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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목회신학적 연구-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중심으로-/김동영.한신大

Ⅰ. 들어가며

 

이 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 담긴 목회신학적 의미를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중심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신앙의 예시이고 모델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규 범과 능력이 된다.

놀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적 경험을 추구하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본질적이고 궁 극적인 형태이다.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관계적 놀이는 ‘나 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를 이어주고, 아울러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이어준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관계 적 놀이는 일종의 목회돌봄의 양태이다.

관계적 놀이의 회복(the restoration of relational play)과 효과적인 목회돌봄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 담긴 의미를 다음의 주제들과 함께 이해해 보고자 한다:

  십자가 안에 서 사랑의 관계 형성과 창조적 자기 변화를 위해 놀이하기,

  십자가 안에 서 자유와 생명력 있는 놀이하기,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 형성을 위해 놀이하기.

 

본 연구와 연관된 선행 연구들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선행된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이후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웨슬리의 영성의 실천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1)

이규성은 이냐시오의 영 성 수련과 칼 라너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십자가의 영성의 삶과 현시대 의 십자가 신학에 대하여 제언한다.2)

이오갑은 루터의 신학과 영성의 삶 을 구원론과 칭의 그리고 십자가 신학과 같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이해한 다.3)

김영동은 십자가 신학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 가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가 문화적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다종교의 상황 속에서 ‘세계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해줌을 강조한다.4)

한편 놀이함이나 놀이의 신학에 기초한 선행된 연구들은 다음과 같다: 손호현은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에 담긴 주제들(예: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 의 성육신, 종말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면서 현대 사회 속에서 미학 적인 놀이의 환경이 회복되어야 함을 주장한다.5)

정연득은 경제적 가치 관과 업무의 성과를 내기 위하여 압박감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주목하는 가운데, 놀이의 신학을 ‘놀이의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한다.6)

그리고 김기철은 그리스도인들이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 상을 구현하고 하나님의 놀이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 다.7)

 

   1)  이후정, “루터와 웨슬리에게 있어서의 십자가와 고난,” 「신학과세계」 92 (2017/12), 63-98.

   2)  이규성, “십자가 영성과 신학: 이냐시오 영성과 칼 라너의 신학을 중심으로,” 「가톨릭신학과사상」 73 (2014/6), 286-337.

   3)  이오갑, “루터 신학과 영성의 개요,” 「신학사상」 178 (2017/가을), 81-115.

  4)  김영동, “오늘의 선교와 십자가 신학,” 「장신논단」 19 (2003/6), 323-349.

  5)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신학사상」 137 (2007/여름), 129-159.

  6)  정연득, “하나님 앞에서 머뭇거리며 놀기: 놀이의 목회신학,” 「신학사상」 168  (2015/봄), 177-213.

  7)  김기철, “놀이로 구현되는 하나님 형상,” 「신학사상」 160 (2013/봄), 75-107.

 

이 글은 선행된 연구들의 주요 주제들과 학문적인 공헌들을 존중하 고 심화시키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관계적 놀이의 회복 의 개념을 활용하여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목회신학 은 신학의 학문성과 삶의 현장의 실천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역할을 한 다.

즉 목회신학은 신학적인 반추와 성찰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 서 실천적인 행동과 돌봄을 지향하는 측면을 주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주요한 물음들은 다음과 같다:

“관계적 놀 이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목회신학적 의미는 무엇 인가?”

아울러

“어떻게 하면 그 의미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현재화 시킬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구 원의 주님’이 되신다는 고백이다(고전 2: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와 함께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삶 속에서 놀이하며 함께 살아간다.

루 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놀이 는 성취와 업적지향의 현대 문화와 윤리적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종 교적 도덕주의를 극복하게 하고, 창조와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함에 근거 한 미학적 가치를 회복하게 한다.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은 단지 이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게 하는 실천적인 삶의 신학이 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은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통한 효과적인 목회돌 봄을 구축하고 전개해 나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관계적 놀이의 회복에 기초한 목회돌봄을 지향 하고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목회신학적 렌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구체적인 역사의 삶의 현장(Sitz im Leben)에서 ‘현재화’되어 십자 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필자는 현대 문화의 업적 지향적 유용성과 종 교적 도덕주의에 갇혀서 억눌려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통하여 극복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스의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놀이를 통하여 관계 적 자기를 회복하고, 관계적 공동체를 구축해가는 것에 대하여 함께 고 찰해 보기로 하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적 놀이의 회복의 개념은 기독교 영성과 목회신학 사이에 학제 간의 상호 보완적인 대화를 추구하게 하는 가운 데, ‘하나님, 자기, 그리고 공동체’의 역동적인 상관성을 이해하는 데 도 움을 준다.

본 논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관계적 놀이를 통하 여 십자가의 영성의 삶을 살게 하고, 목회돌봄의 패러다임을 심화시키 며, 현시대의 교회와 사회의 업적과 성장 중심의 유용성의 문화를 새롭 게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Ⅱ.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

 

1. 십자가와 십자가형에 대한 기본적 이해

 

어원학적으로 고찰해 보면, 십자가(cross)는 두 나무의 상부 부분을 서로 교차하도록 엮어서 지면에 세우는 기둥을 의미한다.8)

 

   8)  David B. Guralnik, (ed.),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Cleveland: Prentice Hall Press, 1986), 338.

  고대 세계에 서 행해졌던 십자가형(crucifixion)은 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으로서 페르시아인, 앗시리아인, 타우리아인, 스키타이인, 인도인, 켈트족, 게르만족, 그리고 카르타고인 등이 사용하곤 했다.

특히, 로마인 들은 반란을 일으킨 죄인들, 노예들, 강력 범죄자들에 대한 처형 수단으 로서 십자가형을 집행했다.

고대 세계에서 맹수형, 참수형, 그리고 화형 등이 무거운 형벌로서 집행되기도 했지만, 십자가형이 극도로 고통스럽 고 공포스러운 형벌이었다.

그 당시 십자가의 형태와 그 처형의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다양했고 차이가 있었지만, 십자가형 자체는 잔혹했다.

죄 인을 살아있는 채로 십자가에서 처형하기도 했고, 혹은 죽은 시신을 십 자가에 매달아 전시하여 모욕하기도 했다.9)

십자가 위에서 “천천히 죽어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었다.

“어느 누가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리고, 어깨와 가슴 위에 넌 더리나게 부르튼 자국으로 몰골이 상하며, 길고도 일그러진 몸부림 속에 서 생명의 숨을 몰아쉬기를 원하겠는가?”10)

고대 로마 시대에서 행해졌던 십자가형은 최고의 형벌로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추구하는 정치적 통제의 수단이었고 권력 유지의 도구였다.

로마 제국은 반역을 도모하고 로마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에게 십자가형을 집행하였다.

즉 십자가형이라는 “고문과 폭력으로 통제”하는 방편을 사용하여 극도의 절망과 공포감을 심어주어 로마 제국 에 대항하는 반란을 차단하거나 진압했던 것이다.11)

십자가형을 받은 자 에게는 심한 채찍질을 가해서 신체적인 고통을 주었다.

또한 사형수로 하여금 자신의 십자가를 형장에까지 짊어지고 가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 를 드러내게 하여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극도의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끼 게 했다.12)

 

    9)  마르틴 헹엘/이영욱 옮김, 『십자가 처형』(서울: 감은사, 2019), 53-57, 76. 고대 세계의 여러 지역의 민족들은 십자가형을 범죄자들이나 전쟁 포로들에게 내리는 형벌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 다. 하지만, 고대 문학의 저술가 포세이도니우스에 의하면 켈트족은 죄인들을 “십자가에 달아 신 들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종의 종교 의례적인 십자가형을 집행하곤 했다. Ibid., 55. 한편, 로마 제 국은 십자가형을 단순한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통제와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 하곤 했다.

  10)  Ibid., 70.

  11)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십자가 신학과 영성』(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20-21.

