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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창군고난사(1)/받은 글

https://blog.naver.com/pjjyym/224157153194

 

《創軍의 苦難史 제1회》

丙午年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과 행복을 기원드리며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하는데 산파 역할을 하였던

원용덕 장군과 이응준 장군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창군의 산파역 원용덕과 이응준☆

 

해방된 조국에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기초를 닦은 사람은 만주군 군의관(軍醫官) 출신 원용덕(元容德) 中校(中領)로 해방된 조국에 군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가 대단히 강하였습니다.

 

*원용덕은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강원도 강릉에서 병원을 개업해 의사생활을 하다 1932년에 만주군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봉천 군관학교 등에서 군의관으로 근무를 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만주에서 귀국한 원용덕은 미군정청(美軍政廳)을 방문하여 미군 장교들을 만나 이야기 하던중에 조선에 장차 군대를 창설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원용덕은 즉시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일본군 大佐(大領) 출신 이응준(李應俊)을 찾아가 "군정청에서 해방된 우리 조국에 군대를 창설해주겠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선배님께서 앞장을 서주셔야겠습니다."라고 부탁하였는데 이응준은 "내가 일본군에 종사했던 사람으로 근신하는 중인데 나설 수가 없으니, 광복군 출신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며 거부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원용덕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만주군에 종사하였으니,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지금 광복군은 귀국을 하지 못하고 중경에 있어서 참여를 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우선 선배님함께서 앞장을 서 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일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원용덕의 최종계급은 중장/보직은 헌병총사령관)

 

*이응준(李應俊)은 1890년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 1기로 다니다가 1908년에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하고 1909년에 일본중앙유년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그후 1912년에 일본육사 26기로 입교하여 1914년 5월에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해방 당시에는 원산항 기지의 수송사령관이었습니다.(이응준의 최종계급은 중장/육군참모총장 역임)

 

위 두분은 창군에 첫번째로 발을 디뎠는데 먼저 원용덕이 군정청 미군장교들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11월 중순에 군정청 군사국 차장 <아고>대령이 안면이 있는 원용덕을 군정청으로 초대하여 조선에 경비대를 설치하는 군정법령 제28호를 보여주며 자문을 구했는데, 원용덕은 "독립된 군대가 아니고 경찰을 보조하는 경비대가 무엇이냐? 그렇다면 누구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도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고> 대령은 앞으로 독립된 군대를 조직하기 위한 기초로 우선 치안을 담당하게될 경비대를 만드는 것이니 그렇게 이해해 달라면서 각 군사단체 대표들을 군정청 군사국으로 소집하여 의견을 들어보자며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원용덕은 마지못해 승락을 하고 일본군 출신 이응준을 찾아가 <아고>대령이 요청한 말의 뜻을 전하고 일본군 출신 장교들의 참여를 독려해 달라고 부탁한 뒤 자신은 만주군 출신 장교들의 참여를 독려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김구 주석의 비서를 통해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11월 20일 군정청 회의실에 일군계, 만군계, 광복군계, 학병계 등 4개단체 대표 120여명의 장교 출신들이 참석하게 되었으며 미군측에서는 <아놀드> 군정장관, <쉬크> 국방사령부장, <참페니> 군사국장과 <아고> 대령 등이 참석하여 군정장관의 인사말에 이어 <참페니> 군사국장이 군 창설에 관한 브리핑을 하였습니다.

 

"군대는 미국식으로 만든다는 것과 치안군 형식으로 기초를 만들고 독립된 국군 창설 문제는 차차 검토하는 방안으로 한다는 요지였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는 미군과 의사소통이 필요하므로 군사영어 교육을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 간부를 양성하겠다는 뜻도 밝혔습니다.

 

<참페니> 대령이 브리핑한 의견에 대해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찬성 의사를 밝혔으나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 등 좌익계 단체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중간에 자리를 뜨고 없었습니다.

 

그날 미군측에서는 군사영어 학교에 입교할 1차 인원을 60명으로 정하고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씩으로 공평하게 할당하였습니다.

 

추천은 이응준과 원용덕이 일군과 만군 출신을 추천하고 광복군 출신은 아직 귀국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국내에 있던 유해준, 이성가, 이춘경 등이 추천되었습니다.

 

추천된 사람들은 이응준과 원용덕이 서류심사와 면접을 하고 <아고> 대령이 간단한 영어 테스트를 하여 합격여부를 판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계획된 인원 60명을 확보하여 1차로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에 입교시켰습니다.

 

입교식에는 군정사령관 <하지>중장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으며 군사영어 학교 교장에는 군정청 법무장교 <리스>소령이 취임하고 부교장겸 행정부장으로 원용덕이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수진으로는 미군장교 2명, 한국인 교수 2명(세브란스 의전 출신 권용준과 임영빈 목사)가 임명되었습니다.

 

이응준은 군정청 고문관으로 임명되어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할 인원을 추가적으로 선발하는 등 국군창설에 관한 업무를 추진하는데 협력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원용덕과 이응준은 해방된 조국에 군대를 만드는데 주춧돌을 놓는 산파역을 하였으며 계속하여 경비대에서 국군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겠습니다.

 

#만주군이란?

참고로 만주군이란 일본 관동군이 1932년 4월에 만주국을 건설하고 군대를 창설하였는데 그것이 만주군입니다. 만주군 총사령관은 만주인으로 세워놓고 그 밑에 실무진은 모두 만주군관학교(봉천/신경군관학교)출신 장교인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러니까 껍데기는 만주국군이지만 내부는 일본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 백선엽, 정일권, 이한림 등이 모두 만주군에 소속된 것입니다.

