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전통은 ‘의롭다 하심’(칭의)과 ‘거룩해짐’(성화)을 구별하면서 도 분리하지 않는 특징적인 구원 이해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21세기 한국교 회와 학계에서는 여전히 법정적 칭의만을 강조하고 성화에 대한 부분은 등한 시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루터, 칼빈, 부써에게서 칭의와 성화는 실체적이고 실존적인 삶 안에서 분리 가능 한가, 아니면 서로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인가?” 본 논문은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세 명의 대표적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 터, 요한 칼빈, 마르틴 부써의 로마서 주석(롬 1:17; 8:29-30)을 정밀 비교한다.
이 두 본문은 각각
①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서 믿음으로’(롬 1:17) ― 칭의론 의 논리적 기초,
② ‘황금사슬’(praedestinavit‑vocavit‑iustificavit‑glorificavit, 롬 8:30) ―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으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성을 연구하고 자 한다.
세 개혁자는 모두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을 고수한다.
약간 달라지는 지점은 루터는 ‘실존적 위로’를 중심으로 한 수동적 의 (iustitia passiva), 칼빈은 ‘연합‑성령’ 조명 중심의 이중 은혜(duplex gratia), 부써는 ‘윤리 ․ 공동체 실천’ 중심의 이중 삼중 의(duplex/triplex iustificatio) 이다.
세 주석을 교차 분석하면서 칭의와 성화는 개념적으로 구별되지만, 신자의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삶 안에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 게 될 것이다.
II. 로마서 1:16-17 주해
1. 루터의 칭의
1) 하나님의 의(iustitia Dei)의 수동적, 전가적 의미
루터는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중세의 처벌하는 의 (iustitia activa)로부터 벗어나, ‘선물로 주어지는 의’(iustitia passiva, aliena iustitia)로 재정의하였다.
루터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virtus Dei)은 인간 안에 거할 수 없으며, 인간의 의지와 자율성은 철저히 부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Sed haec, ut dixi, oportet destrui omnino, saltem quoad affectum illorum; alioquin virtus Dei non erit in nobis.”
이 모든 것, 즉 인간의 자의적 능력은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1
1 Martin Luther, “Dictata super Epistolam ad Romanos (1515/16),” in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vol. 56 (Weimar: Hermann Böhlau, 1914), 160, ll. 19-23. (이후로는 WA 56:160, 19-23으로 표기) Cf. Martin Luther, Luther’s Works, vol. 25, ed. Hilton C. Oswald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72), 49. (이후로는 LW 25:49로 표기)
루터는 복음을 믿는 자가 세상 앞에서는 약하고 어리석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그 안에서 드러난다고 강조한다:
“Oportet eum, qui credit evangelio, infirmum fieri et stultum coram hominibus, ut sit potens et sapiens in virtute et sapientia Dei... Oportet ergo omnem virtu tem, sapientiam, iustitiam abscondi...”2
즉, 복음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시는 법정적 선언이다.
이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루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Iustitia Dei est causa salutis nostrae”(하나님의 의는 우리 구원의 원인이다).3
루터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행위로부터 만들어진 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 개념에 맞서 바울이 말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Iustus ex fide vivit)는 구절을 대조시킨다.4
2 Ibid., WA 56:162, 12-18; LW 25, 50.
3 Ibid., WA 56:163, 8; LW 25, 51-52.
4 Ibid., WA 56:164, 15; LW 25, 52. “Sic enim loquitur Aristoteles Ethicorum III: ‘Iusti fiunt ex operibus iustis’, sed hic dicit Apostolus, ‘Iustus ex fide vivit’.”
결국 루터의 칭의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수동적으로 전가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하며, 이는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와는 무관하다.
이러한 선언은 신자 안에서 실재적으로 능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법정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바깥의 의”(aliena iustitia)이다.
2) 성장하는 믿음(Fides crescens)
루터는 로마서 1:17의 “믿음에서 믿음으로”(ex fide in fidem)라는 하박국 2:4의 인용과 연결하여 신자의 삶에서 믿음의 지속성과 성장을 강조한다.
이 믿음은 단순히 과거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라며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다.
...non venit in speciem, sed semper in clariorem fidem... semper magis ac magis credendo, ut ‘qui iustus est, iustificetur adhuc’, ne quis statim arbi tretur se apprehendisse et ita desinat proficere, i.e. incipiat deficere.”
(믿음 은) 완성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더 밝아지는 믿음으로 자라난 다.
“의로운 자는 더욱 의롭게 될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누구든 자신이 이미 얻었다고 여기며 성장을 멈춘다면 그는 곧 퇴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5
루터 는 이러한 믿음의 성장 과정이 곧 성화의 실제 현장이라 본다.
따라서 신자가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confessio oris)은 반드시 삶의 순종(obedientia vitae) 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아우구 스티누스의 영과 문자에 대하여(De Spiritu et Littera) 제11장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A fide confitentium ore ad fidem eorum, qui obedi endo faciunt”
(입술로 고백하는 자들의 믿음에서 순종으로 행하는 자들의 믿음으로).6
루터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vivens fides, 즉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단순히 율법의 행위(opera legis)가 아니라 그리스도 를 신뢰하는 능동적 실천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Iustificatio requirit non opera legis, sed vivam fidem, quae sua operetur opera”(칭의는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자기의 행위를 낳는 살아 있는 믿음을 요구한 다).7
“Si opera desint, fides deest; neque Christus in corde est, sed mortua est fides”(만약 선행이 없다면, 믿음도 없으며, 그리스도는 마음속에 계시지 않 고,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8
5 Ibid., WA 56:165, 4-11; LW 25, 53(“semper magis ac magis...”).
6 Augustine, De Spiritu et Littera 11, PL 34:66; cf. WA 56:165, 11.
7 Luther, WA 56:166, 3; LW 25:54(“vivam fidem”).
8 Luther, “De fide (1535)”; Bernhard Lohse, Martin Luthers Theologie, tr. by Roy A. Harrisville (Minneapolis: Fortress, 1999), 370에서 인용; 베른하르트 로세, 마르틴 루터의 신학, 정병식 옮김 (서울: 한들 출판사, 2003), 370.
결국 루터에게 있어 믿음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라고 역사하는 믿음이며, 성화는 곧 성장하는 믿음의 열매 로 나타나야 한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신앙이 후퇴하고 있다 는 것이며, 이는 성화가 멈춘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마음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터의 칭의관은 오직 하나님의 의의 전가이며 수동적이다.
