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영혼돌봄과 목회상담
목회상담을 “일반 상담학과 심리학의 발전과 함께(해 온) 신학과 심리학 의 적용 학문”이라는 좁은 의미로 정의할 때,1 목회상담의 역사는 아직 1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목회상담, 즉 영혼돌봄 (cura animarum, cure of souls)으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 역사상의 오랜 목회적 돌봄은 교회가 존립하면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여 왔다.”2
안석모에 따르면 이러한 영혼돌봄의 시원(始原)은 “멀리 구약성서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는데,3 거기서 확인할 수 있는 영혼돌봄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이 곧 인간의 영혼과 삶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4
1 홍인종, “한국 장로교 100년: 목회상담의 회고와 전망,” 「장신논단」 44 (2012), 78.
2 안석모, “목회상담의 역사: 구약, 신약, 교회,” 안석모 외, 『목회상담 이론입문』 (서울: 학지사, 2009), 75.
3 앞의 책, 75.
4 앞의 책, 94.
목회적 돌봄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인식은 오늘날 목회상담에도 여전 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목회상담이 일반 심리치료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판받는 현 상황에서5 실제로 그러한 하나님의 치유가 어떻게 목회상담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고, 목회상담자가 어떻게 그러한 하나님의 치유에 동참 할 수 있는가는 물음은 여전히 목회상담학의 중심 주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일은 전통적인 영혼돌봄과 현대 목회상담 사이의 단절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양자의 연속성을 회복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일이다.
연구자는 전통적 영혼돌봄과 현대 목회상담 사이가 단절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기본적인 개념상의 분리라고 생각한 다.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혼돌봄과 심리치료가 서로 구별해야 할, 서로 다른 영역의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어의 soul이나 라틴어 ani ma가 원래 헬라어 프쉬케(ψυχή)의 번역어라는 사실과 이 헬라어가 바로 심리치료(psychotherapy)의 어원이라는 사실만 생각하더라도 영혼돌봄이 심리치료와 전혀 다른 일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중세 교회에서 영혼돌봄을 지칭한 라틴어 cura animarum(영혼의 치료)은 헬라어로 재번 역하면 Θεραπεία ψυχής, 즉 psychotherapy(심리치료)가 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영혼 삼분법(the tripartite soul)에 따르면 영혼의 기 능은 지(知), 정(情), 의(意)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 삼분법은 현대 심리학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 예컨대 인지행동치료(CBT)에서 마음 의 작용은 인지(cognition), 정서(emotion), 행동 성향(behavioral tendency)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6
5 Philip Rieff, 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 40th Anniversary Edition (Wilmington: ISI, 2006), 42.
6 Norman B. Epstein and Donald H. Baucom, Enhanced Cognitive-Behavioral Therapy for Couples: A Contextual Approach (Washington DC: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2002), 9.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적 영혼(ψυχή, anima) 개념이 현대 심리학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영혼 개념 역시 이러한 그리스-로마 전통과 마찬가지로 현대 심리학 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성경적 의미의 영혼돌봄 (the cure of souls)이 현대 심리학의 심리치료와 서로 연결되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보다 심도 있게 성경을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바로 이를 위해 먼저 성경이 말하는 영(πνεῦμα) 또는 혼(ψυχή)의 개념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성경적 의미의 영혼돌봄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려 한다.
그리고 그런 성경적 의미 의 영혼돌봄이 오늘날 심리치료 내지 목회상담과 어떤 연속성을 가지는지 논의해 보려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본고가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하나 님과의 관계나 인간관계 모두에서 내담자의 내면이 변화되고 성숙하도록 돕는 통전적 영혼돌봄의 성경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II. 영과 혼
1. 영과 혼의 성경적 의미와 상관관계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영과 혼을 서로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חור)와 혼을 뜻하는 네페쉬(שפנ) 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우선 루아흐는 ‘바람’ 내지 ‘호흡’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피조물을 살리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반면 네페쉬는 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기식(氣息)과 생명력 또는 그러한 생명력을 가진 피조물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네페쉬는 “구약 성경에서 결코 불멸의 영혼을 의미하지 않는다.”7
7 Keith R. Crim and George A. Buttrick,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81), 428.
그것은 “본질적으로 욕구와 감정, 의지를 가진 생명체나 주체를 의미하는”8 말이었다.
