자애’요 ‘은총’이며, ‘선물’이요 ‘구원’이며, ‘축복’이요 ‘해방’으로 이 해한다.
존재는 우리가 그 안에 깃들어 사는 ‘집’이요, ‘줌(Geben)’이며, 우리의 존재 를 밝혀주는 ‘빛’이다.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요, 인간은 이 사건 속에서 인간(존재자) 이 된다.
즉, 존재자의 존재 의미는 언제나 존재를 통해 밝혀진다. 그러므로 존재자와 존재자의 관계도 존재를 통해 규정된다. 익명적이고 무인격적인 존재가, 존재자를 사 로잡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다른 서양 철학의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소유와 지배의 철학’이라고 보고, 인격적 자아와 타자, 타자와의 인격적 관계와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 ‘불의한 철학’이자 ‘중립성의 철학’이라 고 비판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이러한 ‘존재로부터의 탈출’에서 시작한다.
레비나스에게는 하이 데거가 말하는 존재 사건이 빛의 비춤이나 축복이 아니라 어둠이고 밤이며,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혼돈 상태이다.
아직 이름도 없고, 아무도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다 만 그 안에 종속되어 숨 막히는 공간을 일컫어 레비나스는 ‘존재’라고 말한다.38)
레비 나스는 인간이 갖는 불안이 ‘무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불안’이며, 그것 은 존재가 지니는 근원적인 ‘익명성’, 즉 ‘그저 있음il y a’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즉 존재의 익명성, ‘그저 있음’으로 인한 무서움, 악으로 인해 인간은 그로부터 벗어나 존 재자로 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존재에는 존재자가 없다.
즉 존재는 “주어도 아니고 명사도 아닌 것”이며, 거기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 서 이러한 존재는 마치 “<비가 내린다il pleut>, <날씨가 덥다il fait chaud>고 말할 때”와 같이 “익명적”이고, “비인칭적”39)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가 이를 통해 핵심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있음, il y a)의 비인격성이다.
이것은 “‘그저 있음’의 현상”일 뿐이며, “기쁨도 풍요도 없”고, “아무리 없애도 다시 돌아오는 소리”40)라는 것이다.
38) 이상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존재 개념에 대한 내용은 강영안,『타인의 얼굴』, 241-2쪽 참조.
39)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40쪽.
40)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57쪽. - 19 -
레비나스가 보기에 존재는 익명적인 사건이며 이곳에서는 그저 비가 내리고 날씨가 더운 것처럼 어떤 개별자도 존재하지 않으며 여기에서는 안과 밖, 내재성과 외재성, 이것과 저것 등이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 자 없는 존재’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예는 밤과 불면이다.
밤에 대해서는 “밤 속에서 우리는 어둠에 얽매여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러한 밤에는 “이것 또는 저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즉 ‘어떤 사물’은 더 이상 존재 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밤, 존재 속에서 인물은 “밤 속에 휩쓸려 버리며, 밤에 의해서 침범당하고 비인격화되고 질식되어 버”41)리고 만다는 것이다.
불면에 대 해서는 “불면 상태란 밤 그 자체만큼이나 익명적”이라고 말하며, 주체를 “침입해 들어 오는, 피할 수 없는, 존재(existence)의 익명적 소음을 분쇄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은 우 리가 자려 해도 잘 수 없는 몇 몇 순간들”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러한 불면, ‘깨어있음’의 상태에는 “주체가 없다”42)라고 말한다.
불면의 상태에서 한 인간은 얼굴도 이름도 없이 그저 ‘존재’에 얽매여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면 의 깨어있음은 “시작도 끝도 없는” 상황이며, 여기에서 ‘나’는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 는” 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존재’를 경험하는 순간인 것이다.
즉 이러한 밤과 불 면의 경험으로 말해지는 ‘존재’는 주체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라 할 수 있으며, 여기 에는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il y a’라는 사실”만 있 다.
여기에서는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파괴”되어, “비인칭적인 힘의 장(場)이 있을 뿐”43)이다.
41)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94쪽.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42) 레비나스, 앞의 책, 108-9쪽.
43)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40-2쪽.
존재에 존재자가 설 자리는 없다.
이런 밤과 불면과 같은 ‘존재’에서 탈출하여 ‘존재자’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 로 서는 것이 바로 ‘홀로서기hypostase’다.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에서 존재자로』 (1947)라는 책의 제목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다.
‘홀로서기’란 ‘익명적 존재’ 상태에서 탈출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 유지 욕망conatus essendi를 실현하고자 하는 ‘존재자’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홀로서는 존재자에 대해 “익명적인 있음il y a속에 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주체는 스스로를 확립한다.
그 말의 어원학적 의미에서 확립은 단단한 터전 위에, 기반 위에 자리 잡음, 조건 지음, 기초를 세움이다.”라고 말하며, 이러한 존재자는 “있음의 익명적인 불면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온 주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는 ‘존재existence’라는 동사로부터 ‘존재자existant’라는 명사의 출 현이기도 하다. 곧 “비인격적 존재(existence)의 한복판에서 명사의 출현”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러한 존재자의 홀로서기는 “익명적 있음il y a의 중지, 사적인 영역의 출현, 이름의 출현”인 것이며, “있음의 바닥으로부터 존재자가 솟아오르는”44) 사건인 것이 다.
레비나스는 홀로서기를 통해 비로소 안과 밖, 내재성과 외재성이라는 구별이 가능해 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엑지스텐츠Ex-istenz’, 즉 자기 ‘밖에 서 는 존재’.
다시 말해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떠나, 밖으로, 세계로 향해 초월하는 존재 로 설정한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그렇게 주체가 밖에 서기 전 에, 이미 그 전에 근원적으로는 홀로서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에서 존 재자로, 즉 밖에서 안으로의 운동으로 인한 내재성, 자기성이 성립된 후에야 비로소 밖으로의 초월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45)
이렇게 홀로 선 주체, 자기의 내면성을 갖게 된 존재자는 이 세계에서 향유를 통해 살아간다.
하지만 이 향유로서의 주체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고 만다.
“존재에 대한 이러한 지배, 존재자의 이러한 주권에는” 자유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에 대 한 무거움도 있는 것이다.
존재자가 된다는 것은 내면성이 생겼다는 것인데 이는 “자 기로의 귀환”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자리 잡기로 치른 대가”이며 이렇게 자신 에게 몰두하는 것은 “주체의 물질성”이며 이는 결국 “자기에게 얽매임”이다.
허나 이 는 주체로서 서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레비나스가 인정하는 바 주체로 서의 “시작은 자기 자신에 의해 짓눌”46)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자가 된다 는 것은 한편으로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존재를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도 같이 겪는 사건인 것이다.
홀로서기로서의 주체는 물질적 육체를 지닌 채 세계 속에서 거주하고 노동하며 인식 하며 소유하는 등의 ‘향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레비나스는 향유의 예로 물, 공기, 햇볕 등을 즐기는 것 자체, 세계 속에서의 노동, 인식, 과학 등 을 들며, 이것들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이것들로 산”47)다고 말한 다.
44)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138-9쪽.
45) 레비나스가 보기에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 내 존재’ 라는 것도, 주체의 출현과 함께 세계가 등장함으로써 즉, 주체의 내면성, 자기성이 성립됨으로써 세계가 비로소 구별 가능해짐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이때 주체는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46)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52쪽.
47)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154쪽. “우리는 ‘맛 좋은 수프’와 공기와 빛과 풍경과 노동과 생각 과 잠 등등으로 산다. 이것들은 재현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들로 산다.”
즉, “우리는 숨 쉬기 위해 숨 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책”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 모든 일이 삶”48)이라는 것이다.
그 리고 이러한 향유를 통해 인간은 전체로부터 자기를 분리하여 ‘내면성’, ‘자기성’을 획 득하고 ‘개별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세계 속에서 집을 짓고 거주를 통 해 삶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얻고자 한다. 그리고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다스리려는 노 동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고자 한다.
주체는 이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하고 세계와의 관계, 즉 향유를 통해 자신과 거리를 두고 세계를 노동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향유는 주체에게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잊게 해주는 것 이다.49)
그럼으로써 존재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향 유로서의 주체는 여전히 동일자이고, 이기적이며, 자기 자신의 신체에 갇혀 있다(주체 의 물질성). 그는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뿐이다.
향유로서의 주체는 전체화에 대한 욕망을 지니고 있기에, 그에게서는 존재의 무게로부터 완전한 탈출이 불가능하며 순간적인 초월이 잠시 가능할 뿐, 진정한 초월이 불가능하다.
자신 의 틀, 자신의 전체성 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기존의 서양철학이 가장 중요시 여겨온 이성을 통한 ‘인식’ 역시 레비나스에게는 향유 중 하나일 뿐인데, 이성의 빛이 라고 하는 인식도 어찌되었든 나에게서 나가는 빛이기에, 결국 자기로부터 자기로의 귀환에 불과한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바 “자기에 사로잡힌 자아를 해방시키기에는 빛의 외재성으로는 충분하지 않”50)은 것이다.
48)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70쪽. “우리는 숨 쉬기 위해 숨 쉬며, 먹고 마시기 위해 먹고 마시며, 거주하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며,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공부하며, 산책하기 위해 산 책한다. 이 모든 일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이 삶이다.”
49) 강영안, 위의 책, 105쪽 참조.
50)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68쪽. - 22 -
홀로서기로서의 주체, 향유로서의 주체는 자신의 얽매임을 스스로 풀 수 없다.
그렇 다면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무엇일까?
존재로부터 벗어나 존재자로 해방되었으나 다 시, 여전히 존재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존재자는 존재 자체의 무거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존재 저편’, ‘존재 너머’로의 초월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여기서 레비나스가 말하는 가능성은 ‘나’의 밖에 있는 ‘타자’로부터 온다.
레비나스 가 말하는 타자란 다른 이, 낯선 이면서 약한 자로서, 타자는 ‘나’의 동일자적 세계내 로 즉 ‘나’의 전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다.
타자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다름 l’altérité’을 지닌 채 ‘나’의 전체성을 벗어나 있다.
나의 전체성, 나의 기준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타자는 ‘무한’과 연결된다.
하지만 이 무한으로서의 타자는 나에게 구체 적으로,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타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자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다 가오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얼굴’이다.
타자는 그의 ‘얼굴’을 통해서 나에게 다가오며, ‘타자의 얼굴’은 그동안 자기 동일성의 세계 내에서 자기실현, 자기 확장을 이루며 살아온 ‘나’의 자유를 문제 삼는다.
즉 얼굴로 다가오는 타자는 기존에 잘 살아 오던 나의 삶을 의문에 부친다.51)
한편 무한인 타자는 또한 힘없고 벌거벗은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한 으로서의 타자는 나의 동일자적 힘이 미치는 곳 너머에 있는데, 이것은 다른 말로하면 ‘나’의 영역 안에서는 머물 곳이 없는 자, 자리가 없는 자, 즉 약자라는 뜻이기 때문 이다.
즉, ‘나’의 영역 안에서 자리가 없는 약자로서의 타자는 동시에 ‘나’의 영역 너머 를 드러내는 무한으로서의 타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로서의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할 때, 이 호소는 단순히 내가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서의 타자가 내리는 명령으로 주어진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명령법”52)으로 다가온 다.
이는 어떤 물리적인 강제력이 주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호소가 높은 데 서 오는 것, 즉 ‘나’의 틀을 벗어난 무한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렇다.
“얼굴 속에서 스 스로를 현시하는 존재는 높이의 차원, 초월의 차원에서 내게 오는”53)것이다.
이렇게 약한 자이자 무한(자)로서의 타자는 “본질적인 비참함”54)을 지닌다.
‘나’는 무한인 타 자로부터 오는 명령으로서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타자의 얼굴은 약한 자로서의 ‘무력함’과 명령하는 자로서의‘주인됨’을 주체인 ‘나’에게 동시에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낮은 자이자 가장 높은 자로서 등장하는 것이 바 로 타자다.55)
51) 콜린 데이비스, 『처음 읽는 레비나스』, 주완식 옮김, 동녘, 2014. 60쪽 참조. 이하 각주를 통 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52) 레비나스, 『어려운 자유』, p.270, 강영안, 앞의 책, 149쪽에서 재인용.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 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통해 얼굴은 모든 범주를 벗어나 있 다.”
53)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320쪽.
54) 레비나스, 앞의 책, 320쪽. “(...) 나로서의 내 자리가 이러한 타인의 본질적인 비참함에 응답할 수 있는 데서, 내게서 자원들을 발견하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의 초월성 속에서 나를 지배 하는 타인은 또한 낯선 이, 고아 그리고 과부다. 나는 그들에게 의무가 있다.”
55) 강영안, 앞의 책, 149쪽 참조.
이러한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는 것은 ‘나’의 삶 전체를 근본적으로 의문 시하고 문제 삼고 변화를 요구하는 고통스런 사건이다. 기존의 나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는 점에서 이는 ‘나’의 죽음에 가까운 고통스런 일이다.
이렇게 타자의 얼굴은 ‘나’ 에게 호소함으로써 ‘나’에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안기며 동시에 ‘나’에게 호소에 응 답하는 ‘책임적 주체’로, ‘윤리적 주체’로 새로이 태어날 것을 요청하고 명령한다.
여기 서 더 나아가 레비나스는 ‘제3자le tiers’를 통한 윤리의 확장을 요청한다.
나와 직접 마주한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더 나아가, 그 타자와 연관된 타자, 그 타자의 타자, 그 타자의 타자로 계속 이어지는 수많은 타자를 가리키는 ‘제3자’에 대한 책임, 만인에 대한 책임, 보편적 책임으로까지 나아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에게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있고, 약자인 타자의 호소에 대해 응답해야하 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일자적 전체성에 갇혀있던 ‘나’라는 주체성을 ‘책임적 주체’로, ‘윤리적 주체’로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레비나스 철학이 다다르고자 하는 궁극적 핵심이자, 본질적으로 하나의 전체성(totality)을 지향하며 그 전체성 안에서 타 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려하는 기존 서양철학(존재론)보다 앞서며 우위에 있는 제일철학 으로 그가 내세우는 형이상학(“형이상학은 존재론에 앞선다”56)), 곧 ‘윤리’다. 이러한 ‘익명적 존재로부터의 탈출 → 존재자(주체)로서의 홀로서기 → 타자(무한)와 의 만남’이라는 흐름은 ‘존재론적 모험’이라고 불려지기도 하며, 이는 주어진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의 이동, 초월을 지향 하며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삶은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속 에 있다.
형이상학은 이런 알리바이에서 출현하고, 이러한 알리바이 속에서 자신을 유 지한다.
형이상학은 ‘다른 데’로, ‘다르게’로, ‘다른 것’으로 향한다.“57)라고 레비나스가 밝힌 바대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레비나스의 주체성에 대한 관점이 중기에서 후기로 가며 그 강 조점이 조금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기 레비나스의 대표저작인 『전체성과 무한』 의 서두에서 자신의 철학을 “무한자의 이념에 바탕을 둔 주체성의 변호”라고 말한 것 은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주체성의 핵심이 무한(타자)에 기반한 주체성이라는 것을 증 명한다.
“이 책은 주체성을 타인을 맞아들이는 것으로서, 즉 환대대hospitalité로서 제 시할 것이다. 환대로서의 주체성 속에서 무한의 관념은 완수된다.”58)
56) 레비나스, 앞의 책, 43쪽.
57) 레비나스, 앞의 책, 26쪽.
58) 레비나스, 앞의 책, 16쪽.
중기 레비나스에 게 주체는 타자를 환대하는 주체, ‘환대하는 주체’인 것이다.
한편 후기 레비나스의 대표 저작인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에서의 주체성은 ‘타자를 위한 존재’, ‘대 리’, ‘타자를 위한 볼모’ 등으로 표현되어 『전체성과 무한』에서의 주체성과 성격이 다소 다름을 보인다.
즉,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가 환대로서의 주체성을 강 조했다면,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에서 레비나스는 타자를 위한 주체, 자신이 볼모가 되면서까지 타자를 책임지는 주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시기 모 두 주체를 ‘타자를 위한’ 자로 놓는다는 점에서는 그 본질이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 며, 이러한 공통점은 레비나스가 주체성을 말할 때 그 근거를 항상 타자로부터 가져온 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레비나스의 철학에서는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환대/책임)가 주 체의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근본적이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벌거벗 은 얼굴로, 고통 받는 약자의 모습으로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할 때, 타자의 타 자성을 배척하지 않은 채 타자성 그 자체로 환대하며, 그를 책임지고, 더 나아가 그의 잘못까지, 그의 짐까지 대신 짊어질 정도로 타자를 위하는, 타자를 사랑하는 주체의 모습. 이것이 레비나스가 그리는 진정한 주체의 모습일 것이다.59)
59) 강영안, 앞의 책, 32-33쪽 참조.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여 레비나스가 그려온 주체성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존재로부 터 탈출하여 처음 등장하는
1)향유로서의 주체성, 그러나 존재의 무거움을 여전히 느 끼며 고통을 느끼기에 타자를 맞이하며 존재 너머로의 초월을 향하는
2)환대로서의 주 체성, 타자를 맞이하는데서 더 나아가 그 타자가 짊어진 짐을 대신 짊어지고 그 타자 의 타자, 그 타자의 타자의 타자에까지 책임의 범위를 넓혀가는
3)책임으로서의 주체 성 등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상의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에 토대를 두고, 한강의 소설을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중기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거쳐 또 다른 의미 로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년이 온다』까지를 살펴볼 것이다.
우선 본론 1장 1절에 서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로부터의 탈출, 즉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분리, 홀로서기 가 한강의 『여수의 사랑』의 등장인물들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리고 1장 2절에서는 이렇게 홀로섬으로써 자신의 내면성을 지니게 된 주체의 주체성, 향유의 주체성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향유의 주체성이 지니는 초월 불가능이라는 한계와 마침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2장 1절에서는 앞의 논의에 이어 이 얼굴로 다가오는 타자, 타 자의 얼굴이란 무엇인지를 『채식주의자』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2장 2절에서 는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라는 윤리적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윤리적 사건 속에 서 타자를 책임지기로 선택하는 주체가 어떻게 윤리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지 를 살펴볼 것이다.
본론 3장 1절에서는 이 논의를 더욱 확장하여 직접적 대면하는 타 자 외 제3자로서의 타자와 주체는 어떻게 관계하는지, 거기에서 발생하는 윤리는 어떤 것인지 『소년이 온다』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3장 2절에서는 책임 의 주체로서의 ‘나’와 타자의 일대일 관계를 넘어서, ‘나’와 타자와 그 타자의 타자의 관계, 그 타자의 타자의 타자와의 관계 등으로 이어지며 만들어지는 공동체에 대한 논 의를 해나갈 것이다
Ⅱ. 본론
1. 주체의 성립과 타자를 향한 열림 - 『여수의 사랑』
1) 고향으로부터의 떠남과 홀로서는 ‘나’
한강은 「붉은 닻」(1994)이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자신의 첫 작품을 세계에 내보인다.
그 후 그녀는 거의 계절마다 한 편씩의 단편을 발표하며 등 단한지 1년 반 만에 첫 단편집 『여수의 사랑』60)(1995)을 묶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첫 책에 대해 “휘몰아치듯” 쓴 소설들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61), 그것을 증명하기라 도 하듯 이 단편집의 소설들을 비교해보면 상호 간에 흥미로운 연결 지점이 보인다.
60) 한강, 『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95.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61)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창비, 2000, 6쪽. “오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묶는다. 첫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구십삼년 시월부터 구십사년 시월까지, 모두 만 일년 동안 휘몰아치듯 씌어진 것 들이었다.”
이 장의 결론을 당겨와 말해보자면,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자신에게는 집이 없다고 여 기고, 자신을 흡수하여 무화하는 듯한 이 ‘그저 있음’의 익명적 세계인 존재, 구체적으 로 나타나기로는 자연(특히 밤의 어둠)과 자신의 고향, 가족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주 체로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하며(존재로부터의 탈출),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 목표로 삼은 채 자신의 집, 자신의 먹고 입고 잘 곳을 최 우선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홀로서기로서의 주체).
한강의 첫 소설집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이러한 모습은, 레비나스가 주체의 성립을 위한 첫 조건으로 내세 우는 ‘존재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이러한 존재로부터 벗어난 존재자가 이루는 ‘홀로서 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한강의 첫 단편집과 레비나스 철학의 첫 출발점으로 공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러나 문제는 어쩌면 주체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불가피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홀로서기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타자에 대한 배척, 추방으로 인해 후에 주체가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좀 더 근원적으로 보자면, 존재자로 홀로섰 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무게에 짓눌리는 주체는 혼자서는 존재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즉 홀로서기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타자를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주체가 경험하는 고통이 자신의 완벽하고 완전한 삶에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타자(무한)의 만남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 고 이 타자와의 만남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살아온 그간의 삶을 돌 아보고 의문시하며 자신의 삶을 ‘창(槍)’으로 찔러 균열을 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 다.
이 창으로 찔러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내는 자, 어두웠던 시절로부터 벗어나 이제 세상 속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잘 살아가고자 하는 주체에게 다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불면에 빠트리는 자, 그리고 마침내는 주체에게 어떤 선택을, 어떤 응답을 요구하는데 까지 이르는 자, 그 자가 바로 ‘타자’다.
이러한 ‘익명적 존재 로부터의 탈출’ → ‘주체로서의 홀로서기’ →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레비나스의 ‘존재 론적 모험’은 한강의 첫 단편집인 『여수의 사랑』의 주요 여정이기도 하다.
우선 익 명적 존재로부터의 탈출과 그와 동시에 일어나는 존재자(주체)로서의 홀로서기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우선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전의 상태, 즉 존재에 사로잡혀 있 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존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근 본적으로 한 개별자가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 이전의 상태로, 구체적으로는 자신으로 돌아올 ‘집이 없다’는 것 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소설이 「진달래 능선」이다.
「진달래 능선」은 어릴적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쳐나온 정환이 어린 딸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 황(黃)씨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정환과 동생 정임은 어릴적부터 아버지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아버지에 의한 이러한 폭력 역시 존재 경험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폭력 속에서 ‘나’라는 개별성은 사 라져가고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에 흡수되어 버린 상태이기 때 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역시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에 도망쳐 올라간 진달래 능선에서, 정환은 물소리에 홀리어 고통스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데 정임이는 계속 배고 프다며 자신을 부른다.
결국 물소리의 방향을 잃은 정환이 정임이의 뺨을 치고 정임이 의 울음으로 뒤로하고 달아버린 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환은 정임이 만신창이로 산속을 헤매다가 겨우 산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대신 어머니의 쩌렁쩌렁하고 냉담한 음성이 날아왔다.
/ “넌 내 아들이 아니 다!” (...) 어둠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 여긴 너희 집이 아니다. / 그때 정환은 그 말이, 자신이 기식 하였던 남루하지만 따뜻한 방과 세 끼의 식사가 이제는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
그때 정환은 막연히 나에게는 집이 없다라고 생각하였다.62)
그날 밤 정환은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가계를 버리고 달아나기로” 결심한다.
오로지 어서 달아나야 했다.
어머니의 부여잡는 손으로부터, 언제 달려들지 모를 술 취한 아버지 의 두껍고 큰 손의 타격으로부터, 그리고 혼자 버려두고 떠난다는 자책만을 안겨주는 누이동생 정임 이의 백치스런 얼굴로부터 정환은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어두웠던 사위가 밝아가며 진달래 능 선이 차츰 거세게 불타오를 때에 정환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숨이 차게 달려 가 올라타고 말았다.63)
62) 한강, 『여수의 사랑』, 204쪽.
63) 한강, 앞의 책, 185-6쪽.
그 후 정환은 자신처럼 고아인 아이들을 입양해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양부 밑에서 지내게 된다.
군대에 있을 때 정환은 양부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고, “그의 죽 음이 자신에게서 이 땅의 유일한 ‘집’을 빼앗아가버렸다”고 느끼게 된다.
정환은 문득 고향을 떠올리고 찾아가본다.
그러나 그가 살던 집은 헐려 있었고, “어디에도 그의 가 족이 살았다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을 키워준 양부의 집은 물론이고, 언젠가 자신이 마음만 먹고 돌아가면 있으리라 여겼던 고향의 집까지 사라 져버린 것이다.
즉, 이제 그는 존재에 완전히 사로잡혀 버린 것이며, 존재로부터 벗어 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집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환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이 한갓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에 흡수된 채로는 살아 갈 수 없기에, 정환은 모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무작정의 희망”을 가지고 아르바이 트나 막일로 입에 풀칠을 해가며 “전국의 여관과 여인숙을 떠돌”게 된다.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마음과 그렇다고 체념할 수도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그의 육신과 영혼 은 찢기고 있었다.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아서 무엇 할 것인가.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 /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64) 결국 정환이 “붙박이 직장을 구했을 때는 그는 지칠 만큼 지쳐 있었으며, 원인이 불 분명한 위장 질환을 앓”게 된다.