그러나 ‘믿음 의 성장’이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문제를 살펴볼 때 신자의 삶에서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했듯이 믿음은 ‘계속 자라 며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칭의만을 위해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에도 계속 작동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루터의 칭의-성화 이해의 발전사와 목회적 상호작용
루터의 칭의 해석은 1515/1516년 로마서 강해에서 iustitia Dei를 수동 적, 전가적 의로 재해석하며 본궤도에 오른다.
그러나 이 초기 통찰은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제에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신학적 축이 정교화된다.
곧, “많이 행함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의롭다”는 역설적 논리가 제시되며, 이는 칭의와 행위의 질서를 전면 재구성하게 된다.9
1535년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루터는 칭의의 법정성을 거듭 확인하면 서도, 참된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갈 5:6)한다는 바울의 테제를 윤리적, 교회적 귀결로 해석한다.
루터는 자의적 고행, 작위를 배격하면서, “이웃 사랑이 모든 행위를 압도하는 ‘태양’”10임을 반복한다.
9 Luther, “In Epistolam ad Galatas Enarratio (1535)”; WA 40.1-2; LW 26-27.
10 Luther, “The Heidelberg Disputation (1518)”; WA 1:353-374; LW 31:35-70.
이 대목은 “열매 없는 칭의”11 를 사실상 믿음 없음으로 간주한다는 그의 일관성을 보여 준다.
이 윤리적 귀결은 1537~1540년 반율법주의 논쟁에서 목회 ․ 권징 질서로 연결된다.
루터 는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설교는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단호히 반박하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회개를 위한 율법 선포가 필수라고 논증했다.
율법 설교 는 곧 회개의 설교라는 동일성 주장이다.
이는 칭의가 방종의 면허가 아님을 교회적 규율의 차원에서 제도화한 예다.12
동시에 루터는 예전 개편을 통해 교리교육과 성만찬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1523년 ‘비텐베르크 미사와 성만 찬 예식’과 1526년 ‘독일 미사’는 성례 참여 전 가르침과 훈련을 강조하고, 회중―특히 젊은 성도―의 성경 훈련과 문답 교육을 예전의 목표로 못 박는 다.
이는 ‘법정적 칭의’의 위로가 교리교육과 성례 규범 속에서 가시적 성화의 삶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된 목회적 장치였다.13
11 Martin Luther, “An Order of Mass and Communion for the Church at Wittenberg (1523),” Liturgy and Hymns, vol. 53 of Luther’s Works, ed. Ulrich S. Leupold, tr. by Paul Zeller Stroda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5), 19-40.
12 Luther, “Deutsche Messe und Ordnung des Gottesdiensts (1526)”; WA 19:44ff; LW 53:19-40.
13 Luther, “Antinomian Disputations (1537~1540)”; WA 39.1; cf. Holger Sonntag, ed., Only the Decalogue is Eternal (Minneapolis: Lutheran Press, 2008).
루터의 ‘법정적 칭의’는 하이델베르크 논제의 십자가 신학과 1535년 갈 라디아서 주석의 fides viva 해석 그리고 반율법주의 논쟁의 율법 선포 필수 논증을 거치며, 1523/1526년 예전 개편(교리교육, 성만찬 준비)이라는 목회 질서와 맞물려 ‘선언에서 삶으로’ 이동한다.
2. 칼빈의 칭의
1) 성령의 조명과 실제적인 작용의 통로
칼빈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효력을 나타내는 보편적 능력이 아니며, 오직 성령의 조명을 받은 자에게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치욕을 견딜 준비, 복음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라고 했다.
이는 복음의 중요성,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고자 함이며, 복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효시임을 말한다.14
“Verum quia non operatur in omnibus efficaciter, sed tantum ubi spiritus interior magister cordibus fiduciam illucet, ideo subicit, omni credenti.” 복음은 모든 사람 안에서 효력 있게 작용하지 않고, 오직 내면의 스승이신 성령이 마음에 믿음을 비추어 주실 때만 역사하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라고 덧붙인다.15
그에 게 복음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 작용의 통로이며,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악함(vitiosa malitia)으로 인해 복음을 거절하며 오히려 그 파멸을 자초한다.16
이로 인해 복음은 신자에게는 생명이지만, 불신자에 게는 “사망의 냄새”(고후 2:16)로 나타나는 복음의 이중성을 지닌다.17
14 Jean Calvin, Commentari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Corpus Reformatorum 49 (Brunsvigae: Schwetschke, 1891), 21-22. (이후로는 CR 49: 21-22로 표기)
15 Ibid., CR 49:169-170.
16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vols., ed. John T. McNeill, tr. by Ford L.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3.11.1, 727.
17 Calvin, CR 49:21-22.
그가 성령의 조명이 곧 하나님의 실제적인 작용의 통로라고 주장하듯 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곧 성령의 효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효력이란 칭의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즉, 칼빈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potentia Dei) 이며, 이를 통하여 구원이 실행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 다.
이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 작용의 통로이다.
2)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성장 ― 관계적 조건과 점진적 확신
칼빈에게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는 단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을 이루기 위한 필수 전제이다.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Si enim salutem quaerimus, hoc est vitam apud Deum, quaerenda primum est iustitia, per quam illi reconciliati vitae fruitionem obtineamus”
(우리가 구원, 곧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원한다면, 우리는 무 엇보다 먼저 그분과 화해하게 하는 의를 구해야 한다. 바로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의 유익에 참여하게 된다).18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복음 안에 계시되며, 믿음을 통해 신자에게 전가(imputatio)된다.
칼빈은 이를 하나님 의 심판대(tribunal Dei) 앞에서 인정받는 객관적 ․ 선언적인 법정적 의로 규정하며, 사람들의 주관적 평가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적 의(iustitia homi num)와 분명히 구별한다:
“Iustitiam Dei accipio, quae apud Dei tribunal approbetur... quam contra hominum iustitiam solet appellare”
(나는 하나 님의 의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승인되는 의로 이해한다. 이는 사람들의 의, 곧 인간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의와는 다르다).19
또한 칼빈은 “믿음에서 믿음으로”(ex fide in fidem)라는 표현을 통해 믿음 의 성장성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신자의 믿음은 고정된 단일 상태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라나는 생명력이다.
