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3회
명나라 제독 마기 또한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 등이 으뜸가는 명장이라고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명련은 명나라 제독 마기麻貴)의 추천으로 종2품 오위장이란 높은 지위에 올랐다.
사헌부에서는 그의 천한 신분을 들어 체직(遞職: 직분을 교체함)을 청했는데도
끝내 윤허되지 않았다.
참고로 종2품이 어느 정도냐고?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수군총사령관)가 바로 종2품 관직이다..
권율 장군의 도원수(육군총사령관)는 정2품으로 종2품과 한 단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이걸 일개 천민이 오직 싸움 실력 하나 가지고 올라간거다.
조선 임금 중 가장 형편없는 왕이 선조라고 하는데 이런 면도 있었다.
선조왈
“한명련한테 옷 좀 보내줘라”
“한명련네 집에 쌀 좀 보내줘라”
“한명련이 다쳤다는데 궁궐 의사를 보내서 치료하게 해라”
그는 선조임금에게 많은 관심과 총애를 받았다
이렇게 전쟁 중 내내
권율의 인증마크 획득
선조의 인증마크 획득
명나라 제독의 인증마크 획득
천민 출신으로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당시 조선 시대에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한명련의 급격한 신분 상승은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켰다.
한명련은
종전 후 기대하던 중앙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한명련 : “내가 존나 열심히 싸웠으니까 인정 받겠지?”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전하! 미천한 자로 하여금 궁궐 수비를 맡길 수 없사오니! 파직하소서!!"
특히 선조의 아들,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 세력은 한명련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천민 출신 한명련의 신분을 꼬투리 잡아 연일상소를 올렸다.
한명련 왈
“그래 그냥 내가 떠나 버리자. 기대 했던 내가 억리석었지
차라리 변방으로 가자........”
결국 한명련은 떠난다.
결국 한명련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변방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한명련을 견제하던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오히려 한명련을 다시 불러들인다 .
그렇게 한명련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광해군의 신임을 받으며 길주 목사를 거친 후 순변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런 영광도 오래가지 못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4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는 화를 입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한명련은 벼슬을 마다하고 사직을 요청하며 귀향하길 원했지만 인조 임금은 그의 귀향을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련은
역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한명련을 압송하던 중 뜻밖의 인물이 그를 구출한다.
바로 북방을 지키던 명장 이괄이었다.
이괄 역시 인조반정 공신이었지만
자신의 공에 걸 맞지 않는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앙심을 품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 아들마저 역모죄로 몰리게 되어 굉장히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한명련은 자신을 구출해 준 이괄의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1624년 1월 22일
이괄과 한명련은 1만 2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관군과의 교전을 피하며
2월 9일 무혈 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괄의 난은 오래가지 못 했다.
불과 이틀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2월 14일
한명련은 이괄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렇게 임진왜란의 영웅 한명련은 반역죄로 드라마틱했던 그의
삶은 끝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명련의 아들 한유는 아버지의 죽음에 큰 원한을 품고
후금으로 망명해 버리고 만다.
그 후에 후금의 장수가 되어 조선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
한유는 정미호란 때 후금군의 선봉에 서서 의주성에 진입해 군기 창궐을 불태우는 등 조선의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이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사람들에게 한적이라 불리며 매국노로 낙인 찍히게 된다.
이처럼 한명련 가문의 비극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반역자로 그리고 그 아들은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가 된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한명련은 임진왜란 발발로 암울했던 전란시대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천민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토사구평당하면서 좌천되었다.
그리고 훗날 다시 조정에서 부르자 충성을 다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졸지에 또다시 토사구평당하며 생을 마감했으니 그 아들의 조선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 않겠는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5회
선조실록 선조 26년(1593년) 12월 3일
선조임금은
좌의경 윤두수를 불러 왜군의 동태에 대해서 물어본다
도원수는 울산 사람들이 제일 정예롭고 용맹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에 이르기를 변장과 수령 가운데 종적이 현지화하여 칭송할 만한 자 없는가 하니 아래기를 한명련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권희인도 잘 싸운 사람인데 탄을 맞아 죽었고 이빈의 군사 구십여 명이 전투에 익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천은 늙었지만 전투에 용감하였는데 동궁이 이천에 있을 때 방어사를 삼아 내보냈으나 직무를 수행하던 중에 옥 등의 왜적이 들이닥쳤는데도 달려가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제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로 그 직을 제소하여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이자 맹장인 한명련에 대한 인지부조화 발언은 너무나 유명하다
인조의 경우 병자호란 종료후
“어휴~~~~ 한명련만 있었으면 우리가 안졌을텐데 라는 발언을 한다.
