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발전한 독일 경건주의는 기독교 사상,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물론 교회음악, 특히 독일 찬송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 다.
우리나라 교회음악 분야에서는 연구가 미미하지만, 경건주의와 바흐의 교회음악 간의 관련성에 대해 여러 교회음악 학자들이 관심을 보여왔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독일 경건주의의 시기가 바흐의 생애와 겹치기 때문이다.
바흐 당시 시대적 상황은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가 대립하고 갈등하던 시대였으며, 두 진영의 신학적 대립은 예배와 교회음악에서 실제적인 차이 를 드러냈다.
바흐는 오어드루프에서 경건주의를 처음 접하게 되며, 뮐하우 젠에서는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갈등 속에 실제적으로 빠지게 된다.
뮐하우젠에서 예술로서의 교회음악을 발전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흐는 약 1년 만에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 시의회에 제출한 그의 사직서에는 교회음악을 향한 그의 소명감과 열정이 잘 나타나 있다.
평생 정통주의와 경 건주의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살았던 바흐는 정통주의 루터교 신앙을 견지하 면서도 경건주의적 요소를 수용하여 자신의 신앙생활과 음악작품에 잘 융화 시켰다.
이러한 바흐의 삶과 음악은 시대는 다르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갈 등 가운데 있는 오늘날의 교회음악인들에게 깊이 생각해 보고 따라야 할 좋 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주제어: 독일 경건주의, 루터교 정통주의, 바흐, 교회음악, 교회음악가
Ⅰ. 들어가는 말
독일 경건주의(German Pietism)는 대체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루터교 정통주의(Lutheran Orthodoxy)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으로 발 전한 신앙 운동으로서 종교적 형식과 교리적 엄격함보다는 중생의 경험 과 영적인 갱신, 개인적인 경건과 신앙적인 삶을 강조했다.
이 운동의 주 요 인물로는 경건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기독교(Das Wahre Christentum)를 쓴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을 썼고 ‘경건회(collegia pietatis)’를 조직하고 이끌었던 슈페너 (Philipp Jacob Spener, 1635-1705),1 경건주의의 중심지 할레(Halle)를 대표 하는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그리고 헤른후트 (Herrnhut) 공동체를 만든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 등을 들 수 있다.2
정인모에 따르면, 독일 경건주의는 “학파(철학)와 종파 논쟁, 외형으 로 굳어진 전통, 관습적인 기독교 정신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는데, 특히 루터 종교개혁 이후 다시 종교가 교리화되고 루터교가 국가종교 형태를 띠기 시작하자, 개인적 영성과 체험을 강조하며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 자고 강조했다.”3
1 슈페너의 ‘경건회’에 대한 의미 있는 국내연구로는, 채이석, “필립 야콥 슈페너의 ‘Collegium Pietatis’에 대한 교회사적 의미 고찰”, 「개혁논총」 26(2013): 333-369가 있다.
2 독일 경건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간단 히 서론적인 언급만 하고 논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독일 경건주의의 발전에 대해서는, 정인모, “독일 경건주의 운동 고찰”, 「독일언어문학」 78(2017): 237-255를 참고하라.
3 정인모, “독일 경건주의 운동 고찰”, 238-239. 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은 개신교 내에 주목할만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기독교 사상과 신앙, 성도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 다.
정인모는 경건주의가 “개인화와 종교적 삶의 내면화의 바탕 위에 개 인의 경건과 공동체 삶의 새로운 형식을 발전시켰다.”고 말하면서, “신학 과 교회의 지속적 개혁에 영향을 미쳤고, 그 해당 국가의 사회 문화적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4
이러한 독일 경건주의는 교회음악 분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 는데, 특히 독일 찬송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5
나중에 경건주의의 특징 이 되는 영적으로 진지한 관심을 담은 찬송가가 일찍이 1635년에 스트라 스부르(Strasbourg 또는 Straβburg)에서 출판되었는데, 그 주제는 그리스도 인의 영적인 상태, 신앙적 상황, 삶의 상황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6
그리고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전반 경건주의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비율로 종교적인 시와 찬송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그러한 찬송들은 신학적으로 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리듬적으로 더 부드러웠고, 시적으로 더 다듬어 져 있었다.7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는 경건주의의 가 장 위대한 찬송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찬송을 포함한 많은 경건주 의 찬송들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경건주의적, 음악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라일링하우젠(J. A. Freylinghausen, 1670-1739)의 신령한 노래집 (Geistreiches Gesangbuch)(1704)에 수록되어 있다.8
4 정인모, “독일 경건주의 운동 고찰”, 238.
5 김용화, “독일 경건주의 신앙을 통해 본 웨슬리 회심찬송”, 「성경과 신학」 93(2020): 130-135를 참고하라. 경건주의 독일 찬송은 한국찬송가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한국찬송가들에 수록된 경건주의 독일 찬송과 찬송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하재송, “A Study of the German Hymns in Representative Korean Hymnals”, 「개혁논총」 21(2012): 249-250을 참고하라.
6 Hans Ludwig Holborn, “Bach and Pietism: The Relationship of the Church Music of Johann Sebastian Bach to Eighteenth Century Lutheran Orthodoxy and Pietism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Saint Matthew Passion” (D.Min. diss.,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 1976): 34-35.
