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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2)/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3회

 

 

그녀는 그런 불복종을 마음속으로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표출한 여인이다.

그녀는 형부와 은밀한 관계를 가졌다.

 

형부 이흥윤은 서리 신분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의 '성범죄'가 발각된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엄한 궁궐에서 이 같은 일을 자행하다니!'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분을 참지 못했다.

 

현종은 궁녀의 '성범죄'에 대해서만큼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형 정도에서 봐주자'는 형조(법무부)와 승정원(대통령비서실)의 주장을 뿌리치고 현종은 결국 귀열이에게 참수형을 가한 뒤에야 분을 풀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왕의 그늘에 있는 궁녀가 '외간남자'와 '재미'를 보는 것을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던 조선 왕궁의 무시무시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이것은 궁녀의 '성범죄'에 대한 형벌이 참수형으로 고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귀열이만 참수형을 당하고 '정작 죽어야 할' 이흥윤은 목숨을 보전했다는 점이다.

 

'나쁜 남자' 이흥윤이 아내와 처제를 모두 버리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귀열이의 부모는 '불고지죄'로 유배형을 당했다. 부모는 둘의 관계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 전직 궁녀에게도 엄격한 규율 적용

 

그런데 이성교제 금지의 속박은 현직 궁녀뿐만 아니라 전직 궁녀에게까지 부과되었다.

 

한번 왕의 그늘에 살았던 여자는 궐을 떠난 뒤에도 '외간남자'와 웃고 즐길 수 없다는 봉건적 권위주의를 반영하는 대목이

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4회

 

 

그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세종 때의 '이영림 사건'을 들 수 있다.

 

세종 21년(1439) 5월 15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영림이란 장교가 전직 궁녀와 성관계를 가진 사건이 발각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다. 사헌부(감사원 또는 검찰청)가 이영림을 참형에 처하자고 주장한 걸 보면,

 

그의 파트너인 전직 궁녀에게도 비슷한 수준의 중형이 적용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직 궁녀 역시 현직 궁녀 못지않은 속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여자 쪽만 무거운 형벌을 받았다.

<세종실록>에서 이영림이 세종의 배려로 참형보다 2단계 낮은 형벌을 받았다고 한 데에 비해 전직 궁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은 걸 보면,

 

그 궁녀는 관행대로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영림이 특별히 감형을 받은 것은 그의 신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직 궁녀들에 대한 성적 통제를 보다 더 확실히 하고자, 조선 정부에서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했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관료들의 처나 첩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성종16년(1485)부터 시행된 <경국대전>에 전직 궁녀·무수리를 처 혹은 첩으로 받아들이는 관료들에 대해 곤장 100대라는 중형을 가한다는 규정을 둔 것이다.

 

나아가 이듬해인 성종 17년에는 왕실이 함부로 다루기 힘든 왕족들에 대해서까지 동일한 제약을 가하는 데에 성공했다.

 

전직 궁녀들과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관료·왕족들의 발목을 제도적으로 묶어둔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드라마 속의 <동이>처럼 궐을 떠난 궁녀라고 해서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궐에서처럼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것 같은 인내심을 미덕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가혹한 속박이 궁녀들에 대해서만 적용된 게 아니었다.

 

정식 궁녀가 아닌 '비정규직 여직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속박이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5회

 

 

이 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숙종 27년(1701) 3월 27일자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인현왕후와 장 희빈이 모두 죽고 최 숙빈(영조임금 생모)이 여인천하의 최종승자가 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이때 불거진 섹스 스캔들의 여자 주인공들은 방자(방아이·각심이) 신분을 갖고 있는 월금이, 영업이였다.

 

방자란 일종의 비정규직 여직원으로서 궁녀의 방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 궁녀보다 처지가 더 열악한 여인들이었다.

 

월금이, 영업이 역시 자신들에게 가해진 속박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했고, 그래서 조정이 또 한 번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월금이, 영업이가 성관계를 가진 상대방이 내시(환관)들이었다는 점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놓고 얼마나 많은 호기심을 느꼈을 것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여자 쪽에 대해서만 가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숙종이 내시들에게 사형 대신 유배형을 가했다는 기록을 볼 때, 월금이, 영업이는 감형을 받지 못한 채 사형 수준의 형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경우에 남자들이 감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남녀 모두가 사형을 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남자가 고위층이거나 왕과 가까운 경우에는 남자 쪽이 특별히 감형을 받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궐을 떠난 궁녀뿐만 아니라 궁녀 아닌 여인에게까지 이성교제 금지의 족쇄가 채워진 것을 보면, 궁궐이란 곳이 여인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곳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바꿔야 한다며 과감히 상소를 올린 관리가 하나 있었다.