 

“십자가형은 형집행자에게 원하는 만큼 때리고 괴롭힐 수 있 는 권한이 주어졌던 형벌”13)이었기에, 이러한 고문과 폭력은 십자가형의 잔혹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형집행자는 형장에서 죄인의 손과 발을 십자 가에 못 박는 방식을 사용하여 오랜 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리며 죽게 했 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대 문학에서 저술가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과정을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 ‘노예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고문’, ‘천벌’14), 혹은 가장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으로 묘사했 다.

 

   12)  마르틴 헹엘/이영욱 옮김, 『십자가 처형』, 58-59.

   13)  Ibid., 59.

   14)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20-21.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의미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에 못 박 혀 죽으신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 되신다는 고백이다.

그리스도교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크리스투스’(Christus, 예수)는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재임 기간 중 유대 팔레스틴 지역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 스(Pontius Pilatus)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게 되었다.

그 당시 십자 가형을 받으신 예수님은 로마의 군인들로부터 조롱과 채찍질을 받으시 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셨다(마 27:27-32).

그 후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은 처참한 고통의 모습 을 보이며 죽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 이까?”(막 15:34),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 라”(마 27:50)

 

예수님은 마치 어린 양처럼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시며 십 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의 역사를 이루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서는 그 시대의 십자가형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철학 적이고 종교적인 관점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 이 ‘로마의 평화’라는 기치 아래 세계를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시대였기 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제국에 반 대하는 자세”15)이었으며, 로마 제국이 우선시하는 정치와 사회적인 전통 그리고 종교적인 가치들에 대한 도전이었다.

고대 세계의 문학가인 타키 투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된 ‘악한’(malum) 종교는 여러 지역에 빠르게 퍼지는 가운데, 로마에까지 이르러 다른 종교들과 견주며 대중화 되고 있었다.16)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 혹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든지 혹 은 로마인들과 많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그 표현 자체로 불편한 것이었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17)

 

     15)  Ibid., 21.

     16)  마르틴 헹엘/이영욱 옮김, 『십자가 처형』, 14.

     17)  Ibid., 29.

     18)  Ibid., 15.

 

로마 제국의 십자가형으로 인하여 다른 범 죄자들과 같이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세상의 구원자가 된다는 소식은 모순되고 도전적인 주장이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들을 보면, 신들이 인간들과는 다르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들과는 구별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 님의 아들로서 신’ 혹은 ‘메시아’라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주장은 참된 종교를 파괴하는 ‘악한 종교임’을 반증하는 것이었 고, ‘병약한 망상들’ 혹은 ‘몰상식하고 열광적인 미신’18)에 불과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 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기곤 했다.

왜냐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신 21:23)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를 예배의 대상으로, 그리고 불경스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를 그리스 도의 복음의 상징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지극히 모순된 것이었다.

한편, 그 당시 철학적인 사고와 가치의 기준에 따라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하는 현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Socrates)는 그리스 철학자로서 독이 든 잔을 마시며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또한 스토아학파(Stoicism)의 현자들은 죽음을 통하여 영혼이 갇혀 있는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자유롭게 된 감정과 태도를 가리키는 ‘아파테이 아’(apatheia)를 강조하는 가운데, 죽음의 두려움과 격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일종의 ‘지혜자의 모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19)

하지만 사도 바울 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금 부활하셔서 “높이 올림을 받으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20)를 찾고자 했다.

 

   19)  Ibid., 177.

   20)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16.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실제적인 고통과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어리석은 사람들로 여겨지고 거리낌을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고전 4:10)을 감내하곤 했다.

그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문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비 판적 편견들과 로마 제국의 박해와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목회 서신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 되심을 강조했다.

또한 바울은 예 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고 선포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을 통 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고후 5:18-19).

바울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근거한 ‘십자가 신학’(theology of the cross)으로서 인간의 공로나 업적 그 리고 율법의 행위로 인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롭게 됨(롬 3:24; 엡 2:8)을 강조한다.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화해의 능력을 강조하 는 가운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신이 겪은 신앙 체험 전체를 ‘함께 십 자가에 못 박힘’(갈 2:20, 롬 6:6)

또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롬 6:5)”22)이 라는 십자가의 삶과 영성의 길을 제시하였다.

바울은 그 자신의 약함을 고백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 의 능력과 부활의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신앙의 예시이고 모델이며, 그리스도 인의 신앙의 규범과 능력이 된다.”23)

십자가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허상이 아니라 실제 적인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변증하는 것 은 중요하다.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가현설(Docetism)에 근거하여 “십 자가를 받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가상”24)이라고 주장했다.

 

   21)  Anna M. Madsen, The Theology of the Cross in Historical Perspective (Eugene: Pickwick Publications, 2007). 20.     22)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64.

   23)  Hans Küng, On Being a Christian (Garden City: Doubleday & Company, 1976), 410.

   24)  이규성, “십자가 영성과 신학,” 291.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몸소 십자가에 달려 고난과 죽음을 당했다는 것 을 부인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뿐만 아니 라 교회사의 교부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실체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가운데,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는 고백을 지속적으로 변증해왔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달려 죽으신 예 수님이 ‘구원의 주님’이 되신다는 고백이 그리스도교가 고대 철학과 종교 그리고 근대의 인문주의와 현저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3. 루터의 십자가 신학 이해하기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으로서 신학의 기준이 되며 그리스도의 삶 의 표본이 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적 삶과 가르침의 결정적 기준이 다!”(Crux probat omnia!).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말씀”(λόγος τοῦ σταυροῦ)의 능력을 강조하며(고전 1:18)

그 말씀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 히신 그리스도”(고전 2:2)를 증거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루터는 “그리스 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공부이고 진정한 신학이다”(Crux christi unica est eruditio verborum dei, theologia sincerissima)라고 주장한 다.25)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담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근거로 하여 십자가 신학의 본질과 기준을 찾고자 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계시되는 하나님 의 은총과 사랑을 인지하고 체험하게 한다.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 (1518년)을 통하여 중세 스콜라주의가 추구해온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넘어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제안하였다.

영광의 신학자는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론이나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인지하려고 했고, 인간의 공로나 업적 그리고 높이 계신 하나님을 향해 상승하려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 총을 획득해 낼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루터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것이 신학적 본질이 됨을 주장했 다:

 

“진정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앎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 서 발견된다.”26)

 

     25)  Martin Luther, WA 5. 179. 31;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서울: 컨콜디아사, 2015), 310; 이규성, “십자가 영성과 신학,” 294.

   26)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02.

 

루터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 님의 계시를 인지할 수 있음(고전 1:18-2:5)을 주목하는 가운데, 교부들이 전수해준 ‘놀라운 교환’(commercium admirabilis)의 개념을 심화시키며 십 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했다.

하나님으 로부터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서 “죄인의 저주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죄를 수용”하시고 대신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선물로 전해주셨다는 것이다.27)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 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엡 2:8)을 강조했던 것처럼, 루터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 그리고 이 성에 근거한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 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재된 하나님의 은총을 주목하는 가운데, 인간의 죄와 구원의 주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등한시하고, 오히려 인간 의 자유의지와 능력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적(Pelagian) 학문의 경향[예: 중세기의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인문주의]을 극복하고자 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 자 신을 십자가에 숨기신 사건임과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이다.28)

 

   27)  이규성, “십자가 영성과 신학,” 295.

   28)  Martin Luther, WA 1. 613. 23-24;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12-313; Charles B. Cousar, A Theology of the Cross: The Death of Jesus in the Pauline Letter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0), 27.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숨겨 진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은 동일하신 분이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 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십자가 아래 숨겨져 있다(absconditas sub contrario).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는 어리석음처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나타내 보이셨고, 하나님의 숨겨진 능력은 연약함처 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 리석음과 연약함, 불의와 수치, 그리고 십자가형 안에 “하나님의 영광, 지혜, 힘, 그리고 구원이 계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숨겨져 있 다.”29)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 안에 숨겨진 하나님을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sola fide)의 영역이다.

