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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3)/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3회

 

 

다음으로 사형 집행 장소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사형은 대부분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그 중 교형이나 참형이 주로 도성 밖의 당고개[唐古介, 堂峴]에서 행해진 반면 능지처참, 즉 거열은 도성 안 군기시(軍器寺), 저자 거리, 무교(武橋) 등에서 행해졌다.

 

특히 능지처참이 가장 많이 행해진 장소는 군기시 앞길이었지만, 꼭 정해진 것은 아니어서 혜민국(惠民局) 거리나 도성 밖의 서소문(西小門), 동작진(銅雀津) 근처, 지방 감영 등에서도 행해진 적이 있었다.

 

거열형이 끝나고 나면 거열 후 잘린 머리는 효시(梟示) 혹은 효수(梟首)라 하여 대개 3일간 매달아 두었으며, 잘라낸 팔과 다리도 팔도에 돌려보이게 하였다.

 

 

그런데 『묵재일기(黙齋日記)』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 지방을 순회하며 처형된 시신을 전시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다.

 

 

『묵재일기』의 주인공 이문건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도 성주(星州)에서 평생 유배 생활을 한 인물인데, 그는 일기의 전반부에 조카 이휘(李輝)가 능지처참되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명종 즉위년(1545) 9월 11일 조카 이휘가 어두워질 무렵에 군기감 앞길에서 능지처참에 처해졌으며,

 

3일 후인 9월 14일 집안에서 머리와 팔다리를 뺀 나머지 이휘의 시신을 수습하여 9월 16일에 가매장을 하였다가,

 

이듬해 4월경 팔도에 전시되었던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이다.

 

또한 일기의 1545년 11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문건은 성주 유배지에 있다가 여러 군현에 순회 전시되던 이휘의 시신이 성주에 도착하여 인동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듣고 식사를 하지 못할 정도로 안타가워 하였다.

 

『묵재일기』를 통해 우리는 당시 능지처참으로 절단된 시신이 실제로 각 지방에 운반되었고,

 

6개월여에 걸친 전시가 마무리된 후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계되어 장례가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가족들은 처형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으니, 한 마디로 당시 처형된 죄수의 몸은 냉엄한 법의 현존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4회

 

4. 한말 외국인들이 목격한 끔찍한 처형 장면

 

앞서 본 것처럼 사형 중에서도 참수형, 능지처사형은 신체를 절단하여 처형한다는 점에서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다.

 

19세기 말까지 지속되던 참수형, 능지처사형은 마침내 낡은 형률과 형벌 개혁이 추진된 갑오개혁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아무튼 정확히는 1894년 12월 27일에 능지처참형은 참형과 함께 금지되었다.

 

대신 이후부터는 민간인에게는 교수형(絞首刑), 군사범죄에서는 총살형(銃殺刑)으로 사형 집행 방식이 통일되었다.

 

이는 이웃 중국이 1905년에 능지처사형을 폐지한 것과 비교할 때 10여년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 바꾸어 말하면 적어도 1894년까지 수도 한양에서 죄수를 잔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이 무렵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죄인 처형 현장을 목도하고 남긴 기록들에서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먼저 프랑스의 선교사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가 1874년 집필한 『한국천주교회사』에 조선의 능지처사형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달레는 조선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성직자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경험들을 달레가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달레는 이 책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 죄인 참수(斬首), 능지처참 등 조선의 공개 사형 집행법에 대해 소개하면서, 모반죄인과 대역죄인의 능지처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것이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진행되나 머리가 몸뚱이에서 떨어진 뒤에 사지를 자른다.

 

그러면 머리와 몸뚱이와 합하여 여섯 토막이 된다. 옛날에는 팔다리를 잘라내는 데에 도끼나 칼을 쓰지 않고, 팔다리를 소 네 마리에 잡아매고 소들이 사방으로 달려 가도록 채찍질을 하여 목 잘린 사람의 사지를 찢었었다.