7 Carl Halter and Carl Schalk, A Handbook of Church Music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78), 71.
8 하재송, “독일 바로크 시대의 경건주의적, 음악적 반영: 프라일링하우젠(J. A. Freylinghausen)의 신령한 노래집(Geistreiches Gesangbuch)(1704)”, 「성경과 신학」 93(2017): 333-359를 참고하라.
그런데, 독일 경건주의가 교회음악에 미친 영향과 관련하여 여러 교회음악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온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독일 경건 주의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교회음악 간의 관련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심은 독일 경건주의가 발전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이 바흐의 생애와 정확하게 겹친다는 사실에 따른 자연스러 운 의문이다.
바흐 전문가인 돈 프랭클린(Don O. Franklin, 1939-2021)도 그와 같은 견지에서 바흐의 경우 “작곡가로서의 지위뿐만 아니라 경건주 의가 독일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시기에 교회음악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재검토가 중요하다.”9고 말했다.
독일 경건주의가 과연 바흐의 교회음악 에도 영향을 주었을까?
영향을 주었다면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을까?
그런데, 국내 교회음악 분야에서 이 부분에 관한 의미 있는 연구는 지금 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러한 연구가 음악적인 접 근 대신 일종의 신학적인 접근과 고찰이 필요한 것이라 그렇지 않을까?
본 연구는 이와 같은 의문들과 관심이 동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본 연구의 주된 관심은 이미 언급한 대로 ‘독일 경건주의가 바흐의 교회음악에 과연 영향을 미쳤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논제를 다룸에 있어서 먼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바흐 당시의 신학적, 교회 음악적 상황을 간단히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독일 경건주의와 바흐의 관련성을 파악하기 위해 바흐의 생애에 경건주의와의 실제적인 접점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고, 논제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다루면서 논의를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연구에 실증적인 무게감을 더하기 위해서는 논제와 관련된 바흐의 교회 음악 작품들에 대한 신학적, 음악적 고찰과 확인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 다.10
9 Don O. Franklin, “Bach’s Career as a Church Musician: early Years”, Pietisten 7/2 (1993), 2024년 2월 19일 접속, http://www.pietisten.org/viii/2/bach.html.
10 예컨대, 그의 칸타타 Wo soll ich fliehen hin, BWV 5; Weinen, Klagen, Sorgen, Zagen, BWV 12; Tritt auf die Glaubensbahn, BWV 152 등과 「마태수난곡(Saint Matthew Passion)」은 독 일 경건주의와의 관련성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작품들이다. 홀본의 논문(Holborn, “Bach and Pietism”)은 그러한 연구의 한 예로서 「마태수난곡」을 중심으로 바흐의 교회음악과 루터교 정통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와 예시까지 구체적으로 다루기에는 지면의 제 한상 어려운 일이기에 그 부분은 부득이 후속 연구로 넘겨야 할 것 같다.
바라기는, 바흐의 교회음악에 대한 이러한 문헌적, 신학적 접근과 기 초적인 연구가 교회음악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특히 신학적이고 신앙적 인 관점에서 바흐의 교회음악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Ⅱ. 바흐 당시의 신학적, 교회음악적 상황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이라는 논문에서 이가영은 “1970년대 중반부터 바흐의 음악을 신학적으로 탐구해온 신학 자 겸 음악학자”인 로빈 리버(Robin A. Leaver)를 언급하면서 “그의 관심 사는 ‘신학으로서의 음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바흐의 음악을 루터교 전통에서 해석하고 설명해 나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처럼 바흐 음악의 신학적 의미를 연구해 온 학자로서 앤 리히(Anne Leahy), 마 이클 매리슨(Michael Marrisen), 돈 프랭클린, 알베르트 클레멘트(Albert Clement),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1923-2006) 등을 언급한다.11
그러면서 “바흐의 음악을 보다 큰 신학적 문맥에서 조망하며 바흐가 얼 마나 신학적인 음악가인가를 학문적으로 고민하는 일은 국내 학계의 시 급한 연구과제 중 하나”12라고 주장한다.
11 이가영,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 아브라함 칼로프 (Abraham Calov)에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까지”, 「음악논단」 27 (2012): 2(각주 2).
12 이가영,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 2.
그의 말대로 바흐와 그의 음악 을 신학적 연관성 속에서 고찰하는 것은 이제 바흐 연구에 있어서 하나 의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바흐 당시는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작용으 로 경건주의가 발전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정통주의와 경건주의가, 시기 와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었다.
‘바흐와 경건주의’에 대해 연구한 한스 홀본(Hans Ludwig Holborn)은 당시의 신학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바흐의 생애 동안 이 두 파벌 사이에는 신랄한 논쟁이 벌어졌다. 경건 주의자들은 교회가 차갑고 학문적이고 교리적이며 생생한 기독교 경험 과 중생의 증거보다는 논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 제도와 성직자 및 교인의 삶 둘 다 경건주의 갱신이 일어나기 위 해서는 급격한 변화가 필요했다.
