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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잡사(34)/받은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3회

 

 

[조선시대 형벌 곤장제도]

 

곤장은 조선시대에 사용된 형장의 일종이다.

 

곤장은 한자로 ‘곤(棍)’이라 쓰는데, 고려와 조선의 매를 치는 형벌인 태형과 장형을 집행할 때 쓰는 형장 ‘태(笞)’와 ‘장(杖)’과는 다르다고 한다

 

태의 모양은 가느다란 회초리를 떠올리면 되는데,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고 지름이 1센티미터가 채 안되었고 장은 태보다 지름이 약간 클 뿐 모양에 큰 차이가 없다.

 

반면 곤장은 배를 젓는 노와 같이 길고 넓적하게 생겨서, 강도가 태와 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곤장을 잘못 맞았다가는 속된 말로 뼈도 추스르기 힘들었다고 한다

 

한말 선교사들이 남긴 견문기에서는 불과 몇 대에 피가 맺히고 십여 대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더라고 곤장을 맞던 죄인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곤장은 없었다고 하는데 언제 출현한 것일까?

 

『신보수교집록』이라는 법전에 보면 순치 연간(1644-1662)에 제정된 법규 가운데 ‘군병아문(軍兵衙門)이 아닌 곳에서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문이 나오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법전 조문상 가장 이른 시기의 곤장에 관한 규정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실록에는 곤장에 대한 용례가 이보다 조금 더 앞선다. 즉,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정밀하게 분석해 보면 선조 32년(1599) 9월 17일에 함종현령 홍준(洪遵)이라는 인물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부당하게 피해자 가족에게 곤장을 가한 죄로 장령의 탄핵을 받고 있다. 이로써 대략 선조 연간 무렵부터 곤장이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웃나라인 명나라에서는 곤장을 일찍부터 사용했는데, 아마도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군이 곤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서 조선에서도 배워서 쓰지 않았을까 추정된다는 견해도 있다.

 

 

선조대 무렵부터 사용되던 곤장은 군영이나 포도청ㆍ진영ㆍ토포영 등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적을 다스리는 기관에 한해서 사용을 허락하였는데,

 

사용 방법은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번갈아 치도록 하였다. 이후 곤장에 관한 세부적인 조처들도 마련되었는데, 현종 4년(1663)에는 곤장의 재질을 버드나무로 정하였고, 숙종 11년(1685)에는 아예 30대 이상 치지 못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곤장은 하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모두 다섯 가지나 되었다. 이 다섯 가지는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과 치도곤(治盜棍) 등을 말한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4회

 

정조가 관리들의 형벌 남용을 막기 위해 각종 형구(刑具)의 크기를 통일한 『흠휼전칙』(1778)이라는 책자를 간행하여 반포하였는데, 이 책에서 곤장에 관한 상세한 규정을 확인할 수 있다.

 

 

중곤(重棍)이 가장 긴 약 181센티미터쯤 되는 반면, 타격부의 너비와 두께는 치도곤(治盜棍)이 각각 16센티미터, 3센티미터 내외로 제일 두텁고 크다.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곤장을 누가 사용할 수 있었는지 좀 더 살펴본다.

 

중곤(重棍)은 병조판서, 군문대장,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가 죽을죄를 저지른 자를 다스릴 때만 쓸 수 있었고,

 

대곤(大棍)은 군문(軍門)의 도제조, 병조판서, 군문대장, 중군, 금군별장,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및 2품 이상의 고위직 군무사성(軍務使星)이 사용할 수 있었다.

