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전근대 한국 지성사 연구의 중심 주제의 하나로 통용되는 실학 역시 학 술 개념의 소산이다. 실학이라는 근대 학술 개념에 의해 직조된 전근대 역 사 지식이다. 근대 학술 개념이 전근대 역사 지식의 이해에 얼마나 유효한 가? 대개의 한국학 학술용어가 그렇듯이 실학 역시 이 물음에 관한 전론을 펼칠 정도로 충분한 학술사적 이해를 축적하지는 못한 상태에 있다.1
다만 실학의 경우 실학의 의미를 둘러싼 전근대와 근대의 격절 지점을 드러낸 현장은 적지 않았다. 곧, 근대 학술 개념으로서의 실학이 전근대 일 반 개념으로서의 실학과 부딪치는 문제가 그것이다.2
전자가 도학과 대립 하는 실학의 역사상을 조장한다면 후자는 도학과 상통하는 실학의 의미체 를 제공한다. 근대 학술 개념으로서의 실학이 전근대 일반 개념으로서의 실 학과 충돌한다면 이 문제의 인식 방법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 본고는 전근대 한국 실학 개념의 통시적인 이해를 추구한다. 전근대 한국 문헌에 보이는 실학의 의미에 도달하는 주요한 맥락들의 검출 에 일차적인 목표를 둔다.
그것들은 각각 도학의 수용, 과시(科試)의 강경(講 經), 군주의 성학, 실정(實政)과 무실(務實), 경세의 실용, 산업의 실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울러 이러한 맥락적 이해 방식의 다양성과 통시성을 고려 하면서도 이것들이 여전히 전근대 실학 개념으로서 근대 실학 개념과는 대 비됨을 보이기 위하여 말미에 근대의 실학을 서술한다.
본고는 실학 연구의 반성3에 공감하면서 전근대 실학 개념 연구의 흐름4과 접속한다.
1 한국학 학술용어는 연구자에 의해 편의적이고 관행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정착했기 때문에 개념 정립을 위해 용례 이해의 정확성이 요망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2020), 『한 국학 학술용어』,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 5].
2 실학 개념을 둘러싸고 천관우와 한우근의 서로 다른 이해 방식, 천관우와 민영규의 서로 다른 이해 방식은 실학 개념에 접근하는 출발점이 근대 실학인가, 전근대 실학인가 하는 차이에서 기인한다[천관우(1953), 「반계 유형원 연구」, 『역사학보』 3, 역사학회; 한우근 (1958), 「이조 「실학」의 개념에 대하여」, 『진단학보』 19, 진단학회; 천관우(1970), 「한국 실학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Ⅵ,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민영규(1994), 「위당 정 인보 선생의 행장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 『강화학 최후의 광경』, 우반].
3 이을호 외(1985), 「다산 실학의 반성과 전망」, 『다산학보』 7, 다산학연구원; 김현영 (1987), 「‘실학’ 연구의 반성과 전망」, 『한국중세사회 해체기의 제문제』 상, 한울; 지두환 (1987), 「조선후기 실학연구의 문제점과 방향」, 『태동고전연구』 3, 한림대학교 태동고전 연구소; 유봉학(2024), 「‘실학’ 연구 100년의 성과와 과제」, 『한국실학연구』 48, 한국실학 학회.
4 이경구(2012), 「개념사와 내재적 발전: ‘실학’ 개념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213, 역사학 회; 강지은(2019), 「조선시대 ‘실학’ 개념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보』 75, 고려사학회; 이 경구(2020), 「조선시대 실학 용법에 대한 거시적 일고찰」, 『개념과소통』 26,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이경구(2024), 『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 푸른역사.
전근대 실학 개념의 통시적인 흐름을 고찰한 결과 종국적 으로 전근대 일반 개념으로서 실학의 의미가 발현되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근대 학술 개념으로서 실학이 부과하는 도학과 실학의 대립이라는 근대적 인 통념5이 발견될 수 있을지를 판단할 것이다.
5 허태용(2021), 「‘성리학 대 실학’이라는 사상사 구도의 기원과 전개」, 『한국사상사학』 67, 한국사상사학회; 허태용(2025), 『실학이라는 생각』, 신서원.
2. 전기 국면
2.1. 도학의 수용
전근대 한국 문헌에서 ‘실학’의 역사는 길지 않다. 13세기까지 실학의 용례를 보여주는 문헌을 찾기 어렵다. 신라 최치원이나 고려 이규보처럼 이 름난 문인의 글에서도 실학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역사서에서도 실학은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고 려 후기 주자학의 수용 과정에서 실학 관념이 비로소 형성된 것인지도 모 르겠다.6
6 중국에서 송대 이후 실학 용례의 증가는 성리학의 대두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가 있다[이경구(2024), 『실학, 우리 안의 오랜 근대』, 푸른역사, pp. 76-77]. 6
한국 문헌에서 실학의 최초 용례는 14세기 전반 이제현의 글과 안 축의 시에서 발견된다.
이제현의 글은 『역옹패설』에 수록된 충선왕과 이제현의 문답을 가리킨 다. 충선왕은 고려 문물이 옛날에는 중화 문물과 다름없다는 칭찬도 있었지 만 지금은 학생이 승려를 좇아서 장구를 익히니 문장을 꾸미는 무리는 많 아도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는 적음을 말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이제 현은 고려 문물의 발달 원인으로 고려 전기의 문교 정책을 말했고 고려 의 종조의 무신 변란으로 인해 고려의 유학 전통이 끊겨 불교 승려가 장구를 가르쳤음을 말했다. 이제현은 유학 전통의 부흥을 원했다. 학교(學校)와 상서(庠序)를 확장 해 육예(六藝)와 오교(五敎)를 밝혀 선왕의 도를 천명하면 진유(眞儒)를 등지 고 승려를 좇으며 ‘실학’을 버리고 장구(章句)를 익히는 일이 사라질 것이고 문장을 꾸미는 무리가 ‘경명행수’의 선비로 변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7
7 李齊賢, 『櫟翁稗說』, pp. 12-14. 8 安軸, 『謹齋集』 권1 「天曆三年五月, 受江陵道存撫使之命. 是月三十日, 發松京宿白嶺驛, 夜 半雨作, 有懷」: “讀書求道竟無成/ 自愧明時有此行/ 但盡迂疎施實學/ 敢將崖異盜虛名/ 民 生塗炭知難救/ 國病膏肓念可驚/ 耿耿枕前眠未穩/ 臥聞山雨注深更”
이 것이 한국 실학의 초기 용례이다. 실학을 개념 정의한 진술은 아니지만 승 려로부터 전수받는 장구 대신 진유로부터 전수받는 실학을 추구했다.
‘선왕 의 도’ 및 ‘경명행수의 선비’와 연결된 실학을 말했다. 이제현이 말한 실학 은 도학 및 경학과 개념적 친근성을 보여준다.
삼대의 도를 회복하기 위해 경학을 다시 구축한 신유학의 도학 정신을 감지할 수 있다. 안축의 시는 그가 강릉도 존무사가 되어 개경을 떠나 임지로 가는 도 중에 지은 7언 율시이다.
시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다.
그는 ‘독서구도’(讀 書求道)했으나 학문의 성취 없이 관리가 되어 부임함을 부끄럽다고 했다. 자기 학문이 우활하고 소루하지만 ‘실학’을 베풀 따름이고 특이한 행색으 로 ‘허명’을 훔치지 않겠다고 했다. ‘민생도탄’(民生塗炭)과 ‘국병고황’(國病膏 肓)의 현실을 근심하느라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빗소리를 듣는다고 했다.8
이것도 한국 실학의 초기 용례이다.
실학 개념의 정의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허명을 훔치는 대신 실학을 베푼다는 실천의식을 표출했다. ‘독서 구도’, ‘민생 도탄’, ‘국병 고황’과 연결된 실학을 말했다. 안축이 말한 실학은 도학 및 경세와 개념적 친근성을 보여준다.
성현의 도에 입각해 경세를 실천하는 신유학의 도학 정신을 감지할 수 있다.
이제현의 글과 안축의 시는 고려 후기 도학의 수용과 실학 개념의 형성 이라는 주제를 논하기에 적절하다.
이제현의 글은 일찍부터 고려 말 조선 초의 ‘실학 제창’이라는 맥락에서 주목받아 왔고,9 사장학 중심의 고려 유학 전통에서 벗어난 ‘경명행수’의 새로운 인재 양성을 추구하는 도학적 경세론 의 발현으로 간주되고 있다.10
안축의 시는 도학적 경세의 도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유 체계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11
고려 후기 안향 이래 원대 세계 문 화로서 도학 수용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12 이제 현과 안축이 말하는 실학은 거시적으로 고려 유학에서 조선 유학으로의 문 명전환기에 ‘경명행수’ 또는 ‘독서구도’와 결합한 도학과 경학으로서의 실 학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13
9 한우근(1958), 「이조 「실학」 개념에 대하여」, 『진단학보』 19, 진단학회.
10 김인호(2016), 「고려후기 이제현의 중국 문인과의 교류와 만권당」, 『역사와 실학』 61, 역 사실학회.
11 이의강(2005), 「근재 안축의 시문에 투영된 성리학적 사유 체계」, 『한문학보』 13, 우리한 문학회.
12 도현철(2018), 「안향 – 유교의 확산과 문치사회론」, 『한국학연구』 48, 인하대학교 한국 학연구소.
13 한국문집총간 db에 의하면 ‘經明行修’와 ‘讀書求道’가 보이는 최초의 문집은 安軸의 『謹 齋集』이다. 이는 이 두 어휘 모두 ‘實學’과 마찬가지로 안축의 시기에 처음 출현했을 가능 성을 시사한다. 즉, ‘실학’, ‘독서구지’, ‘경명행수’ 등을 성리학 수용 국면에서 일어난 역 사적인 어휘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도학과 경학으로서의 실학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대학』이다.