 

현종 3년(1662) 4월 2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승지(대통령 비서) 김시진이 '전직 궁녀에게도 결혼의 기회를 허락함으로써 그들의 답답한 기운을 풀어주자'는 취지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상소는 가납되지 않았다.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고 <현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하기는 이 상소는 처음부터 가납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궁녀가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치를 떨 수 있는 현종 임금에게 그런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김시진의 상소를 읽으면서 현종의 미간이 얼마나 많이 일그러졌을 것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6회

 

청백리 이 참판 댁 노비가 750명…

 

조선시대 서울은 ‘노비의 도시’

 

“사람이 금수로 취급되니 어찌 법이라 할 것인가(人類而處以禽獸, 豈法也哉).”

 

실학자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의 내용이다.

 

유형원의 외가 6촌 동생인 이익(1681~1763)도 <성호사설>에서

“한번 천한 종이 되면 천만 년이 가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학대와 고통은 천하와 고금에 없었던 일이니···”라고 개탄했다.

(一為賤隷千萬世不能免, 焉虐使困苦天下古今之未始有也)

 

조선시대 노비(奴婢·남자종, 여자종)는 인격체가 아닌 짐승으로 취급받던 신분계층이었다.

 

‘말을 알아듣는 가축’으로서 재산목록 중 가장 값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양반 사족(士族)들은 재산증식을 위해 노비 늘리는데 혈안이 됐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의 <이애 남매 화회문기(和會文記)>는

그 적나라한 실상을 보여준다.

 

1494녀(성종 25)년 이애 남매가 부친 사망 후 재산을 합의로 분할하고 작성한 문서다.

이애 남매의 부친 이맹현(1436~1487)은 본관이 재령으로 문과에 급제해 이조참판을 지냈고 청백리에 봉해졌다.

 

<화회문기>에 따르면,

놀랍게도 이맹현이 가진 노비의 수는 한성부와 전국 71개 군현에 걸쳐 총 758명이다.

청렴한 관리의 상징이라는 청백리가 이런 수준이니 다른 고관 벌열(閥閱) 가문의 노비가 얼마나 많았을지는 쉽게 짐작 간다.

 

이맹현의 노비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서울이 147명(19.4%)이며 다음으로 함경도 함흥 67명(8.8%), 경상도 함안 49명(6.5%), 전라도 임실 32명(4.2%), 경기도 임진 28명(3.7%) 등이었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이 제일 많다. 서울은 조선 팔도의 여러 고을 중 노비가 가장 많은 ‘노비의 도시’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한양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 양반은 16% 불과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계급은 모두가 잘 알듯 양반, 중인, 상민, 노비 4가지로 구분된다.

 

조선은 사족의 나라였고 모든 특권은 양반이 독점했다.

반면, 노비는 소유와 매매의 대상일 뿐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도 박탈당한 최하층의 계급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에 살았던 신분별 인구수는 얼마였고 또한 그들의 각기 삶은 어떠했을까.

 

1663년(현종 4) 작성된 <강희이년 계묘 식년 북부장호적(이하 북부장호적·北部帳戶籍·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을 통해

 

17세기 서울 백성의 개략적인 신분구조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중국 내에서 지워버린 너무 부끄러운 중국의 역사>

 

명나라 황제가 지우려 한 치부~~

세종실록에 남았다

 

동아시아 왕조들은 치욕스러운 사건을 기록에서 지우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가 숨기려 했던 참극은 국경을 넘어 조선의 공식 기록에 남았다.

 

중국에서는 사라진 이야기가 세종실록에 박제된 배경이다.

 

명나라를 안정시킨 강력한 군주 영락제의 궁정에서 사건은 시작됐다.

황제의 후궁 여씨와 궁인 어씨가 환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락제는 총애하던 인물들이었기에 처음엔 눈을 감았다.

 

상황은 예기치 않게 폭발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휩싸인 후궁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은폐로 끝날 수 있던 일은 황제의 분노를 자극하는 비극으로 바뀌었다.

 

영락제는 즉각 대대적인 조사를 지시했다.

궁 안팎에서 고문과 압박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자백이 쏟아졌다.

 

조사는 점점 방향을 잃었다.

후궁들이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반역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사건은 개인의 일탈에서 국가적 반역으로 비화됐다.