“Quantum progreditur fides nostra, tan tum proficitur in hac cognitione”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는 만큼, 이 ‘의’에 대한 지식도 함께 자라난다).20
칼빈은 이러한 믿음의 성장을 경건의 지식 (cognitio pietatis)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점점 더 명확하게 조망하는 방향 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믿음의 성장은 신자의 믿음 안에서 자라는 인격적인 성장이다.
즉, 믿음은 단순히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라 나는 생명력이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날수록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와 확신도 더욱 자라나기 때문이다.21
18 Ibid., CR 49:22.
19 Ibid., CR 49:22:8-16.
20 Ibid., CR 49:22:8-16.
맥도널드(Suzanne McDonald)는 칼빈의 칭의론을 성령과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고 칭의를 연결하는 삼각 구도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묶는 결합의 띠로서 실제적 매개로 이해하는 연합의 존재 론22을 만든다.
성령의 연합 안에서 신자는 곧바로 칭의와 성화, 즉 ‘이중 은 혜’(duplex gratia)로서 한 묶음이 된다.
즉, “법정적-참여적 이중성”(foren sic‑participatory duplexity)으로 명명하며, 칭의가 연합의 법적 차원이라면, 성화는 동일 연합의 변혁적 차원임을 강조한다.
법정적 칭의와 존재론적 성화가 동시에 주입 ․ 전가된 것이다.
칭의는 연합의 “법적 차원”, 성화는 “실재적, 윤리적 차원”23이다.
또한 믿음에서 믿음으로 성장은 성령은 첫 믿음만이 아니라 ‘ex fide in fidem’의 지속적 성장 과정24을 계속적으로 밝히는 인식론 적 빛―믿음이 자랄수록 의의 지식도 깊어진다―이다.
맥도널드는 이를 ‘인식론적 성령론’(epistemic pneumatology)이라 부르며, 연합‑조명‑칭의의 긴 밀성을 현대 인식론, 윤리 논의와 연결한다.
맥도널드는 이 과정을 ‘성령에 의해 중재된 참여’(pneumatologically‑mediated participation)라 부르며, 연 합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한 항목이 아니라 칭의, 성화, 영화 전체를 포괄하는 ‘해석학적 매트릭스’로 재규정한다.25
21 “... quia, quantum progreditur fides nostra, tantum proficitur in hac cognitione”(…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만큼, 우리는 이 신앙의 지식 안에서 함께 성장하게 된다).
2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st. 3.1.1(= Battles ed., 537). “Spiritus sanctus est vinculum quo Christus nos sibi efficaciter coniungit.”
23 Calvin, Inst. 3.11.1; 3.11.6.
24 Calvin, Commentarius in Ep. ad Romanos 1:17(=CR 49:22; “quantum progreditur fides...”).
25 Suzanne McDonald, “The Spirit and Union with Christ,” The Oxford Handbook of Calvin and Calvinism, eds. Bruce Gordon and Carl R. Trueman (Oxford: OUP, 2021), 612-633.
3. 부써의 칭의
1) ‘믿음 안에서 나타난 의’와 삶의 갱신
부써(Martin Bucer)에 따르면, 복음은 효력 있는 하나님의 도구(instru- mentum efficax)이다.
부써는 로마서 1:17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두 겹의 구조, 즉
① 즉시 주어지는 죄 사함의 선물(donum remissionis) 과
② 일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역사(opus nova creatio)로 이해한 다.
이 두 요소는 동시적이며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은혜 사건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는 부써의 ‘이중 의’(duplex iustitia) 개념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는 이를 불과 열의 비유로 설명한다.
불이 존재하면 반드시 열을 발산하듯, 죄 사함이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삶의 갱신(성화)이 뒤따른다.
불이 열을 생산하듯, 믿음은 필연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낳는다.26
“Ex fide in fidem ― id est, a fide incipiente ad fidem roboratam pro greditur, sicut ignis calorem continuo parit et auget”
(믿음에서 믿음으로란, 초기의 믿음에서 강건한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이며, 이는 불이 열을 계속해 서 발생시키고 증가시키는 것과 같다).27
즉, 부써는 복음을 통해 받은 칭의가 그 자체로 삶의 갱신을 포함한다고 본다.
이는 루터가 강조한 수동적 전가 (iustitia passiva)와 상통하면서도, “살리는 성령”(Spiritus qui vivificat)을 통해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믿음으로 전환된다.
믿음은 단순히 진리를 수납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과 선한 행위로 외화(外化)되는 실천적 능력이다.
26 Martin Bucer, Enarratio in Epistolam D. Pauli ad Romanos, ad Rom 1:17, Strasbourg 1536; 2nd ed. Basel, 1562; CR 6:25. “Sicut enim ignis necessario producit calorem, ita vera fides necessario producit dilectionem.”
27 Martin Bucer, Metaphrasis et Enarratio in Epistolam ad Romanos (Basel: Johannes Oporinus, 1562), 25.
결국 부써에게 로마서 1:17의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단지 신앙의 전통 계승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되는 인격의 내적 성장을 의미하며, 열을 발산하는 불처럼 믿음은 반드시 변화와 사랑을 동반한다.
칭의와 성화는 시간적으로 구분될 수는 있지만, 은혜의 실제 작용에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III. 로마서 8:30 ‘황금사슬’ 해석 비교
1. 루터: 예정, 소명, 칭의, 영화의 단선적 구원 체계
1)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
루터는 로마서 8:29를 주해하며 예정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 함’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미리 아신 자들(quos praescivit)을 동일한 모습 이 되게 하셨다”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Sit constructio: quos praes civit conformes fieri, hos et praedestinavit conformes fieri.”
문장 구조는 다음 과 같다:
“미리 동일한 모습이 되리라 아신 자들을, 그들을 또한 동일한 모습이 되게 예정하셨다.”28
28 Luther, WA, 56:419, 12.
루터에게 예정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imago)을 닮아가는 자들이며, 이 형상은 단지 영화(gloria)의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고난과 치욕(passio et ignominia)을 포함한 전 생애적 동형화를 의미하며, 결국 존재론적 변화에 있다.
그는 선택이 “믿음”에 기초한다고 보며, 외부에서 주어진 의(aliena iustitia)는 인간의 행위 능력을 철저히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 외부에서 전가되며, 인간의 행위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다.”29
루터의 주석은 그리스도를 “맏아들”(primogenitus)로 붙드는 가족 공동 체적 구원 질서를 포함한다.