칠십인역(LXX)에서 루아흐는 헬라어 프뉴마(πνεύμα)로, 네페쉬는 프 쉬케(Ψυχή)로 각각 번역되었다.
헬라어 프쉬케와 히브리어 네페쉬는 둘 다 원래 생명체가 쉬는 숨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점을 비롯하여 많은 면에서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프쉬케는 네페쉬와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가진 생명을 뜻하는 동시에 의지, 욕구, 감정 등을 지닌 그 생명체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헬라어 프쉬케가 히브리어 네페쉬와 다소 다른 뉘앙스를 갖게 된 것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에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9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에 따라 사람들의 영혼은 죽음을 통해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천상으 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10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이후 초기 기독교를 비롯하여 서구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영혼(soul)이 몸과 분리된 별개의 실체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러한 영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네페쉬는 이와 달리 일반적으로 몸과 분리시 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11
8 Ibid.
9 이러한 영혼불멸론은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몸은 죽지만 그의 혼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한다. 플라톤, 『파이드로스』, 조대호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08), 53. 영혼불멸설이 원래 기독교의 것이 아니라 플라톤 철학에 기원한 것이라는 설명은 오스카 쿨만, 『영혼불멸설과 죽은 자의 부활』, 전주석 외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12.
10 김영선, “영혼불멸사상과 부활신앙의 대립과 융합에 대한 소고,” 「장신논단」 51 (2019), 182.
11 “구약에서는 영육의 분리가 아니라 영육합일체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박노권, “기독교 영성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 「한국기독교신학논총」 24 (2002), 320.
앞서 말한 것처럼 네페쉬는 이 땅에 살아가는 피조물들이 가진 생명력 또는 그러한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 자체를 지칭한 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헬라어 프쉬케 역시 원래 이와 같은 의미 였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 (Περὶ Ψυχῆς)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은 “영혼론”이라는 국역 제목이나 “On the Soul”이라는 영역 제목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과 달리 불멸의 영혼이나 천상의 영혼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프쉬케를 세 종류로 분류한다.
첫째는 스스로 양분을 섭취하여 성장 하는 ‘식물’,
둘째는 거기에 더해 감각 능력을 가진 ‘동물’,
셋째는 앞의 두 가지에 더해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12
12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오지은 옮김 (서울: 아케넷, 2018), 66.
프쉬케를 이처럼 세 종류로 분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쉬케론』은 오늘날의 서지 분류에 따르면 종교 학이나 심리학보다는 오히려 생물학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매우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선 『영혼론』이라는 국역 제목이 주는 선입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자신조차 익숙해져 버린 서구 전통의 이원론적 사고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 역시 서구 사상의 영향으로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해져 버렸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일찍이 플라톤 사상을 수용 한 서구의 기독교나 서구 문화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으로 오늘날 우리 역시 정신현상과 생명현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인해 정신현상과 생명현상이 더 이상 둘로 나누어 볼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생각하고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반응이 단지 정신의 기능일 뿐 아니라 우리 몸의 생물학적 기능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이로써 현대 정신과학은 다시 생명과학과 하나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의 ‘심리’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프쉬케론(Περὶ Ψυχῆς)의 프쉬케 개념에 더 가까워진 것이다.
한편 프쉬케를 불멸의 영혼이 아니라 지상의 유한한 생명체 내지 그것이 가진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구약 성경만 아니라 신약 성경의 관점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 은 프쉬케의 형용사형인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를 “natural man”(KJV, 고전 2:14, “육의 사람”) 또는 “natural body”(고전 15:44, “육의 몸”) 같은 표현에 활용한다.