 

글의 내용을 종합하면 조선에서 능지처참은 참수를 먼저 한 뒤 사지를 절단하였다는 것,

 

사지 절단의 방법은 과거에는 수레를 이용했으나 최근에는 도끼나 칼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레의 언급의 사실이라면 조선에서 능지처참할 때 참수하여 죄수를 죽인 후에 팔다리를 절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단 번에 목을 베어 죄수의 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능지처참형이 우리의 예상과 달리 죄수를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달레에 따르면 사형수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어서 1839년 천주교 박해 때에는 처형된 천주교인들의 절단된 팔이 거지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거지들은 팔에 줄을 매어 동네를 다니면서 동냥을 했다는 것이다.

 

샤를르 달레가 선교사들이 보낸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작성했다면,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 아놀드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는 직접 한국에서 19세기 말 죄인을 참수하는 장면을 보고, 이를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과 함께 글로 남겼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5회

 

 

1891년 2월 6일 랜도어가 본 장면은 모반을 꾀한 대역죄인 7인이 시구문(屍口門) 밖 외딴 언덕에서 참수되는 장면이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사형수들은 웃통이 벗겨진 채 소달구지의 나무 십자가에 결박된 채 사형장으로 이송되었고,

 

이송 도중 주막에서 푸짐하게 술과 음식을 먹은 망나니가 술에 취해 칼을 잘못 휘둘러 사형수의 목이 아닌 어깨를 잘라 버리는 실수를 범했으며,

 

죄인의 시체가 개와 표범의 먹이로 방치되는 사이 망나니들은 일을 마친 후 주막에서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흥청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랜도어는 이와 같은 ‘불쾌한’ 처형 장면을 기록하면서 조선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즉, 조선 사람들은 서양인들과 체질이 달라 고통을 덜 느끼므로 용감하게 참수를 당하며 죽어갈 수 있다거나,

 

중국 망나니들의 참수 기술은 탁월한데 조선인들은 잔인무도하고 서투르게 처형을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요컨대 랜도어는 잔혹한 죄수 처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는 모습에 의아해하며 조선인에 대한 외국인으로서의 편견을 보여주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6회

 

 

김옥균, ‘육시’에 처해지다

 

앞서 달레와 랜도어의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능지형과 참수형이 폐지되기 직전인 1894년 처형 기록이다.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해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효시(梟示), 김옥균(金玉均)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기록인데, 특히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戮屍)는 조선에서 공식적으로는 거의 마지막으로 집행되었다고 한다

 

먼저 영국의 지리학자로 1894년 2월에 한국에 처음 도착한 후 1897년까지 네 차례에 거쳐 한국을 방문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의 동학군 효수(梟首) 장면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녀는 1894년 12월에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전라도에서 붙잡혀 처형된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金介男) 등의 목 잘린 머리를 목격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그들의 머리는 세 발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었는데, 장대가 쓰러져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버려진 머리를 개들이 뜯어먹고 그 옆에서 어린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불과 며칠 후에 능지형, 참형의 폐지가 『관보(官報)』에 공표되었고, 그녀는 이와 같은 개혁이 조선인 스스로가 아닌 일본인 고문에 의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다음,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을 능지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의 더 생생한 기록이 확인된다고 한다.

 

김옥균의 경우 갑신정변 실패 후에 중국 상해에서 1894년 3월에 홍종우의 손에 암살되었고 그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4월에 처참하게 능지처참 당했다.

 

김옥균 시신에 대한 능지처참, 즉 육시(戮屍)는 양화진 강변 백사장에서 행해졌다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묘사한 처형 현장은 다음과 같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7회

 

양화진 형장(刑場)에

“모반대역부도죄인(謀反大逆不道罪人) 옥균을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에서 곧바로 능지처참(凌遲處斬)한다”는

처형선고를 기록한 푯말을 세우고 시체의 목과 손·발을 잘라 3개의 나무토막을 세 발로 세운 곳에 목과 손·발을 하나씩 매달고 그 옆에는 발가벗긴 몸통을 엎어 놓은 채 버려져 있었다

 

그 몸통 잔등부위에 칼자국 세 곳이 있었고 또 그 옆에는 빈 관이 있었으며 관 옆에는 피에 물든 일본식으로 명주안을 받친 잠옷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옥균이 임종할 때 입고 있었던 옷일 것이다.