계급은 일본군과 구별한다며 위관급은 소위.중위,상위/영관급은 소교, 중교, 상교로 호칭하였으며 병사들은 1931년 만주사변 때 관동군에 투항해온 만주 군벌 장학량의 사병 10만여명을 주축으로 추가 증원하여 종전(終戰)까지는 20만명 수준을 유지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2회》

☆군사영어학교 학생들☆

 

1945년 12월 5일부로 군사영어학교 개교와 함께 선발된 60명의 학생들이 입교하였습니다. 교직원은 학교장 <리스>소령과 부교장 원용덕, 그리고 미군 교관 2명과 한국인 민간교수 2명 등 고작 6명이었습니다.

 

1.사복 입고 등하교 하는 학생들

명색이 군인 장교를 재교육하는 양성소인데 교복도 없고 숙소도 없어 자유복장으로 각자 집에서 숙식을 하고 냉천동 언덕배기의 군사영어학교로 등하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학생은 구일본군 장교복을 입고, 어떤 학생은 일제시대 국민복(중국과 북한의 인민복 같은 복장)을 입었고 또 어떤 학생은 신사복 상의에다 운동복 바지에 구두를 신고 다니는 웃지못할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2. 알사탕으로 영어교육 하는 학교장

군사영어학교 학생은 영어 학습 능력에 따라 A.B.C.D반으로 편성하여 교육을 하였는데 A반 학생들은 과거의 군사학교 또는 대학에서 영어를 좀 배워서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는데 이형근(일본군 대위,일본육사), 이영순(일본 해군중위), 임선하(명치대 학병 소위), 김영환(일본 오사카 법대 학병소위)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D반의 동료학생들을 가르치는 조교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A.B반은 <리스>교장과 미군 교관들이 가르치고 B.C반은 원용덕 부교장과 한국인 교수들이 가르쳤습니다.

 

학교장 <리스> 소령은 회화 위주로 가르쳤는데 교실에 들어올 때는 알사탕을 한보따리씩 들고와 알사탕을 색깔별로 몇개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다음 "귀관은 어떤 색깔의 알사탕 몇개를 원하십니까?" 라고 영어로 질문 합니다.

 

그러면 지명된 학생은 "예 저는 빨강색 알사탕 3개를 원합니다."라고 답을 하면 빨간 알사탕 3개를 손에 쥐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3. 월급을 받고 다니는 학교

학생들에게는 매월 급료가 지급되었는데 첫 월급은 45년 12월 말에 900원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당시 순경의 월급이 780원인데 비하면 많은 것이었습니다.

 

4. 찬탁과 반탁으로 나뉜 패싸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미 ㆍ영 ㆍ소 외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 후에 독립을 시킨다는 안이 발표되자 국내는 반탁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그러다 46년 1월 6일경에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좌파진영에서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러자 군사영어학교 학생들 중에 좌파들이 찬탁을 해야 한다고 벽보를 붙이는 등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일본육사 출신 김종석, 오일균, 조병건, 봉천군관학교 출신 최남근, 신경군관학교 출신 이병주, 이상진, 학병출신 하재팔, 최상빈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임관을 하여 부대 근무중 좌익활동으로 1949년 숙군(肅軍) 때 체포되어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음)

 

반탁을 지지하는 우익에는 김종면(학병출신, 일본중앙대), 최홍희(학병출신, 일본 중앙대), 민기식(학병출신,만주 건국대), 김종오(학병출신, 일본 중앙대) 등이었습니다.

 

먼저 우익 학생들이 좌익학생들을 주먹으로 두들겨 팬 일이 있었고 이에 복수를 하겠다는 좌익학생들이 우익학생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분위가 살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교장 원용덕이 나서서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여 조용해졌습니다.

 

5. 졸업날짜도 천차만별

졸업은 영어성적이 우수한 사람들 부터 시키다보니, 같은 동급생이지만 졸업날짜가 다 달랐습니다.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장석륜, 양국진, 이치업 같은 경우는 입교하고 하루만에 <아고>대령의 간단한 영어 면접만 받고 임관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어떤 학생은 3개월 동안을 꼬박 등하교를 해야 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임관 계급도 前계급을 인정하여 정위(대위), 부위(중위), 소위 등으로 임관되었습니다.

 

학병 출신의 경우는 소위로 임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응준 고문의 배려로 일본군에서 준사관과 하사관으로 근무한 우수한 사람들도 입교를 시켰는데 박기병(소장예편)과 송요찬(육군참모총장 역임)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군에서 장군이었던 사람은 영관급으로 강등하여 임관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하간 우여곡절 끝에 46년 1월 15일 날짜로 21명, 1월 22일부 4명, 1월 28일부 8명 ----5월 1일부 17명 이런식으로 그때 그때 영어 실력을 테스트 하여 임관시켰는데 부교장 원용덕은 소령으로 이응준은 대령으로 임관되었습니다.

 

전계급 보다 한계급을 낮추어서 임관된 사람은 원용덕 부교장(중령->소령)과 채병덕(소령->대위)이었습니다. 특별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원용덕의 경우는 군사영어학교장 <리스>가 소령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졸업한 군사영어학교 출신 110명이 군적(軍籍)에 올랐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군번 1번을 두고 다툰 일화를 소개 하겠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3회》

☆군번1번에 대한 시비☆

 

군대에 입대하게 되면 군번을 받게 됩니다. 지원병이나 징병제에 의해 입대한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명단이 작성될 때 일련번호로 각개인에게 부여되는 번호가 군번입니다.