인조의 발언이 문제인 이유 한명련의 경우 인조반정 후 인조에게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인조는 과인의 곁에서 일해 달라며 한명련의 사직을 반려한다.
그런데 이괄의 난이 터지자 바로 한명련에게 너 역적 이라고 선포 했으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거 확정인 한명련은 이괄의 진영에 가담 했으며 진압과정에서 이괄의 부하들에게 목이 잘려 죽고 만다.
그런 주제에 이런말을 하자 이경증이라는 신하가 님이 역적으로 몰아서 난에 가담케 한뒤 죽여 버린 주제에 그런말할 자격있음 이라고 극딜을 박아 버렸으며
인조는 극딜에 아무말 하지 못했으며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은 후금에 귀화해 조선군 방어체계를 후금에 알려주어 후금은 마침내 조선을 침공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6회
정기룡 장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제독 마기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이 조선 제일가는 명장이라고 인정했다.
이번에는 장기룡 장군을 살펴보자
정기룡은 1562년 경남 하동에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사망하였는데 가족들이 어머니의 뱃속에 아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이가 바로 정길용 장군이라는 것이다.
정길용 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고 당시 하늘에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 모두 그 탄생을 영웅의 탄생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의 아내 예천 권씨(권홍계(權弘啓)의 딸)가 그의 관상과 됨됨이를 보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1586년(선조 19년), 정기룡의 나이 25세 때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였다.
선조가 자다가 꿈을 꾸었다.
선조는 꿈에 종각에서 자는 용을 보았던 것이다.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별시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는 썰도 있다.
정확히는 정기룡 사후 78년 뒤 송시열이 장군의 신도비문을 쓰면서 항간에 떠도는 말이라고 하며 처음 언급하였다. 이렇듯 정기룡에 관한 것은 대부분이 '썰'이다.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과 전란에서 마귀와 같이 활동하여 평가가 높다. 그 외 조선 장수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기준이 딱 나뉘는데 이순신과 권율은 바다와 육지에서 일군을 이끄는 원숙한 지휘관이고
한명련과 정기룡은 저돌적인 용맹으로 출세한 30대 젊은 장수들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7회
당시 조선에서 손꼽히는 용장은 개전 초에 전사한 신립을 제외하고, 황진, 장윤, 이종인 등이 들어가는데, 정기룡도 이들 못지 않은 혁혁한 무용을 보여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도 나타난다 .
선조 26년 1593년 11월 5일 왕조 실력에 따르면
『“정기룡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이 적에게 거의 살해될 뻔했다가 정기령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라고 쓰여 있다. 그만큼 정기룡의 무예신력은 조선 조정 대신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명나라 황제조차 말을 타고 왜군을 무섭게 몰아붙인 정길용 장군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직접 직책을 하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에서 처음 나온다.
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8회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면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내고, 명 황제도 그의 실력에 감탄해 총사령관 직책인 총병 벼슬을 내려주었다는데 사실 이는 근거가 불분명하다.
정기룡의 전공 중에는 그의 개인 전공을 집성한 <매헌실기>에만 나오는 것이 많다.
행장은 개인 기록이라 신뢰할 수 없는 게 많다.
이런 과대포장 된 부분조차 조자룡하고 똑같다.
상기의 거창 전투는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라고 주장하는데 공식적으로 임진왜란 육지 첫 승리는 신각의 해유령 전투다.