유학의 역사에서 사서의 형성은 삼대의 고도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정 전의 수립을 의미하는데 『대학』은 사서의 첫머리에 배치되어 도학의 입문 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희는 『논어』와 『맹자』는 사안에 따라 나눈 문답이라 요령을 얻기 어렵지만 이와 비교하여 『대학』은 전후가 연결되고 체계가 성립해 있기 때문에 이를 읽으면 대체를 세울 수 있다고 밝혔다.14
중요한 것은 『대학』의 학문적 가치를 논하는 주희의 관점에 실학에 대 한 관념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유학사의 흐름에서 삼대의 유학과 삼대 이후의 유학을 구별하는 그의 역사의식과 관련된다.
삼대의 유학이란 삼대의 소학과 대학에서 가르치던 학문을 말하는데, 그는 소학에서 가르친 학문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이륜’(彛倫)과 ‘육예’(六藝)였고 대학에서 가르친 학문은 ‘궁리정심’(窮理正心)과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에 관한 학문, 곧 도 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대 이후 고도가 추락하고 고제가 붕괴하여 소학과 대학에서의 이러한 교육 전통이 단절되었고, 그 결과 당말 오대에 이르러 세상의 파괴와 혼란이 극도에 도달했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삼대 이후 학문 의 타락과 세상의 혼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때 이후 속유(俗儒)의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배움이 소학보다 공 부는 배로 많지만 쓸모가 없었고[無用] 이단(異端)의 허무(虛無)와 적멸(寂 滅)의 가르침이 대학보다 수준이 높지만 알맹이가 없었다[無實]. 기타 권모 와 술수로 일체 공명을 이루려는 학설, 그리고 백가의 온갖 기예의 유파로 세상 사람을 속이고 인의를 막는 학설이 다시 그 사이에 분분하게 나왔다. 군자가 불행히 대도(大道)의 요점을 듣지 못하고 소인이 불행히 지치(至治) 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15
14 朱熹, 『大學章句』, 「讀大學法」: “朱子曰, 語孟隨事問答, 難見要領, 惟大學是曾子述孔子說 古人爲學之大方, 而門人又傳述以明其旨. 前後相因, 體統都具, 翫味此書, 知得古人爲學所 向, 却讀語孟便易入, 後面工夫雖多, 而大體已立矣.”
15 朱熹, 『大學章句』 「大學章句序」: “自是以來, 俗儒記誦詞章之習, 其功倍於小學而無用, 異端 虛無寂滅之敎, 其高過於大學而無實, 其他權謀術數一切以就功名之說, 與夫百家衆技之流 所以惑世誣民充塞仁義者, 又紛然雜出乎其間, 使其君子不幸而不得聞大道之要, 其小人不 幸而不得蒙至治之澤.”
주희는 삼대 이후 학문의 문제점을 위와 같이 말했다.
그는 세속의 유 학은 ‘무용(無用)’이라 평하고 노장과 불교는 ‘무실(無實)’이라 평했는데 양 자를 합해서 말하면 ‘실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실용의 없음이란 삼 대의 유학은 대학에서 교수된 도학이었고 그 도학이 이 세상에 지치를 실 현했다는 설명과 연결되어 쉽게 납득이 된다.
주희는 삼대의 도학을 실학이 라 생각하고 도학에 미달한 세속의 유학 및 도학에서 벗어난 이단의 교학 에 대하여 실용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송대에 도학이 부활하기 전까 지 중국 학계의 문제적 상황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도학을 실학이라 인식한 주희는 『중용』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언명했 다.
그는 『대학장구』 서문에서 대학의 교육이라는 시각에서 도학의 역사를 간략히 서술했는데 『중용장구』 서문에 이르러 성현의 심법이라는 시각에서 도학의 내용을 간략히 서술했다.
그는 『중용장구』의 첫머리에서 중(中)과 용(庸)에 대한 개념 정의를 시도했고 성현이 전수한 심법으로서 『중용』의 가르침이 모두 ‘실학’이니 독자가 완미하고 사색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종신 토록 쓸 수 있다고 말했다.16
16 朱熹, 『中庸章句』: “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天下之正道, 庸者天下之定理. 此篇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 故筆之於書, 以授孟子, 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 事, 末復合爲一理,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善讀者玩索而有得 焉, 則終身用之, 有不能盡者矣.”
이것은 『중용』의 학문이 도에 관한 실학이며 그 학문은 평생 실용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주희는 『대학장구』 서문과 『중용장구』 서문을 통해 도학을 실 학으로 인식했고 도학의 실용적인 성격을 부각했다.
도학의 실용이란 학문 과 정치에서 도학의 실천과 동일한 의미였다.
이 맥락에서 이제현과 안축이 추구한 ‘경명행수’ 또는 ‘독서구도’란 주희의 『대학장구』 서문 및 『중용장 구』 서문의 문제의식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도학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유학이 실학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경명행수’와 ‘독서구도’는 모두 실학을 향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2. 과시의 강경
실학 개념의 형성 과정에서 이제현과 안축 이후 주목할 인물은 정도전 과 권근이다.
정도전은 유교와 불교의 동이를 논변하는 과정에서 유학을 ‘고인명덕신민(古人明德新民)의 실학’이라고 말했다.17
권근은 삼대 학교의 명륜(明倫)과 유교 경서의 명도(明道)를 고려하면 향교의 독서인은 구도(求 道)와 후륜(厚倫)을 생각하고 인륜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유 자(儒者)의 실학’이라 불렀다.18
정도전이 말한 명명덕과 신민의 실학, 그리고 권근이 말한 구도와 후륜의 실학, 이것은 실학이 단순한 글공부가 아니 라 도를 실천하는 학문임을 뜻한다.
경서 공부를 통한 도학의 실천이 곧 실 학이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경서 공부이다.
조선시대 실록을 보면 조선의 실학에 특이한 어 법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조선 현종조에 예조가 보고한 과거 시 험의 폐해를 보자.
예조에 따르면 본래 국가의 식년시는 초시(初試)에서 사 장(詞章)을 취하고 회시(會試)에서 경학을 취하는데 이 법도가 무너져서 향 시(鄕試)의 경우 ‘실학으로 유명한’ 거자(擧子)가 있으면 제술(製述)이 형편없 어도 시관이 거자를 방문한 다음 초시에서 합격시키는 폐해가 있었다.19
흥미롭게도 『현종개수실록』은 『승정원일기』의 이 기사를 기재하면서 ‘실학유명’(實學有名)의 문구에 대하여 ‘國人, 以業講經, 爲實學’이라는 협주 를 달았다.20
17 鄭道傳, 『三峯集』 권9 「儒釋同異之辨」.
18 權近, 『陽村集』 권14 「永興府學校記」.
19 『承政院日記』 顯宗 1년 1월 25일(辛巳).
20 『顯宗改修實錄』 顯宗 1년 1월 25일(辛巳).
‘실학유명’은 문집, 실록, 승정원일기를 막론하고 오직 이 대목 에서 보이는 특이한 구절이다.
실록 편찬자는 이 기사 안에서 ‘실학유명’의 의미가 이해되지 못할 수 있음을 염려하여 이것이 ‘강경=실학’의 문제임을 드러내고자 일부러 주석을 남긴 것이다.
조선의 과시에서 강경과 실학의 긴밀한 관계는 조선 실학 개념의 문제 적 지점이다. 조선 세종조부터 성균관 유생이 사장만 익히고 경서를 읽지 않는 폐단을 고치고자 과시에서 강경을 시행해야 이들이 실학에 힘쓸 것이 라는 논의가 있었다.21
조선 실록에서 보자면 강경과 실학의 긴밀한 관계는 대개 조선전기의 언어 현상이다. 강경과 실학의 공통 검출 기사는 세종, 성 종, 중종, 명종, 선조의 치세에 국한된다. 협주까지 포함하면 위에서 언급한 현종조 기사가 마지막이다.
이 이후 실학이 강경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용례 를 보이는 실록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22
조선시대 실학 개념의 담론 현장은 주로 과시를 통해 실학의 선비를 선 발한다는 데 있었다.
강경과 실학의 결합은 실학의 선비를 분별하는 기준이 강경의 대상이 되는 경서의 능숙한 강독에서 나옴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맥락에서 ‘실학을 읽는다’[讀實學]는 발상이 가능했는데 이는 조선 실록 기 사에서 산견된다.
이것은 주로 『중종실록』에서 보이는 표현인데, 별시를 자 주 하면 ‘실학’을 읽지 않고 초집(抄集)에 힘쓸 것이다,23 ‘실학’ 읽기가 심히 괴로운데 ‘실학’을 읽지 않고 과거에 합격하면 이를 괴롭게 읽을 사람이 없 을 것이다,24
명경과를 설치하면 힘써 ‘실학’ 읽는 자가 많아질 것이다,25 이 런 다양한 기사가 있었다.
21 『世宗實錄』 世宗 19년 9월 3일(庚寅); 『世宗實錄』 世宗 19년 9월 14일(庚寅).
22 『승정원일기』에서 보더라도 현종조 이후 과시의 맥락에서 ‘강경=실학’을 보이는 용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순조조 기사에서 중종조 崔淑生의 別試 講經 제안을 칭찬 하고 이로 인해 실학에 힘써서 賢才가 배출했다는 李若愚의 筵奏가 검출되는 정도이다 (『承政院日記』 純祖 18년 11월 12일(丙午)).
23 『中宗實錄』 中宗 11년 7월 25일(甲辰).
24 『中宗實錄』 中宗 33년 10월 3일(癸卯).
25 『中宗實錄』 中宗 34년 1월 19일(戊子).
‘실학’ 읽기의 대상은 성현의 책, 기본적으로 사서삼경이었다.