 

중곤(中棍)은

내병조, 도총부, 군문의 종사관, 군문의 별장, 천총, 금군장, 좌우순청, 영장, 겸영장, 우후, 중군, 변방의 수령, 사산참군, 3품 이하의 군무사성이 사용할 수 있으며,

 

소곤(小棍)은

군문의 파총, 초관, 첨사, 별장, 만호, 권관이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치도곤(治盜棍)은 포도청, 유수, 감사, 통제사, 병사, 수사, 토포사, 겸토포사, 변방의 수령, 변장(邊將) 등이 도적을 다스리거나 변정(邊政)ㆍ송정(松政)에 관계된 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흠휼전칙』의 규정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하나는

 

변방의 수령 등 군사권을 쥔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을 수령들은 곤장을 사용할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흠휼전칙』에 정한 곤장에 관한 규정은 법전인

 

『대전통편』에까지 실렸으며, 이후에도 군무(軍務)에 관련된 죄인을 다스리는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만 곤장 사용이 허락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처벌 대수까지 세밀하게 명시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19세기에 만들어진 당시 대표적인 중앙군인 훈련도감에 관한 사례를 모은 책자인 『훈국총요(訓局總要)』를 보면

 

별장ㆍ천총 등 장교들이 소속 군인에겐 15대,

 

소속이 다르면 7대 이상 곤장을 치지 못하도록 못 박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규정을 잘 만들어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요새말로 ‘공직 기강 확립’ 구호가 잠시 뜸해질 땐 어김없이,

 

정부의 감시가 잘 미치지 못하는 지방 고을 수령들이

 

규정과 상관없이 불법적으로 형장을 남용하여 예사로 곤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고을 수령들이 법을 집행할 때 통쾌한 맛을 느끼고자

 

태ㆍ장보다는 곤장을 즐겨 사용하는 당시 세태를 강하게 꼬집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두들겨야 통쾌한 것일까?

 

정조 말기 창원부사 이여절(李汝節)이란 인물은 부임 이후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무려 경내 삼십 여명의 백성들을 곤장 등으로 마구 매질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5회

 

 

[나라 법보다 무서운 마을 법]

 

멍석말이, 동네볼기~

 

SBS에서 방영되었던 주말드라마 <신기생뎐>에서 과거 조선시대에서나 있었음직한 ‘멍석말이’가 등장하여 화제가 된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현대의 기생을 주인공으로 했다는 점에서 엉뚱한 설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던 터에, 기생들 간에 멍석말이까지 버젓이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문제의 장면은 이렇다. 드라마에서 기생집 부용각의 기생들은 개인 휴대폰의 소지나 손님과의 개별적인 데이트가 금지되어 있었는데,

 

한 기생이 개인 휴대폰을 사용하며 단골손님인 대기업 사장과 데이트를 즐긴 사실이 적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처벌을 받는 과정에서 그녀는 모포에 말린 채 건장한 남자들로부터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였다.

 

이는 과거 민간에서 사사로이 가하던 린치, 멍석말이와 다름없으니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잘 알려진 것처럼 멍석말이는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행해지던 사사로운 체벌인사형(私刑)의 일종이다.

 

마을에서 불효하거나 못된 짓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권세가나 마을에서 회의를 거쳐 어른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에 말아 매질을 함으로써버릇을 고쳐주던 풍속을 말한다.

 

엄연히 국법(國法)이 있으므로 무뢰한을 관청에 신고하여 처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고을에서 종종 이와 같은 처벌권을 행사하였으니 ‘멍석말이’는 일종의 관습법적인 형벌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조선시대로 끝난 것은 아니다.

민속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멍석말이와 같은 관습법적 처벌의 전통은 해방 직후까지도 유습이 남아 있었다.

 

법사학자 전재경 박사의 경상북도 민속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울진, 상주, 안동 등지의 마을에서 멍석말이, 동네볼기는 해방 직후까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예컨대, 울진군 평해읍 거일리 마을에서는 시부모에게 불효한 며느리가 동리의 어르신들 앞에 소환되었으며,

 

결국 소에 매달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다니는 수모를 겪게 한 뒤 마을 어머니들의 주먹세례를 받고 다시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답을 하고 나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947년 상주군 모동면 용호리 마을에서도

1947년에 시아버지를 학대한 며느리에 대해 동회에서 ‘동네볼기’로 징벌할 것이 결정되어, 가마니에 몸을 감은 며느리를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회초리로 한 대씩 때렸다.