즉, ‘프쉬키코스’라는 말을 자연상태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피조물 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의미의 프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와 거의 같은 의미의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프쉬케는 칠십인역 등에서 별 무리 없이 구약 성경의 네페쉬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일례로 창세기 2장 7절의 “היח שפנ”(살아 있는 네페쉬)는 “ψυχὴ ζῶσαν”(살아 있는 프쉬케)로 번역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 45-46절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며 이러한 프쉬케(혼)와 프뉴마(영)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ψυχὴ ζῶσαν, living soul)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πνευμα ζωοποιουν, life-giving Spirit)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ψυχικός)이요 그다음 에 신령한 사람(πνευματικός)이니라(강조는 필자).
이 말에 따르면 프쉬케는 원래 이 땅의 흙으로 지어진 유한한 피조물이지 만 그것에 “살려 주는 영(프뉴마)”이 들어가면 “살아 있는 프쉬케”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단지 “프쉬키코스”(육의 사람)가 아니라 “프뉴마티코스”(영 의 사람)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바로 프쉬케에게 생명을 부여 하는 생명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죽은 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
성경에서 혼(שפנ, ψυχὴ)이 주로 유한한 인간의 속성을 지칭하는 반면, 영(חור, πνευμα)은 주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지칭한다.13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은 특히 그의 피조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영’(the life-giving Spirit)이라고 표현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영에 대한 표현을 창세기 2장 7절 외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예컨대 욥기의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반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이 그 생명체에게서 거두어지는 것이 곧 죽음이라고 말한다.14
13 박종수, “구약성서의 인간이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73 (2011), 14.
14 성종현, “신약학회: 현재 서구 성서신학자들의 성령이해와 신약성서의 성령관,” 「한국기독교신 학논총」 13 (1996), 123.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그의 영(חור)과 숨을 거두실진대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욥 34:14-15).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חור)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영(חור)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영(חור)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아래의 전도서 3장 21절은 자칫 영(חור)이 인간 자신의 속성이며 죽음을 통해 그것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처럼 읽힐 수 있 다.
그러나 그 위의 19절에서 인간이나 동물에게 주어진 것이 “동일한 영”(호 흡, חור)이라는 말씀에 따르면 21절의 “영”(חור) 역시 인간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에게 한때 부여되었다가 다시 거두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고 봄이 더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한편 구약의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생기, חור)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חור)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חור)에게 대언 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חור)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חור)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 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본고의 맥락에서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영(생기)이 “돌처럼 굳은 마음”(ןבאה בל)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영이라는 사 실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 (ןבאה בל)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신약 성경에서도 역시 이처럼 보이지 않는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 다음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7-8).
영으로 거듭나는 변화가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내면의 변화라는 의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 이렇게 인간 내면에서 일으키시는 변화 를 “다시 태어남”(요 3:7) 또는 다시 “살리는 것”(요 6:63)이라고 표현한다.
한편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서신서에서 이처럼 죽은 자를 새롭게 살리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강조는 필자).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 3:6, 강조는 필자).
이로써 우리는 요컨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마음과 몸을 포함한 전인을 새롭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영
또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 시키시는 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우선 창세기의 타락 기사에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결과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게”(창 6:3)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사람 들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창세기 6장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 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다”라는 성경의 표현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에스겔서 36장 26절에서부터 역추론하여 사람들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앨버트 반스(A. Barnes)의 주석대 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의 영을 통해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 고 거룩한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15 아니하셨다는 의미 로 읽을 수 있다.
15 Albert Barnes, Barnes’ Notes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Genesis (Abbotsford: Life Sentence Publishing Inc., 2025), 178.
이는 곧 인간의 타락의 결과가 하나님과 마음이 단절된 상태 라는 의미다.
이러한 마음의 단절을 성경은 죽음이라고 지칭한다.
에스겔서 36장 26절에서 말하는 “새 영”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 된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 마음” 또는 “부드러운 마음”(겔 36:26)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신 다”(겔 36:27).