 

장교들은 임관할 때 성적순에 의해 군번이 부여됩니다.

 

따라서 군사영어 학교 졸업생들에게도 군번이 부여되었는데 1번은 일본육사 56기 출신 이형근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에 발끈한 사람이 일본 육사 49기 출신인 채병덕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형근은 입교 하루만에 구두시험에 합격하여 집에서 쉬고 있다가 1월 15일날 소집이 되어 군정청에 들어가보니, 선배들을 제치고 자기에게 군번 1번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7년이나 선배인 채병덕에게도 미안했지만 특히 자기보다 29년이나 선배인 일본육사 27기 장석륜(군번 4번) 같은 분에게 미안하여 <아고> 대령에게 군번 1번을 반납하고 뒷번호를 받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아고> 대령은 "당신은 지금 우리가 일본군을 재건하고 있는줄 아느냐? 이 군번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당신들의 과거 근무 경력과 졸업시험 성적 등을 평가하여 장차 군의 리더로 키우기 위해 능력에 따라 부여한 것이니 딴소리 하지말라!"며 딱 잘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형근은 할수없이 군정청 고문으로 있는 이응준 선배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해보았으나 뾰쪽한 방법이 없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채병덕이었습니다.

경비대가 46년 1월 15일 창설되고(초대 사령관은 미군 "마셜" 중령) 며칠뒤 경비대 부관참모(미군 스탠톤 대위)의 보좌관인 임선하 소위를 1연대 A 중대장 채병덕 대위가 불러 노발대발하며 "이새끼야 어떻게 해서 새카만 후배(이형근 지칭)에게 군번 1번이 주어지고 내가 왜 2번이냐? 너는 일본군에 갔다왔나 안갔다 왔나?"라고 다그쳤습니다.

 

이에 임선하는 "저는 학병으로 갔다왔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채병덕은 "야! 임마 일본군에 갔다온 놈이 선후배도 모른단 말이야?"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임선하 소위는 "저는 학병으로 갔다와서 일본육사 선후배를 잘 모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더욱 흥분한 채병덕은 그 큰 등치(체중 100kg)를 씩씩거리며 "너, 나를 뭘로 보고 이러느냐? 나는 일본육사 49기이고 이형근은 56기야! 그런데 어떻게 이형근이가 1번이고 내가 2번이야?"라고 또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에 임선하는 차분하게 "저는 군정청에서 넘어온 이력서에 적혀 있는 일련번호를 적어서 기록카드에 기록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마음대로 기록한 것도 아니고 부관참모가 다 확인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꿀수도 없습니다."라고 똑부러지게 응답하였습니다.

 

한편 채병뎍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화가

날만도 하였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군대에서 군번 1번은 매력 있는 영예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난 뒤에 채병덕은 암암리에 이형근을 안좋게 생각했고 이형근도 그 눈치를 알고 부딫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는 후문입니다.

 

#임선하(任善何)는 군사영어 학교 군번 19번을 받았고 일본 명치대학 재학중 학병 으로 가서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6.25 전쟁 때는 3사단장을 역임하고 1959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음

 

다음 회에는 군사영어학교 졸업생들의 출신학교와 군번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전부 다는 할수없고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 위주로 소개)

 

 

《創軍의 苦難史 제4회》

☆군사영어학교 졸업생들☆

 

*군사영어학교 졸업생들은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2명, 학병 출신 65명, 광복군 출신 3명 등 110명이었습니다.

 

광복군에도 처음에 20명이 할당되었으나 중경에서 귀국을 하지 못해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여 숫자가 많은 학병출신들을 많이 입교시켰습니다.

 

군번 1번 이형근(일 육사 56기/9대 육참총장), 2번 채병덕(일 육사49기/2대 육참총장), 3번 유재흥(일 육사55기/국방장관), 5번 정일권(일 육사55기, 봉천군관 5기/5대 육참총장,국무총리), 11번 최경록(일군 준위/13대 육참총장), 13번 장창국(일육사 59기/9대 합참의장), 14번 이병주(신경군관 2기/경비대 군감/남로당 징역 후 행불), 17번 강문봉(일육사 59기, 신경군관 5기/2군사령관), 18번 민기식(만주건국대, 학병/16대 육참총장), 19번 임선하(명치대, 학병/3사단장), 20번 박병권(연희전문, 학병/14대 국방장관), 23번 백인엽(명치대, 학병/6군단장), 31번 김종오(일 중앙대, 학병/15대 육참총장), 35번 김계원(연희전문, 학병/18대 육참총장), 37번 이성가(광복군, 남경군관학교/5군단장), 38번 함병선(일군 준위, 평양숭덕중/2군단장), 40번 정래혁(일 육사58기/2군사령관, 국회의장), 41번 원용덕(만군 군의관/군영부교장, 헌병총사령관), 44번 최홍희(일 중앙대, 학병/6군단장), 51번 최영희(일 전수대, 학병/12대 육참총장), 53번 최남근(봉천군관 7기/ 15연대장, 남로당 관련 사형), 54번 백선엽(봉천군관 9기/7대 육참총장), 55번 김백일(봉천군관 5기/1군단장), 56번 이한림(신경군관 2기, 일육사57기/1군사령관), 70번 김종석(일 육사56기/대구 6연대장, 남로당관련 사형), 72번 오일균(일육사 61기/경비사관 생도대장, 남로당 관련 사형), 77번 김용배(서울법전, 학병/17대 육참총장), 79번 이후락(일 기부고, 학병/중정부장), 80번 장도영(일 동양대, 학병/14대 육참총장), 91번 박진경(일 외국어대, 학병/제주 9연대장, 암살), 96번 송요찬(일군 하사관, 봉수중/11대 육참총장), 101번 강영훈(만주 건국대, 학병/육사교장, 국무총리), 110번 이응준(일 육사 26기/초대 육참총장)

 

위와 같이 군사영어 학교 출신들은 참모총장 12명을 배출하였으며, 남로당에 관련되었거나 6.25 때 전사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병 출신들이 약진을 한 특징이 있습니다.