“긴 하숙과 떠돌이 생활”을 끝내고 황씨의 집으로 계약하여 들어오게 된 그는 “쉬고 싶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일상을 유지해나갈 직 장과, 자신이 자신으로 돌아와 쉴 수 있는 집을 구하게 된 것이다.
즉, 존재자로서 홀 로서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원인모를 만성적인 위장병으로 인한 고통과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 동료들과 지내는 일은 힘들지만, 정환은 어떻게든 회사에서 버 티고자 한다.
마치 그것이 존재로부터 벗어나 존재자로서, 주체로서 홀로서기 위한 대 가라는 듯이.
아프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들과 웃고 떠드는 것은 더 욱 우울한 일이었다. (...) 그때마다 정환은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 이곳이야말로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집이며 가족이며 세계이다라고 입맛이 쓴 다짐을 하곤 하였다.65)
64) 한강, 앞의 책, 195쪽.
65) 한강, 앞의 책, 200쪽.
이처럼 「진달래 능선」에서 정환은 자신으로 돌아갈 ‘집 없음’을 존재로 경험하고 이러한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나 주체로서 서기 위해 직장을 구 하고 집을 마련하는 등 ‘홀로서기’위한 노력, 즉 ‘향유’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첫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여수의 사랑」은 어떨까.
이 소설의 두 주 요 인물인 정선과 자흔에게도 집 없음으로 표현되는 존재에 흡수된 상태가 나타난다.
그녀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으로 인해 그녀들은 고향을 잃고 길을 잃은 채 헤매어야 했을까?
둘의 만남은 월세를 아끼기 위해 룸메이트를 구하던 정선 에게 자흔이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전까지 여러 룸메이트들이 정선을 떠나갔는데 그 이유는 정선의 지나친 결벽증 때문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책 먼지를 훌훌 털고 세면 대를 닦아대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떠난 룸메이트는 언니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것 같 다는 충고를 하고 떠난다.
그런 정선에게 자흔이 나타난 것이다.
헌데, 골목에서 햇빛 을 받으며 서 있는 정선의 첫 모습이 독특하다.
때늦은 두꺼운 외투를 걸친 여자의 얼굴에는 쉴새없이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손수건도 없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손바닥으로 그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닦는 동작에 너무 몰입해 있어서 이를테면 마치 이목구비까지, 더 나아가 고유한 존재까지도 손바닥으로 닦아내버리려 는 것처럼 보였다.66)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 그 땀을 닦아내는 집요한 손놀림, 마치 얼굴을 지워버리겠다 는 듯, 나아가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까지 지워버리려는 듯한 이 모습은 존재에 흡수되 어 무화되어 가는 상태를 표현하는 듯 보이며, 어쩌면 정선이 지니고 있는 결벽증의 증세와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 소설 안에서 정선과 자흔, 두 인물의 뿌리 인 고향은 동일하게 ‘여수’로 설정되어 있기도 하다.
두 인물이 유난히 쌍둥이 자매처 럼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자흔이 자신의 얼굴을 지우는 듯 한 행위는 정선에게도 해 당되는 대목일 수 있다.
“무척 지친 기색”으로 “어항이 없네요. ... 난 어항이 있는 집이 좋은데.”
라며 정선 의 방에 들어선 자흔은 “키득키득”하는 “무구한 웃음 소리”를 내는데 그 순간, 정선의 삭막했던 방의 공기는 “한 색조 환하게 덧칠”한 듯 보이게 된다. 그
런 자흔을 “어딘가 친숙하게” 느끼며 정선과 자흔의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그녀들이 공통적으로 “피로한 기색”을 지녔기에 어떤 이는 ‘두 사람이 꼭 자매처럼 닮았구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활 태도는 “물과 기름”처럼 달랐다.
정선이 자신의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을 명확히하는 타입인 반면, 자 흔은 자신의 돈을 아무곳에나 놓거나 행동거지에 조심성이 없어서 온몸에 멍이 들기도 하는 등 자신의 소유물이나 자신의 몸 자체를 아무렇게나 대한다.67)
모든 행동에 조심 성이 없고 그 때문에 정선은 자흔에게 몇 번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자흔은 고개만 끄 덕일 뿐, “조금도 달라지는 기색이 없었”다.
러던 어느날 자흔은 어항을 사서 물고 기를 기르기 시작하는데, 물고기를 바라보던 그녀가 불쑥 이렇게 말한다.
......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68)
66) 한강, 앞의 책, 19쪽.
67) 이는 홀로서기를 이룬자와 홀로서기를 이루지 않은자의 대비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 즉, 정선이 홀로서기를 하여 자기성을 이루었기에,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내면과 외면을 구분하는 존재자인 반면, 자흔은 아직 홀로서기를 이루지 않은 자, 그래서 아직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없는 상태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자흔은 그 홀로서기의 한계를 깨달았기에, 자신의 것이라는 것도 실은 타 자로부터 온 것임을, 즉 타자에 대한 열림이 일어난 상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68) 한강, 앞의 책, 27-8쪽.
정선의 고향이 여수라는 말을 듣고 반가움을 표한 자흔에게, 그러나 정선은 일곱 살에 떠나온 “그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다섯 살에 어머니가, “일곱 살에 아버지가 죽은 그곳에 두 번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아왔“음을 밝히지만, 자흔은 여수에 대해 정 선과 자꾸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고향이 어디냐는 정선의 질문에 여수라고 답 한 자흔은 정선이 여수 어디냐고 캐묻자 당황하며
”잘 몰라요...... 워낙 어릴 때 떠나 와서요.“
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어릴 때 여수를 떠난 뒤로는 전국을 떠돌며 살아왔음 을 밝힌다.
그러나 소설 뒷부분에서 밝혀지듯, 자흔의 고향은 여수가 아닐수도 있다.
그녀는 단지 갓난아이였을 때 서울행 여수발 열차에 실렸기에, 자신의 고향이 여수라 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기찻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고 말하며, 자흔은 짐짓 일그러뜨린 입술로 웃어보였다.
/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 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69)
여기서 자흔의 ‘집 없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 소설집 전체적으로 볼 때 적어도 인물들에게는 자신의 부모와 어릴 적 시절을 함께했던 고향집이 있었던 반면, 「여수의 사랑」의 자흔에게는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가 누 군지 모르며,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런 그녀에게 하물며 자신의 ‘집’이 있 었겠는가. 그녀는 그야말로 ‘집 없음’의 상태, 존재에 흡수된 상태로 살아온 것이다.
이러한 집 없음의 상태는 정선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자흔이 몸이 아 플 때나 자흔이 떠난 뒤부터 정선은 ‘집 없음’을 경험하게 된다.
언젠가 자흔이 나에게 고백했던 것처럼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하루가 끝나면 차라리 모든 것이 함께 끝나기를 바랐다.70)
전철은 어두운 터널을 달리고 있었다.
검은 유리창에 반사되어 음화처럼 어른거리는 낯선 얼굴들 을 바라다보며 나는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망연히 서 있었다.71)
69) 한강, 앞의 책, 41쪽.
70) 한강, 앞의 책, 48쪽.
71) 한강, 앞의 책, 25쪽.
한편 이러한 ‘집 없음’으로 표현되는 존재 경험은 「여수의 사랑」에서 밤의 어두움 속에서의 ‘불면’으로 경험되기도 한다.
만성적인 위경령에 시달리는 정선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밤”에 대비해 신경안정제를 항상 준비해두며,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 밤 들”의 통증에 시달리며 잠 못 이룬다.
반면 자흔은 “순식간에 곤히 잠들 수 있”는 타 입인데, “어디에서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름의 열 대야가 시작되고 정선의 결벽증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자흔 역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된다.
열대야는 계속되었다. (...) 우리는 속옷바람으로 멀리 떨어져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자흔은 눈에 보이게 우울해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무구한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취방의 공기는 무겁 고 혼탁했다.72)
레비나스는 불면에 대해 “불면 상태란 밤 그 자체만큼이나 익명적”이라고 말하며, 주체를 “침입해 들어오는, 피할 수 없는, 존재(existence)의 익명적 소음을 분쇄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은 우리가 자려 해도 잘 수 없는 몇 몇 순간들”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면, ‘깨어있음’의 상태에는 “주체가 없다”73)라고 말한다.
72) 한강, 앞의 책, 45쪽.
73)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108-9쪽.
불면이라는 깨어있음의 상태는 “자기에게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것은 “자기의 부재” 이자, “자기 없는 상황”74)이다.
74)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42쪽.
이러한 “존재자 없는 존재” 상태, 고유한 얼굴과 이름 없이, 그저 존재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주체 이전의 사건’, 이 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 경험의 핵심인 것이다.
정선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은 후 일찌감치 그 고향을 벗어나 서울에서 홀로서기 위해 살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고향은 집 없음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서울에서 그녀 가 직장을 얻어 방을 얻은 것은 그녀가 비로소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홀로서기를 이루 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흔의 경우는 “두 살쯤 되었을 때 나는 강보에 싸인 채로 열차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정도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 로부터 버림받은 듯 보이며, 자신을 이 세상에서 보호해줄 아무런 보호자 없이 버려진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자흔은 자신의 존재성을 뿌리내릴 수 있는 근거가 애초에존재하지 않으며, 절대적 집 없음의 상태, 즉 존재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녀들은 그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해오며 지금껏 홀로서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흔은 그렇게 여수발 서울행 기차로 서울에 도착한 뒤 전국을 떠돌며 온갖 일들을 해 오며 자라왔고 마침내 이곳 정선의 집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 다. 정선 역시 부모와 동생이 죽은 고향을 등진 채 서울에서 독하게 살아온 것이다. 정선의 한 동료는 안색이 좋지 않아 휴가를 신청한 정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 그만하면 웬만큼 된 일들을 무슨 충성났다고 혼자서 야근하면서 정리 하고, 또 정리하고 ...... 그래가지고 어디 몸이 배겨나겠어?75) 이렇게 힘들게 홀로서기를 이루고 이뤄나가는 그녀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 그녀들의 미래를 보기 전에 우선 이 소설집의 마지막 발표작인 「어둠의 사육제」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존재로부터의 탈출과 그로 인한 홀로서기로서의 주체가 드러날까. 이 소설의 ‘나(영진)’ 역시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홀로살기를 이루 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칠공주 중 셋째였던 그녀는 일찍부터 자식 공 부에 대한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알아채고 “여상을 졸업하자마자 부모의 도움 없이 대학 등록금을 벌기로 결심하고 혼자 상경”한다. 그녀는 작은 무역회사의 경리로 일하 며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통장에 적금을 붓는다. 지출은 최대한 줄이고 “대입 수험서와 영문판 소설들을 사 읽”으며 가난하게 살아가더라도 그녀에게는 “희망 이 있”다. 그렇게 사년 가까이 부은 적금이 거의 만료되어 가던 여름, ‘나’는 같은 고 향에서 살았던 ‘인숙언니’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등진 후 고등 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한 채 열여덟의 나이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일을 하며 살아왔 다. 즉 그녀들은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홀로 서울에서 일을 하며 홀로서기를 이 뤄온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에서는 앞에서 다룬 소설들에 비해 존재에 의한 폭력 성이 그리 나타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소설에서 존재의 폭력은 우선 ‘가난한 부모(고향)’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나’는 가난한 부모의 형편으로 인해 자신이 꿈꾸는 삶을 이루지 못 할 것을 걱정하다 서울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부모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75) 한강, 앞의 책, 36쪽. - 34 - 며, ‘인숙언니’ 역시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형편 속에서 세계의 폭력성, 존재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존재자로 서기 위해, 서울 로 올라가 홀로서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홀로서기를 이룬 그녀들은 이제 서로의 돈을 합쳐 좀 더 넓은 방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그녀들은 “제법 널찍한 방에 말끔한 부엌이 딸린” 방을 얻는다. 그 녀들의 홀로서기는 순탄해 보인다. 여기까지 보면 앞의 소설들의 인물이 겪곤 했던 ‘집 없음’으로 나타나던 존재의 폭력성으로부터 그녀들은 어느 정도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전히 ‘집 없음’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연말연시에 우리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인숙어니는 어차피 고향에 기다리는 가족이 없었고, 나는 나대로 이번 한 해 동안 매운 마음먹고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여 좋은 결과를 얻을 때까지 가 족들의 얼굴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76) 또한 ‘집 없음’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존재의 폭력성은 매순간, 어디에서든 그녀들 을 흡수하여 무화하고자 한다. 새벽 여섯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일하는 인숙언니는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곤 하며 “피곤해, 피곤해 죽겠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다. ‘나’ 역시 서울 생활로 피로하기는 마찬가지이며 “쉽게 잠들지도 못하고 자다가도 몇 번씩 일어나”는 등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들은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 되어 의식을 잃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며, 그 여파로 인해 인숙언니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쓰러지기까지 한다. ‘나’는 그런 인숙언니를 부축하여 택시에 오르며 운다. 그녀들은 가난한 고향으로 벗어나 홀로서기를 잘 이루어왔다고 생각했지만, 각 존재자 들을 무화시키고자 하는 존재로부터의 폭력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향으로부터의 탈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가난’과 ‘죽음’으로 위협을 가 하는 존재의 폭력성은 여전히 그녀들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다만, 앞의 소설들에 비해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이러한 ‘고향으로부터의 탈출’이나 일의 피로, 가난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폭력성에 크게 강조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차이점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주목하고 있는 존재의 폭력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자가 홀로서기를 이룬 이후에도 여전히 그 존재자가 떠맡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의 무게, 여전히 존재자를 흡수하고자 하는 존재의 폭력성인 것이다. 76) 한강, 앞의 책, 224쪽. - 35 - 그녀들이 고향으로부터 떠나와 서울에서 취직을 하고 집을 얻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둘의 돈을 모아 전세금을 마련하여 좀 더 큰 집을 얻더라도, 즉 그녀들이 아무리 존재 로부터 탈출하여 홀로서기를 잘 이루어가더라도, 여전히 그녀들을 따라다니는 존재로 부터 온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이는 소설의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밤의 ‘어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인다.
어둠이 베어먹다 말고 뱉어놓은 살덩어리 같은 달이 떠 있었다.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 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 혈흔(血痕)을 타 고 번져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 들인 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 뒤척이고 있었다. (...) 어둠은 수천수만의 현란한 색채를 띠고 눈앞에 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어둠들이 창(槍)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족족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파리 한 가로등 불빛의 입자들, 차량들의 꽁무니마다 매달려 몸부림치는 붉고 노란 후미등의 불빛들을 나 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77)
그 날 밤 늦게 인숙언니는 잠든 내 어깨를 흔들었다. (...) 얼룩덜룩하게 희고 검은 줄무늬가 있는 암코양이가 팔뚝만한 몸뚱이를 뒤틀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 미터쯤 떨어진 지붕 용마루에 검은 수코 양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둠 속에 꼿꼿이 네 발을 세운 채로, 경련하는 암코양이의 모습을 소 리없이 주시하고 있는 검은 수코양이의 모습은 흡사 악령 같았다. (...) “죽이고 싶어. (...) 저기 서 있는 저 까만 고양이, 모가지를 비틀어 죽여버리고 싶어.” / 하현달이 뜨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을 온몸으로 빨아들이며 검은 고양이는 용마루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놈의 눈빛이 집요하게 꽂히는 곳 에서, 얼룩덜룩한 암코양이는 최후의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78)
나는 한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담요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어둠은 꼭 같았다. 나는 어린 아이와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79)
77) 한강, 앞의 책, 210-1쪽.
78) 한강, 앞의 책, 222-4쪽.
79) 한강, 앞의 책, 258쪽.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이 소설에 밤의 어둠은 무언가를 “베어먹”고 “집어삼 키”며, “창(槍)날을 세우고 덤벼”들어 마침내는 저승에서 온 저승사자처럼, “달빛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며”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을 죽음으로 데려가려는 “악령”으로 나타나 기에 이 “한치 앞도 알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는 어떤 존재자라도 “어린 아이와 같 은 두려움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레비나스가 존재 경험의 예로 밤을들며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즉 레비나스가 말한 바, “밤 속에서 우리는 어둠에 얽 매여 있으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이러한 밤에는 “이것 또는 저것이라 부를 수 있 는 것, 즉 ‘어떤 사물’(존재자-인용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밤, 존재 속에서 인물은 “밤 속에 휩쓸려 버리며, 밤에 의해서 침범당하고 비인격화되 고 질식되어 버”80)리고 만다는 것이다.
80)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94쪽.
존재자로서의 ‘나’는 어둠에 사로잡히고 흡수 되어 개별성을 상실한 채 존재자로서의 자신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 소 설에서 존재의 폭력성은 고향이나 부모, 가난한 삶 등에서 오기도 하지만 그로부터의 탈출을 이룬 뒤에도 여전히 나타나는 존재의 폭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좀 더 강조 되고 있는 것은 바로 밤의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존재로부터 탈출하 여 홀로서기를 이룬 주체가 누리는 자유는 일시적인 자유이자 순간적인 탈출일 뿐이라 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적인 자연과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고향으로 부터 탈출하여 새로운 도시에서 일을 구하고 집을 얻어 홀로서기를 이룬 그들에게 여 전히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존재로부터의 탈출과 홀로서기로 이루어낸, 그러나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자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 진정한 존재로부터의 탈출은 불가능한 것일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만, 죽음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위에서 다룬 소설들의 후반부가 그 가능성을 조금은 보여주는 듯 듯하다.
이 소 설들의 후반부에서 그려지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은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집을 얻는 등 의 홀로서기로 대표되는 동일자적인 운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소설들의 후반부가 말하고 있는 진정한 존재로부터의 탈출의 가능성은 ‘나’라는 동일자의 밖, ‘타자’로부 터 온다.
2) ‘나’의 삶을 무너뜨리고 새로 세우고자 하는 타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인간은 이 세계에 태어난 이상, 우선 세계에 자신을 흡수당하 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무화시키고자 하는 세계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야 한다.
그 러기 위해 인간은 집을 짓고 밥을 먹으며 노동을 하면서 이러한 세계를 자신이 다스리 며 지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 지배’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존재자 는 여기서 일시적인 자유를 느낄 뿐, 진정한 자유, 진정한 존재로부터의 탈출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존재에 대한 이러한 주체의 지배, 존재자의 이러한 주권에는 변증법적 전환이 일어난다. 존재는 자신과 동일한 존재자, 곧 홀로 있는 존재자에 의해 지배된다. 하지만 동일성은 자기로부터 의 출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자기로의 귀환이다. 현재란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존립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자의 [존재자로서의] 자리 잡기로 치른 대가 이다. 존재자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몰두하는 방식, 그것이 곧 주체의 물질성 이다 동일성은 자신과의 무해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얽매임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몰두하기 위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작은 자기 자신에 의해 짓눌린다.81)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홀로서기를 이룬 주체는 자기로부터 출발하여 자기에게로 돌아 오는 운동만 할 수 있다.
홀로선 주체는 결코 ‘나’라는 동일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홀 로선 존재자는 ‘홀로섰다’는 그 대가로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벗어 날 수 없’게 되는데, 이렇게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을 두고 레비나스는 ‘물질성’ 혹은 ‘육체성’이라 부른다. 이는 결국 ‘자신에게 얽매’이는 것이기에 동일성 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로의 귀환’에서 탈출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길은 ‘나’의 밖에서 오는 ‘타자의 얼굴’이다.
얼굴이란 (...) 내가 진실을 파악했다고 믿는 순간에 내 두 손에는 껍데기밖에 남겨 놓지 않는 것 이다. 이러한 실망은 긍정적이며, 이 실패는 유익하다. 자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힘을 잃어야 한다. 그 이유는 타자는 일체화되지 않기 때문이며, 나의 소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고, 나의 경험 모 두가 자신이 태어난 섬으로 의무적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생기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서, 나에게 오디세우스의 모험담과는 다른 모 험담을 알려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타인의 얼굴뿐이다. 나는 얼굴을 향해 간다. 그렇지만 얼굴을 흡수할 수는 없다. 얼마나 멋진 무력감인가. 만약 이 무력감이 없다면, 삶은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 도 자기를 떠나 자기를 향해 가는 단조로운 여행에 불과할 것이다.82)
81)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52쪽.
82) 알랭 핑켈크로트, 『사랑의 지혜』, 권유현 옮김, 동문선, 1998, 26쪽.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나의 힘을 뺀다는 것, 즉 나에게 무력감을 선 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야 자신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동일자적인 세계는 어 떤 균열을 보이게 되고 타자를 향해 열리게 되며 비로소 이때에야 존재의 무거움으로 부터 ‘나’는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타자의 얼굴’이다.
레비나 스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여러 차례, 여러 가지 정의로 말하지만, 가장 기본적이자 핵 심적으로 여겨지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타인으로서의 타인은 단지 나와 다른 자아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닌 사람이다. 그가 그인 것은 성격이나 외모나 그의 심리 상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의 다름(他者性) 때문이다. 그는 예컨대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이고 강자이다. 우리는 상호주관적 공간은 대칭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83)
83) 레비나스, 앞의 책, 101쪽. - 39 -
타자는 약자이고, 나는 강자이다.
타자와 나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며, 비상호적이다.
그리고 이는 그/그녀가 “내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그/그녀의 성격이나 심리 상태, 외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그녀의 “다름(타자성)” 자체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타자 앞에서 ‘나’는 상대적으로 강자인 것이며, 타자와 나의 관계는 언제나 비상호 적, 비대칭적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앞의 논의를 이어가보자면, 존재로부터 벗어 나 존재자로 홀로섰다고 하더라도 존재의 무게에 짓눌리는 주체는 혼자서는 존재로부 터 진정으로 벗어날 수 없기에, 즉 홀로서기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타자를 향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주체가 경험하는 고통이 자신의 완벽하고 완전한 삶에 균 열을 내고, 그 틈으로 타자(무한)의 만남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 열릴 수 있다는 것 이다.
하지만 이 타자와의 만남 역시 고통의 역속이며 오히려 이는 고통을 넘어서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타자와의 만남으로부터 오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의문시하며 자신의 삶을 ‘창(槍)’으 로 찔러 균열을 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창으로 찔러 자신의 삶에 균열을 내 는 자, 어두웠던 시절로부터 벗어나 이제 세상 속에서 아무런 위협 없이 잘 살아가고 자 하는 주체에게 다시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불면에 빠트리는 자, 그리고 마침내는 주체에게 어떤 선택을, 어떤 응답을 요구하는데 까지 이르는 자, 그가 바로 ‘타자’이자 ‘타자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다룬 소설들에서 이러한 타자와이 만남은 어떻게 그려질까?
먼저 「진달래 능선」을 살펴보자. 앞에서 정환이 어머니와 정임이를 찾던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얻고 황씨의 집에 계약을 하여 입주하는 모습까지 살펴보았다. 정환이 홀로서는 모습까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환이 세들어 살게 된 집 주인 황씨 는 어떤인물인가. 황씨에게는 아내와 두 남매가 있었는데, 심장병이 있는 딸은 둔채 아들만 데리고 아내가 도망을 가버렸다. 황씨가 그들을 찾으러 떠돌이 생활을 하다 돌 아왔을 때 딸은 위급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제 “어린 딸을 삼년 전에” 잃은 그는 “셋방을 내도록 설계된 집인데도 딸이 죽은 후로는 여태 놀려둔 채 혼자 살아”왔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듯 보인다. 그가 하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새벽이면 마당에서 줄넘기 따위의 운동을 하는” 것과 집 앞 정원의 나무들을 파내어 그 구덩이 속에 나무들을 던져 태운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전 혀 없는 사람으로, 정환이 보기에 그가 하루 중에 입을 여는 순간은 “먹을 때 뿐일 것 같은 사내”였던 것이다.
그런 황씨가 정환도 편하다.
정환은 굳이 황씨의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중개인의 이야기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정환에게는 그저 자신의 지친 육체를 누일 방 한 칸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 황씨는 낮에는 철제 대문을 빠끔히 열어놓았다. 밤이 되면 힘주어 밀기만 해도 열릴 수 있도록 잠금 장치를 느슨하게 해두었다. 벨을 누르고 끌러주는 절차마저 귀찮아한 것이었다.84)
84) 한강, 앞의 책, 184쪽.