그리스도의 십자 가 사건 안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분별할 수 있을 때, 믿음의 눈은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겸손히 바라볼 수 있다

. 루터는 영적 시련(Anfechtung)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는 가운데, 그리 스도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체험하 고, 영적 순례의 여정에 참여하기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 의 십자가 신학은 단지 이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실천적인 삶의 신학이 다.

루터에게 있어서 영적 시련의 개념은 십자가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 겪게 되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아픔’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인 은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떠나도록 하 는 유혹”인 영적 시련을 겪게 된다.30) 그리스도인은 ‘죄인임과 동시에 의 인’(simul iustus et peccator)으로서 세속적인 유혹과 영적 시련, 그리스도 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의롭게 됨, 그리고 영적 순례의 여정 에서 발생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난과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 고 연합하여 살아가게 하며, ‘억눌림과 죽음의 세계’에서 ‘자유와 부활의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루터가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고난을 삶의 현장에서 신앙적으로 현재화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이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은 일종의 놀이”31)(crucifixion as play)라고 볼 수 있다.

 

   29)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08.

  30)  Martin Luther, WA 5. 470. 10, 33; Anna M. Madsen, The Theology of the Cross in Historical Perspective, 107; 이후정, “루터와 웨슬리에게 있어서의 십자가와 고난,” 70. Anfechtung은 “믿는 자들을 ‘시험’(probatio)하기 위하여 의도된, 그들에게 가해진 ‘공격’(impugnatio)을 통해서 생겨나 는 ‘유혹’(tentatio)의 한 형태이다.”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19.

   31)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Eugene: Cascade Books, 2017), 106.

 

 이러한 맥락에서 놀이에 대한 개념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현재화시킨다는 것 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관계적 놀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 난에 참여하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 다.

 

Ⅲ. 놀이에 대한 이해

 

1. 놀이의 개념과 의미

 

기본적으로 놀이(play)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경험을 추구하 게 하고 향상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놀이를 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함께 살아간다.

그러기에 “놀이는 우리의 삶의 근본적이고 본 질적인 실제(practice)이다.”32)

놀이는 우리 인간 ‘존재의 양식’(a way of being)으로서 삶을 의미 있게 지속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창조적인 놀이 는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촉진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존재의 연속성(going-on-being)을 체험하게 한다.

놀이는 “가장 순수한 인간 활동”으로서 “어린 시절뿐 아 니라 생애 전체에 걸쳐서 행하는 활동이다.”33)

 

   32)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서울: 포이에마, 2013), 70. 33)  Ibid., 91.

 

이러한 맥락에서 놀이학 자인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우리의 삶 속에서 놀이의 중요성 을 강조하며, 인간을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으로 규정하고, 인간 이 놀이하며 ‘본질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34)

하 하면 놀이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고 활력있는 생활을 촉진하는 기능을 하 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놀이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이상을 충족”시켜간다.35)

우리 인간이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은 놀이를 통하여 구축되어 왔다. 인간의 시는 놀이 속에서 지어지고, 노래 와 춤도 놀이의 영양분을 받으며 성장한다.

심오한 종교적인 의례(ritual) 도 거룩한 놀이를 근거로 하여 형성된다.36)

우리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기쁨과 생명력을 체험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구축해가기 위해서는 즐거운 놀이가 필요하 다.

놀이는 우리가 “온전한 인간(a fulfilled human being)이 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놀이를 통하여 “자유와 기쁨 그리고 창조력을 표 현”할 수 있다.37)

고대 세계의 사람들은 놀이의 삶을 존중하는 가운데, 관계적 놀이를 통하여 만남의 즐거움을 체험하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함께 나누었다.

철학자 플라톤(Plato)은 그의 저서 『법률』에서 ‘인간을 놀 아주는 자’로 명명하며, 놀이의 가치와 삶의 중요성에 대하여 역설했다: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놀이하고, 희생을 바치고, 노래하고 춤춰야 한다. 이렇게 하면 인간은 신들을 기쁘게 할 것 이고 …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38)

 

   34)  요한 하위징아/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고양: 연암서가, 2019), 21, 429.

   35)  Ibid., 45.

   36)  Ibid., 111-112; 한경애,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서울: 그린비, 2007), 106; Jürgen Moltmann, Theology and Joy (London: SCM Press Ltd, 1973), 74-75.

   37)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65-66.

   38)  요한 하위징아/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63.  

 

이와 같이 고대 세계의 사람들 이 놀이의 삶의 가치를 느끼고 살았다면, 오늘날 현대 과학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본다.

많은 사 람들은 놀이의 가치와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성취의 업적을 드러내기 위 하여 경쟁의 늪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놀이를 단지 일종의 ‘게으 름의 형태’로 인식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노동에 억눌려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는 놀이를 단지 여가 선 용하는 것이나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하여 잠시 휴식을 얻는 것으로 여기 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고대 세계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놀이에 대한 삶의 지혜를 본받으며, 놀이에 담긴 즐거움과 놀이의 삶의 가치를 회복 해 갈 필요가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놀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형태이다.

우리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 안에서 사랑의 연 대감을 형성하고 관계적 신앙 공동체를 구축해 갈 수 있다.

 

“우리는 놀이 를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진지함의 수준 아래에서 노닐 수 있다. 하지만 놀이를 통하여 아름다움과 신성함의 영역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진지함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39)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시다:

“하나님 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성부·성자·성령의 하나님은 삼위일체(Trinity) 이시며, 관계적 속성을 지니신다.

헬라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는 사랑의 관계로 맺어져 상호 내주하며 서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공간을 의미한다.40)

페리코레시스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속 성을 가리키며, 사랑의 공간에서 원형을 이루시며 마치 놀이하듯이 춤을 추시는 거룩한 모습을 가리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거룩한 춤과 놀이는 사랑의 공간에서 “상호 내주하시는 인격적인 본성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연합하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41)

 

     39)  Ibid., 64.

     40)  위르겐 몰트만/박종화 옮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21; 김동영, “사랑의 관계성 회복과 치유에 대한 통전적 이해,” 「신학과 실천」 56 (2017/9), 382.

    41)  Catherine M. LaCugna, God for Us: The Trinity and Christian Life (New York: HarperOne, 1991), 272.  

 

거룩한 춤 과 놀이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관계적 속성을 드러내 보이시 고, 하나님의 자녀들과는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성에 생기를 주시는 ‘놀이의 영’(spirit of play)이다. 놀이의 영이신 하 나님은 “우리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주는 근원”42)이 되신다.

 

  42)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 128.

 

2.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이해하기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의 저서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에서 미학적 즐거움의 가치와 놀이에 대하여 기술 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놀이란 하나님의 창조 호흡의 생명력과 하 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다.43)

 

    43)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3.

 

하나님의 창 조 섭리와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놀이를 통하여 인격적이고 고귀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창조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

몰트만은 ‘놀이의 신학’을 역설하는 가운데, 업적 지향적인 현대 문화와 윤리적 가치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주의를 극복하고, 창조와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함에 근거한 신학의 미학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한 다.

이러한 맥락에서 놀이는 창조성, 자발성, 생명력, 아름다움, 즐거움 의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의 삶을 변혁시키고 자유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1) 놀이가 지닌 변혁성

 

몰트만은 놀이가 지닌 ‘변혁성’을 고찰하는 가운데, 놀이를 통하여 사회정치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고난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한 다.

몰트만은 고난의 현장 속에서 발생하는 미학적 역설에 주목한다.