 

그 밖에 손과 발 하나씩이 보이지 않았는데, 풍설(風說)과 같이 본보기를 삼기 위해 그것들을 전국 8도에 회람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처형 당시에는 장위사(壯衛使) 이종건(李鍾健)과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 모(某)가 입회하고 처형이 끝나자 곧 서울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처럼 육시된 김옥균의 머리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 적힌 흰 천과 함께 백사장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당시 김옥균 시신에 대한 효수를 중단할 것을 서울 주재 각국 외교관들이 조선 정부에 권유하였지만,

 

또 다른 외국인에 따르면 김옥균의 시신은 16일 동안이나 효수된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구역질나는 과정’이라고 극언하고 있다.

 

이상으로 폐지 직전 조선에서 벌어진 능지형, 참수형 집행 장면에 대한 외국인들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끔찍한 처형 장면이지만, 실제 목격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이들 기록에는 외국인이 갖는 조선 형벌과 법문화에 대한 선입견이 드러나기도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참수형, 능지처사형 등은 구례의 낡고 잔혹한 사형 집행 방법으로서, 근대적 사법개혁의 와중에서 당연히 폐기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을 거쳐 이 형벌은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전통시대 한국은 동아시아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완성도가 높은 중국 법률을 받아들였으며,

 

한국에서 참수형, 능지처참형은 그 과정에서 사형 형벌의 하나로서 채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시행된 사형 중 참수형, 능지처사형을 가학적이고 잔인한 육형(肉刑)으로만 단순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당시 법률 및 형벌체계 내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8회

 

[조선의 유배형]

 

조선시대에도 감옥이 있었지만, 감옥은 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를 가둬두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구치소인 셈이다.

따라서 기결수를 가둬둘 감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사형보다 한 단계 아래의 큰 죄를 지은 자들에게 별도의 형벌로 다스렸는데,

바로 유배형이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다섯 가지 형벌로는

사형(死刑), 유형(流刑), 도형(徒刑), 장형(杖刑), 태형(笞刑)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유형이 바로 유배형을 말한다.

 

일본 에도시대에도 조선시대 유배 같은 추방형이 있었다.

추방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은 ‘엔토(遠島)’, 즉 멀리 떨어진 섬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럼 유배형은 어떤 형벌인가?

 

‘귀양’이라는 말로 잘 알려진 유배형은 중죄를 지은 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관 땅에 보내 종신토록 살게 하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오해가 있다.

유배형은 양반들에게만 행해진 형벌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치범으로서 양반 관료들이 유배된 사례가 많긴 하지만,

일반 평민, 천민들도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다.

 

또 하나. 조정에서 뿐 아니라 지방의 관찰사 직권으로도 형사 잡범에게 유배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유배형은 형기가 종신이라는 점, 유배지에서 노역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무기금고’에 비유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유배형이 지금과 같은 좁은 감옥살이에 비해

훨씬 나았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그 나름의 적지 않은 애환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조선시대 독특한 형벌인 유배형의 특징은 무엇인지,

 

유배지 선정과 죄수들의 실제 유배길은 어떠했는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유배형의 등급부터 알아보자.

 

유배형은 죄인의 거주지에서 유배지까지의 거리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등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죄가 무거울수록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3천리 밖으로의 유배가 가능했는가 하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 워낙 땅이 넓다보니 세 등급으로 유배 보내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래서 죄수가 정해진 유배지로 이동할 때 빙빙 돌고 돌아

 

해당 리 수를 채우게 하기도 하였으며, 아예 세종 12년(1430)에는 등급별로 유배지를 정해버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79회

 

예를 들어 죄인이 전라도에 사는 경우의 유배지로는

경상도, 강원도, 내지 함경도 고을이나 해변으로 한정하였는데,

다른 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각각 대상 유배지가 정해졌다.

 

이 세종 때 규정에 따르면

 

‘유 2천리’는 거주지로부터 6백리 밖 고을, ‘유 2천 5백리’는 7백 5십리 밖 고을,

‘유 3천리’는 9백리 밖 해변 고을이 유배지가 된다.

말이 3천리이지 실제 유배지는 9백리 밖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수교정례(受敎定例)』 현종 13년(1672) 수교에서 보듯이

현종 때에는 최소한 1천리 밖으로 유배보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등

법에 정한 유배지 조항은 후에도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었다.