루터는 “in multis fratribus”라는 바울의 표현에 주목하며, 이는 “모든 사람”이 아닌 “많은 형제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맏아 들이 되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루터는 앞서 언급한 예정된 자들의 세 부류―
① 구원받기를 소망하 는 자들,
② 거부 당해도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자들,
③ 정죄 당해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들―
를 통해 믿음의 자람을 구조적 단계로 드러낸다.30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야말로 예정된 자들의 최종적 목적지이자 신자의 삶의 방향성이다.
따라서 믿음은 외적인 선언에 만족하 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따라 자라가는 방향으로 전진해야 한다.
루터의 칭의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에 중심을 둔다면, 이를 ‘의의 전가와 법정적’이라는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은 루터의 칭의를 개념 에만 머물게 하는 일이다.
그는 믿음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는 곧 칭의와 성화를 개념적으로는 나눌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다.31
맥그래스도 종교개혁의 칭의 교리의 핵심적 요소는 칭의와 중생을 의도 적으로 구분한 것이며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라는 문맥 안에서 둘을 구분 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전적으로 개념적 구분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32
29 Luther, WA, 56:419, 12.
30 Luther, WA, 56:418-419.
31 이성림, “루터의 칭의와 사랑: 테오시스(Theosis),” 「신학과 세계」 104 (2023), 127-159.
32 Alister E.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3r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293; 앨리스터 맥그래스, 하나님의 칭의론, 한성진 옮김 (서울: CLC, 2008), 29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개념’의 구분 안에 있는 것이지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삶으로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점을 잊어서 는 안 될 것이다.
2) 십자가 신학에 따른 예정(Praedestinatio crucis)
루터의 주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리”(prae-)라는 접두어는 예정 (praedestinatio)의 절대성과 하나님의 주권을 수사적으로 강화하는 표현으 로 사용된다.
특히 8:29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다(conformes fieri imagini Filii eius)고 두 차례 반복하며, 이는 영광과 영화뿐 아니라 고난과 치욕의 참여(passione et igno minia)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루터는 이와 같은 해석을 “십자가 신 학”(theologia crucis)의 틀 안에서 설명하며, 영화의 영광은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동반한다고 본다.
로마서 8:30의 네 가지 동사 praedestinavit(미리 예정하심) → vocavit(소 명) → iustificavit(칭의) → glorificavit(영화롭게 하심)는 모두 단순 과거형 으로 배열되어, 바울이 구원의 불가역성과 하나님의 작정의 연속성을 강조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루터는 이에 대응하여 praediffinivit(미리 규정[경계, 정의]하다), praestituit(정하심), praelegit(선택적 은혜), proposuit(계획하 심) 등의 동의어를 나열함으로써 예정의 선재성과 확고함을 더욱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신자는 이미 선택된 자이며, 이들은 구원의 전 과정이 “미리” 준비된 자들이다.
인간의 의지나 결정은 이 구원의 사슬 밖에 있으며, 루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 바깥에 있는 것, 즉 하나님 의 선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33
33 Luther, WA 56:419, 5-6.
결국 루터에게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소명-칭의-영화의 전 구원 질서를 포함하고 있는 구조이며, 이는 인간 의 공로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사건이다.
2. 칼빈의 그리스도와 실체적 연합
1) 연합의 틀 속 예정
칼빈의 선택된 자를 부르시는 효과적인 소명(vocatio efficax)은 반드시 믿음과 칭의와 영광에 이르게 하는 선택적 질서가 드러난다.34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
부르신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위함이며,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써 모든 신 자는 연합되어 동일한 은혜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 의 의가 복음 속에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구원의 체계에서, 복음의 중심점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성서와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성육신론을 다룰 때, 성자 그리스도께 서 자신의 신성과 함께 “인간 육신의 본체를 취하신”(assumptio carnis) 것을 강조했으며,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인격”(una persona) 안에 서 신성과 인성 그 두 본질의 “연합”(únio) 역시도 중요하게 강조한다.35
34 Nam quos praescivit(그가 미리 아신 자들). “Ordo electionis hic nobis patefacitur, quo Deus suos a communi perditione segregat.” 하나님의 택하심의 질서가 여기에서 밝혀지는데, 그 질서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모든 인류에게 공통된 멸망의 길에서 불러내어 따로 세우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여기에서 선택의 질서가 드러난다. 칼빈의 로마서 8:29 주석에 서 나온다. Calvin, Comm. in Rom. ad 8:29; CR 49:169.
35 프랑수아 방델, 칼빈: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 김재성 옮김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6), 258-268; 최성렬, “기독론과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Únio cum Christo) 간의 신학적 연관성 고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1 (2024), 144.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칼빈의 신학 안에서 기독론(성육신론)과 구원 론은 상호 연결되고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칼빈이 주장하는 연합은 신비적 연합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 이뤄지는 “실체적” 연합을 의미한 다.36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본받기 위함이 이러한 선택적 질서의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신자들의 양자 됨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되기 위함이었으 며,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들은 “모든 형제들이 하나로 결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37
36 김은수, “칼빈의 구원론 이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67 (2010), 170.
37 “... ut sciamus nos omnes in illum adunitos esse, participes gratiae eiusdem”(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맏아들이 되신 그분 안에서 모든 형제들이 하나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Calvin, Comm. in Rom., CR 49:169.
2) 구원의 서정 속 칭의와 성화
동사 사중 반복 praedestinavit-vocavit-iustificavit-glorificavit는 불가역 적, 연속적 구원 사슬을 이룬다.
즉, 그에 의하면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외적인 부르심이 아니라,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서 믿음을 낳게 하는 부르심이라는 것이다.38
칼빈은 믿음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한다.
또한 그는 glorificavit(영화롭게 하셨다)와 obsignata gloria(인쳐진 영광)이다.
이는 ‘인쳐진’(obsignata)이 완료 수동 분사 여성 단수 주격으로서, 이미 이뤄 진 사실을 뜻한다.
영광이 이미 이뤄진 것이다.
즉, 선택이라는 과거와 영화라는 미래가 하나의 문장 안에서 이미 확정된 것을 말한다.
이 문장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료시제이다.39
38 “... quae Spiritus sancti illuminatione fidem generat. Ideoque ad gloriam perducuntur, quia in ipsa vocatione radicatur spes salutis aeternae”(… 성령의 조명을 통해 믿음을 낳게 하는 효과 적인 부르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효과적인 소명 안에서 영광의 소망이 뿌리내리기에,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Calvin, Comm. in Rom., CR 49:169.