히 브리 노예들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4)라는 물음을 던지는 가운데, 억압의 상황 속에서도 찬양을 함께 부 름을 통하여 억눌린 삶을 자유로운 놀이로 전환시키고, 소외와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미래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놀이 는 ‘순전한 미학적 관심’(purely aesthetic interest)으로서 변화에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변혁을 위한 ‘메시아적 희망’(messianic hope)을 품게 하여 고난과 억압의 현장에서 변혁을 일으켜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다.”44)

몰트만에 의하면 청교도들(Puritans)은 경제 활동을 통한 이윤 추구 와 근면한 노동을 ‘신의 소명’이라고 여기는 가운데, 미학적인 자유의 공 간으로서 역할을 하는 놀이와 축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다.

청교도들 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기반한 성취의 윤리(morality of achievement)를 지키는 것이 신앙적으로 구원받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믿기 시작했다.

하 지만 역설적으로 성취의 도덕에 근거한 청교도의 직업윤리는 중세기 교 회의 교리인 ‘인간의 업적과 공로 그리고 행위를 통하여 의롭게 됨’이라 는 교리로 회귀하는 현상을 나타내었다.

현대 사회의 문화와 산업 현장 은 업적과 유용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더 많은 숙련된 노동을 요구하고, 놀이를 경시하는 사고를 형성하게 된다.45)

  

  44)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2), 5.

  45)  Ibid., 10-11.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몰트만은 우리가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바라며, 놀이 를 통하여 유용성과 성취의 도덕이 지배하는 삶의 현장에서 얽매어 살아 가는 ‘노동하는 인간’(homo faber)의 모습이 변혁되기를 촉구한다.

 

2) 놀이가 지닌 창조성

 

몰트만은 놀이가 지닌 ‘창조성’에 대하여 주목하며, 하나님의 창조적 놀이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고찰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놀이하시는 하나님’(Deus ludens)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는 자유로우며 미학적인 예술 활동이며, 일종의 ‘하나님의 놀이’(God’s play)이다.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theatrum gloriae Dei)이 됨을 강조하는 존 칼빈(John Calvin)처럼, 몰트만은 하나님 의 창조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목적에 대하여 물음을 가지는 것보다는 오 히려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지니고 있는 ‘존재 자체의 명백한 가치’(de monstrative value of being), 즉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창조의 아름다움 에 주목한다.46)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영역이고, 하나님의 지혜의 놀이이다.”47)

몰트만은 하나님의 창조의 미학적 이유를 해석하는 가운데, 형이상학적인 필연성의 세계관과 현대 사회의 유용성의 경제관 을 극복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이유는 놀이를 통하여 흡족해 하시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시는 것에 있다. “창조의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 실현, 성공보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즐거움을 닮아감으로써 끝없는 아름다움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48)

 

    46)  Jürgen Moltmann, Theology and Joy, 41, 45;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2.

    47)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17.

    48)  Ibid., 23.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 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창조적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 즉 우리는 ‘놀이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닮아가며 ‘놀이하는 인간’ 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의 존재 가치를 깨달으며 아름다 움과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3) 놀이와 성육신 그리고 자유

 

몰트만은 성육신의 주요 주제인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라 는 물음에 성육신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유에 대해서 역설한다.

성 안셀름(St. Anselm)의 대리적 보상설과 같은 전통적인 신학은 인간의 죄를 대신 보상하고 대속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하나님 을 강조하며, 인간의 죄에 대한 구원의 방법으로써 ‘성육신의 필연성’에 주목해왔다.49)

하지만 몰트만은 인간의 죄의 상황과 필연적인 이유를 넘 어서서 성육신하시는 ‘하나님의 자유’에서 나오는 ‘이유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free and uncaused love)을 강조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 랑 안에서 피조물들의 고난과 아픔에 단순히 응답하시는 것을 넘어서서 피조물들을 위해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가신다.”50)

성육신의 신학은 자유 로운 놀이(free play)를 하는 놀이의 신학이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함 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영광송(doxology)의 신학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사건과 죽음 의 무덤에서 다시 사신 부활의 사건은 함께 ‘비극과 희극이 담긴 놀이’ (serious-merry play)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주 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이다.51)

 

     49)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4-145.

     50)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26.

     51)  Ibid., 30.

 

몰트만에게 있어서 부활절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the Crucified Christ)의 다시 사심을 기억하는 시간이고, 동시에 축제(celebration)의 시간이다.

부활절은 자유함을 받은 사람들이 노예 상태의 속박과 죽음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일종의 저항하 는 시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가 담긴 ‘비극과 희극의 놀이’인 구원의 드라마를 몸소 체험하시고 이루시는 가운데, 부활의 이른 아침에 자신이 지셨던 십자가를 돌아보시며, 동시에 미래의 종말의 영광을 예견하신다.52)

 

    52)  Ibid., 30-33. 

 

4) 놀이와 종말론

 

그리고 아름다움 몰트만은 종말론(eschatology)에 대하여 목적을 실현시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지양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종말의 상황이 하나님과 의 사랑과 즐거운 교제로 “목적을 뛰어넘는 미학적 놀이로”53) 묘사되어 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종말은 구원받은 자들이 삼위일체 하나 님과 영원한 기쁨의 춤을 추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을 가 리킨다.54)

몰트만은 시간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간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시간관을 넘어서서 오히려 미래가 역방향인 현재로 다가온다 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희망의 시간관을 강조한다.

미래는 시간의 근 원지이기에, “미래의 종말론적 환희가 현재의 수난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다.”55)

몰트만은 “하나님은 아름다운신가?”라는 물음에 하나님의 신성을 나 타내는 미학적 개념은 영광이고,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우시다”라고 주장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처럼, 몰트만은 성서 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beauty of God)을 묘사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 광(glory of God)을 증언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몰트만은 “예수님의 수치 스러운 십자가형이 그분의 영광이 된다”56)고 주장한다.

 

     53)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9.

     54)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34-35. 55)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9.

     56)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41. 

 

몰트만의 주장은 미학적 역설(aesthetic paradox)의 선포, 즉 그리스도의 영광이 곧 그리스 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된다는 선포이다.

기독론의 미학적 역설은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의 현장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계 시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히 행하신 변혁(transfiguration of Jesus) 은 세상을 멀리하여 산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향 하는 여정과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것이다.”57)

우리는 미학적 회심을 경 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 에 참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을 통해서 미학 적 저항을 하며, 삶의 현장에서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58)

 

     57)  Ibid., 44.

     58)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1964)에 이어서 『놀이의 신학』(1971)을 출판하며 ‘종말론적 희망의 미학 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 후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을 출판하여 (루터가 강조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학의 근거가 됨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구체화  되어 인간의 삶과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주목하게 한다. 아울러 몰트 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1980)와 같은 후기 저서들을 출판함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페리코레시스적) 속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자유와 생명력이 있는 미학적이고 관계적인 놀이를 온전히 행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Ⅳ.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목회신학적 의미 이해하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목회신학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위해 중요하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효과적인 목회돌봄과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위해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구원의 주님이 되신다는 고백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학 적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이고 하나님의 실재성, 은혜, 구원, 그리스도인 의 삶, 그리스도의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다.59)

 

     59)  파울 알트하우스/이형기 옮김, 『마르틴 루터의 신학』 (파주: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17), 46.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놀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적 경험을 추 구하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본질적 이고 궁극적인 형태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놀이는 성취와 업적 지향의 현대 문화와 윤리적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종교적 도덕주의를 극복 하게 하고, 창조와 아름다움 그리고 자유함에 근거한 미학적 가치를 회 복하게 한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과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은 단지 이 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 가게 하는 일종의 실천적인 삶의 신학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의 십 자가 신학과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관계 적 놀이의 회복의 목회신학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목회신학은 신학의 학문성과 삶의 현장의 실천성을 상호 연관시키는 역할을 한다.

목회신학은 신학적인 반추와 성찰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적인 행동과 돌봄을 지향하는 측면을 주목한다.