 

또한 실제 운영 면에서도 원칙과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유배지를 배정하는데 정실이 개입되어 거주지 인근 고을에 형식적으로 유배 보내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아예 서울 근교인 강화도 교동(喬桐)은 왕족들의 유배지로서 유명하였다.

 

 

사실 조선시대 거의 전 국토가 유배지였다.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유배지의 거리, 유배지로의 이동 경로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의금부노정기(義禁府路程記)』를 보면 336개 고을이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은 유배인들을 종신토록 격리시키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곳으로는 아무래도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경 고을이나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등 전라도의 외딴 섬을 들 수 있다.

 

이들 지역은 거리도 거리지만 워낙 변두리이다 보니

해당 지역 사람들이 살기에도 기후나 물자 등 생활 여건이 열악하였다.

 

특히 섬 지역은 육지와 차단되어 있어서 유배인들의 배소 이탈 염려가 없는 최적의 유배지였다.

반면, 유배인들에게는 운 좋게 중간에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죽지 않는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땅이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아무리 먼 유배지라고 하더라도

변경 지역이나 해안 마을에 죄인을 유폐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정쟁이 격화되면서 이들 지역 대신에 섬 지역으로의 도배(島配)가

크게 늘었다. 특히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다도해의 여러 섬들이 유배지로서 애용되었다.

 

특히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인 제주도는

본토와 격리된 절해고도(絶海孤島)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조선시대 많은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관리 뿐 아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조 반정으로 쫓겨난 국왕 광해군의 최종 유배지도 제주도였다.

 

처음 강화도에 유배된 광해군은 몇 차례 옮겨 다니면서 15년을 떠돌다가 1637년 제주도에 들어와 67세의 나이로 병사하기 까지 3년 여를 이곳에서 지냈다.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이곳 학문과 교육 진흥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고 있는 제단.

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에 따라 헐린 귤림서원(橘林書院)이 있던 곳이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0회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에는 제주도 사람들이 추앙하는 조선시대 다섯 분 관리들의 위패가 모셔진 ‘오현단(五賢壇)’이 있다. 여기에 모셔진 제주 오현은

 

김정(金淨), 김상헌(金尙憲), 정온(鄭蘊), 송인수(宋麟壽), 송시열(宋時烈) 등인데,

이 가운데 김정, 정온, 송시열 세 분이 유배인이다.

 

제주도에서 유배인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제주도의 3개 읍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가운데 특히 대정현으로 유배객이 주로 몰렸다.

 

이 곳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바람이 드세고 척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중죄인을 종신 유폐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많은 유배객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대정현의 포구 모슬포를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라 빗대어 ‘못살포’라고 했을까?

 

제주도 외에도 유배지로서 악명을 떨친 곳으로는

전라도 연안의 망망대해 외로운 흑산도, 추자도, 거제도, 신지도 등 조그만 섬들이었다.

 

이 중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유배지로 일컬어지는 흑산도는

오늘날 가수 이미자가 노래한 ‘흑산도 아가씨’로 유명한데,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라 하였다.

 

좁은 땅에 극도로 열악한 생활환경, 육지 소식조차 제대로 확인할 길 없는 외롭고도 쓸쓸한 처지.

아마도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며 속이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가사처럼 유배객들의 가슴도 이곳에서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추자도는 정조 때 귀양간 대전별감 출신 안조환(安肇煥)이 쓴 유배가사에

‘하늘이 만든 지옥(天作地獄)’으로 묘사될 정도로 최악의 유배지 중 하나였다.

이밖에 거제도, 신지도 등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섬들도

흑산도, 추자도와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중죄를 진 유배인들이라도 열악한 섬에 평생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혹했다. 그래서 중간에 절도(絶島)에 유배보내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영조는 1726년(영조 2)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에 유배보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2년 뒤에는 관아도 없고 사람도 많이 살지 않는 조그만 섬에는 유배보내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고종 초기에 만들어진 『대전회통』에서는 추자도, 제주목 유배를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규제 조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들 섬들에 유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丁若銓)이

 

순조 1년(1801) 천주교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된 일은 유명한 일이거니와,

고종 때 최익현, 김평묵, 김윤식 등 상당수 지식인들의 경우

 

『대전회통』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로 귀양가곤 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1회

 

유배형은 사형 다음의 중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료들에게 한 두 번의 귀양살이는 흔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조선시대 당파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연루된 지식인들 상당수가 경험한 유배!