인조조 박지계의 상소에 보이는 ‘독실학여사서삼경지류’(讀實學如四書三經之類), ‘독 성경실학’(讀聖經實學), ‘독실학성학서’(讀實學聖賢書) 같은 표현에서 이를 볼 수 있다.26
중종조에 김안국은 중국에서 구입할 서책 목록을 작성하면서 ‘경학이서’(經學理書)는 대부분 ‘실학’으로 간주했고 제자백가 및 천문·지리· 의약 등의 서책은 이와 구별했다.27
중종조에 김근사는 ‘실학’과는 간격이 있지만 홍문관에서 희귀하게 소장한 서적의 인출을 청했는데 여기에는 정 주(程朱)의 문집도 포함되어 있었다.28
역시 중종조에 윤희성은 경연 진강 책자와 관련하여 지금 진강 책자가 ‘사학무실’(史學無實)의 책이라서 치도(治 道)의 우선이라 할 ‘명군덕’(明君德)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실학진강’(實學進 講)을 생각하라고 간언했다.29
실학과 경서 강독의 밀접한 관계는 ‘실학주’(實學註), ‘실학토’(實學吐) 같 은 어휘의 존재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중용』을 진강하는 경연에서 권시 는 ‘실학주’와 관련하여 남전 여씨(藍田 呂氏)는 모두 여대림(呂大臨)이라고 말했다.30
『주역』을 진강하는 경연에서 숙종은 ‘실학토’(實學吐)와 관련하 여 이(而)와 즉(則) 아래에 현토를 넣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31
과시(科試)의 맥락에서 실학과 경서 강독의 관계를 생각할 때 흥미로운 문구는 ‘실학급 제’(實學及第)이다.
이수광은 조선의 식년시 급제자가 치용(致用)의 실이 없 고 작문도 하지 못해서 ‘실학급제’라는 경멸을 받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32 조익 역시 문리가 불통한 사람을 세칭 ‘실학급제’라고 이르는 현실을 거론 하며 음토(音吐)만을 살피고 문리와 의미는 따지지 않는 배강법(背講法)의 폐해를 논했다.33
26 朴知誡, 『潛冶集』 권2 「萬言疏」; 『承政院日記』 인조 11년 6월 13일(癸酉).
27 『中宗實錄』 中宗 36년 8월 27일(庚辰).
28 『中宗實錄』 中宗 10년 11월 2일(甲申).
29 『中宗實錄』 中宗 37년 2월 1일(壬子).
30 『承政院日記』 孝宗 9년 3월 25일(壬戌).
31 『承政院日記』 肅宗 15년 2월 10일(戊申).
32 李睟光, 『芝峯類說』 권4 「官職部」 <科目>.
33 趙翼, 『浦渚集』 권11 「因求言條陳固邊備改弊政箚」. 노관범 전근대 한국 실학 개념의 역사적인 이해
영조는 경서 강독에서 불통한 사람을 ‘도령실학’(都令實學) 이라 불렀다.34
경학을 통한 도학의 실천이라는 실학의 본래적 어법에서 비추어 보면 경문 이해 없이 경서 음독에만 집중하는 ‘실학급제’의 현실은 실학의 자기 모순이었다.
경문에 적혀 있지 않은 이치를 물어서 능히 대답할 수 있어야 ‘실학’이라는 생각,35 후대의 ‘구독’(口讀)과 달리 삼대의 학교 교육처럼 ‘명 인륜’(明人倫)의 소이를 알아야 ‘실학’이라는 생각36은 경학으로서의 ‘실학’ 을 둘러싸고 도학의 이상과 강경의 현실 사이에 상당한 낙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구독’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학이 미숙한 유자가 일시 적인 ‘구독’으로 요행히 과시에 급제하는 풍조로 인해 유자의 경학 수준이 하락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국가는 ‘실학’으로 인재를 취하니 경학을 중시해야 한다는 대전제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현상이었다.37
34 『承政院日記』 英祖 35년 10월 29일(丙午).
35 『世宗實錄』 世宗 1년 2월 17일(壬辰).
36 『中宗實錄』 中宗 13년 7월 27일(甲子).
37 『中宗實錄』 中宗 34년 8월 4일(戊辰). 38 『中宗實錄』 中宗 15년 5월 15일(壬寅).
2.3. 군주의 성학
조선전기 실학은 좁게 보면 강경이지만 넓게 보면 경학에 기반한 도학 의 실천이었다.
조선 중종조에 이르러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실학의 전통 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종실록』을 보면 남곤은 지금 유자는 ‘탐 리’(探理)를 한다면서 경서를 ‘묵시’(默視)하고 ‘구독’(口讀)을 꺼리며 ‘의론’ 에 힘쓰고 ‘실학’에 종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남곤이 지적한 문제적 상 황은 일단 성리 탐구의 추세 속에서 경서 읽기 방식으로 기존의 성독과 다 른 새로운 묵독이 대두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아울러 의론 정치의 전개 속 에서 실학 공부가 경시되는 현상도 드러낸다.38
『중종실록』의 사신(史臣) 은 남곤의 발언에 찬동하여 이를 중종조 사습(士習)과 사풍(士風)의 전반적 문제로 간주했다.
유자가 외식에 힘써서 내공이 없는데 남의 허물을 들추 어 『소학』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고 경전에 유념하지 않아도 좋은가 개탄했 다.39
인륜 실천의 『소학』은 기존의 ‘강경=실학’ 전통에 대한 혁신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조광조는 『소학』의 이질감이 사라져 성균관 입학 학생도 일상적 으로 이를 독서하는 현실을 보고 군주 일심(一心)의 올바른 추향으로 이것 이 가능했다고 생각했다.
만민의 교화가 군주의 일심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 루어지니 마음 공부에 힘쓰라고 진언했다.
이것은 삼대의 학문은 경서의 구 독이 아니라 인륜의 밝힘이었고 학문을 하면서 인륜을 밝힐 방도를 알아야 실학이라 하겠다는 중종의 발언에 대한 비평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40
39 『中宗實錄』 中宗 15년 5월 15일(壬寅).
40 『中宗實錄』 中宗 13년 7월 27일(甲子).
즉 실학의 포인트를 유자의 경서 강독에서 군주의 마음 공부로 옮기는 한편 명륜과 교화의 문헌으로 유교 경전 대신 『소학』을 부각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실학 개념의 역사에서 중종조를 하나의 변곡점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경서의 공부와 도학의 실천이 곧 실학의 핵 심인데 이제 경서 이외의 문헌도 실학 개념과 결부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광조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이황과 이이의 학문과 도 연결되었다.
이황의 대표적인 학술 성과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손꼽힌다.
그 문제의식은 다름 아니라 주희의 서간문을 활용하여 『논어』를 대신할 새로 운 ‘입도’(入道)의 책, 곧 도학 입문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성인의 가르침 이 시서예악(詩書禮樂), 곧 경서에 있지만 정주(程朱)의 관점에서는 학문에 가장 친절한 책이 『논어』인데, 과시(科試)의 이심(利心)이 생겨서 『논어』의 송설(誦說)에만 힘쓰고 구도(求道)를 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과시의 이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주희의 서간문을 갖고 『논어』의 취지를 살렸음을 밝혔다.
학자가 감발흥기(感發興起)하여 진지실천(眞知實踐)에 종사하도록 학문의 입 두처 역할을 하는 책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비쳤는데, 이는 사서삼경이 과시 와 밀착하여 더 이상 실학의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는 현실에서 실학을 인 도할 새로운 문헌을 창조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 생각된다.41
이황의 도학 입문서로 『주자서절요』가 손꼽힌다면 『성학집요』(聖學輯 要)는 이이의 도학 요약서로 저명하다.
이 책은 ‘입도’의 문헌으로 『논어』가 아니라 『대학』에 주목한다.
주희가 표장한 『대학』이 도학의 ‘규모’(規模)를 세웠고 진덕수의 『대학연의』가 『대학』을 뼈대로 ‘제왕 입도의 지남(指南)’을 창출했음을 평가했다.
다만 『대학연의』는 ‘기사’(紀事)의 서책이지 ‘실학’의 형체가 아니라서 다시 『대학』을 뼈대로 사서육경(四書六經)의 요령을 얻는 요약 작업을 수행했음을 밝혔다.
이것은 이이의 관점에서 『대학연의』는 역 사서이고 『성학집요』는 도학으로 체계화된 경서라는 의미였다.
이처럼 ‘실 학’으로 통용되는 유교 경전의 내용을 ‘정선’해서 『대학』의 형식으로 체계 화한 이 책은 무엇보다 조선 임금의 ‘궁리정심’(窮理正心)과 ‘수기치인’(修己 治人)을 위한 것이었다.42
41 李滉, 『退溪集』 권42 「朱子書節要序」.
42 李珥, 『栗谷全書』 권19 「聖學輯要」(一) <序>.
‘궁리정심’과 ‘수기치인’은 주희의 『대학장구』 서 문에 의하면 삼대의 대학에서 가르친 도학의 핵심이다.
조선 실학 개념이 과시 강경론은 물론 군주 성학론의 방향에서 전개되는 것은 이이의 단계부 터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학집요』는 ‘실학 집요’라 이를 만 한 책이었다.
이이는 군주 성학을 위한 ‘실학’의 요약서를 처음 편찬했을 뿐만 아니 라 군주의 ‘우재수성’(遇災修省)도 처음 ‘실학’의 관점에서 모색했다.
이 경 우 ‘실학’과 함께 ‘실치’(實治)를 강조했음이 특색이다.
즉, ‘우재수성’의 상 황을 맞이하여 원대한 입지(立志)로 삼대를 기약하고 ‘실학’에 힘써서 ‘궁행심득’(躬行心得)하여 자신을 ‘일세표준’(一世標準)으로 삼아야 하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구체적인 정사(政事)와 연결시켜 반드시 ‘실치’를 이룩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실치’의 방향이 현재(賢才)를 선택하여 정사를 위임 해서 나라의 병폐를 개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43
이후 ‘우재수성’과 실학 논의는 계속되었다.