관계적 놀이 는 삶의 현장 속에서 발생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

목회돌봄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는 사 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적인 속성을 주목하게 하 고, 상호 내주하는 공간 안에서 사랑의 관계 형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의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이 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관계적 놀이의 회복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예: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 달린 죄인의 이야기, 루터와 몰트만의 이야기, 아 프리카 노예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 등).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관계적 놀이의 회복에 기초한 목회돌봄을 지향 하고 이해하게 하는 일종의 ‘목회신학적 렌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함께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삶 속에서 놀이하며 함께 살아 간다. 우리는 현대 문화의 업적 지향적 유용성과 종교적 도덕주의 갇혀 서 억눌려 살아가는 모습을 극복하고 관계적 놀이를 회복하는 길로 나아 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놀이를 통하여 ‘삶의 현장’(Sitz im Leben)에서 현재화되게 하여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 스의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 고, 놀이를 통하여 관계적 자기를 회복하고, 관계적 공동체를 구축해 갈 수 있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관계적 놀이하기’는 일종의 ‘목회돌봄의 양태’이다.

효과적인 목회돌봄과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의미를 다음의 주제들과 함께 이해해 보기로 하자:

 

십자가 안에서 사랑의 관계 형성과 창조적 자 기 변화를 위해 놀이하기,

십자가 안에서 자유와 생명력 있는 놀이하기,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 형성을 위해 놀이하 기.

 

1. 십자가 안에서 사랑의 관계 형성과 창조적 자기 변화를 위해 놀이 하기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의 관계 형성과 창조 적 자기 변화를 위한 놀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고, 또한 죽음과 어두움의 세계와 생명과 빛의 세계를 이어준다.

하나님 인식과 인간 인식의 출발 점과 토대가 되는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 되며, “만 물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60)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들여다보는 해석 렌즈 내지 해석학적 렌즈다. 십자 가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은혜의 방편이다.”61)

 

    60)  김영동, “오늘의 선교와 십자가 신학,” 349.

   61)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39. 

 

놀이는 우리가 ‘온전한 인 간’(a fulfilled human being)이 되기 위하여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놀이를 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나타내고 창조력을 표현할 수 있다.62)

우리는 그리 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적인 놀이를 통하여 우리의 옛 모습이 변화되 어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사랑의 관계성을 구축해 갈 수 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황제 재임 시에 유대 팔레스틴 지 역의 총독인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예수님 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의 외침 속에서 로마의 군인들로부 터 조롱과 채찍을 받으시고,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고 난을 받으시고 못 박혀 죽으셨다(마 27:1-50).

그 당시 “십자가형을 당하 는 것은 인간이 맞을 수 있는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 다.”63)

그리스도교가 고대 종교와 철학 그리고 근대 인문주의와 명확히 구별되는 특징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고전 1:23) 한다는 점이다.

즉 다른 종교의 신들이나 마치 신과 같이 높이 들림을 받 는 종교의 창시자들, 그리고 세계 역사에서 추앙받는 영웅들이나 황제들 과 예수 그리스도를 명확하게 구별해주는 특징은 “그가 부활하였고, 높 이 올림을 받았고, 살아있는 거룩한 신적 존재라는 점이 아니라, 바로 그 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crucified) 점이다.”64)

루터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신학의 본질이 되 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의 기준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 나님을 알아가게 하고 또한 인간 자신을 알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 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성을 바라보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를 갈망하게 한 다.65)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분노 아래에는 역설적으로 하나님 의 은혜가 숨겨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 에 숨겨져 있다.66)

 

   62)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65-66.

   63)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21.

   64)  Hans Küng, On Being a Christian, 410.

   65)  Anna M. Madsen, The Theology of the Cross in Historical Perspective, 12. 

   66)  파울 알트하우스/이형기 옮김, 『마르틴 루터의 신학』, 46.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드러내시지만, 그 연약함과 무기력함 안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계시하신다.

한편, 몰트만에게 있어서 놀이는 일종의 ‘하나님의 창조의 호흡과 생 명력’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 존재 자체의 가치를 나타 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하는 본질적인 형태이다. 그 러기에 인간은 단지 공허함(void) 가운데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 나님의 사랑(love) 안에서 창조적인 놀이를 할 수 있다.67)

몰트만에 의하 면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에서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놀이하시는 하나님’으로서 관계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상호 내주하 는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놀이의 관계는 주인과 종과 같은 복종의 형태 인 비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자유 가 동반하는 인격적인 관계이다.68)

삼위일체 하나님은 상호 내주하는 공 간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절망과 아픔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시며,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 순수한 놀이가 ‘건전한 문화 창조의 힘’이 되는 것처럼,69) 순전한 그 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하여 변화 시키고, 죄 가운데 있은 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성서는 “무력한 인간과 하나님의 고난을 보여준다. 오직 고난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70)

예수님이 지신 “골고다의 십자가는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 며, 사랑이 없고 사랑받지 못한 비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 다.”71)

 

    67)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18.

    68)  Ibid., 24; Jürgen Moltmann, Theology and Joy, 67.  69)  요한 하위징아/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408. 

   70)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28.

   71)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365.

 

그 당시 로마 제국은 반란을 일으킨 죄인들이나 노예들에게 십자가형을 내리곤 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장소는 가장 비극적이고 절망 적인 현장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죄인들이나 노예들은 ‘살아있는 사 람(생명체)이라고 부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하나님의 심판으 로 인하여 저주받은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현장은 죄인들과 노예들이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로 버려짐을 당하고 무기 력감을 느끼며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장소였다.72)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의 모습을 보이셨다.73)

예수 그리스도는 절망과 죽음의 상황 속에서 죄인들이나 노예들이 달리는 십 자가에 함께 달리시는 가운데, 억압과 죽음의 형태를 지닌 참혹하게 깨 어진 관계를 회복해 가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 어버리고 살아갔던 죄인들이나 노예들과 십자가에서 ‘동등됨’의 모습을 겸손히 보이시며, “‘수치’(히 12:2)와 ‘율법의 저주’(갈 3:13)를 개의치 아니 하셨고,”74)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그들의 절망과 아픔을 함께 느끼시 며, 그들에게도 생명의 가치와 존중감을 나타내 보이셨다.

 

     72)  당시 로마 제국의 반란자로서 십자가에 달리는 노예들은 수많은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마치 ‘자 신을 사람처럼 느끼지 않는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십자가형의 죽음의 공포에 떨며 죽어갔다. 목 회돌봄과 목회상담/심리치료의 현장에서 가장 치유하기 힘든 환자는 우울감이나 죄책감으로 짓 눌린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행동하고 기능은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사람처럼 느끼지 않는 사 람”이다. 스테판 밋첼 · 마가렛 블랙/이재훈 · 이해리 옮김, 『프로이트 이후』 (서울: 한국심리치료 연구소, 2002), 221.

    73)  토니 에반스/장택수 옮김, 『십자가, 그 놀라운 능력』 (서울: 디모데, 2017), 173.

    74)  마르틴 헹엘/이영욱 옮김, 『십자가 처형』, 177.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노예의 존재’(혹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고통의 나무 위에서 ‘노예의 죽음’으로 죽으셨다(빌 2:8).” Ibid.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은 일종의 놀이’(crucifixion as play)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을 회복시키시고, 인간의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놀이하시는 그리스도’(Christus ludens)이다.

예수님께서 는 ‘십자가형의 놀이’를 통하여 골고다 언덕의 절망과 슬픔의 공간에 사 랑과 위로로 채워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의 놀이’로 인하여 통하여 굳게 닫혔던 ‘죽음과 체념의 장소’가 열리게 되어 ‘삶과 소망 의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 곁에 십자가에 달린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긍 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신실한 동반 자’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 안으로 부르시며, 십자가 의 고통과 아픔이 담긴 절망과 죽음의 상황을 변화시키시는 말씀으로 대 답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사람의 마음은 공간을 채워서 공간이 눌리면 마음 이 눌리고 공간이 열리면 마음도 열리는”75)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으로 채워진 골고다 언덕의 공간 안에 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인 죄인의 억눌린 마음이 열리고, 그의 내 적 모습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목회신학적 놀이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호 내주 하는 공간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창조적인 놀이를 통해 자기를 변화시키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한 사건은 … 하나님 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 척도다.”76)

 

    75)  조재현, 『공간에게 말을 걸다』 (서울: 멘토프레스, 2009), 297.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 지만” 사랑의 눈빛이나 언어 그리고 행동을 통해서 “깊이 숨겨진 감정과 의미를 찾아내게”하고  체험하게 한다. Ibid., 24.