즉, 우리 마음을 다시 하나님을 사모하고 따르도록 변화시킨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여호와의 영” 역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며, 지혜와 총명을 얻게 하시며(사 11:2) 또한 그 택하신 자로 하여금 “정의를 시행”(사 42:1)하도록 이끄신다.
또한 그것은 메마른 심령을 소성시키며(사 44:3-4), 그 백성을 이끌어 “편히 쉬게” 한다(사 63:14).
더 나아가 그것은 세상 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게” 하는 치유의 영이기도 하다(사 61:1-3).
그런데 우리는 신약 성경에 이르러 이러한 하나님의 영이 단지 사람들 마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들 마음에 들어와 내주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새롭게 일어나는 사랑과 갈망, 의지와 소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롬 5:5).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살며 결국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성화" (sanctification)라 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성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영적 변화인 동시에 우리 내면의 심리적 변화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는 모두 성숙한 마음의 특징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통해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다름 아닌 심리적 변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영을 부어주심으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프쉬케”(living psyche, 창 2:7)가 된다는 말씀을 단지 가시적 현상으로만 아니 라 내면의 심리적 변화(psychological chang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변화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람이 부는” 것처럼(요 3:5)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변화다. 즉, 가시적 인 외양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인 인격의 변화다.
고대 그리스 이래 프쉬케는 무언가 생각하고 느끼며 욕구하는 기능을 의미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분법적 이해가 바로 그러한 예인 데, 플라톤은 프쉬케의 기능을 크게 생각하는 이성(logos),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thymos),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epithumia)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고 각각을 철학자, 군인, 노예의 특성으로 간주했다.16
16 플라톤, 『플라톤전집 IV: 국가』, 천병희 옮김 (서울: 도서출판 숲, 2017), 268.
이와 유사하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 마음의 특성을 이성(logos), 감성(pathos), 행동 습성(ethos)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그는 연설을 통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영역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17
17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박문재 옮김 (서울: 현대지성, 2020), 17.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이러한 고대의 심리학적 관점은 오늘날의 현대 심리학에도 거의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특히 인간의 뇌를 생각하는 뇌와 감정 뇌 그리고 본능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뇌로 나누어 보는 뇌과학의 발전을 통해 그러한 정신 이해가 매우 과학적인 이해로 인정되 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각각의 정신요소에 치료를 집중하 는 인지치료, 정서치료, 행동치료의 기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이렇게 오늘날 현대 심리학자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심리적 변화가 성경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넣어주신다(고전 12:8).
또한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절제하는 능력을 부어주신다(롬 5:5; 딤후 1:7).
그리 고 우리 마음에 우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어주기보다 의의 무기로 하나님 께 드리고자 하는 소원과 의지를 불어넣으신다(롬 6:13).
그러므로 현대 심리 학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치료자나 목회상담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그처럼 사람들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사역과 전혀 다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초대교회 이래 이른바 ‘영혼 돌봄’이 바로 그러한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목회상담이나 목회적 돌봄 역시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 현실 속에서 이러한 성령의 사역에 잘 동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당신의 사역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동참시켜 오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III. 하나님의 영을 통해 새로워진 사람
1. 하나님의 영과 마음의 교감
하나님의 영은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 서로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섬기는 일에 동참케 하신다.
하나님께 서 어떻게 당신의 사역에 그의 사람들을 동참시키시는지는, 일례로 우리는 초대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통하여 환란 가운데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지지하셨는지 고백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 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후 1:3-6).
우리는 여기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위로의 연쇄적 전이(transference)라 고 부를 수 있는 성령의 활동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위로의 전이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위로가 바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 도를 통해 바울 자신에게 역사하고 또 그렇게 바울 안에서 역사한 위로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마찬가지로 환난 가운데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역사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받은 위로가 어떻게 바울을 위로하고 또 바울이 받은 위로가 어떻게 다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서로 다른 두 인격체로 하여금 마음의 교류를 통해 서로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심(롬 5:5)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과 마음으로 하나 될 뿐 아니라 우리 서로가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하신다.