위의 예문에서 보듯, 그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살아가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상관하 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며 오로지 혼자 살아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정환에게는 그저 육 체를 누일 방이 필요할 뿐이며, 황씨 역시 정환에게 세를 받으면 그뿐, 인사나 문을 열어주는 일은 그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홀로서기를 철저히 이 루었으며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러한 홀로서기에 어쩐지 불길한 듯 끼어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정환이 ‘원 인이 불분명한’ 위장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환이 홀로서기를 이루었음에도, 아니 홀로 더욱 잘 살아가질수록 더욱 심해지는 병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존재의 무거움이 여전히 홀로선 주체를 짓누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황씨 역시 마찬 가지인데, 그에게도 원인이 불분명한, 정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보인다.
유 난히 위장병에 시달리던 어느 날 정환은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
정환이 황씨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가 바뀌고 강추위가 닥친 일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 정환은 이날따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약을 먹었는데도 위장의 통증이 계속되었다. (...) 그때 나지막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그 소리가 차츰 커 지면서 정환은 잠이 달아나버렸다. (...) 정환이 무슨 마음으로 문을 열었는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황막하던 거실이 뜻밖에 어두우면서도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에 그는 놀 랐다. 그것은 촛불 때문이었다. 거실 벽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형형색색의 초들이 불꽃을 태우고 있 었다. (...) 정환의 기척 때문인지 울음소리가 별안간 멈추었다.85)
이후 황씨는 “울음을 터뜨린 다음날이면 나무 한 그루를 불”사르는, 정환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정환은 황씨의 울음을 “사흘 걸러 한번 꼴”로 들으 며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면서도 딱히 그에게 다가가지는 않고 단지 증세가 더 “심해 진 위장을 끌어안고” “그의 울음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통증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고통은 지속될 것이며 어디에서도 그것을 진정할 수 없으리 라는 초조함 때문에 정환은 좁은 방을 서성거렸다. 벽을 짚으며 한숨을 토했다. (...) 간밤에 뒤집어 서 팽개쳐 놓았던 사진이 거기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들었다. / 얼굴이 희고 눈이 가느다란 앳된 소녀가 웃음도 울음도 아닌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소녀의 얼굴을 찬찬히 문질렀다. (...) ......정임아. / 어디서 이렇게 가난한 얼굴로 자라났느냐. 지금은 어디서 이렇게 가난 한 얼굴로 살고 있느냐.86)
85) 한강, 앞의 책, 186-8쪽.
86) 한강, 앞의 책, 189쪽.
흥미로운 점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정환이 그 끝에 이르러 보게 되는 것은 뒤집어 팽개쳐놓았던 정임이의 얼굴이라는 것이다.
정환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아버지와 폭력 과 자신의 버려둠에 무방비로 “팽개쳐 놓”였던 ‘약한 자’이자 “가난한 얼굴”을 한, 타 자인 정임이를 찾고 있다.
정환은 그런 정임이의 얼굴을 황씨의 마당에 있는 진달래 나무들에게서 보기도 한다.
(...) 정환은 대문 안쪽에 기대어 서서 저물어가는 마당을 바라보고 있곤 했다. 그때마다 정환을 사 로잡은 것은 구덩이 하나하나에 우뚝 솟은 나무들의 환영이었다. (...) 진달래 나무들에 시선이 멎을 때면 환영은 더욱 풍요해져서, 눈이 멀 것 같은 붉은 꽃바다에 정환은 오한이 드는 줄도 모르고 거 기 서 있었다. / 그것은 정환이 고향을 도망쳐나오던 아홉 살의 초봄, 역으로 가는 새벽 첫 버스를 기다리며 보았던 풍경과 흡사했다. (...) 진달래 능선이라 부르던 뒷산 기슭에서 봉화처럼 타오르는 꽃불을 정환은 보았다. 그것은 입술 가득 진달래 꽃물을 들이고 다니던 코흘리개 정임이의 얼굴과 겹쳐졌다.87)
정환은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매번 마당의 진달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정환은 고향의 진달래 능선을, 그곳에서 입술에 꽃물을 들여가며 먹던 정임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황씨가 이 진달래 나 무들을 불태운다는 점이다.
특히 울고 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전날 밤 황씨의 울음 소리는 유난히 크고 격렬하여 정환은 새벽녘에야 선잠이 들어었다.
(...) 마 구 겹쳐져 그 수효를 알 수 없는 진달래 나무들이 타고 있었다. (...) “......왜 태우는 겁니까?” 정환 은 처음으로 만류하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으므로 더듬거리며 첫마디를 꺼내놓았다. 우거진 진달래 나무들을 바라볼 때마다 정환은 막연한 향수와 기쁨을 느끼곤 하였던 것이다. (...) “...... 보기 좋잖 소.” / “하지만” / 정환은 항의했다. / “곧 봄이 됩니다, 꽃이 필텐데요.” / “......그러니까 태우는 거요.”88)
불꽃이 소리를 내며 치솟았다.
순간 정환은 황씨의 등에 업혀 있곤 하였다는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았다. (...) 황씨의 얼굴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영혼은 이 세상을 떠나고 육 신만이 이곳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는 것 같았다. (...) 봄이 오기 전에 저 나무들은 모두 불태워지 고 황씨의 육신도 얼어붙은 겨울의 구덩이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환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다.89)
87) 한강, 앞의 책, 185-6쪽.
88) 한강, 앞의 책, 197-8쪽.
89) 한강, 앞의 책, 199-200쪽.
정환은 왜 “이상한 두려움”을 느꼈을까.
그것은 황씨의 육체가 저 나무들을 모두 불 태우고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나, 더 근본적으로는 나무들이 사라짐으 로 인해 정임이를 떠올리는 자신 역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정환은 이제 곧 봄이 오면 꽃이 필 살아 있는 진달래 나무들을 통해 정임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타는 진달래 나무들을 통해 황씨가 보는 것은 무엇 인가.
왜 황씨는 곧 봄이 오면 꽃이 필 진달래 나무들을 굳이 태우는 것일까.
황씨가 매일 자신의 일과처럼 행하는 일, 즉 나무를 불태우는 일을 통해 찾는 것은 죽은 딸아 이의 얼굴이다.
퇴근 후 위장약을 먹고 깜빡 잠이 든 정환이 오한 때문에 깨어 마당으 로 나섰을 때, 술에 취한 황씨는 마당에 남은 마지막 진달래 나무들을 태우고 있었다.
진달래 나무들을 태우지 말라며 황씨를 밀치는 정환에게 황씨는 주먹을 날리고 둘은 엉키어 바닥에 쓰러진다. 그때 황씨가 울기 시작했다.
겹치어진 몸으로 전해오는 가냘픈 흐느낌이 차츰 격렬해졌다. 창(槍) 을 맞은 상한 짐승처럼 황씨는 고함쳐 울고 있었다. 황씨의 통곡이 그칠 때까지 정환은 얼어붙은 겨 울 땅을 고스란히 등허리로 느끼며 누워 있었다. (...) “...... 내게는 딸이 있었소. (...) 이따끔 그 아 이 꿈을 꾼다오.” / 황씨는 나무에 석유를 끼얹은 뒤 호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불을 당겼다. (...) 비틀거리는 그의 등이 허전하게 넓어보였다. 정환은 그 등에서 떨고 있는 여자 아이의 환영을 보았다. (...) 여자 아이가 푸드덕 모닥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 하긴 살았을 때도 말은 많이 하지 못했지, 숨이 차서, 늘 짧고 간단하게 말해야만 했다오. (...) 언제나 깜박 잠이 들 무렵이면 녀 석이 거기 서 있는 거요, 아부지 여긴 춥구 나무 한 그루 없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말이 오. 그때마다 난 말하오, 그래 보내주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 한 번도 그 사이로 뛰어다니지 도 못한 네 나무들을 보내주마 하고..... (...) 난 이렇게 불태워진 것들이 그 애의 마당에 옮겨 심어 질 거라고 믿고 있는 거요. 이제 이것이 그 동안 내가 가진 마지막 나무인데, 그 아이 섰는 한없이 넓은 땅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려면 아직도 멀었소......”90)
90) 한강, 앞의 책, 207-8쪽.
위 대목에서 보듯, 황씨가 진달래 나무들을 태운 이유는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그루 없는 곳에” 서 있는 죽은 딸아이에게 그 아이가 좋아하던 나무들을 보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불태워 재로 날려 보냄으로써 “그 애의 마당에 옮겨 심어질”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황씨의 딸아이 역시 타자로 나타난다.
그 아이는 심장병 을 앓아 숨이 차서 말을 많이 하지 못한 ‘약한 자’였으며, 그런 아이를 버려둔 채 도망 간 아내와 아들을 황씨가 찾아다니는 동안 홀로 남겨진 ‘고아’였으며, 죽은 뒤에도 춥 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아이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로 나타난다.
즉 정환이 살아있는 나무들을 통해 정임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황씨는 불타는 나무들을 통해 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현실의 나무들이 재가 되어 죽은 딸아이가 살고 있을 마당에 다시 필 나무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환과 황씨는 자신에게 닥치는 고통스러운 경험 속에서, 그 고통의 끝에서 자신의 타자를 바라보고 그 타자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의 인용문에 바로 이어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살펴보자. 불길이 진달래 가지의 끝에 이르자 무수한 불티들이 어둠을 거슬러 올랐다.
그 어둠 저편에서 진 달래 관목들이 붉은 봄빛을 내어뿜으며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91)
91) 한강, 앞의 책, 208쪽.
앞 절에서 살펴본 바, ‘어둠’이 살아있는 존재자를 무화시키려는 존재의 폭력성이라 면, 어둠을 거슬러오르는 ‘무수한 불티’, 어둠 저편에서 뿜어져나오는 진달래나무들의 ‘붉은 봄빛’은 그 존재의 폭력성을 뚫고 나아가는, 살아가는 존재자의 모습으로 보인 다.
살아있는 나무와 불타는 나무를 보며 각자의 타자를 떠올리던 정환과 황씨는 이제 이 어둠을 거스르는 불티들을 보며, 붉은 봄빛들을 보며, 타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들은 홀로선 주체로만 있지 않다. 그들은 이제 문 저편에 있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몸싸움을 하며 뒤엉킨 채 뒹굴었고,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으며, 그 토록 견고하던 자신의 성을 조금 무너뜨린 듯 보인다.
홀로 선 주체로서 잘 살아가는 듯 보였던 그들에게 실은 내재하고 있는 상처와 아픔이 서로를 통해 드러나고,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그들이 나무들이 불타서 재가 된 뒤 ‘불티’들이 되어 어 둠을 거스르는 장면을 보는 것은 함께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봐야할 점은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정환과 황씨의 관계이다.
이들은 각자가 동생과 딸이라는 타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가 서 로에게 타자이기도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위장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정환 은 황씨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무들이 불타는 것을 보게 된 뒤의 어느 날 퇴근 후 방 저편의 황씨에 대해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정환은 문 저 편에서 느릿한 발소리를 내던 황씨, 혼자서 밥을 안치고 먹을 것을 삼키고, 저녁이 오면 텔레비전을 켜고 졔레처럼 하나하나 촛불을 밝혀온 황씨의 지난날을 상상하였다.
/ 이 문, 이 문의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혼자 밥먹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흐느껴 울었다. / 그렇게 기대어 있 자니 정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92)
소설의 중반부까지 볼 때 황씨에게 굳이 신경을 쓰기 싫어하고 그저 자신의 몸 누일 곳만 찾던 정환이, 누구보다 홀로서기를 잘 이루어온 것처럼 보였던 정환이, 이제는 문을 사이에 둔 황씨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 정확히는 황씨의 외로움과 상처와 약 함을. 그런 점에서 황씨는 정환에게 타자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이 정환의 시점으로 제시되고 있어 황씨의 내면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으나, 황씨에게도 정환이 타자로 다가왔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제는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을 살펴볼 차례다.
함께 방을 얻어 살며 홀로 서기를 이룬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앞 절에서 살펴본 바, 열대야가 심해 지면서 정선의 결벽증이 심해짐과 더불어 두 사람은 불면의 밤들을 보낸다.
그런데 이 처럼 열대야가 심해지기 전, 초여름이던 7월의 어느날 자흔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지갑 을 소매치기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지갑 안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경찰의 물음에 자흔 은 현금과 열쇠, 주민등록증 등을 얘기하다가 마지막으로 “열차표가 한 장” 있었다고 말한다.
어디로 가는 표인지를 묻는 경찰의 질문에 자흔이 보인 행동은 정선이 처음 자흔을 보았을 때의 모습이었다.
자흔은 눈살을 모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차츰 거칠어졌다. 내가 처 음 그녀를 보았던 골목길에서처럼 자흔은 자신의 눈과 코와 입을, 얼굴 윤곽까지를 집요하게 닦아내 고 있었다. /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얼굴을 닦던 두 손을 무릎 위로 내려뜨리며 대답했다. / ......여수. / 그때 내 몸 속 어디에선가 가냘픈 유리 그릇 같은 것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부서 졌다.93)
92) 한강, 앞의 책, 201쪽.
93) 한강, 앞의 책, 39쪽.
자흔에게 여수를 떠올리는 것은 존재에 흡수되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자흔은 여수를 떠올릴 때마다 자신의 존재성을 지워버리는 듯, 자신의 눈과 코와 입 을, 얼굴을 지우려 한 것일까.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자흔은 사실 자신의 고향이 여 수가 아닐 수도 있다며, 단지 자신이 두 살쯤 되었을 때 강보에 싸인 채 서울행 열차 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 열차가 여수발 이었다고 하니 그렇게 짐작해왔을 뿐이었음을밝힌다.
자흔은 “기찻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며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음을, “모든 도시가 곧 떠 나야할 낯선 곳”이었음을, 매일 아침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으며 “하루하루가 지옥 이었”음을 밝힌다.
그러나 자흔은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그랬다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괴롭지도 않”다고. 흥미로운 지점은 자흔이 어디로 가는 표 였냐고 묻는 경찰의 질문에 “여수”라고 대답했을 때 정선의 몸 속에서 “가냘픈 유리 그릇 같은” 무엇이 부서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자흔에게서 위와 같은 말들을 다 들은 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흔에게 정선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자흔 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리고 정선의 몸 속에서는 “잠들어 있던 혈관 하나하나” 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녀의 몸 속의 “유리 그릇” 같은 것을 깨뜨렸으 며, 그 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관 하나하나”를 끓어오르게 한 것일까. 자흔의 “여수” 라는 말에 정선은 무엇을 떠올린 것일까.
이날 밤 이후 정선의 결벽증은 “발작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불면 역시 심해져온 것이었다.
온갖 눈병과 귓병이 지하철과 버스 손잡이를 통해 옮겨다녔다. 나는 내 살갗에 다른 사람의 살이 닿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세 정거장 네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다녔다. (...) 나는 회사에서도, 집에서 도 아무 일에도 열중할 수 없을 만큼 병원균들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 급기야 나는 모 든 사물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기에 이르렀다. (...) 나는 자흔이 음식을 만드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서 조리대 가까이에는 다가오지도 못하게 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내 지나친 호의에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는 차츰 나의 혐오와 공포를 깨달았다. 밖에서 돌아온 자흔이 손을 씻지 않은 채 문고 리를 잡으면 나는 기어코 비눗물로 그것을 닦아내야만 했다. 마치 자흔이 모든 병원체의 숙주라도 되는 듯이, 나는 그녀의 손이 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진저리를 쳤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94)
94) 한강, 앞의 책, 42-4쪽.
위에서 정선이 보여주는 결벽증의 태도는 나 자신 외부의 것을 모두 배척하고자 하 는, 홀로서기를 이룬 존재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이제 존재에 사로잡힐 것만 같 던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으며 홀로서기를 이룬 자신의 신체 밖의 것, 외부의 것에 대해 강한 혐오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 혐오가 가리키는 대상은 바로 자흔, 즉 타 자이다.
알랭핑켈크로트는 이러한 타자에 대함 혐오의 예로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혐오를 들고 있는데, 그가 여기서 타자 혐오에 대한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로 ‘불가 시성’, ‘파악할 수 없음’, ‘식별할 수 없음’이다.
유대인 대학살을 준비해온 문서를 읽다 보면,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이 유대인의 불가시성인 것을 알 수 있다.
(...) 유대인의 차이는 오로지 특정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유로 불안을 일으키는 불 길한 것이다. 나치즘이 만든 유대인에 대한 고발 문서에는 기생성과 음모라고 하는 두 개의 무거운 혐의가 지적되어 있다. (...) 이 비유들이 암시하는 것은 (...) 유대인이 열등한 존재라기보다는 파악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유대인은 어느 곳에나, 또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다. 유대인은 타자이지만 구별되지 않는다. (...) 아, 유대인이 단지 다를 뿐이라면 인류는 얼마나 마 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유대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렇게 식별할 수 없는 점에 있다.95)
아닌 게 아니라, 정선은 자흔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종종 이해할 수 없어 하며, 그녀 를 식별해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 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 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96)
그러나 뜻밖에도 자흔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 얼굴에는 견고한 평화가 어른거리 는 것처럼 보였다.
(...) 그때 나는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구인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사람인지, 이 사 람을 비난해야 하는 것인지 어쩐지를 알 수 없어 망연히 자흔의 얼굴을 바라다보고만 있었다.97)
95) 알랭 핑켈크로트, 앞의 책, 146-7쪽.
96) 한강, 앞의 책, 32쪽.
97) 한강, 앞의 책, 33쪽.
정선은 지친 자흔에게서 간혹 보이는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의 정체를 알 수 없 어하고 있으며,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인지를 의아해하고 있다.
그리고 자흔의 얼굴에 뜻밖에 “견고한 평화가 어른거”릴 때, 정선은 자흔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한다.
정선은 자흔의 정체를 파 악할 수 없어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곧 타자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정선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자흔에게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내가 무슨 잘 못을 했느냐는 자흔에게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도하지 말아 요...... 더러우니까.”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날 이후 자흔은 “눈에 보이게 우울해져 가”며, “그녀의 무구한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취방의 공기는 무겁고 혼탁”해진다. 그렇 다면 정선이 이렇게 까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처럼 자흔을 혐오하고 증오하고 배척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 자흔이 묻히고 온 여수의 냄 새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떠나온 고향인 여수가, 정선에게는 어떤 곳이었던 것일까. 여수, 그 앞바다는 아직도 검푸른 파도를 세우며 선착장의 철선들을 향해 밀물져오르고 있을 것인 가. (...) 입술에 묻은 가루약을 닦다 말고 문득 나는 움츠러드는 손바닥을 눈앞에 펼쳤다. 더러운 손 이었다. / 손을 씻고 싶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여태껏 삼켜온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 나는 두 손바닥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동생 미선의 따스한 손바닥, 내가 뿌리쳐버린 손바닥의 온 기가 내 불붙는 듯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언니, 같이 가, 아, 아부지......! 잘 뛰지 못하는 미선의 손 을 냅다 뿌리치고 달아나던 나는 그 아이의 혀 짧은 외침이 부두 아래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소 리를 들었다. 뒤돌아보았을 때 미선의 조막손과 조그마한 머리통은 거품을 뿜으며 바닷속으로 가라 앉고 있었다. (...) 미선이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이번에는 반항하는 나를 목에 감아 안은 것이다. 짙 푸른 물살 속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눈과 코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짠물, 짠물.98)
즉, 정선의 결벽증의 원인, 그리고 자흔에게서 ‘여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 안의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 등의 원인은 바로 이 경험, 아버지에 의한 동생의 죽 음과 자신이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에 의한 폭력성은 「진 달래 능선」에서도 드러나는 바, 한 개별자를 흡수시켜 무화하고자 하는 존재의 폭력 성이다. 여기서 정선은 아버지로 인한 존재의 폭력성을 느낌과 동시에, 동생 정임이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버렸다는 죄책감 까지 가지고 있다.99)
98) 한강, 앞의 책, 53쪽.
99) 이러한 죄책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홀로서기 위해 타자를 내쳐야했다는 죄책감은 한강의 이 후 소설들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바, 이는 레비나스의 철학에서도 후기로 갈수록 중요해지 는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장들에서 더 다루기로 한다.
이런 경험을 했던 여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바로 자흔이었던 것이다.
아버지, 아...... 아버지. (...) ......당신 때문이야...... / 싱크대에 상체를 기대어 주저앉으며 나는 불분명하게 내뱉었다. / 당신 때문에 내가 견딜 수가 없어...... / 푸르게 질린 입술로 떨고 있는 나 에게 자흔은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다가왔다. (...)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 그 빛나는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흔은 나, 내일 떠날 거예 요, 라고 말했다.100)
자흔은 정선에게 끔찍했던 기억, 존재에 흡수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존재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동생의 손까지 뿌리쳐야했던 정선은, 독한 마음으로 서울에서 홀로서기 위해 살아왔고, 일을 얻고 방 을 얻으며 지금껏 홀로선 주체로서 잘 살아왔던 것이다.
이처럼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홀로서기를 이룬 주체인 정선에게, 자흔은 다시 그 존재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홀 로선 주체의 완벽함에 어떤 균열을 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의 타자성이 “약한 자”이자 “가난한 자”이자 “고아”이면서도, 그보다 이 소설에서 더 부 각되는 것은 홀로선 주체에게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 의문을 불러일으킨 다는 점이다.
타자는 창으로 찌르듯, 완벽히 홀로서서 자신을 이루었다고 믿는 주체의 성벽에 균열을 낸다.
이는 자흔의 “다름(타자성) 때문”이며 그런 자흔을 견디지 못하 는 정선에게, 자흔은 마침내 떠나겠다고 말한다. 자흔이 가고자 하는 곳, 그곳은 여수 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흔에게 여수란 무엇일까.
......여수 앞바다의 해안을 따라 한없이 동쪽으로 가면 소제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이 있어요. 아마 정선씨는 못 가봤을 거예요. 나도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나는 바람에 우연히 내리게 된 후락한 마을 이었으니까요. (...)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냥 ‘아름답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 어느 하나도 낯익은 것이 없었는데도 마치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품속에 돌아와 있는 것 같았어요. (...) 아스라이 보이는 여수항에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켜지 고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 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 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에요......101)
100) 한강, 앞의 책, 49쪽.
101) 한강, 앞의 책, 50-2쪽. 특히 이러한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음’, ‘육체성’으로 인한 고통이 잘 드러나는 인물은 같은 소설
이 대목이 흥미로운 것은 자흔이 이미 여기서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 이다. 「진달래 능선」을 살펴볼 때도 보았지만, 주체의 동일자적인 세계에 균열은 내 는 것은 바로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더운 피를 흘려서 그 피를 여수의 개펄에 섞게 하고 여수의 흙을 자신의 혈관 속으로 스며들게 하고자 하는 자흔의 모습은, ‘나’라는 동일자적 세계를 무너뜨리고 외부의 타자를 맞이 하고자 하는, 홀로선 주체가 아닌 또 다른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흔을 그렇게 혐오하던 정선은 자흔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어찌된 일일까. ......가지 말아요. / 자흔이 떠나기 전날 밤, 이가 부딪치도록 차가운 세면장 바닥에 웅크려 앉아 나는 자흔의 앙상한 팔을 붙안고 애원했었다. 처음에는 ‘안 돼요’라고 또렷이 대답했던 자흔은 ‘가 지 말아요, 가면 안돼요’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떨고 있는 나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끌어다 안았다. 앓고 있는 어린 아이를 안타까이 달래듯이 그녀는 대답했다. / 그래요, 가지 않을게요. /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 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푸근하였다.102)
102) 한강, 앞의 책, 56쪽.
정선은 자흔의 품속에서 처음으로 어머니의 품속에 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끔찍한 기억만 있던 여수의 바다를 “다사롭고 푸근”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떠 나버렸고, 자흔은 그녀가 떠난 뒤에 결벽증이 완화되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된다.
마 치 여수가, 그녀를 괴롭히던 끔찍한 기억이, 존재가 떠나고 다시 홀로선 주체로 살아 집 안에 수록된 「저녁빛」의 재헌이다. 재헌은 자신이 몰랐던 친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후 아 버지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며 울다 토까지 한다. 그
러나 재헌은 우는 것이 아니라 토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부수었으니 이제 자신의 몸뚱이까지 부숴뜨려야겠 다는 것처럼 재헌은 수분 간 격렬하게 토악질을 했다. 샛노란 위액까지 연거푸 게워낸 뒤 재헌은 배를 움켜 쥐며 시멘트 바닥에 모로 누웠다. 땀에 젖은 그의 몸이 죽어가는 다지류(多肢類)처럼 돌돌 말렸다(한강, 앞의 책, 150쪽).
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으냐는 동생 재인의 물음에 재헌은 이렇게 대답한다.
“무엇으로든, 나 아닌 것으로”.