정통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강력히 반대 한 경건주의자들의 과도한 감정주의와 분리주의에 대해 항의했다.13
문성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건주의자들은 정통주의 교회를 향하 여 신앙과 신학을 머리와 이성으로 하지 말고 가슴과 심장으로 하라고 주장하였다.”14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바흐 당시의 신학적 논쟁을 상 징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은 바흐의 서재이다.
홀본에 따르면, “그의 사 망 당시 바흐의 서재에는 루터 저작의 두 판본, 루터교 정통주의를 옹호 하는 논쟁적인 저서 몇 권, 그뿐만 아니라 중세 신비주의와 18세기 경건 주의를 둘 다 대표하는 몇몇 고전적이고 표준적인 글들을 포함하여 루터 교 신학의 표준 저작물들이 들어 있었다.”15
즉,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저 작들 모두 바흐의 서재에 있었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루터 교 정통주의의 산물인 칼로프 성경(Calov Bible)과 경건주의의 뿌리가 되는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가 바흐의 서재에 함께 있었다.16
13 Holborn, “Bach and Pietism”, xi.
14 문성모,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를 묻고 답하다 (서울: 예솔, 2016): 96.
15 Holborn, “Bach and Pietism”, 2-3; 바흐가 사망한 이후 작성된 유품목록에는 총 52개 의 제목(동일한 제목 아래 여러 권이 있는 경우 각 권을 모두 계수하면 총 81권)이 나열된 신 학서적 목록이 있었다. 이가영,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 6, 각 주 9. 16 이가영,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 3; 칼로프 성경은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루터가 번역한 성경뿐만 아니라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자 인 아브라함 칼로프(Abraham Calov, 1612-1686)의 주석을 담고 있어 ‘칼로프 성경’이라고 불린 다. 바흐는 1681년 판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각 권마다 친필 서명을 했고, 책 내용에 200개가 넘는 밑줄을 그었으며, 본문의 오류를 정정하기도 했고, 성경 여백에는 25개 남짓한 친필 주 석을 달았다. 이 역사적인 바흐 문헌은 1934년 경 미국 미주리(Missouri) 주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 있는 컨콜디아 신학교(Concordia Seminary)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으며, 1969년 경 크리 스토프 트라우트만(Christoph Trautmann)의 논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가영, “요한 세 바스찬 바흐와 18세기 초 독일의 신학적 지형”, 6-7과 Don O.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Pietisten 7/1 (1993), 2024년 2월 19일 접속, http://www.pietisten.org/viii/1/bach.html을 참 고하라.
이는 바흐가 깊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당시 신학적 논쟁이 치열했으며, 바흐 역 시 그러한 신학적 논쟁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신학적 대립은 예배와 교회음악에서 실제적 으로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다.
문성모에 따르면,
“경건주의자들은 정통주 의 교회가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예배의식이나 음악적 유산을 모두 무 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무시하였다. ... 그리고 단순한 찬송가 이외의 예전 적인 음악은 순수한 신앙을 방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예배에 서 추방하였다.”17
경건주의가 단순한 찬송가 이외의 모든 예배음악에 매 우 적대적이었다는 말이다.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경건주의가 단순하고 경건한 찬송가 이외에 당시의 교회음악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저명한 학자들의 언급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리버는 경건주의 예배 음악에 대해 “예배에서의 모든 정교한 음악은 세속적인 과시로 간주되었 고 루터 세대의 ‘무거운’ 코랄 곡조가 아니라 경건주의자들이 ‘경건회’에 서 노래했던 더 가볍고 접근하기 쉬운 곡조로 노래 되도록 단순하고 경 건한 찬송가로 대체되어야만 했다.”18고 말했고, 유명한 음악학자인 만프 레드 부코프쳐(Manfred F. Bukofzer) 역시 “경건주의자들이 예배에서 수식 적인 음악을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단순하고 경건하거나 병적으로 감상적 인 노래만을 용인했다.”19고 지적한 것이다.
한편, 어윈(Joyce Irwin)은 “경건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당시의 교회 음악 관행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예술적인 교회음악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다.20
17 문성모,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를 묻고 답하다, 97.
18 Robin A.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55/1 (1991): 11.
19 Manfred F. Bukofzer, Music in the Baroque Era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47), 272.
20 Joyce Irwin, “German Pietists and Church Music in the Baroque Age”, Church History 54/1 (1985): 31.
그는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경건주의 비평가 중 한 명이었던 보케로트(Gottfried Vockerodt)가 “교회음악에 대한 독특한 경건주의 신학의 기 초가 될 수 있는 원칙, 즉 음악적 기술보다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이 교회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이라는 것을 명확히 표현했다.”고 언급 하면서, “논쟁의 열기가 경건주의자들이 예술적인 교회음악에 원칙적으 로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교회음악에서의 어 떤 관행과 교회에 고용된 음악가들의 도덕적 결함에 반대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21
21 Irwin, “German Pietists and Church Music in the Baroque Age”, 40.
요컨대, 경건주의는 당시의 교회음악적 관행, 즉 바로크 음악의 장식 적이고 일면 과시적인 양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는데, 그것은 그들 의 신학적인 사고와 반영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교회음악의 역사 적 흐름과 발전을 도외시한 것으로 보이는 경건주의의 그러한 편협한 태 도는 충분히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찬송가에 대한 강조를 통해 경건주의 찬송이 발전하여 결과적으로 교회 음악의 발전에 기여하고 많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경건주의의 한 커다란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독일 경건주의와 바흐의 교회음악
1. 바흐의 생애와 독일 경건주의
독일 경건주의 시대에 살았던 바흐는 그의 생애 동안 경건주의와 어떤 접점이 있었고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그리고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대 립과 투쟁의 시대 속에서 바흐는 어떤 태도를 취했고 어떻게 행동했을 까?