 

이와 같은 멍석말이는 동네볼기, 동리 매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다른 지역에서도 해방 직후까지 행해졌다고 하니,

 

조선시대 마을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적인 체벌의 전통이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나라 법은 어겨도 마을 법은 어길 수 없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6회

 

좀 까마득히 먼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국가 출현 이전의 고대 원시사회에서는 사회적 침해, 범죄가 발생할 경우 그에 대한 반격으로서 피해자의 ‘복수(復讐)’가 용인되었다.

 

그러다가 국가권력이 출현하면서 사적인 복수를 국가의 공식적 형벌이 대신하였다.

 

이는 피의 복수가 또 다른 사적인 복수를 낳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니,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고 형벌을 독점하는 이같은 시스템을 어려운 말로 개념화한다면 공형벌주의(公刑罰主義)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사적인 형벌, 즉 사형(私刑)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는 없었으니, 명나라의 『대명률』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사적인 처벌이 인정되었다.

 

첫째,

자신의 조부모나 부모가 피살당하는 현장에서 그 자손이 범인을 살해한 경우에는 자손을 처벌하지 않도록 규정하여 위험에 처한 존속 부모를 위해 자손이 사적인 처벌을 가하는 경우를 인정하였다.

 

두 번째

부모에 욕을 하거나 시부모를 구타하는 등의 패륜행위를 저지는 자손이나 처․첩에 대해 부모나 남편이 처벌하다가 죽게 한 경우도 이들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였는데, 부모나 남편의 자손, 처에 대한 징계권을 인정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교령(敎令)을 위반한 노비를 주인이 처벌하다가 우연히 노비가 죽은 경우에도 주인의 죄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여,노비에 대한 주인의 징계권도 인정하고 있다.

당시 조선에서 『대명률』을 형법으로 사용한 만큼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일정한 범위에서 사적인 형벌을 인정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이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였지만, 그렇다고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잘못을 범한 노비․자손에 대한 주인․부모의 사적 처벌 같은 것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 이상으로 관습법적으로 사적인 체형이 행해지곤 했다는 점이다.

 

앞서 ‘멍석말이’ 이야기를 했지만, 조선시대에 마을의 관습 형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마을민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국가 법보다 마을 법이 가깝고, 더 무서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을 법, 동리 법으로 주목할 것이 바로 향약(鄕約)이다.

지방민의 교화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6세기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한 향약은 지방사회의 유력자, 즉 사족 양반들의 자치권에 관한 내용이 많이 담겨있었다.

 

각 지역의 유력 사족들이 향약을 매개로 백성들에 대한 재판권과 형벌권까지 행사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잘 알려진 향약의 4대 덕목 중 하나인 과실상규(過失相規) 조항은 마을민들의 잘잘못을 가려내고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7회

 

예컨대, 퇴계 이황이 경상도 예안지역에서 시행했던 예안향약의 규정을 보면 부모에게 불손하고, 형제들 간에 서로 싸우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자들은 향약 계원의 자격을 정지시키거나, 모임에서 요즘의 ‘왕따’, ‘집단 따돌림’처럼 상대해 주지 않는 처벌을 내리고 있다.

 

율곡 이이가 시행한 향약은 아예 체벌을 공식화하여 잘못을 저지는 자들을 매로 다스리기도 하였다.

 

이이가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시행한 서원향약에서는 향약 소속 양반들이 백성들의 소소한 분쟁이나 다툼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마을 법을 어긴 자들에게 태형(笞刑) 40대까지 집행할 수 있었다. 당시 지방관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처벌할 수 있는 형벌권이 이보다 불과 10대 많은 태형 50대인 점에 비추어보면 고을에서 향약의 권한이 막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행정력이 나라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못했던 당시 사회에서, 고을의 관습법은 무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마을 양반, 사족들이 주도하는 마을 법이 백성들 입장에서 어찌 보면 나라 법보다 무서웠을 지도 모른다.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내쫓고~

 

앞서 향약의 자치법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더 심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지방 사족들이 국법을 무시하고 고을민에 대해 매우 가혹한 관습적 처벌을 가한 경우도 있었으니,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훼가출향(毁家出鄕)’이라는 것이었다.