그러나 이 소설에서 타자는 구체적인 인물로 등장하지 않으며, 재헌이 배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황혼빛으로 향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그것이 아마 타자로 향한 모험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갈 수 있다는 듯. 그러나 이제 그 홀로서기는 예전과는 같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부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내가 뿌리친 자흔의 손, 그녀가 가지런히 허공에 펼쳐보이곤 했던 열 손가락들이 내 수많은 혈관들을 비 집고 살갗 속으로, 숭숭 구멍 뚫린 뼛속으로 파고들었다.103)
그녀의(타자의) 열 손가락들이 홀로서기를 이룬 정선의(주체의) 자기성, 내부성를 파 고들어 그곳에 균열을 내고 무너뜨린다.
허나 그것은 단순한 무너뜨림에 그치지 않는 다.
정선은 자신의 무너짐과 동시에 다시 서기 위해 여수에 발을 내딛고 있으니 말이 다. 타자는 주체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새로 세우고자 한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 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 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와 검푸른 기와지붕 위로 자흔의 아련한 웃음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흐 르고 있었다.104)
103) 한강, 앞의 책, 58쪽.
104) 한강, 앞의 책, 58쪽.
이제 정선은 자신이 묻어두고만 있었던 기억, 아버지에 의한 죽음에 가까웠던 고통 의 기억을 직면하고 대면하고자 한다. 그 속에서 자신이 뿌리쳤던 정임 그리고 그렇게 대면을 하고 난 이후의 정선은 이전과는 다른 주체가 될 것이다.
그녀는 진정으로 홀 로서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해준, 그 과정을 이끌어준 이는 바로 자흔이라 는 타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첫 소설집의 마지막 발표작인 「어둠의 사육제」는 어떨까.
‘어둠’이라는 존재에 의해 삶의 매순간 흡수당할 것만 같은 이 소설에서 ‘나’는 함께 살며 서울에서 의 고된 생활을 동고동락해왔던 ‘인숙언니’에게 배신을 당한다.
인숙언니가 전세금을 모두 빼내고 쓸 만한 물건들을 챙겨 사라져버린 것이다.
인숙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 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 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 전부였다. (...) 하루 아침에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인숙언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받은 월급은 회사에 진 빚 밑으로 다 들어갔다. 곧 비워주어야만 할 전세방에서 나는 꼬박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 전세방을 나선 일요일 오전, 나는 여태 잘못 살아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틀려왔다. 인숙언니 말마따나 나는 평생 이용만 당하다 가 신세를 망칠 인물이었다.105)
이제 ‘나’는 다시 ‘집 없음’의 상황, 존재에 흡수될 위협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존재로부터의 탈출하여 다시 홀로서기 위해, ‘나’는 서울에 있는 유일한 친척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녀는 “추운 겨울이 지날 때까지” 몸을 누일 곳이 필요했던 것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이모의 가족들은 탐탁치 않아하며 “미묘한 불쾌감을 표시”한 채 그녀를 대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를 냉담하게 대할수록 그녀 역시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고 중얼거리며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그날 밤 다시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망설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른 나는 이모에게, 신학기가 시작 된다 해도 나에게는 달리 갈 곳이 없다고, 전세방이라도 얻을 만한 돈을 벌기 전에는 쫓아낸다 해도 나갈 수 없겠다고 말했다. (...) 그 다음날부터 나는 일찍 퇴근하여 식탁 앞에 앉아 파출부 아주머니 가 숟가락을 놓고 국을 퍼주기를 기다렸다. 두 그릇씩 밥을 퍼서 먹었고, 한방을 쓰는 둘째 사촌동 생이 함부로 짜증을 내면 두 배로 호되게 꾸지람을 했다.106) 어느 누구 하나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나’ 는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된 홀로서기를 이루고자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퇴근길에 한 여학생의 가방에 있던 하드보드지가 실수로 중년 여자의 얼굴을 치자 중 년 여자가 무지막지하게 여학생의 얼굴을 내갈기는 상황을 목격한다.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중년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 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 다. (...) 지하철 창문에 비친 객실의 음산한 풍경 속에 내 얼굴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 가 면 같은 얼굴을 뒤집어쓴 사람이 더 이상 눈물 따위를 흘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몸 속의 혈관들은 모두 가문 저수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107)
105) 한강, 앞의 책, 225-6쪽.
106) 한강, 앞의 책, 229쪽.
107) 한강, 앞의 책, 230-1쪽.
이제 더 이상 눈물 따위를 흘리지 않을 만큼 독하게 홀로서기를 이룬 주체인 ‘나’이지만, 존재의 폭력성은 여전히 그녀를 그냥 두지 않는다.
이모는 ‘나’에게 “욕실이 두 개 딸린 사십이 평의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잠을 잘 것을 요구한다.
그곳을 독방처럼 쓰면 어떻겠냐고.
‘나’는 베란다로 자신의 짐을 모두 옮긴 뒤 그곳에서의 첫 밤을 맞이 한다.
아파트촌에 밤이 왔다. 나는 거실 쪽의 유리문에 기대어 앉아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 요를 깔고 이불을 덮자 불빛과 어둠이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 그곳은 너무 높았다. / 마치 낭떠러 지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나는 몇 번이고 선잠에서 깨어나 내 몸뚱이 아래 거대하게 펼쳐진 서울의 야경을 보았다. / 밤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미술과 학생들이 석 고 데생을 하다가 흰 빛에 시력을 잃는 것처럼,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차츰 어둠 속의 사 물들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108)
108) 한강, 앞의 책, 232쪽.
어둠을 바라보다 어둠속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그녀는 “밤이면 소경과 다름없어지는 시력”으로 퇴근을 하고, 베란다에서 잠을 잘 때면 “사방에서 발톱을 세우고 덮쳐오는 것 같은 어둠”에 시달리며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는 불면의 밤들을 보내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밤의 ‘어둠’, 존재의 폭력성에 흡수될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한‘나’에게 대뜸 “집이 필요하지 않소? ... 내 집을 주고 싶소”라고 말하며 다가오는 인물이 있으 니, 그는 이름 자체가 ‘어둠 속의 불꽃’인 ‘강명환(姜冥煥)’이라는 사내다.
그는 임신한 아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과속하던 승용차에 치였는데, 자신은 다리 한쪽을 잘라내는 데 그쳤지만, 아내는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차의 주인인 젊 은 가장은 명문 기업체의 조카뻘이었고, 막대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어주는 것으로 사 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그 후 사내는 “목발을 짚은 모습으로 그들 식구 앞에 나타나 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같은 동으로 이사까지 오게 된다.
사내의 출현에 아내는 물론 아이들까지 정서불안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들은 마침내 그 아파트를 떠나게 된다.
이제 그들도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진 사내가 문득 ‘나’에게 다가와 “집이 필요하지 않”냐고, “집이 있다면 베란다에서 잠을 자지는 않을 테니” “내 집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은 “지난 겨울부터 내 집을 받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나’가 “적격자”라는 것이다.
‘나’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선다. 그날 이후 사내는 매일 같이 ‘나’의 퇴근을 기다리다 나타나 “나한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집을 이제 그쪽에게 줄 테니 받아달라”고 청하게 된다.
‘나’는 이따금 “명환 의 집을 양도받는 상황을 상상해보”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나는 그 것이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렇게 명환이 ‘나’를 기다린 지 한 달쯤 되던 날, 점점 자신의 뜻대로 ‘나’가 집을 양도받을 것이라는 확신해가는 듯 한 표정의 명환은 아파트의 불빛들을 가리키며 뜻밖 의 말을 건넨다.
“저 방에서, 저 불빛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오? (...) 저 수많은 불 켜진 창들 속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다는 생각, 그런 거요? (...) 나는 그 반대요. 밤늦게까지 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오.” 나는 간절하게 불빛들을 향하고 있는 명환의 옆얼굴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한데 말이오...... 그 생각이 더 괴 로운 거라오. (...) 아무튼 분명한 것은 말이오......” / 그때 나는 명환이 딱집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몹시 앓고 난 사람이 힘없이 내뱉는 몇 마디 안부 인사에 무거 운 그리움이 깃들여 있듯이, 명환의 낮은 음성에는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던 쓸쓸함과 안타까움 이 깃들여 있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109) 명환의 말에는 묘한 데가 있다.
109) 한강, 앞의 책, 250-2쪽.
아파트의 불빛을 보며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이 더 괴로운 것이라니. 그는 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일까.
어 쩌면 그는 홀로서기의 한계를 깨달아버린 것이 아닐까? 즉, 그가 저곳 어디에건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홀로서기는 어쨌든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그 가능성이 열 려 있고 보장되는 반면, 그 홀로서기 너머에 이르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는 절 대 불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타자로부터 가능하다는 홀로서기의 한계를 그는 깨달아버 린 것이 아닐까.
그는 막대한 배상금을 얻고 좋은 집을 얻어 홀로서기를 이루었지만, 그 홀로서기의 대가로 그가 잃게 된 아내와 아이는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에겐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즉, 강명환은 홀로서기의 한계를 깨닫고 있 으며, 그 한계 속에서 어떤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출구 모색 과정이 바로 ‘나’에게 집을 주겠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나’는 강명환과 위의 대화를 나눈 다음날 우연히 ‘인숙언니’를 만나게 된다. 회사 동료의 장례식으로 들른 병원에서 인숙언니가 ‘나’를 발견하여 부른 것이다.
그녀는 지난 겨울 병원을 찾았다가 아버지의 내력인 간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고, 죽지 않기 위해 짐을 꾸려 달아나 수술을 했으나 완쾌될 가능성은 불투명한 것 같다고, “매 일 아침 눈뜰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어 떤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살고 싶었다”고, 이대로 죽기에는 억울했다고 말한다. 그날 밤 다시 나타나 집을 받으라는 명환에게 나는 “도대체 그 집을 저에게 주고 어 디에서 사시겠다는 거예요?”라고 따진다.
인숙언니와의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지쳐있 던 ‘나’는 명환과의 한바탕 대화를 치른 그 다음날 새벽에 문득 깨닫는다. 그는 죽으려 하는 것이다. /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 가 그의 제의를 거절해온 바로 그 기간만큼 그의 죽음은 연기되어온 것이었다.110)
명환이 자신에게 집을 주고 죽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명환에게서 하루 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어둠이 시시각각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방을 즉시 떠나야만 했다.111)
110) 한강, 앞의 책, 259쪽.
111) 한강, 앞의 책, 260쪽.
그 날 이후 ‘나’는 월세방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한다. 강명환으로부터 벗어나 어서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그러면서도 ‘나’는 어둠속에서 “낯익은 붉은 불빛이 깜박”이는 것을 보고 강명환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반가움과 고통이 뒤범벅”되는 심정이 된다.
‘나’는 강명이 죽는 환영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먹빛 어둠 속에서, 장작불의 불티가 허공으로 날리는 듯한”명환의 담배 불빛을 마치 “명환이 흔드는 손 짓”인 것처럼 느낀다.
“내려와라, 이리 내려오너라”라고 요청하는 그 불빛을 보며 ‘나’ 는 “내겨갈 필요가 없”다고, “그를 만나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강한 힘에 덜미를 거머잡힌 듯” 강명환이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 명환의 얼굴은 몰라보게 검어졌고, 형편없어져 있었다. (...) “...... 언제 떠나는 거요?” / “오 늘 아침에 떠나요.” / “다들 가는군.” / 잠시 정적이 흘렀다. /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이제 명환이 혼자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젊은 부부가 떠난 뒤 명환이 혼자 남았듯이, 이제 내가가면 이 어두운 아파트에 명환이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될 것이었다. 양지바른 곳이라는 그 산기슭으로 남은 짐을 옮기고 나면 나는 다시는 이곳을 찾지 않을 것이었다.112)
기어코 집을 받지 않겠다는 ‘나’에게 명환은 다그치듯 왜 집을 받지 않느냐고 다그 치며 자신의 팔뚝에 담배를 지진 후 말한다.
“어둠 속에서, 야금야금 음식을 축내며,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버텨왔어! 이것이 사는 건가? 이대로 살아남으라는 건가? 그게 결국 네 양심이라는 건가? 똑바로 말해봐, 넌 그저 달아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나한테서, 이런 볼썽사나운 놈한테서 도망치려는 거지! (...) ......도망치려는 거야, 영 영 잊어버리려는 거야! 넌, 넌 나보다 더 비겁한 인간이야......!” / 명환의 손이 내 목을 향해 치켜 올라왔다. 어둠이 꿈틀거렸다. 불빛들이 낱낱이 부셔졌다. / 나는 무릎을 광장 바닥에 짓찧었다. 주 먹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외쳤다. 모든 두려움을, 일생 동안 키워온 두려움을 깨뜨리듯이 울부짖었 다. / “불을 켜세요!” / 나는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명환의 하나뿐인 다리를 붙안았다. / “...... 부, 불을 켜세요. 제발 불을 켜란 말이에요!”113)
그는 ‘나’에게 “비겁한 인간”이라고, “넌 그저 달아나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
네가 지금 행동하는 것은 나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며, “영영 잊어버리려는 거”라고. 불 을 켜라는, 어떻게든 살아가라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명환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 다.
그는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없”다며, “네 베란다에서 내 방을 보고 싶”다고 한다.
둘은 ‘나’의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명환의 방을 함께 눈길로 더듬”는다. ‘나’는 명환 의 혼이 “알지 못하는 다른 곳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이 느끼면서 “아니, 그의 육신에 도 나의 손은 닿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아득한 무력감이 절망적으로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째서. / 나는 고함치려 했지만 입술을 달싹도 할 수 없었다. 무력감은 어느새 어깨를 딛고 목을 타고 올라와 내 정수리를 무딘 발톱으로 짓이기도 있었다. / 어째서 당신이 죽어. (...) “......참 조용 하구나......” / 그것이 그날 밤 명환이 말한 전부였다.114)
‘나’는 명환에게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를 잡지 못하고, 명환은 목발을 짚으며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나’는 베란다로 돌아와 담요 위에 눕는다. 이제 모두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평화도 느낄 수 없었다. 일부러 소리 내어 나직 하게 발음해보았다. / 다 끝났다. / 저 사내는 죽을 것이다. 인숙언니도 죽을 것이다. 나는 뻔뻔스럽 게 한낮의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 무시무시한 신음 소리 같은 먹구름장이 잉크색 하늘에 소용돌 이를 일으켜놓고 있었다. 그 위로 인숙언니의 얼굴 같기도 하고 명환의 일그러진 얼굴 같기도 한 그 림자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 나를 이를 악물었다. 턱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눈물이 뜨겁다 는 것을 처음 안 사람처럼 나는 진저리를 쳤다.115)
112) 한강, 앞의 책, 263쪽.
113) 한강, 앞의 책, 266-7쪽.
114) 한강, 앞의 책, 269쪽.
‘나’는 인숙언니와 명환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으나, 그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으며, 나 자신이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한낮의 거리를 활보”할 것이라 생 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의 눈에는 여전히 “인숙언니의 얼굴 같기도 하고 명환의 얼굴 같기도 한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진저리친 다.
이 소설에서 ‘나’의 타자는 두 명, 인숙언니와 강명환이다.
그들은 레비나스의 정 의에서 보듯 가족을 잃은 ‘고아’이며, 살아갈 힘이 없는 ‘약자’인 것이다.
‘나’는 이러 한 타자들에게 행한 자신의 행동이 “그저 달아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그런 타자를 “영영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묻고 있다.
이제 ‘나’, 주체는 자신의 홀로서기 로서 행한 자유를 문제시해보게 된 것이다. 레비나스는 윤리에 대해 “자유가 그 자신 에 의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대신에, 스스로를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느낄 때 시 작된다”116)고 말했다.
이는 자신의 홀로서기를 이루고자하는 자유가 자의적이며 폭력 적임을 깨닫게 되는 때, 자신의 자유가 문제시 되는 상황이 곧 ‘윤리’라는 말이다.
여 기서 자신의 자유에 대한 1인칭적 의미의 책임인 ‘홀로서기’로서의 책임이 아닌, 2인 칭적 의미의 책임, 즉 타인에 대한 책임이 비로소 등장한다.
앞의 책에서 레비나스는 ‘윤리’에 대해 이렇게도 말한다. 동일자의 자기중심적 자발성 안에서는 행해질 수 없는 동일자에 대한 문제 제기가 타자에 의해서 행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현전이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을 윤리라고 한다.
타인의 낯섦-타인을 나로, 내 사유와 내 소유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은 바로 나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서, 윤리 로서 성취된다.117)
115) 한강, 앞의 책, 270-1쪽.
116)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114쪽.
117) 레비나스, 앞의 책, 43쪽. - 57 -
나 자신은 나의 자발성, 나의 자유를 문제 삼을 수 없다.
이러한 “동일자에 대한 문 제 제기”는 오로지 “타자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타자가 “나 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을 두고 바로 “윤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타자에 의해 “나 의 자발성을 문제 삼는 것”은 곧 타자를 “내 사유와 내 소유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 이며,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는 윤리인 것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이러한 윤리적 상황은 ‘강명환’과 ‘인숙언니’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
어둠 속에 떠오르는 얼굴로 묘사되는 그들은 이 소설 속에서 ‘나’에게 타자로 다가온다.
이 소설의 타자인 ‘강명환’과 ‘인숙언니’는 「여수의 사랑」의 ‘자흔’ 과 유사하다.
그들은 주체의 밖에서 불현 듯 출현하여 홀로선 주체의 동일자적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안정되어가던 그들의 삶에 어떤 모순과 흔들림을, 무너짐을 가한다.
그 들은 주체가 자신의 삶을 의문시하게 만들고 어떤 선택의 순간을, 응답의 순간을 맞이 하도록 한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자흔’이 처음 등장할 때처럼 사라질 때에도 홀연 히 사라져버린 데 반해, ‘강명환’은 사라질 때에 홀연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는 ‘나’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아파트 안에서 몸을 던져 현실에서 죽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나’에게 끊임없이 다가와 말을 걸고 ‘나’의 자유를 제한하며, 어떤 응답을 요구하는 타자다.
그러한 인물, ‘나’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인 구체적인 이 현실에서 지 금 이 순간 죽는 것, 즉 실질적인 현재의 죽음이 일어나는 것은 『여수의 사랑』에서 이 소설 「어둠의 사육제」뿐이다.
다른 소설에서 ‘나’와 관계한 인물은 이미 오래전 과거에 죽었거나, 살아서 만난 인물이라도 소설의 결말부에서 어떤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데, 이는 ‘나’가 발 딛고 있는 ‘이 곳’을 벗어나는, 현실을 초월한 어떤 일이다.
그 들은 ‘나’가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었거나(「질주」의 진규), 어릴 때 헤 어진 후 다시는 못 만나고 있으며(「진달래 능선」의 정임, 어머니), 아니면 ‘나’와 살아있을 때 만났더라도 결말부에 이르러 ‘바다 속으로’ 들어가거나(「붉은 닻」의 동 영, 「저녁빛」의 재헌), 기차를 타고 동해로 가거나(「야간 열차」의 동걸), 여수로 가버린(「여수의 사랑」의 자흔) 것이다.
그러나 첫 소설집의 마지막 발표작인 이 소 설, 「어둠의 사육제」에 이르러 ‘나’와 관계한 인물은 오래전에 죽었거나 초월적인 어 느 곳으로 사라지는 인물일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주인물과 관계 맺는 ‘인영언니’와 ‘강명환’은 모두 초월적인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가 살고 있 는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질적인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죽음은 주체의 남성다운 힘의 한계가 된다. 즉 익명적 존재 한 가운데 서서 <홀로서기>를 통해 가 능해지고 현재의 현상과 빛 속으로 나타나는 남성다운 힘의 한계가 된다.(...) 죽음의 접근에서 중요 한 것은 우리가 특정한 순간부터 더 이상 할 수 있음을 더 이상 할 수 없다(nous ne pouvons plus pouvoir)는 점이다.바로 여기에서 주체는 주체로서 자신의 지배를 상실한다. (...) 죽음, 그것은 계획 을 세울 수 없음이다. 이러한 죽음의 접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다른 것 (absolument autre)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다른 것(他者)이 짊어지고 있는 타자성 (altérité)은 향유를 통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동화(同化)시킬 수 있는 잠정적 규정으로서의 타자성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 자체가 곧 타자성인 그런 의미의 타자성이다.그러므로 나의 고독은 죽음을 통 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깨어진다.118)
118)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83-4쪽
강명환의 죽음은 ‘나’의 동일자적인 세계에 균열을 가하고 ‘나’가 더 이상 할 수 있 음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어둠(冥)속에서 존재의 위협처럼 다가오지만, 실상은 나를 살리려는 불꽃(煥)인 타자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명환의 죽음으로 끝나는 듯한 이 소설은 사실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동일자의 죽음이기도 한 것이 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제목이 단지 어둠이 아니라, 어둠의 사육제(謝肉祭, carne vale: 고기여, 그만, carnem levare:고기를 먹지 않다)인 이유, 즉 어둠의 사육제를 지내어 어둠에 휩싸여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어둠에게 작별을 고하고, 비로소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육제 기간 동안 마음껏 고기를 먹고 향 락을 즐기는 ’나‘의 동일자적인 세계에 머무르는 것을 벗어나, 사육제 이후 만나게 될 세계, 즉 기존의 ’나‘라는 동일자적 세계 틀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 에 열리는 세계를 그려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수의 사랑』이라는 소설집의 흐름을 크게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존재로부터의 탈출과 홀로서기, 그러나 그 홀로서기의 한계인 존재의 무게에 의한 주체의 고통,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주체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타자와의 만남.
그렇다면 타자와의 만남에서 타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타자의 얼굴이 전면에 등장하는 소설, 그것이 바로 마치 사육제를 지낸 후의 사순절(四旬節) 기간을 그리는 듯한 『채식주의자』이다.
2. ‘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주체의 탄생 - 『채식주의자』
1) ‘나’의 세계로 흡수되지 않는, 낯익고도 낯선 타자
『채식주의자』119)를 단순히 말해보자면, ‘나’와 ‘타자’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체성과 무한의 만남일 텐데, 「채식주의 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이라는 세 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채식주의 자』는 이러한 ‘나-전체성’과 ‘타자-무한’의 만남에 대한 하나의 변주곡처럼 보인다.
우선 소설집에서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채식주의자」를 살펴보자. 우선 이러한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다가옴,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나의 노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 다.
이러한 방식은 내 시선 아래에서 주제로 모습을 나타내는데서 성립하지 않으며, 하나의 이미지 를 형성하는 성질의 총체로 스스로를 펼치는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타인의 얼굴은 매번 그것이 내 게 남겨 놓은 가변적 이미지를 파괴하고 그 이미지를 넘어선다. (...) 타인의 얼굴은 이러한 성질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현현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한다.”120)
119)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120)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56-7쪽.
타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것이 타자다’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 시한다. 타자의 얼굴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변적 이미지를 파괴하고 그 이미지를 넘어”서면서 나에게 나타난다.
타자의 얼굴은 어떠한 “성질들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 로 “그 자체로 현현”한다.
타자의 얼굴은 “스스로를 표현”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타자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는 방식을 ‘계시’라고 부르 는데, 그것이 나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스스로 자기 자신 으로부터 나타나는 절대적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얼굴의 현현, 계시 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역에서, ‘밖’에서 오는 것이며, 나의 입장과 위치와 상관 없이 스스로 자기를 표현하는 가능성이다.121)
레비나스는 이런 점에서 “얼굴은 나의 의미부여에 앞”서 있으며 따라서 “나의 주도권과 나의 능력으로부터 독립된 의미 개념 으로 이끌어 준다”122)고 말한다.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 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 있고 깊이를 얻으며 이 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 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123)
「채식주의자」에서 ‘나’는 ‘영혜’라는 타자의 얼굴의 현현을 경험하게 되는 주체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평범한 것을 원하는 ‘나’는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다.
어느 날 새벽, 영혜 가“꿈을 꿨어”라고 말하며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그녀를 ‘나’의 틀 속에서,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라고만 바라봐왔던 것이다.
꿈을 꿨어, 라고 아내는 두 번 말했다. 달리는 차창 너머, 터널의 어둠 위로 그녀의 얼굴이 스쳐갔 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얼굴은 낯설었다.124)
121) 강영안, 앞의 책, 148쪽 참조.
122) 레비나스, 앞의 책, 58쪽.
123) 레비나스, 『어려운 자유』, p.20, 강영안, 앞의 책, 148쪽에서 재인용.
124) 한강, 앞의 책, 18쪽.
그 날 이후 냉장고에 든 고기들을 모두 버리고 단호히 채식을 시작한 영혜를 보며 ‘나’는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평범한 여자여야만 하는 영혜는, 이제 ‘나’의 지평 밖에서 오며, ‘나’에게 파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타자이자 무한으로 다가온다.
동 일자적 세계에서 살아가던 주체인 ‘나’에게는 그런 타자가 낯설기만 하다.