39 quos praedestinavit(미리 정하셨고) → hos et vocavit(부르셨고) → hos et iustificavit(의롭다 하셨고) → hos et glorificavit(영화롭게 하셨다)
glorificatio(영화)는 실질적으로 신자의 삶에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아직 경험되지 않은 미래 사건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서 우리는 영화로 움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선택 받은 신자는 미래의 사건(eschatological future)이지만, 과거형을 써서(glorificavit) 하나님 안에서 영화는 이미 확정된 미래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간주된 다고 말하고 있다.
3) 이미와 아직: 구속사적 시간 구조 속의 영화
칼빈의 로마서 8:30 주석은 구속사적 시간론(ordo temporis salutis)에 입 각하여 전개된다.
이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을 단순한 논리적 배열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구현되는 실제 구속 사건의 전개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이 구속사적 틀에서 바울은 예정-소명-칭 의-영화의 단계를 완료형(perfect tense)으로 기술함으로써, 아직 실현되지 않은 구원의 미래조차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이미 완결된 사실로 선언한다.
특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glorificavit)는 종말론적 완성의 사건을 완 료형40으로 묘사함으로써, 구원이 단지 가능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작정 안에서 확실히 인쳐진 은혜임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Proinde in fide coepta gloria veraciter iam nobis obsignata est”(그러므로 시작된 믿음 안에서 영화는 참으로 이미 우리에게 인쳐진 것이 다).41
. 40 glorificavit. 아오리스트, “현재 소유에 비견될 보증”이다. lnst. 3.11: 두 가지 유익 ― 법정적 칭의의 확정.
41 Calvin, Comm, ad Rom. 8:30, CR 49:170.
칼빈은 성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소명(vocatio)과 칭의(iustificatio) 사이의 성령의 내적 사역, 곧 믿음을 낳게 하는 성령의 조명을 강조하며 거룩함(sanctitas)의 필연성을 암시한다.
“Non tamen loquitur generaliter de vocatione externa, sed de illa efficaci, quae Spiritus sancti illuminatione fidem generat.”
여기서 바울은 단순한 외적 부르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해 믿음을 낳는 효과적인 부르심을 말한다.42
결국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적용되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의 불가역적 작정 안에 단일하고 연속적인 질서로 보증된다.
이 질서는 바울이 로마서 8:30에서 압축적으로 기술한 “구원의 황금사슬”(cat ena aurea)로, 신자에게 구원의 확실성(certidudo salutis)과 성도의 견인 (perseverantia sanctorum)을 보장한다.
“glorificavit라는 완료시제는, 인간 의 경험 속에서는 아직 미래인 것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는 이미 성취된 사실임을 나타낸다.”43
이와 같이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의 구조는 구 속사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틀이며, 칼빈은 이를 통해 구원의 현재적 보증성 과 미래적 완성 사이의 신학적 긴장을 해석해 낸다.
따라서 로마서 8:30은 단순한 구원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시간 속에 인쳐지는 실재적 사건임을 선포하는 본문이다.
특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glorificavit)는 아직 미래에 실현될 사건임 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으로 서술된다.
이는 바울이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 과 작정의 확실성에 근거하여 미래의 영화도 현재 이미 확보된 실재로 간주함 을 의미한다.44
42 Ibid., CR 49: 169.
43 Douglas J.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535-536.
44 Ibid., 535-536.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glorificavit의 완료형 사용을 주목하고, 하나님께서 “속임도 변함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영화는 “믿 음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인쳐졌다”(gloria veraciter iam nobis obsignata est)라고 해석한다.45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적용 되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단일하고 폐기될 수 없는 연속성으 로 보장된다.
그는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 만, vocatio와 iustificatio 사이의 성령의 내적 사역을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룩함이 구원의 필연적 경로임을 암시한다.46
이처럼 칭의-성화 영화는 단순한 교리적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실재적 구속 질서이다.
칼빈은 이 구절을 통해 믿는 자의 구원이 시작에서 끝까지 확정된 여정임을 해석하며, 구원의 견인(perseverantia sanctorum)을 옹호하는 성경적 근거로 삼는다.47
바울이 로마서 8:30(προώρισεν-ἐκάλεσεν-ἐδικαίωσεν-ἐδόξασεν) 에서 사용한 사중 동사는 모두 아오리스트로 제시된다.
칼빈은 이를 하나님 의 시각에서 본 구속 사역의 완료성을 드러내는 수사로 읽는다.
그는 “영화는 아직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드러났으나, 그분의 영광은 우리 의 영광을 현재 소유에 비견될 만큼 확실한 보증으로 제시한다”48고 해석한 다.
이때 확정된 미래의 현재화는 “프로렙시스”(선취)의 문체가 아니라 언약 의 불변성과 선택의 견고성에 근거한 신학적 선언이다.
이러한 독해는 Inst. III.11의 ‘두 가지 유익’(duplex beneficium)―법정적 칭의와 존재론적 성화―의 구별 속 결합을 전제한다.49
45 Ioannes Calvinus, In Epistolam Pauli ad Romanos Commentarius (Argentorati: Wendelinus Rihelius, 1540); ad Rom. 8:30; Cf. Corpus Reformatorum 49, ed. Edward Reuss (Brunsvigae: Schwetschke, 1895), 170. “Proinde in fide coepta gloria veraciter iam nobis obsignata est.”
46 Ibid., 169. “Non tamen loquitur generaliter de vocatione externa, sed de illa efficaci, quae Spiritus sancti illuminatione fidem generat.”
47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4, Holy Spirit, Church, and New Creation, ed. John Bolt, tr. by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2008), 248-251.
48 “Though glorification is not yet exhibited except in our Head... our hope may be justly compared to a present possession.”
49 “Nam cum Christum iustitiae nostrae titulo tenemus, simul sanctificationem quoque
consequimur.” 그를 붙잡을 때 동시에 두 가지 유익을 얻는다.즉,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義)라 붙잡을 때 동시에 성화 또한 얻는다.”
Inst. 3.11.1(1559), CR 30, 727.