 

훼가출향이란 불효, 간통 등 윤리상 용납하기 힘든 못된 짓을 한 자를 관가에 고해서 국법으로 처벌하는 대신, 지방 사족들이 직접 그 죄를 물어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고을에서 영구히 쫓아내 버리는 풍습이었다.

 

이같은 사족들의 집단 행동이 조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선조 임금 때의 일이었다.

 

경상도 진주의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岳)이란 인물의 후처 이씨가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진주 유생들이 무력시위를 벌여 마침내 훼가출향,

 

즉 그녀가 사는 집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그녀를 마을에서 몰아내 버린 사건을 말한다.

 

하종악의 전처는 남명 조식(曺植)의 조카딸이었고 후실인 이씨는 구암 이정(李楨)과 집안이 연결되어 있는 등 이 사건 관련 집안이 당대 그 지역의 대표적 명사들과 혼인관계로 얽혀 있어 더욱 논란이 되었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8회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당시 진주목 서면 수곡리에 살았던 진사 하종악은 처가 죽자 후실로 문제의 함안이씨를 들였다.

 

그런데 하종악이 죽고 난 뒤,

후실인 이씨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며 행실이 부도덕하였다.

 

이에 하씨 집안을 비롯한 진주의 유생들이 관에 고하여 그녀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을의 풍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무리를 이끌고 그녀의 집을 부수고 마을에서 쫓아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하종악 후실 이씨, 또 그녀와 간통한 것으로 지목된 간부(奸夫) 집안 사람들이 옥에 갇혀 문초를 당했을 뿐 아니라,

 

하항(河沆) 등 훼가출향(가문 명예훼손. 쫓겨남)을 주도한 남명의 문인 일부도 지나친 일을 벌였다고 관에서 옥고를 치렀다.

 

특히 이 사건으로 인해 조식은 이정과 절교를 선언하는 등 당시 학자들 간에도 그 파장이 적지 않았다.

 

남녀 간의 문제야 지금도 진실을 알기 힘든 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하종악 후처의 행실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고을에서 향권(鄕權)을 틀어쥔 양반들이 실행한 부녀자에게 훼가출향이라는 무거운 징벌을 가할 만큼 사족 등 마을 유지들의 힘이 컸던 것은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의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보면 진주 인근 고을인 함양에서도 정인홍(鄭仁弘)을 비방한 인물을 이 지역 사족들이 훼가출향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훼가출향이 여러 지역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보통 사람들에게도 집은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으랴? 훼가출향을 통해 잘못을 저지른 자로 지목된 자가 삶의 유일한 터전인 집을 잃고 공동체에서 영원히 쫓겨난다는 것은 분명 상상하기 힘든 형벌이었을 것이다.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한 노비들~

 

앞서 조선시대 마을 사족들이 향약 등 자치권을 매개로 마을민에게 관습적 징벌을 가했던 점을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노비(奴婢)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나빴다.잘 알려진 것처럼 노비는 조선시대에 사고 팔리는 존재였던 만큼 마을 법은 제쳐두고 주인가의 가법(家法)을 어기거나 심지어 사소한 잘못으로도 주인의 체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으며, 죽이지는 않아서 법의 처벌을 받지는 않더라도 주인이 노비를 잔인하게 다룰 경우 도덕적으로 선비들의 지탄을 받을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죽지 않을 정도의 노비 체벌은 공공연히 이루어졌고, 심지어 체벌 과정에서 노비가 죽는 경우에도 주인이 받는 처벌은 상당히 가벼웠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89회

 

 

즉, 『대명률』 규정에 따른 죄를 지은 노비를 주인이나 주인 친척이 함부로 때려죽인 경우 장형(杖刑) 100대의 형벌에 그쳤으며, 심지어 아무 죄도 없는 노비를 죽이더라도 장일백(杖一百) 도일년(徒一年)이라 하여 요즘으로 치면 매를 맞고 징역 1년 정도 살면 그만이었다.