그녀의 집안 사람들을 떠올리면, 자욱한 연기와 마늘 타는 냄새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 모든 식구가 –장인이 특히- 육회를 즐겼고, 장모는 손수 활어회를 뜰 줄 알았으며, 처형과 아내는 커다랗 고 네모진 정육점용 칼을 휘둘러 닭 한 마리를 잘게 토막낼 줄 아는 여자들이었다. 바퀴벌레 몇 마 리쯤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 아내의 생활력을 나는 좋아했다. 그녀는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던가. (...)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상한 일들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다.125)
타자의 얼굴을 맞닥뜨린 ‘나’는 전형적인 동일자적 태도로, 자신의 이해의 틀 속에서 타자를 대한다.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듯한 영혜에게 더 이상 꿈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 꿈이 내가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의 평온한 일상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 유난히 얼굴이 멍하고 무엇인가에 짓눌린 것처럼 보이는 아침에 내가 까닭을 물으면 “꿈을 꿨어”라고 대답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어떤 꿈이냐고 나는 묻 지 않았다. 다시 어두운 숲속의 헛간,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대한 얘기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았 다.126)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없게 된 그녀를 그저 파출부 정도로, 자신의 밥을 차려주고 집을 청소해주는 존재정도로 여기기로 한다.
심지어 성행위를 원치 않는 그녀의 의사 를 무시하고 강제로 성폭행을 하기 까지 한다.
이대로, 좀 이상한 여자와 산다 해도 나쁠 것 없겠다고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냥 남인 듯이. 아 니, 밥을 차려주고 집을 청소해주는 누이, 혹은 파출부 같은 존재로서라도. 그러나 한창 나이에, 무 덤덤했다곤 하나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남자에게 장기간의 금욕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회식이 있어 늦게 들어온 밤이면 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아내를 덮쳐보기도 했다. 저항하는 팔을 누르고 바 지를 벗길 때는 뜻밖의 흥분을 느꼈다.127)
125) 한강, 앞의 책, 25-6쪽.
126) 한강, 앞의 책, 25쪽.
127) 한강, 앞의 책, 18쪽.
이러한 동일자적인 태도로 타자를 대하는 것은 ‘나’뿐만 아니다.
영혜의 가족들의 경 우도 마찬가지인데, 채식을 하기로 한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영혜에게 폭력적으로,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뺨을 때리면서까지 영혜의 입을 벌려 고기를 먹이고자 한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아내의 입술에 장인은 탕수육을 짓이겼다. 억센 손가락으로 두 입술을 열었으나, 악물린 이빨을 어쩌지 못했다.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 을 때렸다.128)
한편 여기서 얼굴의 현현을 경험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영혜’ 역시 꿈을 통해 타자의 얼굴을 만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꿈속에서 고깃덩어리들이 매 달려 있는 헛간을 헤매다 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 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129)
꿈에서 본 얼굴이 “생생”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는 무한이 자 구체적인 얼굴로 다가오는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이해되지 않고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영혜 역시 타자의 얼굴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게다 가 영혜에게 그것은 꿈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를 나타내는 방식을 가리켜 ‘계시’라고 표현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130)
128) 한강, 앞의 책, 50-1쪽.
129) 한강, 앞의 책, 19쪽.
130) 여러 평자들이 영혜가 채식을 하게 된 이유로 어릴 때 먹은 개고기의 영향, 남편의 자기중심적 인 동일자적인 태도, 혹은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부장제의 폭력성 등 영혜가 이 세계에서 겪어낸 경험들을 원인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윤리적인 차원에서 영혜가 무한-타자를 만난 것이라는 본고 의 관점을 취한다면, 영혜가 채식을 하는 원인은 타자와의 만남으로 인한 것으로, 위와 같은 개인 적 경험의 밖에서,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역, 즉 무한에서 오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어떤 사회 적, 문화적, 역사적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혜에게 타자는 꿈에서 본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처럼 낯설기도 하고 “수없이 봤던 얼굴”처럼 낯익기도 한 얼굴이며 이는 “내 얼굴”이자 “내 얼굴이 아니”기도 하 다.
이는 2부 「몽고반점」에서 “내 뱃속의 얼굴”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혜가 이 얼굴 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그 내면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1부에서는 영혜의 남편인 ‘나’, 2부에서는 영혜의 형부인 ‘그’, 3부에서는 영혜의 언니 인 ‘인혜’로 설정되어, 영혜가 직접적으로 화자로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영 혜의 내면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는 장이 1장인데, 여기서 영혜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 신이 꾼 꿈이나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 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131)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132)
131) 한강, 앞의 책, 43쪽.
132) 한강, 앞의 책, 60쪽.
남편인 ‘나’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인 영혜를 자신의 틀 안에서 재단하고 평가해버 리는 것에 반해, 영혜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이 타자의 얼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 지 않는다.
그저 “설명할 수 없다”고, “그게 뭔지” 모른다고, “왜 나는 이렇게 말라는 거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을 뿐이다.
「채식주의자」 안에서 영혜가 어떤 선택을 내렸다고 보기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연작 소설의 끝에까지 이르러보면, 스스로 나무가 되어가는 영혜는 그 타자의 얼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라고 짐작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억지로 자신에게 고기를 먹이려는 가족들 앞에서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형부인 ‘그’는 피흘리는 영혜를 업어 병원 으로 데려가고, 그곳에서 치료를 받던 영혜는 어느날 병원 정원에서 상의를 벗은 채 태연히 앉아있게 된다.
그 사건으로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퇴원 후 언니인 인혜 의 집에서 당분간 지내다 안정을 취한 후 원룸을 구해 살아간다.
한편 영혜의 남편인 ‘나’는 여전히 채식을 하는 영혜가 정상이 아니며 “겉보기에 유순해진 것뿐”이라며, 마 치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당연한 태도로” 영혜를 버리고 이혼한 다.
『채식주의자』의 두 번째 연작인 「몽고반점」은 1부의 논의를 이어 주체와 타자, 전체성과 무한의 구도를 좀 더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혜의 남편이었던 ‘나’ 에서 영혜의 형부인 ‘그’로 화자가 바뀐 이 작품에서, 영혜의 타자로서의 무한성은 한 층 더 표현되고 있다.
무엇보다 영혜의 무한성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이 장의 제목이 기도한 ‘몽고반점’으로 보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한동안 같은 집에서 지낸 영혜에 게 아직 몽고반점이 남아 있을 거라는 아내(인혜)의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영혜의 형부인 ‘그’는 영혜를 성적으로 욕망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영상작가인 ‘그’는 자신이 그동안 그려왔던 이미지, 자신이 실현하고자 꿈꿔왔던 예술을 위해 영혜를 이용하고자 한다.
여인의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꽃이 열리는 장면은 바로 그 순간 그를 충격했다.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벌거벗은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교합하는 장면은 불가해할 만큼 정확하고 뚜렷한 인과관계로 묶여 그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 그의 스케치 속의 여자는 얼굴이 잘려 있을 뿐 처제였다. 아니, 처제여야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처제의 알몸을 상상해 처음 그리 고, 작고 푸른 꽃잎 같은 점을 엉덩이 가운데 찍으며 그는 가벼운 전율과 함께 발기를 경험했었다. 그것은 결혼한 이후, 특히 삼십대 중반을 지나서는 거의 처음 느끼는, 대상이 분명한 강렬한 성욕이 었다.133)
‘그’는 자신이 꿈꾸는 이미지, “벌거벗은 남녀가 온몸을 꽃으로 칠하고 교합하는 장 면”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처제인 영혜를 이용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도 타자(무한)은 계시처럼 다가오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한순간 이 이미 지는 그에게 왔”으며, “바로 그 순간 그를 충격”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 지를 처제인 영혜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부탁할 것인가. 처음 ‘그’는 “어떻게 이 이미지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 고,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작업도 하고 싶지 않”다고 느꼈기에,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이미지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는 “가장 중요한, 처제를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다.
그’는 채식 중인 영혜를 찾아가 벗은 몸에 “꽃을 그릴 거”라며 영혜를 설득한다.
마침내 영혜가 작업실에 와서 옷을 벗고 알몸으 로 섰을 때, 그리고 그가 영혜의 엉덩이에서 몽고반점을 봤을 때, ‘그’는 뜻밖에 성적 인 것과는 무관한 “태고의 것”이자 “진화 전의”어떤 것을, “식물적인 무엇”을 느낀다.
반점은 과연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왼쪽 엉덩이 윗부분에 찍혀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 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 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134)
133) 한강, 앞의 책, 74쪽.
134) 한강, 앞의 책, 101쪽.
‘그’에게 몽고반점은 그동안 성적으로만 생각해왔던 자신의 틀을 벗어난 것으로, 지 금 이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태고의 것을 떠 올리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몽고반점’은 무한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몽고반점을 지닌 영혜가 바로 구체적인 타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런데 ‘그’는 한편으로는 분명 타자와 만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영혜와의 만남 이후,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균열을 경험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 번에 그가 이러온-대단찮은 것이었으나-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 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 이상 안다고 말 할 수 없게 되었다.135)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 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종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 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 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 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을 다룰 수 있었을 때 그는 충분히 그것들을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혹은, 충분히 그것들로부터 위협당하 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처제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푹푹 찌는 여름 오후의 택시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위협했고, 구역질나게 했고, 숨을 쉴 수 없게 했다. 앞으로 오랫동안 자 신이 작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는 그때 했다. 단 한순간에 그는 지쳤고, 삶이 넌더리 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136)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1부 「채식주의자」의 ‘나’가 영혜를 단순한 소모품으로 여기거나 욕구의 대상으로 여긴 것과는 달리, 영혜의 타자성과 만났으며 그것을 욕망 하고 있다.137)
135) 한강, 앞의 책, 75-6쪽.
136) 한강, 앞의 책, 83-4쪽.
137) 강영안, 앞의 책, 35쪽 참조. 레비나스에게 욕구besoin는 나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것에 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하나의 전체성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욕망desire은 개체를 넘어서 타자 또는 무한과의 관계를 그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욕망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은 땅에 대한 동경”,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에 대한 그리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는 영혜와의 만남 이후 자신 안에서 균열을 겪고 있으며,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자유를 문제시하고 있고, 그동 안 자신이 해온 작업들이 모두 무너져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는 “지쳤고, 삶이 넌 더리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게 된다.
무한은 우리 속에 있는 자발적인 자유를 문제 삼는다. 무한은 자유에게 명령하고, 자유를 심판하 며, 자유를 그것의 진리로 이끈다.138)
타인을 맞아들이는 것은 나의 자유를 의문시하는 것이다.139)
138)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58쪽.
139) 레비나스, 앞의 책, 116쪽.
타자(무한)는 주체의 “자유를 문제 삼”고, 그 자유에게 “명령하고”, “심판하며”, 그 것의 “진리로 이끈”다.
이제 타자의 얼굴을 만난 후의 주체는, 자신이 자신의 자유를 지나치게 사용해왔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자유를 부당하게 또는 지나치게 사용해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타자의 얼굴은 비폭력적이고 윤리적인 방식 으로, 주체의 자유 그 자체를 의문에 부치고 문제 삼는다.
이처럼 무한인 타자를 맞이하는 일은 주체로서의 “나의 자유를 의문시하는 것”인데, 이는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것은 단순히 힘이 셀뿐인 강자가 하 는 방식이다.
강자는 그저 힘으로 무지막지하게 누르고 밀고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그의 강한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함으로 ‘나’의 자유를 문제 삼는 다.
우리가 정녕 떨쳐버릴 수 없는 관계는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타자의 약함에서, 그 상처 입기 쉬움에서, 벌거벗음에서, 죽을 수밖에 없음에서 비롯하는 것. 진정 저항조차 불가능한 것은 힘에 의 한 압박이 아니라, 약함으로 파고든 얽힘, 호소가 아닌가.140)
140) 문성원, 『철학의 슬픔』, 그린비, 2019, 180쪽.
영혜는 어떤 강한 힘으로 ‘그’를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다.
영혜는 그녀의 약함으로, 그녀의 타자성으로 ‘그’에게 호소한다.
타자의 약함이 역설적으로 주체에게는 그 무엇 보다도 강한 힘이 되어 그의 자유 자체에 제한을 건다.
레비나스는 이를 ‘죄책’의 경험 과 연결시킨다.
즉 타자의 얼굴을 만난 후의 주체는 자신이 자신의 자유를 지나치게 사용해왔음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그러한 자유를 부당하게 또는 지나치게 사용해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지문에서 ‘그’는 지금 그런 상황을 겪 고 있다.
이러한 나의 자발성, 자율성에 제동이 걸리는 죄책은, 그러나 레비나스에 따르면 실 패나 좌절은 아니다.
실패나 좌절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실현 못했을 때 오는 것이지 만, 죄책은 타자가 당하는 곤궁에 대한 의식, 나의 무책임에 대한 의식에서 오는 것이 기 때문이다.141)
레비나스는 이 죄책의 경험이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라고 말한다.
레비나스가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도 하는 타자에 대한 욕망은 주체의 자유를 문제시하고, 주체가 그간 살아온 삶에 균열을 가하며, 더 나아가 지금 자신과 만나고 있는 타자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다.
동일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동일자의 자아 중심적 자발성 안에서 발생하지 않는-타자에 의해 야기된다.
우리는 타인의 현존을 통해 나의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윤리라 일컫 는다.
타자의 낯섦, 나와 나의 생각들과 나의 소유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는 정확히 윤리로서, 나의 자발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서 확립된다.142)
윤리, 그것은 타자의 얼굴에 의해 나의 본성을 재검토하는 일이다. ...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상처와도 같이 내게 침투한다. 타자, 아마도 그의 타자성을 정의하는 말인 이 타자는 내 안에서 인간성, 다시 말해 인간의 본성과의 이혼을 선고한다. 타자 때문에 나는 자연 스럽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143)
141) 강영안, 앞의 책, 36쪽 참조.
142) 레비나스, 앞의 책, 33-4쪽.
143) 알랭 핑켈크로트, 앞의 책, 136쪽.
그러나 타자에 대한 인식이 곧바로 타자를 타자로 대하는, 타자를 책임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라는 것 또한 ‘나’의 지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체성에 속하는 일이기에 그것은 타자를 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혜를 ‘이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타자성(무한성)을 인식은 하고 있지만, 그 이해할 수 없 음을 계속 가져가지 않고 그 타자성(무한성)을 자신의 틀에 맞추고, 자신의 예술적 욕 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용하게 된다.
이는 ‘그’가 타자를 타자로 대하지 않음을, 타자의 얼굴을 지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스케치한 그림에서 벌거벗은 남녀의 “얼굴은 그려져 있지 않”으며, 아내인 인혜와 성관계를 가질 때는 눈을 감아 “아 내의 얼굴을 지웠”다.
‘그’는 타자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144)
이처럼 타자에 대한 욕망이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까지 반드시 이어지는 것은 아니 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나의 자유는 자의(恣意) 대신 타자에 대한 책임적 관심과 헌신으로 바뀐다고 하는데145), ‘그’의 경우 마지막까지 그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타자를 타자로 대하지는 않는다.
그는 타자를 자신의 물감으로 칠하고 포즈를 취하게 하고 자신의 카메라 안에 담고자 한다.
자신이 욕망한 것, 자신 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타자를 그 틀 속으로 끌어들이고 때로는 자신의 성욕을 위해 이용하기까지 한다.
영혜가 꽃을 그린 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 의 몸에 꽃을 그리고 영혜를 찾아간다.
“...... 좋은 냄새가 나요. 물감냄새.”그는 신음을 내며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조명도, 촬영 따위도 그는 잊었다. 솟구치는 충동만이 그를 삼켰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눕혔다. 한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그녀의 입술과 코를 닥치는 대로 빨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 벌 거숭이가 된 그는 그녀의 가랑이를 힘껏 벌리고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146)
마지막 수분간의 섹스는 그녀의 이를 부딪치게 했고, 거칠고 새된 비명을 지르게 했고, “그 만......”이라는 헐떡임을 뱉게 했으며, 다시 눈물을 흘리게 했다.147)
144) 반면에 영혜는 타자의 얼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영헤가 꿈 속에서 만나는 타자인 “내 뱃속 얼굴”로 드러난다. “무슨 얼굴이지? 누구의 얼굴이야?” / “......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 요. (...) 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 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 (...)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한강, 앞의 책, 142-3쪽.
145) 레비나스, 『타인의 얼굴』, 150쪽 참조
146) 한강, 앞의 책, 138쪽.
147) 한강, 앞의 책, 141쪽.
심지어 그는 영혜의 무한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몽고반점’을 자신의 혀로 녹여 내어 삼키고자 한다.
이는 타자의 무한성을 주체의 전체성 안에 흡수하고자 하는 것이 다.
검푸른 새벽빛 속에서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오랫동안 핥았다. “이걸 내 혀로 옮겨왔으면 좋겠어.” / “......뭘요?” / “이 몽고반점.” (...)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으로 몽고반점을 어루만졌다. 낙인 같은 이 점을 나눠갖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널 삼켜서, 녹여서, 내 혈관 속을 흐르게 하고 싶다.148)
「몽고반점」의 ‘그’는 영혜라는 타자를 만났고, 몽고반점이라는 무한성을 알아보고, 그간의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타자를 책임지는데 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타자를 자신의 전체성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그래서 다시 자신의 자유를 확장하고자 하 고 나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타자를 만나 자신이 그간 살아온 삶에 균열을 겪고, 마침내 타자를 책임지는데 까지 나아가는 자는 연작의 마지막 소설 에서 나타난다. 바로 3부 「나무불꽃」의 화자로 등장하는 인혜다.
2) 타자의 호소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윤리적 주체
그러나 인혜가 처음부터 영혜를 타자로 대한 것은 아니었다.
인혜는 ‘그’보다 더 영 혜를 타자로 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가족이자 언니로서, 인혜는 영혜가 타자라 는 인식 자체를 안(못) 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 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 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 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 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 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149)
148) 한강, 앞의 책, 141-2쪽.
149) 한강, 앞의 책, 191-2쪽.
어릴 적, 그녀들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다. 인혜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술국을 끓여드리는 것으로 그 폭력을 면제받은 반면, 그 폭력은 고스란히 동생인 영혜에게 향했다. 그녀는 그간 영혜가 받았을 고통에 무지했 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 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고스란히 폭력에 노출되어야 만 했던 약자로서 영혜는 이미 그때부터 인혜에게 타자였다. 그러나 인혜는 그 타자로 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아 왔던 것이다.150)
대신 그녀는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받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 왔다.
그녀는 “두 평 반으로 시작한 화장품 가게”를 해가 지날수록 키워내 “점포를 세 배로 넓혔고”, 그 화장품가게의 수입으로 아파트까지 분양 받았다. 그녀는 남편을 사 랑한다는 확신 없이 단지 “자신을 좀 더 위로 끌어 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기에,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그의 집안 분위기”가 좋았기에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존 재자로서의 자기 확장을 이뤄왔고 홀로서기에 성공해왔다. 이처럼 자수성가하여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며, “성실은 천성과 같”은 그 녀는 “그 성실의 관성으로”, 동생의 지나친 듯한 채식과 남편이 그런 동생에게 저지른 일, 그런 남편과 이혼 후 자식과 단 둘이 남게 된 삶 등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을 극 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자, 동일자로서 잘 살아갈 그녀 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자가 바로 영혜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삶 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알았으며, 성실은 천성과 같았다. (...)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 면. 비 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날 이후 모든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다 면.151)
150) 이는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개인으로서 우선 존재로부터 탈출하여 존재자 로 서는 것이 그녀에게는 우선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51) 한강, 앞의 책, 169-170쪽.
고통 받는 타자는 그 고통으로 주체에게 호소하고 다가온다. 홀로서기를 이뤄 잘 살 아온 주체는 약자인 타자의 호소를 듣는다. 주체는 그 호소를 마냥 모른 척 할 수 없다.
그 호소에 응답하던지 응답하지 않던지 선택을 해야 한다. 괜찮아질 것 같았던 영혜의 증세가 악화되면서, 인혜는 타자인 영혜의 호소를 듣게 된다.
그녀는 지금껏 일어난 일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때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의문에 부치는 윤리의 장에 진입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 그런 순간에, 이따금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 언제부터 이 모든 일 들이 시작되었을까. 아니, 무너지기 시작했을까.152)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 그렇 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까.153)
그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그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만한 단서를 놓친 적은 없었을까. 영 혜가 아직 약을 먹는 환자라는 사실을 그에게 더 강하게 인식시킬 수는 없었을까.154)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질문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옳았을까.155)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 그날의 가족모임에 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잡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 그렇게 그녀는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 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156)
152) 한강, 앞의 책, 165쪽.
153) 한강, 앞의 책, 166쪽.
154) 한강, 앞의 책, 167쪽.
155) 한강, 앞의 책, 191쪽.
156) 한강, 앞의 책, 192쪽.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언 제부터 이 모든 일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을까”라고. 또한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라고 묻고 있는데, 이는 그녀가 이 모든 일들에 어떤 책임을 느끼고 있다 는 것으로 읽힌다. 무엇보다 인혜는 영혜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이런 책임을 느끼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던 때, 영혜가 이대로 집을 떠나자고 했을 때,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던 때, 자신이 그것을 멈출 수는 없었을까, 하 고 인혜는 묻고 있다.
그녀는 이런 생각들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그녀가 스스로 에게 이러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기 전, 그녀에게는 어떤 일이, 어떤 자각이 있었다.
홀 로서기를 잘 이뤄온 그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뜻밖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을 것이 다.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인식이다.
이년 전 사월, 그러니까 그가 영혜의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그녀는 한달 가까이 하혈을 했다. 피에 젖은 속옷을 빨 때마다 수개월 전 영혜의 손목에서 허공으로 솟구치던 선혈이 떠오르는 까닭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 만일 나쁜 병이라면,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일년. 육개월. 아니면 삼 개월.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생생하게 의식한 것은 그와 함께 살아온 긴 시간이었다. 기쁨과 자연스 러움이 제거된 시간. 최선을 다한 인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 바로 그녀 자신이 선택한 시간이 었다.157)
그녀는 문득 남편인 ‘그’와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인 내와 배려만으로 이어진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도. 고통에 못 이겨 병원으로 향하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이 그동안 단지 견디어 왔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저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유롭게 살아왔다고 생각해왔을 뿐이었 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 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 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158)
157) 한강, 앞의 책, 196쪽.
158) 한강, 앞의 책, 197쪽.
홀로서기를 누구보다 잘 이뤄온 그녀는 “이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고, 자신은 “다만 견뎌왔을 뿐”임을 깨닫는다. 누구보다 홀로서기를 잘 이뤄온 그녀는 채식을 하는 영혜와의 만남 이후 어떤 균열을 겪었으며, 이후 존재로부터의 흡수라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육체적인 상처는 아물어갔으나, 그녀의 내부에는 “몸 뚱이보다 크게 벌어진 상처”가 생겨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는 듯 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녀가 보낸 사개월여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혈은 이주쯤 더 계속되다가 상 처가 아물며 멈췄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몸에 상처가 뚫려 있다고 느꼈다. 마치 몸뚱이보 다 크게 벌어진 상처여서, 그 캄캄한 구멍 속으로 온몸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 언제나 처럼 그녀는 손님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활달하게 제품을 권했고, 적당한 에누리를 해주었으며, 샘플 과 사은품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 그러나 직원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지우를 데리러 가는 저녁이 면 그녀는 무덤처럼 지쳐 있었다. (...) 그녀는 예의 캄캄한 구멍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입을 벌 린 채 그녀를 빨아들이려 하는 것을 느꼈다.159)
그러던 어느 새벽, 피곤하다는 그녀에게 ‘그’가 “잠깐만 참아”라며 그녀를 안았던 밤 이후의 새벽을 그녀는 기억한다.
“그 말을 그녀가 잠결에 무수히 들었다는 것을. 이 순간만 넘기면 얼마간은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견뎠다는 것을.” 마침내 그녀는 “이 모 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줄을 들고 산을 오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산의 어떤 나 무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한, 살아라, 라는 생명의 말을 듣는 듯 한 경험이다.
그녀는 알 수 없다. (...)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160)
159) 한강, 앞의 책, 198쪽.
160) 한강, 앞의 책, 205-6쪽.
자신이 목 매달 나무를 찾던 그녀는, 그러나 그곳의 모든 나무들로부터 “서늘한 생 명의 말”을 듣는다.
살라는, 살아있으라는 말일 그것은 마치 명령처럼 그녀에게 내려지고 있다.