경건주의와 관련된 바흐 생애의 중요한 시기들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685년 독일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난 바흐는 양친을 잃고10세 때 큰 형이 있는 오어드루프(Ohrdruf)로 가게 되는데, 그는 거기에서 경건주의를 처음 접하게 된다.
오어드루프는 당시 경건주의의 거점으로 서 “열성분자들, 다른 지역에서 온 분리자들이 거기에서 피난처를 찾았 다.”
그러나 “바흐가 다녔던 학교 당국은 경건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가장 단호한 태도로 그들은 정통주의 관점을 비타협적으로 옹호했다.”22
이처럼 바흐는 어려서부터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격한 대립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어린 바흐가 경건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분명 하지 않으나 어린 학생 시절이었기에 아마도 학교 당국의 지도와 영향을 좀 더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경건주의와의 관계에서 바흐에게 짧지만 분명한 흔적을 남긴 곳은 뮐하우젠(Mühlhausen)이다.
1707년과 1708년 사이에 바흐는 뮐하우젠의 성 블라시우스 교회(St. Blasius Church)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는데, 그 교회의 목사인 프로네(Johann Adolph Frohne, 1652-1713)는 헌신적인 경건 주의자였다.
그런데 바흐는 프로네와 자주 대립했던 성 마리아 교회(St. Mary’s Church)의 정통파 목사인 아일마르(Georg Christian Eilmar, 1665-1715) 와 공교롭게도 친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흐의 칸타타 BWV 131이 아일마르에 의해 위촉되어 성 블라시우스 교회가 아니라 성 마리 아 교회에서 연주되었고, 그 정통파 목사가 바흐의 첫째 아이인 카타리 나(Catharina Dorothea Bach, 1708-1774)의 대부였기 때문이다.23
이러한 상 황에서 “바흐는 불가피하게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논쟁에 빠지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 신념과 가문의 전통에 충실하여 자신의 교회의 목사에 대항하면서까지 정통파 편을 들었다.”24
결과적으 로 예술로서의 교회음악이 그러한 환경에서는 번성할 수 없다고 확신한 바흐는 약 1년 만에 뮐하우젠을 떠나게 된다.25
22 Leo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7/2 (1946): 156.
23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13-14.
24 Bukofzer, Music in the Baroque Era, 272.
25 Halter and Schalk, A Handbook of Church Music, 71.
1708년 6월 25일 바흐가 뮐하우젠 시의회에 제출한 사직서26에는 교 회음악을 향한 그의 소명감과 열정이 생계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과 함께 잘 나타나 있다.
그 글에서 바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규정된 교회음 악(a regulated church music in honor of God)’이 음악의 최종적인 목적이 고, 그 목적을 향해 예배에서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의 의도였다고 밝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기회를 통해 ‘교회음악을 잘 체 계화하는’ 그의 목적을 위해 끈기 있게 일할 것이라고 다짐한다.27
이처럼 바흐는 그가 평생 추구해야 할 소명은 ‘교회음악을 체계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잘 규정하는 것’이라고 특징짓는다.28
그러므로 바흐 가 뮐하우젠을 그렇게 빨리 떠나게 된 이유는 경건주의자인 목사와의 갈 등이나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에서의 어떤 신앙적 문제 때문이 아니 라29 뮐하우젠의 여건이 바흐 자신의 교회음악적 소명을 이루어가기에 너 무나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26 사직서의 영어 번역본들은, Karl Geiringer, Johann Sebastian Bach: The Culmination of an Er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28과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53에 실려 있다.
27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53.
28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53.
29 문성모는 바흐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종교적 문제로 사임을 해야 했다”고 말한다. 문성모,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를 묻고 답하다, 99.
1708년 7월 바흐는 바이마르(Weimar)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바이마르 궁정은 정통주의를 따르고 있었고, 바흐는 거기에서 사 실상 이전과 같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직접적인 갈등과 대립을 겪지 는 않았다.
그러나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특성들이 바흐의 작품 안에서 일면 융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 히 1714년 바흐가 궁정악단의 악장이 되면서 매달 칸타타를 써야 했는데, 그러한 칸타타 양식 안에서 그러한 융화의 과정이 나타난다.
칸타타는 기본적으로 정통주의가 지키는 교회력에 따라 작곡되었는데, 그 가사의 내용과 표현에 있어서는 경건주의적인 특성을 내포했다.