    76)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39. 

 

십자가를 통하여 놀이하시 는 예수님은 ‘수치와 조롱의 공간’이었던 골고다 언덕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여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기의 변혁이 발생하는 공간’ 으로 새롭게 만드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당시 예수님 곁에서 십자 가에 달린 죄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의 놀이를 통하여 ‘하 나님의 심판을 받아 자신을 잃어버리고 버려지는 존재’(예: “죽음을 향한 존 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예: “자기실현”의 존재)로 변화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안에 계시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가운데, 창조적인 놀 이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온전히 회복하고, ‘실존적 불안과 두 려움의 세계’에서 ‘평안과 생명력이 충만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2. 십자가 안에서 자유와 생명력 있는 놀이하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유와 생명력을 지닌 놀이를 촉진하는 본질적 인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받은 이야기를 증언하고 나 타내는 중요한 상징”77)이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의 모델과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자유는 ‘놀이의 기초’가 되고, “구속은 놀 수 있는 자유를 회복시켜 준다.”78)

 

     77)  James H. Cone, The Cross and the Lynching Tree (Maryknoll: Orbis Books, 2013), xiv.

     78)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 131.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한 사랑의 관계성 안에 존재(being-in-relationship)하는 가운 데, 놀이를 통하여 죄와 억압의 세계에서 구속과 자유의 세계로 향하게 되고,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숨겨진 사랑과 은혜 를 계시한다. 루터는 놀라운 교환(commercium admirabilis)의 개념을 사 용하며, 죄와 억압 가운데 있는 인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 음을 역설한다.

루터의 놀라운 교환의 개념은 이성에 근거한 자유의지와 인간의 업적과 행위로 죄에서 구원함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는 ‘펠라기 우스적 학문의 흐름’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재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골고다의 언덕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자’(the forsaken)가 되어 수치 와 조롱을 받고 죄인의 처지로 전락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죄 를 수용하면서,” 오히려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 시고 ‘구원의 선물’을 제공해 주셨다는 것이다.79)

우리는 ‘오직 신앙’을 통 하여 하나님의 계시 안에 숨겨진 하나님을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고, 그 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유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놀이는 죄와 억압의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 망하게 하고 생명력을 회복하게 한다.

죄는 ‘놀이를 방해하는 기능’을 하 며, ‘구체적인 역사적 억압의 형태’를 보인다.80)

우리 인간은 죄와 절망의 세계 안에 갇혀 있을 때, 즐겁고 자유롭게 놀이를 할 수 없다.

몰트만에 의하면 구속(redemption)은 일종의 ‘인간의 자유의 회복’(restoration of human freedom)81)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절망과 억압의 상황에 갇혀 있는 인간이 자유하게 되어 즐거워하고 생명력의 놀이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 유하는 존재들(liberated human beings)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82)

 

     79)  이규성, “십자가 영성과 신학,” 295.

     80)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 130;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1-3.

     81)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106.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놀이하고 기 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해방과 치유 그리고 죄의 대속이 이루어진다.” Ibid.

     82)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32.

 

하나 님의 구속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이를 통하여 일어나고 우리 로 하여금 죄의 모습에서 벗어나 놀이할 수 있는 자유를 회복하고 생명 력을 지니게 한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신정론(theodicy)은 고난의 현장 속에서 그리스 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추구하고 목회돌봄의 활동 을 할 때,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신정론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시고(unsurpassably good), 전능하신(incomparably powerful) 분임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의 삶 속에 고 통과 악(suffering and evil)이 존재하는가?”83)

신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심 과 전능하심,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악이 공존하는 당혹스럽고 실제적인 상황을 주목하는 가운데,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하 며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인도하심을 변증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참 혹한 재난과 고통 그리고 무정하고 가혹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하나님 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고 모순적인 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겪는 극 심한 고난과 재앙의 상황 속에서 고대 철학자들[예: 에피쿠로스(Epicurus)] 이나 근대 계몽주의 철학자들[예: 데이비드 흄(David Hum)]도 신적 존재 의 선함과 그 능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풍자하곤 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로마 제국의 십자가형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과 재난의 상황에 어떠한 의미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하여 숙고하고 대답을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의 삶 속에서, 특 히 우리가 겪는 고통과 재난 그리고 억압의 상황 속에서 자유와 치유 그 리고 생명력을 추구하는 관계적 놀이의 회복을 통해서 ‘현재화’시켜야 한 다.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회에 속한 젊은 수도사로서, “인간이 의로우시 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을 가지고 고민하였다.

그 당시 사회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상황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과 지옥의 형벌의 이미지 가 강조되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84)

 

     83)  Thomas C. Oden, Pastoral Theology: Essentials of Ministry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83), 224.

     84)  폴크마르 요에스텔/이재천 옮김, 『마르틴 루터』 (서울: ITS, 2017), 7-8.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는 하나 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날마다 죄의 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신앙의 공적을 쌓고 선한 행위를 하며 금 욕적인 고행의 삶을 살아갔다.

1510년 11월에 루터는 그 당시 거룩한 도성이라고 불리는 로마에 순례의 길을 갔다.

루터는 로마를 “영적이며 성 스러우며 죄 사함을 베풀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도시”85)라고 여겼다.

특 히, 루터는 로마에 있는 “라테란 성당”의 계단들을 가리켜 ‘죄 사함을 받 고 구원에 이르는 거룩한 길’이라고 여기고 무릎을 꿇은 채로 끝까지 올 라갔다.

하지만, 루터는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서 ‘영적 시련’(Anfechtung) 을 겪고 있었고, ‘심판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루터가 라테란 성당의 계단들을 오르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신앙의 공적을 쌓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의 마 음속에 절망감과 무력감이 더욱 밀려왔고, 영적 시련은 더욱 깊어만 갔 던 것이다.

그 후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에 있는 탑 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과 씨름하며 이 해하고자 했다.

그때 루터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마음의 깊은 곳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남을 느꼈다.

루터는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려 는 선한 행위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86) 신뢰하는 것이 중요 함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버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죄인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는 사랑과 용서 의 하나님”87)이라는 것이다.

 

     85)  김주한,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 이야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50.

     86)  Ibid., 40.

     87)  이오갑, “루터 신학과 영성의 개요,” 90.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계시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가운데, 죄책감으로 인한 억눌림에서 벗어나 즐거이 자유함을 누리고, ‘두려움과 죽음의 세계’에서 ‘기쁨과 생 명력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루터와 연관된 맥락에서 몰트만은 놀이가 지닌 자유와 생명력의 측 면을 강조한다. 몰트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중에 전쟁포로가 되어 철조망 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3년간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에 절망하게 되었다: “안팎의 세상은 온통 철조망뿐이었다.

 

…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 더는 사랑할 것도 없고, 애착을 가져볼 것도 없었기에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 감각 기능이 소실되더니 존재의 의미조차 상실되고 말았다.”88)

 

이와 같이 몰트만은 포로 수용소에 갇혀 ‘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놀이의 자유 와 생명력’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45년 종전이 된 후, 몰트 만은 억압과 속박의 상황에서 전쟁 포로였던 경험을 토대로 하여 “하나 님의 버림을 받은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89)하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학에 몰두하게 되었다.