예컨 대 사도 바울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그 자신 역시 사랑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 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사랑으로 환난 가운데 처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어져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안에 계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계신 것처 럼 그의 제자들 역시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으로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요 17:21).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과 세상 역시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요 17:23).
과연 이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그들 역시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와 같은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먼저 바울 안에 부어주셨고, 그런 바울을 통해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과 우리만 아니라 우리 서로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라는 사실은 다음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골 2:5, 강조는 필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와 몸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여기서 영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마음 으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라는 것을 우리는
“함께 있어… 기쁘게 본다”
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영을 통해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마음을 나누는 관계가 되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처럼 한 몸 안에서 지체들이 서로 교감하는 관계에 비유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이래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되는 “성도의 교통 함”(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및 다른 지체들과 서로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고백이다.
2. 변형적 내면화와 속사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부어진다는 것을 단지 일회적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갈 5:22)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것은 단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본질적 인 인격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갈 2:20)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내적 변화가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 며 본질적인 변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지속적이며 본질적인 인격의 변화를 다음처럼 “새 사람” 내지 “속사 람”이라는 용어로 묘사한다
. …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새 사람” 또는 “속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중심인 프쉬케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속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심리적 변화 (psychological change)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변화 의 과정을 현대 심리학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까?
연구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이러한 ‘심리적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현대 심리학의 개념 중 하나가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의 ‘변형적 내면화’(transmuting internalization) 개념이라 생각한다.
코헛은 부모 내지 상담자의 자기 대상(selfobject) 역할이 단지 그 사람 밖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내면화되어 성숙한 인격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즉, 부모나 상담자 가 반영해 주던 자신의 가치를 내면화하여 스스로 자기존중감을 가진 사람이 되며 또 그 부모나 상담자가 제공해 온 지지나 안정감을 내면화하여 자기 스스로를 격려하고 일으킬 수 있는 자립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18
18 이재현, “목회상담에서의 ‘성숙한 역전이’: 구원환상에 대한 상호주관적 이해의 재고,” 「목회와 상담」 38 (2022), 173.
코헛은 이러한 과정이 마치 사람이 섭취한 음식이 그 사람 안에 단백질로 축적되어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했다.19
그러면 이러한 변형적 내면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도 비슷하게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안젤라 손(Angela Son)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모세의 확장자로 제공하심으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하셨다”
고 설명한다.20
19 홍이화,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 이야기 I』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2011), 79-80.
20 Angella Son, “Making a Great Man, Moses: Sustenance and Augmentation of the Self through God as Selfobject,” Pastoral Psychology 64 (2015/10), 764.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을 모세의 자기대상 으로 제공하셔서 모세가 보다 성숙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민수기 12장 3절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노년의 모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노년의 모세의 모습은 젊은 시절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애굽인 관리를 쳐 죽이던 모습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이러한 모세 의 변화가 오랜 세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의 안에 내면화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말미암은 변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적 변화를 사도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과거 그리스도 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였던 바울은 이후 자신이 그리스 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어떻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제 그의 안에 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곧 그의 내면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처럼 새롭게 변화한 그의 인격의 중심이 바로 그의 “속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지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며 그리스 도와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었다.
모세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는 친밀한 관계를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거울을 보듯) 마주본다”(고후 3:18a)고 말한다.
이것을 심리학 의 용어로 바꾸어 설명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기대상이 되신다는 의미이 며, 그래서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후 3:18b)는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안에 변형적으로 내면화된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과정이 모두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후 3:18c)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자신의 인격이 되는 변화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변화라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박해자였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 는 과정은 토마스 옥덴(Thomas Ogden)이 이야기하는 ‘투사적 동일시’(pro jective identification)와 변형된 경험의 ‘재내면화’(reinternalization) 과정으 로도 설명할 수 있다.21
21 토마스 옥덴, 『투사적 동일시와 심리치료 기법』, 김도애, 류가미 옮김 (창원: 경남가족상담연구 소, 2015), 41; 권현지, “상담자와 내담자를 변형시키는 분석적 삼자, 성령 하나님,” 「신학과 실천」 89 (2024), 365.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처음 박해자 사울(바울)이 그리스도인들과 투사적으로 동일시한 것은 그 스스로 용납지 못하는 자신의 일부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일부란 곧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다른 법을 섬기는 “죄”(롬 7:17)였다.