 

숙청은 멈추지 않았다. 처형 대상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2천8백 명에 달하는 궁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피의 숙청이 이어지던 와중 뜻밖의 장면이 벌어졌다.

처형을 앞둔 한 궁녀가 황제를 향해 독설을 퍼부었다.

침묵 속에서 황제의 치부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궁녀는 황제의 성 기능 문제를 언급했다.

젊은 후궁들이 환관과 어울린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분노로 칼을 휘두르던 황제는 이 말 앞에서 흔들렸다고 전해진다.

 

명나라로서는 치욕 그 자체였다.

황제의 성적 수치와 대규모 학살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궁정은 기록을 지우고 입을 막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사건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에 체류하던 조선 사신들이 현장을 지켜봤다.

그들은 소문과 증언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조선 사신들의 보고는 본국으로 전달됐다.

사실 확인과 기록에 집착하던 조선은 이를 공식 사서에 남겼다.

그 결과가 세종실록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찾기 힘든 이 사건이 조선 기록에만 남게 된 이유다.

권력은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기록은 국경을 넘어 살아남았다.

대륙의 황제도 조선의 기록 문화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7회

 

<북부장호적>에는 한성부 서부(마포·영등포) 총 16계(契·마을), 681가구의 거주지, 나이, 직역 및 신분, 가족구성원 등이 기재돼 있다.

 

신분별 가구의 점유율은 양반층 16.6%(113호), 중인층 0.6%(4호), 상민층 29.5%(201호), 노비층 53.3%(363호)이다.

 

15세기 말 자료인 <이애 남매 화회문기>와 큰 차이가 없다.

 

이에 반해 <단성현 호적대장(단성향교 소장)>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인 1678년(숙종 4)

경상도 단성현(산청)의 신분별 비율은 양반층 6.2%, 중인층 0.6%, 상민층 60.3%, 노비층 32.9%다.

 

<대구부 호적대장(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에 의하면, 1690년(숙종 16) 대구부의 신분별 비율도 양반 9.2%, 상민 53.7%, 노비 37.1%였다.

 

서울은 양반과 이들에게 예속된 노비가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지방 일수록 상민의 비중이 높았던 것이다.

 

양반이 행세를 하려면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야 한다. 벼슬자리가 많은 서울에 양반이 집중된 이유다. 그렇더라도 벼슬자리는 한정돼 있었고 따라서 서울의 관리도 소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17세기 후반 한양의 관원 숫자를 제시한다.

이에 의하면, 1품관에서 9품관까지 문무 관리는 겨우 595명에 불과했다. 문무관리는 가족(5인 기준)을 포함하더라도 총 2975명으로 3000명에도 못 미친다.

 

관직에 오른 양반은 봉급인 녹봉, 토지인 과전(科田), 공신전(功臣田)을 받았다.

 

녹봉은 국가재정에서 지출되는 만큼 풍족한 양은 아니었다.

녹봉은 품계에 따라 18과(科)로 등급을 나눠 보통 매년 춘하추동 네 차례 곡식과 면포로 지급했다.

 

<경국대전>을 보면,

정1품 관직은 제1과로서 쌀 17섬(石·2.45t·1석=144㎏), 콩 12섬(1.7t), 포 6필, 저화(楮貨·지폐) 10장이었다.

 

종9품은 제18과로 쌀 3섬, 콩 1섬, 포 1필, 저화 1장이었다. 최고와 최하 등급의 급여차는 쌀을 기준으로 6배가 난다.

 

노론세력 권력 독점하며 양반들도 양극화...다수는 도시빈민 전락

 

녹봉은 광흥창(마포 창전동)에서 내줬다.

 

관원이 직접 받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대체로 대리인을 시켰다.

녹패(祿牌·녹봉 인수증)를 제시하고 녹패에 기재된 양 만큼 수령했다. 녹봉의 착복과 부정수급도 비일비재했다.

 

<정조실록> 1793년(정조 17) 9월 11일 기사는

 

“상사는 상사대로 사납게 굴고 아랫 것들도 앞다투어 마구 들어와서 곡식의 좋고 나쁨과 분량의 많고 적음을 놓고 제멋대로 퇴짜를 놓거나 고르기도 한다.

 

쌀이나 콩을 흩뿌려 짓밟기도 하고 창고담당 아전을 두들겨 패기까지 한다”고 했다.