 

그럼 이들 유배죄인들의 유배지까지의 노정은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먼저 유배인이 관원 신분일 경우 호송 책임은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평천민은 형조에서 담당했다.

 

그런데 같은 관원이라도 등급에 따라 호송관이 달랐는데,

 

정2품 이상, 즉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 이상 고위 관원은 의금부 도사(都事)가 맡았다.

그리고 이외의 관원들의 경우도 당상관은 서리(書吏), 당하관은 나장(羅將)이 나누어 맡았으며,

관직과 무관한 평천민은 지나는 고을의 역졸(驛卒)이 번갈아가며 호송을 책임졌다.

 

 

지금처럼 편리한 교통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상, 죄인들이 유배지까지

하루 이틀 만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수 십일이 소요되는 게 예사였다.

규정상 하루 평균 8, 90리는 가야했기 때문에 이동 수단으로는 말이 자주 이용되었다.

 

그럼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은 누가 충당했을까?

유배지에 도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대개 유배인 자비로 해결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

압송관 입장에서도 죄인의 압송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으므로 으레 수고비를 챙겼다.

이는 유배인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선조 때 광해군 책봉을 건의한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몰려

1591년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된 홍성민(洪聖民)의 경우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 옷가지와 음식물 등을 장만하기 위해

가산(家産)을 턴 상황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

 

한편, 어떤 직책,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 압송관도 달랐듯이

유배지로의 긴 여행길도 죄인 처지에 따라 대우가 크게 달랐다.

 

평천민 대부분의 유배 길은 유배지에서의 비참한 생활 못지 않게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이동하는 것은 예사였으며,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해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이 높은 관리, 제법 힘깨나 쓰던 돈 많은 양반들의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을 수령과 지인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지나는 길에 선산(先山)에 들러 성묘를 하거나 중간에 며칠씩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조선대 김경숙 교수의 유배 일기 분석에 따르면

 

관직자들의 유배 길은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간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로 가득했으며, 심지어 호화판 유람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경종 2년(172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甲山) 유배 길에 오른 윤양래(尹陽來)의 경우

 

전체 18일 여행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후한 접대는 물론 많은 노자를 받았다.

그가 중간에 얼마나 많은 물자를 제공받았던지 수령이 챙겨준 물건을 싣고 가던 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심지어 윤양래의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같이 동행하지 않고 별도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2회(

 

 

선조 22년(1589) 함경도 길주(吉州)로 유배된 조헌(趙憲)은

경유지인 안변(安邊)에서 부사(府使)와 활쏘기와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 폐비를 반대하다가 북청(北靑) 유배 길에 오른 이항복(李恒福)은

가는 길에 함흥(咸興)과 홍원(洪原)에서 기생 덕선(德仙), 조생(趙生) 집에서 묵기도 하였다.

특히 기생 조생(趙生)은 이전에 유배객 윤선도(尹善道)와의 술 자리로 인해 그 총명함이

 

서울까지 알려져 있었는데, 이항복은 유배 가는 길에 일부러 그녀를 만나는 호사를 부렸다.

 

광해군에게 인목대비의 폐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이항복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으며, 5개월 만에 병사하는 불운을 맞는다.

 

한편, 섬으로 떠나는 유배 길은 육지와는 사정이 또 달랐다.

간혹 파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로 가는 유배객을 실은 배가 풍랑 때문에 표류하여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전라도 관찰사나 제주 목사의 보고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육지에서 제주도로 들어갈 때에는 전라도 해남, 강진, 영암 등지에서 출발하여

보길도, 소안도, 진도 등을 경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거센 바람 때문에 몇 일 씩 배를 띄우지 못해 지체하기도 했으며,

풍랑에 떠밀려 제주도의 어느 포구에 도착할 지도 일정하지 않았다.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아우 김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라도 강진을 출발해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한 사실에 안도한 것을 보면

 

제주 유배 길은 그곳 생활만큼이나 힘든 여정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유배 길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조정에서 힘깨나 쓰던 관리인 경우 유배 길의 불편함이 다소 해소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마음까지 홀가분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떠나는 길인만큼 배소(配所)에서

벌어질 앞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