영조조 이기진은 고인의 응천(應天)의 방도는 다름 아닌 실덕(實德)과 실정(實政)에 있으니 ‘위기(爲 己)의 실학’에 힘쓰고 ‘급민(及民)의 실혜(實惠)’를 강구하면 하늘이 재앙을 거둘 것이라 말했다.44
영조조 김상익도 성인의 응천의 방도는 강학(講學)의 실과 근정(勤政)의 실에 있으니 실학으로 실정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45
순조조 김기은도 ‘응천이실’(應天以實)의 교훈을 새겨 구재(救災)의 방도를 실학, 실덕, 실정에서 구했다.
반드시 존심(存心)에 실공(實工)이 있고 수기 (修己)에 실덕이 있으며 안민(安民)에 실정이 있어야 하며 모든 의념과 사업 이 지성무위(至誠無僞)에서 나와야 한다고 진언했다.46
43 李珥, 『栗谷全書』 권40 「經筵日記」 <萬曆九年辛巳>.
44 『承政院日記』 英祖 26년 3월 25일(戊辰).
45 『承政院日記』 英祖 32년 10월 19일(癸未).
46 『承政院日記』 純祖 9년 10월 14일(辛丑).
즉, ‘우재수성’은 군 주 성학으로서의 실학과 그 정치적 실천으로서 실정의 공효를 깨우치는 장 치이었다.
3. 후기 국면
3.1. 실정과 무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실학은 군주 성학론의 일반적인 차원에서도 전개 되었다.
이 경우 실심과 실정이 곧잘 이와 함께 수반되어 실학 담론의 특색을 보였다.
정조조 서배수는 치국평천하의 도는 실학과 실정에 있다고 단언 했다.47
영조조 이제는 궁행실천의 실학을 중시하고 ‘실학→실심→실정’으 로 무실(務實)의 도를 다하라고 진언했다.48
순조조 오연상은 임금의 강학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을 근본으로 하고 용인은 실심실정(實心實政)에 힘쓰기를 진언했다.49
이제는 실심 여부에 따라 만사의 진가(眞假)가 결정된다고 했 고, 오연상은 문승(文勝)의 고질적인 폐단 때문에 상질억문(尙質抑文)에 힘써 야 한다고 했다.
성학으로서의 실학에 이처럼 진가론(眞假論)과 문질론(文質 論)이 작용한 것은 조선후기 실학 개념이 양명학과 친화적인 방향에 입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지만 실제로 실심실학과 실심실정의 정치 언어의 주체 는 주자학에 입지해 있었다.
특기할 것은 조선후기 실심실정론의 폭발적인 증가이다.
아래 표에서 보듯 『승정원일기』에서 실학, 실심, 실정 등이 검색되는 기사 건수의 추세 를 보면 영조, 정조, 순조 연간(1724~1834)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실심의 경우 영조조 이후 고종조까지 지속적으로 높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 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추세와 연동되어 실심과 실정이 한 글자 격한 ‘實 心○實政’의 구절이 역시 영조, 정조, 순조 연간에 약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실심과 실정이 직접 연결된 ‘實心實政’의 경우는 오직 영조조부터 시작 하는 어휘 현상이다.50
47 『承政院日記』 正祖 11년 7월 12일(丁丑). 48 『承政院日記』 英祖 10년 12월 10일(辛亥). 49 『承政院日記』 純祖 2년 10월 6일(甲辰). 50 ‘實心實政’의 최초 출현은 실록과 승정원일기 모두 영조 4년(1728)이다[『英祖實錄』 英祖 4년 1월 5일(丙辰); 『承政院日記』 英祖 4년 3월 12일(壬戌)]. 18 인문논총 82권 4호 2025. 11. 3
이것은 조선후기 실심실정론이라 불러도 좋은 담론 현상이 영조조부터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실심실정의 영향을 받 아 실학 개념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을까?
조선후기 실심실정론의 시작은 어디일까?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實 心○實政’의 형태로 구체적인 실심실정론을 갖춘 글은 인조조 이수광의 「조진무실차자」(條陳務實箚子, 1625)이다.51
이 글에서 이수광은 ‘무실’(務實) 을 진언했다.
실심으로 실정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이루어 생각마다 사안마다 모두 실에 입각하여 정치를 해야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근학(勤學)의 실(實)’부터 ‘명법제(明法制)의 실(實)’까 지 12조목의 무실을 말했다.52
그런데 이수광에 앞서 ‘무실’을 강조한 유학자는 전술한 이이였다. 그 는 「동호문답」에서 수기와 안민을 말하면서 수기의 요점은 무실(務實)이라 했고 무실의 항목으로 ‘격치(格致)의 실(實)’부터 ‘교화(敎化)의 실(實)’까지 10조목의 ‘무실’을 말했다.53
51 『承政院日記』 仁祖 3년 11월 21일(丙寅); 李睟光, 『芝峯集』 권22 「條陳務實箚子」: 조선전 기 실심실정을 언급한 예외적인 사례로 李浚의 글이 하나 있다. 이수광의 이 글은 실심 실정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12가지 실정의 사례를 갖추어 ‘무실’을 개진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실심실정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52 李睟光, 『芝峯集』 권22 「條陳務實箚子」: ‘勤學의 實’, ‘正心의 實’, ‘敬天의 實’, ‘恤民의 實’, ‘納諫爭의 實’, ‘振紀綱의 實’, ‘任大臣의 實’, ‘養賢才의 實’, ‘消朋黨의 實’, ‘飭戎備의 實’, ‘厚風俗의 實’, ‘明法制의 實’을 진언했다.
53 李珥, 『栗谷全書』 권15 「東湖問答」: ‘格致의 實’, ‘誠意의 實’, ‘正心의 實’, ‘修身의 實’, ‘孝 親의 實’, ‘治家의 實’, ‘用賢의 實’, ‘去姦의 實’, ‘保民의 實’, ‘敎化의 實’을 말했다.
<표 1> : 생략 (첨부 논문파일 참조)
또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의 실효가 없음을 실공(實功)의 없음에서 구하고 ‘상하(上下)의 교부무실(交孚無實)’부터 ‘인심 (人心)의 향선무실(向善無實)’까지 7조목의 무실(無實)을 말했다.54
이이가 10 조목의 무실(務實)과 7조목의 무실(無實)을 논한 것은 실에 관한 의식이 투 철했기 때문이다.
전술했지만 이이는 일찍이 실학실치론을 제기했고 이어서 이수광의 실 심실정론이 출현했으며 다시 조선후기 영조조 이후 실심심정론의 확산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무실론의 경우도 이이의 무실론이 이수광의 무실론 을 거쳐 조선후기 영조조 이후의 무실론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55 영조는 즉위한 이래 언제나 무실거문(務實祛文)을 신하들에게 강조해 왔는데,56 이 러한 무실거문의 배경에는 조선의 국사(國事)가 언제나 인순고식(因循姑息) 에 빠져 변화가 없다는 생각도 작용하였다.57
이와 함께 국가 역사의 흐름 을 보면 국초에는 문물이 미비해도 원기(元氣)가 혼후한데 중엽 이후 문치 (文治)가 구비되지만 결국 문승(文勝)에 빠져 쇠퇴한다는 역사의식도 존재하 였다.58
54 李珥, 『栗谷全書』 권5 「萬言封事」: ‘上下의 交孚無實’, ‘臣隣의 臨事無實’, ‘經筵의 成就 實’, ‘招賢의 收用無實’, ‘遇災의 應天無實’, ‘羣策의 救民無實’, ‘人心의 向善無實’ 등을 말 했다.
55 조선시대 무실사상을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전개한 선구적 인물로 이이에 주목하는 연 구가 있다. 이 연구는 조선시대 무실사상의 주체를 율곡학파, 우계학파, 실학파, 양명학 파 등으로 구분했다[황의동(2012), 조선조 무실사상의 전개와 그 사상사적 의미, 한국사 상과 문화 65, 한국사상문화학회].
56 『承政院日記』 英祖 卽位年 11월 13일(癸卯).
57 『承政院日記』 英祖 3년 10월 22일(甲辰). 58 『承政院日記』 英祖 9년 10월 18일(丙寅).
영조조에 궁행실천의 실학을 중시하고 ‘실학-실심-실정’으로 구성 된 무실의 도를 다해야 한다고 이제가 진언한 것은 영조의 무실에 대한 호 응이었다고 하겠다.
영조조의 실학 개념과 관련하여 주목할 어휘로는 양득중이 제기한 ‘실 사구시(實事求是)’가 있다.
이것은 영조조 실심실정 및 무실과 연결된 어휘 현상으로 청대 고증학의 실사구시와는 성격이 다른 언어이다.
그는 조선 의 정치 언어를 지배하는 ‘의리’(義理)의 폐해와 조선의 정치 문화에 만연 한 ‘허위’(虛僞)의 풍조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인 인식을 보였고 이를 해결 할 방안으로 실사구시를 제시하였다.59
그는 실사구시와 물정물조장(勿正勿 助長)을 중시하여 이를 각각 진실(眞實)과 무망(无妄)으로 나타내고 영조에게 진실무망의 정치를 당부하였다.60
59 梁得中, 『德村集)』 권1 「辭掌令疏-己酉」; 「辭召旨疏-己酉」.
60 梁得中, 『德村集』 권2 「辭別諭召命疏-丁巳」 : 故臣每以實事求是及勿正勿助長兩語, 仰達 於冕旒之下者此也. 實事求是, 卽所謂眞實也, 勿正勿助長, 卽所謂无妄也. 眞實无妄, 卽實心 之淡然虛明, 實理之潔靜精微也.
양득중의 허위 비판과 실사구시 제출, 그 리고 진실무망의 정치 제안을 통해 보건대 양득중의 학문은 ‘양명학적 실 심에 기반한 실학’61으로 이해될 소지도 있다.