몰 트만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자유로 운 놀이를 하고 생명력과 종말론적 회복을 담아내는 신학적 사고와 영성 의 삶을 전개해 갔던 것이다.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일종의 자유와 치 유 그리고 생명력의 회복을 위한 놀이를 갈망하게 한다. “십자가에 못 박 히신 그리스도”(고전 2:2)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죄책감과 억 눌림, 그리고 속박의 형태인 죄’를 이기게 하시고, ‘즐거운 놀이와 자유 그리고 생명력의 형태인 구속’을 누리게 하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리스도’만이 우리에게 놀이의 자유와 구속을 주시고, 억압과 속박의 세계 를 변화시킬 수 있다. 루터가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로 하여 금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90) 하시는 ‘놀라운 교환’을 이루어가신다.

 

     88)  위르겐 몰트만/박종화 옮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243-244.

     89)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6.

     90)  권진호, “그리스도의 싸움의 승리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설교자 루터,” 「한국기독교신학 논총」 65/1(2009/10), 77.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지혜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 그분을 알아가야 한다.

영광 과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오직 겸손과 십자가 의 치욕의 모습에서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91)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 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고 버림받은 한 사람의 무기력함만을 바라볼 때, 믿음이 있는 사람들 은 “인간의 고통 가운데 현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능동적 으로 일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숨겨진 하나님’(Deus crucifixus et absconditus)의 … 현존과 활동을 인지한다.”92)

 

     91)  우병훈, 『처음 만나는 루터』 (서울: IVP, 2017), 110.

     92)  알리스터 E. 맥그라스/김선영 옮김, 『루터의 십자가 신학』, 323.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에서 못 박히시는 연약함과 속박,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십자 가의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자유함과 생명력을 즐거이 체험하게 하신 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생명력의 놀이는 일종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담긴 동시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다: “너희 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 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루터와 몰트만의 십자가의 영성과 관계적 놀이의 삶처럼, 우리 그리 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구축되는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자기 존재감과 존재의 연속성을 느끼고, 자유와 생 명력이 있는 놀이를 할 수 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숨겨있 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계시되는 그 사랑으로 인하여 ‘심판자 하나 님 앞에서 두려워 떠는 루터’가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이 놀이하는 루터’로 새롭게 변화되는 체험을 하였다.

루터의 경우처럼 몰트만도 억압 과 속박의 상황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놀이의 영’을 체험 하는 가운데, 전쟁 포로로서 ‘철조망에 갇혀 놀지 못하는 몰트만’이 ‘자유 롭게 생명력을 느끼는 몰트만’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였다.

몰트만은 그 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놀이의 영을 체험하는 일이 소중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제는 생명에 안길 시간이다. 감각 도 되살려 놓을 시간이다. 우리의 삶이 다시 색깔과 음향, 향기와 맛을 즐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93)

 

    93)  위르겐 몰트만/박종화 옮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245.

 

3.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 형성을 위해 놀이하기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 간 안에서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놀이를 추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해방과 치유 그리고 죄의 대속이” 이루 어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로 형성된 공동 체의 기쁨과 웃음이 이루어진다.”94)

마치 어린아이들이 사랑으로 인하여 조성되는 ‘신뢰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순전하고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 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믿음과 환 대의 환경’을 구축하고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를 형성해 갈 수 있다.

관계 적 놀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나의 세계’를 ‘하나님의 세 계’에 이어주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이어준다.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체험하고, 영적 순례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 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영적 시련’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십자가 아래에 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기를 역설한 다.

루터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견과 함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데 있다.”95)

 

   94)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106.

   95)  이후정, “루터와 웨슬리에게 있어서의 십자가와 고난,” 93.  

 

루터는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돌보고 섬기 며, 사랑의 십자가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촉구한다.

루터와 연관된 맥락에서 몰트만은 놀이가 지닌 기쁨과 환대, 그리고 돌봄과 섬김의 측면을 주목한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은 기쁨의 놀이를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being there-for-others)이고, 동시에 돌봄의 놀이를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being-there-with-others)이다.96)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체는 단지 삶의 가치관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 내적 집단 이 아니라, 일종의 “타자를 향한 열린 애정과 존경을 담은 열린 공동 체”97)이다.

몰트만은 ‘미학적 역설’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면서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의 현장에서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계시 되었 음을 강조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의 현장에 고난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살아가기를 역설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성육신(incarnation)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임”(a remedy for human sin)을 증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성육신의 당위성’에 초점을 두는 가운데,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를 즐겁게 원하신 것인 가?’에 관한 물음, 즉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서 대답을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98)

 

    96)  Jü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70-71.

    97)  위르겐 몰트만/박종화 옮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풍성한 생명』, 189. 

    98)  Brian Edgar, The God Who Plays, 105. 

 

이러한 맥락에서 목회신학적 관계 적 놀이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함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 에 본질적인 놀이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활의 소망을 지니게 하시고, 하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함의 즐거움을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이 ‘미학적 역설’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 움’이 드러나도록 놀이를 하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움과 절망 의 역사의 현장 속에서 희망의 놀이를 하는 것은 중요하다.

즉 미래의 종 말론적 기쁨이 현시대의 고난과 아픔의 역사를 직시하고 다시금 해석하 게 해야 한다.

“희망은 현실보다 크며 위대하다.”99)

‘놀이하는 인간’은 일 종의 ‘행동하는 인간’(homo agens)으로서 놀이의 순전함을 지키기 위해 행 동에 나선다.100)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는 십자가의 영성의 길과 관계적 놀이를 하는 일들이 어떠한 굴곡도 없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십 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누군가에는 어리석고 모순 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능력과 기쁨 을 얻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고통”101)에 함께 하는 길이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어 둠과 죽음의 상황 속에서 ‘기쁨과 희망의 놀이로 현재화’시키는 주제는 중요하다.

이 주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북아메리카의 매우 넓은 농장에서 일했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실존적 삶의 이야기’102)를 고찰해 보고자 한 다.

 

     99)  손호현,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149.

   100)  요한 하위징아/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429.

   101)  토니 에반스/장택수 옮김, 『십자가, 그 놀라운 능력』, 227. 102)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 62-63. 이 글에서 고찰하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반적인 이 야기는 드와이트 홉킨스(Dwight N. Hopkins)의 저서 『아래로, 위로, 그리고 너머로: 노예 종교 와 흑인 신학』(Down, Up, and Over: Slave Religion and Black Theology)에 있는 내용임을 밝힌다.

 

그 당시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하루는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낮의 시간)와 “해 질 때부터 해 뜰 때까지”(밤의 시간)의 크게 두 가지의 시간으로 분류되었다.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있어서 낮의 시간 은 빈틈없이 세워진 계획에 따라 쉼 없이 일하는 단지 노동하는 시간이 었다.

하지만 ‘햇빛이 없는 어둠의 시간’은 노예들이 일종의 “자유와 역 량”을 발견하는 때였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농장 시스템에 의해서 그들 의 감독자들이 물러가서 공백으로 남겨진 밤 시간을 활용하는 가운데,숨은 공간에서 “놀이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재구축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들은 “세속적인 시간을 신성한 시간으로 전환”시켰던 것이 다.103)

아프리카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 님을 찬양하고, 노동이 아닌 희망의 놀이를 통하여 쉼을 얻고, 서로를 환 대하며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삶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 을 통하여 ‘어둠 속에서 놀이하기’(playing in the dark)의 소중함에 대하여 깨닫게 해준다.

놀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고통 그리고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심 (God is present)을 확신한다.”104)

아프리카 노예들의 삶의 이야기처럼, 초 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피하여 카타콤과 지 하 예배당과 같은 ‘어두운 장소에서 그리고 어두운 시간대에 놀이하였 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의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했 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환대하며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를 세워갔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둠 속의 놀이는 절망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자기 계시가 일어나는 과정이다.”105)

 

       103)  Ibid., 63.

      104)  Anna M. Madsen, The Theology of the Cross in Historical Perspective, 241.

      105)  제임스 에반스/홍병룡 옮김, 『놀이』, 80.