 

조선후기 노론 중심의 경화(京華)사족들이 조정의 권력을 독식하면서 양반층도 극심한 신분 분화가 일어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8회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는

 

“오늘날 조정에서는 문벌을 기준으로 사람을 쓰니 문벌이 낮은 사람은 모두 태어나지마자 미천하게 된다”고 했다.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소과에 급제한 진사·생원의 성명, 생년간지(干支), 본관, 주소, 아버지의 벼슬, 형제 등을 상술한다.

 

<조선시대 서울의 사족연구(최진옥·1998)>의 연구에 의하면,

 

현전하는 186회분의 <사마방목>을 분석한 결과, 생원·진사 합격자 중 거주지가 기록된 사람은 총 3만8386명이었다.

 

도시별로는 서울이 1만4338명(37.4%)으로 압도적 1위이고, 이어 안동 783명(2.04%), 충주 624명, 원주 570명, 개성 569명, 평양 529명, 공주 512명 등의 순이었다. 경기도권에서는 양주 349명, 광주 344명이었다.

 

성씨별로는 왕족인 전주 이씨가 1382명으로 가장 많았고,

파평 윤씨 454명, 남양 홍씨 413명, 청송 심씨 367명, 연안 이씨 347명, 안동 김씨 332명, 청주 한씨 313명, 안동 권씨 304명, 동래 정씨 297명, 한산 이씨 278명, 대구 서씨 270명, 평산 신씨 253명, 풍양 조씨 239명, 의령 남씨 225명, 해평 윤씨 209명 등이었다.

 

서울의 경화사족 가문에서 집중적으로 생원 진사 합격자가 나왔던 것이다.

 

순서는 대과 급제자도 거의 동일하다.

 

특정 성씨나 집단이 유전적으로 우월할 수는 없다.

 

가문을 배경으로 형성된 벌열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공개경쟁 선발제라는 과거시험마저 혈족끼리의 관직승계 수단으로 악용됐던 것이다.

 

몰락한 서울의 사족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사족은 상공업이 금지됐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평민과 다름없이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상공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중인·상민, 도시와 상업 발달과 함께 서울의 주요 주민으로 부상

 

중인은 애매한 신분이다.

 

<홍재전서> 제49권 ‘명분(名分)’에서 정조(재위 1776~1800)는 중인으로 장교, 의원, 역관, 율관, 화원, 사자관(寫字官·왕실기록물 작성 관원) 등의 기술관을 꼽고 있으며

 

이와 유사한 부류로 ‘시정(市井)’이라 해서 각사(各司)의 서리와 시전상인 등을 언급한다.

 

조선은 농민이 천하의 큰 근본인 사회였지만 농토가 희박한 서울에서는 상인들이 주요 주민으로 성장했다.

 

<영조실록> 1768년(영조 44) 12월 18일 기사에서 국왕 영조는 대신들과 비국(비변사) 당상들과 대면한 자리에서

 

“서울의 근본이 되는 백성으로, 하나는 상인(市民)이고 하나는 공인(貢人·어용상인)이다”라고 선언했다.

 

 

서울에 주둔하는 삼군영의 군사도 상민들이었다.

삼군영 군사는 훈련도감 5000명, 어영청 1000명, 금위영 2000명 등 1만명 가량이었다. 가족을 포함하면 5만명이 군인 관련 인구로 분류된다.

 

천인은 노비(奴婢)와 기생, 백정, 재인(才人·광대), 공장(工匠), 승려, 무당, 상여꾼 등 8종의 부류가 해당된다.

 

천인 중에서 노비가 숫자는 물론 종류도 많아 천인은 통상 노비를 가리키는 말로 통했다.

 

관청 소유의 노비는 공노비, 개인이 소유한 노비는 사노비라 했다.

 

<북부장호적>에 따르면, 공노비는 한성부에 소속된 부노비(府奴婢)와 궁궐의 궁노비, 내노비, 관청의 서노비(署奴婢) 등이 존재한다.

 

 

서울의 공노비 수가 모자라면 지방의 공노비를 서울로 불러올려 노역을 시켰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69회

 

이들의 서울 생활 혹독했다.

 

<세종실록> 1423년(세종 5) 5월 28일 기사는

 

“(노비들이) 잡혀서 서울에 올 때 스스로 지고 온 쌀은 두어 말에 불과하고, 서울에 들어오는 날 돌아가 쉴 데도 없다.

혹 관아 건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비바람을 면하지 못하고 깔 자리도 없으며, 밥을 지어 먹기도 어렵다. 열흘쯤 되면 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져 춥고 배고프니 부득불 도망하게 된다”고 했다.