61 한정길(2013), 「덕촌 양득중 학문의 양명학적 성격에 관한 연구」, 『양명학』 34, 한국양명 학회.
그러나 넓게 보면 그의 실사 구시는 영조조의 조선 정치 언어에서 현저해지는 실정론과 무실론의 특색 있는 발현 방식의 한가지로 보는 편이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양득중의 실사 구시는 후술할 홍석주의 실사구시와 서로 대비가 되는데 전자의 무실론과 후자의 격물론은 실사구시의 개념적 인식에서 유용한 참조점이 된다.
3.2. 경세의 실용
전술했지만 주희에게 유교의 실학이란 도학의 실천이었다. 『대학』과 『중용』을 시종으로 하는 사서 체계를 구축하여 도학의 정전을 확보한 다음 도학의 가르침을 공부하여 정치에서 실용(實用)하는 것, 그것이었다.
학문과 정치를 매개하는 실용 개념은 곧 도학의 정치적 실천으로서 주희가 생각한 실학의 주안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학의 실용으로서 실학을 사고하는 방식과는 달리 경세의 실 용으로서 실학을 사고하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중국 유학사 에서 명말청초 경세학의 동향과 관련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는데, ‘고학을 부흥하고 유용에 힘씀’[興復古學, 務爲有用]을 모토로 하는 ‘실학경세’의 조류 가 성행하여 『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 『경제유편』(經濟類編), 『경제팔편유 찬』(經濟八篇類纂), 『경세문편』(經世文編) 등 다양한 경세학 문헌이 쏟아져 왔기 때문이다.62
이 시기 경세학의 열풍은 진인석(陳仁錫)의 『경제팔편유 찬』에 수록된 당순지(唐順之)의 『형천우편』(荊川右編)에 실린 초횡(焦竑)의 서 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경세를 모르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며 고 고(考古)와 합변(合變)을 모르는 경세는 경세가 아니라’고 단언했다.63
경세학의 유행은 『대학』의 이해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명대 후기 『대학연의보』의 중간(重刊) 서문은 『대학』의 ‘격치성정’(格致誠正)을 경직(耕 織)에 비유하고 『대학』의 ‘수제치평’(修齊治平)을 의식(衣食)에 비유하여 경 직의 결과 의식을 얻지 못한다면 학문에 종사할 이유가 없음을 명시했다.64
62 관련하여 『대학연의보』를 편찬한 명대 전기 주자학자 구준(丘濬)은 주희의 실용 개념을 활용하여 주희 당대에는 『대학』의 도가 실천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학의 도가 책이 아니 라 내게 있다’는 주희의 말이 허문이 되고 말았지만 이제는 이 말이 실용이 되었다면서 『대학연의보』의 찬진을 감격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명대에는 주자학이 사물을 탐구 하여 심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유자는 실학이 없다’[儒者無實學]는 인식도 공존하고 있 었다[李紀祥(1992), 『明末淸初儒學之發展』, 臺北: 文津出版社; 윤정분(1994), 「서평: 李紀 祥 著 『明末淸初儒學之發展』 臺北, 文津出版社, 1992, 425쪽」, 『명청사연구』 3, 명청사학 회].
63 부유섭(2020), 「안정복의 『잡동산이』와 진인석의 『경세팔편유찬』」, 『한국실학연구』 39, 한국실학학회, p. 90.
64 丘濬, 『大學衍義補』, 「重刊大學衍義合補序」 <奎中 2681>: “予嘗覩于耕織而有感焉. 夫所謂 格致誠正者, 不猶田而耕機而織哉? 所謂齊治均平者, 不猶耕而得食織而得衣哉? 故夫耕者 所以爲食謀也, 耕而不食則無所事耕矣. 織者所以爲衣謀也, 織而不衣則無所事織矣. 學者所 以爲天下國家謀也, 學而無補於天下國家則無所事學矣.”
사공(事功)의 관점에서 학문에 반드시 공효(功效)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 조한 것이다. 명말청초 주자학자 시황(施璜)은 강규(講規)에 반드시 육예(六 藝)와 시무(時務)를 포함했는데 이것은 당세의 학자가 이학(理學)을 허담( 談)하고 문장에 종사하며 육예와 시무를 강구하지 않아 사변에 대처하지 못 함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그는 시무의 범위로 역상(曆象), 병형(兵 刑), 전량(錢糧), 치하(治河) 등을 예시했고 육예와 시무의 학문을 통칭하여 ‘경제실학’(經濟實學)이라 일컬었다.65
경세의 실용으로서 실학을 사고하는 방식은 실학으로 지칭되는 학문의 범위를 도학에서 제도학으로 확대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조선의 홍한주(洪 翰周)는 국가의 문물과 제도에 관한 일관된 탐구를 수행하여 경세학의 지식 을 구축한 중국 당송대의 저술, 곧 두우(杜佑)의 『통전』(通典)과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와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경세실용’(經世 實用)의 서적으로 높이 평가했고 이들 저술에 대하여 박학의 고풍을 보여주 는 ‘당송인(唐宋人) 실학’이라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했다.66
조선의 이상수(李象秀)는 학술과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옛날에는 체용 (體用)의 학문을 유지했기 때문에 유교 경전을 갖고 치하(治河)와 절옥(折獄) 에 종사할 수 있었지만 학술과 경제가 분리된 지금에는 실용진재(實用眞才) 가 되기 위해서는 『통전』, 『통지』, 『문헌통고』는 물론 『대명률』, 『오례의』, 『대전통편』, 『문헌비고』, 그리고 『반계수록』 등을 회통해야 한다고 인식했 다.67
65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治道類」 <科擧誤人辨證說>: “今之學者, 大槪虛談理 學, 專事雕鏤之文, 而置六藝時務於不講, 及臨事應變, 茫然不知不能, 此朝廷所以有不得人 之歎, 而世俗視讀書爲迂者此也. 玆願同人於窮經之暇, 各隨自家聰明才質, 專習一藝, 或能 兼通諸藝更佳, 如禮樂射御書數及曆象兵刑錢糧治河之類, 必精鍊習硏, 實實可以措諸事業, 不徒空談其影響而已也, 此皆經濟實學.”
66 洪翰周(1984), 『智水拈筆』, 아세아문화사, pp. 10-11: “古之博學者, 未必以詩文名世, 故各 自致力於一部書而傳後者, 亦或一道也. 唐之杜岐公有通典, 宋之鄭夾漈有通志, 馬貴與有文 獻通考, 王伯厚有玉海, 洪景盧有夷堅志容齋隨筆等書, 皆巨帙也. 有明一代如升菴弇州荊川 及王畿陳仲醇陳仁錫輩, 著書尤多, 而亦各有詩文一集. 淸以後, 則全務考證, 自爲一種學問, 故所著名目繁富, 愈博愈精, 殆指不勝數, 然皆不如通典通考之爲經世實用之書, 儘乎唐宋人 實學之不可易言也.
67 李象秀, 『峿堂集』 권9 「與申言汝-箕善-丁丑」: “古者學術經濟無二道, 求藝賜達, 俱能從政, 德行文學, 隨處相通, 是爲體用之學. 至漢猶能以禹貢治河, 春秋折獄, 有坐言起行之實, 降及 後世, 則判焉不可不別有其學也. 以古今之學有不同, 而士鮮通才也, 陳君擧專用功於此, 朱 子斥之者, 恐學者急於治人, 緩於修己也, 其實經濟, 何可少也? 特患才短耳. 若左右優爲之 矣, 民國利病爲首, 次則制度興廢, 次則山川謠俗, 次則甲兵關防, 三通爲考据之淵藪, 若大明 律五禮儀大典通編文獻備考等書及國家三政磻溪隨錄爲最, 融貫會通然後成一家言. 然儒 論經世, 必曰井田封建, 叔孫救時, 又鄙而無稽, 酌古參今, 不泥不鄙, 斯爲實用眞才, 竊念吾 所知, 惟左右可以爲此, 未知亦嘗有意否乎? 故以暴衷曲焉.”
홍석주(洪奭周)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이를 배경으로 그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양득중의 ‘실사구시’가 영조조의 실정론(實政論)과 무 실론(務實論)에 호응하는 정치론의 명제였다면 홍석주의 ‘실사구시’는 무실 론에 찬동하면서도 다시 구시론(求是論)을 추구하는 학문론의 명제이다.
그 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학』의 도를 사용하여 관청의 전곡(錢穀)을 관리하는 사무에 종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꺼낸다.
『대학』의 도를 갖고 전곡에 종사할 수 없다면 이는 『대학』의 선학(善學)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경세의 실용과 도학의 실용은 서로 다른 것일까? 전곡에 종사하는 것은 경세의 실용이다.
『대학』의 도를 강론하는 것은 도학의 실용이다.
홍석주는 옛날에는 일경(一經)을 전공하여 종신토록 사업에 시행했는데, 지금은 성리 는 강론하나 육예(六藝)는 경시하여 사업에 대처하지 못하고 왕도는 담설하 나 실무는 서리에게 맡겨 백성이 병들고 있으니 무실(務實)이 절급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그 무실이 재화와 의식의 이익만을 쫓는 ‘이해의 실’에 매 몰되지 않도록 ‘시비의 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사 필무실’(事必務實)과 ‘실필구시’(實必求是)로 요약되는 무실과 구시의 학문론 에 도달했고 무실과 구시를 결합한 학문론의 명제로 실사구시를 제출했다.
홍석주의 「실사구시설」은 도학의 실용과 경세의 실용이 합일되기를 추 구한 것이었다.
『대학』의 도(道)와 전곡의 사(事), 그것이 무실과 구시의 통 합적인 인식을 제공하는 기본 출처라면 『대학』의 격물치지 역시 이러한 인 식에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대학』 8조목이 ‘궁리’(窮理)가 아니라 ‘격물’(格物)에서 시작함에 착목하고 격물의 의미를 새롭게 풀이했 다.