이것은 “얼굴은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한 존재가 우리와 접촉하는 방식”이라고 한 레비나스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인혜에게 나무들이 건네는 말은 마 치 타자의 명령처럼 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영혜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그녀가 이런 자각을 하게 되기 전에 그녀가 타자의 얼굴과 만났다는 것, 그러 나 그 타자의 얼굴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채식을 하는 영혜를 만났으나 이해하려하지 않았고, 가족들과의 모임에서 영혜가 자신 의 손목을 그을 때 그 사건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아버지의 말에 따랐으며, 이후에도 여전히 영혜를 대할 때 자신신의 틀 안에서, 동일자의 생각 안에서 대하고 있다.
언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엔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 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 그녀는 영혜의 앙상한 손을 잡고 말했다. / 지금 넌 제대로 걷지도 못하잖아. (...) 집에 오면 밥을 먹을 거니? 먹는다고 약속하면 퇴원시켜줄게. / 그때 영혜의 눈에서 빛이 꺼진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 ......언니도 똑같구나. (...) 아무도 날 이해 못 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161)
161) 한강, 앞의 책, 189-191쪽.
그녀는 영혜에게 밥을 먹어야 한다고, 밥을 먹으면 병원에서 나가게 해주겠다고, 네 가 죽으면 안 되니까 일단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동일자의 말, 영혜가 아니라 인혜가 생 각하고 주장하는 말일 뿐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녀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타자의 얼굴을 만났기에 이 순간부터 그녀의 완전하던 삶에는 어떤 균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 고 그 균열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삶이 “단지 견뎌왔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후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죽 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다.
이는 그간의 자신의 삶, 완벽하게 이루어져온 동일자의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것에 균열을 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으며 타자의 말을 만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세계에 생겨난 균열, 틈을 토대로 밖으로, 타자를 향한 초월을 해볼 수 있게 된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자신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 흡수해온 이들이 타자들이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남편인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 ‘그’와의 결혼 역시 단지 홀로서기로서의 장 안에서의 확장에 머무르는 것일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날 이후 그녀가 그에게 바란 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쉬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써 기울 인 여러 배려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녀가 간절히 쉬게 해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 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열아홉살에 집을 떠난 뒤 누구의 힘도 받지 않고 서울생활을 헤쳐나온 자신의 뒷모습을, 지친 그를 통해 그저 비춰보았던 것뿐 아닐까.162)
그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부지중에 알면서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혹 그녀에게는 자신을 좀더 위로 끌어올려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비록 그가 하는 일은 경 제적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그의 집안 분위기를 그녀는 좋아했다.
그의 말투, 그의 취향, 그의 미각과 잠자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그녀는 노력했다. (...)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함께 살았던 팔년 동안, 그가 그녀를 좌절시킨 만큼 그녀 역시 그를 좌 절시켰던 것은 아닐까.163)
그녀는 ‘그’를 쉬게 해주고 싶어서 결혼하였다고 믿어왔는데, 어쩌면 그것은 ‘나’를 쉬게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를 온전히 ‘그’로, 타자로 대 하지 않고 단지 “지친 그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 는 ‘그’를 타자로 대하지 않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그’가 타자라는 것을, 자신은 ‘그’를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했다.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낯선 것이었다.
그 녀가 그토록 존경하려 애썼던 사람, 인내하고 보살피기 위해 몸을 으스러뜨렸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 었다.
그녀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는 한갓 그림자에 불과했다. / 나는 당신을 몰라.164)
162) 한강, 앞의 책, 160-1쪽.
163) 한강, 앞의 책, 193쪽.
164) 한강, 앞의 책, 194쪽.
이제 그녀는 ‘그’와 영혜가 자신에게 타자라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이는, 이 소설의 결말부에 인혜의 태도가 바뀌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지금까지 그녀는 영혜 에게 굶으면 죽게 되고 죽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밥을 먹어야 한다고 영혜를 다그쳐왔 었고 그 이유로 병원에서 나가게 해달라는 영혜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병 원 보호사에게 온 몸이 짓눌려 결박당한 채 강제로 음식물을 주입당하는 영혜를 보는 인혜의 태도는 이제 달라진다.
발버둥치는 영혜를 두 명의 보호사와 간호조무사가 달려들어 침대에 눕힌다. 두 팔과 두 다리를 묶는다. (...) 싫......어......! 먹기 싫......어......! (...) 마침내 보호사의 억센 두 손아귀에 영혜의 움 푹 꺼진 두 뺨이 잡힌다. 그 틈에 담당의는 튜브를 영혜의 코에 집어넣는다. (...) 수간호사가 진정제 주사를 꺼내는 순간, 갑자기 간호조무사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진다. 그녀는 잡혔던 팔을 뿌 리치고 침상으로 뛰쳐나간다. 비켜요, 다 비켜요! (...) 이거 빼요. 이 줄 빨리 빼라구요! (...) 그녀 는 내처 달려가 영혜의 몸을 껴안는다. 영혜가 왈칵왈칵 토해낸 더운 피가 그녀의 블라우스를 적신 다. / 제발 그만 좀 해요. 그만 좀......165)
영혜는 간호사들에 의해 온 몸이 결박당해 있으며, 두 뺨도 강제로 고정되어 있다.
그녀는 강제로 주사에 찔리고 튜브를 삽입 당한다.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당하며 자신 의 의사가 철저히 짓밟히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는 자기를 부과하지만, 그의 비참함과 그의 벌거벗음-그의 굶주림-으로 내 게 호소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나는 그의 호소에 귀머거리가 될 수는 없다.166)
165) 한강, 앞의 책, 210-3쪽.
166)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296쪽
그러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인 타자로서 영혜는, 그녀의 “비참함”과 “벌거벗 음”, 즉 그녀의 “굶주림”으로 지금 주체인 인혜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제 타자의 호소 를 듣고 있는 인혜는 그녀의 호소에 “귀머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혜는 타자 의 호소, 먹기 싫다고, 이 병원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영혜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 고,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영혜를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대해왔다는 것을, 한 번도 영혜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 는 것도.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 로 되지 않지.167)
그들은 여기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여자(병원에서 영혜를 돌봐준 희주씨-인용자)가 그렇듯이. 영혜 가 그렇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 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168)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인혜는 영혜를 끌어안고 함께 병원을 나서 차를 탄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끝까지 영혜와 함께 하고자 한다.
이제 그녀는 타자의 호소 에 응답함으로써 윤리적 주체로 태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영혜와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타자였음을 느끼며, 동시에 그것이 뜻하는 바는, 내가 타자를 책임지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타 자가 나를 책임졌으며 살려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듯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 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 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 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 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169)
167) 한강, 앞의 책, 214쪽.
168) 한강, 앞의 책, 215-6쪽.
169) 한강, 앞의 책, 219-220쪽.
그녀는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 무너졌을 사람 은 바로 그녀”였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지금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라는 것도.
이제 그녀는 자신을 죽임과 동시에 새로이 태어나게 한 타자, 자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타자를 환대하기로 한다.
그녀는 윤리적 주체로 선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주체로 선 이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삶은 어떤 행복이나 평안에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 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 은 어둡고 끈질기다.170)
지금 그녀가 쏘아보고 있는 나무들은 한때 자살을 하려던 그녀에게 ‘살아라’라는 생 명의 명령을 내리던 나무들처럼 보인다.
이 나무들은 “활활 타오르는” “초록빛의 불꽃 들”, 즉 ‘나무불꽃’으로서 인혜에게 영혜이기도 하고 타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 타자 를 “어둡고 끈질기”게 쏘아본다.
마치 자신에게 왜 이런 명령을 내려서 자신을 살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책임지게 하는 것인지, 왜 이런 힘든 일을 겪게 하는 것인지 “항의하듯”.
이는 윤리적주체가 된다는 것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그것은 끊임없 는 현재의 순간순간 속에서 행해져야하고 이루어져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왜 냐하면 타자와 만나 그에 응답한다는 것은, 언제나 온전히 잘 살아가던 자신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오고 자신의 삶에 균열을 가져오며, 마침내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일으 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적 윤리적 주체는 타자에 대해 절대적인 책임과 의무를 지니게 되며, 자신은 그것을 수행하는 도덕적 주체로서 언제나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주체 다.
바우만이 레비나스적 도덕적 주체에 대해 “그는 자신에 대한 고질적인 불만을 통 해, 충족되지 않음에 대한 고통스런 감각을 통해, 도덕성을 인식한다.
이 도덕적 자아 는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다는 혐의에 의해 언제나 괴로워하는 자아이다.”171)라고 말한 것처럼, 레비나스 자신이 “자유의 도덕적 정당화는 결과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그것 은 오히려 운동과 삶으로서 성취된다”172)라고 말한 것처럼,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혜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윤리적 주체로 서고자 하는 인혜는 이제 매순간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족함과 ‘그럼에도 내가 해야한다’는 절대적 의무 사이에서, 무너지는 동 시에 거듭 태어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70) 한강, 앞의 책, 221쪽.
171) 콜린 데이비스, 앞의 책, 86-7쪽.
172) 레비나스, 앞의 책, 458쪽. - 79 -
타자의 얼굴의 현현과 그에 대해 동일자 중심으로 타자를 흡수하려는 주체를 보여주는 「채식주의자」, 타자의 얼굴의 무한(성)을 좀 더 드러내고 이에 대해 주체도 자신 의 삶에 대한 균열을 겪는, 그러나 책임에까지는 이르지 않는 「몽고반점」, 여기서 더 나아가 타자에 대한 그 무한 책임을 지기로 결단하는,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는 주 체가 등장하는 「나무불꽃」.
이렇게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연작소설인 「나무불 꽃」에 이르면 마침내 윤리적 주체가 탄생하고 이는 보편성으로서의 타자에 관한 논의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173))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흐 름 속에서 등장하는 소설이 바로 『소년이 온다』이다.
3. 광장의 타자를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 『소년이 온다』
1) 광장에서 만나는 타자와 윤리적 주체
본격적으로 『소년이 온다』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작품이 있다.
한강이 2012년 봄에 발표한 「에우로파」174)라는 단편으로, 이 작품은 같은 해 출간 되는 소설집 『노랑무늬영원』175)에 묶인다.
그리고 이후 2년의 공백기를 지나 『소년 이 온다』가 발표된다.
본고가 이 단편 소설에 주목한 이유는 이 단편 소설이 그간의 한강 소설의 흐름에서 『소년이 온다』로 넘어가는 하나의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에우로파」에서는 신체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자신의 성이 여성에 가깝다고 느끼는 ‘나’와 그런 내가 사랑하는 여성 ‘인아’가 소설의 주 등장인물로, 그 들 사이의 깊으면서도 위태로운 관계가 그려지고 있다.
대학 음악동아리에서 보컬을 맡았던 인아의 노래 중에는 이 소설의 제목과 같은 제목인 ‘에우로파’라는 노래가 있 다.
에우로파, / 얼어붙은 에우로파 /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176)
174) 한강, 「에우로파」, <문예중앙>, 2012 봄호.
175) 한강, 『노랑무늬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176) 한강, 앞의 책, 68쪽.
에우로파는 운석들에 의해 땅이 파이면서도 얼음이 녹으면서 그 자리를 메꾸고 그것 이 다시 얼면서 둥글어지는, 흉터가 생기는 않는 행성이다.
어느 골목길에서 인아가 나직이 부른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나’는 인아를 사랑하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여자 를 사랑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성정체성과 관련한 둘의 관계가 이 소설에서 하나의 중심축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본고는 특별히 이 소설에서 ‘인아’라는 인물의 변화에 주목해보았다.
인아는 결혼 후 남편으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이혼하게 되는데, 이때 큰 충격을 받고 고통스런 악몽에 시달게 된다.
이 사건이후 작은 지하 클럽에서만 간간이 활동 하던 인아는 어느 날 밖 에서, 광장에서, 사람들과 섞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인아는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노래했다.
약간의 보수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차비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노래가 끝난 뒤 청중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다 최 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맞아 기타가 망가진 적도 있었다.
이제 인아는 내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만 나고 가까이 지낸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177)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제한된 사람들과 만나던 인아는 이제 거리에서, 시 위 현장에서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노래한다. 그녀는 ‘나’가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어느날 그런 변화에 대해 ‘나’가 물 었을 때, 인아는 이렇게 답한다.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 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 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178)
177) 한강, 앞의 책, 89-90쪽.
178) 한강, 앞의 책, 91-2쪽.
인아는 “내 안에서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다고,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다고, 그리고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고 말한다.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이제 인아는 내 안, 나의 것을 위한 노 래보다 내가 아닌 것, 나의 밖의 것을 위한 노래를 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 안”을 무 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가볼 수 있는데 까지 다 가봤”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장례식은 무엇일까.
아마도 결혼 생활동안 고 통 받으며 죽어간 자신에 대한 장례식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녀는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지만, 이런 환멸은 나를 믿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장례식이 끝났다면서, 왜 인아는 다시 악몽을 꾸는 걸까.”
자신에 대한 장례를 끝냈다고 하는 그녀가 계속해서 악몽을 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녀는 예전과 달리 거리에서, 광장에서, 사람들 속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이 소 설에서 그 답은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네가 방금 물었던, 왜 그런 델 다니면서 그런 노래를 하느냐는 질 문에 대한 진짜 답이 아니야.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아.179)
“왜 그런데서 노래를 부르냐”는 ‘나’의 질문에 인아는 앞의 인용문에서 제시된 말들 을 하지만 사실 그건 진짜 답이 아니라고, “그 대답은 너에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다.
이는 한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 가장 깊은 고통은 끝내 말로 타인에게 전해지지 않으리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러한 무의식은 나 자신도 의식할 수 없는 것 일 터다.
그것은 목성의 달인 너, 에우로파의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 결국 만 져볼 수 없을 차가움”일 것이다.
그러나 “만져볼 수 없을 그 차가움”을 지닌 ‘너’노래 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나’에 대한 장례만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너’ 에 대한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너’의 고통, 슬픔, 아픔의 차가움 은 만져볼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노래함으 로써 그 만져볼 수 없음을 만져보고자 하는 시도가 아닐까.
그리고 그 시도를 계속하 는 한, 불가능함에 대한 노래는 계속해서 불릴 것이다.
이 노래에 마치 응답하기라도 하듯 들려오는 노래가 있으니, 「에우로파」 이후 2년 뒤 발표되는 『소년이 온 다』180)이다.
179) 한강, 앞의 책, 92쪽.
180)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이하 각주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에 대한 끊 이지 않을 노래이다.
총 6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소설은, 각 장마다 5.18과 관련 된 인물이 주 인물로 등장하여 말하는 형식을 지니고 있다.
우선 각 장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간략히 살펴보자.
1장은 1980년 5.18 당시의 광주를 배경으로 하며, 주 인물은 만 열다섯 살의 ‘동호’ 이다.
구체적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 화자가 동호를 ‘너’라고 부르며 이야기가 전개된 다. ‘너’는 친구인 ‘정대’를 찾기 위해 도청으로 왔다가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도청 앞 상무관에서 일하게 된다.
‘너’는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의 몸을 수습하고 관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2장은 1장과 시공간의 배경이 거의 같으며, 주 인물은 1장의 동호가 찾고 있던 ‘정 대’이다.
다만, 정대는 도청 앞 광장에서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기에 ‘혼’으로 등 장하며, 여기서 1인칭으로(‘나’) 이야기를 해나간다.
정대는 자신의 죽은 몸을 내려다 보며 고통스러워하고, 이 고통과 끔찍함을 이겨내기 위해 누나인 정미, 친구인 동호와 함께한 빛나는 순간들을 기억해내고자 한다.
그러다 정대는 정미가 이미 죽었다는 것 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죽은 자신의 몸에 불이 붙을 때 도청에서 동호마저 죽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3장은 1980년대 중반의 서울이 배경이다.
주 인물로 ‘은숙’이 등장하는데, 1장과 같 이 화자가 구체적 인물로 등장하지 않고 ‘그녀’로 불리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5.18 당 시 도청에서 ‘선주’와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았던 그녀는, 현재 출판사 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녀는 군중을 소재로 한 책의 번역가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유 로, 경찰서 취조실에서 한 사내에게 일곱 대의 뺨을 맞았다.
그녀는 하루에 한 대씩 그 뺨을 잊으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검열과에서 대부분의 페이지에 검은 잉크를 칠 해 책의 내용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희곡집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 희곡집을 쓴 작가 는 그 희곡을 무대에 올린다.
그녀는 배우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 모양으로 소 리 없이 말하는 연극을 보다, 무대 위의 한 소년에게서 5.18 때 함께했던 ‘너’-동호를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그 소년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어 눈을 감았던 그녀는, 마지 막에 이르러 눈을 부릅떠 소년을 응시한다.
그녀는 동호를 기억하며 폭력에 맞서 싸워 나가기로 다짐하는 듯 보인다.
시간이 흘러 뺨이 아물어도, 그 폭력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4장은 1990년대로, 도청에서 여러 일을 도맡아 하던 ‘김진수’가 초점인물로 등장하 고, 그와 함께 도청에 남아 싸우다 군인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던 ‘나’가 화자로 이야 기를 풀어간다.
‘나’는 김진수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검하고자 한다는 ‘선생’에게, 도 청 앞 광장에서 거대한 심장을 이룬 것만 같았던 5.18 당시의 상황과 군인들에게 붙 잡혀 상무대에서 당했던 끔찍한 고문, 그리고 그곳에서 시·공간적으로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현재까지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얘기한다.
그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 인한 것인지, 그렇다면 역시 인간인 선생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지 물으며, 자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5장의 시간은 2000년대이며, 역시 5.18 당시 도청에 남아 끝까지 싸웠던 인물인 ‘임선주’가 화자에 의해 ‘당신’이라고 불리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신은 현재 시민단 체에서 녹취 푸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며, 최근에 시민군의 심리부검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한다는 ‘윤’(윤은 4장의 ‘선생’과 동일인물로 짐작된다)으로부터 당시의 경험을 증언해달라는 요청과 함께 공테이프와 녹음기를 받은 상태다.
당신은 5.18 당시 은숙 과 동호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하였으며, 도청으로 계엄군이 들어오던 마지막 날까지 남아 시민들에게 가두방송을 하였었다. 그 밤 이후 군인들에 의해 붙잡혀가 끔 찍한 고문을 당했던 당신은, 그때의 기억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녀는 그 때와 관련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부 끊고, 자신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 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밀어내고, 홀로 살아왔다.
시간이 흘렀다고 하나, 당신은 그때 의 경험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과거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성희’ 언니가 입원해있는 병원 앞에서 서성이다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라는 말을 떠올리고(당신은 그 말을 듣고 성 희언니와의 관계를 끊었다), 동시에 자신의 꿈에 발자국 소리로 자꾸만 찾아오던 사람 이 동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청에서의 어느 밤, 김밥을 나눠 먹은 뒤 자신이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면 집에 들어갔을, 그러나 그 말을 하지 않았기에 도청에 남았다 가 목숨을 잃게 된 동호를 떠올리며 그녀는 “내 책임이 있는 거”라고 말한다.
밝아오 는 새벽 속에서 당신은 성희 언니에게 “죽지 마. / 죽지 말아요”라는 말을 거듭 전한 다.
6장은 5장의 시간으로부터도 몇 년이 지난 시점으로, 동호의 어머니가 1인칭 화자 (‘나’)로 등장한다.
그녀는 동호를 잃은 뒤 봄이면 “미치”고, 여름이면 “시름시름 앓” 고, 가을이면 “겨우 숨을 쉬었”으나 겨울이면 “삭신이 얼었”다고, “뼛속까지 차가워졌 다”고 말한다.
다시 여름이 와도 땀이 안날 정도로.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전두환 이 광주로 온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유가족회 엄마들과 함께 나아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녀의 얼은 마음은 녹지 않는다.
그녀는 동호와 함께 한 기억을 떠올린다.
동호가 여섯 살즘 되었을 적에 동호와 함께 천변길을 걷던 기억. 동호는 그 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싫어해 “왜 캄캄한 데로 가”냐고,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 로”가자고, “꽃 핀 쪽으로” 가자고 그녀를 붙잡고 이끌었던 기억이다.
그녀는 이 기억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었을까.
마지막 에필로그는 이 소설을 쓰고 있는 ‘나’가 등장하여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열 살 때 어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으며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살던 집에 이사 온 소년이 그때 죽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광주를 방문하였던 아버지가 가져온 사진첩을 몰래 펴보던 ‘나’는 마지막장에서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 순간 ‘나’의 안에 있 는 줄도 몰랐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진다.
이제 어른이 된 ‘나’는 광주를 찾 아 5.18 관련 자료를 최대한 모두 읽고, 그곳과 관련된 여러 장소를 찾는다.
그리고 동호의 형에게서 “제대로 써야”한다고,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한다는 말을 듣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나’는 동호의 무덤을 찾는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라며 지금까 지 이 글을 써온 듯한 ‘나’는, 동호와 그 옆 소년들의 무덤 앞에 초를 놓고 불을 붙인 다.
쌓인 눈이 발목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묵묵히 들 여다보고 있”다.
이와 같은 소설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각 장이 나아가 면서 소설 속 시간이 현재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민주화운동의 당시 부터(1,2장), 5.18이후 흩어져 홀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3장-1980년대 중반, 4장-1990년대, 5장-2000년대, 6장-2000년대), 그리고 마침내 이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로 여겨지는 에필로그(2014)에 이르기까지, 각 장이 진행될수록 소설 속 시간은 점차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 가까워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의 이와 같은 흐름에서 레비나스적 주체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 다는 점인데, 각 장에 등장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간 본고가 논의해 온 레비나스적 주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소년의 온다』의 각 화자들의 모습에서 ‘존재의 폭 력성/위협 – 존재로부터의 탈출 – 홀로서는 주체 – 그러나 여전히 존재의 폭력성/위협 을 겪는 주체 - 그러한 주체에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안기는, 동시에 ’살아라‘라 고, ’윤리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라고 명령하며 다가오는 타자 – 그 타자에 대한 주 체의 응답(타자를 환대하며 윤리적 주체로서 서고자 싸워나가는 주체) - 책임적 주체, 윤리적 주체의 탄생’ 이라는 레비나스적 주체의 큰 여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이 소설에서 존재의 폭력성/위협은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
이 소설에서 드러나 는 존재의 위협은 다름 아닌 전두환을 대표로 하는 신군부세력에 의한 폭력으로 보인 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 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 고 부를 수 있어.181)
군인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일으킨 반란. 사람들의 어떠한 의사결정 없이, 민주적인 투표없이 독단적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려는 전두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으로 끝날 것만 같던 독재정치는 그러나, 곧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이때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며 전국 곳곳에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는 1980년 5월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나게 난다.
그러나 전두환은 전 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을 잡아 가두거나 죽이는 등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짓밟았다.
전두환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백주대낮에 곤봉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이러한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세력의 행태는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전체성 (totalité)/전체주의적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전체성이란 동일자(‘나’) 위주의 사고체계 로, 동일자의 자기실현만을 추구하며 그 외 다른 이들은 자신의 끝없는 확장을 위해 체계 속에 포함되어야 할 하나의 수단이자 개체로 여긴다.
내가 지배하고 규정하고 나 의 힘이 자유롭게 작용하는 이 전체성의 세계에서, 다른 이의 인격은 하나의 체계 속 에 종속되어 버리고, 만약 이러한 자신의 체계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 즉 ‘나’와 다 를 경우 그 타자를 추방하고 심지어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체계라고 할 수 있다.182)
181) 한강, 앞의 책, 17쪽.
182) 강영안, 앞의 책, 31쪽 참조.
전두환과 신군부세력이 행태가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이제 그들은 마치 본보기로 삼겠다는 듯, 광주를 다른 지역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그곳에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선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 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 총을 메고 곤봉을 쥔 군인 셋이 언덕빼기를 타고 내려와 그 젊은 부부를 둘러쌌다. 누군가를 뒤쫓다 잘못 내려 온 것 같았다. /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 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지 보았다. (...)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 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183)
183) 한강, 앞의 책, 24-5쪽.
1장의 동호는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일요일에 문제집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러나 동호가 마주하게 된 거리는 여느 날과 같은 거리가 아니었다.
광주에는 공수부대 가 투입되었고, 그들은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붙잡아 곤봉으 로 때리고 있었다.
그들이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아니어도, 그저 성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교회로 가던 길이었음에도.
환한 대낮에, 전두환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그렇게 했다.
동호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이러한 군인들의 폭력은 존재자로 홀로선 주체를 무너뜨리고, 그로 하여금 익명적이고 공포스런 존재il y a의 위협을 겪게 한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과 절대적 권력, 그것만을 위해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심지 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전두환의 행위 이면에는 전체성/전체주의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러한 존재의 위협 속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만 인물이 2장의 정대다.
동호와 함께 도청 앞 광장에서 행진을 하던 정대는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진다.