 

서울 각사노비는 궁궐과 각 관사에 소속돼 잡역에 종사했고 관원이 외출할 때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기도 했다.

 

<경국대전> 규정에 의하면, 총 161개 기관에 3629명이 배정됐다.

 

사노비는 <북부장호적>에서 가내노비인 솔거노비, 외거노비인 가직(家直), 정자직(亭子直), 고직(庫直), 농막직(農幕直), 행랑(行廊), 모입(募入) 노비 등이 발견된다.

 

외거노비들은 상전과 따로 살면서 주인이 서울에 소유하는 정자, 창고, 농막 등 여러 용도의 건물을 관리하는 노비로 보인다.

 

외거노비들은 독립된 생활을 하는 조건으로 몸값인 신공(身貢)을 내기도 했다.

 

 

노비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을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연령군 소유 준호구(准戶口·호적증명서)>에 의하면,

 

연령군(1699~1719·영조의 이복동생)에 예속된 서울 중 사환노비는 24명(남자 16명, 여자 8명)이다.

 

연령분포는 30대가 46%로 절반가량 됐고, 20대, 40대, 50대는 17~21%로 비슷했다. 사환노비는 주인집 내에서 거주하며 노동에 동원됐던 노비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10대 이하와 60대 이상의 노비가 없다는 점이다.

 

영조 노비세습제 개혁...갑오개혁때 비인간적 노비제 폐지

 

다시 <북부장호적>을 보면, 합장리계(합정동)와 망원정계 등에 거주하는 70대 6명, 60대 3명의 어부는 사노출신이었다.

 

유학 신감의 사노였던 합장리계의 이춘양은 목수를 생업으로 삼았다. 여성 중 4명은 거지로 표기됐다.

 

 

노비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연령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인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이후 어부, 목공, 허드렛일 등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여성 4명은 나이가 들어 상전에게서 독립했지만 남편이 사망해 스스로 생계를 찾을 수 없게 되자 구걸로 연명한 사례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은 부친이 참판이었지만 어머니가 기생이어서 출생과 동시에 천민으로 신분이 결정됐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제는 초기부터 부모 중 한명이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원칙을 유지했다.

 

그러나 국가 입장에서 노비의 증가는 양역(良役·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공역) 인구가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조(재위 1724~1776)가 사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고 노비세습제를 대대적으로 손질한다. 1731년(영조 7) 모계를 따라 자식의 신분을 결정하는 ‘종모제(從母制)’을 법제화한 것이다.

 

어미만 양인이면 자식도 양인이 될 수 있게 한 한국 노비제도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비인간적인 노비제의 완전한 폐지는 그러고서도 160여년의 세월이 흐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뤄진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0회

 

조선의 형벌제도

 

죽는 것도 등급이 있었다

 

조선에서 시행한 형벌이 동 시기 중국과 마찬가지로 오형(五刑), 즉 다섯 가지 형벌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형은 『대명률(大明律)』에 명시된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을 의미한다.

 

태형이 가장 가볍고 사형이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의 사형제도다

 

이를 한말 외국인들이 남긴 생생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지금 우리의 관념으로는 어떻게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 같은 사형이라도 교형, 참형, 능지처사형으로 나누어 집행하였다.

 

교형, 즉 교수형은 처형된 시신이 온존하다는 점에서 사형 중에서는 가장 가벼운 것에 해당하였다.

 

반면 참수, 즉 목을 베어버리는 참형은 이보다는 훨씬 무거운 것이었고, 능지처참으로 잘 알려진 능지처사형은 목, 팔, 다리 등 처형된 신체가 완전히 손상된다는 점에서 가장 무거운 사형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자를 사형에 처했을까?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형률에 규정한 전체 범죄 행위 가운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의 비중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에는 당시 통용되던 『대명률』, 『경국대전』 등의 법전에 명시된 죄목(罪目)과 형량을 뽑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집계해 보면 전체 2,038개의 범죄 행위 가운데 태형·장형은 832개 조문, 도형·유형은 841개 조문, 사형은 365개 조문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은 전체의 17.9%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현대 국가에서 형법상 사형의 비중은 극히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에 법률에 명시된 범죄 유형 가운데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점은 전근대 엄벌주의적 형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점이 조선에서만 특수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근대 시기 동서양의 여타 나라에서도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의 비중이 대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1회

 

 

2. 능지처사(凌遲處死), 거열처사(車裂處死)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형, 참형, 능지처사형 등 조선의 세 가지 사형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이 능지처사형이었다. 그럼 어떤 범죄를 능지처사로 다스렸을까?