격물의 ‘물’이 실사구시의 ‘실사’라면 격물의 ‘격’은 그 실사가 이해의 실이 아니라 시비의 실이 되도록 작용하는 ‘구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68
68 洪奭周, 『淵泉集』 권25 「實事求是說」: “大學之道, 亦可以鉤稽官錢耶?…何爲其不可也?… 凡治一經者, 終其身, 施諸事爲, 皆是經也. 今之號爲讀書者, 往往能博涉古今, 兼古人十數家 之功…與之一廛則眊然而不分禾黍, 出而遇財賦卒乘訟獄之事, 目張而臂縮…夫講大學之道, 而不能以從事於錢糓, 余固以爲不善學也.…然今之人, 惟不習灑掃應對也…而不能執子弟之 職者多矣. 惟不講禮樂射御書數之節文也, 故遇一事, 輒茫然不知所置手…後之君子則不然, 端委而談王道, 其名甚美…至於國家之大計, 生民之大命, 日用而不可闕者, 一付諸庸陋瑣刻 不讀書之胥史, 而徒執空言以臨之, 曰君子不言財, 豈誠能無倉廩府庫而治, 不衣不食而使人 哉?…嗚呼! 斯皆不務實之過也…後世之爲學者…其營營于貨財衣食之塗者, 皆自謂求其實 矣, 然所求者利害之實, 而非是非之實也, 使其事必務實, 實必求是, 則學安有不成, 治安有不 古若哉?…大學之始, 不曰窮理而曰格)物, 物者固實事之謂也.”
주희는 도의 탐구라는 시각에서 격물을 곧 궁리라고 보았지만, 홍석주는 실 사구시의 시각에서 실사에서 구시를 추구하는 격물을 고원한 성리 탐구를 뜻하는 궁리와 구별하였다. 그의 실사구시는 본질적으로는 무실론의 성찰 로서 격물론이었고 이 점에서 무실론을 위주로 하는 양득중의 실사구시를 넘어선 곳에 있었다.
홍석주는 도학의 실용과 경세의 실용이 접합하는 지점에서 양자의 분 리를 인식했고 그 통합을 추구했다.
이때 그는 실사의 바탕에서 구시를 추 구함으로써 경세의 실용 위에서 도학의 실용을 긍정하였다.
반면 정기세(鄭 基世)는 동일한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해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옛날에 는 육예(六藝)와 대학(大學)이 모두 하나의 실용학이었으나 후세에는 ‘경제 지학’과 ‘성리지학’으로 학문이 분열했고 따라서 이를 통일하는 방안이 필 요한데, 육예와 대학의 귀일(歸一)을 실현하는 고증학이 그러한 학문적 역 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논의를 펼쳤다.69
이것은 도학의 실용과 경세의 실 용을 실용의 측면에서 동일성을 부여하되 성리학과 경세학의 분열을 극복 할 새로운 방법으로 고증학의 가치를 부각하는 태도였다.70
69 李裕元, 『林下筆記』, 「林下筆記序」(鄭基世): “余甞論古之爲學, 皆本諸身而徵諸事物, 大學 之修齋治平,孔門之身通六藝, 其條列雖殊, 而實用則一也. 後世好名, 始而學術, 隨以分門, 有性理之學, 有經濟之學, 又下以爲功令詞章之學, 趨舍行藏, 截然爲二, 若僚之丸, 秋之奕, 各異其能, 而不知夫極其精逞其功之同其理也, 然則學之術, 其將孰能一之乎? … 今橘山相 公…皆不離乎日用事爲之間, 綱擧而目張, 術分而源同, 入而爲士子之業, 出而爲宰相之事, 此實古人爲學之法, 而八條六藝之所以終歸於一也.”
70 조선후기 ‘실사구시’의 대표적인 입론으로 金正喜의 「實事求是說」이 거론된다. 김정희의실사구시는 ‘경전의 진의를 고증학적 방법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규명하여 실천궁행한다’ 라고 정의될 수 있다.즉, 고증학을 수단으로 경학에 도달하고 경학을 매개하여 성현의 도를 실천하는 일이다[이선경(2006), 「추사 김정희 사상의 실사구시적 특성」, 『한국철학 논집』 19, 한국철학사연구회, p. 369]. 이것은 경세치용의 실용이나 이용후생의 실용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경학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고증을 수단으로 의리에 도달하여, 고증 중 심의 漢學과 의리 중심의 宋學 사이의 시비를 넘어서는 漢宋不分의 경학론이라 하겠다.따라서 김정희에게 실사구시는 학문론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성현의 도를 궁행실천하는 일이다.김정희의 「실사구시설」은 문경(門逕)과 당실(堂室)의 비유를 통해 바른 문경(= 고증)을 통해 당실(=의리)에 들어가 성현과 만나는 일을 실사구시의 학문이라 서술했다 (金正喜, 『阮堂全集』 권1 「實事求是說」).그런 의미에서는 주희가 추구한 도학의 실용에 서 벗어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3.3. 산업의 실용
경세의 실용은 기본적으로 제도론의 문제를 내장했지만 동시에 내부 적으로 산업론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제도론의 문제로부터 경세의 실 용을 볼 경우 경세의 주체는 제도에 접속해 있는 조정 관인이 된다.
그러면 조정 관인으로 입신하지 못한 향촌 사족은 경세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일 까? 조정과 향촌 사이에서 발생하는 경세의 차등은 해소될 수 있는 문제인 가?
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산림 또는 임원을 표방하는 경세서의 출현은 산업론의 시각에서 실학 개념의 형성을 추동하는 배경이 되었다.
곧 홍만선 의 『산림경제』(山林經濟)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그 적실한 사례이다.
양자 모두 ‘산림경제’ 또는 ‘임원경제’라고 하는, 조정 관인의 국 가 경영을 전제하는 제도론의 시각에서 보면 형용 모순처럼 보일 수 있는 새로운 경세를 표방했는데 이에 관한 사고방식은 상반된 방향에서 도출되 었다.
즉, 산림경제가 의미하는 바는 조정에 조정의 사업이 있고 조정의 경제 가 있듯이 산림에도 산림의 사업이 있고 산림의 경제가 있으며 양자의 경제는 본질적으로 서로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산림의 독자성을 부각 하는 것이 아니라 경세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관점이었다.71
이러한 관점에 서 산림에서 전개하는 처사의 이용후생에 관한 전반적인 활동은 그가 조정 관인이었다면 당면했을 활국이민(活國利民)과 경방체도(經邦體道)의 사업을 추진하는 마음으로 수행되는 사회적인 실천이었다.72
산림경제가 ‘경제’에 주안점을 두어 산림의 ‘경제’를 말했다면 임원경 제는 ‘임원’에 강조점을 두어 ‘임원’의 경제를 말했다.
임원경제가 의미하는 바는 사대부의 공간이 정치와 교화로 구성되는 출사의 공간과 생업과 문화 로 구성되는 거향의 공간으로 분별된다는 것, 따라서 임원의 경제는 출사의 경제가 아니라는 자각의 표시였다.73
그 결과 임원의 생활에 관한 실용 지 식에 집중해서 식화와 이용의 경제 생활과 문예와 의례의 문화 생활에 관 한 정보 구축에 더욱 진전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다.
이것은 제도론에서 산업론으로 경세의 ‘실용’이 확장되는 결과를 초래 했다.
서유구는 자신의 학문 편력을 경예학, 경세학, 농학의 추이로 나타냈 는데, 독창적 학설을 생산하지 못하는 경예학(經藝學), 담론에 갇혀 현실에 무익한 경세학(經世學)을 지나 농학에 이르러 비로소 ‘실용’을 발견했다는 그의 고백74은 조선후기 경세의 ‘실용’을 둘러싼 주요한 맥락의 하나가 이용후생에서 발출함을 가리킨다.
71 洪萬選, 『山林經濟』, 「山林經濟序」(洪萬鍾): “山林與經濟異途, 山林獨善其身者樂之, 經濟 得意當世者辦之, 其異若是, 而亦有所同者存焉. 蓋經者經理庶務, 濟者普濟羣品, 廊庙而有 廊庙之事業, 則是廊庙之經濟也, 山林而有山林之事業, 則是山林之經濟也, 所處之地雖異, 其爲經濟則一也.”
72 洪萬選, 『山林經濟』, 「山林經濟序」(洪萬鍾): “蓋以活國而理民者, 移之於花木, 以經邦而體 道者, 施之於園圃, 士中可謂跡山林而心經濟者也.”
73 徐有榘, 『林園經濟志』, 「林園十六志例言」: “凡人之處世, 有出處二道. 出則濟世澤民其務也, 處則食力養志亦其務也. 顧濟世之術, 一應政敎無非所需, 固多備述之書, 至於鄕居養志之 書, 尟有裒集者, 在我邦僅有山林經濟一書. 然中多冗鎖, 所採亦狹, 人多病之. 故於此略採鄕 居事宜, 分部立目, 搜羣書以實之, 以林園標之者, 所以明非使宦濟世之術也.”
74 徐有榘, 『金華知非集』 권3 「杏蒲志序」: “噫! 天下之治方術者多矣. 九流百家, 競樹墠垣, 冀 以承前而耀後者何限, 余獨弊弊乎農家者流, 竆老盡氣而不之止者, 是誠何爲也? 吾嘗治經藝 之學矣, 可言者昔之人言之已盡, 吾又再言之三言之何益也? 吾嘗爲經世之學矣, 處士揣摩之 言, 土羹焉已矣, 紙餠焉已矣, 工亦何益也? 於是乎廢然匍匐于氾勝之賈思勰樹蓺之術, 妄謂 在今日坐可言起可措之實用者, 惟此爲然.”
농학의 연구와 임원의 경제는 학문과 경세의 주체로서 사(士)의 실학 (實學)에 대한 자각을 배경으로 하였다.