게다가 거창전투는 다른 사료엔 안 나오고 매헌실기에만 나온다. "본진과 떨어진 상태에서 전투를 했는데 실전은 처음이다 보니 정기룡이 보고해야하는 것을 몰라 그냥 넘어가서 다른 곳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하는 편리한 이유를 주장하지만
당연히 확인할 길은 없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없는 전공도 있는 전공처럼 만들고 자기가 잘못해서 패배해놓고도 남탓을 하는 등 허위보고가 판을 치는 당대 모습을 생각해보면
보고를 하지 않았다 운운은 "나 공 세우고도 뭐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요."라고 말하는 것인데,
조선군 최악의 바보인 원균조차 보고는 허위가 많을지언정 재깍 올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59회
이 문제에 대해 하용준의 소설 <정기룡>에서는 정기룡의 입을 빌려
"싸움이 끝난 뒤 적의 수급을 챙겨 오면 그것으로 논공행상하는 줄을 소관이 미처 몰랐사옵니다."라며 보고 방법을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 앞부분에는 함경도 6진에서 함경도 북병사 이일, 동구비보 권관 이순신과 함께 여러 전투에서 승전했다고 해놓고서, 이후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초짜처럼 군다.
이에 대해 난중일기나 징비록 등을 들어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둘은 이미 다른 기록과 교차 검증이 완료된 사료로 인정받는다.
(물론 징비록의 객관성도 논란이 많다.)
전후 7년 뒤 1등 공신에 올라서 일부 사람들이 이순신과 비교를 하지만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이고, 정기룡은 '선무원종공신' 1등이다.
즉, 선무 공신에 들지 못한 후보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순신과 더불어 선무 1등 공신은 권율, 원균 세명 뿐이다.
그나마도 원균은 선조 혼자 억지로 밀어붙였다.
신하들은 왕의 입장을 고려해서 원균을 최대한 높은 자리까지 추천했는데 그게 선무 2등 공신이었다.
한 마디로 신하들은 '아무리 그래도 원균은 죽었다 깨어나도 1등은 절대 안 돼.'라고 생각했단 뜻이다.
실질적으로는 이순신과 권율만이 선무 1등 공신의 자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는 조헌, 고경명, 부산포에서 전사한 정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이영남 등이 있으며 3등까지 합해서 18명인 선무 공신과 달리 선무원종공신은 총 9,060명(...)에 달한다.
당연히 수가 적은 선무 공신이 더 끗발이 높다.
실제로 공신에게는 공신전 등이 주어지지만 원종 공신에게는 그런 거 없다.
후손들에게 음직(음서)의 혜택 등이 좀 주어질 뿐이다.
또 이러면 정기룡은 혈연이나 파당이 없어서 추천을 받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하지만 권율도 스스로의 공으로 선무공신에 올랐고,
위에 정기룡과 함께 거론된 한명련은 천민 출신임에도 선조가 총애해서 파격적으로 출세했다.
이순신도 전라좌수사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대간에서 반대할때 북방에서 활동상을 보고 이순신을 높이산 선조가 강력하게 밀어 붙여 좌수사가 되었다. ]
정말 공적이 컸다면 고언백처럼 선무공신 3등에라도 이름을 올렸거나 곽재우, 정운, 배흥립, 우치적, 김응함처럼 공신도감에서 선정할때 거론이라도 되었을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0회
하지만 위 주장엔 맹점이 있는데,
정문부가 그것이다.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한산도 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에 밀리지 않는 조선군 최고 승전 중 하나였는데, 정문부는 선무공신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정기룡이 저평가받았던 것도 비슷한 케이스 아니었나 싶다.
또한, 한산도 대첩과 행주 대첩에서 모두 전공을 세운 선거이 장군 또한 공신록에 없는 것, 그리고 원균이 1등 공신으로 배정된 것과 실록에 기록된 공신 선정 당시 조정의 설왕설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이 논공행상 자체가 원칙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정기룡과 한명련은 임란 시기 내내 경상우도에서 주로 명군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것도 저평가의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남도 쪽 조선군의 대부분은 전라도와 경상좌도에 포진해 있었고 경상우도는 대부분 명군의 작전지역이었다.
정기룡은 사실상 명나라군 소속의 조선인 장수에 가까웠는데, 이 탓에 조선 조정 입장에선 정기룡에게 큰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에 반해
명나라 입장에선 (자신과 함께 싸웠던 전우인) 정기룡과 한명련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6.25 전쟁 당시 미군에서 백선엽과 김동석을 한국군의 최고 명장으로 평가했던 것과 비슷하다.
저 둘의 활약도 대단하긴 했지만 김홍일, 김종오, 장도영 등 활약 면에선 앞서 언급된 둘보다 더 뛰어났던 장군들도 많았다.