 

#봉천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비교

 

1932년에 관동군이 만주국을 건국하고 군대를 만들어 주기 위해 세운것이 1932년에 개교한 봉천군관학교입니다.

 

1.봉천군관학교

◇위치 : 1932년 봉천(심양)

◇교육기간 : 2년

◇입학자격 :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으로 중등교육 이상 수료자

◇한국인 졸업생 : 1기생 김주찬, 2기 : 김정호(예,준장), 4기 : 김응조, 계인주 등 5

명, 5기 : 정일권, 김백일, 신현준 등 18명, 6기 : 양국진 등 2명, 7기 : 최남근 등 5명, 8기 : 석주암 등 3명, 9기 : 백선엽 등 3명

 

2. 신경군관학교

봉천군관학교를 폐교하고 1939년 신경(장춘)에 4년제 군관학교를 개교함

◇위치 ; 신경(장춘)

◇교육기관 : 4년

◇한국인 졸업생

1기 : 박임항, 이주일 등 13명, 2기 : 박정희, 이한림 등 11명, 3기 : 최주종 등 2명, 4기 : 장은산 등 2명,

5기 : 강문봉 등 5명, 6기 : 김윤근 등 9명, 7기 : 김광식 한양대 교수 등 4명(7기는 해방으로 임관을 못함)

 

- 어느해는 1년에 2개기씩 입교를 시키기도 하였음

*다음 회에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관하여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創軍의 苦難 제5회》

☆국방경비대 창설의 진통☆

 

♡개요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부로 "남조선 국방경비대"로 창설되었다가 1946년 3월 미소공동 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이라는 문구에 시비를 걸어옴으로서 6월 15일 "국방"을 빼고 "조선경비대"로 개칭하여 경찰예비대 형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기간 : 1946.1.15~1948.8.15)

 

♡미군정청의 국방경비대 창설 계획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은 1945년 11월 13일에 병력규모 45,000명 수준의 "국방경비대" 창설안을 맥아더 사령부를 경유하여 워싱턴으로 보냈으나, 워싱턴에서 결정이 늦어지자 동년 12월 20일 <챔페니> 군사국장에게 병력규모 25,000명 수준으로 "경찰예비대" 창설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것이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될 "조선경비대"의 창설계획인 뱀부계획(Bamboo Plan)입니다.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 25군사령관의 명령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보안대"를 창설했다가 1946년 1월 16일에 "철도 보안대"를 추가로 창설했는데 이것이 북한 인민군의 전신입니다.

 

뱀부계획은 남한에 주둔지를 두고 경찰 예비대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남한 각 도(道)에서 일정한 주둔지를 기준으로 일반경찰과 같은 경찰예비대 (Korean Constabulary Reserve)를 25,000명 규모로 편성하여 경찰을 지원하고 국가 비상시에 출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세부 내용

ㆍ규모 : 8개 연대 25,000명

ㆍ배치 : 각 도에 1개 연대

ㆍ편성 방법 : 중대 부터 편성(장교 6명, 병 225명)

ㆍ정원의 20%를 추가 모병하여 그 20%로 2중대 편성하고 다시 3중대를 편성함

ㆍ이렇게 3개 중대가 편성되면 본부중대와 대대 참모부를 편성합니다. 그렇게 하여 1개 대대가 편성되면 다시 2,3대대를 편성하여 연대를 편성하는 방식입니다.

 

♤"국방경비대" 명칭논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이 "국방"명칭과 그 숨은 뜻이 무엇이냐고 문제를 제기하자 미군정은 46년 6월 15일 부로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조선경비대"로 변경하였습니다. (내용은 "경찰예비대")

 

군사국 보좌관 <아고> 대령이 "경찰 예비대"를 창설한다는 안을 군사 영어학교 학생들에게 소개하였을 때 대부분 장교들이 "우리가 무슨 경찰의 통역관이나 하려고 이 고생을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 했고, 이응준이나 김응조 같은 당시 전 일본군 출신이나 만주군 고위층에 있던 사람들도 "경찰예비대"에 대한 명칭에 거부감을 들어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청에서는 양보없이 "경찰예비대"를 공식명칭으로 사용했지만 우리 측에서는 끝까지 "국방경비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부대 간판도 "국방경비대"라고 써서 걸었습니다.

 

1946년 1월 15일부로 태릉에서 "국방경비대 사령부"와 "1연대"가 동시에 창설되었습니다.

 

태릉에 있는 구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 건물의 1층에는 1연대, 2층에는 경비대 사령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초대 경비대 사령관은 미군 <마샬> 중령이 임명되고 부사령관은 군사영어학교 부교장 원용덕 소령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2월 7일부로 취임하였습니다.