무실(務實)의 정치를 이루고자 농가 의 전서를 편찬하겠다는 정조의 윤음을 받고 조정에 진상된 박지원의 농서 『과농소초』(課農小抄)는 사의 학문이 농공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 결과 농 공상의 생업이 완성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이 사의 ‘실학’이다.75
이 맥 락에서 농학은 실학의 중요한 일부가 되는데 그의 관심사는 농학의 주체로 농민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선비의 학문이 성리와 사장에서 벗어나 농학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76
이것은 이용후생의 중요한 문제인 농업에 대해서 이를 기술이 아니라 학문의 견지에서 접근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그는 박제가의 『북학의』의 취지에 찬동하여 ‘북학중국’(北學中國)을 주장하면서 성인의 학 문 역시 이용후생을 위한 사물의 학문이었고 그것의 증진 방안은 호문(好 問)이라고 말했다.77
후일 김윤식(金允植)은 박지원의 학문을 비평하면서 이 두 가지 글에 근거하여 박지원이 근대의 농학, 공학, 상학의 뜻을 얻었다고 논했다.78
75 朴趾源, 『燕巖集』 권16 「課農小抄」 <諸家總論>: “然而士之學, 實兼包農工賈之理, 而三者 之業, 必皆待士而後成. 夫所謂明農也, 通商而惠工也, 其所以明之通之惠之者, 非士而誰也? 故臣窃以爲後世農工賈之失業, 卽士無實學之過也.”
76 朴趾源, 『燕巖集』 권16 「課農小抄」 <諸家總論>: “士或高談性命, 而遺於經濟, 或空尙詞華, 而罔施有政. 富者旣飽煖逸居, 而不知衣食之所自出, 貧者又無卓錐之業, 可以學稼而學圃. 於是乎農之學, 莽矣. 農之學莽, 而其效益蔑如, 則凡民之稍有智巧者, 日趨於末業遊食之塗, 而其屈首緣畝, 皆天下之至愚至拙也.”
77 朴趾源, 『燕巖集』 권7 「北學議序」 : “舜自耕稼陶漁, 以至爲帝, 無非取諸人, 孔子曰, 吾少也 賤, 多能鄙事, 亦耕稼陶漁之類是也. 雖以舜孔子之聖且藝, 卽物而刱巧, 臨事而製器, 日猶不 足, 而智有所窮, 故舜與孔子之爲聖, 不過好問於人, 而善學之者也.”
78 金允植, 『雲養集』 권10 「燕巖集序-壬寅」: “農說曰四民之業, 皆待士而成, 後世農工賈之失 業, 卽士無實學之過也. 北學議序曰吾東之士, 生老病死, 不離疆域, 謂禮寧野, 認陋爲儉, 謂四民, 僅存名目, 而至於利用厚生之具, 日趨於困窮, 此無他, 不知學問之過也. 此今日農學 工學商學之意也.”
김윤식은 서구 근대사상이 육경과 암 합(暗合)하고 박지원이 육경의 실학자로서 동양의 선각자였다고 인식했기 에 이런 인식이 가능했다.79
그러나 박지원이 추구한 이용후생의 학문은 여 전히 유학의 수기치인의 정신에 머물러 있었고 정덕(正德)과 결합해 있었 기 때문에 이를 근대적 실학의 관점에서 실업학으로 독해하는 협애한 시각 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유학사의 맥락을 고려한 근세적 실학의 관점에서 학 문적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실학은 근세적 실학의 인식 계기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그 역사적 실상의 온전한 인식을 저해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80
79 金允植, 『雲養集』 권10 「燕巖集序-壬寅」: “今先生洞觀宇宙之變, 雖知其言之不用於當世, 而留待於百年之後, 將以開發人智, 收其遠大之效, 可不謂間世之英豪, 東洋之先覺乎? 或曰 先生之時, 未見泰西文字, 何其言之與西人之學理政術, 一一相符乎? 曰泰西善法, 未嘗不暗 合於六經. 先生儒者也, 其經術文章, 皆自六經中來, 其言之相符, 曷足異也?”
80 小川晴久 지음(1995), 하우봉 옮김, 『한국실학과 일본』, 도서출판 한울, pp. 24-33.
4. 비교
4.1. 근대의 실학
한국사에서 근대 실학 개념은 신교육의 실시로부터 출발한다.
갑오개 혁 기간 반포된 교육입국 조서는 국가 보존의 근본으로서 교육의 방도를 다름 아닌 허명의 제거와 실용의 숭상에서 구하고 이를 달성하는 교육 강 령으로 덕양(德養), 체양(體養), 지양(知養)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교육 에서 추구하는 실용의 숭상에 맞추어 대한제국 선포 후 설립된 상공학교, 광무학교 등은 각각 ‘상업과 공업에 필요한 실학’ 또는 ‘광업에 필요한 실 학’을 교육하는 기관임을 관제에 명시하였다.
중학교의 경우 관제에서는 실 업 취업의 인민을 위해 ‘정덕이용후생’의 중등교육을 교수한다고 밝혔고 청의서에서는 한국 학제에 어학교나 소학교는 있으나 실학 교육 기관이 없어 서 ‘실지학업’을 교수하고자 한다고 밝혔다.81
이것은 근대 교육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 실학이 상학, 공학, 광학 등 특 정한 실업 교육 기관의 학문 또는 일반 교육 기관의 학문이라 하더라도 실 업 취업에 도움이 되는 이용후생의 실지 학업을 의미함을 보여준다.
이에 앞서 조선 정부는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는데, 태서 학문이 ‘석리’(析 理)와 ‘이용’(利用)에 뛰어남을 인정하고 학생들이 언어에 통하여 사물을 익 히기를 원했다.82
단순히 언어와 문자를 학습하는 기관이 아니라 농상(農 桑), 의약(醫藥), 공상(工商) 등 이용후생의 학문을 얻는 기관으로 인식하였 다.83
근대 교육의 내용으로 사물학 또는 이용후생학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서는 갑오개혁 이후 신교육 실시와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아직 ‘실학’, ‘실 업’, ‘실지’ 등의 직접적인 의미 부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제국 전기 박은식의 교육 개혁 담론도 한국 근대 실학 개념의 이해 에 도움이 된다.
그는 「흥학설」(興學說), 「종교설」(宗敎說), 『학규신론』(學規新 論) 등을 집필하여 거듭 교육 개혁을 촉구했는데, 대한제국 사회에 필요한 학문을 ‘이용후생의 신학(新學)’이라 말했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각종 실학(實學)’이라고 말했다.84
그는 국가 부강과 인민 자립을 위한 태서 학문으로 실업학, 격치학, 법학, 철학 등 제반 분야를 말했고,85 학교 교과 교육에서 교수하는 학문의 성격에 대하여 ‘경제’(經濟) 또는 ‘예술’(藝術)이 라고 표현하였다.86
81 『各部請議書存案』, 「中學校官制請議書」.
82 『育英公院謄錄』, 「育英公院規則序」(閔種默).
83 『育英公院謄錄』, 「育英公院學校規則序」(金永壽).
84 朴殷植, 『學規新論』, 「論學要遜志」; 朴殷植, 『學規新論』, 「論遊學之益」.
85 朴殷植, 『謙谷文稿』, 「興學說」: 農學, 商學, 武學, 醫學, 磺學, 哲學, 化學, 法律學, 工藝學, 測算學, 繪圖學, 天文學, 地理學, 光學, 電學, 聲學, 重學, 汽機學 등의 학문을 거명했다.
86 朴殷植, 『謙谷文稿』 「宗敎說」.
전근대 실학 개념이 전통 유학 내부에서의 실학에 머물 렀다면 근대 실학 개념은 그 바깥에 위치하였다.
박은식이 말한 ‘이용후생 의 신학’, ‘영법덕미의 실학’이란 표현은 실학이 이제 한국의 현실에 필요한 근대 서양의 분과 학문이라는 어의를 함축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대한제국 후기 신교육이 확산되면서 근대 분과 학문으로 가리키는 실 학 개념은 지역 사회의 학교 교육으로 구현되었다.
이를테면 서울의 약명학 교는 실학을 발명한 세계 열강과 실지 교육이 없었던 한국을 비교해서 실 학 교육, 실지 교육의 중요성을 내세운 학교인데 이를 위한 교과목으로 한 문, 지리, 역사, 경제, 수신 및 과학(산술, 이학, 화학)과 어학(한문, 일어, 영어) 수업을 개설했다.87
근본적으로 실학은 세계 열국의 교육 과정에서 이수되 는 전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곧, 농학, 상학, 이학, 화학, 광학, 의학, 기계학, 조직학, 법률학, 경제학, 정치학 등의 허다한 실학이 그것이었 다.
반면 장구와 사장에 매몰되고 시무와 법률에 어두운 한국의 학문은 ‘사 실도허’(捨實徒虛) 곧 실학을 버린 허학이었다.88
근대 실학은 서양 열강에서 제도적으로 재생산하는 다양한 전문 분야의 학문이었지만 그 중심에는 자 연과학과 산업학이 있었다.
한국의 재일 유학생 단체의 학회지 『태극학보』 는 한국의 부강과 독립을 기약하는 필수적인 방법으로 농공상 실업의 발달, 전기화(電氣化) 실학의 연구, 그리고 철학의 강마 등을 거론했다.89
87 『大韓每日申報』 1907년 10월 15일, 잡보 「藥明學校趣旨書」.
88 『皇城新聞』 1906년 5월 9일, 광고 「能川郡私立開通學校各面里廣告」.
89 『太極學報』 22, 논설 「法律學生界의 觀念」 1908. 6.
전체적으로 한국 근대 실학 개념은 신교육 조서의 실용 숭상과 신학교 관제의 실학 교육을 필두로 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신학교 의 신교육으로 교수되는 교과목의 분과 학문들, 그리고 그것의 근원으로 세 계 열강의 교육 제도에서 생산되는 전문적인 분과 학문들이 실학으로 간주 되었다.