정대의 몸은 군인들에 의해 다른 시체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어딘지 알 수 없는 숲 속 공터에 버려 진다.
그들의 죽은 몸은 “열십자로 겹겹이 포개져” 쌓여, “수십개의 다리를 지닌 거대 한 짐승의 사체 같은 것”이 된다.
“아래에서 두 번째에 끼여 납작하게 짓눌”린 정대의 몸은 “그렇게 짓눌려도 더 이상 흘러나올 피”가 없다. 정대는 죽어서 혼이 되었음에 도, 여전히 존재의 폭력을 겪고 있는 것이다.
몸들의 높은 탑 아래 짐승처럼 끼여 있는 내 몸이 부끄럽고 증오스러웠어. / 그래, 그 순간부터 내 몸을 증오하게 되었어. 고깃덩어리처럼 던져지고 쌓아올려진 우리들의 몸을. 햇빛 속에 악취를 뿜으 며 썩어간 더러운 얼굴들을.184)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 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 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185)
정대는 “짐승처럼 끼여 있는” 자신의 몸과 “썩어간 더러운 얼굴”을 “증오하게 되었” 다.
이는 존재의 폭력성에 의해 존재자로 선 주체가 자신을 잃고 있음을 보여준다. 총 에 맞아 피를 흘리고 죽은 정대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주체로 홀로서지 못하고, 존재에 흡수되어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
그곳의 또 다른 시체는 “흰 페인트로 얼굴이 지워”지 워져 “눈도 코도 입술도 없”게 된다. 정대는 얼굴의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 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경험하게 된다.
이제 그들 은 ‘너’와 ‘나’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개개인이 하나의 존재자이자 주체로 여겨지지 않는, 그리하여 각 사람이 그 사람 자체로 서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이곳의 장소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익명적’인 공간이며, 이 장에서 정대의 혼이 말할 때의 시간은 대부분 ‘어두운 밤’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익명적인 존재의 폭력성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나스가 존재의 예로 든 밤에는 “이것 또는 저것 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즉 ‘어떤 사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밤(존재) 속에서 인물은 “밤 속에 휩쓸려 버리며, 밤에 의해서 침범당하고 비인격화되고 질식되 어 버”186)리고 만다는 것.
이 어둡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정대의 몸과 다른 죽은 몸들 이 버려진 공터에는 “어떤 것, 어떤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있다il y a’라 는 사실”만 있으며, 여기에서는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파괴”되어, “비인칭적인 힘의 장(場)이 있을 뿐”187)인 것이다.
184) 한강, 앞의 책, 53쪽.
185) 한강, 앞의 책, 59쪽.
186)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94쪽.
187)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40-2쪽.
어두운 숲 속에 버려진 정대와 다른 죽은 사람들의 몸은 2장의 끝에서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지게 된다.
마치 그 죽은 몸까지 없애버리려 는 듯.
이처럼 1·2장에서 5.18 당시 신군부세력에 의한 존재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인물들이 그려지고 있다면, 3·4·5·6장에서는 그러한 존재의 폭력을 겪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인물들이 그려진다.
이제 그/그녀들은 당시의 끔찍한 경험(존재의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자로서 자신만의 홀로서기를 이룬 듯 보인다.
그러나 홀 로선 이후에도 그/그녀들은 여전히 존재의 폭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월의 그날로부터 몇 년이 지난 시점,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는 3장의 은숙은 광주를 벗어나 서울에서 홀로서기를 이루었다.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밖에도 나가 지 않고 있던 그녀에게 그녀의 어머니는
“그냥 눈 딱 감고 살아주면 안되겄냐. (...) 남들같이 대학 가서 네 밥벌이 네가 하고, (...) 그렇게 내 짐을 덜어주면 안되겄냐.”라 는 말을 한다.
그녀는 “누구의 짐도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다시 공부를 하여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였고, 그 후 현재의 출판사에 취직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홀로서기 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존재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알 지 못하는 번역가의 행방을 모른다는 이유로, 잠깐 그와 만났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 서의 한 사내에게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그녀는 일곱 대의 뺨을 “하루에 한 대씩, 일주만에 잊”어보기로 한다.
어떻게 잊을까, 어둠속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 어떻게 첫 뺨을 잊을까. / 처음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사무적인 일을 앞둔 사람처럼 침착하던 사내의 눈을. / 그가 손을 쳐들었을 때, 설마 때리 는 건가, 생각하며 앉아 있었던 그녀 자신을. / 목뼈가 어긋난 것 같았던 첫 충격을.188)
188) 한강, 앞의 책, 70쪽.
그녀는 사내의 폭력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고, “설마 때리는 건가” 생각하며 그저 앉 아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폭력은 “목뼈가 어긋난 것 같았던 첫 충격”으로 끝나 지 않았고, 사내는 총 일곱 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오른뺨의 실핏줄이 터진 것”을 모른 채 “사내의 얼굴을 멍하게 건너다보았”을 뿐이다.
사내의 이러한 폭력은, 1980년 5월이 지나도 여전한 존재의 폭력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녀는 사내가 뺨을 때릴 때 “소리를 내지 않았”고, “몸을 피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못했던 것이 맞을 것이 다.
사내의 폭력이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그것은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네 번째까 지도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존재의 폭력성은 이렇게 존재자의 존엄을 무너뜨리고 짓밟는다.
이러한 존재의 폭력은 은숙이 검열과에 찾으러 간 희곡집에도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그녀가 받은 첫 번째 느낌은, 페이지들이 불탔다는 것이다. 불에 타서 검은 숯덩어리가 되었다. (...) 이 가제본의 도입부 열 페이지 정도는 절반 이상의 문장들에 먹줄이 그어져 있다. 그다음 삼십 페이지 가량은 거의 대부분의 문장들에 먹줄이 그어져 있다. 그렇게 오십 페이지를 넘어가자, 선을 긋는 것이 수고스러웠는지 잉크에 담근 롤러로 페이지 전체를 검게 지워놓았다.189)
그녀가 검열과에서 돌려받은 희곡집의 대부분의 문장들에는 “먹줄이 그어”졌으며, 그것마저 귀찮았는지 검은 잉크에 담긴 롤러로 “페이지 전체가 검게 지워”져있었다.
이 희곡집의 페이지들은 “불에 타서 검은 숯더어리”가 된 듯 하다. 이것은 2장에서도 보았던 존재의 익명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둠 속에서 존재자가 존재에 의해 흡수되고 무화되어가듯, 검은 잉크와 먹줄로 지워진 이 희곡집에는 더 이상 어떤 내용도, 의미 도 찾아볼 수 없는 듯 하다.
4장의 ‘나’ 역시 5월의 그날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한 존재의 폭력을 겪 고 있다. 도청에 남아 끝까지 싸우다 붙잡혀 상무대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그는, 이제 그곳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교대 복학생이었던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고, “가족의 신세를 지며 생 계”를 이어간다.
택시 운전을 하며 존재자로서 홀로서기를 이룬 그는, 그러나 여전히 잠 들지 못하고 불면 속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습니 다.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 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190)
189) 한강, 앞의 책, 78-9쪽.
190) 한강, 앞의 책, 126쪽.
5월의 그날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는 택시 기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지만, 여전히 그는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고통 을 겪고 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으며, 누구도 그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는다. 그 자신조차 그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의 “몸 속에 그 여름의 조사 실”이 남아있으니까.
그 조사실에서 당했던 끔찍한 고문의 기억이 여전히 그를 놓아주 지 않으니까. 그것은 결코 잊혀지는 것이 아니니까.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 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 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 굴욕당하 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191)
그는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는”다고,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 억은 상무대에서 그가 당했던 고문의 경험이다.
이제 그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 한 존재”인 것이냐고, 자신이 겪은 것이 단지 “보편적인 경험”이었던 것이었냐고, “굴 욕당하고 훼손당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이냐고 선 생에게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생에게 말한다. 자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 욕과 싸”우고 있다고,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고 있다고,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느냐고.
이러한 4장의 ‘나’와 같은 질 문을 던지면서 싸워나가는, 그러면서 끝내 어떤 응답에 이르고자 하는 화자가 바로 5 장에 등장하는 ‘임선주’다.
5장의 임선주는 5월의 그날 이후 광주를 떠나 시민단체에 취직해 그곳에서 홀로서 기를 이루어왔다.
당신은 ‘5월 광주’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왔다.
당신은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수며 그곳으로부터 “도망 쳐”왔다.
오직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하여, 단지 “살아남기 위하여” 그렇게 해왔다.
무엇이 문제인가, 라고 당신은 자신에게 물은 적 있다. 모든 게 지나갔지 않은가. 당신에게 고통 을 줄 가능성이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당신 스스로 깨끗이 밀어냈지 않나.192)
191) 한강, 앞의 책, 134쪽. 192) 한강, 앞의 책, 161쪽.
당신은 이제 “모든 것이 지나갔”다고, 자신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 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끗이 밀어냈”다고, 이제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같은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당신은 80년 5월 이후 계속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 고 있다. 외등 갓의 바깥은 칠흑같이 검고, 그 안쪽은 수은처럼 연한 회백색이다. 그 가로등 아래 당신은 혼자 서 있다. 불빛이 비치는 곳까지만 안전하다. 어둠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 지만 상관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불빛의 동그라미를 빠져나가지 않을 테니까. 냉정한 긴 장 속에서 당신은 기다린다. 해가 떠올라 원 밖의 어둠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 그러다 눈을 뜨 면 아직 어두운 시각이다.193)
193) 한강, 앞의 책, 146쪽.
5.18 당시 시신을 수습하며 참혹한 시신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당신이, 피가 낭자 한 꿈을 꾼 것은 “지난 이십여년 동안 서너 차례뿐”이다. 대신 당신의 악몽은 “차갑거 나 고요”하며, “흔적없이 피가 마르고 뼈가 풍화되어 사라진 후의 어떤 장소”로 묘사 된다.
그곳은 사방이 깜깜하고, 당신은 연한 회백색의 빛이 나오는 외등 갓 아래에 홀 로 서 있다.
당신은 깜깜한 어둠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은 외 등 갓 아래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을”것이기에, “불빛의 동그라미를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기에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렇게 당신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원 안에서 기다린다.
그러나 당신이 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해는 떠있지 않고 여전히 “어두운 시각”이다. 당신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이 어둠은 무엇일까.
그것은 군인들에게 붙잡혀가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경험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당신에게 끈질기게 따 라붙어 당신을 흡수하려고 하는 존재의 폭력성이 아닐까.
광주를 벗어나 홀로 살아온 당신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왔고, 사람들과의 관 계를 끊은 채 홀로서기를 이루어왔다.
당신은 “성실하고 과묵했”고 “견디는 것”을 잘 하는 사람이며, 여공시절 시위를 하다 잡혀간 일 년을 제외하면 “노동을 멈춘 적이 없”다.
일을 하며 “혼자 삶을 꾸려갈 수 있는 한, 빛의 동그라미 바깥을 두려워할 필 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당신은 이제 알고 있다.
언제든 그 꿈에서 등장하는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것을. 외등 밖의 어둠이 결코 쉽게 물러나지 않으 리라는 것을.
어쩌면 자신이 그 어둠에 흡수될 수도 있다는 것을.
5월 광주, “그 여름 으로부터 이십여년”이 지났지만,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져있다는 것을.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6장의 동호 어머니는 동호를 잃은 그 5월 뒤로, 봄이 되어도 여름이 되어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먼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 겨우 숨을 쉬었다이. 그러다 겨울에는 삭신이 얼었다이. 아무리 무더운 여 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194)
동호를 잃은 뒤 그녀는 봄이 오면 “미치”고, 여름엔 “시름시름 앓”고, 가을엔 “겨우 숨을 쉬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삭신이 얼었”다고, 다시 여름이 와도 땀이 안 날 정 도로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고 말한다.
5월의 그날, 그녀는 동호를 데리러 둘째 아들과 함께 도청으로 갔었다.
직접 들어가서 동생을 데려오겠다는 둘째의 말에 시민군이 “지금 들어오면 못 나옵니다”라고 말하자, 그녀는 둘째의 말을 막는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약속을 했단게. / 사방이 너무 캄 캄해서 내가 그렇게 말을 했다이. 금방이라도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 버렸다이.195)
194) 한강, 앞의 책, 190쪽.
195) 한강, 앞의 책, 184-5쪽. - 94 -
그녀는 “사방이 너무 캄캄”했고, 곧 그 어둠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날 것 같”았기에 둘째 아들을 설득한다.
분명 자기 발로 나올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을 했었다고.
그것 은 자칫하다 둘째마저 도청 안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그렇게 둘째마저 잃을 것 같은 두려움에서 나온 말이었다.
여기에서도 존재의 폭력성이 어둠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어둠속에서 “너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그 뒤로 그녀는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하루를, 한 계절을, 일 년을 어떻게든 살아왔다.
“목숨 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다고, “꾸역꾸역 가게에 나가 장사를 했” 다고. 그녀는 그렇게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도 너무 힘들 때, 밥이 차마 넘어가지지 않을 때,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그녀는 동호의 이름을 “가만가만” 불러왔던 것같다.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 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만은 가만가만 부른다이. ...... 동호야. (...)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 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 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196)
196) 한강, 앞의 책, 192쪽.
그녀에게는 “동호야”하고 부르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동호가 “여섯 살, 일곱 살” 즈음, 둘이서 천변길을 걷던 기억. 동호는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싫어해서, 그녀 에게 “저쪽으로 가”자고, “햇빛 있는 데로 가”자고 그녀의 손목을 이끌었다.
“저기 밝 은 데는 꽃도 많이 폈”다고, 그 “꽃 핀 쪽으로”가자고. 이 장의 제목이기도 한 “꽃 핀 쪽으로”는, 그녀가 동호를 떠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지금 동호를 잃고 심장이 차가워진 그녀가 가까스로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생명수 같은 말일 것이다.
“왜 캄캄한 데로 가”냐고,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가자고 하는 동호의 말은, 동호를 잃고 그늘진 곳을 지나며 어둠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삶에 비치는 한 줄기 햇빛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를 살리는 타자의 말, 주체가 존재의 폭력성에 쓰러지는 것을 막고 주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타자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존재의 폭력을 겪는 이들에게 다가와, 다시 존재자로 서야 한다고, 존재에 흡수될 것만 같은 캄캄한 어둠이 아니라 햇빛 쪽으로 나아가야한다고 말하는 자가 바 로 타자다.
그리고 이는 6장의 화자, 동호의 어머니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힘든 상태, 심지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고 통스런 상태, 존재의 폭력성이 존재자를 집어삼키고 흡수하는 것만 같은 상태에서, 타 자인 ‘너’를 부르면서 가까스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 에서 ‘너’는 만 열다섯의 나이에서 더 자라지 못한 ‘동호’로 보인다.
각 장의 인물들에 게 호명되는 동호는, 전체성에 의한 존재의 폭력성을 겪고 있는 인물들에게 다시 존재자로 설 것을, 더 나아가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을 호소하고 일깨우는 듯 보인다.
그 리고 이에 응답하듯 각장의 주요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책임을 지고자 한다. 동호가 주 인물로 나오는 1장을 제외하고 모든 장에서 동호는 사람들에 의해 호명 되고 있다.
2장의 정대는 검은 숲에 버려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혼으로 등장하는 데, 마침내 자신의 몸이 불태워지는 순간까지 그는 ‘너’를 부르고, ‘너’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는‘너’와 함께 한 “기억들을 이어가”며 그 끔직한 순간을 이겨내고자 한다.
자신의 뺨을 때린 사내에게 어떤 저항도 못하고 그저 맞아야 했던 3장의 은숙. 무기 력하게 폭력에 당해야만 했던 그 순간을 잊기 위해 그녀가 소설의 마지막에 부르는 것 은 ‘너’다.
그녀는 연극 위에선 소년을 보며 “동호야.”라고 말하고, “네가 죽은 뒤 장 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너’의 장례식을 이제라도 제대로 치르기 위해서라도, “일곱 번째 뺨을 잊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고, 그것을 그저 잊음으로써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을, ‘너’를 기억하며 존재의 폭력성에 싸워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연극의 초반부에서 소년의 “얼굴 을 바로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던 그녀는, 연극의 끝에서 “눈을 부릅”뜬 채 “소년 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녀는 ‘너’를 기억하며 싸워나갈 것이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싸우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했던 4장의 ‘나’는 매일 밤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며 존재의 폭력성을 겪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닌 것만 같던 끔찍한 고문의 기억을 청자인 ‘선생’에게 들려주며, 인간 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이냐고 묻는다.
이 장에서 ‘나’는 동호를 직접적으로 호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동호가 도청앞에서 죽은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게 된다.
‘나’ 는 그 사진을 통해 도청에서 손을 들고 항복하러 걸어 나오던 동호와 어린 학생들이 총에 맞아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선생에게 말한다.
자신은 “날마다 혼자서 싸”우고 있다고. 아직 “살아있다는 치욕”과 싸우고,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 과 싸우고 있다고.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 과 싸우고 있다고.
존재에 완전히 삼켜져버리는 상태인 죽음에 그가 지금 맞서 싸우고 있는 힘은 그날 함께했었던 사람들, ‘너’에게서 오는 것 아닐까.
5장의 ‘임선주’는 항쟁의 마지막 날까지 도청에 남기를 택했고, 그로 인해 끔찍한 고문을 겪었다.
그녀는 그 고문의 기억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광주로 향한다.
그러다 금남로 거리에 붙어있던 사진에서 그녀는 ‘너’를 발견한다.
그러다 너를 본 건 금남로에서였어. (...)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 있었어. (...) 옆구리가 뒤틀 린 그 자세가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증거하고 있었어. (...)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 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197)
죽기 위해 찾아간 그곳에서 ‘너’를 본 순간, 그녀는 다시 살아날 힘을 얻게 된다. ‘너’는 그녀의 피를 “펄펄 되살게 했”다.
그것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존재의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는, ‘너’의 바람이자 호명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녀는 ‘너’의 죽음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그날 김밥을 나눠 먹은 뒤 자신이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라고, 거기에는 “내 책임 이 있는 거”라고.
이처럼 이 소설 속 각 장의 화자 및 주 인물들은 5.18 당시와 그 후의 시간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다.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세력의 전체성/전체주의 적 사고에 바탕을 둔 존재의 폭력성을 경험해온 것이다. 그 속에서 존재자로 홀로선 주체는 무너져간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5.18 당시 광장에서 타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너’를 호명하며, ‘동호’를 호명하며, 그날 함께 싸운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다시 일어선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주체성의 근본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주체는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타자로 인 해 주체로 설 수 있다.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주체성을 “타인을 맞아들이 는 것으로서, 즉 환대로서 제시”하고 “환대로서의 주체성 속에서 무한의 관념은 완수 된”198)다고 말했듯, 주체성의 바탕에는 무한-타자가 있다.
197) 한강, 앞의 책, 172-3쪽.
198)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16쪽.
즉, 타자가 주체성의 핵심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이제 ‘너’를 통해, 동호를 통해, 그날 자 신들과 함께한 사람들을 통해, 즉 타자를 통해, 타자로 인해 다시 홀로서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홀로서기는 단순한 홀로서기가 아니다. 그들은 예전의 홀로섰던 자신 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다른 주체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나’에게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있고, 약자인 타자의 호소에 대해 응답해야하며,그렇게 함으로써 동일자적 전체성에 갇혀있던 ‘나’라는 주체성을 ‘책임적 주체’로, ‘윤 리적 주체’로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고 레비나스가 말한 바, 바로 ‘윤리적 주체’로서 일 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이 며, 이 속에서 그들은 윤리적 주체로 서고 있는 것 아닐까.
선주는 자신의 꿈속에 자 꾸 나타나는 인물, 동호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타자인 성희 언니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더 이상 그 호소를 모른 척하며 살아가지 않기로 한다. 이는 각장의 주 인물 모두에게서 드러나는 모습이다.
3장의 은숙 역시 소설의 마지막에서 더 이상 눈을 감지 않기로 눈 을 똑바로 뜨고 동호를 응시하기로 하며, 그날 치르지 못했던 장례식을 이제라도 치르 고자, ‘너’의 호명에 응답하고 한다.
4장의 ‘나’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우고 있다고 말할 때, 죽음이 자신의 모든 끔찍한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 주리라는 사실과 싸우고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먼저 죽어간 임들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아닐 까.
1장의 동호는 도청 앞에서 함께 나아가던 정대가 총을 맞았을 때, 손을 놓고 도망 쳐버린 자신을 잊지 않는다.
동호는 정대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느끼고 있 다.
그래서 동호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나 자신까지도”라고 다짐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해볼 것은, 이러한 주체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주체가 타자를 만나기 위해 갔다기보다는, 타자가 주체를 만나기 위해 온(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게 여 겨진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소년이 온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보면 어떨까. 주체와 타자의 만남이라는 것은 ‘나’라는 주체가 타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너’라는 타자가 ‘나’에게 오는 것임을.
이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타인은 우리를 거슬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이때의 주체는 수동적인 주체이고, “이런 수동성이 주체의 주체성”199)이라고 말한 레비나스를 떠올리게 한다.
선택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는데 선택된 것이라니! (...) 언제나 선택보다 더 오랜 선. 선은 언제나 이미 유일함을 선택 혹은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선택을 선택하지 않고 선택된 자로서 사람은 겪는 다는 것의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을 지닌다.200)
199) 레비나스, 『신, 죽음, 그리고 시간』, 그린비,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2013, 279쪽.
200)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김연숙 옮김, 인간사랑, 2010, 114-5쪽. 이하 각주 를 통해 저자, 제목, 쪽수만 표기.
레비나스가 그리는 주체의 모습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다.
레비 나스적 주체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된 자”이며, 그는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을 지닌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주체는 수동적으로 타자를 맞이하며, 심지어 그 의 짐을 대신 짊어지며 책임적 주체가 된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주체의 모습 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속 인물들은 5월의 광장에서 힘없고 약한 타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약한 타자가 시간을 거슬러 현재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다시 나타난 다. 타자는 주체에게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안기며, 동시에 이제 새롭게 태어날 것을 명령한다.
광장에서 만났던 타자는 이렇게 개인들의 삶에 다시 나타난다. 이제 각 개 인들은 윤리적 주체로 태어나고자 한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책임을 짐과 동시 에 자신은 항상 그에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며 거듭해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2) 타자를 통해 만나는 그/그녀와 당신,
그리고 우리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소년이 온다』에서 각 장의 인물들에게 다가오는 타자가 주로 공통적인 하나의 인물(동호)이라는 것이며, 그 인물이 아니더라도 그 인 물과 연관이 있는 인물들(동호와 함께 도청에서 싸웠던 김진수와 영재, 동호가 찾던 정대의 누나인 정미 등)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바로 그들이 80년 5.18민주화운동을 광장에서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그와 그녀 와 당신이 모여, 우리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광장에서 함께 형성해보았기에 가능한 일 일 것이다.
요컨대 소설의 끝에서 다시 일어서는 이들, 윤리적 주체로 태어나고자 하는 이들, 고통스런 기억을 응시하고 마주하고 그것과 싸워나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은 이제 그저 홀로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혼자 서 있되 같이 서 있으며, 혼자 서 있는 동시에 공동체로 서 있다.
이들은 이제 ‘너’라는 타자만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타자는 홀로 오는 것이 아니라, 5.18 그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과 함께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너’를 만날 때 ‘너’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타자와 - 99 - 도 만나고 있다.
이는 너의 타자, 또 너의 타자의 타자로 계속해서 연결되는 것이며, ‘그’나 ‘그녀’, ‘당신’과의 만남으로, 더 나아가 ‘우리’라는 공동체의 형성에 이르게 된 다.
이러한 흐름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제3자le tiers’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인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이 쓰이기 전까지, 레비나스의 윤리는 주체와 타자사이의 만남에 집중되어 왔다. 그동안 이 주체와 타자 의 만남의 보편화는 말해지지 않아 온 것이다.
그러나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을 쓸 때의 레비나스는 그것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낀 것 같다.
레비나스는 일반화 없 이(전체성에 빠지지 않으면서), 타자와의 만남이 어떻게 정의, 사회적 평등, 도덕적 사 회의 토대 등이 되는지에 말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레비나스가 사회정의의 실마리로 기능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제3자’ 개념이다.201)
얼굴과 얼굴의 만남은 자신과 타자의 편안한 친밀함을 확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 바깥의 전체 세계의 존재를 나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내가 타자the other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무수한 타자들 others의 잠재적 현존이 또한 나에게 드러난다. 이 계시에 근거하여, 윤리적 관계는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할 수 있다.202) 이제 주체는 타자를 만나면서 타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바깥의 전체 세계”를 보게 된다.