 

아울러 어둠 속의 놀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즉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에 참여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이의 영(spirit of play)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며 기쁨과 돌봄의 놀이를 할 수 있다. 목회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둠과 절망의 역사의 현 장 속에서도 관계적 놀이를 통하여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를 구축해가게 한다.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의 재발견은 생명의 의지와 희망의 능력에 속한다.”106)

 

   106)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7), 256

 

아프리카 노예들은 억압과 속박의 현장에 갇혀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단지 농장에서 ‘노동하는 노예 공동체’(slave community)가 아니라 ‘놀이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faithful community)를 이루어갔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경우처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어둠과 절망의 공동 체’가 아니라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를 구축해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통하여 고난의 역사적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가운데, 관계적 놀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부활 의 소망을 가지며, 자유와 기쁨 그리고 돌봄과 환대의 공동체를 세워가 야 한다.

 

 

Ⅴ. 나가며 ―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적 놀이에 근거한 십자가의 영성과 목회돌봄의 함축적/실천적 의미

 

‘십자가와 놀이’의 개념은 기독교 영성과 목회신학 사이에 학제 간의 상호 보완적인 대화를 추구하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 자기, 그리고 공 동체’의 역동적인 상관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관계적 놀이를 통하여 십자가의 영성의 삶을 살게 하고, 효과 적인 목회돌봄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의 영성 과 목회돌봄의 공동 임무는 놀이함으로 ‘관계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be related)을 회복하고 심화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관계적 놀이는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를 이어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도 이어준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107)(conformity to the crucified Christ)을 살아가는 가운데, ‘온전한 인 간됨’을 회복하고 즐거이 놀이할 수 있다.

 

    107)  마이클 고먼/박규태 옮김, 『삶으로 담아내는 십자가』, 20. 우리는 “하나님 형상을 입은 사람”이 기에 “하나님의 놀이를 모방하고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김기철, “놀이로 구현되는 하나님 형상,” 102.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지음 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창조의 놀이에 참여 하는 ‘놀이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종교적 도덕주의에 기반하여 외형적인 종교 의 례에 참여함을 강조하는 가운데, 신앙의 공적을 쌓고 선한 행위로 인하 여 구원함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간의 죄 를 대속하기 위한 성육신의 당위성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구속론 적인 의미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그리스 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전해지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의미를 현재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놀이에 참여함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관계적 놀이를 즐거 이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고 우리 자신의 의로움 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겸손히 기도하며, 그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 는 것이다. 우리의 낮은 자존감이나 높은 우월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온전하게 회복되고 겸손해지며, 우 리의 불안과 두려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묵상하며 변 화되어 평안함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십자가의 영성과 목회돌봄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 가를 지시는 영성의 삶을 사셨고, 선한 목회돌봄자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고 볼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낮고 천한 종으로 오신 것 은 예수님이 동일하게 여기시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다.”108)

놀이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을 통하여 죄인들이나 노예들 과 같은 미천한 사람들의 “신실한 동반자가 되어주시고”(faithful companioning),109)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부르시며, 나아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절망과 죽음의 세계’를 ‘소망과 부활의 세계’로 변화시키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주는 새 창조의 영 (spirit) 속에 살고 있으며 이 영에 따라 행하며,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면 서 살아간다.”110)

 

     108)  토니 에반스/장택수 옮김, 『십자가, 그 놀라운 능력』, 4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순전한 사랑의 가장 위대한 확증이자 실천이다.” Ibid., 12.

    109)  Chris R. Schlauch, Faithful Companioning: How Pastoral Counseling Heals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76-77.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놀이’를 하시며 일종의 ‘목회돌봄’을 행하신다고 볼 수 있다. 쉴라흐에 의하면 목회돌봄은 일종의 “상호 협력적인 대 화”(collaborative conversation)이다. 이 대화를 통하여 목회돌봄자는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과 신실한 동반자가 되며, 상호 협조적이고 공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Ibid., 12-15. 이러한 맥락 에서 존 패튼(John Patton)은 목회돌봄의 공동체적이고 상황적인 패러다임(communal contextual paradigm of pastoral care)을 제시하는 가운데, 목회돌봄의 중요한 임무는 단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상호 관계성 안에서 듣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John Patton, Pastoral Care in Context: An Introduction to Pastoral Car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40.

   110)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옮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8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어둠과 억압의 역사적 현장에서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환대와 축 제의 놀이를 통해 이 땅을 더 나은 세계로 구축해 가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사랑으로 인하여 촉진되는 ‘신뢰할 수 있는 환경’ 안에서 천진난만하고 즐거운 놀이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믿음과 환대의 환경’을 형성해 갈 필요가 있다.

아 프리카 노예들이나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어두움 속에서 관계적인 놀이를 하며 환대와 돌봄의 공동체를 추구했던 모습은 오늘날에도 여전 히 우리에게 역동적으로 깊은 영감과 울림을 주고 있다고 본다.

‘어두움’ 은 단지 ‘물리적인 빛’이 부재한 차원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 도 우리의 삶 속에 깊은 어두움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성취와 업적 지향적 유용성의 문화로 인하여 경쟁과 노동에 억눌리는 상태, 자기 존 중감이 없고 자신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자기의 분열에 갇힌 상태, 억 압과 속박의 환경 안에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놀이가 결핍된 상태, 인 간과 신적 존재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성이 상실된 상 태 등.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관계적 놀이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본다.

관계적 놀이는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게 하는 가 운데, 온전한 관계적 자기를 형성하게 하고, 관계적 공동체를 견고하게 구축해 가게 한다.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우리는 관계적 놀 이를 통하여 절망과 어두움의 환경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환대와 기 쁨 그리고 돌봄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다.

십자가의 영성과 목회돌 봄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관계적 놀이의 회복에 참 여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들려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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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관계적 놀이’라는 개 념을 근거로 하여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에 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신앙의 예시이고 모델이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규 범과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 게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놀이는 인간과 인간 사 이에 관계적 경험을 추구하게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 계성을 표현하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형태이다. 상호 내주하는 사랑의 공간 안에서 관계적 놀이는 ‘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를 이어주고, 아 울러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이어준다. 목회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관계적 놀이는 일종의 목회돌봄의 양태이다. 그리 스도의 십자가는 효과적인 목회돌봄을 위해 다음 세 가지의 요소로 이루 어진 관계적 놀이를 가능하게 한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의 관계 형성과 창조적 자기 변화를 위해 놀이하기, 십자가 안에서 자유와 생명력 있는 놀이하기,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기쁨과 돌봄의 공동체 형성을 위해 놀이하기.

 

주제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관계적 놀이, 사랑의 관계성, 자기 변화, 자유와 생명력, 기쁨과 돌봄, 목회신학

 

 

A Pastoral Theological Study of the Cross of Christ — Based on the Restoration of Relational Play

Dong-Young Kim( Lecturer, Pastoral Theology(Pastoral Psychology) College of Theology Hanshin University )

The purpose of this writing is to explore the meaning of the cross of Christ by using the concept of the restoration of relational play from a perspective of pastoral theology. The cross is a faithful example and model for Christians as well as the norm and strength for Christian faith. The cross of Christ enables us to experience the grace and love of God, and to conform to the life of Christ. Play is a kind of essential and ultimate form which promotes the mutually-informing experience within the human-human relationship, and which establishes the close encounter within the God-human relationship. In the intersubjectivelyrelated space, relational play has an essential role for connecting the world of God, the world of I, and the world of others together. From the perspective of pastoral theology, relational play in the power of the cross of Christ is a type of pastoral care. The cross of Christ facilitates relational play which consists of three elements as follows: 1) play of the formation of loving relationship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self, 2) play of freedom and vitality, and 3) play of the establishment of community of joy and caring.

 

Key Word :The Cross of Christ, Relational Play, Loving Relationship, Transformation of the Self, Freedom/Vitality, Joy/Caring, Pastoral Theology

 

 

 

 

논문접수일: 2025년 3월 1일 논문수정일: 2025년 3월 15일 논문게재확정일: 2025년 3월 20일

神學思想 208집 · 202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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