칭의는 법정적 수납의 사건이되 성화는 성령에 의한 삶의 진전으로, Inst. III.14가 다루는 ‘진전’은 칭의의 증가가 아니 라 거듭남의 심화이다.50
50 “시작된(inchoata) 의”, 즉 거듭남과 경건의 진전(regeneratio/progressus pietatis)이지, 칭의가 점차 커지거나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칭의는 단번에 완전하게 주어지지 만, 그 의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불완전하며 죽음을 향해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될 때까지 ‘진전’의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이미와 아직’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Inst. 3.14.9. CR 30, 743.
따라서 로마서 8:30의 완료적 시제(아오리스트)는 연합 안에서 ‘이미’ 보증된 구원의 확정성을, Inst. III.14의 진전은 ‘아직’의 성화 여정을 지시한다.
제도사적으로 제네바의 「교회장정」(1541)과 콘시스토리는 이러한 연합 성화의 교리를 주간 권징, 교훈, 성례라는 제도적 장치로 구체화했다.
장정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직을 규정하고, 목사단, 콘시스토리의 정례 회합과 권징의 목적(회복)을 명시한다.
콘시스토리는 매주 목요일에 회집하여 신자 의 예배, 성찬, 가정, 경제 윤리 전반을 치리했다.
성찬의 주간 시행을 지향한 칼빈의 의도는, 실제로는 시의회의 결정으로 분기 시행에 그치면서도, 연합 과 성화의 공적, 공동체적 표지로 기능했다.
3. 부써의 이중 성화론
1) 황금사슬 안의 ‘재창조적 성화’
로마서 8:30에 대한 주석에서 부써는 전통적인 예정-소명-칭의-영화의 황금사슬(catena aurea)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이에 재창조적 성화 (renovatio)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이를 불과 열의 비유 로 설명한다.
불이 반드시 열을 수반하듯이, 참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과 새로운 삶을 낳는 성화의 열매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Sicut calor a foco ― 불에서 열이 나오듯, 믿음은 즉시 사랑을 낳아 선한 행위를 흐르게 한다.”51
이는 믿음을 통한 칭의가 곧 성화를 수반하는 구조적 사건임을 의미하며, 부써는 이 둘을 분리 가능한 구분이 아니라 불가분의 연속성으로 본다.
믿음에서 믿음으로(ex fide in fidem) 진행되는 신자의 여정 은 단지 ‘선포된 의’를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변화되는 믿음의 성장 과정이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변화도 있을 수 없다.”52
부써는 복음이 신자의 내면에서 성령에 의해 점화되고 확장되는 살아 있는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강조 기호(< >)를 사용하여 “<열>(calor)이 점차 확산되듯이”라고 주해하며,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 사랑과 행위로 이어진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성화는 칭의 이후의 별개 단계가 아니라, 칭의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은혜의 내적 필연성이다.
이러 한 구조 속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unio cum Christo)하며 성례전, 말 씀에 대한 순종, 성령의 내적 사역을 통해 구원의 여정을 걸어간다.
결국 부써 에게 칭의란 법정적 선언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존재 론적 이중 사건이며, 이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능동적이고 실재적인 구원 행위이다.53
51 Bucer, Metaphrasis et Enarratio in Epistolam ad Romanos, 25.
52 Ibid., 25.
53 부써의 능동적 복음이 실재적인 구원에 참여된다고 하는 것은 삶과 칭의가 분리되지 않은 실재 적인 참여로 드러난다. Joseph Sherrard, “Retrieving Martin Bucer’s Theology of Penance,” Bulletin of Ecclesial Theology 8 (2021/2), 45.
이는 필연적으로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한다.
2)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
또한 부써는 로마서 8:29-30에 나타난 구원의 사슬(catena salutis)을 단순 한 서열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과 작정의 구속사적 표현으로 해석한다.
그는 “미리 아신다”(praescire)는 표현을 단순한 인식(nuda notitia)이 아니라 부성적 사랑으로 품으심이라고 보며, 예정(praedestinatio)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사랑의 안배(dispositio Dei)로 규정한다.
예정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 도의 형상과의 일치(conformitas ad imaginem)이며, 이는 양자 됨의 인 (adoptionis sigillum)으로서 신자의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의 이중 의(duplex iustitia) 또는 이중 칭의(duplex iustificatio) 개념의 두 요소는 단순히 병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칭의 안에 동시에 실재하는 이중 작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칭의는 “단회적 선언”인 동시에 “실재적 수여”(realiter donata)다.54
이러한 이중 의에 대하여 최동순은 어거스틴이 ‘죄 사함’(법정적 의)과 ‘내적 갱신’을 동시에 포함해 두 은혜라고 설명한 것을 지적한다.
그는 “예정‑소명‑칭의‑영화” 사슬을 단회적 사건이자 현재적 효력 으로 해석한다.
칭의(세 번째 일)가 이미 시작되었고(행위로 자라남) 영화까 지 이어짐으로 설명한다.55
부써의 이중 칭의론은 후속 학자들에 의해 삼중 칭의(triplex iustificatio)56 로 발전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54 부써의 초기 저작(1532)의 성화 이해에서 중세의 완전론 전통과 맞닿아 있다. 부써의 칭의-성화 의 통합 논지가 중세와 단절과 연속 모두 함유함을 알 수 있다. Ueli Zahnd, “Martin Bucer’s First Theological Program and the Late‑Medieval De perfectione Tradition,” Revue d’histoire et de philos ophie religieuses 101 (2021/2), 189‑221.
55 최동순, “Divine Acceptance of Sinners: Augustine to the Reformers,” Perichoresis 12 (2014/2), 163‑184, 특히 각주 35. 168-171은 요약 설명.
56 삼중 칭의(triplex iustificatio)는 핑크(2007)가 제시한 주해적 가설임을 전제한다. 즉, 제1칭의 (죄 사함)-제2칭의(내적 갱신)-제3칭의(영화)로의 구조화 자체가 본문에 ‘명시적’으로 서술된 체계는 아니며, 주석의 시제 ․ 주제 전개를 분석하여 도출한 재구성이라는 점을 밝힌다.
데이비드 핑크(David C. Fink)는 로마서 8:30 주석을 기반으로 부써의 칭의를 다음과 같이 분해한다:
제1칭의: 죄 사함 (법정적 선언),
제2칭의: 새 창조(내적 갱신),
제3칭의: 공적이고 종말론적 영화(glorificatio).