 

집안에서 노비에게 체벌을 하더라도 제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 또한 이러하였으니, 노비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주인들로부터 체벌을 받기 일쑤였다.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쓴 생활 일기를 보면 노비 체벌이 흔치 않게, 심지어 노골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쇄미록(瑣尾錄)』을 보면 오희문(吳希文) 집안의 노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체벌을 당했다. 예를 들어 밥 지을 때 쥐똥을 골라내지 않았다고 종아리를 얻어 맞았고, 거만하고 상전을 우습게 안다고 빰을 얻어맞기도 하였다.

 

『묵재일기(黙齋日記)』에서 이문건(李文楗)은 비 삼월(三月)과 윤개(尹介)가 자신이 부르는데 즉시 오지 않았다고, 속히 더운 물을 대령하지 않았다고 각각 매질하였다. 또한 노 야찰(也札)은 밤에 이유 없이 늦게 집에 돌아왔다는 이유로 매로 엉덩이 찜질을 당했다.

 

 

물론 노비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주인들도 적지 않았으니, 세종 임금 때의 재상 황희(黃喜)의 경우 노비에게 한 번도 매질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초려 이유태(李惟泰)처럼 현실적으로 체벌이 엉뚱하게 큰 화(禍)를 부를 수도 있다고 해서 함부로 상놈이나 노비에게 매를 들지 말 것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17세기 충청도의 대표적 산림(山林)의 하나로 꼽히는 초려 이유태(李惟泰)는 자손들에게 지켜야할 생활규범을 담은 「정훈(庭訓)」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거기서 그는 주변에 불량한 젊은이들이 많지만 그 집안에서 죄를 다스리도록 참아야지 절대 자신이 직접 손을 대지 말 것을 당부한다.

 

만에 하나 매 맞은 자가 다른 병으로 죽어버리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0회

 

그러면서 이유태는 선친인 이서(李曙)가 겪은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있는데, 하루는 선친께서 길을 가다 말을 타고 가는 마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손으로 성의 없이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화가 난 선친의 마부(馬夫)가 버릇을 고쳐주려고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체벌하려고 하던 것을 선친이 만류했는데,

 

그날 밤 마침 말을 타고 가던 그 자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당시 선친이 그에게 행여 손이라도 댔으면 그 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어쩔 뻔 했겠느냐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화를 피하기 위해,

혹은 온화한 품성을 지녀서 노비에게 함부로 매를 대지 않는 양반들도 있었던 반면, 체벌의 도가 지나친 주인들도 적지 않았다.

 

성종 임금 때 세력가였던 유하(柳河)의 아들 중에 유효손(柳孝孫)이란 자가 그 하나였다.

 

그는 비 효양(孝養)이 자신과의 동침을 거부하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그녀를 붙잡아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졌으며, 심지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발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끈에 꿰어 묶어놓기까지 하였다.

 

 

 

이보다 한참 뒤인 1740년(영조 16)에 영조 임금은 형벌 남용을 금지하는 법령인「남형금단사목(濫刑禁斷事目)」을 발표하는데,

 

그 사목을 보면 못된 주인들이 노비를 잔혹하게 고문하고 체벌하는 사례가 여전히 등장한다. 거기에 보면 도망갔다는 이유로,

또는 도둑질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에게 주인이 화승(火繩)을 발가락 사이에 끼우고 불사르거나, 거꾸로 매달아놓고 콧구멍에 잿물(灰水)을 붇거나,

 

다리를 목화의 씨를 뽑아내는 기계인 거핵기(去核機)에 끼워 고문하는 등등의 가혹행위를 했으니 그 징벌 방법도 다양하였다.