사울은 그런 자신의 숨겨진 “죄”를 그리스도인들 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만난 그리스도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26:14)라는 말씀으로 그런 그를 직면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렇게 그의 위선을 직면하시면서도 그를 용납하시고 변화시키셔서 이방에 당신의 이름 을 전할 “택하신 그릇”(행 9:15)으로 삼으셨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용납하심 의 은혜를 자신의 안에 내면화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해 갔던 것이 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렇게 바울 안에 내면화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은 비단 그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회심한 초대교회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다.
바울은 이렇게 해서 변화한 성도들을 일컬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a)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이 편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적인 마음판” (고후 3:3b)에 쓴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영이 변화시키는 것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일체를 이루는 우리 마음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즉,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는 몸과 마음을 포괄하는 인간의 전인적 변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우리 의 속사람의 변화는 우리의 육신과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우리 육신의 삶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룬다”(고후 4:17)고 말한다.
또한 그렇게 우리 안에 형성된 속사람이 땅의 유한한 장막이 무너지더라도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덧입게 된다(고후 5:1-2)고 말한다.
즉,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성경이 말하는 ‘심리적 변화’ 가 단지 현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것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 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to die is to gain)”(빌 1:21)라는 바울의 고백이 함의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 고백에 담긴 뜻은 그의 안에 형성된 그리스도의 성품이 육체적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 면 사람들의 속사람의 성숙을 돕는 ‘영혼돌봄’은 비단 그들의 현세적인 유익 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영적’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나오며: 속사람의 성숙을 위한 영혼돌봄
끝으로 이상의 논의가 목회적 돌봄에 시사하는 바가 어떤 것들인지 정리 해 보도록 하자.
첫째, 더 이상 영혼돌봄과 심리치료를 서로 다른 별개의 영역 의 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혼과 심리는 어원적으로나 성경적 관점으로나 교회 전통의 견지에서나 서로 완전히 나누어 볼 수 없다.
심리치 료자가 치료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살리신다고 한 ‘프쉬케’(ψυχή)이다.
그러므로 현대 심리학을 활용하면서 사람들 마음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자나 목회상담자는 동시에 사람들의 중심을 변화시키시 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역시 목회 상담이 목회상담자와 내담자 양자 간의 대화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포함한 삼자 간의 대화(trialogue)22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목회상담의 과정 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식별하는 영적 분별이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22 Wayne E. Oates, The Presence of God in Pastoral Counseling (Waco: Word Book Publisher, 1986), 23.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마음을 우리 안에 부어주시는 영이라 는 사실(롬 5:5)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마음은 목회상담자와 마주하고 있는 내담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의 마음이 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담 자들을 사랑하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담자들은 사울이 그의 감춰진 죄성과 공격성을 그리스도인들에게 투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그들의 분노 와 상처를 투사할지 모른다.
이때 목회상담자는 자신의 힘으로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인내하고 용납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내담자들은 비록 내면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23
23 김태형,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관계성의 심리학적 관점과 목회상담적 적용 가능성의 시도,” 「장신논단」 52 (2020), 137.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담자들 안에 변형적 으로 내면화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내담자들이 그들 안에 품어 인격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비단 내면의 치유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의 논의에 따라 목회상담자들이 유념해야 할 또 하나 는 그들의 사역이 비단 내담자들이 현재 가진 고통스러운 문제의 해결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닮은 인격으로 새롭게 빚어져 가도록 돕는 영적 사역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목회상담과 돌봄이 단지 현세적인 웰빙을 지향하는 것만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고후 4:17)을 이루어 가는 사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내담자들이 현재적으로 가진 문제의 해결에 이제까지와 같이 치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목회상담과 영혼돌봄을 이분법적으 로 나누어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목회상담이 궁극적으로 영적 성숙을 돕는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지금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를 지혜 롭게 극복하도록 돕는 일이 바로 영적 성숙을 돕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영적 성숙은 이 땅의 삶과 무관한 ‘영혼’의 일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을 살아가는 ‘프쉬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본고의 논의는 목회상담이 영혼의 구원과 성숙을 도모하는 전 통적 영혼돌봄과 다시 연결되도록 성경적 기초를 마련하려 하는 시험적 논의 에 지나지 않았다.