핑크는 “iustificavit는 제1, 2칭의에, glorificavit는 제3칭 의에 해당한다”고 보며, 로마서 2:13, 7장, 8장, 12장에 걸쳐 삼중 칭의의 주해 적 발전을 추적하였다.57
브라이언 루지오요(Brian Lugioyo)는 부써의 칭의 영화 구조를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종말론 틀에서 해석하며, 부써 의 복음 이해가 단지 법정 선언을 넘어선 내적 변화와 윤리적 실천의 통합 구조라고 평가한다.58
앤서니 레인(Anthony N. S. Lane)은 레겐스부르크 협상 (1541)의 제5조에서 부써와 멜란히톤이 “이중 칭의”를 통해 로마 가톨릭의 “내적 변화” 개념과 절충을 시도했다고 보며, 이를 중재 신학적 혼합이자 실질적 합의 모델로 해석하였다.59
마아아스(Korey D. Maas)는 레겐스부르 크 협상(1541)에서 논쟁된 ‘이중의’ 용어의 근원이 부써에게서 재해석되었다 고 한다.60
57 핑크는 “삼중 칭의가 바울의 황금 사슬 구조에 흡수되며, 예정‑영화 사이를 ‘칭의’가 관통 축으로 연결”되었다고 설명하며, 용어 대신 다중 시제로 암시한다: ‘iustificavit’(1, 2), ‘glorificavit’(3). 핑크는 삼중 칭의는 예정과 칭의와 영화가 하나님의 은혜 사건이지만, 예정(미리 아심/과거)-칭 의(죄 사함과 새 창조/현재)-영화(미래의 완료) 칭의는 예정과 영화를 잇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그는 이를 “칭의가 곧 부써 soteriology의 통합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David C. Fink, “The Doers of the Law Will Be Justified: The Exegetical Origins of Martin Bucer’s Triplex Iustificatio,”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58 (2007), 508‑514.
58 Brian Lugioyo, Martin Bucer’s Doctrine of Justification: Reformation Theology and Early Modern Irenicism (Oxford: OUP, 2010), 52.
59 Anthony N. S. Lane, “Bucer, Melanchthon and the Regensburg Interim,” The Reformation Theologians, ed. Carter Lindberg (Oxford: Blackwell, 2002), 234-252.
60 Korey D. Maas, “Double Righteousness after Regensburg,” The Regensburg Article 5 on Justification (Oxford: OUP, 2019), 178-205.
맥그래스는 “의롭게 된 믿음은 반드시 온전한 경건과 복된 삶(die ganze Frommheit und Seligkeit)을 산출해야 한다”고 보는 부써의 입장을 소개하면 서, 그의 칭의론이 신자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확장됨을 강조한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칭의되지만, 그 이후의 삶은 선행에 의해 입증 되어야 한다”는 부써의 교훈을 윤리적 긴장 속에서 평가하며, 이를 다소 도덕 주의적으로 본다.61
61 맥그래스, 하나님의 칭의론, 337.
IV. 칭의론 요약 비교
<표1. 루터, 칼빈, 부써의 칭의 이해 비교>
항목 루터(Martin Luther) 칼빈(John Calvin) 부써(Martin Bucer)
칭의의 본질 법정적 선언 연합 속 선언 이중 칭의
(iustificatio forensis) (법정+관계적) (duplex iustificatio) ― 법정+실재 변화
그리스도의 의 외적 전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전가+성령에 의한 실현 (realiter donata)
(aliena iustitia) 속 수납
믿음의 역할 수동적 수납,성장함 성령의 조명에 따른 믿음 → 사랑 → 실천 (sicut calor a foco)
능동적 신뢰
성화와 관계 칭의 이후에 따름 연합 안에서 필연적 귀결 칭의 안에 성화 내포 (opus renovationis)
(구분됨)
영화의 시제 종말론적 미래 소망 glorificavit 완료형: glorificatio=iam nunc (현재적 영화 시작)
확정된 미래
구원 구 조 예정-소명-칭의-영화 하나님의 작정의 은혜의 불가역적 사슬 (disrumpi non potest)
(위로 중심) 확 실성 강조
< 표 2. 예정-칭의-영화 시간 구조>
루터 칼빈 부처
예정 하나님의 절대주권 언약 속 사랑 인격적 품으심 (dispositio Dei)
소명 말씀 선포 중심(외적) 외적+내적 소명 구분 말씀+성령의 동시 작용 (simul operatur)
칭의 단회적 선언, 의의 전가 연합 속 선언, 확신 강조 죄 사함+새 창조 (donum et opus)
루터, 칼빈, 부써의 칭의론은 로마서 1:16-17과 8:29-30 본문에 대한 주석을 통해 공통적으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납’을 강조하지만, 각각의 강조점과 구조는 다르게 나타난다.
루터는 앞서 살펴본 결과 칭의를 하나님의 선언적, 법정적 의로 이해하며, 믿음의 성장과 성화의 동반을 명확히 주장하며, 성화가 멈춘다는 것은 곧 믿음이 후퇴하는 것임을 주장하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루터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신칭의를 분명하게 강조함과 동시에 의롭게 된 사람은 성화된다는 교리를 칼빈과 동일하게 주장한다.62
루터는 로마서 8:30에 나타난 예정-소명-칭의-영화의 구속 질서를 “하나 님의 불가역적 구원 사슬(catena aurea)”로 해석하며, 각 단계는 단순 과거형 동사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작정이 이미 완결된 사실임을 강조한다.
루터의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속에서 일 어나는 실재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63
62 이승구,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적실성,” 「신학정론」 35 (2017), 177.
63 Calvin, Inst., 3.16.1; 유태주, “칼빈의 이중 은혜론의 의미와 작용,” 「한국기독교신학논총」 77 (2011), 73.
칼빈은 로마서 8:30에 나타난 예정-소명-칭의-영화의 구조를 하나님의 불가역적 작정에 따른 구원의 연속 질서(catena aurea)로 해석한다.
그는 이 질서를 인간의 논리적 사유가 아닌 구속사적 시간론(ordo temporis salutis) 속에서 이해하며, 각 동사는 완료형이다.
성도의 삶에서 “이미” 인쳐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 긴장을 반영하며,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 믿음이 생성되고, 그 믿음 안에서 구원이 시작부터 끝까지 보증된다는 사실 을 강조한다.
비록 칼빈은 성화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소명과 칭의 사이의 성령의 사역을 통해 거룩함(sanctitas)의 필연성을 암시하며, 전 과정을 하나 님의 언약과 은혜의 단일한 작정 안에 있는 구속 질서로 제시한다.