그러나 저 셋이 순수 한국군 장성에 가까웠던 것에 반해 백선엽과 김동석은 영어에 능통해서 주로 미군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저 둘을 더 고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매헌실기의 신뢰성 문제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나, 해당 기록의 전술적 흐름과 일본군의 실제 기본전술, 묘사되는 사건들의 논리적 아귀에는 문제가 없어 숫자가 부풀려지거나 소속된 다른 사람의 공이 전부 정기룡의 것으로 치환되었을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라는 쪽이 더 신빙성 있다.
어쨌건 왜란 와중에 활약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를 직접 보고 평가한 이원익이 홍계남보다 뛰어난 장수로 식견도 있어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잘할 수 있다며 홍계남보다 먼저 승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고, 활약이 없었다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실적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앉혔다고 봄이 옳다.
1601년 울산부사를 역임했고 1610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과의 외교는 재개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여파가 워낙 엄청났던지라 정기룡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보직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1회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2004년에 나온 월탄 박종화의 10권짜리 역사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정기룡이 거의 주인공급에 조선 최강의 장수로 묘사되고 있다.
책 자체가 임진왜란에 대한 각종 야사 총집합인데 정기룡에 대한 야사들도 모두 이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기룡을 주인공으로 한 박상하의 소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2008)가 출판된 이후 사람들에게 60전 60승 무패의 장수, 육지의 이순신 등 아주 많이 과장되게 알려졌다.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 하동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는 정기룡 장군의 고향으로,
그의 탄신지에는 생가와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관련 문화재 세 점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에는 정기룡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2020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이 출간되었다.
2022년에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이 출간 되었다.
( 하용준)
조자룡은 실제 삼국지에서 모두가 구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갔다.
워낙 출중한 무예 실력 탓에 조조가 조자룡을 생포하라고 명하지만 아무도 잡지 못하고 조자룡은 적진을 탈출해 유비의 아들을 결국 구출해냈다.
그때부터 일당백으로 싸우는 사람을 떠올리는 대명사로 조자룡이란 이름이 자주 사용되곤 한다.
조자룡이라는 캐릭터는 게임 속에서도 전투력이 가장 출중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임진왜란 당시 홀로 왜군을 격파하고 다녔던 인물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바로 조선의 조자룡이라고 불렸던 장수 바로 정기룡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2회
'궁녀들의 성생활은 어떠 했을까?'
조선 궁녀들의 이성관계 혹은 성(性)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국왕 이외 남자와의 성관계는 '범죄'... 참형에 처한다
궁녀의 성관계를 참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한
<대전회통>.
조선 초기부터 궁녀의 ‘성범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현종 때부터
이에 대한 형벌이 참형으로 고정화되고 이런 규정이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성문화된 것이다.
궁녀의 성관계를 참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한 <대전회통>.
조선 초기부터 궁녀의 ‘성범죄’는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현종 때부터 이에 대한 형벌이 참형으로 고정화되고 이런 규정이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에 성문화된 것이다.
1543~1698년 기간의 왕명을 수록한 법전인 <수교집록>,
영조 22년(1746)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 고종 2년(1865)에 편찬된 법전인 <대전회통> 등에서는
"궁녀가 바깥사람과 간통하면 남녀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형을 가한다"라고 규정했다.
위의 법규에서는 궁녀가 국왕 이외의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을 '성범죄'로 규정하고 그에 관련된 남녀 모두에게 참형을 가하도록 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란 것은 통상적 사형집행기간인 추분~춘분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형벌을 집행하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오늘날,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 정도의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히 재판을 신속히 진행하듯이, 궁녀의 '성범죄'에 대해서도 그렇게 신속히 절차를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만큼 조선시대에는 궁녀의 성범죄가 중대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위와 같은 법령은 조선 초기 이래의 관습법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궁녀의 성관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왕명이 국초부터 누적된 끝에 위와 같이 성문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발생한 궁녀의 섹스 스캔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는 현종 8년(1667)에 불거진 '귀열이 사건'이다.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인 최 숙빈(1670~1718년)이 태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일이다.
대비전의 시녀인 귀열이는 궁녀에게 가해진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에 불복종한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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