바흐는 칸타타 작업에서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 1671-1756) 와 프랑크(Salomo Franck, 1659-1725)의 텍스트(text)를 사용했다.30
홀본에 따르면, “바흐는 노이마이스터의 칸타타 개혁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형식 들을 확장하고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새롭게 도입된 것들을 사용하고 프랑 크의 시(詩) 중 많은 것을 사용했다.”31
노이마이스터는 정통파 목사로서 경건주의 반대자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종교적 주제에 응답하여 강렬 하고 개인적인 감정 상태(tone)를 경건하고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예 시해주며, 그는 그것을 ‘개인적인 경건의 표현’으로 간주했다.32
그리고 프 랑크 또한 노이마이스터와 동일한 경건한 감정 상태를 전하는 시를 썼 다.33
심지어 프랑크의 칸타타 텍스트는 신비적이며 열렬하고 때때로 열 정적이며 심지어 황홀한 언어로 되어 있다.34
30 바흐가 바이마르에서 작곡한 20여 곡의 칸타타 중 2곡은 노이마이스터, 13곡은 프랑 크의 텍스트를 사용했다. Don O.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For the Glory of God and My Neighbor’s Instruction’: Bach in Weimar”, Pietisten 9/3 (1994), 2024년 2월 27일 접속, http://www.pietisten.org/ix/3/bach_and_pietism.html을 참고하라.
31 Holborn, “Bach and Pietism”, 88
32 Holborn, “Bach and Pietism”, 87;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9.
33 Holborn, “Bach and Pietism”, 88.
34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For the Glory of God and My Neighbor’s Instruction’: Bach in Weimar”.
이처럼 노이마이스터와 프 랑크의 칸타타 텍스트는 개인적인 종교적 감정을 경건하게 표현한 것으로 일종의 경건주의적 유사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바흐는 이러한 텍스트가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경건한 음악으로 표현해냈다.
이처럼 바흐의 생애에 서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대립과 논쟁은 바이마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에 투영되어 일종의 역설적인 공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쩌면 뮐하우젠 사직서에 명시된 그의 교회음악적 소명을 그가 추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쾨텐 (Köthen) 시대(1717-1723)를 거쳐 마지막 라이프치히(Leipzig) 시대(1723-1750) 까지 계속 이어지며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독일 경건주의와 바흐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 시대적으로, 그리고 교회음악가로서 일하는 현장에서 정통주의와 경건주 의의 격렬한 대립과 논쟁을 경험하면서 바흐는 경건주의에 대해 실제적 으로 어떤 입장이었을까?
경건주의를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교회음악적 전통을 중시했던 정통주의를 견지하면서 경건주의를 반대하고 거부했을 까?
경건주의가 바흐의 교회음악에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 이 논제는 사실상 핵심적인 사안인데,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와 논의 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저명한 교회음악 학자이자 신학자인 에릭 라우틀리(Erik Routley, 1917-1982)는 바흐의 종교적 배경이 경건주의라고 주장한다.35
리 버에 따르면, 라우틀리는 바흐의 경건주의에 대한 증거로 특별히 그의 칸타타와 수난곡의 대본을 살펴보았으며, 결론적으로 바흐를 전례 예배 의 외적인 형식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내적인 신앙에 훨씬 더 관심을 가 지면서 그것을 그의 음악 속에 원숙한 기술과 예술성으로 표현한 경건주 의자로 보았다.36
또한 역사신학자인 펠리칸은 경건주의의 영성에 주목하면서, 개인의 영혼과 예수님 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종교개혁 전후의 정통주의 해석에서 우세했던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Christ for us)’라는 개념에서 ‘우리 안의 그리스도(Christ in us)’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는 것으로 그 강조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37
35 Erik Routley, Church Music and the Christian Faith (Carol Stream, IL: Agape, 1978), 55.
36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6.
37 Jaroslav Pelikan, Bach Among the Theologia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65.
펠리칸은 이러한 ‘주관성으로의 전환’과 같은 경건 주의 영성이 바흐의 칸타타와 수난곡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시대나 우리 시대에 정통주의 루터교 신조주의자들(confessionalists) 이 바흐를 자신들의 신학파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시도는 칸타타 와 수난곡의 텍스트에 부딪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결코 전부는 아니 더라도) 그것 중 많은 것에 경건주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레시터티브와 아리아는 ... 모든 변화를 소리 내서 알리고 18세기 경건 주의의 모든 주제, 즉 모든 강렬한 주관성, 도덕적 진지함, 경건주의적 설교와 헌신과 시의 로코코적 은유 등을 울려 퍼뜨린다.38
요컨대, 라우틀리와 펠리칸 모두 경건주의가 본질적으로 새롭게 된 영성의 운동이며 경건주의적 헌신의 본질적인 특성이 바흐의 칸타타와 수난곡에서 발견된다는 기본 전제에 동의한다.39
그러나, 음악 작품에 작 곡가의 사상과 감정이 일부 반영된다고 하더라도 바흐의 칸타타와 수난 곡에서 경건주의적인 특성이 나타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경건주의자로 간주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와 경건주 의의 대립 속에서 바흐가 신학적으로 경건주의를 수용하고 따랐다는 객 관적인 자료나 문헌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듯이, 바흐가 어린 시절 정통주의적 교육을 받고 후에 루터교 정통주의의 대표 적인 문헌인 칼로프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것을 보면, 그의 신앙의 중심 은 정통주의에 서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고 자연스러울 것 같다.