 

그전에 부대 창설요원으로 채병덕 대위가 최경록과 강문봉 소위를 대동하고 모병을 하여 1개 대대 규모를 모병하였는데 그것이 1대대가 되고 대대장에는 <마샬> 중령이 임명되었습니다. "마샬" 중령의 입회하에 남조선 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되고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아래 사진1)

 

*이때는 연대병력 수준이 안되어 대대 규모로 <마샬> 중령이 1대대장 겸 1연대장 직함으로 창설식을 주관하였습니다.(당시 부대 창설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하여금 현지에 내려가서 병력을 모집하여 창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음)

 

1연대 창설 산파역을 담당한 사람은 채병덕 대위였는데 그는 A 중대장 보직을 받았습니다.

 

46년 2월 7일부로 <마샬>중령이 취임했다가 4월에는 <배로스> 중령이 경비대 사령관 겸 1연대장에 취임하여 지휘하였습니다. 그러다 1946년 9월 28일에야 지휘권을 한국인 이형근 소령에게 넘겨주었습니다. (한국인으로는 초대 사령관) 그리고 <배로스> 중령은 고문관의 위치로 바뀌었습니다.

 

경비대 사령부 조직이라 해봐야 사령관 1명과 보좌관인 임선하 소위와 법무장교 이찬형 소위, 그리고 사병 1명이 전부였습니다.

 

명색이 경비대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주어졌으나 권한은 고문관인 <배로스> 중령이 행사를 하기 때문에 이형근은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형근은 군정장관 <러취>소장에게 배로스 중령의 행위를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받은 <러취> 군정장관은 <배로스>를 제주도로 보내고 이형근도 통위부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46년 12월 23일부로 송호성 중령이 4대(한국인으로는 2대) 경비사령관에 취임하였습니다. 송호성은 1923년 상해에서 성시백, 나석주 등과 함께 상해의 군관 양성소인 감전강무당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장개석의 북벌군에 참여하여 대령까지 진급했다가 광복군으로 넘어와 광복군 소장(少將) 계급을 받고 훈련처장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1946년 귀국후 통위부장 유동렬이 추천하여 경비사관 2기로 입교하여 3주정도의 기본교육만 받고 중령으로 10월 17일 특별 임관하여 전주 3연대장 경력 2개월 만에 경비대 사령관에 취임 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군정청에서는 2대 사령관에 일본육사 27기 출신인 김석원 대령을 임명하려고 했는데 통위부장 유동렬 등 광복군 출신들이 군정청에 압력을 가해 친일파는 안된다것 때문에 뒷배가 약한 미군들이 물러서버린 겁니다.

 

그래서 현대적인 군사지식이 전무한 송호성을 경비대 사령관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6회》

☆통위부(統衛部) 설치☆

 

전회에서 6회에서는 각 연대 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는데, "통위부(統衛部)"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오늘은 통위부(統衛部)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1945년 10월에 군정법령 제28호에 의거 군정청에 국방사령부가 설치되어 <쉬크> 준장이 사령부장이었는데 46년 6월 15일에 군정법령 제86호에 의거 "국내경비부(國內警備部)"로 개칭하여 서울 중구 남산동 2가에 사무실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군정청은 이 "국내경비부"를 한국인에게 맡겨서 장차 자력으로 군대를 창설하도록 유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한국인들이 "국내 경비부"는 경찰 예비대 냄새가 나서 기분 나쁘다고 사무실 간판을 "통위부(統衛部)"라고 써서 걸어버렸습니다.

 

"통위부" 라는 어원은 고종25년에 군영(軍營)을 右營, 後營, 海防營을 통합하여 中營으로 개편하였는데 이의 공식명칭을 통위영(統衛營)이라고 한데서 따온 것입니다.

 

이와같이 선조들은 미국이 해방을 시켜준 것은 고맙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대단히 강하였음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1946년 5월 어느날 전북도경찰국장을 지낸 김응조(중국 화북군 소장 출신)가 <아고>대령의 추천으로 <러취>군정장관으로부터 추천으로 "국내경비부장"의 교섭을 받았는데, 자기는 중국군에서 오래동안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그런 직위를 맡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다음은 중경에 머무르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게 타진을 하였으나 또 거절당하였습니다.

 

두번을 거절당한 <러취> 군정장관은 군정청 고문인 이응준에게 "이번에는 당신이 한사람 추천해보시오. 그래서 데려오면 그사람을 임명하겠소."라고 임무를 주었습니다.

 

이응준은 망서림 없이 바로 臨時政府 軍務部 參謨總長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서울에 와 있는 류동열(柳東悅 : 일본 육사 15기)을 찾아갔습니다.

 

이응준은 류동열 장군이 장인인 독립군 이갑(李甲) 선생과 일본육사 동기생이기 때문에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격의없이 국내경비부장(통위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이응준이 "저는 정치에 대한 것은 잘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릴수 있는 것은 어르신께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간성이 될 군대의 상징이 되어 주셔야만 군의 자세가 바로 설 것이라는 소견입니다.

 

임시정부 요인 여러분께서 내세우는 법통(法統)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이어가게 하려면 어르신 같은 분이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숭고한 사명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니, 류동열은 착찹한 기분으로 "일단 자네 말을 알아들었네,라며 오늘밤에 생각해보고 내일 답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손으로 나라를 다시 찾은 것도 아니고, 미국이 군대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 남은 여생을 새출발하는 군대를 위해 희생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튿날 이응준에게 통위부장을 수락하겠다는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46년 9월 12일 초대 통위부장(統衛部長)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에서 류동열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주책없이 미군들 하수인을 자처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의중이 "장차 나라를 세우려면 젊은이들을 군대에 많이 보내놓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조용해졌습니다.