 

『증보문헌비고』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365개 범죄 행위 가운데 능지처사에 해당하는 죄목으로 『대명률』에 나오는 15가지 행위를 꼽고 있다.

 

즉 역모를 꾀한 모반·역죄인, 가족 3인 이상을 죽이거나 신체를 절단하는 등의 흉악한 살인범, 그리고 가족·주인 등을 폐륜 살해한 강상범 등이 능지처사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교형, 참형 등으로 처벌하는 범죄 유형이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추가로 규정되어 있는 반면,

 

능지처사의 경우 『대명률』 규정 외에 별도로 조선에서 새로운 입법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명, 청대에 사형으로 처벌하는 기준이 계속 확대되었고 능지처참으로 처벌하는 죄목이 증가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조선에서는 능지처참 형벌을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하여 적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능지처사형이 조선에서 어떤 방식으로 집행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짚어보자.

 

신체의 여러 부위를 칼로 잘라 죽게 하는 능지처참이 중국에서도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칼질의 횟수에 따라 8도, 24도, 36도, 72도, 120도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한편 칼질의 횟수가 8도인 경우, 즉 8회에 걸쳐 살을 잘라내는 경우는 먼저 1·2도로 양 눈꺼풀, 3·4도로 양 어깨, 5·6도로 양 젖가슴, 7도로 심장을 관통하고, 8도로 목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의 경우는 능지처참의 방식이 중국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1395년(태조 3)에 간행된 대명률의 해설서에 해당하는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는 대명률 원문의 ‘능지처사(凌遲處死)’는 모두 ‘거열처사(車裂處死)’로 번역해놓았다.

 

‘거열’은 ‘환형(轘刑)’, ‘환렬(轘裂)’이라고도 하는데, 수레에 죄인의 몸을 매달아 수레를 끌어서 찢어 죽이는 것을 말한다.

조선에서는 중국의 『대명률』을 형법으로 수용하면서 그 속에 기록된 능지처참 형벌을 사용하긴 하였지만,

 

능지처참 죄목을 추가한 중국과 달리 능지처참 형벌을 제한적으로 적용하였으며 집행 방식도 ‘거열’로 하여 분명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2회

 

 

3. 처형된 시신을 6개월이나 수습하지 못한 사연

 

『대명률직해』에서 보듯이 조선에서는 능지처참 집행 방법이 죄수를 거열(車裂)하여 처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능지처참을 거열로 대신했다는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세조대 사육신에 대한 능지처참이다.

 

세조 2년(1456)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된 사육신(死六臣)을 능지처참으로 처단하면서 집행은 거열형으로 하였다.

 

당시 체포된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환열(轘裂), 즉 거열 당했는데,

 

세조는 관리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거열 장면을 보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머리는 3일간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 당시 고문으로 이미 숨진 자들의 경우도 시신에게까지 능지형을 시행하였는데,

 

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 등이 바로 죽어서도 시신이 거열당하는 참화를 겪은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능지처사형이 여러 차례 칼질하여 신체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경우 거열을 통해 목과 팔·다리 등 몸을 6등분하는 정도에 그쳤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거열형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중국에서 고대에 이미 거열형이 시행되었는데, 『좌전(左傳)』에 거열(車裂)을 ‘환(轘)’이라고도 하였다.

 

대개 죄인의 몸을 묶는 수레는 오차(五車), 즉 다섯 대의 수레가 이용되었고, 죄인의 목과 팔·다리를 각각 다섯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조선에서도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열형을 집행할 때 여러 대의 수레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거열형은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미 집행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즉 공민왕 때에 반역 죄인인 홍륜(洪倫) 등에게 환형(轘刑)을 가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려 말에 거열이 집행된 적이 있다.

 

왜 조선에서 능지처참을 거열로 했는지 분명치는 않다. 또한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법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명확치 않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거열형의 역사가 고려시대까지 소급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거열형이 유럽에서도 시행되었던 처형 형태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다른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유명한 푸코의 『감시와 처벌』 앞부분에 거열이 등장한다고 한다.

 

책에서는 1757년 프랑스 루이 15세를 살해하려다 실패한 다미엥이란 인물에게 네 마리의 말에 몸을 묶어 사지를 절단하여 처형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거열형의 전통이 중국이나 조선에서만 있었던 처형 방식이 아니라,

 

과거 동서양 여러 나라에서 함께 공유한 잔혹한 사형 집행 방식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