반면에, 리버는 “바흐가 경건주의자였는가?”라는 질문에 힘주어 “부 정적”(negative)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생애 동안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 이의 긴장의 증거가 있는 곳에서 바흐는 항상 정통주의 편에 있었다”고 주장한다.40
그리고 “바흐는 경건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복했을까?” 그리고 “경건주의자들은 바흐를 그들의 지지자 중 하나로 인정하고 싶었을까?” 라는 연관된 질문들에 대해서도 모두 “부정적”이라고 말한다.41
38 Pelikan, Bach Among the Theologians, 57.
39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8.
40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13.
41 Leaver, “Bach and Pietism: Similarities Today”, 15.
사실 그러한 질문들은 일면 바흐의 교회음악적 소명과 관련된 것들로 경건주의 자들 속에서 바흐가 자신의 교회음악적 목표를 추구하기는 극히 어려웠 을 것이고 경건주의자들 역시 바흐가 추구하는 음악을 실제적으로 용인 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그 대답이 모두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본다.
홀본은 그와 같이 바흐가 정통주의를 유지했다는 리버의 견해에 적 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바흐가 당시의 경건주의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루터교 유산을 고수했다는 증거가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42고 말하면서, 심지어 이렇게 주장한다.
바흐는 경건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드린 종교 개혁 의 전례(典禮)적 전통을 가진 제도적 교회에 너무 관련되어 있었다. 그 의 음악은 교리의 교훈적인 공표에 공헌했다. 그는 분리주의자 경향이 나 행동에 호의를 보일 수 없었다. 바흐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향한 강한 사랑을 가졌다. 그가 채택하고 발전시킨 예술적 양식 (style)은 경건주의자에게 증오스러운 것이었다.43
그렇다면, 바흐의 음악에 나타나는 경건하고 주관적인 표현은 어떻 게 이해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홀본은 이렇게 말한다.
“민감하고 경 건한, 심지어 숭고하고 영묘한 작곡을 통해,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개 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전유(專有)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음 악적 표현을 제공함으로써 바흐는 주관적인 종교적 표현의 이유를 공급 한다.”44
42 Holborn, “Bach and Pietism”, 110.
43 Holborn, “Bach and Pietism”, 116-117.
44 Holborn, “Bach and Pietism”, 117.
즉, 그것은 경건주의의 영향이라기보다 작곡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경건하게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말이 다.
할터와 샬크(Carl Halter and Carl Schalk)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건주의와 합리주의는 둘 다 신앙고백적 정통주의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재능과 기술이 허락하는 최고의 장인적 솜씨로 하나님을 찬 양하려고 노력했던 바흐의 경건함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45 이는 바 흐의 경건성을 경건주의와 분명하게 구별 짓는 말이다. 홀본 역시 바흐의 경건성을 경건주의와 구별하여 “devotionalism”이라 고 칭하면서 그것이 종종 경건주의로 오해된다고 지적한다. 그는 16, 17 세기 정통주의 루터교 시인들을 바흐의 ‘devotionalism’의 뿌리라고 언급 하면서, 고대, 중세 신비주의에서 일어난 이 정신이 바흐의 종교적 본성 으로 들어가서 그의 작품에서 정통주의 시인들의 말로 표현되었다고 주 장한다.46
홀본은 이처럼 바흐의 경건성을 오히려 16, 17세기 정통주의 시인들과 연결시키면서 경건주의와의 관련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상, 정신, 영성, 예술과 같은 것들에 대해 논하면서 어떻게 특정한 한 사조(思潮)의 영향만을 배제할 수 있을까?
더구나 당시 경건주의는 격렬 한 논쟁의 대상이었고, 기독교 신앙과 사상, 예배와 교회음악에 이미 상 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과연 바흐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을까?
비록 그가 정통주의에 충실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는 경 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그러한 견지에서 몇몇 주요 학자들은 앞에 제시된 두 개의 상반된 견해들과 다른 제3의 견해를 제시한다.
이것은 바흐의 음악에서 정통주 의와 경건주의의 어떤 연결성 내지는 공존을 발견하고 주장하는 견해이 다.
독일의 음악학자 하인리히 베셀러(Heinrich Besseler, 1900-1969)는 “바 흐가 전 생애에 걸쳐 정통교회파로서 경건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기존의 주장이 오해의 여지가 많기 때문” 이라고 지적하면서, “루터파 정통교회주의와 경건주의 두 진영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서로 연 결되어 있었다.”라고 주장한다.47
45 Halter and Schalk, A Handbook of Church Music, 71.
46 Holborn, “Bach and Pietism”, 166.
47 Heinrich Besseler, “Bach als Wegbereiter,” 이성률 역, “선구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바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들, 강해근, 나주리 편 (파주: 음악세계, 2007), 58, 59.
그리고 정통주의에서도 “공동체의 신앙고백뿐만 아니라 개인적 영혼의 교화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48라고 말 한다.
정통주의에서도 경건주의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 영 혼의 교화’, 즉 개인적 영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음악학자 레오 슈라데(Leo Schrade, 1903-1964)는 바 흐와 그의 교회음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많은 요소들이 정통파 형 식주의 편인 반면, 예배와 음악에서 신성한 말씀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그 자신의 성향과 그의 특별한 태도는 그를 경건주의 쪽으로 몰아갔다.”49
그리하여
“바흐에게 이제 경건주의는 모든 외적인 함의와는 완전히 별개로 그 자신의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감정을 수반하는 하나의 사상이 되었다.”50
고 슈라데는 말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한 다.