 

이처럼 보직 하나에 사람을 불러오는데도 진통이 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육군본부의 전신이 되는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국방부의 전신이 될 통위부가 창설되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7회》

☆제1연대 창설☆

 

한국 육군의 最先任聯隊라고 하는 제1연대는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구리 묵동(現 태릉 육사 자리)의 舊일본군 특별지원병 훈련소에서 A중대의 입대식이 이루어진 것이 연대 창설의 시초입니다.(육군에서는 그날을 1연대 창설일로 기록하고 있음)

 

군정청에서는 우선 1개중대를 창설하여 점차적으로 1,2,3중대를 창설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국방군 응모"라는 타이틀로 신문에 모병광고를 냈습니다. 응모자격은 군사경력을 가진 사람은 하사 이상, 일반인은 중졸 이상 학력을 가진자로 한정하였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 1,000명여명이나 몰려들었습니다.(모집정원은 220명이었음)

 

선발은 군사영어학교에서 하였는데 시험관으로 임선하, 김병휘, 김영환, 윈태섭 등 군사영어학교 학생들이 맡아 서류심사와 면접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220명을 선발하였는데 이 인원들 중에는 대부분이 46년 5월 1일 개교한 경비사관학교 1기부터 5기까지 입교하여 장교가 되었습니다.

 

1기생으로 임관한 사람들중 대표적인 사람들은 6.25 때 7연대장 임부택, 백두산 호랑이로 유명했던 김종원 대령 등 5명입니다.

 

임부택의 경우는 일본군 하사관으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주일 교육을 받던중에 채병덕이 대위로 임관하여 1연대 창설요원으로 가면서 "내가 1연대 창설요원으로 가니까 같이 가자고 데리고 나왔는데 장교는 안시켜 주고 A중대 선임하사관으로 임명시켜주고 채병덕이 소령으로 대대장이 되면서는 대대 선임하사관으로 부려먹는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부 일본군 출신과 학식이 있는 일반인 출신들은 군문을 이탈하는 사례가 적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채병덕도 책임감을 느끼고 군정청 군사국장에게 대책을 강구해보자는 의견을 개진하고 군사국에서도 이런 실정을 감안하여 장교의 확보를 위해서는 "경비사관학교"를 창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모아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5월 1일부로 급히 경비사관학교를 1연대 서쪽 건물에서 개교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육사 전신입니다.(사진#2,조선경비사관학교)

 

채병덕 대위는 소대장으로 최경록 소위와 강문봉 소위를 데리고 A중대를 창설했고 다음에는 병력을 추가적으로 모집하여 B중대를 편성하였는데 중대장은 군번 4번인 장석륜 대위(일 육사 27기,만주군 중령 출신)가 보직되었습니다. 우수운 것은 채병덕은 일본군 소령이었는데, 미군 편제에 대위가 중대장 직위이기 때문에 대위로 임관을 시켰고 장석륜은 만군 중령 출신이며 나이도 50줄인 사람임에도 중대장을 맡기려러니, 할수없이 대위로 임관을 시킨겁니다.

 

B중대 소대장으로는 최주종 소위, 유흥수 소위, 안광철 소위, 한인준 소위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대장겸 대대장 <마샬> 중령은 B중대를 근무중대로 바꾸고 정일권 대위를 영입하여 다시 B중대를 편성하였습니다.

B중대의 소대장으로는 이춘경 소위, 장창국 소위, 이성가 중위가 보직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선 3개 중대가 편성되자 군정장관의 사열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러취 군정장관과 군사국장 챔페니 대령(장군 예정자)과 보좌관 <아고>대령, 경비사령관 <배로스> 중령이 참석하였으며 결과는 만족하게 평가되었습니다.

 

3월에는 C중대가 편성되었는데 중대장에는 이병주(신경군관학교 2기) 중위기 보직되고 소대장에는 이정석 소위, 김용배 소위가 보직되었습니다.

 

대대 부관(인사장교)에는 백인엽 소위, 경리부장에 원태섭 소위, 군수장교(구매관겸 식사관)에 함병선 소위, 병기 소대장에 소병기 소위 등으로 간소하게나마 참모부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대에는 군악대가 편성되었는데 김계원 소위가 보직되었습니다. 김계원은 연희전문 학생시절에 섹소폰을 연주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김계원(육참총장 역임)은 일본군이 창고에 두고 간 악기를 고쳐서 활용하였습니다.

 

46년 6월 1일부로 1대대장 겸 1연대장 채병덕 소령이 후방총사령관으로 전출되고 2대 대대장겸 1연대장으로 이성가 소령(광복군 출신)이 취임하였습니다. (부대 규모로 보면 말이 좋아 연대장이지 사실상 대대장이나 마찬가지였음)

 

이성가 소령이 연대장에 취임한 이후부터 2,3대대가 편성되면서 명실공히 연대장 구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1연대는 1947년 9월 1일 일제의 병기와 피복을 미제로 교체하였으며 이성가 연대장은 1947년 12월 1일부로 제1여단 참모장으로 전출되고 3대 연대장에 김종오 소령(학병출신)이 취임하였습니다.

 

同연대는 1948년 11월 15일부로 태릉에서 서빙고 [전 일본군 병사(兵舍)]로 이동하여 교육훈련에 임하였습니다.

 

同연대는 1949년 1월 22일 다시 의정부 금오리로 이동해 미군으로부터 38선 경계 임무를 인수하여 西로는 연천군 적성리로부터 東으로는 가평군 현리까지 90km 정면의 경계임무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4대 연대장은 1950년 4월 30일부로 함준호 대령(학병출신)이 취임하였습니다.