이러한 제도적인 외연과 함께 학문적인 내포에서도 실학 개념의 응집력이 상승했고 그 결과 국가 부강을 위한 실지 학문으로서 특히 과학과 산업에 기여하는 학문들이 실학의 대표자로 거론되었다.90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근대 실학은 금(今)이라고 하는 현재의 시간에 관 심을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초기에 감각된 실학이란 ‘옛날 사람의 허 문이 오늘날 사람의 실학으로 변화했다’는 언술에서 보듯 ‘금인의 실학’이 었으며,91 ‘금일이 가히 실학시대(實學時代)요 실력세계(實力世界)라’는 언술 에서 보듯 ‘금일의 실학’이었다.92
90 노관범(2016), 「전환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기억의 역전』, 소명출판.
91 『大韓協會會報』 4, 「世人의 來歷」 1908. 7
92 『太極學報』 24, 「舊染汚俗咸與維新」 1908. 9. 32
이러한 ‘금인의 실학’과 ‘금일의 실학’은 과거가 아닌 현재, 역사가 아닌 현실에 관심을 두고 있기에 이러한 사고방 식에서 한국의 학문적 상황을 본다면 실학의 결핍으로서 허학이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견지에서 한국사의 특정한 시기에서 실학의 조류를 검출하여 실 학의 존재를 상상하는 후일의 조선후기 실학론은 근대 실학의 일반적인 용 법과는 들어맞지 않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근대 교육과 근대 학문의 맥락에서 실학 개념이 부과하는 허와 실의 이분법은 비단 근대의 현실 인식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전근대의 역사 인식으로도 개입했다.
이 시기에 유행한 일반적인 실학 개념은 학술적인 실학 개념의 원형이 되었다 고 볼 수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전근대 한국 문헌에 보이는 ‘실학’의 개념사를 논구했다.
전 근대 실학 개념의 주요 이해 맥락으로 도학의 수용, 과시의 강경, 군주의 성 학, 실정과 무실, 경세의 실용, 산업의 실용 등을 제시했다.
말미에서 근대 실학 개념을 서술하여 실학 개념에서 전근대와 근대의 역사적 거리를 실감 하게 하였다.
먼저 도학의 수용은 한국 실학 개념의 출발이다.
주희는 『대학』과 『중 용』의 서문에서 도학이 실학임을 명시했다.
그는 『대학』 서문에서는 대학 의 교육이라는 시각에서, 그리고 『중용』 서문에서는 성현의 심법이라는 시 각에서 도학에 접근했다.
『대학』과 『중용』의 학문이 도에 관한 실학이며 그 학문은 평생 실용이 있다는 뜻이었다.
한국 문헌의 최초 실학 용례는 14세기 전반 이제현의 문과 안축의 시에 보인다.
양자는 각각 ‘경명행수’의 문제의식과 ‘독서구도’의 문제의식을 보 였는데, 모두 도학의 경세론을 표현하고 있기에 이들이 발화한 ‘실학’은 주 희의 뜻을 계술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이 말한 명명덕과 신민의 실학과 권근이 말한 구도와 후륜의 실학 역시 동일한 맥락의 실학이었다.
도학의 수용 이후 실학에 관한 사고는 조선 전기에는 주로 과시의 강경 에 위치했다.
‘실학을 읽는다’, ‘실학으로 유명하다’, ‘국인이 과업으로 하는 경서 강독을 실학이라 한다’ 등의 문구는 ‘실학=강경’의 특징적인 사례이 다.
‘실학주’, ‘실학토’, ‘실학급제’ 역시 이 맥락에 있었다. 경학의 목표는 도학의 실천이었으나 강경의 현실은 도학의 이상과 멀 어져 갔다.
이에 입도의 맥락에서 실학에 대한 고민이 생성되었다.
이황의 『주자서절요』 작업은 학자의 실학을 위해 『논어』를 대신할 새로운 입도의 책으로 기획된 것이었고, 이이의 『성학집요』는 군주의 성학을 위한 기존의 『대학연의』가 역사서이지 실학서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대학』의 경세론을 새롭게 창안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실학 개념의 정치화에 기여한 어휘는 실정과 무실이었다.
『승 정원일기』의 기사 건수는 실학, 실심, 실정이 모두 조선후기 영조, 정조, 순 조의 치세에 약진했고 서로 연동하는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도학의 경 세론에서 무실의 강조는 이이의 「동호문답」에서 출발해 이수광의 「조진무 실차자」를 거쳐 영조에 이르러 재차 강조되었다.
영조는 인순고식을 비판 하고 무실거문을 주장했고, 이에 호응한 양득중은 의리의 폐해와 허위의 풍 조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에서 ‘실사구시’를 제기하였다.
조선후기 경세의 실용은 실정과 무실의 정치의식과 관련된다. 본래 도 학의 실용은 학문과 정치를 매개하는 개념이고 도학의 실천이 실학의 실현 이다.
명말청초 ‘경세실용’ 또는 ‘경제실학’의 조류는 도학의 실용과 구별 되는 경세의 실용이라는 관념을 야기했고 고제 연구와 현실 개혁이 결부된 경세서의 출현을 자극했다.
홍석주는 『대학』의 도를 갖고 전곡에 종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새로운 ‘실사구시’를 제기했다.
홍한주는 『통전』, 『통지』, 『문헌통고』 같은 제도서를 ‘경세실용’의 문헌으로 인식하고 이를 ‘당송인 실학’이라 평가했다.
경세의 실용은 제도론과 함께 산업론의 문제를 포함한다.
조선후기 향 촌 선비의 이용후생 활동이 새롭게 경세 개념에 포착되었다.
전통적으로 경 세의 공간은 중앙 조정이었으나 홍만선의 『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경 제지』는 경세의 공간으로 산림 또는 임원을 표방했는데, 전자는 경세의 보 편성에 착목하고 후자는 임원의 독자성에 착목하여 경세 개념을 확장하였 다.
또한 박지원은 선비의 실학으로 농공상의 이치 탐구를 부각했고, 서유 구는 경학이나 경세학이 아니라 농학에서 실용을 발견했다.
산업의 실용은 아직은 정덕과 이용후생의 결합으로서 수기치인의 정신에 머물러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근대적 실학이 아닌 근세적 실학이었다.
전근대 실학에서 근대 실학으로 실학 개념의 시대 전환은 신교육의 실 시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갑오개혁 기간 신교육 조서의 실용 숭상과 대한 제국 시기 신학교 관제의 실학 천명은 근대 실학이 다름 아닌 신학문임을 명시했다. 한국의 신학교에서 교수되는 신학문, 세계 열강에서 생산되는 전 문적인 분과학문, 국가 부강을 위한 실지 학문, 특히 자연과학과 산업학이 실학으로 지칭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 도학 허학론과 근대 신학 실학론의 현실인식이 확산되 었고 그것이 역사인식으로 투영되었다.
도학과 실학의 이분법적 대립을 자명하게 전제하는 ‘조선후기 실학’이라는 학술 개념의 생성 배경이다.
그러 나 전근대 학문 조류로서 실학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전근대 실학 개념의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전근대 실학의 학술적 이해는 근대 실학의 강변으 로는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향후 전근대 실학 개념의 역사적인 이해 맥락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착수되기를 희망한다.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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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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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전근대 지성사 연구에서 학술 개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 치지 않다. 학술 개념의 정합성과 적합성이 보증되어야 이에 기반한 학술 연구가 순행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 속에서 생성된 학술 개념은 시대에 제 한된 사고에 갇혀 있기 쉽고 결국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념적 반성에 직면 한다. 이 글은 전근대 한국 실학의 개념사를 탐구했다. 전근대 한국 문헌에 보이는 실 학의 의미를 이해하는 주요 맥락으로 도학의 수용, 과시(科試)의 강경(講經), 군주의 성 학, 실정(實政)과 무실(務實), 경세의 실용, 산업의 실용 등을 검출했다. 이러한 맥락을 통해 전근대 실학의 구체적인 개념 현장을 복원했다. 끝으로 신교육 실시 이후 근대의 실학을 서술하여 전근대 실학 개념의 비교적인 이해를 시도하였다. 종국적으로 전근대 일반 개념으로서 실학의 의미가 발현되는 역사적인 맥락에 근대 학술 개념으로서 실학 이 부과하는 도학과 실학의 대립이라는 근대적인 통념이 놓여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주제어 실학, 도학, 경세, 개념, 맥락
ABSTRACT
A Study on the Historical Concept of Silhak in Pre-modern Korea
Noh, Kwan Bum( Associate Professo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article explores the conceptual history of Silhak (實學) in pre-modern Korea.
This study identifies the following as the key contexts for under standing the meaning of Silhak found in pre-modern Korean literature: the acceptance of Neo-Confucianism (道學); the exposition of the classics in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講經); Sage Learning (聖學) for the monarch; substantive governance (實政) and political pragmatism (務實);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statecraft (經世) and its extension to utility of industry. Through these contexts, the paper reconstructs the specific conceptual environment of pre-modern Silhak. Finally, it attempts a comparative understanding of the pre-modern concept by describing the Silhak of the modern period, following the implementation of new education. Ultimately, the research confirms that the modern conventional viewpoint―which posits an opposition between Dohak and Silhak imposed by the modern academic conceptualization of Silhak―is not present in the historical context where the meaning of Silhak, as a general pre-modern concept, originally emerged.
Keywords Silhak (實學), Neo-Confucianism (道學), Statecraft (經世) Concept (槪念), Context (脈絡)
원고 접수일: 2025년 10월 12일, 심사완료일: 2025년 11월 10일, 게재 확정일: 2025년 11월 11일 36
인문논총 82권 4호(2025. 11. 30.), pp. 3~36
[DOI] https://doi.org/10.17326/jhsnu.82.4.20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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