“바흐는 경건주의가 그의 외적인 생활에서 많이 느껴지도록 허용하 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예술에 대한 그의 종교적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인정했다.”51
48 Besseler, “선구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59.
49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6-167.
50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7.
51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7. 여기에서 슈라 데는 ‘바흐가 경건주의의 영향을 인정했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요컨대, 슈라데는 바흐가 정통주의에서 멀어 졌다거나 경건주의자가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 흐 스스로 경건주의의 영향을 ‘인정했다’고 말함으로써 경건주의가 바흐 의 예술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명히 확인해 준다.
‘바흐와 경건주의’ 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프랭클린은 “바흐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전 연구가 결론을 내린 것처럼 그가 경건주의를 즉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번성한 곳에서 그 입장을 받아들이고 종종 찾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를 밝혀냈다.
그 증거는 매우 다양한 출처 에서 밝혀졌다.”고 말하면서, 연구 과정에서 드러난 바흐의 이미지는 “한 편으로는 정통주의 교리와 전례적인 관행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 건주의의 보다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목표를 잘 받아들이는 작곡가이자 교회음악가”52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프랭클린은 바흐를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현실적으로 모두 수용한 교회음악가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3의 견해에 대한 근거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 이 바로 바흐의 서재에 있었던 문헌자료이다.
앞에서는 ‘바흐 당시의 신 학적 논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바흐의 서재를 언급했지만, 그것은 또한 바흐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양측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있 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캘빈 스태퍼트(Calvin R. Stapert)는 바흐의 서재 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의 서재는 신학에 대해 깊고 지속적인 관 심을 가진 한 사람을 드러내고, 그 서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책들은 그것을 주의 깊게, 지성적으로, 헌신적으로 읽은 한 사람을 드러낸다.”53
바흐의 서재에는 경건주의의 대표적 저서들인 아른트의 진정한 기 독교와 슈페너의 경건한 소원이 있었다.
그리고 경건주의에 대한 그 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를 경건주의에 영향을 준 중세의 신비주의로 이 끌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자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1300-1361)의 설교도 바흐의 서재에 포함된 것이다.54
그러나, 경 건주의 서적들이 바흐의 서재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바흐가 경건 주의에 치우쳤고 루터교 정통주의에 충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는 19세기 말까지 루터교 지역의 거 의 모든 가정에서 발견될 정도로 일반적인 서적이었고,55 아른트와 슈페 너도 바흐와 마찬가지로 루터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루터교에서 저명한 인물들로 평생 지도력과 권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56
52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For the Glory of God and My Neighbor’s Instruction’: Bach in Weimar”.
53 Calvin R. Stapert, My Only Comfort: Death, Deliverance, and Discipleship in the Music of Bach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0), 11.
54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7;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프랭클린은 “타울러의 저작물은 루터에 의해 중시되었지만, 17세기 초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접촉’에 대한 언급 때문에 대부분의 정통파 루터교도들에 의해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지적한다.
55 Chuck King, “Bach and Pietism”, The Peitist Schoolman, 2024년 3월 14일 접속, https://pietistschoolman.com/2014/08/20/bach-and-pietism-chuck-king/.
56 Franklin, “J. S. Bach and Pietism”.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서재에 경건주의와 관련된 여러 문헌이 있었다는 사실은 적어도그가 경건주의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러한 관심과 탐구는 결국 바흐의 교회음악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Ⅳ.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바흐는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가 대립하고 갈등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부딪쳤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한 사상적 대립 은 신학적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예배와 교회음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 쳐서 양측의 예배와 교회음악 현실은 매우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교회음악가 바흐는 그러한 신학적, 교회음악적 상황 속에서 성장했고, 인 생 초기에 특히 오어드루프와 뮐하우젠에서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대립 과 갈등을 깊이 경험했다.
바흐의 교회음악 사상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는데, 거기에는 경건주의와 관련된 그의 생각과 경험도 반영되 었을 것이다. 바흐와 독일 경건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견해가 있 는데,
첫째는 그의 교회음악 작품에서 드러나는 경건주의적 영성을 근거 로 바흐를 경건주의자로 보는 입장이고,
둘째는 그와 반대로 바흐는 항 상 정통주의를 견지했으며, 바흐의 음악에 나타나는 경건함은 경건주의 의 영향이 아니라 음악적인 표현으로 인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의 견해는 바흐가 외형적으로는 정통주의를 따랐으나, 그의 교회음악 사상과 작품은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서 필자는 당시 시대적 상황, 바흐의 생애와 사역, 그의 교회음악 사상과 작품들, 그리고 그의 서재로 대표되는 문헌적 근거 등을 종합적으로 고 려했을 때 제3의 견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경건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바흐의 교회음악 작품에 영향 을 미쳤을까?
그 주된 연결 고리는 바흐의 교회음악 작품에 사용된 텍스 트라고 할 수 있다.