부써는 칭의를 죄 사함(donum remissionis)과 새 창조(opus renovationis) 로 구성된 이중 칭의(duplex iustificatio)로 보며, 이 둘은 불과 열의 관계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작용이라고 해석한다.
부써는 로마서 8:29-30의 예정-소명-칭의-영화 구조를 하나님의 인격적 사랑이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구속사적 질서(catena salutis)로 해석하였다.
예정의 목적은 신자를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conformitas ad imaginem) 시키는 데 있다.
부써의 칭의는 실재적으로 수여되는 변화(realiter donata) 로 확장하며, 이중 칭의(duplex iustificatio)를 주장한다.
그는 이를 불과 열의 관계(sicut calor a foco)처럼 설명하며, 참된 믿음은 사랑과 삶의 갱신을 필연 적으로 동반한다고 본다.
후속 학자들에 의해 삼중 칭의(triplex iustificatio) 로 발전되었으며, 부써의 복음 이해는 단순한 법정 선언을 넘어서 성령에 의해 실현되는 내적 변화와 윤리적 경건(die ganze Frommheit und Seligkeit) 을 포함하는 구속적 현실로 제시된다.
세 인물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기초한 칭의를 강조하지만, 루터에게 실제적이고 실존적 확신 그리고 성화의 후퇴는 곧 믿음의 문제다.
믿음은 성장되며 지속되어야 한다.
이는 그의 칭의와 성화가 개념으로는 분리되지 만 실제적 ․ 실질적으로는 삶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과 성령의 조명을 강조한 구속사적 확정성을 발견한다.
칼빈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부써는 죄사함과 새 창조라고 하는 이중 칭의를 주장하면서, 윤리적 실천 에 중점을 두며 서로 다른 신학적 강세를 형성한다.
V. 나가는 말
본 연구는 루터, 칼빈, 부써가 로마서 1:16-17과 8:29-30을 주석한 원전 텍스트를 정밀 대조함으로써, 세 종교개혁자의 칭의 이해가 하나님의 은혜 믿음의 수납이라는 공통 토대 위에서 ‘법정 선언, 연합, 변혁’이라는 각기 다른 구조로 전개됨을 밝혔다.
루터는 수동적 의(iustitia passiva)의 단회적 전가를 강조하지만,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을 통해 칭의와 성화는 개념적으로 구분되되 실존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신자 연합의 띠’(vinculum)로 규정하고, 연합 안에서 이중 은혜(칭의, 성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부써는 ‘죄 사함+새 창조’ 라는 이중(삼중) 칭의 틀을 통해 칭의, 성화, 영화를 단번에 통합한다.
이 비교는 곧 “칭의와 성화가 시간상 구별될 수는 있으나 신자의 실존적이 고 실체적인 삶 안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오늘날 개혁신학은 루터의 실존적 위로, 칼빈의 연합, 확정성, 부써의 윤리적‑공동체적 실천을 종합함으로써 법정, 연합, 변혁을 아우르는 통전적 구원론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신자는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닮아가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 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화가 드러나지 않는 교회나 신자의 삶은 믿음의 중단을 뜻하며, 이는 구원의 방향성을 상실 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지속성 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할 차례다.
어지러운 시대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고,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다.
칭의와 성화가 한 몸이고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목회적 제안으로서 교회에서 성화를 가르쳐야 한다.
이는 설교나 교리교 육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중요한 주제다.
믿음으로 칭의 받은 자는 반드시 성화로 그 행위가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선포해야 한다.
이는 제네바의 「교회 장정」과 콘시스토리가 권징과 교훈, 성례를 제도적 장치로 만들어 신자의 예배, 성찬, 가정, 경제 윤리 전반을 치리했던 것처럼 또한 루터가 예전 개편을 통해서 교리교육과 성만찬 질서를 세우며 성례에 참여 전에 가르침과 훈련을 강조했던 것처럼, 2025년을 살아가는 한국교회도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전 교인의 교리 문답을 통해 기독교인 정체성을 확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강조하는 ‘가시적 성화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무엇보다 매주 교회 안에서 선한 행위를 찾아서 광고하며 칭찬하는 자리를 만들어서 선한 행위는 구원 받은 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임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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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초록
본 연구는 루터, 칼빈, 부써의 칭의 이해를 로마서 1:16-17과 8:29-30 주석을 중심으로 비교 ․ 분석한다. 방법론은 원전(루터 WA, 칼빈 CR, 부써 1536/1562본) 과 라틴어 표현의 주해적 대조이며, ‘법정-연합-변혁’이라는 분석 축을 ‘이미/아 직’의 구속사적 시간론과 접목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외부 전가된 의(aliena iustitia)로 보되, 살아있는 믿음(vivens fides)의 성장과 지속 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 속에서 칭의와 성화의 동시적 수여(duplex gratia)를 논증하며,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glorificavit)를 통해 구원의 확정성과 견인을 해명한다. 부써는 불과 열의 비유로 죄 사함과 새 창조를 결합한 ‘이중 의’를 제시하며 성례, 권징을 통한 공동체적 실천을 부각한다. 비교 결과 세 인물 모두 오직 은혜, 오직 믿음 (sola gratia, sola fide)을 공유하며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불가분”으로 이해 하되, 루터는 실존적 위로와 믿음의 성장, 칼빈은 연합과 확정성, 부써는 윤리 ․ 제도적 실천에 각각 중점을 둔다.
주제어 루터, 칼빈, 부써, 칭의, 성화
Abstract
A Comparative Study of Luther, Calvin, and Bucer’s Doctrines of Justification: Focusing on Their Commentaries on Romans 1:16-17 and 8:29-30
Kyunga Kim(Ph.D. Independent Scholar, Historical Theology)
This study compares Luther, Calvin, and Bucer’s views of justifica tion through their commentaries on Romans 1:16-17 and 8:29-30. Luther stresses alien righteousness and the growth of living faith. Calvin highlights union with Christ and the assurance of glorification. Bucer emphasizes double justification linking forgiveness and renewal. All share sola gratia and sola fide, seeing justification and sanctification as distinct yet inseparable
Keywords Luther, Calvin, Bucer, Justification, Sanctification
접수일: 2025년 8월 7일, 심사완료일: 2025년 8월 28일, 게재확정일: 2025년 8월 30일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38집
https://doi.org/10.18708/kjcs.2025.10.13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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