타자를 만나면서 동시에 그 타자와 연결된 “무수한 타자들”, 즉 제3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는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 어지게 된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직접 얼굴을 마주한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더 나아가 ‘제3자’를 통한 윤리의 확장을 요청한다. 나와 직접 마주한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3자의 등장이 경험적 사실이라는 것은 아니며,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이 계산으로 강요된 ‘사태 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아니다.
타자의 근접성 속에서 타자보다는 모든 타자들이 나를 사 로잡는다.203)
201) 콜린 데이비스, 앞의 책, 83-4쪽 참조.
202) 콜린 데이비스, 앞의 책, 84쪽.
203) 레비나스, 앞의 책, 295쪽.
레비나스가 말하는 제3자는 어떤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이나 “‘사태의 힘’”에 의해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제3자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타자의 얼굴 속에서, 그 타자의 “근접성” 속에서 “잠재적으로 현존”하며 그렇게 만나는 “모든 타자들”인 것이다. 이는 나와 마주한 타자 외에, 그 타자와 연관된 또 다른 타자, 그 타자의 타자, 그 타자의 타자로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타자들”은 바로 주체인 ‘나’를 “사로잡 는” 것이다. 이제 주체는 이 수많은 타자들에게 불모로 사로잡히며, 그 속에서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이러한 수많은 타자를 가리키는 ‘제3자’에 대한 책임, 만인에 대한 책임, 보편적 책임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레비나스가 말하는 것이다.
그 럼 구체적으로 소설 속에서 이러한 제3자에 의한 연결과 그럼으로써 형성되는 공동체 가 소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자.
우선 살펴볼 인물은 ‘동호’다.
‘동호’는 이 소설의 많은 인물들에게 ‘너’로 불리고 있 는데, 그러면서 인물들은 ‘동호’라는 타자를 통해 서로서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장에서 동호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주요 인물들에 의해 불리거나 기억되고 있 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가 동호를 부를 때, 그/그녀는 그 속에서 동호 뿐 아니라 동 호와 연결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5.18 당시 동호와 함께하였 던, 도청 앞 광장에서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행진하였던, 함께 싸웠던 사람들일 것이 다.
그리고 3장에서 은숙이 연극 무대에서 소년을 향해 “동호야”라고 부를 때, 그곳에 는 무수한 사람들이 함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열한두살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어느새 통로 가운데 서 있다. 하얀 반소매 체육복 상하의에 흰 운동화를 신고,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추운 듯 가슴에 끌어안고 있다. 소년이 무대를 향해 걷기 시작하자, 네발짐승들처럼 허리를 구십도로 구부린 배우들의 무리가 어두운 통로 뒤편에서 나타나 뒤를 따른다. (...)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색색의 만장들이 일제 히 무대 천장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 무대 아래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이 별안간 꼿 꼿이 허리를 편다. (...) /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204)
204) 한강, 앞의 책, 101-2쪽.
극에서 등장하는 열한 두 살 즈음의 소년은 “조그마한 해골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있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유골이라는 듯이, 미처 제대로 치르지 못한 장례를 지금 치 르고자 한다는 듯이.
은숙은 그런 소년을 보며 “동호야”라고 부른다.
이때 마치 기다 리고 있었다는 듯, “색색의 만장들”이 펼쳐지고, “네발짐승처럼 모여 있던 배우들”은 “꼿꼿이 허리를 편”다.
이 사람들, 소년이 나타나자 뒤따라 나타나 소년의 뒤를 따르 고, 만장이 내려왔을 때 허리를 펴 꼿꼿이 서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는 소년을 위한 만가(挽歌)를 소리 없이 함께 입으로 부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바로 5.18 당시 도 청 앞에 모였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아닐까. 그곳에서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같이 싸 워나갔던 사람들. 그곳에서 군인들의 총과 곤봉에 의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 그리고 도청에 끝까지 남지는 않았으나 그날 밤 공포 속에서, 양심이 깨어지는 고통 속에서 잠 못 들고 있었던 사람들. 군인들이 청소차로 실어가 버려 제대로 장례도 치르지 못 한 사람들을 마음 아파하며 기억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모두가 지금 이곳에서 은숙과 함께 ‘너’의 장례를 치르고자 모인 것 아닐까.
여기에서 은숙은 ‘너’를 만나고 ‘너’를 부름을 통해 그날 ‘너’와 함께하였던 수많은 사람들, 즉 제3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결에 의해 이곳에서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어떤 공동체가 형성 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5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장의 화자인 선주는 “고요히 울리는 발 자국 소리”를 꿈에서 자주 듣게 되는데, 이는 실제로는 물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였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자꾸 “누군가가 정말 왔던 것처럼” 여긴다. 마치 “그 걸음걸이가 생시였고, 수건에서 흐른 물로 젖어 있던 바닥은 꿈이었던 것 같”다고. 그 소리는 더 이상 물수건을 걸어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들려온다.
선주는 “누가 이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오는” 건지 알 수 없어한다.
하지만 이는 이 장의 말미에 가 면 누구인지 드러난다.
성희 언니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문득 동호를 떠올리고, 김밥을 나눠 먹은 뒤 자신이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너’가 도청에 남지 않았 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동호의 죽음에 “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냐고 묻는데, 이를 통해 앞의 꿈에서 다가오던 발소리의 주인이 바로 동호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발소리가 한 명의 발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 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205)
205) 한강, 앞의 책, 174쪽.
선주는 이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때로 확신할 수 없어하며, “언제나 같은 사람 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헷갈려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발소리가 “한 사람 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번지고 스며들어서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앞에서 선주는 동호의 죽음에 자신의 책 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동호가 자신에게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발소리가 동호 한 사람이 아니라, 동호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오는 것인지 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동호라는 타자 외에도 그 타자와 연관된 또 다 른 타자, 그 타자와 연관된 또 다른 타자들이 동호와 함께 오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즉 1980년 그 당시 함께 싸웠던, 이름도 모르고 직접 얼굴도 보지는 못했으나, 그 순간 그곳에 함께 하였던 그 사람들이 서로 스며들어 선주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다.
즉, 동호라는 타자를 통하여, 동호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 타자들, 제3자가 동호 와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면서 “한 몸이 돼서” 다가오며 어떤 공동체를 형성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타자-제3자-공동체로 나아가는 연결망을 살펴볼 수 있 다.
이런 점에서 또 주목해볼 인물이 ‘정미’다.
정대의 누나인 정미는 동호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 속에서 다른 인물들에 의해 여러차례 호명되는데, 이 소설에서 동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타자로 나타난다면, 정미는 스스로 타자로 등장하면서도 그 타자의 ‘제3 자’로서 등장하기도 하면서 또 다른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1장에서 정미는 동호와 정대 사이에 있으면서, 동호-정대의 일대일 관계에 하나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을 너는 문득 바라다본다. (...) 처음 저 사람을 본 순간 너는 정 미 누나를 떠올렸었다. (...) 어딘가 비슷한 것 같았다. (...) 하지만 너는 그녀의 맨발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검푸른 팥알만 한 점이 그녀의 무릎 위쪽에 있었는지는 정대가 알 것이다. 정대가 있어 야 저 사람이 정미 누나가 아니란 걸 확인해줄 수 있다. / 하지만 정대를 찾으려면 거꾸로 정미 누 나가 있어야 한다. 정미 누나라면 시내 모든 병원을 샅샅이 뒤져, 회복실에서 막 의식을 차린 정대 를 찾아낼 것이다.206)
206) 한강, 앞의 책, 40-1쪽.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하며 정미와 정대를 찾고 있는 동호는, 정미와 닮은 사람을 본다.
그러나 너는 그녀가 정미인지 확신할 수 없다. 그녀의 무릎 위쪽에 “검푸른 팥알만 한 점”이 있는 것은 “정대가 알 것”이기 때문이다. “정대가 있어야 저 사람이 정미 누나”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 대를 찾기 위해서는, 누나와 싸우고 가출한 정대를 “하루 만에 귀신같이 만화방에서 찾아”낸 정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설은 동호-정대의 관계에서 동호-정 대-정미의 관계로 확장되고 있다. 정미는 5장의 선주와 성희언니 사이에서도 등장한다.
군인들에 의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나온 선주는 이듬해 성희언니와 만난다.
성희 언니는 “정미가 그 봄에 실종됐 다는데, 알고 있었니?”라고 묻는다.
“너, 거기 사년 살았다면서. 큰 도시도 아닌데, 오 며 가며 한 번도 못 만났”냐고 묻는 성희에게, 선주는 정미의 얼굴도 잘 떠올리지 못 하다가, 문득 어떤 순간을 떠올린다.
그것은 5.18 당시 도청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때로, 그곳에서 선주는 버스에 올라탄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 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 우리들은 정의파다”. 똑똑히 기억하는 그 노래를 따라, 당신은 홀린 듯 그 버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다.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어 광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 노인들, 초등학생 아이들, 작업복 차 림의 남녀 공원들,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들, 투피스에 힐을 신은 젊은 여자들, 그것도 무기라고 장 우산을 들고 나온 새마을 점퍼 차림의 아저씨들. 그 모든 사람들의 행렬 앞에, 신역에서 총을 맞은 청년들의 시신 두 구가 수레에 실려 광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207)
207) 한강, 앞의 책, 158-9쪽.
버스에서 들려오는 노래, 마치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 소리”를 따라 선주는 걸었고, 그 길의 끝은 “수십만의 군중이 거리 곳곳에서 몰려들 어” 향하는 곳, 바로 도청 앞 광장이었다.
여기서 선주는 그 버스에서 들려오던 또 다 른 목소리도 듣고 있다.
바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에 이어 들려 오는 목소리. “먼저 가신 임들을 따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 까.” 여기서 선주가 도청 앞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듣는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 하니까”라는 말은 노조 소모임에서 성희 언니가 말이 막힐 때면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 다.
그 모임에는 정미도 있었으며, 정미도 그 말을 많이 들어 익히 알 것이었다. 그리고 5월의 그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선주는 성희 언니로부터 정미가 서울에서 내려간 뒤 광주에서 지냈다고, 그러다 80년 봄에 실종됐다는 말을 듣는다.
즉, 선주가 여공들 의 노래를 들었던 그 버스 안에, 바로 정미가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 다.
이렇게 성희와 선주의 관계에 정미는 또 다른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정미의 목소 리는 이는 그날 도청 앞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선주를 또 연결해가고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주체-타자-제3자-공동체로 나아가는 연결고리208)는 4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8) 한편, 이러한 주체-타자-제3자-공동체의 연결망은 소설 내·외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에필로그의 화자로 등장하는 ‘나’는 이 소설을 쓴 작가로 짐작되기도 하는데, ‘나’는 어 릴 적 들었던 ‘동호’라는 이름에 의지하여 그를 찾고, 그를 소설 속에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 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동호를 만나면서 동호와 함께 했던 사람들, 은숙과 선주, 정대와 정미, 김진수 등의 제3자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이를 통해 작품 안에서 또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이 작품 내적인 측면이라면, 작품 외적으로도 이러한 공동체는 이루어지고 있는 듯 하다. 바 로 작가인 한강과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 그리고 그 소설을 읽고 있 는 독자인 ‘나’이다. 여기서 작가가 주체라면, 작가의 기존의 내면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윤리적 주체로 설 것을 호소하는 소설은 타자,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는 제3자에 해당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는 작가-소설-독자로 연결되며, 이 독자는 또 다시 다른 독자로, 다른 독자로 연결될 것이기에 여기에서도 어떤 공동체가 그려지고 있는 것 아닐까.
4장에서는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던 ‘나’가 등장하여 김진수의 심리부검을 연 구하고 있다는 선생에게 말을 하고 있다.
김진수는 상무대에서 ‘나’와 함께 고문을 당 했고, 2인1조로 밥을 먹을 때 함께 먹던 사이였다.
김진수는 그곳에서 ‘영재’라는 아이 와 친해지게 되는데, 영재는 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더 먹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그러지 마요. (...)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영재는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받으며 짐승처럼 여겨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죽 을 각오를 했었다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다.
이후 김진수 는 영재에게 말을 걸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그 아이의 손에도 볼펜으로 짓이겨진 고문의 상처가 있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 면서. 그러다 상무대에 끌려간 사람들이 단체로 재판을 받던 날, “끽소리만 내도 즉석 총살”이라고, “입 닥치고, 끝까지 고개 숙이고 있”으라고 하는 하사의 명령을 듣고 다 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순간, 재판장이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습니다. (...) 누군가가 소리 죽여 흐느끼듯 애국가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린 영재라는 걸 깨달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미 합창이 시작돼 있었습니다. 자력에 이끌린 것처럼 나도 따라 불렀습니다.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우리들이, 땀과 피와 고름이었던 우리들이 조용히 노래하는 동안, 어째서 였는지 그들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209) 고문을 받으며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짐승의 몸에 불과하다고, “땀과 피와 고름”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들은 어린 영재가 흐느끼듯 부르기 시작한 “애국가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합창을 시작하였다. 바로 영재의 목소리를 통해 5.18 당시 자신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어떻게 애국가를 부르고 행진하고 마음먹 었는지 떠올린 것이다. 영재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 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 아니었을까. 그들은 영재라는 제3자를 통 해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을 이뤘던 그 순간을 기억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결국 이 소설의 핵심 질문 중 하나인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응답 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 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 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 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 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 를.210)
209) 한강, 앞의 책, 123쪽.
210) 한강, 앞의 책, 115-6쪽.
4장의 ‘나’는 사람들과 함께 도청 앞 광장에서 행진하다 군인들이 쏜 총에 놀라 달 아난다.
그러나 그가 군인들로부터 광주시민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을 때, 헌혈하기 위해 끝없이 줄을 선 사람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바 삐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자신이 탄 트럭 위로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주 던 여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군인들에 의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낀다.
1980년 5월 광주. 그곳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이 느끼지 않았 을까.
그들은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라는 양심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 았을까. 그리고 그 기적 같은 순간은 나와 대면하고 있는 타자를 만나는 것 뿐 아니 라, 그 타자와 연관된 또 다른 무수한 타자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타자들에 대한 책임으로 형성되는 공동체를 1980년의 광주는 이루어낸 것이다.
그들이 모여 일으키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은, “자신이 완 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은 개인 혼자로서는 일으킬 수 없는, 나 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넘어서, 이를 토대로 하여 수많은 타자들에 대한 책임으로 나아갈 때 가능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양심은 제3자의 현전으로 발생한다.
양심이 여전히 사심 없는 것이라는 것은 양심이 제3자의 출현 으로부터 나옴에 따라서이다.
양심은 마주보기의 친밀성 속에서의 제3자의 등장, 영원한 등장이다.
(...) 양심의 기초는 정의이다.211)
211) 레비나스, 앞의 책, 298-9쪽.
레비나스는 이러한 양심이 “제3자의 출현으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한다.
양심은 나와 타자가 형성하고 있는 “마주보기의 친밀성 속”에서 등장하는 제3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타자의 이자관계가 아니라 나와 타자와 그 타자와 연결된 타자, 그 타자의 타자의 타자, 수많은 잠재적 타자로 연결되며 하나의 공동체적 연결망을 형 성한다.
그리고 이 양심의 가장 근원에는 바로 “정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삼자에 의한 공동체의 형성이, 타자와의 윤리적 만남에서 시작한다 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주체와 타자간의 윤리적 만남은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환대하고, 그 타자가 짊어진 짐까지 대신 짊어지고자 할 때, 그 타자를 자 신이 온전히 떠맡고 책임지고자 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이 소설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인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 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 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껍데기를 벗고 나와 연한 살을 맞댄 것 같은” 순간의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위해, 타자를 환대하고 타자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짊어지고자 노력하고 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 기적 같은 순간을 위해 타자를, 소년을 오래토록 “묵묵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자 신의 어머니를 햇빛으로, 꽃 핀 곳으로 이끌곤 했던 소년이 이곳으로 올 수도 있지 않 을까.
『소년이 온다』는 그 길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이끌어 간 다.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212)
212) 한강, 앞의 책, 213쪽.
Ⅲ. 결론
본 연구는 한강 소설이 그려내는 다양한 주제의식 중 타자(성)와 윤리에 주목하여, 타자(성)와 윤리가 한강 소설의 근본적인 뿌리임을 밝혀냄으로써 지금까지 발표된 한 강 소설 세계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타자는 자기중심주의에 의해 공격당하거나 추방당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자민족중심주의와 자국가중심주의 등 집단적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타자는 이 시대에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 강 소설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데, 특히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대다 수가 ‘타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는 레비나스의 개념으로, ‘나’라 는 동일자에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성을 지니며 ‘나’의 ‘전체성’을 벗어나 있 는 ‘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나’의 자유를 문제 삼 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며, ‘책임적 주체’로 태어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여기서 타 자에 대한 책임에서 더 나아가 그 타자의 타자, ‘그’나 ‘그녀’, 즉 ‘제3자’에 대한 책임 으로까지 확대된다.
이는 주체와 타자와 그 타자의 타자, 그 타자의 타자로 연결되며 어떤 공동체를 형성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윤리를 토대로 한강 소설의 타 자를 살펴봄으로써 현 시대 우리의 타자를,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주체에 관해 성찰해봄으로써 주체와 타자 사이의 윤리에 관해 연구하였다.
본고는 이상의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에 토대를 두고, 한강의 소설을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중기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를 거쳐 또 다른 의미 로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소년이 온다』까지를 살펴보았다.
우선 본론 1장 1절에서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로부터의 탈출, 즉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분리, 홀로서기가 한 강의 『여수의 사랑』의 등장인물들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1장 2절에서는 이렇게 홀로섬으로써 자신의 내면성을 지니게 된 홀로서기로서의 ‘나’가 작 품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홀로선 주체가 지니는 한계를 보 여주면서,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고통받으며 무너지나 동시에 타자를 통해 새 롭게 태어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본론 2장 1절에서는 앞의 논의에 이어, 타자의 얼 굴이 어떻게 주체에게 나타나는지 살펴본 뒤, 이러한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라는 윤리적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윤리적 사건 속에서 타자를 자신의 틀(전체성) 안에 서 받아들이는 주체의 모습을 『채식주의자』를 통해 살펴보았다.
2장 2절에서는 타자 를 타자 그 자체로 맞이하는 주체, 타자를 환대하는 주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는 타자를 책임지기로,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기로 결단하는 주체로, 여기서 주체는 윤리 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난다.
본론 3장에서는 이 논의를 더욱 확장하여 직접적으로 대 면하는 타자 외 제3자로서의 타자와 주체는 어떻게 관계하는지, 거기에서 발생하는 윤 리는 어떤 것인지를 『소년이 온다』를 통해 살펴보았다.
우선 3장 1절에서는 ‘5.18민 주화운동’이라는 광장에서 만나는 타자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존재의 폭력성에 처 한 주체는 타자를 호명하면서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 등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3장 2 절에서는 책임의 주체로서의 ‘나’와 타자의 일대일 관계를 넘어서, ‘나’와 타자와 그 타자의 타자의 관계, 그 타자의 타자의 타자와의 관계 등으로 이어지며 만들어지는 공 동체에 대한 연구를 해보았다.
본 연구는 한강의 소설이 보여주는 타자성이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 닿아있는 지점 을 살펴봄으로써, 주체와 타자의 만남에 관해 논해보았다.
타자는 주체의 틀 안에서는 알 수 없는, 무한(자)이다.
그렇기에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일은 주체의 삶에 의문을 던지고, 균열을 일으키며 심지어는 주체의 삶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의 씨앗을 주체 안에 심는다.
이제 주체 는 윤리적 주체로 새롭게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 타자와 연관된 또 다른 타자를 발견하고, 그/그녀와의 만남도 이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주체 와 타자와 이 타자의 타자, 이 타자의 타자의 타자(제3자)로 이어나가는 연결망은 하 나의 공동체를 그려나가게 된다. 이것이 전체성/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레비나스가 꿈꾸 는 윤리(를 기반으로 한 정치)일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와 같은 윤리를, 소설 속 인 물과 그 인물과 연관된 또 다른 인물의 관계를 통해 잘 나타내고 있다.
본 연구에서 살펴본 『여수의 사랑』과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한 강의 소설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그 윤리를 깊게 다루고 있다.
『소년이 온다』 이 후 단편 2편213)과 장편 1편214)을 발표하며 ‘눈·혼’ 연작을 이어가고 있는 한강이 앞으 로 어떤 소설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
213) 한강,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창비, 2015년 여름호. 한강, 「작별」,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214) 한강, 『흰』, 난다, 201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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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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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반논문,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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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좌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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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Other and the Ethics in Han Kang's Novels
Lee Geun-hee Advisor : Prof. Shin Hyoung-cheol Department of Literature and Creation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This study focuses on the other(ness) and ethics out of the various themes depicted in the novels of Han Kang and aims to understand the overall flow in her stories that have been published so far by revealing that other(ness) and ethics are the fundamental elements of her fictions. Otherness in modern society is being attacked or chased out by egocentric tendencies. This is not limited to individuals, but is expanding toward collective psyches including ethnocentrism, nationalism, and the like. There is no place where others can fit in this age. It is important to examine the narratives of Han Kang with this as the background, because the majority of the main characters in her novels are alienated others. The "Other" mentioned here is a concept advanced by Emmanuel Levinas, which does not revert to the same person who is the "ego," but can be said to have its own original traits and is an infinity that is outside the totality of the ego. The "face of the Other" as an infinity puts into question the freedom of ego, makes ego suffer, and demands that one be reborn as a responsible subject. In addition, responsibility for the Other should go further to expand toward the Other of that Other, which is the responsibility for a third party. This connects the subject to Other, and that Other to the Others of the Other, and forms a type of community. By examining the Others in the novels of Han Kang based on the ethics of Levinas, this study aims to contemplate on our Others in the current age and more fundamentally, the subject that is ego. In the main part of this essay, an examination will be made on the characters of the novels of Han Kang based on this ethics of Levinas. In Section I, I will examine how an escape is made from the entities that try to neutralize ego and how later when the subject is able to stand on their own, they meets the Others, goes through hardship and finally opens up to Others through her first novel 『A Love of Yeosu』(1995). In Section II, I will look into how the "face of the Other" and the ethical subject, which are the most central concepts in the philosophy of Levinas, are expressed in her best-known novel 『The Vegetaria n』(2007). In Section III, I will review how the central concept in late Levinas, which is the "ethics of responsibility" by Others for Others, is expressed, as well as examine what form the community created as this responsibility for Others is expanded to a "third party" takes through the other widely-read novel 『Human Acts』(2014), which deals with the May 18th Gwangju Uprising. In conclusion, this study examines the aspects where the alterity shown in the novels of Han Kang is linked with the alterity of Levina’s ethics of Other in order to discuss the Other as well as the subject who needs such Others.
국문초록
본 연구는 한강 소설이 그려내는 다양한 주제의식 중 타자(성)와 윤리에 주목하여, 타자(성)와 윤리가 한강 소설의 근본적인 뿌리임을 밝혀냄으로써 지금까지 발표된 한 강 소설 세계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현대 사회에서 타자는 자기중심주의에 의해 공격당하거나 추방당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자민족중심주의와 자국가중심주의 등 집단적사회적 현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타자는 이 시대에 설 자리가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 강 소설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데, 특히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대다 수가 ‘타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는 레비나스의 개념으로, ‘나’라 는 동일자에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성을 지니며 ‘나’의 ‘전체성’을 벗어나 있 는 ‘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얼굴’은 ‘나’의 자유를 문제 삼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며, ‘책임적 주체’로 태어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더 나아가 그 타자의 타자, ‘그’나 ‘그녀’, 즉 ‘제3자’에 대한 책임으로까 지 확대된다.
이는 주체와 타자와 그 타자의 타자, 그 타자의 타자로 연결되며 어떤 공동체를 형성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윤리를 토대로 한강 소설의 타자를 살펴봄으로써 현 시대 우리의 타자를,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주체에 대해 성찰해 보고자 한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레비나스의 윤리를 토대로 한강 소설의 인물들을 살펴볼 것이다.
본론 Ⅰ에서는 ‘나’를 무화시키고자하는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후 홀로서기를 이룬 주체가 어떻게 타자를 향해 열리게 되는지를 한강의 첫 소설집인 『여수의 사랑』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본론 Ⅱ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에서 가장 핵심 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주체가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본론 Ⅲ에서는 후기 레비 나스의 핵심 개념인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책임의 윤리’가 어떻게 나타는지, 그리 고 이러한 타자에 대한 책임이 ‘제3자’에게로 확대되며 만들어져가는 공동체란 어떤 모습인지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의 또 다른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통 해 살펴볼 것이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한강의 소설이 나타내는 타자성이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 닿 아있는 지점을 살펴봄으로써, 타자와 더불어 이러한 타자를 만나는 주체에 관해 논하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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