바흐가 교회음악 텍스트에 접근하고 그것을 표현하 는 방식에서 경건주의적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흐가 정통주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주장한 홀본은 바흐의 경건성(devotionalism)은 성경 주석 가로서의 그의 기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바흐에게는 개인적 인 종교 생활에 적용되는 텍스트의 깊은 의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측면 이 있다고 말한다.57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흐의 성 향과 작업 방식은 그가 단어를 해석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루터교 정통 주의와 관련된 것보다 경건주의 주석 범주와 더 가깝게 닮았다. ... 우리 가 바흐의 음악과 주석에서 아주 풍부하고 일관되게 발견하는 모든 속성 은 정통주의 루터교보다 경건주의의 표현과 관심을 더 많이 암시한다.”58
이는 경건주의와의 유사성에 관한 언급으로 이해되지만, 일면 경건주의 적 접근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경건주의가 바흐 의 교회음악 사상과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슈라데 역시 텍스트에 대한 바흐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변형될 종교적 텍스트에 대한 바흐의 태도를 고무시키는 것은 경건주의다. 단어 의 숨겨진 의미에 접근하려는 그의 확고한 결의, 단어에 내재된 종교적 가치에 대한 그의 경건한 묵상, 예술적 형식이 그 종교적 의미를 손상시 키지 말아야 하는 단어에 대해 충분히 보여주려는 그의 열망 등을 설명 해 주는 것도 경건주의다.”59
57 Holborn, “Bach and Pietism”, 160.
58 Holborn, “Bach and Pietism”, 161.
59 Schrade, “Bach: The Conflict between the Sacred and the Secular,” 168.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의 격렬한 갈등과 논쟁 속에서 바흐는 정통주의 적 루터교 신앙을 지키면서도 경건주의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그는 정통 주의 신앙과 사상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에도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과 자 료들을 탐구했다.
그러한 탐구의 결과는 그의 칸타타와 수난곡 등 교회 음악 작품에 반영되어 경건주의적 영향을 나타낸다.
요컨대, 바흐는 당시 대립과 갈등, 논쟁을 빚었던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그의 사상과 삶, 그 리고 교회음악 작품 속에 자신의 방식으로 융화시켰다.
문성모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하는 이 두 가지의 종교적 사상 사이에서 피해를 보기도 했지만, 그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정통주의와 경건주의를 하나로 통합한 신앙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우리는 바 하를 통하여 두 종류의 신앙관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를 보완하면 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다.”
고 하였다.60
60 문성모,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를 묻고 답하다, 99.
이처럼 바 흐는 루터교 내의 사상적 격랑 속에서도 신앙적으로 흔들리거나 방황하 지 않고, 정통주의 신앙에 기초하여 경건주의적 요소를 수용하고 자신의 신앙과 음악 작품 속에 잘 융화시킴으로써 후대 음악가들, 특히 교회음 악가들에게 진정한 음악가의 한 표상이 되었다.
바흐의 시대와는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한국음악계와 교회음악 현장 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다종교 한국 사회에서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 갈등이 음악계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예배 전쟁(worship wars)’이라고 일컬어지는 예배와 교회음악의 본질과 양식에 대한 세계적 인 논쟁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며, 기독교 내에, 작게는 개 교회 안에도 교회음악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그로 인한 여러 가지 갈등 들이 있고,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전통적인 교회음악과 현대적이며 대중적인 교회음악에 대한 선호도로 대표되는 사상적, 교회음악적 갈등 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다양하고 복잡한 갈등 속에서 교회음악가는 과 연 어떠한 삶의 모습으로 교회음악 활동을 할 것인가?
바흐의 생애와 그 의 교회음악은 그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고 본다.
즉, 이 시대의 교회음악가도 바흐처럼 성경적 기독교 신앙에 굳건히 서서 교회음악 현 장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갈등들을 자신의 삶과 음악 속에 잘 융화시 켜 나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교회음악적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해 나 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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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the Influence of German Pietism on Church Music by J. S. Bach Ha, Jae-Song( Associate Professor of Church Music, Chongshin University )
German pietism, which developed from the late 17th century to the early 18th century, had significant influence on Christian thoughts and lives, as well as church music, especially German hymns. Several church music scholars have been intereste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Pietism and Bach’s church music, which has hardly been studied in the field of church music in Korea, as the period of German pietism overlaps with Bach’s life. It was a time of conflict between Lutheran orthodoxy and pietism, and their theological dispute resulted in practical differences in worship and church music. Bach first encountered pietism in Ohrdruf and consequently fell in a dilemma between orthodoxy and pietism in Mühlhausen. Concluding that it was difficult for him to develop church music as an art in Mühlhausen, he left there after about a year. His resignation letter submitted to the city council clearly shows his sense of calling and passion for church music. Bach maintained his orthodox Lutheran faith during the conflict between orthodoxy and pietism, but he accepted pietistic elements and integrated them into his religious life and musical works. Although there exists a large temporal gap, the life and music of Bach will serve as a model example for today’s church musicians, who also are amidst various practical conflicts in their lives.
Key-Words: German Pietism, Lutheran Orthodoxy, J. S. Bach, Church Music, Church Musician
논문 접수일: 2024. 08. 17. 수정 접수일: 2024. 09. 30. 게재 확정일: 2024. 10. 19.
성경과 신학 1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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