 

동연대는 1950년 6월 20일 7사단에 예속되어 6.25전쟁을 맞았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8회》

☆무질서한 병영☆

 

1연대 A중대가 창설되어 병사들 220명이 생활하는 내무반은 실로 엉망이었습니다.

 

깔고 잠을 자야할 매트리스도 부족하고 더구나 덮을 이불도 부족한 실정이어서 울타리 너머에 있는 짚단을 가져와 깔고 자고 난로를 피워야할 기름도 없어 장작을 구매하여 불을 피우고 취사를 하였습니다.

 

또 병사들에게는 계급을 부여하지않아 무등병으로 방치해놓으니, 아래 위도 없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군정청에서 A중대 입대하고 1개월이 지나서야 계급을 부여하고 계급장을 달아준 것이 46년 2월 1일입니다.

 

계급장은 미군 사병계급장을 거꾸로 만들어서 지급하였습니다.

 

계급 명칭은 사병은 이등병사, 일등병사로 하고 하사관은 이등중사, 일등중사, 이등상사, 일등상사, 특무상사로 부여하였습니다.

 

복장도 엉망이었습니다. 입대 초기에는 집에서 입고온 피복을 입고 생활하다 2~3주나 지나서 지급되었는데 그것도 일본군복이었습니다.

일본군이 두고간 창고에서 꺼내 지급한 것이지요. 아래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상의는 잠바형으로 개조한 것이고 하의는 그대로이며 일본군 군화에다 갑반을 차고 모자는 일본군이 쓰던 전투모였습니다.

 

중대원들은 우리가 무슨 일본군이냐며 피복을 집어던지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와같이 열악한 병영환경에 환멸을 느낀 일부 병사들은 탈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지원병들이었기 때문에 탈영을 해도 문제를 삼지않았습니다.

 

취사병은 서로 안하려 했고, 사역도 기피했기 때문에 소대장과 식사관(취사반장)이 애를 먹었고 그러다 보니, 주먹질이 오고가고 심지어는 병사들이 식사관 함병선 이등중사를 집단 구타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일본군 학병 소위였던 유흥수(나중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한국군 소위로 임관)와 일본군 공수부대원이었던 함병선(유흥수 처럼 장교로 임관)이 솔선하여 취사 업무를 맡아주었습니다.

 

어쩌다 밥이 잘못되어 죽이 되거나 반찬이 시원치 않으면 밥그릇을 집어던지는 등의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랬으니, 어떤 사람들은 사설 군사 단체만도 못하다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습니다.

 

북에서 전기 공급을 중단하면서는 내무반에 촛불을 켜야 했으며, 내무반장의 말을 듣지 않으니, 내무반장도 주먹이 센 하사관이 맡아야 했습니다.

 

초창기 경비대의 난맥상은 이런것 뿐만 아니고 경비대 내부에서 암약하는 좌익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9회》

☆제2연대 창설☆

 

제2연대는 1946년 2월 28일 충남 대전비행장의 舊일본군 兵舍에서 이형근 대위(군번1번)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이형근 대위는 미군 중대장 <커페니> 중위와 하사관 1명, 그리고 소대장 요원으로 심언봉 소위(학병 출신)와 함께 대전으로 내려와 2연대 창설에 임하였습니다.

 

이형근은 자기 고향에 연대를 창설한다는데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관공서 등의 게시판에 모집공고를 붙이고 거리에 나서서 전단지를 뿌리는 등 열성적으로 장정들을 모집하여 A중대와 B중대를 빠른시간에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2연대도 신원조회를 하지않고 누구나 들어올수 있는 기회를 주다보니, 좌익분자들이 침투해 들어와 밤이면 내무반에서 사상전(思想戰)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또 밖에서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렀던 전과자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이들에게 군복을 입혀놓으니, 외출을 나가서 과거에 감정이 좋지않았던 경찰을 두둘겨 패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이형근은 3월 2일부로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에 취임하였으며 5월 1일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영전하였습니다. 제2대 대대장에는 심언봉 중위가 대리로 취임하고 6월에는 소대장들이 보충되어 C,D 중대가 추가로 편성되어 완전한 대대가 되었습니다.

 

2연대도 1연대와 마찬가지로 연대 간판을 달고 중대급부터 점진적으로 3개 대대를 편성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책은 중대장에서 금방 대대장이 되고 금방 연대장으로 바뀌고 대대장과 연대장을 겸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 것입니다. 그점을 독자분들께서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훈련은 각 연대마다 미군 중ㆍ소위 1명과 하사관 1ㆍ2명이 맡아서 하였으며 이들의 횡포 때문에 트러블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9월 6일에는 경비대 사관학교장으로 갔던 이형근이 다시 돌아와 3대 연대장에 취임했다가 同月 28일에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대리로 영전해 가고 4대 연대장에 최홍희 대위가 취임하였습니다.

최홍희 대위(학병 출신)가 연대장을 하면서 3개대대를 완전 편성하게 되었고 소령으로 진급도 하였습니다.(46년12월)

 

제5대 연대장으로는 6연대장을 하던 김종석 중령(일 육사 56기)이 47년 1월에 취임하였습니다.