본고에서 시도한 성경적 고찰은 목회상담학자들뿐만 아 니라 성경학자 등에 의해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전통적 인 영혼돌봄의 방법과 현대 심리치료의 기법을 통합하여 통전적인 영혼돌봄 방안을 마련하려는 노력도 함께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논의 를 통해 현대 심리치료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영혼돌봄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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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목회상담을 일반 심리치료의 목회적 적용이라는 좁은 의미로 정의할 때 그 역사는 10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영혼돌봄(cura animarum)이라 일컬어 져 온 전통적 의미의 목회돌봄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왔다. 이러한 전통적 영혼돌봄의 기초는 곧 하나님 자신께서 인간의 영혼과 삶을 돌보시는 분이라는 믿음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혼돌봄과 심 리치료는 서로 구분되어야 할, 서로 다른 영역의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어의 Soul이나 라틴어 anima가 원래 헬라어 프쉬케(ψυχή)의 번역어이며 이 프쉬케가 바로 심리치료(psychotherapy)의 어원이라는 사실만 생각하더라 도, 과연 영혼돌봄과 심리치료가 서로 다른 것일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고는 사실상 이렇게 서로 나뉠 수 없는 영혼돌봄과 목회상담이 서로 다른 사역으로 인식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개념상의 혼동과 분리라고 생각한다. 즉, 영(πνεῦμα)과 혼(ψυχή)의 개념이 혼동되고 실상 같은 의미인 혼과 마음이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고는 먼저 성경에 나타난 영과 혼의 의미와 양자의 상관관계를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경적 의미의 영혼돌봄이 오늘날의 목회상담이나 심리치료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럼으로써 인간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 양면에서 사람들 내면의 치유와 성숙을 돕는 통전적인 영혼돌봄의 성경적 기초를 마련하 고자 한다.
주제어 영혼돌봄, 목회상담, 영, 혼, 속사람
Abstract
Soul-Care for the Growth of the Inner Man: The Biblical Foundation of Holistic Soul-Care
Jae Hyun Lee(Ph.D.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Theology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When defined in the narrow sense of the pastoral application of general psychotherapeutic methods, the history of pastoral counsel ing spans only about 100 years. However, the traditional concept of pastoral care, referred to as “cura animarum” (care of the soul), has existed since the early church and continues to this day. The founda tion of this traditional care of the soul is the belief that God Himself is the One who cares for the souls and lives of human beings. Today, many Christians believe that soul care and pastoral psychotherapy are distinct ministries belonging to different realms. However, consider ing that the English term “soul” and the Latin term “anima” are origi nally translations of the Greek term “psyche,” which is the root of the term “psychotherapy,” one cannot help but question whether soul care and psychotherapy are truly distinct. This paper argues that one of the main reasons why soul care and pastoral counseling have come to be recognized as different ministries is conceptual confusion and separation. In other words, the concepts of spirit (πνεῦμα) and soul (ψυχή) have been confused, and the soul and mind, which are ac tually synonymous, have been regarded as different. Therefore, this paper first examines the meaning of spirit and soul as revealed in the Bible and their interrelationship. Based on this, it explores how bib lical soul care can be connected to contemporary pastoral counseling or psychotherapy. Through this, the paper aims to establish a biblical foundation for holistic soul care that helps people achieve inner heal ing and maturity in both their relationships with others and with God.
Keywords : Soul-Care, Pastoral Counseling, Spirit, Soul, Inner Man
접수일: 2025년 5월 8일, 심사완료일: 2025년 5월 29일, 게재확정일: 2025년 5월 30일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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