 

조선후기 영조는 양반들이 개인집에서 노비들에게 함부로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을 강력히 금지시키고 체벌이나 형벌 남용을 경계하였지만

 

오랫동안 있어온 관습적 체형을 완전히 없애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참고문헌 : 심재우 교수 글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1회

 

조선시대 왕들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그들이 선택한 리더십을 통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나라를 이끌고 갈 리더들에게 무엇이 시대 정신인지를 살펴보는 책 《 조선왕, 그리고 리더십》< 저자: 김윤태. 성안당>에서 몇 편을 골라 소개합니다

 

먼저 조선 창업자 이성계의 리더십이다.

 

난세에 등장한 이성계

결국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창업하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실력을 갖추지 못한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그 기회를 알아보지도 잡지도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찾아오고 준비된 자만이 그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더가 진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이 말은 산을 오를 때 높이 오를수록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는 말이다.

 

리더에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정녕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밖에 없다.

 

조선 건국 후 한 달 만에 이성계는 여덟 아들 중 막내인 11세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방석이 세자에 책봉된 배경에는 태조의 막내에 대한 사랑도 있었지만 신덕왕후 강씨의 입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성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면 다음은 왕실의 안정을 위해 상식적인 후계자 선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상식적이지 못한 태조 이성계의 악수는 혈육간의 피를 불러왔고 본인의 불행한 노후를 보내며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성계의 팔남 중 위 6명은 첫 번째 부인 신의 왕후 한씨의 소생이고 아래 두 명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곽 씨의 소생이다.

첫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한씨는 고려 말에 사망했고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전국의 중비가 되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첫째, 부인과는 다르게 권문세족의 여식으로 처가의 힘이 필요했던 이성계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는 어린 부인이었기에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朝鮮時代의 雜(job)史산책>>>292회

 

태조는 세자 선정을 위해 정도전 조준 배극렴등 공신들과 협의 중 강씨의 첫째, 아들인 방번이 마음에 있음을 내보인다,

 

하지만 배극렴이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자 언찮아 했다고 실록은 기록한다.

 

태조가 이번에는 조준에게 질문하자

평안할 때는 적장자가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자가 우선이라고 하여 태조에게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왕과 조정 신하들이 세자 책봉에 대한 논의 일을 하던 내용을 문 밖에서 듣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가 자신의 아들이 배제됨을 얻고 대승통곡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평소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던 강씨의 모습으로 볼 때 이성계는 신덕왕후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강씨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면 품행이나 됨됨이에서 앞선 둘째의 방석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방석을 제자로 책봉한다.

 

이런 잘못된 선택으로 새 왕조를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할 신하들과 아들들이 분열되고 서로 함께 칼을 겨누게 된다.

 

리더의 잘못된 방향 선택의 조직과 구성원의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결코 결국 왕자의 난이라는 비극적인 단초가 되고 만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태조 이성계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태조 이성계가 핏값으로 얻은 조선의 안정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나도 뼈아픈 실책인 것이다.

 

이성계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던 고려의 세력들이 남아있음을 알았다면 강한 세자를 세워 왕실의 안정을 도모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는 탁월한 무장으로써 부하 장수들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며 통속력을 발휘한 성공적인 라더였다.

 

하지만 정치인 이성계의 모습은 실패작이었다,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로서의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판단해야 했다. 뛰어난 무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이성계가 57세에 왕이 된 후 긴 시간 몸에 밴 리더십 스타일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리더에게 현재 시점에서의 문제 해결보다는 미래 시점에서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의 방향을 바라보고 나갈 수 있는 리더십이 더욱 요구된다.

 

이성계가 준비된 왕이었다면 왕조 안정과 번영에 대한 비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세자를 세우는 실책을 범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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