 

김종석은 6연대장 시절에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으로부터 군 내부에 좌익세력을 양성하고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김종석은 6연대장 시절에 김지회(경비사관 3기), 홍순석(경비사관 3기), 문상길(경비사관 3기) 등에게 사상교육을 시키고 그들에게 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도록 충동질을 하고 그들에게 신원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이것들이 47년 1월에 경비사관 3기생으로 들어가서 그때 생도대장 오일균 소령으로부터 본격적인 사상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47년 4월에 소위로 임관한 김지회와 홍순석은 광주 4연대로 배속되었다가 48년 5월에 14연대 창설요원으로 여수에 갔는데 그해 10월에 반란사건의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문상길은 제주 9연대에 배속되어 중대장을 하면서 한라산 인민유격대장 김달삼과 내통하고 직속상관인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역적이 된 것입니다.

 

김종석은 2연대장 재직중 쌀 600가마, C-레이션 600상자, 담배 2,000만원어치를 부정처분하여 남로당 기금으로 조달한 사건으로 조사를 받았으며 47년 9월 22일 구속되었습니다.

 

김종석 후임으로는 최덕신 소령(황포군관학교 10기)이 취임하였습니다.

 

48년 10월 여수 14연대 반란 진압군으로 1개대대가 출동하였으며 동년 12월에는 제주도 폭동진압군으로 연대가 모두 출동하였습니다. 이때 연대장은 함병선 중령이었습니다.

 

동연대는 49년 8월에 옹진반도에 전개했다가 동년 11월에 17연대에 인계하고 서울로 나와 수도경비사령부에 잠깐 배속되었며 50년 6월 20일에는 6사단 예속부대로 홍천으로 이동하여 8연대와 교대하였습니다.

 

2연대는 전방진지에 배치된지 5일만에 6. 25 맞아 용전분투(勇戰奮鬪)하였습니다.

 

《創軍의 苦難史 제10회》

☆제3연대 창설☆

 

3연대는 1946년 2월 26일자로 전라북도 이리에서 김백일 대위(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에 의해 창설되었습니다.

이날은 1개 중대 정원 220명이 모집되어 A중대가 창설된 날입니다.

 

각 연대 창설은 연대 서열 순서대로 창설된 것이 아니고 창설요원들이 먼저 장정들을 모집하여 연대의 모체가 되는 A중대를 먼저 창설하여 국방경비대에 보고되는 순서대로 하다보니, 창설 날짜가 연대 서열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해하시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김백일은 미군장교 2명과 하사관 3명, 그리고 소대장 요원으로 이한림(신경군관학교 2기), 김종오(학병출신), 백인기(학병출신), 정래혁(일 육사58기), 장만석(학병출신) 등 5명의 소위를 데리고 이리로 내려가서 모병을 하여 A.B.C.D 중대를 빠른시간에 창설하여 대대를 편성하게 되었습니다.

 

소대장급들 중에서 이한림과 정래혁은 훈련을 맡고 김종오는 식사관, 백인기는 경리, 장만석은 구매(당시는 물자가 중앙에서 조달되는 것이 아니고 돈을 주고 현지에서 구매를 하였기 때문에 구매관이 별도로 보직되어야 했음)

 

김백일은 각소대장 요원들에게 중대창설을 위해 모병임무를 부여하였습니다.

 

A중대는 이한림 소위가 군산에서 모병을 해오고, B중대는 백인기가 이리 동국민학교에서 모집하고, C중대는 이명재가 東이리 공장터에서 모집하였습니다.

 

모집하는 방법은 벽보에 모집 공고문을 붙이고 전단을 뿌리고 가두 연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3연대에는 고급하사관들이 열성적으로 움직였는데 이들은 박창록, 윤택중, 김창룡(나중에 방첩부대장), 손창규 등으로 경비사관 3기로 입교하여 장교가 되었으며 박춘식은 5기로 임관하였는데 이들은 나중에 모두 장군이 되었습니다.

 

3연대도 예외없이 전과자와 좌익 색채를 띤 불량배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경비사관 3기로 장교가 된 김응록은 48년도에 14연대 반란군 진압작전 부대로 출동했던 12연대 2대대 중대장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자입니다.

 

그리고 불량배들이 총기를 7정이나 훔쳐서 숨기는 등의 사고를 치고 김백일 연대장이 보급품을 부정처분하여 결혼자금으로 썼다고 모함하여 연대장에서 해임되도록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남로당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각부대에서 암약하는 공산 푸락치들이 총기를 절취하여 숨기는 사례가 빈번하였음)

 

김백일은 연대장에서 해임되어 부연대장으로 밀려났으며, 2대 연대장은 중국군 출신 송호성이 부임하였다가 2개월만에 경비대 사령관으로 영전하고 김백일 소령이 다시 3대 연대장으로 컴백하였습니다.(국방경비대에서 조사한 결과 김백일 소령이 보급품을 부정처분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임)

 

김백일 소령은 중령이 되어 47년 9월에 경비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하고 임선하 소령이 4대 연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리고 48년 2월에 연대본부는 이리에서 전주로 이동하였습니다.

(1대대 : 군산, 2대대 : 남원, 3대대 : 이리 주둔)

48년 7월에 함준호 중령이 5대 연대장으로 부임하고 그해 10월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진압부대로 출동하였습니다.

 

군산에 주둔하고 있는 1대대(대대장 백인기 소령)는 48년 5월 1일부로 12연대 창설부대로 지정되어 12연대를 창설하였습니다.

 

49년 1월부터는 남원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하였으며 50년 1월에는 6대 연대장으로 박임항 중령(신경군관학교 1기)이 부임하였으며 동년 1월 27일에는 서울로 이동하여 7사단에 배속되었습니다.

 

동년 6월 10일에는 7대 연대장에 이상근 중령(경비사관 1기, 이형근 동생)이 보직되어 6.25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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